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학개와 스가랴의 시대에 성전 재건되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거룩한 회복을 일으켰습니다. 부흥기가 지나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며 형식적인 신앙생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렇게 영적인 암흑기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말라기의 제목
말라기는 히브리어(Mal'aki)로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여호와의 사자’라는 뜻을 가진 말라기야(Mal'akiyah)의 단축형인 것 같습니다. 이 이름이 구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말라기란 선지자의 이름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명칭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라기의 저자
선지자는 자기의 개인 생애와 봉사의 연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약 선지자들 중에 마지막 인물이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말라기는 포로 생활이 거의 잊혔을 무렵, 성전이 복구되어 예배 의식이 얼마동안 진행되고 있었을 때에 예언하였다는 것을 이 책의 내용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라기의 기록 시기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성전이 재건되고 학사 에스라(주전 458년 귀환)나 총독 느헤미야(주전 445-425년경)의 종교개혁이 취해지던 어간에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라기의 개혁 조치들은 거의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언급된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라기서가 에스라나 느헤미야 시대보다 다소 앞서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주전 460년경), 또 혹자는 느헤미야 시대로 보기도 합니다(주전 435-425년경).
말라기의 특징
말라기는 몇 가지 점에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말라기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과(1:2-5) 종결 부분(4:4)이 언약을 기억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부자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6; 3:17).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2:1-30).따라서 2:2-3에서는 언약을 어긴 징계가 어더한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다른 민족 곧 열방들에 대한 심판의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 말라기는 기록 목적은 이스라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시지 이면에는 열방들에 고나한 심판이 적지않게 내포되어 있기도 합니다(1:5,11,14).
셋째로 예배에 대한 언급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예배의 형식적인 의식보다는 여호와께 대한 순종이 더욱 고귀한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의인의 이름이 적인 기념책(3:16)과 주의 길을 예비할 엘리야(4:5)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信用不良者)’가 됩니다. 본인의 신용도가 나빠집니다. 신용불량자는 다음에 대출하려고 할 때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대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신앙불량자(信仰不良者)’입니다. 보편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환경일 때, 신실하게 하나님을 약속을 믿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 또한 더욱 대단한 믿음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훌륭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한나의 기도를 통해 불임의 고통을 돌아보셨습니다. 기도할 때,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를 돌아보시고 그녀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사무엘이 성장하여 젖을 떼자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신실하게 반응하는 백성들을 통해 진행됩니다.
사무엘을 낳은 한나(19-20)
매우 풍족한 가정 일지라도 자식이 없으면 가정 분위기가 우울합니다. 옛 여인들은 결혼해서 남편과 시가족들에게 잘하면 칭찬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지만 모든 잘해도, 자식을 낳지 못하면 소박을 맞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에 아이의 탄생은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19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19-20)
한나의 가정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암울한 가정이었습니다. 엘가나의 화려한 족보 앞에, 한나는 매우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남편의 사랑과 위로로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는 사람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한나를 보시고 긍휼이 여기셨던 것입니다.
한나의 “나를 생각해 달라”(11)는 기도에 대제사장 엘리를 통해서 응답하셨습니다. 한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생각하신 하나님”께서는 엘리를 통해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대제사장 엘리이지만,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라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라마’는 ‘라마다임소빔’의 줄임말로, 베냐민 땅의 라마(수 18:25)와 구별됩니다. 여호와께서는 한나를 생각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한나는 남편 엘가나와 동침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와 고통을 생각하시고 아들을 해주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사무엘상 1:5-6), 태를 열고 닫는 분은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녀는 천하를 얻을 것처럼 기뻤을 것입니다.
아이를 임신한 한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하나님께 구하여 얻었다.’는 뜻으로 ‘사무엘’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나가 더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며,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펴보면, 우울한 한나의 가정은 당시 암울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으로 불신의 시대에 믿음이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가정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펼쳐갈 창조적인 모판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화려한 인간의 족보로는 그치게 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시간이 여호와께서 시작케 하신 사무엘이라는 새로운 족보로 인해 회복과 기쁨의 시간으로 변한 것입니다.
사무엘을 양육하는 한나(21-23)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아무리 급해보여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때가 차기까지 인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다림은 결코 정체(停滯)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21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21-23)
아이 사무엘이 출생한 후 매년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남편 엘가나과 가족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참석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를 살던 한나도 뜻을 이루고 난 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자신의 뜻대로 행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에게 매년 드리는 제사에 참석지 않기를 요청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서원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겠다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해서 젖을 떼거든 자신이 직접 아이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영원히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한나의 요청에 남편 엘가나는 흔쾌히 격려해줍니다. 그는 한나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서원을 어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이 아직 젖을 떼지 못할 만큼 어린데다가, 사무엘이 자라면 그때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드리려했기 때문입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라는 것은, 사사기의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비슷한 뉘앙스처럼 보입니다. 사사기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지 않고, 세상적인 방식대로 살아가는 불순종의 사람들의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나에게는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올바른 지혜와 영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을 이루시길 원하노라”는 기원으로 말을 맺습니다. 한나의 하나님의 약속인 서원이 하나님께 상달되길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는 간구를 통해서, 영적으로 어두운 사사시대에 숨통이 점점 트이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젖떼기까지 특별한 애정과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젖먹이를 끼우는 풍습은 대략 3년 정도 젖을 먹였습니다. 그 동안 사무엘을 가슴에 앉고 영적인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서원한 것을 항상 준비해 왔습니다. 이것은 아이보다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24-28)
종종 다급할 때, 서원하는 기도를 해서 응답 받습니다. 종종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며 그 약속을 파기(破棄)하는 경우를 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손해가 난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과의 서원은 반드시 지킵니다. 한나의 부부의 경우에도 한마음이 되어 서원을 지키기로 다짐합니다.
24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28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24-28)
사무엘은 젖을 뗄 만큼 성장하였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과 남편에게 약속한 대로 시간이 지난 후에, 약속대로 자신의 서원을 지킵니다. 본문에 행동의 주어가 남편 엘가나도 나타나지 않고 한나로 나타난 것을 볼 때, 주도적이고 독립적으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한나가 주관한 것을 봅니다. 그녀의 남편은 서원을 이행하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모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한나는 아주 신실하게 사무엘을 위한 서원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들을 준비합니다. 율법의 규정대로 신실하게 드립니다(민수기 15:8-10). 하나님께 드릴 예물로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24) 등을 준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원을 갚기 위한 화목제물을 드릴 때는, 화목제물에는 소나 양으로 암수 상관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수소를 드린 것은 가장 비싸고 예물로 대제사장이나 백성 전체의 죄를 위한 속죄를 드릴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곡식가루나 전병들도 함께 드리기 때문에 밀가루를 준비하였고, 포도주는 제물 위에 뿌리는 전제를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잠시 한나의 제물을 살펴보면, 이렇게 많은 제물은 하나님께 매우 정성껏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이 미약한 여인에게 서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의 표현하는 것입니다.
더욱 사무엘에 대해 “아이가 어리다”라는 표현으로 아주 어린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표현은 한나가 얼마나 큰 헌신을 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네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무엘이 엄마와 떨어지기에는 힘들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전에 영원히 바치기 위해서 데리고 간 것입니다
한나는 먼저 하나님께 수소를 잡아 서원제를 드리고, 망설이지 않고 어린 사무엘을 대제사장 엘리에게 갑니다. 이전에 자신이 성전 곁에서 기도하던 여인임을 상기시키고, 데리고 온 아이가 그때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은 아이임을 밝힙니다. 서원대로 아이를 여호와께 그것도 평생 드려 여호와를 섬기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아들을 주셨으니, 자신 또한 약속대로 사무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 드려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후 어린 사무엘은 엄마 한나와 떨어져 집이 아닌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며 자라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떠나보내고 겪게 될 모든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기로 하고, 자신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신실함을 보인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은 한 가정의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대로 이뤼 가실 미래를 위해 쓰임 받을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서원하는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젖을 뗀 아이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그대로 돌려 드린 것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바치라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드리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22장).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했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한나에게서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을 열기 시작합니다.
암담한 시대에 이스라엘에 영적인 위대한 지도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나와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서 신실한 싹이 출생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의 나머지 생애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두운 이스라엘을 깨우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중에 서원한 후에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배은망덕하게 서원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하나님과의 서원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모의 신앙을 보고 배우고 자란 것입니다. 그 결과 자녀들 또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 됩니다. 자녀들이 사무엘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바다 모래밭에서 조개가 숨을 쉬거나 먹이를 먹으면서 모래가 따라 들어갑니다. 조개 안으로 모래는 껍질 속에서 부드러운 조갯살에 상처를 냅니다. 조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액을 분비해 내고 이것이 굳어져서 알맹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알맹이를 ‘진주’라고 부릅니다. 고귀한 진주는 조개의 아픔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조개들 중에 분비액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조개는 썩어 죽어버리고 맙니다. 위대한 인물 중에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고통 가운데 두시는 것은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내기 위한 계획이십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진주와 같은 믿음을 만들어 내길 바랍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입니다. 이 시대를 설명한 말씀은, 사사기 마지막에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고 소개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섬지기 않고 자신의 생각이 옳은 데로 행하던 혼란의 사사시대가 마무리할 무렵 사무엘은 선지자로 활동합니다. 사무엘상의 범위는 사무엘부터 다윗의 왕국이 왕성할 때까지 기록합니다.
한나에 대한 소개(1-2)
시대적인 흑암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두운 사사시대 430년을 마감하고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큰 인물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어두운 사사시대를 마감할 새로운 인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1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1-2)
먼저 사무엘서의 시대적 배경은 삼손 이후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두운 사사시대였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선출되기 전, 사사들이 통치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사시대를 기반으로 사무엘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1) 엘가나의 가문(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무엘서는 먼저 ‘엘가나’라는 한 가정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그는 라마다임소빔Ramathaim에 살고 있는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불리는데, 그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마다임소빔은 후에 사무엘이 활동하는 근거지로 벧엘에서 북서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장소입니다.
여기서 엘가나를 에브라임 사람으로 소개함으로 아들 사무엘도 에브라임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역대기 6:34- 38를 참고 해보면, 사무엘의 족보를 볼 수 있는데, 제사장 지파인 레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을 4대까지 거론할 만큼 뼈대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사무엘이 에브라임 출신이지만, 나실인으로서 성막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레위 지파로 입적되었다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보수적으로 설명하는 경우에는 엘가나를 에브라임 지방에 살고 있던 레위지파 한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2) 엘가나의 두 아내(2)
레위 사람인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가정은 대체로 일부일처제를 따르고 있었지만,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첫째 아내가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경우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됩니다.
그의 아내 이름은 첫째 아내는 ‘한나’이고 둘째는 ‘브닌나’였습니다. 따라서 엘가나는 첫째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후손을 얻을 목적에서 브닌나를 둘째 아내로 맞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지만, 첫째 아내 한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나와 브닌나의 이름이 교차 대구를 이루며 한나의 불임이 더욱 강조됩니다. 한나의 불임 문제가 한낱 자신으로 인해 생긴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며, 한나가 사회적 가정적 지위를 인정받기 매우 힘들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한나의 불임이 개인의 일처럼 보이지만, 크게 보면 당시 사사시대를 불임의 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사시대의 영적 혼돈과 무질서를 극적으로 들어낸 것은 엘가나 가정의 모습입니다. 엘가나의 가정에 불임, 불화 그리고 무기력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이스라엘의 탄식이며 역경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갈등(3-8)
내부에서 자란 고통은 담쟁이처럼 서서히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은, 구부러진 나무가 자신의 그림자가 구부러진 것을 슬퍼하지 않고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 고통을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3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4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3-8)
사무엘서를 기록한 저자는 한나의 불임 원인으로 하나님을 지목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 집안의 죄에 관한 결과라는 인상은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서에서는 불임한 이스라엘의 한 여인인 한나를 통해 어두운 이스라엘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1) 엘가나 가족의 제사(3-5)
엘가나는 당시 사사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지만, 그는 해마다 온 가족들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3).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가 여기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 자주 나타나는데, 큰 군대를 가지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나타냅니다. 엘가나의 가족은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할당된 성읍이며 벧엘과 세겜의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대략 30km거리에 있습니다(수 16:6; 삿 21:19).
반대로 영적인 부분에는 성전에서 일하는 대제사장은 엘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3). 이 두 제사장들의 소개는 실로 성소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곧 태어날 사무엘이 아 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될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엘가나의 가문에 첫째 아내 한나를 통해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은 미래가 없고, 가정적으로는 가문에 위기를 가져온 것입니다. 한나는 항상 괴로움 속에 살았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이 자신에게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더욱 남편 엘가나는 다른 아내 브닌나를 얻어 자식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모든 음식을 전폐할 정도로 슬픔이 켰습니다. 어떤 것도 이 슬픔을 위로해 주지 못했습니다.
