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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5-02)


 순종하는 자가 얻는 지혜

잠언 15장 19-33절


노르웨이는 6년 연속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2014 세계 번영 지수’에 따르면, 노르웨이는 8개 분야 중 특히 사회구성원 간의 협조나 네트워크, 자선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 69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잠언은 다양한 주체들을 통해 사회구성원 간에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움과 우매함의 구분이 ‘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이나 조언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시기적절한 말로 도움을 주는 자가 지혜로운 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부모를 경시하고 자신만 믿고 모든 것으로부터 귀를 닫아 버리는 자는 죽음의 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매자의 길과 지혜자의 길(19-24)

지혜자와 우매자를 여러 방면에서 대조합니다. 지혜자가 곧고 평탄한 길을 가는 자라면 미련한 자는 스스로 자기 삶에 장애물을 놓는 사람입니다. 지혜자는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만 미련한 자는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어서 경영이 무너집니다. 지혜자는 때에 맞는 말을 하며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습니다. 이는 악인의 종착지가 사망인 것과 대조됩니다.

19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20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21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22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23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4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19-24)

19-24절 단락은 처음과 마지막에 각각 ‘게으른 자의 길’과 ‘정직한 자의 길’ 그리고 ‘지혜로운 자의 생명길’이 나타나 수미일치(처음과 끝에 같거나 유사한 말을 써서 단락을 나타내고 강조하는 형식)를 이루며 한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19절의 금언은 게으른 자의 길을 가시밭으로, 정직한 자의 길을 ‘대로’(15:19)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게으른 자의 대조로 부지런한 자가 아니라 ‘정직한 자’를 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게으름이 단순히 꾸물거리고 일을 미루는 것만이 아니라 부정직한 말이나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게으른 자가 가는 길은 가시 울타리와 같습니다. 이 ‘가시 울타리’는 게으른 자가 걷는 길에서 만나는 문제들, 곧 장애물을 말합니다. 반대로, ‘정직한 자’가 가는 길은 높이 쌓아 올린 길이며 장애물을 찾아볼 수 없는 곧고 평탄한 길입니다.

20-21절은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0절에서 지혜자는 10:1과 같이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출애굽기 20:12의 계명을 지키며 부모를 공경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전하는 훈계를 들으며 그 훈계로부터 지혜를 얻습니다(4:1; 13:1). 반면, 미련한 자는 부모의 가르침과 경책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13:1; 15:5), 더 나아가 부모를 멸시하고 경멸합니다(19:26). 나를 낳고 기르신 부모를 공경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따르는 지혜자의 참 모습입니다.

21절은 미련한 자의 헛된 즐거움을 20절의 지혜자의 참된 즐거움과 대조하여 교훈하는 금언입니다. 21절의 ‘미련한 것’은 문자적으로 ‘마음이 미련한 것’을 말합니다. 무지한 자가 스스로의 마음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따라 행악하기를 즐거워하며 악인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입니다(10:23; 15:9).

22-23절은 조언에 대한 금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2절에서 미련한 자는 자기 계획이나 생각을 다른 이들과 의논하지 않는 자로 소개됩니다. 그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겨 자신의 미련함을 따라 혼자 결정하기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11:14과 같이 친밀하게 조언하는 자들을 곁에 많이 두고 신중하게 판단하여 행하기 때문에 자기가 뜻한 바를 이룹니다. 이처럼 일을 계획하고 진행함에 있어서 나를 맹신하는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주위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뜻하는 바를 이루는 지혜입니다(13:10). 23절에서는 특히 적절한 때에 건네는 올바른 조언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24절에는 19절에 나타난 ‘길’의 주제가 다시 반복되어 나타나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도 선택할 수 있는 두 길을 제시합니다. ‘위로 향하는 길’과 ‘아래로 향하는 길’은 각각 ‘생명의 길’과 ‘스올(죽음)로 가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가는 길은 19절에 언급되었듯이 높이 쌓여 걸릴 것이 없는 곧게 뻗어 있는 길로서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이 지향하는 곳과 종착하는 곳은 죽음입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것(25-29)

여호와는 자신을 경외하는 지혜자를 기뻐하시고 자신을 멸시하는 미련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자와 악인의 잔꾀를 미워하셔서 그들의 집을 허십니다. 그들이 뇌물로 얻은 불의한 이익이 도리어 그들의 집을 해롭게 하게 하십니다. 악인은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으십니다. 의인이 숙고하여 내놓은 선하고 정결한 말을 기뻐하십니다.

25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26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7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28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25-29)

15장의 마지막 단락인 25-33절에는 ‘여호와’란 명칭이 다른 곳보다 자주 나타나면서(25, 26, 29, 33), 10-15장의 주제들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로운 아들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호와의 훈계를 따르는 자라고 요약됩니다. 특히 25-29절은 말에 대한 주제가 두드러져, ‘의인의 선한 말’(26), ‘대답할 말’(28), ‘기도’(29)와 함께 악인의 입으로 쏟는 ‘악한 말’(28)이 나타납니다.

25절의 금언은 여호와가 교만한 자를 미워하고 그 집을 허무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집’은 장소적 개념만이 아니라 가족 집안의 의미를 포함하고 모든 재물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교만한 자가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며 자신의 것을 쌓지만 여호와는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심으로 그를 심판하심을 명백히 설명합니다. 반면, 가난한 과부는 의지할 곳이 없기에 겸손히 여호와만 의지하고 그의 도움을 받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삶에 관여하시고 그들을 돌보십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악인의 집을 무너뜨리실 뿐만 아니라(25)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행위의 시발점이 되는 악한 생각과 계획도 몹시 싫어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꿀송이 같이 달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는’(16:24) 의인의 선한 말은 여호와께서 귀히 여기십니다.

27절은 경제생활에 관한 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하지 않은 이익에 마음을 빼앗겨 다른 이들을 해하며 이익을 챙기는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와 같은 불의한 재물은 결국 그 사람의 집안을 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불의의 재물을 싫어하는 지혜로운 자는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의인의 집은 든든히 세워지며, 여호와가 그 집을 풍성케 하십니다(12:7; 14:1; 14:11; 15:6).

28-29절에는 잠언의 주요 단어인 ‘의인’과 ‘악인’이 교차 대구를 이루며 언어생활에 관한 금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8절은 2절과 유사한 내용으로서 의인은 사려 깊은 말을 하지만, 악인은 거침없이 악을 내뱉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설명합니다. 29절에서는 각각 의인과 하나님, 악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와는 관계를 단절하시나 의인과는 가까이하시고 그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훈계를 따르는 자와 싫어하는 자(30-33)

지혜를 추구하는 삶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우리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혜를 추구하면 마음에 선한 질서가 작동하여 몸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마음의 즐거움으로 얼굴이 빛나고, 뼈가 든든해집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은 우리를 존귀한 자로 사람과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이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건강해진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30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31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32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3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30-33)

30-33절에는 ‘경계’, ‘훈계’, ‘견책’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나와 서로 연결되며, 훈계를 따르는 자와 훈계를 싫어하는 자를 대조합니다.

30절의 금언은 지혜가 훈계를 따르는 자의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활력을 주고 강건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31절에서는 지혜자를 ‘생명을 주는 교훈을 듣는 귀를 가진 자’로 설명하는데 이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귀로만 듣고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삶으로 응답하는 순종이 있어야 함을 확실히 설명해줍니다.

이와 반대로, 훈계를 받기 싫어하는 자는 32절에서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생명을 버리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미련한 자입니다.

33절의 금언은 여호와 경외가 지혜의 훈계라고 선언합니다. 잠언의 서문(1:2)에서부터 나온 단어인 ‘훈계’는 무엇보다 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지혜의 대치어로 나오며,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로 소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훈계 듣는 일을 기뻐하지 않지만, 잠언에서는 계속적으로 그 훈계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거절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훈계를 들으면 지혜로운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고 그에 따른 유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훈계는 여호와 경외를 그 밑바탕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33절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바로 지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훈계의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9:10)이며 나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3:5-7)을 의미합니다.


자기 입장과 맥란만 중요시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고르반이나 모르쇠로 반응하지 말고 굳게 드리운 휘장을 찢고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예방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각박한 일상에서 무엇을 통해 활력을 돋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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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5-01)


 의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잠언 15장 1-18절


말은 곧 그 사람 자신이고, 예배는 그의 신앙 자체이며, 행복에 관한 생각은 그의 가치관을 대변합니다. 만일 여기에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말도, 예배도, 행복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가치관, 본성이 집약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음 항목을 통해 우리의 진정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의인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며 아버지의 훈계를 따르고 여호와 경외함으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위에 덕을 끼치는 자입니다. 반면, 우매한 악인은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아버지의 교훈을 멸시하고 분을 쉽게 내는 미련한 길을 걷는 자입니다.

 

온화한 말과 과격한 말(1-4)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말을 잘 다루고 잘 듣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언변이 유창해도 그 말에 진정성을 담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힘듭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1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1-4)

1절은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오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나의 부드러운 대답은 상대방의 분노조차 내쫓지만, 고통과 모욕이 담긴 말은 상대방의 화를 끓어오르게 합니다.

1절과 수미일치를 이루는 4절은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온순한 혀’는 ‘치료의 혀’라는 뜻이고 ‘폐역한 혀’는 ‘속임의 혀’, ‘사악함의 혀’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말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나무와 같지만 사악한 말은 영혼을 깨부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1, 4절을 2, 3절과 연결해서 볼 때, 심한 말과 속임의 말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는 미련한 자며 악한 자입니다. 정직한 말을 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며 부드럽게 말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며 선인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말을 언제 어디서나 다 감찰하십니다. 그만큼 언어생활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언어가 나와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신중하게 생각하여, 일상의 말이나 행동에서 늘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온화함, 신실함, 정직함이 진심으로 배어 나오도록 애써야 합니다.

 

훈계를 따르는 지혜자와 거부하는 우매자(5-12)

훈계를 따르는 어부가 지혜의 유무를 결정합니다. 벌써 여러 번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타인으로부터 겸허하게 권면과 책망을 수용하여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자가 지혜롭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더 온전해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5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6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7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8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9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10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11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 12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5-12)

5-12절에서는 지혜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우매자가 각각 ‘미련한 자’와 ‘거만한 자’로 5절과 12절에 소개되어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5절에서 슬기로운 자는 지혜로운 아들로서, 앞서 10:1; 12:1; 13:1; 15:10에서 언급되었듯이 아버지의 훈계를 따르며 그의 책망을 듣고 삶을 고치는 자입니다. 반면, 우매자는 삶의 경험과 지혜에서 오는 아버지의 훈계를 하찮게 여기며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6-7절에서 지혜자는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그 지식을 마음에 쌓으며(2:1; 9:9; 10:14; 13:1), 그 입술로 지식을 널리 전파하는 자로 설명됩니다. 의인은 지식만 얻는 자가(5) 아니라 집에 보물도 쌓아 이웃에게 나눠주는 자입니다(6). 반면, 악인의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그와 그의 주변 사람에게 불안과 고통을 주고(6), 궁극적으로는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10:1-5). 그의 마음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 또한 없기에 미련하고, 기본 바탕이 견고하지 않으며 올바르지 않습니다(7).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악인의 말은 결국 공허하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8-9절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것을 악인과 의인의 대조되는 예배 생활과 삶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악자의 길을 가면서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자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의 일상 모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언행과 공의를 따라 사는 모습이 일상에 지속하여 나타날 때 하나님이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며, 그러한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10-12절의 금언들은 하나님이 바른길을 저버린 자와 책망받기 싫어하는 자를 엄히 징계하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0절을 5절과 연결해서 볼 때,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한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는 곧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미련한 자로서 필연적으로 죽음의 심판을 맞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은 사람이 볼 수도 없고 근접할 수 없는 곳인 스올과 아바돈 즉, 죽음의 영역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난다는 점을 밝힙니다. 3절에서와같이 감찰하시는 여호와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사람의 마음과 행위뿐만이 아니라 숨겨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는 보고 아십니다(시 139:1-4, 7-8; 눅 12:2). 그러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교훈을 받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책망받기를 싫어하여,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자들을 피하는 우매한 자입니다(12).

 

즐거운 마음과 근심의 마음(13-18)

지혜의 길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선순환의 질서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한 세력의 반대도 있고, 또 의미 있는 역사는 시간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변수도 있지만, 궁극에는 즐거움과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서를 거스르면 눈앞에의 성공에도 마음에는 근심과 불안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분을 내고 미워하고 번뇌하게 됩니다.

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4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5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16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13-18)

13-18절은 내면의 즐거움과 근심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금언이 주를 이릅니다.

13, 14절은 원문에서 ‘마음’이라는 단어가 각 절의 첫 단어로 등장하여 반복됨으로써 지혜자와 우매자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금언에서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라고 제안합니다. 13절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즐거움이 밖으로 드러나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심령’(영혼)을 상하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자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바른 마음을 갖고 즐거워하는 것이 영육 간에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14절의 금언은 명철한 자는 마음에서부터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찾고 구하나 미련한 자는 입으로 미련한 것을 즐길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즐기다’는 원래 ‘목양하다’라는 의미로서, 미련한 자가 자신의 마음뿐 아니라 입으로도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런 어리석음을 추구하여 더욱더 미련한 자의 삶을 키우게 됨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우매자의 모습은 지혜자가 마음을 잘 다스려 점점 더 지혜로워지는 모습과 상반됩니다.

15절의 ‘고난받는 자’는 16-17절과 연결하여 볼 때 ‘가난한 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5절에서는 가난한 자가 험악한 현실 속에서 어려움과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삶의 현장이 가난과 고통 속에 있음을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즐거울 때는 어려운 환경이 닥쳐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내적 안정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어 날마다 잔치하듯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15절은 13-14절과 16-17절의 중심에 등장하고 마음과 ‘즐거운(좋은)’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두 단락을 의미상 서로 연결해줍니다.

16-17절에는 ‘~하는 것이 ~보다 낫다(좋다)’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16절에서 ‘가난한 자’의 모습은 15절의 고난 받는 자와 연결성을 가지며, ‘부한 자의 마음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비록 가난하여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재물이 많아 다투고 시기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경외의 가치는 삶에 질적인 기쁨과 풍성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습니다. 17절은 15절처럼 잔치와 먹고 마시는 장면을 예로 들었으며, 이번에는 두 종류의 식사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하여 채소를 먹을 수밖에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잔칫상에 차려진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싸우는 것보다 낫습니다.

17절도 16절과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자의 삶이 물질의 소유나 그 풍부함에 있지 않음을 교훈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는 지혜자의 삶입니다.

18절은 다시 1절의 ’분노’와 연결됩니다. 1절에서는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내쫓는다고 설명하였고, 18절에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표출하면 싸움만 커질 뿐 화평을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14:17; 29). 즉, 화평한 말을 할 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강한 절제력을 실천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관계에서, 행복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진심이 빠져선 안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가장 삐걱거리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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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4-02)

 


가난한 자를 지으신 하나님

잠언 14장 20-35절


안녕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배후를 들여다보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부패한 사회 현상의 들러리가 되는 것도 모자라 앞장서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손에 넣은 것은 다 독점하려는 자는 결국 자기 꾀에 잠식당할 것입니다. 시험대에 오른 기독교 신앙, 어떻게 건져낼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나와 하나님 간의 올바른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그를 의지하며 그의 성품과 말씀을 따라 살 때 나와 나 자신, 나와 타인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경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왕과 같은 제사장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데 기초석이 되어줍니다.

 

악과 선을 도모하는 자(20-24)

지혜로운 자는 재물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재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인자와 진리를 사랑하는 성품을 동반하여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깁니다. 이런 마음이 있기에 지혜 있는 자에게 재물은 면류관이 되지만 어리석은 자에게 재물은 미련한 것이 됩니다.

20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21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22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23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24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20-24)

먼저 20-24절은 부와 재물에 관련된 금언과 악과 선을 도모하는 자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20절은 부와 가난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궁핍과 고통은 물질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이웃 관심의 부재와 인색한 마음에서 비롯된 미움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부유한 자는 재물이 풍부하므로 그의 주변에 친구가 많습니다. 20절이 부와 가난으로 인해 타인에 게 어떤 응대를 받는지에 대해 말한다면, 21절은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를 대조하여 이웃을 업신여기는 죄를 짓지 말고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행복을 맛보라고 권합니다. 22절의 금언은 악을 계획하는 자와 선을 계획하는 자를 대조합니다. 여기서 ‘도모하다’라는 ‘밭을 갈다’, ‘일구다’의 뜻으로서, 선악을 계획하는 것을 선악을 심고 거두는 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악한 음모를 갈고 있는 자는 제대로 좋은 것을 수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일구는 자는 인자와 진리를 얻습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되었으므로 선을 추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지지와 관심과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3, 24절은 20, 21절과 마찬가지로 부와 재물에 관련된 금언입니다. 23절은 일이나 노력은 하지 않고 말만 앞세운다면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음을 교훈합니다. 24절은 앞서 18절이나 4:9; 8:21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지혜와 지식이 사람의 면류관이라고 언급했는데, 14:24에서는 지혜자의 재물이 사람의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이 금언은 재물 자체보다 재물을 소유한 자와 재물 관리에 초점이 있습니다. 지혜자에게 재물이 있다는 말은 그가 정직하게 재물을 모았거나, 분별력이 있어 가진 재물을 자신과 남을 위해 적절히 쓸 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의미든 여기서는 지혜자가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재물은 그 사람의 됨됨이, 분별력, 긍휼을 보여주는 영화로운 면류관과 같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소유를 모으거나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의 미련함만 보일 뿐입니다.

