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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01)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12절


지난번 뉴스에 ‘과자들의 과대포장’이란 제목으로 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포장은 큼지막한 데, 외형적인 부피에 막상 10%도 안 되는 내용물을 담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겉포장은 분명히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포장은 튼튼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포장이 아무리 화려해도 내용물이 변변치 않으면 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삶에는 형식과 본질이 있습니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구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선민 민족이었던 유대 민족들이 전반적으로 구원에 길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을 받게 된 동기가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들의 악한 결정에 의해 된 것이라고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이스라엘(1-5)

종종 잘못된 자녀들 중에는 자신이 잘못된 것을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장성해서 하는 말이 ‘왜 어릴 때에 나를 잡아주지 않았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을 주장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적반하장으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반열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로마서 10:21). 지금도 2000년 동안 한결같이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예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5)

사도 바울은 앞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지 못했던 이유로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취하지 않고 율법이라는 껍데기만 취했던 결과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⑴ 자신을 통한 증명(1)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에서 포기하지 않았음을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설명합니다. 자신도 혈통적으로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디모데전서 1:15)고 고백합니다. 자신같이 부족한 사람도 구원의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나기 전에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인 율법에 메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등등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사도행전 9:1-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이라는 껍데기를 취하던 자신의 아주 어리석은 삶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껍질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본질에 대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본질을 구하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질을 추구하도록 소개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면서, 가망성이 조금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인생을 바꾸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알곡을 위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할 때 안타깝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알고 나니깐, 과일을 깎아서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만 먹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받은 백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⑵ 역사를 통한 증명(2-5)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가장 암흑과 같은 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셨던 것을 설명합니다. 그 시기가 바로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를 통해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당시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은 이방 시돈(Sidon)사람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왕비 이세벨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매우 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북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하도록 장려하고 이방 종교의 부도덕한 생활을 유행시키고 베니게(Phoenicia)에서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바알 선지자 450명을 불러드렸습니다(열왕기상 16:31-33).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참함을 토로하면서 “나만 남았나이다”(왕상 19:10)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생각에는 모두 죽고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혼자 싸워간다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8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18)

엘리야에게는 뜻밖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칠천 명을 감추어 두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거부한 것 같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이사야 6: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할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사랑한 백성들 섣불리 심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지 않으면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욱 폐쇄적인 삶으로 갇혀 살아갑니다. 새로운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가 그런 이기주의와 편견적인 결과인 실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마음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 다음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들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남겨두신 성도’입니다. 오늘날 점점 어두움이 찾아오는 저녁처럼, 영적으로 세상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중요한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만족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남아있길 원치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초대교회에 사도 바울을 만나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남겨주신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있어서 우리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당신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 가족과 이 시대와 이 지역을 향한 구원 역사를 강력하게 이루어가길 원하신 것입니다.

 

버림 받게 되었던 이스라엘(6-10)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도 상대방이 거절하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가 매우 궁금합니다. 사도 바울의 통찰력은 위대합니다. 그는 시대와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알곡은 버리고 껍데기만 가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6-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 후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세워져서 모든 열방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잠시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이 작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위해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모든 관계는 쌍방적인 역할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로 잘못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계속 베푸셔서 참 순종하는 자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족시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신 전반적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들을 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일을 잘 깎아가지고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만 챙기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욕심에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력과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욕심으로 잘못된 판단력을 가진 것입니다.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인 율법만 가지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은혜로 일어난 사건이지 율법을 따라 행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제깨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11-12)

세상에서도 잘못된 관계를 지속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서 넘어진 것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1-12)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제거된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공포요, 진노입니다. 다행인 것은 아직도 구원의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것을 ‘넘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짐’에 결과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는 유대인들이 받아야할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버렸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결과,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이 흘러갔기 때문에 이방에서 복음이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됨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회복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넘어졌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오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순종하였다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전케 되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믿는 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2)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성경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됩니다. 영어 성경 ESV에서 “If their failure means riches for the Getiles, how much more will their full inclusion mean!”(만약 그들의 실패로 이방인들이 부유해졌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그들의 전체에게 있겠는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풍성이 주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순종한다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뜨겁게 하려는 데는 방해가 많습니다.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넘어집니다. 그러면 당신이 받아야 누려야할 축복을 타인에게로 가버립니다. 여호수아처럼 믿음으로 살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축복의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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