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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7-02)


 형들에게 팔려진 요셉

창세기 37장 18-36절


 사람을 보면 절망하고 역사를 보면 희망이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비통함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시간과 사람과 사건들이 있어야 합니까? 그 종착점은 어디입니까? 묻고 또 묻습니다.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마저도 이렇게 절망하고 기대를 접으실 것입니까?

 

요셉의 형들은 처음 계획은 요셉을 죽이고 구덩이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20). 동생을 보자마자 죽이기로 작정한 대서 요셉에 대한 형들의 사무치는 증오심을 엿보게 하지만, 덧붙여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 패거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여 사체를 처리한 뒤, 포악한 들짐승이 잡아먹은 것으로 위장하자고 소름끼치는 음모를 꾸밉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한 형들(18-24)

미움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미움이 자라서 살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남의 성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얻을 것이 아니라면, 성공한 사람도 얻지 못하도록 합니다. 약육강식의 악한 짐승의 마음입니다. 편애는 반드시 가족 내의 분열을 일으킵니다.

18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18-24)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그를 죽일 계책을 꾸몄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그들의 누이에 대한 보복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몄는데(34:24-29), 이제는 대조적으로 동생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1) 모의하는 형들(18-22)

요셉이 형들에게 가까이 갈 때 그들은 멀리서도 동생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입혀준 눈에 띄는 채색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저기 꿈 대장이 온다!’ 형들이 사용한 표현은 단순한 ‘꿈꾸는 자’가 아닌 ‘꿈들의 주인’입니다. 그들이 비아냥대며 사용한 요셉의 이별명은 역설적으로 점차 진실이 됩니다. 장차 그는 꿈을 마음대로 풀어내는 능력을 지닌 신비한 해몽가로 쓰임 받습니다.

요셉을 증오하던 형들은 그가 들판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살의를 느끼고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요셉을 살해한 뒤 들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으로 위장하기로 합니다. 죄가 죄를 낳습니다. 죄를 죄로 은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한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꿈 자랑을 했던 요셉을 조롱합니다. ‘그래! 네놈이 꾼 꿈이 잘도 성취되겠구나!’

르우벤은 살인 음모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형제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그들을 말립니다(21). 맏형인 르우벤은 처음부터 동생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장남으로서 가족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 의식이 컸고, 또한 그를 편애하는 아버지의 큰 상실감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간통한 후 아버지의 신뢰를 이미 잃었기에 자신이 또 책임을 져야 할 음모에 적극 가담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살인은 저지했지만, 요셉을 구덩이에 넣는 것으로 형제들과 타협하려 합니다.

(2) 구덩이 던져진 요셉(23-24)

형들은 요셉이 도착하자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바위를 깊숙이 파서 만든 인공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의 깊이는 다양한데, 요셉을 내던진 우물의 깊이는 혼자 빠져나오기 힘든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형들의 일련의 동작, ‘(옷을) 벗기고, 잡아서, 던지고…앉았다’는 이 일이 얼마나 신속하게 거침없이 진행되었는지 말해줍니다. 웅덩이에 물은 없었지만 바닥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진흙탕이었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컴컴하고 서늘한 구덩이에 내던져진 요셉의 모습은 그가 애굽에서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옥살이할 것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25-28)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지 못한 감정과 적개심 때문에 서로를 배척하고 있습니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이 좋지 못한 감정, 적개심, 그리고 배척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분열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이지 말고 종으로 팔자고 제안하였습니다.

25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5-28)

본문은 요셉의 반응에 대해 침묵하지만 그는 소리를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걸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42:21에서 확인됩니다. 형들이 떠나면 광야 한복판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형들은 밥이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태연히 앉아 밥을 먹습니다. 저자는 요셉의 처절한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초점을 이 무정한 형들에게 맞춤으로써 이들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다시 한 번 드러냅니다.

