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현상 또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이해나 경험으로인해 잘못된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항상 옳을 수 없습니다. 또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쉽게 판단하거나 단정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된 제자들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출신과 성분으로 단정 짓고 그러한 자기 판단에 사로잡혀서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치유했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사도들에게까지 성령의 능력이 연결됨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두려움으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위협하면서 사도들의 사역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복음의 확산(13-14)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들을 때 말씀이 우리 마음에 닿으면, 고백하고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3-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골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능력하게 두시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 충만해져 담대해졌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데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의 선포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성전 미문 앞에서 앉아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말씀으로 일으켜 걷게 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온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다음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사역을 판단했지만, 제대로 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능력을 넘어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아무런 권위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무시하여 함부로 대하고 심하게 심문했습니다. 사도의 신분은 귀족이나 부자도 아니고 특별한 학벌도 없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 아래 권위적인 분위기만 잡기만 하면, 두 어부의 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협박과 신문에 오히려 성령이 충만하여 더욱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권세자들 앞에서 그들은 당당했습니다. 그들은 생각과는 다르게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이 있었고, 전하는 내용은 무식한 말이 아니라 논리가 정연했습니다.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자신들보다 사도들이 훨씬 월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반응하고 따른 것을 보면서,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모습을 본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놀랍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몹시 편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대부분이 별 볼일 없는 시골 나사렛 평범한 어부들에 불과한 줄 알았지만, 이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대단히 분명했고 무엇보다도 담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에 사로잡혀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힘으로 위협 당하는 복음(15-18)
사람의 손바닥으로 하늘 전체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해보려고 계속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하늘을 가려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사람들이 막으려면 할수록,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환란이 있지만 반드시 주께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낙심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항상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만이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5-18)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고, 점점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현실로 나타났고, 그 증거들이 확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았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부인할 수 없는 유명한 표적으로 사도들을 칭송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이 행하는 명백한 표적을 공개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루살렘 있는 사람들이 인정한 증거를 억지로 거부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
‘영적 권위(靈的 權威)’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최고의 권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절대 군림의 권위가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겸손하게 하늘의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사용하지 않고 용납의 사랑으로 모두를 품어주셨습니다. 그의 교훈은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나의 삶을 따르라’라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역사 속에서 이러한 권위를 잘못 사용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권위자들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잘못 사용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본문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많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당황스런 상황을 어떻게든지 모면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잠시 공회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기들끼리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종교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하나님이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만 의식해서, 사람들로부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정리만 하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잊고, 하나님의 영적 권위마저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들로부터 흐트러지지 못하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회의한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이 복음과 기사가 더 퍼지지 않도록 제자들의 입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지 시키기로 결의했습니다(17).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고 협박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권위 아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도 불쌍한 영혼이요 회개해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구원 받아야 할 영혼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확산되는 곳에는 항상 함께 따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단의 훼방입니다. 성령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방해합니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은 빛을 싫어하듯이 항상 반대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상히 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초월한 능력(19-20)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자세가 중요합니다.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며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 위협과 도전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
예루살렘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면서 명령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명령에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라고 대답합니다.
사도들은 성령 임재를 통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히 11:38). 단 한 번의 성령 임재를 통해 변화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변화된 사람들은 사람의 시선(視線)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는, 엉뚱한 행동들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가장 힘들 때에도 부탁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부인하고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도들을 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기다리셨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아름다운 제자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현재의 연약한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장차 성령 체험을 통하여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경고에 대해 묵살합니다(19).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고 반문합니다. 사도들은 서슬 파란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서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화된 것은 그 동안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일들도 많았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니 이해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 임재로 능력의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의 경고와 위협 앞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더 담대하게 전합니다.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문(反問)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입니다. 재판권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가르침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은 담대하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용감했습니다.
모든 사역의 결과(21-22)
신앙 생활하면서 경험하고 배웠던 것은 모두 헛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손이 터치하면 가나안 혼인 잔치의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모든 경험과 지식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인간의 작은 경험이나 지식도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 되어집니다.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21-22)
유대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점점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합니다. 사도들을 제어할 수 있는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계속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들은 위협과 협박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어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권위적인 명령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사도들을 핍박함으로 자신들에게 반대로 피해가 올까 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위협하고 석방하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악인들의 훼방은 무기력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황을 초월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복음 전도자의 삶은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신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로 위협해 봅니다. 하지만, 그 권위는 하나님의 권세를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면 됩니다. 앉은뱅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당신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담대하게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모든 영적 경험들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하는 전도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비록 당신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성령이 임하신다면, 훌륭하게 변화되고 능력 있게 사용 받으실 것입니다.
볏과에 속한 억새와 달뿌리풀, 갈대는 비슷하게 생겨 구분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자라는 곳을 알면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억새는 산에서 자라는데, 잎이 뿌리 쪽에 나서 강한 산바람을 잘 이겨냅니다. 개울가의 달뿌리풀은 줄기가 땅 위로 길게 뻗으며 뿌리를 내려 장마철에 불어난 개울물에도 잘 견딥니다. 강가나 바닷가에 서식하는 갈대는 산소가 부족한 강가의 진흙땅이나 소금기가 있는 땅에서도 잘 삽니다.
사는 환경은 달라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약한 풀이지만 바람과 물살을 잘 견디며 살아갑니다. 줄기 안이 비어있어 자유롭게 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연함 덕에 아무리 세찬 바람과 장맛비에도 꺾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사람을 ‘목이 곧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욕심을 버리고, 성령의 바람에 모든 걸 맡기는 영적 유연함이 있다면 사는 곳이 어디든, 어떤 풍파가 밀려오든 꺾이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열매를 허락할 때 이들 풀처럼 고개 숙이는 감사와 겸손의 모습도 보일 수 있습니다.
베트남의 시인 휴틴의 ‘사람에게 묻는다’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과 달리 죄와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을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신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너는 아느냐 그리고 할 수 있느냐.” 억울한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당당했던 욥도 결국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가리까….”(찬송가 280장) 이 가사처럼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십시오. 인간의 죄성과 부패함을 깨닫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오늘도 겸손함과 화평함으로 무장해 발길 닿는 모든 곳마다 승리하는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받아들임과 거절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의외로 마음을 쉽게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무리 두드려도 닫힌 문처럼 딱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주는 현장에는 언제나 긴장감과 긴박감이 있습니다.
