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9-02)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9장 7-16절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심판으로 환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에 대해 미리 깨달아 파멸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죄악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거짓과 사기가 하나님 백성의 본질이 됐습니다. 서로 속이고 악을 행하며 공동체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듯 그분께서 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심판선언(7-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자원을 주십니다. 그분 안에는 모든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그 무한한 자원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거룩한 삶을 회복하십니다. 당장은 징계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그것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7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9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7-9)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의 타락한 삶을 마냥 두고 보지는 않으십니다. 죄인들은 자기 삶을 방치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언젠가 끝장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유다 백성에게 징계의 채찍을 드셨습니다.

(1) 징계의 선언(7)

마치 악을 행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악행이 편만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사회 규범인 양 일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들짐승의 세계처럼 됐습니다.

(2) 고발(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8),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떠난 화살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듯이 거짓을 말하는 자들의 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겉으로는 친근하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다정하게 인사하며 상대를 함정에 빠뜨립니다. 웃는 얼굴의 거짓 혀는 ‘죽이는 화살’과 같이 치명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혹감과 분노 가운데 행동에 나서십니다. 징계를 통해 죄악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7)는 심판의 목적이 아직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고 불을 가해 순도 높은 금속을 얻는 것처럼, 혀를 치명적인 화살로 악용하는 자들을 녹이고 연단해 다시 깨끗하게 하십니다.

(3) 징계의 선언(9)

하지만 9절의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는 제련이 성공적이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8절의 고발을 중심으로 ‘내 딸 백성’이 ‘이런 나라’로 바뀝니다. 전자가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된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담고 있다면, 후자는 거리감과 단호함을 보여줍니다. 9절의 ‘벌하다’는 동사 ‘파카드’의 번역으로 ‘잘못에 관하여 책임을 묻다’를 의미합니다. ‘보복하다’는 동사 ‘나캄’의 번역으로, 악한 자들을 보복하시고 세상을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합니다.

 

멸망의 탄식(10-11)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심판으로 환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에 대해 미리 깨달아 파멸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10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11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10-11)

우리 삶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요로움이 황폐함으로 변합니다. 무성하고 풍요로운 곳이 모두 황무지가 되고, 사람으로 가득 찼던 곳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가축도 공중의 새도 들의 짐승도 사라진 사막과 같은 곳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탄식(10)

화자 ‘나’의 탄식(10)과 심판선언(11)으로 이뤄진 단락입니다. 11절의 ‘나’가 하나님임은 분명한데, 10절의 ‘나’는 불분명합니다. 통일성 있게 하나님의 일인칭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10절의 내용과 표현은 예언자의 탄식에 좀 더 어울립니다. 10절은 하나님께서 선포한 멸망의 심판(10)이 성취될 것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예언자의 반응입니다. 문맥 안에서 앞 단락과의 연결은 희미합니다. 혀를 죽음의 화살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선포된 여호와의 보복(7-9)은 일종의 정화의 심판인데, 11절의 심판선포와 10절의 탄식은 완전한 멸망을 지향합니다. 심판의 대상을 전자는 감정이 깃들인 “내 딸 백성”(7) 또는 “이런 나라”(9)로 부르는데, 후자는 중립적인 표현인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로 말합니다. 반면에 12절과의 연결은 비교적 뚜렷합니다. 특히 예언자의 질문(12b)과 예언자의 탄식(10)은 일부 표현까지도 공유합니다. ‘광야’와 ‘지나가는 자가 없다’와 ‘불에 타다’는 양쪽에 다 나옵니다. 또 멸망한 ‘이 땅’은 유다 산지와 광야를 포함하기에 10절의 ‘산들’과 ‘광야 목장’과 일치합니다. 요약하자면, 현재의 위치에서 10-11절은 예언자가 멸망의 원인에 관해 질문하는 12절의 배경 역할을 담당합니다.

(2) 심판의 선언(11)

죽은 자를 위해 애곡하듯이 예언자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애통해하며 애가를 부릅니다. 한때 사람들이 가축을 키웠던 푸른 산들과 광야의 목초지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사람도 없고 가축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10). 하늘의 새부터 땅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산들과 광야의 목초지가 들짐승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됐습니다. 예언자가 산들과 광야 목초지를 두고 울부짖으며 애가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멸망을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11). 하나님의 심판으로 돌무더기가 된 예루살렘은 승냥이의 소굴이 되고, 사람들이 사라진 유다의 성읍들은 황무지가 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그처럼 파국적 심판을 받는 이유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13-14절의 문맥에 따르면, 불순종과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재난의 원인(12-16)

사람이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당신의 말씀 안에서 만족을 얻도록 설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 거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12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 13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14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5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16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12-16)

예레미야는 슬픈 노래를 부르며 묻습니다. 이 땅이 왜 멸망해 광야같이 되었는지를 알 만큼 지혜 있는 자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선지자는 불타 버린 땅을 향해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 화자의 질문(12)

예레미야서는 자주 가상적 질문과 답변의 틀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요약적으로 가르쳐줍니다(참조․ 5:19; 13:22; 16:10–13; 22:8-9). 보통은 백성이 묻는데, 여기서는 예언자가 묻고(12) 하나님께서 답변하십니다(13-16).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언자의 질문은 10-11절이 선포한 심판 위협이 눈앞의 현실이 됐음을 전제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사람들이 탄식하며 던질 질문을 예언자가 대신합니다.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12). 처음 두 질문은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과 관련한 수사적 질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 심판에 떨어져 황무지가 된 이유를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놀랍게도 예루살렘 거리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없었던 것입니다(5:1). 하나님 백성이 이처럼 처참하게 멸망한 원인을 깨달아 아는 지혜자도 없고 이에 관해 말씀을 받아 선포할 예언자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광야처럼 초토화된 현실 앞에서 지혜자들과 많은 예언자들은 할 말을 잃고 그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원인을 모르면 치유가 불가능하기에 상황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그들은 이제라도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입’이었음을(참조, 1:9; 5:14; 15:19) 인정하고, 예언자의 선포를 들어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답변(13-16)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세 번째 질문은 예언자의 좌절과 절망과 연민을 담고 있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이처럼 불타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었단 말입니까! 심판 선포의 성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현실이 너무나도 참담합니다. 멸망의 원인에 관한 여호와의 답변은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선포한 내용의 요약입니다.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3-14).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주어진 율법을 버렸습니다. 준수하면 생명과 축복이 주어지는 율법을 버린 대가로 죽음과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르침 안에서 걷기를 거절하고 조상들의 길을 따라 오직 바알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에 있어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들을 섬기며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5-16절에서는 시점이 바뀌어 다시 멸망 이전의 현재 상태에 대한 기술로 돌아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을 간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쓴 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해서 멀리 이방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멸망과 유배가 심판의 정점이기는 하지만, 그 끝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곳으로 쫓겨난 유다 백성에게 칼을 보내 그들을 진멸하십니다. 누구도 그분의 심판에서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조상 대대로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따라 하나님은 철저하게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는 문자 그대로 그들이 ‘모르는 나라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함’의 모티브는 공간적 거리감과 심리적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다. 멀리 있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더욱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죄악 때문에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한 생명의 땅이 황폐해지고 모든살아있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의 이러한 죄악 중에서도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순종의 길만 걷기를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9-01)


유다의 죄를 탄식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8장 18절-9장 3절


요즘 우리는 환경의 오염에 대해서 많은 생각과 염려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오염입니다. 마음이 오염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오염이 되어지고 결국 사람과의 관계가 망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겉을 깨끗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속이 깨끗해져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따라서 함께 ‘하나님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주옵소서! 정직한 영으로 나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치명적인 뱀과 독사를 보내신 것을 알기에 예레미야는 고통스럽게 반응합니다. 고집스럽게 귀를 막고 제 길로만 가지만, 그래도 유다는 예레미야에게 동포였습니다. 슬픔에 그의 마음이 병들고, 백성의 상처 때문에 예레미야도 상처를 입습니다.

 

예언자의 탄식(18-9:1)

한 공동체의 영적 정체성과 실제 모습이 언제나 일치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죄의 본성대로 살면, 어느 새 죄악의 길 한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정체성은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징계가 있을 때 감사하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 그런 공동체가 거룩한 길을 걷습니다.

18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9:1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8:18-9:1)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은 우상숭배와 간음이라는 타락의 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죄악은 서로에게 속임수를 행하고 거짓말을 꾸미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더 이상 신뢰도 진실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1) 예언자의 탄식(18)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를 향해 외쳤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완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을 결정하십니다. 적들은 기병대를 앞세우고 이미 원정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시기에(뱀과 독사를 보내)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딸 내 백성’을 덮치는 재앙이 예레미야를 고통과 절망에 빠뜨립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심판에 떨어지지만, 그래도 유다는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유다의 비극적인 운명을, 아마도 환상 가운데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예언자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합니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그의 마음이 깊이 병듭니다(18). 예언자는 ‘딸 내 백성’이 도처에서 넋이 나간 듯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2) 백성의 탄식(19a)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19). 유다 백성은 시온을 덮친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으로 계시는데 시온이 망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온의 안전과 구원을 확신한 자들에게는 눈앞의 현실이 차라리 원망스럽게도 느껴졌습니다. 시온의 왕이 시온을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이시라면 당연히 시온을 구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이 백성을 이처럼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단 말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구원의 보루로 간주하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시온의 보호자란 의미에서 시온의 왕이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 이름을 두신 여호와께서 시온의 심판자가 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3) 여호와의 탄식(19b)

백성의 원망 어린 탄식에 뒤이어 여호와의 탄식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19b), 백성의 탄식에 대한 답변으로, 이들을 덮친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시온의 왕으로서 도와주기가 싫거나 그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에 격노하신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재앙을 보내 징벌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이시라면, 그들이 합당한 모습으로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입술로만 그리할 뿐, 그들은 왕을 배반하고 다른 왕(우상)을 섬겼습니다.

(4) 백성의 탄식(20)

다시 백성의 원망 어린 탄식이 인용됩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20). 자신들의 처지가 마치 수확 없이 여름을 보내고 굶주림의 겨울을 맞는 농부의 절망적인 형편과 같다고 탄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시온의 왕 여호와께서 계시기에 재앙이 곧 극복되리라 기대했다가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좌절한 듯합니다. ‘우리’는 재앙의 원인을 되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곤궁한 처지만 염려하며, 시온의 왕께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토로합니다. 이들의 하나님 이해에 따르면, 여호와는 시온의 왕으로서 백성이 재앙을 당하지 않게 보호해주셔야 했고, 설혹 재앙이 닥칠지라도 구해주셔야 했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농경은 4-6월에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늦은 여름에 과일을 따서 말리고, 이것들을 곳간에 저장하여 겨울을 대비합니다. 저장한 곡식과 과일로 이듬해 봄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지내야 합니다. 가뭄이나 병충해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의 여파로 여름 수확기를 빈손으로 보내면 겨울과 이른 봄을 굶주림으로 버텨내야 합니다.

(5) 예언자의 탄식(21-9:1)

마지막 세 절은 예언자의 탄식입니다. 백성의 중한 상처 탓에 예언자도 중한 상처를 입고, “딸 내 백성”을 덮치는 멸망의 그림자 때문에 공포와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21). 유다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음에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길르앗에는 상처를 아물리는 데 좋은 유향과 유능한 의사가 있지만(참조, 창 37:25), 유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22). 여호와께서 마시게 하신 ‘독이 든 물’이기에, 그분이 보내 물게 하신 ‘뱀과 독사’의 독이기에 어디에서도 해독제를 구할 수 없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예언자는 슬픔과 절망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애도할 뿐입니다(1), ‘죽임을 당한’은 ‘칼이나 창에 찔려 죽은’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이미 전쟁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은 백성입니다. ‘딸 내 백성’의 죽음이기에 그 슬픔은 끝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울어 눈물이 메말랐지만 슬픔은 더해만 갑니다. 죽음에 넘겨진 자기 민족을 위해 예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애곡하는 것뿐인데, 눈물이 메말라 마음껏 울지도 못합니다.

 

책망 어린 탄식(9:2-6)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매일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속이거나 거짓을 일삼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무슨 말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려는 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끕니다.

2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6)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나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예례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처럼 유다 백성의 타락을 슬퍼합니다.

(1) 탄식(9:2)

일인칭 화자 ‘나’가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독백에 담아 한탄하듯 토로합니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2), ‘나’는 하나님도 예레미야도 모두 가능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맹목적 거절에 차라리 무력감을 느끼시고 가슴이 에이는 아픔에 빠지십니다. 간음과 반역을 일삼는 유다를 포기하고 관계를 끊으셔야 하는데, ‘내 백성’이기에 단호하게 쳐내지 못하십니다. 유다가 당신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완강한 거절에 지친 예언자의 절망과 그럼에도 끊을 수 없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적임을 알고 거듭 경고를 발하지만, 멸망을 향한 유다의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 모릅니다. 예언자의 선포는 허공을 가를 뿐, 최소한의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절망적 현실 앞에 차라리 아무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지만, 자기 민족과 함께 있어야 함을 알기에 이들을 버리고 떠나지도 못합니다. 듣지 않고 응답하지 않을지라도(참조. 7:27)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하나님과 그분 백성이 정면으로 충돌하기에 예언자는 더 깊이 좌절과 절망에 빠져들어 갑니다. ‘간음’과 ‘반역’은 자주 우상숭배의 죄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뒤따르는 3-6절에 따르면 윤리적 계명의 위반입니다.

(2) 고발(9:3-6)

관계의 단절을 초래한 ‘간음’과 ‘반역’의 구체적 예로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사기를 고발합니다. ‘내 백성’의 허가 전쟁 무기인 활과 같습니다(3).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이들의 혀는 이웃을 향해 거짓의 화살을 날려댑니다. 이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거짓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과 열심을 발휘합니다. 속임수와 거짓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제 혀를 가르치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칠 때까지 악을 행합니다(5). 거짓과 속임수가 진실을 쫓아내고 사회규범으로 통용됩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속이기 위해 사는 사회로 변질하였습니다. 형제는 서로 사기를 치고 이웃은 서로 헐뜯기에 어떤 형제도 신뢰하지 말고 제 이웃을 조심해야 합니다(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3b), 하나님을 알기 싫어하는(6b) 사회의 추하게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이웃을 속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존재였고, 그분을 아는 지식은 거짓과 악을 행하는 데 방해만 됐습니다. 사회적 질서와 규범의 원천이시자 보장자이신 하나님께서 없는 사회는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거짓이 승리하는 불신과 불의의 사회이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불법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6a).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5)것은 어쩌면 사기꾼의 본성에서(4, 완전히 속이며) 나온 자연스런 행태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과 속이 다른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지도자들이 거짓 평안을 전하며 심각한 영혼의 중병을 가벼운 감기로 바꾸는 동안 백성들도 치명적 죄악을 감춘 채 평화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취소하거나 연기할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총체적으로 썩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듯, 제련사가 뜨거운 불로 불순물을 태워 녹이듯, 이대로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고 있다면, 신속하게 자신의 마음을 주께 토로하고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8-02)

 


진리에서 멀어진 이스라엘의 결과

예레미야 8장 4-17절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알을 낳기 위해서 회귀하여 갑니다. 그곳을 향해 가는 연어들의 모습은 봅니다.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면 물결을 타고 상류로 올라갑니다. 큰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엄한 바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배가 찢어지기도 하고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여호와께 돌아가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것이 그곳에 생명이 있고 살 길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원인으로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떠나면 돌아오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엎드러질 줄 모르고 평안하다 합니다. 결국 이들은 최후까지 고집하다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백성의 완악함과 어리석음(4-7)

진리(말씀)에서 떠나면 본향을 잃고 완악해져서 표류하는 인생이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배반하고 떠난 이스라엘은 도무지 돌아올 줄(회개) 모릅니다. 그래서 거짓을 고집하면서 정직을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악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길로 그대로 달려갑니다. 동물들도 그 정한 시기와 때를 아는데 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합니다.

