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연예인들은 긴 무명시절이 있습니다. 무명시절은 분명히 힘든 시간들이지만 그렇다고 불행의 시간은 아닙니다. 무명의 시간은 외롭고 힘든 과정이지만, 자신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힘들어도 밝게 웃는 얼굴, 성공의 때가 온다는 믿음, 힘든 것을 즐기며 감사하는 마음, 이 세 가지가 무명 시절의 터널을 잘 통과하는 비결입니다. 성도들도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신앙생활이 멋있게 달라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준비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시간을 선용하고 주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지혜롭게 살라고 촉구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둘 다니는 세상에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길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은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으로 예배와 감사와 상호 복종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지혜롭게 행하라(15-17)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옛사람일 때 추구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을 빛과 어두움의 삶으로 대조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 일을 벗고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바울은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5-17)
본문은 에베소서의 후반부 중심에 해당합니다. 이제 나머지 부분에서 변화된 정체성에 어울리는 삶을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조를 선보였는데, 여기서 ‘지혜 있는 자’와 ‘지혜 없는 자’를 대조합니다. ‘지혜’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된 주제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소아시아 주변의 상황은 영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것들은 은근히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시간을 다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세인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동안 일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평생 동안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 볼 때, 그들은 제대로 일한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도들은 시대가 악하기 때문에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분별력 없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서 자세히 살피고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혜 있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최대한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그러한 기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른 ‘분별력(分別力)’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어두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일과 시간에 맞추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헌신하고 온전히 삶을 드리려고 할 때, 그 시간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일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전략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라고 권합니다.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영적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세월을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잘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열정만 가지고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성공하지 않습니다. 미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해야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아무런 준비 없이 순간적인 생각에 의해 결정하고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할 때는 열정만 가지고 시작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면, 열정이 식어지면서 일에 대한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곤 사역 자체를 피곤해 하면서 나중에는 사역이나 일을 집어치워 버립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틀림없이 영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 없이 무턱대고 덤벼들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교회의 사역도 무명의 시절에 교회 안에서 무엇이든지 맡겨진 일은 충성하다보면 점점 교회 사역에 대한 다양한 부분을 통달합니다. 이것저것 모든 일들을 해보면 전체적인 안목이 생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성도 시절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고, 사역의 직분도 없고, 직장도 없을 때가 자신을 가장 준비시켜 놓기 좋은 기간입니다. 그때는 실패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준비해야할 것은 자신을 여러 가지로 준비시켜 놓은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이러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교회 전체를 화합할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훈련되지 않는 일군에게 불화음이 생기지만, 훈련된 일군은 조화를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좋은 일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련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서 기만과 위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성도들이 원한다고 바른 행실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의 첫 번째 특징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고 권고합니다. 시간을 돈 주고 산 물건처럼 아껴 쓰라는 표현입니다. 세월 낭비나 허비하지 않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급한 일로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면 갈팡질팡 방황하고 흔들린 삶을 살아갑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자세히 살펴가면서 성취하는데 노력하는 삶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성도들이 지혜롭게 사는 것은 “세상을 분별하는 것”(17)입니다. 세상의 풍속은 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갈 순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집중해서 읽을 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무장된 성도는 악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세월을 낭비하는 삶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 시대를 따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이나 정욕을 위해 사는 삶도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길 노력하십니까? 혹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있습니까?
성령의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18-21)
인생의 가치는 그 삶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속으로 가득하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으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합니다. 악한 시대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18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19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0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1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21)
당시 에베소 지역은 이방 종교와 제사 의식의 중심지였습니다. 자신의 신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술에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취한 상태에서 신의 뜻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어떻게 하면 그 신을 잘 섬기고 순종할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이 있다 보니깐,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과거에 에베소 신들을 섬기던 습관에 젖어서, 술 취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자칫 이 세상에 정욕과 쾌락에 취할 수 있습니다. 방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물질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무지하게 사는 것은 술 취한 생활과 다를 바가 없는 삶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술 취해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힘입지 않으면 이 세상에 취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깨어있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은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끝임 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져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다른 표현을 사용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 3:16)라고 권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심령 가운데 역사하실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되어 집니다.
빛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허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의 생활을 살펴서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꿈이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한 시대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네 가지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교제(交際)가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만남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만남과 교제는 다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신령한 노래와 찬미하면서, 서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삶의 노래가 달라집니다. 그들은 찬양하길 기뻐합니다. 그들은 찬양이 떠나지 않습니다. 한밤중에도 감옥 속에도 그리고 깜깜한 동굴 속에서도 어디에서나 찬양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찬송을 통해 주님이 임재하시고 찬송을 통해서 더욱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감사의 생활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할 때,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때, 삶이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특징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삶의 특징은 지배하고 정복하고 군림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길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기꺼이 섬기고 기꺼이 복종합니다. 그런 삶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난 동사들을 정리하면, ‘화답하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복종하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들은 ‘충만하다’(18)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과거의 방법으론 하나님을 섬길 순 없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이 세상의 방법으로 삶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들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오직 성령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길 원하는 성도들이 준비해야할 것은, 바로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삶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교도들처럼 외형적으로 이상한 현상이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즐거움으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영적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존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으로 설명되어질 가정에서 부부관계나 자녀관계나 직장에서 직원들과의 관계들이 원활하고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성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즐거움은 영원하며 우리 영혼을 풍성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외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서로 순종함으로 삶에 나타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쁘고 즐겁습니까?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성령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영적 복을 누리기 위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 서로의 유익을 구하게 되고, 서로를 위하여 복종하게 되어 집니다. 성령 충만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되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말씀과 기도로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교회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시켜 나갑니다.
똑같은 세상이지만 밤낮은 밝기 차이가 납니다. 어두운 밤에는 깜깜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만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고,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많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워진 세상에 기준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 세상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이방인의 부끄러운 방식을 버리라고,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들이 비추어야 할 이유는 그들의 빛을 통하여 어둠 가운데 있던 것이 빛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드러난 것은 그 자체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8-10)
빛이 소중한 것은 아주 깜깜한 장소에 들어가면 더 알 수 있습니다. 밝은 곳에서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앞이 안보입니다. 한참 있으면, 조금씩 어둠 속에 있는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을 빛이 비추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들어나 보입니다.
8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8-10)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에 이어서, 이제 성도들의 신분을 빛으로 비유하여 소개합니다. 그는 빛이신 하나님과 어두움인 세상을 대조하며,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과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소개합니다. 이제는 신분이 어둠에서 빛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⑴ 이유 :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사람(8a)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회심하기 전, 이방에 살 때에 ‘어두움의 자녀’이었지만, 복음을 통해 새로운 ‘빛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졌다고 전합니다. 이제는 모든 어두운 악한 세력이 물러났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들에게 ‘빛 가운데 있다’하지 않고 ‘빛’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요한복음 1:5-7) 바울은 한 발 더 나가서 성도들은 ‘빛’ 자체이며 ‘빛의 자녀’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말한 ‘빛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것과 관련이 되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구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둠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무지 가운데 불순종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죽음과 지옥과 심판을 상징합니다(4:17-18). 반면에 빛은 진리의 깨달음을 통한 순종의 삶이며, 새 창조를 통한 새로운 생명을 의미합니다(4:20-24).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빛의 자녀’임을 인식하며, 그 다음은 ‘빛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위대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빛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⑵ 명령 :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b-10)
바울은 주안에서 ‘빛’이며 ‘빛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신분에 걸맞게 살라고 명령합니다. 그 다음에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①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8b)
성도들을 ‘빛의 자녀들’이란 표현은 ‘불순종의 아들’(2:2; 5:6)이나 ‘진노의 자녀들’(2:3)라고 표현과는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과거에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다가 결국 멸망 받을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거듭난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중생하지 못한 ‘진노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예전에 그들이 살았던(4:18; 요한복음 1:5; 3:19-20) 어두움이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5:14-16; 요한복음 3:21; 8:12; 로마서 13:12; 데살로니가전서 5:4-5). 그들은 흑암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1:13). 이제 주 안에 있는 것은 ‘빛’이며(요한복음 8:12) 또한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특징은 ‘은밀함’입니다. 은밀하게 시작해서 패가망신(敗家亡身)해야 끝납니다. 누구든지 마약이나 도박은 패인의 지름길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한 번 길에 들어서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악한 사단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인도에 대한 결과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죄 가운데 죽음으로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② 빛의 열매(9)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시여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들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에게 ‘빛의 열매’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빛의 열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된 성도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행실이나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모든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열매들의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든 착함(goodness)’은 ‘선함’(로마서 15:14), ‘양선’(갈라디아서 5:22), ‘선’(데살로니가후서 1:11)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어질고 관대한 모든 행실을 가리킵니다. 다음은 ‘의로움(righteousness)’인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사람의 성품이며(4:24), 또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의의 선물입니다(6:14). 본문에서는 불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따르는 행실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실함(truth)’는 ‘복음의 진리’(1:13; 4:21; 6:14)나 ‘진실한 말’(4:25)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 행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빛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며 의로우며 진실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깨끗하게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고린도전서 6:11), 또한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4:24). 그러므로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감으로 빛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실제로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한 사람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 더 나가서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것처럼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이사야 42:6). 이것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당연히 세상 사람들은 똑같은 욕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자녀인 성도들을 더 욕을 합니다.
③ 주를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을 시험하라(10)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고 권고합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님의 영광이며 주님의 기쁨입니다(로마서 14:8; 고린도전서 6:20; 10:31).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좋아 보인 것일지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라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다’라고 명령합니다. 이 단어는 ‘분별하다’(로마서 12:2)로 사용하며, 무엇이 참인지 결정하기 위해 면밀하게 ‘시험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는 성도들의 영혼을 어둡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성도들은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은 무엇이며 좋은 것은 무엇인지 성도들 자신이 시험하고 분별해야 합니다(빌립보서 1:10; 데살로니가전서 5:21).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생동하며 자기 유익이나 기쁨을 먼저 고려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매 순간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욕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가 만연했던 에베소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려고 할 때, 매우 분별력(分別力)이 필요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 그리고 성도로서 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났다고 하지만, 과거 어두움에 속했던 습관대로 살아가기가 쉬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죄악으로 만연한 세상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행동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고 권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빛의 자녀들’은 과거에 어두운 속에서 행하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바른 분별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이며, 불순종의 자녀들과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 살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악인들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11-13)
살고 있는 주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로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기청정기(空氣淸淨器)를 사용합니다. 평상시는 잘 모르겠지만,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보면, 그렇게 많은 먼지를 마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악의 먼지로 가득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죄악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11-13)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에 참여하지 않는 데 그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어두움을 폭로하라고 명령합니다. 불신자들은 ‘빛의 열매’와 반대되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행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들은 언젠가는 들어날 것입니다. 그때는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⑴ 명령 : 참여하지 말고 드러내라(11)
이제 성도들은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참여할 자’가 아닙니다(시편 1:1). 어둠과 빛은 본질적으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물러나고,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이 없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들’으로 강력한 능력을 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① 어두움을 참여하지 말라(11a)
바울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동참하지 말고’고 명령합니다. 이곳에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란 ‘빛의 열매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즉,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더럽고 부끄러운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분명히 거듭난 ‘빛의 자녀들’이지만, 아직까지 어둠의 행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어두움에 있을 때처럼 조용히 행동하면 죄가 들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습니다. 어두움의 아들들이 행하니깐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들보다는 죄악의 강도가 깊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빛의 자녀들’이 어둠의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② 어두움을 들어내라(11b)
바울은 어둠의 행위에는 ‘열매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열매가 없는 것’이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열매를 맺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행위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악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빛의 열매는 아니므로 열매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어둠의 행위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어둠의 행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성도들이 드러내 보이라고 명령합니다. ‘책망하라’는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고 야단치라는 뜻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어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빛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인하여 ‘어두움의 행위들’을 드러내야 합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행위들’은 빛 안에서 행하지 않는 믿는 자들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만 불신자의 행위를 드러내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12-13). 한편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몇몇 성도들 사이에서 악한 행위들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입니다(고린도전서 5장). 세상에 법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죄악을 범람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보다 더 무서운 건 하나님이십니다. 어두움의 사람들은 죄악을 범하다가도 빛의 자녀들을 보면서 멈추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들은 점점 어두움을 바르게 책망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을 책망하지 못할 만큼 거룩한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두움을 향해 책망하면,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도리어 ‘너희들이나 잘해!’라고 책망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그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향해 책망할 수 있는 능력은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두운 속한 사람들같이 행했던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빛의 자녀들’로 설 때만이 강력한 빛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이 되려면,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⑵ 이유 : 그들의 행위는 부끄러운 것(12)
바울은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다’고 합니다. ‘은밀히 행하는 것’은 불순종의 자녀들이 행하는 일이 어두움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그들에게 빛을 비추므로 은밀한 것이 드러나게 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열매 없는 ‘어둠의 열매’가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은밀한 중에 행해지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행위를 그만두게 하는 방법은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인지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것’이라는 표현은 ‘음행과 더러운 것은 입에 담지도 말라’(3)고 했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어둠의 행위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부끄러운 것들이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어둠에 빛을 비추어 그것의 더러운 실체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의 본질적인 역할이며 사명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둠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둠의 행위에 동참하지 말고, 오히려 빛으로 어둠의 행위를 몰아내는 자가 되라고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⑶ 설명 : 빛은 행위의 진실됨을 보여줌(13)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둠에 빛을 비추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둠의 행위에 그 빛을 비추게 되면, 그 빛을 받아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보이게 된 것은 곧 빛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빛이 악한 행위들을 드러낼 때,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들’은 그것들의 악함으로 보고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믿는 자들에게도 해가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스스로 깨끗하도록 인도합니다(요한일서 1:5-7).
성도들은 더 적극적으로 은밀히 행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묵인하지 말고 항거하고 빛으로 밝혀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한 삶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빛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마태복음 5:15). 그럴수록 칭찬하기 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망친다고 가혹한 처벌과 보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등대불이 꺼지면, 항해하는 배들은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빛을 꺼버리면, 수많은 영혼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이 빛을 세상에 밝히 비춤으로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할 것입니다. 성도들 개인적으로는 영혼에 감사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심(14)
성을 지키는 파수꾼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적군이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근무시간에는 졸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군사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빛의 자녀들’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14)
에베소 성도들 중에는 구원의 소식을 듣고도 아직까지도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잠자는 자’라고 칭합니다. 이제 빛을 보고서라도 잠에서 깨어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의 자녀들’로서 걸맞게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깜깜한 어두운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을 켜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사방이 밝아집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나게 한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책망을 받고 깨어나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줌으로 죽음의 자들 사이에서 영혼이 깨어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어두움에서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은 죄악의 열매뿐입니다. 하지만 빛에서 좋은 것은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들은 상황 이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흔들림 없이 굳건히 바르게 세워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죽어있는 영혼들 사에서 잠자는 영혼들을 향해 ‘달리다굼!’(마가복음 5:41)하시면서 깨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모두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당신의 영혼도 잠자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혼을 향해 주님의 거룩한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빛의 자녀’로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속할 때, 어두움에 방황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을 분별하고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빛을 어두움을 향해 비추어야 합니다. 선과 의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들 때문에 어두운 세상이 점점 밝아지길 원합니다.
러시아 경찰이 늑대 떼들과 함께 생활하던 소년을 발견하고, 모스크바의 병원으로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만에 늑대 소년은 병원을 탈출해서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 지저분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다가, 늑대처럼 할퀴고 깨물고 난폭한 행동을 보여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를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가 야생에서 늑대들과 지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를 통해 한 번 고정된 습관은 좀처럼 바꿀 수 없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사람답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새사람의 삶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4:25-32). 계속해서 교리적으로 적용해서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면서 살아야 할 삶을 계속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믿는 자들의 행위를 언급함에 있어서 세 번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됨으로서 거룩함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측면 :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1-2)
성도들이 아이를 출산해서 심방할 때마다 느낀 점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결같이 신생아들이지만 자기 부모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닮지 않은 아이라면 더 이상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닮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1-2)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바른 삶을 권고합니다. 그들에게는 성도로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문제를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권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변화된 성도로서 알맞은 모습으로 살아가길 제시합니다.
⑴ 하나님을 본 받으라(1)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을 향해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 베푸신 사랑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그들의 신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2:2).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었고, 오히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순종의 아들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서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25; 요한복음 10:11,15,17-18; 갈라디아서 1:4; 히브리서 9:14). 그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향기로운 제물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제물 때문에 이제 불순종의 아들들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바 되었습니다(로마서 5:5).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그의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마태복음 5:48; 누가복음 6:36).
성도들의 변화되어가야 할 이상적인 모습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닮아가야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 받은 사람으로서, 그 희생적인 사랑을 자신의 삶에 나타나야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하나 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서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으라’고 권고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그 행위를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할 것을 강하게 권면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은 바로 사랑을 통한 ‘용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들을 깊이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⑵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으라’고 권고한 후, 바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15:21)라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드리신 사건을 모델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과 병행을 이룹니다. 즉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향기로운’이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친히 행동으로 십자가 위에서 실천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핵심은 바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사랑으로 실천하였듯이, 이제 성도들이 이웃을 향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실천해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본받아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희생하는 태도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인하는 방법이며 사랑받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육신적인 부자간에는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과 행실에서도 닮아가듯,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 좋은 영향력을 받아서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영향을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 : 악을 삼가하라(3-7)
누구나 새로운 옷을 좋아합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더러워진 헌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더러운 옷 위에 새로운 옷을 덧입는다면 새로운 옷을 입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버려야할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버려야할 더러운 것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3-7)
사도 바울이 개별적인 삶에 대한 두 번째 권고입니다(3-21). 첫 번째는 실질적인 삶에 대해 권면했지만, 이번에는 종교적인 면에서 어떻게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본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앞부분인 3-7절까지만 먼저 강론하겠습니다.
⑴ 책임 : 악한 행위를 삼가라(3-4)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을 설명한 후, 이제 그것과 대립되는 어두움에 속한 행위에 대해 설명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지역적인 종교 특색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음란한 종교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주로 성적인 죄를 염두해 두고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 생각지 말아야할 것(3)
당시 바울은 이방 종교의 영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는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우상숭배 하던, 당시 이방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신을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음행(淫行)’과 ‘더러운 말’과 ‘개인적인 탐욕’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더러운 행동들이 종교 활동으로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도 같은 종교 행위로 생각하고 행했을지 모릅니다. 먼저 ‘음행(immorality)’에 대해 언급합니다. ‘음행’은 온갖 종류의 성적인 범죄를 다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주로 창기와의 성관계를 염두에 두고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any impurity)’은 부도덕한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히 음행과 같은 성적인 죄를 가리켜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 4:19; 5:5). ‘탐욕(greed)’ 역시 이 문맥에서는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듯이, 데살로니가전서 4:5-6에는 이방인의 색욕이 형제의 아내를 탐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절대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도(聖徒)’란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행’, ‘더러운 행동’ 그리고 ‘탐욕’과 같은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행하는 것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더러운 것을 끼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에 역겨운 것을 끼 얻는다면, 그 더러워진 제물을 절대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은 성도에게 마땅치 않은 부도덕한 단어들입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제거해야할 단어들은 음담패설,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희롱)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라면 한 마디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거룩함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로새서 3:8-10)
바울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걸맞지 않는 부정한 것들에 대해 입에서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도록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옛 사람이 아닌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마다 하나 된 공동체를 세우면서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② 생각해야할 것들(4)
바울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타락한 성적인 언어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누추함’으로 음란하고 추접한 외설적인 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말’도 성적인 농담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러한 대화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희롱’의 말은 단순한 대화를 넘어 성적인 농담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대화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으로 옮겨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입에도 올리지 말아야 할 ‘더러운 말’과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감사하는 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더러운 말들을 버리고, 반대로 ‘감사하는 말’들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4:2)는 명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베풀고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합당한 언어생활입니다.
‘감사하는 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들이며, 남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보면서 감사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입니다. 이 세상을 감사하면서 살아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감사의 언어가 풍성할 때 거룩한 성도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 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에베소 도시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눈만 뜨면 음란함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악이나 탐욕도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결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아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몸을 음탕한 곳에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망치지 않습니다.
⑵ 이유 : 우상숭배자들을 본받지 않음(5-7)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우상숭배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급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할 자들(5)
여기서 3절에서 지적했던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탐하는 자’들을 ‘우상숭배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적인 범죄를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유대 전통에서 익숙한 것입니다. 헬라인에게도 우상숭배와 음행은 종종 같이 행해지는 풍습이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지역에는 우상숭배자들이 음행과 같은 더러운 행위를 종교 행위로서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악행자들을 멀리해야할 이유는 음행과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임을 엄하게 경고합니다. 그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로 약속된 자들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에베소서 1:14,18). 비록 독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 받았지만 그들이 더러운 생각과 말을 계속한다면 약속된 기업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이 없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6:9-11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처럼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 성도들도 악행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8).
