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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4)


멸망의 참상을 목격한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중동 시리아 내전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국민 약 500만 명이 안전한 나라를 찾아 유럽 국가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종종 피난을 떠나면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얼마 전에는 시리아 난민 3살배기 아이가 익사한 채 터키 해변으로 밀려와서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더 슬픈 것은 지금도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피어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들은 시리아만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선지자가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아파하는 마음은 이보다 몇 백배 더 할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예루살렘 성과 하나님의 성전까지 철저히 무너졌다고 슬퍼했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을 1인칭으로 슬픔을 표현합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먹어야 하는 비참한 예루살렘의 재앙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재앙에 대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던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합니다. 늦긴 했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호소합니다.

 

시온의 참상으로 인한 슬픔(11-12)

바벨론에 멸망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이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굶어 죽었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예루살렘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11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12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11-12)

계속적으로 예레미야애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패망한 후,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까지 파괴되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의 참상을 소개합니다.

⑴ 참상을 목격한 선지자(11)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이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여성들이 피해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가장 큰 참상은 전쟁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세 개의 기관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고, ‘창자’는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고대근동에서는 간을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간을 땅에 쏟아놓는다’는 말은 ‘자신의 감정, 특히 슬픔의 감정을 물처럼 땅에 쏟아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표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다’라는 뜻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강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20에서도 나왔습니다. 선지자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느꼈던 슬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동일하게 느꼈던 슬픔을 표현합니다. 선지자가 슬퍼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11b). 그것은 이스라엘이 패망으로 해밝게 웃고 있어야할 어린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힘없이 길거리에 누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힘없이 눈만 끔뻑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⑵ 엄마 품에서 죽어가는 아이들(12)

선지자는 아이들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조금 다행인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길거리에 죽어가는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에서도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어머니를 향해 양식을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머니의 품 혹은 가슴은 원래 젖먹이가 젖을 먹으며 가장 배부르고 행복한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근으로 어머니의 젖까지 말라버렸습니다. 말라버린 젖을 빨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8:41과 50절 및 53-57절에서 경고한 것처럼 전쟁으로 인한 기근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엄마 품에서까지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통곡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배 굶주림에 죽어가진 않습니다. 하지만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굶주림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야망과 경쟁문화 때문에 아이들의 영혼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과 직장만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우상숭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 재물로 불에 던져진 우상숭배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기근으로 인해서 어머니의 젖이 말라버린 것처럼, 성도들의 기도와 말씀은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조롱당하는 시온(13-17)

전 세계적으로 전쟁으로 죄 없는 많은 아이들이 죽어갑니다. 아이들은 전쟁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집과 가족 그리고 친구를 잃어 갑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약탈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해 아이들의 아픔을 소리쳐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어른들의 욕심이 수많은 아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13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 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13-17)

하나님께서는 바벨론과 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선지자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황폐해진 예루살렘 상황을 더 자세히 소개합니다.

⑴ 위로와 치유자가 없는 시온(13)

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런 큰 비극과 슬픔 앞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시적 형식을 살려 배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으로 네게 증거할까? 무엇으로 너에게 비유할까? 딸 예루살렘이여 무엇으로 너에게 비교하며 내가 너를 위로할 수 있을까? 딸 시온이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까? 세 번이나 ‘무엇으로’라고 사용하면서 질문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의문문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어떻게 증언해야 할지, 어떤 비유를 들어 설명해야 할지, 또 어떤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의 참담하고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마지막 문장의 ‘누가 너를 고칠까?’는 한편으로는 전적인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심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⑵ 책임이 있는 거짓 선지자들(14)

이런 멸망의 책임은 1차적으로 거짓된 선지자들에게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만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어리석다’는 눈가림을 위해 석회를 발라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들어내어야 할 죄에 석회를 발라 덮어주는 것입니다. 꾸짖고 책망할 죄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거짓 평화와 안정 속에서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고 심판을 면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지키는 파수꾼인데, 예언자가 그 역할을 못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습니다(참조, 에스겔 3:17-21). 교만한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⑶ 비웃고 조롱당하는 예루살렘(15)

과거 예루살렘은 완전한 영광, 더 할 나위 없는 영광스러운 도시로 불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환희의 도시였습니다. 자신이 제일 잘 한줄 알고 엄청난 교만에 빠져 타인을 무시하고 그래서 미혹에 빠져 자신의 삶과 미래를 망쳐 버립니다. 주변 나라들뿐만 아니라 그 원수들까지 예루살렘을 조롱합니다. 예레미야애가 1:12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본 증인으로 나타나는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조롱하며 박수치는 사람들로 표현됩니다(참조. 욥기 27:23). 머리를 흔드는 행동도 조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행동뿐만 아니라 꼴좋다는 말로 계속해서 조롱을 이어갑니다. 조롱은 원수들에게서도 계속됩니다. 원수들은 입을 벌리고 비웃고 이를 갑니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험담하고 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비웃다’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놀리면서 웃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마른 자는 머지않아 비웃을 당할 것입니다. 원수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삼켰다’고 의기양양해합니다. 그런데 ‘삼키다’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2:2과 5절 및 8절에서 여호와께 돌린 표현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여호와의 심판이지만, 원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의기양양해 있습니다.

⑷ 원수들이 기다렸던 멸망의 날(16)

이날에 원수들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며 즐거워합니다. 여기서 ‘이 날’(16)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적의 멸망을 원하는 날이었지만,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로 원수들이 이긴 날이 되었습니다. 환난 날에 쉴 곳을 찾으며(13), 음식을 찾으며(1:6), 묵시를 찾았지만(2:9),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단번에 찾아냈습니다. 여호와를 찾고 보기를 원했지만 이들은 찾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원수들의 말속에서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원한 것과 반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과는 정반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 그분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원수들의 뿔이 높아지고 즐거워하는 모든 일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바벨론 신에 패한 것이 아닙니다.

⑸ 철저히 멸망시킬 여호와의 계획(17)

예루살렘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폐허가 된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모든 일은 여호와의 계획과 명령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정하신 일과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은 같은 의미로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전제로 합니다. 모든 것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계획,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징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우리를 징벌하실 때 우리가 조롱하던 사회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부끄러운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십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주셨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갑자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과 명령하셨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명령하시고 경고하셨던 대로 예루살렘을 파괴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기쁨을 주고 복의 근원과 온전한 영광이 되어야 할 성읍이 불의한 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그를 삼켰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옛적에 경고하신 대로 이루신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탄원하는 선지자(18-19)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 번 성경을 통해 ‘부르짖으라!’고 권고합니다. 비록 부족해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을지라도, 연약해서 무능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18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18-19)

지금도 교회들이 세상에 조롱을 당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롱을 스스로 자초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수치를 주셔서 교회의 민낯을 철저히 들어내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⑴ 밤낮 쉬지 말고 간구(18)

이제 선지자는 시온에게 이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부르짖어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해 보자고 청합니다. 이 재앙의 근원이 여호와임을 알고 그 근원 되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다고 용서해 주실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는 밤낮으로 쉬지 말고 울부짖으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은 밤낮 쉬지 않고 범죄했습니다. 이제 반대로 밤낮 쉬지 말고 간구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울음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계속적으로 흘리는 눈물을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계속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⑵ 어린 자녀들을 위한 간구(19)

이스라엘에게 멈추지 말고 회개의 기도하며 주의 자비하심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간곡한 요청은 굶어 죽어가는 어린 자녀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더라도, 재앙 이후에 이스라엘을 재건할 희망인 어린 아기들은 살려야 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빈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대한 탄원(20-22)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에는 믿음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 그리고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리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분의 자녀입니다. 못나고 부족해도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20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20-22)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책임저주십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해 놓으십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 자신도 하나님께 응답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20-22절에 나오는 언급은 신명기 28:53-57의 심판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⑴ 허기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20)

선지자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자신들의 자녀들을 돌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⑵ 유일하신 여호와를 위한 기도(21)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 심하게 다루셨다는 호소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적에게 잔인한 손에 이스라엘을 맡겨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감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⑶ 자신의 처지를 위한 기도(22)

여기서는 여러 부류의 죽음이 나오는데, 어머니의 손에 죽는 아기들,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제사장과 선지자들, 길거리에서 칼에 죽은 늙은이, 젊은이, 청년들과 처녀들 등장합니다. 이들이 모두 주의 날,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적들로 인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탄원하며 애곡합니다. 시온의 자녀들을 지독한 심판을 이제 멈추고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 고통을 통해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주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픔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녀와 교회와 나라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멸망한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 말씀으로 살아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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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3)


맹렬하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의 편에서 일하십니다. 항상 당신 편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부패된 신앙과 영적인 흑암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막대기로 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힘찬 발걸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의미를 찾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2장에서도 1장에서처럼 알파벳순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2장은 시온과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재앙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앞장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코 정치적,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전까지는 선지자와 예루살렘이 탄식의 마음을 토로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분노의 감정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와 분노에 온 유다가 통곡합니다.

 

시온에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반대로 잘못하면 원수가 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하고 반대편에 설 때,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진노의 손길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을 적과 원수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편에 서시길 바랍니다. 

1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2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3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1-3)

선지자 예레미야는 1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한 후 그 참상을 탄식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고, 주변 나라들은 바벨론의 침공할 때 도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2장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1장에 이어서 탄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편 탄식시는 탄식하다 마지막에 회복이나 기대에 대한 신뢰 고백으로 끝을 맺지만, 예레미야애가는 거의 대부분 탄식으로만 끝납니다. 계속적으로 예루살렘의 참상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단적으로 그만큼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⑴ 아름다운 성전을 파괴하심(1)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사랑했던 예루살렘을 얼마나 철저하게 징계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슬프다’라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장송곡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을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1)라고 시작하고, ‘여호와께 진노하시는 날에는’(22)으로 마칩니다. 본 장의 핵심 주제가 ‘여호와의 진노’라는 것을 잘 드러냅니다.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복도 허락해 주시지만 반대로 재앙도 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2장에서는 화법(話法)을 3인칭 화자로 등장시켜 예루살렘과 거리를 두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땅 시온’,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란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뻐하사 자신을 친구처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점입니다. 진노하심의 첫 번째 징계는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1)는 것입니다. ‘구름’은 출애굽기에서 광야를 행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막을 짓거나 성전을 지었을 때도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으로 구름이 성전과 성막을 덮었습니다. 이제는 구름이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으로 변했고, 성전에는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하는 구름으로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라고, 심판의 구름이 임하자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짓밟힌 아름다움이 예루살렘 성 전체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을 땅에 던져 완전히 비참한 상황으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의 발판’은 기본적으로 언약궤를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확대되어 언약궤가 있었던 시온 전체를 상징합니다. 성전과 언약궤만 있으면 안전하리라는 이스라엘의 신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마저 버리셨습니다. 심판은 하늘에서 땅으로 던지셨습니다. 언약은 깨어졌고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사건들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배신과 거짓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매우 강력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파멸과 몰락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다루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약을 맺지 않았다면 그토록 잔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망각의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마치 치매에 걸린 부모님이 자녀를 타인으로 대한 것처럼, 그 동안 관계를 잊으시고 무자비한 심판으로 매우 잔인하게 다루셨습니다.

⑵ 견고한 성벽까지도 파괴하심(2)

이전에 이스라엘은 매우 융성하여 근처 나라들보다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스스로 욕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서 두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성읍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것입니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채들도 무너졌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강함을 ‘도성’, ‘성벽’, ‘망대’, ‘성문’, ‘빗장’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요새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시자 견고한 성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발등상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인 성전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까지 원수들에게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셨습니다. 그날에는 나라 전제와 지도자들도 수치를 당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떠난 사람들을 많이 소개합니다. 가인은 범죄한 후 여호와 앞을 떠나서 먼저 한 일은 성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성의 이름을 ‘에녹성’, 즉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4:17-18). 가인은 자신이 왕으로 군림 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은 자기 방어와 보호 본능에서 나온 불신의 벽이었습니다. 그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결코 될 수 없었습니다. 노아 홍수 후 바벨탑을 쌓은 것도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안전 대책이었습니다(창세기 11:1-9).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성을 쌓습니다. 전혀 안전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안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전을 추구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안전은커녕 파멸과 멸망을 맛보고 말았습니다.

