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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2-01)


주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스바냐 2장 4-15절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고, 남들로부터 존경만 받으려 합니다. 항상 일들은 완벽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많은 부담을 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교만으로 인해 아픔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자신이 이룬 것으로 교만스럽게 행동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교만은 천사를 마귀가 되게 하지만,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하기 전에 유다를 둘러싸고 괴롭혔던 주변국들을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 대적들은 차례로 서쪽 블레셋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모압과 암몬, 남쪽의 구스와 북쪽의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변국을 먼저 심판하심으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훗날 이 땅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서쪽 블레셋 심판(4-7)

종종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잘못된 일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24장 1-2절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4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그론은 뽑히리라 5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6해변은 풀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7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4-7)

‘이방인’ 또는 ‘이주민’이라는 뜻을 가진 ‘블레셋’은 그 의미대로 가나안 토착민이 아닙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로, 영토 분쟁뿐 아니라 다양한 문제로 반복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구약시대에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민족입니다. 사사시대 후기, 그리고 이스라엘 왕정 초기에 블레셋은 가나안 땅에서 최강자의 위치에 군림했습니다.

스바냐는 먼저 유다 서편의 블레셋을 향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웃시야와 히스기야 왕에게 정복된 갓을 제외한(왕하 18:8; 대하26:6)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을 향한 심판이 선언됩니다. 가사는 버림받고,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고, 에그론은 뿌리째 뽑힐 것입니다. 아스돗은 예상치 못하게 대낮에 침략을 받아 무너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지역들을 멸하시고 주민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그곳들은 머지않아 양 떼를 먹이기에 적합한 목초지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초지를 유다 족속의 남은 자들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을 돌보시고 결박과 고난에서 해방시킬 때, 그들은 블레셋의 목초지에서 양 떼를 돌보고, 새로운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온 당신의 백성을 다시금 긍휼히 여기셔서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고, 집과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동쪽 모압과 암몬 심판(8-11)

누구든지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그 교만함으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주변 사람들도 그동안 당한 것처럼 교만한 사람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특히 곤경에 처한 자를 조롱하고 이용하려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분명합니다. 주변에 연약한 자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8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10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교만하여졌음이라 11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8-11)

모압과 암몬은 부녀지간의 근친상간을 통해 생성된 민족들입니다(창 19:30-38).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한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모압 왕 발락은 인정을 베풀지 않았고, 발람을 시켜 그들을 저주하려 했습니다(민 22:1-41: 23:1-30: 24:1-25: 신 2:8-9).

암몬 족속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지고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방자하게 행했습니다(10).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교만하고 악한 민족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외쳤습니다(렘 49:1-6; 겔 25:2-10). 그들은 그 조상 롯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영원히 황폐해져, 소금 구덩이로 남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소금’은 메마름과 멸망의 상징입니다(욥 39:6).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조롱하며 괴롭힌 모압과 암몬은 영원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반면 유다의 남은 자들은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고,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과 함께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를 경배할 것입니다.

 

남쪽 구스와 북쪽 앗수르 심판(12-15)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늘날 성도들을 대적한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한결같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만 믿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한 행동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자랑하기 좋아하고 교만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실하고 겸손해야겠습니다.

12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13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14각종 짐승이 그 가운데에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12-15)

유다 남쪽의 구스는 나일강의 제1폭포 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BC 720~654년에 애굽을 다스렸습니다(사 11:11; 18:1). 구스는 주변 나라들에 상당한 힘을 행사하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심판의 때 구스 사람들도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할 때 성취되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메시지는 당시 초강대국 앗수르에게 향합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흥망성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나라입니다. BC 1350년경 앗수르 발리트 1세에 의해 건설된 앗수르는 헷 족속의 나라인 히타이트 제국과 오랫동안 격전을 벌였습니다. BC 884-859년에 앗수르 바니팔 2세의 광범위한 정복 전쟁과 함께 대제국이 된 앗수르는 지중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앗수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그들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디글랏빌레셀 3세(재위 기간: BC 745-727년) 때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앗수르 왕 불’로 불리는데(왕하 15:19), 남유다의 12대 왕 아하스 때 유다를 돕기 위해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을 공격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습니다(BC 733-732년; 왕하 15:29;16:9). 몇 년이 지나지 않은 BC 722년에 사르곤 2세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왕하 17:24). 이외에도 열왕기하 19:35 이사야 36~37장은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멸망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앗수르는 상당한 힘과 위용을 과시하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바냐는 머지않아 여호와의 심판으로 앗수르가 파멸될 것을 예언합니다. 또한 수도 니느웨는 사막같이 메마르게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당시 앗수르가 훌륭한 관개시설을 자랑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수도가 장차 사막같이 메마르게 된다는 예언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한때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그 성은 각종 동물의 서식지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를 하나님이 시온을 심판하고 가르치시기 위한 ‘몽둥이’로 묘사했습니다(사 10:24). 앗수르의 침략은 하나님 백성의 죄를 깨우쳐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앗수르가 방종한 데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오만하고 자만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보다, 오히려 대제국 건설이라는 야망을 성취하기에 급급해(사 37:21-29) 열방을 무참히 짓밟고 파괴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쪽 유다는 앗수르에 많은 조공을 지속적으로 바쳤고, 백성은 착취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앗수르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근본 원인입니다. 한때 기쁜 성이라, 염려 없는 성이라 자만하던 그 성읍은 지나가는 자들의 비웃음을 사는 황폐한 무더기로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번성하는 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있는 힘을 가지고 교만하게 될 때, 이스라엘 주변국처럼, 모두 멸망당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허락해 주신 능력으로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삶입니다. 불신자들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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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1-02)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함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


예부터 우리나라는 이름에 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에는 반드시 뜻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름의 뜻을 따라서 가치 있는 사는 사람들을 ‘이름 값하는 사람’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뜻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본 책의 ‘스바냐’라는 뜻은 ‘하나님이 숨겨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뜻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숨기시고 보호하시길 원하십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날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 날에 범죄한 유다에게 임할 심판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여호와께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절대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회개의 자리로 모이라고 하십니다.

 

행하실 큰 날의 심판의 묘사(14-16)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날은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의인에게는 기쁨의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심판을 없는 것처럼 죄악은 만연해져 갑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하나님처럼 무시하며 말하지만,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노아의 홍수의 심판처럼 있을 것입니다.

14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14-16)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출구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받으며 소경처럼 헤매지만 피할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께서 비인격적이고 잔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해서 범죄한 것에 대한 보응입니다.

(1) 여호와의 큰 날(14)

본문 14-18절은 여호와의 날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로 말하는데, 그날 유다 백성에게 나타날 크고 무서운 결과들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여호와의 큰 날이 BC 586년 바벨론 군대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그날은 빠른 시일 내에 임할 것이고, 누구고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사의 슬피 우는 소리’는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군대의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유다 온 땅이 진도하고, 유다의 성읍과 주민은 삼킴을 당할 것입니다(렘 8:16-17).

(2) 환난과 고통의 날(15-16)

‘여호와의 큰 날’은 분노, 환난, 고통, 황폐, 패망의 날, 어둠, 구름, 흑암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요엘 2장 2절은 그날을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로 묘사합니다(암 5:18,20). 이는 그날이 기쁨, 소망, 생명의 빛이 전혀 없는 절망의 날임을 암시합니다. 그날에 여호와의 분노를 머금은 적국은 나팔을 불며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치고, 높은 망대를 허물어뜨립니다.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고,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렘 7:34).

스바냐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지만,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14a)라고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날을 묘사하면서 군인, 나팔, 성읍, 망대, 피, 시체, 불 등으로 묘사해서 전쟁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는 심판의 날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비참하고 무섭게 임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15)라고 기쁨의 날이 아닌 절망과 고통, 흑암과 완전한 멸망의 말이 될 것입니다.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하셨다면 이제는 불로 세상과 사람들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도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살전 5:2). 준비되어 있지 않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과 같이 부끄러운 만남이 아니라 주님을 맞을 준비되어 있는 지혜로운 신부가 되길 바랍니다. 그 심판의 날을 스스로 피할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결과(17-18)

세상의 은과 금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우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재산도, 업적도,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의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에 빼앗긴 마음을 질투하신다고 하시는데, 당신은 계속 고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길에서 떠나시길 바랍니다.

17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17-18)

여호와께서는 그 심판의 날에 유다 백성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어둠 속을 헤매게 하실 것입니다. 맹인같이 행한다는 표현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심판받아야 하는 무기력함과 암담함을 내포합니다. 이처럼 참담한 심판이 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범죄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렘 7:24).

유다 백성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출 19:5-6). 그러나 악한 꾀와 완악한 마음을 따라 범죄하고 여호와께 등을 돌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이자 파괴자가 되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피는 먼저와 같이, 그들의 살은 분토와 같이 사방에 흩날릴 것입니다. 백성이 믿고 의지하던 황금과 재력뿐 아니라 추구하던 명성과 권력도 그들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질토하시는 여호와께서, 우상을 섬기고 범죄를 자행한 백성을 놀랍게 멸절하실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파멸은 종말에 임할 우주적 심판을 아울러 예견합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1-3)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1-3)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백성들로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두려움을 통해 회개하고 순종에 이르길 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우상과 무관심을 버리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에서 숨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수치를 모르는 백성(1-2)

스바냐는 이제 내용을 바꾸어 유다가 재앙에서 벗어나리라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간절한 권고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모일 것’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이라 뜻은 ‘훈련받지 않은’ 또는 ‘버림받은’이란 뜻입니다. 3:5에서 ‘수치를 모른다’는 표현은 ‘불의하다’와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그들은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악을 자행함으로써 영적 수치심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 앞에 모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서 심판의 뜻을 돌이키도록 은혜를 간구하라는 것입니다(욜 2:16).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기 전,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진심으로 악에서 돌아서서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2)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3)

여호와이 말씀을 따르고, 참된 회개를 이루는 자는 세 가지 본질적 요소, 즉 여호와를 찾음, 겸손, 공의를 이룹니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돌이킴’ 또는 ‘마음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함을 보여 줍니다.

먼저, 여호와를 찾는 것은 언약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내포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구현하는 제자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영적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언약 백성이 추구해야 할 영적 가치의 근본을 겸손에서 찾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겸손을 구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겸손하게 의지하는’ 영적 자세뿐 아니라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돌이킴을 포함합니다. 끝으로, 성도는 공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공의’는 ‘흠 없는 행동과 정직’, ‘의’, ‘(재판관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 ‘의와 경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의’,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신뢰할만한 진리’, ‘법률적 요청’, ‘사회정의’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많은 경우 정의와 공의는 함께 등장하여, 어떤 존재의 행동 양식이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올바름, 공평함, 정직함, 신실함, 죄 없는 상태를 내포하는데,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1)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식(시 97:2; 98:9; 사 32:16~17), (2) 세상 왕과 지도자들의 통치 원리(삼하 8:15; 왕상 10:9; 시 72:1~4), (3) 하나님 백성의 의로운 삶의 양식(사 5:7; 겔 18:5~9;암 5:24).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공의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성품)과 통치 방식일 뿐 아니라 언약 백성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구현해야 할 경건한 삶의 핵심가치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서 ‘공의’는 우상과 죄악을 벗어 버리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 관계를 견지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의 임재와 지혜를 구할 때, 삶을 통해 구현됩니다(사 61:1-3).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숨김을 얻고(스바냐의 이름의 의미), 구원, 인자, 복을 누릴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에서 안전하게 덮어주길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죄악으로 만연한 땅에서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겸손히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여호와께 돌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다시 부흥의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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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01)


미가서 서론


미가서는 12소선지서 중 하나로, 몇몇 구절들로 인해 오늘날 성도들에게 잘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5:2)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장 6절에 약간 변형되어 인용되어 성탄 메시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이 말씀 외에도 찬양의 가사로 사용된 6장 6-8절도 친숙한 말씀입니다.

 

기록자

◇ ‘미가'는 ‘미가야’의 약자입니다. 예레미야 26장 18절에는 완전한 이름인 ‘미가야’가 나옵니다. 이 이름의 원래의 형태는 ‘미가야후’인데, 이것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나 주와 관련된 이름들은 그 선지자의 태도와 충성을 나타내는, 미가의 경우에는 거짓 선지자와 죄인들에 대한 도전의 표시였습니다.

(1) 외적 증거 : 미가서에 대한 다양하고 심층적인 연구 결과로 미가서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미가 선지자를 저자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2) 내적 증거 : 본문에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1)이라고 선언이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기록자 미가에 대한 정보가 역사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단지 모레셋 출신이라는 것, 그가 활동한 시기가 본문에 소개된 데로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였다는 것, 그리고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역사적 배경

미가의 활동 시기는 본문을 근거로 역사를 거슬러 산출해보면, 대략 BC 735에서 700년 사이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와 아모스(웃시야/여로보암 2세)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주전 8세기로 올라갑니다. 앗수르 제국이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지중해 국가들의 토대와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는, 대 변동과 위기의 시기였습니다.

앗수르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미가가 활동하고 있는 유다도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19장에서 서술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앗시리아의 공격은 예루살렘 멸망을 전망하는 본문(3:9-12)과 미가의 고향에 대한 위협(1:8-16)에 직간접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산헤립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열왕기하 18:33)라고 도발했는데, 이에 대해 미가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가서 7:18)라고 강하게 대답한 것처럼 울려 퍼집니다.

암울하고 불안한 역사적 상황은 이미 황폐해진 사마리아와 유다 곳곳의 참상과 함께 미가서 곳곳에 배어 있는 슬픔과 고통의 부르짖음의 근거가 됩니다.

 

미가서 구성

◇ 미가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미가서 전문에서 ‘들으라’는 단어는 두 번 나옵니다(1:2; 6:1). 그것을 기준해서 두 부분으로 1-5장과 6-7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 미가서 1-5장 : ‘들으라’는 명령과 함께, 여호와께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증인으로 등장하며
2) 미가서 6-7장 : ‘들으라’는 또 다른 명령과 함께, 자기 백성에 대해, 이어서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변론을 요구한다.   

 

미가서 메시지

(1) 사회 지도층에 대한 고발

미가서에서 나타난 메시지의 특징 중 가장 주장된 메시지는 사회 지도층에 대한 고발입니다. 미가는 국가의 부패를 사회 종교지도자들의 탓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3장에 나타난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그리고  7장의 ‘지도자와 재판관 그리스도 권세자’의 타락한 모습은 오늘의 현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2)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을 예언

이러한 타락한 모습은 하나님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미가서 1:6;이사야서 7:8-9;아모스서 3:12-14 참고). 그러나 미가는, 자기 시대에 예루살렘이 안전할 것을 약속했던 이사야와는 달리,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3:12)과 백성들이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1:16).