(2) 브닌나의 질투(6-7)
평상시에는 둘째 아내인 브닌나와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년 실로에 있는 성소로 제사를 지내려 올라갈 때 함께 가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갈등 원인은 4-6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해마다 실로에 있는 성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릴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불화는 매년 제사하려고 갈 때마다, 더 폭발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사를 드리는 제물의 양 때문이었습니다. 엘가나는 매년 자식이 있는 브닌나에게는 그녀와 자녀들의 몫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지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브닌나만큼 제물을 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항상 브닌나는 이것을 빌미로 한나를 조롱하여 격분시켰던 것입니다(7).
이곳에서 ‘격분’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원래 ‘천둥’이라는 뜻입니다. 브닌나가 얼마나 심하게 조롱하였던지, 한나가 천둥 같은 화를 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매년 제사를 드리려 갈 때마다 일어나는 연례행사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한나가 이렇게 부닌나에게 수모를 당하는 이유를 반복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5,6)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태를 여닫으신 분은 여호와이심으로 이 문제의 원인도 여호와이시고, 해결하실 뿐도 오직 여호와 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즉 한나의 불임은 한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불임이라는 이유로 한나를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3) 남편의 위로(8)
제사를 드리려 갈 때마다, 부닌나에게 고통을 당한 한나는 식음을 전폐하였고,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습니다. 더욱 위로를 해주었지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한나를 사랑한 엘가나의 사랑은 매우 지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나가 괴로운 것은 자식을 둔 둘째 아내 브닌나가 계속적으로 충동질이었습니다. 실로에 올라갈 때마다 항상 브닌나는 한나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한나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조롱했던지 한나가 마치 천둥 치듯이 매우 격분했던 것입니다.
엘가나가 “어찌하여”라고 말한 것은(7), 그가 이유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충분한 공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극히 사랑해주는 남편이라도 한나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엘리나의 개인적인 가정의 암담한 현실은, 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암담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만한 하나님의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못된 자들뿐이었습니다. 어두운 이스라엘 상황을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불임인 한 여인 한나를 통해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한나(9-18)
‘키에르 케고르’는 기도에 대해 “하나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응답해 주시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과정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기도란 단조롭고 무의미한 사람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지만, 괴로움을 경험한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숭고한 언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시신을 생명의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9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10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17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9-18)
괴로움을 당하던 한나는 오직 남편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이제 환경에게 매달리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방법밖에 없음을 알고 기도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도움이나 방법이 없어질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1) 한나의 서원 기도(9-11)
매년 이렇게 남편의 위로를 받던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9).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태를 여닫는 권능하신 여호와 한 분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안 되는 문제는 아무리 속을 끓여도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성막으로 갔습니다. 기도하려 간 시간에 마침 그곳에는 대제사장 엘리가 성전 문설주 곁에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결심하고 앞에 섰지만, 여전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10).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통곡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서원에 대한 부분으로 한나는 먼저 하나님께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한나는 서원에 대한 부분으로 한나는 먼저 하나님께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그녀는 “고통을 돌아보시고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셨다면”(11)이라고 삼중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만 온전히 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에 자기 조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서 돌아보신 후, 출애굽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간구합니다. 고통으로부터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은 문제해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 기도로 나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고통의 때가 기도의 때인 줄 알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억하시고 아들을 주신다면, 아들을 성별하여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11).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고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일꾼인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나실인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 1-21절에 나옵니다. 일정 기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를 서원하면 그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부정한 것을 특히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당대에 유명했던 삼손처럼 아들을 주신다면 평생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셨지만, 사무엘은 자발적인 서원으로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바쳐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 살게 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서원을 보면 한나가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하나님께 바칠지언정 정말로 간절하게 자신의 속으로 아기를 낳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나가 아이에 대한 간구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갈망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바칠지언정 정말 간절하게 자신의 속으로 아기를 낳고 싶었던 것입니다.
(2) 엘리와의 대화(12-16)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자기의 속으로 하나님께만 간절히 털어놓았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나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성전 문 앞에 앉았던 대제사장 엘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의 눈에는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이 술 취하여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13). 대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중얼거리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술 취한 것으로 보았던 것은 나이 들어 시력이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의 영적인 상태는 사사시대의 암흑기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들어냅니다. 그의 영적으로 어두운 모습은 뒤에서 여러번 관찰됩니다. 그는 한나에게 묻지도 않은 채 성급하게 판단하고 한나에게 술을 끊으라고 질책하였습니다(14).
한나는 이러한 엘리의 책망을 듣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자신은 마음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현재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모두 쏟아놓던 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합니다(15). 사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사람은 이성을 잃고 부르짖거나 소리치거나 아니면 중얼거릴 수 있습니다.
(3) 엘리의 축복(17-18)
한나의 말을 듣고서야, 엘리는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라는 축복합니다. 복을 빌어주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시길 기원합니다. 영적으로 우둔한 엘리 제사장이었지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기적을 체험합니다.
한나는 엘리에게 은혜를 간구합니다. 엘리의 기원이 이루어지길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8)고 고백합니다. 엘리의 말대로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돌아가서 먹고 다시는 이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부분은 최선을 다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넘겨드린 것입니다.
한나는 오랜 불임과 브닌나의 멸시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을 영적 절벽으로 몰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솔직한 자기감정을 하나님께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지만,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녀는 자신이 할 부분까지 최선을 다 하였고, 이제 아이가 생기는 여부는 하나님 손에 넘겨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괴로움을 쏟아내고 원통한 마음을 아뢸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나는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를 막으신 분이 생명을 주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한 한나는, 그 해결 방법은 역시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한나처럼 기도합시다.
열왕기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고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범죄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남유다와 여로보암이 세운 북이스라엘로 나뉘게 됩니다. 이후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이 교차적으로 기록되며 열왕기상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열왕기하는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유다의 멸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마치고 있습니다.
1. 명칭
‘열왕기하’는 원래 히브리 원전에서는 열왕기상과 분리되지 않은 한 권의 책입니다. 열왕기하의 명명 과정에 대해서는 열왕기상의 서론에서 언급하였습니다.
2. 저자와 기록 연대
⑴ 기록 연대
현재 열왕기는 포로기 중간쯤인 주전 561년 이전으로 사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본서에는 주전 538년 이후의 사실들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주전 538년은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바벨론으로부터 1차 귀환했던 해입니다. 본서의 저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전 561년 여호야긴 왕의 석방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본 서의 저작 연대는 열왕기상과 함께 주전 537-561년 사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⑵ 기록 저자
저자는 다양한 옛 전거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열왕기는 분명 바벨론 포로 기간의 자유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자료에 근거한 역사서입니다.
저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의 범위와 여호야긴 왕의 운명에 대한 관심으로 볼 때 저자는 아마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포로로 끌려간 고위직의 귀족들이나 서기관으로 추측됩니다.
열왕기 사관은 신명기의 가르침에 뿌리는 두고 있어 언약에 대한 충성, 율법의 준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징벌과 땅에서 쫓겨남 등 신명기적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배경
열왕기 상·하서는 원래 히브리 원전에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기록 내용의 관련 연대나 범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열왕기상과 동일한 집필 동기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주변 강대국들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고대 최강국이었던 이집트가 쇠퇴하면서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렇다 할 강대국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730년경 앗수르가 갑자기 강성해지기 시작해 주전 722년에 사르곤 왕이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앗수르의 남쪽에 바벨론의 세력이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느부갓네살 왕 때에 이르러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와 앗수르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곧이어 팔레스틴을 침공했고, 예루살렘을 세 번씩이나 공격하여 마침내 주전 586년 남유다를 정복하였습니다.
4. 내용
전반부는 남북 왕국이 서로 공존하다가 북왕국이 먼저 앗시리아에게 주전 722년에 함락됨으로써 분열 왕국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즉 주전 840-722년 사이의 남북 왕국 각각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다룹니다.
왕을 중심으로 하자면 북왕국은 제8대 왕 아하시야로부터 마지막 제19대 왕 호세아까지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는 제5대 요람 왕 때부터 제12대 아하스 왕 때까지의 역사입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계속 오래 참으시며 사랑의 보호와 심판의 경고를 주심으로 백성들이 돌아올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남북 왕국이 공히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남왕국 유다에 대해서는 더 기회를 주셨고, 또한 징계도 약하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윗 왕가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 옛날 다윗에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다윗 왕가의 왕권을 연결시켜 주심으로 결국 다윗 왕가를 영원한 왕가로 삼아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후반부는 일단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하나님이 심판으로 함락된 이후에, 그래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각됩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유다 왕국은 잔존하였지만, 그들도 역시 타락하여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즉 주전722-586년까지의 136년간의 역사를 이룹니다. 왕을 중심으로 아야기하자면 제12대 아스하에서 제20대 히스기야 시대까지의 역사입니다.
본 서의 특이한 점은 이러한 인간의 타락을 통렬하고도 여실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유다 왕국의 멸망이라는 결정적 심판을 가하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멸절시키지 않고 선민의 역사를 계속시키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는 주전 970-840년경까지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대에서 분열 왕국 초기의 역사를 다룬 상권에 이어 주전 840-586년까지 남북왕국 후기 역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 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까지의 남북 완조의 역사를 다루는 전반부 1-17장과 그 이후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까지도 바벨론 왕에 멸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후반부 18-25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본 서는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이르는 대부분의 주요 선지서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고 있음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5. 구속자적 의미
다윗 왕조 사람들도 북왕조 사람들처럼 타락했고 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즉 예수그리스도에까지 이어질 다윗 언약과 그를 통한 구속사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엘리사 등의 선지자들과 타락한 선민 국가의 종교를 개혁하며, 또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히스기야나 요시아 같은 선한 왕들은 택한 성도에게 선지자요, 왕으로서의 사역을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해 줍니다.
6. 내용 분해
Ⅰ. 남북 분열 왕국 공존 시대(1-17장)
1. 아하시야의 북이스라엘 통치(왕상22:51-왕하1:18)
2. 여호람의 북이스라엘 통치(왕하2:1-8:15)
3. 요람과 아하시야의 남유다 통치(왕하8:16-9:29)
4. 예후의 북이스라엘 통치(왕하9:30-10:36)
5. 아달랴와 요아스의 남유다 통치(왕하11:1-12:21)
6.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의 북이스라엘 통치(왕하13:1-25)
7. 아마샤의 남유다 통치부터 북이스라엘의 멸망 까지(왕하14:1-17:41)
Ⅱ. 남왕국 유다의 잔존 시대(18-25장)
1. 히스기야의 남유다 통치(왕하18:1-20:21)
2. 므낫세, 아몬, 요시아의 통치(왕하21:1-23:30)
3. 여호아하스의 유다 통치와 애굽의 포로됨(왕하23:31-34)
4. 여호야김의 유다 통치와 바벨론 제1차 포수(왕하23:35-24:7)
5. 여호야긴의 유다 통치와 바벨론 제2차 포수(왕하24:8-16)
6. 시드기야의 유다 통치와 바벨론 제3차 포수 및 남유다 멸망(왕하24:17-25:21)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두움은 더 깊습니다. 앞이 안 보이던 주변이 닭소리에 놀라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닭소리에 여명이 밝아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합니다. 역사 속에서도 통치자의 폭력이나 억압으로 국민들이 시름이 깊어집니다. 국민들은 한숨을 지으며 매우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민주화는 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심한 고난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지 400년이 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한 내용입니다. 새로운 일을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두움이 점점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무슨 뜻이 숨기어져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번성의 축복(1-7)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더 나가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은 풍성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고통과 좌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1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1-7)
출애굽기는 야곱이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떻게 애굽으로 이르게 되었는지, 창세기 후반부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근을 피하여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간 식량 피난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곱을 통해 애굽 땅에 들어갈 때는 70명이었습니다. 아들 요셉의 도움으로 애굽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입성한 후 고센 지역에 자리 잡고 목축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난지에서 그의 후손을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강하여’, ‘가득하게’ 되었다고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이 성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세기 12:2)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26장 4절에서도 28장 14절에서 계속되어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창은 애굽 생활을 통해서 그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7). 이스라엘 백성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시대를 넘어서도 반드시 성취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은 400년 만에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번성케 해주신 놀라우신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번성케 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을 세워주시고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처음 믿을 때 당신도 축복의 약속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역사 속에 이스라엘(8)
새로운 일은 이루어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하시기 위해 새로운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일입니까?
8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8)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번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옮기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이란 기간 동안 살았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후손들은 자신들이 애굽에게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비해서는 고센 땅이 풍요롭고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센 땅이 약속의 땅이 축복의 땅같이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 굳이 옮길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계속 살려고 합니다.