4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6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7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4-7)

심판의 날에 멸망 당한 자들은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속이려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미물보다 못한 자들이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말만 들었습니다. 죄를 행하는 백성, 죄악 된 행실을 보고서도 아무 경고도 하지 않았던 지도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1) 하나님의 탄식과 고발(4-5)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유다의 행태에 하나님께서도 당황스러워하십니다. 누구나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가던 길이 틀리면 다시 돌아 나오는데, 유다는 쓰러져도 일어나려 하지 않고 빗나가도 다시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4). 여기서 ‘떠나갔으면’과 ‘돌아오지’는 동일한 단어 ‘야숩’의 번역으로, 전자는 ‘길을 벗어나 옆길로 들어서다’를 의미합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길을 가다 옆길로 빠지면 얼마쯤 가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돌아와서 바른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완악함이 몸에 밴 유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이나 되돌아봄이 없이 고집스럽게 제 길로만 나아갑니다. 마치 하나님을 배반하고(머슈바) 그분에게서 멀리 떠나가는(쇼버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5). ‘어찌함이냐’(마두아)는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좌절이 담긴 책망의 표현입니다. 거짓에 사로잡혔기에(5b; 참조. 9:3-6)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 구원의 길을 벗어나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아무리 경고하고 위협해도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귀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7.4)과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는(11) 구원 예언에만 익숙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 이름을 두신 여호와를 오직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고발과 멸망 선포가 악의에 찬 거짓말이거나 남의 이야기로만 들릴 뿐입니다.

(2) 예언자의 고발과 탄식(6-7)

6-7절에서는 화자가 하나님에서 예언자로 바뀝니다(4-5절의 경우처럼 일인칭 화자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6절 서두의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 즉’과 7절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는 예언자에게 더 잘 어울립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거리감을 내포한 ‘이 백성’을 사용해 유다의 배반을 고발하였다.) 예언자가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지만,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6a).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바른길을 벗어났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에 돌이켜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명령에 따라 요란스럽게 전쟁터로 내달리는 군마와도 같이 모두가 앞만 보며 달려갔습니다(6). 철새도 창조주께서 정해놓은 질서를 알아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돌아와야 할 때 돌아오는데,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다는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7). 학과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 같은 철새가 때맞춰 이동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유다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고 거짓을 고집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한다면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여호와의 규례’는 유다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규범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지혜자의 어리석음(8-9)

심판이 임박한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혜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날에 준비할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8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9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8-9)

고발의 대상이 ‘내 백성’에서 하나님의 법을 맡은 ‘서기관’으로 바뀝니다. 앞 단락과 연결해 읽자면,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법을 왜곡했기에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해 멸망합니다. 유다의 맹목적 질주는 서기관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만들어낸 거짓에 불과합니다(8). 철새보다도 못한 자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떠들고, ‘여호와의 규례’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지혜와 율법은 입술의 주장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지혜롭다면 지혜 주신 분을,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면 율법 주신 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는 서기관들의 교리적 율법 해석을 고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평강’을 선포한 것처럼 서기관들도 전통적인 구원신학에 근거하여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이들의 왜곡된 율법 해석이 유다로 거짓을 고집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거짓되게 하는 자들은 결코 지혜로운 자들일 수 없습니다. 지혜로 ‘여호와의 율법’을 해석한다는 서기관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두려움에 떨며 사로잡혀갈 것입니다(9).

 

평강을 외치는 자들(10-12)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며 순종을 촉구하는 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교회가 위로의 말씀과 축복 선언만 외친다면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도 강단에서 물려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경성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때문입니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1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12)

특히 거짓의 붓을 휘두른 서기관을 포함해 제사장과 예언자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도 거짓에 사로잡혀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분께 돌아오기를 거절했지만, 이들에게 맹목적 구원의 환상을 심어준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은 훨씬 큽니다. 이들은 평강이 없음에도 평강을 외치며 멸망을 향한 유다 백성의 질주를 부추겼습니다. 이들의 거짓 구원을 신뢰한 자들은 가던 길을 되돌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벌할 때’ 이들은 모두 넘어지고 쓰러질 것입니다(참조. 6:12-15).

 

북쪽으로부터 오는 적(13-17)

말씀을 떠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열매가 없음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견고한 성읍으로 피하면서 멸망하자고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긴 문제를 여호와를 향하여 핑계하고 불평하고 있는 배은망덕함까지 자행합니다. 마침내 심판의 군대가 탄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이스라엘 땅과 소유와 성읍과 주님을 삼키게 됩니다.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14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15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1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13-17)

탐욕스러운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끝까지 평강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가증한 일을 행할 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으로 말미암은 멸망의 순간에 백성과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여호와의 재앙선언(13)

‘우리’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이 단락은 ‘이 백성’의 완강한 배반을 고발하는 4-7절의 연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수확하듯 여호와께서는 빠짐없이 모두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13). 여호와께서 농부가 되셔서 거두시기에 어떤 열매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을 상징하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다 빼앗기고 잎사귀마저 말라버립니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약속의 땅을 포함해 그분께서 구원의 선물로 주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주셔서 지금까지 누려왔던 구원과 축복의 선물을 모두 빼앗깁니다.

(2) 재앙에 대한 우리의 반응(14-15)

심판에 떨어진 자들의 탄식을 인용해 이들의 절망적 형편을 기술합니다. 적들의 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 특이합니다.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14a). 적이 쳐들어오면 살기 위해 요새로 피신하는데, ‘우리’는 멸망하기 위해 피신합니다. ‘우리’는 견고한 성읍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처럼 절망하는 이유는 전쟁의 신학적 성격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범죄한 ‘우리’에게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셨기에, 성읍으로 피한들 멸망을 모면하지는 못합니다(14). ‘우리’는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한 자신들의 죄악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을 만나지 못하고, ‘고침을 입을 때’를 고대하나 '놀라움뿐인 현실을 탄식합니다(15).

(3) 침략하는 적의 묘사(16)

대적은 이미 유다를 향하여 원정을 떠났습니다. 적의 기병대가 지축을 뒤흔들며 단을 지나 무섭게 진격합니다. 마치 사망의 스올이 생명을 삼켜버리듯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켜버립니다(16).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적군의 돌진입니다. 성들이 함락되고 재물은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적군의 칼날 앞에서 맥없이 쓰러집니다.

(4) 여호와의 심판선언(17)

이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이기에, 해독제가 있을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17; 참조, 민 21:4-9), 독사에게 물린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처럼, 유다가 적들의 침략을 받아 처참하게 멸망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외침을 무려 40년이나 외치고 살았습니다. 기적하나 없이 자신이 선포(설교)한 것을 누구도 듣지 않는 현실, 그러나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망해가는 이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도 괴로웠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그 길을 오늘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니 여러 가지로 말씀을 맡은자의 사명의 길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8-01)

 


성전과 도벳에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예레미야 7장 29절-8장 3절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구원은 이신칭의인,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임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임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고 죄를 떠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임하면 우리에게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우상숭배를 지적합니다. 가장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우상을 세워두었습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하나님께 반역한 행위입니다. 또한 힌놈 골짜기에서 도벳 사당을 세워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더럽힌 유다 백성을 강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우상 숭배한 현장들을 전부 죽음의 장소로 바꾸실 것입니다. 멸망의 날에 예루살렘은 죽은 자들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질 정더러 완전히 뒤집어 집니다.

 

우상으로 성전을 더럽힌 유다 백성(29-31)

누구나 고질병이 있습니다. 나았다 싶으면 다시 도져서 또 문제를 일으키는 약점입니다. 유다의 고질병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왜 유다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를 끊지 못하겠습니까? 우상숭배를 한 자들에게 선포된 말씀이 참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매섭습니다.

29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 30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29-31)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자녀를 헛된 우상에게 재물로 드리는 유다 백성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쏟아 부으셔서 그들을 우상에게 제사하던 그곳에서 끔찍하게 살육 당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 진노의 세대(29)

예언자가 애가의 형식을 빌려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28)에게 심판을 선고합니다.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29). 사람이 죽으면 얘기를 부르듯이 ‘너’는 헐벗은 산 위에서 죽음을 통곡해야 합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기에’(29b)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애가를 부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애가를 부를 ‘너’는 여성으로, 문맥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유다 또는 가나안 땅이 모두 가능합니다. ‘벗은 산’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우상들과 음란을 즐겼던 산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풍요와 생명을 기대하며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결과로 죽음이 주어집니다. 3:21에서도 예레미야는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 족속이 헐벗은 산에서 애곡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머리를 미는 행위는 애도의 전통적 풍습에 속하는데(참조. 사 22:12; 겔 7:18; 암 8:10), 여기서는 특별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너의 봉헌물을 잘라 버려라”의 뜻입니다. “머리털”로 옮긴 히브리어 ‘네제르’는 원래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실인 규정(민 6:5)과 관련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표현 같습니다. 나실인은 서약 기간이 끝난 후에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기에, 머리카락을 잘라 내던지라는 예레미야의 명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가 끝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순종의 봉헌 서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더는 하나님께 구별된 자가 아닙니다.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분 진노의 세대’로, 하나님의 진노가 현세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보여줍니다.

(2) 성전의 우상숭배(30)

다시 여호와께서 화자로 등장해 유다 백성의 죄악을 고발하십니다. 이들은 여호와가 보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것'을 세워놓고 그 집을 더럽혔습니다(30).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점령한 우상들이 예루살렘 성전까지 차지해버렸습니다. 도둑의 소굴이 된(11) 여호와의 집이 우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도둑과 우상숭배자들은 여호와께 예배하러 성전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에스겔도 환상 중에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겔 8:16). ‘가증한 것’을 여호와의 집에 들여다 놓은 자들의 가증함은 한계가 없었습니다.

(3) 도벳의 우상숭배(31)

이들은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다 도벳 사당을 세우고 자기 아들들과 딸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드렸습니다(31a).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거리를 지나 예루살렘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31)는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 드려졌음을 시사해줍니다.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하나님의 주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아이 희생제사를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유다 백성 가운데 일부는 출애굽기 22:29의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원래 바알에게 드려졌던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참조, 렘 19:5; 32:35) 여호와 제의 안에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미가 6:7의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도 속죄제를 위해 맏아들을 드리는 경우가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에스겔 23:37-39도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어린아이 희생제사와 성전 예배를 함께 묶어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자녀를 잡아 우상에게 음식으로 바친 바로 그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전 6세기 전후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철저하게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심판 선고(32-8:3)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 중 하나는 교만입니다. 성경에서 132번이나 교만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이는 마음, 바로 사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33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34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2-8:3)

성전을 가증한 것으로 더럽히고, 자녀들을 불살라 우상에게 바치는 끔찍한 죄를 범한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힌놈의 아골 골짜기에서 그들이 떼죽임당하게 하심으로 그곳이 살육의 골짜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1) 도벳의 심판(32-34)

예루살렘이 이방 제의의 각축장이 됐다.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진 여호와께서 심판을 결정하신다. 먼저 가증스러움의 극단을 보여준 도벳과 관련한 심판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때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죽임의 골짜기’로 바뀔 것입니다(32). 축복과 번영을 기대하며 우상을 섬겼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멸망과 죽음의 상징이 됩니다.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아 매장지가 없어 제의장소인 도벳에 시체를 묻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불살라 바치던 도벳이 공동묘지가 됩니다. 가증한 짓이 행해지던 곳이 가증한 짓을 행하던 자들의 시체로 더럽혀집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전면적이고 파멸적입니다. 매장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밥이 됩니다(33). 새와 들짐승이 시체를 뜯어먹지만, 그것들을 쫓아내고 시체를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로 활기가 넘치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는 죽음의 적막이 감돕니다(34). 땅이 완전히 황폐해져 생존이 불가능하기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사라집니다. 도벳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친 결과로 자녀들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2) 완전한 멸망(8:1-3)

여호와의 심판은 산 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에서 쉬고 있던 자들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할 것입니다(1-2).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무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무덤까지도 훼손되어 이들의 뼈가 땅 위에 분토처럼 내버려집니다.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고인의 영원한 안식처였기에, 때로는 복수의 차원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무덤에서 뼈를 꺼내 들판에 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들판에 버려진 뼈는 우상들의 무능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상들은 한때 자기들을 섬겼던 자들의 무덤이 파헤쳐져도 속수무책입니다. 우상숭배자의 수치는 우상의 수치이기도 합니다. 들판에 나뒹구는 숭배자들의 뼈로 그들이 한때 신으로 섬겼던 “해와 달과 하늘의 별”이 더럽혀집니다. 우상숭배자들에게는 죽음도 안식으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헛것을 숭배한 대가로 영원한 저주가 주어집니다. 마지막 절은 산자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줍니다.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3). 전쟁의 심판에서 살아남았다고 목숨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이 죽은 자들의 운명보다 더 비참할 것입니다. 이들은 유배지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향에서 쫓겨나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소망할 것입니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우상숭배에 빠졌기에 아무도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 가지 못합니다.


우상 또한 피조물이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해코지도 무엇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심각한 것은 일월성신 이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돈의 우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주권을 휘청거리게 하고, 탐욕을 부추기고, 법과 정의를 굽게하고, 교회를 부정하게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해야 할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7-02)


돌이킬 수 없는 진노의 심판

예레미야 7장 16-28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모르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순종의 결과가 복으로, 불순종의 결과가 저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를 위해 중보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유다의 심각한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줍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일관한 그들에게 심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16-20)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6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7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18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19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20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6-2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것도 ‘기도하지 말라,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간구하지 말라’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유다 백성 가운데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중보기도의 중지(16)

성전 문에 서서 도둑의 소굴로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 개인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해서도 부르짖거나 간구해서도 안 됩니다. 유사한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의 금지를 단호하게 명하십니다. 중보기도는 예언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로, 때로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알게 된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보기도를 받아들여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암 7:1-3, 4-6).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중보기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어주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셨기에 심판을 집행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성전의 제사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중보도 그 기능과 유효성을 상실합니다. 유다와 하나님 사이의 통로가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2) 고발(17-19)

현재의 문맥에서 17-18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를 금지시키신 이유를 보여줍니다.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예레미야도 보아서 잘 알기에 변호의 여지가 처음부터 없어집니다(17). 예레미야로서는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배교는 노골적이고 전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연한 우상숭배 가운데서 특별히 하늘 여왕 제의를 고발하십니다. 하늘 여왕에게 드릴 과자를 만들기 위해 온 가족이 역할을 분담해 제의를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를 주워 모으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밀가루를 반죽했습니다(18). 하늘 여왕을 숭배하는 동기와 목적은 풍요였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여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늘 여왕을 섬겼을 때는 양식도 풍부해 잘 지냈고 재난 겪지 않았습니다(44:17). 성전은 희생제물로 죄를 세탁하려는 자들로 들끓게 되었고, 거리의 집들은 우상을 섬기느라 분주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그분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 우상들로 점령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어떻게 하면 여호와를 더욱 노하시게 할 수 있을까’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노의 심판을 선포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의 어리석음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한이나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19). 우상숭배의 부끄러운 짓이 이들에게 재앙의 부끄러움을 초래합니다. 중요와 번영을 기대하며 하늘 여왕과 우상들을 섬겼는데, 멸망과 파멸이 주어집니다.