② 헛된 말에 속지 말라(6)
바울의 관심은 이제 헛된 말로 성도들을 속이는 이방인에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훌륭한 수사학으로 말한다고 해도, 그곳에는 진리가 없는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헛된 말에 속지 않도록 권고합니다. 성도들은 ‘헛된 말’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은 불순종의 아들들로 규정되는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③ 불신자들과 함께하지 말라(7)
바울은 ‘헛된 말’에 속지 않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그들과 함께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자들의 더러운 언어나 행위에 참여하여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불신자들과 전혀 만나지도 말고 상종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성도들은 그것을 오해하여 불신자들과 전혀 상종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오해를 교정하면서 만약 우리가 불신자들과 전혀 상종도 하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그들의 더러운 언행에 동참하는 자는 압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이방 종교들뿐이 아니라 거짓 율법 선생들이 들어와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근본은 탐욕스런 삶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거짓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죄악을 합리화시키는 헛된 교리를 만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거짓된 교리로 위안을 주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불의가 아름다운 말로 꾸민다고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불순종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날에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흐리게 하는 유혹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그들과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라고 했던 것처럼, 성도는 삶 속에 죄악이 한 점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들끓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죄악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특권과 사명이 나옵니다. 이미 떠나온 세상, 이미 저버린 구습들, 이미 벗어난 옛 신분, 이것은 더 이상 당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옛 사람처럼, 옛 사람으로서 더 이상 살지 않습니다. 이제 버려야할 옛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물들어서 헤매면,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죄악의 길과 정반대되는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하고 더러운 것들로부터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강력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설날이 가까우면,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을 위해 며칠 전에 설빔을 사오셨습니다. 사 오신 설빔을 입혀 보신 후, 명절 때까지 장롱에 보관하셨습니다. 며칠을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새 옷을 입는다는 기대감에 즐거웠습니다. 새 옷을 입을 때, 과거에 더러워진 옷 위에 끼어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에 합당한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 개인적인 생활과 관련해서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삶(17-19)
옛날 항해하는 선원들은 별을 보면서 방향을 잡았습니다. 많은 별들 중에 오직 북극성과 십자성만으로 기준을 잡았습니다. 북극성은 정북쪽에 십자성은 정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았을 때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기준점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도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이 있어야 합니다.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7-19)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세 번째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과거에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세상과 분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에베소 성도들 중에는 예전 잘못된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 성도의 기쁨도 누렸습니다. 그것도 잠시 주변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그들과 다른 삶의 패턴으로 살아갔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베소 아데미 여신을 섬기며 음란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우상의 소굴인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형제 이웃과 친구들에게 압박과 고난 그리고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 때문에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서 편하게 살아가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유 때문에 거룩한 삶과 반대되는 이방인의 잘못된 삶을 상기시킵니다(참고 2:2-3). 하나님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 성도들이 이방인처럼 산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분과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이방인으로 있던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2-13)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동된 특징입니다. 그 특징은 세 가지로 ‘영적 무지’(17), ‘영적 죽음’(18) 그리고 ‘영적 타락’(19)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숙히 선언하듯이 주안에서 하나씩 설명해 나갑니다.
⑴ 영적 무지(17)
첫 번째 특징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이방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생각에는 ‘마음’을 행동에 관련된 도덕적인 판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허망’은, 이방인의 불경건한 삶 전체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사람은 이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목적에 대한 계념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로마서 1:21-25)
소경이 목적지를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사람은 정확한 목표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더 이상의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물질과 성공에 최종적인 가치를 둡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바른 목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시편 73:28).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목표가 없는 삶’이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엄중히 권면합니다.
⑵ 영적 죽음(18)
두 번째 특징을 영적인 죽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신데, 하나님과 떠나 있다는 것은 영적인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총명은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총명’은 ‘인지 능력’입니다. 영적 인지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 또한 없습니다. 그 결과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과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꺾어진 나무 가지는 잠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후엔 말라 죽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 5:12)
깜깜한 밤에 불빛이 없으면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똑똑한 인생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부평초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아갑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로마서에서 잘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⑶ 영적 방탕(19)
세 번째 특징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람은 바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이곳에서 ‘방탕(放蕩)’이란 ‘주색잡기 빠진 상태’도 의미하지만, 부평초처럼 ‘마음이 들떠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음’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은 영적으로 강퍅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마치 불에 대인 딱딱한 피부처럼 옳고 그름에 감각이 없습니다. 당연히 영적으로 양심은 마비되고 무감각합니다. 아무런 수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탐욕’입니다. 그들은 탐욕으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릴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허전함이 찾아옵니다. 허전함 때문에 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은밀하고 더러운 것을 탐닉합니다.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습니다. 마약, 게임, 스포츠 심지어는 섹스 등과 같은 중독에 빠집니다. 이러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결국 방탕한 삶은 영적 죽음의 열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에 대한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영적인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고,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영적 사망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사망에 이른 삶은 부평초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다가가 결국 멸망당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 6:23).
추구할 새 삶의 근원(20-21)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유토피아 세상을 만들려 시도하지만, 악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두운 생각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병든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거듭난 지체들은 다릅니다.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0-21)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체가 된 성도들은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피력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할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제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배우지 않았다’는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에베소 성도들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보혈로 거듭났음을 확신했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데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가치와 방식을 따라야 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어두움에서 빛으로 완전하게 새로운 백성으로 근본(根本)부터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음’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성도들에게도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행적을 돌아보면,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과거 어두움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성도들은 첫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요한계시록 2:4). 깨끗하게 씻긴 돼지가 다시 진흙 속으로 들어가듯이, 점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삶의 방식에서 전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변화된 새로운 사람(22-24)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왜 싸우는가,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향해 성도의 삶이 주장하는 이론과 삶이 일치하길 원합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2-24)
성도들이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활이 몇 가지만 바꾸어진 것을 의미한 것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삶이 바뀌는 것이며,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이 내용은 그렇게 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배운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⑴ 옛 사람을 벗어버린 것(22)
에베소 성도들은 위에서 제시했던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새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옛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어두움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옛사람’은 타락한 첫 아담과 연합하여 과거의 삶의 방식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거짓된 욕심을 따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부패한 삶을 누립니다. 그들의 특징은 영적인 것은 망각하고 육체적인 것으로만 살아갑니다(에베소서 2:3).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서 속임수에 빠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면 만족하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에 속은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욕심으로 자기 만족 때문에 더 채우기 위해 도덕적인 부패까지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얻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실을 벗어 버렸습니다. 몇 가지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모든 것이 변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썩어져 가는 과거의 삶의 방식을 따르던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마치 새 옷을 입기 위해 헌 옷을 벗은 것처럼 설명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렸던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삶입니다. 앞에서 거론했던 이방인의 생활방식(2:1-3, 4:17-19)에 대해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제는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과거의 방식으로 어둡고 더러운 옛 옷을 다시 입도록 유혹합니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 사단은 거짓으로 성도를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속임입니다. 순간마다 옛 옷을 다시 입히고 어두운 삶으로 이끌고 가려고 시도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만, 아직도 어두운 과거의 삶의 방식이 남아서 갈등합니다. 그래서 부패한 음식에 파리가 쉽게 모이듯이, 조금만 틈을 주면 너무 쉽게 어두운 것들이 달라붙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옛사람과 새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게 됩니다.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19-21)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도 동일한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흠칫 놀라운 경우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사단은 순간마다 판단력을 흘리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패하도록 합니다. 영적 전쟁은 평생 동안 해나가야 합니다.
⑵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23)
바울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간다는 점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새로워지는 것은 성도의 모든 삶에서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순간으로 마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본성과 삶에서 온전하게 새롭게 되어가야 합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영의 생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령이 새롭게 되었다”는 생각의 틀이 새로워졌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부분들만 헌신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생각이 지배하고 지속적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은혜로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이방인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또한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직 욕심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으로 타락해 가면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점점 더 많은 물질이나 강력한 것 그리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여 그 본성과 삶이 온전한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세상은 사라지고 하나님만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⑶ 새 사람을 입은 것(24)
에베소 성도들이 영적으로 배운 것에 대한 마지막으로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벗었으면 깨끗하게 씻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새사람을 입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새사람’의 근원을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옛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일을 기억나게 하십니다(창세기 1:27). 처음 창조 때처럼, 두 번째 창조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형상(“의와 거룩함”)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이며(에베소서 2:15), 더 자세히 본문에서 “새사람”은 ‘옛사람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새사람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신분이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재창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므로 이제 옛사람(이방인)의 가치와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서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동시에 새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아데미 우상숭배와 음란한 생활이 들끓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승리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진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인격이 제자의 인격이 되고 그분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제자들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되어야합니다. 항상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로 성숙해가지 않는다면 성도가 아니라 단순히 ‘구도자(求道者)’에 머물 뿐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새사람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귀한 존재입니다. 내주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속적인 성장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심령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갑니다.
오래 사역을 하다보면 영적인 부분은 관심이 적어지고, 보이는 부분에만 관심이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점점 단조로운 신앙생활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 성령께서 자신과 공동체에게 은사를 주셨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각자 자신에게 주신 영적 은사를 따라 봉사하면, 그 공동체는 건강한 교회로서 성장해 나갑니다. 본문에서는 효과적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과, 이 능력의 출처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를 살필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 용납하고 잘 연합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연합할 지체들의 다양성을 직시하며, 다양성 속에서 연합과 성장을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각자 나름대로 섬기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온전케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십니다.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은혜로 주신 은사(7-10)
전쟁에 승리한 장군들은 부하들에게 하사품을 내립니다. 승리에 대한 혜택이 병사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때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혜택을 어니 한 사람이 독식하면 불만으로 쌓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도자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줍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7-10)
사도 바울은 먼저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 등을 통해서 교회의 일치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주장했습니다. 이제 각 성도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로서 그 몸의 일치를 보존하는 방법들을 열거합니다.
⑴ 은혜를 주심(7)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하지만,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 또한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의 다양성에 대해, ‘교회 공동체가 연합하면서 어떻게 서로 개성을 인정하며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논합니다. 그 답은 그리스도께서 배분해 주신 특별한 은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로 은혜 혹은 능력을 받았습니다(에베소서 3:2,7-8).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각 성도들의 고유한 역할을 받은 것입니다. 각 은사는 교회의 성장과 관련하여 주어지는 봉사를 위한 ‘은사’를 가리킵니다(로마서 12:6-8).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에 따라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선물에 합당하게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1절과 로마서 12:4-6, 그리고 고린도전서 12:4-6에 보인 대로 각종 선물이 발휘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은사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 각자에게 다른 은사가 주어졌음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믿는 자는 각각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구분대로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간에 그들의 선물들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모두 동일합니다.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구원 후 더욱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공동체를 위한 서로 섬김과 봉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분량대로 은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은사와 능력은 교회가 하나 됨에서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십니다.
⑵ 성경을 통한 증명(8)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가 인용하는 성경은 시편 68편 18절의 말씀입니다.
18주(여호와)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시편 68:18)(에베소서에서는 ‘받으신다’를 ‘주신다’로 바꿈).
이 본문의 기본적인 의미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그와 함께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노획물을 선물을 나누어주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임하셨고 사단과 싸워서, 그 싸움에서 승리하셨다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은 실패한 것으로 여겼던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제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세력을 사로잡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각 성도들에게 선물로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통해 사단의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⑶ 승천하신 그리스도(9-10)
사도 바울은 인용한 시편 68:18를 통해 주장을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실제적으로 조치하신 사실들을 풀어 나갑니다. 그는 8절에서 인용한 ‘올라가셨다’를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늘의 보좌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늘에까지 그의 통치권이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가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내려오신 것을 전제합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고 내려오셔서 승리자가 되어서 다시 오르신(승천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승리의 징표로 자기 자녀들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승리에 대한 결과로 받은 것입니다. 절대 개인적인 자랑거리가 아니라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나도록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승리를 따라서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신 은사를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사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해 나가길 원합니다. 은사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헌신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11-13)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건강하고, 이 건강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건강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풍성하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되려면 모든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숙을 위해서 주께서 은사와 직분을 주셨을 때, 제일 먼저 리더를 준비시키십니다.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1-13)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세상의 방법과 다릅니다. 세상은 먼저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모이고 그리고 리더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먼저 영적 지도자를 준비하십니다.
⑴ 은사의 다양성(11)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의 구체적인 항목과 목적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는 다양합니다. 본문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 많은 은사들은 나열해 놓았는데 매우 다양합니다(고린도전서 12:4-11).
많은 직분들이 있지만, 본문에서는 공동체를 이끌어갈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의 직분들이 있습니다. 언급되지 않는 직분들이라고 저급한 직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저급한 은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작은 직분이라도 선합니다.
⑵ 은사를 주신 목적(12)
사실 모든 직분은 원칙적으로 한 목적을 위해 맡았습니다. 비슷하지만 각자에게 다른 직분을 주신 것은 각자의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더 잘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어떤 직분이든지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행동은 영적인 타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갈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들을 잘 가르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또한 권면과 경계로 잘 훈련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⑶ 은사를 통한 목적(13)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을 깨달았다면 그 목적에 부합하게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는 무엇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1:23)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지식에 근거합니다. 아무리 굳건한 믿음이라도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 됨을 헤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해야 할 목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권고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이라면 간절하게 원했던 모습입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7-10)
바울은 온전하게 되는 것을 어린아이가 자라서 장성한 성인이 되어가는 것에 비유합니다. 어린아이는 사실분별에 어둡고 속임수와 유혹에 잘 넘어갑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파도와 바람에 비유합니다. 독자들이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성장하지 않으면 여러 속임수와 유혹에 빠지고야 맙니다. 마치 거친 파도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다니듯이, 성도들은 이리저리 취둘리다가 결국에는 평안을 빼앗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 직분에 대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직분을 사람이 부여하거나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또한 교회의 직분은 그저 필요한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교회를 단지 선한 사업을 위한 단체 정도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공동체입니다. 그 구원 사업을 위해 선한 은사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신 사명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잘 성장해 나가고, 공동체로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를 보내주신 목적(14-16)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그들을 통해 교회와 이웃을 위해 섬기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직분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면, 정확한 방향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주신 은사를 가지고 아이들 수준으로 단지 직분에 따라 ‘누가 크냐?’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4-16)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통해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사와 직분은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입니다.
직분마다 그 역할이 조금씩 다르지만, 존재 목적은 모두 동일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성도들을 양육과 훈련을 통해 은사와 직분을 따라서 봉사하게 건강한 교회를 세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신약에서는 12제자와 12사도를, 구약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을 준비시키신 것처럼, 언제나 먼저 교회의 지도자를 준비시킵니다.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 됨을 이루라는 그의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잘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모든 면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들이 어디에서나 은사를 따라 사역장에서 주체가 될 때,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제대로 양육되고 훈련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 풍조에 요동하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로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서로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들이 일치하지 못한 것은 성도들이 어린아이처럼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숙이 있을 때, 연합이 일어나고 일치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함으로 모든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받은 은혜를 따라서 성숙하면 서로 하나 되어 연합되어 갑니다.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연결되어 가고 서로 세워가면서 사랑 안에서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건강한 교회에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충만하면 이 세상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의 건강한 교회를 원한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성도들에게 있는 은사와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신 승전 기념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게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능 간에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며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허락하신 은사와 직분을 소중히 여기고 잘 이행하기 원합니다. 사랑의 수고로써 온 세상의 교회가 온전해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미국 줄리아드 음악대학은 음악으로 유명한 대학교입니다. 유학생 중에 지도하기 가장 힘든 학생들은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능력은 뛰어나만, 문제는 협연(協演)하면 제대로 하질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자기 소리만 내려고 해서 협연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는 함께하는 ‘협주(協奏)’입니다. 협주에서 자신의 소리만 내려고 하면, 전체적인 하모니(調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소리를 줄이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3장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소개했습니다. 이제부터 마지막까지 대부분 성도로서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복음의 합당한 태도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하나로 연합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다양하게 세우십니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고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권고하는 바울(1a)
대부분 자기 허물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허물을 들어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적대감을 품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물을 지적해 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지적해 줌으로써 허물을 볼 수 있고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수치와 같은 감옥생활에서도 담대하게 진리를 권고합니다.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a)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에베소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신분에 관해 설명을 마치고, 이제부터 서신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본 단락에서 실천적인 권면으로 옮겨 갑니다.
먼저 본문에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서신의 전반부에서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제 실천적인 권면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신분인 성도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권면합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사도로서 선지자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다시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반복해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소개한 것은, 자신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투옥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들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자녀들을 통해 영화로운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바꾼 만큼 매우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 또한 그 귀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투옥된 것입니다. 투옥된 사실에 대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교회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를 위해 예수님처럼 자신이 희생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옥된 사실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들은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수많은 희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위해 고난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은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사도행전 5:41). 바울은 주 안에 갇혀 있으며 부르심의 목적 아래 갇혀 있습니다. 바울이 투옥된 삶을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사역에만 집중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투옥되는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것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감옥에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매우 값진 일입니다.
성도로 부르신 목적(1b-3)
성도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미완성품입니다.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성화 되어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은 인내(忍耐)입니다. 자신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1-3)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회를 향해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 소원을 에베소서 교회에도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그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특히 이방인이던 에베소 성도들은 은혜로 구원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함(1)
첫째 권면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라고 권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윤리적인 기준으로 선포합니다.
바울이 말한 ‘부르심(καλεο)’은 ‘교회’라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어원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서 ‘불러내진 사람’, ‘부름 받은 사람’, ‘호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시는 분’, ‘호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거룩하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해서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먼저 ‘세상 창조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에베소서 1:4)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내 새 생명을 주셨고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거룩한 일군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합당하게 행하기를’ 간청합니다. 이곳에서 ‘합당하게’란 ‘같은 중량’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만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들의 행위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대로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는 삶을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한 후, 곧 바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⑵ 합당한 방법(2)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세도 역시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덕목의 디딤돌을 놓습니다. 그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라고 하셨습니다. 이 요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3)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이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겸손(謙遜) : 헬라 문화권에서 겸손은 하나의 악덕으로서 노예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만과 교만의 반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겸손의 모델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모시고, 다른 사람들을 두 번째 자리에 놓고, 자신은 맨 뒷자리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셨고, 지상 사역에 정확히 낮은 태도가 수반되었습니다(빌립보서 2:5-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마태복음 11:29)하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② 온유(溫柔) : 복종된 권력, 현명한 주인의 통제 아래 권력입니다. 어떤 힘이 올바른 일을 위해서 길들여지고 사용될 때 온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비로소 온유함이라는 인격적인 성도의 자질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남에게 가혹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싸우지 않으며, 매사를 승자독식의 경쟁의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감정을 배려합니다. 온유가 있어야 날카로운 성격들이 부드러워져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표현에서 보듯 겸손과 온유는 일심동체입니다. 겸손이 마음의 태도라면 온유는 겸손한 자세가 외모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도 겸손과 온유로 힘의 균형을 이룬다면 사실상 모든 충돌이 사라질 것입니다.
③ 오래참음(忍耐) :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로마서 2:4,9:22;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3:15).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참기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야고보서 5:10). 어떤 잘못된 것에 앙갚음하지 않는 자제력 입니다.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덕목 중에서 인내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든 방식으로 습득되기 때문입니다. ‘인내’란 겸손과 온유를 구사하되 실망과 좌절과 노골적 반감을 주는 사람들 속에서 참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일체의 오래 참음의 모범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래 참음의 덕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인내가 있어야만 모두가 실수하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용납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추슬러 끊임없는 영적 성장의 멀고 험한 과정에 임할 수 있습니다.
④ 용납(容納) : 겸손과 온유가 짝을 이루듯이 인내와 용납도 서로 짝을 이룹니다. 인내는 모든 상황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지만, 용납은 상대방은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용서와 이해와 동정을 베풉니다. 모든 사람들을 은혜로 대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되 다른 방식과 다른 속도로 자라가게 이해줍니다. 물론 바울의 의도는 죄, 악, 부도덕 그리고 악행을 용납하라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라는 것이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허용하라는 것입니다.
⑤ 사랑 : 연합으로 가는 결정적인 단계는 ‘사랑’입니다. 즉, ‘아가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앞에 네 가지 덕목은 진정한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 가운데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합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 덕목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함께 하나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을 간직하고 지켜야 합니다(에베소서 2:15-16). 그들은 ‘평안’으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섬겨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를 이루는 방법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조화가 깨진다는 말입니다. 전체의 화합을 위해서 서로 겸손하게 섬겨애 합니다. 반대로 너무 무관심하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⑶ 힘써 지켜야할 하나 됨(3)
운동선수가 트랙에서 열심히 달리다보면 목적지가 나오듯이, 지속적으로 다섯 가지 덕목을 실천하게 되면, 최종적인 목적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섯 가지 덕목으로 부르심의 목적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를 위해 하나가 된 것을 힘써야 합니다. 이곳에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평화의 기도
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여 주십시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요.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게 하나되게 하신 것을 최선을 다해 하나를 지켜간 것입니다.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 되게 하신 만큼 능력도 주셨습니다.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 됨을 유지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자기의 주장을 하는 것은 모두 다 맞고 서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주장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겸손과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평안’으로 이루어지는 ‘매는 줄을 통해’서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른 점이 있더라도 서로를 사랑함으로 깊이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하나 되어 가야할 이유(4-6)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입니다. 몸은 한 부분이 부족하면 전체에 불편한 영향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부족한 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형제라도 자기처럼 사랑해서 세워주어야 합니다. 절대로 분열은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은 성도들의 믿음의 행동에서 가장 근본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하나를 의미하는 ‘한’이란 단어를 일곱 가지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한 소망, 즉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를 유지해야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은 한 주를 섬기며 하나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삼위일체의 조화로운 하나 됨을 세 인격을 중심으로 세 가지 요소로 소개하며 권고합니다.
⑴ 성령의 하나(4)
바울은 먼저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를 지켜갈 것을 설명입니다. 삼위일체 순서로 하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데, 이곳에서는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고 하십니다. ‘한 몸’은 보편적인 교회, 곧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1:23;2:16;3:6). 그리고 ‘한 성령’이란 그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에베소서 2;22).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성령이 한 분인 것처럼 한 소망 안에서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공통된 소망(참고 베드로전서 1:3; 3:15)과, 그들이 구원으로 부름을 받은 그때에 시작된 확신(에베소서 1:4,18; 2:7; 4:1)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는 ‘한 몸’(4)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몸을 헤치는 일에 각별히 주의하고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위한 믿음으로 살아갈 지침입니다.