떠나야할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왔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 새로운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준비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을 부흥케 한 지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 때문에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요셉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애굽에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일인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삶 속에 뜻하지 않는 일들을 만납니다. 왜 이러한 일들을 만나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깨달아야할 것은,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색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학대(9-14)
이 세상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며 서로 더 강자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때로는 위협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 내용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9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9-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자리 잡게 됩니다. 점점 하나님의 축복으로 애굽인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이제는 애굽 사람들에게는 자신보다 강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협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새로운 바로 왕에게 두려웠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그에게 넣어 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흥하고 성장하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0년 동안 축복하셨습니다. 그럼에도 400년 되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핍박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사단은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하려고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들어오게 했던 요셉은 애굽을 번성케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 선대하고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 등극하였습니다. 새로운 왕은 먼저 정치적인 적들을 숙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정적들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부터 보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많아서 대적하게 되면 자신들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다른 민족들이 침공해 올 때, 그들과 손을 잡으면 자신들은 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세워진 바로 왕은 자신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게 된 고난과 학대는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과 핍박을 허락하실 때,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400년 만에 애굽 땅에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핍박과 방해가 심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강한 능력으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서 큰 위기를 겪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더욱 번성해 나갔습니다. 강한 시련이 있을 수 잇을 때, 강할수록 생명력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승리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 활동할 때 악도 또한 활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흥왕해지자 바로왕도 더욱 악하게 강해져만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어두움도 번성해져서 더불어 다가옵니다.
이러한 때에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덧입을 때, 어떤 고난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 이 세상에 만족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께 축복을 주시면 믿음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대로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기 시작하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가 가장 조심해야할 시기입니다. 그런 후로는 ‘이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생활로 들어 가버린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너 정신 못 사렸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 과거에 나와 무슨 약속을 했느냐?’고 하시면서 그 축복의 약속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핍박이 있고, 자신의 자녀들이 죽는 상황이 이르게 되니깐,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400년이 아니라 4000년이 지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을 나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너무 안락하면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고 찬양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들은 어떤 환경이든지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손해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길 바랍니다. 이것이 축복의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전하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변함없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교훈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강령한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속에 있거든 그 약속대로 밀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 바다에는 배가 다니는 ‘해로’, 그리고 육지에는 ‘고속도로’, ‘차량전용도로’, ‘국도’ 그리고 ‘지방도로’ 등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이 놓여진 형세에 따라서 ‘고빗길’과 ‘평탄한 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처럼 이름을 붙여지게 됩니다. 이와 달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선한 길’과 ‘악한 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등으로 길의 형색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믿음의 길’과 ‘불신의 길’ 그리고 ‘배교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합이 아람과 전쟁할 때 함께 참여한 여호사밧은 아람 정예군과 맞닥뜨렸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합은 누군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 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계속 보내 심판을 경고하셨지만, 여호와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아사 왕과 그의 아들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기는 왕으로 소개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41-50)
단순하게 생각하면 믿음 생활이 자신만의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단순하게 믿음의 모습이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선배들의 신앙적인 열정과 헌신 그리고 목표를 바라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존 세대들의 신앙 태도가 매우 무겁습니다.
41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43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4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45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6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7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41-50)
본문에서는 유다 왕 중의 한사람이었던 아사 왕의 아들인 여호사밧의 통치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1) 등극(41-42)
여호사밧은 앞에서 기술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전사한 아람과의 전쟁에 잠시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 왕과 함께 여호와 앞에 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아합 왕 제 4년(B.C 872)에 등극하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등극한 나이는 35세이고, 25년 동안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아들의 이름을 ‘여호람’, 그 의미는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아마도 여호사밧이 스스로 여호와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여호와를 높게 받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서 그 아들에게 이 여호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동시대를 살았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가지 살았습니다. 여호사밧은 기원전 872년부터 869년까지 3년 동안 그의 부친 아사 왕의 섭정 하에 있었고, 기원전 853년부터 848년까지 5년 동안 그의 아들 여호람과 함께 통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아사 왕은 그가 늙어서 발에 병이 생겨 통치가 어려워지자 함께 통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33년 정도 됩니다. 여호사밧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었습니다.
(2) 여호사밧 왕에 대한 평가(43-44)
여호사밧은 아사 왕과 함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가 단호하게 우상숭배를 배격한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아사는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고 태후가 만든 아세라 우상도 파괴하였으며, 태후까지도 폐위시켰습니다. 하지만 아사도 산당을 없애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열왕기 기자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열왕기상 15:14)고 평가합니다.
여호사밧은 올바르게 행동하였지만 산당 제의는 그대로 허용하였습니다. 아사의 경우는 다른 것은 다 완전한데 산당이 유일한 결함이었다면, 여호사밧은 일반적으로 올바르게 행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을 아사 때보다 문제를 삼습니다.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 산당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아니라 이방신을 위한 제단이며, 산당을 중심으로 바알이나 각종 우상들을 섬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록 아사는 산당을 남겼지만, 자신을 왕으로 세운 태후를 폐하면서까지 강력한 종교개혁을 시행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십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단행된 유다를 물려받은 여호사밧이 아버지의 개혁을 발판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 산당까지 없애 종교개혁을 완성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저자는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것 역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 것은 좋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들인 아합과 아하시야와 정략결혼을 통해 결혼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결혼시켰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아합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을 도운 행동에 대해 역대하에서는 선지자 예후는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19:2)라고 비난합니다. 이후에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 다윗 자손을 모두 멸절시키고, 스스로 여왕이 되어, 6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며 바알 신앙을 퍼뜨렸습니다. 악한 아합 가문의 영향력이 유다 가문까지 위태롭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통해 볼 때 결혼동맹으로 얻은 평화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어렸습니다.
(3) 여호사밧의 업적(45-49)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죽음 공식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45절과 50절에서는 전향적인 죽음 공식에 해당하는 구문입니다. 여호사밧에 대한 왕의 업적이 다른 왕들보다 길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45절에서 언급된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은 그가 싸움을 잘하는 힘 있는 장수였다는 것과 전쟁을 했다는 것인데, 열왕기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역대하 20장에 따르면, 여호사밧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크게 승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상에서는 이 부분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46절에서 그는 아버지 아사 시대에 남은 이방 신전의 남창 제도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일하던 남창들을 모두 근절시키고 있습니다.
에돔에 왕이 없고 총독이 왕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에돔을 유다에 부속시켜서 유다에서 총독을 보내어 다스렸다는 의미로 유다의 국력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유다를 강성하게 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호사밧은 다시스에서 선박을 제조하여 무역업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던 일이며, 솔로몬은 무역선으로 많은 금은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박의 경우에는 이런 시도가 에시온게벨에서 배가 파선되어 실패합니다. 그러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자신과 합작으로 다시 배를 만들어 무역업을 하자는 제안한 히람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같이 무역을 하여 금전적 이익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열왕기에는 거절한 이유가 언급되지 않는데, 여호사밧과 아하시야는 결혼으로 동맹을 맺은 상태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나눌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이 사건에 대해 여호와께서 여호사밧이 악한 왕 아하시야와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20:35-37).
역대기는 오므리 왕종조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교류하는 것까지 문제 삼지는 않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를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4) 죽음 공식(50)
여호사밧에 대한 죽음은 전형적인 죽음 공식의 장례 부분입니다. 그가 죽어서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하고 유지한 인물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북이스라엘과 달리 유다는 두 세대 동안 평화의 시대를 느렸습니다.
그가 남 유다의 왕위에 오른 것은 아합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한마디로'여호와보시기에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통치는 그의 부친 아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사의 종교 개혁 정책을 기억합니다(15:9). 그는 그 땅에서 남색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쫓고 우상들을 몰아내는 일을 하였었습니다. 여호사밧 역시 아버지의 그 같은 정책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다 내어쫓지 못한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였습니다(46절). 그러나 그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산당을 폐하지 아니하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여러 산당에서 분향하게 함으로써 불완전한 종교 개혁을 하였습니다.
한편, 우리가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그는 아버지 아사와는 달리 북 이스라엘과 평화하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부친 아사와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평생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15:16). 그때 유다는 아람과 손을 잡고 북 이스라엘을 견제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정책을 바꾸어 북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아람을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47절에서 언급하는 에돔에 왕이 없었고 섭정왕이 있었다는 말은, 그 나라가 남 유다의 속국이었으며 그곳을 다스리는 왕의 임명을 유다가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야곱과 에서에 관한 예언(창 25:23)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의 또 다른 정책은 배로 무역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상선들을 건조하고 그것들을 오빌로 보내어 황금과 교환하여 오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시스의 선척은 장기간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큰 배를 의미합니다. 이런 큰 배들이 지중해의 한쪽 끝인 이스라엘 지역에서 지중해의 다른 쪽 끝인 스페인의 다시스까지 운행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큰 상선들을 다시스의 선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정책은 솔찍이 솔로몬이 실행했던 계획이었습니다(9:26) 이러한 정책은 여호사밧이 나라의 부를 극대화하려는 경제 정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에시온게벨에서 그 배가 파선됨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역대하 20장 35절 이하는 이 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여호사밧이 아합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아하시야와 연합 정책을 취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통치(51-53)
믿음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실익도 계산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상태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다시 따라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51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51-53)
본 성경에는 열왕기가 두 권으로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헬라어 번역서인 70인역에서는 두 권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마지막 부분에 소개되는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는 열왕기하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열왕기상에서는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가 나오고, 열왕기하에서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언급됩니다.
(1) 등극의 공식(51)
남 유다 왕인 여호사밧이 유다를 지혜롭게 통치하던 17년, 북 이스라엘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이 참여했던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합이 죽은 후 바로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병들어 일찍 죽습니다. 아합의 아들이 왕좌에 등극한 것은, 아하시야의 자신의 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부친 아합이, 잠시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겸비한 자세를 취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2) 아하시야의 업적(52-53)
아하시야는 미가야의 진실한 예언을 따라 그 부친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 길을 아버지의 길과 어머니의 길이며, 또한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어머니 이세벨의 길을 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아하시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의 중심 종교로 바알 숭배를 하고 예배하였습니다. 그이 아버지가 했던 온갖 못된 행동을 그도 따라했다고 합니다.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파멸을 맞이하였던 것처럼, 그 역시 그 길을 걸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시키며 파멸을 재촉하였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길을 따라가며 여호와의 축복을 받은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열왕기상을 통해서 서로 다른 두 왕국을 통해서 전혀 다른 두 행보를 지켜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남북 시대의 역사는 두 길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 길은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 ‘신앙의 길’과 ‘불신앙의 길’에 대한 것입니다. 그 끝에서 번영과 쇠퇴의 결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도 여전히 두 길이 있습니다. 당신의 선택과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차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출력을 내는 엔진의 성능보다 멈추어야할 때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의 제동력입니다. 차량이 멈춰서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사고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도 멈추어야할 때 멈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멈출 때를 놓친 채 내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멈추어야할 때 스스로 멈추지 못하면 타인에 의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멈추어야할 때, 멈추지 못한 것들은 대부분 죄들입니다. 악이 죽음으로만 멈추게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인생이 아니라 노을의 속도로 아름답게 드리운 저녁노을과 같기를 바랍니다.
아합에게 불려온 마가야는 그에게 전쟁에 올라가면 여호와께서 죽이기 위한 거짓 예언이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선지자는 미가야의 예언을 거짓이라고 하면서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그를 옥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떡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아합은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올라갑니다. 이제 누가 참 선지자인지가 밝혀질 것입니다.
변장하고 전쟁에 올라간 아합(29-30)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과장하기 위해 거짓의 가면을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추려고 쓴 가면이 있다면 그 가면을 벗어버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29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30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29-30)
북이스라엘 아합은 전쟁에 올라가면 죽을 것이라는 미가야의 선탁을 무시하고 남유다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갑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까지 합리화 하는 아합은 참 예언자인 미가야에게는 귀를 닫고, 충동의 소리인 시드기야에게는 귀를 열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스르엘에서 동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요단 동편에 있습니다. 이곳은 왕의 대로와 주요 대간선이 만나는 곳에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0장 34절에서 아람왕은 이스라엘에게서 취한 성읍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이곳은 아직 돌려주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합은 앗수르가 힘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서 아람과 전쟁하여 이곳을 되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합은 전쟁 전에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사밧에게 자신은 변장하고 갈 것이니,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으라고 합니다. 아합이 변장을 하려는 이유는 미가야의 신탁을 무시하고 전쟁터에 올라왔지만, 마음 한편에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신 여호사맛에게 왕복을 그대로 입으라고 명령한 것은 여호사밧이 자기 대신 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아합은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 두려움이 자신이 추구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한 모습입니다. 아합처럼 신앙의 가면을 쓰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사는 종교인은 아닙니까? 혹시 자신에게 아합의 가면처럼 여전히 포장되어 있다면 이제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길 바랍니다.
