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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7-01)


스데반의 설교(Ⅰ):믿음의 조상

사도행전 7장 1-16절


설교는 어머니의 젖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설교를 듣느냐에 따라서 색다른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목회자들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양한 자료들을 준비합니다. 그 준비된 재료들로 요리하듯이 설교를 만들어갑니다. 자료뿐만 아니라 주변에 비판, 찬사, 성도의 필요와 시련, 그리고 본문의 자료들이 첨가됩니다. 그러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잘못된 통념입니다. 가끔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메시지를 준비하여, 설교하지 못한 것만도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항상 진리 위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고발하는 내용이 사실인지를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답변할 기회를 얻습니다. 스데반은 답변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애굽으로 팔려갔다가 온 가족을 구원한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대제사장의 질문(1)

사람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것을 스스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가야할 길을 가게 하시고, 해야 할 일들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스데반의 길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1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1)

사도행전 6장에서 살펴본 대로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택한 동기는 원래 구제 사업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순히 교회의 구제 사업을 위한 봉사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초대교회의 지도자들로서 12사도들과 똑같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헌신한 소중한 믿음의 일꾼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믿음의 일꾼들 덕택에 교회를 핍박하던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복음의 결실이 맺힐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대제사장의 심문은 사도행전 6장 11,14절을 근거한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심으로 운영된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말문이 막혔습니다.
또한 스데반이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는 모습은 성전 당국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헬라파 유대인들로 하여금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스데반이 메시아로 믿는 ‘예수’라는 자가 성전을 헐고 모세의 율법을 고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들이 스데반을 고소한 내용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고 의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사람들이 고소한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이제 산헤드린 공회에서 스데반의 긴 변론을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당한 일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당하신 일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에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답변할 기회를 얻습니다. 만약 스데반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신성모독죄로 판결 받았을 것이며, 그가 ‘아니다’고 부정했다면,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성모독죄에 위증죄까지 더하여 처벌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고소 내용에 대해 일일이 자신을 위한 반박 형식으로 변론을 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변론하는 대신 답변적인 긴 설교를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역사를 되짚어 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는 자신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과 율법을 거스른 것은 정작 유대인들임을 선언할 목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의 답변(2-16)

인간의 죄, 불의, 수많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단 한 명의 아들만을 주셨지만, 그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가 세워진 과정이 소개됩니다.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9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11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2-16)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설교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구약 역사를 길게 나열합니까? 스데반의 답변은 일차적으로 거짓 증인(사도행전 6:11,13-14)에 대한 변호인 것이 맞지만, 그의 설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얽혀 있습니다. 곧 ‘율법’과 ‘성전’입니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이 율법을 거슬러 말하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작 유대인들이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했으며,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불순종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부터 옮겨 다니는 성막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지만, 성전 자체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졌고(사도행전 7:39-43)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거하시는 것을 잘못 생각했다는 주장입니다(사도행전 7:44-50).

⑴ 아브라함의 이야기(2-7)

스데반의 설교는 산헤드린 공회에 정면으로 맞서서 큰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그는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하던 대로 오랜 성경의 전통에 따라 이 연설을 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구속의 역사를 나열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전체 여정을 살펴야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조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신 내용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끄신 역사를 되새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곳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였다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잠깐, 스데반의 이야기와 창세기 11:31-12:1의 이야기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은 때와 장소가 다른 듯 보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을 데라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말하고, 하란에 거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곳은 메소보다미아(갈대아 우르)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까? 창세기 15:7에서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과 느헤미야 9:7에서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들은 부르심을 하란으로 떠나기 전, 갈대아 우르에서도 들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동 시대 유대인 저자인 필론과 요세푸스도 이와 동일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스데반도 당시 유대교의 해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한 장소를 스데반이 구체적으로 메소보다미아라고 밝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 땅, 즉 부정한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임재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임재한 땅이 메소보다미아라고 언급한 이유는 약속의 땅과 성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자랑하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시지 않는 분임을 말하기 위해 메소보다미아 계시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언급한 것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만 거하지 않는다는 초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시내산 율법 수여 이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미 언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곳이 현재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도 아니며, 거룩한 성전도 아니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한 것입니다. 그의 연설 후반부에서 강조될 것이지만, 스데반은 설교 초반부터 하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성전에서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아님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먼저 하란에 정착했고,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최종 목적지로 보낸 지역을 지금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너희들’은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포함해 지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말의 배후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지금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부각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은 아직 약속의 땅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발 붙일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2:5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전 아브라함에게 실제적으로 땅을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자기가 의존하고 기댈 만한 것,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이 타국(다른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살면서 종살이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그늘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길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와 관련된 칠십인역 출애굽기 3:12은 ‘네가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면 너희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이 산에서’ 대신에 ‘이곳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라고 수정합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과거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뜻합니다.

⑵ 아브라함에서 요셉으로 전환(8)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모세의 이야기로 바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요셉의 이야기로 전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증표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7:11). 할례의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에 대한 외형적인 표증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이야기가 점점 출애굽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것과 더불어 출애굽기는 유대인 정체성의 본질이며 스데반이 말하고자 한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⑶ 요셉의 이야기(9-16)

9절부터는 스데반 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요셉 이야기의 시작합니다. 스데반은 요셉이 이 땅이 아닌 애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거기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집중할 사실은 ‘애굽’은 이방인의 땅인 동시에 고난의 장소이자 하나님의 나라와 대조되는 영역을 상징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바로의 집안과 애굽 전체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형들이 먹을 것이 필요해서 찾아간 사람은 그들이 질투해서 버렸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형들을 자비롭게 대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은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의 가족 수가 ‘일흔다섯 명’이라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창세기 46장 27절과 출애굽기 1장 5절에 기록된 칠십 명과 차이를 보입니다. 스데반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따르기보다는 칠십오 명으로 되어 있는 칠십인 역을 따릅니다. 칠십인 역은 야곱과 요셉을 제외하고 요셉의 아홉 명의 아들 중 나머지 일곱 명을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요셉이 세겜 땅에 장사된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청중이 유대인들임을 감안한다면, 증오의 대상이던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강조한 것은 특이합니다. 유대 땅만이 조상들이 장사될 만큼 특별한 장소가 아님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관한 유대인들의 편협한 지리적 개념을 넌지시 겨냥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 그리고 예루살렘 성과 그 안에 세워진 성전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 전정한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대상이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 교회는 혹시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을 거룩하게 여기며 섬기는 오류를 법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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