⑶ 이스라엘의 능력을 제거하심(3)

다음으로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뿔’은 힘과 권능을 상징하고, 오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랐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힘과 권위 그리고 왕권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손’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을 돕던 손길이지만, 이제는 원수들 앞에서 그 손을 거두십니다.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돕는 손길마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야곱을 불살라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태우며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불 심판으로 야곱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불의에 눈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의 불의로 타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못 본척하면서 사랑하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자 예루살렘은 너무 쉽게 무너졌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신 성전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성전과 법궤를 우상화한 이들을 향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입니다(예레미야 3:16).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을 무디게 하는데 십자가의 사랑을 이용한다면 십자가마저 수단과 우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시온의 원수가 되신 여호와(4-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원수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습니다.

4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5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4-5)

이 단락의 핵심은 ‘원수 같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와 대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분의 역사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혹독하게 심판하십니다.

⑴ 진노의 불을 내리신 하나님(4)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같았던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배신의 결과 ‘원수 같이’와 여기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던 그의 오른손을 거두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향할 손으로 활을 잡으시고 이제 반대로 이스라엘을 향해 유다에게 활을 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키던 여호와의 오른손이 이제는 분노를 불처럼 일으키며 딸인 시온의 장막 위에 쏟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선지자는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10:25)라고, 야곱을 삼킨 이방인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한 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의 불을 열방이 아닌 야곱에게 쏟아놓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인내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⑵ 애통을 더하게 하신 하나님(5)

이전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다른 성읍들은 견고하고 요새화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진노하사 그들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삼키다’란 반복적으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유다 땅을 철저히 파괴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치 삼킨 것처럼 파괴되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환란과 적에 공격에 대하여 위풍당당한 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궁궐과 성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성으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궁궐과 성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부가 깨어지듯 손쉽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딸인 유다는 슬픔과 애통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시온 성전을 허무신 여호와(6-7)

이스라엘에게는 역설과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버리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멸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상까지도 불태워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막을 거두시면 더 이상 안전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6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7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6-7)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몇몇 사람을 데려가서 천국에 채우시려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닮은 자,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도 그리고 하나님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절기와 제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전 파괴와 절기를 폐하신 모습을 묘사합니다.

⑴ 절기를 폐하신 하나님(6)

이스라엘은 이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거룩한 임재의 표시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아름답게 해주시던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초막’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임시 거처(居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파괴하시고, 흔적도 남지 않은 동산처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곳은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파괴시킨 것입니다. 좀 더 확장시켜 이해하면 이스라엘과의 만나는 절기를 흔적도 없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도 폐하신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온에서의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시온에서 더 이상 절기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맹렬한 진노를 내려 왕과 제사장들이 큰 치욕을 당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역할을 온전히 못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영적인 권위와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일반 백성들의 책임보다 무거웠습니다.

⑵ 제사를 거부하신 하나님(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단을 버리시고 자신의 성소를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제단을 버렸다’는 것은 ‘거부하였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를 여호와가 제단을 거부하시고 미워하셨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에 예루살렘 성에서는 각종 이방 신들을 위한 제의가 행해졌으며, 죄 지은 손과 피 흘린 손으로 부정한 제사를 드리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교와 관련된 모든 날과 상징물들이 모두 파괴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 초막, 절기와 안식일, 제단, 성벽, 성문, 왕과 대신들, 예언자들, 장로들 등 모든 종교 제도들을 파괴하시고, 가장 거룩한 지성소마저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또한 궁전의 성벽도 원수의 손에 넘기셨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전쟁의 맥락에서 ‘ ~를 ~의 손에 넘겨준다.’라는 말이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 약속을 듣고 전쟁에 나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는 원수와 손잡고 그들의 손에 성벽을 넘겨주십니다. 원수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승리를 축하하며 잔치를 열고 떠들썩하게 먹고 마십니다. 그 모습에서 마치 예전에 절기의 축제를 즐기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씁쓸하고 가슴 아픈 풍경에 애통해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비참한 결과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과 고난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힘차게 날아오를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하고 염려할 것이 전혀 없으며 모든 일들이 형통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셨다면 절망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더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행위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과 대신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성막이나 절기와 안식일, 제단 그리고 왕이나 제사장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 종교행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해의 제단을 버려졌습니다. 각종 번제물을 드림으로 용서와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지성소에 거하지 않습니다.

 

시온 성벽을 허무신 여호와(8-10)

지금은 교회들이 고난을 받는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고난은 아닐지라도 교회들이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잘못된 행동들을 통해 부끄러움을 자초한 것이며 그로 인해 영적인 능력을 잃은 힘겨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살아가야 합니까?

8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10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8-10)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기록합니다. 이제 아름답고 견고했던 성벽이 허물어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후손들에게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⑴ 성벽을 파괴하신 하나님(8)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헐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허무셨던 여호와께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보호 장치인 예루살렘 성벽들마저 허무십니다. 이 장면은 매우 자세하게 나타나는데,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신 하나님께서 줄을 띠십니다. 여기서 줄은 ‘다림줄’을 의미합니다. 원래 다림줄은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 주로 반듯하게 세우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성벽을 허무실 때 다림줄로 측량하며 매우 계획적이고 정밀하게 파괴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벽을 허무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않고 부지런히 계획한 일을 실행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을 보며 성벽과 성곽은 통곡합니다. 여기서 성벽과 성곽을 다시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벽의 무너짐을 바라보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⑵ 말씀이 사라지도록 만드신 하나님(9)

이스라엘에 점점 비참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성문은 넘어져 땅에 묻히고 문빗장은 부서져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예루살렘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침략 속에서 왕과 제사장은 이방인의 나라로 끌려가고, 그 성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⑶ 장례식처럼 심판하신 하나님(10)

이런 재앙에 대한 반응으로 장로들은 애도하며 침묵하고,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땅에 머리를 대고 엎드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위로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마치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망연자실한 모습입니다. 장로와 처녀라는 대조되는 묘사는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예배와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이며 거룩으로 단장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예배는 짐이 되고 안식일은 지겨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영광과 거룩을 버리고 쾌락과 탐심을 추구하는 세속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싫었습니다. 말씀은 구속과 억압의 상징이었고 자기 죽음은 멍청한 짓이며 섬김과 헌신은 열정을 강조하는 노동 착취이며, 복음을 위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복음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것은 미개인이나 하는 수준 낮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멸시하고서 무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묵시를 외면한 백성들의 성인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원수들과 함께 직접 파괴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들의 유희를 통곡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맹렬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라고 하였습니다. 징계를 통한 주의 부르심에 겸손히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회개하고 돌아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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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2)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1장 12-22절


중환자들을 위한 ‘무균실’을 만들고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는 통제지역입니다. 이 실은 먼지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와 같은 것까지도 통제하는 곳입니다. 무균실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아주 작은 죄까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도 자신과 같이 거룩함을 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하시고 거룩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처럼 본받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용서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자녀들을 벌하십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파하시며 진노하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징벌 당한 비참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매우 가슴 아파는 애가입니다. 예레미야는 앞서 바벨론 침공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참혹하고 황폐하게 된 현실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예루살렘처럼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는지를 물으면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마치 자신이 고통을 겪을 것처럼 설명해갑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뿌린 대로 심판하신 하나님(12-17)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에서 위로해주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심판을 행하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고백합니다. 

12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12-17)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란 사실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으로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해도, 오히려 돌아오라고 전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당함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현실에 대해 절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정당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제 선지자는 육체에 미친 고통을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뼈가 타는 듯한 아픔을 겪습니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발까지도 꼼짝도 할 수 없고, 손도 목과 함께 묶여 숨만 겨우 쉴 뿐입니다. 총체적으로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마치 짐승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⑴ 누구나 알 수 있는 심판(12)

선지자는 서두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擬人化)하여 설명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호소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멸망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이스라엘 멸망의 책임이 비단 한 두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자신보다 더 괴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괴로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은 구약에서는 ‘주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주님이 임하신 날이며, 주님이 임하시면 심판과 구원이 함께 합니다. 창세기에 나온 바벨탑 사건(창세기 1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사건이며, 심판과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심판과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열방과 이방이 심판을 받지만 언약 백성인 자신들은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이런 잘못된 확신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점점 교회들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해가는 것에 대해 목회자나 특정 그룹의 책임이 아니라 성도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고쳐야할 일이 있다면 자신부터 고쳐야 합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⑵ 불로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13)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듯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잡으려고 공격적이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발 앞에 그물을 친다는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잡으려고 공격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도망가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무게로 인해 선지자는 피곤하고 힘들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⑶ 자기 백성을 넘기신 심판(14)

선지자는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죄악 때문에 강력한 바벨론에게 자기 백성을 넘기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나의 죄악의 멍에’란 이스라엘의 죄악이 자신을 얽매는 멍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만든 죄악의 멍에를 이스라엘의 목에 씌우신 것입니다. 그 무게로 인해 이스라엘은 힘들어 흔들렸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서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 넘겨졌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심판이 자신이 쌓아 올린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열방이나 이방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뜻하지 않게 당한 멸망이 크나큰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호소한 것입니다.

⑷ 청년 용사도 필요 없는 심판(15)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모든 용사를 물리치셨고 젊은 남자들을 성회에 모아 부수셨습니다. 성회(聖會)는 원래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의 보호를 구하는 모임인데, 오히려 이 모임 때 이스라엘을 부수는 역설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온 유다 성읍에 큰 살육으로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이 흘러나온 것처럼 살육의 현장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자녀인 유다를 포도즙 틀에 넣고 짓밟은 것처럼 심판하였습니다. 선지자가 느끼는 심판의 무서움과 잔혹함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에는 용사와 청년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용사와 청년과 처녀들이 모두 사라지는 절망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과 처녀는 미래를 암시함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절망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은 미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이 힘들고 고통과 아픔이 있더라도 보장된 미래가 있다면, 결국은 좋아질 것입니다. 결국은 위기가 기회라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 당하는 고통이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작은 소망이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예레미야 18:16)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대로 유다에게 큰 고통을 내리셨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불을 내리시고, 그물을 치시고, 멍에를 얽어매셨습니다.

⑸ 하나님 심판에 대한 반응(16)

이제는 여호와의 징벌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로 인해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다며 자신의 비통함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에 슬프고 비참한 것은 위로할 자, 생명을 소생시켜줄 자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했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당한 모습을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심판을 면하지 못한 자기 백성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희망이 없을 만큼 혹독한 재앙임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할 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회복될 수 있는 상태에서 받는 징벌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회복에 대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재앙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또한 선지자는 원수들의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나의 자녀, 즉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황폐하게 되고 진멸되었다고 고백합니다.

⑹ 도와줄 사람이 없는 심판(17)

선지자는 시온(예루살렘)을 주어로 등장시켜서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친구 같이 생각했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두 손을 펴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행동으로, 예레미야 4:31에서 해산하는 여인이 극심한 고통 중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손을 펴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까지도 헛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로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위로자가 되시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적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다른 나라에 명령을 내리시는 모습은 그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예언자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들을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타락을 책임져야할 사람 따로, 비판해야할 사람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자신이 고칠 것이 있으면 냉소적인 태도를 함께 울며 주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선지자는 주변 나라들에게 짓밟힌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불결한 자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불결’인 ‘니다’(הדּנ)는 기본적으로는 ‘여성의 생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의미인 ‘오물’,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주변 나라들로부터 공주가 아니라, 이제는 오물 취급을 받아서 혐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로부터 버려진 여호와의 도성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이스라엘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와 교회의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언약에 신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 편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데도 그것을 지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악을 좋아한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없이 사랑하지만 진리 안에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지만, 주일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매일 묵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남편이 있음에도 정부(情夫)와 불륜에 빠진 부정한 일과 같습니다.

 

여호와께 죄를 인정함(18-19)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인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물을 뒤집어 쓴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그 무엇으로 과시하고 꾸미고 노력해도 전혀 아름다워 보지지가 않습니다.