 

여호와 경외의 유익(25-27)

지혜로운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는 진실한 말로 타인의 생명을 구하며 거짓말로 속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강하게 신뢰하기에 두려움이 없으며 그 자녀에게도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그 확신 때문에 생명의 샘처럼 생명의 활력과 생기 넘치게 살 수 있습니다.

25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26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2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25-27)

25-27절은 정직과 여호와 경외에 대한 금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5절을 포함하여 진실한 증인에 대한 권유와 거짓 증인에 대한 경고는 잠언에 종종 나옵니다(5; 19:5, 9.28; 21:28; 24:28; 25:18 등). 이는 법정에서나 일상에서의 거짓말이 중죄임을 확실히 밝히고, 정직한 말을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권유합니다. 26절과 2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유익과 이에 따르는 영향력을 설명합니다. 26절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되어주실 뿐 아니라 그의 자녀에게도 지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사회적, 윤리적, 신앙적으로 패망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덫에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점을 밝혀 여호와 경외의 영향력을 교훈합니다. 27절은 여호와 경외를 생명의 샘으로 비유하며 여호와 경외가 기쁨과 활력과 생기와 치료의 근원임을 드러냅니다. 그뿐 아니라 여호와 경외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알게 되므로, 매사에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사회적, 윤리적, 신앙적으로 패망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덫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고 설명합니다. 13:14에서는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을 생명의 샘으로 표현했는데, 이 구절과 연결해서 볼 때 지혜자의 교훈이 여호와 경외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실히 말해줍니다.

 

지혜로운 왕과 백성(28-35)

지혜로운 왕은 자기 위에 참다운 왕이 계심을 아는 자입니다. 따라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속히 분내지 않으며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을 학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공의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지혜로운 신하 역시 왕에게 은총을 입습니다. 지혜로운 백성과 왕이 만날 때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는 견고한 나라가 설 수 있습니다.

28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29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30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31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32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33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34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35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에게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28-35)

28-35절은 첫 부분인 28절과 마지막 부분인 34, 35절에 왕과 백성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한 단락을 형성하고 그 중간에는 여호와 경외와 지혜자, 어리석음과 지혜 등에 대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잠언 10장 이후로 14:28에서의 왕의 첫 등장은 26-27절과 연결하여 볼 때, 여호와를 경외하고 신뢰하며 영적, 도덕적으로 생명의 샘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모범으로 예시된 것입니다. 왕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 신명기 17:14-20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듯이 하나님이 왕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영적 지도자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고 배워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8절에 의하면, 왕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은 군사력이나 다른 나라와의 정치적 유대 관계나 자신의 부귀와 명성이 아니라 그를 지도자로 존중하며 지지하는 백성이 많고 적음에 있습니다.

29절은 감정 표출에 대한 경고로서 첫째, 분노를 늦추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로 소개하셨습니다(출 24:6), 하나님도 인간의 무지와 실수와 죄에 대해 긍휼한 마음으로 참으심을 기억하여 내 안에 솟구치는 분노의 불길을 꺼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야말로 지혜자와 의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둘째, 성급한 마음을 삼가라고 권고합니다. 감정과 순간의 판단이 이성을 앞지르게 두는 것은 올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흐리게 하는 어리석은 일이며, 이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내심과 이해심을 갖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언행을 실천하는 훈련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29절에 이어 30절도 내면에 대한 금언으로서, 마음에 명화가 있으면 영육 간에 생명력이 지속되지만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뼈가 썩듯 몸과 마음에 고통과 죽음이 따름을 설명합니다. 4:23이나 5:2, 6에서 언급하였듯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31절은 21절과 연결됩니다. 21절에서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였고, 이제 31절에서는 그와 같은 행위가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존경하는 데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다른 이의 필요를 살피고 긍휼히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타인이나 나를 동등하게 흙에서 창조하셨으며 관심 있게 돌보고 계심을 깨닫고 인정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의무(레 19:15; 신 10:17-19; 시 72:4, 12-14: 잠 31:9)임을 제대로 알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32절은 의인이 죽음의 순간에도 피난처를 얻을 수 있는 것(‘소망이 있느니라’로 번역됨)은 그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33절은 지혜와 우매의 장소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앞서 13:16에서도 슬기로운 자를 여호와 경외의 지식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행동하는 자로 소개하면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력을 바탕으로 부주의하게 어리석음을 펼치는 미련한 자와 대조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4, 35절은 다시금 28절의 왕과 백성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정의가 실행될 때 도시와 나라가 번영하지만(11:11), 지도자나 백성의 죄는 나라를 망칩니다(34). 왕은 슬기로운 신하와 욕을 끼치는 신하를 분별하여 나라를 견고히 세워야 합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견고함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정의를 구현하는지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이 땅에서 청지기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지혜로운 자만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지혜로운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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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4-01)


지혜자와 우매자의 대조한 지혜

잠언 14장 1-19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그 길이 반드시 사망의 길(12)이라는 말씀 앞에 멈추어봅니다. 사람이 보는 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사람 자체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내 삶을 헛되이 하는 일, 내 죽음마저 헛되이 하는 일, 그 출발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 언어와 행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이해하기에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무지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삶의 질서뿐 아니라 삶의 무질서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말(1-6)

지혜의 길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 때문입니다. 그 출발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멸시하는 것이며, 그 끝은 생명의 번성, 그리고 패망과 죽음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정직과 깨끗함, 거짓과 더러움 등으로 명확히 구분됩니다. 우리가 취할 태도는 분명합니다.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는 것입니다.

1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2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3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4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5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6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7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8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1-8)

1절은 지혜로운 자의 집 짓는 주제를 소개합니다. 지혜로운 여인이 집을 짓는다는 말은 가족을 위해 자기의 시간과 재능과 지혜를 쏟는다는 의미입니다. 31:10-31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힘의 여인’)에 대한 이상적인 묘사가 지혜로운 여인이 집을 세우는 예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미련한 여인은 게으르고 어리석으므로 있는 집조차 자신의 손으로 허물게 될 것입니다.

이 지혜의 여인이나 미련한 여인은 문자 그대로 지혜롭거나 미련한 여인을 의미하기도 하고 지혜와 우매 자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금언이 말하려 하는 것은 한 가정을 제대로 세우는 데 있어 여호와 경외를 기초로 하는 정직, 근면, 언행 등을 실천하는 지혜가 필수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정직한 삶과 그릇된 삶을 사는 자들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여호와에 대한 태도에서 찾습니다. 정직한 길을 가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따라 자기도 정직과 의의 삶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는 그의 말씀 또한 업신여기므로 자기 멋대로의 삶을 삽니다.

이와 같이 잠언이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지식적인 면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항상 같은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3, 5절은 지혜자와 우매자의 언어생활을 통해 2절에서 언급한 정직한 삶과 그릇된 삶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정직을 말하며 말이 필요한 때가 언제인지 분별하고 조절할 수 있는 절제력을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신실한 자이므로 오직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언행을 통하여 자신과 남들을 위기에서 구하고 존귀를 얻습니다(10:21; 12:8, 13; 13:6).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에는 교만의 막대기가 있어 말을 함부로 하고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또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 때나 감정을 쏟아 표현하며 거짓말을 늘어놓아 자신에게 수치를 가져오고 남도 멸망시킵니다(10:31; 12:13, 16-20; 13:2-3),

4절에서는 소가 없으면 구유도 없으므로 처리할 일도 없고 몸이 편하지만, 소를 돌보고 잘 키우면 밭을 갈거나 추수 때와 곡식을 털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유익하다고 설명합니다. 1절의 집을 세우는 여인처럼 가축이나 집안의 돌봐야 할 것을 제대로 돌보면 본인과 가정에게 이득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6-8절은 지식과 관련하여 거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구분합니다. 미련한 자는 종종 거만한 자 즉, 남을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자, 남의 훈계를 싫어하고 거절하는 자로 소개됩니다(9:7-9). 이처럼 거만한 자가 지식을 찾으려 해도 지식은 거기 없지만, 분별력 있는 자는 지식을 찾는 일이 쉽습니다. 이 지식은 판단력이나 통찰력을 의미하는데, 이런 지식에는 여호와 경외가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므로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와 선 대신 어리석음과 거짓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이나 언행을 왜곡하고 쉽게 타협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별력 있는 자는 겸손함으로 지혜를 추구하므로 어떤 생각이나 언행에 있어서 여호와 경외가 깃들어 있는지를 쉽게 분별합니다. 또한, 자기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고 있는 목적지가 바른지를 똑바로 파악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9-15)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지혜는 그 이면을 보고 더 멀리까지 보는 능력입니다.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며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의 실마리가 되고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톱니임을 아는 능력입니다. 눈앞의 이득을 위해 원칙을 포기하지 않고 오늘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능력이 지혜에서 나옵니다.

9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10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11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12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3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14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15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9-15)

9-15절의 대부분의 금언은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이중성이 있음을 교훈합니다.

9절에서는 죄를 가볍게 보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없는데도 미련한 자는 자신의 죄를 우습게 생각하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타인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자이므로 죄를 지었을 때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여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와 은총을 입게 됩니다.

10절의 금언은 사람의 마음의 진정한 상태를 알고 그 감정을 공유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이 금언이 자기 마음의 고통과 즐거움을 아는 자는 자기 자신뿐임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기 마음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아시는 분이 하나님뿐임을 기억하라고 넌지시 강조합니다.

11절은 1절의 ‘집’의 주제로 돌아가 악인들의 집과 정직한 자들의 집의 흥망을 대조합니다. 1절에서 지혜와 우매가 집을 세우고 허무는 요인이라고 말했다면 여기서는 경건과 불경건 또는 정의와 불의가 집을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가정이나 공동체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지식과 신앙과 윤리가 함께 역동적으로 작동해야 함을 말합니다.

12, 13, 15절은 9, 10절과 유사하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며 안 보이는 부분에 대조적인 요소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12절에서는 ‘길’을, 13절은 ‘감정’을, 15절은 ‘말’을 주제로 들었습니다.

12절에서는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나 사망으로 가는 길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길도 있다고 소개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는 인생의 여정이나 남이 가는 인생의 여정의 끝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길을 쉽사리 판단하고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내가 가는 길을 주의 깊게 살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지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이제 13절은 누군가의 웃음 속에도 슬픔이 담겨 있을 수 있고 즐거움의 끝이 근심과 눈물로 변할 수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의 현재나 미래의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하므로 겉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모습으로 장래의 모습을 단정 짓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15절에서는 아무 말이나 쉽게 믿는 분별력 없는 우매자의 모습과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삼가는 지혜자의 모습을 대조하여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언어와 행실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주의하도록 교훈합니다. 이처럼 삶에 있어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삶의 복잡성과 인간의 한계성을 깨달아 겸손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더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남을 존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혜자와 우매자(16-19)

집을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것, 집안을 망하게 하거나 흥하게 하는 것, 다 자기 손으로 하는 일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몸을 삼가고 두려워할 줄 알기에 악을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만만하여 조심성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한 가정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16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17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18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19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16-19)

16-19절은 지혜자와 우매자, 의인과 악인의 본질과 보응에 대해 언급합니다.

16절은 1, 8절 등의 지혜로운 자의 특징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재확인해줍니다. 이에 반해 어리석은 자는 건방지고 교만하여 스스로를 최고로 여긴다고 지적합니다. 17절은 악인의 보응을 언급하는 금언으로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악을 계획하는 자는 어리석음과 죄에 빠지며 다른 이로부터 미움과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18절은 6-8절과 유사하게 지식과 관련하여 지혜자와 우매자를 설명합니다. 우매한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치 유산처럼 상속받고 자기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전달하려 듭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면류관을 쓰듯 자기 머리를 지식으로 장식합니다.

19절은 의인과 악인의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악인은 그의 행악으로 인해 결국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인 앞에 굴복하며 그에게 은혜를 구하고, 의인에게 복종하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꾀에 속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최고인 줄 압니다. 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불리해 보여도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가기에 무한 은혜를 공급받으며 나아갑니다. 당신은 자신의 가정을 어떻게 이끌고 가겠습니까? 하나님께 더 많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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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3-02)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지혜

잠언 13장 14-25절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결말에 대해서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일수록 결말의 해답을 지혜를 따르는 데서 찾지 않고 지혜를 거슬러 계속 역주행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얻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생명과 패망이라는 갈림길에서 나와 우리 가정이 생명의 샘에 거할 수 있는 지혜에 귀를 열어봅시다.

 

지혜 있는 자의 가르침은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과 같이 삶에 기쁨과 생기와 활력을 가져다줍니다. 그 가르침을 겸손히 받는 자는 지식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게 되므로 어떤 어려움과 위기라도 지혜롭게 대처해나갈 수 있습니다.

 

지혜자와 선한 교훈(14-19)

성경에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얻는 창조질서나 세상의 이치에 대한 밝은 이해를 의미하기도 하고 실제적인 기술을 뜻하기도 하며 올바른 분별력이나 판단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과 교훈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헛된 명예욕은 사망의 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위기는 내면을 살피게 하고, 생명의 길을 안내하여 자신을 변화하도록 이끕니다.

14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15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6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17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18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19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20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21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22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23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24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25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14-25)

본문은 지혜 있는 자의 영향력을 생명, 샘, 양약으로 다양하게 말합니다. 이어서 훈계를 수용하는 것의 중요성,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재물의 비유들을 이야기합니다. 지혜는 자신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1) 지혜자와 선한 교훈(14-19)

잠언 13:14-19은 12-19절 단락의 일부입니다. 12절과 19절에 ‘소원’이란 단어가 공통으로 나와 한 단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17절을 제외하고 훈계와 말씀의 유의와 관련한 금언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17절도 언어와 관련된 ‘사신’(‘전령’의 의미)에 대한 금언이므로 다른 구절들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시작인 14절은 지혜자의 ‘가르침’(‘교훈’으로 번역됨)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13절의 말씀, 계명과 연결되며, 가르침의 유익으로 제시한 생명의 샘은 12절의 소원의 성취를 표현한 ‘생명나무’와 의미상 연결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말씀이나 계명처럼 여호와 경외를 기초로 하는 내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혜자의 가르침은 가르침 받은 자에게 마땅한 보상을 제공해 주는데(13), 그 보상에는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생명의 샘과 같은 역할도 포함되었습니다(14). 즉,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죽음처럼 다가오는 위기와 어려움을 자기가 받은 가르침의 잣대로 판단하고 선택함으로써 건짐을 받을 수 있고, 샘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듯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며 정의와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신앙과 생활에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15절에서는 14절의 지혜자의 가르침이 선한 지혜와 연결되는데, 이때 선한 지혜는 ‘선한 분별력’ 또는 ‘좋은 지각’(시 111:10)을 의미하며, 신실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자의 생각이나 분별력과 대조됩니다. 지식적, 도덕적, 신앙적으로 선하고 적절한 판단력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있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올바른 분별력은 여호와 경외에서 비롯됩니다. 16절에서는 슬기로운 자를 여호와 경외의 지식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행동하는 자로 소개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력을 바탕으로 부주의하게 어리석음을 펼치는 미련한 자와 대조합니다.