⑵ 주(성자)도 하나(5)
다음으로 바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소개합니다. ‘한 주’는 그리스도, 즉 교회의 머리를 말합니다(에베소서 1:22-23; 골로새서 1:18). 먼저 다른 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 즉 그리스도로 인해 믿어지는 믿음의 본체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주관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또한 ‘한 세례’는 물세례, 곧 내적 실재의 외적 상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동일 시 됨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로마서 6:1-11; 갈라디아서 3:27).
모든 성도들이 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었고, 같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고,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는 한 몸입니다. 몸은 여러 기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한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아픈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그런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⑶ 하나님(성부)도 하나(6)
이제 바울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가르칩니다. 만유(萬有), 만물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마지막 정점입니다. 특히 ‘만유’를 4중 사용은 평범한 ‘모든 인류’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모든 믿는 자들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이십니다. 믿는 자들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요한복음 1:12; 갈라디아 3:2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통치자로 그들 ‘위에’ 계십니다. 특히 이방인에게는 다양한 신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라는 점에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 위에 계시면서 만물을 다스려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된 것처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분열시키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일과 같습니다.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오 본질이신 하나님께서는 세 인격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타락 전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으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가 분열되었습니다. 구원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깨어지고 분열된 것들을 다시 연합시키고 회복시키며 막힌 담을(에베소서 2:14) 허무는 하나 됨의 작업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적으로 교회의 몸에 이방인들을 접붙임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같이 누리게 해야 하며, 만유까지 이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이사야 11:6-9)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 대부분인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처럼 손색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 각 성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항상 하나 되길 원합니다.
세상에는 거짓 우상과 타락한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영적 도전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헛된 풍요와 거짓 평안을 약속하는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세상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엘리야는 당당히 영적 전쟁을 선포합니다.
아합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숭배한 것에 대한 징벌로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아 심판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아합은 여기저기 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닙니다. 이때 엘리야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오바댜 앞에 나타나 아합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라고 합니다. 엘리야와 아합이 만나면서 이제 본격적인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말의 전쟁으로 시작하여 불의 전쟁으로 마칩니다.
엘리야의 아합의 논쟁(16-18)
영적 전투는 성도에게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삶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하는 군사, 전투하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세상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노력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16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6-18)
엘리야의 명령을 받은 오바댜는 가서 아합을 만났고, 그에게 엘리야의 말을 전달해줍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마자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라고 부릅니다.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 이후에 가뭄과 기근이 왔기 때문에 엘리야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아합은 재앙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리고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엘리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반박에 아합은 대답을 못하였고, 둘의 논쟁은 엘리야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신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사이의 대결을 제안(19-20)
성도는 하나님을 거절하며 헛된 신을 섬기는 세상과의 영적 전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노력을 하는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칙적인 말씀 묵상과 일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영적 무기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거짓된 가치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19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19-20)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여호와의 선지자인 자신의 대결을 제안합니다.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 산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자신이 대결을 하여 누가 참 신인지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란 표현은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후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제거하고 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대체하여 우상의 나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방의 왕비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든 이런 모습은 솔로몬 시대 수많은 이방 왕비들이 솔로몬에게 이방신들을 섬기게 한 것의 확장판입니다. 엘리야의 요구에 아합은 사람을 보내어 모든 이스라엘 자손과 선지자들을 갈멜 산에 모았습니다.
갈멜 산에 대결을 준비함(21-24)
세상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숭배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 영광을 함께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영광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얻으려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변화되어 가정과 공동체도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20-24)
엘리야는 갈멜 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언제까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며 양쪽 신을 섬길 것이냐고 질타합니다.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왔다갔다 갈피를 못 잡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 참신이라고 생각하는 쪽을 따르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기에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에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주장은 이세벨이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오기 전에는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도 우상숭배 때문이고, 북이스라엘에 반역이 끊이지 않는 것도 왕들이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죄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지적받고 경고를 들어왔기에 엘리야가 한 신만 선택하라고 요구할 때 아무 말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여기까지였고, 여전히 둘 사이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이제부터 누가 참 신인지 알아보는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합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각기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둔 후, 각 선지자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른 후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살아있는 참 신이라면 자기 선지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불을 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제안에 백성들은 모두 좋다고 찬성합니다. 그들도 참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알 제사장들의 실패(25-29)
성도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당당함은 자신의 됨도미이나 재산이나 실력이나 인격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으로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세속주의와 혼합주의가 팽배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5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25-29)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그쪽이 인원수가 많으니 송아지를 택한 다음 먼저 제사 준비를 하고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절대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야의 말을 따라 바알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가져다 잡고,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바알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합니다. ‘뛰놀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절뚝거리다’, ‘다리를 절다’라는 뜻으로, 21절의 ‘머뭇거리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백성들이 둘 사이에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바알 선지자의 모습을 닮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 주위를 돌면서 소리 지르고 춤을 추고 격렬한 행동을 하는데, 이는 자기 신의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며 부르는데도 정오가 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더 큰소리로 신을 부르라고 조롱합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 신이 묵상하고 있든지, 아니면 잠깐 신전에서 외출을 했든지, 다른 곳을 다니고 있는 중이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 잠이 들었으면 깨워야 한다고 조롱합니다. 외출이나 여행 중이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바알 신은 공간적으로 제약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며,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잠들었으니 깨워야 한다는 것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과 대조됩니다.
이런 엘리야의 조롱은 바알 신이 장소적 제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귀가 어두워 깊은 생각에 빠지면 백성들의 소리를 못 듣고, 신체적으로 연약하여 잠을 자야 하는 제한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바알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봄에는 살아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만, 모트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면 지하 세계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때가 겨울입니다. 그러다 다시 살아나서 세상으로 오면, 다시 봄이 시작되는 순환적 신이기 때문에, 바알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무 응답을 못하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조롱에 자극을 받은 바알의 선지자들은 더 큰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규례를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의식은 고대 근동 종교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며,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소리 지르고 춤추고 몸에서 피까지 내면서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지만, 바알 신은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의 이름을 불렀고, 모든 수단을 간구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냈지만, 바알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른 바알은 응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신은 가짜 신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지켜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바알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인지 거짓 우상인지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음성에 응답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작은 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과 같은 우상과 달리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예배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예배 대상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는 세상에서의 영적 전쟁 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유혹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당당히 세상과 맞서는 믿음의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과거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을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장래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를 소망하기 위한 교훈으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역경과 시련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눈을 피해 그릿 시내로 가서 숨어 지내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여호와의 권능으로 살려내어 바알의 본거지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을 알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호와께서는 다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며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과 일전을 준비하십니다.
다시 아합에게 가는 엘리야(1-2)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상황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극복하고 사명을 이루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1-2)
가뭄을 선언한 지 3년이 지난 후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아합에게 가서 보이라는 명령과 이제 비를 내리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내린 징벌의 시간이 끝나고, 아합과 결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둘 중 하나가 제거되거나 항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10절의 오바댜의 말에 따르면, 아합은 그동안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온 세상을 다 찾아다녔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아합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사마리아로 돌아갑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기근이 심각했습니다. 이것은 가뭄을 극복하지 못하여 농사와 목축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가뭄을 극복하지 못한 무능한 신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기근은 시돈의 사르밧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산 엘리야와 과부 가족의 삶과 대조를 이룹니다. 결국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한 오바댜(3-6)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위협을 받을 때 사명을 망각하지도, 사명이란 명분으로 세상을 등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지닌 위치와 능력은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3-6)
여기서 오바댜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합 궁의 왕궁 맡은 관료로 상당히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세벨이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의 공식 종교로 만들면서 이에 방해가 되거나 반대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제거할 때 오바댜는 백 명의 여호와 선지자를 숨기고,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4절에서도 ‘양식을 공급하다’라는 뜻의 동사 ‘킬칼’을 17:4,9과 동일하게 사용했는데, 엘리야가 그럿 시내에서 까마귀의 공급을 받거나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어 지내며 양식을 공급받은 것과 비슷합니다. 오바댜는 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까마귀나 사르밧 과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선지자가 죽임을 당하고 기근으로 고생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기 사람들을 지키시고 먹을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아합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오바댜에게 물을 찾으러 나서자고 말합니다.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시내’라는 표현은 현재 이스라엘 땅에 모든 물이 말라버리고 가축들을 먹일 풀마저 사라져굶어 죽게 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다 잃다’로 번역된 ‘나크리트’는 4절의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에서 ‘멸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제거하는 것과 이스라엘 땅에서 가축들이 제거되는 것이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과 오바댜가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한쪽은 아합이 가고 다른 쪽은 오바댜가 가기로 정하는데, 오바댜는 지위가 높은 인물이며 아합이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알 숭배자 아합 밑에 있는 여호와의 종이 신뢰받는 고위 관료라는 것 자체가 여호와의 섭리입니다. 아합과 오바댜는 물을 찾기 위해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7-15)
우리가 받은 사명은 획일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다른 사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 사명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사명을 비교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사명을 무시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사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받은 다양한 사명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다른 성도를 하나님 나라를 함께 함께 세워 가는 동역자로 여겨야 합니다.
7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8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10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15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7-15)
오바댜가 길을 가는 중에 엘리야가 우연히 그를 만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사르밧 성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둘이 만난 것입니다. 엘리야를 만난 오바댜는 그를 알아보고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정말 엘리야인지 확인합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엘리야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으로,오바댜가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긴다는 또 하나의 징표입니다. 오바댜의 질문에 엘리야는 자신이 진짜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너의 주인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 대답해줍니다. 놀란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자신을 아합의 손에 죽게 하려고 이런 명령을 하였다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10-14절에서 자신이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바댜는 엘리야의 말을 듣는 순간 딜레마를 느꼈습니다. 아합은 모든 민족과 모든 왕국에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았고, 만일 그곳에 없다고 하면 정말로 엘리야를 보지 못했다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맹세는 만일 거짓말을 하면 아합의 보복을 받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적의 소굴인 시돈에서 안전하게 거하게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바댜의 말을 통해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했고 엘리야는 도망 다녀야 할 상황인 것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신이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야 있는 곳을 아합에게 보고했는데 여호와께서 그 후에 엘리야를 자신이 모르는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면, 자신은 아합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바댜는 두 가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합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엘리야를 숨긴다거나 엘리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하면 죽였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찾기 위해 백성들을 위협하고 함부로 죽인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에 대한 불신과 염려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엘리야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엘리야의 개인적 만용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엘리야의 말이 개인적 생각이라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이전처럼 숨기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바댜는 그동안 아합이 오바댜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영이 그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아합을 이길 수 없기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숨기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걱정을 말한 후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자신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실한 자라고 주장합니다.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고, 특히 4절에서 화자가 말한 것처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를 굴에 숨기고, 물과 양식을 공급해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는 증거를 내민 것입니다. 14절에서 다시 한 번 엘리야의 명령대로 행하면 자신이 아합의 손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말을 맺습니다. 오바댜는 아합 곁에서 아합과 이세벨의 무서움을 보고 겪었기에, 엘리야의 말에 대한 신뢰보다 아합의 응징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끝내실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고, 홀로 나타난 엘리야를 보면서 그의 능력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에서 행한 기적들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한 이야기를 못 들었냐고 물었지만, 정작 자신이 여호와의 놀라운 기적을 듣지 못하였고, 이제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이어가며 여호와의 힘과 기적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어려움은 여호와를 배신한 것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지만, 오바댜를 포함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며 부르짖던 사람들은, 혹시 여호와께서 바알을 못 이기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이 점점 약해져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바댜의 말에 엘리야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은 오늘 반드시 아합 앞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여호와께 ‘만군’, 즉 ‘군대’, ‘용사’라는 별명을 붙인 이유는 오바댜의 연약한 믿음에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오바댜에게 여호와는 군대와 같은 힘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아합이나 이세벨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여호와께서 바알에게 졌기 때문이 아니며, 이제는 여호와께서 일어나 이 상황을 정리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오바댜의 고생을 귀하게 보시고 그에게 가장 먼저 여호와의 일어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던 오바댜에게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숨어 다니던 엘리야는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아합을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명은 주님의 역사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명의 크기, 사명자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명을 주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듯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서로 다릅니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자기 사명에 온전한 헌신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공식적으로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후원회의 밤’을 실시합니다. 이러한 후원회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될 수 만 있으면 많은 사람을 초청해서 많은 후원을 받으려 합니다. 만찬회는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자리를 배치해 줍니다. 그것은 기부금액이나 정치 영향력에 따라 앞자리부터 앉도록 특혜를 줍니다. 세상의 법칙은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좋은 자리를 배치하지만, 천국에서는 세상의 법칙과 다릅니다. 천국에서도 세상의 법칙을 따라 배치한다면, 조차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법칙대로 하지 않으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잔치 자리를 공평하게 배치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전반부인 교리 부분을 기도로 마감합니다. 그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그 기도를 응답해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첫째, 속사람이 강전해지길 위한 것, 둘째,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실 것,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달라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충만케 하신 것으로 채워달라는 것을 구합니다. 이 기도는 전반부 신학을 마감하며, 후반부 권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14-15)
날마다 기도하면서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대상과 응답해주시는 분을 잊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형식적으로 하다 보니, 기도를 응답해주실 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려움에 빠지면 스스로 연민을 느끼면서 기도합니다. 때로는 푸념을 늘어놓고, 나중에는 기도가 원망으로 변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14-15)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형편에 대해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설명한 후, 이제 다시 돌아와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 기도는 첫 번째 기도인 1장 15-23절을 이어받아서 하는 두 번째 기도입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 기도는 앞부분에서 한번만 등장합니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앞부분뿐만 아니라 이렇게 특이하게 중간에서도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앞부분의 기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감사 기도’였다면, 본문에서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관심과 소원 기도’였습니다.
(1) 기도를 드릴 마음(14)
사도 바울은 이전에 3장 1절에서 ‘이러므로’라고 기도하려다가 잠시 동안 기도를 멈추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 갔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이 투옥된 상황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해 로마 제국의 죄수가 되었고 환란을 당하지만, 그 ‘그리스도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을 동일하게 구원을 주신 사실과,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모든 족속을 위해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에 대해 설명했었습니다.
이제 재정비하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3장 1절과 똑같이 ‘이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이어 받고 싶었던 내용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을 ‘내가’라고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바울’이란 걸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좋은 점도 보았지만 부족한 점을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비판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을 보면서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처럼(마가복음 14:32-42), 그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2) 기도를 드릴 대상(15)
① 기도의 대상(15a)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할 때마다 기도를 드리는 대상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받으실 분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 굶고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데 기도를 받으실 분에 대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즉 ‘이 세상에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있을 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함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 친밀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만물의 소유주임을 증명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이란 말이 ‘아버지’를 수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권세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우주적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하나님을 우주적인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온 족속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예상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아버지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한편으로 바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마태복음 6:9;요한복음 17장).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갖는 화해적 성격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아버지로서 사랑하시고 자녀로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4-18)
하나님께서 아버지란 사실은 하나님과의 회복과 친밀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친근한 아버지로서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에 소유하시고, 그리고 모든 통치하신 전지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참 주인이십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께 아버지로 모시면서 그 아버지께 담대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족속(πατρια)’는 한 조상에게서 파생된 가족 단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조주 한분 하나님 아래서 한 족속으로 창조되었지만, 아담 타락 이후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각 족속별로 나누어졌습니다(창세기 11:1-9). 그 결과는 사람들 사이, 족속들 사이에 분열과 전쟁이 지속하였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 이렇게 분열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하나 되지 못하고 이처럼 분열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대상을 소개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듣고 응답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또 다른 숨은 의도는 에베소서가 추구하는 교회의 연합에 대한 의도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② 기도의 자세(15b)
다른 사람 앞에 자세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하는 태도에 따라 상대방의 위치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몸의 자세보다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두 가지로 서서하는 기도(마태복음 6:5;마가복음 11:25;누가복음 18:11,13)와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에스라서 10:1;누가복음 18:13)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펴서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방법들 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과 기도하는 사람의 겸손을 나타냈습니다(누가복음 22:41;사도행전 7:60;20:36;21:5). 기도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가 여러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6:39;누가복음 10:13; 18:11,13;디모데전서 2:8). 바울의 기도하는 자세는 아마도 이사야서 45장 23절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이사야서 45:23)
전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함께 무릎 끓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장로들은 생전에 바울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고 그들 끌어안고 입 맞추며 크게 울었습니다(사도행전 20:36-37). 그 장로들은 기억 속에 바울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던 모습을 인상 깊게 남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서신을 보면서, 그 때 간절하게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의 깊은 사랑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겸손함과 간절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그 기도는 약해지거나 비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더 강력하게 간구할 것입니다.
바울 기도의 내용(16-19)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닮아갑니다. 부모님이 기도하면 자녀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 자녀도 같이 읽습니다. 이처럼 영적 부모인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바른 신앙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6-19)
사도 바울을 살펴보면, 투옥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밖에 있는 성도들을 더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빌립보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후, 다시 돌아와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기도를 정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인은 설교학에서 가장 존경하는 영국의 존 스타트 목사(Rev. John Stott)의 견해를 따라 네 가지-강건, 사랑, 지식 그리고 충만-로 정리해 봤습니다.
(1) 속사람이 강건하길(16)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길 위해 기도합니다. 에베소 환경은 심적으로 낙심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3:13). 이러한 낙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강건하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할 때, ‘속사람’이 힘을 얻어 강건해집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두 단어인 ‘속사람’과 ‘강건한다’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속사람’이란 바울서신에만 나타난 독특한 표현으로(로마서 7:22;고린도후서 4;16), 회심할 때 입는 ‘새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속사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거주하는 내적 부분, 곧 마음이나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면,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또한 ‘강건한다(κραταιωθηναι)’는 ‘강해지다’란 뜻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서 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풍성’은 하나님의 모든 면에서 완전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구원하는 근원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역사하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 해달라는 기도는 성도들의 마음을 강건하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강건해져야 할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오직 성령충만입니다. 에베소처럼 도덕적으로 문란한 이방 사회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악한 영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심령이 강건해야 합니다. 약한 성도는 자기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며, 우유부단하여 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고, 시험과 고난 앞에 무너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 수도,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은 모든 부분의 주인이 그리스도께서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면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도들 한 사람 한사람의 그리스도로 심령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 들고 육신은 늙어지고 병들고 그리고 죽게 됩니다. 세상 이치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늙어 질병으로 무너져 가지만, 속사람인 영혼은 결코 쇠하거나 약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인격 수양이나 교양으로도 가능하지 않고, 사람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십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성령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겉사람인 육체가 강건하게 하는데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강건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속사람의 강건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먼저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6-18)
사도 바울이 말한 ‘속사람’은 이 말씀을 기본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유혹과 고난 그리고 환난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승리케 하는 배경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는 간구는 인격수양이나 성품 훈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유혹이나 핍박에 직면할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면 이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속사람이 강건할 수 있도록 이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며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17a)
성도들의 강건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령에 내주하셔야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첫 번째 제목은 성령의 임재를 통한 성도들의 강건을 위해 기도했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시길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심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4-10)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심으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내기 시작됩니다. 이 약속은 이미 예수님께서 성도들 속에 성령으로 내주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20). 바울도 같은 의미로 성도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6;19).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주인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인이 되면 평상시에는 괜찮지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위축되고 초라해 집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심령에 내주하시면 더 강력해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충만하면 더욱 강건해집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미 영접한 순간 성령께서 심령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상스럽게 또 내주하심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한 이유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흔들림 없이 견고해지길 위해서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길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과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심령에 내주하시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바로 머리나 입술만의 믿음을 아닌 실질적으로 삶 속에서 증거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좌정하시면 선하게 인도하시고,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을 분명히 깨달음(17b-19a)
계속해서 세 번째 간구는 에베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깨달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을 기초해서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도록 원했던 결과입니다. 그 제목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온전하게 이해하고 강건해지기를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식물과 건물에 비교합니다. 바람직한 믿음은 단순히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마치 식물이 계속 성장하듯, 그리고 건물이 계속 건축되듯이 믿음 또한 계속적으로 성장해 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날씨에 상관하지 않고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에서 ‘사랑’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17)은 그리스도와 관계 때문에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말하지만, 두 번째 ‘사랑’(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무한해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대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사랑을 측량할 수 있는 것처럼 수사적(修辭的)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8절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동일하게 표현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체험적인 사랑을 알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한없이 넓고, 깊고, 높아서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깨닫게 됩니다.
굳이, 이곳에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넓이’는 모든 사람들을 품을 만큼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 즉 땅끝까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범위를 의미하고, ‘길이’는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긴 사랑, 즉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지속되는 사랑이며, ‘높이’는 모두를 무한한 영광으로 인도할 만큼, 변질된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이 차원 높은 사랑이며, ‘깊이’는 모든 필요를 채우고 죄나 상처에 덮을 만큼, 무한히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광대한 능력과 무한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상상할 수 없지만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세상의 기준을 통해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모두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믿음에 멈추지 않고 체험적인 믿음으로 더욱 성장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는 모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지만, 심령에 내주하셔서 깨닫게 하시면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체험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만 비로써 바른 신앙고백이 가능합니다(고린도전서 8:1;13:2; 빌립보서 4:7). 이렇게 하는 목적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사랑이 없는 교회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고, 생명력이 없는 교회는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아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드린 사랑처럼 성도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계시길 바라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잘 뿌리내려져서 성장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에베소 성도들이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교제를 나누길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굳건히 세워지길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의 지식을 초월해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해주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심령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신 결과,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는 내리고 견고해질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4) 충만함으로 채워짐(19b)
사도 바울의 마지막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유한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하나님으로 가득 채울 순 없습니다(역대하 6:18). 하지만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가능한 역량의 최대치만큼 하나님의 힘과 사랑과 지식이 흘러넘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본문을 쉽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로 점점 충만하게 하사 하나님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시길 구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충만하다(πληρωμα)’를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될 수 없지만, 현재보다 더 성장해서 온전해져 갈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내용이 서로 같습니다.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성도들에게 성숙한 목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심령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씸 같이 온전해 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충만하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인도됨을 암시합니다. 이 ‘충만’은 이미 1장에서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케 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유사하게 말씀하시고, 에베소서 4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십니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 4:13-14)
하나님의 소원은 성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것이 그 절정(絶頂)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의와 진실과 사랑을 본받고, 그분과 같이 온전하게 해달라는 중보기도입니다.