18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18-19)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혹독하지만, 이것은 매우 정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오물 취급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신처럼 취급한 죄를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심판하실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⑴ 심판에도 의로우신 하나님(18)

선지자는 이와 같이 맹렬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어쩐지 ‘매를 든 하나님’과 ‘의로운 하나님’은 조화롭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의롭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다가 당하는 고난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심한 환란을 당했지만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환란의 원인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과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에게는 심각한 징계를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자신들의 고난은 언약을 어긴 벌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을 외적의 강함이나 악함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죄에서 찾는 선지자의 모습은 매우 신앙적입니다. 성경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 즉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이런 죄의 고백이 필요하며 예루살렘처럼 망하기 전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⑵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19)

사랑하던 자의 배반에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사랑하던 자는 여호와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모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이방나라들, 이방신들, 재물 등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잘 살 줄 알았는데, 정작 환란 날에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위로자나 구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제사장과 장로들이 등장한데,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평상시에 권력을 행하던 자들이 이제는 처참하게 양식을 찾아 헤매다가 성 안에서 죽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죄였습니다. 죄의 결과는 알면서도 쉽게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만큼 달콤해 보지만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결과를 돌이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일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긍휼을 구하는 선지자(20-22)

범죄한 사람들에게 살 길은 오직 하나, 겸손히 회개하는 일입니다. 아픈 현실을 보며 아파할 필요가 있고, 슬픈 현실을 슬퍼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에는 진중한 성찰과 진심을 담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눈물은 단지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넘어서, 회개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20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20-22)

사람들은 범죄 후에 비참한 결과를 맺을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죄악을 단순하게 후회하며 낙심한 것은 아닙니다. 원인을 찾아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원수들이 저지른 악행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⑴ 자기 죄로 인한 고백(20)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시 11절처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라고 자신들의 형편을 봐달라는 탄원합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처지를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한 자신의 죄를 탄식합니다. 먼저 자신의 환란이 심각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안다고 고백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하며 정직하게 탄식하되,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우리의 죄를 더욱 절실히 탄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7:10).

⑵ 원수를 심판해 달라는 청원(21)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로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변 나라들에게 심판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도구로 그들을 잠시 사용하셨던 것이지만, 이제 자신에게 행한 일에 대해 같이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호소합니다. ‘주께서 선포하신 날’(21b)은 12절에서 언급된 ‘진노하신 날’과 반대되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예언서에는 두 가지 ‘여호와의 날’이 언급되는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과 ‘이방인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까지 여호와의 날이 자신들을 구원하고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날로만 생각하며 안이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원수의 행위를 심판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범죄하여 심판을 받은 것처럼, 원수들의 악행도 동일하게 판단하고 벌하시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시온을 약탈하고 학살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이 땅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손길이 미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⑶ 원수 죄를 들어 내달라는 청원(22)

이스라엘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이 이미 도래했고, 다음 순서로 이방인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의’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반역하여 벌을 받게 되었지만, 회초리로 쓰였던 원수들도 이스라엘보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악함대로 그들을 심판해달라며 공의의 하나님께 탄원하며 시를 마칩니다. 그들의 죄악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들어나게 하시고, 그 죄과에 대한 심판을 공의롭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붙들며 고난의 상황을 이겨 나갑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하나님께 간구한 것처럼, 우리들도 자신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범죄들을 통렬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계속 죄악으로 가득한 한국교회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레미야처럼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안고 기도하듯이 함께 기도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비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에게도 닥친 고난이 단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우연한 재앙은 통제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진심으로 돌이키면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겸손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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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1)


멸망으로 비탄한 예루살렘

예레미야 애가 1장 1-11절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성범죄를 고발하고 그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문학가, 연극영화계 심지어는 종교계까지도 추잡한 민낯을 들어냅니다. 그들은 잘못된 행동으로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파괴시켰습니다. 과연 이 가해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모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들어난다면, 대부분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서 있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한 때 모든 성 가운데서 여왕처럼 칭송을 받았던 예루살렘이 순식간에 과부와 노예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특히 성전에는 매일 찬송 소리가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 성전은 바벨론 침략으로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광경을 보며 탄식하면서 작성한 시가 본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이유를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멸망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1-4)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황폐하게 된 것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고 시온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적들이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돌봐주시길 간구합니다.

1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1-4)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슬프다’라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하는데, 이 단어는 장송곡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형식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장송곡(葬送曲)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을 때는 철옹성 같았던 성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황폐된 성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지 선지자뿐만 아니라 자녀로서 이스라엘을 본 하나님의 슬픈 마음일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은 인간의 교만과 자기만족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성읍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⑴ 과거와 대조되는 예루살렘(1)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활기차던 예루살렘 성은 적막한 외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보고 선지자의 첫마디는 ‘슬프다’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변화는 먼저 그 많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전쟁으로 죽거나 포로 끌려가서 쓸쓸하고 적막한 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하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이 이제는 남편 잃은 과부처럼 부모 없는 고아처럼 연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주처럼 존경받고 영화를 누리던 성이 이방나라에 조공을 받쳐야 하는 노예와 같이 비천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선지자는 번성하고 화려했던 과거 모습을 생각할 때 현재 적막하고 초라한 모습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⑵ 철저하게 배신당한 예루살렘(2)

이처럼 번성하고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된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선지자는 낮은 물론이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뺨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친구이던 주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배반해서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과 동맹 관계를 맺고 서로 돕기로 약속하면서 왕래하던 주변 나라들, 즉 애굽을 비롯해서 에돔이나 모압, 그리고 암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려울 때는 이스라엘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하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협력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동맹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배신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는 도움은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를 살피면서 선지자는 밤에 안식을 누려야할 시간까지도 밤새도록 눈물로 지새웁니다.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건강과 부를 잃은 것도 아니라 주위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위로는 힘든 일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나눌 위로자가 있다는 것은 재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40:1)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⑶ 포로로 끌려간 예루살렘(3)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예루살렘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 삶은 ‘유다가 쉴 곳을 얻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고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기업을 잃고 포로가 되어 이방 민족에게 온갖 핍박을 당하며 살아간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공주와 같던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고 과부와 고아 같은 상황을 볼 때, 충격적이고 그 고통으로 육체는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딘가에 살고 있었지만 살만한 곳이나 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이며 이주민이며 떠돌이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도 몇몇 사람들 외에 고달픈 생활은 계속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추적자들이 그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앞에서 편안하게 숨어 지낸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에 황무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울며 탄식하면서 슬픈 시를 썼습니다. 다른 탄식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찬양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시편보다 덜 두드러지게 나오지만 절망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싸우시는 ‘전사(戰士)’로 나타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과 전쟁하시기 위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격파하시고 언약궤를 가져가버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나가서 자기 백성에서 고난을 가져다준 바벨론 같은 대리인들에게도 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붙잡는 너무 값싼 희망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무슨 악한 일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 눈감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대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한 때 신실했었다고 모든 것이 용서되고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항상 오늘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이룬 업적으로 하나님께 사죄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인 겸비한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본 서가 보여줍니다.

⑷ 절기가 없어 황폐한 예루살렘(4)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드린 많은 제사로 풍성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예전 명성과는 전혀 다르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의 명성은 살아지고 이제 황폐하고 쓸쓸한 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로 인해 대부분 1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 왔습니다. 그 시기에는 예루살렘 거리마다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순례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도로는 하나님께 절기의 제사하러가며 기뻐하는 행렬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조차도 사라진 적막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으니 제사장도 할 일이 없어지고, 제사 예식을 수종을 들며 춤추던 처녀들도 일들이 없어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에서 점점 기쁨은 살아지고 근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이사야서 1:11-17). 혹시 죄악을 즐기면서 현재 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마지막이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모른척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만 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만 않으십니다. 혹시 하나님께 감추고 있는 죄가 있다면 지금 돌이키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 받아서 황폐해진 예루살렘(5-7)

하나님께 사랑 받고 풍성했던 예루살렘이 이렇게 비참함과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통해 얻는 잠시 달콤함보다 비참한 결과를 생각하고 죄를 멀리하시길 바랍니다. 범죄는 생각한 것보다 비참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5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모든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7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5-7)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 침공으로 이스라엘은 그의 자녀들은 바벨론으로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시니 시온을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딸이었던 이스라엘은 모든 영광이 떠났고, 지도자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냥꾼 앞에 사슴처럼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했습니다. 버려진 예루살렘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⑴ 예루살렘의 심판 받은 이유(5)

선지자는 비극적인 상황을 탄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모든 비국의 원인에 눈을 돌립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황폐하게 된 이유를, ‘그의 죄가 많으므로’(5)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맺었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했습니다.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팔아서 우상을 사고, 부자가 되는 걸림돌이 되는 모든 율법들을 제거하고, 탐욕과 탐심에 사로잡혀 정의와 공의는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많은 죄를 저질러서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⑵ 예루살렘의 심판 받은 결과(6-7)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과 산성 그리고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언약의 가치가 점점 퇴색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과 가정 그리고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입니다.

①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6)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순식간에 먹구름이 밀려와서 사면이 깜깜하게 되었습니다. ‘처녀 시온’은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서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정결하고 아름답던 신부와 같던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이 있는 것으로 영광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더렵혀졌고 하나님께서는 부정해진 그곳에 더 이상 머무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떠난 예루살렘은 그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고 삭막한 곳이 되었습니다.

② 비웃을 당하는 예루살렘(7)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불결해지고 낮아집니다. 원수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쫒기는 신세와 비웃음 그리고 조롱을 받습니다. 환란을 당한 이스라엘은 언제 웃음소리가 퍼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이 깊어집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큰 영활르 누리며 즐거워하던 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지도자라면 위기에는 더욱 이기적이 될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다 사라집니다. 존경은커녕 예루살렘처럼 사방에서 비웃음과 조롱이 밀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범죄했다면 대가를 지불할 생각해야 합니다. 상황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것을 사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용서하면 자신의 마음은 편해질 것이지만, 피해자들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진실한 회개와는 먼 것입니다.

 

기근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8-11)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장차 공동체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머리된 부모님이 가정을 버리고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 때, 그 가정은 결코 밝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일수록 회개와 자기 비움이 필요합니다. 큰 영향을 주는 만큼 큰 책임이 따릅니다.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0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8-11)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존재한 장소였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거룩하고 경건한 곳이며, 은혜와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거룩해야할 곳이 범죄 집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⑴ 영광이 사라진 예루살렘(8)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탄식합니다. 그는 ‘그의 죄가 많으므로’(5)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8)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가식과 불법 그리고 불의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큼 죄악이 쌓여졌습니다. 그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기보다 못한 주변 나라들이 스스로 큰 체하며 이스라엘을 업신여기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습니까! 환난 당한 예루살렘은 ‘옛날의 즐거움’, 즉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영화로운 그 때와 비교하면 매우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영광을 누리던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 그 결과를 생각지 못한 예루살렘은 어느 날 갑자기 큰 파멸을 당하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⑵ 범죄 후 추악한 예루살렘(9)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죄악된 상태는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9)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여인들이 생리 때문에 생리혈이 옷에 묻어 있거나 성폭행을 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의 풍습을 좇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음행의 죄를 범함으로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거하신 거룩하신 곳이 아닙니다. 영광은 사라지고 부정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예루살렘을 떠나신 것입니다. 죄에 물들게 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상태가 얼마나 부정하고 역겨운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한 죄를 온갖 핑계로 합리화하며 심지어는 의로운 행동으로 미화까지 하는 것입니다.