17절은 ‘악한 사자’와 ‘충성된 사신’을 대조하는 금언입니다. ‘악한 사자’는 자기를 보낸 주인에게 충성되지 못하고 주인의 의견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해 주인을 궁지에 몰아넣는 종입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종은 정직과 전략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주인과 자신에게 양약(‘치유’의 뜻)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18절은 13절과 유사한 금언이며 훈계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이 낳는 각각의 결과를 묘사합니다. 여호와 경외를 바탕으로 하는 지혜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궁핍과 수치를 당하게 되지만, 그러한 책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는 풍요로움과 존경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궁핍이나 수치는 단순히 물질적인 궁핍과 정신적 수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신앙, 도덕 등, 여러 방면에서 일어나는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19절은 12절의 주제인 소원 성취와 관련된 금언입니다. 12절에서는 지연된 소망과 성취된 소망이 사람에게 주는 상실감과 만족감을 대조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19절에서는 특별히 ‘성취된 소원’과 ‘미련한 자의 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성취된 소원이 ‘마음에 달다’라는 말은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라는 표현입니다. 소원이 성취되면 생명 나무처럼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만족감과 활력을 제공 받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고 악에 머물기를 선택했으므로 그가 행한 악으로 인해 참된 만족이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2) 의인과 악인의 보응(20-25)

20절은 지혜자의 친구와 우매자의 친구가 되는 일을 대조하며 지혜로운 자(또는 지혜 자체)와 친구가 되라고 권유합니다. 지혜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면 그들로부터 올바른 지식을 전달받고 분별력 있는 생각과 행동을 배우게 되어 자기 자신의 지혜도 함께 커갑니다. 이런 지혜로운 자들은 올바른 지식과 분별력과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들과 동행하면 기쁨과 만족을 얻고 계속 성장하며 여러 방면에서 양질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미련한 자들의 친구가 되면 그들의 분별력 없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자기 자신도 어려움과 어리석음에 빠지기에 십상입니다. 잠언의 앞부분에서도, 숨었다가 까닭 없이 사람의 피를 흘리자고 제안하는 강도의 무리(1:11-14)나, 정직을 버리고 불의와 행악을 저지르는 무리(2:13-15), 아첨과 번지르르한 외모로 젊은이를 유혹하는 음녀(2:16-19),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자를 붙들어 사망의 연회에 초대하는 미련한 여인(9:13-18) 등의 예로 우리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 누군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판단력이나 통찰력이 부족하고 생각이 악하므로 이들과 동행하면 후회와 수치가 몰려와 결국 영적, 도덕적으로 패망하고 죽게 됩니다.

21-23절은 의인과 악인의 보응과 재물에 대한 금언인데 서로 같은 단어나 주제가 나와 연결됩니다. 21, 22절은 선한 보응과 선한 사람(‘선인’으로 번역됨)이라는 공통 단어와 함께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22, 23절은 ‘재물’과 ‘가산’이라는 유사한 단어와 함께 재물에 관해 설명합니다. 먼저 21절은 죄인과 의인의 보응에 대한 금언입니다. 죄인에게 악(재앙)이 따르나 의인은 선한 것으로 보응을 받습니다. 특히 죄인에게 따르는 ‘재앙’이 20절에서 미련한 자의 친구에게 따라오는 ‘재앙’(‘해’로 번역됨)과 연결됨으로써 죄인과 미련한 자가 서로 연결됩니다(결과적으로 의인과 지혜로운 자도 서로 연결됩니다).

잠언을 비롯하여 성경에서는 미련한 자와 악인이나 죄인을 크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7; 시 10:4; 14:1; 렘 2:13, 19 등). 이런 자들은 지식이나 능력에 한계가 있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자신의 눈에 옳다 생각되는 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을 거두게 됩니다.

21절의 의인은 22절에서 ‘선한 사람’으로 지칭됩니다. 21절에서 의인은 선한 보응이 약속되어 있는데, 23절에서는 그 약속이 그에게만 아니라 대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힙니다. 선한 자들은 자기가 받은 산업을 자녀와 손자들에게 물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 유산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이 쌓아 놓은 재물은 그들의 후손이 소유하지 못하고 의인과 그들의 후손이 누리게 됩니다. 욥기 27:16-17에서도 악인이 은이나 옷을 티끌처럼 가득히 쌓아둔다 해도 의인이 그것을 다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의인과 악인에게 약속된 보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섭리 아래 성취됩니다.

23절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 언급되며 위의 금언들과 재물이나 ‘의’라는 주제로 연결됩니다. 가난하다 하더라도 새롭게 갈아엎은 땅을 경작함으로써 양식을 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사회에 정의가 없다면(‘불의로 인하여’로 번역됨) 그들이 모은 재산을 다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24절에서는 자식을 부지런히 제대로 훈육하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매를 아끼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23:13-14에서도 회초리로 때려도 죽지 않으니 매를 아끼지 말라고 교훈하며 특히 이와 같은 훈계가 자식의 생명을 무덤에서 구해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식에게 매를 아끼지 말라는 표현은 체벌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잘못을 제때에 따끔하게 처벌해서 잘못을 바로잡아 올바른 삶을 살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편법과 상술이 난무할지라도 끝까지 지혜를 붙들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존영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와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확고한 길로 인도해주는 말씀을 더욱 신뢰하며 잠언이 주는 삶의 반전을 경험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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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3-01)

  


의인과 악인이 받을 보응에 대한 지혜

잠언 13장 1-13절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복들을 가져오는 능력이 됩니다. 의인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움을 입고 곤란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 의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악인이 부지불식간에 수치와 패망에 이르게 되는 까닭은 바로 그가 행한 악 때문입니다. 복은 의의 열매이고 저주는 악의 열매입니다.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하는 지혜의 훈계에 경청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언어생활이나 경제생활 등에 완전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정직한 말과 절제 있는 말을 통하여 선의 열매를 맺고 부와 재물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통하여 근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어생활과 그 결과(1-6)

말에는 살리고 죽이는 힘이 있습니다. 부모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지혜로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지만, 훈계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입을 열 때와 닫을 때를 구분하지 못한 채 함부로 이야기는 것은 멸망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1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2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3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4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5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6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1-6)

1-6절의 금언은 대부분 훈계를 비롯하여 정직, 침묵 등의 언어생활과 이런 생활이 미치는 영향을 설명합니다. 1절은 훈계의 말을 들으라는 교훈(10:8; 12:1, 15)이며,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자가 지혜롭고 겸손한 아들이고 반대로 꾸지람을 듣지 않는 자는 거만하고 미련한 자라고 설명합니다. 이 금언은 1-9장에서 아버지의 강연과 지혜의 초청에 빈번히 등장하는 ‘내 말을 듣고 행하라’는 명령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같이 아버지나 지혜가 주는 훈계를 받아들이는 데는 그 말을 경청하려는 겸손한 태도와 열린 마음, 그 훈계가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함을 인식하는 분별력, 이를 실행하려는 결단과 의지가 꼭 필요합니다.

1절이 말을 듣는 것에 관한 금언이라면 2, 3, 5절은 말을 하는 것에 관한 금언입니다. 먼저, 2절에서는 말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며 입으로 뱉는 말에는 그에 따른 열매가 있어 각자 그 열매를 먹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음이 정직하고 화평한 자는 정직하고 화평한 말을 하여 선(복록)이라는 열매를 먹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신실하지 못한 자는 거짓말과 폭력적인 말을 하므로 폭력의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말이 가져오는 열매의 종류와 질은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는 말로 인한 열매를 맛보게 되므로(2) 말을 삼가는 자가 지혜롭다는 교훈을 줍니다. 말을 삼가느냐 맘대로 놀리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거나 멸망을 당할 수 있습니다. 18:21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는 금언이 이를 잘 요약해 줍니다.

말과 관련하여, 야고보는 혀에 실수가 없는 자가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약 3:2). 그는 배의 키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말이 지닌 엄청난 힘과 그 영향력을 지적하며 혀를 길들이라고 권면합니다(약 3:3-5), 크고 단단한 배라도 광풍이 불면 바다에서 이리저리 밀려가지만, 이때 흔들리는 큰 배를 움직이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조종실의 작은 키입니다. 혀도 배의 키처럼 몸의 작은 기관이지만 지구를 들었다 놓았습니다.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허풍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작은 불씨와 같이 삽시간에 산을 태우거나 사람을 매장할 수 있는 파괴력이 있으며 자신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는 치명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의 힘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쪽으로도 얼마든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칭찬하고 화평의 말로 용기와 위로를 제공할 수 있으며 죽으려 하는 자도 살릴 수 있는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혀를 길들여 정직과 화평을 말하고, 필요 없는 말을 삼가 화를 면하고, 선한 열매를 맺어 나와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1절의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지혜로운 자는 2-3절에서 조언하는 언어생활을 실천할 수 있고, 이제 4절에서 교훈하는 근면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마음에 원하는 바가 있지만, 손을 게을리 움직이고 무엇이든 미루며 잠만 재촉하는 자는 가난해지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6:9-11; 13:4; 19:24; 23:33-34). 그러나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개미처럼 미리 준비하고 일하는 자는 원하는 바를 풍족하게 얻게 됩니다(6:6-8).

5절에서는 다시 언어생활로 돌아가 정직한 말을 권면하고, 6절에서는 의로운 행동을 권합니다. 정직한 자는 거짓말을 미워하지만 거짓말하는 자는 양심도 없고 이기적이고 추악한(‘행위가 흉악하여’로 번역됨) 자이므로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2, 3절에서 언급했듯이, 말에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으며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또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그 과정에 있어 정직한 말을 포함하여 정의와 완전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정의가 온전한 자를 보호한다는 말은 정의롭게 말하고 행동해야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두려울 것이 없고 감출 것이 없어 무죄로 판명이 나듯 마땅한 보상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의와 부정과 같은 악을 추구하는 자는 죄인으로 타락하여 결국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

9절은 의인과 악인의 빛을 대조하는 금언입니다. 여기서 ‘빛’이나 ‘등불’은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욥 3:20). ‘의인의 빛이 즐거워한다(‘환하게 빛난다’로 번역됨)’는 말은 그의 삶에 즐거움과 만족이 지속되며 풍요로움이 점점 더해간다는 뜻입니다. ‘악인의 등불이 꺼진다’는 말은 악인의 삶에 질적으로 풍요로운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고 결국 꺼지고 만다는 의미입니다(욥 18:5; 21:17).

10절은 1절의 훈계에 대한 유익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금언입니다. 권면을 듣는 자는 겸손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알며 남의 의견을 수렴하여 적절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훈계를 듣기 싫어하는 자는 남의 의견 자체를 업신여기고 자기 생각을 남보다 더 낫게 여기므로 교만하여 필요 없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부와 재물(7-11)

겉모습만 보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인 것처럼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가진 게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고, 가난한 것처럼 실제로는 부자인 사람도 있습니다. 내실 있는 알찬 삶이야말로, 겉치례를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삶입니다. 이렇게 재물은 사람의 부귀를 나타내는 척도도 되지만, 근심과 협박의 근거도 될 수 있습니다.

7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8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9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10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1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7-11)

7절에 이르면 주제는 언어생활에서 경제생활로 변합니다. 특히 7-11절의 금언은 9, 10절을 제외하고 모두 재물이란 단어가 공통으로 나와 부와 가난의 척도, 재물의 영향력, 재물을 얻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은 실제로는 가난하면서 부자인 체하며 허세를 부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실제로는 부자인데도 부를 드러내지 않고 숨기거나 또는 검소한 삶을 사는 자도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금언은 자신의 부나 가난을 그대로 드러내라는 뜻이 아니라, 부와 가난의 척도를 개인의 겉모습이나 행동으로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줌으로써 빈부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방지해줍니다.

8절에서는 부와 가난의 영향력에 대해 언급합니다. 재물이 많은 자는 때로 납치나 협박 등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위기의 때에 몸값을 지불할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위기와 협박에서 대부분 자유롭고 안전할 때가 많습니다.

7, 8절에서 부와 가난의 현실적이고 상대적인 실체와 가치를 일깨워준다면, 이제 11절에서는 재물을 모으는 윤리적 방법에 대해 교훈합니다. 헛되이 모은 재물은 입김같이 사라지게 되지만 열심히 지속적으로 모은 것은 늘어갑니다.

 

마음의 소원과 말씀(12-13)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후 자기의 소유로 자신의 가치를 과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나 재물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는 대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2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13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12-13)

12절은 19절까지 한 단락을 이루는데, 이 단락의 처음과 마지막에 ‘소원’이란 단어가 공통으로 나오고 그 중간에는 훈계와 말씀에 관련된 금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먼저, 12절에서는 소망이 지연되고 안 이루어질 때의 상실감과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의 만족감을 대조적으로 기술합니다. 지연되는 소망이나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은 사람을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하게 만듭니다. 이와 반대로 성취된 소원은 생명 나무와 같이 심리적, 육체적으로 만족감과 활력을 제공해 줍니다.

13절은 다시 1절과 10절의 금언으로 되돌아가서 ‘훈계’를 대하는 반응에 따르는 결과를 밝힙니다. 여기서는 ‘말씀’과 ‘계명’(명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잠언에서 아버지의 ‘교훈’ 즉, 1절의 훈계나 ‘꾸지람’, 10절의 권면과 대치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는 아버지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기초로 하여 훈계와 권면의 말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경외하며 실행하는 자는 그에 따른 보상을 받지만, 말씀을 멸시하는 자에게는 패망이 기다립니다.


흐르는 맑은 시냇물의 근원이 작은 옹달샘이듯, 우리의 무성한 말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의 정원을 잘 가꾸는 것이야말로 풍성한 말의 축복을 위한 근원입니다. 마음의 옹달샘을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생명의 성령으로 채우십시오. 그때에 마음의 샘에서 생명의 말들이 흘러나와 인생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 땅을 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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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2-02)


 진실한 입술과 거짓된 혀

잠언 12장 15-28절


학교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노조절장애’나 ‘주의력결핍장애’를 가진 아동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거친 행동을 나타내거나 매순간 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성품과 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교육풍토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의인의 길에는 생명이 있으며 사망이 없습니다. 그는 거짓과 악을 멀리하는 자이며, 지혜와 판단력이 있어 진실한 말을 입에 담고 화평을 조언하는 자입니다. 그의 정직한 말과 행동은 자신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며, 이웃을 구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입습니다.

 

정직한 말과 거짓말(15-23)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욕을 당할 때 인내하며, 합당한 충고를 수용합니다. 이에 반해 어리석은 사람은 충고를 듣는 즉시 분노하며 합당한 충고마저 거부합니다. 옳다고 생각했던 일에 대해 누군가 잘못했다고 충고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15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16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7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18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19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20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21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22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23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15-23)

15-23절은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대조하는 금언으로 시작하고(15-16) 역시 유사한 내용의 대조적 금언으로 끝남으로써(23) 한 단락을 이루며, 그 중간(17-22)에는 진실하고 화평한 언어생활을 도모하는 금언이 등장합니다.

수미일치(처음과 끝이 같거나 유사한 내용으로 단락을 형성하여 그 주제를 강조하는 구조) 형식을 이루는 15, 16, 23절에도 ‘권고’, ‘분노를 드러냄’, ‘전파하다’와 같은 언어와 관련된 단어가 나와 17-22절과 연결됩니다. 15, 16, 23절에 나타나는 지혜자와 우매자가 구분되는 행동을 살펴보면 첫째, 자신의 생각에 대한 마음의 태도로알 수 있습니다(15). 미련한 자에게 있어 옳고 그름의 기준은 자기 눈입니다. 그러므로 제 눈에 바르다고 생각하는 말과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의 권고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죄의 시작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사사 시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했다”(삿 17:6; 21:25)는 구절이 그 시대의 영적, 도덕적 상황을 적절히 묘사합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그의 말씀을 업신여겼으므로 제사장을 돈으로 사기도 하고 사사들이 수십 명의 자녀를 거느리며 호의호식하는 등 무슨 일에든지 자기의 사리 판단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어떻게 생각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자입니다.

둘째,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는 감정 조절에서 나타납니다(16). 우매자는 성급하여 자신의 화나 울분을 즉각적으로 터트리지만, 지혜자는 수치를 당할 때조차 감정을 다스리며 신중하게 행동합니다.

셋째, 자신에게 있는 것을 드러낼 때와 삼갈 때를 인지하는 여부에서 나타납니다(23). 지혜자는 필요한 경우에만 자기의 지식을 발설하고 평소에는 겸손히 그 지식을 간직하지만, 우매자는 때를 가리지 않고 맘속에 있는 미련함까지도 전파하여 자기 무덤을 파는 자입니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대조 중간 부분에 있는 17-22절은 진실과 화평을 말하는 자를 높이는 금언입니다. 여기서 진실과 화평을 말하는 자는 15, 16, 23절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자와 동일시됩니다. 잠언에서 언어생활에 관한 조언으로 1-9장에서는 ‘입술로 지식을 지키라’(5:2), ‘거짓을 멀리하라’(4:24)는 명령 정도가 나왔으며, 거짓 증언과 중상모략이 하나님의 혐오 대상(6:16-19)임을 밝혀 정직과 지혜의 말을 권면하였습니다. 특히, 의인화된 지혜가 자신의 언어의 주된 내용이 바로 선, 정직, 진리, 의이며 굽은 것이 없다고 설명함으로써 지혜로운 말이란 무엇인지 그 특징을 정의해 주었습니다(8:6-10).