성도들의 최종적인 결정체(結晶體)는 지상이 아니라 천성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완벽하게 변화될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하게 구비되길 간구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먼저 성령 충만하게 무장해서 승리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거룩한 하늘나라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간구에 대한 제목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간섭을 전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 성령을 통해 심령이 귀경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개인이 성령으로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길 바라며 나가서는 온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송영 : 하나님께 영광(20-21)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께 경배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신 올바른 지식으로 예수님에 대해 깨달을 때, 하나님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20-21)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로 네 가지 제목으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위대한 기도를 응답하실 하나님께 찬송하며 장엄함으로 전반부를 마무리합니다.
(1) 영광의 대상(20)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경륜을 시작하셨고 또한 완성하셨습니다. 그 구속의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더 ‘충만한’, ‘넉넉한’, ‘후히 주는’, ‘채우시는’, ‘능히 하시는’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실 때, 은혜의 역사가 한없이 크고 풍성하다는 사실을 묘사합니다(로마서 8:28; 빌립보서 4:7). 바울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압도되었습니다. 크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십니다. 그 풍성하신 능력으로 세우신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들도 그분의 능력과 은혜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모든 부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교회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 송영(21)
사도 바울은 그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이 대대로 있기를 기원합니다.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송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에베소서가 특이한 것은 다른 바울 서신의 송영에는 없는 ‘교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대부분 다른 서신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끝맺지만, 에베소서는 ‘교회 안에서’라고 첨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서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참으로 놀라운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갓난이 옹알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령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교회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온전히 있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성도와 교회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위대한 것뿐 아니라,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풍성하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는 만유(萬有)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이제 조직신학적인 부분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가 제대로 구비되어야만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시작하여 마무리됨을 신뢰하며, 더욱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알 수 있는 내용은 ‘정보’이라고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고 있는 것은 ‘비밀’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비밀’은 사적이고 은밀하게 전해집니다. 만약 어느 지역을 ‘도시개발’한다면, 그런 사업은 계획단계에서는 비밀스럽게 몇몇 사람들만 진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기꾼들이 투기하여 사업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디선가 일어났던 사실을 몇몇 사람만 아는 것을 ‘비밀(秘密)’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비밀도 때로는 많은 유익을 주지만, 천국의 비밀을 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유익을 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경륜’이 ‘하나님의 비밀’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새로운 한 형제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전파 하면서 투옥이라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받은 고난을 두려움이나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바울의 상황(1)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선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인도하신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1)
바로 앞부분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담이 무너졌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분되지 않고 함께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존재임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계획 따라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이 때문에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비밀’과 자신이 받은 사명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⑴ 그리스도의 갇힌 자(1b)
사도 바울은 속 시원히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라고 소개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지금 로마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노년인데도 감옥에 투옥된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이 투옥된 상황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투옥된 상황을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에베소 있는 성도들도 들었습니다(갈라디아서 1:23). 에베소 교회 안에 연약한 성도들은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하거나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투옥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바울 당시는 어떻겠습니까! 그는 감옥에 갇혔지만 죄수된 상태에 메어있지 않았습니다. 투옥 중에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사역을 멈추지 않고, 조금도 움츠려들지않았습니다. 사령관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사령관실에서 영적 전투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빌레몬과 같은 좋은 일군들을 만나서 동역하기도 합니다(빌레몬서 1:10).
오히려,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것은, 그만큼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투옥된 죄목은 실질적으로 ‘로마 반역죄’이지만 영적인 계획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모함이나 고소 때문에 로마 황제나 로마법 아래 있는 죄수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성취된 일일뿐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의 일’인 즉, ‘복음 사역’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지 않았으면, 로마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당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 퍼지면 퍼질수록 사단의 나라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사역을 방해하고 더 나가서 바울을 모함하여 감옥에 넣었지만, 복음은 더 힘차게 뻗어나갔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복음을 완성시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을 로마 반역자로 투옥시키는 것은 사단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핍박할수록 고난 받기를 즐거워하고 기꺼이 고난에 동참했습니다(베드로전서 4:13).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한 감옥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에 묵묵히 순종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오히려 투옥된 사실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비밀(2-7)
동일한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끼리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비밀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동체 의식을 느낀다는 것과, 반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도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과 복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한 상태라서 서로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2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2-7)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된 이유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마 자신의 투옥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성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소개합니다.
(1) 바울의 사역 소개(2-4)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비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① 은혜의 경륜(2-3)
사도 바울은 먼저 전반적인 자신의 사역이 ‘은혜의 경륜’이라고 소개합니다. ‘경륜(οικονομια)’은 ‘직분(職分)’이나 ‘사명(使命)’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의 직분’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직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사역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을 맡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던 죄인에 중 괴수였습니다(디모데전서 1:15).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불가능했고, 더 더욱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사역을 맡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살기가 등등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핍박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소원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성도들을 잡으러 가던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啓示)해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1:11-12). 또한 그 비밀을 깨닫게 된 것만도 감사한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비밀을 전파하는 사명까지 주셨던 것입니다(사도행전 9:1-9).
위대한 사역을 바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경륜’을 따라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일군으로서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성도들은 사역하던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 했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면서 희망을 갖도록인도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② 이해할 수 있는 방법(4)
사도 바울은 이해하지 못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분하게 근본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점을 풀어갑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진리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앞부분 1-2장에 기록한 내용-만물의 통일(1:9-10), 이방인의 구원(2:11-22)-을 잘 읽어보면, 그 동안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바울의 현재 어려운 상황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마서 11:13)로서 ‘그리스도의 비밀’이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과 이후 모든 이방인 성도들은 바울과 같은 일군들의 헌신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를 통해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순간적인 시점에서 보면 고난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더 힘을 받아서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이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 투옥된 것까지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직분’으로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2) 그리스도의 비밀(5-6)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거론한 사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의 비밀’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에서 ‘비밀(μυστηριον)’은 영어 ‘미스테리(mystery)’를 파생시켰습니다. 이는 ‘비밀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단어를 과거에 용도를 살펴보니, 이방 종교에서는 제사 의식의 내용이나 제의(祭儀)에 참석한 사람들이 받은 비밀스러운 신탁이나 신접 그리고 환상 등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사용했는데,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진 어떤 사실들, 즉 일정 기간 숨겨졌던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계획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비밀’이란 단어를 유대인이 사용하던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신비’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 ‘신비’는 과거에는 숨겨져 하나님의 계획이 때가 되자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계시된 종말의 사건들, 즉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 이루실 종말적인 구원 계획으로 사용합니다(로마서 11:25;16:25;고린도전서 2:7;15:51;골로새서 1:27;데살로니가후서 2:7).
결국,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비밀’은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알려지기 전에는 전대미문의 것이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 과거에 숨겨져 있다가 때가 되니깐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고,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일군인 바울 자신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앞 장(1-2장)에서 소개한 ‘그리스도의 비밀’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메시아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만드실 것과, 그 새로운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갈 계획이셨습니다. 그 계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행되어 가고 완성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동일한 한 몸으로 연합 되었고,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는 자로 참여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살던 사람(특히 유대인)들은 대부분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장차 메시아가 오신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만 위한 분이지,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제시될 줄 몰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림자로만 보여주셨기 때문에(히브리서 8:5) 실체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5). 그리고 성령을 통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그가 메시아임을 알려주셨습니다(참고 누가복음 1-2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동안 감추진 비밀들을 갈보리 십자가 위에 모두 이루셨습니다(요한복음 19:30). 그리고 바울과 같은 일군들을 택하셔서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기록한 내용을 자세히 살폈으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에게는 매우 거북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유일한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이렇게 자부심 강한 이스라엘에게 바울이 와서 유대인의 메시아가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하시고 한 백성으로 연합한다니 충격과 반감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의 비밀’은 넓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해 종말적인 구원의 계획을 의미하며, 좁은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 받는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비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집니다(갈라디아서 2:16).
(3) 비밀의 일꾼인 바울(7)
사도 바울은 이제 간략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직분을 감당했는지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고 나니, 세상에 어떤 소식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깨닫는 것으로만 멈추지 않고 그 비밀을 전하는 직분까지 맡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했으며, 그리스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진멸하려고 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역을 이제는 자신이 그 사역을 감당하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일군(διαχονς)’이란 ‘하인’,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일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삶이 변화된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라고 표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 사역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과거에는 혈기가 가득한 사람의 일군이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인도하신 대로 따라가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일군으로 ‘그(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움직였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역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도하는 대로 ‘복음의 일군’된 것을 시인한 것입니다. 과거의 그를 그리스도께서 넘어뜨리셨고, 이제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했던 사역을 ‘이 복음을 위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이 복음’은 지금까지 누누이 강조했던 ‘그리스도의 비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함께 상속자가 되고, 그리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는 영광이지만 유대인에게는 논란거리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땅끝까지 이방인에게 전하도록 세움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나타난 이 위대한 소식을 누군가는 전해야 했지만, 아무나 함부로 감당할 수 없었고,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이 자신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일군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역의 일군으로 예수님의 12사도들은 주로 예루살렘과 주변 유대인에게 전했지만, 바울은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건너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사도가 되었기에, 그는 일군으로서 은혜의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사역하면 할수록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가망 없어 보이는 이방인도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기쁘게 복음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비밀을 전하는 바울(8-12)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행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세상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 감동되어 복음을 듣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나아감을 얻느니라(8-12)
그리스도의 좋은 일군의 특징 중 하나는 ‘겸손’입니다. 자기를 높이거나 들어내지 않고 낮추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고 주장하는 자세는 처음부터 일군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바울에게 복음의 비밀을 맡기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비밀을 맡기신 이유(8-9)
사도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일군으로 삼으신 이유에 대해, 첫째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따라서 세워졌고, 둘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 때문입니다. 이 경륜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미빌을 맡기신 것입니다.
① 일군으로서 자격(8a)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강조하면서, 받은 직분에 비해 자신의 인간적인 자격에 대해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를 고백합니다.
과거 자신을 돌아보면, 인간적으로 훌륭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배설물과 같아서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자신의 존재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자격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신에 대해 제자인 디모데와 고린도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린도전서 15: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던 과거 모습은 능력 있는 ‘일군’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 변화된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직분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지를 깨닫고 인정합니다. 복음을 위해 30년 가까이 헌신했고, 심지어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하지만, 사역은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다른 ‘성도’들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성도보다 더 작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작아진 만큼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오직 사역에 대한 성패가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② 맡겨진 사명들(8b-9)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중요한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 이방인에게 전함(8b)
첫째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8)하려고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구원의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신비한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 비밀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오면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파하지 않으면 누구도 들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10:14).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이 소식을 전파하는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 감추인 경륜을 들어냄(9)
사도 바울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9)고 소개합니다.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경륜은 비밀스럽게 감추어졌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감추어졌던 비밀의 장막을 벗기셨습니다. 장막을 들추어보니, 그 속에 ‘그리스도의 풍성’이 하나님의 비밀 경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알려해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반역과 범죄로 타락하여 온갖 불의와 혼돈에 빠진 만물을 회복하여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시작하셨고, 장차 완성하실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감추어졌던 비밀, 즉 우주적인 구원의 계획(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만드심)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들을 실행해 가시는지를,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 드러내도록 바울에게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동일했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합니다(참고 로마서 1:14).
이러한 모든 사역들-이방인에게 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내는 일-을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맡기신 직무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자격은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다고 겸손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바울처럼 겸손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면, 맡겨진 사명에 대해 충성스럽게 잘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2) 비밀을 맡기신 목적(10-12)
이제까지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전파하는 목적과 비밀의 경륜(직무)을 설명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비밀의 경륜을 전파하도록 맡기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이 경륜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그 비밀의 경륜이 전파되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즉, 바울의 복음 전파를 통해 어떤 결과를 내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는지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① 전파할 대상(10a)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기실 때,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를 대표해서 일군을 세우셨습니다. 그 일군을 통해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참 권세자이며 통치자라는 들어나도록 증명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전파할 대상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라고 지적합니다. 이 부분의 해석에 에베소서 난해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해 보면 그 대상을 두 가지 학설로 한정할 수 있습니다. ‘지상 악한 통치자들’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라는 학설인데, ‘천상의 존재들’을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본문 전체를 통해 보면, 후자가 ‘천사의 존재’인 ‘천사’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의 사역이 이방인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었고, 이제 영적 존재들에게 까지 확장 됩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위해 주어졌지만, 영적 권세들에게까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② 전파할 내용(10b)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적 존재들을 집합시켰습니다. 증인으로 집합한 모든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즉, 사단)들에게 준비된 소식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들 앞에 전파될 내용을 ‘하나님의 각종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이곳에서 ‘각종(πολυποικιλος)’이란 ‘가장 다채로운’, ‘한없는’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는 우주적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경륜과 섭리에 대한 지혜를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입증했습니다. 그 내용은 누누이 강조하지만,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만물을 통일하셨고, 적대관계였던 유대인과 이방인도 하나 되게 하여 새로운 인류, 즉 교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취해 가시는 방법은 비교할 수 없이 매우 탁월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의 가장 지혜로움보다 월등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무한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섭리 속에 나타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오묘함 그리고 무한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③ 전파할 방법(11)
이제까지는 그리스도의 경륜이 비밀로 들어나지 않았습니다(5).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비밀을 완전히 들어 내셨습니다.
그 지혜를 입증하는 방법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참 권세자이고 통치자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모습을 통해 영적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을 통해 사단이 장악했던 악한 모든 세력이 약화되어 갈 것입니다.
이제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인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전파되었습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를 미혹하는 세력은 하늘의 권세를 잡은 악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미혹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의 역할과 성도의 정체성을 망각하여서, 세상과 구별됨이 없이 살아가도록 하는 시도입니다. 이런 미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④ 전파한 결과(12)
전파됨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맺습니까?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먼저 본문에 ‘담대함(παρρησια)’는 ‘자유로운 말’, ‘명백’, ‘확신’과 ‘당당히(πεποιθησια)’는 ‘확신’, ‘신뢰’의 뜻을 함께 지녔습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확신’과 ‘신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인들은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가는데 담대하게 나가길 권합니다.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19-22)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양으로서 대속적 죽음, 즉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만 생길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5;3:4).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받아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께 떳떳하게 나아가는 확신에 찬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모든 구원의 사역은 유일하신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담대함과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됩니다. 복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모든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한 위로(13)
하나님께서는 지상 위에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워짐으로 많은 핍박이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모습이 두렵거나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풍성한 은혜 그리고 각종 지혜를 드러내는 영적인 곳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하나님에 세워진 교회임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그의 영광을 위해 헌신을 다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13)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투옥된 이유와 자신의 직분에 대한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통해 2-12절까지 설명했던 내용을 그 결론으로 맺으려 합니다.
그는 독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이라고 시작해서 기록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을 통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실망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12).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잘 살펴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갇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로 유혹되어 악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모습 때문에 낙심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고난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의 영광’으로 귀하게 생각해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수고한 만큼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달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이든지, 너희 영광을 위한 것이니 절대 낙심하지 말라고 더 담대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고난에 동참한 것이 사역자의 영광입니다. 자신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에서 복음의 씨앗은 옥토나 척박한 땅이든지 세상 어느 곳이든지 뿌려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환경에 구애 받지 않고,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며 자신의 사명에 따라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 결과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을 당할지라도 오직 자신의 사명에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 성도들을 열매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느 위치에 있든지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사명에 매진해야 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한쪽 벽과 다른 한쪽 벽을 연결하는 부분입니다. 서로의 벽을 이을 때 중요한 돌을 사용하여 이어갑니다. 이 중요한 돌을 모퉁이돌이라고 합니다. 이것의 역할은 두 개의 벽이 직각으로 마주하는 곳에 놓아 그 벽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다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퉁이돌로서 어떤 역할을 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앞 단락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이방인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초점을 맞춥니다. 과거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던 비참한 모습을 상기시키고,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모습과 대조시킵니다. 본 단락을 세 부분으로, 첫째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던 이방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하였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화해의 관점에서 이방인이 완전하게 변화된 삶을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이후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이방인(11-13)
‘차별(差別)’이란 ‘둘 또는 여럿 사이에 차등을 두어 구별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차별과 억압이 많습니다. 인종적 차별, 성별적 차별, 신분상 차별, 지역적 차별 등, 수도 없습니다. 대부분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 위에 군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이런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차별 때문에 섭섭함을 느끼고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 위로를 전합니다.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1-13)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에게 과거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던 비참한 상황을 생각하면, 현재 영광스러운 삶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감사가 넘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이방인들은 어떤 비참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11)
사도 바울은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의 영적인 신분에 대해 먼저 ‘무할례당(ακροβυστια)’라고 일축합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영적인 특권과 복을 누릴 신분증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할례라는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민족적 우월성을 가졌습니다. 유대인은 할례 받지 않는 이방인들을 향해 ‘포피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한 백성들이라고 무시했고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고 경멸했습니다.
이방인의 비참한 상황은 12절에서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방인의 상황은 그만큼 너무 비참했었습니다.
⑵ 그리스도 밖에 여러 가지 상황(12)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보는 관점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영적인 신분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목적은 과거에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복과 특권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입니다.
① 그리스도가 없었음
유대인들은 ‘메시아 사상’으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미 구원자가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자기 민족에게서 나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사무엘하 7:13,16; 이사야 9:1-9). 그러나 과거에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메시아 자체를 알지 못했고, 당연히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② 이스라엘 나라에서 단절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나라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유대인의 나라만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종교적 정치적인 공동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셨고 유대인들은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었으므로 그의 백성에서 제외되고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합법적인 백성이 아니고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누리는 영적인 복과 특권에서 제외되었습니다.
③ 언약들에 대해 외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를 통해 구원과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2:1-3,사무엘하 7;8-16;시편 89편).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 언약과 상관이 없는 ‘외인(外人)’, 즉 ‘외국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 주신 언약들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는 외국인이었습니다.
④ 세상에서 소망이 없음
과거에 이방인들은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인생의 성공이나 번영에 대한 소망은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소망일 수 없습니다. 참 소망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것만 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참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세상에서 불안과 절망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⑤ 하나님이 없는 자
과거 이방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스스로 우상들을 만들고 신으로 섬겼습니다. 신들은 많았지만 자신을 구원해줄 참 신은 없었습니다. 그 신들에게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신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이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한마디로 매우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언약들과 무관한 외인들이었고, 소망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던 비참한 상황을 “생각하라”고 충고합니다. 은혜 받기 전 과거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합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면 스스로 주인이 되고 점점 교만해져 버립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서 받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믿을 때 가졌던 열정, 믿음 그리고 소망을 잊고 변질되었습니다. 첫사랑이 변질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4-5)
사도 바울은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에게 과거 비참한 상태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현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구원에 대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⑶ 그리스도로 가까워짐(13)
사도 바울은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언급한 후에, 이제 그들의 공통된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본 절에서 과거 상황의 ‘멀리’과 현재 상황의 ‘가까운’을 대조 시키면서 완전하게 달라졌음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영적으로 ‘멀리’는 11-12절에서 언급한 과거 이방인들의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을 의미하고, 현재 ‘가까운’상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요약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비참했던 상태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들을 찾아오셨듯이(창세기 3:9), 허물과 죄로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비참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함께 계서서 인도하고 계십니다(마태복음 1:23).
멀리 비참한 상황에 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신 중매자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죄값을 지불한 순간 분리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피’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서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이 되는 방법은 ‘할례의 피’를 흘려야만 유대인으로 자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대속적인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구원의 증표를 ‘할례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 바꾸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이상 비참한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길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14-18)
‘인간의 죄성(罪性)’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서로 높은 담을 만들고 깊은 틈을 만들어 점점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죄성’의 결과로 항상 혼자라 생각하며 불행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지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관계 회복을 위해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4-18)
이제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멀리’있던 비참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워진’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은 과거의 습관대로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서로 화목하고 하나로 연합된 ‘화해의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을 ‘평화’와 ‘화해’로 꼽습니다.
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 ‘멀리’있던 이방인들을 찾으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수평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서로 화평을 이루셨고,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이에 평안을 만드셨습니다. 이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공동체에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사역(14-15a)
㉮ 둘을 하나 되게 하심(14a)
14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소개하길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로 소개합니다. ‘화평(ειρηνη)’는 구약의 ‘샬롬(מולשׂ)’과 동일한 의미이며, ‘나라끼리 화목함’또는 ‘마음이 평안함’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불화나 적대 관계가 해소됨으로서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 서로 하나로 연합합니다.
즉, 불일치와 갈등 그리고 적대감의 관계가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시어 하나님과 사람사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조화와 평화의 일치로 회복시키시고, 서로 화해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적 화평을 가져다주면 세상에 많은 충돌을 유방하는 요인들이 사라집니다.
㉯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심(14b)
사도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위해 이루신 일을 설명합니다. 본문에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소개합니다. 이곳에서 ‘둘’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셔서 적대감을 없애고 ‘하나’로 일치와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과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막이라는 담이 있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견고한 장벽도 존재했습니다. ‘막힌 담’이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성전의 담을 염두해 둔 것입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휘장을 제거시키셨고(마태복음 27:50-51),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서로 원수 되었던 막힌 담을 하나로 무너뜨려 다 이루셨습니다(요한복음 19:30).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습니다.