성전 미문 솔로몬의 행각에 앉은뱅이가 치유된 기적 사건에 대한 결과를 기록합니다.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고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원 앞에 서서 그들의 신문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적적 사건에만 관심 가졌지만, 사도들은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 앞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치유 사건에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핍박 가운데 복음의 열매(1-4)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전파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밖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한다.’, ‘회개하라!’라는 거북스런 내용도 전하기 때문입니다.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1-4)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4장은 복음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찬양하는 사건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는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 복음을 거부한 무리들(1)
사도들이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을 증언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다가왔습니다(1). 이미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넘겨준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경비대장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전과 성전 주위 질서와 치안 유지를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극했던 두 가지는 선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참지 못했습니다(눅 20:1-8).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분개하며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사도들(2-4)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2)라는 말씀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으로 앞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씀은 또한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맨 앞에 놓인 문구 “예수 안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있어 예수님의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합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활해 높아지신 예수님 때문에 이미 현재적인 실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두개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마 22:31-32; 막 12:25-27; 눅 20:35-38).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님의 구속 사건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어떤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겠습니까? 사두개인을 제외한 유대인들은 대개 죽은 자들이 미래에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에 담긴 결정적인 의의는 부활의 확실성을 입증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되는 현시대가 바로 부활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때 구약의 일부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마 27:52-53).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고전 15:12-17). 바울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시대는 옛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미래에 있을 성도들의 육체적 부활은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된 부활 시대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소집된 산헤드린(5-7)
성도는 이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많습니다.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상당히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곤경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와 관계에 기반을 둡니다.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5-7)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힌 다음 날, 당시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사도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처형시키는 데 앞장섰던 자들(눅 22:66)이 참석했습니다(5-6).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던 자리에 사도들도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그들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앉은뱅이의 새로운 인생이 아니라 오직 누구에 권세로 사역했냐는 것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들은 누구 이름이 더 큰지가 관심이 있어서 누구에 이름으로 전하는지 추궁했습니다. 그들 중에 가장 높은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보다 더 높은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전했지만, 그들의 판단 기준은 종교적인 권위였습니다. 물론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허락 아래 증언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마 26:65).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사도들을 같은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의 치유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선포한 베드로(8-12)
복음을 전할 때 논리로 설득하거나 논쟁하려 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영혼들이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의 유일한 이름인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함으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8-12)
성령께서는 위험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셨습니다. 이미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을 성령께서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0:19-20). 복음을 전한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상태로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핍박당할 때 성령이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발견합니다(눅 12:11-12).
(1)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베드로(8)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8). 베드로는 성령이 임재하기 전에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나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종교지도자 앞에서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연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심으로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당당하게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심을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음을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지(9-12)
베드로는 공회가 사용한 “누구의 이름으로”란 문구에 맞추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라고 대답합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선포했습니다. 자신들을 정죄하려는 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산헤드린 공회가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한다고 밝혔습니다(10).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음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에 버림을 받았으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11: 시 118:22). 이 세상에 구원을 얻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밖에 없음을 선포합니다(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박해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은 단지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 전쟁에 적군인 사단의 나라에 공격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큰 저항을 받을 수도 있는 강력한 초청의 메시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성령을 덧입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숨바꼭질하던 아이들이 다 가버리고 한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울고 있느냐.” 아이는 숨바꼭질을 할 때 꼭꼭 숨어 있었더니 친구들이 찾다가 그냥 다 가버려서 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얘야, 하나님께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으시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려도 사람들은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고 다 가버린단다.”
가뭄과 전염병, 대기근, 대재앙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부르짖습니다. 20세기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욥과 같은 사람도 엄청난 재앙을 만나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절규합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속성의 양면성, 곧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극심한 고통을 겪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나는 삼백 가지의 꿈을 꾸고, 이백아흔아홉 개는 버렸습니다(중략) /그런데 나를 만드는 건 바로 기어코 이룬 한 개의 꿈이 아니라 /그 이백아흔아홉 개의 덧없이 버려진 꿈이었지요.”
장석주 저(著) ‘마흔의 서재’(한빛비즈·145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루고 행한 것뿐만이 아니라 버린 것도 열매입니다. 주님 때문에 내려놓은 자존심, 욕심, 나의 옳음, 시기, 복수심, 과거, 집착, 허영, 이기심 등은 또 다른 열매입니다. 버려야 열리는 세계가 있습니다. 봄에 지는 꽃은 여름을 위한 내려놓음입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이파리를 버려야 겨울을 납니다. 석공이 작품을 위하여 돌을 쪼아내듯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깁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을 버리면서 살았습니다. 버릴수록 열리는 하나님 나라를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룬 것뿐만이 아니라 버린 것도 열매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 9)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갈 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일반적인 상식일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라면 기독교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외골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리는 주장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십자가를 넘어섰는가?’ 또는 ‘넘어서지 못했는가?’가 믿음의 기준이 됩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실체적인 문제에 대해 논쟁과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연약한 자들을 비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날을 기억하면서 삶을 아름답고 충성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언어가 거룩하게 기름 부음받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7-9)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의 시작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받아 들리고, 같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잘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7-9)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⑴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7)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7).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 판단, 시간, 재물 그리고 건강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하셨습니다.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46)
하나님 나라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집중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 세상에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삼층천 하늘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장). 하늘의 것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안에 이러한 모습이 있는가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⑵ 자신을 위해 죽지 않음(8)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목숨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주권이 있습니다. 최근에 연예인들이 자살하니깐 연쇄적으로 모방 자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종 삶이 어렵다고 자살하는 경우가 뉴스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중에 무슨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잠시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생명을 버리는 일은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주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몸과 영혼이나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 하셨으므로 하나님 소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혹시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서 41:10)
이제부터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위해 기도할 때, 편안한 죽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더욱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죽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⑶ 주님을 위해 사는 존재(9)
성도들의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쾌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삶에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생명에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의 삶에 주인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만남과 모든 물질들을 소중하게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때, 실수를 하게 됩니다. 욕심에 집착하게 됩니다. 욕심이 성장하면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주님을 놓치면 금방 넘어지게 됩니다. 성도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까? 어디를 향해 나가야 합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9)
생명의 권한은 주님의 손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 모두의 하나님이시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날(10-13)
공동체의 하나 됨은 각자 자신보다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더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찾아옵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우리도 서로 인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잘했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0-13)
바울은 다른 지체를 비판하지 말라는 권고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경고했습니다. 자기 신앙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지체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다른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 날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한다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⑴ 하나님 앞에 설 날 기억함(10)
이제 바울은 형제우애를 위해서 마지막 심판의 날을 권고합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 앞에 설 날 올 것입니다.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그날에 각자 과거의 살아온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의 삶이 평가되어 질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면 다른 지체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모두 설 때, 정확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을 다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태복음 10:3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때도 공의롭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⑵ 성경적인 구약의 근거(11-12)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이사야 45:23) 말씀을 인용합니다.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위를 토설해야 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해 줍니다. 바울은 이사야 말씀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서 소개해 줍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주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 형제 사랑 등의 주제를 어떻게 로마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 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마음이야말로 ‘주를 위하여’라는 내적 기준의 실제적 구현에 해당할 것입니다.