⑶ 약탈을 당한 예루살렘(10)

계속해서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 촐한 비극적인 결과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린 예루살렘과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벨론 군인들이 군화발로 성전을 훼손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던 성소가 이방인들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룩한 성소도 텅 비고, 쌓아 놓은 보물도 생명 부지를 위해 탕진됩니다. 선지자는 함부로 적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서 성소를 침범하고 성물을 빼앗아갔다고 고발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인 하나님의 성전이 짓밟히는 것은 경건한 백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⑷ 기근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11)

바벨론은 쉽게 항복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항복시키기 위해 장시간동안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심한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 자녀들을 양식과 바꿀 정도로 기근이 극심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황폐해진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는 무엇을 느껴졌습니까?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오직 한 가지만 간구합니다. 환난 중에도 그들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합니다. 자기 죄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 결과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짓밟히고 영적 곤경과 양식이 떨어지는 육적인 빈곤을 당합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양식을 구해야 하는 상황을 돌아봐달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용서해 달라고 구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멸망당하기 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현재 한국 교회 상황이라면 너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 헌금이나 성도들이 줄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처럼 성도들이 여호와께 돌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의 참상을 목도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위에 긍휼을 베푸시고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순간부터 점점 죄악 가운데 빠져 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온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 앞에 범죄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판받은 상태는 처음보다 더 비참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경외해야 합니다.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끊지 못하는 죄 속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빨리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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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3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최고의 상담사, 성령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행의 경험을 통해 트라우마가 형성되고, 그 트라우마에 휩싸이게 되는 증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세 가지의 경향 아래 지배당하는데 개인화 침투성 영속성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개인화) 자존감이 낮아지고, 그 경험이 주는 불안감이 일상 속에서 수시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괴롭히며(침투성), 언젠가는 다시 자신을 덮치게 될 것이라는 확신(영속성)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안감에 휩싸일 때 심리학자들은 ‘내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어서 좋은 것들이 들어갈 틈이 없으니 좀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맡기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에피립토인데, ‘집어던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의 쓴 뿌리를 고스란히 주님께 맡기고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침 성령강림절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의 번역인데, 많은 영어 성경은 상담사로 번역합니다. 최고의 상담사인 성령을 의지하면 새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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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3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비전은 거룩한 슬픔을 동반한다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많은 사람이 인생의 비전을 꿈꿀 때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다른 사람의 인정이 있는 것 등으로 비전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내가 좋아하는 어떤 감정으로부터 시작하기보다 거룩한 슬픔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기도합니다.(느 1:3~4)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통치와 현실 사이의 간격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 9:36)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로 애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슬픔이 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슬픔이 바로 사명이며 인생의 비전입니다.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themiss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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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5-02)

 


모든 세상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

로마서 5장 12-21절


신앙을 점검하는 두 가지 기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면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잘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른 성도들의 삶은 생활 가운데 자신의 ‘자랑’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환경에 대한 ‘불평’이 아닌 삶에 대한 ‘기쁨’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으심과 부활이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시조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의 권세를 시작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권세를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한 사람의 행위가 선악 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첫 아담을 통한 사망(12-14)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면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는 주장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항변합니다. 그들은 ‘왜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라는 반문합니다. 그 질문을 다음에서 설명합니다.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2-14)

하나님의 화해 사역의 대상인 인간들을 연약하고(6), 경건하지 못하고(6), 죄인이며(8), 하나님의 원수로 묘사한 바울은 이제 죄와 사망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⑴ 한 사람으로 시작된 죄(12)

사도 바울은 첫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표현하면서 설명합니다. 먼저 시조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제시합니다(12). 이 말을 들으면서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 첫 아담이 가져다준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자손인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력 아래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조상이 노예이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들은 모두 노예인 것과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합니다. 한국 대표 팀들이 경기할 때마다 열광적으로 응원합니다. 한국 대표 팀이 승리하면, 마치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패하면 자신이 패한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도 아닙니다. 축구장의 승패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우리들이 한국 대표팀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이러한 영적인 정체성 때문입니다. 첫 아담을 통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사망이 왕노릇 하고, 사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사망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에는 장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나 세상의 족보들은 모두 죽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범죄 함으로 그 죄악의 뿌리가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범죄 하는 것은 그 죄의 뿌리가 낳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땅을 살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심판하심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대가)을 사망으로 지불해야할 원칙입니다.

⑵ 죄를 위해 투입된 율법(13-14)

사망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설명합니다(13-14). 죄가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시절에도 아담 이후 모두가 죽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죽게 된 이유가 확연하게 들어났습니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 먼저는 빛을 비추면 들어납니다. 그 먼저는 빛을 비추기 전에도 있었지만, 단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율법을 통해 알게 되어 집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율법 전에 살았다할지라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 이후로 속한 모든 인류는 사망의 그늘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아담과 같은 또 다른 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둘째 아담을 통한 은혜(15-19)

첫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는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력을 끼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끼친 영향력에 대해 비교하고 있습니다.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5-19)

모든 인류가 아담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사망이 왕노릇 함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담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사망의 효력을 발휘하였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효력을 발휘합니다(15-17).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아 넘칩니다. 결국 아담은 죽음을 가져다주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 받았는데, 또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첫 아담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지만 효력의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아담은 사망을 퍼뜨렸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을 퍼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미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원리로 하나님과 함께하게 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말씀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수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한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입니다.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과 주변 국가들이 원자로에서 새어나온 방사능(放射能)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각 정부에서는 방사능 비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맞지 말고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만약 그런 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사능이 포함된 비를 맞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방사능의 영향력 아래서 피폭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음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인류를 살리셔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아담의 영향력 아래 존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왕노릇하고 사망의 권세 앞에 붙잡힌 인생으로 사망의 영향력 아래 존재하는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 대표성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 아래서 율법의 역할(20-21)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라면 율법의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은가?’라는 숙제가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0-21)

우리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에 대해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죄가 많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많아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범죄하면서 양심이 마비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13).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면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범죄를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고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점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성이 들어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적인 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러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모든 인류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감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 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에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잘 받아들여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당신을 지배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발견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며,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아담 이후 죄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통해 속죄해 주셨고 그 은혜 안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굳게 잡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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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5-01)


칭의에 동반된 축복

로마서 5장 1-11절


미국의 헨리 위드 비쳐 목사는 “고난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옵니다. 이는 사람을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하며, 불쌍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씨를 천 배로 늘리기 위해 쟁기질로 땅을 비옥하게 하듯, 고난은 우리에게 기쁨과 영적인 결실을 더하여 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은 경험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하기 쉽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유익을 찾기보다는 또 다시 좌절과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고통이 아니라 고난을 통한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과의 화해가 결국 그들을 최종적인 구원의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평화와 소망(1-4)

성도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죄(罪)’라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통해 죄의 문제를 잘 해결이 될 수 있는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1-4)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들에 대한 결론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할 것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경험하는 결과들을 제시합니다. 그 의로움에 근거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⑴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얻은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곳에서 ‘화평’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4). 이는 인간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화평을 받자!’가 아니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권세와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평안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란 거짓입니다.

⑵ 즐거움을 누리는 삶(2)

바울은 4장까지에서 다른 또 하나의 주요 주제를 언급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상기시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 아니라 잠시 동안 주어질 뿐이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을수록 만족되지 않고,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기쁨은 충만한 기쁨입니다. 우리 내면에 주신 기쁨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를 들어간 것처럼, 은혜의 장막 안으로 들어간 능력과 권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⑶ 소망을 누리는 삶(3-4)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환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환란은 인내를, 그리고 그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를 훈련시킨 후에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평온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이 순탄해야 되지 않는가? 만사형통(萬事亨通)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의 만사형통(萬事亨通)만을 말씀하진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은 만사형통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더 많이 당합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이나 죄악에 정당히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받습니다. 왜,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방법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고난받을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은 왕의 품위(品位)가 있어야 합니다. 왕이 내시(內侍)같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 사람들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죄악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마귀를 자녀와 같은 행동을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더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0:22,23). 우리 성도들이 고난을 받아도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소망을 이루는 줄 알이로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소망(所望)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하늘 나라의 소망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망의 근거로서의 하나님 사랑(5-8)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환난을 받는다면,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나가서 환난 중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소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에 대한 것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적인 천국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핍박합니다.

⑴ 성령을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5)

로마서 1:16절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울은 5절에서 그 복음의 약속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즐거워 할 수 있는 비결을 보여 주십니다.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비결을 바울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5)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5에 이르기 전까지 ‘성령’이라는 단어를 3회만 사용할 정도로 아껴왔습니다. 5-7장에서 이 세대의 죄와 사망의 다스림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음 세대의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역설하게 될 바울은, 8장에 이르러서야 그 생명의 결정적인 운반자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스데반 집사님께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면서 돌에 맞아서 기쁘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7:55-56).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도 ‘성령이 충만하여’(7:55)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의 말씀에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원인을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순간순간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배급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성령에 의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른땅에 물을 부어서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해 주시듯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우리의 심령에 풍성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날마다 담대하게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세상의 죄악에 패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말씀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국(敵國)에게 패배해서 승리한 적군의 장군 앞에서 패배했다고 머리를 숙이는 일을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해 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⑵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6-8)

하나님의 사랑이 말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5-8절에서 바울은 ‘죽다’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한 대상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그 사랑이 주는 충격을 더 해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동료 인간들 중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음을 바울은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라서 1:18-32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사망(1:32)의 다스림에서 헤어 나올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충격적입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는 더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원수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큽니다.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순종을 감당하셨습니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 되었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의 동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불뱀의 심판을 하셨을 때,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게 하셔서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아나셨듯이 말입니다(민수기 21:9).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화해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9-11)

마귀는 거짓 것들인, 육신 쾌락, 세상적인 물질, 욕심을 채우는 만족 등과 같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잠시 순간적인 만족은 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만족들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대가의 고통이 따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능력이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9-11)

이 구절들은 우리의 신분과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하게 된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것입니다.

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얻은 의로움과 구원(9)

마지막 소단락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미래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희생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즉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9a)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셨다면, 이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간 우리를 그 그리스도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실 것은 더더욱 자명한 일입니다(9b).

⑵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을 통한 화해와 구원(10)

10절은 이를 재차 확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하셨습니다.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감수하신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부활 생명에 동참케 하실 것은 더욱 자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화해하다’라는 단어는 외교적인 용어입니다. 한때 적대국이었던 나라가 동맹국이 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당시에는 ‘화목’이 가능하려면, 항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묘사하는 화목은 상식을 뒤집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이 단어는 4회 더 등장하는데, 고린도후서 5:18-20에 3회나 사용됩니다. ‘화해’라는 말은 5:1에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평화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과 고린도후서 5:18-20 모두에 나타난 화해의 가르침에서 눈여겨볼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 화해의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린도후서 5: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화해 사역을 위해 순종하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둘째로, 두 본문 모두 화해의 개념을 하나님/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주제와 성도가 얻는 의로움의 혜택과 연관시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14)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21) 9-10절 모두에서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미래적 구원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신 과거의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한 현재적 의로움과 화해의 관계와 연결시킵니다.

⑶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자랑함(11)

바울이 재차 확인하듯이, 하나님과의 화해와 미래적 구원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 있으므로 그리스도 이 외에 자랑할 자가 없습니다. 잠시, 성도들은 뜻하지 않는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란 사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들에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성도들은 자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도록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이미 세상을 이기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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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더운 갈이가 필요합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농부는 꿈속에서도 물이 마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농부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가문 논에 물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하고요. 모를 심을 때가 됐는데도 비가 오지 않으면 농부의 속은 시뻘겋게 타들어 갑니다. 거북이 등짝보다 더 심하게 갈라지고요. 자식 죽는 건 봐도 곡식 죽는 건 못 보는 게 농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더운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긴 가뭄으로 모를 심을 때가 돼도 논에 물이 없으면, 농부는 두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른 논을 갈았습니다. 먼지가 풀풀 나도록 마른 논을 갈고 또 갈면 마침내 논은 먼지처럼 고운 가루가 됩니다. 그러다 천둥소리가 나며 비가 쏟아져 내리면, 온 식구가 달려가 뒤늦은 모를 심었습니다. 천둥소리가 나야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천둥지기라 했습니다. 먼지처럼 곱게 갈린 논에 비가 오면 논은 이내 곤죽이 되는데, 그러면 뒤늦게 논을 갈고 삶고 할 것도 없이 모를 꽂아나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뙤약볕 아래 마른 논을 갈고 또 갈았던 것을 더운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믿음의 눈으로 보자면 긴 가뭄을 겪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외면당하는 현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른 논을 갈고 또 가는 더운갈이입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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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2-01)


의로운 삶을 사는 지혜

잠언 12장 1-14절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살다보면, 이따금 ‘의롭게 살아서 뭐하나?’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편법과 이기심으로 사는 인생이 성공하는 듯 보이고, 원칙을 지키며 의의 길을 좇는 이들은 뒤처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의로운 사람의 길은 생명이요, 미련한 사람의 길은 죽음이라고 경고합니다. 더불어, 의로운 삶의 유익을 보여주며 격려합니다.