(3) 심판선언(20)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유다 백성에게 볼 심판이 선언됩니다.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들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봄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20). 하나님의 진노의 분노가 붙이 되어 우상들로 가득 찬 예루살렘과 유다를 초토화 시킵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 사람과 짐승뿐만 아니라 야생의 나무와 경작지의 소산 끝까지 모두 태워버립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환경마저 남김없이 파괴됩니다. 죄악의 심각성에 비례해 심판도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나무’는 들판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를, ‘땅의 소산’은 과실이나 곡식과 같은 수화물을 가리킵니다.

 

제사에 우선하는 말씀의 순종(21-28)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고 명령하셨던 것은 번제물이나 회목제물이 아니라 순종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더욱 잘 순종할 수 있습니까?

21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22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23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27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28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21-28)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향해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태워 바치는 제사기 때문에 오느 누구도 제물의 일부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번제물의 고기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1) 제사 거절(21)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자들에게 제사 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격적인 명령이 내려집니다.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21) 이는 성전의 제사를 전혀 무시하는 명령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제단에서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다른 제사의 경우는 제물의 일부만 화제로 드리며, 나머지는 제사장과 제의 참석자들의 몫으로 돌려집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에 따르면 번제물의 고기는 제의 참석자들이 먹을 수 없습니다(참조, 레 1:3-17). 하나님의 명령은 차라리 풍자적입니다. “너희의 희생제물과 너희의 번제물이니 고기를 좋아하는 너희가 희생제물의 고기뿐만 아니라 번제물의 고기도 다 먹어라!” 우상과 불의로 부정하진 자들이 가져온 제물은 모두 부정하기에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고, 부정한 제물이기에 부정한 자들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정과 부정이 제의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 옮겨집니다.

(2) 제사 대신 말씀 순종(22-23)

번제물의 고기도 함께 먹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어긋나는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다. 여호와 신앙의 근간인 출애굽 사건을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셨고 명령하지 아니하셨습니다(22). 그들로부터 제사를 받기 위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는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인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없었슨비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였습니다(23).

(3)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대조(24-25)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제의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말씀의 순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분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분께서 명령하신 길로 가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고 언약의 근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길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피와 완악한 대로’ 행하였습니다(24). 이들의 불순종은 의도적이며 계획적이었습니다. 등을 돌리고 완강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돌려세우기 위해 그분은 거듭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25). 완악함과 악행이 이스라엘의 본질이 됐습니다.

(4) 더 악한 현세대(26)

시점이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지는 26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불순종과 악행과 완악함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보다 더했습니다(26).

(5) 예언자의 선포 거질(27)

조상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께서 보내신 그분의 종 예언자들을 거절했던 것처럼, 목이 뻣뻣한 현세대도 다르지 않았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불러도’ 그들은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27). 조상들처럼 현세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가려 하기에 예레미야의 선포는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6) 교훈을 받지 않는 민족(28)

예언자적 사역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을 알려주시고 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선포할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이다. 진실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의 입에서 끊겼다”(28절의 사역). 내용상 27절의 반복으로, 메시지라기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 평가입니다. 예레미야의 선포에 귀를 막고 응답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술순종과 완고함이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등을 돌리고 얼굴을 향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되돌리기 위해 징벌하셨지만, 이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익한 거짓말’에 의존해(8,4)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기에, 이들의 입에서는 ‘진실’이 끊기고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율법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어떠냐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백성이 율법을 따라 살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적이 됩니다. 순종을 바탕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위치에 머무르게 되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형통한 삶을 살 것입니다. 순종에 관심 없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려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11-02)

 


복음이 결실되어 가는 성숙한 교회

사도행전 11장 19-30절


미국 MIT공대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Edward N. Lorenz)가 처음으로 발표한 이론으로 ‘나비효과’입니다. 이 이론은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과학이론에서 발전했으나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습니다. 믿음에서도 믿음으로 살겠다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하고 실천하는 나비효과를 통해서 작은 믿음의 날갯짓이 나중에는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스데반에 시작된 작은 날갯짓은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는 큰 역사를 낳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온 지역으로 흩어졌던 헬라파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수리아의 수도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를 파견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사울을 다소에서 데리고 옵니다. 안디옥 교회는 지역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됨(19-21)

교회의 존재하는 목적은 주의 능력이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모이던지 흩어지든지 어디에 있든지 주와 함께 하면서 사역해 가는 일군들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한 신실한 일군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기 원하십니다. 

19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9-21)

앞 사도행전 11장 1-18절에서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 친구 그리고 친척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과정과,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과정과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13장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팀을 통해 복음이 이방인 지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것으로 더 발전할 것입니다. 안디옥 이방인을 위한 복음 사역으로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된 후, 얼마나 시간이 경과되었는지 모릅니다.

(1)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19)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들은 아직까지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 성경에 대한 기초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흩어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고난과 핍박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없고, 빠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핍박을 통하여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2)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20-21)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교회 지도자급에 속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다른 복음 전도자들도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각자 흩어졌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자가 되기 위해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교회 내에서도 수적인 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관련한 율법의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할례에 속한 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갈 2:11-14). 베드로처럼 복음 전도자들이 안디옥에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는’ 전파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이 구브로 출신이고, 그레데 출신들이 안디옥에서 전도자로 일했다고 소개합니다.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일은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영향력이 지리학적으로 확장되어 나갈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도 초대교회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복음을 받은 자들을 ‘헬라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순수한 이방인들이 아니라 고넬료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어떤 계기로 그들과 대화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그 메시아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기뻐하시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던 주님께서 복음 전도자들 속에 역사 하셨습니다. 흩어진 자들은 먼저 베니게에서 복음을 전했고 일부는 배를 타고 구보로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브로는 오늘날의 키프로스로 바나바의 고향입니다(사도행전 4:36). 구브로는 또한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전도한 곳이기도 합니다(사도행전 13:4-12), 적어도 주전 2세기부터는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마카비 1서 15:23). 또한 이들 중에는 수리아의 수도인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인구 50만의 대도시였으며, 당시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이 앞 단락에서 소개된 고넬료의 회심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뉘앙스를 전혀 남기지 않습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복음 전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독립적 현상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복음 전파를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이제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예수를 주(퀴리오스)로 소개하는 새로운 선교 전략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도 선교 대상에 따라 복음의 강조점을 달리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는 말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전하는 자의 뛰어난 말솜씨보다는 그들과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와 이적이 함께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선교 활동 배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에게는 말씀보다 이러한 사역이 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역으로 인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몇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주께서 하셨다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안디옥 교회의 성장(22-30)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명성만큼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한 두 명의 이방인으로 시작한 안디옥 교회는 점점 능력 있는 교회로 성장해갑니다.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2-30)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접촉해서 세례를 주었던 일이 신속하게 전파되었듯이, 안디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 사건 역시 예루살렘 교회까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통해 이미 예방 주사를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 바나바를 파송하는 예루살렘 교회(22-24)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정비되어 본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신속하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사마리아가 주의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선택해 안디옥으로 보낸 이유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구심, 혹은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교 전통을 중시하는 소위 보수 성향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친 우려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나바를 파견한 듯합니다. 바나바라는 인물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추측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바나바는 비록 구브로 출신인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이었지만, 그 동안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왔습니다. 관계 중심적으로 ‘위로의 사람’이란 별명처럼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와 연결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도 히브리파 신자들과 헬라파 신자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잘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의 드러난 성품 또한 그가 이번 일의 적임자임을 말해줍니다. 안디옥 교회의 가능성을 본 바나바는 자신과 함께 동역할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가 바로 옛 친구 사울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를 부르기 위해 다소까지 내려갑니다. 고향에서 있던 시간이 승승장구하던 사울에게는 유배 생활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10여년의 기간 동안, 이후에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한 온갖 모든 것들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사울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환상의 콤비였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이 많은 관계 중심 사람이었고, 사울은 성경과 신학에 능한 훌륭한 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로마 제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라’는 말은 일 년간 교회(건물)에서 모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모였다는 의미입니다. 전자는 교회(에클레시아)를 장소로 보는 것이고, 후자는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으로 보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은 성도(25-26)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집단적인 회심 사건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지,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할 만한 회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심한 이방인들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새로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굳건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이러한 당부와 지도는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바나바의 영적 통찰력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온 자들이 성숙해지자 안디옥 교회는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이로써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 말은 초대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복음을 받은 자들 대신에 바나바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다른 복음 전도자들로 성장한 것입니다. 제자가 제자들을 낳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를 ‘착한 사람’라는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누구에게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착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언급을 덧붙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큰 부흥을 이끈 구브로 출신의 복음 전도자들과 잘 협력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전달하고 성도로 양육하는 일에 협력하기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한 사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든든하게 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숙하게 성장했는지에 대해 다음 성경에서 말합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는 말에서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이)라는 표현은 본래 헬라어가 아니라 라틴어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일컬음을 받았다’는 말은 안디옥의 일반 시민들이 성도 공동체를 가리켜 만들어낸 신조어였을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안디옥 시민들이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긍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조롱과 조소의 의미도 들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6:28; 베드로전서 4:16).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제자’나 ‘성도’, 혹은 ‘형제’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이방인 안디옥 교회의 선교(27-30)

성숙해진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완숙되어 가지만, 성장해가면서 능력의 성장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여 이제 어머니 교회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27-30)

성도들이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정도로 안디옥 교회는 구별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장하여 점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닥친 흉년이 오리라는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한 것도 이를 증명하는 예일 것입니다.

(1)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을 예언(27-28)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가 시험해 볼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선지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순회 사역을 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내리시겠다는 흉년을 막을 수 없어도 대비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자,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중 한 사람인 아가보가 천해온 로마 제국에 걸쳐)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당시 여러 차례 흉년이 있었다고 전하고, 요세푸스도 주후 46년경 유대 지방에 흉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누가의 관심사는 단순히 아가보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보인 성숙한 신앙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모습을 부각하는 데 누가의 관심이 있습니다.

(2)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29-30)

안디옥 교회는 점점 성숙해져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라고, 유대 예루살렘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 구제 헌금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정한데로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이 구제헌금을 전달할 사람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택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바나바와 같은 좋은 지도자를 보내 줌으로서 영적인 도움을 안디옥 교회에게 주었다면, 안디옥 교회는 이에 구제헌금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모든 사역은 사람의 힘만으로도 성령의 역사만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와 사람들의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이렇게 세워집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숙한 신앙의 모습은 이전에 예루살렘 교회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행 2:45; 4:35) 물건을 나누었던 모습과 맥을 같이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도 닮아가야 할 좋은 모본입니다.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작은 날갯짓이 예루살렘을 넘었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었고, 이제는 이방 지역인 안디옥으로까지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도 성실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동안 성심과 성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11-01)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포용한 교회

사도행전 11장 1-18절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능력이 나타나서 ‘기적’과 ‘방언’으로 ‘치유’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외적인 증상만 나타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령에 가장 중요한 사역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도록 하는 역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회개의 역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능력의 역사 등이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돌아온 베드로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들, 즉 자신이 보았던 환상과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들을 설명합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베드로 (1-3)

사람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습관을 벗어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롬 12:2). 자연스럽게 변할 수도 있겠지만, 성령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에 대한 가치관의 혼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1-3)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네 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이 사건은 이방인 복음 전파에 매우 중요한 한 획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유대교 종교 풍습에 집착한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베드로는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설명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를 완성해줍니다. 기록자인 누가는 고넬료 사건은 초대교회에 이방인 선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사건이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누락된 상태에서 온전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술해 나간 듯합니다.

(1) 이방인과 교제한 베드로 소식(1)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방문하고 ‘함께 머물렀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만큼 큰 이슈를 일으킬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유대 전역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까지 퍼졌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들’과 일반 성도인 ‘형제들’에게 전해졌다는 것과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이 이제 앞으로 전개될 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한 유대 성도들(2-3)

이방인들의 기독교로 회심한 소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이전에 먼저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서 함께 교제한 사실은 아직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에겐 매우 쇼킹한 사건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러한 일을 했으니, 예루살렘 교회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한다고 지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서 비난하는 사람들을 ‘할례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변화의 과도기였기 때문에, 과거에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논쟁이 불씨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 중, 특히 ‘할례자들’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간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한 베드로의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은 역사는 유대인이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일들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역이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과 함께한 베드로의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베드로에게 어떤 자초지정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교제한 일들에 대해 비난부터 쏟아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점을 비난한 것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전혀 이해 못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대대로 지켜오던 유대인의 종교적인 관습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이방인들이 회심했다고 하여서 하루아침에 생각이 뒤바뀔 수는 없습니다. 이 사안은 단번에 해결될 성격의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에서 기록된 바, 베드로 또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다른 유대인들이 온다는 소석에 그 자리에서 도망친 실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 저변에 깔린 생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스데반 집사처럼 비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들은 소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과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먹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들은 내용에 대한 묘사가 매우 특이합니다. 그들이 들은 소문을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0:44).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45),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47) 등등으로 다양하게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11장에 들어와 그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할 때는 성령을 언급하기보다 단순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고 기록합니다. 왜 ‘이방인들도 성령 세례를 받았다’라든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까? 누가의 언어 선택을 통해 고넬료 회심 사건의 외형적인 모습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건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누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좀 더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표현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누가는 꽤나 중립적인 표현들을 선택함으로써,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심했다는 의미를 물론 포함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들이 순종하는 삶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말하려 합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14절에서 ‘구원 받을 말씀’이라는 표현과 ‘생명 얻는 회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상황을 설명한 베드로(4-18)

모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믿는 자들은 구별치 말아야 합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멀리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인종과 가른 사회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합니까!

4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4-18)

언제나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하고 문제를 신앙적이면서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도 ‘할례자들’의 비난을 듣고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난을 접한 후에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들에게 이론적이고 순서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넬료의 환상 이야기보다 자신이 본 환상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차분히 모든 일의 자초지정을 설명했습니다.