⑶ 연약한 형제를 배려하라(13)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같아야 한다는 것은, 몸은 지체가 같아야 한다고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몸의 모든 지체가 같아야할 이유 없습니다. 모든 손과 발이 발처럼 되어야 하면 사람이 아니라 네 발 가진 짐승처럼 기어 다녀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심판의 날을 의식하면서도 계속해 다른 지체를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스스로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판단하기보다 사랑으로 연약한 부분을 감싸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사역들의 모든 시시비비의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교제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있다면, 말씀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말씀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듣고 싶고, 더 가까이 하고 싶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는 열망에 가득찰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은혜의 초대로 함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안에 있던 형제들과의 관계들을 지적합니다. 음식 문제와 절기 문제로 빚어졌던 갈등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받으셨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세우시는 권능은 주님께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1-4)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남을 비판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도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고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
성경은 서로를 향한 비판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비판할 때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가급적 비판하는 일을 삼가하면 좋겠다고 말씀을 전개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성도들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⑴ 연약한 믿음을 용납(1a)
바울은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라’고 권고합니다. 믿음이 있지만 아직까지 연약한 사람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은 약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실수나 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점들을 수용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연약하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원하는 수준에 요구하는 사항을 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판단하고 행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들과 생각과 견해가 다르다고 언쟁을 통해서 바꾸려고 해서는 교제를 맺을 수 없습니다. 처음 교회에 출석했을 때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은 모든 교회의 환경이나 예배가 매우 낯설습니다. 그들은 주기도문이나 사도행전도 더 나가서 헌금하는 일도 모릅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것 모릅니다. 모든 낯선 가운데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 성도들은 초신자를 위한다면 그들의 시선으로 보고 응대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연약함이나 미숙함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 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확실하고 완전하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의심(疑心)하고 회의(懷疑)하더라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러 가지를 질문하더라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항을 가지고 헐 트거나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에게 ‘틀렸다!’,‘잘못됐다!’라고 말함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할 때는 상대를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비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충고할 때 그 충고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준비 안됐다면 비판은 아무리 좋은 비판일지라도 삼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그 충고의 말이 그에게 가시가 되어서 박힐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지적을 받음으로 믿음에 낙망이 생기고, 교회를 떠나는 일도 생깁니다.
⑵ 연약한 사람들을 기다림(1b)
바울은 다음으로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신앙의 훈련에 참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의 깊은 통찰의 내용을 나누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질이 불같이 급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판 하나를 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마다 그 나무판에 못 하나씩 박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아들이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게 되자, 아버지는 이번엔 화를 한 번씩 참을 때마다 나무판에 박힌 못을 빼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면 나중에 사과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잘 받아주고, 믿음이 원하는 수준만큼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들이 그런 생각을 했는가를 품어주고, 그리고 성숙한 성도들은 연약한 성도들의 눈높이로 내려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사람들이 성장할 때까지 잘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에는 오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장한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고 기다리면서 그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시간과 때가 있는 성숙(2-3)
성급함으로 망치는 것을 콩나물국과 시루떡만이 아닙니다. 짐승이나 식물들도 성장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한 순간에 자라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성장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우유를 먹을 시기가 있고, 채소를 먹을 때가 있고, 그리고 고기를 먹을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에서도 더욱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2-3)
사도 바울에게 보고되는 문제 중 하나는 로마 교회 안에서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고기를 먹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비판하고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습관에 따라서 짐승을 잡으면 이방신에게 들려진 후에 판매되었기 때문에 우상 제물로 바친 고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기는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기는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상대를 헐뜯고 비판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두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이니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셨는데, 왜 너희들은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면 자신과 입장이 다르더라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각과 견해로 차이로 부딪친 것은 아무런 명분이 없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의 특징은 서로를 상대방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안에 권면하면서 성숙한 과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비판의 대상이 보인다면, 인내하시고 사랑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판단의 주인이신 주님(4)
성도들은 영적 성숙에 있어서 서로 다른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태도나 행동을 결정짓는 가지각색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형제들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 중 첫째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비판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한 가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비판할 수 있지만,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을 조절하라고 말씀합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하인은 그 주인이 알아서 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하인까지 간섭하는 것은 월권(越權)입니다. 그 주인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권리와 범위 안에서만 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었고, 멋있게 주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받았습니다. 또 ‘반석’이라는 ‘베드로’라는 멋진 이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에 베드로는 교만한 일을 행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니깐, 베드로는 주님께 십자가를 감당하지 말라고 참견했습니다.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베드로의 범위를 넘어선 교만의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베드로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서양 속담에 “상대방에 신을 신어보기 전에는 걸음걸이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서 다리를 절고 가는데, 그 사람이 장애가 있어서 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옛날에는 구두를 만들면서 못을 박았습니다. 그 못이 삐져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던진 말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우리 속마음과 동기를 보시고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편협하게 한두 가지로 속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정확하심과 넓으심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편이든지 넉넉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소위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약의 율법과 전통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의 눈에 구약의 율례를 따라(레위기 11-16장)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전혀 모르는 것으로 비쳐졌습니다. 따라서 복음 안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들은 채소만 먹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종종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로 성도들끼리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며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시했습니다(4).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5-6)
모든 영역과 삶의 경험 속에서 각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갖는 책임은 중요한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 앞에 있으며,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께 맡겨졌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할 때 그 일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나라를 위한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까?