㉰ 계명들의 율법을 폐하심(15a)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중에는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존재했던 적대감을 제거하셨는지 설명합니다. 본문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소개합니다. 서로 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계명의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백성으로 지켜야 했던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기 때문에 언약의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막힌 담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하셨는데, ‘폐하셨다(καταργησας)’는 ‘무력화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모든 인류에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막혀 있던 율법의 담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가는 율법의 담은 사라지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결과(15b-16)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지상의 사역에 대한 내용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한 결과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로부터 수평적인 관계 회복의 창조와,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 즉,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과 적대감을 소멸하시고 화목하게 하신 수직적인 창조인 것입니다.
㉮ 새 사람의 창조(15b)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결과로 ‘한 새 사람의 창조’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옛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듯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 새 사람’ 즉,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창조됨을 설명합니다. 후반부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에서 잘 설명합니다.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1-24)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열과 대립의 옛 사람 대신에 화평과 연합하여 새롭게 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아닌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전하게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수직적인 관계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가 다 함께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28; 골로새서 3;11). 하나님께서 첫 창조 후에 타락한 사람들은 분열과 전쟁으로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창조를 통해 서로 화해시켜 하나로 아름다움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킨 재창조 사건도 첫 창조 때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 매우 좋았습니다.
㉯ 하나님과 화해시킴(16)
사도 바울은 수평적인 관계인 사람과 사람들과 화목과 연합을 거론한 후에, 이제 하나님과 사람과의 수직적인 화목한 관계를 언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궁극적이 목적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 둘’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로 서로 화목하게 된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들을 즉, 모든 사람들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화목하게 하다’라는 ‘불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을 재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타락으로 둘 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어 하나님과 적대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노와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로마서 1:18).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대적하던 원수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수평적인 관계 회복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수직적인 관계 회복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리에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서로 화목하며 하나 되어 아름다운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나가길 원하십니다.
⑵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17-18)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원래 자신의 자리인 하나님 우편으로 돌아 가섰어도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지금부터 하늘에서 하신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모두에게 평화를 선포(17)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먼 데 있던 이방인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한 평화가 임했습니다.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명합니다.
19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이사야서는 멀리는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가까운 데는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대조를 이루어 설명했지만, 에베소서에서는 ‘멀리 있는 여러분’은 이방인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화는 가까이 있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 그 평안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평안(ειρηνη)’은 ‘걱정이나 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내적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적인 차원에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아무 걱정 없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방인들도 이방인의 뜰을 지나서 유대인의 뜰을 지나고 더 하나님의 성소까지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5-16)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선포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수직적인 관계 회복에서 평화가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 나가서 수평적인 관계인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도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합니다. 그 바탕에서 하나의 새로운 인류인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②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나감(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 누구나 똑같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대제사장을 통해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6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마태복음 27:50-51). 이 사건은 모든 성도들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까지 교회 안에서 조차도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반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한 성령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하나님께서 나아간다고 담대하게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당시로서는 유대인들에게 분노를 살만했지만, 분명히 그리스도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을 제거하셨고 한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고 생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근거는 사람의 행위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로 입양하셨고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데는 더 이상 제사장이나 복잡한 의식 절차도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동일하게 믿는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과거에 원수같이 반목하고 대립하던 둘이 이제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함께 손을 잡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방인(19-22)
이주민 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내에서 자국민들과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같은 땅에 같이 살지만, 한국인으로서 누릴 특혜들을 누리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는 대한민국 국적(國籍)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국적을 취득하면 자국인들과 동일한 해택을 받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도 혈통적으로 유대인처럼 구원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19-22)
사도 바울은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이 이방인이라고 무시당하고 소외되지 않길 원했습니다. 과거에 아무 소망도 없던 이방인들도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립니다. 이방인 성도들이 누릴 새로운 신분과 특권이 무엇인지를 풍성하게 묘사합니다.
⑴ 동일한 시민들(19)
첫 번째 특권으로 영적인 신분의 변화가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 이방인의 출신이라고 무시하고 천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외인이 아니며 나그네도 아닙니다.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선언합니다.
과거에 이방인은 하나님 나라에서 외인이라서 차별을 받아 하나님의 권리나 특권을 별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바울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과거처럼 출신이 이방인이라 구원에 대해 외국인이나 손님도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도이며 동일한 시민이며 동일한 권속(眷屬)이 되었습니다.
당시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 중에는 육신적으로 신분의 변화는 꿈도 꿀 수 없는 종(從)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육신적으로 계속해서 종의 신분으로 살지만,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에서 자유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일한 시민권을 가짐으로 신분의 변화되었습니다. 신분은 종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나라의 모든 특권을 함께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합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모든 보장과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출신 배경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더불어 살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교회의 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⑵ 사도와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짐(20)
두 번째 특권을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신앙을 성전 건물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처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며 그것을 전파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건물 전체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수고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회로서 한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 비록 이방인이고 종의 신분일 수 있지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수고를 통해 맺어진 영적 열매들입니다.
⑶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감(21-22)
이방인 성도들은 굳건한 반석으로 만들어진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서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이방인들도 쓰임 받아 함께 성전으로 세워간다고 합니다.
교회를 성전에 비유할 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성전을 구성하는 돌입니다(베드로전서 2:4-5). 다양한 돌들이 모여서 건물을 이루듯이 다양한 배경의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모퉁잇돌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룹니다. 서로 주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함께 아름답게 지어져 갑니다.
건물은 수많은 돌이 모아져서 아름다운 건물을 만듭니다. 구성하는 건축 자재는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것이 없이 모두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는 성도들 또한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모두가 귀중한 성도들입니다. 모퉁잇돌인 그리스도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연합시키고 결속시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현대 교회에도 성도들은 각자 출신 성분이 다릅니다. 성품도, 학벌도, 재물도 달란트까지도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서는 이런 차이가 서로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습니다. 각자 성도들은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일률적인 재료로 건축할 수 없습니다. 각자 성분과 형태가 다른 건축 재료들을 통해 특성에 맞게 이용해서 아름다운 건축을 만드는 것입니다. 서로 장점과 단점을 통해 서로 상합해서 버팀이 되어줍니다. 교회 안에 구성원들도 서로 보완해서 되어 하나님의 한 공동체인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성도나 교회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미완성적인 존재입니다. 현재도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불안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성 되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서로가 단점은 보완해주고 세워줌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완성해 나가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성전으로 묘사함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공동체가 되는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제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백성,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방인들이 구원 받은 후, 성도로서 영적 변화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과거에는 외인으로서 소망 없던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모든 권세와 특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용서와 사랑을 통해 하나 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완성되어 나갑니다. 당신이 속한 교회가 서로 화해가 이뤄지고 상호 간의 신뢰 속에서 평화의 공동체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황당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한 어르신이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응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의사가 진단해본 결과, 이미 숨도 맥박도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진단을 내렸습니다.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고 장의사가 염하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죽었던 사람이 생명을 얻어서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만약 죽을 고비를 넘겨본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있으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었던 사람을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본문은 구원 받은 전후 상태와 직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 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찬양’(3-14)과, 그 사역을 온전히 알기 위한 ‘기도’(15-23)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성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제 바울은 성도들이 알아야할 ‘구원론’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 내용은 먼저 구원 받기 전에 비참한 상태와,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원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소개합니다.
구원을 받기 전 상태(1-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죽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이 있어보지만 이미 죽은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 비참한 상태로 놓아두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비참한 상태에서 어떻게 살리셨는지에 설명합니다.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1-3)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먼저 구원 받기 이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본문은 신약성경에서 구원에 대해 명확하고 사랑 받는 설명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에 대한 기준점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단연코, 그리스도 이전의 구원 받기 전 모습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비참한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구원 받기 전 과거에 비참한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려 하고 그 문제는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지그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왔고 말씀을 지켜 왔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없이 구원이 확정된 민족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죄인의 범위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본문에서 대명사의 변화를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2)는 이방인들을 의미하지만, ‘우리’(3)는 유대인들을 지칭합니다. 결국, 본문을 살펴보면, 죄인의 범위에 대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런 죄인의 범위에 대해 로마서에서는 설명합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 전의 상태를 이방인부터 시작해서 유대인까지 살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영적인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⑴ 구원 전 이방인의 상태(1-2)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이방인 성도들에게 ‘너희’(2)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죽었었다고 단언합니다. 당연히 이방인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죽은 사람들이 맞습니다. 죽은 시신은 외부 환경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해 아무런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죽음의 상태를 두 가지 영적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①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함(2a)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만드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생명을 공급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환자실 환자에게 산소 호흡기를 떼면 죽은 것처럼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된 사람은 영생이 없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 관한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 없는 사람은 영적인 죽음으로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죽음에 대한 원인을 ‘허물과 죄’이라고 관련짓습니다. 허물과 죄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허물과 죄) 가운데서 죽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허물(παραπτωμα)’은 ‘경계선을 넘어 벗어나는 것’을 의미함으로, ‘사람이 잘못된 행위나 실패하여 하나님의 뜻과 법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죄(ἁμαρτιαις)’는 ‘과녁을 비켜 가는 화살’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뜻과 법에 어긋나게 행하는 것’이나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어거스틴(Augustine)의 해석에 의해서, ‘허물’은 고의성이 없이 범한 죄이고 ‘죄’는 고의성을 가지고 행한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의 죄악성을 포괄적이며 다양성을 설명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창조되었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만 높이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 있는 목적에서 벗어난 죄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방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떠나 있었습니다(에베소서 4;18; 골로새서 1:21; 2:13). 이것은 바로 죄이며 영적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에 대한 결과에 대해 말씀합니다.
23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이러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는 이미 인간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선악과 언약을 맺으면서 경고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경우 사람에게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17). 시조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실제적으로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24).
② 세상과 악한 영을 좇음(2b)
사도 바울은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이 ‘허물’과 ‘죄’ 때문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만나기 전까지 그 가운데 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 가운데서 행하여’라고 소개한데, ‘행한다(περιπατεω)’는 행동이나 생활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구원 전의 이방인 성도들이 죽음의 상태에서 계속해서 어두운 방식으로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를 표현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어두운 삶’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현재 ‘영광스러운 삶’(10)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의 과거 어두운 삶에 대한 특징을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한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된 불신앙의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요한복음 17:14). 세상 풍속을 좇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노아 시대 사람들’(창세기 6장)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세기 19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을 배척하고 세속적 사고, 물질적인 가치 그리고 육체적인 쾌락에 집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도 죄악에 대해서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두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삶과 별로 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도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비교했을 때, 참으로 답답하고 슬퍼집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과거의 세상에서 삶의 인도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불순종의 영’이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공중(αμρ)’는 ‘하늘’과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높은 신성한 곳으로, ‘공중’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바로 위인 세속적인 곳을 의미했습니다. 그만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사람들에게 쉽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사용한 것입니다. ‘권세 잡은 자’는 ‘불순종의 영’과 동격입니다. 성령께서 순종하는 영혼들 가운데서 선한 일을 역사하듯이 사단은 악인들 가운데서 악한 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던 이방인 성도들은 과거에는 공중 권세자를 따르면서 불순종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한 결과는 죄이고 사망이었습니다. 공중 권세자에게 불건전한 지배 영역과 분위기를 받으면서 모든 거짓과 악을 행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⑵ 구원 전 유대인의 모습(3)
사도 바울은 이제 눈을 돌려서 에베소 교회 안에 유대인 성도들을 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유대인 성도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해서 부릅니다. 유대인들을 ‘우리(유대인)도 다 그 가운데서’라고 강조한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도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범죄 상태 있다는 증거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① 정서적인 타락(3)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도 구원 전의 삶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다고 합니다. 입니다. 본문에서 ‘육체(σαρξ)’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은 정신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충동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6).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은 관심 없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로마서 8:7). 그들의 생각에는 육체의 욕심이 기준이 되어 살았던 것입니다. 자아 중심적인 욕망에 지배할 뿐 아니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 신체적인 타락(3)
이어서 바울은 두 번째 증거는 ‘육체의 원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육체’는 ‘성령’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정신이 타락하면, 자동적으로 행동도 타락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 중심적인 가치관의 중심-물질만능주의, 권력만능주의, 육체쾌락주의 등-으로 살아갑니다.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모든 역량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삶에 하나님께서 끼어들 곳이 없습니다. 구원 전의 유대인들도 옛 본성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다름없었습니다. 허기진 사람들처럼 채우지 못한 세상의 욕망을 채우기 모든 가득하였습니다.
③ 이성적인 타락(3)
마지막으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타락한 모습을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했다고 지적합니다. 사람의 이성적 기능은 지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이성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 육적 우선순위에 따라 자기기만, 자기 합리화, 혼미함, 불합리한 신념 등으로 결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완벽하게 죄인이라고 세 가지 반증을 들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존재라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을 부정한 죄인으로 간주해서(갈라디아서 2:15),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사도행전 10:28). 겉으로는 선민으로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말씀을 가르쳤지만, 내면에는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라고 해서 연민으로 감싸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죄인이란 사실은 의사에게 암 3기를 진단 받은 것보다 더 하늘이 무너지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선언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조건이든지 예외 없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모든 인류의 구원 받기 이전 인류의 상태를 간결하게 살폈습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죄 가운데 살고 있음을 밝혔습니다(로마서 5:12-14). 죽은 사람은 움직일 능력이 없는 것처럼, 구원을 위해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풍조를 따랐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악한 지배를 받으면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까지도 패역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아무런 소망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이 필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4-9)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외적으로는 아무런 육체적인 변화는 없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단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가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됩니다(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4(그러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4-7)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방인이나 유대인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어떤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구원 작전을 수행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일입니 다(요한복음 3:16; 갈라디아서 4:4-5; 디모데전서 1:15).
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심(4-6)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비극적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러나) 하나님께서 …(ό δε θεος)’라고 앞 1-3절의 비극적인 내용을 극적인 반전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밖에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습니다. 극적인 변화는 “죽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5)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데다가 마귀의 권세에 눌려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속죄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면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도 함께 살리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은 이미 정죄되어 저주 받을 운명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은 아무런 느낌이 없듯이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물며 구원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위대한 사랑이며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참고 출애굽기 2:24-25). 가만히 계시지 않고 ‘자기의 큰 사랑 때문에’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아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넘치도록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에 대해 ‘우리’를 향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앞에서 유대인들만 한정한 ‘우리’(3)와는 다르게 모든 유대인들을 포함한 이방인까지 모든 인류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와 사역과 연결시킵니다(1:20-23). ‘우리’를 위해 이루셨던 구원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1:20)과 동일한 사역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하늘에 함께 앉히신 일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전치사와 중요한 세 가지 동사는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그리고 ‘함께 앉히셨다’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들 앞에는 ‘함께(συν)’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 전체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부활과 승귀가 동참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시고 자기 우편에 앉히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한 능력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입니다(요한복음 3:3,7; 베드로전서 1:3,23).
아무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과거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 승귀가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연합한 사람들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
⑵ 구원의 목적(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죽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죽음의 쇠사슬이 풀려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요한복음 5:24; 골로새서 2:13-14). 장차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천국의 모든 것을 누릴 것입니다.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보이셨습니다(에베소서 1:19-20). 성도의 구원에는 인간은 무능력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왜 아무런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즉,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오는 세대에 알리려는 것’입니다. ‘오는 세대’란 현재 세대와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미래 세대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보여주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영원히 나타나실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은혜’를 살펴보면, 사람의 공로가 없이 하나님께 거저 주시는 것, 즉 구원의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푸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휘페르발로(ὑπερβαλλω)’, 즉 ‘엄청난’, ‘탁월한’이란 단어와 함께 ‘플루토스(πλουτος)’ ‘부요함’이란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긍휼히 충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분이시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분입니다. 인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풍성하신 분입니다. 엄청난 풍성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그의 인자하심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긍휼히 풍성하신 은혜를 오는 세대들에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는 특권을 주신 목적입니다. 은혜란 자격과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와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⑶ 구원의 방법(8-9)
이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믿음’을 언급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믿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잘못생각하면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언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값없고 조건 없는 긍휼이며 ‘믿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 구원을 받았으니’(5,8)라고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시작합니다. 단순한 반복 서술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탄성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계속 구원을 누리고 있는 상태를 기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구원 받은 ‘그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적으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 것처럼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위에서 언급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한 성도의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부터 구원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서술합니다. 구원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드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선민(選民)’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은혜의 역사를 통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사도행전 18:27; 빌립보서 1:29).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유대인처럼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거만하게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구원 받은 인간(10)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 값없이 받지만, 반대로 선물을 줄 때는 선물의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때는 값없이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주시기 위해 값진 대가를 지불했어야 합니다.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
사도 바울은 10절을 ‘그러므로(γαρ)’로 시작하면서, 구원에 대해 인간적인 자랑이 있을 수 없는 이유를 다시 주장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며, 곧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의 작품(10a)
본문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소개합니다. ‘만드신 바(ποιημα)’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미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구원하신 사건을 설명합니다. 구원의 사건은 개인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를 말하지만, 공동체적으로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작품’임을 밝힌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작품’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하신 피조물을 말합니다. ‘창조’란 단어는, 창조 때뿐만 아니라 재창조 때도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이것은 창조나 재창조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누누이 강조하지만,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구원에 대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도자기를 빚듯이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서 앉히신 것, 모든 구원 사역은 태조에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 사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재창조를 심도 깊게 하셨습니다.
작품은 그 작품을 만든 작가의 솜씨를 그대로 들어냅니다. 재창조된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⑵ 선한 일을 위함(10b)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작품으로 만드신 또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죽어서 스스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었던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앞 단락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1:6,12,14).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은 입술로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26).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창조주의 원하심대로 따라 다스렸으면, 만물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 나타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과 영광도 상실되어졌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를 닮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모습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특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한 모습을 들어 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물을 주신 분의 뜻에 합당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창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선한 도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말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값없이 최고의 선물인 ‘구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으로서 탄생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오직 겸손히 감사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힘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정출산(遠征出産)이 문제된 적이 있지만, 중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원정출산이란 다른 나라 안에서 출산하면 출산한 나라의 시민권과 시민으로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출산을 말합니다. 시민권을 얻기 위해 좀 더 좋은 나라에서 출산하기를 동경합니다. 대부분 미국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미국령인 괌이나 하와이 같은 곳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출산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과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한없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 본문은 찬양이 이어 그의 기도가 기록된 부분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세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의 영광을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길 바랍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특권을 누리면서 영광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성도들은 ‘찬양’과 ‘기도’가 동반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교회에 대한 감사(15-16)
요즘 청소년들이 많이 흔들립니다.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부모와 자녀들 간에 가정교육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기 뿌리에 대한 교육도 없어 자존감(自尊感)도 사라져 갑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존감을 인식하면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흔들리지않지만, 반대는 좋은 환경 속에서도 쉽게 흔들려서 방황합니다.
15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15-1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 관심은 교회들을 위해 중보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로마에서 감옥에 투옥된 상태에서도 교회와 성도들 생각뿐이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는 그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정말 어려움 가운데 헌신하면서 세운 교회(사도행전 20:34)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관심은 매우 깊었으므로, 그들을 위해 당연히 기도했을 겁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표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에베소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듣고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⑴ 감사의 근원(15a)
에베소 성도들에 대한 좋은 소식은 먼 로마까지 소문날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소식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들려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듣고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울은 더욱 그들을 한사람 한사람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성장할 수 있는 근원을 “이로 말미암아”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3-14절에서 설명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구원에서 근원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감사할 조건은 사람의 능력이나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입니다.
⑵ 감사의 조건(15b)
에베소 성도의 ‘사랑’과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결실이며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완벽하지 않지만 에베소 교회는 꾸준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본문으로 돌아와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라고 합니다. 충만한 공동체의 요소인 ‘믿음’과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① 믿음
먼저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 ‘믿음(πίστις)’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햇볕처럼 내리시는 은혜 아래 머물러 있는 능동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 지배 아래 있는 식민지들은 모두 황제를 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교를 무릎 쓰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뿌려진 복음이 ‘주 예수 안에’성장하여 열매 맺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거론한 것처럼 에베소 지역은 믿음이 성장하기에 매우 척박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황제 숭배뿐만 아니라 이방적인 우상과 풍요로운 물질 그리고 방탕한 문화 등이 산재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지뢰밭처럼 유혹과 시험이 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3년 동안 이런 에베소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지만 에베소 성도에게 겨자씨처럼 성장했던 것입니다. 유혹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있었습니다. 연약해 보이던 이들이 굳건한 믿음을 서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매우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② 사랑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향한 실천적인 ‘사랑(την αγαπην)’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로 개종이나 종교 행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도 나타납니다. 그 실천적 믿음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1서 4:20)
에베소 성도들이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구성원들이 다른 출신과 배경으로-혈통과 신분,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들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차별과 분열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친한 동료들에게만 속 좁은 사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하나 되어 모든 성도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연합과 충만한 공동체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평판이 주변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에 대한 펴졌습니다. 교회들을 개척할 때, 여러 모습으로 물심양면 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에베소 교회가 ‘믿음’과 ‘사랑’이 가득하다는 소식은 바울에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었습니다. 아름다운 믿음은 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주변에 대해서도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⑶ 믿음의 결과(16)
건강한 농작물은 좋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성숙한 믿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어가는 모습은 영적인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기쁨과 동일합니다. 마치 농부들이 농작물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볼 때처럼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더 나가서 그들의 성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 사실에 근거해서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은 바울이 기록했던 서신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참고 로마서 1:8-9; 빌립보서 1:3-4; 골로새서 1:3,9; 데살로니가전서 1:2; 데살로니가후서 1:3,11). 이러한 ‘감사’와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차차 살펴보겠지만, 에베소 교회는 좋은 면도 있었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현재 미숙한 상태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장차 미래 성숙한 모습을 보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부족하지만, 장차 성장해서 온 세상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 청사진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감사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를 위한 기도(17-19)
중보기도는 타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모든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하나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7-19)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 감사하던 바울은, 더 나가서 이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근거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숫자의 부흥, 성장, 출세, 성공 그리고 부귀영화와 같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닙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핵심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 깊게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 즉 ‘하나님 자녀임’을 확신하길 원했습니다.