아합만 잡으라고 명령한 아람 왕(31-33)
다
31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33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31-33)
모든 계획이 아합 왕이 정한 꾀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져 간 것처럼 보여 집니다. 이 장면은 아람 군대의 상황으로 아람 왕은 그의 병거 지휘관들 32명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병거 지휘관들은 아람 군대의 주요 지휘관들로 아람 왕은 그들에게 작은 자나 큰 자와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고 지시합니다.
아람 왕은 전쟁에서 지휘관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병사들이나 지휘관들 몇 명을 죽이고 잡는 것보다는 왕을 잡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특히 왕이 이끄는 전투에서는 왕이 죽으면, 부대는 그대로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람 왕의 명령은 미가야가 아합에게 했던 예언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을 통해 아합을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전 명령에 지휘관들이 왕복을 입고 있는 여호사밧을 보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확신하고 그에게로 돌아서서 싸우려고 달려왔습니다. 여호사밧은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고 번역한 동사는 일반적으로 위험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몰라지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잘 섬겼고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이 큰소리로 부르짖을 때, 병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쫓고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아닌 것을 확인한 후 추격을 멈추고 돌아섭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역대하 18장 31절에서는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라고 말하면서, 여호와의 도움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연한 화살에 맞아 죽은 아합(34-36)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은 계산하지 않는 우연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환경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34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6해가 질 녁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34-36)
아합의 잔꾀처럼 이루어져 간 것 같았지만, 돌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반면에, 아합은 우연히 어떤 사람이 아합을 맞힐 의도 없이 쏜 화살에 맞습니다. 그것도 가슴 갑옷 솔기 사이에 맞았습니다. 아람 왕의 칼을 위장한 가면으로 피한 아합은 무명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고 맙니다. 무심히 당기고 쏜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중에도 가슴막이의 아주 조금 여백이 있는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화자는 ‘의도하지 않게’, ‘갑옷 솔기 사이에 맞는다’라는 표현하는데, 이것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아합이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화살을 맞았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가리킵니다.
아합 왕은 적장의 시선은 피했지만 심파나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갑옷도, 현장에 처세술도 하나님의 시선을 막지 못합니다.
미가야를 통해 들은 여호와의 신탁을 피하려고 왕복을 입지 않았고, 대신 유다 왕을 미끼로 세웠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까지 꼼꼼하게 입었지만, 여호와께서 날릴 화살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이 왕이고 갖은 책략을 갖고 있어도, 세상의 왕이신 여호와의 눈은 피할 수 없었고, 여호와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여호와의 손과 눈을 피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아합의 최후를 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앞에서 미가야가 예언한 내용이 성취된 것입니다(열왕기상 22:17). 화살을 맞은 아합은 병거를 모는 자에게 자신이 화살을 맞았으니 빨리 전쟁터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치료를 받기 위해 급히 전장을 벗어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합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져 그의 병거는 아람 군대 앞에서 마저 오도 가도 못하다가, 저녁 무렵에 결국 아합은 병거 바닥에 많은 피를 흘리고 죽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무참히 패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합의 마지막 모습은 참혹합니다. 죽음을 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우 고통스럽게 하루 종일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아합 왕이 죽고 저녁 무렵이 되자 각자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울려 펴졌습니다. 아합의 죽음이 확인된 후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입니다. 결국 아합은 미가야가 예언한 것처럼 전쟁터에서 죽었고, 미가야가 참 선지자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오늘날 광야를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면을 쓰고 진리를 왜곡하는 삶을 살면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만의 성을 쌓는 일에 몰두하며 계속 진격하고 있습니다. 누가 과연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진격하는 사람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처럼 시퍼런 칼끝이 심장에 파고 들어와야만 욕망의 경주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전에 하나님의 진검의 말씀 앞에 나가야 합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 앞에 내보여야 합니다.
죽음의 공식(37-40)
하나님 없이 죄와 함께 쌓여 가는 재물과 지위와 명성은 다 헛될 뿐입니다. 삶을 통해 순종한 말씀의 흔적들이 인생의 요약이 되게 해야 합니다. 아합의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37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38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39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0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37-40)
전쟁터에서 죽은 아합의 시체를 그의 부하들이 사마리아까지 메고 와서 사마리아에 안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봇 사건으로 인해 아합의 가문에 심판을 내리셨을 때, 아합이 회개하여 아합 때에 내리시기로 한 징벌을 미뤄주셨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사마리아에 안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 아합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순전한 사람 라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그를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개들이 라봇의 핥은 못에서 아합의 시체의 피도 핥을 것이라고 예언이 있었습니다. 다만 열왕기상 21장 19절에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곳에서 네 피를 핥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내린 심판을 이제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에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에 의해 나봇이 죽은 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아합을 통해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결론을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38)고 맺습니다.
아합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그가 건축한 상아궁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상아로 만든 가구 장식과 널판을 벽에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상아는 주로 아람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아합이 사마리아에 상아로 만든 호화로운 궁전을 만들었다는 것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백향목 궁을 만든 것과 비교됩니다. 이것은 아합이 다스렸던 왕국이 매우 부유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의 백향목 궁을 만드는 것도 솔로몬이 매우 큰 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합은 바알 숭배를 수단으로 부와 영화를 얻었고, 그 결과물이 호화로운 상아 궁입니다. 아마도 아합의 가장 큰 업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과는 다르게 그의 상아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한마디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아합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합의 긴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이 시돈 사람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여호와 신앙을 없애고 바알 숭배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신앙을 없애려는 시도에 대해 여호와께서는 엘리야를 비롯한 여러 선자지들을 보내시고 큰 권능을 보여주시며,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 돌아올 기회를 여러 번 주셨지만, 결국 아합은 이런 기회를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장 악하다고 평가 받던 시대에 가장 강한 선지자와 많은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표현입니다.
진실 대신 믿고자 했던 거짓은 아합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역시 거짓으로 위장한 차림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가리고 위장해도 하나님의 화살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아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 발을 멈추어 세우는 것이 말씀이어야지, 치명상을 입히는 화살이 되어선 안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고 따르려 하지만,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꼭 들어야할 말씀을 듣고 따릅니다.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의 바른 말은 때로는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핵심이 있는 말씀을 통해 바르고 굳건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움 받기 좋은 말을 따를 것인가 라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 편에 서려면 비진리가 주는 위협을 감수해야 합니다. 진실만이 거짓을 향해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논란의 중심에 진실이 있어도, 결국 판결의 중심에 진실이 설 것입니다. 진실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더 진실을 찾고 진실한 척하는 세상에서 끝까지 진실을 위해 살아가길 바랍니다.
마가야는 전쟁의 패배와 아합의 죽음에 대해 예언합니다. 이것을 자신이 보고 들은 천상회의 환상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제시합니다. 아합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게 합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빠져 죽게 될 것을 선고합니다. 그 결과 옥에 갇히지만, 거침없이 예언의 정당성을 말합니다.
아합 앞에서 예언하는 마가야(15-18)
종종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자신의 욕망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듣고 싶은 말만 가려듣는 사람에게 큰 재앙은 더 이상 싫은 소리를 전해주지 않고 듣기 좋은 메시지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미혹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15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16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 17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18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15-19)
아합왕의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아람을 치러 올라가야 한다며 하나님께서 아람을 이기도록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왕 여호사밧은 이 예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를 찾습니다. 아합은 평소에 자신에게 쓴 소리만 하는 미가야 선지자를 안 불렀는데, 어쩔 수 없는 그를 불러서 예언을 듣게 됩니다. 왕의 사자는 아합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라고 하지만, 선지자 미가야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의 예언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왕 앞에 오자, 아합왕은 사백 명의 선지자들에게 물었던 것처럼 그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하러 가도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미가야는 사백 명의 선지자처럼 ‘올라가라. 그리고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긍정적인 신탁을 합니다.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들은 아합은 자신에게 좋은 예언을 한 그의 예언을 믿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안 좋은 예언만 하던 사람이 좋은 예언을 하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맹세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미가야의 좋은 예언이 사실임을 확신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진실한 말만 하라고 하지 미가야는 자신이 여호와로부터 실제로 받은 환상과 말씀을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진 것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이들을 위한 주인들이 없으니 각 사람들은 그들의 집으로 평안하게 들어가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져 있다는 것은 목자인 아합이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며, 아합의 죽음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가면 아합은 죽고 백성들은 왕을 잃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니, 전쟁하지 말고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있던 예언은 거짓 예언이고 불길한 예언을 한 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여호사밧 왕에게 이전에 자기가 한 말이 맞지 않느냐고 하면서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고 푸념했습니다. 이런 아합의 태도를 보면, 그가 미가야의 예언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 모습은 아합이 여호와께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아합은 여호와께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목숨을 연장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여호와를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긴 것입니다. 미가야가 진정한 여호와의 선지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 듣기를 싫어하고 불평합니다.
아합은 자신이 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직 여호와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번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여호와를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질책하고 벌을 내렸지만, 아합은 아직도 이런 자신의 잘못을 못 깨닫고 불평만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아합은 매우 유아적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하며, 징계를 하면 잠시 두려워하다가 결국 토라지는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전쟁 계획을 그를 심판하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아합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였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아합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어용 선지자들을 동원해 전쟁의 명분을 쌓고 승리를 선전하게 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사는 아합에게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을 하게 하여 패망의 길을 자초하게 하셨습니다.
아합을 꾀어낼 하나님의 계획(19-23)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을 통한 미혹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통한 미혹은 가장 효과적인 사탄의 전술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서 살아가지 않으면, 사탄의 유혹에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19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2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19-23)
선지자 마가야는 계속해서 어린 아이처럼 투정하는 아합에게 계속 자신이 본 환상을 통해 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천상회의’ 환상을 전달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욥기 1-2장이나 이사야 6장 등 구약에서 가끔 언급되는 장면인데, 여기서는 하늘의 군대가 보좌 좌우에 서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전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상회의’에서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유인하여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니, 영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었습니다. 한 영이 나와서 자신이 유인하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방법으로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의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선지자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속이는 것을 허락하시며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미가야는 이런 이유로 해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의 영을 두셨고, 결국 여호와는 당신에게 재앙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사백 명의 선지자들이 아합에게 전쟁에 올라가면 승리하리라고 예언한 거짓의 영으로 인한 속임수이며, 아합에게 재앙을 주기 위한 유인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합에게 있던 사백 명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정한 선지자가 아니라, 아합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아합의 선지자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용해서 아합을 유인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영뿐만 아니라 거짓의 영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9:9). 여호와의 악령 혹은 거짓의 영은 항상 심판의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심판받는 사람들을 악령의 손에 두셔서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게 하시고, 그 결과 파멸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미가야가 여호와께서 아합을 속이려고 한다는 계획까지 아합에게 말해줌으로써 아합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미가야의 말을 믿었다면 하나님께서 유인하는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합은 여호와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잃었고, 결국 거짓의 영에 미혹되어 전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마가야를 감옥에 가두는 아합(24-28)
아무리 사람들이 거부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의도대로 역사할 것입니다. 지금도 지도자들은 같은 성경 말씀으로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무분별한 맹종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순종을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입니다.
24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25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26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7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28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24-28)
마가야는 아합에게 전쟁에 나가면 이긴다고 예언하는 예언자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영에 이끌려 아합을 죽음으로 꾀어내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언을 들은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빰을 때리면서 마가야의 말을 반박했습니다. 그는 철뿔을 만들어 아합 왕에게 승리를 확신시켰던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너와 말하기 위해 자신을 떠난 것이냐며 질책합니다. 이는 자신이 한 예언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서 한 여호와의 말씀이며, 미가야의 말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은 정반대의 예언을 하였기 때문에, 한 명은 여호와의 참 선지자이고, 다른 한 명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현재 말만 가지고는 누가 참 선지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마가야는 시드기야에게 골방에 들어가 숨는 날에 누구의 말이 진정한 여호와의 말씀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즉, 아합과 아람이 전쟁하여 아합이 패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 예언 때문에 두려워 골방에 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참 예언자인지 여부를 분별하는 방법은 그의 말이 이루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아합은 자신에게 불길한 예언을 한 미가야를 잡아서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가도록 지시합니다.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고 지시합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은 죄인에게 주는 매우 적은 떡과 물을 의미합니다. 새번역에서는 ‘빵과 물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아합의 의도를 잘 드러낸 번역입니다.
