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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5-02)


핍박에서도 진행된 하나님의 사역

사도행전 5장 12-26절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동서고금에서 해방과 자유를 성취해 왔습니다. 다른 나라에게 억압 받던 나라에게 해방을 주었고, 노예와 같은 인격의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가 해방과 자유뿐이라면,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 같은 경우에는 억압과 수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겠다고 하는 ‘해방신앙’이 태동합니다. 고통을 자신으로부터 찾기보다는 사회적인 구조악에서 찾으려고 하여 계급투쟁, 사회주의 혁명, 정치적 의식화 양상을 보이면서, 평화적인 방법보다 과격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 결과로 폭력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국가는 더 혼란상태로 전락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폭력을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폭력적으로 복음을 억압하려는 것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그것을 초월하여 나타납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십니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잡아 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다시 투옥된 사도들은 밤중에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다시 기적적으로 풀러나게 되고, 주의 사자의 지시대로 성전에서 말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12-16)

오늘날도 성도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나 육체적인 치유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전격적으로 가치관이 변화가 일어난다면, 부족한 성도들을 통해서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할 수 있습니다.

12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2-16)

본문은 사도행전 2장 42-47절과 4장 32-35절처럼 다음 단락과 연결하기 위해서 삽입된 누가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요약의 일부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다시 요약 정리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12b-14). 이 본문의 주요 기능은 다음 단락을 소개하기에 앞서 왜 사두개인들이 시기로 가득하게 되었는지, 왜 사도들을 다시 잡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⑴ 사도들을 통한 많은 기적(12a)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과 기사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세상에 존재감을 분명히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하셨던 사역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의 선포대로 살아서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증명합니다.

⑵ 기적에 대한 세 가지 반응(12b-14)

본문에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 소개합니다. 사도들의 기적 행함과 성도들의 솔로몬 행각 모임을 일종의 인과관계로 묶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누가는 12a절에서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킴을 명료하게 기술하고(12a), 12b-14절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경고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반응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① 믿는 사람들의 반응(12b)

예루살렘 성도들은 예전처럼 넓은 공간을 제공하는 솔로몬 행각에서 집회를 갖곤 했습니다(12b).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집회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아마 다락방 같은 곳에서 이렇게 많은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개적인 공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모였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였습니다.

②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13a)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 나머지’(13)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보고 두려워합니다(13a). 성도들이 그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향 때문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득권 세력의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아서 성도들과 역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③ 칭찬을 받는 성도들(13b-14)

또한, 세상은 성도들을 인정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사랑이나, 사도들이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그렇게 상종하지 않다가 점점 믿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면 지속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됩니다(13b-14). 이것은 15-16절과 함께 사두개인들이 왜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다시 잡아들이게 되었는지(17-18) 그 원인을 제시해줍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 4장 30절의 제자들의 간구가 그대로 응답되었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⑶ 사도들의 치유 사역(15-16)

본문에서는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부각됩니다. 구체적으로 사도들의 기적과 표적의 사역은 믿는 사람의 수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 전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참 복음은 치유와 소생, 갱생과 부활의 에너지를 발산하였습니다. 형식주의로 각질화 되고 냉랭해진 유대교의 성전 체제를 근본적으로 세차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가 자신들의 몸에 덮여서라도 치유 받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인들이 그림자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누가는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가 그런 미신을 동일하게 믿었다고 말하기 위해 이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내용을 통해 베드로를 향한 사람들의 인기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차후 여러 지역을 돌며 순회 사역에 돌입합니다. 사도행전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은 초대교회의 행적에 대해 감동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누가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할 때 그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항상 이 모든 행적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이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12a절에서도 누가는 ‘사도들이 민간에 많은 표적과 기사를 일으켰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이 두 진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사도들이 주동자인 반면, 후자는 비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주동자인 셈입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휴 가운데서도 불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좁은 길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반응(17-18)

언제나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능력을 강력하게 나타날 때는 무력화(無力化)하려 시도하고, 능력 없이 무기력할 때는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17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7-18)