⑴ 에베소를 위한 중보기도(17)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바울은 3-14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소개했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 이해시키려 하기 보다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영광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이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더욱 인격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먼저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臨)하시길 기도합니다. 진리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임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역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성령께서 자녀에게 임재를 통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사도 바울도 같은 의미로 고린도 교회에게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10)
그렇다면 이제 성령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은 많지만, 그 사역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비밀을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시고(에베소서 3:5),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특히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요한복음 14:15-21; 16:7-15).
엘리사 시대에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의 많은 규모를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를 위해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환의 눈을 열어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합니다(열왕기하 6:15-17).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간구합니다. 임한 성령께서 성도들의 눈을 밝혀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비밀을 정확히 깨닫고 깊이 통찰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을 성도들을 위해 더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⑵ 중보기도의 제목(18-19)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그의 기도 구체적으로 세 가지였습니다. 그 제목 하나하나에 신앙의 핵심적인 실체들이 담겨 있습니다. 차례로 기도 제목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부르심에 대한 소망(18)
먼저,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단순히 영혼 구원을 위해 부르신 것만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과거 세상에서 사단의 자녀로 죄악에 소망이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망’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는 것이며(1:14; 5:5), 교회적인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세우시는 것입니다(5:26-27). 마지막으로 우주적인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실 때 이러한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성도들을 불러주셨습니다.
하지만 허물과 죄로 어두워진 사람들은 한없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임하셔서 사람들의 영안을 여시고 깨닫게 할 때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영안을 열어야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②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18)
둘째로 그들이 깨달아야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움’이었습니다. 본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성도 안에 있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것’이나 ‘성도들이 소유하거나 앞으로 소유하게 될 기업’을 의미합니다.
이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기업의 풍성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보증을 해주셨습니다. 이제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기업을 계속 누리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서 모두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풍성하지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대하신다는 것, 즉 ‘영적 자존감’을 깨닫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풍성함에 기뻐할 수 있고, 또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③ 능력의 지극히 크심(19)
마지막으로 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자녀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본문을 쉬운 해석을 한다면, ‘그의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여러분으로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 ‘힘’, ‘역사하심’으로 반복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것 위에 매우 뛰어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능력은 사람들과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구원 사역의 예를 들어서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2:1-5),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시며(2:8-9) 그리고 전에 악하게 살던 사람에게 선한 뜻과 행위로 살도록 깨닫게 하십니다(2:10).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을 주관하시고, 그리스도를 하늘에 오르게 하시고, 그리고 만물 위에 뛰어난 존재가 되게 하실 만큼 크고 위대한 능력입니다.
이 뛰어난 능력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임하셔서 마음의 눈을 밝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바울은 구원의 능력은 깨닫기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눈이 밝아진 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능력인지를 깨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모든 이방인 성도들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확실하게 상기시키려 합니다.
정리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성도들도 자신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실을 깨닫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임재 하셔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더 깊고 풍성함을 깨달을 걸 원합니다. 지금도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바울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깨닫기를 기대합니다.
능력을 통한 기도의 근원(20-22)
복음 안에서 하나 되고,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증거 하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사단은 매우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바른 하나님의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고 흩어 놓으려 합니다. 여러 가지 궤계를 사용해서 바른 공동체가 분열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단의 궤계를 깨뜨리고완전하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0-22)
사도 바울은 계속적으로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해 언급하고,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19절에서 설명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강력하고 웅장한 기도의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20)
사도 바울이 능력 있게 기도할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이 부활하였습니다. 보란 듯이 죽음을 이기고 삼일만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고, 더 나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본문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여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앉히셨다’라고 알맞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연장선상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아 만물의 통치하시는 주요 구원자라는 의미로 받아 들렸습니다. 이미 다윗이 시편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시편 110:1-2)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며 만물을 통일하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 모든 영광의 지위를 회복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고 세우시며 주관하시는 강력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 강력한 능력을 근거로 기도한 것입니다.
⑵ 만물을 복종케 하심(21-22a)
기도할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복종케 하신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부터 지금까지 온 천하 만물을 통치하시고 찬양 받으실 분입니다(로마서 9:5). 더욱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다시 한 번 온 천하를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의 대상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들, 즉 세상에 존재한 모든 권세들을 통치하실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시편에서 다윗은 잘 설명합니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편 8: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신 만물의 의미는 하늘과 땅, 하늘에 존재한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영적인 존재들과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우주 만물입니다.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발 아래 두신 것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치하시는 우주 만물의 주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자기 우편에 앉히시고, 모든 존재들까지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을 통일시키시고 화목케 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사단을 우리 발아래 굴복케 하시고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로마서 16:20). 단지 영적 존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까지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통치권 아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히브리서 2: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해 세력도 기도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상달되고 응답됩니다.
⑶ 만물 위에 계신 그리스도(22b)
기도할 마지막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통치하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하나님께서) 그를 만물 위에 계신 머리로 교회에 주셨습니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머리(κεφαλη)’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권위’, ‘지배자’나 또는 ‘원천’, ‘근원’으로 사용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요(골 1:18) ‘정사와 권세의 머리’(골 2:10)라고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란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치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소서에서 그리스도의 만물의 주되심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그리스도는 만물을 통치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만물 위에 계신 머리로, 바로 교회의 머리,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심으로 항상 교회를 보호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서 금대접에 향으로 담아서 흠향하실 것(요한계시록 5:8)이며, 그 기도를 선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해서 기도한다는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무기력한 푸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력한 능력을 근거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사적 기도나 공적 기도든지, 조용한 골방 기도이나 강한 외치는 기도든지, 그리고 새벽 기도든지 저녁 기도든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흠향하고 계십니다. 그 기도의 제목보다 더 풍성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더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신 자의 교회(23)
세상적으로 물들어 가는 교회는 그만큼 영적 능력을 상실해 갑니다. 그리고 종종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무능력한 교회일지라도 그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곳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치 그리고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가 연약해 보일지라도 함부로 폄하할 수 없습니다.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사도 바울은 앞 절에서 거론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부연 설명합니다. 두 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합니다. 간결하지만 에베소서에서 가장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⑴ 그리스도의 몸(23a)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또는 ‘몸’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1:23;2:16;4:4,12,16;5:23,28,30).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란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와 ‘생명을 가진 유기적 통일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생명적인 관계입니다. 반대로 분리되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실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공급 받을 때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존재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교회’가 ‘유기적 통일체’란 많은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4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한 몸이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2:13).
지금도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임재 하시고 각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접붙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 또한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⑵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23b)
이 부분은 가장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먼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곳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임재로 온 세상을 가득히 채우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주권적으로 만물을 통치하며 그리고 그 능력으로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죄와 타락으로 상실한 만물을 평화와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회복하여 다시 완전하게 만드시는 것이 곧 만물의 충만인 것입니다.
‘교회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구약에 하나님께서 성막이나 성전에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출애굽기 33:22).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2:21-22). 종말에 새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 자신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는 만물을 통일하신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이 가장 먼저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와 통치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성령의 은사들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이 교회를 통해 만물을 온전히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선교의 도구이자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으로 만물에게 그리스도의 통치를 증거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오염된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인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어떤 역할을 살피고 감당하실 원합니다. 자신의 몸인 성도들이 기도할 때,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 나가서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마음의 눈을 밝히길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계신 머리’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주인이심을 깨닫길 원하십니다. 성령 임재를 통해 에베소 성도들처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삼위일체(三位一體)’는 신비로운 교리입니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해주신다고 할지라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 신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종종 사물을 통해 삼위일체를 비교 설명하려 하지만, 어느 것도 이 신비를 적당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을 피조물과 비교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위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찬양을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인사말과 축복의 말을 마친 후, 이제 복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 에베소서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되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일치와 연합에 초점을 맞춘 ‘교회론(敎會論)’이 중심입니다. 바울은 찬양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그 결과 모든 성도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찬양(3-6)
사람들은 백번 잘 해주다가 한 번 실수하면, 그 실수한 것만 기억합니다. 그 동안 좋은 일을 잊어버리고 단 한 번의 서운함에 오해하고 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서운한 일보다 좋은 일을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을 하나씩 나열하면서 찬양합니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3-6)
사도 바울은 인사말을 마친 후, 수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말을 접고 먼저 벅찬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시작합니다. 이 방법은 바울의 다른 서신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인사 후 바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 기도를 하지만(로마서 1:8;고린도전서 1:4;빌립보서 1:3-8;데살로니가전서 1:2-4;데살로니가후서 1:3;빌레몬서 1:4), 에베소서에서는 기도보다 먼저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찬양은 성도들을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참조 고린도후서 1: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선언으로 영광송(Doxology)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3-14절이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문단을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단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순서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순으로 구원 사역에 대해 찬양합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두 가지 계획은 ‘선택’과 ‘예정’으로 서술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계획은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녀인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려는 것입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선택(選擇)(3-4)
사도 바울은 순서에 따라 첫 번째로 ‘성부 하나님’를 찬양합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것은 우리의 구원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깐 당시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으로 대단했습니다.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17-18)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구약에서는 감히 함부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거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막혔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열린 길을 통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길을 따라서 나갈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족 같은 친밀함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① 모든 신령한 복(3)
성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신령한 복’은 ‘세상적인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으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 되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1:3). 죄로 죽었던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생명을 가능하게 가져오신 모든 사역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복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합당한 사람들에게만 임합니다. 바로 그 합당한 사람은 선택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자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요한복음 1:12). 이들에게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이 성도들에게 내려 누립니다. 이는 장차 천국에서 누릴 복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면서 누릴 복입니다. 이는 이미 앞에서 거론했던 ‘은혜’와 ‘평화’의 형태로 심령에 임합니다.
② 하나님의 선택(4)
본문에서 말하는 ‘신령한 복’은 가장 중요한 복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수많은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강조점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부터 모든 세상을 향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특히 영혼을 구원하신 선택은 중간에 변경하거나 취소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인 항상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천지 창조하신 후 좋아하셨고(참고 창세기 1장), 창조 사역 중에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창세기 1:31).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어두움이 가득히 찼습니다. 새롭게 하시기 위해 세상을 홍수 심판하시고 믿음의 선진들을 선택하지만, 모두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은 다시 죄악으로 돌아 가버렸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인가 하면 할수록 더 악화시켰습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 선택의 시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은 사랑하셨고 찾으십니다(참고 신명기 7:7-9). 무능력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선택한 시기를 ‘창세전에’라고 소개합니다(참고 에베소서 3:11). 모든 만물이 아무 것도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기억하셨고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이나 바울을 선택하신 것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하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너무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성품이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 선택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적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소개합니다. 결국 모든 인류가 사망에 아니라 구원에 이르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서도록 하신 것입니다(참고 골로새서 1:22). 이 모습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드려진 제물들이 흠이 없고 깨끗해야 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선택 받은 사람들은 영접한 순간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흠이 없는 완벽한 존재는 아닙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점점 거룩하게 성화시키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날에는 거룩하고 흠이 없으므로 책망할 것이 없는 영화로운 존재로 세우십니다(골로새서 1:22; 에베소서 5:27; 고린도전서 1:8).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받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도록’(에베소서 4:1)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 받은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聖徒)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누가복음 3:8). 많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사람들은 열매 맺는 성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제자라고 인정할 것입니다(요한복음 15:8; 고린도후서 7:1).
죄인들을 선택하시고 흠 없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찬송가처럼 ‘만 입이 있다면 그 모든 입을 다 가지고 주 크신 은혜’를 항상 찬양할 것입니다(찬송가 23장).
(2) 성부 하나님의 예정(豫定)(5)
이제 사도 바울은 두 번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언급합니다. 그 복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 삼으시려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예정하다(προορίζω)’는 ‘미리 결정하다’, ‘사전에 결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것은 선택과 같이 단일회적인 사건이며 그 결과가 중간에 변경됨이 없으셨고 지금까지 예정하신대로 계속되고 계십니다.
본래 사람은 ‘불순종의 자녀’이며 ‘진노의 자녀’(에베소서 2:2-3)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가운데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1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디모데후서 1:9-10)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새롭게 창조 되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매우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2:18; 3:12).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까지도 거부하면 하나님 자녀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담은 사단의 유혹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거부하고 결국 범죄 하고 ‘타락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악된 상태로 사람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시기 위해 예정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기 쉽도록 당시에 로마법 절차를 따라 설명합니다. 당시 한 노예가 주인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 주인의 자녀로 입양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노예는 종의 신분에서 주인의 자녀가 되고, 자녀로서 주인의 모든 특권을 누릴 자격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된 사람은 영접한 순간부터 모든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4-17)
이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과의 누렸던 친밀한 부자관계를 똑같이 누리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첫 번째로 성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선택’과 ‘예정’을 찬양합니다. 성도들은 과거의 어두운 자녀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께 속한 빛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 없는 사람들을 자녀 삼으시려고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이끄셨던 것입니다(로마서 8:32). 그 사랑을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넘치도록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 앞에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가르쳐 주신 것처럼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구속 찬양(7-12)
조선시대에는 노비(종)들은 관아(官牙)나 개인의 양반집에게 매어 살았습니다. 그 노비들이 벗어나는 방법은 일정한 몸값을 주고 그의 노비 신분에서 양민이 되는 ‘속량(贖良)’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속량’이란 단어를 빌려서, 사단의 노예 신분인 사람들을 위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물이 되셨고, 사단으로부터 구원한 사실의 용어로 사용합니다.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7-12)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사역을 찬양한 다음, 이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찬양합니다. 그 사역은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구원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사역들 중에서 구속 사역을 정리해서 세 가지 제목으로 찬양합니다. 이 사역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함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贖良)(7)
먼저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첫 번째 목적은 ‘죄인들을 위한 속량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은 세상에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죄양이 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예정함을 입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량’또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속량(redemption)’이란 ‘값을 지불하고 노예(종)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당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이 깊이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의미가 확실히 다가오는 단어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일반적인 노예나 팔려온 노예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에 노예 상태로 에베소 교회를 출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노예에서 해방’이란 단어 ‘속량’이란 대단한 소식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속량’은 ‘죄사함’으로 동격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속량’은 구약 시대는 범죄한 사람들은 속죄 받기 위해 흠 없는 양을 잡아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도 노예시장에 나온 노예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으로 만들어 준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가를 지불한다는 동일한 의미로 ‘속량’입니다. 이처럼 구원에서 죄나 매임으로부터 대가를 지불하고 해방되는 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의 속량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더 나가서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이 ‘속량’에 대해 간단하지만 핵심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4)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8-19)
실제로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대가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양이 되셨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시려고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구원 받은 정도가 아니라 더 넘치도록 풍성하게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속량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만 속량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더 자세히 속량을 설명합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8-10)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 받은 것은 가장 중요한 복 중레 복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된 것처럼 속량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 신비한 비밀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지혜와 총명(지식)을 주셨습니다. 현 시대 성도들이 더욱 감사한 것은 에베소 성도들 아니 어느 시대 성도들보다 이 하나님의 진리를 더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統一)(8-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속량된 것은 가장 중요한 복 중에 복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한 동안 신비로운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비밀(μυστηριον)’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깨닫도록 지혜와 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역은 유대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르신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되도록 하시기 위합니다. 타락한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이 찾아왔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로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려하다 보니 분열이 찾아왔고 삶은 지옥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기, 질투, 살인, 전쟁들이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타락한 세상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창조 때와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길 원하셨습니다. 다시 창조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의 상태로 새롭게 회복시키시길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죄로 혼란스러웠던 세상 즉, 범우주적인 모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죄를 제거시키고, 각자 다양했던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시 조화롭게 하나로 만드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머리 혹은 통치자가 되실 것입니다(에베소서 1:20-23). 그 안에서 모든 만물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나 이방인 성도나 할 것 없이 하나로 만드실 것입니다. 마침내 완전한 재창조를 통해 하나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주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서부터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서 분열을 버리고 통일을 이루어야 할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 모든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분파나 분열, 우열이 없고 성령으로 하나를 이루어 갔습니다. 개인적이나 사회적으로도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질서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모든 만물에게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⑶ 예수 그리스도의 기업(基業)(11)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들을 계획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획하신 분이 또한 그 계획을 완성해 가실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에 평안함을 줍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기업(κληροω)’이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 후에 각 지파들이 제비뽑기해서 자신의 분깃 또는 몫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민수기 26:55-56;신명기 3:18; 15:4). 이런 연장선상에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열방 중에 하나님의 분깃으로 선택되었고(신명기 32:9),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사용한 ‘기업’의 의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천국의 기업을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의 선물로 가나안 땅을 주셨듯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것이므로 그의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11,12)는 앞에서 나타난 ‘우리’(3-10)와는 의미가 차이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이방인 성도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 성도들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인 유대인들이라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여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소중히 보호하시는 보배로운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유대인들 중에 몇몇 사람을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이 있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새로운 백성을 만드시고 자신의 찬송을 부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43:21).
성부 하나님의 비밀스러웠던 계획 아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량을 받았고 하나 같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하나를 이루어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침 찬양(13-14)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유하시길 원하지만,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거부했지만, 인내하시고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소개하고 찬양합니다.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3-14)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달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⑴ 성령의 인(印)치심(13)
유대인들은 거부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다고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어 갑니다. 성령께서 예정된 성도들에게 ‘약속의 인치심’을 받도록 하십니다. 인치심을 통해 확신한 구원의 보증이 되도록 하십니다.
본문 13-14절에서 이제 “너희”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이방인 성도들입니다. 즉 이방인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유대 성도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집니다.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이방인들과 소수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특권을 이제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성령의 ‘인치심’과 동일한 조건으로 소개합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입니다(로마서 10:14;갈라디아서 3:2). 갈라디아서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라디아서 3:1-2)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들이 ‘진리의 말씀’인 것은 구약 성경이 예고하셨던 내용들의 실제이자,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요 1:12). 이방인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인 인(印)치심을 받았다고 소개합니다.
이곳에서 ‘인침을 받았으니(εσφραγιαθητε)’란 보통 ‘일을 확정 짓는다’또는 ‘자기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引)’은 소유권을 승인하거나 종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백성임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를 할례로 삼았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구약의 예식처럼 할례를 증표로 가진 것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심령에 성령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식을 받은 것이 인침입니다(로마서 8:16;요한1서 3:14). 성령의 인치심은 심령에 내주하심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식이며, 성도들은 이러한 인치심의 내적 표식을 외적 표지(標識)하는 것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실 기업은 상상할 수 없이 풍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창조하시기 전부터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진리에 믿음으로 응답한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인(印)쳐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들의 의지나 우연 그리고 변덕스러운 마음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정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행위가 사람의 스스로 의지인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영접한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순간부터 어느 누구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록 하십니다. 또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기업을 주셨고, 측량할 수 없는 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이 복을 누린 사람들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처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합니다.
⑵ 성령의 보증(保證)(14)
본문에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라고 소개합니다. ‘보증(ἀῤῥαβών)’은 헬라어로는 ‘보증금’이라는 뜻이며, 또 ‘먼저 맛봄’, ‘담보’, ‘완전한 지불을 약속하는 지급 보증료’, ‘미리 내주는 일부 지불’ 등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셔서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하게 보증하십니다. 성도의 구원에 대해 보증이 되셔서 미래에 받을 천국의 기업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보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린도후서 5:4-5)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과거에도 일하셨지만,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내주하셔서 책망하시고(요한복음 16:8), 우리를 위로하시고(사도행전 9:31), 우리에게 승리하면서 살도록 능력을 주시고(에베소서 3:16),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주십니다(로마서 8:16).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성령의 사역들은 장차 누릴 것에 비하면 예고편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지금까지 보증하셨던 것들이 완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이유(엡 1:3-14)
성부 하나님
무조건적인 선택(3-4)
사랑으로 예정(5)
성자 하나님
너그러운 속량(7)
하나로 통일(8-10)
영원한 기업(11)
성령 하나님
약속의 인치심(13)
기업을 보증(14)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소유주이십니다. 장차 그들을 완전히 구속하셔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구원을 확증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상태에서도 꾸준하게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여, 구원의 보증하시고 믿음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십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므로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분명히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영원토록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사도 바울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린 찬양의 내용은 무엇보다도 귀한 ‘구원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주신 신령한 복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값이 주신 은혜(恩惠)’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께 ‘끝없는 영광(榮光)’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누린 모든 복을 헤아려보면 바울이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당은 현대 감각으로 아름답게 건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건축된 아름다운 예배당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먼저 믿는 성도들의 삶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다시 발길을 세상으로 돌려 버립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예배당도 아름다워야겠지만, 내면적인 구성원의 삶들은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때,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이런 모범적인 교회와 아름다운 성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 초대교회들을 돌아봅니다. 본 서를 기록할 당시에 그는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 교회를 보살핀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는 직접 갈 수 없지만 서신을 통해서라도 멀리 있는 교회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열정적으로 옥중에서 기록한 편지가 바로 ‘옥중서신’인데, 그 중에 본 ‘에베소서’가 속해 있습니다. 본문은 에베소서에서 서론(序論) 중 인사말입니다.