 

의인과 악인 또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들의 생각, 말, 행동, 사람들에게서 듣는 평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보응 등 자신과 자신, 자신과 타인, 자신과 하나님 간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현재 내가 선택하는 마음의 태도와 말과 행동이 내가 맺을 열매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특징(1-3)

자신이 가장 지혜롭고 완벽하다고 생각하여 훈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사실상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깨닫고, 교훈과 책망을 수용할 때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뿌리를 하나님께 내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까?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1-3)

잠언 12장은 의인과 악인의 본질을 언급하며 진실하고 화평한 말과 근면 정신을 함양합니다. 오늘 본문인 1-14절은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하는 금언 중 말과 재물의 주제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며, 나머지 15-28절은 정직과 화평의 말과 근면이 강조되었습니다. 

먼저, 1-3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본질(1, 3)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보응(2)에 대해 말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본질적인 구분은 첫째, 훈계를 받아들이는 여부에서 나타납니다. 1절은 훈계를 좋아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를 각각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미련한 짐승으로 대조함으로써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였습니다. 12:1의 현명한 사람과 미련한 짐승의 구별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지식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여기서 지식은 ‘지혜’의 다른 표현으로써 훈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교훈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과 판단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3:5-7) 그런 교만한 마음에는 훈계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둘째, 의인과 악인은 그들이 삶의 기초를 어디에 뿌리내렸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3절은 의인과 악인을 나무로 비유하여 각각의 뿌리가 선과 악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악인에게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미래가, 의인에게는 견고하고 안정된 미래가 기대됩니다. 이와 같은 비교는 시편 1편의 물가에 심긴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 또는 예레미야 17:5-8의 사막의 마른 나무와 물가에 뿌리내린 청청한 나무의 비교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으로 굳게 서는 의인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은 의인과 악인의 본질과 결과(1, 3)는 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2)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훈계를 좋아하고 선으로 견고히 서 있는 의인에게 은총을 주시나, 훈계를 싫어하고 악을 좋아하여 악을 꾀하는 자들은 정죄하실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언행과 결과(4-8)

말과 생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냅니다. 의인은 바른 생각과 정직한 행동으로 그가 의인임을 드러내고, 악인은 다른 사람을 해하며 속이는 일을 도모하여 그가 악인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인이 날고뛰어도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의인입니다. 우리 생각과 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4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5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6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7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8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4-8)

4-8절의 금언들은 부인이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력(4),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생각, 말, 운명(5-8)에 대한 내용을 기술합니다. 먼저 4절은 ‘어진 여인’을 자기 남편의 면류관과 같은 존재로, ‘수치스러운 여자’를 자기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존재로 소개합니다. 어진 여인은 문자적으로는 힘의 여인이며 성경 다른 곳에서 ‘현숙한 여인’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잠 31:10-31; 룻 3:11). 이때 ‘힘’이란 육체적 힘만이 아니라 성품, 경제력, 재능 등에서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잠언의 마지막 단락인 31:10-31의 ‘힘의 여인’에 대한 이상적인 묘사가 이 점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 단락은 ‘힘의 여인을 누가 찾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와 같은 여인을 찾는 지혜로운 남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이런 여인의 값어치는 진주보다 귀하며(31:10) 이와 같은 여인은 본인도 영광을 얻고(11:16) 그녀의 남편에게도 면류관(12:4)이 되어 남편 또한 영광을 얻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여인이 힘의 여인으로 불리며 가정과 사회에서 칭찬을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이며 이를 삶에 실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31:30). 한편, 수치스러운 여자는 어떠한가? 본인에게 치욕거리를 만드는 이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자입니다. 뼈가 썩는 것은 살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훨씬 그 상태가 심각하고 위중합니다.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썩어들어가는 고통과 냄새와 괴로움은 당사자의 몸과 마음을 다 망가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힘의 여인이나 수치스러운 여인을 잠언 1~9장에서 각각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1:20-33; 2:10-22; 4:5-9; 8:1-36; 9:1-6)와 우매(2:16-19; 5:1-23; 6:20-35; 7:1-27; 9:13-18)와도 연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현명한 여자를 찾고 음녀를 피하라고 권면한 것은 누구든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하는 지혜를 얻고 미련함을 벗어나라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5-8절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생각(5), 말(6), 운명(7-8)에 대한 금언들로 구성되어 의미상 연결됩니다. 5-6절은 의인과 악인의 말이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의인은 정의를 생각하고 정직한 말을 하므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궁지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속임수를 계획하고 남을 무고히 해치려고 음모를 꾸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악인의 이런 모습은 1:8-19의 무죄한 사람을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며 사람의 피를 흘리려는 강도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7-8절은 이 같은 악인과 의인의 언어와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7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반응(행동)이며, 8절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반응(말)입니다. 의인은 정직을 선택하는 지혜자이므로 사람들에게서 칭찬의 말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입어 그와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견고해집니다. 이와 반대로, 악인은 마음이 비뚤어져 거짓과 남을 해하려는 언행을 일삼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멸시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와 그의 공동체가 파괴되어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이 맺는 열매(9-14)

불법으로 얻은 소득을 방탕하게 사용하고, 수고로이 일하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잠시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지만, 그 열매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의롭게 살아갈 때 참 열매를 얻을 수 있고, 깊은 뿌리로 말미암은 열매라야 튼실합니다. 속성으로 키워 모양만 낸 열매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9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10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11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12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13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14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9-14)

9-14절의 금언들은 10절을 제외하고 의인과 악인의 재물(9, 11, 12)과 언어(13, 14) 그리고 이로 인한 열매를 대조합니다. 9절은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보다 조개 속의 진주에 가치를 두라는 금언입니다. 가진 것이나 능력이 부족한데도 외적으로 뻐기며 포장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미련한 자이며 후회와 고통만 증대됩니다. 그러나 설령 남들이 몰라주고 업신여긴다 해도 실제로는 종을 부릴 정도로 재물과 지혜와 능력을 갖춘 자는 삶에 기쁨과 만족이 넘칩니다. 10-14절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10절은 의인과 악인의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다룹니다. 의인은 마음에 긍휼과 자비가 있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까지도 보살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마음에는 긍휼이 없으며, 그에게 있어 긍휼이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꾸민 잔인하고 악한 궤계일 뿐입니다. 11-12절은 다시 재물과 그에 따른 결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절은 9절과도 내용상 연결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땅을 성실히 경작한 자는 그에 따라 풍성한 소득을 얻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방탕하고 헛된 것을 뒤쫓는 자는 9절의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음식보다 분별력이 핍절한 자입니다. 11절에 이어 12절에서도 의인과 악인의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은 다른 악한 자들의 탈취물까지도 탐하지만, 의인의 뿌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때 의인의 뿌리는 의인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신뢰와 실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4절은 입술의 열매에 대한 금언입니다. 악인은 본인의 말로 인해 스스로 덫에 빠져들지만,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납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가 뿌린 말과 행동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불의한 방식으로 손쉽게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쉽게 열매 맺지 못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은 많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의로운 삶이 주는 유익과 가치를 확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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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먼 스승과 가까운 스승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이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의 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위인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순신 장군처럼 되기 어렵고 워런 버핏처럼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리오넬 메시 같은 축구 선수가 되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죠.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려고 산을 오른 아브라함 같기가 쉽지 않고 사자 입을 무서워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다니엘처럼 되기 쉽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돌멩이질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스데반 같은 신앙인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조금 더 나은 인격의 사람이나 더 나은 기능을 가진 사람, 좀 더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처럼 되는 건 접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스승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위대한 분들은 먼 스승으로 모시고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닮아가고자 한다면 그들을 스승으로 모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서 달콤한 성장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출처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04740&code=23111512&sid1=f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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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4-02)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

로마서 4장 13-25절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빛과 소금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사들이 배울 수 있는 모범입니다.

 

이 단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을 할례와 분리시킨 바울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을 율법과도 분리시킵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죽은 것 같은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 많은 후손이 일어난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의롭다 함 받은 것과 병행시키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아브라함 이야기를 설명해 나갑니다.

 

믿음으로 되는 후손(13-16)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요구조건 없이 율법이 아니라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주신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3-16)

바울은 앞에서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할례나 혈통 그리고 전통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⑴ 약속을 받을 상속자들(13-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만약 율법에 의해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언약의 상속자가 죄는 방법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특별히 계시한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특별한 위치에 서게 하는 근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할례 대신 율법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라고 단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간의 순서로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할례가 아닌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만약 율법에 속한 자들이 그 약속을 상속한다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도 파기된다고 단언합니다(14). 이전 단락 10-11절에서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이전에 의롭다 함 받았다는 시간적 순서를 중요시 합니다. 다메섹 체험 이전의 바울과 1세기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긴 약속들과 그 언약의 징표인 할례는 430년 뒤에 모세 언약과 율법을 통해 확대되고 발전되고 완성 됩니다. 구약성경만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옛 언약의 체계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할례, 율법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서로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미리 율법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대한 근거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창세기 26:5)는 근거 구절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할례와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을 소유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바울이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구약의 문맥 속에서가 아니라 다른 해석학적 준거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아브라함 이야기와 이스라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 약속과 율법을 분리(갈라디아서 3:17-18)시키기 직전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임을 결정적으로 선언합니다. 바울의 논리는 과연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일 때만 참입니다.

⑵ 진노에 이르게 하는 율법(15-16)

바울은 그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잠깐 언급합니다. 다메섹 체험 이전의 바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율법은 오히려 범법함을 더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후 그가 깨닫게 된 율법의 숨겨진 구속사적 기능을 바울은 이후의 편지에서 계속 풀어 나갑니다.

⑶ 믿는 자들에게 주는 은혜의 상속(16)

바울은 ‘그러므로 그 약속은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고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응답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약속이 그분의 은혜, 곧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주기는 그분의 사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자손의 약속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오직 그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인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이 진행된 것과 같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 머물고 그 은혜의 약속들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합니다(16). 율법을 통해서 은혜의 약속들이 주어진다면 오직 유대인에게만 그 약속이 흘러갈 뿐입니다. 이래서는 아브라함을 열방의 조상으로 부르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16). 여기에서도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윤리가 아니라, 그 뜻을 유대인들의 문화적, 시대적 옷에 입혀 주신 역사적 도구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13-16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상속자 개념입니다. 앞으로 바울은 ‘맏아들’(로마서 8:29) 되셔서 우리가 얻을 유업을 이미 다 상속하시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 속에서 ‘맏아들’의 중요한 기능과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상속입니다(로마서 8:14-17).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언약의 약속을 이미 상속하셨습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과 완전한 하나님 백성의 지위인 의로움에 먼저 이르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맏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도 동일하게 상속자 된다는 이해는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바울이 16절에서 상속자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와 유사한 표현임을 주목하라. 즉, 이 단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서 언약적 신실하심을 다하시고, 언약의 약속을 상속하시고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 그 상속한 것들을 나누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바울의 구속사적 이해가 일관되게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성격(17-21)

생명을 살리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17-21)

기독교는 구원받은 것,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녀 삼아주신 칭의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값없이 받았다면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율법적으로 철저히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약속(17)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창세기 17장 5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아브람과 동일시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육신의 자손들에게 주신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약속들이 영적인 것으로 변했다거나 폐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살펴보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의롭게 되는 방법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표본이 됩니다. 그래서 그의 방법대로 따라가면 아브라함처럼 의롭게 됩니다. 그의 구원과 복이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고령이고 사라는 불임을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임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성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심하거나 믿음 없음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이루어졌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② 율법을 주신 시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 400년 후에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롭게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율법보다 먼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법을 넘어서 거룩한 삶을 삽니다. 율법이 족세처럼 억매이도록 하면서 이것을 제대로 지키고 살아야만 얻는 구원의 방편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실천 유무로 하나님의 백성 자격을 논한다면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국 백성으로서 자격이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만 주신다면 율법대로 살았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로 주어진 약속은 율법을 폐하고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주신 것처럼 우리도 불러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⑵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18-21) -------------- 이후는 정리가 덜 되었음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높이 사셨고,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리아 처녀의 몸에서 구주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이 그림자인 셈입니다. 남자 없이 아이가 생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세기 12:2-3)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에 대해 동일한 ‘상속자(相續者)’가 된 것입니다. ‘상속’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선조나 재산가로부터 재산을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에 믿음의 후손이라면 이러한 모든 복들이 우리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가 믿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취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믿을 만한 약속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끝까지 믿었습니다. 환경을 보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가 누린 축복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90세와 자신이 100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난 후에 사라도 비웃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생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은혜의 사건을 경험하고 더 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불가능한 상태를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이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이자 언약 신앙, 창조 신앙입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신앙은 그릇된 것입니다. 당신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여러 가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연약하지지 않길 바랍니다. 환경이나 상황들을 보면 도무지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켜 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훌륭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바울은 아브라함이 소망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미 백 세가 되어 그의 몸이 죽은 것 같았고 그의 아내 사라의 태 또한 닫힌지 오래였습니다. 이 단락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17) 그리고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19)라고 말하면서, 죽음과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의 주제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4-25절에서 바울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기능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도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유일한(진정한) 자손으로 암시됩니다(갈라디아서 3:16). 바울이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통해 성취된 의로운 약속(22-25)