이에 비해, 10-15장에서는 언어와 관련된 금언이 상대적으로 빈번히 소개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 전(10:1-12:14)까지 나온 의인(또는 지혜자)의 언어에 대한 금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의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징, 언어가 자신과 다른 이에게 미치는 영향,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반응으로 요약됩니다. 결국, 의인 자신, 의인과 타인(과 공동체), 의인과 하나님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지혜로운 언어생활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첫째, 의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성격과 특징으로 언어에 지혜와 지식이 담겨 있고(10:13, 31; 11:9), 정직하며(10:18), 천은과 같은 가치가 있고(10:20), 절제할 줄 알며(10:19), 남의 비밀에 침묵할 줄 안다(11:12, 13)고 언급되었습니다. 둘째, 의인의 언어가 자신에게 미치는 유익 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는 입의 허물로 인해 덫에 걸리지 않고 환난에서 벗어나는 축복(12:12)과 입의 열매대로 복을 받는다는 약속(12:14) 등이 나왔습니다. 셋째, 의인의 언어에 대한 타인의 반웅으로는 칭찬과 축복이 언급되었습니다(10:7). 넷째, 의인의 언어가 다른 이와 공동체에게 끼치는 영향력으로는 다른사람을 구하며(12:6), 생명의 샘과 같이 활력과 치유를 주고(10:11), 여러 사람을 교육하며(10:21), 자기가 속한 도시에 평안과 번영을 가져온다(11:11, 14)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17-22절을 중심으로 오늘 본문인 12:15-28에서 기술하는 의인의 언어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의인의 언어의 특징으로서 그의 언어에는 거짓과 위증이 없이 정직하며(17, 22), 재판에 정의를 가져오고(17), 선하며(25), 영원성이 있고(19), 발설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며(23), 화평과 희락이 담겨 있다(20)는 점을 설명합니다. 둘째, 의인의 언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기쁨과 사랑입니다(22). 셋째, 의인의 언어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으로는 건강이나 치유(18, ‘양약’으로 번역됨)와 즐거움(25)이 예로 나왔습니다. 넷째, 의인의 언어가 이웃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지식의 전달을 설명합니다(23).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보다 재판에서의 정직한 증언을 강조하며, 남을 해치는 말이 아닌 치유를 주는 화평의 말을 추가하고, 이와 같은 지혜로운 언어생활에 따라오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부지런함과 게으름(24-28)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부귀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시작했어도 게으르게 행동한다면 어떤 열매도 손에 쥘 수 없습니다. 어떤 자리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노력과 부지런함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계획했던 일들의 진행을 돌아보면서 그 계획했던 일들을 잘 이루어 나가길 바랍니다.

24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25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26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 27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28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24-28)

15-23절의 금언들은 언어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이제 24-28절의 금언들은 대부분 경제생활에 있어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논하고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조합니다.

먼저 24, 27절은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24절은 부지런한 자가 주인이 되며 게으른 자는 종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25절에서는 근면을 사람의 부귀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애써 잡은 사냥감조차 요리하지 않는 게으른 행동은 밥그릇에 손을 얹고도 입으로 퍼 올리기를 싫어하는 행동(19:24)과 같습니다. 결국, 미련한 자는 있는 것조차 누리지 못하며, 원하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고(13:4), 남의 종살이를 할 처지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25절은 마음의 근심과 선한 말의 결과인 우울함과 즐거움을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을 좌절시키고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에 자리 잡은 근심과 상처와 아픔입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상대방에게 위로를 주고 그 사람을 즐겁게 해줍니다. 여기서 ‘즐겁게 하다’라는 동사는 20절의 ‘희락’의 동사형으로 나왔으므로 이를 연결해보면 선한 말이란 거짓과 악이 없는 말이며 평안과 화평을 조언하는 말로도 설명됩니다. 26, 28절은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언급하는 금언이므로 서로 연결됩니다. 26절은 의인과 악인의 행동이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미치는 영향을 대조하며, 28절은 의인의 길의 특징을 기술합니다. 의인은 지혜로운 자이므로 자기만이 아니라 이웃까지도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가 인도하는 길은 사망이 없으며 오로지 생명이 있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도 유익을 주는 길입니다. 여기서 ‘길’은 삶에서 선택하고 추구하고 있는 방향을 의미합니다.

한편, 악인은 본인이 저지른 악행으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올가미에 걸리게 하는 자며 방황하는 자입니다. 앞서 14절에서는 악인이 자기 입술의 실수와 허물로 인해 그물에 걸려 수치를 당하는 예를 들었습니다. 이와같이 악인의 언행이 자신에게 해를 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악인에게 여호와 경외가 없으므로 삶의 길이 어둠과 같기 때문입니다(4:14-19).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13:24) 하였고,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22:15) 하였습니다. 훈계가 폭력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자녀가 소중한 만큼 훈계를 아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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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4-02)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

빌립보서 4장 10-23절


헌금은 항상 민감합니다.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거나, 반대로 아예 무시당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복음 사역을 위해 보낸 선교 헌금을 받고 매우 기뻐합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그의 기쁨의 원인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전합니다.

  

교회 내외적 문제들에 대한 마지막 권면을 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교회가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감사 표현이 또 다른 선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조심하면서 교회가 보내준 선물의 의미를 계속 부연합니다. 이후 빌립보 교회가 인사하라는 것과 함께 독자들을 향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인사를 전달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전달한 선물에 대한 감사(10-20)

성숙함은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배우고 훈련해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재정적 문제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인정함으로 자족함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이 구체적 영역에서 성숙해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10-20)

바울은 자기의 괴로움에 동참한 빌립보의 형제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바울이 사역 초기에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뿐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실 때, 손을 펴서 돕기를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1) 선물에 대한 감사(10)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함으로 빌립보 교회의 선물에 대해 감사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선물을 ‘나를 생각하던 것’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물질 차원이 아니라 관계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주고받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아마도 한동안 교회는 바울이 필요한 것을 돕지 못했던 듯합니다. 바울을 생각하는 것이 다시 일어났다고 말하고, 생각이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절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물을 밝히는 속물처럼 비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제 다시 싹이 났다’는 표현입니다. 그동안 안 했던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이 기뻐한 것은 순수하게 독자들의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음을 11-13절에서 부연합니다.

(2) 오해의 여지를 없앰: 선물을 더 요구하는 것이 아님(11-13)

10절 표현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설명을 추가합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부족해서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이미 지나온 과정 동안 없어 본적도 있고 풍족하게 누린 적도 많기에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13). 이 말은 하나님으로 인해 불가능한 일이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의지해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가난한 상황이 해결 안 될지라도 여전히 만족하며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기쁨은 단순히 선물이라는 물질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1차적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독자들의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 14-20절에서 바울은 그 선물의 의미와 그에 대한 반응들을 서술합니다.

(3) 선물의 의미 1: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것(14-16)

11-14절과 연결해 독자들이 전한 선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비록 선물을 계속 바라고 기뻐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이 어려운 처지에 있던 것은 사실이고 그들의 선물은 큰 도움이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다’는 표현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바울과의 관계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은 독자들이 바울을 도왔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미 독자들은 교회가 세워진 이후 바울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일하면서 경비를 충당했지만, 그때에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헌금은 받았습니다(고린도후서 11:9).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것은 교회의 분열과 경쟁에 휘둘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빌립보 교회의 것은 순수하게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주도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구제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로마서 15:26). 이런 면에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온 선물은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만,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함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7의 표현처럼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독자들이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보내는 선교사의 일을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4) 선물의 의미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목(17-18)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선물의 또 다른 의미를 설명합니다. 14-16절에서 말한 내용이 마치 후원을 요청하는 것 같은 오해를 낳을까 봐 바울은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다’라고 다시 말합니다. 불욕에 어두운 사람으로 보일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후원했던 일을 말한 까닭은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상업적 표현으로 독자들의 계좌에 이익이 쌓인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독자들이 했던 과거와 현재의 동참이 왜 그들에게 이익인지 두 가지 이유를 통해 서술합니다. 첫째, 이미 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고 있기에 그의 표현은 욕심이나 아첨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독자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며 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둘째,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준 선물이 감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선물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기에게 한 일이 그분께 한 일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사랑한 것과 복음에 동참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살아 있는 제물로서의 삶입니다. 예배 표현을 사용해 하나님께서도 칭찬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선물에 대한 반응: 하나님이 갚아주심을 바람(19-20)

독자들의 선물에 대한 바울의 반응입니다. 18절의 ‘채우다’라는 말과 연결해 이전에 독자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웠기에, 이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모든 풍성한 대로 독자들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줄 것이 없고 그런 상황도 아닙니다. 대신 ‘나의’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평생 바울과 함께하셔서 그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이 독자들의 모든 필요도 채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하나님의 채움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하나님/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 됨으로 복음 사역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분의 은혜를 얻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채움의 삶은 하나님, 곧 ‘우리’(바울과 독자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20).

1:9-11에서 독자들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중 정체성으로 잘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원하는 목회자의 마음과 궁극적으로 삶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로 맞춘 신앙인 바울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안 인사와 축도(21-23)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성격과 성장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차이를 넘어 서로에게 문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반겨 주고 따뜻하게 인사하는 것에서부터 교회의 연합은 견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상처를 받아 관계가 소원해진 지체에게도 먼저 악수를 청하기 바랍니다.

2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1-23)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전하면서, 특히 로마 황제의 집 사람들 중 몇 명이 빌립보의 집 사람들에게 전하는 인사를 언급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1) 문안 인사(21-22)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문안 인사입니다.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 곧 바울의 동역자들이 문안합니다. 아마도 디모데와 누가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특별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몇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빌립보 성도들에게 인사합니다. 이들은 황제에게 속한 노예나 자유민으로서 예수를 믿는 어떤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인사는 빌립보 교회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놀랍고 반가운 소식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로마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황제가 아닌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축도(23)

빌립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독자들의 모든 영 안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바울 편지의 전형적인 마무리입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 바울의 어려움을 돕고 사도는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관계 안에 흐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오늘날의 교회에 절실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 간에, 그리고 성도들 간의 관계가 사랑으로 연합할수록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거룩한 능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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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4-01)

 


 교회의 건강을 위한 바울의 권면

빌립보서 4장 1-9절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분열과 분쟁으로 교회들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핍박과 교회 내부의 갈등으로 그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편지 마무리 부분을 향해 갑니다. 유오디아와 순도게의 갈등 상황에 대한 구체적 권면(2-3)과 교회 전체를 향한 마지막 명령들이 제시됩니다(4-9). 본문은 이전 부분과 다르게 많은 2인칭 명령형들이 연속으로 등장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대와 소망이 강렬하게 제시됩니다.

  

결론적 권면:주 안에 서라(1)

우리가 인간적 욕망과 본능대로 산다면 내면에 점점 더 삭막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줍니다. 우리의 내면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충만한 평강으로 지배받으며 살아갈 원합니다.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

사도 바울은 권고할 사항을 전하기 전에, 먼저 ‘주 안에 서라’라고 권고합니다. 그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앞부분의 결론을 이끕니다. 참 모본을 따라 바르게 살라는 3:17-21의 결론이고, 유대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소개한 3:1부터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전 내용에 대한 단순한 정리는 아닙니다. 이후 진행될 교회 내 갈등과 독자를 향한 마지막 권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앞부분 내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소개하는 형식이 전환입니다. 독자를 향한 호칭을 많이 사용함으로 시작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독자들을 부르고 명령을 한 후, ‘사랑하는 자들아’를 추가합니다. 모두 바울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 진행될 내용이 사랑의 마음 표현이기에 독자들이 꼭 들었으면 하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을 담은 명령은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앞부분 내용처럼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과 다르게 하늘 시민권자로서 그리스도를 계속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 서라’는 복음의 신앙을 위해 군사처럼 굳게 서라는 말로 1:27에서 교회 문제에 대한 권면을 시작할 때 말했습니다. 이 표현을 다시 사용한 것은 대외적으로 복음을 위해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이후 2-3절에서 말할 복음 사역 수행을 위해 내적 화합이 중요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개인적으로 이중 정체성을 갖고 하늘 시민에 합당하게 살며, 공동체 내적으로 서로 화합하여 외적으로 복음 사역을 잘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갈등 문제에 대한 권면:유오디아와 순두게(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할 공동체를 위해 사도의 복음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대로 행동한다면 공동체의 화목은 당연히 깨질 것입니다. 공동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때 공동체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강으로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2-3)

바울은 먼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 권면합니다. 두 여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견에 반대했고 그들 사이에 생긴 긴과 불화는 교회의 분열로 이어질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1)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권면(2)

교회 내적 문제인 두 여자 지도자들의 갈등을 언급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제외하고 교회 성도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 만큼 바울에게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두 여자의 이름과 함께 ‘내가 권한다’는 말을 각각 사용한 것은 둘 중 어느 한편을 들지 않겠다는 것이며, 화합을 위해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핵심은 그들 모두가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 됨을 주문한 2:2의 내용과 같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한 생각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해 겸손과 배려와 함께함의 삶을 주문합니다.

(2) 그들을 도우라(3)

2인칭 단수형 ‘너’에게 그 여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바울과 함께 멍에를 멘 동역자입니다. 당시 독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테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확실치 않습니다. 두 여자 지도자들 문제에 제3자의 도움을 요청하여 바울이 이 사안을 심각하게 보고 꼭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그 둘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을 복음 사역에 있어 바울과 함께 힘써 싸웠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늘 시민권자로 등록되어 그에 맞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복음 사역에서 교회의 본이 되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서로 경쟁의식으로 갈등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 도와야 했고, 그들 각자에게뿐 아니라 ‘너’에게도 부탁해 도우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복은 개인뿐 아니라 복음 사역을 위해 교회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삶을 위한 편지의 마무리 권면들(4-9)

하나님의 평강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가 온갖 위협으로부터 항상 양을 지키듯,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지켜 주십니다. 마음에 염려가 일어날 때 하나님의 보좌를 찾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의 평강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9)

주 안에서 굳게 서길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자녀들의 특징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한 것처럼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할지라도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우리의 만족과 기쁨이 됩니다.

(1) 권면의 시작:기뻐하라(4)

‘항상 기뻐하라’는 말로 편지의 마무리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 표현을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한다.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과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의 삶을 경험하고 있는 자기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2) 대외적 사람들을 향한 자세(5)

또 다른 마무리 권면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 관용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반대 모습으로 교회를 대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다르게 대하라고 합니다. 주께서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늘 시민권자로서 종말에 있을 승리를 기대하고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야 합니다.

(3) 기도에 대한 권면(6-7)

성도가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기도와 하나님께서 응답 때문입니다. 도시의 적대적 환경이 독자들을 염려하게 하고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의 상황도 근심하게 하지만, 모든 것에 기도와 간구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삶이나 이 땅에서 이중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도 그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기대하는 때와 방법과 결과에 하나님이 맞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의 때에 당신이 의도하신 결과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때로 그것이 사람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최선입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염려가 나누인 마음이라면, 하나님은 그 마음과 생각을 나누이지 않도록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4) 마지막 권면들: 사고와 행위 영역에 대한 권면(8-9)

독자를 향한 마지막 명령으로 두 가지 차원에 대한 권면입니다. 하나는 생각 차원의 명령입니다(8). 여덟가지 요소를 나열하고 그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 덕이 되고 기림이 되는 것들입니다. 모두 분별의 삶과 관련 있습니다. 또 다른 것은 행위 차원의 명령입니다(9). 바울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두 차원은 서로 구분되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생각으로 시작해서 행위로 이어지는 순서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몇 가지 면에서 이전 내용의 정리입니다. 첫째, 생각과 행위 영역을 구분하되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독자를 위해 기도하는 1:10-11의 내용입니다. 또한 교회 내적 문제를 다룰 때 생각 차원을 먼저 말하고 행위를 나중에 말한 2:1-18의 내용이며, 그 과정에서 예수의 모본을 다룰 때도 이 두 차원을 함께 말합니다. 회심 이후 생각의 변화와 지속적 추구의 달려감(3:7-14)도 같은 모습입니다. 둘째, 신자 삶의 본이 중요하다는 것도 앞부분 내용과 같습니다. 9절은 바울을 모본으로 말하지만, 최고의 본은 예수입니다(2:6-11). 바울은 그 예수의 종(1:1)으로서 그분을 추구하고 있고, 여러 사람들도 바울의 본을 따릅니다(3:17).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여기 속합니다. 이 모든 예들은 독자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일차적으로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데(6-7), 8-9절은 신자의 바른 생각과 행위를 통해 경험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하늘 시민권자로서 복음 안에서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게 하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당시 독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들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지혜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옳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악함일 수 있습니다. 하늘 시민은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세상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는 복음 위에 바르게 서서 하나 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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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3-02)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2)

빌립보서 3장 12-21절


차마 내 말보다 내 행동을 본 받으라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처럼 사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목회자가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바울이 부러우면서도 딴죽을 걸고 싶어집니다. 도대체 바울은 어떤 삶의 길을 걸어왔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유대 할례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경고를 계속 이어갑니다. 이전 문단에서 자신의 회심 이전과 이후 상태를 비교 설명한 바울은 12절부터 부르심의 상을 향한 지속적 추구의 모습을 언급하고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적용 권면을 이어갑니다. 17절부터는 땅에만 마음 두고 사는 자들과 다르게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살라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과 그의 모습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모본을 제시합니다.