사도들을 통해 ‘기적과 표적’이 예루살렘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제자들에게도 지속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소식은 급속도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죽어있던 신앙에 생명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새로운 영적 산소와 같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종교 지도자 역할을 했던 자들은, 자신 중심적인 방법이 아니므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조건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⑴ 지도자들의 시기(17)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몇몇 부류들을 거론합니다. 그중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들을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루살렘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급속도록 부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모두 시기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사두개인’을 기록한 것은 그들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인 의사결정을 한 ‘산헤드린 공회’에서 수적으로도 우세해서,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종교적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유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부활이나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들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인 사도들을 투옥시킨 동기를 설명해주는 어구인데, 여기서 ‘시기’로 번역된 ‘젤로스’는 ‘질투’ 혹은 ‘시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종교적 ‘열정’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첫째, ‘그들이 시기로 가득하여서’로 번역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발동하여’로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하늘 높이 치솟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시기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들의 유대교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열심히 발동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기득권으로 그 동안 잘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등장은 자신들 누려온 신앙과 전통에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방법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⑵ 사도들을 투옥시킴(18)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의 활동에 대해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동안 자신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일어남으로 배움도 없는 사도들을 향하는 것을 보면서, 경쟁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가만히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면 모든 것이 조용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특히 예수의 부활도 없게 될 것이라고 어리석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합니다.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9-26)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사와 기적’만 보면 그것에만 부러워하고 의기소침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매우 짧고 소극적인 생각입니다. 넓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성도들에게 각각 자신의 달란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 하더니 25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19-26)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자신의 힘으로 감옥에 투옥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력행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증명해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누가는 19-26절의 내용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기술합니다.

⑴ 기적적으로 탈옥된 사도들(19)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지하 감옥을 탈옥할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겹겹이 둘러싼 경비병들을 따돌리고 사도들이 다 빠져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사건 역시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행하시는 기적으로 묘사합니다. 본문은 ‘주의 사자’라고 천사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개입하심을 소개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개입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⑵ 다시 사명을 받은 사도들(20)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사도들은 탈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도들이 체포당했던 바로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의 사자가 안전하게 지켜주시거나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치도록 도와야 하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말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20). 이곳에서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므로 ‘백성에게 말하라’는 말은 전도의 대상이 아직까지는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음을 시사 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구원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짧은 구절에 세 개의 명령어, 곧 ‘가서’, ‘서서’, ‘말하라’가 나옵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의 메시지를 끈기와 담대함으로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사도들은 붙잡혀 혹독한 채찍형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생명 있는 사도들에게는 이제 감옥 안에 있던지 밖에 있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축복은 자신의 어떤 처지에서든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려고, 쉬지도 않고 새벽에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⑶ 순종하는 사도들(21a)

옥에서 풀려나면 멀리 도망가서 숨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말씀하신 바,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21,26). 성령 충만한 자들의 모범이며 순종의 모습입니다. 밤에 천사에 의해 옥문이 열리고 사도들이 탈옥하는 기적이 너무나도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이 사건을 누가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략한 서술이라 하여 저자의 순수한 창작이라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가 이 사건을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중에 다시 한 번 등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누가의 기획 의도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⑷ 새벽에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21b-25)

유대인들에게 새벽은 바쁜 시간입니다. 그들은 동틀 무렵 경배하고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왔습니다. 사도들을 가둔 지도자들은 아직까지 주의 사자가 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판하려고 밤새 가두어두었던 사도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21b). 감옥에 가보고서야 감옥이 비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무덤이 텅 비어 있었듯이, 사도들을 가두어놓은 감옥도 텅 빈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투옥되었던 잠긴 채로 나왔기 때문에 옥문은 여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옥문이 잠긴 채로 빠져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잠시라도 천사들을 통해 부활의 몸을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었기 때문에, 경비병들이 잠자지 않고 서 있는 가운데,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 문지기들은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을 데리려 갔던 사람들이 사도들이 사라진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의혹하면서 “이 일이 어찌 될까?”(24)라고 합니다. 사도들의 탈옥이 성전 경비대원들의 방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보고를 합니다.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친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25).

⑸ 다시 잡힌 사도들(26)

사도들은 잡힐 것이 뻔한데, 순종하며 성전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 회의에서는 즉시 잡아오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성들 때문에 사도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지도자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모호하게 함부로 죽였지만, 사도들은 함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 전반에 걸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성전 경비대장, 경비대원들이 서로 우왕좌왕하는 모습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하게 대처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감옥에 투옥되고, 다시 탈출되어지며, 그리고 다시 체포되어지는 사건을 통해, ‘탈출’은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증명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꼭 필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유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하시고 다시 다스리시는 분에게 속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진정한 진리 안에 거할 때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유 자체를 얻는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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