만약 많은 유산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신이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 유산은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자신의 소유인들 활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믿음으로 얻는 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이제 화목해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게 해줍니다.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2-25)

⑴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함을 우리(22-24)

성경에서는 믿음의 조상을 본보기로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24)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선배의 믿음의 삶이 현재 우리의 위치에서 적용되어질 때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⑵ 죄와 의로움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25)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덧입기 위하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본받아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앞서 간 길잡이가 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선배가 많다는 것은 전정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듯이 우리도 그러한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가 세상의 후사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제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신 방식은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절정에 열방을 의롭다 하시는 방식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의롭다 함 받는 이들이 믿은 대상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3-4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믿음의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고,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서 하나님께 언약적 신실함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성취하신 분으로 조명합니다. 24절은 아브라함의 나이 백 세에 후사를 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믿음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언약적 신실함을 다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24; 참조 로마서 1:4). 25절이 말하는 대로, 그의 ‘내어줌’은 우리의 죄를 사하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희생제물(로마서 3:25)이었습니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의로움을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의로움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로마서 1:2). 그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제한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로서 의로움을 획득하셨습니다. 아들 하나님에게 의로움이 부족해서였겠습니까? 바울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먼저 의로움을 얻으시고, 이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의로움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의로움’의 지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성도가 얻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전에 하나님의 믿음(신실하심)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를 부르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이 제작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믿음 이전에 예수님의 믿음(신실하심)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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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03-01)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디도서 3장 1-7절


속담 중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는 아무리 상대방이 우리를 헐뜯고 욕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웃으며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하면 싸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많지만,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하면 복이 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워야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본문은 바울 사도는 사회생활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정부와 세상 사람들에게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과의 관계(1-2)

소금이 짠맛 나는 것이 당연하고, 빛이면 등잔 위에 얹어 놓은 등불처럼 어둠을 사르고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목표, 방식으로 구별되어 사는 이들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동떨어져 살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할지 바울은 디도에게 가르쳐 줍니다.

1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1-2)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섬에서 있는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치라고 권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 밖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보여야 할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갑니다. 인간관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속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수용할 수 없는 삶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혀 무시하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 질문에 사도 바울은 그레데의 성도들이 다스리는 자와 정부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고, 모든 사람에게 부드럽고 겸손하게 대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의 갈등이 일어나면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행실이 게으르거나 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권했습니다(2: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구원하셨습니다(2:14).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파할 수 있도록 하면, 성도들의 잘못된 언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롭게 된 사람답게 이전과는 다르게 살고 있습니까?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깨끗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까?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3-7)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삶이 달라야 합니다. 믿지 않을 때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변화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 변화된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통해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3-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3)라고 소개합니다. 성도들도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게 죄악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방해 사람이라 할지라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어야할 이유를 구지 설명한다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인 우리들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다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 일의 노예가 되었고, 육체의 즐거움을 따라 악한 일을 하며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올바른 행동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욕하거나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친하고 당신에게 잘 해주는 친구들뿐 아니라 서먹하고, 헐뜯는 친구들에게도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준비시키고 싸움에 대비하며 다음을 예비하는 일은, 교회 안퍆에서 필요한 준비 태세입니다. 경건한 성도요 성숙한 시민으로 교회는 사람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이단과 허탄한 세상 문화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영적 싸움에 대비해야 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가 전하는 전도자들을 공급하고 연결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일을 열심히 하려 하는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준비 태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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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31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꽃피는 사막

오연택 목사(대구제일성결교회)


 

칠레 북쪽 아타카마 사막은 매우 건조한 곳입니다. 이곳의 연평균 강수량은 15㎜ 정도입니다. 그런데 2015년 3월 어느 날 12시간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7년 동안 내릴 비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비가 그치자 척박한 땅 곳곳에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꽃망울이 맺혔습니다. 몇 주 후, 흙먼지뿐이던 사막이 분홍색 꽃들로 뒤덮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기적 같은 일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진작가가 멋진 절경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실로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후 비가 내리지 않자 꽃은 사라지고 다시 황량한 사막이 됐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비만 내려준다면 아타카마 사막은 언제라도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황량한 사막 같은 존재가 됩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삭막하냐”고 묻는 대신 그 마음에 생명 되신 예수를 소개해 은혜의 단비를 누리게 하면 어떨까요. 사막 같은 그의 마음도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오연택 목사(대구제일성결교회)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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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02-01)


진리에 합당한 성도의 모습

디도서 2장 1-15절


 

좋은 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야 효과가 있습니다. 교육도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면 훌륭한 교육이 됩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고도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교육에 대한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된 가르침인 복음을 배우고 따름으로 그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효과를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는 디도가 그레데에서 거짓 교사를 거짓 교훈을 방어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더 나가서 적극적으로 성도들을 언행의 본을 통해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표인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양육(1-10)

진리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인생 끝까지 역사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늙은 남자들은 위엄을 갖추고, 늙은 여자들은 거룩해야 하고, 젊은 여자들은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 남자들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도자는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1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2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3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9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10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1-10)

그레데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어떤 자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린 사람이며,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가장을 파괴하는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디도에 대한 개인적인 권면(2:1)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계층의 성도 양육에 관한 권면(2:2-10)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은 노년의 남성(2:2) 노년의 여성과 젊은 여성(2:3-5), 젊은 남성(2:6-8), 노예(29-10)로 구분하여 각각 권면합니다. 본문은 디모데전서 5:1-6:29 내용과 유사합니다.

⑴ 건전한 교육(1)

디도를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권면입니다. 본 절은 ‘그러나 너는’의 강조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건전한 교리에 적합한 것을 가르치라’고 강권합니다. 유대인의 거짓교사들은 족보 이야기와 장로들의 명령을 따라 헛된 교훈을 가르침으로 그레데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삶과 믿음이 분리되어 모순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1:16). 따라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비교되는 진실한 목회자로서 디도의 사역을 기대하며 권면합니다. 그레데 성도들이 삶과 믿음이 일치하기를 원했습니다.

⑵ 늙은 남자 성도의 양육(2)

바울은 연장자들부터 거론합니다. 늙은 남자 성도에 관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2)라면서, 노년 남성에게 가르쳐야 할 네 가지 덕목이 나타납니다. 늙은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망 있는 생활 습관으로 첫째, ‘결제함’은 원래 어원적으로 술 등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 상태를 뜻합니다(디모데전서 3:2,11). 다음으로 ‘경건함’은 존경할만한 고귀한 신앙 인품을 말합니다(디모데전서 3:8,11). 존경을 받아 위엄과 엄숙함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중함’은 근신하는 마음으로 말이나 행동을 삼가는 것, 즉 자제력을 뜻합니다. 이 덕목은 디도서에 자주 언급되는데 바울은 자제력을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간주합니다(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8; 2:4,5,6). 당연히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에서 나온 절제력으고 깊은 사고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덕목은 믿음, 사랑, 인내에 있어 ‘건강함’입니다. 목회서신에서 믿음, 사랑, 인내는 신앙의 핵심 요소입니다(디모데전서 6:11; 디모데후서 3:10; 참조. 데살로니가전서 1:3).

⑶ 늙은 여자 성도에 대한 권면(3)

이제 바울은 늙은 여자 성도에 관한 권면합니다. 이 단락은 젊은 여성에 관한 권면도 포함합니다(2:4b-5).먼저 경건한 여인에게 마땅한 거룩한 행실을 권면합니다. 다음으로 ‘남을 헐뜯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덕목은 집사의 아내에 관한 권면에서도 언급됩니다(디모데전서 3:11). 신약성경은 사탄을 ‘헐뜯는 자’(요한계시록 12:10)로 묘사하는데 남을 모함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디모데후서 3:3). 그 다음으로 ‘술에 중독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덕목은 집사에 관한 권면에서도 나타납니다(디모데전서 3:8). 바울이 노년 여성의 덕목과 관련하여 특별히 험담이나 술 중독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레데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끝으로 ‘선한 일을 가르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노년 여성이 젊은 여성에게 신앙인의 성숙한 삶에 관하여 가르칠 것을 권합니다.

⑷ 젊은 여성 성도에 대한 권면(4-5)

3절의 마지막 구절은 4-5절과 연결됩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노년 여성이 선한 일을 가르치면 젊은 여성의 신앙은 성숙하게 되고, 젊은 여성의 신앙이 성숙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젊은 여성의 덕목으로 ‘남편을 사랑함’, ‘자녀를 사랑함’, ‘자제함’(2:2), ‘순결함’(디모데전서 2:9; 5:2), ‘가사에 충실함’, ‘친절함’, ‘남편에게 복종함’(에베소서 5:22; 골로새서 3:18) 등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젊은 여성의 신앙 성숙을 언급하면서 가정에서 충실한 내조의 역할에 초점을 둡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가정에서부터 신앙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족을 섬기고 가정에서 맡은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가정생활을 통하여 경건한 믿음의 개근을 이루어 가고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⑸ 젊은 남자 성도에 대한 권면(6-8)

젊은 남자 성도에 관한 권면입니다. 본문은 젊은 남자에 관한 권면(2:6)과 젊은 디도에게 권하는 개인적인 권면(2:7-8)으로 구성됩니다. 6절에 장로, 노년 남성, 젊은 여성의 덕목과 관련하여 언급된 형용사 ‘신중한’(1:8; 2:2,6)의 부정사형이 나타납니다. ‘신중하다’는 어원적으로 ‘자제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바울은 젊은 남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자제력을 언급합니다. 다시 바울은 젊은 사역자인 디도를 향한 개인적인 권면입니다(7-8). 본문은 디모데전서 4:12-16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선한 일’은 디도의 사역과 직결되는 일로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참조. 디모데후서 2:21). 바울은 젊은 지도자인 디도에게 먼저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권면합니다.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과 관련하여 부패하지 아니하고, 단정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도록 권면합니다. ‘부패하지 아니함’은 가르치는 동기와 관련된 것으로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청렴함입니다(참조. 1:11). ‘단정함’은 가르치는 자세와 관련되는데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위엄을 가리킵니다(디모데전서 2:2). ‘책망할 것이 없는 말’은 가르치는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비난받을 것이 없는 건전한 교훈을 뜻합니다(2:1). 바울은 디도에게 가르치는 자로서 청렴하고 위엄을 지니며 건전한 교훈을 가르치라고 권면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자신의 권면대로 행하면 거짓 교사들이 건전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나쁘게 말할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⑹ 노예인 성도들에 대한 권면(9-10)

바울은 신분상 노예인 성도들에 관한 권면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디모데전서 6:1-2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 ‘거슬러 말하지 않는 것’, ‘훔치지 않는 것’, ‘참된 신실성을 드러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원래 군대에서 상관의 수하에 예속되는 것을 뜻하는데 다른 사람의 지배하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18).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란 구절에 사용된 유아레스토스(εύάρεστος는 바울 서신에서 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연관되어 나타납니다(로마서 12:1;14:18: 고린도후서 5.9: 에베소서 5:19; 빌립보서 4:18). ‘참된 신실성을 드러내는 것’은 온전한 충성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골로새서 3:22). 10b절에서 바울의 권면에 따라 행하면 하나님의 교훈이 빛나게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구원과 주의 재림에 대한 권면(11-15)

은혜가 성도를 양육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을 소망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가르침과 운영 원리에 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은혜, 사랑과 긍휼의 은혜, 산한 일을 열심히 하는 백성을 낳으려는 목표가 분명한 은헤의 원리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11-15)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생활(2:11-1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2:13-14), 그리고 디도를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권면(2:15)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1-10절에서 실제적인 권면하고, 이제 11-15절에서 권면의 근거가 되는 교리를 진술 합니다. 이러한 서술적 특징은 3:1-7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⑴ 성도의 생활(11-12)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술입니다. 11절은 단락의 주제 문장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합니다(참조. 요한복음 1:14). 12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성도의 생활에 대하여 서술합니다. 본절에서 성도의 생활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신중하게 의롭게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신중하게는 이전 단락에서 자주 나타난 형용사 소프론(σωφρων, 1:8, 2:2,5)의 부사형으로 ‘자제력 있게’의 뜻입니다.