 

할례주의자로 인한 위험을 경고(12-14)

 교만한 사람들은 ‘이만하면 됐다.’, ‘더 이상 무엇을 섬기겠는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많은 경험과 경력과 수고와 열매를 가졌지만, 그러한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2-14)

앞 강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폈습니다. 본문은 바울을 통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건강한 신앙을 위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7-11절에서 언급한 회심 이후 상황과 연결해 계속되는 신앙 여정의 모습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전 부분이 주로 가치 비교라는 사고 영역과 관련 있다면(7-8), 이 부분은 그와 관련한 태도와 행위도 보여줍니다. 비록 현재 모습이 회심 이전과 분명한 차이를 가기고 인지만, 바울은 모든 것을 다 이룬 상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8)이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좋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11)도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추구를 계속합니다. 하지만 단지 부족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그분이 다메 섹으로 가는 길에 먼저 바울을 잡으셔서 거룩한 관계를 시작하셨기에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것입니다(12).

바울은 이 추구의 모습을 13-14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형제들아’라는 것으로 먼저 주의를 집중한 후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과거 경험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추구 과정을 강조한 것입니다. 마치 경주자가 종착점을 향해 날리듯 미래에 허락될 온전한 것을 위해 계속 달린다는 말입니다. 경주자가 이기면 월계관을 상으로 받듯, 신앙의 경주 끝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로부터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의 관계에 끝이나 완성은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지식으로 관계가 더 깊어갈 뿐입니다.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더 깊고 친밀한 관계의 시작인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분을 알아가고 그로 인한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추구하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이고 그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짜로 알기 때문입니다.

 

참 모본을 따라 바르게 살라(15-16)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아 가는 것은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공적인 믿음의 경주자에게 상급을 수여하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5-16)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주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의 경주를 달릴 것을 권면합니다.

(1) 이것들을 생각하라(15)

14절까지의 설명에 근거해 ‘우리’라는 표현으로 독자를 포함한 신자 삶에 대한 적용 권면을 합니다.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생각의 영역입니다(15). 온전한 자들은 이것을 생각하자고 합니다. 명령형 대신 권면의 가정법을 사용했지만, 단순 명령보다 더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울과 동일한 생각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요는 아닙니다. 혹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도 계시하실 것이라는 말을 추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배려도 담고 있습니다.

(2) 성숙의 각 단계에 충실하게 살라(16)

권면의 또 다른 차원은 행위 영역입니다(16).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 단계에 맞게 행하라고 합니다. 지속적 추구 과정을 전제로 매 순간을 그리스도와 함께 정성스럽게 살라는 말입니다. 이런 두 요소를 담고 있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사고 영역 변화를 통해 믿음의 성장과 추구를 계속해가되 각 단계마다 충실히 살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참 모본을 따라 바르게 살라(17-21)

최선의 학습 방법은 모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주님을 닮기 위해 치르는 모든 수고를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에 대해 보상하고 갚아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무의미한 세상의 칭찬과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직 위에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끝까지 달라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17-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닮아 가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눈질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칩니다. 그들은 세상 것에 더 마음을 둡니다.

(1) 명령: 바울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본 받으라(17)

‘형제들아’라는 표현으로 신앙의 모본을 따르는 주제로 옮겨갑니다. ‘너희’라고 표현한 독자들에게 두 그룹의 모본을 소개하고 그들을 따르라고 합니다. 한 그룹은 ‘나’로 표현된 바울 자신입니다. 그가 완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전 내용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계속 추구해가는 모습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후 18-21절에 의하면 이 땅에 소망 두고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배우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또 다른 모본은 ‘우리’라고 하는 바울의 모습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삶도 주목해서 보고 배우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 속에 디모데와 에바보라디도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궁극적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2:6-11). 전체적으로 예수→바울→바울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빌림보 교인들이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사람들이 필요하고 서로 배워가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2) 명령의 이유 1: 부정적 예들(18-19)

모본을 따라 살라고 명령한 이유는 그와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미 여러 번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합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인 되는 핵심인데, 그 반대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 내의 어떤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은 더 직접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단지 독자들에게 신자의 삶에 대해 주의를 주고 합당한 삶을 권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모습이 19절에서 설명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의 배입니다. 이 땅에서의 소유를 마치 신처럼 받들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 핵심은 돈을 향한 추구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관계나 하늘 하나님의 뜻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는 결과인 영생의 구원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영광은 곧 수치로 여김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일 것입니다. 1:28에서 언급한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결과와 동일합니다. 현재는 자기들이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어느 날 자신이 추구하고 누리는 것들이 허상인 것과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 명령의 이유 2: 긍정적 예들(20-21)

18-19절 모습과 달리 ‘우리’라고 말하는 진짜 신자들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바울과 그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17). 그들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 시민권을 소유한 자로서의 정체성입니다. 원래는 땅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예수로 인해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하늘 시민권자로서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정체성에 맞게 살아갈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온전함은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앞서 언급한 회심 이후 바울의 모습과 동일하며(7-14), 땅의 것에만 집중하는 자들(19)과 대조됩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땅에 발붙이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이중 정체성을 갖고 하늘을 보고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지는 21절에서 설명됩니다. 부활의 새로운 몸, 곧 예수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킨 예수 그리스도가(2:10-11) 신자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 부활이 중요한 것은 새로운 몸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소망하는 핵심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백성 혹은 하나님-자녀라는 새 언약 관계의 궁극적 완성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은 ‘나처럼 살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 시민은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이다’를 보여줍니다. 성공과 성취로 가득한 인생이라도 자신만 드러내면 본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득한 인생이라도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면 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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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3-01)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빌립보서 3장 1-11절


데이비드 폴리슨은 사람의 분노에는 심리적인 요인 외에 영적인 면이 있다고 간파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섬뜩한 일입니다. 상황을 자신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 그 밑뿌리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신의 자아가 있습니다. 바로 근원적인 죄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겠다고 말할 후 주제를 바꾸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들로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하나님 백성의 자격으로 가르쳐서 교회들을 어렵게 한 자들입니다. 아직 빌립보 교회로 들어오지 않은 듯 보이지만, 바울은 그들의 영향력을 조심하고 바른 진리로 분별하라고 요청합니다.

    

할례주의자로 인한 위험을 경고(1-11)

배움이 멈춘 사람들은 교만과 자만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때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거나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누리는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율법주의 선생들에 대해 설명해 나고 있습니다.

1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11) 

바울은 그리스도보다 육체를 자랑하는 할례파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는 몸에 해를 입히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자랑과 영광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를 부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되게 합니다.

(1) 새로운 권면을 시작함(1)

앞 강에서 다른 새로운 주제로 전환했습니다. ‘나의 형제들’이란 말로 빌립보 성도들과의 친밀감을 드러내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기뻐할 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수고스러움이 아니며, 그들에게 안전하다는 내용을 추가합니다. ‘같은 말’이란 2절부터 말할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했던 내용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진리로 인한 바른 삶을 조심해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그 삶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2) 할례주의자들을 조심하라(2-3)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으로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할례는 옛 언약 요소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외적 증거입니다(창세기 17:10-14). 아마도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고, 그것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창세기 17:13-14을 근거로 예수로 인한 새 언약 안에서도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듯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먼저 2절에서 몇 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 수위를 높입니다. 첫째, ‘삼가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해 강조합니다. 둘째, ‘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맨 앞에 위치시킵니다. 다짜고짜 ‘개들’이라고 말한 듯한 느낌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요법입니다. 아마도 유대인인 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여겼겠지만, 실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그들이 ‘개’라고 말합니다. 셋째, 그들을 ‘악을 행하는 자’로 말합니다. 단순히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를 거세라는 말로 비하합니다. 이 모든 것은 독자들을 보호하고픈 바울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왜 문제인지를 3절에서 설명합니다. 할례를 가진 자기들만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방인 독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 ‘우리’가 새 언약의 참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섬깁니다. 성령은 새 언약 백성의 증거로 약속된 것이기에, 그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가 진짜 하나님 백성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합니다. 예수는 새 언약에 대한 구약 예언을 성취한 분입니다. 신자는 그 예수와 관계 맺고 있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육체’란 몸이나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 얻은 자로서 복음에 합당치 않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할례라는 단순한 육체의 표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곧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설명입니다.

(3) 바울의 예 1: 회심 이전 상태(5-6)

할례주의자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육체, 곧 그리스도와 무관한 세상 것들에 대해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지만, 바울은 회심 이전의 자기가 휠씬 더 많다고 말하고 그 내용을 열거합니다.

총 일곱 가지인데, 유대인으로서의 자격과 율법과 관련된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격은 8일 만에 할례 받은 것과 이스라엘 족속, 베나냐민 지파 출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뒤의 두 개는 정말 자랑할 만합니다. 베냐민은 첫 번째 왕을 배출한 지파요 남유다 왕국을 이루었던 지파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팔레스틴 출신 유대인처럼 아람어를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것에도 자랑할 만합니다. 율법학자 그룹인 바리새파 출신이고,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율법 준수에 열심이었으며, 그 율법의 의로는 홈이 없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했다는 거의 예수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여겨 그들을 막는 것이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란 율법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행했다는 의미로 언약 관계의 신실함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회심 이전 바울의 입장에서는 언약 백성의 의무를 자기만큼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완벽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한 조건들입니다.

(4) 바울의 예 2: 회심 이후 상태 1(7-11)

5-8절에서 말한 놀라운 조건들을 무색하게 하는 반전이 시작됩니다. 현재 입장에서 과거의 그 모습은 전혀 쓸모없는 배설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에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가치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게 하신 그리스도(메시아) 예수입니다. 바울은 왜 그분이 더 나은 가치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비록 2:6-11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미 독자들에게 전했었고, 그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의 변화의 핵심과 이후 모습을 소개합니다.

먼저, 변화의 핵심 모습은 가치 비교를 통한 분별입니다. 행위가 중요하지만 우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먼저 생각과 사고 영역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우선적 가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입니다. 7-11절에 열 번이나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표현(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그의 부활의 권능, 그의 고난, 그의 죽으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율법 지킴을 통해 옛 언약 관계에서의 충실함을 최선으로 표현했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 바울 역시 옛 언약이 약속했던(예레미야 31:31-34; 에스겔 34:23-25) 새로운 언약 관계를 완성해 줄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이미 와서 공적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새 언약의 길을 완성했지만, 바울은 몰랐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 받고 마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킨 사람처럼 여김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받은 것입니다. 이후 그에게는 옛엣 언약의 요소보다 새 언약을 시작하고 온전케 하실 그리스도 예수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함께하고 싶어졌습니다. 심지어 그의 고난과 죽음도 본받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닐뿐더러, 그의 부활처럼 장차 신자에게도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옛 언약의 요소를 강조하는 할례주의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할례주의자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은 더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독자들 교회에도 미칠 수 있기에 미리 경고했고, 편지로 다시 조심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 시민으로 사는 일은 가치의 전복(顚覆)을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입니다. 현실의 통념과 지배 논리를 거절하고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에서 낯선 자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연한 세계에 당당하게 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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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2-03)


 바울의 동역자들

빌립보서 2장 19-30절


한국의 대표적 선교단체 중 하나인 죠이선교회는 예수님을 첫째로(Jesus First), 이웃을 둘째로(Others Second), 나 지신을 마지막에(You Third) 두는 삶이 인생의 참 기쁨(JOY)임을 전하며 젊은이 선교에 힘써 왔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렇게 사는 두 명의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1:27-2:18에서 교회 문제를 다룬 후 바울은 교회에게 보낼 두 사람을 추천합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디모데는 독자드의 상황을 알고 싶기 때문이며, 에바브라디도는 병이 들었다가 회복되어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이미 알고 있고 인정하는 사람들이지만, 바울은 그들을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또 다른 모본으로 소개합니다.

 

동역자 디모데(19-24)

영적훈련은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을 때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이 자신감 있게 빌립보 교회에게 디모데를 추천하는 이유가 여기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희 교회를 섬기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19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9-24)

감옥 안의 바울은 자신의 사정과 인위보다 빌립보 교회의 근황과 인부에 큰 관심을 갖고 심려했습니다. 몸은 사술에 매어 있지만 마음은 성도들을 향한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1) 디모데를 보내기 원함(19)

1:27-2:18을 통해 교회 문제에 대한 권면을 마친 후, 19절부터 주제를 바꾸어 빌립보 교회에 보낼 두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상황을 보고 될수록 빨리 보내고 싶어 합니다. 독자들의 상황을 듣고 마음에 기쁨과 힘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수감된 사람의 안부를 듣고 싶어 할 텐데, 바울은 그 반대로 말합니다. 독자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디모데를 선택해 보내는 이유(20-22)

19절과 연결해 디모데를 선택해 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빌립보 교인을 향한 디모데의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만큼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지고 독자들을 염려하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굉장한 칭찬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음을 향한 디모데의 섬김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만,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수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고한다’는 말은 종으로 섬긴다는 말인데, 7-8절에서 예수의 겸손한 섬김과 동일한 표현이나. 즉, 바울이 예수를 본받아 복음을 위해 섬기는 것처럼 디모데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는 디모데의 이런 모습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합니다.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개척자 중 하나였고 그 이후의 모습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인정을 이끌어내어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에 공감하게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바울을 중심으로 디모데를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디모데는 독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바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고, 복음과 관련해서도 마치 바울의 믿음의 아들처럼 함께 사역했습니다. 독자들이 바울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디모데 역시 그렇게 하라는 의도를 전달합니다. 

(3) 바울의 빌립보 방문에 대한 확신(23-24)

21-22절의 이유 때문에 디모데를 즉시 보내기 원한다고 다시 말합니다. 즉시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얼마 후가 될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봐서 곧 보내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곧 빌립보 교인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1:25-26에서 말한 것처럼 독자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동역자 에바브로디도(25-30)

교회를 섬길 때 때로는 돕는 자라는 자기 Identity를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목회자의 동역자요. 교회에 팀장의 동역자요. 대표 장로님에 동역자요. 이런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함께 일할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자가 될 때 그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25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25-28)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복음을 위해 충성하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안위보다 교회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성도들이 염려할까 근심했다기보다 그의 질병이 교회의 시험거리가 될까 근심한 것입니다.

(1)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 함(25)

19-24절의 니모데에 이어 에바브로디도도 추천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것들을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를 소개하는 방법이 놀랍습니다. 무려 다섯 가지 표현을 사용해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울은 그를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를 바울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역자와 군사로 묘사합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도와 동일한 일을 하는 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빌립보 교회가 믿고 보낸 사자이고 돕는 자입니다. 정리하면 그는 하나님이 인정한 자녀이며, 바울도 인정한 복음 사역자이고, 교회도 인정한 섬기는 자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귀한 섬김을 알아주라는 의도입니다.

(2)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이유(26-27) 

25절과 연결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표면상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에바브라디도가 독자 모두를 너무 보고 싶어 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독자들이 들은 것을 알고 근심했기 때문입니다(26).

바울의 소개에 의하면 에바브로디도는 참 귀한 신앙인입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교회를 대표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왔습니다. 복음에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또한 병든 자신보다 자기 때문에 걱정할 교인들을 더 염려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6-8절에서 말한 대로 자기를 높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택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또한 복음과 교인을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고 사는 1:12-26의 바울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이제 그가 회복되어 바울이 다시 보내려 합니다. 27절은 그간의 상황을 요약합니다.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은 에바브로디도에게 좋은 일이지만, 옆에서 지켜 본 바울에게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병은 바울에게도 깊은 근심이었기 때문 입니다.