(3) 회복과 메시야의 평화의 통치

그럼에도 미가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소수, 또는 그의 백성 가운데 ‘남은 자’를 일으키시리라고 예언합니다(2:12-13; 5:7-8). 미가와 이사야는 사실상 같은 용어를 가지고 여호와의 평화의 우주적 통치를 드러낸다(4:1-4;이사야서 2:1-4). 미가는 이런 메시야적 희망에다 베들레헴에서 나올 하나님의 백성의 통치자에 관한 예언을 추가합니다(5:2-5; 또한 마 2:6; 요 7:42 참고). 미가서의 절정과 결론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는 것입니다(7:18-20).

 

미가서의 구조

1. 미가서의 표제(1:1)

2. 이스라엘과 유다에 임박한 심판(1:2-16)

(1)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킴(1:2)
(2) 여호와의 도래에 대한 선포와 묘사(1:3,4)
(3) 유다의 죄를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죄(1:5)
(4) 무서운 결과(1:6,7)
(5)심판에 대한 미가의 환상(1:8-16)

3. 악인에 대한 심판(2:1-3:12)

(1) 땅을 빼앗는 압제자에 임하는 재난(2:1-5)
(2) 설교하는 도적들(거짓 선지자)(2:6-13)

① 참 선지자의 설교를 방해함(2:6)
② 여호와의 신이 편협하다고 거짓 설교함(2:7)
③ 불안한 생활 문제 (2:8-13)

(3)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3:1-7)

① 미가의 답변(3:1)
② 사악한 압제자들(3:2,3)
③ 여호와께서 듣지 아니하심(3:4)
④ 더욱 악한 거짓 선지자들(3:5)
⑤ 불신당함(3:6,7)

(4)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미가의 자각(3:8)
(5) 죄악은 수치임(3:9-12)

4. 오시는 메시야를 통한 회상적 환상(4:1-5:15)

(1) 예루살렘의 최후 승리(4:1-5:1)

① 참 신앙의 부흥과 여호와께로 돌이킴(4:1,2)
② 평화와 번영(4:3-5)
③ 포로에서의 귀환 약속(4:6,7)
④ 예루살렘이 더 큰 영광과 능력으로 회복됨(4:8)
⑤ 고난 후의 구속(4:9,10)
⑥ 원수들이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변호를 보게 됨(4:11,12)
⑦ 포위 당한 후의 승리(4:13-5:1)

(2) 오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과 야곱의 남은 자의 회복(5:2-15)

①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메시야(5:2,3)
② 메시야의 은혜로운 통치(5:4-7)
③ 위대한 정복자가 될 영적 이스라엘(5:8,9)
④ 믿고 의지하던 것을 빼앗긴 영적 이스라엘(5:10-15)

5. 여호와의 논쟁(6:1-7:20)

(1) 여호와의 첫 번째 쟁변(6:1-5)
(2) 이스라엘의 첫 번째 답변(6:6-8)
(3) 여호와의 두 번째 쟁변(6:9-16)
(4) 이스라엘의 두번째 답변(7:1-10)
(5)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7:11-13)
(6) 이스라엘에 대한 마지막 탄원(7:14-17)
(7) 여호와의 은혜의 승리(7:18-20)

① 용서하시는 여호와(7:18)
② 구속하시는 여호와(7:19)
③ 신실하신 여호와(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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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4-01)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

요나서 4장 1-11절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은 회심이 아니라 단지 신(神)을 바꾼 개종일 뿐입니다. 종교란 것은 자신이 주인이지만, 회심은 하나님께서 주인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회심이 아니고 개종일 뿐입니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반면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시자 이에 분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바로 꾸짖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시며 왜 하나님께서 큰 성읍 니느웨의 멸망을 두고 보지 않으시고 아껴 사랑하셨는지, 멸망에서 생명을 얻게 하셨는지 깨닫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모두를 아끼시는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기까지 화가 난 요나(1-4)

우리의 뜻에 집중하지 말고,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전념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정죄하고 미워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혹시 요나와 같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1-4)

요나서 4장은 1-3장에 덧붙인 부록과 같은 장이면서도 앞에서 알지 못했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세심히 봐야 합니다. 이미 3장에서 니느웨에 대한 결말, 즉 하나님이 니느웨의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신 일이 다 기록되었기 때문에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나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4장이 있음으로써 니느웨의 운명에 대한 요나의 본심, 그리고 요나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요나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 일에 화가 났습니다(1). “매우 싫어하고”란 어구는 문자적으로 ‘큰 불쾌함으로 불쾌하게 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때 불쾌함으로 번역되는 ‘라아’는 3:10에서 니느웨 백성의 “악”과 하나님이 내리려 하셨던 “재앙”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상호연관성을 보여줍니다. 니느웨도 ‘라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도 ‘라아’를 내리지 않았지만, 이제 그 ‘라아’는 요나의 몫이 된 셈입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의 심판을 외쳤지만 내심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큰 불만을 품은 요나는 기도를 통해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2)라며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심판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을 때 주된 목적은 심판 선포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나는 니느웨가 진심으로 회개할 경우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이미 예상했고 하나님께도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둘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미래에 대해 요나에게 알리지 않으셨으나 요나는 그가 지대한 은혜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더디 내고 마음을 바꿔 재앙도 거두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혹시나 했던 일이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벌어졌으므로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여기서 요나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등의 속성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했을 때, 그들을 심판하신 후 다시 십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출 34:-7). 요나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며 비꼬듯 불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지금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바닷속에 빠졌을 때,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었을 때 생명을 얻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참으심 덕분이란 점입니다. 몹시 화난 요나는 차라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죽는 게 낫소이다”라며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어 하나님께 생명을 구했던 요나(2:2,7-9)가 이제 다시 죽기를 요청하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꾸짖지 않으시고 대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옳으냐”란 말은 ‘마땅하냐’, ‘잘한 것이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화와 불만에 진노하실 수 있으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본심(5-7)

율법적 사고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경건한 자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불신자를 정죄한 적은 없는지 돌이켜봅시다. 우리는 편협한 신앙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5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5-7)

요나는 여전히 화가 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니느웨 성에 어떤 결과가 임할지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그는 성을 떠나 동편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더위를 피해 그 아래에 앉았습니다.

한편,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던 하나님(1:17)은 이번에는 그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박넝쿨은 요나에게 그늘이 되어주어 그의 머리를 내리쬐는 햇볕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예기치 못한 박넝쿨의 덕을 보고 크게(문자적으로 ‘큰 기쁨으로’) 기뻐했습니다. 요나가 뜨거운 햇볕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준 박넝쿨을 크게 기뻐하는 모습은 1절에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신 일에 요나가 크게 불쾌해하던 모습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죽기까지 화난 요나(8-9)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앞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널쿨 그늘을 주셨다가 거두심으로 니느웨 주민들과 가축들까지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람과 구원을 기억할 때, 우리도 생명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8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8-9)

박넝쿨이 주는 시원함에 기뻐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강타해 다 갉아 먹어버리자 요나는 더 이상 그늘진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해가 뜨고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뜨거운 동풍이 불어와 요나의 머리를 강타하자 요나는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요나는 다시금 죽기를 구하며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요나는 원하지 않는 곳에 심판을 선포하러 가기보다는 죽기를 바랐고, 자기가 바란 대로 심판이 이르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죽기를 바랐고, 이제 자기가 원했던 박넝쿨이 없어져 고통을 당하자 죽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는 요나의 말은 죽을 만큼 괴롭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조종할 수 없는 일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네가 성내는 게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요나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외칩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10-11)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안에 요나의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힘을 다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명령으로 시작한 요나서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끝난다. 10-11절은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박넝쿨, 벌레, 동풍을 준비하신 이유와 니느웨를 멸망시킬 계획을 바꿔 살려주신 이유를 자명하게 알려준다.

불만과 화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비유로 들어 니느웨의 심판을 번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의중을 밝히십니다. 요나에게 있어 박넝쿨은 수고하여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있었다가 하룻밤에 시들어버린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박넝쿨은 요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요나도 그 박넝쿨에 관심을 두고 아꼈습니다. 그 박넝쿨이 계속 있어 자기에게 큰 기쁨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박넝쿨에 반해, 큰 성읍인 니느웨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오랜 세월 관심 있게 살피고 키우신 곳입니다. 이 도시에는 현재 오른쪽 왼쪽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이만 해도 12만 여 명이 될 정도로 많은 무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한 가축도 많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인이 경멸하는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께는 손수 창조하신 소중한 피조물이며 이스라엘과 매한가지로 그의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이 백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성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요나서는 이처럼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선포를 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 중간에 큰 바람(1:4), 큰 두려움(경외, 1:10, 16), 큰 물고기(1:17), 큰 성읍(3:2, 3), 큰 불쾌함(4:1), 큰 기쁨(4:6)의 ‘큰+명사’ 조합이 여덟 번 나와 총 열 번을 이룹니다. 이 모든 예는 각각의 양적 질적 크기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큰 성읍 니느웨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하심과 은혜입니다. 요나는 요나 자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해서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등한시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불순종을 심판하셨지만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고 그의 부당한 분노에도 그를 위해 여러 가지를 예비해주시는 등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해 품은 깊은 관심과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심판이 뜻이라면 이 땅에 과연 남을 사람이 있습니까?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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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3-01)


니느웨에 일어난 회개 운동

요나서 3장 1-10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순종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순종을 통해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려고 우리를 유혹해 불순종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순종 하나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순종을 통해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요나는 두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선포합니다. 니느웨 성은 이를 듣고 왕부터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기들이 지은 죄와 악한 일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의 참된 회개를 보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 성을 멸하려는 마음을 바꿔 그들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요나의 순종(1-3a)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잡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1-3a)

일부를 제외하면 두 번째 파견 보고는 첫 번째 파견보고를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합니다. 요나의 파견 목적이 니느웨의 심판임을 시사해주는 1:2의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가 탈락하고, 그 자리를 “내가 네게 명한 바”가 대신합니다. 상응해서 부정적 의미를 갖는 ‘그것을 거슬러 외쳐라’가 가치중립적인 ‘그것에게 외쳐라’로 바뀝니다. 무게중심이 악독으로 가득 찬 니느웨의 심판에서 요나에 의한 여호와의 명령 이행으로 옮겨집니다. 예언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참조. 렘 26:2) ‘내가 네게 명한 바를 외쳐라’와 같은 명령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나의 첫 번째 불순종과 관련된 언급입니다.

여호와는 요나의 불순종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확고한 의지 표명으로 이를 대신하십니다. 이 언급은 또 요나가 여전히 여호와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며, 4장에서 벌어질 충돌을 암시해줍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요나가 이번에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갑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요나(3b-4)

순종은 나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입니다. 순종은 우리를 살리시고 믿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3…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3b-4)

요나의 니느웨 선포가 간단하게 언급됩니다. 메시지보다 선포의 외적 환경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니느웨의 크기가 이중적으로 소개됩니다. ‘사흘 길’이라는 표현은 성을 가로질러 가는 데 사흘이 걸린다는 것인지, 성벽을 한 바퀴 도는 데 사흘이 걸린다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하룻길이 대략 30km이기에 사흘 길은 90km가 됩니다. 어떻게 이해하는 과장법에 속합니다. 최전성기의 니느웨 성벽 둘레는 대략 12.5km, 성의 길이와 폭은 평균적으로 대략 4.2km와 1.2km였습니다. “하나님 앞에”(문자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는 보통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최상급의 의미를 갖는 숙어입니다. 니느웨가 세상에서 가장 큰 성임을 이중으로 강조하면서 니느웨에 남다른 지위, 곧 대표성을 부여해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성읍 니느웨가 땅을 대표하는 세력이라면, 니느웨의 심판은 온 땅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됩니다. “하루 동안 다니며”는 ‘하룻길을 가서’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요나는 사흘 길의 성읍에 들어가 하룻길을 가서 외칩니다. 예언의 선포 장소는 보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문 앞이나 성전 앞이기에 굳이 성읍 가운데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흘 길’과 ‘하룻길’이 특별한 의도에서 사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오기는 했지만 큰 성읍 니느웨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다섯 단어로 된 짧은 문장에 불과합니다. ‘아직 사십 일이 [남았다].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멸망의 심판만 선포하지 않고 멸망의 시점까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요나의 메시지는 심판을 선포한 다른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구별됩니다. 즉, 메시지의 초점이 멸망의 심판보다 아직 남은 사십 일의 기간에 맞춰집니다. 직접 회개를 요청하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도 아닙니다. 5-9절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은 이 행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선포에 대한 니느웨의 응답: 전면적 회개(5-9)

회개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회개의 은혜는 겸손한 자들에게 임합니다. 왕은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왕은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우리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삶에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 참된 회개의 길로 갑시다.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3b-9)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에 즉시 반응합니다. 요나의 멸망 선포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읽어내고 긴박하게 움직입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면적인 회개운동에 나섭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5). 금식과 굵은 베옷은 회개의 외적 표지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믿고”는 여기를 제외하고 언제나 이스라엘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이방 선원들은 폭풍을 일으키고 통제하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요나가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막으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방인들이 요나를 통해 여호와를 알고 그분의 구원 능력을 경험합니다. 니느웨 주민들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이 왕궁에까지 미친다. “그 일” (문자적으로 ‘그 말’)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선포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니느웨 사람들을 움직였던 요나의 메시지가 왕에게 전해지자 왕도 즉시 반응합니다.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걸친 후에 잿더미 위에 앉습니다(6절). 백성은 베옷만 입는데, 왕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습니다. 심판 경고를 왕이 백성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보좌에서 내려와 잿더미 위에 앉는 행동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비합의 표현입니다. 먼저 자신을 낮춘 왕은 대신들과 함께 조서를 내립니다. 금식에 관한 조서는 세 개의 금령(7)과 세 개의 요청(8)으로 구성됩니다. 왕이 니느웨에 선포한 금식은 그 범위와 철저함에서 일반적인 금식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참여하고, 다들 맛을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 니느웨 성이 무너져 내리는 파멸적 재앙이기에 성안에 사는 사람이나 소나 양이나 예외 없이 금식해야 합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자료에 따르면 금식과 관련해 군사용 말과 나귀의 갈기나 꼬리를 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해야 할 것’ 세 가지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처음 둘은 애도 행위에 속하고, 세 번째는 회개의 본질적 지향점입니다. 외적 내적 행위는 삶의 공간에서 실천되는 구체적 결단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요나의 선포에 멸망의 원인(1:25)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왕은 내느웨의 폭력과 악행이 심판을 초래했음을 알고(참조. 1:7) 백성들에게 폭력과 악한 삶에서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9절은 왕이 조서를 내린 동기나 목적을 보여줍니다. 왕은 요나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보지만, 이를 되돌릴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멸망을 결정하신 분께서 뜻을 돌이키신다면 멸망을 피할 수도 있음을 압니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과 생존이 하나님께만 달렸음을 알고, 결정은 그분께 맡기고 그분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참조. 1:14). 하나님을 강제할 수 없지만, 니느웨의 참된 회개를 보시고 그분께서 뜻을 돌이켜 멸망하지 않게 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참조. 욘 2:14a)?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왕들에게 기대한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니느웨 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뜻을 돌이키심(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순종에도 크게 기뻐하시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순종의 시작은 하나님 약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마지막까지 기다리십니다. 속히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최선을 다하는 왕의 간절한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전심을 다한 실천적 희개에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들이 행한 것(마아세)’을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지(내리지) 않는 것으로 화답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자,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려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십니다. ‘그들의 길’을 수식하는 ‘악한’과 ‘재앙’의 히브리어는 ‘라아 ’로 동일합니다. 악의 열매가 재앙임을 시사해줍니다. 후반절은 문맥에 따른 차이를 제외하면 출애굽기 32:14에 일치합니다.