⑵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13-14)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진술합니다. ‘복스러운 소망’(13)은 12에 언급된 ‘영생의 소망’과 같은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14절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서술합니다. 또한 불법에서 구속하고 정하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선한 일’은 디도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입니다(1:16; 2:7; 3:1,8,14).

⑶ 권위 있는 책망을 위한 권면(15)

바울은 디도에게 권위 있는 책망을 함으로 누구도 그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동일한 권면을 합니다(디모데전서 4:2). 성도는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하게 바랍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의 몸을 입고 영생을 누릴 소망을 가집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자 특권입니다.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닮은 자로 변화시킵니다. 진리의 은혜로 선한 열매를 인격과 삶에서 맺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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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01-02)


거룩한 교회를 지켜야할 의무

디도서 1장 10-16절


 

질병은 초기에 발견하고 치료하면 쉽게 치료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병을 방치하면 점점 켜져서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나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제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로 비화해 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 잘못된 이단사설이 거짓 이단은 빨리 처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섬에 남아서 교회를 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들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를 세우라고 권하면서 지도자의 자격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그와는 대조적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을 거론합니다.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인 할례당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입을 막고 꾸짖으라고 권면합니다.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10-11)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을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건강한 지도자입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도 신앙과 인격이 일치한 지도자로서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지도자가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다음으로 올바른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 가르침은 바른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나타나야 합니다.

10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11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10-11)

바울은 친 아들과 같은 디도에게 그레데 섬에서 남겨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떨쳐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가르침을 배격하고 올바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홀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사역을 도울 장로를 세우라고 권했습니다. 본 절은 ‘거짓 교사들의 정체’(10)와 ‘영향력’(11)에 관해서 서술합니다.

⑴ 할례파 거짓 교사(10)

본 절에서는 그레데 섬 교회에 거짓 교사 무리가 형성된 배경과 상황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 외부에서 들어온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아서 헬례를 주장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늘어놓으면서 복음이 가르침과 권위에 흠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10)이라고, 세 단어를 특별히 사용하여 그들의 정체를 밝힙니다. 첫째로 거짓 교사들은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6절에서 장로들은 순종하는 자이여야 했지만, 그들은 진리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어리석은 변론과 논쟁에 치우친 자들입니다(3:9). 장로들에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가 본 절에도 나타납니다(참조. 딤전 1:9). 두 번째는, 거짓 교사들은 ‘헛된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유대인의 신화나 족보, 율법에 대한 논쟁에 몰두하여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이는 자들입니다(1:14; 3:9; 참조. 딤전 1:4-7;4:7; 딤후 4:4). 그들은 거짓 교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속이는 자’들입니다(참조. 갈 6:3).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밝히고 유대인 중에 거짓 교사들이 많음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놓은 이유는 거짓 교사들을 막으란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은 것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세였습니다. 복음에 아직 어린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이 포함된 기독교 거짓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사역자와는 달리 그들의 관심사는 영혼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사사로운 이익이었습니다. 탐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치지 않고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허망한 이론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여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두 헛된 말이었고, 오히려 공허한 말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순수한 믿음을 망쳤습니다. 그들의 중심은 바른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을 속여 자신의 배만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악한 행동을 합니다. 더 나가서 행복한 가정을 망가뜨렸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교회 존재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⑵ 거짓 교사들의 영향(11)

이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해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교회 안에서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디도에게 ‘입을 막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권하는 바울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용납하지 말고, 단호하게 더 이상 전하지 못하도록 기회를 뺏으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11b)은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땅치 아니한 것’은 가르치지 말아야 하는 교훈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가정들은’이란 성도의 가정들을 뜻할 수 있고 가정 교회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는 부유한 성도의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정 교회의 형태이었습니다(몬 1:2). 그들의 의도는 ‘더러운 이득’인데, 가르치는 자가 탐욕 때문에 합당하지 않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참조. 딤전 6:5; 벧후 2:3).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침으로 교화 성도들을 혼란케 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미 그 마음속에 세속화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돈과 권력과 성적인 범죄가 따릅니다. 이것들이 이단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이러한 거짓 주장과 행동으로 가정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입을 막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거짓 교사들을 침묵케 하도록 강력하게 경계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문 메시지는 바리새인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마 16:6; 막 8:15). 지도자는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여 건전한 교회를 세워갈 책임이 있음을 명심하게 됩니다. 거짓 교사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여러 가정들을 망쳐 놓는 악한 자들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이단들은 무단히 노력을 합니다. 믿는 가정만 찾아다니면서 이단 사설을 전파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의 연약한 점을 들추어 낸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디도처럼 이단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항상 이단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그런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엄중한 책망을 권면(12-16)

동서고금으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위선적인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고 더러운 것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처럼 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는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사로운 이득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12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13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14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12-14)

오래전부터 그레데 지역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속 문화가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을 닮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레데 사람들을 더 닮았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문화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 거짓 교사들을 엄중한 책망을 명령하고(12-13a), 책망해야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13b-14).

⑴ 그레데 사람의 정체(12-13a)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이유를 더욱 확고히 해 줄 수 있는 증언을 첨가합니다. 그는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 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12)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레데 섬 출신 신인 에피메니메스(Epimenides)의 시에서 그레데인의 사기성과 잔인함, 욕심과 태만 등을 잘 표현하는데, 이런 시가 나올 정도로 그곳의 환경은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은 복음을 반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삶은 복음이 요구하는 삶보다는 세속적인 그레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리 잘못을 판단한 능력이 없더라도, 그들이 사는 모습이나 행동 그리고 인격을 보면, 이미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서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피메니메스의 시를 인용하여 자신이 하는 권면에 대해 정당성을 변호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13a)고 권면합니다. 본 절에 언급된 ‘그들’은, 즉 책망의 대상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을 뜻할 수 있고, 거짓 교사들의 영향 아래 있는 그레데 교회 성도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단락이 거짓 교사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문맥상으로 보면 그들이 거짓 교사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더 합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목회서신에서 거짓 교사들의 회개 가능성을 언급합니다(디모데전서 1:20; 디모데후서 2:24-25). 그런데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을 구별하는 11, 13b-14절의 내용에 따르면 그들을 일반 성도들로 보는 견해 역시 타당성을 지닙니다. 본 절은 ‘그 고소 때문에’로 시작하는데 바울은 인용에 근거하여 가혹한 책망을 정당화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음식이나 절기와 관련된 의식적 규정들이었습니다. 음식을 속된 것과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음식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로마서 14:14)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정말 속된 것과 거룩한 것에 대한 구분을 예수님의 말씀을 판가름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더러운 것들이 나오는 더러운 말과 이론들이 더 더럽게 만듭니다. 이처럼 거짓 교훈의 특징은 말씀에서 주는 진정한 의미 자체보다 말씀에서 파생된 잘못된 가르침을 더 추종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것이 마치 자신만의 특권인 것처럼 주장하며, 신령한 진리인 것처럼 가르친 것입니다.

⑵ 엄한 책망을 한 이유(13b-14)

책망할 이유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14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13b-14)라고 서술입니다. 바울은 강력한 권징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엄한 책망은 온전한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2:1-2). 다음으로 책망은 거짓 교훈에 현혹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는 유대인의 신화를 뜻합니다(디모데전서 1:4). ‘사람들의 명령’은 유대 장로들의 유전에 따르는 의식과 결례의 계명을 뜻합니다(디모데전서 4:3-5). 거짓 교사들들은 그레데 교회에서 유대인의 신화나 족보에 몰두하고 유대인의 유전에 따라 행하도록 미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1:10,14; 3:9; 참조. 골로새서 2:22; 디모데전서 1:4). 그리하여 바울은 디도에게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건전하게 보존하도록 엄중히 책망을 권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권징이 사라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강력한 권징을 명령합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권징의 필요를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18:15-20). 권징은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한 방편입니다. 건전한 교리에 입각한 권징은 건강한 교회를 위하여 반드시 시행될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위선(15-16)

거짓 사람들의 특징은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아는 것처럼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선한 일을 합니다. 하지만 생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모습 속에서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2:14)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15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15-16)

거짓 교사들은 외적인 정결에는 노력했지만, 속은 더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체만 가지고 더럽고 정결한 것은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모든 것이 다 거룩해졌고 정결해졌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이중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설명해 나갑니다.

⑴ 마음과 양심의 오염(15)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섬에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교훈을 막을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이 오염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했습니다. 썩은 이론은 썩은 감자와 같습니다. 썩은 감자는 다른 감자들에게 썩은 물을 전파하여 썩게 만듭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훈이 다른 성도들을 물들이고 망치게 합니다. 성도들이 물들이지 않도록 과감하게 꾸짖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의사가 병든 부분을 과감하게 절단해 버리듯이 꾸짖어서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항상 거짓 교사들과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엄히 꾸짖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더럽히지는 것을 막고,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잘 따르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⑵ 거짓 교사들의 행위(16)

엄히 꾸짖으므로 인해, 그들과 혹은 성도들이 참된 믿음으로 회복됩니다. 생활이 회복되어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교회 또한 날마다 건강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은 아는 사람답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지만,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오염된 진리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방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바른 진리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분별력과 지혜를 주셔서 거짓된 가르침에 속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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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30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네 손을 놓으라

김석년 서울 서초성결교회 목사


유럽에 가면 도시마다 중세 성주들이 살던 웅장한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의 중심에 하나님을 예배하던 채플이 있습니다. 당시 성주들은 세력을 확장하느라 자주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럴 때면 먼저 성직자를 모셔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선 누구 편을 들어주실까요. 강자 편일까요, 약자 편일까요.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한 편일까요, 적게 한 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 편도 안 들어주십니다. 욕심으로 인해 다투는 것이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을 ‘폐기적 심판’이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사 서로 욕되게 하시는 것”(롬 1)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오래 많이 합심해서 기도할지라도 욕심 때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 되실까요. 바로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그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 소원이나 욕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을 따라 나를 변화시켜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나에게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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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9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한 사람의 영향력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파키스탄 출신 여성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에 대한 교육을 금기시하는 탈레반 지배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탈레반이 여성과 아동에 부당한 탄압을 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 알렸습니다. 이에 탈레반의 표적이 된 그는 학교에 가던 길에 괴한으로부터 총을 맞았습니다. 두 발의 총알은 얼굴, 또 한 발은 어깨를 관통했지만 어려운 수술과 힘겨운 회복 과정을 통해 그는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사건 이후 말랄라를 향한 전 세계적인 응원이 터져나왔습니다. 유엔의 세계교육특사는 전 세계 모든 아동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자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파키스탄에서는 최초의 교육권 법안이 비준됐습니다. 말랄라는 많은 인터뷰와 연설을 이어갔고 2014년 17세의 나이로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한 사람이 이룬 업적과 영향력은 실로 위대합니다. 오병이어가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듯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한 사람을 통한 기적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믿음을 가진 창조적 소수로 살아가십시오. 감동과 변화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출처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04204&code=23111512&stg=wm_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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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3)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

마태복음 12장 22-30절


 

전쟁할 때, 교전국 사이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그곳만은 싸우지 않기로 협정한 지역을 ‘중립지역(中立地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인 전투에는 중립지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해야만 합니다. 항상 사탄은 타락한 영적존재이므로 자신을 인간에게 접촉하여 그 사람을 타락시켜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힘으로 쫓아냈다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쫓은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고, 성령 모독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하며, 사람은 심판 날에 자기 말로 의롭다 함과 정죄함을 받는다고 반박 하십니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22-24)