형들은 멀리서 이스마엘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낙타에 향품, 유향, 몰약과 같은 귀한 향신료와 약재들을 싣고 애굽으로 가는 무역상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미디안 상인이라고도 불립니다(28,36).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이 종족으로는 엄밀히 구분되지만, 당시 두 명칭은 애굽으로 무역을 위해 오가는 아라비아의 상인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면서 교대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스마엘 후손은 아라비아와 시내 반도 일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25:13-17). 또한 미디안 종족과 이스마엘 종족이 통혼했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25:2;17-18; 29:9). 따라서 미디안 무역상은 이스마엘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르우벤이 잠시 사라지고 유다가 전면에 나섭니다(26). 유다는 살인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벨의 죽음 이후 무고한 피를 흘리면 그 피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다는 교훈을 잘 알고있었을 것입니다(4:10). 따라서 살인은 좋은 선택이 아니며 오히려 요셉을 산 채로 제거하되 이익을 남기는 쪽이 낫습니다. 유다의 계획은 르우벤과 달리 요셉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생을 팔아 이익을 남기려 하기에 그의 행동은 더욱 치졸합니다. 고대에 누군가 먼 이국땅에 노예로 팔리면 홀로 돌아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행위는 인신매매다. 더구나 형제를 납치해 파는 행위이므로 죄질이 더 나쁩니다. 유다는 요셉이 ‘우리의 동생이요 혈육’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지만, 이것은 그를 살리기 위한 호소가 아닌 형제들을 설득하기 위한구실일 뿐입니다. 유다의 계산과 달리 율법은 인신매매범과(출 21:16) 유괴범을(신 24:7) 살인과 동급의 범죄로 취급하여 사형을 선고합니다. 납치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생명을 훔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유익하고 창의적인 제안을 모든 형제가 따릅니다(27). 미디안 상인들이 다가오자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 은 20냥에 팔아넘깁니다. 상인들은 그를 애굽으로 데려가 몸값을 제대로 받고 어느 부잣집에 넘길 생각입니다. 은 20냥은 은 20세겔(약 220그램)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 바벨론과(주전 2000년 초) 이스라엘에서(레 27:5) 5-20세 남자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유다가 상황을 주도 하지만 배후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 중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곧바로 찾지 못해 시간이 지체됨으로써 요셉과 미디안 상인들이 정확한 시간에 조우하게 되었고, 유다가 미디안 상인을 목격한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셉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어 결국 요셉의 꿈은 현실이 됩니다.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임(29-36)

가족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항상 분열의 원이 됩니다. 거짓말은 신뢰성을 파괴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고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감정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은 다른 어떤 죄보다도 결혼과 가정을 신속히 파괴합니다.

29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29-36)

이제 요셉의 형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1) 요셉의 죽음에 대한 야곱의 애통(29-35)

르우벤이 다시 등장합니다(29). 저자는 형제들의 음모가 진행되는 순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는 양 떼를 살피러 잠시 나갔던 것 같습니다. 돌아온 르우벤은 구덩이에 요셉이 없는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비탄에 빠집니다. 흔히 옷을 찢는 행위는 회개와 슬픔, 비탄감과 애곡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형제들이 그를 처리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나는 어디로 갈까’라며 절망스러워 합니다. 이것은 요셉을 잃은 채 어떻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는, 자신의 책임을 크게 통감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것을 몰랐습니까? 아마 처음에는 몰랐으나, 채색옷에 염소 피를 묻히는 속임수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아 동생들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장남입니다. 다시 한 번 르우벤의 위상이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안타깝게도 야곱에 대한 인과응보의 징벌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그는 운명을 결정지었던 교묘한 사기극으로 에서를 속이고 또한 아버지를 속인 전력이 있었지만, 결국 라반에게 오랜 세월 속더니 이제 자식들에게 속습니다. 형제들은 숫염소를 죽여 요셉의 채색 옷에 묻힌 뒤(31) 그것을 아버지에게 보냈습니다(32). ‘보냈다’는 표현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우선 종을 통해 그 채색 옷을 아버지에게 보냄으로써 이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도착해서는 자초지종을 조작해서 보고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죽인 짐승과 옷으로 이삭을 속인 것처럼, 이제 아들들이 죽인 짐승과 옷으로 아들들에게 속습니다. 그는 그 옷이 요셉의 것임을 즉시 알아차리고 들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단정 지은 뒤,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며 애곡의식에 들어갑니다. 그의 애곡은 오래도록(문자적으로 많은 날 동안을) 지속되었습니다. 야곱의 모든 자녀가 그를 위로했지만 그의 비탄한 마음과 슬픔을 달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대로 죽을 때까지 슬퍼하다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갈 생각입니다(35). 하나님께는 물론 사람에 대한,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야곱의 아들들의 죄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2) 애굽에 팔린 요셉(36)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려가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참고로 당시 아시아인들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다는 기록이 여러 이집트 문헌에 등장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애곡하고 있는 상황에서 화자는 36절에서 요셉은 애굽 사람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 살아 있다고 대조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한 곳 제대로 돌아기지 않습니다. 오해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합니다. 인신매매와 살해 의도를 감추는 않습니다. 속이고 또 속습니다. 부자간의 도리도, 형제간의 도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역사에도 하나님께서는 의미를 만들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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