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04-01)
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신칭의
로마서 4장 1-12절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더욱 진가를 발합니다. 하지만, 다이어몬드와 같은 귀중한 선물을 받아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위대한 가치를 깨닫습니까?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정의에 대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정의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대해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먼저 의롭다 하심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의 법이 실효성 있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1-3)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십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랑의 문제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1-3)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음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고, 믿음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역사 위로 들어 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결과입니다. ‘의’는 약속이 잘 지켜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신실함’ 또는 ‘믿음’은 ‘그 약속을 잘 지키는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언약을 전제로 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신실한 표현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전하고 싶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자들, ‘의롭다’고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신실하신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실하심’, ‘예수님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복음이 아닙니다. 이미 1:18절에서 3:20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의인 아브라함과 노아 그리고 엘리야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믿음’,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하니, 세 가지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믿음을 자랑할 수 있느냐?’입니다. 당연히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본문에서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부르는 근거 질문 제기(1)
사도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이 문장을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 것이 육신을 따른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바울은 4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시는 방법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⑵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2-3)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의 ‘행위’ 혹은 ‘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조입니다. 그는 유대인들도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행위나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만큼 행위에 있어서 매우 의로웠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들은 믿음으로 위대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바로 알면, 유대인들도 복음에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의 행위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3:30에서 바울은 이미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아님을 천명하고, 다시 4:1에서 그 ‘육신의 표시’를 따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되었는지 질문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는 할례를 지칭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의롭게 된 ‘방법’은 결정적으로 그가 의롭게 된 ‘때’에 달려 있습니다. 즉, 할례 받기 ‘이전’에 그가 보인 믿음을 통해 이미 의롭다 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선택되어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지와도 어떤 ‘업적’이나 ‘일’과도 상관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혜’입니다. 이제 바울은 독자들이 인정하거나 물을 수 있는 권위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창세기 15장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반적인 은혜의 약속을 듣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창세기 15:6에 의하면,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4장 전체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5:6의 전후 문맥은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의로움’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5:6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시작된 순간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부름 받아 땅과 자손을 얻을 약속과 열방을 위한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소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미 같은 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세기 12:4), 벧엘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세기 12:8).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즉, 창 15:6의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는 구원의 첫 관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오히려 창 12장에서 아비 집을 떠나는 장면은 어려운 순종의 결단을 위한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그 증거로 3절에서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을 근거로 들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의로움’이라는 단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약속 안에 신실하게 머물러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는 사실은, 로마서 3:28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선포를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 내용에 전말은 아브라함은 아무리 기대려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주인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는 방법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구원에 대한 우월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더 나가서 이 구원이 교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대로 구원은 우월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은 것뿐입니다.
믿음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4-8)
사람들이 일하고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함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안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죄 사함의 복을 선물해주십니다.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8)
사도 바울은 앞 절에서 인용한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람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심과 선택하심으로 의롭게 여기신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⑴ 불경건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얻는 의로움(4-5)
사도 바울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선택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제 4절에서 상업적 비유 하나를 듭니다. 어떤 일꾼이 일을 하고 상급(개역개정에 ‘삯’이라 번역)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보수를 받은 것이라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4). 재미있는 것은, 4절에서 바울이 ‘미스토스(μισθ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창세기 15:1 칠십인역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이라는 상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땅과 자손의 상급을 얻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공헌을 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대가’ 혹은 ‘보수’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장차 받을 상급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아브라함은 그것에 ‘믿음’으로 반응하였을 뿐입니다. 5절은 4절의 상업적 비유와 바울의 요점을 연결시킵니다. 아브라함도 ‘일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또한 비유 속의 일하지 않는 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볼 때, ‘경건하지 않은 자’란 표현을 통해 바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들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반응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셨을 뿐, 할례와 율법 때문에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⑵ 죄사함을 받은 자의 복에 대한 다윗의 고백(6-8)
사도 바울은 6절 이하에서, 이 동일한 진리를 시편 32:1-2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언어들을 통해서 더 보편화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도 범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간음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단순하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아무런 수고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사전 행동이나 공헌 없이 은혜와 선물로 죄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들의 복에 대해서 이미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신뢰이든, 신실함이든)을 (인간의) ‘일’에 포함시키지 않고, 하나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로마서 3:21-26에서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임한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한 바울은 4:1-8에서 오직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의로움의 지위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브라함 이야기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재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구원에 대해 아무 자격이나 공로도 없는 당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방인이 받을 구원(9-12)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십니다. 유대인은 그들이 율법을 맡은 것을 자랑하며 유대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할례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9-12)
아브라함이 이방인처럼 무할례자 신분에 있었을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먼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믿음의 징표로써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할례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⑴ 무할례시에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9-10)
바울은 이미 3:30에서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로마서 2:25-29;3:29-30).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언약 백성의 표지가 오직 ‘믿음’임을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와서 본격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앞의 논의를 다시 정리한다(9). 아브라함도 할례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할례와 무할례가 아니라 믿음의 소유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⑵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11-12)
10-12절에서 바울은 이를 재미있는 논리로 설명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였습니다(10). 둘째, 할례의 표지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의로움을 인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11). 셋째,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보여준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의로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12). 이상의 논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의 원래 문맥이나 구약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의문점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의롭다 인정받은 것은 분명하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그 시간적 순서들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으로 할례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 자손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해 놀랍게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해석의 출발점에서 갈라디아서 3:16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브라함 자손은 그리스도 한 사람뿐입니다. 로마서 3:21-26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의 소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통해 그 소명을 성취하셨다. 아브라함 자손의 이야기는 결국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이 사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여겨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11).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12).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믿을 때의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그 표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혹시 할례와 같이 외적인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를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로 삼고 나타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느 정도 억울한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한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것이 없는데, 자격이 없는데 먼저 다가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상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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