여기서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평안히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아합의 말에 미가야는 왕이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면 자신이 여호와의 거짓 선지자로 판명될 것이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향하여 ‘다 들으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자신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판정하는 증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미가야는 자신이 받은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것을 알았기에, 아합 왕의 협박과 모욕에도 당당하게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이런 반응을 할 줄 알고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합에게 가감 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미가야나 엘리야 모두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사라면서 아합의 마움을 받았습니다. 주류 세력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늘 광야로, 이방 땅으로 도망을 다니는 등 어렵게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는 여호와의 종들은 비주류에 속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미가야처럼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며 가난과 억압 속에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하기에 여전히 이스라엘 땅에 여호와의 말씀이 전달되고,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이 실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기존 축을 사정없이 흔듭니다. 아합 왕이 확신하는 승리에 패배를 선언하고, 자기 예언을 참으로 여기는 시드기야의 착각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역설에 진실이 담길 때 진실은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 편에 서길 원합니다.
참된 제자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주위 사람들의 거짓 충고와 여론과 대세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성령님께서 말씀 가운데 깨닫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릅니다.
아합은 벤하닷이 길르앗 라못 땅을 돌려주지 않자,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계획합니다. 여호사밧은 이 전쟁에 합류 의사를 밝히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아합에게 제안합니다. 이에 아합은 선지자들을 소집했고, 그들 모두는 그에게 출정을 부추기며,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들의 일치된 예언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결국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 미가야를 불러오게 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의 동맹(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긍휼로 베푸신 소중한 평화를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무모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형편을 따지기 전에 반드시 성령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뜻을 구한 다음 행동해야 합니다.
1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 2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3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4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1-4)
나봇의 포도원 사건(21:1-29)에 이어 다시 이스라엘과 아람 간의 전쟁이 전개됩니다(1-40). 앞서 아람과의 두 차례 전쟁(20:1-34)은 아람이 먼저 이스라엘을 침략했으나, 이번에는 아합이 먼저 아람을 칠 준비를 합니다. 앞의 두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승전을 예고하셨고, 그 예고대로 큰 승리를 이뤄주셨습니다. 이번 길르앗 라못 전쟁에서는 아합이 죽게 되며, 이로써 죽음을 예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1-28절까지는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참 신을 가리는 경합을 한 것(18:20-40)과 유사하게 미가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출정에 대한 하나님의 참 뜻을 가리는 경합의 진행 과정을 그립니다.
아합은 아람에게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할 합이 계획을 세웁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편 길르앗의 한 성읍으로 도피성이며 교통의 요지였습니다(수 21:38). 지난 3년 동안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었는데, 아합이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후 벤하닷과 화친 조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20:34). 그러나 그 조약과 이번 전쟁 사이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카르카르 전투(주전 853년)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합은 벤하닷 및 열 왕들과 연합하여 시리아 서북부의 카르카르에서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주전 859-824년)에 맞서 싸워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전투가 기록된 쿠르크 석비에는 다메섹 왕과 더불어 아합이 가장 막강한 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합은 앞서 아람과의 두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했고 카르카르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이번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는 일에 큰 자신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이 잊고 것이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 덕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는 유다의 여호사밧(주전 872-848년)도 합류합니다. 그와 아합은 자녀의 정략결혼을 통해(대하 18:1) 적대 관계(14:30; 15:6,32)에서 우호 관계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로써 아람과 앗수르 등을 견제하고 각 나라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에 오자 아합은 후히 접대했습니다(대하 18:2). 당시 아합은 길르앗 라못 탈환을 계획했기에, 신하들에게 그 땅이 여전히 아람 왕의 손에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추궁합니다(3). 아벡 전투에서 패한 벤하닷이 이스라엘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반환하기로 했으나(20:34) 약속을 어겼고, 이에 아합이 분개했을 것입니다. 영토 탈환에 대해 운을 뗀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동참을 권유합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이 아합과 같고 자신의 백성과 말들도 마찬가지라며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의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대답(4)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나옵니다(왕하 3:7). 그는 여호람 이전에 아하시야와도 동맹을 맺고 교역을 추진합니다(48; 대하 20:35-37). 여호사밧이 이처럼 친이스라엘 정책을 편 것(44)은 군사, 건축, 무역 등(대하 18-20장)에 상승효과를 기대했고, 여러 방면에서 강세를 보였던 오므리 왕조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왕이 바알을 섬기는 왕들과 교류하고 돕는 것은 어리석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입니다(대하 19:2).
전쟁에 대한 예언(5-9)
자신의 계획을 찬성하고 지지해 주는 종교 자도자와 사람들만 자기 곁에 두고 따라가는 불신앙적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의견이 똑같다 해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5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6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7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8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9이스라엘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5-9)
여호사밧은 전쟁에 앞서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자고 아합에게 제안합니다. 전쟁 전에 신의 뜻을 묻는 것은 관습이지만, 여호사밧이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 한 것(5; 왕하 3:11)은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왕이었습니다(대하 17:3; 20:3-4).
반면 아합에게서는 여호와의 뜻을 먼저 묻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매번 전쟁에서 하나님이 먼저 선지자를 보내 승리를 예고하셨고, 전쟁을 지도하셨습니다(20:13-14, 22-25,28). 아합과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대로 승전을 목격한 후 그가 참 하나님임을 깨닫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20:13,28). 그러나 사르밧 여인(17:24)이나 갈멜산의 백성들(18:39)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경험한 후에도 신앙을 고백하거나 악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돌아오지 않은 것은그들의 완고함을 증명하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기기에 합당할 뿐입니다. 아합의 선지자들은 승전을 예언하지만, 여호사밧은 그들의 예언이 미덥지 않습니다. 아합이 여호사밧의 제안에 따라 소집한 선지자는 대략 40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출정하라고 아합을 북돋우며 “주”가 승리를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6). 아합은 승리에 대한 예언을 들으니 출정의 명분이 더확고해져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이들 외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냐고 묻습니다(7; 왕하 3:11). 참 선지자 한 명으로도 족한데 무리가 나서서 왕이 기뻐할 예언을 하고 “주”(6절)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점 등이 못미더웠을 것입니다. 아합은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있으나 좋은 말은 안 하고 나쁜 말만 예언하기에 그를 미워한다고 대답합니다. 여호사밧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이에 아합은 서둘러 미가야를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이세벨의 선지자 살생 정책(18:4, 13) 속에 미가야 같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생존했다는 것은 엘리야나 오바댜가 숨긴 선지자들 외에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계획 아래 보호하신 자들이 있음을 함축합니다. 그렇다면 400명의 선지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5)을 대언하러 소집됐고, 여호사밧의 떨떠름한 반응 이후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만(11,12,24), 미가야와 같은 무리는 아닙니다.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핍박당하고 있었고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대적으로 여겼기에, 여기에 소집될 만한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일 것입니다. 갈멜산 대결에 바알 선지자 450명만 언급되었으므로(18:22) 나머지 아세라 선지자들이든지 바알 선지자들과 섞인 무리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왕이 원하는 예언을 하고 부추기는 점(6),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따로 찾은 심(7), 무리 지어 예언행위를 하는 점(10), 예언이 거짓말의 영에 의한 계시라는 점(19-23, 25) 등은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는 거짓 선지자임을 알려줍니다.
시드기야의 예언(10-12)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청중이 듣기 좋아하는 긍정적인 말씀, 축복에 대한 말씀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길한 일이든 흉한 일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를 찾으려고 합니다.
10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11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12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10-12)
이제 아합과 여호사밧은 성문 입구 광장(또는 타작마당)에 마련된 왕좌에 앉았고, 그 앞에는 선지자들이 승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철 뿔들을 만들어 와,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로 시작하며, 아합이 뿔들을 가지고 아람을 진멸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11). 철 뿔은 강력한 힘을 상징합니다(신 33:17). 나머지 선지자들도 아합에게 출정하라고 부추기며, 이제는 “주”(6)가 아닌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12). 6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올라가소서’의 주체는 아합을 대표로 지칭하는 ‘당신’으로 나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미가야(13-14)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한다고 해서 축복과 성공에 대한 메시지만 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전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악한 사람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만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13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14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13-14)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동안 내시는 미가야를 데리러 갔습니다. 미가야는 당시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의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26). 내시는 선지자들이 일치되어 길한 예언을 하니 미가야도 제발 길한 예언을 하라고 종용합니다. 이는 회유이거나 강요일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내시는 여호와의 뜻을 찾기보다는 왕을 기쁘게 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뜻을 맞추려 합니다. 내시의 말에 미가야는 ‘여호와가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할 것이라고 답합니다(14). 이는 내시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겠다는 각오입니다. 과연 미가야가 전할 여호와의 말씀은 길할지 흉할지 청중의 궁금증이 커져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계획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를 분별하고 대세 대신 성경적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 간에 행한 모든 일을 아시고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하시며 심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악인이 감추고 있는 추악한 죄악을 신랄하게 고발하실 뿐 아니라 공의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 앞에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한 이세벨의 계략은 성읍 지도자들의 조력으로 완벽히 실현됩니다. 나봇을 음해하려는 금식이 선포되고, 그에 대한 위증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나봇은 모독죄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세벨은 의기양양하고 아합은 포도원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아합이 겸손히 회개하자, 아합 왕조의 재앙을 아들 대로 미뤄주십니다.
이세벨의 계책과 나봇의 죽음(11-16)
야보고서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인간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임한 후 근심으로 마음이 답답해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눈에 보이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생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를 말씀을 통해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11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12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13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14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5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16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11-16)
이세벨의 악한 계책(9-10)이 공조자들에 의해 실행됨으로써 나봇은 억울하게 죽습니다. 계책이 적힌 편지는 나봇의 성읍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편지들은 아합의 인장으로 봉해졌지만(8), ‘이세벨이 그들에게 보냈다’(11)는 문장은 이세벨이 발신인이자 악행의 주모자임을 밝혀주고 성읍 지도자들은 그녀의 협조자들이며 악행의 실행자들임을 확인시킵니다.
지도자들은 먼저 성읍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금식은 일반적으로 환난이나 위기 때 고난의 원인을 찾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하기 위한 매개로 선언됩니다(삼상 7:6; 대하 20:3; 욜 1:14; 느 9:1). 그러나 이번 금식은 무죄한 하나님 백성 하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죽이기 위해 악용되었습니다. 금식 성회를 진행하던 중 그들은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머리, 꼭대기) 앉혔다.’ 이는 나봇을 우두머리로 세웠다는 의미일 수 있으나, 바로 이어 나오는 재판 장면을 고려하면 나봇을 눈에 띄는 피고인석에 앉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판이 열리고 지도자들이 미리 준비해둔 불량자 둘이 등장합니다. 율법에 따라 최소 두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신 17:6;19:15). 이제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밑 작업이 다 갖춰졌습니다. 나봇 앞에 증인으로 앉은 불량배들은 나봇이 성읍에 닥친 환난이 하나님과 왕의 탓이라며 저주했다고 위증했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한 저주는 율법에 금지되었고(출 22:28) 이에 해당하는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레 24:16).
지도자들 무리는 율법에 따라 나봇을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레 24:14-16). 나봇의 아들들도 함께 죽임 당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왕하 9:26). 이처럼 이세벨의 모략은 동조자들의 완벽한 협력, 율법과 사법의 교묘한 활용 속에 완전 범죄로 끝났습니다. 아합을 포함해 이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력, 부, 지위, 영민함 등을 악용했고, 백성을 지켜주는 기반인 율법과 사법을 악용하여 백성의 권리와 목숨을 빼앗았습니다(미 2:1). 이들은 사람과 하나님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아합은 소원대로 이제 나봇의 포도원의 상속인이 됩니다. 이세벨은 나봇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아합에게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라’며 생색을 냅니다(15). ‘차지하다’(야라쉬)는 ‘취하다’란 의미가 아니라 ‘기업으로 소유하다’, ‘상속받다’의 뜻입니다. 이제는 범죄자의 땅이므로 왕이 거둘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세벨에게 있어 포도원은 ‘돈까지 준다 했으나 나봇이 교환을 거부한(“싫어하던”, 15)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실상 나봇이 거부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서 선지자의 친구도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는 나봇과 정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20:35-36). 나봇의 죽음은 11-16절에 다섯 번 언급되어(13, 14, 15[×2], 16절), 그 죽음의 부당함이 부각됩니다. 아합은 자기 탓에 죽은 나봇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곧바로 포도원을 차지하러 갑니다.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고(17-26)
자신의 힘과 지위, 주위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라는 사탄의 충동질을 분별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성도는 사탄의 충돌질에 따라 가장 소중한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기면서까지 욕심을 이루려는 죄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오늘날 더러운 야망에 빠져 나봇과 같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강제로 차지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17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8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19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20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3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5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17-26)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은 엄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그의 죄를 확증하고 심판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아합의 죄목은 나봇을 죽인 죄와 그의 포도원까지 빼앗은(야라쉬) 죄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선언되었으나, 이는 아합이 벤하닷을 살려준 대가로 이미 예고된 내용입니다(20:42). 이번에는 거기에 덧붙여, 아합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할 것을 알립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될 것입니다.