(1)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성령(4-10)

베드로는 논쟁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명백하고 솔직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만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한 전체적인 줄거리는 그 체험을 돌이켜 보기에 충분했습니다(행 10:1-48). 먼저 이 일이 일어나게 된 욥바에서의 환상에 대해 자세히 말합니다. 할례자들의 비난으로 인해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한 현상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은 그분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증거하고 주장합니다. 4-10절까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미 기술한 내용을 다소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거기서 생략되었던 한두 가지의 내용이 여기에 추가로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5절과 6절에서는 사도행전 10:11-12에 기록된 내용보다 훨씬 더 생생한 언어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큰 보자기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묘사됩니다. 또 사도행전 10:12에서 세 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했다면, 이 단락의 6절에서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나열된 젓처럼 네 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8절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거부하며 그런 음식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라고 했던 말도 사도행전 10:14에 기술된 내용보다는 에스겔서 4:14에 나오는 진술에 더 가깝습니다.

(2) 고넬료에게 역사하신 성령(11-17)

세 번의 환상이 나타난 직후 가이사랴에서 세 사람이 도착하고 베드로는 성령으로부터 아무런 차별을 두지 말고 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욥바에 사는 유대인 신자 여섯 명과 함께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당연히 고넬료를 가리킵니다. 13절에서는 고넬료가 어떻게 천사를 보게 되었는지가 아주 간략하게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당시 자기의 말을 듣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독자들은 주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약속한 말씀의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입니다. 천사는 이미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되던 ‘구원을 받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미 구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 경외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15절에서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어느 정도 설교를 했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말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바는 자기가 전하려고 한 메시지를 다 전하기도 전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했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처음’은 오순절 다락방 사건을 말한다. 즉, 베드로는 여기서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 사건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의 서술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이방인들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예수가 사도행전 1:5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들이 성령 받은 사건은 성령 세례이며, 이는 그들이 복음을 믿을 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신 약속의 성취로 일어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동류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이 성령 세례를 받다면(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혹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다면), 그들도 역시 물세레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17)를 ‘우리가 … 믿은 후에’라고 변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3) 베드로의 소명에 대한 반응(18)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것을 보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고 말합니다(행 1:4-5). 누가 능히 주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할례자들은 동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쉽게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종종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먼저 비난부터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이 정말 다 맞겠습니까? 사람이 표준이 아니기 때문에 틀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속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10-03)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선 복음

사도행전 10장 34-48절


‘이제 실화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난 일이 믿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거나 큰 일일 때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러한 사역에 대해서는 절대로 허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복음도 성령도 모두 하나같이 실화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이방지역의 역사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를 경외하며 의롭게 사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미든 사람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이에 베드로와 동행한 유대인 성도들은 이 광경에 놀랍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34-43)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할 떼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든지 다니며 전파하셨으며,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들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4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34-43)

고넬료의 환대에 대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고넬료에게 전해야 할 말을 주셨습니다. 고넬료에게만 특별히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각자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해야할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⑴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 하나님(34-35)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 앞에 선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대한 발언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어구로, 34-35절에 베드로의 발언은 수백 년 동안 스스럼없이 행해져 왔던 유대인 중심의 사상과 인종 및 종교적 차별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면서 ‘깨달랐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깨달을 일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성민인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고 보호하심을 받고 그리고 자신들만이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여기며 그들을 깔보고 경멸하며 업신여겨 왔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차별하는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프로소포렘프테스’(προσωπολημπτης)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옵니다. 헬라 문헌을 통틀어 이곳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표현(나샤 파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사람을 편애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차별’ 혹은 ‘편애’라는 ‘프로소포렘프사이’(προσωπολημφια)는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롬 2:11; 엡 6:9; 골 3:25; 약 2:1; 벧전 1:17).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의도는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구원에서 배제시키거나 더 엄격한 구원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공로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의 신학은 깊고 넓고 그리고 멀리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이방인들을 환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받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각 나라’와 ‘다’입니다. ‘각 나라’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와, ‘다’ 또한 유대인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기대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이나 민족의 문제가 아닌 마음이나 가치관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33절에 서술된 고넬료의 ‘간증’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이 욥바에 있을 때 깨닫기 시작했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들의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점진적으로 깨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환상을 유대인들의 음식법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가, 나중에는 이방인들과의 교제에 대한 허락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고넬료 집에 모인 무리가 하나님의 복음 듣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베드로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그들에게 아람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본 단락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에는 사도행전 초반에 기록된 베드로의 이전 설교에 비해 아람어식 표현들이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누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창의적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전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심(36-39)

36절은 구약의 두 구절을 암시적으로 인용합니다(시 107:20; 사 52:7). 베드로는 아주 특이하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구약의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셨음을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유에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입니다. 당연이 이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메시아도 됩니다. 그 분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관계있던 죄인들을 화해시킨 복음입니다. 그간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하는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직접 오셔서 행하신 일들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소개합니다. 38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친히 사용했던 것처럼 이사야 61:1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지상사역을 묘사하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유에르게테오’에서 ‘후견인’ 혹은 ‘자선가’라는 의미의 명사 ‘유에르게테스’가 유래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비롯해 많은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유에르게테스’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는 이 동사를 여기에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 통치자들을 비교하며 예수가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와 구원을 줄 수 있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와 동고동락한 자들로서 예수님께서 행한 모든 사역의 증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설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는 표현은 신명기 21:23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를 상기시킵니다. 원래 베드로는 유대인 앞에서 설교할 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고 강하게 질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 표현을 질책이 아니라 복음 증거의 구절로 활용합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에서 이 구절이 예수를 통해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3)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40-4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증인으로 택함 받은 자들만이 목격하게 하시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의 확실함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는 사도들에게 이 부활을 전하라 명령하셨고, 그 부활의 메시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든 사람들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진술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 부여하신 것은 재판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한 자와 영접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4) 믿는 자는 죄 사람을 받음(43)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눅 24:47). 여기서 베드로가 구약의 어느 본문을 언급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말씀을 우리는 이사야 33:24; 53:4-6,11 그리고 예레미야 31:34; 다니엘 9:24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함(44-48)

얼마나 영광스러운 증거입니까! 복음은 모든 인류, 즉 모든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상에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도전이 되어 집니다. 우리에게도 간절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그분의 구원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할 정도로 하나님을 초청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44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44-48)

이방인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겠습니까? 누가는 기록하지 않지만, 이미 베드로가 증거 하는 복음을 믿고 있었던 것을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성령이 임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1) 성령이 임재하심(44-46)

43절에서 베드로가 ‘그를 믿는 자는 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마 베드로는 그러한 구분 없이 이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머릿속에 후자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복음 선언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이 구절에서 ‘그를 믿는 자는 다’를 강조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깊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피려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다’라는 어구는 헬라어 문장 맨 뒤에 나오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의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기에(참조. 행 11:17-18) 우리가 여기서 유추할 수있는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기 모인 이방인들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받으시고 성령의 선물로 인을 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비로소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곧 만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욥바 출신 유대인들인 베드로의 수행원들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오순절 120명의 제자 모두에게 내리신 것처럼 동일하게 이방인에게도 오신 것입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증거로 방언과 찬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에도 보았던 증거들입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라고 전합니다. 이들은 욥바에서 베드로와 동행한 여섯 명의 신자들입니다(행 11:12). 누가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묘사합니다. 성령이 ‘내려오시니’(44), ‘성령을 부어주심’(45), 성령을 ‘받았으니’(47) 등이 그러합니다.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동일한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방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이방인들을 환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마다 방언의 역사가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까? 이 사건에서는 방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기에, 아마도 가시적인 증거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일어나야 하는 필연적이고 규범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는 초대교회의 규범적인 선언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 사도행전 2:38에서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해 동행한 유대인 신자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45). 그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에게도 부어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45절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그들이 놀랐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2) 44절에는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하지만, 45절에는 헬라어로 ‘성령의 선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이란 표현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행 2:38). 같은 성령의 선물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3) 45절의 동사 ‘부어 주다’(에크케오) 역시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2:17-18,33). 그러므로 두 표현, ‘성령의 선물’과 ‘부어 주다’는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47). 예루살렘에 유대인들과 순례자들을 환대하셨던 성령께서, 사마리아 성도들도 환대하시고, 이제 땅끝까지 환대하시려고 고넬료 가정부터 활짝 문을 여신 것입니다. 유대교가 환대한 것보다 훨씬 더 극진하게 차별 없이 환대하셨습니다.

(2) 베드로가 세례를 베풂(47-48)

이 성령의 역사를 베드로는 보고서는 더 이상 설교를 이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성령께서 이방인들은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셨으니, 교회가 이제 한 가족 한 형제로서 인정하자고 제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합니다. 한 가족이 된 가이사랴 공동체는 이제 베드로를 환대합니다. 베드로에게 설교를 더 듣길 위해서 몇 일을 더 머물기 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만 알 뿐 체득되지 못할 수 있고, 이기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피하거나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 왔다면, 지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10-02)


이방인을 성도로 받아들인 초대교회

사도행전 10장 17-33절


요즘 젊은 세대들은 존경할 인물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동안 기성세대들이 어른으로 존경받지 못할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가정 밖에서 인정받고 존경받아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의한 평가가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는다면 그처럼 훌륭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 집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찾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주저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집으로 들여 하룻밤을 머물게 한 다음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출발합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베드로는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초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고넬료로부터 직접 듣습니다.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17-23a)

성도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라고 하지만 의심스러울 때가 있으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조건 영적 지도자라고 순종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올바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면, 그 분이 비천한 사람이라도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17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17-23a)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비장하게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게임이나 놀이입니다. 그 뜻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도착은 우연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⑴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17-18)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던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가 본 환상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여주셨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환상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스승 노릇을 해주십니다. 직접 모범답안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환상과 전혀 상관이 없지만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도록 안내해주십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방금 본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며 머리를 갸우뚱거릴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 밖에서 그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입니다. 환상에 대한 의미를 잡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정답을 주신 것입니다.

⑵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심(19-20)

이번에는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19b-20). 본문에는 ‘두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동행한 군인을 경호병으로 간주하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실제적으로 세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두 사람을 따라서 가이사랴로 가면, 그 환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 환상을 주셨는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백부장이 집으로 가야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은 환상 속에서 ‘잡아 먹으라’와 같은 명령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도착은 우연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의심하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라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미리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를 드러내십니다. 즉, 이 사람들의 방문을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상에서 내려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⑶ 고넬료의 말을 베드로에게 전함(21-22)

옥상에서 내려온 베드로는 그들에게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그들이 찾는 사람이 자신임을 밝힙니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묻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온 사람들의 임무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전혀 모르고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욥바에서 온 사람들은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22)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보낸 주인 백부장 고넬료에 대해 베드로에게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자기들을 보낸 사람은 로마 군대 백부장인데 선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주인을 이렇게 소개한 것은 단순히 주인에 대한 사실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주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그가 좋은 성품과 인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인이 아랫사람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넬료의 인품을 뒷받침해주는 설명이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이 말은 고넬료가 비록 로마 군대를 위해 백부장으로 봉직하면서도 식민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살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2)와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여기서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개된 고넬료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4-5절의 천사의 말에서나 8절의 고넬료의 지시에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 생략된 정보를 누가가 이제 와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내러티브의 생동감과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무슨 목적으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대한 것인지를 미리 발설하지 않고 이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소개합니다. 이와 같은 누가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독자들을 이야기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들과 이방인의 방문이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초청과 욥바로 가라고 하신 말씀이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이 이방인들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부정한 동물들이었습니다. ‘부정한 동물들을 먹으라’는 것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 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방인이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명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으니 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에게 환상 중에 건너오라고 초청했던 마게도냐 사람들의 환상과 버금가는 엄청난 복음의 역사, 교회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초청이었습니다.

⑷ 시몬의 집에 유숙함(23a)

베드로는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경청해서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끝나자, 그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손님을 하루 대접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을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집안에서 식사도 같이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향제로 맞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세례를 받은 것도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이방인들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기준이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불과, 오전에 베드로와 오후에 베드로, 욥바 고넬료로부터 온 사람들을 만나기 전과 후의 베드로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 방문객을 집에 유숙하게 했다면, 이제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이방인을 자기 집에서 (율법의 범위 안에서) 접대하고 유숙하게 하는 것과 이방인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가 접대를 받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연히 다른 문제에 속합니다. 후자는 집에서 어떤 음식을 제공받을지에 대한 권한이 방문객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서(23b-33)

성도들의 삶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위해 인생을 살려면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항상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많은 것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 예수의 복음도 쉽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23…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23b-33)

이 단락은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에서 세 번째 장면에 속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에게는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장벽, 점령군으로서 장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⑴ 가이사랴에 도착함(23b-24)

다음날 아침, 베드로는 ‘의심하지 말고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서, 시몬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그들은 이튿날 베드로와 함께 가이사랴로 출발합니다. 여기서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라고 말하는데, 욥바 출신 성도들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지혜롭게 욥바 출신 성도들이 함께 이 여전에 동행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숫자가 여섯 명이었음이 밝혀집니다(행 11:12). 지금으로서는 그들의 동행이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이야기가 차츰 무르익어감에 따라 독자들은 그들이 목격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튿날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고넬료는 혼자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도착을 준비하며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고 대기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환상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백부장으로서 베드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환상은,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 같은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여자들에게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보고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넬료가 알고 유대교와 메시아에 대한 알고 있었던 지식을 다시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습격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고넬료와 대화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간 베드로는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고넬료의 친척과 친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서 이런 사람들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⑵ 베드로와 고넬료가 서로 인사(25)

베드로가 집에 도착하자 고넬료는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배국 장교가 피지배국 백성인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상관에게 절하듯 절을 했습니다. 악수를 하거나 목례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신적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듯 극진한 환영이며 두려움에 찬 환영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만큼 겸손했고 간절했습니다. 사실 고넬료는 로마 제국의 백부장으로 유대 나라를 지배하는 점령군의 지휘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도라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던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엎드려 절을 해야할 사람은 고넬료가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이렇게 행동은 자신이 본 환상과 천사의 지시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는 시선과 안목이 바뀌어서 둘 사이의 관계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맞이하는 예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이전에 누구로부터도 이러한 예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한 가지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져서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만지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고넬료의 예의에 ‘일어나세요. 저도 다 같은 사람입니다.’라면서 사양합니다.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린 고넬료는 베드로는 천사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를 주 안에서 존경하는 형제가 아니라 경배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⑶ 베드로가 초청 이유를 물음(26-29)

베드로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들은 유대인들과의 접촉을 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자의적으로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베드로가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개역개정으로 읽으면, 마치 베드로가 오기 싫은 곳에 억지로 할 수 없이 온 것처럼 매우 투명스런 어조로 말하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베드로의 말을 가급적 현대적인 어투로 바꾸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가까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 것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저를 불렀을 때 전혀 사양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떤 유유에서 저를 부르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서 특정 음식이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곧 한 사람도, 부정하거나 불결하다’고 여길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음식에 관한 환상에서 '사람에 대한 새로운 적용 포인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⑷ 고넬료가 이유를 설명함(30-33)

고넬료의 독자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하여 내려오게 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천사의 지시에 따라한 것이라고 환상 중에 들은 것을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하인들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 마무리하면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3의 ‘하나님의 사자’는 이제 고넬료의 입에서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고넬료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모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차별과 소외의 복음이 아닌 공평과 포용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뜻이 잘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었습니다.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베드로와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경계와 장벽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한계를 넘어서 진정한 복음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7-02)


안전한 곳이 성전이라는 거짓말

예레미야 7장 1-15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나 어떤 일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하는 것보다 거룩함을 먼저 보십니다. 탁월함보다는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를 때도 먼저 ‘내 신을 벗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내려놓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함으로 나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는 심판을 초래합니다. 선전 제사에 앞서 먼저 제 길과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희생제물로 원하십니다.