(3) 에바브라디도를 보내려 함(28)

26-27절의 이유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려 한다고 다시 말합니다. 그가 돌아감으로 교회가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고, 또한 교회와 에바브로디도로 인한 바울의 걱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빌립보로 다시 가는 것은 에바브로디도 자신에게도 큰 기쁨일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그의 근심이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라디 도와 관련한 이 모든 과정은 교회와 사역자 사이, 교회 성도들 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에바브라디도 모두는 복음에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누구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직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되기를 생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을 통해 그림의 사랑에 기쁨과 웃음을 주십니다. 그분 역시 함께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당부(29-30)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하여 리더인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할 줄 알고, 섬기면서 일할 줄 알고, 또 사랑이 충만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일꾼으로서 에바브로디도가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29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28-30)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하나는 주님 안에서 큰 기쁨으로 그를 잘 영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앞의 것은 독자들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뒤의 것에 더 비중을 두는 듯합니다. 30절에서 에바브로디도가 무엇을 했는지를 추가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못한 것을 에바브로디도가 채웠습니다. 사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낸 것은 교회이기에 교회가 복음 사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일을 수행한 것은 마땅히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태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위와 상관없이, 교회 내 유명세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 충실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신성한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 나라의 참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도 ‘성공’을 논하는 시절을 삽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사역자를 보는 일은 희귀한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자기의 일보다 먼저 구하는 참 기쁨이 교회 안에 넘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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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2-02)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장 5-18절


교회의 분쟁과 분열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옳음가 틀림의 싸움보다 아픈 건 옳음과 옳음의 싸움입니다. 서로 옳다는 주장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을 품으라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마음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 다룬 대내외적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의 예를 듭니다. 그분은 신적 영광을 가지고 계셨지만 겸손함으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가역을 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전 영광을 회복시키고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는 교회에게는 겸손한 섬김의 본이고 세상에게는 로마 황제도 무릎 꿇어야 하는 주님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더욱 겸손히 그리고 굳건히 복음 안에 서야 함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본(5-11)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던 교만한 아담(창세기 장)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당연한 지위와 권리마저 다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5-11)

바울은 교회를 향한 사도의 애정 어린 당부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도 안에 있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가 있거든,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라고 권고합니다. 

(1)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권면(5)

5절은 1-4절과 6-11절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시작은 생각의 영역입니다. 그리스도가 생각했던 것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6)

3절에 이어 예수의 모습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성육신 이전 모습입니다. 전통적으로 본체를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 같은 존재론적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외적 형태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란 신으로서의 영광과 존귀로 옷 입은 외적 상태를 말하며 하나님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를 비롯한 인간들은 자신을 신격화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적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쟁 대상으로 여기거나 그 지위를 남용하고 움켜쥐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본문의 주동사인 ‘여기다’입니다. 3절 표현과 같은 것으로 생각 차원입니다. 실제로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예수처럼 생각하라는 명령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경쟁과 비교의식을 갖고 있는 교회 내 사람들의 태도와 다릅니다. 그들이 일차적으로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7-8)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상황입니다. 6절이 성육신 이전 생각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7-8절은 그 이후 그리스도의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두 개의 주동사를 통해 표현하는데, 그중 하나는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바울은 ‘비웠다’는 동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 행동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신성이나 능력 등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형체로서의 지위와 신분을 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유는 모습은 세 가지로 부연됩니다. 첫째,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종이란 당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낮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형체와 극렬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둘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본질상 피조물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모양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수동태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체이지만 피조물 중 하나인 사람이 되었고 마치 종처럼 가장 낮은 지위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 스스로 한 일입니다.

주동사를 통해 표현한 그리스도의 또 다른 행동은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성육신이 종의 형체가 되는 것이라면 낮추는 것은 종으로서의 행동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한 것으로 묘사되며, 그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부연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종과 십자가는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조롱거리입니다. 예수는 그 조롱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이지만, 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9-11)

6-8절에서 말한 예수의 생각과 행동의 결과입니다. 주어가 예수에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적 존재들을 포함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며 궁극적으로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원래 상태로의 회복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한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예수의 왕권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릎 꿇게 되는 자들 속에는 로마 황제를 포함해 그 밑에서 위세 떨치는 권력자들도 포함됩니다. 외적 어려움을 겪는 교회에게 세상의 실제 모습을 보여줌으로 써 온 우주의 왕을 섬기는 하늘 시민권자로서 당당하고 굳세게 서라고 격려하고픈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 권면(12-18)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예수님에게 가장 높고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앞에 모든 피조물들이 복종하게 하셨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신앙은 자라고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2-18)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권면합니다. 바울이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바울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신을 담아 권고합니다.

(1) 대내적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12-13)

6-11질에서 말한 예수의 모습을 근거로 구체적 권면을 합니다. 먼저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해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행위 차원의 명령입니다. 이 구원이 개인의 종말적 구원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문맥상 일차적으로 교회 상황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경쟁의 사고를 버리고, 자기를 비워 섬긴 그리스도처럼 바른 사고와 행위를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받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1-4절에서 말한 다른 사람을 항한 사랑과 배려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온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삶은 구원 속에 있는 신사 개인의 온전함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명령에 세 가지 요소를 추가합니다. 첫째,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입니다. 명령이 친밀한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확인시킵니다. 둘째, 어떤 태도로 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바울이 함께 있는 것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조심해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분은 신자 개개인의 삶을 통해 공동체의 온전함을 만들어 가실 소원을 주시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기에 그분을 의지해 행하라고 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울과 독자, 그리고 하나님 모두에게 중요한 것임을 전달하여 바울의 명령을 강조합니다.

(2) 대외적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14-16)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한 실제적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논쟁의 다툼 없이 행하라고 합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과정에서 겸손한 섬김을 주문합니다. 두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세상에서 그분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흠 없는 삶을 통해 잘 유지하여 복음 증거와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바울 자신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수고한 열매인 빌립보 교인들이 끝까지 복음을 위한 삶을 잘 살아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독자를 향한 사랑과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두 목적은 바울의 기도인 1:10-11 내용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대외적 문제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섬김을 본받아 진리의 기준을 지혜로 적용하는 분별의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3)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17-18)

자신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소개함으로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란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전해준 것(2:25,30)을 제사장적 섬김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설사 그들의 섬김을 받고 자신이 죽는다 해도 독자들로 인해 기뻐나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 더 중요하고 기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믿음의 진보와 복음 안에서 하나 되어 계속 함께 서는 것입니다. 독사들에게 동일한 관점을 갖고 기뻐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나 되는 일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개인의 비젼으로 하나가 된다고 해도 저절로 그것이 주님의 몸인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성도 각자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겸손한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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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2-01)


 복음에 합당한 삶

빌립보서 1장 27절-2장 4절


이민자들은 늘 정체성의 질문을 받습니다. 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전쟁 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로마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이들에게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제 속한 나라가 바뀌었으니 그 나라에 걸맞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뜻입니다.

 

화제를 빌립보 교회 상황에 대한 것으로 옮겨 두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 로마에 충성하는 도시의 분위기가 주는 압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 복음 증거 과정에서의 갈등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복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시킴으로써 대외적으로 더 버티고 대내적으로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외적 문제(27-30)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은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달려가야 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대적들이 있기에 성도들의 협력은 더욱 필수적입니다.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서로 연대하며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문화에 저항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 곧 하늘 시민에 합당한 삶입니다.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27-30)

바울은 빌립보 서오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하늘 시민답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로마 시민답게 살아야 하듯 말입니다.

(1) 바울의 명령(27a)

본격적으로 교회 문제에 대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첫 주제는 대외적인 것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빌립보 도시민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기독교인들을 압박하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합니다. 도입 부분만 자신의 상황 소개에 이어 계속해서 복음을 전체 주제 삼아 독자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생활하라’는 말의 원뜻은 한 도시의 시민으로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도시가 어디인지 말하지 않지만, 3:20은 성도를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 말합니다. 본문도 빌립보 도시가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함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1:1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과 빌립보 지역 거주민이라는 신자의 이중 정체성을 인식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둘째,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어디에 충성할지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같은 세상 권력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셋째, 세상 가치관과 문화에 충성하지 말라는 것으로, 황제를 위해 사는 도시 문화와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넷째, 다른 삶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1:10에서 말한 것처럼 진리의 지식으로 분별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그런 삶은 고난을 수반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왕에게 충성하며 살아가는 신자 삶의 정상적 모습입니다. 바울은 ‘오직’이라는 말로 첫 번째 명령을 시작합니다. 빌립보교회 문제에 대한 유일한 조언이며 신자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따라야 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2) 명령의 목적(27b-28a)

27a절 명령에 대한 목적을 기술합니다. 독자들의 귀한 삶의 소식을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믿음의 삶이 온전해지는 진보의 소식이 바울에게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25-26절에서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석방을 기대하는 마음과 동일합니다. 그의 이 마음은 ‘가서 보나 떠나 있으나’라는 것으로 강조됩니다. 외적 환경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정말 이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한 성령 안에서 굳게 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함께 싸우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공동체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 됨과 함께함의 표현이 반복되는데, 인간적 차원에서 개인의 싸움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맞서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4:2-3과 같은 공동체의 분열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둘째, 버티고 견디는 적은 복음의 신앙 때문입니다. 소속과 정체성이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사람을 사랑하는 구원의 진리 때문에 세상에 맞서는 것입니다.

째, 한 성령 안에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신적인 요소입니다. 단순히 인간적 버팀은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 어둠의 영역에 맞서는 것이기에 신적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 세 요소 통해 세상에 맞서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3) 세 가지 부연 설명(28b-30)

계속해서 28a절 내용에 대해 세 가지 추가 설명을 이어갑니다. 첫째는 고난당하며 복음을 위해 굳게 서는 것의 의미입니다(28b).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 견디는 것은 불신자들이 멸망당할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 신자에게는 자신들이 구원의 영역에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서로 다른 영역 속에서 다른 결과를 당할 운명임을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 은혜 받은 것은 예수를 믿는 궁정적인 것뿐 아니라 죄악의 세상에서 신자가 받을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중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자가 하늘 시민으로 충성하면서 경험하는 자연스런 갈등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시킵니다. 셋째, 바울 자신의 예입니다(30).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 또한 세상에서 하늘 시민으로서 복음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자신을 보고 힘을 내라고 말합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깊은 사랑의 권면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내적 문제(2:1-4)

대적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이 성도의 연합과 복음의 진보를 방해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은 기쁘지만, 그 기쁨은 충만하지 않습니다. 다툼과 분쟁을 넘어 한 마음으로 겸손히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온전한 기쁨이 됩니다.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1-4)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함께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하난 되기를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내의 다툼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실천을 촉구합니다.

(1) 바울의 명령: 하나 되어 살라(2:1-2)

시선을 교회 내적 문제로 돌립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갈등 상황입니다. 4:2-3에 나온 복음에 열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경쟁으로 인한 문제인 듯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의 상황 개선을 통해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개역개정은 그 명령을 4절에서 언급하지만, 원래는 2절에 있어야 합니다. 명령이 특이합니다. 보통은 문제 해결 자체에 집중할 것 같은데 바울은 자신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철저히 바울과 독자 사이의 사랑과 신뢰 관계에 기인한 표현입니다. 그만큼 바울이 독자들을 염려하고 있고, 그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독자들을 향한 명령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그에 대한 근거와 어떤 모습으로 기쁘게 할 것인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명령의 근거는 조건절로 표현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친밀한 감정이나 사랑의 마음이나 자비가 있다면…’ 모두 독자들이 믿음을 동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한편, 바울이 기대하는 모습은 독자들이 같은 생각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생각하기를 기대합니다. 모두 생각의 영역과 관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 내의 문제가 복음 사역과 관련한 경쟁과 비교의식임을 알았기에,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미 경험했거나 혹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은혜를 근거로 하나로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연합의 시작은 생각의 영역을 바꾸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같은 생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향하는 곳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 다음입니다.

(2) 두 가지 부연 설명(2:3-4)

바울이 기대하는 독자들 모습에 대한 부연입니다. 생각이 영역에서 시작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화합니다. 경쟁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겸손한 생각으로 서로를 자기보다 높게 생각하는 것입니다(3).

또한 자기의 일들에만 집중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들도 주의 깊게 보는 것입니다(4).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두 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내면의 생각 영역에서 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고, 그 모습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경쟁이나 비교의식이 아닌 배려와 겸손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0에서 말한 기도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리와 바른 분별의 지혜가 수반된 사랑의 삶으로 복음에 집중해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은 생각 영역에 집중하고 사랑과 관련한 행위의 모습은 5-11절에서 그리스도의 예를 말한 후 12절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선행해야 할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정체성이 우리의 말과 행동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삶의 방식은 우리가 천국 시민임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거슬러 하나님 나라 질서를 보여주는 겸손과 사랑의 공동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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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1-02)


바울의 최우선 순위

빌립보서 1장 12-26절


사람을 만남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항상 만나고 싶은 사람이며, 두 번째는 있으나마나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마지막으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항상 만나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일수록 은혜가 충만한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본문은 서신의 시작입니다. 첫 주제는 바울의 근황입니다. 수감된 바울을 염려하는 독자들을 안심시키고 오히려 그 상황이 복음이 더 확장되는 기회가 되었다는 긍정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와 함께 석방될지 순교될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석방을 통해 독자들의 기도와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을 위로하고 상황과 상관없이 복음 안에서의 삶을 계속 살라고 독려하려는 의도입니다.

  

외부 사건들과 바울의 반응(12-18)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란 없습니다. 매인 상황에서 허우적대며 원망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매임을 통하여 주님을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할 때가 강함인 것을 믿고 매인 상황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2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2-18)

바울이 감옥에 투옥된 일은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옥에 갇히지 않았으면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이 형제들의 담대함을 이끌어냈습니다.

(1) 도입(12)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미루어서 빌립보 신자들이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에서는 실수는 없으신 분입니다. 바울은 투옥됨으로 그의 사역이 움츠러들기는커녕 진보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독자들을 안심시키고 ‘복음’과 관련한 권면을 이어가려는 의도입니다.

(2) 갇힘과 진보(13-14)

12절과 연결해서 왜 자신의 상황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두 가지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는 교회 외적 차원에서 불신자들인 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그리스도 때문에 갇혀 있다는 것을 설명할 기회를 통해서이거나 혹은 실제로 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모든’이란 말은 과장된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사건은 교회 내적 차원에서 동료 성도들(형제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왕에 자극 받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바울이 의도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과정에서 일하고 계심을 소개함으로써 복음 때문에 의부로부터 압박 받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3) 두 가지 복음 증거 태도(15-17)

14절에서 언급한 바울 때문에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그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15). 착한 뜻으로 전한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증했기 때문에 매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서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16). 그리스도를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15)의 전파 동기는 이기적인 야심이었습니다(17).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 고의적으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했습니다. 물리적 고통보다는 경쟁심을 부추겨 바울에게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착한 뜻으로 전합니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갇힌 것을 알고 좋은 자극을 받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합니다. 이 두 부류는 로마 신자들로서 독자들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언급한 것은 빌립보 교회의 상황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의 교회 안에서도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비교의식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습니다(4:2-3). 바울은 이에 대한 권면(2:1-4)에 앞서 그들의 문제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4) 바울의 반응(18a) 

앞에서 말한 두 부류의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반응입니다. ‘그게 뭐?’라는 반응으로 시작해서 둘 다 괜찮다고 말합니다. 독특한 반응입니다. 보통은 좋은 뜻으로 전하는 쪽을 지지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좋은 뜻으로 복음 전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보입니다. 그 두 부류 모두 바울과 관련해 복음을 전하지만, 정작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전해지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면 됩니다. 이것이 그에게 진정한 기쁨이다. 바울의 이런 태도는 10절에서 독자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 곧 바른 지식의 기준과 지혜로 더 나은 것을 분별하는 사랑의 삶을 살 것에 대한 적용입니다. 비교의식이나 경쟁 같은 자신의 유익에 휘둘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라는 더 나은 가치로 상황을 분별해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이 모습을 말한 것은 그들 또한 동일한 원리로 교회 문제를 대하라고 권면하려는 의도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기도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기도 내용대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이며 빌립보 교회의 모델입니다.

 

바울의 내적 반응과 기대(19-26)

사명자의 삶은 자신의 원함과 유익보다 교회를 위한 사명과 유익을 더 앞세운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와 그리스도의 영광은 물론 ‘성도들의 신앙’도 바울이 살아 있는, 또는 살아야할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석방보다 더 간절히 기대와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9-26)

살고 죽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웅처럼 죽는 일은 차라리 쉽습니다. 바울에겐 그 편이 더 낫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살아서 고난을 감내하기로 합니다.

(1) 바울의 또 다른 기쁨과 그 이유(19-20)

11-18a절과 다르게 이번에는 갇힌 상황에 대한 바울 자신의 반응과 기대를 서술한다.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기쁨 외에 또 다른 기쁨이 있다고 말함으로 시작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자기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구원의 상태에 더 든든히 서 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를 위해 세 가지요소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함께 동역하고 있는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고, 셋째는 그런 삶으로 살고자 하는 믿음 안에서의 강한 열망과 열정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통로가 된 것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하고, 그분을 향한 삶이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열망은 3장에서 끊임없이 주를 추구하는 모습을 설명할 때 다시 표현됩니다. 이런 바울의 기쁨 역시 1:10에서 언급한 기도 내용의 적용이기도 합니다. 11-18a절이 외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18b-20절은 자신의 상황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주 안에서 더 중요한지를 분별하여 적용한 것입니다. 독자 역시 동일한 원리로 적용해야 합니다.