9-10절이 출애굽기 32장을 배경으로 한다면, 이스라엘과 니느웨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이들이 악에서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징벌 결정을 되돌리시고, 니느웨의 경우는 악에서 떠난 것을 보고 결정을 되돌리십니다. 회개의 자세와 준비에 있어 니느웨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순종의 기회입니다. 내 마음대로 순종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도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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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2-01)


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요나

요나서 2장 1-10절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방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나도 자신의 고집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인간은 애석하게도 자유를 잃고 고난을 당한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고난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내던져지지만, 그의 의도대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려 요나의 도주를 막으셨던 여호와께서 이번에는 ‘큰 물고기’를 준비해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가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 떨어지지만, 완전히 죽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그가 멀리하려 했던 여호와를 다시 만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요나(1)

믿음의 회복은 인생의 회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줄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벼랑 끝에서 우리를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먼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1)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 전통에 따라 1장 마지막에 자리한 1:17은 히브리어 성경의 전통에 따라 2장의 처음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요나는 이전에는 하나님을 떠나려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회피했습니다. 요나의 자리가 큰 폭풍으로 거의 부서지게 된 배에서 다시 잔잔해진 바다의 물고기 뱃속으로 바뀝니다. 배는 여호와를 피해 도주하는 요나가 선택한 수단이고, 물고기는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그분의 도구입니다. 요나의 자리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배에서 물고기 뱃속으로 옮겨지면서 요나도 바뀝니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며, 여호와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배에서는 끝까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맞서던 요나가 마침내 여호와를 바라봅니다. 여호와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하려던 요나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기도하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완악함과 불순종의 요나가 여호와의 은혜로 기도와 순종의 요나로 바뀌고, 자신의 생각과 신학으로 여호와를 통제하려 했던 요나가 그분의 주권과 구원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요나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기도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시작하는 요나(2-9)

하나님께서는 서원에 따라 드리는 제사보다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바라셨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는 수많은 생각이 밀려옵니다. 수많은 방법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생각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놀라운 응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2-9)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도 문제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생각 속에서 우리가 은혜는 좋아하면서 감사에는 인색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1)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2-4)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요나는 기도했습니다. 2절은 요나의 전체 기도의 요약이자 핵심입니다.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위협 아래 놓였던 요나는 응답하시는 여호와를 경험합니다. 겁에 질린 선원들의 부르짖음에 침묵하는 이방신들(1:4)과 달리,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께 부르짖는 선원들의 간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신 것처럼 (1:14-15),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1:9) 분께서는 당신을 찾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이시고 응답하십니다.

“스올의 뱃속”은 요나가 이미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시사해줍니다(참조 사 38:10). 요나가 처한 고난은 용기 내거나 애써서 벗어날 수 있는 고난이 아닙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멸망으로 끝나는 고난입니다.

“부르짖었더니”의 동사 ‘샤와’는 도움을 구하는 외침을 가리킵니다(시 5:2; 18:6; 22:24; 30:2 등). 요나는 자신이 받는 고난이 여호와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요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은 곳에 던지셨을 뿐만 아니라, 큰물에 에워싸인 요나 위로 파도와 물결이 넘치게 하셨습니다(3). 자신을 던지는 주체가 여호와임을, 더 나아가 바다에 빠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파도와 큰 물결”마저 그분께서 보내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1:15에 따르면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렇다고 선원들만의 결정은 아닙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던지자 여호와의 “큰 바람”이 일으킨 “큰 폭풍”으로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음은 저들의 결정이 여호와의 뜻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요나의 주장이 책임 전가처럼 보이지만 이는 피상적 이해로, 현재 문맥에서는 기도의 동기로 작용합니다. 여호와께서 고난의 원인자이시기에 여호와만이 요나를 도울 수 있고, 그래서 요나는 여호와께 도움을 청한다. “깊음”(출 15:5;시 68:22: 69:2,15; 88:6; 107:24)과 “바다”는 생명과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으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여호와만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4절은 고난 중에 있던 요나의 이전 기도의 인용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목전, 곧 그분 성전에서 쫓겨났지만, 구원의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전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장소이라는 점에서 “주의 성전”과 “주의 목전”(문자적으로, ‘당신의 눈앞’)은 동격입니다. 3절의 ‘여호와께서 던지심’과 내용상 일치하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쫓겨남’은 고난으로 귀결되고, 2절의 ‘여호와께 부르짖음’과 내용상 일치하는 ‘성전을 바라봄’은 구원과 회복(고난에서 벗어남)으로 구체화 됩니다. 1:3에 따르면 요나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을 시도합니다.

(2)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5-7)

회고적 인용 다음에 나오는 5-6절은 표현과 내용에서 3절에 가깝습니다. 장면이 다시 바다로 바뀌고, 요나의 고난이 깊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물은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바다의 풀은 머리를 휘감았고, 심연이 에워쌉니다(5).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빗장이 걸린 지하세계에 갇힙니다(6). 고대 우주관에 따르면 큰 산은 바다 밑바닥까지 그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지하세계는 대문과 빗장이 갖춰진 성곽과 같아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1장의 주요 모티브인 ‘바다’와 ‘내려감’이 2장에서도 계속 사용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멀어짐’과 관련한 요나의 도피는 수평적이며 동시에 수직적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동쪽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 반대편인 서쪽 땅 끝의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피해 거듭 아래로 내려갑니다. 욥바로 ‘내려간’ 요나는 배로 ‘내려가’(1:3) 그 밑창으로 ‘내려간다’입니다(15).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허우적거리다가 바다 밑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빗장이 쳐진 지하세계에 갇힙니다(6a). ‘내려감’이 죽음과 심판의 길이라면 ‘올라감’은 생명과 구원의 길입니다. 죽음이 이미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을 때 여호와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요나를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십니다(6).

7절은 2절과 4절의 중심 단어인 ‘기도’와 ‘성전’을 받아 요나의 입장에서 구원 경험을 기술합니다. 생명력이 거의 사라졌을 때 요나는 여호와를 기억합니다. ‘여호와를 기억하다’는 신뢰와 고백의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기억이 요나가 여호와께로 나가도록 이끕니다. 요나의 기도가 여호와께,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다다릅니다.

(3)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8-9)

8절의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은 감사 예배에 참여한 자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입니다. 요나의 말은 권면보다는 경고 또는 고발에 가깝습니다.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비판은 예언자들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지만, 요나의 고난과 아무 관련이 없기에 그의 고발성 경고는 감사기도의 문맥에서 매우 돌출적입니다. 더 넓은 문맥을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을 비판하는 말이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이방인과 다르지 않기에 이방인들에게로 확장이 가능합니다. 여호와께 맞서다가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요나의 시각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시사해줍니다.

요약하면,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요나의 고발성 경고는 4장의 여호와와 요나의 충돌을 예비해줍니다. 1장과 3장의 이방인들에 대한 긍정적 전망과 요나의 이스라엘 중심적 시각이 긴장 속에 공존하다가 4장에서 파열음을 내며 맞부딪칩니다. 요나의 감사기도가 선원들의 구원 이야기와 유사하게 끝을 맺습니다. 요나의 개인적 구원 경험을 고백적-교리적으로 집약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를 제외하면 10절은 대체로 1:16을 반복합니다. 큰 폭풍에서 구원받은 선원들이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서원했던 것처럼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구원을 받은 요나도 감사기도와 함께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1장에서 대조적이었던 이스라엘사람 요나와 이방 선원들의 모습이 2장에서는 자주 중첩됩니다.

 

요나를 구해주신 여호와(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지만, 주의 뜻대로 구하지 않은 기도가 응답 되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 응답을 구하기 전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인지를 살피는 것이 더 우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10)

요나의 도피로 발생한 사건이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난 요나가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했던 요나가 죽음의 바다에 빠졌다가 기도에 응답하시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의 은혜로 원래 있어야 할 육지로 다시 돌아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1:2)는 여호와의 명령이 실행될 여건이 다 마련됩니다. 선원들이 먼저 인정했듯이(1:14) 여호와께서는 당신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황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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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01-01)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요나

요나서 1장 1-17절


연륜과 신앙적인 신념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을 때, 신앙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자기중심적 완고함과 자기 고집 그리고 교만으로 변질하여, 신앙이 왜곡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허위의식과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돌아보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 다른 예가 없는 특별한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예언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맞받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처신합니다. 그는 동쪽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당시 세계관에 따르면 서쪽 끝에 해당하는 다시스로 도망을 시도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요나의 도주(1-3)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의한 일들을 만나면, 불의한 세계에 대해서 우리 마음은 정죄 의식과 분노로 들끓기 쉽습니다. 자칫 연민을 잃어버린 회색빛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복음으로 정복하길 명령하시지만, 완고한 신념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과의 대립각을 세우면 반항하게 될 것입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1-3)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하시자, 그 사명을 받은 요나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당시 서쪽 땅끝인 다시스로 도망하여 그 뜻을 무산시키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생각해보면, 원수의 나라가 은혜를 얻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말씀 사건(1)

요나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함으로 시작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열왕기하 14:25-28에 따르면 가드헤벨 출신으로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2세(주전 793-753) 당시 활동한 여호와의 종이자 선지자였습니다. 말씀 사건의 양식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선포할 말씀이 나오는데, 요나에게는 선포의 장소와 관련한 지침이 주어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땅을 넓혀주실 것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 여호와의 명령(2)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사역하던 요나에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는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2)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에게 임한 명령은 3가지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로 구성되었습니다. 요나는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이 중요했음을 시사해줍니다. 니느웨는 산헤립 이후부터 앗수르의 수도가 됐습니다. 니느웨를 수식하는 ‘큰 성읍’은 물리적 크기뿐만 아니라 그 의미의 남다름까지 포함합니다(참조. 4:11).

여호와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파견하시는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의 죄악이 여호와에게까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참조, 출 2:2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니느웨의 하나님으로서 저들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3) 요나의 도주(3)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반응하는데, 전혀 뜻밖입니다. 그는 명령에 순종해서 동쪽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 반대편에 있는 서쪽의 다시스로 달아나려고 항구도시 욥바로 내려갑니다(3). 여호와의 예언자가 여호와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깁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주저하는 경우는 있지만(참조. 출 3:11; 4:10,13; 삿 6:15; 삼상 9:21; 렘 1:6), 대놓고 그분의 명령을 무시하는 예는 요나가 유일합니다.

그 이유는 뒤늦게 4:2에서 언급됩니다. 욥바로 내려간 요나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라탑니다. 니느웨는 오늘날의 모술(Mosul) 맞은편 티그리스 강좌안에 위치했고, 다시스는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남서쪽에서 찾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다시스는 서쪽의 세상 끝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요나가 여호와의 시선 밖으로 벗어나려고 다시스를 목적지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세상 끝은 여호와의 관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여호와의 간섭으로 도주에 실패하는 요나(4-16)

상황이 자신의 걸음을 가로막을 때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불신자보다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가 깨어질 정도로 강력한 바람을 보내어 그의 불순종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십니다.

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4-16)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시는 과정을 보면 놀라운 분이십니다. 큰 폭풍과 선장의 말,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를 질책하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요지부동입니다. 만물의 창조자를 경외한다는 입술의 말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1) 여호와의 ‘큰 바람’(4)

요나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자 여호와께서 반응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나게 하셔서 배가 부서지게 만드십니다(4). 배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하는 경우는 고대 세계의 흔한 재난이지만, 요나가 탄 배를 위협한 폭풍은 여호와의 특별한 간섭으로 발생한 파괴적 자연현상입니다.

(2) 두려움에 사로잡힌 선원들(5-6)

큰 폭풍으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자 선원들이 먼저 반응합니다. 이들의 반응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신에게 부르짖고, 다른 한편으로는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안에 있던 짐을 모두 바다에 던집니다(5). 전자는 선원들이 이방인들이었음을 전제합니다. 배를 구하려고 다들 정신없이 움직일 때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큰 바람 속에 아등바등하고 있는 갑판 무리의 모습을 뒤로하고 초점을 요나에게 향합니다. 그 시간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가고 베로 내려갔으며 배 안에서도 밑층으로 내려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코를 골고 잘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5b).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했던 요나는 그분의 ‘큰 바람’도 무시합니다.

이때 중재자가 등장합니다. 선장이 배가 난파 위기에 처했는데도 잠만 자는 요나를 깨워 책망하면서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라고 요청합니다(6). 선장의 ‘일어나라’, ‘외치라’는 명령은 놀랍게도 앞서 하나님의 명령에 쓰인 세 단어 중 두 단어이므로 요나는 선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장의 요청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재앙을 초래했으면서도 재앙과 관계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혹시”는 신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동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위기에 처한 자들이 신께 도움을 부르짖지만, 개입은 신의 주권적 결단에 합니다.

(3) 폭풍의 원인을 찾는 선원들(7-10)

선원들이 다시 반응합니다. 이번에는 제비를 뽑아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알아보기로 합니다(7). 큰 폭풍이 배에 탄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발생했음을 전제합니다.

요나에게 제비가 뽑히자, 사람들이 요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8). 다섯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라는 제비뽑기로 이미 해결됐고, 그 다음의 세 질문은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생략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인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에만, 요나의 답변이 주어집니다. 답변은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로 충분하지만, 요나는 자신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소개합니다(9).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해줍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온 땅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바다와 육지(마른 땅)’는 주로 창조(창 1:9-10)와 출애굽(출 14:16, 22, 29; 15:19; 시 66:6; 느 9:11)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창조와 역사의 주이심을 보여줍니다.

그의 고백은 부족함 없는 신학적 진술이지만, 그의 행동은 입술의 고백에 완전히 어긋납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으로 고백하면서도 여호와의 통치가 땅 끝까지는 미치지 않으리라는 생각 속어 다시스로 도망하고, ‘하늘의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이방 세계가 그분의 통지 안에 포함되는 것에 결사 반대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 여호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일종의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요나와 달리 그의 답변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게 된 선원들은 더욱더 두려워하게 됩니다(10).

(4) 선원들과 요나의 대화(11-12)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선원들은 요나와 다시 대화를 시도합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11)는 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요나는 아주 냉정하게 답변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12) 원인이 자신 때문임을 알면서도 요나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배와 자신을 분리시켜 끝까지 여호와께 맞섭니다. 다시스 행이 좌절됐다고 여호와께서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이번에는 바다, 곧 도망보다 훨씬 강력한 죽음을 선택해 그분의 계획을 좌초시키려 합니다.