 

약속이 따르는 권면의 말씀(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성전 때문에 지켜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이 선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을 원하셔서 성전과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신실한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1-7)

예레미야 1-6장은 서로 역할을 합니다. 본론은 성전을 향한 경고(7:1-8:3)로 시작되는데, 7:1-15은 ‘성전 설교’라고 불리는 유명한 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문에 서서 예배하러 들어가는 자들에게 외쳤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리 강한 이방군대가 쳐들어와도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는 잘못된 신앙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1) 도입부(1-2)

여호와께서 이번에는 말씀을 선포할 장소를 특별히 지정해주십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2). 이는 선포할 메시지가 성전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유다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으로 떠받드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포하려 할 때, ‘여호와의 집 문’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을 것입니다. 잘못된 유다의 성전 신학을 규탄하기에 성전 문 앞보다 좋은 장소를 생각해볼 수는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선포하도록 주신 말씀은 약속이 함께하는 권면의 말씀이었습니다(3-7).

(2) 권면과 약속:명령문(3-4)

먼저 긍정적 권면이 주어집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3). 유다 사람들이 올 곧은 길을 가며 바른 삶을 산다면 가나안에서 쫓겨나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7)의 약속과 그분의 가르침에 따른 윤리적 삶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2)으로는 땅의 약속을 구속력 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땅과 하나님 백성의 유기적 관계는 성전 또는 성전 제사가 아니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에 의해 지속됩니다. 부정문으로 기술된 두 번째 권면은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

(3) 권면과 약속:조건문(5-7)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유다 백성의 환상을 충격적으로 고발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보장해준다는 주장은 ‘거짓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지위와 특권을 자랑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면,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에만 성전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구원의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거짓말’이나 조장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은 그저 웅장한 건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전과 그 성전을 택하신 여호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명령문의 처음 두 권면과 달리 5절과 6절의 권면은 조건문으로 기술됩니다. 5a절은 절대형 부정사(참으로)가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3a절의 권면을 그대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땅의 약속의 지속적 성취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바르게 해야 할 ‘길과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사회적·윤리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5). ‘정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회적·법적 질서로서, 유다는 정의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정의의 실천은 공동체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 해야 한다’(6a), 공동체는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 남다른 관심을 갖고 보살펴야 합니다. 출애굽기 22:21-23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는 살인 행위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폭력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땅이기에 이웃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됩니다. 약속의 땅에 사는 자들은 이웃을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하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길과 행위’가 종교적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해야 한다”(6a). 십계명의 구조가 보여주듯, 이스라엘에서 윤리와 종교는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가르침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정의를 행하는 자는 여호와만을 섬기는 자이기도 합니다. 7장의 문맥에서 ‘다른 신들 뒤를 따라’는 공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면서도(10). 사적인 공간에서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18) 종교적 흔합주의를 가리킵니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권면은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며 살 때, 곧 이웃 간에 정의를 실천하고 우상숭배에서 떠날 때.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항구적으로 살게 해주십니다(7).

 

기회의 상실: 유다의 현실(8-11)

자기 삶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예배당에 오면 복을 받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 거짓말에 흔들리는 자들을 깨우치고 바른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8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11)

하나님게서는 유다 백성이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계명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성전에 들어와서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1) 무익한 거짓말(8)

예루살렘 성전을 구원의 보루로 신뢰하는 자들의 귀에는 차라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예언자의 선포가 거짓말이었습니다. 여호와 종교를 성전 제의로 축소해버린 자들은 하나님의 윤리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2) 십계명 무시(9)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십계명조차 무시했습니다(9). 거리낌 없이 도둑질하고(여덟째 계명), 살인하고(여섯째 계명), 간음하고(일곱째 계명), 거짓으로 맹세하며(셋째 계명), 바알에게 분향하고 알지도 못하는 다른 우상들을 따라갑니다(첫째 계명), 이들은 여호와께 예배하러 성전을 찾아가지만, 그분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3)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10-11)

계명을 어긴 자들은 원칙상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들어와 그분 앞에 서서 구원받았다고 떠듭니다(10). 이들은 성전 예배를 통해 성전 밖에서 범한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돌아가서 다시 가증스러운 짓을 계속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됩니다(11). 도둑이나 강도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은신처를 찾아 숨는 것처럼 성전이 범법자들의 도피처로 악용됩니다. 사회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이 제의적으로 용서받기 위해 성전을 찾습니다. 성전 밖에서 저지른 악행을 짐승의 희생제물로 세탁할 수 있기에 성전은 도둑들로 가득 찹니다.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보셨기에 멸망은 기정사실이 됩니다.

 

멸망과 유배의 심판 선고(12-15)

객관적으로 드러난 이단들의 거짓 교훈은 구별하기가 쉽지만 유다 백성처럼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왜곡된 신앙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탐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 신앙은 없는지 말씀 안에서 자신을 살펴보고 바른 신앙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12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15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12-15)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법궤가 옮겨지기 전에 성막이 있던 실로에 가서 그곳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오래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해 폐허가 된 복 이스라엘처럼 유다 땅도 똑같이 폐허가 되게 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1) 실로의 경우(12)

거듭된 권면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악에서 떠나지 않고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유다에게 여호와께서 멸망과 유배의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의 멸망으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했습니다(12). 여호와께서 실로 성소를 당신 처소로 택하셨다는 사실이 실로 성소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성소가 이스라엘의 악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할 때 여호와는 당신 성소일지라도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사무엘상 2장에 의하면 실로 성소의 심판은 제사장 엘리 아들들의 비행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에게 실로의 비극적 운명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습니다.

(2) 회개 거절(13)

실로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지 못한 유다를 깨우치기 위해 여호와께서 거듭 예언자들을 보내 마쓰이 표하게 하셨지만, 이들은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았습니다(13).

(3)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14)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 신봉하는 자들은 예언자들의 선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실로 성소를 멸망시키셨다면, 유다의 죄를 조장한 예루살렘 성소의 운명도 다를 수 없습니다(14).

(4) 유다의 유배(15)

실로 성소의 타락이 ‘에브라임 온 자손’의 유배를 초래했다면, 도둑의 소굴이 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은 유다의 유배를 초래합니다(15).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이 실로 성소와는 다르다고 주장하겠지만, 여호와께는 둘 다 당신 이름을 둔 성소로 차이가 없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에브라임과 구별했지만, 여호와께는 유다와 에브라임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말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지켜 주시는 하나님, 형통하게 하신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정의의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심판자 하나님에 대해서는 듣기 싫어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모습만 생각하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들으려는 것이야말로 패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신실한 백서이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6-0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

예레미야 6장 16-30절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주유소를 들어간 이유가 다르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주유소에 길을 물어보기 위해 들어가지만, 남성들은 길을 찾아 헤매다가 기름이 바닥나서 주유소를 찾는다고 합니다. 사실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안다고 생각하는 경험에 묶여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자칫 잘못하면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서 헤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바른 길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앞에도 여러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길을 물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의 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북방에서 치러 오는 민족은 아주 잔인하고 무자비해 유다 백성은 두려워 떨며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유다는 내어 버린 은이라 칭함 받을 것입니다.

 

선한 길을 택하라(16-21)

사람들은 새것과 새로운 방법이 신앙생활에 좋으리라 기대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교회를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에 다 들어 있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다 백성들의 실수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전에 알려주셨고, 언약으로 보여주셨고, 지시하신 많은 계명과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방법대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원리를 따르지 않는 유다 백성들의 경고가 나옵니다.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17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18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19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20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2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16-21)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옛길 길’이 ‘선한 길’이라 하시면서 그리로 가야 평강을 얻는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나팔을 부는 파수꾼을 세워 주셨으나 그 경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1) 최고적 고발(16-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역사를 되돌아보며 살길을 찾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16). 이스라엘은 지금의 길을 버리고 생명으로 인도해주던 옛길(참조. 18:15)을 찾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옛적 길’은 출애굽ㅡ광야 가나안에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라간 길이었습니다. ‘선한 길’은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같은 선한 것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면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16). 지금의 길이 선한 길이고 가나안의 물질적 삶에서 ‘평강’(쉼터)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옛적 길’을 찾아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예언자)을 세워 나팔 소리를 들려주셨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듣기를 거절했습니다(17). 평강의 선포에 길들여진 귀(14)는 회개를 외치는 파수꾼의 경고를 듣기 싫은 소음으로 여겼습니다.

(2) 심판 선언(18-19)

하나님께서 ‘나라들’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완강하게 거절한 이스라엘을 재판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알도록 이스라엘에 대한 판결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십니다. 판결은 징벌보다 그 원인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재앙은 유다가 자초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다의 (잘못된) 생각이 자라나서 결실한 (악한) 열매가 재앙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기 생각과 계획에 따라 살았기에, 그들에게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씨를 뿌린 이스라엘은 재앙의 열매를 거둔다. 동사 ‘듣다’와 17절의 ‘파수꾼’을 함께 고려할 때, ‘내 말’은 파수꾼-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제의적 고발(20)

현재의 문맥에서 제의적 경건을 비판하는 20절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의 구체적인 예에 해당합니다. 시바에서 들여오는 값비싼 유향과 먼 땅에서 가져오는 귀한 향품으로 분향한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기름지고 풍성한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하나님께서 배부르시겠습니까? 귀하고 값진 예물과 풍성한 제사가 그분의 말씀과 율법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참조. 14:12; 사1:11: 암 5:22).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저들만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의적 경건은 ‘그들의 생각’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옛적 길’을 찾아 그 길을 가는 삶, 곧 그분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유향’은 제사 때 피우는 거룩한 향을 만드는 주재료고(출 30:34), ‘향품’으로 번역한 ‘카네 하톱’은 창포나 향초 줄기를 가리킵니다(출 30:23). 유향과 향품은 모두 먼 곳에서 들여오는 귀한 수입품이었습니다. 유향과 황금, 향료와 보석으로 유명했던 시바는 아마도 아라비아 남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4) 신판 선언(21) ‘옛적 길’을 찾아 그 길로 걷기를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에다가 장애물을 놓아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게 하십니다(21). ‘그들의 생각의 결과’(19)라는 점에서 멸망은 이스라엘이 초래한 재앙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두어 걸려 넘어지게 하셨다는 점에서 멸망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그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놓으신 장애물이기에 넘어짐과 멸망에 예외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집안)과 ‘이웃과 그의 친구’(공동체)가 함께 넘어져 멸망합니다.

 

위기의 시온(22-26)

평강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선한 길로 행할 때 옵니다. 우리는 앞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생명의 길, 진리의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불순종한 결과는 재앙과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은 수천 년간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역사를 무시하고 새로운 흐름을 따르겠노라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23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24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그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25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 26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임이라(22-26)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한 길을 떠나 먼 곳에서 온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은 먼 곳에서 올 재앙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방에서 잔인하고 강한 나라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자들에게 임한 새로운 소식은 그 손을 약하게 하고 고통을 줄 뿐입니다.

(1) 북방에서 오는 민족(22-23)

시온을 치려고 ‘북방에서’ 한 민족이 내려오고, ‘땅 끝에서부터’ 큰 나라가 일어납니다(22). 두려움과 놀람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민족이 시온을 향해 원정을 떠납니다. 이들은 활과 단창으로 무장한 잔인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다가 포효하듯 함성을 지르며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옵니다(23).

(2) ‘우리’의 반응(24)

시온의 주민은 북방에서 무서운 적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 손이 축 처지게 됩니다. 시온의 주민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들을 죽은 목숨과도 같이 여깁니다(24).

(3) 예언자의 권고(25-26)

유다 백성은 적을 보기도 전에 겁에 질려 용기를 잃고 절망합니다. 시온의 주변이 언제 적군의 수중에 떨어질지 모르기에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숨어 있어야 합니다. 원수의 칼이 높이 들려 ‘사방에 두려움’뿐이기에 밭으로 나가거나 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25). 파괴자가 ‘갑자기’ 덮쳐올 것입니다. 시온은 이미 죽은 목숨이기에 죽음을 애도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 뿐입니다(26). 이는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애곡하는 의식이 행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시온의 통곡은 집안을 이어갈 외아들을 잃고 울부짖는 여인의 통곡처럼 처참할 것입니다.

 

내버린 은(27-30)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공의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백성을 한없는 사랑으로 인내하시며 권고하십니다. 하지만 죄악이 범람할 때는 반드시 심판의 매를 드십니다. 하나님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면, 결국 하나님은 잔인하고 포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27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28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29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30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27-3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셨지만 유다 백성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27). 이에 하나님께서는 은제련 비유를 통해 유다를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 시금자 예레미야(27)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기십니다. “내가 너를 내 백성 중에 시금자(와 검사자)로 세워 저들의 길을 살펴 시험하게 하였노라”(27). 시금자는 광석에서 뽑아낸 금속의 순도를 조사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시금자로서 하나님 백성이 바른길을 가는지,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율법을 따라 사는지를 살펴 조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 따르면, 2-6장에 수집된 고발의 말씀들은 예언자가 시금자의 임무를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시금자 예언자는 그 기능에서 파수꾼-예언자(6:17)에 가깝습니다.

(2) 시험의 결과(28-23)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28-30절은 맡겨진 사명에 따라 조사를 수행한 시금자-예언자의 보고로서, 그 결과는 아주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28).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부르는 자들이 모두 고집 센 반역자, 헐뜯고 돌아다니는 자, 멸망을 가져오는 부패한 자였습니다. 전반절과 후반절에 한 번씩 사용된 ‘그들은 다’라는 어구는 유다 백성 전체가 타락했음을 강조합니다. 완고함과 공격성을 상징하는 ‘놋과 철’은 유다 백성과 예레미야를 대비시켜줍니다. 1:18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은 자신들을 ‘놋과 철’로 만들어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에게 완강하게 대듭니다. 예언자의 사역은 실패한 제련과정에 비교됩니다. 풀무에 광석을 넣고 화학 물질을 첨가한 후에 불을 지피면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은이 남는데, 풀무불을 더욱 세게 지펴 뜨겁게 해보았지만, 금속과 불순물이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29). 이스라엘을 다시 깨끗하게 하려는 하나님과 예언자의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실패했음을 비유합니다. 예언자는 강도를 높여가며 이스라엘의 부패를 고발했지만, 어떤 긍정적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다.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들어 치셨지만,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하고 더욱 완고하게 저항했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갔지만 은을 뽑아내는 데 실패한 광석이 쓸모없는 놀로 버려지는 것처럼,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죄악에서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스라엘은 버려집니다(30).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버린(19) 이스라엘을 버려, ‘내버린 은’이 되게 하십니다.