발신자 바울(1)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을 때,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능력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서신의 첫 부분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1a)
본 에베소서는 당시 일반적인 편지 형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 당시 편지에는 발신자, 수신자 그리고 인사말 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형식은 에베소서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디모데후서에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부름 받은 ‘사도’로 소개합니다.
(1) 발신자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에 편지을 작성하는 형식은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먼저 발신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이 에베소서에서도 자신을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한국 성경은 번역하면서 바울 앞에 많은 단어들을 수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먼저 발신자의 이름인 ‘바울’을 기록하였습니다. 영어 성경들도 번역하면서 원문 헬라어 어순(語順)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양의 편지들은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 (NASB)
사도 바울은 본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 있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투옥된 상태에서도 각 지역 교회들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옥중에서 각 교회들의 소식을 듣고서 회답 형식으로 기록한 서신들이 바로 바울이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이 옥중서신 중에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록한 서신이 바로 본 ‘에베소서’입니다. 하지만 이 서신은 단순하게 에베소만 위한 것이 아니라 에베소 근동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에게 돌려가면서 볼 수 있도록 기록된 ‘회람형 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까지도 회람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삶이 변화되었던 사람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기 위한 일군으로 바울이 적격(適格)이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살펴보면 더욱 적당한 일군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본 서신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① 바울의 출생
사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출생했습니다(사도행전 22:25-28). 또한 그는 율법에 정통한 독실한 유대인이었고(사도행전 9:11;21:39;22:3), 그의 이름은 유대식으로는 ‘사울’이며, 로마식은 ‘바울’이었습니다(사도행전 13:9).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부모님은 다소에서 영향력 있는 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소의 바울은 엄격한 근본주의 유대교 가정에서 자라서, 모세 율법대로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성인 때까지 율법을 준수하며 성장했습니다(갈라디아서 1:14;빌립보서 3:5-6). 다소에서 살다가, 공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바리세인으로 저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한 근본주의 유대교 교육을 받습니다(사도행전 21:39;22:3,28). 그는 가말리엘 문하 중에서 가장 총망 받던 문하생이었습니다.
② 바울의 변화
유대교에서 총망 받던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생각과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자신이 유대인으로써 최고의 엘리트라고 착각하면서 거만하게 행동했었습니다. 유대교를 위해서라면 목숨 받힐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주후 33-34년경에, 그는 매우 특심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예수를 이단자라고 생각했었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즉, 기독교인들은 이단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거룩한 이스라엘에서 암적인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박멸시키기 위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더욱 모든 이단자들을 박멸하기 위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600km가 넘는 먼 거리인 다메섹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에 여러 회당에 있는 기독교인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사도행전 9:3-5).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게 됩니다.
③ 바울의 사명
사명자는 사명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명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변화된 바울은 평생 동안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 길을 갈 수 있엇던 것은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3:7-13).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확신은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을 통해서 입니다. 다시 다메섹 사건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눈이 멀었고, 사람들에 인도되어 다메섹 직가(直街)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사람의 생각으로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을 기독교를 세우는 일군으로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 구원하시고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친히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던 중, 에베소 교회는 3차 전도여행 때에 세우게 됩니다. 3년 동안 많은 고난을 받아가면서 세웠던 교회입니다. 그 만큼 사랑이 가는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들려온 에베소 소식은 모두가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소식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회의와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지금 바울이 처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젊어서 고생하고 노년에 열매를 먹고 삽니다. 하지만 오직 복음만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은 그 법칙에서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신실하게 평생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역했던 바울이 노년에 호사(好事)는 누리지 못할지라도, 로마 감옥에서 중죄인 신분으로 사형을 기다리는 상황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미숙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세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상황에 마치 불난 곳에 기름을 끼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거짓 선생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곳에 거짓 선생들이 방문해서, 바울이 가짜 사도이며 가짜 사역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가짜 사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말 미숙한 성도들에게는 매우 혼돈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혼란(混亂)은 회의(懷疑)를 부릅니다. 회의는 삶을 방황케 하고, 결국 세속적인 방식대로 살아가고, 결국 방황하면서 범죄 하도록 만듭니다. 방황하는 사람은 사단의 먹잇감입니다.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사단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미숙한 에베소 성도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거짓 교사들로 정확하게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란스러울 때는 다른 무엇보다 바른 신앙으로 정립한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에베소 소식을 들은 바울은 에베소를 직접 방문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서신으로 격려하고 신앙을 바르게 정립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에베소서’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2) 사도성
사도 바울은 대외적으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 받고 투옥되었지만, 자신의 사명이나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 나라의 사자(使者)로 쓰임 받고 있음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사단은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일군들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가령 그 대상이 돈에 약하면 돈으로, 이성에 약하면 이성으로, 명예에 약하면 명예로 유혹해서 공격합니다. 깨어있지 않는 일군들은 바람에 낙엽 떨어지듯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집니다. 사단은 선한 일군인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공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인 사도권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서 그 점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이 바울을 공격할 목표는 ‘사도직’이었습니다. 사단은 바울과 충돌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도직을 가지고 단지를 걸었습니다. 바울에게 사도직을 공격하면, 힘을 잃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 안팎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사도권’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 있던 거짓 선생들도 바울을 공격하면서 정면으로 ‘사도’가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권’을 흔들면 흔들수록, 사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욱 더 강력하게 ‘사도권’을 주장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도권’에 대해 살펴봅시다. 예수님 이후 ‘사도’에 대해 설명한 곳은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죽은 후, 그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뽑았습니다. 이 때 사도의 자격을 소개했습니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사도행전 1:21-22)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12사도들처럼 함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지 못했고, 더 나가서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고, 12사도들과 동일한 사도직을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장하는 ‘사도권’을 로마서를 통해 살펴보면, 사도로서 3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로마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어야 하고
2. 하나님의 복음 속으로 온전히 구별되어져야 하며
3.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에는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기에 사도나 성도로서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 성도들을 체포하려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반전을 이룬 확실한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고, 바울은 사도로서 부르심에 응답 하였습니다.
(3) 사도의 근원
수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흔들리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던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사명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이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확신에 찬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자격으로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다른 의미는 당시 바울에게 사도권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방어였습니다. ‘사도’라면 예수님을 직접 목격해야 된다고 공격할 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던 사건으로 방어했던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대표적인 공격은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공격할 때, 자신의 사도권과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론합니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 1:10-12)
사도 바울의 ‘사도직’은 자신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다니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섭리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항상 낮추어서 말합니다.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9-10)
하나님께서 바울을 강제적으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즉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변호했던 것입니다. 종의 권한처럼, ‘사도권’도 자신의 의도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권한이 없습니다.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도권’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사도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동안 사도권을 가지고 사역했던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즉, 이것은 복음을 무력화하기 위한 사단의 공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도로 세우신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고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적 정체성이 흔들릴 때, 사단은 그 성도들을 공격 목표로 삼습니다. 과거의 약점으로 ‘너는 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공격합니다. 이렇게 사단이 공격해올 때, 성도들은 담대하게 ‘과거에는 몰라서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이러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분에 대해서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신자 성도들(1b)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적인 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누렸던 복을 헤아려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렸고 또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b)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고, 이제는 세상과 단절되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풍속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라면 그의 소유로서 합당한 새로운 방식과 그의 요구에 걸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또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⑴ 영적인 직분
사도 바울은 본 에베소서 수신자들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중으로 ‘성도(聖徒)’와 ‘신실한 자’이라고 부릅니다.
① 성도
먼저 ‘성도(ἅγιος)’란 구약에서 종교적 경외심을 뜻하는 ‘신성한 사람’, ‘봉헌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였습니다(신명기 33:3).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 영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거듭난 자, 또는 세상으로부터 성별(聖別)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도’란 호칭이 도덕적인 의미에서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거룩한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身分)을 의미합니다. 이 ‘성도’란 호칭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名譽)입니다.
② 신실한 자
다음으로 ‘신실한 자(πιστος)’란 ‘신뢰하다(πειθω)’에서 유리한 단어로 ‘믿을 만한 자’, ‘신임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에서 사용할 때는 성도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성도의 신실한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무리’또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합해 보면, 신분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성도’이고, 실제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호칭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구별된 거룩한 사람이며,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불렀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 세상에서 구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두 가지를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만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방법에 영향 받지 않을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에 속해서 부정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의도한 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동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또한 믿음을 소유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정체성으로 ‘성도’와 함께 ‘거룩’이 동시에 사용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며,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⑵ 실질적 생활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할 에베소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과 후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었지만, 일상에서는 일반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에베소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기란 매우 힘들었습니다.
① 다양한 구성원
에베소 교회 안에는 구성원이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인과 지역민, 주인과 종 등으로 다양한 형태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소수지만 영적 자부심 때문에 서로 화합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방인 출신 성도들은 아직까지 이방 영향으로 도덕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이러한 이방인 성도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게 되고 점점 파벌 싸움으로 비화될 수 있었습니다.
② 지역적 상황
서론에서도 소개했지만, 에베소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했지만, 영적인 면으로 보면 매우 열악했습니다. 항구도시로서 무역이 활발해서 경제적인 부요했습니다. 당연히 물질적인 풍요에 따라오는 것은 도덕적인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는 매우 음탕한 지역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달의 여신 아데미를 섬긴 우상숭배의 중심지 지역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음탕한 에베소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심각했던 지역이라 그만큼 영적인 전쟁이 심각했습니다. 날마다 강력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가야했지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③ 영적 성숙도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성숙도 문제였습니다. 이방인 성도들 중에는 부르심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지만, 아직 미숙한 상태였습니다. 세상에서 생활한 모습은 거룩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에베소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사도행전 19:1-20). 먼저 사도 바울이 안수 기도할 때 성령 임재 체험하였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악한 귀신들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수많은 우상 책과 부적들을 불사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외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아직 내적인 면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봅니다. 아직 부족하고 미숙한 모습이 있었지만, 이들을 향해 바울은 ‘성도’라고 부릅니다. 분명한 것은 에베소 성도들은 부족해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부족해서 ‘성도’로써 합당해 보이지 않지만, 장차 성장하면 강력한 일군이 될 것을 본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해도 그들은 분명히 ‘성도(聖徒)’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부족하다고 손가락질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장차 장성한 모습을 바라보시고 자녀로 축복하십니다.
인사말(2)
오늘날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다른 시대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치 못하고 불평이 많습니다. 감사치 못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사도 바울은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 인사에는 ‘은혜’와‘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들에는 헬라식 인사와 히브리식 인사를 하나로 만들어서 기독교화한 인사법입니다. 이러한 인사는 바울의 서신에 잘 나타난 특징입니다. 간단한 몇 단어로 구성된 인사법이지만, 그 속에는 에베소 교회 안에 히브리 성도와 이방인 성도들로 분열을 일치하도록 하는 인사가 담겨있습니다.
⑴ 은혜
‘은혜(καις)’란 자격 없는 사람에 주신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호의, 그리고 성령을 통한 모든 은총을 의미합니다. 이 은혜는 사람의 행위와 조건을 뛰어넘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⑵ 평강
‘평강(ειρηνη)’은 구약 히브리어의 ‘샬롬(שלום)’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습니다. ‘평강’은 ‘평화’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서 모든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없이는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은혜’가 임하는 곳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심령에 ‘평강’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맺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곧 세상에 모든 조건, 상황 그리고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⑶ 은혜와 평강의 기원
‘은혜’와 ‘평강’이 어디에서 오는지 기원(起源)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원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소개합니다. 이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합니다.
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 창조주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인 아버지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자녀로서 특별하게 은혜와 평강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2:3),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2:12).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로 입양시켜 주셨습니다(1:5).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아낌없이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마음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② 주
다만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옵니다. 예수님을 수식하는 단어는 ‘주(κυριυς)’입니다. ‘주’란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빌립보서 2:9).
당시에는 ‘주’란 표현은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팍스 로마(Pax Romana)’라고, 강력한 힘을 가진 로마 황제가 무력으로 지배한 지역에는 로마가 주는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주는 평화는 로마가 주는 평화와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셔서 진짜 평화를 주십니다. 이 평화는 로마의 평화처럼 무력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주신 평화입니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평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른 것은 모든 세상에 진짜 통치자와 주권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은혜와 평강을 부여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합니다.
사단은 성도들에게 거짓 평화를 누리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은 모든 세상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위대한 평화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갈 때만, 이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을 누립니다. 대표적으로 이것을 누리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성도로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령한 복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제 세상에 어떤 것에 얽매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깨닫는 성도들은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어느 곳에든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에서 우리 시대를 향한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새 생명을 얻는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으므로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과 세상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런 현실 속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되었으며,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에베소서의 제목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헬라어 원제목에서 유래 되었으며, 또한 수신자들의 지역을 반영합니다.
에베소서의 저자
이 서신의 저자는 바울입니다.
⑴ 내적 증거 : 본 서에서 바울이 자신이 기록했다고 두 번이나 소개합니다(1:1;3:1). 또한 본문의 내용에서 엿보이는 바울의 영적 통찰력을 살필 수 있습니다.
⑵ 외적 증거 : 초대교부인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교부들도 그의 저작설을 확신하고 있음이 뒷받침해 줍니다.
에베소서의 수신자
이 서신은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 교회에 전한 서신입니다. 그 사실은 본문에서 ‘에베소에 있는’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에베소 교회만 한정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성도와 교회들에게 전하는 서신이었습니다.
에베소서의 기록연대
주후 62년경. 에베소서 3:1; 4:1 등으로 보아 죄수의 신분에서 쓴 것이 명백합니다. 주후 61년 봄에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2년간 감금생활을 하는 도중, 다른 옥중서신들과 함께 집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배경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2년 이상 목회한 곳이며, 바울과 이곳 성도 들은 매우 친밀한 정을 나누었으므로 헤어짐을 크게 아쉬워했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에서 떠나 있으면서도 이단의 가르침이 스며들 것을 염려했고, 실제로 그런 문제가 나타났으므로 본 서신을 쓰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20:28-30; 디모데후서 2:116-18).
에베소서의 기록목적
① 친히 설립하고 양육한 교회이지만 감옥에 갇혀 방문할 수 없으므로 서신으로 권면하기 위하여,
② 당시 에베소 교회의 심각한 문제였던 이방인과 유대인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에베소서의 주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도들을 택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교회를 이루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 되게 하신 비밀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유기적 조직으로서 연합을 이루도록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서의 특징
⑴ 교회론적 서신-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기적이며 생동적인 교회에 대한 비밀이 계시됨(1:9, 23).
⑵ 전 복음의 집약-구원의 계획, 실현, 미래의 완성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간결하게 집약시켰다.
에베소서의 교훈
이 서신은 에베소 교회에 널리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서 현재 우리 시대에 큰 도전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 도전은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요청은 웅장한 교향곡처럼 들려줍니다.
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거룩한 새 인류로 만들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아들들 됨이, 새 인류 됨이 그분의 계획입니다.
⑵ 바울의 기도는 우리의 관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거룩한 하나님 아들들 됨이, 새 인류 됨이 그분의 계획입니다. 에베소서는 이 요청을 웅장한 교향곡처럼 들려줍니다.
⑶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철저히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시종일관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⑷ 이런 삶이 함께 공동체로 실현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참 공동체 실현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복수의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각자의 역할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참된 성전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널리 퍼집니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실로 얼기설기 짜인 융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할 때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애통할 때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슬픔의 날을 만날 때, 그때에도 우리는 슬픔의 탄식을 믿음의 탄성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드리는 눈물과 비탄의 호소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간절한 믿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든 이방 땅에서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바알의 성읍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엘리야를 공궤할 자로 지목한 자는 아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여인의 집에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 후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8-24)
비록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지라도 인생길에서 맞이하는 모든 상황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험난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을 때가 바로,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바랄 때입니다. 인생의 불확실함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올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8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8-24)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이 않다가 죽게 되자 비탄에 잠깁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시신을 다락으로 옮겨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려주시고, 여인은 이 일을 통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1) 엘리야와 과부 식구를 먹이신 하나님(8-16)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 엘리야를 돌봐주십니다. 2절에서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9). 하나님은 그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그릿 시내가 말랐으므로,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보내 공급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시돈은 가나안의 북동쪽이자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니게 왕국의 도시입니다. 요단 동편의 그릿 시내에서 130킬로미터 이상인 먼 거리입니다. 게다가 그곳은 이세벨의 고향이며, 부친 엣바알의 통치 지역으로, 바알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16:31). 당시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강요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였으며, 아합은 엘리야를 찾아 수색전을 펼쳤습니다(18:4,10).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바알 숭배지로 보내는 일은 인간의 허를 찌르는 책략입니다. 그릿 시내에서 까마귀를 이용하여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엘리야를 공궤할 대상으로 사르밧의 한 과부를 정하셨습니다. 까마귀에게 명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과부에게도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20). 이번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미래에 할 일(‘명령할 것이라’)이 아닌 이미 완료된 일(‘명령했다’)로 나와, 그의 능력을 부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이방 과부에게 보내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지적하셨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눅 4:25-26).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공급과 축복은 이방 여인과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바알의 풍요를 기대하는 자들은 기근 속에 허덕이나, 하나님의 매일 양식은 엘리야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한 이방 여인 가족에까지 확대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수배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가 먼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 덕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은 기근을 피해 도착한 바알 숭배지에도 가뭄과 기근이 심각했으며, 엘리야의 숙식을 맡게 될 과부는 풍족한 양식은커녕 자기 가족 먹을 것도 없는 처지였다는 점입니다. 엘리야가 성문에 도착했을 때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성문은 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라, 남들이 떨어뜨린 땔감을 주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성문은 엘리야처럼 나그네들이 성읍 주민들에게 초청받아 숙박할 기회를 얻는 장소였습니다(창 19:1-3; 삿 19:15). 엘리야는 그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인지 알기 위해 그릇에 마실 물을 조금 갖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갔을 때(창 24:13-14)를 상기시켜,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지목한 과부임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요청에 응하여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자, 엘리야는 그녀를 다시 불러 빵 한 조각도 함께 청합니다. 요청에 당황한 여인은 자기에게 빵이 없으며, 식량이라고는 통에 곡식 가루 한 움큼, 병에 기름 조금 뿐임을 밝힙니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땔감 두어 개를 주워다가, 남은 재료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이 말을 하면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12)을 언급하는데, 이는 엘리야가 자기 신분을 이미 밝혔음을 암시하며, 여인의 말이 진실함을 주장하는 의도입니다. 여인의 형편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라며 그녀를 위로합니다. 그러더니 예상 밖에 자기를 위해 작은 빵 하나를 먼저 만들어 오고, 그 후에 그녀와 아들의 빵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이 명령은 앞서 10-11절의 “청하건대”를 수반한 ‘요청’이 아닌 ‘명령’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면, 여호와의 말씀에 가루 통이 바닥나지 않고 기름병이 줄지 않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처음 만난 이방인의 이런 말은 뻔뻔한 속임수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그가 시킨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러 날을 먹어도 가루와 기름이 계속 채워졌습니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기를 기다리려 했던 여인은 순종을 통해 음식과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꼐서는 바알의 성읍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며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2)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17-24)
하나님께서는 양식 문제를 뛰어넘어, 이방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그가 생명의 주관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있어 엘리야의 체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만 일어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곡식 가루와 기름을 계속 공급받고 있던 중여인의 아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19)의 어린 나이로 짐작됩니다. 아들의 병세는 심히 악화되었고, 결국 숨이 끊어졌습니다. ‘숨이 남지 않았다’(17)는 표현은 아이의 죽음이 확실함을 나타냅니다. 여인은 이방 선지자 엘리야를 집으로 들인 것이 아이의 병과 죽음의 화근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시돈인인 그녀는 바알을 숭배했을 터이므로 여호와의 선지자의 체류 자체가 바알의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아들이 양식을 공급받아 여태 생명을 부지해온 것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존재로 자신의 다른 죄악들도 드러나고, 자기 죄 때문에 신의 징벌이 내렸나 싶어 괴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는 급기야 엘리야가 그곳에 온 이유가 그녀의 죄를 기억나게 하고 아들을 죽게 하려 한 것이었냐고 따지며, 괴로움과 원망을 다 쏟습니다. 물론 여인이 이 일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눈에 아들의 죽음은 사람의 힘으로 손쓸 수 없는 일이고,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아이가 더 소중했을 터이므로, 이런 반응은 자연적이고 당연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살핀 태도 자체는 병든 아들을 보고도 자신의 죄과를 기억하지 않은 여로보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14:1-18). 실상 과부 아들의 죽음은,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게 된 자에게 설명하시듯(요 9:3), 아들의 죄나 여인의 죄때문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매개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경우 아들 아비야의 질병은 여로보암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들이 위중했을 때 자신의 죄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선지자를 속여 아들의 생사를 알아내려고 술수를 쓰며 죄만 더해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기도할 특권이 있었으나 아들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여인에게서 죽은 아들을 건네받아, 자기가 거하는 윗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아이를 침대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인이 아들의 죽음을 엘리야 탓으로 돌렸듯, 엘리야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신이 체류하는 집의 과부에게조차(“또”로 번역됨, 20) 재앙을 내리셨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세 차례 뻗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마술이나 소생술의 연출이 아닌 자기희생과 간구의 한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엘리야는 또한 아이의 영혼을 되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죽은 아이의 생명을 되돌려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눈으로) 보아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23)라며, 아이가 생명을 되찾았음을 확인시킵니다. 여인은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함을 분명히 알았노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아이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이방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또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의 능력과 함께 시돈의 우상신 바알이 아닌 여호와가 생명의 주인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인생의 연약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인생에서 슬픔으로 인해 탄식할 때가 있겠지만, 마침내 슬픔의 비탄을 기쁨의 탄성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린 우리의 눈물의 호소와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영광의 찬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혼탁한 세상 가치관에 순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고집하며,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참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으로 혼탁해지는 세상에 맞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믿음을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며 공급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에게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바알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하는 바알 숭배자들을 도발하는 소식입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겨 보호하십니다. 말씀대로 전혀 내리지 않고, 급기야 그릿 시대도 마릅니다.
