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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8-01)


 기업 무름의 여인 다말

창세기 38장 1-30절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세상의 윤리를 초월합니다. 그것은 세상 윤리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윤리가 지향하는 기대보다 훨씬 차원이 높고 지향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때로 세상이 합법이라고 하는 것을 위법이라고 말하고, 위법이라고 말하는 것을 합법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8장은 요셉 이야기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유다 에피소드입니다. 이 기사는 몇 가지 이유로 여기에 배치되었습니다. 첫째, 독자들의 궁금증을 최대로 불러일으킵니다. 둘째, 이 장면은 요셉이 애굽에서 이미 오랜 시간을 지내고 있음을 알립니다. 셋째, 유다의 금지된 가나안 여인과의 통혼 및 그와 관련된 충격적 사건은 큰 뉴스가 될 말했습니다. 넷째, 유다의 두 손자가 탄생하는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가 결국 야곱 톨레도트의 범위 내에 들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유다의 통혼과 세 아들의 출생(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시고 악한 자들을 징계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보시기에 악하고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 덕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1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1-5)

창세기 37-50장까지는 요셉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38장과 39장의 요셉 이야기에 낀 유다 에피소드는 서사의 흐름을 깨트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도입’에서 말한 대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유다 이야기가 삽입된 이유는 유다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인 메시아가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큰 민족으로 만드시는지 알게 하시고, 유다 이야기를 통해 메시아의 혈통을 어떻게 선택하시고 지키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후에’라고 요셉을 팔아버린 후에, 유다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합니다. 잠시, 시간 흐름을 정리해 보면, 이것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이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사건은 요셉의 나이 17세와 30세(41:46) 사이에 발생했으니, 적어도 22년의 긴 시간 간격이 존재합니다. 아둘람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20킬로미터 거리며, 유다는 그곳으로 이사해 20년 넘게 거주합니다.

유다가 정착한 속은 팔레스타인 중앙 고원지대에 있는 ‘아둘람’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으로 이주한 이유는 그곳에 그의 친구 ‘히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라’를 ‘아둘람’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은, 그가 자유인이며 그 지역에서 명망 있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유다가 ‘떠나 내려가서’란 가나안 원주민처럼 세속화되어 가는 의미입니다.

유다는 그곳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맞아서 가정을 이룹니다. 그는 아브라함 가문에서 금지된 결혼 대상인 가나안 여인과 결혼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통제권을 벗어난 일입니다. 디나 사건 때 디나를 적극 보호하지 않아 아들들의 불만과 원성을 산 후, 야곱이 자녀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듯합니다. 유다의 장인 이름만 언급되고(수아) 아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데, 요셉 이야기에서는 아내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입니다(46장).

결과적으로 그는 엘, 오난, 셀라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닌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지역에서 유다의 결혼 생활은 문제가 없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수난(6-11)

미숙함과 어리석음에도 불구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 되게 하시는 장면들을 보면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는 다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구나라고 착각하며 죄에 대한 경계심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6-11)

세월이 훌쩍 흘러서 유다는 장남 엘이 성장하여 며느리를 맞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말’인데, 마찬가지로 가나안 여인이 분명합니다. 유다가 며느리를 선택하는 모습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종을 보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버린 채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고, 자기 아들도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게 하고 있습니다.

(1) 큰 아들 엘의 사망(6-7)

평안하게 잘 살아가면 유다에게 갑작스런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장차 엘이 결혼 후 죄를 범해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 죽은 것입니다. 아마 다말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간통을 저질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은 심각한 범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엘의 일차적 잘못은 다말을 통해 씨의 약속인 후손을 얻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2) 둘째 아들 오난의 사망(8-10)

