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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9-02)

 


준비된 사람 아나니아

사도행전 9장 10-19절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1919년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이사를 합니다. 그 집을 구입한 이유는 근처에 당시 위대한 작가인 ‘셔도우 앤더슨’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앤더슨과 글 쓰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이사를 했던 것입니다. 점점 가까워져 글 쓰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가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그 유명한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앤더슨은 헤밍웨이만큼 유명하지 않습니다. 유명인이 그렇게 되기까지 누군가 그를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맨토링이란 주전 1200년 전 이야기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은 이제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환상을 통해 사울을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리십니다. 사울의 과거 경력에 대해 알고 불안해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그가 복음을 위해 선택된 사람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건강을 되찾습니다.

 

아나니아가 본 환상(10-16)

위대한 리더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대한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맨토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맨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맨토에게는 요구되는 자격이 있는데, 특히 영적인 맨토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절대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10-16)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신중하고 아주 세밀하게 일하십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굴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시기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하셨습니다. 신실한 아나니아를 준비하십니다.

⑴ 준비된 제자 아나니아(10)

훌륭한 일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아나니아’라는 믿음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나타나내고 이루시기 위해 아나니아를 택하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군인 바울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소개된 위대한 맨토 아나니아를 소개할 때, 많은 자격들이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그를 주의 ‘제자’로만 소개됩니다. 주의 제자로 소개되는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이미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사울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과 같이, 아나니아도 사울을 등장 시키고 자신은 역사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아나니아를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자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의 삶은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나중에 바울의 입을 통해 그가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라고 소개를 덧붙인다(사도행전 22:12). 문학적 의도와 각 본문의 정황에 따라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는 것은 누가의 집필 방식입니다. 주님은 환상 중에 ‘아나니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때 주님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⑵ 사역을 가르쳐주신 예수(11-12)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주십니다. 한 영혼을 새로운 사람으로 빚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고도 섬세한 계획이 그리스도에게 결박당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아나니아에게 전한 사역들은 ⑴ 찾아가야 할 집 주인의 이름과 ⑵ 그 집이 위치한 거리 이름과 ⑶ 찾아가 만나면 사울이 하고 있을 일과 ⑷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보게 될 환상의 내용까지 모두 세밀하게 알려주십니다.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는 사건과 관련해 사울은 모두 세 번의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습니다. 누가는 첫 번째 환상을 사도행전 9:4-6에서, 두 환상을 9:11-12에서 기록한다. 사도행전 22:17-21에서는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라는 환상을 들은 것에 대해 기록합니다.

⑶ 머뭇거리는 아나니아(13-14)

사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아나니아는 매우 부담스러운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사울에 대한 소문은 아나니아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사울은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미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가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다메섹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른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포악한 사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러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라고 말씀 드립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울을 생각만 해도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 안수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순종하기보다 머뭇거리며 반문한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사울에 대한 아나니아의 이러한 반응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는 아나니아의 입에서 나온 사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바로 이어서 소개될 사울의 새로운 소명과 변화된 모습을 극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보여 줍니다

⑷ 사역을 다시 확인시킴(15-16)

주저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 주님은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앞으로 사울을 자기 종으로 부르셔서 어떠한 심오한 뜻을 펼쳐 나가실지 보여주십니다. 누가는 이후 이 이야기를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직접 말해 주는 방식으로 기록합니다(사도행전 22:14-16).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다소 사람 사울을 눈여겨보셨고, 그에게 주실 어떤 위대한 사명을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박해 한 ‘전파’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의 이러한 죄과를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될 대상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방인이 전도 대상 목록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그의 복음 전도 사역이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주님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는 한편, 또한 기도하고 있던 사울에게도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쌍방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쌍방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계시 방법은 나중에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시 보게 되는 사울(17-19a)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이고 일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러한 일군을 찾으십니다.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17-19a)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의 환상으로 보여준 지시를 따라 ‘직가(直街)’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음 것입니다. 유다의 집에 들어간 아나니아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에게 안수를 합니다(12).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부릅니다.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사울 아델페 Σα。ún αδελφε)를 보면,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형제는 예수 믿는 자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국적과 성별과 나이와 지위와 피부색을 막론하고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이보다 따뜻한 호칭이 이 세상에서 또 어디에 있으랴!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나타나셔서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사울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키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려고 자기를 보내셨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것은 그가 시력을 회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세례가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을 유대교로부터의 ‘개종(conversion)’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call)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전통적 인 견해는 이 사건을 대체적으로 유대교로부터의 회심/개종으로 이해합니다. 루터는 사울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 낙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통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행위를 강조하는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로 전향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이 사건을 바울의 개종으로 해석하는데 반대합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의 모습에서 심각한 죄책감이나 유대교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뚜렷한 구절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울은 율법 앞에서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살았습니다(빌립보서 3:4-6). 따라서 최근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루터의 전통적인 견해가 반박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사울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루터의 잘못된 견해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당시 유대교의 구원관에 대한 오해도 잘못된 견해로 이어졌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해했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목적이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면 다시 그 관계가 회복되고 율법에 규정된 제사를 통해 언약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 당시 유대교의 율법 이해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울의 경험이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처럼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이 아님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언하자면, ‘다메섹 사건이 개종인가 소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개종이자 소명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눈을 떴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아나니아를 통해 눈을 떴습니다. 그에게서 사명을 들었고, 공동체의 따스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용서였고 인정이었습니다. 회심을 새로운 공동체와 관계하는 일입니다. 그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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