(5) 실패로 끝난 선원들의 마지막 노력(13)

여호와를 피해 도망하는 요나 때문에 폭풍이 발생했음을 알았음에도 선원들은 그 원인을 곧바로 제거해버리지 않습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육지로 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젓습니다(13).

어떻게든 요나도 살려보려는 선원들의 모습은 생명에 무관심한 요나, 여호와의 계획에 맞서 죽음도 불사하는 요나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더는 어쩔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요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6) 선원들의 기도(14)

마지막까지 여호와를 찾지 않는 요나와 달리 이들은 요나를 바다에 내던지기 전에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던 자들(5)이 이제는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14)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선원들은 요나가 거절한 여호와의 주권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구원 능력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7) 바다에 던져진 요나(15)

요나가 바다에 내던져지자 성난 바다가 곧 잔잔해집니다(15).

(8)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선원들(16)

다시 잔잔해진 바다를 보고 사람들은 여호와를 더 “크게” 두려워하여 그분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합니다(16). 희생 제사 다음에 행한 서원의 내용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바다 폭풍의 신으로 경험했기에, 선원들은 그분과 지속적 관계를 맺고자 서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요나의 기도(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세상 가운데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 영광의 핵심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를 그 순종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성도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세상이 큰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경건과 사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완성됩니다.

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여호와를 모르던 선원들은, 그분을 알면서도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는 요나 덕분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됩니다. 요나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이야기가 마지막 순간 여호와의 개입으로 반전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다시스를 향하여 도망가다 결국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바다에 던져진 것 자체는 불순종의 대가로서 죽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죽이기보다는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그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다만 요나가 물에 던져지자마자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킨 것은 아닙니다. 1:17의 ‘큰 물고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를 가리키는지 단서가 나와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이 물고기를 준비하셨다는 것이며, 부수적으로 이 물고기가 크다는 점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은 반역한 요나를 바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요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은 이 물고기만이 아니라 물고기를 시작으로 4장에서 정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둘째, 요나서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 중 하나는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큰 성읍”(1:2; 3:2,3; 4:11), “큰 바람”(1:4), “큰 두려움”(1:10, 16)에 이어, 오늘 본문에는 “큰 물고기”(1:17)가 소개되었습니다. 여기서 니느웨를 가리키는 “큰 성읍”이 요나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1:2; 4:11)에 나오며 총 네 번이나 나온 것으로 보아 니느웨에 주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이라는 형용사는 표면적으로는 같이 나오는 명사의 크기를 강조하면서 암시적으로는 니느웨 성이 크고 하나님께서 구원해야 할 사람이 많은 중요한 도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완고한 신앙인, 인간미가 없는 편협한 종교인, 이기적이고 차가운 선민의식은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경외심, 마음으로 뜻을 순종하는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종교인이 아닌 참 순수한 신앙을 가진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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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서론


요나서 서론


1. 저자와 제목

이 책의 제목은 주인공인 선지자 요나입니다. 1장 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나(비둘기)’이며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2. 저작 연대

요나는 기원전 803-790년경 사람입니다. 에리야와 엘리사 다음 북이스라엘의 기록된 선지자 중 최초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주전 8세기입니다(왕하 14:23-28). 주전 2세기의 시락서 49:10에 12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요나서는 주전 8세기에서 주전 3세기 말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3. 주제

여호와는 ‘우리’(요나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이방인 선원들과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한없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기록 목적과 배경

(1) 기록 목적

요나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베푸시는 한없는 긍휼을 깊이 깨닫고, 그분의 사명은 모든 피조물의 차별 없는 보호와 행복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도구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2) 기록 배경

요나는 주전 782년부터 753년까지 이스라엘(북왕국)을 다스렸던 여로보암 2세 (왕하 14:23~28) 의 통치기에 예언했습니다. 그 시기는 국가적으로 크게 번민스러운 때였습니다(왕하 14:26,27).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은 왕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므로 국가적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국력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완화 조치는 그 나라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유도정책으로 계획된 것 같습니다. 번영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 밑에서 그 나라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그의 후계자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4:24).

여로보암 Ⅱ세 통치기간 동안 앗수르의 왕들은 아다드-니라리 Ⅲ세(Adad-nirari Ⅲ. B.C. 810-782), 살마네셀 Ⅳ세(Shalmaneser Ⅳ, 782-772), 아수르단 Ⅲ세(Ashur-dan Ⅲ, 772-754), 아수르 니라리 Ⅴ세(Ashur-nirari Ⅴ, 754-746)이었습니다. 그중 아다드 니라리 3세의 통치 기간에 한 종교 개혁이 발생했다는 것을 다분히 암시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보시파의 신(神)나부(Nabu,Nebo)가 유일신, 또는 적어도 주신(主神)으로 선언된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이 일신론적 개혁과 요나의 니느웨 선교사이에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 장르

요나를 역사적인 실제의 선지자로 볼 것인지, 아니면 우화적으로 가상의 인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요나는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요나를 성공한 선교사가 아니라 실패한 선교사로, 반면교사를 삼아 요나와 같이 죄지 않도록 가르치는 역할을 합니다.

요나서의 기록속에는 당대의 선지자들이었던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예언자에게 빵과 고기를 제공하는 까마귀의 이야기(왕상 17:6)가 등장하는데, 요나서에서도 물고기가 요나를 하나님이 명하신 목적지로 운송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재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물고기(1:17), 식물(4:6), 벌레(4:7), 동풍(4:8)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보여주십니다(마 12:40-41).

 

6. 핵심 주제

앞서 말한대로 요나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요나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원, 니느웨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입니다. 요나서의 마지막은 요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로 마무리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이들을 아끼시는데 너는 이렇게 아끼는 마음이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너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요나는 말라버린 식물(4:10)을 염려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실패한 선교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방인 선원들(1:14), 선장(1:6), 니느웨 왕(3:9)은 요나를 포함한 인간들이 멸망하지 않는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몇 가지 참고할만한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지상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2) 자신의 메시지를 열방에 전달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심

(3) 일반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

(4)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성과 위선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

(5)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실 것

 

7. 개요

Ⅰ. 요나의 임무와 불순종 1:1-17

    1. 요나의 거절과 폭풍 1:1-10

    2. 큰 고기가 요나를 삼킴 1:11-17

Ⅱ. 요나의 기도와 구출 2:1-10

Ⅲ. 요나의 전도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3:1-10

Ⅳ. 요나의 성냄과 하나님의 꾸짖으심 4:1-11

    1. 불평 4:1-5

    2. 마른 박넝쿨과 그 교훈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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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03-01)


구경거리로 전락한 니느웨

나훔 3장 1-13절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몰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앗수르도 그랬습니다. 잘 나가던 나라, 가장 강한 나라가 앗수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한 결과, 멸망이 홀연히 앗수르에 임했습니다. 앗수르의 죄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장에서 멸망을 예언한 후에, 3장에서는 이 니느웨가 분명히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강화합니다. 재앙 신탁의 형식으로 이미 니느웨에 재앙이 임한 것처럼 전달하기도 하고(1-7), 그들이 멸망시킨 노아몬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8-13). 조롱의 어투로 전쟁을 대비하라고 명령하기도 하고(14-17). 장송곡의 형상으로 니느웨의 멸망을 분명히 합니다(18-19).

 

니느웨에 대한 재앙 신탁(1-7)

스스로 자신만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필경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높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현숙한 여인과 같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앗수르는 처음에는 화려하고 창대해 보였지만, 마지막은 비참하게 몰락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1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4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5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7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1-7)

일반적인 재앙 신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여기서도 보여주는데, 보통 재앙 신탁은 죄에 대한 고발과 그 죄로 말미암은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1-4절은 니느웨의 죄악을 고발하고, 5-7절은 이와 같은 니느웨의 죄악에 근거하여 니느웨가 당할 징벌을 선언합니다.

(1) 니느웨의 죄악 고발(1-4)

1절의 “화 있을진저”는 이 단락이 재앙 신탁임을 알려줍니다. “피의 성이여”라는 표현은 단적으로 니느웨의 정체성을 규정짓습니다. 피를 흘린 성읍(겔 24:9), 피로 건설한 성읍(합 2:12)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는 직역하면 ‘모든 성읍은 충만한 거짓과 전리품이다’가 되는데, 성읍 자체가 거짓이며 전리품이라는 의미입니다. 거짓 자체라는 의미는 랍사게의 사건에서 잘 드러납니다. 앗수르에게 항복하면 풍요로운 땅으로 옮겨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거짓에 불과합니다(왕하 18:31-32), 정복하는 나라에 온갖 거짓으로 약속하지만 감언이설일 뿐입니다. 또한 성읍 자체가 전리품일 정도로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표현 역시 전쟁으로 생긴 탈취물, 전리품이 끊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2-3절은 1절에서의 잔혹함으로 가득한 성읍의 모습을 다시 묘사하여, 앗수르가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2-3절의 묘사는 역설적이게도 2:3-4에서 ‘파괴하는 자’에게 공격당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앗수르가 공격하며 잔혹한 행위를 일삼은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들이 행한 그대로 당할 것이라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절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음행’과 ‘마술’에 대한 묘사는 실제로 니느웨에서 행해졌던 우상숭배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음녀’는 성전 창녀를 가리킬 것입니다.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성전에 거주하는 창녀와의 성행위로 신들을 흥분시켜 비가 오게 하거나 풍요를 기원하는 풍습을 시사합니다.

자신들의 풍습을 지킬 뿐만 아니라 ‘미혹’했다는 것은 정복한 나라들에게도 그 풍습을 전파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해석은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인데, 창녀가 결국에는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마술이 사람을 현혹하는 것처럼, 니느웨가 이웃 나라들에게 한 행위가 자신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현혹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모두 의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2) 니느웨가 당할 징벌(5-7)

5-7절은 여호와의 대적자가 당할 징벌을 묘사합니다. 5절은 앗수르가 정복한 나라에 행한 그대로 자신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6절의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은 우상을 가리키며, 니느웨가 섬긴 신들을 의미합니다. 랍사게 사건에서도 드러나듯이(왕하 18:33-35; 19:4), 앗수르가 이웃 나라들을 정복한 것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사상이 고대 근동에 만연했습니다. 따라서 7절의 표현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자부심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7절은 애곡하는 2:10-12을 떠올리게 하는데, 니느웨의 멸망을 장례에 비유한 것이며, 곡할 자조차 없을 정도로 비참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경고: 노아몬과 같은 운명(8-13)

사람들은 철저한 대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소용없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이웃을 약탈하며 자기의 안전을 도모합니다. 결국 그들은 멸망의 때에야 자기들이 행한 일들이 무가치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8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12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8-13)

노아몬과 비교하며 시작합니다. 이후로 노아몬에 대한 묘사는 니느웨에 대한 묘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8b-9절에서는 노아몬이 얼마나 강력한 성읍이었는지를 묘사합니다. 10절에서는 그렇게 강력한 성읍도 멸망당하고 패배한 결과를 처참하게 맛볼 것을 묘사합니다. 노아몬은 니느웨만큼 강했고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음에도 멸망당했듯이, 니느웨 역시 멸망당할 것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킵니다.

(1) 노아몬의 운명(8-10)

8절의 노아몬(테베)에 대한 묘사에서 ‘바다’는 테베가 지리적으로 바다에서 65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므로 사실적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난공불락의 성읍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위치상 정복하기 힘든 점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9절에서는 구스와 붓과 루빔이라는 이집트 주변 나라들과의 연합군이 지키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쉽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8-9절에서처럼 노아몬이 점령하기 힘들었음에도, 10절에서는 점령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읍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묘사합니다. 존귀한 자들은 고위직 관료들을 가리키며, 모든 권세자들은 그보다 높은 지위의 귀족들이나 관료들을 가리킵니다.

(2) 노아몬과 같은 멸망(11-13)

8-10절에서 노아몬의 운명을 묘사한 후에, 11-13절의 소단락은 니느웨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1절에서는 술 취한 자에 비유하여 무기력하게 정복당할 것을 예언합니다(1:10), 12절에서는 마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흔들어 따듯이 산성이 쉽게 정복당할 것을 말합니다. 13절의 “장정들은 여인 같고”는 군대의 나약함을 가리킵니다(사 19:16).

12-13절에서는 니느웨의 정복을 산성에서 시작하여 산성을 지키는 군대의 무력함과 빗장이 쉽게 열리는 것으로 점진적으로 묘사하여, 철저하게 멸망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노아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앗수르에게는 충격적인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남유다 역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자신들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징벌의 예언은 동일한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유다는 잘못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은 괜찮을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도 앗수르를 통해 멸망시켰습니다. 남유다 역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고 언약을 파기한다면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니느웨에 대한 조롱(14-17)

권세만 믿고 아랫사람들과 이웃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어리석은 자들은 결국 멸망할 운명에 처합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면 사람들이 떠나고, 오히려 그가 고통 당함을 즐거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4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16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14-17)

마지막 단락들을 조롱과 장송곡으로 마무리하면서 니느웨의 멸망을 기정 사실화하며 강조합니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전쟁을 대비하라는 조롱 조의 명령과 멸망에 대한 선포를 번갈아 가며 언급함으로써,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4절은 장기간 포위됐을 경우의 식수를 대비하라는 것이며, 산성을 수리하여 견고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진흙에 들어가”는 벽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진흙에 들어가 작업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15b절은 군사를 정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비들이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15절과 16-17절에서는 전쟁에 패배할 것을 예언합니다. 15절의 ‘불’(사 43:2)과 ‘칼’(신 28:22)은 전쟁으로 인한 멸망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16절에서는 부를 많이 쌓았으나 느치가 날아감 같이 흔적도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17절에서도 역시 군대 장교들이 많을지라도 흔적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멸망할 것을 강조합니다.

 

니느웨에 대한 장송곡(18-19)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이 전혀 애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히려 손뼉 치면서 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할 때, 사람들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앗수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18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18-19)

이미 7절에서도 장례의 비유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였듯이, 여기서도 나훔서의 마지막을 장송곡으로 마무리하면서 니느웨의 멸망을 강화합니다. 18절에서 목자와 귀족과 백성은 니느웨의 각계각층을 가리키며, 온 성읍이 흩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19절은 니느웨의 패망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며, 그 패망에 대해 이웃 나라들이 조롱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니느웨는 자신들이 이웃 나라에 행한 그대로 당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나훔은 악인이 멸망함으로써 의인이 구원을 얻고 기쁨을 누리리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의의 길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최후의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잠시 번성하는 것을 보고 그 길에 편승한다면, 결국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고 우리가 망하는 것을 이웃들이 즐거워하는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의인의 길을 꿋꿋이 걸으며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백성으로 견고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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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02-01)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훔 2장 1-13절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참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다에게 권고하는 성격이 짙은 첫 신탁(1:9-15)에 이어, 본격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1-9절에서는 니느웨를 공격하는 자들을 묘사하고, 그 공격에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을 묘사하며, 10-12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조롱 섞인 애도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13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니느웨의 멸망(1-9)

세상의 부와 권력을 의지하며 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 의인을 압제하는 자들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1-9)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악행을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니느웨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서언한 후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파괴하는 자(1-4)

1절의 ‘파괴하는 자’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1절의 “너는 산성을 지키며…굳게 할지어다”라는 조롱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산성’을 의지하여 교만했으나 이렇게 굳건하게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2절은 2: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며 ‘파괴하는 자’가 공격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갑작스럽게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회복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법은 선지자 나훔이 이미 사용한 방법입니다. 이미 1:12-15에서 유다에 대한 구원 신탁을 다루는 단락에서도, 1: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언급함으로써 유다의 구원이 니느웨의 멸망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하여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즉 나훔서는 주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지만(1:1), 이 니느웨의 멸망이 유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a절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표현입니다. ‘이는’이라고 이유를 밝히는 표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이후 오랫동안 앗수르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진노하기를 늦추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 되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승승장구함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부재하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유다는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야곱’과 ‘이스라엘’이 각각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같은 대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사 44:1을 참조하라).