장남이 죽자 유다는 당시 관례대로 차남 ‘오난’이 그 의무를 다하도록 형수와 결혼을 시킵니다. 계대결혼은 고대 근동에서 보편적인 관행이었으며, 그것은 형제들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상태로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면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재산을 상속 받을 수도 없습니다. 죽은 자의 형제들이 후손이 이어질 수 있도록 의미를 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대사회의 관습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가르치는 책임입니다(신 25:5-10). 이 제도가 실현되는 장면은 룻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난’은 다말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게 되면, 자신의 후손이 될 수 없고 장자인 형의 재산이 모두 그 아이에게 상속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자신이 보호해야 하기에,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자신에게 상속권이 돌아와 더 많은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때문에 다말의 비참한 형편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오난’은 씨를 보존하고 가족에 과부가 된 여인을 보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형수와의 잠자리에서 땅에 사정을 합니다. 당시 관례와 율법을 기준으로 볼 때, 오난의 행위는 하나님의 씨 보존 명령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입니다. 따라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오난도 하나님께 중벌을 받아 죽습니다.

(3) 다말에게 수절을 원함(11)

유다에게는 셋째 아들 셀라가 남았습니다. 셀라도 결혼이 가능한 연령으로 성장했음이 분명합니다(14). 그러나 유다는 셀라도 그 형들과 같이 죽을까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그를 불길한 며느리 다말에게 주지 않습니다(11). 유다는 마지막 남은 아들을 보존하여 대를 이으려 하고 다말도 같은 목적을 지녔으나, 두 사람의 계획은 전혀 다릅니다.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떠난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개했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마치 다말 때문에 죽은 것처럼 생각하여 셋째 아들 셀라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유다는 마지막 남은 셋째를 보전하여 대를 이르려고 하는 행동이지만, 궁극적으로 야곱과 유다로 이어지는 혈통을 통해 메시아를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결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다를 속여 후대를 이으려는 다말(12-2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롭고 용감한 행동을 통해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과 어리석음에도, 이 세상에 불의함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일하시는 분입니다.

12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12-23)

본문에서는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서 쌍둥이를 낳은 충격적인 장면을 듣게됩니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벌을 내리려 함입니다. 

(1) 유다를 속인 다말의 위장술(12-19)

속임수가 계속됩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이어서 라반이 야곱을 속였고,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속였습니다. 이제 유다의 며느리가 유다를 속입니다. 속인 자가 속임을 당하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섭리적으로 계속 작동됩니다.

세 가지 사기극에서 모두 염소와 옷이 위장술에 사용됩니다. 얼마 후 유다는 아내를 잃습니다. 그 후 홀로 된 유다는 양털 깎기 시즌을 맞아 친구 ‘히라’와 함께 축제 기간에 맞추어 북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딤나로 올라갑니다(참조. 31:19).

다말에게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13). 다말은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다말은 과부 옷을 창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얼굴을 가립니다(참조. 잠 7:10 ‘기생[창녀]의 옷’). 다말의 입장에서 막내아들과 계대결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후의 수단은 시아버지를 통해 직접 씨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근동 국가(특히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에서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대를 잇는 수단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었습니다(신 25:5-10; 레 25:48-29:).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던 그녀는 금지된 선을 넘기로 결심합니다.

유다는 변장한 다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가 왜 쉽게 창녀의 품에 안기려 했는지는 아내의 죽음 이후 홀로된 그의 처지에서 유추됩니다. 그러나 그는 첫눈에 반해 가나안 여인과 성급히 결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절제와 인내심이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수중에 충분한 화대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화대로 염소 새끼를 후불 지급하겠다고 제안하고, 다말은 담보물로 유다의 개인 도장과 도장에 달린 끈, 그리고 그의 지팡이를 요구합니다.

당시 자유인 신분인 성인 남자들의 도장은, 굴려서 진흙에 찍는 원통형으로, 돌이나 금속으로 만들어 중간에 끈을 달아 놓았습니다. 권위의 상징인 짚고 다니던 지팡이는 특수 제작되었으며, 손잡이의 장식 부분에 소유권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다와 다말은 관계를 맺었고, 그로 인해 다말은 임신에 성공했습니다. 담보물을 챙긴 다말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과부의 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2) 담보물을 증표로 간직한 다말(20-23)