5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5-6)
구약 율법과 규례의 한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극복되어 가던 초대교회 안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일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 규정된 절기들을 옹호했지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을 똑같이 강조했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강조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준이 되면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 곧 주일이 거룩한 날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어떤 날을 따로 구별해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이 된 셈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감사함으로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격이 없는 연약한 존재인데도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여진 존재들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존재로 다른 사람들을 품어야 합니다.
영화 ‘인턴’의 주인공인 70세 인턴사원 로버트 드니로는 평소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데 자신이 쓰지는 않습니다. 쓰지 않는 손수건을 왜 갖고 다니느냐고 동료가 묻자 그는 “누가 울면 빌려주기 위해서지. 예의 바르게 내 흔적을 남기는 거야”라고 답합니다. 어떤 교인은 추석 연휴 동안 봉투에 돈을 준비하고 다녔습니다. 연휴에 만나게 될 폐지 줍는 어르신과 환경미화원에게 드리려 한다고 했습니다.
나누려면 여분이 있어야 합니다. 여분의 손수건을 지닌다든지, 돈이나 사탕을 따로 갖고 다녀야 합니다. 사무실에 방문하는 손님을 위해 음료수를 시원하게 준비하고 입지 않는 옷과 신발을 깨끗하게 손질해둬야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늘 바쁜 사람은 누구를 돕고 싶어도 도울 시간이 없습니다. 여유는 따로 떼어놓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나눔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너무 사랑하십니다’와 같은 문구와 성경 구절도 덧붙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눔도 기뻐하시는 제사라 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따로 떼어뒀다가 나누는 삶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야겠습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도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든지, 부모님이 자녀를 만나든지,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 만나든지, 어떤 만남도 반듯이 마지막 있습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우리를 마지막으로 인도하고,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율법의 내용을 줄인다면, ‘사랑’입니다. 그것을 둘로 나누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있는 곳에서 거룩하고 빛 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한 율법 완성(8-1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즐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때로는 즐김에 도를 넘어서 욕심 때문에 불건전하고 불량하게 즐기려고 죄를 짓는 일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이러한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고 권합니다.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8-10)
구약의 율법에는 다양한 계명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계명들을 요약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⑴ 서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8)
바울은 본문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다섯 번 사용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단락의 주제가 ‘사랑’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12:9-21에서 ‘거짓 없는 사랑’을 신앙 공동체 안팎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권면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사랑’이 하나님 백성이 실천해야 할 윤리의 핵심적인 원리임을 재차 강조합니다.
① 받을 사랑(8a)
바울은 ‘사랑’에 대해 받을 사랑과 나눌 사랑으로 말합니다. 첫째는, 받을 만한 사랑은 받아야 합니다. 그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때가 있고, 채우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죄성 때문에 사랑은 점점 고갈됩니다. 사랑이 갈증 날 때, 세상 속한 헛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실 바랍니다. 세상에 속한 사랑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때론 시간이 가면서 변질됩니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38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시편 37:38)
② 주는 사랑(8b)
다음으로 사랑을 넉넉히 받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권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성취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빚에 관한 성경의 말씀입니다. 채워져야 넘치는 사랑의 에너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변에 사랑해야할 대상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12)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이 충분히 채워지고 소비되어지면, 사랑이 순환되어 건강하게 작용해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충분히 받고 충분히 주면 건전한 사회가 형성되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건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길 원하십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에 빚지시길 바랍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에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⑵ 이웃을 사랑한 진실한 사랑(9-10)
‘사랑’이란 무엇인지 또 다른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성취, 완성하고 율법이 사랑을 통해서 요약된다는 것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① 소극적인 사랑(9)
그래서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라고 주장합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간음하지 않으며, 살인하지 않으며, 도덕절하지 않습니다. 악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것들을 끊는 것은 거짓 없는 사랑뿐입니다. 탐욕이 올라온다 할지라도 진실한 사랑하기 때문에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죄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죄성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올라온 지 모릅니다. 매일매일 회개를 해도 말씀을 접고 세상에 나가서는 이러한 탐욕적인 일들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탐욕을 끊을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이러한 일들이 더욱더 팽배해지고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가지고 승리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② 적극적인 사랑(10)
또 적극적인 의미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본과 가르침을 따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곧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서로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그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다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 더욱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모두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으로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 빚을 갚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웃에게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말씀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시작도 사랑이고 마지막도 사랑입니다. 성도들의 시작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고 마지막도 사랑으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율법의 온전함과 완성됨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대해 규정하는 율법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해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보장하는 것과 관련되고, 그 조항을 실현하는 원동력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와 같이 여기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특별한 절기 때에만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며 사는 삶(11-14)
‘말세’ 또는 ‘종말’이라는 것은 긴장을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들에게 끝이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마지막을 고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말세에 대한 권면으로 초대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1-12)
사도 바울은 다음으로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합니다. 이전의 삶의 모습은 밤과 같이 어두웠던 밤과 같이 어두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낮과 같이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 주님을 만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말의 시기를 말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을 카운트다운(countdown)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말세를 준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⑴ 종말에 대한 경고(11a)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11a) 성경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 ‘종말은 현실이다.’, ‘종말은 사실로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모든 피조 세계에 일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종말을 하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삶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에 현실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⑵ 밤이 깊을수록 깨어 있어야 함(11b)
11 …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b) 종말이 오기 때문에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잘 때가 아니라 깰 때입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일들을 벗어나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깨어 있으면 긴장을 줍니다. 무엇이든지 준비해야하면 준비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영역에서 깨어나야 할 영역들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로서 준비해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⑶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성도들이 깨어 일어날 때, 어두움을 벗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워할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마지막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두움의 세력인 죄와 마귀에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속한 행실을 하지 말고 빛과 같이 행동하며(12-13),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말미암아 종말이 더욱 가까이 왔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음이나, 밤이 깊어 낮이 가까이 왔음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이와 같이 종말적 현실에 대한 인식은 성도들에게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영적 무감각 상태에서 깨어나 빛의 갑옷을 입고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어둠의 일을 버림으로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등의 삶을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의 일을 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권고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거지 옷은 거지의 신분이고, 군복은 군인의 신분으로 절도가 있습니다. 예복을 입으면 예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백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의 옷, 진리의 옷을 입으므로 말세를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질 것입니다. 내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참 신앙인의 삶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은 종말론적 현실을 인식하고 현실에서 경건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이 통치하는 절망의 세상에 의와 생명의 통치를 구현하러 오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아무리 갚아도 충분하게 갚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이웃 사랑으로 보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중년 이상이라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월요일마다 ‘애국조회’때,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의식을 행했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이렇게 태극기를 보거나 국가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뛰면서 새로워집니다. 교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상 기도합니다. 나라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요, 이 세상의 국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갈등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습니다. 따라서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단지 정치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말했다면 13장에서는 사회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국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권세 아래 순복함(1-2)
