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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4)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빌립

사도행전 8장 26-40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성장해 나갑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 집사를 통해 복음을 위해 수고할 사람의 발걸음보다 앞서 걷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 혼자가 아닙니다. 빌립의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주의 사자로부터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명령을 따라 광야로 간 빌립은 길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입니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시는 빌립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묻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은 빌립은 그에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길에서 내시를 만남(26-28)

목회자가 수많은 성도들이 있는 규모 있는 교회를 사임하고 성도들이 몇 명 있는 작은 교회로 옮긴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분을 이상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 곳이라면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많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습니다. 물속에 빠져 허덕인 것처럼 구원해 달라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전해도 스펀지처럼 말씀을 사모하며 받을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6-28)

복음 전도의 출발은 순종이고 간절함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말에 상대방이 들을 건인지 제는 성도가 아니라 무조건 순종하는 종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니면 절대 채울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도자의 마음에 많은 영혼보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⑴ 새로운 지역으로 떠남(26)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많은 기적들도 나타났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병든 자가 낫게 되는 놀라운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조금만 더 사역하면 사마리아 성에 더 큰 복음의 부흥이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사마리아의 사역하던 빌립 집사에게 성령께서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빌립은 아직도 사마리아에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일꾼을 양육해서 든든한 교회를 세우려면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는 사역지를 내려놓고 광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땅입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땅입니다. 빌립은 성령의 말씀에 의지하여 성공적인 사역 현장을 내려놓고 떠납니다.

⑵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27-28)

빌립 집사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에서 수레를 타고 가는 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며 내시였습니다.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 개종자(proselyte) 혹은 에디오피아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추정됩니다.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받고 있었지만, 유대 공식적인 절기인 유월절을 참여할 정도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모세오경에서는 내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신명기 23:1). ‘내시’로 일반적으로 거세한 고자를 가리킵니다. 그 내시는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 56:3-8을 읽을 신실한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구약에 익숙한 독자들로 하여금 이사야 56:3-8의 성취로 읽도록 하려고,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요한복음 12:20에 나오는 헬라인들처럼 이스라엘의 절기 기간에 예루살렘을 방문해 예배를 드린 후 귀국하는 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에디오피아 고관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에디오피아 내시는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예루살렘 예배에 참여하는데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없었습니다. 항상 허전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성경을 가르쳐 준 사람도 없고, 성전에서도 넘어서 성전의 중심으로 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정 있고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는,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 탄 채로 소리 내어 성경을 잃으면서 가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개인적으로 찾아다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성령께서 립빏 집사와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왕궁이나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말입니다. 그는 수레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소리가 빌립에게 들렸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내시를 만난 빌립(29-35)

신실한 성도들이라면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 진리를 향해 열린 마음, 진리를 수용하는 마음이 항상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마음을 만지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빌립에게 복음을 들은 에디오피아 내시는 복음을 수용하고 자신에게 세례를 줄 것을 요구합니다.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대답하여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29-35)

빌립 집사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섬세한 손길을 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⑴ 내시를 만난 빌립(29)

에디오피아 내시는 내려가는 동안 열심히 수레에서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나아가라고 명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그곳에서 수레를 발견했을 때, 다시 한 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는 ‘주의 사자’대신 ‘성령’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내시가 타고 가던 수레는 황소가 끄는 수레라 빌립이 따라잡기에는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대 시대의 관습대로 내시는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 수레로 가까이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빌립 집사는 수레 가까이 다가가니 성경을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⑵ 내시와 빌립의 대화(30-35)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시에게 철통 경호를 뚫고 나가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분상으로 감히 근접할 수 없었지만, 성령께서는 에디오티아 내시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담대히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관심사인 그가 읽고 있던 성경에 대해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빌립의 질문은 대화를 이어가려는 유도 질문입니다. 이에 내시는 답답한 마음을 담아서 주저 없이 반응합니다.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빌립이 입은 옷차림새나 그의 말투에서 그가 유대인인 것을 감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시는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하셨던 것처럼(누가복음 24:25-27, 44-47) 구약의 내용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설명해줄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본문은 이사야서였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구약성경 본문이 바로 이사야 53:7-8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7-8)

이 이사야 53장 7-8절은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시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면서 성취된 말씀을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 자신도 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때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이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했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1:11).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이 예언을 성취하기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 말씀을 읽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이사야의 예언을 연상시킬 만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과 유대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동일 인물로 본 전례를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씀은 다름 아닌 이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 본문(이사야 52:13-53:12)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두 인물을 자신의 인격과 사역으로 성취하신 분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자기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립이 이 성경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빌립은 예수님에 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내시가 물이 있는 곳에서 수레를 멈추고 세례를 받으려 한 것을 보아도 빌립은 복음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각자 제 길을 감(36-40)

준비된 지도자는 이 시대의 필요와 도전을 예리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전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건강한 공동체의 지체로 세워가는 사역자, 복음의 증인으로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빌립은 간다게의 영적 갈증을 간파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없음)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36-40)

내시는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 나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빌립은 수레를 멈추고 물로 내려가서 내시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36절과 37절 사이에 초기 필사자(주후 2세기경)가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서방사본에서 발견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사본학자들은 누가의 기록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어떤 초기 필사자가 여기에 이 내용을 추가한 것이라 판단했습니다(개역개정은 ‘없음’으로 처리). 헬라어 원문은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 단락의 이야기를 급작스럽게 마무리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여기서도 사본들 간의 이문이 존재합니다. 다른 사본에 보면 그들이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내시위에 임했는데 주의 사자가 빌립을 잡아챘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본학자들은 필사자들의 실수로 성령(프뉴마 하기오스)을 가리키는 단어 중 하기오스부터 주의 사자(앙겔로스 퀴리우)의 ‘앙겔로스’까지의 내용이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긴 문장이 원본의 내용을 반영한다면, 내시가 세례 받은 직후 성령이 그에게 내려왔다는 말이 되어 본 절이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사본학적으로는 현재의 원문이 우세하지만, 긴 본문이 원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제 빌립을 통해 인종과 지역과 역사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역자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의 구체적인 형편을 살피고, 함께 기도하며, 물질로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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