유다의 친구 아둘람 사람은 히라가 분명합니다. 유다는 그에게 염소 새끼를 보내 화대를 지급하고 그 창녀에게서 도장과 지팡이를 찾아오려 합니다. 히라는 딤나 근처의 에나임으로 올라가서 그녀를 수소문해 찾지만 실패합니다.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에나임 길거리의 ‘창녀’를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 ‘창녀’라는 명칭은 15절에서 언급된 ‘창녀’와 다른 ‘신전 창녀’를 의미합니다(신 23:17-18). 최근 다수의 학자는 신전 주변에 창녀들이 활동했고 이들이 ‘신전 창녀’라 불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창녀들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신전에 서원한 뒤 바쳤습니다. 이것이 옳다면, 그런 창녀들을 ‘일반 창녀’와 ‘신전 창녀’로 교호적으로 부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히라’는 창녀 수색에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유다는 그 일로 인해 자신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색을 단념합니다(23). 아마도 귀중한 도장과 지팡이를 함부로 무명의 창녀에게 담보물로 준 것은 바보 같은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창녀에게 쉽게 넘어간 유다의 성적인 문란은 이후에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도망가는 요셉과 대조를 이룹니다.

또한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관계를 맺고 아들한테 되었다는 것을 매우 비윤리적이고 부끄러운 이야기로 들립니다. 단순히 이 이야기의 초점은 단순히 얼마나 문란하고 비윤리적인지를 드러내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타락한 존재로 그리지만, 다말은 의로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가 오는 길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다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를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쌍둥이를 출산한 다말(24-30)

하나님 나라는 경건하고 선한 사람들만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허물없고 죄 없는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유다와 같은 자들, 요셉의 형들과 같은 자들,다말과 같은 이들을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로 인해 들어오게 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방 여인 다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을 이는 영광스러운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24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7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24-30)

하나님 나라를 세상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인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을 잡았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1) 다말의 잉태한 소식(24-26)

이 사건이 있는지, 석 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말의 임신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결과임이 분명했습니다. 오경의 율법 전에도 이러한 행음은 고대 근동 전역에서 사형으로 다스려졌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 화형에 처하라 지시했습니다(참조. 레20:14; 21:19; 수 7:25-26). 다말에 대한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다말의 악행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정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결정적인 반전의 물표를 꺼냅니다. 유다가 맡긴 담보물입니다.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즉시 다말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녀의 정당성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막내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은 것은 당시 관례로 위법적이고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말이 의로운 이유는 그녀는 과부로 있으면서 자신의 동족들과 다시 결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목숨을 걸고 후손을 이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다말은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으려 했습니까? 다말은 유다가 마땅히 보고 깨달아야 할 여호와의 메시지를 보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남편 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뿐 아니라 악에 대해 심판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죽은 오난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를 거부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말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고, 이 씨에 소망을 두고 붙들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악 때문에 자신들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 씨를 보호하기 위해 의로운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말의 행동이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비윤리적이고 문란하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말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호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말은 며느리로서 지위와 유다의 후손들의 어머니로부터의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서 다말이 메시아의 혈통 안에 있는 어머니들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쌍둥이 탄생(27-30)

하나님께서는 다말에게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먼저 나오던 아이는 머리가 아닌 손부터 나왔습니다. 산파는 재빨리 홍색 실을 그 손에 매어 표시했습니다. 장-차남의 순서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손을 다시 자궁 속으로 넣었습니다. 아우가 먼저 밀고 나왔는데, 산파는 밀치고 터뜨리며 나온 그 아이를 ‘터뜨림’을 뜻하는 ‘베레스’라 불렀습니다. 이어서 그의 형이 손에 홍색 실을 매단 채 나왔습니다. 그에게는 ‘세라’라는 이름이 부여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두르러지는 장-차남 역전 주제가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세라와 베레스, 르우벤과 요셉,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도와 관례, 관습을 초월해 주권적인 결정으로 장자를 선택하시며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가장 지저분해 보이는 유다의 혈통에서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하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가 완성됩니다.


유다와 다말의 행동 모두 현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업을 잇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시대에는 수치와 모욕과 죽음까지 불사한 다말의 단호한 결단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다말은 다윗 왕과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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