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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8-01)


스데반의 설교(Ⅳ) : 스데반의 순교

사도행전 7장 54절-8장 3절


좋은 습관은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지만, 잘못된 습관은 실패한 인생을 만듭니다. 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며,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일반적인 습관도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영적인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고 좋은 습관이 몸에 배일 때까지 최선을 다 해 복종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영적인 좋은 습관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어디서나 담대하며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에 종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분노하며 스데반에 대해 이를 갑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버립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긴다는 기도와 함께, 그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간구하며 숨을 거둡니다.

 

모세의 이야기(54-57)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은 빛에 있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불의한 자들은 의로운 자들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어두운 행동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감추려고 빛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갑니다.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54-57)

스데반의 순교는 사도행전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과 맞물려서 사울이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격분한 청중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입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스데반 순교를 기점으로 사역이 이전에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순교했지만,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어 갑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는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시작하여 53절에서 마쳤습니다. 이제는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구속된 상태이기 때문에 재판받는 법정에서 살아남으려면, 상식적으로는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유리함을 증명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변호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과 성전을 완성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잘못은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인 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자부심이나 영광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수치와 불순종 그리고 반역의 역사를 나열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이방에 포로로 끌려간 것이라고 역사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패망의 역사를 가지고 온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후예인가? 아니면 그 패망을 경고하다가 죽임을 당한 수많은 선지자의 후예인가?’라고 묻습니다. 더 나가서 산헤드린 공회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모든 선지자를 죽인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후예들이며,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하던 완악한 자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⑴ 산헤드린 공회의 반응(54)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반응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설교의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날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논점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그들의 분노는 쌓여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순종하라고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장본인이 자신들이라는 지적에 마음이 찔렸지만,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말이 맞았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스데반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마음에 격분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이 나타낸 감정적인 반응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개역개정은 ‘마음에 찔려’라고 번역하지만, 이는 마치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고 회개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그들의 격분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지 회개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스데반을 향한 저주가 군중 여기저기서 뛰어나왔을 것입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칠십인역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또 다른 은유적 표현입니다(욥 16:9; 시 35:16; 37:12; 112:10; 애 2:16). 이 두 가지 표현을 통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생동감 있게 보여줍니다.

⑵ 천국을 바라본 스데반(55-56)

하나님 나라와 가까운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세상에 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격분한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상황에서도 스데반 집사는 대조적으로 침착한 모습을 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야수같이 으르렁 거렸지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새롭게 성령 충만함을 받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보게 되는 경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이 스데반의 편에 계심을 간접적으로 시사 합니다.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예수가 인자로 묘사되는 경우는 사복음서 외에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자라는 기독론적인 칭호는 예수가 친히 즐겨 사용하신 칭호였습니다. 예수도 지금 스데반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의 심문을 받으며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고 그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스데반은 같은 장소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이 진실이었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모습을 본 것이 아니 라 서 계신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예수가 지상에 계실 때 하셨던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눅 12:8).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신을 주로 시인하고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한 스데반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마지막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의 순교(57-60)

항상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지만, 성령을 거슬렸던 사람들은 자기 육신의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야수성을 들어내고 격렬하게 폭력을 자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끝까지 인격적인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7-60)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을 듣고 청중이 보인 반응을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기술합니다(57-58).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신들의 귀를 막았으며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거짓말을 하였고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인 질문이 하나 제기된다. 스데반은 과연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사형을 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자신들의 분을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어떤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스데반을 불법적으로 살인한 것입니까? 전자의 경우가 사실이라면,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들이 죄인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라고 말한 요한복음 18장 31절과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진술을 얼마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당시 사형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사도행전의 행간이 드러내는 뉘앙스는 스데반의 죽음이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친 사형 언도가 아니라 참석자들의 분노에 의한 우발적인 살해였음에 추정의 무게를 실어줍니다. 스데반은 ‘폭도’들에게 붙잡혀 성 밖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유대 문헌인 미쉬나에는 돌로 쳐 사치하는 형벌에 관한 공식 절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에도 그 절차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는지는 정확히 단언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장면에서 증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증인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가장 최소한의 합법 적인 절차는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는 신성모독으로 인해 사형에 처할 경우 증인에 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레 24:14). 증인들이 옷을 벗은 것은 자신들이 이 일에 대해 증인임을 밝히는 행위입니다. 사울은 사도행전에서 여기서 처음 등장하지만,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사울도 스데반을 대항하던 길리기아 회당 소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6:9). 하지만 사울은 돌로 치는데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청중이 던지는 돌을 맞으면서도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연상케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했다면,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예수께 부탁했다는 미세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세한 차이점은 놀랍게도 커다란 기독론적 함의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고-기독론이 매우 이른 시기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박해와 성도의 흩어짐(8:1-3)

항상 세상 권세는 하나님 권세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성도들도 방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세상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성령으로 덧입고 기도로 복된 공격을 가하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1-3)

본문은 짧은 단락은 사도행전 6:8에서 시작된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스데반 순교 이후 교회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이 변화는 사도행전 8-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울이 본격적으로 무대 위로 등장해 교회를 박해하는 활동에 돌입했음을 보여줍니다.

(1) 스데반의 장례 이후(1-2)

7장에서 스데반의 죽음만 언급한 저자는 교회에 대한 핍박과 함께 스데반의 장례를 소개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행한 스데반의 장례와 큰 애곡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 사울의 핍박을 기술합니다. ‘그 날에’라는 표현을 통해 스데반의 부당한 죽음과 교회의 큰 박해를 연결합니다. ‘그 날’은 바로 스데반이 순교한 날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박해는 스데반의 순교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를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가정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단수로 표현한 것은 큰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 저자는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밝히면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인접한 이 두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소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졌습니다(11:19). 그들이 흩어진 영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8에서 언급된 순서대로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 순서로 교회에 임한 핍박이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지상 명령에 충실하도록 도왔음을 보여 줍니다.

(2) 사울의 등장과 핍박(3)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크게 애곡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애곡했다는 사실은 스데반의 죽음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 핍박의 현장에 출현하여 교회를 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9장에서 사울의 극적인 회심 이야기를 다룰 것입니다. 그 이야기에 앞서서 사울이 그간 얼마나 초대교회를 비참하게 박해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박해자들의 손을 피해 피신합니다. 사실 2절의 내용이 1절의 내용보다 역사적으로 먼저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가 이 단락의 서술순서를 뒤집어서 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2절의 초대교회의 애도하는 분위기와 3절의 박해의 분위기를 대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남녀 성도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잔멸하다’라는 동사는 본문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사나운 들짐승들이 몸을 물어뜯어 죽이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는 사울의 행동이 얼마나 짐승처럼 사납게 행동했는지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사울은 각 집을 수색했는데, 수색한 각 집은 가정 교회였을 것입니다. ‘끌다’(3)는 사람들을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사울에게 질질 끌려가 공식적인 제판 전 구류되는 장소에 갇혔습니다. 사울은 이와 같이 엄청난 핍박을 행했습니다. 예루살렘 모든 성도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흩어지면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4).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사울은 이런 일을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핍박을 통해 더 확산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절대로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순간에도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스데반처럼 적대와 박해 그리고 순교가 기다리는 자리로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참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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