2b절의 ‘이는’으로 시작하는 표현은 니느웨의 기구한 운명을 드러냅니다. 약탈하며 땅을 넓혔던 앗수르가 이제 약탈당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유익을 주는 나무로 풍요를 대변하는데,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는 말은 니느웨의 풍요가 제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4절은 다시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약탈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공격하는 용사와 병거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정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떤 학자는 방패가 붉은 것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전쟁에 임하면서 상대방의 방패를 볼 때 공포감이 몰려오는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의 군사들이 붉은 옷을 입었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겔 23:14-15), 나훔이 앗수르를 공격하는 군대가 바벨론의 군사임을 염두에 두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면서도 위엄 있게 공격하는 군대 앞에서 니느웨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데, 멸망하는 시기가 가까워 왔을 때에는 이미 국력이 쇠한 때이기 때문에, 이런 멸망의 선포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니느웨는 강대국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보며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치 눈앞에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이 내용이 전달될 때 유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현실을 본다면 의구심이 들겠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2) 니느웨의 패망(5-9)

1-4절의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에, 5~9절은 그 앞에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당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합니다. 앞의 문장에 속할 수도 있고, 니느웨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키고 존귀한 자들은 군대의 장교나 고위직을 가리킬 것입니다.

5절은 특히 ‘파괴하는 자’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전쟁 준비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 급히 성에 이르러 대비하려는 허둥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6절의 ‘강들의 수문’은 니느웨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런 것도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안을 쳐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왕궁이 소멸”되기까지 합니다.

7절의 “정한 대로”라는 표현은 니느웨의 멸망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됐고 결정된 일이며, 따라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확고하여 변개할 수 없는 예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7절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과 패전을 애도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8-9절은 니느웨의 역전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물이 모인 못” 같다는 것은 니느웨가 강성하여 부가 넘쳤던 것을 가리킵니다. 니느웨에게서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고 모였으나 이제 망하게 되자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9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축한 것이 많으나 이제 망하여 약탈당하는 상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강대국이라고 교만하여 우쭐대지만, 자신들이 약탈한 상황 그대로를 당하면서 니느웨의 신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풍요롭게 복을 누리는 것 같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며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니느웨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줄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10-13)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서면, 세상의 악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버려질 것이비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만 하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거되고,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식, 화평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10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서 악인들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시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1) 애도의 노래(10-12)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애가의 형식으로 니느웨가 당할 멸망의 모습에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만 해도 5-9절에서 묘사된 대로 처참하게 당할지는 모르고 전쟁에 대비했을 것입니다(1). 그러나 여호와의 심판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0절의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는 니느웨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1-12절에서는 11절과 11-12절의 대조를 통해 니느웨가 멸망당한 비참한 상황을 부각합니다. 11b-12절은 니느웨가 멸망 당하기 전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마치 숫사자가 사냥하듯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그 전리품을 챙겨 자신의 성을 풍요롭게 했었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굴과 사자가 흔적조차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2) 여호와의 선언(13)

13절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결론적 선언입니다. ‘파괴하는 자’를 통해 니느웨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네 대적이 되어”는 니느웨를 멸망시킨 주체가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려다 보면 억울한 일을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어쩌면 징계하셔서 더욱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한 도구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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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01-01)


질투하시고 심판하신 하나님

나훔 1장 1-15절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좋으신 하나님’, ‘복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심판하신 하나님’,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증거하면 싫어합니다. 현대인들이 과거의 성도들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서처럼 니느웨가 대표하는 앗수르 제국의 운명이 핵심 주제이지만, 그 전망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요나의 앗수르는 여호와의 은혜와 인애를, 나훔의 앗수르는 여호와의 진노와 보복을 경험합니다. 고대 근동을 두려움과 혼돈에 몰아 넣었던 앗수르가 자신의 속국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의해 멸망의 떨어집니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1)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입장에서 보복의 하나님께서는 곧 구원의 하나님이며, 진노의 주는 곧 은혜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

이중의 표제어는 나훔서에 기록된 말씀의 신적 기원을 강조합니다. ‘경고’는 신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민족들의 신탁 표제어에 등장합니다. 앗수르 제국을 대표하는 니느웨가 신탁의 대상이 됩니다. 니느웨는 주전 701년 예루살렘을 침공했던(참조. 왕하 18:12-19:37; 사 36:1-37:38) 산헤립(주전 704-681)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가 됐습니다.

문자적으로 ‘묵시의 책’을 의미하는 ‘묵시의 글’은 예언서들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예언자가 이상 중에 본 또는 받은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이 말에 근거해서 나훔이 처음부터 문서로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나훔도 처음에는 공개적 장소에서 말로 신탁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나훔의 출생지만 언급하고 활동 시대와 집안에 관해서는 달리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고향 엘고스는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입니다. 후대의 전승은 그 위치를 갈릴리나 니느웨 근처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름 ‘나훔’은 ‘위로하다’의 동사 ‘나함’에서 파생한 단어로 ‘위로가 많은’을 의미합니다.

 

보복하러 오시는 여호와(2-8)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항상 두려움과 떨림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해 얼굴을 붉히셨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우리를 향해 얼굴을 붉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셔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2-8)

전통적 언어로 신현(新峴)을 묘사하는 이 단락은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비유적 언어로 보여줍니다. 그분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감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께로 피하는 자는 지켜주시고 악인은 진멸하시는 무한한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땅과 역사는 그분의 활동 무대로, 그분의 역사 의지가 구현되어 가는 시공간입니다.

나훔을 문학적으로 보자면, 각 행의 첫 자음이 ‘알랜’부터 ‘카프’까지 열한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시(詩)입니다. ‘알랜’으로 시작하는 첫 행(2a)은 예외적으로 출애굽기 34:6-7을 인용하는 2b-3a절에 의해 확장됩니다. 특히 보복과 진노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심판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전면에 드러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34:14; 신 4:24; 5:9; 6:15; 29:19; 32:16,21; 수 24:19)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라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결혼) 관계에 뿌리를 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의 독점적 관계가 무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향해 갈 때 그분의 질투는 징벌의 심판으로 나타나고, 대적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는 이들에게는 파괴적 능력으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보복하시는 하나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오늘의 감정적-사적 이해와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사고에서는 사법적 공적 영역에 속한 표현입니다. 정의의 근원이시자 마지막 보루이신 여호와는 폭력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징계를 통해 이들에 의해 훼손된 당신 정의를 다시 바로 세우십니다. 질투와 보복과 진노는 불법과 불의의 승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심판 의지의 극적 표현으로 의미상 동일한 범주에 속합니다. 여호와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의 정체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2-3장에 가서야 니느웨가 대표하는 앗수르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보복과 진노는 인간의 행위에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노에 더디시지만, 벌하지 않으시고 마냥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권능이 크시기에 세상의 어떤 세력도 그분의 진노에 맞설 수 없습니다.

3b-5절은 여호와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그분의 현현에 수반하는 특별한 자연현상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창조 이후 흔들림이 없었던 피조세계의 질서가 뒤틀립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여호와를 직접 볼 수 없기에 그분의 출현은 동반하는 자연현상의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신현 묘사에 사용된 언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통적인 것들입니다.

먼저 3b절은 여호와를 폭풍의 신으로 기술합니다. 폭풍과 회오리바람이 불고 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폭풍과 회오리바람을 막아설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름은 임재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보이지 않게 감춰주는 역할도 담당합니다. 그분은 바다와 강을 꾸짖어 물이 말라버리게 하십니다(4a).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조상이 홍해(출 14:21-25)와 요단(수 3:14-17)을 건널 때 이미 경험했던 이적입니다. 또 그분의 꾸짖는 소리에 바산과 갈델과 레바논의 초득이 시듭니다(4b). 레바논은 최상급의 목재로 인정받는 백향목이 자라는 울창한 산림지대로 유명했습니다. 진노하신 여호와의 출현에 자연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 땅과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산의 바위도 깨집니다(5b). 견고함과 영원함을 자랑하는 자연도 속절없이 굴복하는데 누가 그분의 진노의 불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진노는 대적들에게 국한됩니다. 그분은 선하시기에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은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대적하는 자들은 넘쳐흐르는 홍수로 끝장내고 지하세계로 쫓아내십니다(7-8). 다음 단락에서는 여기에 관한 구체적 언급입니다.

 

유다와 니느웨에 관한 예언(9-15)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의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으로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와 가까이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9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9-15)

니느웨(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에 관한 예언들이 모아져 있는데 청자의 신분이 달리 언급되지 않아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9-10절은 여호와께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주는 위협의 말씀입니다. 다시는 재난이 일어나지 않게 여호와께서 대적들을 모조리 끝장내실 것입니다. 한번 불이 붙으면 곧장 다 타버리는 마른 지푸라기처럼, 술에 취해 서로 뒤엉켜 곯아떨어진 주정꾼들처럼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쳐 멸망합니다.

심판의 대상인 청자 “너희(남성)”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의 구원 승리을 불신하고 계속 앗수르의 봉신으로 남기를 주장은 예루살렘 왕궁의 친 앗수르 세력 또는 앗수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세리이라는 점에서 함께 고려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11절에서는 청자가 여성 단수의 ‘너’로 바뀝니다. ‘여호와께 거슬러 악을 꾀하며 사악한 것을 도모하는 자가 너에게서 나왔다/떠났다.’ 청자 ‘너’로 예루살렘이나 니느웨가 다 가능합니다. 전자라면 앗수르의 이익을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한 앗수르 세력의 철수를, 후자라면 니느웨 성을 나서는 앗수르 군대의 원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방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약속하는 12-13절의 청자 ‘너’(여성)는 예루살렘 또는 유다가 분명합니다. 앗수르 또는 그 군대가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그분께서 반드시 멸망시키시고, 앗수르가 유다에 지운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을 끊어주실 것입니다(참조. 사 9:4). 전에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 붙여 심판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해방하십니다. 유다를 심판하신 분께서 유다를 구원하십니다. 14절의 ‘너’는 남성으로, 청자가 다시 바뀝니다. “네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는 앗수르의 역할과 관련한 언급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는 여호와의 도구였던 앗수르(참조, 사 10:5-6)의 역할이 다 끝났습니다. 한계를 넘은 앗수르가 심판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심판의 범위가 앗수르의 통치자를 넘어 그의 후손과 우상들로 확대됩니다. 15절에서는 청자 ‘너’가 다시 여성으로 바뀝니다.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이미 산 위에 이르렀습니다(참조. 사 52:7). 여호와의 구원 약속은 먼 미래에 속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악인(앗수르)이 다시는 유다로 통행하지 못합니다. 유다는 다시 축제를 즐기고 서원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유다는 정치적 주권을 되찾고, 여호와의 종교도 온전히 회복됩니다.


많은 성도가 죄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만 그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있고, 마음대로 방탕하게 살고 있다면 오히려 진노의 하나님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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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01)


나훔 서론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 백성을 회개로 이끈 이전 선지자 요나와는 대조적으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각성을 잊어버렸고, 이전의 부력과 우상 숭배와 교만의 습관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니느웨를 파괴해서 니느웨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주 구체적으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저자

나훔이라는 이름은 ‘평안’ 혹은 ‘위로’라는 뜻이다. 니느웨가 멸망한다는 나훔의 메시지는 잔혹한 앗수르 사람에게 고통 받던 유다인들에게 분명히 평안을 주었다. 1장 1절에 의하면 선지자는 에고스 사람이라고 불린다. 엘고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엘고스가 예루살렘과 가사 사이에 있는 유다 남부의 한 마을로 나중에 엘케시라고 불린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견은 나훔이 남왕국의 선지자임을 암시하며, 그가 유다의 승리에 관심을 쏟은 이유를 설명한다(1:15, 22).

 

기록 연대

나훔서의 메시지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니느웨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BC 612년 전의 어느 시기에 이 묵시의 글을 전했을 것이다. 또 이 책은 분명히 애굽의 수도 테버(3장 8절에서 ‘노아몬’이라고 불렸다)가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BC 663년 이후에 기록되었다. 테베는 BC 654년에 독립을 얻었으나, 나훔은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BC 663년과 654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주제와 문학적 구조

나훔은 일관되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다. 니느웨가 멸망한 이유 중에는 앗수르 군대의 비인간적 행위(2:12)와 도시에 만연한 악행(3:4)이 있다. 하나님의 성품, 특별히 하나님의 분노, 거룩함 정의 능력 때문에 그의 대적들은 멸망을 피할수 없다1:2-10).

