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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4-01)


능력에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4장 1-12절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받아들임과 거절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의외로 마음을 쉽게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무리 두드려도 닫힌 문처럼 딱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주는 현장에는 언제나 긴장감과 긴박감이 있습니다.

 

성전 미문 솔로몬의 행각에 앉은뱅이가 치유된 기적 사건에 대한 결과를 기록합니다.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고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원 앞에 서서 그들의 신문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적적 사건에만 관심 가졌지만, 사도들은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 앞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치유 사건에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핍박 가운데 복음의 열매(1-4)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전파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밖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한다.’, ‘회개하라!’라는 거북스런 내용도 전하기 때문입니다.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1-4)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4장은 복음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찬양하는 사건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는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 복음을 거부한 무리들(1)

사도들이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을 증언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다가왔습니다(1). 이미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넘겨준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경비대장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전과 성전 주위 질서와 치안 유지를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극했던 두 가지는 선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참지 못했습니다(눅 20:1-8).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분개하며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사도들(2-4)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2)라는 말씀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으로 앞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씀은 또한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맨 앞에 놓인 문구 “예수 안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있어 예수님의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합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활해 높아지신 예수님 때문에 이미 현재적인 실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두개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마 22:31-32; 막 12:25-27; 눅 20:35-38).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님의 구속 사건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어떤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겠습니까? 사두개인을 제외한 유대인들은 대개 죽은 자들이 미래에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에 담긴 결정적인 의의는 부활의 확실성을 입증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되는 현시대가 바로 부활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때 구약의 일부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마 27:52-53).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고전 15:12-17). 바울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시대는 옛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미래에 있을 성도들의 육체적 부활은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된 부활 시대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소집된 산헤드린(5-7)

성도는 이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많습니다.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상당히 많은 핍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곤경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와 관계에 기반을 둡니다.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5-7)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힌 다음 날, 당시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사도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처형시키는 데 앞장섰던 자들(눅 22:66)이 참석했습니다(5-6).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던 자리에 사도들도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그들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앉은뱅이의 새로운 인생이 아니라 오직 누구에 권세로 사역했냐는 것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들은 누구 이름이 더 큰지가 관심이 있어서 누구에 이름으로 전하는지 추궁했습니다. 그들 중에 가장 높은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보다 더 높은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전했지만, 그들의 판단 기준은 종교적인 권위였습니다. 물론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허락 아래 증언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마 26:65).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사도들을 같은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의 치유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선포한 베드로(8-12)

복음을 전할 때 논리로 설득하거나 논쟁하려 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영혼들이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의 유일한 이름인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함으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8-12)

성령께서는 위험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셨습니다. 이미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을 성령께서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0:19-20). 복음을 전한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상태로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핍박당할 때 성령이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발견합니다(눅 12:11-12).

(1)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베드로(8)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8). 베드로는 성령이 임재하기 전에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나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종교지도자 앞에서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연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심으로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당당하게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심을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음을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지(9-12)

베드로는 공회가 사용한 “누구의 이름으로”란 문구에 맞추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라고 대답합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선포했습니다. 자신들을 정죄하려는 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산헤드린 공회가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한다고 밝혔습니다(10).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음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에 버림을 받았으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11: 시 118:22). 이 세상에 구원을 얻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밖에 없음을 선포합니다(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박해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은 단지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 전쟁에 적군인 사단의 나라에 공격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큰 저항을 받을 수도 있는 강력한 초청의 메시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성령을 덧입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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