그리스도인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한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2)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황제의 통치에 의해 신앙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르쳐준 지침의 핵심은 로마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폭력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현실을 떠나서 성도들만의 공동체를 이뤄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본문 단락에서 말하는 ‘권세’는 세속 정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위의 근원이십니다. 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5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16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언 8:15-16)
이 세상에 있는 권세의 기초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만물이 주로부터 나오고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름과 모든 권세, 모든 신 위, 그리고 모든 나라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권세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입니다(다니엘 4:17,25,34-35). 그래서 권세 아래 굴복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쳐줍니다. 이들을 통해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십니다. 이러한 로마서의 권면은 잠시 혼란스럽게 합니다. 성도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첫 핍박이 네로 황제에 의한 것(주후 64년경)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제국이 ‘본격적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한 것도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됩니다. 로마 제국의 종교정책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로마는 사실상 모든 종교를 수용하려 햇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종교적 핍박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에 대한 제국의 핍박 또한 국지적, 한시적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제국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려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클라우디오스 칙령은 제국의 정책에 따라 교회의 구성이나 생태계가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속 정부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그 권세에 대항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각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의 통치자이시고 인간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자들을 세우시고 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것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은 심판을 자취(自取)한다고 권고합니다. 성도라고 해서 세상과 무조건 분리되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 살면서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쉽게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고, 정치와 신앙을 분리하는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질서(3-5)
하나님께서 세상 주관자들에게 권세를 주셔야만 합니까? 사람들은 공동체로 모여 살고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권세는 질서를 위해서 공동체의 균현과 조화를 이해 하나님께서 주신 힘의 균형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지킬 대, 질서가 지켜지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유익이 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입니다.
3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3-5)
하나님께서는 권력자들을 통해서 악을 제어하고 선을 세우므로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또한 권력자들은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데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백성들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공평하며 진실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⑴ 권세에 대한 불순종의 심판(3-4)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최후 심판대 앞에서 얻게 될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세속 권세를 통해 집행되는 악한 행동에 대한 구체적 보응이라고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들에게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권세를 단순히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에게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른 것은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됩니다.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권세 아래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권세의 딜레마는 권세에 대해 저항감을 가진 것은, 그 권세자가 공공의 질서와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개인의 사리사욕과 만족과 탐닉을 위해 사용할 때나 부조리가 있을 때, 그 권세에 대해 굴복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실 모든 공동체 안에서 질서가 충돌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3)고 권고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이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선한 것 아래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목적이고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양(羊)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양심 아래서 선한 일을 행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게 하는 것, 생명을 더불어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권세와 질서는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권력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것은 권세의 진정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퇴보하고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함을 얻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집단만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풍성함 얻고 성장 가운데 나가게 하기 위함이 권세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권세 있는 사람이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권세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과정과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 뜻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위해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질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가진 사람이나 권세 아래 있는 분들이나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질서와 균형이 생길 것입니다.
⑵ 권세에 순종해야 될 이유(5)
바울은 국가에 순종해야 될 이유들에 대해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5)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국가(권위)에 대해 순종해야 될 이유를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를 인하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하기 때문에 이 질서를 어기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진노’는 곧 악을 행하거나 세속 권위에 불순종함으로써 그 권위로부터 얻게 되는 처벌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과 질서 가운데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반항하는 것임으로 심판에 대한 대가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경고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양심을 인하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인 질서와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만물 안에 하나님의 질서를 주셨습니다. 인간의 몸 안에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순복하고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이라는 것을 모두 주셨습니다. 그 양심의 법칙을 따라서 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그 양심이 하나님의 질서를 떠나면 죄책감(자책감)을 줍니다. 순종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폭행이나 살인 그리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양심에 찔림을 받습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힘이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서와 권세 가운데 있지 않으면 양심이 발동해서 괴롭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 땅에 권세를 세우셔서 질서를 바로 잡으십니다. 따라서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들을, 부모님과 선생님을 존경하며 잘 순종해야 합니다.
국가에 대한 납세의 의무(6-7)
그리스도인은 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권세에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백성으로서의 책임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책임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세금입니다. 바울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으로 납세와 의무를 지키려고 합니다. 나라의 통치자들은 정직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하며,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권세에 순종하고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6-7)
바울은 이제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고 세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세금’은 국가에 대한 백성의 의무입니다. 세금으로 공적으로 잘 사용해서 개인이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유지하고, 사회간접자본(도로, 철도, 공항 그리고 도시 등)을 건설하고 유지보수를 합니다. 모두 공공의 질서와 선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니 그 의무를 항상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은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라고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세금을 집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세금은 정당하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세금을 내는 사람에게도 세금을 사용하게 되는 사람에게도 조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탈세로 인해 세상의 경제 질서가 무질서해졌고,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이때 국가는 권력을 이용하여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금에 있어서 양심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비양심적인 책임 이행은 자신을 힘들게 하며 기독교 공동체를 멍들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물질에 대한 깨끗한 양심으로 세금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끗한 양심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때 국가는 건강해지며, 동시에 국민은 튼튼한 국가 안에서 보호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리라’(마태복음 22:21)는 말씀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국의 권세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국민으로서, 학생으로서, 자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대로 하라고 순복하면서 하나님의 질서와 기능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의무를 마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착복하거나 태만하지 말고 권고하십니다.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이 해야 할 국가와 권위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뜻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순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조화로운 유익과 풍성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국가와 권위를 주신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라는 영적 원리를 기억하고, 당신 위에 세우신 리더에게 순종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순종의 마음으로 세우신 리더에게 온전히 순종할 때 질서를 통해 온전한 기쁨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들을 존중하며 잘 따르겠습니다.