(2)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바울의 갈등(21-24)

‘이는’이라는 접속사로 앞부분을 부연합니다. 자신의 상황이 석방으로 연결될지 죽음으로 이어질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지만, 바울은 갈등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죽음으로 고통을 끝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그리스도로 인해 영광의 몸, 곧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3:20-21).

바울이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완전함과의 가치 비교 때문입니다. 그 핵심은 과거 십자가/부활을 통해 보이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다(3:7-9). 그것이 확실하기에 미래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의 삶은 과거 십자가/부활의 은혜를 발판으로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시 10절에서 말한 진리로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삶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독자들이 너무 슬퍼하고 힘들어한 것 같아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다. 신앙 안에서 자신에게 최선의 것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모습 사이의 갈등입니다.

(3) 바울의 확신(25-26)

21-24절의 갈등에 대한 바울의 선택과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석방될 것을 기대합니다. 자신의 목숨 보전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독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의 석방은 믿음으로 바울을 위해 기도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다시 보게 되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10절의 기도 내용처럼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하는 사랑의 삶의 적용입니다. 자신의 생명이나 소원보다 성도들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분별합니다. 여기서의 기준은 성도 사랑이다. 이전 18a절과 연결하면 바울의 삶의 기준은 (1) 그리스도와 복음과 (2) 성도들이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로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바울을 아낌없이 후원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시기와 다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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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01-01)


교회를 향한 감사와 기도

빌립보서 1장 1-11절


 성경공부 프로그램인 프리셉트(precept)의 창시자인 Kay Arthur는 “빌립보서는 수많은 신자들의 일상생활 속에 새로운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준 영적 진리의 샘이다”고 했습니다. 그에 빌립보서에 대한 표현이 정확합니다. 이 서신을 읽을수록 하늘에 속한 새로운 기쁨과 평화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빌립보서를 통해 진리의 샘 속으로 빠져드시길 바랍니다. 모든 세상의 눈물을 씻고 하늘의 위로와 기쁨 그리고 평화를 보길 바랍니다.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복음에 참여한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 풍성하게 되어, 선한 것을 분별하며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서론(1:1-2)

세상에서 마음 맞은 사람들과 일을 함께 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바울이 원하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좋은 소식을 듣고서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1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

사도 바울은 당시 편시의 도입 부분은 발신자와 수신자, 문안 인사로 구성됩니다. 동일한 형태를 사용하지만, 바울은 나름의 독특한 몇 가지를 넣어 자신의 의도를 넌지시 소개합니다.

(1) 발신자(1)

바울은 당시 자신의 이름을 두 가지로 사용하는데, 헬라식 이름인 ‘바울’과 히브리식인 ‘사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방인의 중심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헬라식인 ‘바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➀ 예수 그리스도의 종(1)

바울은 자신에 관련하여 ‘사도’라는 말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도’라는 표현을 안 쓴 것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다는 끗이고, 종을 사용한 것은 예수에 대한 충성과 그분을 섬기는 자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교회 내적 갈등에 대해 권면하면서 예수의 섬김을 말할 때 다시 사용됩니다(2:7). 교회의 문제에 대해 종으로 섬기신 예수를 따라 살라고 말하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바울 자신을 예수를 따라 섬기는 모본으로 소개하여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3:17).

➁ 동역자 디모데(1)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과 같이 동급으로 소개합니다. 발신자에 대한 특별한 소개 없이 이름만 나열한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경우를 제외하면 바울 서신 중 유일한 표현입니다. 보통은 바울은 사도로, 디모데를 형제로 말합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빌립보서 2:20), 바울의 감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2:19,23). 디모데는 3인칭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이 서신의 공동 저자는 아닙니다(2:19-24). 로마에 잡혀 있던 하나님의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들(‘노예’)이었다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사용한 헬라어 ‘하기오이(ἅγιοι)’는 ‘구별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하나님께 구별되었습니다. 비록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를 ‘종’으로 표현한 것과 함께 생각하면, 디모데 역시 자신과 똑같이 예수를 충심으로 섬기는 자로 소개하려는 의도입니다.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기에 교회는 그를 잘 알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를 더욱 추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도는 2:19-24에서 구체화 됩니다.

(2) 수신자(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일꾼인 감독과 집사들뿐 아니라, 모든 평신도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문안하며 편지를 보냅니다.

➀ 빌립보 성도들(2a)

바울은 수신자와 관련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성도의 이중 소속과 정체를 말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빌립보라는 물리적 차원입니다. 이런 이중 정체성은 교회의 내적(2:1-11,12-13), 외적 문제(1:27-30;2:14-18)를 다루는 권면의 기초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말하며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한 3:20과도 연결됩니다.

➁ 감독들과 집사들(2b)

감독들과 집사들을 수신자 속에 포함합니다. 모든 바울 서신 중에 유일한 표현입니다. ‘감독’이나 ‘주교’는 ‘장로들’로 부르기도 했으며(디도서 1:5,7). 그들은 양떼를 돌보거나 목양하는 책임을 졌습니다(참조, 사도행전 20:17,28). ‘집사들’은 회중 안에서 특별히 봉사의 직무를 지닌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참조, 사도행전 6장). 감독들과 집사들을 따로 말하지만 그들도 모든 성도 안에 포함됩니다. 아마도 4:2-3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포석일 것입니다. 모든 내용은 독자의 상황을 알고 그들과 소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바울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➂ 은혜와 평강(2c)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인사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은혜를 묘사하는 두 개의 단어인 ‘은혜와 평강’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의 사용 순서는 의미가 큽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은 갈보리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는데, 어떤 진심에서 우러난 평강이 있기 전에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그 근원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감사(3-8)

하나님께서는 구속을 시작하신 끝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채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늘에 속한 온갖 은혜를 교회 안에 충만하게 채워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날마다 세우신 그 교회를 은혜로 채워 가시는 분이십니다.

3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3-8)

빌립보 교회는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고통 받는 현장을 찾아와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바울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위해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1) 끓임 없는 증거에 감사(3-6)

바울이 그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시간은 흘렀어도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항상 그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감사하고 있는지 서신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마음속에 큰 기쁨이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에 1,300km나 떨어진 로마에 있는 사람에게서 온 감사의 편지가 있습니다.

믿는 자들 중 어느 하나도 바울의 기도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죄수에게서 온 감사,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기쁨으로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고난은 바울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하는 동역자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이 자기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빌립보 교인 들은 바울을 위하여 그가 진 짐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드린 셈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죄수로 있었던 어려운 때에만 소유를 나누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첫날부터 그와 교제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에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에 큰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확신하노라’는 헬라어 단어의 완료 시제는 바울이 일찍이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아직도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확신하고 자신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을 틀림없이 계속하여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 ‘착한 일’은 바로 그들의 구원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바울과 교제하고 그에게 후원금을 보내주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 하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들 가운데서 일하실 것입니다. 2:16에서 바울은 이날을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그날이 언제인지 몰랐지만(그때에 모든 믿는 자들이 주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올려질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 속에서 시작하신 그 일을 계속 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2) 복음을 염려함에 대한 감사(7)

이 구절의 첫 부분은 3-6절에 나타난 대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생각했던 바에 대한 일종의 해명이자 변호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는 구절의 헬라어는 ‘너희가 나로 나의 마음에 있게 했기 때문에’로 변역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서로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NIV성경의 번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1:8과 4:16에서도 서술됩니다.

바울이 구금 상태에 있든지 풀려났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하시는 일 속에서 그와 함께했습니다. 그 일은 우선적으로 복음 전파와 관련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와 함께 교통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염려하는 모습에 그들에게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3) 바울의 사랑으로 나타난 감사(8)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빌립보 교인을 향한 자기의 감정을 증거하는 증인이시라고 합니다. 바울은 마치 빌립보 교인이 그러기나 한 것처럼, 그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까 봐 염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아셨습니다. 빌립보 교인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인 관심이나 흥미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완전히 압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 자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의 실재와 강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9-11)|

과실은 한 해 동안 열심히 광합성을 하여 때가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농부를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백성에게 의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길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광스러운 교회는 끊임없이 자라가는 열매 맺는 교회임을 기억해 합니다.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9-11)

4절과 연결된 기도의 내용으로 독자들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 안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두 가지를 추가해 그 사랑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지식과 총명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한 것이고, 총명은 통찰력이나 판단의 지혜입니다. 모두 분별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바른 기준으로서의 지식과 그에 따라 잘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의 기도는 독자들이 지식과 총명으로 분별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런 삶이 왜 필요한지를 첨가합니다(10-11). 그들이 진실하며 허물없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개인과 교회 공동체 내에서 복음과 관련해 순수하고 바른 동기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2:1-4), 허물이 없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2:15).

이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합당한 의의 열매가 가득 맺히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는 삶입니다. 바울은 독자들의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기도 내용은 신자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신자의 삶은 ‘진리’로 ‘분별’하는 ‘사랑’의 삶입니다. 둘째, 신자의 삶은 크고 길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을 인식하고, 세상 속에서 오늘이란 시간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궁극의 초점인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삼십여 년 동안 주님을 섬긴 사도가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감옥에서 성도를 향해 이 기도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그의 유언 같은 것으로 신자 삶의 핵심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로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바울을 아낌없이 후원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시기와 다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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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서론


복음 없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자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삶의 중심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옮겨졌을 때 가능합니다. 감옥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이야기한 바울의 모습은 성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됩니다.

  

1. 빌립보서의 저자

빌립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1) 내증 : 확실히 바울은 디모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라고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1인칭 단수로 전체를 썼다는 사실은 양자 중 바울에게 주된 책임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밝혀집니다. 빌립보서의 저자는 디모데가 아니라 바울이었습니다.

(2) 외증 :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의 요새의 공격을 지휘한 사람은 바울이였는데 그는 갈라디아서, 고린도후서, 그리고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의 이름으로 통하는 모든 서신들에 대하여 바울 저작권을 공격 하였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독들과 집사들에 대한 언급(1:1)은 바울 후기의 교회 정치 무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6:1-6, 11:30,14:23,20:27,28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2,13의 연구는 이런 직분이 빌립보서가 기록되기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2. 빌립보서의 기록연대

기록 장소는 분분하지만, 대략 주후 61~63년(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던 말기)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중의 하나입니다.

 

3. 빌립보서의 수신자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 (1:1)

 

4. 빌립보 교회 :

 (1) 사도 바울이 유럽 땅에 세운 최초의 교회이었습니다. 주후 52년경, 제2자 전도 여행 중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해 빌립보로 건너갔습니다(사도행전 16:9). 이곳에서 자주장사인 루디아와 한 간수의 집안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들의 가정은 유럽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바울인 제3차 전도 여행 때 다시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고린도후서 2,7장).

(2)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이 교회는, 작고 가난했지만 무척 관대하고 자선적인 교회였습니다. 이 편지가 기록하기 전에도 이 교회는 바울에게 최소한 두 번 정도의 헌금을 보냈으며(4:16), 그가 로마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헌금을 보내 바울을 도왔습니다(4:10,14). 또한 그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미덕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한 일에서도 나타납니다(고린도후서 8장).

 

5. 빌립보 (도시)

(1)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2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는 번영하는 로마의 식민지(유명한 로마 ‘에그라티아 도로’변 비옥한 평원 위에 건설된 동부 마게도냐의 도시로, 주변의 산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채굴되었다)였습니다. 이곳은 마게도냐 로마 속주의 첫 번째 지역이었습니다(사도행전 16:12).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고대에서 중세에 걸친 광범휘한 기간의 유적들이 발굴되었습니다.

(2)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전도 중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었으나, 옥터가 흔들리고 쇠고랑이 풀려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사도행전 16:25~40). 그들은 신자들을 격려한 후, 빌립보를 또 났습니다. 후에 제3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 다시 한 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0:6).

 

4. 빌립보서의 기록 배경

(1) 사도 바울은 주후 50년경 제2차 전도여행 때 로마군의 전초기지이며 각종 철학, 종교, 우상이 성행하던 빌립보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들을 돌보았지만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2)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다른 교회와 바울의 ‘주고받는 일’이 없을 때에도 지속적으로 바울을 도왔기 때문입니다(4:15).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도 내부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로 인한 분쟁(3:1~3),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일어난 분열(4:2), 바울의 투옥으로 인한 갈등(2:19~24) 등이 그것들입니다.

 

5. 빌립보서의 기록목적

(1) 감옥에 있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권면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2) 자신이 투옥된 상황은 복음의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임을 밝힘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일치와 기쁨을 누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입니다(1:12~26).

(3)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보내준 헌금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함입니다(4:10,14~18).

(4)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가 왜 에바브로 디도를 되돌려 보내는지 설명하기 위함입니다(2:25~30).

(5) 빌립보 교회에 분열의 위험이 있음을 듣고, 그들이 한 마음으로 연합할 것을 권면하기 위함입니다(1:27; 2:1~11; 4:2).

(6) 빌립보 교회에 만연한 율법주의가 복음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3:3~11).

(7) 성도의 경험이 외부 상황에 의해 형성되지 않고 성도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8) 빌립보 성도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처럼 순종하는 것입니다.

 

6. 빌립보서의 구성

1:1-2 첫인사

1:3-11 바울의 감사와 기도

1:12-26 바울 자신의 형편 소개

1:27-2:18 빌립보 교인들의 형편과 권면

1:27-30 굳게 섬

2:1-2 하나됨

2:3-11 겸손

2:12-18 순종과 성결

2:19-30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형편 소개

3:1-4:1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

4:2-9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권면

4:10-20 선물들에 대한 감사

4:21-23 끝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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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서론

 


출애굽기 서론


1. 명칭

‘출애굽기’라는 명칭은 구약 헬라어 본 70인역(LXX)과 영어번역 엑소더스(Exodus)와, 벌게이트역(Vulgate) 엑소디(Exodi)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1에 나오는 ‘떠나다’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애굽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유대 전통에 따라 첫 두 단어인 ‘붸엘레 쉐모트’(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이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출발, 탈출, 밖으로 나감 등을 뜻합니다. 출애굽기는 다른 책과 분리된 내용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지는 큰 줄거리의 교량 역할을 하는 책으로서 상기 책들과 상호 연관성을 자집니다.

 

2. 저자

‘출애굽기’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⑴ 내적 증거 : 출애굽기 17:14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함으로써 출애굽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 외에도 24:3-4 “(3)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34: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등에서 모세를 저자로 언급하며, 예수님도 모세의 기록으로 인정한다(막 7:10; 12:26; 눅 20:37; 요 5:46-47; 7:19-23).

⑵ 외적 증거 : 뿐만 아니라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하여 모세가 저자임을 분명히 한다. 모세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기록하였고, 이 5개의 책을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모세오경’(pentateuch)이라고 부른다.

 

3. 출애굽의 연대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B.C. 1445-1440년 무렵 아멘호텝 Ⅱ세(B.C. 1450-1425) 치하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라암세스 Ⅱ세(BC, 1299-1232) 치하에서 B.C. 129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두 견해 중 전자를 뒷받침해 주는 열왕기상 6:1에 의하면,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해는 출애굽 사건 이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즉위 제 4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 즉위 제4년이면 B.C. 약 960년경입니다. 따라서 출애굽의 시기는 대략 BC 1440년경이 됩니다.

또 B.C. 1100년경에 활동했던 입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300년이 흘렀다(삿 11 : 26)고 말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제18왕조인 투트모세 Ⅲ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Ⅱ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다고 합니다(2:15,23, 3:10).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 11에 나타나는 ‘라암셋’이라는 지명을 볼 때 분명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라암세스 11세(B.C. 1299-1232) 때라고 주장한다. 후기설에 대한 논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로 동원된 라암셋 성은(1 : 11) 당시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의 이름을 따서 붙였으므로 출애굽은 라암세스 Ⅱ세 이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 모세의 나이는 80세였고 라암셋 성은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세워진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후기설을 취한다면 B.C. 1299-1290년 사이, 즉 9년 만에 모세가 80세가 되었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⑵ 또 요단강 동편 지역에는 B.C. 1900-1300년경에 정착민들이 없었으므로 에돔 족속 같은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것(민 20 : 20, 21)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В.С. 16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주장도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습니다.

⑶ 이스라엘 민족이 В.С. 1300년까지는 ‘하솔’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제시되지만 성경은 하솔이 두 번 멸망했다고 말합니다. 1차 멸망은 여호수아에 의해서이고(여호수아 11:10,11), 그 후에는 드보라와 바락이 하솔을 무너뜨렸습니다(사사기 4:2,23,24). 하솔의 유적지에서도 이 성읍이 B.C 1400년경에 멸망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⑷ 또 라기스(여호수아 10:32)와 드빌(여호수아 10:38,39)이 В.С. 1230-1200년 사이에 멸망한 것은 후기 연대설을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수아가 이 도시들을 완전히 멸절시켰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여리고’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성경적 증거와 고고학 자료들은 출애굽 연대를 B.C. 1445-1440년경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4. 주제 및 신학

출애굽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입니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속하시고 그들 중에 임재하셔서,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본서의 핵심입니다.