한편 포도원에 내려간 아합은 엘리야를 발견하자 “내 대적자여”라고 부르며 자신을 찾았느냐고 묻습니다. 아합에게 있어 참 선지자들은 자신에게 흉한 말을 전하는 자들입니다(17:1; 20:42; 22:8). 그렇기에 그는 그들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18:17), ‘대적자’(20절), ‘내가 미워하는 자’(22:8)로 부릅니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20)란 물음은 ‘이번에는 또 무슨 흉한 소식을 갖고 왔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는 그때 나봇의 포도원을 갈취하고 있었기에 속으로 뜨끔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를 찾았노라고 답하며 여호와 심판의 말씀이 있음을 알립니다. 아합의 죄는 스스로를 팔아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죄입니다. ‘자신을 팔았다’는 말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아합이 자신을 탐욕과 죄에 넘겨주어 악을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백성의 재산을 보호하고 백성을 공의로 치리해야 하는 왕의 책무를 버리고 나봇을 죽게 만들었고 포도원을 가로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쓸어버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남자(‘벽에 오줌을 누는 자’)를 다 멸절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21). 아합이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노하게 했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끌었기에 그의 집안은 같은 죄를 지은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왕조처럼 끝날 것입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에게 예고된 내용(14:11; 16:4)과 마찬가지로 아합에게 속한 자들은 성읍에서나 들에서 죽어, 개와 새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24). 이세벨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개들이 이스르엘 성벽에서 그녀의 시신을 먹을 것입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에게 선포된 심판이 다 이뤄졌듯이(15:29; 16:11), 아합과 이세벨에게 선언된 심판도 다 이루어집니다(22:38; 왕하 9:36).
열왕기 저자는 아합처럼 스스로를 팔아 하나님의 눈에 악을 행한 자가 없다고 한탄하며, 그렇게 된 데에는 이세벨의 충동질이 큰 원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시돈의 바알 숭배자인 이세벨이 옆에서 아합을 부추겨 바알을 섬기게 했고,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퍼뜨렸으며, 여호와의 선지자들과 나봇을 죽게 했습니다. 그녀의 충동질로 시작된 아합의 우상숭배는 아모리 사람의 우상숭배에 견줄 만큼 심각했습니다. “아모리 사람”(26)은 당시 가나안의 한 족속을 지칭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이전의 거주민들을 두루 지칭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 음란, 가증한 풍습 등으로 그 땅을 더럽혀, 하나님의 징벌 대상이 되었습니다(레 18:24-25). 이스라엘이 그들을 따라간다면, 땅이 이전 거주민들을 토해낸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내뱉어져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 경고되었습니다(레 18:26-30; 26:31-39). 그럼에도 아합은 그들을 뒤따랐고 이스라엘 백성 또한 그 길에 함께했습니다.
아합의 겸비함과 하나님의 긍휼(27-29)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비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때늦은 회개도 받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심판도 연기해 주셨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회개라면 반드시 받아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참된 회개만이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27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27-29)
자신과 이세벨 및 왕조의 멸망을 선고받은 아합은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회개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아합은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20:42)나 나봇이 포도원 매도를 거절했을 때(4)는 언짢아 의기소침했으나, 이번에는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두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눕고, 걸음걸이까지 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겸비함을 인정하신 만큼 그의 회개는 당시 진심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다윗을 위해 이스라엘의 분열을 솔로몬 대가 아닌 솔로몬의 아들 대로 미루셨듯이(11:12-13), 아합의 재앙(왕조의 멸망)을 그의 아들 대에 내리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크고 많은 악을 행한 아합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겸비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대신 그가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겔 18:23). 그는 불순종하는 자의 죄는 ‘삼사 대’까지 갚으나 순종하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출 20:5-6).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죄의 경고나 심판의 예고는 그의 백성이 죄의 엄중함을 깨닫고 그에게 돌아와 회개하고 순종하기를 독려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는 죄악의 욕망에 눈멀게 해 영혼을 팔아넘기게 하는 사탄의 충돌질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회개할 때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있게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성도를 유혹하고 비웃고 협박하지만, 성도는 악한 세상에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것이 풍족하다고 그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을 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합의 탐욕은 이세벨의 간교한 계획을 통해 죄악으로 구체화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눈독을 들이고, 이를 구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포도원이 조상의 유산이며, 이를 매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음을 들어 이를 거절합니다. 이에 아합은 의기소침해집니다. 이세벨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봇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줄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녀는 성읍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나봇을 함정에 빠뜨리고 위증을 해서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합니다.
나봇의 포도원(1-3)
우리는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또는 환경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지위와 권력은 오직 교만거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성도에게는 소유와 능력이 하나님을 위한 사명거리일 뿐입니다.
1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2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3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1-3)
이 일들 후에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서 포도원을 매입하려고 합니다(2). ‘이 일들 후에’(“그 후에”, 1)라는 어구는 첫째, 시간적 흐름으로, 아람과의 두 번의 전쟁 및 벤하닷과의 조약 이후라는 뜻입니다. 둘째, 공간의 이동으로, 사마리아에 머물던 아합이 이스르엘에 머물고 있음을 알립니다.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1)이라는 표현은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임을 뜻하고, 이때 왕궁은 사마리아 궁이 아닌 이스르엘의 여름 별궁임을 암시합니다. 셋째, 의미상의 연관성으로 이전 사건들과 이번 일에 관련이 있으므로 이 점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아람과 치른 두 번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고하셨고 그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승리의 공로를 가로채고, 처단해야 할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20:34). 이후 아합은 이 일에 대해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책망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었습니다(20:42). 아합은 의기소침해져서 사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속 내용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돌아온 후 그의 행동이나 심경 변화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아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전 일들을 잊고 일상생활로 돌아간 듯합니다. 이스르엘의 별궁 근처에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잇사갈 지파의 기업인 이곳(수 19:17-18)은 사마리아에서 북서쪽 37킬로미터 떨어진 평원으로 여러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곳 포도원을 푸른 정원(“채소밭”, 2)으로 만들고 싶어 눈독을 들였습니다. 그는 포도원이 궁에서 가까움을 핑계로 나봇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를 테니 포도원을 주라고 요구합니다. 대가로는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나봇의 눈에 좋다면 돈으로 줄 것입니다. 아합의 토지 매매 제안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고, 더 좋은 포도원과 맞바꿔주거나 값을 지불한다니 정당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포도원이 조상이 물려준 유산일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아합의 토지 매입 시도는 왕이 백성의 가족과 소유를 빼앗을 것임을 경고한 사무엘의 말에 부합합니다(삼상 8:9-17). 백성의 토지를 가지려 한 마음부터가 죄의 시작입니다. 나봇은 땅매각이 여호와께서 금한 일임을 이유로 들어 아합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나봇의 거절은 핑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진정한 순종 행위였습니다.
그의 대답(3-4)은 유산(기업)으로서의 ‘땅’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첫째, 땅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각 지파와 가문에게 땅을 기업으로 수여하셨습니다. 이는 각 가정에게 삶을 지탱할 가장 기본적인 터전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기초로 합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26:3-4; 출 3:17; 신 1:8).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각 지파, 각 가정에게 땅을 분배하셨습니다(수 13-22장). 이때 그들에게 땅을 ‘유산’으로 할당하심으로써 각 가정이 자자손손 영구히 삶의 터전을 확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신 1:8; 6:10-11). 나봇이 “내 조상의 유산”(3,4)을 반복하는 것은 그 포도원이 조상 대대로 물려온 하나님의 기업이며, 자신에게는 이를 지켜 후손에게 유업으로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음을 함축합니다. 셋째, 언약 백성으로서 분배받은 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가 주신 땅에서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신 30:19-20). 따라서 언약과 기업의 약속이 확고히 유지되도록 이스라엘 백성 간에 땅을 영원히 매각하는 것을 율법으로 금하셨습니다(레 25:23).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일시적인 매매가 허용되기도 하나, 희년에 매입자가 땅을 매도자에게 돌려주도록 규례를 정하여 땅의 주인이 바뀌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희년 전에는 언제든 기업을 되사서 회복할 수 있도록 ‘기업 무르는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레 25:23-28). 이와 같은 점들을 참작할 때, 나봇의 “(포도원 매각을)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3), “왕께 줄 수 없다”(4)는 발언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순종할 각오임을 드러냅니다.
나봇과 달리 아합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업'의 의미와 그가 명령한 규례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가 백성의 땅을 사들이려 한 것은 부친 오므리가 율법을 어기고 세멜에게서 땅(사마리아)을 매입한 일(16:24)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이세벨의 계책(4-10)
세상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뜻을 굽히려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융통성이 아닙니다. 세상과 타협한 일은 우리의 신앙과 영혼의 건강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4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5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6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7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8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4-10)
나봇의 포도원에 대한 아합의 소유욕은 이세벨의 악랄한 계책으로 진전됩니다. 포도원 거래가 성사되지 않자 아합은 마음이 언짢고 답답했습니다. 근심과 답답함(4)은 앞서 벤하닷을 살려둔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죽음 예고를 들었을 때의 심정이었습니다(20:34).
아합은 이처럼 어떤 일 때문에 수틀리면 이성적으로 원인과 대책을 헤아리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받고 감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토라진 아이마냥 침대로 들어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이 대체 무슨 일로 밥도 안 먹고 침울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아합은 이전에 갈멜산 사건을 그녀에게 보고해줬듯(19:1) 이번에도 자신과 나봇의 일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나봇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포도원을 가지려 했음은 자세히 말하지만, 나봇에 대해서는 그가 거절했다는 점만 언급합니다. 아합이 이세벨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데에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갈멜 산 사건을 들려준 이후에 이세벨이 엘리야를 겁주어 달아나게 하지 않았습니까(19:1-3).
한편 아합의 말을 들은 이세벨은 ‘당신이 지금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고 있는 겁니까’라며 어처구니없어합니다(7). 왕이란 자가 백성의 소유를 맘대로 빼앗지 못해 끙끙대고 있다니! 시돈의 공주였던 그녀에게는 이해 불가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 그에 따라 백성의 땅을 보호해야 하지만(신 17:14-20), 이방 왕은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포도원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아합에게 일어나 밥도 먹고 마음을 풀라며, 그를 북돋웁니다. 또한 자기가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줄 것이라 약속합니다. 이세벨은 ‘나’(7)를 강조하며, 자신에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왕에게 줄 능력과 방책이 있음을 은근히 과시합니다. 앞서 아합이 벤하닷과 조약을 맺으며 보여 주었던 교만한 태도(20:34)와 맞먹습니다.
이세벨은 이처럼 적극적인 데다가 지력과 결단력과 추진력까지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이 장점들을 악행을 저지르는 데 사용하고, 아합을 부추겨 죄짓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녀는 포도원을 가로채기 위해 나봇에게 누명을 씌우려 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담은 편지를 아합의 인장으로 봉한 후 나봇의 성읍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이로써 자신이 왕권을 수행합니다. 이세벨은 나봇이 포도원을 지키려 한 이유인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려 할 때는 ‘율법’을 제반 활용했습니다. 금식을 선포할 상황을 만들고, 나봇을 높은 곳(또는 지위)에 세우고, 불량배 두 명을 증인으로 준비시키고(신 17:6), 사형이 마땅한 죄목으로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출 22:28) 위증하도록 조치하고, 율법에 따라 나봇을 성 밖에서 돌로 치도록(레 24:10-16) 명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행악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죄’ 뒤에는 ‘사망’만이 따를 것입니다.