 

단락 구분

1.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함(11-15)

     (1)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원칙(1:1-8)

     (2)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1:9-15)

2. 니느웨의 멸망을 묘사함(21-13)

     (1) 선전 포고(2:1-2)

     (2) 니느웨의 멸망(23-13)

3. 니느웨 멸망의 정당성(3:1-19)

     (1) 니느웨가 멸망한 이유(31-11)

     (2) 니느웨 멸망의 필연성(3:12 19)

 

오늘날 교회에 주는 메시지

나훔서는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열정 적인 소책자다. 즉, 여호와는 니느웨 사람들의 엄청난 죄로 인해서 앗수르를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1:2)의 개념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는 의롭고 순수하다는 것을 잊어 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류를 내려다보시고 그들의 악을 살피신다는 사실을 교회는 기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순결함을 간직하며 악한 세상의 득세함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넬슨 성경개관(개정판)-죠이선교회출판부

IVP 성경주석-IVP

구약성경개론-도서출판 엠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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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9-01)


호렙 산에 나타나신 여호와

열왕기상 19장 1-21절


성공한 사람도 슬럼프를 경험합니다. 영적 승리 후에도 슬럼프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영적 침체를 이겨 내는 최선의 방책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 낙심하지 말고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번 영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순종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가뭄이 끝난 후에도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번에는 이세벨에게서 생명을 위협받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를 거쳐 시재 반도의 호렵 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탈감과 외로움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그에게 천사를 보내 보살피셨습니다. 또한 직접 나타나셔서, 그가 감당할 사명을 주시며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1-18)

우리가 낙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는 대신에 위로하며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신실하게 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낙심하고 있을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낙심이 찾아올 때에라도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위로와 회복의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며 다시금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1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18)

아합은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행한 일을 이세벨에게 알립니다. 이세벨은 복수를 다짐하며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전갈을 보냅니다.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이세벨을 피해 브엘세바로 도망합니다. 홀로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 앉은 엘리야는 더 이상 살 힘이 없다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1) 이세벨에게서 도망한 엘리야(1-7)

이세벨은 아합을 통해 갈멜 산 대결의 전말을 전해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 작정합니다. 열렬한 바알 숭배자인 그녀는 그동안 이스라엘에 퍼진 바알 숭배가 엘리야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고, 자기가 후원하는 선지자들(18:19)이 그의 칼에 죽었음을 알고 격노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에게 경고장을 보내 다음 날까지 그의 생명을 없애지 않으면 신들의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이세벨도 갈멜 산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 엘리야의 위력에 맞서는 일을 주저한 것으로 유추됩니다. 이세벨의 위협에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려 멀리 떠납니다. 가뭄을 예고한 후에는 아합의 수색망을 피해 도망해야 했습니다. 단지 목숨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주신 사명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린 후에조차 그는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사명을 다 완수하여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 그때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여인(17:20)이나 오바댜(18:9-14)처럼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살기등등한 이세벨의 위협은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수년간의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을 기억 저편에 묻게 만들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약 5:17). 그는 줄곧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후 행동했으나, 이번에는 먼저 움직입니다. 그의 도망은 이처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구책, 회피책이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이스르엘을 떠나, 남쪽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유다 남단의 브엘세바까지 갔습니다. 동행하던 사환을 그곳에 남겨두고, 혼자 남서쪽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갔습니다. 광야에서 작은 그늘이 돼주는 로뎀 나무를 찾은 그는 그 아래에 앉아 죽기만을 바랐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간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을 위해(3) 그 먼 곳까지 와서는, 이제 충분하니 여기서 죽겠다고 하는 것(4)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죽은 조상들을 부러워할만큼 심신이 바닥난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탈진한 엘리야는 나무 아래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고 있는 엘리야를 쓰다듬어 깨우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권유합니다(5). 그의 머리맡에는 놀랍게도 구운 빵과 물 한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먹고 마시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그 후 천사가 또 와서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며 갈 길이 아직 멀다고 귀띔했습니다(7).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십니다. 천사를 보내 그를 보살피신 하나님은 까마귀와 사르밧 여인을 통해 그를 보살피셨던 그 하나님이십니다(17장).

(2)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8-18)

이제 하나님은 직접 말씀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으로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40일에 걸쳐, 장장 300킬로미터 이상의 길을 주야로 걸어 시내 반도의 호렙 산(시내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그곳 동굴에서 유숙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말을 건네십니다(9). 이 물음은 엘리야를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떠난 이래 그를 고통 속에 두시면서도 그가 충분히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먹고 쉴 수 있게 보살피셨습니다. 엘리야는 본인이 여호와께 열성을 다했으나 목숨이 위태한 채로 혼자 남았다면서 허탈감과 외로움과 두려운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가 부른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10,14)는 ‘온 군대의 하나님’으로서 바알을 꺾고 승리한 전사임을 암시합니다. 엘리야의 “열심”은 하나님만을 향한 충성과 신의에서 나온 질투였습니다. 열정을 불태우며 사명을 완수했기에,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신은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그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혼자 남겨진 자신은(실상은 100명의 선지자가 살아있다! [18:4]) 목숨마저 위태롭습니다. 그의 한탄은 인간의 눈으로 가뭄 전과 진배없는 현실을 바라볼 때 생기는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말씀으로 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직접 나타나 엘리야를 다시 사역의 길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굴에서 나가, 그 앞에 서라고 명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기 위해(출 33:20)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갔습니다(13). 그 후 여호와가 지나가시자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 산이 갈라지고 바위들이 부서졌습니다. 바람 후에는 지진과 불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람, 지진, 불 가운데 여호와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불 이후에 고요하고 가는 소리(“세미한 소리”, 12)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강림의 장면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신 일(출 3:2-4), 모세 앞에 나타나신 일(출 33:18-23) 등을 연상시켜 그가 엘리야에게도 소명을 주고 세밀하게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했던 질문(9)을 반복하셨고(13), 엘리야 또한 대답을 반복합니다(14).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에게 새 사명을 맡겨 선지자 직분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의 임무는 하나님이 지목한 세 명에게 기름을 부어 왕과 선지자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님시의 손자(“아들”)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선지자로 임명하셨습니다(16). 이들은 나라와 직분이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는 데 쓰임 받을 자들입니다. 하사엘과 예후는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매개(“칼”)가 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을 피하는 자들은 엘리사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진멸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바알을 섬기지 않는 자 7천 명을 남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초점은 남겨진 ‘수’가 아니라 남긴 ‘주체’가 ‘하나님’이심에 있습니다. 7천이란 수는 상징적인 수로 남겨진 무리를 총칭합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거나 입맞춤을 하지 않은 신실한 자들입니다(호 13:2). 큰 심판의 때에 신실한 자를 따로 남기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크신 긍휼과 주권이 드러납니다(습 3:12-13; 롬 11:5). 앞서 갈멜 산에서 백성들의 신앙 고백이 그들의 마음을 미리 돌이키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18:36,39). 하나님의 약속은 홀로 남겨진 것 같아 외롭고 괴로워하는 엘리야를 향한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엘리사(19-21)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열심에 근거한 믿음은 영적 우월감에 젖어둘 우려가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가 없으면 깊은 영적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열심에 도취 되는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19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19-21)

하나님의 명령(16)에 따라 엘리야는 엘리사를 선지자로 부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중 아벨므홀라에 들릅니다. 그곳 밭에서 열두 쌍의 쟁기질하는 소를 앞에 거느리면서, 열두 번째 겨릿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발견합니다(“만나니”, 19). 많은 소가 있는 만큼 밭이 넓고 여럿이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밭을 가로질러 가서 엘리사에게 그의 털 겉옷을 던졌습니다(왕하 1:8). 이는 선지자 직을 엘리사에게 위임한다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의미를 알아차린 엘리사는 소를 버리고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엘리야의 대답인 ‘돌아가라 내가 네게 무엇을 했느냐?’(20)는 꾸짖음일 수 있으나, 핵심은 그가 선지자로 부름 받았음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돌아가 소 두 마리를 잡아 멍에와 쟁기를 태워(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아 친족과 이웃(“백성”, 21)을 대접했습니다. 이는 작별과 축복을 나누는 장면이며, 사역에 대한 엘리사의 헌신과 결단을 나타냅니다. 이제 모세에게 있어 여호수아처럼(수 1:1), 엘리사는 엘리야의 수종을 들며 선지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자신의 기대와 열심이 하나님보다 크게 보일 때 낙심하게 됩니다. 열심과 열심정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신실한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분도, 그 사명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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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1-01)


남유다를 향한 여호와의 심판

스바냐 1장 1-13절


국제 운동 경기는 국가적인 관심사입니다. 요즘은 축구경기가 국제적인 관심이 깊다 못해, ‘축구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각 나라들은 경기에 매우 민감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수들이 파울을 했어도 심판들이 호루라기를 불지 않을 실수의 경우가 있습니다. 심판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심이나 편파 판정으로 승패가 뒤바꾸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심판하십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살던 시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한 약 100년 후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이 통치하고 있던 남쪽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요시야를 소개하면서 히스기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히스기야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혁을 원했던 것입니다.

 

표제(1)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유다를 철저히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범죄한 유다와 예루살렘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에 점점 가까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대상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이 생각날 정도로 강력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1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1)

선지자인 스바냐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임합니다. 스바냐는 경건한 왕 히스기야의 현손으로 유다의 개혁을 주도했던 요시야 왕 때 선지자 사명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이 숨기셨다’ 또는 ‘하나님이 숨기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성장기에 유다는 악한 왕 므낫세의 범죄와 타락으로 우상숭배와 배교의 거센 물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아래 경건한 영성의 소유자로 성장해 기록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왕족 혈통으로, 왕실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왕궁과 연결된 사람들, 즉 왕족(8-9), 제사장(4;3:4), 재판장과 지도자들(3:8), 상인과 권세자들의 부패, 배교, 타락을 상세히 다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지식과 경험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요시야 왕(BC 640-609)의 영적 개혁을 지지하며 선지자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악한 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과 남은 자들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본문에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의 유다에게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나누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10지파를 합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로 시작하였고, 도덕적인 타락이 심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먼저 심판하셔서 앗수르 제국에게 BC 722년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었지만, 남유다도 역시 도덕적으로 붕괴가 되었고 타락하였고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스바냐의 배경은 남유다 역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남유다 왕국의 16대 왕 요시야 시대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선지자로 활동했던 스바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관심한 나라였습니다. 유다 사회는 영적으로는 우상숭배와 혼합주의가 만연하고 죄악이 홍수를 이룬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을 향한 선언(2-6)

하나님께서는 우상들과 숭배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채 영적 회색지대에 거하며 습관적으로 우상에게 경배하는 현대의 우상숭배자들에게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빨리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제거합시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4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2-6)

유다와 예루살렘에 그 범위를 집중시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과 진노로 그의 손을 펴서 남 유다와 그 수도인 예루살렘을 멸절시킬 것을 선언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긴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창조 질서 전체를 뒤흔들 만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을 선포합니다.

(1) 만물에 임할 심판(2-3)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해 만물에 임할 보편적인 심판이 선언합니다.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 여호와께서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시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악인들도 멸절하실 것입니다(3). 이는 마치 노아 홍수 심판을 연상시킵니다(창 6:7). 스바냐 당시 유다의 범죄와 패역함이 마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모든 계획이 악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던 노아의 때와 비슷한 상황임을 의미합니다.

(2) 유다의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4-6)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범위를 좁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심판의 주된 이유는 그들 가운데 만연한 바알 숭배입니다. 그 심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5가지를 지목합니다. (1) “바알을 그곳에서 멸절하며”(4). 스바냐의 성장기에 므낫세 왕은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 왕이 확립해 놓은 경건한 전통과 제의를 근본부터 허물었습니다. 이교 관행으로 성전을 더럽혔고, 바알 숭배와 유아 인신 제사를 권장했습니다. 게다가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와 신실한 남은 자들을 박해했습니다(왕하 21장: 대하 33:3, 7). 요시야 왕이 우상들을 파괴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했지만, 여전히 바알 숭배가 남아 있었고, 영적 배교와 타락이 지속되었습니다(대하 34:4). (2) 심판할 대상으로 ‘그마림’은 바알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데(호 10:5), 어원은 ‘검은’(그들의 검은 옷에서 유래) 혹은 ‘열정적인’(열광적인 우상숭배에서 유래)입니다. (3) 당시 제사장들은 열광적으로 바알을 숭배했고, 많은 백성이 지붕 위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기에 거의 모든 집이 우상의 성소가 되었을 정도입니다(왕하 21:3,5; 23:5-6;렘 7:17~18; 8:2; 19:13; 44:17~19). (4) 그들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암몬의 우상)을 동시에 예배했습니다. (5) 당시 유다 백성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완악하고 사악한 마음을 따라 여호와를 배반하고, 범죄와 우상숭배의 배교를 서슴지 않았습니다(6). 여호와께서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시기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준엄한 심판으로 당신의 통치와 정의를 확립하셔야 했습니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7-13)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우상보다 못한 분으로 여긴 자들을 끝까지 찾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등불을 들고 두루 찾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늦습니다. 당신도 혹시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속으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습니까? 신앙의 이중성을 가진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7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8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12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13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7-13)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희생제물 드리는 날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선지자들은 이날에 여호와께서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을 시행하신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날에 왕이자 용사로 임하셔서, 근원적인 악과 악인들을 진멸하실 것입니다(15,18; 2:2-3; 사 63:1-6; 렘 4:8; 애 2:1; 겔 7:3,7),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셔서 영광과 새 창조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2:3,7,9; 욜2:18-32; 암 5:14-15).

선지자 스바냐도 1-2장에서 임박한 여호와의 날, 즉 심판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날을 대비하기 위해 백성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7). ‘잠잠할지어다’라는 표현은 예배를 드릴 때와 같이, 겸손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심판이 마치 희생제사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어긴 자들은 마치 희생제사의 짐승과 같이 죽음과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7-13절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을 다룹니다: (1) 이교도의 관습을 좇는 방백, 왕자, 종들(8-9), (2)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10-11), (3) 심판에 무관심한 자들(12-13). 먼저, 당시 권력을 향유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던 완악한 정치인과 왕자, 그리고 이교도들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포악과 거짓으로 문턱을 뛰어넘어 자기 주인의 집을 풍요롭게 한 종들도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문(魚門)’은 예루살렘 성읍 북편에 위치한 문으로, 물고기가 팔리는 어시장 가까이에 있는 문입니다. 제2구역은 여선지자 훌다가 살았던 곳으로, 아그라 언덕에 있는 지역입니다(왕하 22:14). 막데스 지역은 두로 골짜기의 북쪽을 따라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입니다. 이 지역들은 부정직한 상행위가 성행하던 곳들입니다. 장차 바벨론 군대가 침략할 때, 사악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부유해진 상인들은 마치 희생제사의 제물처럼 부르짖으며, 그들의 거래는 중단될 것입니다. 끝으로, 여호와께서는 마치 숨어 있던 물건을 등불을 밝혀 찾아내듯이, 심판에 무관심한 자들의 죄악을 밝혀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재물은 노략되고, 집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더 이상 풍요와 즐거움의 상징인 포도주도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사 62:8-9; 미 4:4; 슥 3:10).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물질에 대해 더 충성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물질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거룩함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교행위’, ‘혼합주의’, ‘종교적 무관심’ 등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우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멸망으로 치닫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내놓고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풍성함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 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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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서론


 

저자와 제목

(1) 제목

이 말씀의 창시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여호와’)이었지만, 이 말씀을 유다에 전한 예언적 중재자는 스바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스바냐의 이름을 따서 ‘스바냐’라고 명명되었습니다.

(2) 저자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숨기셨다/보호하셨다’를 뜻입니다. 그의 부모의 경건함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1의 계보는 스바냐가 두 악한 왕이 왕좌에 오르기 전에 경건한 유다의 통치자였던 히스기야의 후손임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저작 연대

이 예언은 중요한 남유다의 왕인 요시야(BC 640~609)가 다스리던 시대에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에 이미 멸망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언급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남은 부분, 즉 남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남유다 16대 왕 요시야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 시대 이래로 폐지되어 버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의식을 재확립하려 노력한 종교개혁 군주였습니다.