믿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부족해서 또 받은 은혜가 모자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모르면서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올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22그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2-24)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남자를 치유하십니다(22). 귀신 들린 자는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참조. 9:27-31). ‘말을 못하는’은 9:33에 나온 용어로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한 손 마른 자의 치유가 있었고(9-14), 마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밝혔고(15-21),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인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십니다(22). 예수님께서는 종으로서 맹인을 치유할 것이라는 이사야 42:7의 역할을 성취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앞 장면과 마찬가지로 22절의 치유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 행하신 사건입니다. 무리는 놀라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아들’은 치유에 이어서 나온 메시아 칭호입니다(9:27). 무엇보다도,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며, 당시 유대인들이 치유자로 믿었던 솔로몬(-다윗의 아들)보다 더 큰 자입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음 질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까? 아니면 악령의 능력으로 축귀를 행한 사람, 사탄과 한 패거리입니까? 귀신을 쫓아내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살려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이고 다윗의 아들입니다. 복음서에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와서 사탄의 나라를 궤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축사(逐邪) 사건은 다른 치유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 드디어 와서 하늘나라를 실천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목적 중 하나는 그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되는 나라가 회복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쪽 손 마른 자를 치유한 사건처럼 귀신 들린 자가 회복된 사건 역시 다윗의 아들은 회복을 실현하는 종으로 왔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지금도 회복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교회는 회복의 일에 쓰임 받아야 하며,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확장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바알세블 논쟁(25-29)

귀신 들려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 살았으나 즉은 것이나 다름없이 빛과 소리 없이 살아왔던 혼돈의 인생이 빛 되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빛과 소리를 찾았습니다.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았고, 샬롬과 쉼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5-29)

본 단락은 22-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으로 구성됩니다. 17-2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종이며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정의를 실현한 종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정체성과 정반대의 평가를 내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힘을 사용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사탄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로써 이들의 평가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축사 사역이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서로 분쟁하는 나라나 도시나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25).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사탄의 힘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26). 26절에서 바알세불이 사탄으로 바뀝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장면은 마치 사탄의 세력 안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같습니다. 사탄은 악의 세력을 통치하는데 통치자가 자기 나라에서 군대를 쫓아낸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자신의 축사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된 것이라면 ‘너희의 아들들’이 행한 축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되물으십니다(27). ‘너희의 아들들’은 유대인들 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 문헌에는 유대인들이 귀신들을 쫓아낸 기록이 나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늘나라가 온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임함은 예수님을 통한 축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서 통지하시는 나라이므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한 회복의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쫓겨난 사건은 하늘나라가 온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28).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성령의 힘으로(눅 11:20에는 ‘하나님의 손가락’)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종에게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라는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8; 사 42:1-4; 61: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여호와의 종이 회복의 나라를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사 44:3; 59:21). 여기서 ‘왔다’는 과거형으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축사 사역을 통해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고(4:17; 10:7), 예수님의 축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예, 4:24, 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사역을 하고 있는 그 시대와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임함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적대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강한 자인 사탄이 더 강한 자인 예수님에 의해 결박당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9). 사탄을 결박해야 사탄의 집에서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힐을 시작하신 것은 사탄이 결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치유 사건들(12:10-13, 15)과 마찬가지로 축사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사탄이 결정적으로 결박되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때이지만, 예수님의 활동으로 사실상 사탄은 결박당하기 시작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땅에서 행하신 일(귀신 축출)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뜻(사탄이 묶이는 것)이 성취됩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특히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예, 사 52:7)를 가지고 온 것은 이사야 61:1-3에서 주의 영이 주의 종에게 임해 희년을 실현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30)

신앙의 중립지대, 완충지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서 걸쳐 있을 곳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넘겨주신 것은 우리를 얻으려고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건입니다.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마다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30; 개역개정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마다 흩어진다’를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로 번역함).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자들이고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흩어진 자들입니다. ‘흩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승리자가 정복당한 군대를 흩어버리듯이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흩어버린 사건이 구약에 여러 번 묘사됩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앞의 내용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흩어진 백성(양 떼)을 모으러 오신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사명을 떠올리게 하며(사 49:5, 24-25), 이는 양 떼를 모으러 온 종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복 혹은 구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러 오셨지만(사 49:5,24-25), 예수님에게 모이지 않으면 종을 통한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용서 받을 기회를 잃는 비극에 처합니다(마 12:31).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편에 서기 때문에 모이는 양 떼가 아니라 흩어지는 양 떼에 속합니다. 2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은 양떼를 모으려고 사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탄의 집을 공격해서 양 떼를 살려내는(=모으는) 예수 편에 서야 하며, 예수께 반응하는 일에 있어서 중간 지대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영적 전투에서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자이며, 자신과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으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귀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반대편에 서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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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01-01)


살아 있는 교회에 대한 두 가지

디도서 1장 1-9절


우리나라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협력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협력 공동체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한 마음으로 교회의 목적을 향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여러 장로들을 세우고 그들과 합력해서 일을 처리해 나갈 것을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디도를 그레데에 두고 떠났습니다. 서두에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설명하고, 장로이자 감독인 목회자의 자격에 관하여 권면합니다. 그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하는데, 남은 일을 정리하는 것과 장로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목적을 중심으로 디도서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사말(1-4)

교회가 많아지고 교회 안에서 사역을 위해 참으로 분주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향한 실망과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세상은 교회를 행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교회는 지도자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레데에서 사역한 디도에게 서신을 통해 교회 바른 지도자들에 대해 권고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4)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 디도를 두고 온 뒤, 그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레데 섬에서 사역을 해야 하는 디도가 좀 더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디도서의 특징은 바울 서신의 서두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감사와 기도의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은 서신의 발신자(1-3), 수신자(4a) 그리고 첫 인사(4b)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⑴ 발신자 바울(1-3)

먼저 발신자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디도에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합니다. 자신의 사역은 선택 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생의 소망에 기초한 믿음과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① 하나님의 종(1a)

‘하나님의 종’이라 칭호는 본 절에 특별히 나타납니다. 이 칭호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시편 105:42), 모세(민수기 12:7), 다윗(사무엘하 7:8-9) 그리고 선지자들(예레미야 7:25; 다니엘 6:20; 아모스 3:7)에게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권위를 함축하는 표현입니다(민수기 12:5-8; 이사야 42:1-9). 바울은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고린도전서 1:1; 고린도후서 1:1; 에베소서 1:1; 골로새서 1:1; 디모데전서 1:1; 디모데후서 1:1).

②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1:1b-3)

바울은 자신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첫째는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입니다(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2:14). 이 구절에서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사도로서 자신의 사명임을 밝힙니다(참조. 고린도전서 1:17). 둘째, 그의 사도권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한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은 목회서신의 중심주제 중 하나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은 목회서신의 중심주제 중 하나입니다(디모데전서 2:2; 3:16; 4:7,8; 6:3,5,6,11; 디모데후서 3:5).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경건한 삶으로 이끄는 진리의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이 그의 사도직의 한 목적이라고 밝힙니다(참조. 디모데전서 2:4). 셋째, 그의 사도직은 영생의 소망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생을 약속하셨고 그것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데, 바울은 이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사도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임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진리의 지식과 경건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로 인한 삶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리하여 그 지식을 소유한 자들에게 경건의 능력을 부여합니다(디모데후서 3:5).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그의 기뻐하시는 일에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⑵ 수신자 디도(4a)

바울은 수신자 디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디도를 향해 ‘참 아들’이라 부릅니다. ‘참아들’은 합법적인 아들의 의미인데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와 디도에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참조, 디모데전서 1:2). 그만큼 바울과 디도의 관계가 유난히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디도는 바울의 회심 후 예루살렘 방문 때에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2:1). 바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첫 여정에 동행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회에 가서 바울의 심정으로 사역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8:16-17). 그리고 바울의 최후 선교 여행에 동행하던 중 바울의 위임을 받고 그레데 선교 여행에 동행하던 중 바울의 위임을 받고 그레데 섬에 남아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디도서 1:5).

⑶ 첫 인사(4b)

바울이 디도에게 전한 첫 인사의 내용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은혜’는 당시 헬라인의 인사에 해당하고 ‘평강’은 히브리인의 인사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보편적으로 그의 서신의 사도에서 ‘은혜와 평강’의 인사를 전합니다(로마서 1:7; 고린도전서 1:3; 고린도후서 1:2; 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빌립보서 1:2; 골로새서 1:2; 데살로니가전서 1:1; 데살로니가후서 1:2). 이 구절에는 바울서신의 사도에 일반적으로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라는 칭호가 특별히 나타납니다. ‘구주’라는 칭호는 디도서에서 구원의 교리와 관련하여 거듭 나오는데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강조합니다(2:10,13; 3:4,6). 이것으로 살펴보아서, 그레데 교회에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또 성장하키기 위해 목회자들을 통해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바르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사역(5-9)

하나님의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 즉, 장로님이나 권사님의 기준은 교회의 성장에 기여도나 재력 또는 사회적 명망 등을 중요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직분은 감투나 명예직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바울은 디도가 그레데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에서 장로의 자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5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7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5-9)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디도와 더불어 그레데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레데 섬을 떠나면서 디도를 남겨두어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1:5). 후일에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 목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권면을 하였습니다. 본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 및 감독의 자격에 관한 권면입니다. 그 내용은 장로의 자격에 대한 권면(1:5-6), 감독의 자격에 관한 권면(1:7-9)으로 구성됩니다.

⑴ 디도의 사명(5a)

디도가 그레데에 존재한 이유는 첫째는 부족한 일, 즉 거짓 가르침을 바로 잡는 일입니다. 그의 사역은 집중적으로 1장 10절에서 3장 11절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바른 가르침을 전할 장로들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1:5-9). 경건한 백성을 날은 진리의 지식과 그것을 전할 온전한 지도자가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⑵ 장로의 자격(5b-6)

먼저 디도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각 성의 장로들, 즉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에서 지도자의 자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은 디도에게 장차 세워야 할 장로의 자격에 대한 권면입니다. 6절은 장로의 자격에 관한 서술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고’라는 것은 장로의 자격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인데, ‘고소당해 비난받을 일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덕목은 이어서 언급되는 감독의 자격에서도 우선적으로 언급됩니다(1:7; 참조, 딤전 3:2). 바울은 다음으로 가정의 범주에서 장로의 자격을 말합니다.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고 언급합니다(딤전 3:2,4-5).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먼저 가정의 지도자로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목회자는 먼저 가정의 지도자로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바울의 권면에 의하면 장로는 방탕하거나 혹은 불순종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 자이어야 합니다. ‘방탕’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행동을 포괄하는 문맥에서 나타납니다(엡 5:18; 벧전 4:4). ‘불순종하는’이란 형용사는 잘못된 교훈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딤전 1:9; 딛 1: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방탕하거나 진리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를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⑶ 감독의 자격(7-9)

먼저,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집을 배경으로 하는 단어인데, ‘집을 관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지도자를 그 집을 세우는 자로 묘사합니다(고린도전서 3:9c-11).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권면은 감독의 자격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이어서 언급되는 내용은 감독으로 피해야 할 부정적인 자질과 추구해야 할 긍정적인 자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7절에 감독이 피해야 할 자질로 완고함, 성마름, 술을 탐닉함, 난폭함, 부정한 이득을 탐함 등이 나열됩니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것’은 다음 단락에서 거짓 교사들의 특징으로 언급됩니다(1:11). 8절은 추구해야 할 자질로 나그네를 대접함, 선을 좋아함, 자제함, 의로움, 거룩함, 절제함을 언급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함’은 특별히 복음을 전하며 순회하는 복음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딤전 3:2; 참조. 요삼 1:9-10). ‘신중하며’는 건전한 마음으로 자제하며 근신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바울은 감독뿐 아니라 그레데 교회 성도들에게 전반적으로 이 덕목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2:2,5,6), 9절에서 감독은 신뢰할 만한 말씀의 교훈대로 행하여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전파자들을 환대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이 가정의 범주에서 목회자의 자격을 언급한 것은 주목한 만합니다.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목회자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하여 ‘만약 어떤 자가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디모데전서 3:4-5). 목회자는 우선 한 가정의 신앙 리더로서 경건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디도에게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는 장로들과 협력하여 교회 안에 잘못된 사역을 막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잘못을 막는 사람들은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움을 받는 장로들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모범을 보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성품과 외면적인 생활(특히 가정생활)이 일치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른 지도자와 그 지도자가 전하는 바른 교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일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대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안팎의 존경을 받고, 내외적인 자격을 갖춘 지도자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바른 가르침이 있을 때, 교회로서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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