형식만 있고 마음은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값비싼 유향과 향품을 동원한 호화스러운 예배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많은 헌금과 근사한 찬양대와 오케스트라를 앞세워도 하나님께서는 예배한 자의 순종과 정직한 고백이 없으면 그 예배를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순종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길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6-01)


예루살렘에 분노하신 하나님

예레미야 6장 1-15절


 

불순종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재앙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경고가 되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재림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약속은 만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길로 행함으로 주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장차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임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름답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성은 파괴되고 소유는 타인에게 넘어가고, 남녀노소가 다 잡혀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선지자와 제사장이 거짓 평안을 말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벌 받을 성 예루살렘(1-8)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한다면,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를 끌고 오셔서 직접 예루살렘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라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과거에 주어진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의 대적이 되실 수도 있다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1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4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5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6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7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8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1-8)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반적으로 작은 성읍에 사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같이 크고 방비가 잘된 성안으로 피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오히려 예루살렘으로부터 피난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고 외칩니다

(1) 북방에서 오는 적(1-5)

적의 침략이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목숨을 구하려면 포위당하기 전에 빨리 성을 떠나야 합니다. 위험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난 온(4:6) 베냐민 사람들은 ‘재앙과 큰 파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1). 드고아는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은 깃발을 들어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유다 산지로 피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1). 예루살렘의 운명은 확정됐습니다. 여호와께서 북방에서 민족들을 불러 파멸시키기로 결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2). 시온을 수식하는 ‘아름답고 우아한’은 여호와께서 시온에게 허락해 주신 특권과 영예의 표현입니다. 시온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도성으로, 그분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번영과 영예를 누렸습니다. 시온은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기에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지, 시온이 아름답고 우아한 도성이어서 그분께서 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잃어버린 시온은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들이 방목에 좋은 초지를 찾으면 장막을 치고 머물면서 양 떼를 먹이는 것처럼, 적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위해 주변에 진을 펼칠 것입니다(3). 시온을 택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시온을 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공격 준비를 명령하시자 적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4-5).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은 출병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는 자들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준비가 길어져 저 됐지만, 이들은 준비가 잘오져 저녁이 됐지만, 이들은 중단하지 않습니다. 군대를 움직이기에 매우 불리한 밤도 이들의 출정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을 멸절하려고 여호와께서 불러온 군대이기에 한낮의 무더위나 밤의 어둠이 이들의 앞길을 막지 못합니다. 이들은 요새들을 파괴하고 성을 점령하자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2) 벌 받을 성(6-8)

출정을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성의 공격도 진두지휘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군대에게 성을 칠 수 있도록 공격용 축대를 쌓게 하십니다(6). 성을 공격할 때 원정군은 주변에 성벽과 비슷한 높이로 흙이나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이를 공격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총사령관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시기에 성 함락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실 때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었습니다(6). 샘에서 시원한 물이 흘러나오듯, 예루살렘에서는 끊이지 않고 악이 흘러나왔습니다(7). 들리는 것은 ‘폭력과 탈취’(폭력과 파괴)의 소란뿐이었고, 보이는 것은 폭력과 파괴로 생긴 ‘질병과 살상’뿐이었습니다(7). 폭력으로 이웃을 억압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서로를 병들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이 예루살렘의 일상사였습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 포악과 폭력과 파괴가 지배하는 ‘벌 받을 성’이 됐습니다. 예루살렘의 악행은 본성에 속하기에 멸망의 심판 이외에는 달리 기대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공략 준비를 다 마친 원정군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 난 것 같은 순간에 여호와께서 갑자기 마지막 명령을 잠시 뒤로 무르시고, 예루살렘에게 최후의 기회를 한 번 더 주십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8).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습니다. 멸망을 모면하려면 이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이번에도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인적이 없는 폐허로 만드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협적인 권면은 예루살렘이 교훈을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실 수 없는 그분의 안타까움의 반영입니다.

 

심판을 초래하는 백성의 완악함(9-15)

불순종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재앙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경고가 되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재림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잊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길로 행함으로 주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따듯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10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11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12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15)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경고하시면도 그들에게 훈계를 받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심판을 철회하시고자 최대한 미루시면서 그들이 훈계를 받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1) 완전한 멸망(9a)

9a절은 9b-10절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입니다. 예언자의 선포를 비웃으며 거절했기에(9b-10)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남김없이 거둬들이게 하십니다(9a). ‘그들’의 신분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문맥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징벌하려고 여호와께서 북방에서 데려오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심판은 벌써 심판이 한 차례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전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마저 남김없이 이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구약성경 내에서 추수는 자주 여호와의 심판 표상으로 사용됩니다.

(2) 멸망의 이유(9b-11a)

9b절은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사명을 맡기며 주시는 명령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살펴서 좋은 열매가 맺혀있는지 조사해보는 임무가 예언자에게 맡겨졌습니다. 예언자의 답변(10-11)은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완악한 반응에 예언자는 절망합니다.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못한 귀라 아무리 선포하고 경고하여도 예언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10). 평강의 예언에 길들여진 귀는 심판과 멸망의 선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거절하고 죽음과 멸망의 길을 고집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예언자를 절망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로 가득 채웠습니다(11a). 배반한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예언자도 마찬가지로 분노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분노하는 예언자에게 마음속에 가득찬 ‘여호와의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붓도록 허락하십니다(11ab).

(3) 멸망과 유배(11b-12)

완고하게 당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예언자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땅 주민’을 거슬러 손을 뻗으시기에 누구도 도피하지 못합니다(12a). 길거리에서 장난치며 노는 아이들과 모여서 젊음을 즐기는 청년들도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남자나 여자, 나이 든 자나 노인 모두 사로잡혀갑니다(11b). 북방에서 내려오는 대적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말갛게’ 주울 것입니다(9). 심판의 범위가 인적 자원에 한정되지 않고 물적 자원까지 확장됩니다.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이들 삶의 터전이었던 집과 밭과 아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갑니다(12b). 생존에 필요한 모든 소유물을 상실합니다. ‘강한 손과 편 팔’(참조, 신 4:34; 5:15)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내신 여호와께서 이제는 당신 백성에게 진노하여 손을 펼치고 그들을 치십니다.

(4)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13-15)

다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유다 백성이 모두 탐욕을 부립니다(13a). 소유욕에 사로잡혀 자기 잇속만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한통속이었습니다. 이러한 부패에서 종교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이 거짓으로 백성을 오도했습니다(13b). 오진에 의한 처방이 환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처럼, 이들의 그릇된 영적 판단이 백성의 완악함을 악화시켰습니다. 백성이 중병에 걸렸는데도 이들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처방했고,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외쳤습니다(14). 영적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부패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두는 ‘가증한 일’을 범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15a). 그들은 탐욕과 거짓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망적 기대감(8)은 이제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특히 이들의 영적 무감각에 책임이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15b).


성도라면 본문 말씀을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이 되실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안일한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때로는 매를 드셔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의 그 사랑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5-03)

 


배반과 반역과 속임의 이스라엘

예레미야 5장 20-31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제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합니다. 만약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며,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예언자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백성의 우둔함을 서술합니다. 그들은 눈이 있지만 장님 같으며, 귀가 있지만 귀머거리 같습니다. 백성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백성(20-25)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밎지 않는 행동을 하고서도 몰랐다고 변명하지만, 사실 대부분 알면서도 하지 않았거나 거역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거역하고서 몰랐다며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20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21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2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23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24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25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0-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과 지각 없음을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만약 그들의 눈과 귀가 제대로 기능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다와 땅의 경계에 모래를 두어 바다가 땅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1) 선포 명령(20)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지 않는 ‘야곱 집’과 ‘유다’를 책망하십니다. ‘야곱 집’은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참조, 2:4). 책망의 대상에 유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전 북왕국에 속했던 주민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에 있어 유다는 예전의 북왕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2) 직접적 책망(21-22)

유다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습니다(21). 이들의 눈과 귀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했지만, 영적으로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현실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지각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그분 앞에서 떨지도 않습니다(22a). 사납게 날뛰는 바다도 하나님께서 경계로 정해놓은 모래를 넘지 않고 경계를 준수하는데(22b), 유다는 창조 질서를 정하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3) 서술적 책망(23-24)

눈과 귀가 영적으로 고장 난 자들의 마음이 온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배반하여 반역하는 마음’(완강하고 반항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어, 하나님께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23). 이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에 따르는 길을 거절하고 자기 계획과 결정에 따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삶과 역사를 결정하는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고, 창조 질서를 정하신 분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은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에 땅의 결실이 그분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추수 기한을 정하신 분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 질서를 다스리시는 분께 의존하지 않았습니다(24). 제 때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가뭄이나 병충해로 흉년이 들어도,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눈과 귀와 마음이 영적으로 마비된 유다는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4) 직접적 책망(25)

하나님께서 유다를 직접 책망하십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5). ‘이러한 일들’과 ‘좋은 것’은 창조주께서 정하신 자연 질서, 구체적으로는 때를 따라주시는 비를 가리킵니다. 유다의 죄가 비를 내리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현재의 재앙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른 비’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내리는 가을비를, ‘늦은 비’는 12월부터 2월까지의 우기가 지난 후에 3월과 4월에 내리는 봄비를 가리킵니다. 거의 전적으로 비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가나안에서 때맞춰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결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수 기한’은 곡물에 따라 수확 시기가 달리 정해졌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4-5월에 보리 수확이 시작되고, 보통 한달 보름이 지나 밀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보리 수확을 시작(무교절)할 때부터 밀 수확을 끝낼 때(칠칠절)까지 대략 일곱 주간이 걸렸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불법(26-29)

재판은 본래 힘이 없는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재판관들은 결국 하나님의 처벌을 받을 수밖ㄸ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해 나갈 때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어찌 너희를 벌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26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28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29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6-29)

하나님께서는 새장에 새가 가득함같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집에 속임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해졌으나 그들의 영혼은 타락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1) 고발(26-28)

유다로부터 ‘좋은 것’을 막은 허물과 죄를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회는 폭력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사회였습니다. 정의 와 공의가 사라지고 가난한 자가 부당하게 짓밟힙니다. 악인들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노골적으로 악을 행합니다. 새 사냥꾼이 나무나 수풀 또는 물가에 그물을 쳐놓고 새들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릴 듯이 이들은 덫을 놓고 숨어 기다리다가 사람들을 잡습니다(26). 우연이나 실수로 이웃에게 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계획하고 이를 그대로 실행에 옮겨 이득을 탐했습니다. 이들에게 이웃은 먼저 잡으면 제 것이 되는 사냥감에 불과했습니다. 새 사냥꾼이 사냥한 새로 새장을 가득 채우듯, 악인들은 사기 쳐 얻은 재물로 제집을 가득 채우며 더욱 번창하고 거부가 됐습니다(27). 더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이웃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번창하고’와 5절의 ‘지도자들’은 히브리어 어근이 같습니다. 사기와 불법과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된 자들이 곧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지도자들입니다. 부당한 수단을 사용해 부자가 된 자들의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르고 윤기가 돕니다. 세속적인 보응 신학에 따르면 성공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악행은 한계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안다는 자들이지만,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했다’(28).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은 ‘고아가 승소할 수 있도록 송사를’로 옮기는 것이 좋다). 자기 집을 채우는 일에 혈안인 지도자들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의 송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재판의 공정성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부유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법(정의)을 무시하고 거짓을 따랐습니다.

(2) 징계 선포(29)

하나님께서 연민을 갖고 ‘내 백성’이라 불었던 유다가 정의를 왜곡한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해 그분의 보복을 받아야 하는 ‘이 같은 나라’가 됩니다(29: 5:9). 하나님의 법과 길을 모르는 백성(4)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21-24), 하나님의 법과 길을 아는 지도자들(5)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짓밟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총체적 타락입니다.

 

무섭고 놀라운 일(30-31)

교회가 진리 위에 서 있지 않는데 교인들이 오히려 그 상태를 좋아한다면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진리 위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백성은 저들에게 세뇌되다시피 했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그 악한 자들을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생각만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0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

전체 고발의 요약입니다. 한마디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30).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끔찍한 일이 유다에서 벌어집니다. ‘무섭고’는 ‘황량/황폐하다, 생명에서 잘리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로, 황량함이나 폐허가 야기하는 두려움과 놀람과 같은 경악스러움을 가리킵니다. ‘놀라운’은 23:14에 한 번 더 나오는데, 하나님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충격적인 것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이 정치와 사회가 아니라 여호와 종교 안에서 자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1).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그분의 백성이 끔찍한 일의 주인공들입니다. 여호와의 예언자가 ‘거짓’을 예언합니다. 거짓 존재인 우상에게서 신탁을 받아 전하거나 자기 생각을 하나님 말씀으로 포장해 선포합니다. 이들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떠들고(6:14),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합니다(23:14). 제사장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제멋대로 다스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7:4)을 퍼뜨리고, 십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성전을 개방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듭니다(7:9-11). 황당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 그런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심판 예언자들은 싫어하고(12-13),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값싸게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좋아합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서로 도와가며 제 욕심과 이기심을 만족시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한 패거리가 돼 ‘무섭고 놀라운 일’을 즐깁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정직하고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살지 않는 자들을 용납하거나 그들 편에 서서 이기적인 욕심을 채운다면, 하나님을 경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올바르게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7/14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는 

서정오 목사(서울 동숭교회)


창세기 13장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6절). 양떼가 많지 않았을 때에는 조그만 목초지도 함께 나누어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들이 많아지자 한 사람 소유의 양떼를 먹이기에도 부족해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게 너무 없어서 함께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는 서로 도우며 알콩달콩 잘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소유를 누리는 요즘, 우리는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공존의 조건이나 행복의 척도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유가 증가할수록 서로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집니다. 고독의 깊이는 더해 가며, 외로움과 절망도 깊어집니다.

아브람의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절)

생명의 근원이 같음을 공유하며, 사랑하는 이에게 선택권을 기꺼이 양보해 보십시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서정오 목사(서울 동숭교회)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10-01)


이방인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사도행전 10장 1-16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과거와는 달리, 크게 변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스가 1543년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정지해 있는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합니다. 이전까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을 비롯한 모든 별들이 지구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을 믿고 있었을 때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는 특별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십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불러오라는 지시였습니다.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 기도하러 올라간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환상을 보게 됩니다. 부정한 음식들을 보여주시면서 잡아먹으라는 환상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집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본 환상(1-8)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극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한 영혼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기쁨과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1-8)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사도행전 9장의 베드로와는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과의 사도는 오늘의 사도와 다른 일군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0장에서는 고넬료의 회심에 초점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 그리고 이방인의 세례 같은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유대인 교회에서 대표격인 베드로가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 회심보다 베드로의 회심을 더 중요하게 본 이유입니다.