자기 자랑과 교만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이 세상에 선포하실 주님 예수 그리스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자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1940년대 많은 성도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옥되었고, 목숨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삼척에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최인규 권사가 있었습니다. 경찰서장은 그에게 똥지게를 지우고 “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최인규다”라는 글을 가슴에 달고 거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그의 온 몸에는 이미 모진 고문 자국이 피얼룩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친구 한 사람이 경찰서장을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나는 최인규의 친구 자국성이오, 내 친구는 본래 정신이상자라 헛소리를 잘하오. 그러니 그를 풀어주시오”. 이 말을 들은 경찰서장은 오히려 “미친 것은 최인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으시오. 신념을 가지고 말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핍박하는 사람에게 적당한 눈속임으로 나의 편안을 찾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고,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강한 아람왕 벧하닷의 침공을 두 번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해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 교만한 이스라엘 왕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책해 나가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35-37)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은 이에 대해 순종을 선택할 것인가 거부를 선택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우리는 마음의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승리를 이루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평판에 도취하여 오만한 아람 왕을 살려 보낸 아합 왕에게 하나님꼐서는 생명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35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36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37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그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35-3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어 심판의 소식을 전하기 전에, 선지자의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아합에게 요구한 것이 순종이었음과 불순종의 대가가 죽음임을 알리십니다. 이 선지자는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35)이며, 앞에 등장했던 선지자(13,22,28)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선지자의 무리”는 문자적으로 ‘선지자의 아들들’로 선지자 양성 훈련을 받고 있는 학생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 학교가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은 사무엘 시대이며, 사무엘이 그곳의 지도자였습니다(삼상 19:20). 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벧엘(왕하 2:3), 여리고(왕하 2:5), 길갈(왕하 4:38), 에브라임(왕하 5:22) 등에 많은 생도들이 상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본문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명을 받아 그의 친구에게 “너는 나를 치라”고 말합니다(35절). 이 명령에는 ‘제발’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상대방이 꼭 들어주기를 바라는 요청임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때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여기서 ‘싫어했다’(35)는 동사는 ‘거절했다’, ‘거부했다’의 뜻이며, 좋고 싫고를 떠나 그가 의지적으로 치는 행동을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거절했든지 간에 그 결정은 ‘여호와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 생각, 판단, 경험 등을 앞세운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려고 작정한 벤하닷을 아합이 살려준 행동(42,34)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때리기를 거부한 친구에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36)고 선언함으로써 불순종이 그의 죄목임을 확증합니다. 이어서 그가 선지자를 치지(나카) 않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로 사자가 그를 칠(‘나카’, “죽이리라”, 36)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 예언 후 그 친구는 선지자의 곁을 떠났고, 예언대로 사자가 그를 발견하여 쳐(나카) 죽였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아합에게 임할 운명을 미리 보여줍니다. 또 이 사건은 여로보암 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여 사자에게 죽임 당한 일을 상기시킵니다(13:14-26). 이 모든 사건은 불순종의 죄가 엄중하며 그 심판 또한 엄중하고 피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한편 선지자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 그에게도 자신을 치라고 요구합니다(37). 이 사람은 선지자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세게 쳤습니다. 과한 폭력을 쓴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앞선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소식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선지자는 양 눈을 덮개로 가리고 나타나는데(38,41), 이는 변장의 목적도 있지만(38) 두 번째 사람에게 맞아 눈을 다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위 사건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이 ‘순종’만을 요구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주권적인 계획과 판단 하에 이루어지며, 그 안에는 그의 공의와 인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등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이 있어 때때로 그 명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에 불복하고 니느웨와 완전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떠납니다(욘 1:1-3).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 친히 징조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아하스 왕은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며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사 7:11-12).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며 잡아먹으라고 세 번이나 명하시지만, 그는 율법에 부정한 짐승 먹는 것을 금하므로 먹지 않겠다고 모두 거절합니다(행 10:10-16). 이들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는 데에는 자신의 적정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우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화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가라’는 명령에 따라 미지의 땅으로 출발하는 아브라함의 순종(창 12:1-4)이 성도가 실천해야 할 순종의 태도입니다.
아합에게 예고된 하나님의 심판(38-43)
우리는 잠시 작은 승리 앞에서 승리에 도취되어 긴장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승리가 스스로의 능력처럼 오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세울 때는 우쭐하고 하나님께는 우물쭈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인정, 소유권 인정, 그것이 참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는 절대로 모른척하지 않으십니다.
38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어 변장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39왕이 지나갈 때에 그가 소리 질러 왕을 불러 이르되 종이 전장 가운데에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그를 잃어 버리면 네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40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41그가 급히 자기의 눈을 가린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그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줄을 알아본지라 42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43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38-43)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그가 불순종의 심판으로 죽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앞에서 상해를 입은 선지자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길가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두 눈을 가려 전투에서 부상 당한 병사처럼 위장한 상태라(38), 그의 정체를 은폐할 수 있었습니다(41).
아합이 지나가자 선지자는 그를 소리쳐 불러, 가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런 방식은 나단 선지자나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할 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입니다(삼하 12:14; 14:5-18). 선지자는 자신이 전장에서 포로(또는 죄수) 한 명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잠깐 다른 일을 보는 새에 그가 도망가, 이제 자신의 생명을 바치거나 은 1달란트를 물어내야 할 형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배상이 너무 과하므로 선처하여 줄여달라는 요청입니다. 노예 몸값이 은 30세겔이고(출 21:32), 오므리가 매입한 사마리아 산지 가격이 은 2달란트(16:24)인 점을 고려한다면, 은 1달란트(3,000세겔)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목숨이나 고액의 몸값은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의 죄가 그만큼 위중함을 암시합니다.
사정을 들은 아합은 그가 자초한 일이므로 원래 정한 대로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 말에 선지자는 재빨리 눈을 가린 수건을 풀었고, 아합은 이내 그가 선지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진멸’하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아합이 풀어줬으므로 아합은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람 백성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합니다(42). 아합이 벤하닷을 석방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준 기회를 자기의 권한으로 악용한 것이며 방심하여 왕의 책무를 잊은 것입니다. 이 일은 과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각 왕을 살려둔 사건과 흡사합니다(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 왕을 살려두고 최상의 짐승들을 따로 남긴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며 그 말씀의 엄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은 살려둔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그가 기뻐할 것이라며 자신의 불순종과 죄를 합리화했습니다(삼상 15:15, 21). 그러나 외면의 행실이 내면의 동기와 태도와 부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앞서 그것부터 하나님 앞에 악이고 죄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무찌른 상대방 왕에게 위세를 뽐내고, 백성에게 용맹하고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꾸짖음을 들었을 때에도 백성의 눈치를 보았습니다(삼상 15:30). 아합이 적대국 왕과 조약을 맺은 결정 또한 국제, 정치, 상업 등 상호의존과 유익을 추구한다는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도 상대국이나 이스라엘에게 권위와 자비가 있는 군주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택했습니다. 아합이나 사울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결정이 공의이며, 이스라엘을 향한 보호책이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울은 왕권을 빼앗기고(삼상 15:23,26) 나중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삼상 31장). 아합 또한 이후 아람과의 전쟁 중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22:35). 그의 자손들과 백성마저 아람의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왕하 13:3). 아합은 벤하닷과의 조약이 자신과 나라에 이득이라고 생각했겠으나 이스라엘과 아람은 결코 화친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는 생각지 못한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심판 예고에 낙심하고 답답한 심정을 갖고 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근심하고 답답하여”(43)란 표현은 후회나 죄책감이 아닌 언짢고 화난 상태를 뜻합니다. 이후 나봇의 포도원을 갈취하지 못했을 때에도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21:4). 아합도 죄를 뉘우칠 때는 옷을 찢고 금식하며 스스로 겸비할 줄 아는 자입니다(21:28). 이런 점을 종합하면, 아합은 이번에 자신의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에 중독되어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에겐 성장도 성찰도 없습니다. 자기 합리화밖에 모는 성인 아잉서 객관적으로 성찰하며 돌이켜 회개하고 변화를 지향하고 율례를 보존하는 어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성도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아서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왕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이 전쟁을 계획하기도 전에 그들의 계획을 아합에게 알리셨습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앞선 패전 원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이었다는 점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벤하닷에게 골짜기에서 전쟁할 것을 권하고 승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패했고 벤하닷은 사로잡힙니다. 아합은 아람의 세력을 제지할 기회를 얻었으나, 어리석게도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살려둡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22-34)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비해야 합니다. 어떤 상항을 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대적의 공격을 이겼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따라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22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23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24또 왕은 이 일을 행하실지니 곧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 곳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25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왕을 위하여 보충하고 말은 말대로, 병거는 병거대로 보충하고 우리가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하리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26○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27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8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29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30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31○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32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33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34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22-34)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내년에 있을 아람의 보복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겠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준비를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벤하닷도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철저하게 보복을 준비합니다.
(1) 아람의 전투 전략(22-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 아람이 다시 침략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선지자는 첫 전쟁 당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던 자입니다(13). 이번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쟁 시기와 대책이 포함되었습니다. 아람은 해가 바뀌는 봄에 출정할 것이다. 봄부터 건기가 시작되므로 공격과 전투에 용이하기 때문이며, 이는 벤하닷이 패전의 수욕을 씻기 위해 서둘러 공격할 태세임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전쟁을 대비해 힘을 기르고(하자크) 준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는 지난번 승전이 하나님 덕분인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전투를 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아람 궁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패전 원인과 후속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후에 아람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논의 이전에 그 내용을 이미 간파하셨음을 보여주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수도를 공략했다 실패한 아람은 이번에는 신을 공격할 전략을 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지난 전투에서 강했던(하자크) 근원을 그들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인 데서 찾았습니다(23). 해발 400미터의 구릉지인 사마리아에서 싸웠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능력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산 아래 골짜기(평지)에서 접전한다면 이스라엘의 ‘산의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람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모든 면에 전능한 신이 아니라 특정지역이나 지형, 역할 등에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바알을 바다나 비를 관할하는 폭풍의 신으로 여겼듯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산에서만 위력을 떨치는 신으로 오인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같은 산악지에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해왔고, 산악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말과 병거를 가진 군대가 이스라엘에 맞서려면 평지 전투가 유리했습니다. 옛적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를 끌고 기존 강 계곡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도 이 점을 참작한 전략이었습니다(삿 4-5장).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역이용하여 건기에 말라 있던 기존 강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불어난 물과 급류로 병마와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알 리 없는 벤하닷의 신하들은 다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며 왕을 설득합니다. 또한 승리를 위한 새 전략으로 동맹국 왕들을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 총독을 세울 것과 패전으로 인해 수효가 준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고 재정비할 것을 제안합니다. 신하들은 이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평지에서 전쟁을 벌이면 아람이 반드시 이스라엘보다 강할(하자크) 것을 반복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왕은 그들의 주장과 전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이나 신하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전제한 것부터 잘못됐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강할(하자크) 것이라 장담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합에게 힘을 기르게 (하자크) 하셨고 이스라엘의 승전을 보장하셨습니다.
(2) 아람의 침입과 이스라엘의 승리(26-30a)
봄이 되자 하나님의 예고대로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만, 이스라엘의 ‘산의 신’에게 완패합니다. 아람 군대는 아벡으로 올라왔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이 평지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군도 소집되고 식량을 배급받고 진영을 쳤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염소 두 떼 같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아람 군은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아합에게 와서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번 승리의 약속은 아랍 사람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속단한 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합니다(2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승전을 주어 아람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전쟁은 각 군대가 대치한 지 7일 째에 시작됐습니다. 적은 염소 무리 같은 이스라엘 자손(27)은 그날 하루에 아람의 10만 보병을 무찔렀습니다.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 27,000여 명은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그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점들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시켜(수 6:20)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게 ‘산의 신’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전능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가뭄 예고와 시작, 갈멜 산에서의 불의 응답, 사마리아 전투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벡에서의 승전에서도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28).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확실히 깨닫고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3) 아합과 벤하닷의 조약(30b-34)
아람에게 대승을 거둔 아합은 항복한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맙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에 패하여 신하들과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앞서 사마리아 전투에서는 마병의 원조를 받아 도망할 수 있었지만(20), 이번에는 전투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와 무리는 성읍의 가장 구석진 곳(“골방”, 30)에 숨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습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여기고 골짜기의 신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던 신하들이나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벤하닷은 아람의 완패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벤하닷을 살리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의 취약점을 공략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이 ‘인애’의 왕들(“인자한 왕”, 31)이라는 평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조약 맺을 가능성을 타진해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략은 어리석었지만 아합에 대한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그들은 참회와 항복의 표시로 굵은 베를 허리에 여미고, 밧줄 같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가겠다며 벤하닷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합이 벤하닷의 생명을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설득합니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실행하여 아합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아합에게 자신들의 왕 벤하닷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기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음을 밝힙니다(32). 아합은 ‘그가 살아있냐’고 물으며 뜻밖에도 벤하닷을 자기의 “형제”라고 대답합니다(32). 신하들은 이를 좋은 징후로 여겨 재빨리 아합의 말을 받아 ‘벤하닷이 아합의 형제’라고 응수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또한 그가 오자 병거에 태워 자신과 동등한 대접을 해줍니다.