엘리야를 보호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1-7)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혼탁한 가치관이 난무하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믿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에 맞서며 시대를 바꾸어 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길들여지는 연약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에 도전하는 생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 맞서며 살아가야 합니다.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1-7)
이스라엘을 바알 숭배로 이끌어 가장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합(16:30,33)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주십니다. 분열왕국 왕들의 기록 중 아합 단락(16:29-22:40)은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의 악행을 두드러지게 묘사합니다. 또한 단락 안에는 엘리야의 사역이 아합만큼이나 비중 있게 나옵니다(17:1-19:21; 21:17-29).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용하여 신앙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사하심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나타내십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길르앗 땅의 디셉 출신 또는 거류자로서, 아합(주전 874-853년)과 아하시야(주전 853-852년) 대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아합의 통치 기록에는 엘리야 외에도 엘리사(19:19-21), 이름 없는 선지자(20:13-14, 22-25, 28), 또 다른 선지자(20:35-42), 미가야(22:828),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18:4) 등이 등장합니다. 이는 악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를 보내 그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나타냅니다(미 6:4). 하나님의 말씀에는 심판의 경고도 있고 승전의 약속도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은 그 말씀 그대로 실현되어 갑니다. 그럼에도 아합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를 버리고, 바알을 좇는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합당한 심판에 점점 더 다가갑니다. 한편 엘리야 단락인 17-19장과 21:17-29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응답, 탈진, 그리고 재기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 과정의 한편에는 엘리야의 단호함, 용기, 열정, 헌신, 간절함 등이, 또 한편에는 외로움, 상실감, 좌절, 우울함 등이 기술됩니다. 하나님꼐서는 굴곡 있는 삶의 여정 속에 엘리야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신실하게 공급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19장까지는 3년 6개월의 가뭄을 배경으로 하나님이 엘리야와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보살피셨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1) 가뭄 예고(1)
선지자 엘리야는 땅에 가뭄이 시작될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보함으로써 아합의 바알 숭배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비뿐 아니라 이슬조차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예고되었습니다. 바알은 천둥과 폭풍의 신으로서 땅의 풍요와 가축의 번성을 제공하는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가나안 주민들은 바알이 땅에 비를 내린다고 믿었으므로, 바알은 농경생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숭배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도 아합과 이세벨과 더불어 바알을 이스라엘의 신으로 섬겼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신은 자기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임을 밝힙니다. 1절의 “내 (엘리야) 말이 없으면”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면’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엘리야의 가뭄 선포는 여호와와 바알 간의 대결이며, 바알과 그의 숭배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18장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18:20-40) 이전에, 그들이 각각 섬기는 ‘신들의 대결’이 먼저 시작됐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바알과 대결을 벌인다 해서 바알이 실제로 존재한다든가 하나님과 바알이 대등하게 견줄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당시 아합을 비롯하여 백성이 바알을 신격화하여 섬겼으므로, 그들의 신이 생명과 능력이 없는 형상에 불과함을 증명하기 위한 한 방법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출 3:14). 한편 가뭄 예고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임을 함축합니다. 이슬이나 늦은비, 이른비 등의 비는 하나님의 은혜이나(욜 2:23), 가뭄과 기근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한 형벌임을 암시합니다(레 26:18-20; 신 28:23-24).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솔로몬의 기도에 언급되었듯(8:35-36) 그들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암 5:6-12; 히 12:5-11).
(2) 엘리야를 보호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2-6)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 엘리야에게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의 그릿 시내가에 숨으라’(3)고 명하셨습니다. “여기”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읍으로 유추됩니다. 1절에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언한 장소가 아합의 궁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에도 아합을 만나러 사마리아로 간 점(18:2)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숨으라’는 명령은 배경 설명이 없어 갑작스러우나, 엘리야의 가뭄 예언 이후에 나온 것을 봤을 때, 그의 발언 때문에 어려움이 닥쳤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황은 17장의 앞뒤 내용에서 보충됩니다.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극에 달한 계기는 오므리가 추진한 아합과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시돈은 바알을 위시해 아세라와 아스다롯의 숭배지였습니다. 아세라는 모든 신의 어머니로, 아스다롯은 풍요와 다산의 신의로 알려졌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출애굽 당시 이미 가나안의 신들로 소개됐고(출 34:13), 사사 시대에 아스다롯과 함께 이스라엘의 숭배신으로 증명되었습니다(삿 3:7; 6:28; 삼상 7:3-4). 솔로몬 대에도 아스다롯 등 이방신 숭배가 만연했습니다(11:1,5). 아사의 할머니이며 태후였던 마아가도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15:13). 현재 아합의 아내 시돈 공주 이세벨은 열성적인 바알 신자였습니다. 시돈과 같은 나라(베니게)에 속한 두로의 히람 왕은 성전 건축에 힘을 보탰지만(5장), 시돈의 이세벨은 아합을 부추겨 바알 신봉자로 만들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바알 사이로 몰아넣었습니다(18:21). 이스라엘에는 바알 신전과 제단, 아세라 상이 즐비했습니다(16:31-33). 또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있어, 이세벨이 공급하는 양식을 먹으며 호사를 누렸습니다(18:19), 이처럼 아합과 이세벨의 주도하에 바알이 흥왕하고 있을 때 엘리야가 나타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알리며 가뭄을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의 예언을 그들의 신과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그 후 비가 내리지 않자 모든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려, 그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18:17). 아합은 이스라엘 안팎으로 엘리야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18:9-12),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찾아 죽였습니다(18:4;19:10). 나중에 가뭄이 끝날 즈음 엘리야가 아합에게 비가 내릴 것임을 선언한 일(18:41) 또한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핍박이 가뭄과 관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보호의 약속과 더불어 그릿 시냇가를 통해 물을, 까마귀들을 통해 음식을 엘리야에게 공급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대로 까마귀들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는 음식과 함께 그럿 시내의 물을 마셨고, 그곳에서 안전히 숨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출 16-17장; 민 11, 20장).
(3) 가뭄의 시작(7)
엘리야의 가뭄 예고(1)로 시작한 이 단락은 가뭄이 실제로 시작되었음(7)을 알리며 끝납니다. 이런 전환은 시간적, 물리적, 환경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선언된 엘리야의 가뭄 예고가 현실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가뭄은 비를 관장하는 폭풍의 신 바알이 여호와의 능력에 압도당했음을 의미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그릿 시내도 말라, 곧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곳도 엘리야의 식수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또 어떤 방법을 통해 엘리야를 먹이고 돌보실지 기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적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 때가 우리를 더욱 강인한 영적 용사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는 시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는 일입니다. 그분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과 상관없이 누리는 번성은 그분의 존재감을 지우고 망각하게 만드니 재앙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 북이스라엘에 계속 일어남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점점 가까워집니다. 분열왕국 이해 60년이 채 안 되어 이스라엘에는 시므리와 오므리를 통해 각각 왕조가 바뀝니다. 제4왕조를 시작한 오므리와 그 아들 아합은 그들 전의 어떤 왕들보다 악을 더 행했습니다. 아합은 이내 이세벨의 영향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고, 그들의 제단과 우상들을 만들었습니다.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전역에 퍼뜨려 여호와의 노를 부추겼습니다.
이스라엘 왕 시므리(15-20)
우리가 자격도 되지 않는데 인간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비성경적이고 비인륜적인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립됩니다. 욕심은 죄입니다. 욕심에 빠져 사악한 행동을 계속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15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그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16진 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매 17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 18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 19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20시므리의 남은 행위와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5-20)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왕 시므리(주전 885년)는 7일간의 짧은 통치와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역사에 남깁니다. 그가 바아사의 아들 엘라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때는 유다의 아사 왕 제27년이었습니다. 시므리의 반역으로 엘라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깁브돈(디르사의 남서쪽 80km)에 진 치고 있던 군대 지휘관 오므리와 온 이스라엘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반으로 왕좌에 오른 시므리를 합법적인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지휘관인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시므리에 대항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들의 행보는 오므리가 시므리보다 군사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반자 시므리를 처단하기 위해 깁브돈에서 행군해 올라와 디르사를 에워쌌습니다. 오므리를 따른 군대는 ‘온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무리”)로 나와 그가 군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지도자임과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마침내 오므리 군대는 디르사를 함락했습니다. 결국 시므리의 반역은 이스라엘에게서 깁브돈을 함락할 기회를 빼앗고(15:27; 16:17), 애꿎게도 자국의 수도가 함락되게 만들었습니다. 시므리는 디르사가 오므리의 손에 점령당하자 좌절하여 왕궁 요새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신도 그 속에서 재가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시므리는 왕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그의 반역은 무모했습니다. 그는 경쟁 상대를 예상치 못했고, 강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바아사 가문에 대한 숙청은 빈틈없었으나 정작 자신의 모반에 대한 공격과 저지 세력에 대한 준비는 미약했습니다. 왕이 된 지 7일 만에 방화와 자살을 함으로써 자신이 세운 왕조와 지지자들과 스스로를 버린 행동 또한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몰락이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죄’의 ‘심판’임을 단호하게 지적합니다(19). 그의 죄는 다른 왕들과 같이 개인이 지은 죄(‘여로보암의 길로 걸은 죄’)와 백성을 악으로 이끈 죄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짓게 만든 죄)입니다. 짧은 통치로 생을 마감한 시므리에게 여로보암의 죄를 묻는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자임을 뜻합니다. 그가 저지른 암살과 숙청 자체가 자기 욕심을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규례에 어긋난 죄이며, 나라의 분열과 갈등을 가중시키는 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21-28)
우리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업적을 자신의 영적 현주소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이룬 위대한 성공과 업적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의 길’로 언급되는 죄, 즉 자신의 목적을 절대화하거나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1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로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라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따랐더니 22오므리를 따른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른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23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24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25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26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27오므리가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8오므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합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1-28)
시므리의 자결 후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왕이 된 오므리(주전 885-874년)는 강력한 왕조의 군주였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왕정은 여로보암 이래 암살과 숙청이 난무하던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약 25년 전 깁브돈에서 나답과 함께했던 온 이스라엘은 그를 암살에서 지켜주지 않았으나(15:27), 오므리와 함께한 “온 이스라엘”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든든한 지지 세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시므리가 이미 왕 엘라를 죽이고 바아사 가문을 다 숙청했고, 시므리 자신마저 자살함으로써 오므리는 앞선 왕조에 대해 손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등극 당시는 유다 아사 왕 제27년으로(15), 분열왕국 이래 47년이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유다는 다윗 왕조가 지속되고 아사가 세 번째 왕으로서 장기 통치 중인 반면, 이스라엘은 반세기 동안 왕조가 네 번 바뀌고, 왕도 여섯 번째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정권을 잡은 여로보암 왕조는 말년에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끝났고(대하 13:20), 그의 아들 나답이 암살당하여 더 위태해졌습니다(15:27). 새로이 권력을 잡은 바아사가 20년 이상의 긴 통치를 이루었으나(15:17), 유다의 아사 왕 때 벤하닷의 침략으로 영토를 많이 잃어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엘라는 1년 새에 시므리에게 암살당합니다(16:10). 그러나 시므리는 7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북왕국 내에 내분이 생깁니다. 백성의 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주전 885-880년)를 왕으로 삼고, 반은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시므리의 등극 시기가 아사 제27년이며(15), 디브니가 제거되고 오므리가 왕이 된 때가 제31년(23)인 것을 계산하면, 분열 기간은 약 4년 정도입니다. 오므리 왕조는 4대에 걸쳐 44년간(주전 885-841년) 지속됨으로써 북이스라엘 9왕조 중 예후 왕조(5대, 89년) 다음으로 장기 집권하면서 가장 강력한 왕조를 이뤘습니다.
오므리는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겼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 약 67킬로미터, 세겜에서 약 20킬로미터의 거리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원래 소유자는 세멜이며, 그의 이름을 따 ‘사마리아’라 이름 지었습니다(24). 은 2달란트(68kg)에 구입한 이곳은 해발 약 400미터에 위치하여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므리가 땅을 매입한 행위는 레위기 25:23의 ‘땅 매매 금지’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신 것은 각 가정과 후손에게 삶의 터전을 확보해주시는 의미였습니다. 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영원히 팔거나 양도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오므리가 이를 가볍게 여기고 땅을 산 데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오므리는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더구나 여로보암처럼(14:9) 이전 모든 자들보다 더 악을 행했다는 내용이 부가되었습니다. 선왕들처럼 여로보암의 길을 따름으로써 자신도 죄를 짓고 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열왕기는 오므리에 대해 여덟 절을 할애했으나, 실상 그와 그의 왕조는 성경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메샤 비문(Mesha Inscription)에는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한 내용이 적혔고,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악한 왕의 정치 군사적 업적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의 악행을 고발하고 죄에 합당한 심판이 있음을 알림으로써 독자들에게 죄와 심판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29-3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총체적 삶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신앙을 양보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가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해 섬기는 이분법적인 태도나 혼합주의적인 모습은 없는지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29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30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34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29-34)
오므리에 이어 다섯 번째 왕이 된 아합(주전 874-853년)은 이스라엘의 가장 약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유다 아사 왕 제38년에 왕좌에 올라 22년(실제 21년)간 통치했습니다.
30-33절에 빼곡히 기록된 죄목은 그의 죄가 질적, 양적으로 무거움을 알립니다. 그는 부친 오므리처럼 이전 모든 자보다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했습니다. 특히 오므리가 주선한 정략결혼을 통해 아내로 맞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인해 죄가 가중되었습니다. 아합은 그녀가 섬긴 바알을 함께 숭배했고,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과 제단 및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유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데 반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는 이방신 바알의 신전이 자리 잡았습니다. 아합의 배역 행위는 솔로몬이 이방 아내들을 위해 산당과 제단을 지어, 자신과 백성을 이방 신 숭배로 이끌어, 하나님의 큰 책망을 받은 일을 상기시킵니다(11:1-13). 솔로몬의 이런 배역으로 이스라엘이 분단되지 않았습니까! 아합의 악행이 크므로 여호와의 진노도 증대되었습니다.
한편 당시 일어났던 여리고 재건축도 이스라엘의 악행과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난 한 사례입니다. 과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성읍의 재건을 금하고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수 6:26-27). 그러나 아합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했습니다. 이 건축은 왕의 명령으로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성을 재건한 결과, 히엘이 성읍 터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읍 완공 후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의 선포된 말씀은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왕과 백성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점점 패망으로 가까이 갑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 종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무의미한 이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머무는 한 아무도 주변인이요, 변두리 인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부모는 두 아들을 편애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각기 그릇에 맞게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에는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에서의 세 아내로부터 여러 후손들이 출생하였습니다. 세일 산에 거주하는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입니다. 에서의 세 아내의 이름은 바로 위에서 소개된 아다, 바스맛, 오홀리비아로 명부의 이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서의 병명 ‘에돔 족속의 조상에서’라는 제목이 달립니다. 에돔은에서 후손 민족의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에돔 족속과 더불어 세일 산에 거주하던 호리 족속의 자손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9-19)
하나님께서는 에서로 하여금 한 민족으로서 세력을 확장하여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에서의 계보는 야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였지만, 상대적 열세일 뿐 절대 적지 않은 수였습니다. 그들 모두 족장이 되어 한 민족을 이루었고, 열한 개 지역에서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에서의 신앙에 머무릅니다.
9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10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11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13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14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15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16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17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18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19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9-19)
이 명단은 3대에 이르는 에서의 자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를 통한 자손은 제외되었습니다. 첩의 아들인 아말렉을 제외한다면 나홀의 후손(22:20-34), 이스마엘의 후손(17:20; 25:13-16), 야곱의 후손처럼(35:23-26)에서 역시 창세기가 선호하는 정치 단위인 12부족 연맹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1) 에서의 세 아내의 자손들(9-14)
에서의 자손 목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소개됩니다. 목록 A(9-14절)는 ‘에서의 후손들의 목록’으로 세 아내와 아들들, 그리고 그 아들들이 낳은 손자들의 목록입니다.
반면에 목록 B(15-19절)는 ‘에서 족장들의 목록’으로 족장들의 목록입니다. 후손들의 목록과 족장들의 목록은 겹칩니다. 그러나 목록 A의 엘리바스의 아들 명부에서 목록 B의 엘리바스의 족장 명부에 나타난 고라 족장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대신 목록 A에서 고라라는 이름은 오홀리바마의 아들 중 한 명에서 나타나 두 명의 고라가 명단에 수록됩니다. 일단 두 명의 다른 인물이 고라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B에는 나타나는 고라라는 이름이 A의 엘리바스의 아들 명부에서는 누락되어 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월키는 목록 B에서 엘리바스 족장들의 목록을 한 명 더 늘려 일곱 명으로 맞추기 위함인 것으로 추론합니다. 반면에 목록 B에는 세 아내 중 아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왜 발생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에서의 1, 2대 후손은 야곱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열두 명으로 구성됩니다. 목록 A의 자손들의 목록에서 첩 딤나를 통해 낳은 아말렉이 서자로 취급되어 빠지면 열두 명이 됩니다. 딤나는 아래 명부가 소개되는 세일 산의 호리 족속의 딸이었습니다. 오홀리바마의 경우는 그녀의 아들들이 열두 명의 명부에 오르고 아다와 바스맛의 후손은 손자들이 열두 명의 명부에 오릅니다. 이것 역시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열두 명으로 맞추기 위한 목록 작업인 것으로 보입니다.
몇몇 눈에 띄는 인물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엘리바스의 아들 데만은 훗날 에돔 땅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됩니다(예레미야 49:7,20; 에스겔 25:13). 역시 엘리바스의 아들인 그나스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나스는 갈렙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말렉 또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유일하게 첩의 아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에서의 열두 명의 후손 목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을 초기부터 끈질기게, 그리고 오래도록 괴롭혔습니다. 당장 출애굽 후 광야를 걷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으며 이후에도 끈질기게 이스라엘과 충돌한 족속입니다(출애굽기 17:8-16; 참조, 사사기 3:13;6:3-5,33; 7:12; 10:12).
(2) 에서 가문의 족장들(15-19)
목록 b는 에서의 1,2대 후손들을 이제 각 지파의 기원이 된 족장으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다만 이름이 등장하는 순서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만 이름이 등장하는 순서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기서 목록 A에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추가됩니다. 아다의 아들 엘리바스의 후손에 고라 족장이 새로 들어옵니다. 이 고라는 오홀리바마의 아들 고라와 다른 인물이 분명합니다. 이는 엘리바스의 아들들의 이름을 일곱 면으로 채우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호리 족속 세일의 후손들(20-30)
가안을 떠나 세일에 터를 잡았던 에서는 호리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한 채 혼합주의와 세속주의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만 섬기는 데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호리 족속은 자녀 수로는 에돔 족속을 능가했지만, 족장 수는 에돔 족속에 비해 절반가량 차이를 보입니다.
20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21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요 22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과 로단의 누이 딤나요 23소발의 자녀는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24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25아나의 자녀는 디손과 오홀리바마니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며 26디손의 자녀는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27에셀의 자녀는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28디산의 자녀는 우스와 아란이니 29호리 족속의 족장들은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0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세일 땅에 있는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었더라(20-30)
호리 족속은 아브라함 혈통과 전혀 상관없음에도 그 뿌리가 상세히 소개됩니다. 이는 에돔 족속과 호리 족속의 긴밀한 관계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곱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명부에 올라 있습니다(20-22). 이들은 에돔이 세일 산을 점유하기 전에 오랜 기간 세일 산의 토착 세력으로 살고 있었습니다(신명기 2:22). 에돔은 이들과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창세기 36:20, 22, 25을 보라).
위의 목록 A의 엘리바스의 첩이 된 딤나에 대한 소개에서 개역개정의 실수가 보입니다(22). 바로잡는다면, ‘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이요, 딤나는 로단이 누이이다.’ 말하자면, 딤나는 로단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라 로단과 남매입니다.
아나란 인물이 눈에 띄는데, 그는 ‘온천’을 찾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온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예밈’의 뜻을 둘러싼 논란이 있는데 온천이 가장 유력합니다. 28-30절은 호리 족속 중에서 족장들 명부를 별도로 제시합니다. 총 일곱 명의 족장이 소개됩니다.
에돔의 왕명록(31-43)
에서는 통치 체제에서도 변화를 수용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정을 시도했고 여기 소개된 여덟 왕들은 세습이 아닌 각기 다른 지역 출신으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약속하신 후손을 주시려 해도, 이방 여인과 결혼한다면 하나님과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31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2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33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4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5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36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7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8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9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40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31-43)
에돔 족속은 초기에는 연맹 공동체로 여러 두령이 분할 통치하는 방식이었으나 나중에 왕정 체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여기에 여덟 명의 왕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에돔의 왕정은 단일 왕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닌 여러 두령들 중에서 옹립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왕권은 계승되지 않고 분할 통치하는 군주들에 의해 매번 바뀌었습니다. 그로 인해 왕들이 통치한 수도들도 각자의 중심거점의 수도로 계속 바뀝니다. 40-43절은 왕들이 아닌 족장들의 이름입니다. 족장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초기의 조상들이며 그들에게서 나온 후손들이 번갈아 가며 왕직을 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에 가려 그의 형으로만 불리지 않도록 ‘에서’라는 이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삶을 꾸려가게 하시고, 이후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까지 내려오는 아브라함 언약을 주셨어도 언약의 자손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