(1)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1-2)

하나님께서는 먼저 베드로를 룻다를 거쳐 욥바로 보내시고 무두장이 시몬 집에 머물게 하셨습니다(9:32-43).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울타리 밖에 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불러드린 사역을 준비하십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이러한 편협한 생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려있음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합니다. 고넬료는 10-11장에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그의 회심 사건은 크게 네 장면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장면은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 이야기(10:1-8)로 시작하고, 두 번째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의 환상 이야기(10:9-23a), 세 번째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운명적인 만남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이야기(10:23b-48)로 전개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방인의 회심 사건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는 일(11:1-18)로 구성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구원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성취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첫 번째 장면은 가이사랴에서 시작됩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새로 설립한 신도시로서 유대 속주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부가 있던 곳입니다. 누가는 먼저 그 도시에 있던 고넬료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을 소개합니다. 그의 이름 코르넬리우스는 당시 흔한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주전 82년에 코르넬리 우스 술라(Cornelius Sulla)라는 로마 장군이 만 명의 노예를 한 번에 해방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자유민이 된 자들이 모두 그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후손들도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정할 수 없지만,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 역시 그 자유민 출신이거나 그러한 자들의 후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식민지인 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2)라는 말은 고넬료가 하나님 경외자였음을 시사합니다.

(2) 고넬료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봄(3-6)

하나님 경외자는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열정과 관심을 보이며 유대교 회당을 출석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취급했지만,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을 포용하고 받 본문에서 고넬료가 소개됩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헤롯이 건설한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 곳에 로마의 유대 총독부 관저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많고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입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아 부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에도 충실해서 온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유대교의 유일신을 믿고 유대교의 윤리적인 기준은 받아들이지만, 율법을 지킬 의무는 없는 개종자, 할례를 받지 않아서 유대인이 안 된 사람을 의미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언약에는 외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같이 식사할 수 없고, 합석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성전에서는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고넬료의 마음을 열도록 하며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가 유대인의 기도 시간인 제 9시(저녁 번제 드리는 오후3시)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보냅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질겁했을 것입니다. 두려웠지만 소리 나는 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여 무슨 일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에는 신이 자신의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였습니다. 주의 사자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와 구제가 상달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고넬료의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이 구원의 근거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몸에 배인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환상 중에 보내셨을 때, 그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욥바까지는 약 51km로 장정이 보도로 거는 시간만 8-9시간 걸린 거리였습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통해 알아들은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환상을 따를 만한 사실인지에 대한 결정은 고넬료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이라고 보기에는 정보가 너무 상세했습니다. 지명, 만나야 할 사람, 묵고 있는 숙소의 위치, 그 집 주인의 이름과 직업까지 너무 구체적으로 말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무두장이 집에 묵고 있다는 사실에, 고넬료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면, 유대인이라도 이방인인 자기가 초대하면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천사는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더 잘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고 성령도 받게 하시고 계십니다.

(3) 고넬료가 욥바에 사람을 보냄(7-8)

군인인 고넬료는 단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그는 직접 가지 않고 하인 두 명과 경건한 군인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이제 장면이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로 옮겨집니다. 이 시간이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했을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려고 시몬의 지붕 위에 있는 평평한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정오가 되자 베드로는 출출해졌습니다. 하인들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고, 베드로는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황홀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큰 그릇의 보자기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세상에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정한 짐승도 들어 있지만, 유대인이라 하면 누구나 협오스러워 하는 짐승도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이렇게 뒤섞여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베드로에게는 시험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토라를 통해 명령하셨던 것을 스스로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다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손색없는 대답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고백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깨지고 무너지고, 열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시각을 넓혀 주시기 위해 또 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라는 말이 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짐승이라도 깨끗하게 하셨다면, 더 이상 사람들이 속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철저한 율법 준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는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또 같은 일을 세 번이나 하셨을 때는,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이런 환상을 주셨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환상이니 진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손수하신 율법을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에게 환상 중에 이런 명령을 하시는지 알 리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봄(9-16)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부분과 볼 수 없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부분은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우연이나 기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이해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9-16)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일들을 이루시기 위한 사역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적으로 깨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싶은 일들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베드로가 기도함(9)

이제 다음 장면은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욥바로 바뀝니다. 다음 날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제 육 시’는 약 12시 정오를 가리킵니다. 아마도 습관을 따라 베드로도 정오쯤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하는 기도 중 두 번째 기도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그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낮 12시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식사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느지막하게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늦은 오후 시간에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 방식이었습니다.

(2) 기도 중에 환상을 본 베드로(10-16)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던 중에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하늘이 열리고 네 귀를 메어 땅에 드리운 큰 보자기가 내여 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세 가지 종류의 짐승들이 그릇에 담겨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온갖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짐승들은 레위기 11장에서 식용으로 금지된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1:30에 따르면 이 음식들은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에 담긴 것을 자세히 보고 파악했을 때, 곧이어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자기는 결코 먹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14).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규정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졌습니다(15-16). 이러한 반복은 이 이슈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하고 공고해진 편견과 인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본 환상은 무슨 의미입니까?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이제부터 구약에서 규정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이 사라졌으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환상의 의미는 다음 단락에서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음식의 구별을 없애신 것입니까? 물론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선언하셨을 때부터라는 답변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초대교회는 이 율법의 폐기는 예수님이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마가복음 7:15-16,19)라고 말씀하실 때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4:14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이러한 환상의 사역을 보여주신 이유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종교적, 문화적 장벽은 이만큼이나 공고했습니다. 오래토록 고착화된 유대인만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생각과 사상 그리고 종교를 깨뜨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닌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극복됩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한 영혼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기쁨과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09-04)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베푼 베드로

사도행전 9장 32-43절


신앙성숙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열린 마음입니다. 그것이 진지하게 숙고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면, 그 논리와 이론에 하나님도 갇히게 됩니다.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야 합니다.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두 가지 기적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베드로가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쳐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병들어 죽어 장혜를 기다리던 도르가를 다시 살리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두 기적(32-43)

하나님께서는 원하는 시간표를 따라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동안 철저하게 고정관념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꼐서는 그분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적인 역사를 체험함으로 변화시킵니다.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방 땅에도 사망이 물러가고 생명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 하면서 놀라운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켜 갑니다.

32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32-34)

누가는 사도행전 9:1-31에서 사울의 회심 이야기와 그 후 사울의 초기 전도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8:25에서 사마리아 방문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베드로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팔레스틴 서쪽 해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행한 두 가지 기적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복음의 역사는 불신자들을 치유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 처음으로 믿는 자의 치유 사건이 등장합니다. 유대 지역이 아닌 사마리아와 이방 땅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룻다에서 애니아를 치유함(32-35)

베드로는 사방으로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 동안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에 퍼져 있는 교회를 방문하면서 바쁘게 사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쁜 사역 중에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룻다’라는 마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룻다’라는 지역은 샤론 평야와 가까운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거기서 그 마을에 사는 성도들을 만납니다. ‘성도’라는 단어는 경건한 유대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9:13에서 ‘예수를 따르는 신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당할 때 이곳으로 이주했거나 빌립이 아소도에서 가이사랴로 가면서 복음을 전해 믿게 된 신자들로 보입니다. ‘애니아’는 잘 알려진 헬라 이름이지만, 유대인 신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그를 신자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가 신자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말한 것이 그가 이미 신자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녀는 베드로를 만났을 당시 이미 팔 년 동안이나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치유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5:17-26에서 네 명의 친구에 의해 들려 온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신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 베드로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네 자신을 펼쳐라’의 뜻입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침상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지만, 식사를 위해 앉을 자리를 준비하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만약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누가복음 8:55에서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치유 기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이 기적을 통해 룻다와 사론에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주께로 돌아왔다’라고 표현합니다. ‘룻다와 샤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 표현은 누가가 사용한 과장법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애니아의 치유 소식은 룻다가 국제 무역 도로가 통과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 욥바에서 도르가를 살림(36-43)

누가는 이제 독자들의 시선을 욥바로 돌립니다. 욥바는 룻다에서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변 도시입니다. 욥바에는 ‘다비다’라는 이름의 ‘여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제자’를 뜻하는 ‘마떼트리아’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등장합니다. 앞 단락의 ‘애니아’와는 달리 ‘다비다’는 명시적으로 ‘제자’로 소개됩니다. 누가가 이어서 서술할 그녀의 경건한 신앙과 믿음의 행위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람어 ‘다비다’는 번역하면 ‘도르가’입니다. ‘도르가’는 헬라어로 ‘영양’(羊)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가는 도르가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르가의 신앙을 칭찬하기 위한 사족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가의 특별한 의도를 인지해야 합니다. 누가는 내러티브를 전개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물론 도르가가 실제적으로 선행과 구제에 힘썼던 여인이었겠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부각한 사람은 누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행전을 읽어보면, 그는 특별히 가난한 자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산상수훈의 팔복에 대해 기록할 때, 예수가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닌 실제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한 것으로 기록합니다(눅 6:20), 수태고지에서도 마리아의 찬가를 읽어보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강조됩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눅 1:52-53).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를 기록한 복음서 저자는 오직 누가뿐입니다. 누가는 재물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가장 많이 기록합니다. 삭개오의 회심 이야기도 다른 복음서 저자와 달리 누가만 선별해 기록합니다(눅 19:2-9).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나누는 형제애를 두 번에 걸쳐 소개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11장에 가서는 안디옥 교회가 기근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들려 전달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누가의 이러한 신학적 메시지는 구약의 율법 정신 및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목소리와 일맥상통합니다. 누가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개인과 교회의 삶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글을 통해 강조합니다. 도르가가 병들어 죽고 만다.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였습니다. 이것은 그녀를 위한 장례를 치르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를 기적적으로 고친 것과 그가 아직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욥바에 있던 신자들(‘제자들’)은 두 사람을 보내 속히 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두 사람과 함께 욥바에 도착한 베드로는 도르가의 시체가 뉘여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다락방에는 도르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르가가 살아있을 때 자기들에게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가 그녀의 착한 마음을 보고 기적을 베풀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가 하셨던 것을 따라합니다. 그는 먼저 애도하는 자들을 다 방에서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죽은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다비다야 일어나라’라고 명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아람어로 했다면, ‘타비따 쿰’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킬 때 하셨던 ‘탈리따 쿰’(‘딸아 일어나라’)과 같은 구문이며 거의 비슷한 음가를 따릅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이 두 이야기가 사실 동일한 사건에서 유래된 두 가지 버전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죽었던 도르가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눈을 떴고 베드로를 보더니 그대로 일어나 자리에 앉았습니다. 기도와 명령 한마디에 그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통해 또다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욥바에서도 죽었던 도르가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도르가를 다시 살린 이야기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누가가 이 정보를 여기에 기록한 것은 이 이야기가 10장의 고넬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무두장이’는 짐승의 생가죽을 다루는 직업으로서 제혁업자에 해당합니다. 당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던 바리새인들은 부정하다는 이유로 무두장이들과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문 것이 율법 준수에 대한 베드로의 개방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낯선 사역자와 낯선 경험을 통해 베드로가 알고 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셨고 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뒤에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향한 환대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인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사역을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옹호하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도행전(09-03)

 


전도자로 변한 박해자 바울

사도행전 9장 19b-31절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을 갖는 문제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우선순위가 바뀌고 의지하는 대상, 내가 투신하는 가치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건강을 되찾은 사울은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사울을 암살하려는 음모 때문에 사울은 다메섹을 극적으로 탈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과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사울은 거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만 또다시 살해 음모 때문에 고향 다소로 돌아갑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19b-22)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신학과 가치관과 인생 목표 전체에 변화를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수용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변화된 삶을 주변에 보여주었습니다.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19b-22)

본 단락의 이야기를 갈라디아서 1장의 바울의 ‘자서전적' 기록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시력과 건강을 되찾은 사울은 다메섹에서 며칠을 그곳의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19b-20). 이 기간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16-17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로 가기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서 바울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진술합니다. 그렇다면 이 진술은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과 상충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바울의 진술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자기가 지금 전하고 있는 복음이 하나님의 직접 적인 계시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예루살렘이나 다메섹에서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음을 말하려 합니다. 바울은 이제 기독교 박해자에서 기독교 전도자로 전향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으로 요약합니다. 이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입니다. 사도행전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행 13:33)를 제외하고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서신에서 이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매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주’와 ‘그리스도’ 칭호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하지만,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매우 중대한 진술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등장시킵니다. 이 칭호는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자기가 받은 중대한 소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등장하고, 로마서 1:1-4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도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갈라디아서 4:4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성육신’ 사건을 이야기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칭호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사무엘하 7:14) 부활 이후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하신 분(시편 2.7)임을 의미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주함(23-25)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복음 전도자는 참 증인이 아니며 듣는 이들이 다 좋아하는 말씀은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사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이지만, 그 소식이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23-25)

23절에서는 여러 날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여러 날’(직역하면·충분한 날들)은 ‘며칠’(19)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갈라디아서 1:18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전의 기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23-25절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아라비아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그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넣고 성 밖으로 탈출시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32-33에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여기서 아레다 왕은 나바트 왕국의 왕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17에서 언급하는 아라비아는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 흑자는 이 지역을 사막으로 간주하고 바울이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구약성경을 연구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당시 아라비아는 팔레스타인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나바트 왕국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즉시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이동 장소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면, 사울은 다메섹(사도행전 9:19-22)에서 아라비아(갈라디아서 1:17; 나바트 왕국)로 가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다시 다메섹(사도행전 9:23-25: 갈라디아서 1:17)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19)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남(26-29)

주변인에게 성도로서 변화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몸소 주의 일꾼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을 통해 누군가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주변인들이 주의 일꾼이 되고, 은사를 발휘하고, 적절한 일과 자리를 찾아가도록 돕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에 충성스러웠습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6-29)

사울은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사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기 원했지만, 정작 그들은 사울이 저질렀던 ‘과거 행적’ 때문에 그의 회심(‘제자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 사귀려는 사울의 의도를 하나의 잘 기획된 ‘속임수’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사울의 극적인 회심과 그에게 주신 사명과 그의 전도 활동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를 통해 아직 사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도들의 마음을 회유하고 사울의 ‘명예 회복’을 돕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형제에게 보여준 바나바의 따뜻한 배려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그의 온유한 성품과 조화를 이룹니다. 물론 원문은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으며 그가(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으며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열두 사도를 만났다는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 1:18-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라는 바울의 진술은 상충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다른 본문을 서로 비교할 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각 저자가 각각의 본문에서 말하려는 의도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누가와 바울의 진술은 강조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열두 사도들과도 우호 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두 주밖에 머물지 않았으며 사도 중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을 뿐입니다(갈라디아서 1:18-20).

 

사울이 다소로 돌아감(30)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30)

사도들과 우호적인 유대 관계를 맺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성도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간 후, 다시 다소로 보냅니다. 가이사랴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이며 학문이 발달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온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짐(31)

풀무불 같은 역경은 진짜 복음이 아니라 거짓 사상을 태웁니다.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거짓 선동, 세상을 얻으면 성공한다는 허황된 풍조들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신앙을 순수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초기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던 초대교회는 여러 과정을 통해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이제 사울은 사도행전 11:25에서 다시 등장하기까지 사도행전의 서사적 무대에서 잠시 동안(약 10년간) 사라집니다. 누가의 관점에서 볼 때, 9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방 선교를 위한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31절에서 초대교회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구절로 사도행전 6:8부터 서술한 초대교회의 복음 확장 이야기를 일단락 짓습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는 팔레스타인 전체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여기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임재는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사울은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사람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제거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원수 관계이던 자들이 형제가 되고 형제이던 자들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수이던 유대와 사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7/13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숲 향기 더욱 짙어지는 날

배성식 목사(수지 영락교회)


새벽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 뜬금없이 커피 생각이 났습니다. 숲으로 가는 길에 조그만 커피가게라도 있었으면 하는 사치스런 바람에 혼자 웃음 짓습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세상을 다 쓸어갈 것 같았던 비가 내린 뒷날 새벽은 이렇게 숲의 향기로 새벽을 깨웁니다.