시인 한명희의 시 ‘오뚝이’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넘어지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존재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올리버 골든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오뚝이를 닮은 숫자 8자를 옆으로 눕혀 보십시오. 무한대의 기호 ‘∞’가 됩니다. 성도는 넘어지면서 만물의 무한대를 보며 더욱 깊고 푸르러지는 존재들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오뚝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아래 중심에 무거운 추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바람에 흔들려도 다시 균형을 잡는 것은 배 중심에 ‘바닥짐(ballast)’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날아오릅니다. 유리처럼 깨지지 않고 공처럼 튀어 오릅니다. 돌을 맞으면 그 돌들로 성을 쌓습니다. 고난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됩니다.
살아가다보면 잔치에 초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결혼식’, ‘백일잔치’, ‘회갑잔치’, 그리고 슬픈 일은 ‘장례식’까지 초대를 받습니다. 모든 초대에 중심에는 알고 보면 ‘사랑의 초대’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축복해 주길 원하며, 때로는 위로해 달라는 초대입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하기 원하고 사랑을 받길 원합니다. 본문은 성도들을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사랑의 현장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바른 공동체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3-8). 이제는 개인이 삶에서 성도로서 살아가야 하는 태도에 대해 서술합니다. 성도의 생활은 한 마디로 사랑의 생활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아름다운 말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조그만 일에서부터 어려운 일까지 힘써 노력할 때 아름다운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것(9)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개인의 목표만 우선할 수 없는 것이 공동체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개인도 존중해 주어야 하지만 일반적인 원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일반적인 원칙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살아갈 일반적인 원칙인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바울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드러나야 할 덕목 중 가장 먼저 거짓 없는 사랑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근거한 것입니다. 위선적인 사랑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위선적인 사랑은 어떤 이익을 챙기려는 사랑입니다.
⑴ 사랑하라(9a)
기독교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삶의 원리도 당연히 ‘사랑’입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가진 사랑은, 첫째는 거짓 없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하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⑵ 분별하라(9b)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큰 실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 선악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에 속하고 악을 미워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디모데후서 2:15)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기준에서 때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 기준이 달라져 버립니다. 선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도 혼돈스러울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신도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 선을 행하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대한 사랑(10-13)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들어나야 하는 곳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신 사랑의 모습이 잘 들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진행된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되어진 것입니다.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0-13)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랑이 진행되어야 하겠습니까? 먼저 형제를 다정하게 사랑으로 대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명령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좋은 관계를 맺고, 부지런히 행동하며 열심히 주를 섬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시작되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마음에 샘솟듯이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기쁘기 때문에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나눔과 섬김이 나타납니다. ‘밥퍼 목사’로 잘 알려진 최일도 목사님이 속한 ‘다일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동체는 다양한 은사들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해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합니다.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립보서 2:15-16)
사랑이 변하지 않고 순수하면 정말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변질되면 악취가 진동합니다. 마치 좋은 음식은 보기에도 아름다워 보이고 먹음직스러보이지만, 변질되면 코로 맡을 수 없는 음식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처럼 사랑도 변질되면 사람들의 냄새가 진동해서 악취가 진통해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며 존경해야 합니다. 사랑은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붕대(繃帶)입니다. 서로 달란트를 가지고 사랑할 때 공동체는 하나 되며, 하나 될 때 건강한 교회가 되어집니다. 건강한 교회가 성장하고 영적으로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에게 대한 사랑(14-21)
성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을 연결하는 ‘가교(架橋) 역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옳은 행실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따라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힘들지만 사랑의 최고봉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14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4-21)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 평범한 사랑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끼리 사랑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사랑하고 권합니다. 그래서 한걸음 더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원수들까지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알게 되면, 원수를 축복하는 일은 적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성도들을 핍박하던 자신이 주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 받은 사랑으로 원수를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만지시고 치유시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게 능력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길 원하십니다. 진정한 승리는 더 큰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이 임하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당신은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당신보다 나보다 낫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섬기는 데 솔선수범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히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헬라어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카리스마’의 본래 뜻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알맞게 주셨습니다. 각자 받은 선물은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선물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턴 새로운 부분이 전개됩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실천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대원리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1-2)
모든 성도들은 예배하길 원합니다. 예배처럼 흥분과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과 태도로 예배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삶의 예배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
바울은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라고 찬양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12장부터 하나님의 찬양하는 성도들은 찬양이 그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 기뻐하신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⑴ 살아있는 예배의 성격(1)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는 직영하면 ‘이치에 맞는 예배’입니다. 그가 말하는 예배의 성격을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 것
예배는 분명한 자신의 신앙고백 위에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음을,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신앙고백 위에 드려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② 예배는 몸으로 드린 것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몸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더 강조하면 예배는 피를 요구합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제사)는 제단에서 속죄양을 잡고 각을 뜨고 제단 불 위에 태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애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죄악된 행위까지도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린 것이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준비가 아닙니다. 주일날 거룩하게 몸으로 드려진 예배를 위해서 6일 동안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성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나가서 정성껏 몸으로 준비하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③ 예배는 영으로 드린 것
예배는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몸으로 드려지긴 하지만 영과 영이 통하는 곳입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영이 열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들이마시고 인간의 죄악을 내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영과 영이 교통하여 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⑵ 예배를 위한 삶(2)
바울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물인지 부연 설명합니다. 이렇게 하면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은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곳에서 말하는 ‘이 세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본능에 의해 지배된 세대입니다. 타락한 본성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중심의 시대, 본능에 지배된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타락한 본성으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즐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바쁘긴 하지만 방향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본받지 않는 삶을 살 때,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② ‘마음으로 새롭게 변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시달려서 강퍅해진 마음을 말씀으로 쟁기질을 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방치하면 묵은 땅이 되어 집니다.
