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04)
멸망의 참상을 목격한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중동 시리아 내전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국민 약 500만 명이 안전한 나라를 찾아 유럽 국가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종종 피난을 떠나면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얼마 전에는 시리아 난민 3살배기 아이가 익사한 채 터키 해변으로 밀려와서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더 슬픈 것은 지금도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피어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들은 시리아만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선지자가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아파하는 마음은 이보다 몇 백배 더 할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예루살렘 성과 하나님의 성전까지 철저히 무너졌다고 슬퍼했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을 1인칭으로 슬픔을 표현합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먹어야 하는 비참한 예루살렘의 재앙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재앙에 대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던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합니다. 늦긴 했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호소합니다.
시온의 참상으로 인한 슬픔(11-12)
바벨론에 멸망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이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굶어 죽었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예루살렘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11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12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11-12)
계속적으로 예레미야애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패망한 후,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까지 파괴되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의 참상을 소개합니다.
⑴ 참상을 목격한 선지자(11)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이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여성들이 피해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가장 큰 참상은 전쟁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세 개의 기관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고, ‘창자’는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고대근동에서는 간을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간을 땅에 쏟아놓는다’는 말은 ‘자신의 감정, 특히 슬픔의 감정을 물처럼 땅에 쏟아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표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다’라는 뜻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강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20에서도 나왔습니다. 선지자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느꼈던 슬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동일하게 느꼈던 슬픔을 표현합니다. 선지자가 슬퍼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11b). 그것은 이스라엘이 패망으로 해밝게 웃고 있어야할 어린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힘없이 길거리에 누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힘없이 눈만 끔뻑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⑵ 엄마 품에서 죽어가는 아이들(12)
선지자는 아이들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조금 다행인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길거리에 죽어가는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에서도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어머니를 향해 양식을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머니의 품 혹은 가슴은 원래 젖먹이가 젖을 먹으며 가장 배부르고 행복한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근으로 어머니의 젖까지 말라버렸습니다. 말라버린 젖을 빨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8:41과 50절 및 53-57절에서 경고한 것처럼 전쟁으로 인한 기근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엄마 품에서까지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통곡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배 굶주림에 죽어가진 않습니다. 하지만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굶주림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야망과 경쟁문화 때문에 아이들의 영혼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과 직장만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우상숭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 재물로 불에 던져진 우상숭배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기근으로 인해서 어머니의 젖이 말라버린 것처럼, 성도들의 기도와 말씀은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조롱당하는 시온(13-17)
전 세계적으로 전쟁으로 죄 없는 많은 아이들이 죽어갑니다. 아이들은 전쟁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집과 가족 그리고 친구를 잃어 갑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약탈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해 아이들의 아픔을 소리쳐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어른들의 욕심이 수많은 아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13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 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13-17)
하나님께서는 바벨론과 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선지자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황폐해진 예루살렘 상황을 더 자세히 소개합니다.
⑴ 위로와 치유자가 없는 시온(13)
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런 큰 비극과 슬픔 앞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시적 형식을 살려 배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으로 네게 증거할까? 무엇으로 너에게 비유할까? 딸 예루살렘이여 무엇으로 너에게 비교하며 내가 너를 위로할 수 있을까? 딸 시온이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까? 세 번이나 ‘무엇으로’라고 사용하면서 질문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의문문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어떻게 증언해야 할지, 어떤 비유를 들어 설명해야 할지, 또 어떤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의 참담하고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마지막 문장의 ‘누가 너를 고칠까?’는 한편으로는 전적인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심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⑵ 책임이 있는 거짓 선지자들(14)
이런 멸망의 책임은 1차적으로 거짓된 선지자들에게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만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어리석다’는 눈가림을 위해 석회를 발라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들어내어야 할 죄에 석회를 발라 덮어주는 것입니다. 꾸짖고 책망할 죄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거짓 평화와 안정 속에서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고 심판을 면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지키는 파수꾼인데, 예언자가 그 역할을 못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습니다(참조, 에스겔 3:17-21). 교만한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⑶ 비웃고 조롱당하는 예루살렘(15)
과거 예루살렘은 완전한 영광, 더 할 나위 없는 영광스러운 도시로 불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환희의 도시였습니다. 자신이 제일 잘 한줄 알고 엄청난 교만에 빠져 타인을 무시하고 그래서 미혹에 빠져 자신의 삶과 미래를 망쳐 버립니다. 주변 나라들뿐만 아니라 그 원수들까지 예루살렘을 조롱합니다. 예레미야애가 1:12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본 증인으로 나타나는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조롱하며 박수치는 사람들로 표현됩니다(참조. 욥기 27:23). 머리를 흔드는 행동도 조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행동뿐만 아니라 꼴좋다는 말로 계속해서 조롱을 이어갑니다. 조롱은 원수들에게서도 계속됩니다. 원수들은 입을 벌리고 비웃고 이를 갑니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험담하고 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비웃다’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놀리면서 웃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마른 자는 머지않아 비웃을 당할 것입니다. 원수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삼켰다’고 의기양양해합니다. 그런데 ‘삼키다’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2:2과 5절 및 8절에서 여호와께 돌린 표현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여호와의 심판이지만, 원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의기양양해 있습니다.