 

주제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스바냐가 더 일관되게 선포했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1:7 등). 이 다가오는 날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국면과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복의 국면이라는 두 가지 국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형벌에 있어서나 자신의 공평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배경, 특징

(1) 배경

당시는 악한 왕 아몬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개혁을 이룬 요시야 왕의 통치 초기였다. 그러나 국외적으로 앗수르가 근동 최강국의 위치를 굳혀 유다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2) 특징 

⓵ ‘여호와의 날’ 사상 – 여호와의 알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 성격을 자세히 부각시키고 있다.

⓶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 – 수식어를 거의 사용치 않고 운율성을 강조하지 않은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제를 채택하고 있다.

(3) 내용

        ① 하나님은 온 땅과 유다와 유다의 이웃 이방 나라들을 똑같이 심판하실 것이다.

        ②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분으로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되돌아오면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③ 하나님은 복과 은혜를 모든 민족과 나라에 베풀기를 원하신다.

        ④ 심판과 복은 가까운 미래에 선지자와 선지자의 청중에게 발생하며 또한 먼 미래에도 발생한다.

       ⑤ 2세대 하나님의 자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앞 세대의 믿음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해야 한다.

 

문예적 특징

스바냐서는 이른바 ‘소선지서’ 가운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축소판 ‘대선지서’처럼 보인다. 스바냐서에는 심판 신탁(1:1~18), 이방에 대한 신탁(2:4~15), 소망의 신탁(3:8~20) (암 2:4 이후의 아모스서와 매우 비슷하게 관심사가 나라 밖에서 나라 안으로 바뀌는) 2:1~3과 3:1~7은 예루살렘에 예리하게 적용되는 ‘전환적’ 신탁의 역할을 한다.

스바냐서의 문예적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 다가올 심판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시라는 방편을 사용하는 것, 회개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하나님의 복의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에 대한 마지막 신탁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 지위와 재물이 있는 이들을 고발하는 동시에 백성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특히 습 2:3. 이 둘은 3:11~13에 압축되어 있다).

 

스바냐 개요

1. 심판의 예언(1:1-3:8)

    (1) 유다의 심판(1장)

    (2) 열방의 심판(2장)

        ① 서론(1-3)

        ② 블레셋의 심판(4-7)

        ③ 모압과 암몬의 심판(8-11)

        ④ 구스의 심판(12)

        ⑤ 앗수르의 심판(13-15)

(3) 예루살렘의 심판(3:1-8)

 

2. 구원의 예언(3:9-20)

        (1) 이방인의 구원(9-10)

        (2) 이스라엘의 구원(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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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2-01)
 


의로운 삶의 유익

잠언 12장 1-14절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살다보면, 이따금 ‘의롭게 살아서 뭐하나?’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편법과 이기심으로 사는 인생이 성공하는 듯 보이고, 원칙을 지키며 의의 길을 좇는 이들은 뒤처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의로운 사람의 길은 생명이요, 미련한 사람의 길은 죽음이라고 경고합니다. 더불어, 의로운 삶의 유익을 보여주며 격려합니다.
 
의인과 악인 또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들의 생각, 말, 행동, 사람들에게서 듣는 평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보응 등 자신과 자신, 자신과 타인, 자신과 하나님 간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현재 내가 선택하는 마음의 태도와 말과 행동이 내가 맺을 열매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특징(1-3)

자신이 가장 지혜롭고 완벽하다고 생각하여 훈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사실상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깨닫고, 교훈과 책망을 수용할 때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뿌리를 하나님께 내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까?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1-3)
잠언 12장은 의인과 악인의 본질을 언급하며 진실하고 화평한 말과 근면 정신을 함양합니다. 오늘 본문인 1~14절은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하는 금언 중 말과 재물의 주제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며, 나머지 15-28절은 정직과 화평의 말과 근면이 강조되었습니다.
먼저, 1-3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본질(1, 3)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보응(2)에 대해 말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본질적인 구분은 첫째, 훈계를 받아들이는 여부에서 나타납니다. 1절은 훈계를 좋아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를 각각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미련한 짐승으로 대조함으로써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였습니다. 12:1의 현명한 사람과 미련한 짐승의 구별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지식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여기서 지식은 ‘지혜’의 다른 표현으로써 훈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교훈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과 판단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3:5-7) 그런 교만한 마음에는 훈계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둘째, 의인과 악인은그들이 삶의 기초를 어디에 뿌리내렸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3절은 의인과 악인을 나무로 비유하여 각각의 뿌리가선과 악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악인에게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미래가, 의인에게는 견고하고 안정된 미래가 기대됩니다. 이와 같은 비교는 시편 1편의 물가에 심긴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 또는 예레미야 17:5-8의 사막의 마른 나무와 물가에 뿌리내린 청청한 나무의 비교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으로 굳게 서는 의인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은 의인과 악인의 본질과 결과(1, 3)는 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2)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훈계를 좋아하고 선으로 견고히 서 있는 의인에게 은총을 주시나, 훈계를 싫어하고 악을 좋아하여 악을 꾀하는 자들은 정죄하실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언행과 결과(4-8)

말과 생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냅니다. 의인은 바른 생각과 정직한 행동으로 그가 의인임을 드러내고, 악인은 다른 사람을 해하며 속이는 일을 도모하여 그가 악인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인이 날고뛰어도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의인입니다. 우리 생각과 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4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5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6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7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8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4-8)
 4-8절의 금언들은 부인이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력(4),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생각, 말, 운명(5-8)에 대한 내용을 기술합니다.
먼저 4절은 ‘어진 여인’을 자기 남편의 면류관과 같은 존재로, ‘수치스러운 여자’를 자기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존재로 소개합니다. 어진 여인은 문자적으로는 힘의 여인이며 성경 다른 곳에서 ‘현숙한 여인’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잠 31:10-31; 룻 3:11). 이때 ‘힘’이란 육체적 힘만이 아니라 성품, 경제력, 재능 등에서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잠언의 마지막 단락인 31:10-31의 ‘힘의 여인’에 대한 이상적인 묘사가 이 점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 단락은 ‘힘의 여인을 누가 찾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와 같은 여인을 찾는 지혜로운 남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이런 여인의 값어치는 진주보다 귀하며(31:10) 이와 같은 여인은 본인도 영광을 얻고(11:16) 그녀의 남편에게도 면류관(12:4)이 되어 남편 또한 영광을 얻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여인이 힘의 여인으로 불리며 가정과 사회에서 칭찬을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이며 이를 삶에 실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31:30).
한편, 수치스러운 여자는 어떠한가? 본인에게 치욕거리를 만드는 이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자입니다. 뼈가 썩는 것은 살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훨씬 그 상태가 심각하고 위중합니다.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썩어 들어가는 고통과 냄새와 괴로움은 당사자의 몸과 마음을 다망가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힘의 여인이나 수치스런 여인을 잠언 1~9장에서 각각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1:20-33; 2:10-22: 4:5-9; 8:1-36; 9:1-6)와 우매(2:16-19; 5:1-23; 6:20-35; 7:127: 9:13-18)와도 연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현명한 여자를 찾고 음녀를 피하라고 권면한 것은 누구든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하는 지혜를 얻고 미련함을 벗어나라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5-8절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생각(5), 말(6),운명(7-8)에 대한 금언들로 구성되어 의미상 연결됩니다. 5-6절은 의인과 악인의 말이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의인은 정의를 생각하고 정직한 말을 하므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궁지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속임수를 계획하고 남을 무고히 해치려고 음모를 꾸며자신과 다른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악인의 이런 모습은 1:8-19의 무죄한 사람을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며 사람의 피를 흘리려는 강도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7-8절은 이 같은 악인과 의인의 언어와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7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반응(행동)이며, 8절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반응(말)입니다. 의인은 정직을 선택하는 지혜자이므로 사람들에게서 칭찬의 말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입어 그와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견고해집니다.
이와 반대로, 악인은 마음이 비뚤어져 거짓과 남을 해하려는 언행을 일삼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멸시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와 그의 공동체가 파괴되어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이 맺는 열매(9-14)

불법으로 얻은 소득을 방탕하게 사용하고, 수고로이 일하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잠시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지만, 그 열매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의롭게 살아갈 때 참 열매를 얻을 수 있고, 깊은 뿌리로 말미암은 열매라야 튼실합니다. 속성으로 키워 모양만 낸 열매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9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10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11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12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13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14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9-14)
9-14절의 금언들은 10절을 제외하고 의인과 악인의 재물(9, 11, 12)과 언어(13, 14) 그리고 이로 인한 열매를 대조합니다. 9절은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보다 조개 속의 진주에 가치를 두라는 금언입니다. 가진 것이나 능력이 부족한데도 외적으로 뻐기며 포장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미련한 자이며 후회와 고통만 증대됩니다. 그러나 설령 남들이 몰라주고 업신여긴다 해도 실제로는 종을 부릴 정도로 재물과 지혜와 능력을 가진 자는 삶에 기쁨과 만족이 넘칩니다.
10-14절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10절은 의인과 악인의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다룹니다. 의인은 마음에 긍휼과 자비가 있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까지도 보살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마음에는 긍휼이 없으며, 그에게 있어 긍휼이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꾸민 잔인하고 악한 궤계일 뿐입니다.
11-12절은 다시 재물과 그에 따른 결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절은 9절과도 내용상 연결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땅을 성실히 경작한 자는 그에 따라 풍성한 소득을 얻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방탕하고 헛된 것을 뒤쫓는 자는 9절의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음식보다 분별력이 핍절한 자입니다.
11절에 이어 12절에서도 의인과 악인의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은 다른 악한 자들의 탈취물까지도 탐하지만, 의인의 뿌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때 의인의 뿌리는 의인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신뢰와 실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4절은 입술의 열매에 대한 금언입니다. 악인은 본인의 말로 인해 스스로 덫에 빠져들지만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납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가 뿌린 말과 행동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불의한 방식으로 손쉽게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쉽게 열매 맺지 못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은 많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의로운 삶이 주는 유익과 가치를 확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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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04-02)


문안과 축복

골로새서 4장 10-18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 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항상 누가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참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세 많이 지고 간신히 해낸 일입니다. 기적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건 그걸 알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에 무한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 6명의 동역자들을 소개하는데, 그 중 3명은 유대인이며, 다른 3명은 이방인 출신입니다. 바울은 함께 있는 동력자들의 무한 인사를 전하면서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에바브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의 교회를 세우고 섬긴 사람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각각 서신을 보내며 서로 돌려가며 그 서신을 읽으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의 문안(10-14)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동역자보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복음에 함께 동참하는 동역자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처지면서도 함께 사역한 동역자들의 수고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이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0-14)

바울의 골로새 교회를 향한 문안 인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과 함께 골로새 교회 문안인사를 보내는 6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3명은 유대인 아스다고 마가 유스도이고, 다른 3명은 개종한 헬라인 에바브라 누가 데마입니다.

⑴ 문안인사 :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10-11)

사도 바울과 함께 골로새 교회에 문안인사를 보내는 여섯 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세 명은 유대인(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이며, 다른 세 명은 개종한 헬라인들입니다(에바브라, 누가, 데마).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마가 그리고 유스도를 소개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입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개종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행 17:1-9). 그는 개종 후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했는데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행 19:29). 또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로 여행할 때 동행했으며, 로마에서 바울과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참된 친구와 동역자는 어려울 때 함께하는 자입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참된 친구이며 동역자였습니다.

다음 인물은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 요한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행 12:12,25). 마가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을 함께 출발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버가에서 도중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행 13:13). 나중에 제2차 전도여행에 함께 동참하려고 했지만, 바울은 그를 데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바나바와 크게 싸운 후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결별하여 각각 따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행 15:36-41). 그랬던 마가가 지금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과 마가는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었으며 지금은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가에 대해서 독자들이 이미 받은 명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가 이르면 특별히 잘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마가’에 관한 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마가를 잘 영접하라고 부탁한 것은 아마 그가 과거에 성실하지 못했던 일로 인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거나 홀대할까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반성하고 그 이후에 심기일전하여 성실하고 헌신된 자로 점점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영원히 그를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인정받는 자로 거듭났습니다. ‘유두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바울은 그를 할례파 즉 유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 사람의 유대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하는 자들로 묘사되지만, 이들은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⑵ 문안 인사 : 에바브라, 누가, 데마(12-14)

바울은 세 명의 유대인 출신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후 이제 개종한 헬라인 동역자 세 명의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에바브라’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특별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평소에 바울 자신의 사도직 직분을 강조하면서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라’에게 그러한 표현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인정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골로새서 1장 7절에서는 에바브라를 ‘함께 종 된 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은 두기고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골 1:7;4:7). 바울은 독자들에게 에바브라가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알리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너희를 위해서 항상 애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애쓰다’는 고통 가운데 투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직면해 있는 골로새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9절에서 독자들에게 관한 소식을 들은 날부터 계속해서 기도해 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바울에게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쉬지 않고 고향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이단적 가르침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증거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교회를 위해서도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증거한다는 것은 에바브라의 수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바울이 전했던 복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증하고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의심하지 말고 에바브라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누가’와 ‘데마’의 문안 인사도 전합니다. ‘누가’는 사랑받는 의사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가 바울의 의였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데마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합니다. 한때 바울을 도왔던 동역자들이 그가 노쇠하고 병들었을 때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부탁과 마지막 인사(15-18)

누구나 고난이나 고통의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극심한 고난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긴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도 고난 앞에서는 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15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5-18)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처음 믿을 때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때로는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모든 성도와 오래 함께 협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함께함으로 귀한 동역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⑴ 바울의 부탁(15-17)

바울은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후 이제 자신의 간단한 문안인사와 부탁의 말을 전합니다.

바울은 특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눕바라는 여인과 그녀의 가정 교회에 문안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눕바(Νυμφα)’라는 여인은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 교회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각각의 서신을 따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라오디게아 교회와 서신을 서로 돌려 읽으라고 특별히 부탁합니다. 각각의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서로 달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교회가 그 편지를 서로 교환하여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아킵보의 이름은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킵보는 빌레몬서에서 바울과 함께 군사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킵보는 빌레몬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아마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킵보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라고 부탁하는데 그 직분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⑵ 끝인사(18)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 서신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친필로 서명하여 확증합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누군가에게 대필하게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자신의 친필로 문안 인사를 첨가함으로 이 서신이 다른 사람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서신이라는 사실을 보증합니다.

바울은 ‘내가 매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서신을 끝맺습니다. 아마 이것은 독자들에게 바울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일 것입니다. 서신은 축복으로 마무리됩니다.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약함을 주님 안에서 용납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이 곁에 있는 사람, 용서하고 관용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역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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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04-01)


지혜롭고 은혜롭게 행하라

골로새서 4장 2-9절


혹시 직장이나 가정에 어려움을 당할 때, 무엇이 가장 생각이 납니까? 또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이 정답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가 정답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꼐 모든 상황을 올려드리고 맡겨드린 문제의 마스터키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질적인 메시지를 마치고, 마지막 권면과 부탁의 말을 합니다. 권면의 내용은 기도와 지혜로운 행위 그리고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명합니다. 마지막 권면은 성도들을 향한 태도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한 태도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독자들은 자신과 성도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지혜롭게 행동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여 복음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라고 권면합니다.

