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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02)


끝까지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3-24절


어린 시절에 들이나 산에는 ‘야생배나무’, 또는 ‘아그배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사과나무과’에 속하지만 작은 구술만한 배처럼 생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야생배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종종 이 나무에 배나무를 접붙이면 큰 배를 수확할지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배에게 큰 배를 접붙임으로 큰 배를 수확한다면, 그 배나무는 야생배나무가 아니라 훌륭한 배나무로 변할 것입니다. 그냥 작은 ‘아그배’를 열리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에서 큰 배가 열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따라서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교마함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간절한 소망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도 율법이라는 모든 껍질을 버리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울(13-17)

복음이 이방인에게 열렸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을 바라보면, 이방인들에게 당부합니다.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3-15)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한편에서는 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많이 돌아오는데,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방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돕는 공생(共生)의 길임을 말씀합니다. 이제 이방인들에게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먼저 자신의 직분에 대해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직임을 받은 사람인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을 그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르심을 받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이러한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인은 성도들도 중요합니다. 이 질문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직분은 중요합니다. 그 직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맡은 자리가 사람들의 이목에 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와 직분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세우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어느 곳에서도 요셉처럼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항상 어떤 자리이든지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데 그 사람만 가면 그 자리를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의 선교는 바울이 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빛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자리가 바울처럼 빛나게 하는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 놀라운 간증과 기적과 축복이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재확인시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틈만 날 때마다 자신의 직분과 사도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대해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직분은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수고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참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축복 받은 이방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을 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돌아오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더 열심히 감당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감람나무를 통한 비유(16-18)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접붙임을 통해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의미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6-18)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구원관계에 대해 설명 합니다. 그가 말하는 돌감람나무는 이방인이고, 참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꺾인 돌감람나무’로 표현합니다. 돌감람나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꺾인 돌감람나무 가지는 얼마나 더 가치가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꺾인 가지는 그대로 두면 말라서 비틀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없이 다만 불에 던져 넣을 뿐입니다. 영적으로 살펴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가치 없고 볼품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버림임을 받을 수밖에 없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이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감람나무 가지가 참감람나무 가지가 되어서 뿌리의 모든 공급과 자원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감람나무 가지에서 ‘새로운 참감람의 열매’가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근본적인 본질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일나무는 항상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떤 결과를 맺습니까?

42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3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4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3-45)

돌감람나무는 열매를 맺어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것도 꺾인 가지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이방인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서 훌륭한 감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참감람나무였던 유대인들은 돌감람나무가 되었습니다. 열매가 과거에 이방인들처럼 형편없는 열매였습니다. 그라나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만, 너무 자긍하면서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접붙임을 위한 사역자(19)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19) 이방인인 돌감람나무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참감람나무로 접붙이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그 사역을 매우 귀중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사역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당신도 바울처럼 주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원대한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20-24)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나 멸망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0-24)

⑴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20-22)

돌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접붙임이 되고, 참감람나무의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틀이 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취해야 할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0a). 유대인은 원 가지(뿌리)이고 이방인은 접붙인 지류(가지)인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꺾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접붙여진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약속된 특권을 대신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구원 받은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 자랑이 될 순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에 대해 교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져선 안 됩니다. 둘째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거나 방자하게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20b). 만일 그렇게 처신한다면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꺾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근거가 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믿음의 사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敬畏)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은 외예가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서는 참감람나무 가지이든지 돌감람나무 가지이든지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칙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구원의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있지만 준엄(峻嚴)하심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준엄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나 혈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다 꺾기우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를 구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아도, 즉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대한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은 충분이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만은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판과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있습니다.

⑵ 유대인에 대한 구원(23-24)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다. 참감람나무가 원뿌리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에게 대해 믿어야 합니다. 참감람나무 임에도 믿지 않는 것은 꺾인 가지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외형적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믿음이 없다면 참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꺾인 가지이기 때문에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이나 지명들이 모두 생소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익숙한 문화와 환경들, 그리고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들이 믿기 시작하면 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믿었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뿌리에 접붙이지 않으면 그가 참감람나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 인자의 원리, 은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실만한 능력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강조하고 준엄하심을 간과하는 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생명력 넘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복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요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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