⑷ 원수들이 기다렸던 멸망의 날(16)
이날에 원수들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며 즐거워합니다. 여기서 ‘이 날’(16)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적의 멸망을 원하는 날이었지만,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로 원수들이 이긴 날이 되었습니다. 환난 날에 쉴 곳을 찾으며(13), 음식을 찾으며(1:6), 묵시를 찾았지만(2:9),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단번에 찾아냈습니다. 여호와를 찾고 보기를 원했지만 이들은 찾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원수들의 말속에서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원한 것과 반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과는 정반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 그분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원수들의 뿔이 높아지고 즐거워하는 모든 일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바벨론 신에 패한 것이 아닙니다.
⑸ 철저히 멸망시킬 여호와의 계획(17)
예루살렘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폐허가 된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모든 일은 여호와의 계획과 명령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정하신 일과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은 같은 의미로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전제로 합니다. 모든 것은 원수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계획,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징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우리를 징벌하실 때 우리가 조롱하던 사회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부끄러운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십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주셨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갑자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과 명령하셨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명령하시고 경고하셨던 대로 예루살렘을 파괴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기쁨을 주고 복의 근원과 온전한 영광이 되어야 할 성읍이 불의한 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그를 삼켰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옛적에 경고하신 대로 이루신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탄원하는 선지자(18-19)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 번 성경을 통해 ‘부르짖으라!’고 권고합니다. 비록 부족해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을지라도, 연약해서 무능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18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18-19)
지금도 교회들이 세상에 조롱을 당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롱을 스스로 자초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수치를 주셔서 교회의 민낯을 철저히 들어내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⑴ 밤낮 쉬지 말고 간구(18)
이제 선지자는 시온에게 이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부르짖어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해 보자고 청합니다. 이 재앙의 근원이 여호와임을 알고 그 근원 되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다고 용서해 주실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는 밤낮으로 쉬지 말고 울부짖으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은 밤낮 쉬지 않고 범죄했습니다. 이제 반대로 밤낮 쉬지 말고 간구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울음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계속적으로 흘리는 눈물을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계속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⑵ 어린 자녀들을 위한 간구(19)
이스라엘에게 멈추지 말고 회개의 기도하며 주의 자비하심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간곡한 요청은 굶어 죽어가는 어린 자녀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더라도, 재앙 이후에 이스라엘을 재건할 희망인 어린 아기들은 살려야 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빈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대한 탄원(20-22)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에는 믿음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 그리고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리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분의 자녀입니다. 못나고 부족해도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20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20-22)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책임저주십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해 놓으십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 자신도 하나님께 응답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20-22절에 나오는 언급은 신명기 28:53-57의 심판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⑴ 허기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20)
선지자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자신들의 자녀들을 돌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⑵ 유일하신 여호와를 위한 기도(21)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 심하게 다루셨다는 호소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적에게 잔인한 손에 이스라엘을 맡겨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감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⑶ 자신의 처지를 위한 기도(22)
여기서는 여러 부류의 죽음이 나오는데, 어머니의 손에 죽는 아기들,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제사장과 선지자들, 길거리에서 칼에 죽은 늙은이, 젊은이, 청년들과 처녀들 등장합니다. 이들이 모두 주의 날,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적들로 인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탄원하며 애곡합니다. 시온의 자녀들을 지독한 심판을 이제 멈추고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 고통을 통해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주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픔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녀와 교회와 나라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멸망한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 말씀으로 살아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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