 

마지막 권면(2-6)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하는 모든 권면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자신들을 위해 기도와 감사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지혜로운 행동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어 마음을 열어주고, 복음을 전할 기회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2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의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2-6)

바울은 이 서신의 기록한 목적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제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성도의 삶에 대해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첫째, ‘계속해서 기도하라’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골로새 성도들 자신들과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2-4). 둘째, ‘지혜롭게 행하라’라는 권면인데, 이것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5-6).

⑴ 계속해서 기도하라(2-4)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먼저 그 자신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골 1:9). 이제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눅 11:5-13; 18:1-8). ‘계속하라’는 명령에는 단지 시간적으로 쉬지 말고 계속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에 헌신되고 준비된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계속 기도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누구를 위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는 헌신되고 준비된 다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기도에 깨어 있으라’고 보충하여 말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종말론적인 경각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경각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으로 깨어 있는 것과 더불어 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특히, ‘감사함으로 기도에 깨어있으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항상 감사하면서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흑암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 아들의 영광스러운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골 1:12-13). 바울은 독자들이 항상 감사하고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특별히 디모데와 에바브라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골 1:1,7; 4:12).

기도의 목적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감옥에서 석방되어서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재판정에서 자신을 위해서 변론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조차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감옥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밖에서 자유롭게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제 갇혀 있을 때에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갇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형편을 주시면 복음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 헌신된 자입니다.

⑵ 지혜롭게 행하라(5-6)

사도 바울은 이제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고 은혜롭게 말을 해야 합니다. 먼저 이방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지혜는 바울이 강조했던 것으로, 모든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골 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곧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거짓 교사들의 ‘교묘한 말’과 대조됩니다(골 2:4). 지혜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지만, 교묘한 말은 독자들을 속여서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잘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는 이방인들을 만나는 시간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방인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쓸데없는 논쟁이나 무익한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유익하게 잘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행위는 선한 행위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롬 15:9).

‘너희가 이방인 중에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벧전 2:12)

둘째, 이방인들에게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명합니다. ‘은혜로운 말’이란 복음에 합당한 경건하고 의로운 말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말할 때에는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태도에 있어서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은혜로운 말을 소금으로 맛을 낸 음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질문하면 언제라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혜롭게 행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는 것에 습관이 된 자들은 이방인들의 질문에 마땅히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7-9)

거룩한 성품을 가꾸는 데 있어서 ‘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와 같이 말과 혀는 사람의 마음과 생명을 좌우하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약 3:4-5; 잠 18:21).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히 간을 맞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의 혀를 즐겁게 하듯, 지혜롭고 적절한 말로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공급하고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말로 상처를 준 일은 반드시 회개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7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주리라(7-9)

사도 바울은 이제 골로새서를 마무리하면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합니다. 성도의 삶에 대한 권면을 마치고 서신을 마무리 부분으로 진행합니다. 바울 곁에 있다가 골로새 교회로 갈 두 사람을 추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⑴ 두기고를 보냄(7-8)

먼저 이 서신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바울의 사정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두기고가 바울의 사정과 형편을 독자들에게 다 알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에바브라가 바울에게로 간 후에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주로 글보다는 말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꼭 필요한 메시지를 글로 써서 보내고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소식과 사정은 두기고를 통해서 들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서 세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첫째 그는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둘째 신실한 일꾼입니다. 셋째 그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된 자이라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마지막 무렵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와 드로와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에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바울이 젊어서 왕성하게 선교 사역을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갇혀 늙고 병들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두기고는 바울의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몇몇 사람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두기고를 보내는 목적은 이 서신을 전달할 뿐 아니라 바울을 대신해서 그들을 위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⑵ 오네시모를 보냄(9)

두기고와 더불어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향해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이며 너희에게서 온 자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너희로부터 내게 온 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골로새 출신임을 말해줍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 성도였던 빌레몬의 종이었으나, 지금 주인을 버리고 도망쳐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로 왔습니다. 바울이 도망친 종을 향하여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파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인사 치례가 아니라 사실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지금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칠 때는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 바울뿐 아니라 고르세 교회 성도들에게도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가 다시금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도망쳤다가 주인에게 잡히면 십중팔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잘 대해주라고 부탁하긴 하지만 그가 다시 주인의 노예로 돌아간다는 것은 분명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사로잡혀 돌아가는 도망친 노예로 취급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의 말을 전하는 사자로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책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이며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기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기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을 아끼며 살 때 세상에게 할 말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진짜가 아니면 세상에게 진짜를 소개해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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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03-0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

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라면, 당연히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땅의 질서를 따라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을 닮아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을 창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아버지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작은 예수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로, 부부간,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들과 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것처럼 그들도 서로에게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옷 입으라(1) : 사랑의 삶(12-14)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하심을 받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신분인 새로운 사람에 걸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구습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받은 우리는 주님처럼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면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새 사람의 성품을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12-14)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시고 거룩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이전에 입었던 옷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부분의 내용과 의도는 앞부분과의 연관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⑴ 다섯 개의 덕목(12)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 입어야할 ‘옷’이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개의 기독교적 덕목입니다. 이 덕목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덕목으로 무장하는 것을 옷 입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영적인 옷에 의해 드러납니다. 독자들이 옷 입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은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창조를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기에, 마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이라고 묘사합니다(1). 이것은 구약에서 언약에 따라 택함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들입니다. 이제 이방 종교로부터 개종한 독자들에게 이 표현을 적용함으로,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1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다섯 가지 덕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신 것들입니다. ‘긍휼(σπλαγχνον스플랑크논)’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라면, ‘자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입니다. ‘겸손’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며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며 온유함의 전형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인내’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⑵ 서로 용납하라(13)

사도 바울은 다음으로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위 12절에서 말한 다섯 덕목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재진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할 원인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야 합니다.

용서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용서함을 받았으면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고 말은 쉽지만, 사실 것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하셨겠습니까! 그만큼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 있는 불만입니다. 불만은 본질적으로 불의이나 악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생길 수 있는 불평입니다. ‘용납한다’는 것은 형제들의 약점을 감당하고 견디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의 약점을 지적하고 비난하기보단 서로를 용납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단어는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의 약점을 용납하고 감당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용서가 온몸으로 느껴질 때가 되면, 자신도 어느새 용서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⑶ 사랑을 더하라(14)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기독교의 덕목들을 완전하게 하나로 묶는 띠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에서 설명한 기독교의 덕목이나 용서는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도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은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본받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옷을 입으라(2) : 평강과 감사와 말씀의 삶(15-17)

기준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자유가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있어야 안전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하나님의 기준을 얻는 일입니다. 이것은 물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구명조끼와 같습니다.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5-17)

성도는 자유인입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인지 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자신을 다스리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배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처럼 평화를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창조하고 타인을 살려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⑴ 그리스도의 평강(15)

바울은 ‘옷 입으라’고 명령했던 바울은 이제 ‘주장하게 하라’는 명령으로 계속 권면합니다. ‘주장’하는 주체는 그리스도의 평강이며, ‘주장’되어야 할 대상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교회가 평강으로 한 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이지만 사탄은 죄라는 수단을 통하여 다툼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여기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를 주장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주장한다’는 것은 운동경기에서의 심판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⑵ 그리스도의 말씀(16)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할 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리스도의 평강’과 병행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강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신다면, 우리는 서로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앞에서 모든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골 2:3), 독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골 1:9). 여기서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지혜는 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말과 헛된 가르심과 대조됩니다(골 2:4,18).

⑶ 그리스도의 이름(17)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이어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한다는 뜻과 ‘그리스도의 마음과 심장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말에나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욕되지 않고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18-4:1)

성도의 가정에는 사랑과 섬김의 질서가 작동합니다. 순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사랑으로 그 순종에 화답합니다. 주 안에서 종들에게 주인은 하늘의 상전과 같습니다. 하늘의 상전을 대하듯이 정직하게 인간 주인을 상대해야 하고, 상전은 하늘 상전을 대하듯 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18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1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18-4:1)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17)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몇 가지 삶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는 가정의 영역에서 각 구성원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그리고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고 행할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 부부관계(18-19)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그 안에 남자와 여자로 구성하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역할적인 부분에서 남자에게만 특별한 역할을 주시고, 또 여성에게도 특별한 역할 주셔서 가장을 이룰 수 있는 동기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도 잘 협조하고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본문에 메시지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때, 그 안에 진정한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권고합니다. 남자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또 여자들에게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화롭게 아름답게 주셨습니다. 남편들이 힘을 가지고 부인들을 어렵게 하면 가정이 불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아내를 사랑할 때, 아가페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아내를 자신의 마음에 품고 그것으로 기쁘게 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이 남편된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으로서, 또한 부인으로서 역할을 주셨는데, 그 주의 마음으로 잘 품고 나눌 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아름다운 부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2) 부자관계(20-21)

다음으로, 자녀들에게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것이니라’(20)라고 권고하십니다. 자녀들에게 주시는 주시는 말씀은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모든 것들을 겸비하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특별히 특별히 십계명 중에 1-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지만, 5-10계명까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계명 중에서 첫 계명으로 세우신 것은 그만큼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자녀들입니다. 계속적으로 자녀를 통해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마음을 품고 축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을 가지고, 때로는 우리가 대화할 때, 마음이 깨어지거나 또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대할 때, 유리그릇을 다루듯이 조심해서 그 아이의 인격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좋은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내고 잘 가꾸면 쉼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으로 들어가고 싶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엉겅퀴가 나고 다른 가시가 나서, 가정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을 잘 복구하고 관리하고 잘 수리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바울을 통해 골로새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가정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잘 양육하여서 하나님의 거룩을 가지고 계속 거룩함을 추구함으로, 그런 거룩한 교회로 발전시키는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3) 주종관계(23-4:1)

종들에게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22)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그 당시에는 종과 상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잘 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현재 적용한다면, 회사 안에 직원이 상사인 우리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잘 섬기는 것이, 하나의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대하듯 행할 수 있다면, 그 삶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계시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섬길 때, 또한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과 스타일이 있다면, 여러 면에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모든 사람들을 주께 대하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25절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본성이 우리를 외모로 취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어리고 비록 연약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왕으로 이끌어 주시고, 또 이스라엘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에, 항상 중심이 하나님께 열려있고 순종하고 솔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들에게만 권고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 상전들에게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전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과응보로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우리에게 여러 가지 판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잘하면 함께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모습이 이러한 가운데서 아름답게 생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남성 우월주의나 노예 제도에 대해서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화와 제도일 뿐입니다. 사실 어떤 시대에 어떤 문화와 제도라도 이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문화와 제도에는 항상 어떤 모순과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라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종들에 대해서 특히 많이 강조하면서 주인에 대한 권면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성도들 중 종의 신분에 있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골로새 교회 오네시모라는 종은 주인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쳐서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종들에게 특별히 권면을 해야 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도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힘을 의지하여 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분처럼 사랑하고 욕망면 그분처럼 자유로워집니다. 인간다워집니다. 삶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분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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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03-01)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장 1-11절


성도는 빛 가운데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구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 뜻과 계획 그리고 바람보다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을 성령으로, 성경의 말씀으로 거룩한 주의 교회를 통해 지침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독자들이 세례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설명한 후에 이제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죄 아래 속했던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려면 땅에 속한 옛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버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때달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1-4)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신 나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중에게 여기며 하나님의 가치들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1-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시편 110편 1절)는 세상 밖의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뜻이요, 땅의 것은 무엇이든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다스림을 망각하면 땅의 것, 돈이나 권력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영생의 소망과도 멀어집니다. 나는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얻을 때보다 주의 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더 사모하며 기뻐합니까?

⑴ 위의 것을 생각하라(1-2)

사도 바울은 앞에서 육체에 따라 살아가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옛 사람은 죽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하늘에 속한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독자들이 살리심을 받았다는 설명은 육체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그들이 판단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논리로, 교회에서는 교회의 논리로 산다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 다스리는 곳을 의미하고, 그것은 교회만 온 세상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므로, 영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은 곧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광한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지금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후에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독자들도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마땅히 하늘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하늘에 있는 거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독자들이 여전히 과거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행하던 생각과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고 생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속한 자들인지 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속한 자들인지 인식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육체에 속한 세상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늘에 속한 자들이라면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⑵ 너희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3-4)

사도 바울은 독자들이 하늘에 속한 자들이 한 사실을 다시 강조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육신의 눈으로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리스도는 죽었고,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십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존재라면 그들의 영적인 생명도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지금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추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면 이 사실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들의 영적인 생명이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영광 중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나중에 그렇게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 중에 나타날 것에 대한 소망은 지금 이 세상에 죄와 더불어 고난 가운데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소망과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육신을 죄로부터 떠나라(5-11)

육체의 목숨이 있으면 충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짐승과 다를 봐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할 때만 영위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박대영 2:32)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5-11)

위의 것을 차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모습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전에 그 가운데 살 때는 그 가운데서 행했다고 말합니다.

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7)

바울은 1절에서 ‘위의 것들을 찾으라’고 했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위의 것들을 찾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위의 것들을 찾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땅의 것들을 생각하던 땅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라는 명령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골로새서 2:12,13,20;3:3). ‘죽었다’는 사실적인 선언과 ‘죽이라’는 명령이 함께 나타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을 통한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덧입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과거의 죄에 얽매여 있던 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배어 있는 죄의 속성을 지체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예수께서도 범죄하는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27-30).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죄에 얽매여 있는 생각이나 행위를 철저하게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울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이라는 다섯 개의 악의 목록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독자들이 회심하기 전 과거 이방인으로 있을 때 행했던 습성들입니다. 이 다섯 개의 목록은 주로 마음의 생각과 관련된 것입니다.

⑵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8-9)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에 대해서 재차 강조합니다. 이번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말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비슷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독자들이 과거에 행하던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번에도 벗어버려야 할 다섯 개의 악의 목록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분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입니다. 바울은 말과 행위로 나타나는 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특히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속이는 거짓말은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킨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 아래 있는 옛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울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옛 사람은 존재론적인 문제이고 행위는 실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단지 어떤 불의한 행위만이 아닙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 존재가 그대로 있으면서도 어떤 죄의 행위를 절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이고 속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존재론적인 측면과 행위론적인 측면에서 모두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⑶ 새롭게 창조된 자들(10-11)

바울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8절에 ‘벗어버리라’는 말은 명령형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라는 말은 사실적인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도들이 악한 행위를 벗어버려야 할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창조는 단지 불의한 행위를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까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던 인간이 스스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땅에 속한 옛 지체의 죄악을 죽이고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백성들에게는 신분이나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파나 무헬라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는 한 하나님의 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변화와 공동체의 연합으로 나타납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도 변합니다. 새 사람을 입은 삶은 인종, 지역, 성별의 벽을 허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은 만유를 지으시고,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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