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도행전(03-01)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교회

사도행전 3장 1-10절


목회를 하면서 도박에 빠진 어떤 여성도와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 상담을 하면서 도박에 빠진 이유를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모두 학교가고, 남편도 직장에 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친구들과 만나서 장난삼아 고스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박을 심취하면서 시간도 잘 가는 줄 모르고 무료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점점 도박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박 장소인 ‘하우스’를 들어가는 날은 밤새는 줄 모르고 도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녀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밖으로 돌기 시작하고, 남편은 자녀들을 양육하지 못한다고 싸우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도 모두 탕진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붕괴 직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미친 자신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을 보면서, 문뜩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번개처럼 번트기면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심방을 요청했고, 2년 동안 도박의 삶을 떨어놓고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이제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완전히 옛 도박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뜻밖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 사도들을 만남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무의미한 인생들(1-3)

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면 의식이 없이 수많은 호스로 연명하고 사람들을 봅니다. 이렇게만 살아가야할까 비참한 인생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병원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인생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귀한 시간을 살면서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수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1-3)

 

사도행전 3장부터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세워가는 교회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보게 됩니다. 정말 세상을 살리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⑴ 성전에 오르는 두 제자(1)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은 오순절 축제의 분위기 속에 뜻하지 않는 사건들로 예루살렘은 뒤숭숭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상한 분위기와 상관없이 평상시 그대로 하루에 세 번씩(오전 9시, 오전 12시 그리고 오후 3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무런 기대 없이 종교적인 습관대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오후 3시)에 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올라가다가 성전 입구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았습니다.

 

⑵ 미문에 앉은 걸인(2)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걸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인 앉은뱅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친구나 가족들이 그를 매고 와서 미문에 두고 떠났습니다. 미문이 이름 모를 앉은뱅이의 직장이었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거지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의 순서를 기다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이나 당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하려 성전을 올라가면서 도와달라는 그의 구걸 행위를 보았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가 미문에 앉은 것은 미문이 그의 직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미문까지만 유효했습니다. 유대교는 그가 하루하루 연명하는 정도로만 유익했습니다. 그가 자립해서 그곳을 떠나게 하지 못했고, 더욱 태어날 때부터 죽은 다리를 고쳐주진 못했습니다. 어떤 제사장도 그 걸인을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감히 유대인들과 똑같이 제사를 들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앉은뱅이라고 하면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성전은 앉은뱅이 걸인이 들어가기에 너무나 거룩해서, 일반 사람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육적인 앉은뱅이뿐만 아니라 영적인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성전은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구걸하는 직장뿐이었습니다. 날마다 성전으로 출근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미문 곁에 앉아서 제사를 지내려 오가는 사람들이 종교심에 조금 더 많은 자선을 베풀어줄 것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습관적으로 행동하면서 새로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의 갈증을 채워 줄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는데,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영혼이 매우 갈증 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욕만 먹었지 갈증을 채우질 못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만나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에게도 진정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 하루하루를 허무하게 지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무의한 생활은 일반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도 그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을 무의미해서 목적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가치 없는 괴로운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찾습니다. 수다를 떨어볼 친구들을 찾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보려고 술이나 도박에 빠져서 점점 술중독, 도박 중독 그리고 인터넷 게임 중독이 되어봅니다. 과연 이러한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⑶ 제자들을 만난 걸인(3)

제자들도 습관대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그 앉은뱅이 걸인을 만났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다가간 것입니다. 사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간 것입니다.

두 제사들이 지나가다가 그 앉은뱅이 걸인 앞에 섰습니다. 앉은뱅이는 항상 하던 대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가 지나고 나면, 자신에게 누군가가 자선을 베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간절하고 불쌍한 눈빛을 보내면 제자들을 처다 보았습니다. 걸인에게는 단 한 가지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어제보다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적선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불쌍한 자세를 취해 보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유지할 금과 은뿐이었습니다.