③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고
세상 사람들처럼 방향이 없어서 바쁘긴 하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분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산 채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기에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당신이 새롭게 변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예배의 축복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선물(3-6)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룬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부르셔서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십니다.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고 각 은사들이 지혜롭게 발휘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도록 하십니다.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4-8)
교회도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서로 존중하며 협력할 때 교회 공동체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떤 자세로 예배의 삶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⑴ 자만심을 품지 말라(3)
먼저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3) 권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었다면, 아무도 그 말씀을 전할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수를 잡아 죽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처한 문제의 해결의 원리는 제시하는데,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b)라고 두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사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의 은사가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준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이방인도 유대인보다 뛰어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11장까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무엇이 ‘믿음’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죽을 자임을 아는 태도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고, 하나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신의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자신 스스로 미래를 보장할 수 없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만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주실 있다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고 이것이 다름 아닌 지혜입니다. 믿음이 있어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는 삶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이 생각할 만큼만, 마음이 품을 만큼만 품어야 합니다. 자신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은 지나치게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을 간섭하다 보면 자신도 동일한 범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 맡기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⑵ 서로 협력한 공동체(4-5)
바울은 이 원리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고 로마 교회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때, 항상 몸으로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에베소서 4:1-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 몸입니다.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여러 기관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룹니다. 각 기관들은 다른 기관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각 기관들이 서로 도와서 온전한 하모니를 이루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각 지체가 하나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한 색깔만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주로 한 지도자에 의해서 주도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지도자 자신의 스타일만을 성도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건강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나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잖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사용될 가치가 있도록 존귀한 존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지체도 소월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⑶ 다양성으로 섬기는 공동체(6-8)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그 각 사람에게 주신 많은 기능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그 직분을 ‘은사’라고 표현합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그 지체마다 직분이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다양한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구성원은 각자 다른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능 없는 몸의 지체가 없듯이 어떤 지체도 덜 중요하고, 더 중요한 지체가 없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전체 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하라고 하면, 의학적으로 이것을 ‘병(病)’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6a)라고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왜 바울은 자신이 은혜로 전한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은혜이듯이, 성도들에게 주신 여러 가지 모든 은사도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노력하거나 받을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닌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각자 받은 은사를 서로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로서 말씀을 전하는 자신의 은사마저도 로마 교회 성도들의 다른 은사보다 더 우월하여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섬기고 구제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축복입니다. 다 각자 다르고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달란트는 각자가 다른 것입니다. 각자 역할과 특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부서와 역할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일반적인 일을 할 순 없습니다.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달란트를 따라서 섬김으로 모두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섬깁니다. 어떤 부서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영적인 예배를 위해서 쓰임 받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은사)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마다 다른 은혜의 선물을 주셔서 하나님의 공동체와 사람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기억해 합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를 통해 섬기는 것은 다양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오랜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차려준 식사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중 너무나 훌륭한 나머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음식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수많은 끼니들이 지금까지 내 생명을 지탱해줬습니다.”
어느 노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살다보면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개학 첫날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새 교실의 문을 살며시 열던 때라든지,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 종일 울기만 하던 시절이라든지,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 같은 것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다듬고 빚어온 재료는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순간들일지도 모릅니다.
우린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그래야만 내 삶이 의미 있고 특별해질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내가 평범하게 흘려보내는 하루하루, 순간순간들은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고르고 골라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에게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퍼즐의 조각들입니다. 그것들이 맞춰질 때 내 삶의 큰 그림이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무로 원앙새를 잘 새기는 장인(匠人)이 있었습니다. 목각새를 주문한 사람들은 그의 솜씨를 경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각새를 사가는 사람이 장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날아가는 목각새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장인은 날아가는 목각새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년, 2년이 지나가도 날아가는 목각새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이상해졌다고 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장인은 낙심과 좌절에 가득차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작은 새가 날개를 다쳐 몸부림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는 “저 새도 나처럼 날개가 꺾였구나”라고 탄식하며 그 새를 정성껏 치료해줬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작은 새는 푸드덕하며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장인은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저 작은 새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봐줬더라면, 날아가는 목각새를 만드는 헛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을….”
예수님께서는 소년의 오병이어로 남자만 5000명이 먹는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엘리사는 기름 한 병을 통해서 선지생도의 아내가 빚을 갚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습니다. 내게 있는 작은 것으로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집안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이 있고, 가치 없는 물건도 있습니다. 또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될 귀한 물건도 있고, 될 수 만 있으면 빨리 버려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물건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버려야할 물건들을 담는 것이 ‘쓰레기통’입니다. 집안에 버릴 것을 제때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 먼지 나는 것을 모두 버려야만 새로운 물건을 구입해서 새롭게 리모델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도 과거의 쓰레기와 같은 것들은 모두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쓰레기통에 담아야할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버려야할 것들을 소개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25-27)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구원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기존 틀을 깨고, 옛 잘못된 생활과 신앙을 버리고,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25-27)
사도 바울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이 믿지 아니하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⑴ 유대인들의 영적인 교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최고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멋있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은 자신들이 생각한 기준에서 일뿐이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신앙이 아니라 가장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교만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 당신들은 의롭거나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행위로 완벽하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빨리 버려야할 것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⑵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겸손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25절).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들을 돌이키시는 사건이요, 그들의 죄를 없이 하시는 은혜의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언약을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이 구원의 비밀을 이루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⑶ 구원에 대한 생각을 변화
과거의 구약 시대 때에 주셨던 율법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급작스럽게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 방법을 따라 노력을 해보았지만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 약속을 따라서 구원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믿음 생활한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신앙을 붙잡고 나가야 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가 시내산 광야에서 하나님과 영적이 교제하는 장소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聖幕)입니다. 성스러운 텐트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이동하기 때문에 성막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고 왕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왕 중에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건축된 뒤에는 성막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구약에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이 건축되었는데도 성막을 고집하듯이 그런 영적인 방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런 과거의 생각을 버리고 시대에 맞는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⑷ 새로운 구원의 방법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주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붙잡고 있는 율법과 할례의식 등이 아니라 새롭게 그리스도를 오셨습니다. 이제는 책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과 계명 그리고 살아있는 율법인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가 올 때, 그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나갔던 방법이 이제는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려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의 산 제사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비극 중에 비극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줄 아는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씩씩거리고 있다는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집안에 쓰레기가 가득한데도 버리지 못하고 쓰레기 속에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외형적인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쓰레기로 가득한다면 쓰레기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히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고집합니다. 바꾸어야할 때를 놓칩니다. 시기를 놓치면 모든 것을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 같이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면 버리시길 바랍니다. 포기할 것들이 있다면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안되는 것을 집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28-29)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집착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바른 길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8-2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모름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넣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행전 9:3-5)
유대인들은 바울의 고집으로 하나님의 뜻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갔고, 더 나가서 하나님을 핍박하므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흘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실수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이 정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과거의 영적 쓰레기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사정에 따라서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이중적인 입장에 있었습니다. 복음의 측면에서는 복음을 거부하였기에 원수된 자들입니다.
