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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3)


사마리아에도 임한 성령

사도행전 8장 14-25절


하나님께서 사역을 맡기실 때, 먼저 달란트를 주시고 사용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보다 변화를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사람은 참 생각이나, 참 공의의 길을 갈 때도 혹독한 시련을 겪지만, 성숙하게 변화된 사람만이 어디서도 쓰임새가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감옥이나 심지어는 전쟁터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 있어야할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필요로 하는 모순과 악이 극에 달하는 지옥 같은 곳이며, 거기서 그의 존재는 더욱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숙한 이는 그런 곳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는 변화, 그것은 우리의 목적이고 인간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진상 조사단’으로 파견합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두 사도가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는 것을 본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베풀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잘못된 동기와 생각을 보고 강한 어조로 경고의 말을 선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14-17)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은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순간부터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타적으로 인종, 나라, 사상을 초월해서 하나됨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14-17)

예루살렘 박해를 통해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마리아의 이야기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있는 사실이 사도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들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하셨던 약속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⑴ 베드로와 요한을 보냄(14)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선포된 일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회의를 소집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조사단으로 뽑아서 파견해서 확인하도록 합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제자들의 시각은 누가복음 9장 54절을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이동 경로를 선택하셨을 때,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에 분노한 두 명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하늘의 불을 내려 사마리아 성을 불태워 버리자’고 제안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 꾸중을 듣고는 예수님의 일행은 사마리아가 아닌 다른 경로를 이용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를 불살라 버리자고 했던 제자들이 이제 조사단을 꾸며 그곳을 조사하려 갑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두 사도를 어떤 의도로 보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사도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사상이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해 두 명으로 구성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모든 교회들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했기에, 사도들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가서 보고는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역사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던 복음이, 이제 이방지역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지역에도 퍼졌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형제들도 그 동안 원수로 여기고 부정한 자로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한 형제로 맞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⑵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기도(15-16)

누가의 말에 의하면, 사마리아로 내려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도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빌립의 전도를 통해 복음은 믿었습니다. 빌립에게 물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두 사도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안수 기도하니깐 놀랍게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기도는 해주었지만,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사람들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매우 대단한 사건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성령을 받은 놀라운 현장에 증인들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제자들의 부끄러운 수준을 들어냈던 증인이었다면,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역사를 살아내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확인시킨 증인들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유대인처럼 사마리아와 유대를 분리하는 사도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원수처럼 여겼던 사람들까지도 교회의 한 지체, 한 몸이 되게 하는 연결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⑶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 임재(17)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람들은 모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는 회심한 것까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만한 성령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이제 두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계십니다. 만약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께서 임하셨다면, 그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역사를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에, 사도들의 안수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도 나타납니다. 이방인의 회심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1-48). 초대교회에서 모두들 부정한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인정해야할 것인지를 격론이 일어날 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결론 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5:). 성령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통일에 역사, 하나됨의 역사가 사마리아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인들에게 성령이 임재 하는 순간이 사마리아 전도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성령이 임재함으로 사마리아의 회심자들은 마지막 의심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완전히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사도 베드로를 통해 ‘너희는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하여 회개하고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렇게 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라(사도행전 2:38)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 선언은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회개와 결단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소개됩니다. 초대교회의 사상을 규범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이와 상반되는 듯한 모습을 보줍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왜 사마리아인들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까? 이 질문에 관한 답은 1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마리아인들의 성령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는 15절과 17절 사이에 ‘설명’을 삽입합니다. 16절을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왜냐하면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그들 중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행전 2:38과 상반되는 구절을 이곳에 추가한 것입니까? 이 구절은 실제적으로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물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재차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본문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특히 오순절 신학계통의 신학자들에 의해 증거본문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구절을 통해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항상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증거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해석이 합리적인 것입니까? 이 구절을 어떤 교리를 지지하는 증거본문으로 사용하기 전에, 역사적인 관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왜 이 사건에서 사마리아인들의 회심 및 물세례와 동시에 성령이 내리지 않았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소위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내린 ‘성령 세례’가 두 사도가 올 때까지 지연된 사실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라는 누가의 강조적인 표현 안에는 이미 사도행전 2장 38절에 제시된 ‘성령 세례’에 관한 규범적 선언과 대치되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의 회심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을 누가가 두 개의 서로 분리된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대변해줍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랜 반목과 질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이후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 주변 민족과 혼혈 관계를 맺으며 순수한 민족적 혈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400년경 그리심 산에 모여 자신들만을 위한 성전을 세웠고,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보수적인 예루살렘 교회에 신학적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제거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가 나중에 고벨료 사건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했다는 점입니다(사도행전 11:17).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누가는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사마리아의 성령 사건과 고넬료의 이방인 성령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말세에 만인에게 주기로 하신 약속이 이제 선포된 복음 안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누가는 사도행전 2:38을 초대교회의 회심과 성령에 관한 규범적 선언으로 제시하고,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에게 각각 내리신 성령강림 이야기를 서술적인 진술로 묘사합니다.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18-25)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높아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때, 바로 그 순간이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단은 기회를 타서 흔들어버립니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잘되면, 스스로 능력 있는 것처럼 교만하고,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겸비한 자를 찾아서 그의 일군으로 사용하십니다.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된 것도 없느니라 22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파하니라(18-25)