종종 생활 속에서 무료함에 빠져 있는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갈증을 채워줄 새로운 것을 찾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선한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질 원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갈증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걸인 앉은뱅이와 같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습관이 됩니다. 나쁜 습관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성도들은 세속적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새롭게 변하는 인생들(4-8)

겨울철 죽은 가지와 같은 무의미한 인생에 봄철에 생기가 돋는 듯한 삶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지만 정말 가치 없는 인생을 갈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아서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⑴ 걸인을 주목하는 제자들(4-5)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4-5)

 

무능한 성전에서 할 수 없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일어납니다. 걸을 수 없었던 걸인은 금과 은을 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기 때문에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날이 새면 또 무의미하게 성전 미문으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소망이라고 한다면,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많은 돈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걸인에게 사도들이 다가갔습니다. 반대로 제자들이 다가선 만큼 앉은뱅이 걸인은 최대한 더 불쌍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가까이 온 제자들은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희망 섞인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에게 영원한 것을 주기 위해 ‘우리를 보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 걸인은 사도들을 향해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습관대로 제자들에게 ‘무엇을 얻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걸인에게는 사도들이나 일반인들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돈만 구걸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영혼의 갈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름철에 시원한 생수와 같이 것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갈증이 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모래 날리는 사막일 뿐이지 진정한 생수는 주지 못합니다. 순간적으로 채워줄지 모르지만, 또 다시 갈증이 나게 합니다. 궁극적인 것으로 채워주면 갈증 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적이고 일시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관심을 세상적인 것에서 점점 영적인 것으로 돌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⑵ 인생에게 필요한 것(6-8)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6-8)

① 영적으로 줄 수 없는 것

앉은뱅이 걸인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도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걸인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금과 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과 은을 약속해 주신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육적으로 원하고 욕망하며 성취하고 싶은 것을 채워주신 분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채우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꼭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인 영생입니다.

사람들의 갈증은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주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3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② 영적으로 줄 수 있는 것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는 요구에, 앉은뱅이 걸인은 사도들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은과 금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수단일 뿐입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으로 만족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라며,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은과 금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재물을 가진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나 영적으로는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풍족하게 만든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조금 더 넉넉한 소유를 가진 것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은과 금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은과 금이 없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③ 믿을 추구한 베드로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앉은뱅이 걸인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일어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걸인의 믿음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걸인의 내적으로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걸인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켜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 기능을 못했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일어나 서서 뛰었습니다. 처음으로 걸어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과 성전 미문 앞 두 곳이었는데, 이제는 가고 싶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세상이 걸인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영적인 지도자에게 예수님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요구 때문에 어리석인 지도자들은 예수님보다 세상적인 것을 채워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부터 교회들이 변질된 세속화 문화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변질된 교회는 은과 금은 많이 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 변화시키려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⑶ 변화된 인생(8b)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b)

앉은뱅이의 치유는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본인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앉은뱅이의 치유된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둡던 삶이 변하여 정상적인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주님은 앉은뱅이를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앉은뱅이는 걸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장애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성전은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제 일반인들처럼 성전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자신의 변화를 찬송했습니다. 평생 동안 앉은뱅이로 성전 근처에서 걸인으로 멍든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변화된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찬양하며 예배하는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변화된 삶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습니다.

그는 단지 치유된 것뿐만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그가 기뻐 찬송하는 자체가 복음 선포였고, 진리를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적인 성전 출입과 감흥도 없던 형식적인 예배일지 모르지만, 앉은뱅이에게는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성전의 지도자들도 모르는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변화는 육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한 사람들(9-10)

세상에는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지 병을 고쳐 주는 분이나 이 세상에서 삶을 윤택해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사역만 하려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전해야 합니다.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9-10)

 

예수님의 부활 다음으로 또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만 제거하면 끝나버릴 것 같은 일이 여기저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타나 버린 것입니다. 평생 동안 걷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서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뛰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기적 이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앉은뱅이 치유 사건은 눈에 보이는 기적뿐만 아니라 이면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음이나 승천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을 통해 전달되어짐을 보여줍니다. 기적의 주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또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도들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확실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붙잡아 일으켜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명령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으로 넘치는 삶을 원합니다. 교회들은 화려한 예배당 건물과 세련된 예배 형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 같은 재산은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늘진 상처를 만져 줄 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세상은 성도들이 전하는 말을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