구원의 경륜에 참여한 자(30-32)
이제는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로움을 사람들이 어떻게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할 지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0-32)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으로 열렸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혜택을 입어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문을 꼭 닫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음의 문을 이방인들에게 활짝 여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중요한 원칙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순종치 아니함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긍휼은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방인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 선민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니깐, 이방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이방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선택한 민족이나 사람은 끝까지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함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주셔서 마지막 때에 이방인들로 하여금이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이 흘러넘칩니다. 먼저 받은 사람들이 넘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들이 구원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열방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복음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Back to the Jerusalem’이라는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선교의 도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면 내국에게는 전도, 외국에는 선교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복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복음과 은혜의 통로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은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힘있게 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건강에 대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건강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건강한 육신으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장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욕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일상생활 가운데 자족하며 사는 것이 건강의 지름길입니다.
둘째, 건강 축복의 지름길은 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웃는 자에게 건강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왜 웃음이 건강을 가져다줄까요. 웃을 때 신기하게도 우리 몸 안에 있는 불필요한 독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건강은 저항력이 결정합니다. 저항력이 강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저항력이 약하면 병에 걸립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면 우리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이 웃으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웃으십시다. 하나님은 웃는 자에게 건강의 축복을 주십니다.
어린 시절에 들이나 산에는 ‘야생배나무’, 또는 ‘아그배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사과나무과’에 속하지만 작은 구술만한 배처럼 생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야생배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종종 이 나무에 배나무를 접붙이면 큰 배를 수확할지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배에게 큰 배를 접붙임으로 큰 배를 수확한다면, 그 배나무는 야생배나무가 아니라 훌륭한 배나무로 변할 것입니다. 그냥 작은 ‘아그배’를 열리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에서 큰 배가 열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따라서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교마함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간절한 소망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도 율법이라는 모든 껍질을 버리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울(13-17)
복음이 이방인에게 열렸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을 바라보면, 이방인들에게 당부합니다.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3-15)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한편에서는 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많이 돌아오는데,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방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돕는 공생(共生)의 길임을 말씀합니다. 이제 이방인들에게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먼저 자신의 직분에 대해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직임을 받은 사람인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을 그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르심을 받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이러한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인은 성도들도 중요합니다. 이 질문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직분은 중요합니다. 그 직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맡은 자리가 사람들의 이목에 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와 직분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세우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어느 곳에서도 요셉처럼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항상 어떤 자리이든지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데 그 사람만 가면 그 자리를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의 선교는 바울이 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빛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자리가 바울처럼 빛나게 하는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 놀라운 간증과 기적과 축복이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재확인시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틈만 날 때마다 자신의 직분과 사도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대해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직분은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수고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참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축복 받은 이방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을 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돌아오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더 열심히 감당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감람나무를 통한 비유(16-18)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접붙임을 통해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의미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6-18)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구원관계에 대해 설명 합니다. 그가 말하는 돌감람나무는 이방인이고, 참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꺾인 돌감람나무’로 표현합니다. 돌감람나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꺾인 돌감람나무 가지는 얼마나 더 가치가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꺾인 가지는 그대로 두면 말라서 비틀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없이 다만 불에 던져 넣을 뿐입니다. 영적으로 살펴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가치 없고 볼품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버림임을 받을 수밖에 없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이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감람나무 가지가 참감람나무 가지가 되어서 뿌리의 모든 공급과 자원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감람나무 가지에서 ‘새로운 참감람의 열매’가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근본적인 본질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일나무는 항상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떤 결과를 맺습니까?
42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3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4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3-45)
돌감람나무는 열매를 맺어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것도 꺾인 가지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이방인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서 훌륭한 감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참감람나무였던 유대인들은 돌감람나무가 되었습니다. 열매가 과거에 이방인들처럼 형편없는 열매였습니다. 그라나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만, 너무 자긍하면서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접붙임을 위한 사역자(19)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19) 이방인인 돌감람나무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참감람나무로 접붙이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그 사역을 매우 귀중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사역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당신도 바울처럼 주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원대한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20-24)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나 멸망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0-24)
⑴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20-22)
돌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접붙임이 되고, 참감람나무의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틀이 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취해야 할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0a). 유대인은 원 가지(뿌리)이고 이방인은 접붙인 지류(가지)인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꺾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접붙여진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약속된 특권을 대신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구원 받은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 자랑이 될 순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에 대해 교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져선 안 됩니다. 둘째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거나 방자하게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20b). 만일 그렇게 처신한다면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꺾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근거가 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믿음의 사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敬畏)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은 외예가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서는 참감람나무 가지이든지 돌감람나무 가지이든지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칙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구원의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있지만 준엄(峻嚴)하심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준엄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나 혈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다 꺾기우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를 구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아도, 즉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대한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은 충분이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만은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판과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있습니다.
⑵ 유대인에 대한 구원(23-24)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다. 참감람나무가 원뿌리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에게 대해 믿어야 합니다. 참감람나무 임에도 믿지 않는 것은 꺾인 가지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외형적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믿음이 없다면 참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꺾인 가지이기 때문에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이나 지명들이 모두 생소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익숙한 문화와 환경들, 그리고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들이 믿기 시작하면 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믿었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뿌리에 접붙이지 않으면 그가 참감람나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 인자의 원리, 은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실만한 능력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강조하고 준엄하심을 간과하는 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생명력 넘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복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요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