누가는 앞서 성령이 오심으로써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단락에서는 앞 단락의 내용을 발단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 부정적인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⑴ 육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시몬(18-19)

사도들이 안수하여 기도하자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술사였던 시몬은 종교로 큰 장사를 했던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멋진 사업 아이템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도들의 가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빌립이 하고 있는 장사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하는 능력이 없으니, 자기가 그것을 가지면 빌립에게 빼앗겼던 손님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함을 보고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시몬은 회심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완전히 안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합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는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사람들 마음대로 소유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성령을 부리는 능력이 사도들에게 있고, 그 능력은 자신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빌립보다 더 튀어난 종교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아볼로를 보고 경쟁심이 일어났듯이, 시몬도 빌립을 보면서 존경스러웠지만, 경쟁심이 불일 듯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단이 이 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직매매(聖職賣買)’를 영어로 ‘사이모니(Simony)’라고 부릅니다. 본문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기도와 능력을 오해했습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자신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게 하는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거듭나지 못한 육적 생각으로 그 사건에서 대박 공식만 보았습니다.

⑵ 베드로의 책망(20-23)

사도 베드로는 이런 시몬에게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오랫동안 품어온 경쟁심과 시기심이 들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모습과 다릅니다. 그는 빌립을 통해 배우기보다는 경쟁심만 키웠던 것입니다. 빌립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라면, 이 복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돈과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망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신인 ‘맘몬(Manmon)신’에게 사로잡힌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처럼 들립니다. 성령을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도 성령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시몬은 단순히 자신도 성령 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엇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되길 원했습니다. 이에 20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대답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강력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하는 생각은 하나님과 성령을 심각하게 오해한 결과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22). 5장의 아나니아의 경우와는 달리 시몬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경고를 듣고 베드로의 말이 자신에게 임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시몬이 '중생을 경험했느냐, 안 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릇된 동기와 방법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아무리 심각한 죄를 범한 자에게도 용서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는 교훈에 본문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⑶ 시몬의 대답과 사역 정리(24-25)

사도 베드로의 책망에 마술사 시몬은 회개했겠습니까? 그는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회개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기도해도 되는데, 사도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직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도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노릇을 대신하려고 할 것입니다. 시몬은 직적 회개하고 직접 용서를 구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기는 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람인 사역자들에게 도움을 받지만, 거만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가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은 시몬에게 말씀으로 깨우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여러 마을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신은 종교 기술자입니까?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사람의 힘이나 돈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갑니까?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합니다. 은사와 능력을 주시는 것도 교회를 세우기 위합니다. 빌립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처럼 취급되던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증거 되었고, 놀라운 사역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한 사람을 부르시고 삶을 인도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사랑을 주시며 기쁨과 위로를 베푸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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