비온 뒤 숲의 향기는 더 진합니다. 잣나무 향, 가을을 위해 단장하고 있는 단풍잎 향, 폭염 아래 나뭇잎 끝이 갈색으로 채색된 상수리나무 향기, 폭우에 찢겨 떨어진 밤나무 잎의 향기, 무엇보다 가녀린 풀들의 향기까지 숲은 8월의 습기와 함께 짙은 숲 속 향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숲에 들어올 때 향기가 많이 나는 날이 있습니다. 누군가 숲길 입구에 풀을 베어낸 날, 동네 아이들이 장난으로 소나무에 생채기가 나서 송진이 나오는 날, 폭우가 지나간 뒤에 숲은 더욱 향기가 강합니다. 아마 향기는 숲의 풀과 나무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인가 봅니다.

우리 인생에도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썩어져 가는 인생이 아니라 상처 때문에 폭우가 지나간 숲의 풀과 나무처럼 하늘이 잘 보이는 곳에서 하늘이 보낸 바람에 상처를 맡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마음의 상처를 안고 숲을 찾는 또 다른 영혼을 치유하는 숲의 향기와 같은 인생이 되어 갈 것입니다.

배성식 목사(수지 영락교회)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5-02)


반역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5장 10-19절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생각하고 여겨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갈 수 있는 그러한 때는 없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바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힘들어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순종의 기회가 됨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반전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유다 백성들은 심판 전이나 후에도 변함없이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결코 재앙이 자신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 있는 그분의 말로 불을 만들어 그들을 사르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 그들은 타국에서 이방인을 섬길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혼란(10-14)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자 이방 땅으로 끌려가 종노릇 하며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의 강퍅한 태도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0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무너뜨리되 다 무너뜨리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 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게 심히 반역하였느니라 12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13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14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찌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12-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심히 반역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반역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르기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타락한 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줍니다.
(1) 파괴되는 포도원(10-11)
여호와께서 종교적·윤리적 간음을 즐긴 ‘이런 나라’에 보복하십니다. 그분께서 2인칭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파괴를 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녀의 포도원 두둑으로 올라가서 파괴하여라. 그러나 끝장을 내지는 말라. 그 가지들만 잘라내어라. 그것들이 여호와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10절의 사역). 포도원의 파괴가 제한적입니다. 포도나무가 잘려 나가지 않고, 가지들만 꺾입니다. 그 가지들이 여호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포도나무와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지, 좋은 열매가 열린 가지와 나쁜 열매가 맺힌 가지를 구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지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 아니기에 잘립니다(1-5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에는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 가지가 다 잘려 거의 죽은 나무와 같지만, 그래도 줄기와 뿌리는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히 말라 죽지 않습니다. 아마도 유다가 대적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지만, 완전히 끝장나지 않고 언젠가 다시 회복될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이 모두 심판에 넘겨지지만, 미래의 회복 가능성마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의 가지가 다 잘리는 혹독한 심판을 받은 이유는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여호와께 ‘심히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11).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이스라엘을 유다와 나란히 언급합니다. 여호와께 ‘심히 반역한’ 이스라엘이 주전 72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심히 반역한’ 유다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번역이 멸망과 유배를 초래했듯이 유다의 철저한 반역도 멸망과 유배를 초래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다의 경우는 회복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2)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12-14)
현재의 문맥에서 다음 두 절은 유다 사람들이 어떤 연유에서 여호와께 반역하고 예레미야와 같은 심판 예언자들의 선포를 거절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심판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12).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의 심판 의지를 무시하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구원사적 전통에 매몰된 자들은 여호와께서 유다를 심판하시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칼과 기근’의 재앙을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들에 맞서서 그런 재앙은 결코 자신들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예언자들이 심판받아야 할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13). 여호와의 심판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볼 때 재앙을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들은 실체가 없는 '바람'에 불과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자들로,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바람과 같으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칼과 기근’의 재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칭한 자들에게나 임할 것입니다. 심판 예언자들을 거짓 예언자들로 정죄한 자들에 맞서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옹호하시며, 그들에게 볼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음을 그리고 예레미야를 당신의 예언자로 선택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에 두신 그분의 말씀(참조 1:9)은 봄이 되고, 그의 선포를 거절한 유다 백성은 나무가 됩니다.
 

강하고 오랜 민족에 의한 심판(15-19)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도 믿지 않기 때문에 굳이 선하게 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결국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은 유다 백성의 행위와 그 결과를 묵상하고, 새 언약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5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6그 전통은 열린 묘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17그들이 네 자녀들의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떼와 소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의뢰하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18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19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15-19)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들에 대해 말씀이 불이 되게 하고 그들은 나무가 되게 하셔서 말씀으로 그들을 불태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알지 못하던 강한 민족이 올라와 그들을 치고 성읍을 파멸시키며 모든 것을 갈취해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 강하고 오랜 민족(15-16)
여호와의 심판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 집’을 태울 붙은 전쟁의 불입니다. 여호와께서 ‘한 나라를 먼 곳에서’ 오게 하시는데, ‘강하고 오랜 민족’으로 이스라엘이 알아듣지 못하는 모르는 말을 사용하는 민족입니다(15). 이들은 모두 잘 훈련받은 용사들로 이들의 화살은 빗나감 없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혀 무덤에 들어가게 합니다(16). 이스라엘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들과 싸워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먼 곳’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알지 못하는 곳이고, 감정적으로는 두려움과 야만스러움의 장소입니다. ‘강하고’는 원래 ‘지속적인’, ‘영속적인’을 의미합니다. 흥망성쇠를 경험하지 않고 고대로부터 계속 있어 온 민족은 강한 민족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모르는 말’은 낯섦과 무서움의 대상입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불러오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은 20장에서 바벨론으로 밝혀집니다. 강하고 오랜 민족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남김없이 파괴되고 약탈당합니다.
(2) 침략의 결과(17)
“그들이 네 추수 곡물과 네 양식을 먹으며 네 자녀들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17). 스올이 입을 크게 벌리고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다 집어삼키듯이 침략자들이 모든 것을 먹어 치웁니다. 사람들은 칼에 맞아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혀 끌려갑니다. 곡식과 가축을 다 빼앗기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잘려 버렸기 때문에 기근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였던 ‘견고한 성들’도 모두 ‘칼’에 파괴되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하게 몸을 쉴 곳이 없어집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습니다. ‘칼과 기근’의 재앙이 닥칠 리가 없다고 하나님의 심판 능력을 인정하지 않던 자들이 모두 ‘칼과 기근’에 쓰러지고 멸망합니다.
(3) 진멸의 모면(18)
침략자들이 ‘아들들과 딸들’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마저 먹어 치우는 17절에 따르면, 멸망 이후 전망하기 힘든 완전한 멸망입니다. 그러나 10절의 경우처럼 심판은 철저하게 집행되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끝장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을 위해 미래를 열어놓으십니다.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하지는 아니하리라”(18), 적들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폐허로 만들고 백성을 사로잡아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4) 심판의 이유(19)
하나님께서는 이미 심판 이후를 준비하십니다. 그분은 회복의 약속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심판 원인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새로운 미래도 없기 때문에 가상적 질문과 답변의 양식을 빌려 이를 알려주십니다(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냐”는 질문에는 재앙을 경험한 자들의 당혹감과 한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임하게 하셨음을 인정하지만, 어떤 연유로 그분께서 이처럼 혹독하게 심판하셨는지는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그분 백성의 멸망은 이해하기 힘든 파국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의 원인을 묻는 자들에게 줄 답변을 예언자에게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서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이제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유다의 멸망과 유배는 겉으로는 전쟁과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재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숭배가 초래한 신학적 사건입니다. 병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면 처방전도 확실해지는 것처럼, 심판의 원인이 우상숭배에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비교적 분명해집니다.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은 우상숭배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의 도움을 기다려야 한다. 지난 시대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씀만 듣고자 한다면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고 복 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만을 듣고자 할 뿐, 정작 진리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과 복과 보호하심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찌른다면 그 말씀에 오히려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5-01)


의인 한 명이 없는 예루살렘

예레미야 5장 1-9절


그리스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죽을 때, 알렉산더 대왕이 와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이 내 앞에서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라고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유명한 것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그리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정직한 사람을 찾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정직한 사람을 몇 명이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며,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배부르며 부유하나 음욕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고 떠난 유다 백성을 반드시 징계하실 것입니다.

 

한 명의 의인이 없는 예루살렘(1-6)

사람들은 혼자 정의롭게 살아봤자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게 지혜롭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의인을 주목하십니다. 한 사람의 의인을 보시고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심판을 철회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로 했습니다. 심판하시기 전에 의인이 있다면 심판을 유보한다고 했습니다. 그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1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2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찌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3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4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6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1-6)

하나님께서는 유ㅠ다 백성을 향해 예루살렘 거리로 다니면서 ‘정의를 항하여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성읍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의인 10명을 찾으신 것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ㅇ었는데 예루살렘에는 의인 1명이 조건으로 제시된 것을 볼 때 예루살렘의 죄악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1) 의인이 없는 예루살렘(1)

하나님께서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1).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찾는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옛적에 소돔을 구하기 위해서는 의인 열 명이 필요했는데(창 18:23-33), 예루살렘의 용서는 의인 한 명만으로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읍도 아닌, 여호와의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고 여호와의 율법이 선포되는예루살렘에서 단 한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을 피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 악함에 있어 예루살렘은 소돔을 압도했습니다(참조, 겔 16:47-48).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했다면, 이제 단 한 명의 의인도 없는 예루살렘이 멸망을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2) 여호와 이름의 남용(2)

한 명의 의인도 없다는 하나님의 주장은 어쩌면 예루살렘 주민에게 황당하게 들렸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했지만, 이는 모두 거짓 맹세였습니다(2). 고대 세계에서 특정 신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는 자는 자신이 그 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전제하는 행위로, 일종의 신앙고백과도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자들은 원칙상 여호와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 곧 여호와께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입술로만 여호와의 통치를 인정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참조, 출 20:7). ‘정의’는 일차적으로는 이웃들 사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돌보고 불법과 폭력을 멀리하는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되고(참조, 7:5-6), ‘올곧음’을 의미하는 ‘진리’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참조, 9:3)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교훈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타납니다(참조, 7:28).

(3) 열매 없는 하나님의 징계(3)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거리와 광장을 찾아가 살펴본 결과, 예언자는 낙담하였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경험한 예루살렘 주민들의 영적 무능력과 완악함을 탄식하듯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찾으시는 올곧게 사는 사람이 예루살렘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들 영적으로 무감각하여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3a). 이들은 거듭 임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실존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재앙의 배후를 살펴 그분의 의지를 읽어내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도를 더해가며 치셨지만, 이들은 그분의 징계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럴수록 더욱 완강해져 갔습니다. 얼굴을 바위보다 더 굳게 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3b). 하나님의 징계가 아무 결실도 보지 못하고, 거꾸로 노골적 반감만 초래했습니다.

(4) 예언자의 착각(4-6)

예언자는 자기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인정합니다. 한때 그는 예루살렘 주민 가운데 다수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할지라도 지배 계급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나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게 처신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길, 저희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4절의 사역). ‘여호와의 길’을 모르는 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는다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분명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찾아가 보았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도자들이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리라는 기대는 온전히 예언자의 착각이었습니다(5). 이들은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었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안다는 자들이 모두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는 소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모르는 비천한 자들은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아는 지도자들은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습니다.’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하나님을 떠나 제 생각과 결정에 따라 산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비천한 자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난한 자들을, ‘대인들’로 옮길 수 있는 ‘지도자들’은 왕궁의 관료와 성전의 종교 지도자, 부자와 지역 사회의 장로와 같은 지배계층을 구성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의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할 수 없는 예루살렘이기에 심판이 확정됩니다.

(5) 멸망의 심판(6)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아는 자가 한 사람도 없어 모두가 멸망을 당합니다. 숲속의 사자가 물어뜯고, 사막의 이리가 찢어발기고, 표범이 성을 엿보다가 나오는 자들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이듯이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6). 모든 성읍이 파괴되고 폐허가 됩니다.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하기 때문에’ 심판도 예외를 허락하지 않고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7-9)

의인 한 사람이 없어 멸망을 당했던 예루살렘은 타락한 인간의 영적 무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의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도는 생명과 진리와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7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8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9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7-9)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용사할 수 없다고 학정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꼐서 아닌 것, 곧 우상을 두고 맹세했고(7a),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상기시키십니다.

(1) 수사적 질문(7aa)

화자가 예언자에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루살렘의 우상숭배와 배은망덕과 파렴치를 고발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거짓 맹세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2), 더 나아가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기도 했습니다(7a). 필요에 따라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우상의 이름으로도 맹세했습니다. 혼합주의의 늪에 빠져 우상을 섬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공적 자리에서는 여호와를 찾고, 사적 자리에서는 우상을 찾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다가도 환난을 당하면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했습니다(참조, 2:27). 이들의 악행은 한계를 몰랐습니다.

(2) 책망의 말씀(7ab-8)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 도다”(7b-8). 하나님의 축복으로 배가 부르자 복을 주신 분을 잊고 간음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돌리기는커녕 그분께서 주신 풍요를 파렴치한 짓거리에 썼습니다. ‘창기의 집’과 ‘이웃의 아내’는 간음이 우상숭배보다는 윤리적 타락과 관련해 사용됐음을 보여줍니다. 종교적 혼합주의의 간음이 윤리적 간음을 조장합니다. 욕정을 주체할 수 없는 우상숭배자들은 성욕을 채우기 위해 무리 지어 창녀의 집으로 몰려다닙니다. 발정기의 수말이 암말을 찾아 들판을 헤매며 돌아다니듯, 음란에 빠진 예루살렘 사람들이 헐떡이며 제 이웃의 아내를 뒤쫓습니다. 종교적 간음에 빠진 자들에게 윤리적 간음은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참조, 29:23). 예루살렘 사람들의 종교적 간음과 윤리적 간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3) 수사적 질문(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9). 하나님께서 용서의 한계를 넘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종교적·윤리적 타락에 책임을 물어 보복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악인에 의해 훼손된 그분의 정의를 바로잡는 사법적 행위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의인에게는 구원으로,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구체화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그분의 길과 법’을 잊어버리고 ‘이런 나라’, 곧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이방 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보복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눈이 의로운 자 한 사람을 찾고 계실 때,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 되길 원합니다. 불신앙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게 해드릴 수 있는 의로운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에는 의인 한 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한 사람이라는 책임감으로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