성경의 구원 사상은 출애굽의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과정을 통해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며,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는 자임을 계시하였습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최소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 계시, 둘째 그의 속성, 셋째 구속 사상, 넷째 그의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 방법입니다. 또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의 소명과 사역, 제사장 제도의 시작, 선지자의 역할 등으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3, 6, 33-34장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초점은 ‘여호와’라는 이름과 그의 영광의 임재에 있습니다. 또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그의 영광, 거룩함 위엄, 능력에 견줄 자가 없음(15:11)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구속 산하의 핵심은 12, 2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 양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성취되었다(요 1 : 29 ; 고전 5 : 7).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의 언약에 가한 것(2:24)으로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3:15-17; 6:2-8; 19:3-8), 또 ‘십계명’(20:1-17)을 통하여 성경적 유리와 도덕의 기초를 확고히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언약의 책’(20:22-23:33)을 통하여 그 원리를 실생활에 어떻게 전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로 예배학에 관한 사상으로 끝을 맺습니다. 거기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제도와 규율이 무소부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5. 출애굽기의 구조와 내용

1:1-22 서론: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

1:1-7 이스라엘의 급격한 번성

1:8-14 박해를 받는 이스라엘

1:15-22 바로의 말살정책

 

2:1-7:7 모세의 생애와 소명

2:1-10 모세의 탄생

2:11-25 미디안으로 도망한 모세

3:1-4:31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심

5:1-7:7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7:8-12:36 애굽에 내려진 재앙들

7:8-13 아론의 지팡이가 뱀이 되다

7:14-25 첫째 재앙: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하다

8:1-15 둘째 재앙: 나일 강에 개구리가 가득하게 되다

8:16-19 셋째 재앙: 티끌이 이가 되다

8:20-32 넷째 재앙: 파리가 가득하다

9:1-7 다섯째 재앙: 가축의 죽음

9:8-12 여섯째 재앙: 악성 종기가 생기다

9:13-35 일곱째 재앙: 우박

10:1-20 여덟째 재앙: 메뚜기

10:21-29 아홉째 재앙: 흑암

11:1-10 열 번째 재앙에 대한 경고

12:1-28 유월절과 무교절

12:29-36 열 번째 재앙: 장자의 죽음

12:37-42 출애굽

12:43-51 유월절

13:1-10 무교절

13:11-16 초태생에 대한 규례

13:17-15:21 홍해 횡단

15:22-18:27 광야생활

15:22-27 마라의 쓴 물

16:1-36 만나와 메추라기

17:1-7 므리바 반석의 물

17:8-16 아말렉과의 전투

18:1-12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방문

18:13-27 백성의 우두머리(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를 세움

 

19:1-24:18 시내산에서

19:1-25 시내산 도착

20:1-17 십계명

20:18-23:33 율법

24:1-18 시내산 언약

 

25:1-31:17 성막에 관한 규례

25:1-9 성막을 지을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25:10-31:17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에 대한 설명

 

32:1-34:35 금송아지 사건과 두 번째 언약

32:1-35 금송아지 숭배

33:1-23 호렙 산에서의 모세

34:1-35 두 번째 언약

 

35:1-40:33 성막 건축 실행

 

40:34-38 성막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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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0-01)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I)

열왕기상 20장 1-12절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청지기의 벗어나서 자신이 주인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셨을 때, 에덴의 관리자 청지지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을 때, 그곳에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 아담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절대 권력자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임박했습니다. 벤하닷은 32명의 왕을 이끌고 올라와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그는 아합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라고 위협했습니다. 아합은 납작 엎드리며, 요구에 응하겠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의 속내는 사마리아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것이었습니다. 벤하닷의 과해진 요구에 아합은 장로들과 대책 회의를 엽니다. 장로들은 요구를 거절하라고 단호히 조언합니다. 벤하닷은 아합이 요구에 불응하자, 사마리아에 대한 공격 준비를 명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1-12)

그 누구도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기에 자신의 소유와 능력을 믿고 교만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소유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소유를 자랑하고 앞으로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소유와 능력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합니다.

1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2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3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4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5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6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7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8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9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10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11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12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1-12)

왕들 중 가장 악하다고 평가받은 아합의 기록(16:29-22:40)은 아합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심판을 함께 묘사합니다. 아합의 통치 개요(16:29-34)와 석 장에 걸친 가뭄과 엘리야와 관련된 사건들(17:1-19:21) 이후, 다시 세 장(20:1-22:40)에 걸쳐 아합 중심의 사건들이 서술됩니다. 이 단락은 아람과의 세 차례 전쟁(20장, 22:1-40)을 기술하며, 그 중간에 나봇의 포도원 사건(21장)을 두고 있습니다. 본문은 제1차 전쟁인 사마리아 전투(1-21절)의 전반부입니다. 앞서 17-19장에서는 가뭄과 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알에 비견할 수 없는 전능자임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20-22장에 묘사된 하나님께서는 첫째, 아람과의 전쟁을 통해 그가 인간 역사의 주관자임을 증명하십니다. 둘째, 전쟁에 개입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악한 세대 속에서도 자기 백성에 대한 언약적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셋째, 계속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보내어 왕과 백성을 인도하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넷째, 선포된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그의 전능함을 나타내십니다. 다섯째, 죄의 경고와 심판을 통해 공의를 행사하고, 순종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입증하십니다. 한편 아합에 관해서 20-22장 단락은 그의 죄악을 고발하고 마땅한 심판을 받았음을 알립니다. 아합의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앙적인 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이득과 판단에 부합되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버렸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악을 행했을 뿐 아니라 이세벨을 통해서도 범했습니다. 둘째, 사회적인 죄입니다. 아합은 죄 없는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갈취했습니다. 이로써 백성의 권리가 담긴 율법과 사법 질서를 짓밟았습니다. 셋째, 정치적으로 그는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두고 동맹을 맺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렸고, 백성과 후손에게 전쟁의 고통을 지속시켰습니다. 이는 16장의 개요에 서술된 아합의 악행을 증명하고, 그가 왕들 중에 가장 큰 악을 행한 왕임을 재확인해줍니다.

(1) 사마리아를 포위한 아람군대(1)

아람의 벤하닷 2세(주전 약 860-841년)와 그의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말과 병거를 끌고 올라온 무리 중에는 32명의 동맹국 왕들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메섹 왕 벤하닷처럼 아람과 인근 지역에 있는 도시국가의 우두머리들입니다. 벤하닷이 ‘아람 왕’이라는 대표성을 가진 칭호로 소개된 것과 32명의 왕이 그의 전투에 동참했다는 것(1)은 벤하닷이 실권을 장악한 주체이며, 각 왕들의 나라가 그에게 예속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람도 다윗 대에 이스라엘에 종속되었으나(삼하 8:6), 솔로몬 대에 르손이 그의 대적자로 일어나 다메섹의 왕이 되면서 독립했습니다(11:24). 이스라엘의 분열 이후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세는 뒤바뀌었습니다.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동맹을 맺기 원하는 나라로 부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아사와 유다의 아비얌은 다메섹의 벤하닷 1세(주전 약 896-874년)와 각각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비얌의 왕위를 이은 아사도 벤하닷에게 화친을 맺고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간청하는 입장이었습니다(15:18-24). 그때 벤하닷은 바아사와의 조약을 깨고 아사의 요청에 응하여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공격했습니다(15:20).

(2) 벤하닷의 요구와 아합의 대응 1(2-4)

아합은 순순히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라는 벤하닷의 요구에 군말 없이 응합니다. ‘벤하닷이 이렇게 말한다’(“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2)로 시작하는 서찰은 아합의 기를 꺾으려는 기고만장한 벤하닷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아합의 은과 금, 아내들, 자녀들이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자기에게 바치라고 명합니다. 아내들을 바치라는 것은 왕권을 갖겠다는 뜻이며(2:21-22; 삼하 16:21-22), 자녀들을 바치라는 것은 인질로 삼아 활용하겠다는 뜻입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내 주(주인) 왕”으로 부르며(4), 자신과 자신의 소유가 다 벤하닷의 것이라 답합니다. 이전에 유다의 르호보암과 아사가 예루살렘을 사수하기 위해 각각 애굽과 다메섹 왕에게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내주었듯이(14:26; 15:18), 벤하닷의 도발에 대한 아합의 굴복은 강대국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소극적이고 굴욕적인 대응입니다. 이는 또한 현재 이스라엘이 아람 군대를 당해낼 수 없는 형편임을 암시합니다.

(3) 벤하닷의 요구와 아합의 대응 2(5-9)

벤하닷이 조공을 빌미로 아합을 옥죄어 오자 아합은 급기야 그 요구를 거절하기에 이릅니다. 벤하닷은 사신들을 다시 보내 앞서 요구한 것을 재확인시킵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아합과 그의 신하들의 집까지 다 수색하여 그의 소중히 여기는 재물과 사람들을 취해갈 것이라고 통보합니다. 아합은 지난번에는 저자세를 취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했으나 벤하닷의 요구 조건이 과도해지자 안색을 바꿉니다. 그는 장로들을 다 불러 회의를 열고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벤하닷을 ‘이 자(사람)’로 낮춰 부르며, 그가 악을 도모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7). 이 설명은 벤하닷이 화평을 위해 조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려고 시비를 건다는 뜻입니다. 아합은 벤하닷이 재산과 자기 가족을 바치라 명했고, 자신이 이를 거절하지 못했음을 덧붙여 실토합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 자신이 당한 모욕을 알렸을 수도 있고 이를 통해 장로들의 거부 의견을 모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현 상황을 들은 장로들은 모두 벤하닷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단호히 입을 모았습니다. 이에 아합은 벤하닷이 처음 요구한 것은 들어주겠으나 그 이상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음을 사신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벤하닷을 “내 주 왕”으로, 자신은 “(당신의) 종”으로 부르며 아람의 눈치를 살핍니다.

(4) 벤하닷의 요구와 아합의 대응 3(10-12)

아합과 벤하닷 사이에 마지막 신경전이 오가고, 끝내 아람은 사마리아를 공격할 태세를 갖춥니다. 아합이 태도를 바꿔 자신의 명을 기억하자 벤하닷은 분개했습니다. 이에 벤하닷은 만약 자기 발치에 있는(“나를 따르는”, 10) 백성들이 사마리아의 흙먼지 한 숨을 줘 수 있게 된다면, 신들의 어떤 별도 받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흙먼지 한 줌’의 의미는 군사들의 손으로 먼지나 재의 부스러기를 주워 담지도 못할 만큼 사마리아를 초토화하겠다는 뜻입니다.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10)는 엘리야의 생명을 위협한 이세벨의 말에서도 언급된(19:2)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는 말하는 자의 분노와 확고한 결단을 함축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의 큰소리에 지지 않고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11)고 받아칩니다. 한마디로,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훈계입니다. 전쟁하러 나서는 병사(“갑옷 입은 자”)가 승전한 병사(“갑옷 벗는 자”)인 양 나대고 있음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이번 아합의 회신에는 “내 주왕”이나 “(당신의) 종”이라는 표현(4,9) 없이, ‘(그에게) 전하라’는 명령만 나와 그의 돌변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왕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던 벤하닷은 아합의 도발을 전해 듣고 바로 공격 준비를 명합니다(12). 군대는 즉각 공격 태세를 갖춥니다. 그런데 실상 벤하닷은 공격 명령만 내렸을 뿐 연회 자리는 뜨지 않았습니다. 이후 정오가 되어 이스라엘이 선제 공격을 해올 때, 그와 왕들은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16). 이런 상황은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쉽게 함락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방심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를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이 세상에 선포하실 주님 예수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안정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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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3-02)


여호와의 회복의 날

스바냐 3장 9-20절


경기에서 승패의 결과를 집중하면 긴장하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승패의 결과를 알고서 게임을 볼 때, 경기 중에 어떤 일이 생겨도 크게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아무리 많은 점수 차이가 나더라고 승리한 게임은 결국에는 언젠가는 반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역시 이미 승리가 보장된 영적 전쟁을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회복하실 것을 표현합니다. 이 날은 회개의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주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여호와를 인정하는 이방인들도 주께 나오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기쁨으로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열방의 회복(9-10)

사람들에게 가장 안식을 주는 곳은 바로 ‘집’입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본향 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의 방황은 지나가고 본향으로 입성할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상 죄인이므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죄 사람의 역사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9-10)

본문은 종말에 열방과 유다가 맞이할 영광스러운 구원과 복을 다룹니다. 9,19-20절에 반복된 ‘그때’와 11,16절에 나오는 ‘그날’은 여호와의 큰 날, 즉 종말론적 회복과 구원의 때를 일컫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열방을 향한 심판을 선언한 후, 그들의 회복을 예견합니다. 종말에 성취될 열방의 회복과 구원은 이사야 19:22-25에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주권자로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과 앗수르를 심판하신 후, 그들을 이스라엘과 함께 참된 예배자로 세우십니다(사 19:21). 그리고 그들이 열방의 복이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열방은 헛된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했고, 정화되지 못하고 더러운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셔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11-18)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 같이 심판을 선고하셨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사람들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어 진노하신 것이지, 절대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이방인이 우리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제는 주의 말씀을 가지고 땅 끝이 이르러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11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14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11-18)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구원 받을 사람들을 회복시키신 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을 돌립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며, 백성들을 죄악과 교만에서 회복시켜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그곳의 거민들에게 다시 더 특별하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것은 백성에게서 불순한 요인들을 제거됨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존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11-13)

선지자 스바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회복을 극적으로 다룹니다. 11절 이후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정결케 되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경험자들, 즉 남은 자들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남은 자들’의 대표적인 예는 온 세상이 물로 심판받는 가운데서 구원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입니다(창 6-10장). 아합왕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 또한 남은 자들입니다(왕상 19:18; 롬 11:25). 사도 바울은 각 시대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롬 11:5). 성경에서 남은 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점은 이들이 의미 있는 신앙의 자질과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바냐는 남은 자의 영적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악을 행하지 않음. 둘째, 거짓을 말하지 않음. 셋째, 입에 거짓된 혀가 없음. 이사야 30:15,18은 남은 자들의 영성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잠잠히 여호와를 신뢰함. 둘째, 여호와를 기다림, 즉 남은 자들은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며 악을 행하지 않고, 입술에 거짓이 없으며, 잠잠히 여호와를 신뢰하고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순결한 신부와 같이 주님을 기다리며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종말의 때에 여호와의 구원과 영광을 경험할 것입니다.

(2)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14-15)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참조, 사 1:8: 애 1:1-6). 그때에 시온의 딸은 기쁘게 노래 부르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거하셨고, 그들을 괴롭혔던 원수를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왕으로 좌정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임하시는 것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나아오심과 임재는 구원, 생명,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사 35:35:40:1-11). 반면, 여호와의 떠남은 저주, 심판, 사망을 의미합니다(겔 10장). 여호와께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시자,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 당했습니다(겔 11:1-13). 여호와께서 시온에 왕으로 임재하신 것은 회복과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므로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3)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16-18)

본문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그들을 위해 성취하실 구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 회복의 때에 유다 백성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으로 인해 손을 늘어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기뻐하며 17절은 15절과 함께, 당신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와 그분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임재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좌정하실 때,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과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진노와 분노가 아니라, 사랑, 기쁨, 즐거움을 품고 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자하나님으로, 구원자로 임재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좌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구원하시고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확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유, 치유, 소망, 부유함을 누릴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은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과 평안과 기쁨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께 달려 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유배 상황 속에서 절기를 지키지 못해 근심했지만, 이제는 마음껏 절기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19-20)

여호와의 회복될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는, 구원 받지 못할 것 같았던 이방인들을 먼저 영적 회복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 나라에서 이방인 중에서 여호와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되어 이방의 우상을 섬기던 죄악된 입술들이 하나님을 찬양의 입술이 변화될 것입니다.

19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9-20)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벌을 받고 유다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반면 저는 자들과 세상에서 수욕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유다로 모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온 세상 가운데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는 놀라운 구원을 통해 유다 백성의 운명이 반전된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 백성은 더 이상 여호와께 버림받은 과부가 아니라, 여호와와 언약을 새롭게 체결하고, 영광, 명성, 복을 열방에 과시하는 찬란한 왕비가 됩니다(사 62:1-5),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로 인해 세상 가운데 영광, 명성, 복을 과시하는 빛과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간절히 돌아오길 기다리셨습니다. 돌아오기 쉽도록 방법을 준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오는 백성들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기다리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그 날까지 기다리며 준비된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니 낙심하지 말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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