이에 벤하닷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아합에게 조약을 맺자고 회유합니다. 첫째, 부친인 벤하닷 1세가 아합의 부친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아합에게 반환한다는 약조입니다. 이때 아합의 부친은 오므리가 아닌 ‘바아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아사 때(15:20) 벤하닷 1세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북방 성읍을 친 일이 있었는데(15:2), 이후 엘라와 오므리 때에 그 성읍들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벤하닷 1세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읍을 만든 것처럼 다메섹에 아합의거리를 만들라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업신여겨 쳐들어온 그의 죄는 헤아리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적 유익만 따져 조약을 맺은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더구나 ‘바로 내가 이 조약으로 당신을 풀어주겠소’라고 하며(34), 벤하닷을 풀어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과시합니다. 이처럼 아합은 승전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승전 후에는 순종의 길을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심판만 남아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미끼로 성도를 유혹하는데, 성도가 야망이나 욕심에 빠지게 되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영적 대적과의 싸움에서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싸우며 영적 야합을 거절하고 악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청지기의 자리를 벗어나서 자신이 주인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맡기셨을 때, 에덴의 관리자인 청지기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처럼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 아담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입니다. 어쩌면 절대 권력자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떄문일 것입니다.
아람과의 전쟁 전에 하나님꼐서 한 선지자를 보내 아합에게 승전을 약속하십니다. 또한 아합이 묻는 질문에 답하시며 전투 전략을 알리십니다. 아합은 말씀에 따라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앞세워 먼저 아람을 공격하게 합니다. 아람 왕과 동맹국의 왕들은 술에 취해 있다가 불시의 공격을 받고 도망합니다. 아합은 출정하여 아람을 크게 격파합니다. 승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이 또 증명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II)(13-21)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에서 나옵니다.
13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14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15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16○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17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18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19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20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21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13-21)
성도는 자신의 소유와 능력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타협에는 적정선이 없슨비다.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하면 신앙에 있어서 계속적인 후퇴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려믄 헛된 노력을 정산하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1)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13-14)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승전을 약속하십니다. 벤하닷은 아합이 ‘전쟁이나 끝나고 자랑하라’고 훈수를 둔자, 이에 분개하여 사마리아를 향해 공격 준비를 명했습니다(11-12).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 궁에서는 한 선지자가 아합 앞에 나아왔습니다. 13절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가 문장 맨 앞에 나와, 선지자의 등장이 뜻밖의 일임을 알립니다.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이세벨에게 죽임 당했고(18:4,13), 엘리야는 혼자만 남았다고 외로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19:10,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나 이 선지자 외에도 그의 주권적 계획 하에 또 다른 선지자(35), 미가야 선지자(22:8), 오바댜가 굴에 숨겨둔 100명의 선지자들(18:4) 등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를아합에게 전합니다. 이때 사마리아를 향해 진영을 갖춘 아람 군대는 “큰 무리(또는 군대)”였습니다(13). 본문에 아람 군의 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듬해에 아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보병이 10만 명에 달한 점을 참고하면(29) 이번 아람의 병력 또한 10만 명 내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큰 군대를 아합의 손에 넘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승전 예고에 어리둥절하여 대체 누구를 통해 승리를 주실지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주축을 이룰 것이라 답하십니다. 이에 아합은 누가 싸움을 시작할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와 같이 오늘 하나님께서 아합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일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언약적 사랑과 긍휼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전의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가뭄이나 갈멜 산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가 여호와인 것을 아합과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13; 18:36). 그들이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의 청중과 현대 독자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과 긍휼이 유효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자가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2) 이스라엘의 승리(15-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은 수를 이용하여 큰 무리의 아람을 이기게 하실 예정이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14) 각 지방의 고관 청년들을 소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232명으로 적은 수였습니다. 이들 외에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은 7천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15)으로 지칭되었으나, 이는 백성 중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용사의 모든 수가 아니라 이번 전투에 대표로 소집된 용사의 수를 나타냅니다. 이 숫자는 문자적으로 7천 명 또는 상징적인 수로 볼 수도 있습니다. 7천이라는 수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바알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들’(19:18)의 수와 일치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준비하신 자들임을 암시합니다. 적군의 수에 비해 턱없이 작은 이스라엘 군의 규모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병사의 수나 말과 병거의 수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함축합니다. 이는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락에게 시스라 군대에 맞설 용사로 두 지파에서 1만 명을 소집하라고 지시한 데에서도 나타납니다(삿 4:6). 이번 아람과의 전투에서 선두에 설 232명의 청년의 수효 또한 사사 시대에 미디안에 대항한 기드온의 용사 300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당시 세 지파에서 소집된 32,000명 중 1만명 만이 참전하기 위해 남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많다고 하셨고, 결과적으로 기드온과 300명만으로 미디안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삿 7장).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람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스라엘은 정오에 232명의 고관 청년들을 먼저 출정시켰습니다. 그때 벤하닷은 동맹국 왕들과 함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대적들이 허술한 틈을 공략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술에 취한 벤하닷의 모습은 오므리 장군을 전장에 보내고 디르사에 남아 술에 취해 있었던 엘라 왕을 떠오르게 합니다(16:9). 이런 연결성은 엘라가 방심해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병거 지휘관 시므리에게 암살당했던 것처럼(16:10), 아람 왕도 죽든지 아니면 적어도 큰 해를 입게 될 것을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듭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보고 받고, 군사들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성에서 사람들이 나와 아람 진영을 향해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이 본 자들은 선두에서 진격하는 232명의 청년 무리였을 것입니다(17).
벤하닷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해(“화친하러”) 나오더라도 사로잡고, 전쟁을 위해 나오더라도 사로잡으라고 명합니다(18). “화친”을 언급한 것을 보면 벤하닷이 청년 무리를 항복을 전하러 오는 아합의 사절단으로 오인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판단력이 흐려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적군을 사로잡으라는 벤하닷의 두 명령 원문에 ‘산 채로’라는 말이 각각 나와 강조되었습니다(18). 벤하닷이 그들을 왜 생포하려 했는지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람의 병력 규모가 이스라엘과 비할 수 없이 컸으므로, 이스라엘과 혈전을 벌이지 않아도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생포하라는 명령은 그의 방심과 과시욕에서 나온 언사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선두에 섰고, 나머지 7천 명의 병사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청년들과 나머지 이스라엘 용사는 일대일로 적군을 맞닥뜨려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아람 병사들은 전세가 기우는 것을 인지하고 도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이때 벤하닷도 말을 타고 마병들과 함께 피했습니다. 이들은 패전에 대비해 왕의 탈주를 돕는 수행원들로 이해됩니다. 또한 그가 술에 취했기에 도움 없이 혼자 도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초토화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의 신들에게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고 떠벌렸지만(10), 그의 위풍은 결국 허풍이 돼버렸습니다. 1절에서 “아람 왕”으로 불리며 등장한 벤하닷은 20절에서도 “아람 왕”으로 불리며 퇴장하나, 그의 모습은 1절과 전혀 다른 형국입니다. 등장 때의 벤하닷은 32명의 동맹 왕의 대표로서 큰 군대를 거느리며 사마리아를 공격하러 온 용맹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퇴장 때는 전장에서 술에 취해 자제력과 판단력을 잃은 왕, 오판으로 아람의 많은 병사를 죽게 했으며, 패배 속에 수욕을 견디며 도망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 왕 아합은 힘없고 굴욕을 참아야 하는 왕으로 등장했으나, 마지막은 출정하여 용맹스러운 활약을 펼치고 승리하는 왕으로 나옵니다. 아합은 벤하닷 군대의 말과 병거를 치고, 아람 사람을 큰 격파로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승리를 약속하고 예고하신 여호와의 말씀(13)이 성취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사마리아 전투 전체(1-21)의 구조상으로도 단락 중간 즈음에 나와 벤하닷과 아합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승전은 이스라엘 군대보다 열 배 이상 많은 군대를 상대하여 얻은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인간의 계산으로는 불가한 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의 전능함을 이스라엘과 열방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승전 약속의 성취를 통해 아합과 이스라엘이 그를 “스스로 있는 자”(출 3:14),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임을 깨닫기 바라셨습니다(13). 앞서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을 지켜봤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불의 응답에 놀라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18:39). 그러나 오늘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아합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는 내용이 기록되지 않아 긴장감을 줍니다.
힘의 노리가 지배하는 세상 질서 속에서 더 강함되기를 추구하기보다 약자의 어려움을 돌봐주며 강함되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의지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을 헛된 자만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성도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부분에 솔선수범으로 충성스럽게 봉사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분이 세상에서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 안밖에서 생활이 다른 이원론적인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아름다운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5).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 칭송이 자자합니다(행 2:47).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게가 형성된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 환경과 바르게 형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과 바르게 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말합니다.
물질에 대한 생각(10-13)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쫓아 살아갑니다. 땅투기, 부동산 투기, 요즘은 가상화폐라는 것에까지 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을 바보 취급합니다.
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1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2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13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10-13)
솔로몬은 세상만사가 헛되다는 명제를 설명하면서, 전도자는 이미 2장 1-11절에서 소유의 허무함에 대해서 언급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삶의 구체적인 실상들을 살피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부와 소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10)
10 돈을 사랑하는 사람마다 돈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고 부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재산이 아무리 불어나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이것 또한 허무한 것이다.(우리말 성경)
세상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없으므로 당연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높아져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약자들을 물리치고, 어떻게 해서라도 한 발이라도 높아 보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깐 자신의 능력만큼이 아닌 무리해서 불법과 무질서로 그것들을 취하려고 합니다. ‘은을 사랑한다’는 돈을 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가족도 건강도 보이지 않고 오직 돈에만 집중합니다. 당시에는 가장 지혜로운 것 같지만, 나중에 그것이 올무가 되어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몸도 상하고 가족도 다 떠나버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물질을 대하는 모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물질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량과 달란트를 따라 주셨음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은 하늘 아래서 공평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물질에 대한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잠언 30장 7-9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7-9)
하나님 보다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권고했습니다. 세상이나 물질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에는 믿음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 사람들이 부자를 보면서 ‘부자들은 돈 걱정할 것 없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11)라고 반문합니다. 부가 증가하면 할수록 새로운 더 큰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근심을 가져옵니다.
12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12)
12일하는 사람은 먹는 것이 적든 많든 단잠을 자나 부자는 그의 풍부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우리말 성경)
‘노동자’와 ‘부자’의 잠을 비교합니다. 노동자는 잠을 잘 자지만, 부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부자가 잠을 못 이루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업에 대한 걱정도 있을 것이고, 다른 부자와의 경쟁도 있을 겁니다. 인생이 삼분의 일이 잠인데 그 잠을 제대로 못 잔다면 인생의 삼분의 일을 망친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받아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직원들과 직원의 식구들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는 그의 풍부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동안 맡겨주신 것이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서 드려야 할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인 욥의 모습처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21-22)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면서 평안함으로 누립니다.
유산에 대한 생각(13-17)
욥의 고백대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빈손으로 떠나가게 됩니다(시 49:17).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그것을 얻고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이러한 폐단들은 결국 부와 소유의 헛됨을 입증해 줍니다.
13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14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15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7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13-17)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번은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문제로 매우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5)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눅 12:13-21)를 통해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은 부자가 밭에 소출이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곳간과 창고를 짓는 일에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부자는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9)라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한 물질 지키느라고 인생을 다 보냅니다.
재물은 본질적으로 허무한 것이고 그로 인한 폐해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물질 자체를 죄악 시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재물로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의 허무함을 밝혔던 전도자가 이제 부와 소유에 대한 올 바른 태도에 관한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사람이 부를 지나치게 사랑하며 해가 되도록 지키는 것이 폐단, 즉 악하고 해로운 일인 반면에 열심히 일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삶에 대한 전도자의 기본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삶의 허무함을 깊이 탄식하면서 동시에 “먹고 마시며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2:24 참조).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처럼 재물 역시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사는 동안 이것을 통해 필요를 채우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여 재물을 해될 만큼 추구하거나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지키려는 것은 삶을 망치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것의 용도를 알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응하시리라"는 말은 부와 소유에 관한 교훈이자 삶에 대한 결론적인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 헛되고 부질 없는 것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고후 12:7-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물질은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자식의 재산이 되지 못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맙시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 부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은 신기루 일 뿐입니다. 여러분 주위 사람들을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운 모습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누리게 한 것들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과 삶이 이원론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부정적인 권력의 유혹, 물질적인 짐은 유혹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주시면 주실수록 더 겸손히 섬길 때 하나님께서 더 능력 있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르고, 모든 피조물과도 바르게 형성합니다. 솔로몬은 그 동안 인간 세상을 돌아본 결과는 모든 것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조물을 관리하고 통치하기보다는 섬기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우상숭배의 행위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근본인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돌아봅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 기쁘게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드리는 것이 넘칩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서도 너무 감사해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1-7)
예배를 많이 참석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려 나올 때,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어떤 분은 몇 수십 년 예배당을 다녔지만, 말씀을 한번도 듣질 못한 기적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설교를 들을 수 없습니다.
1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6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1-7)
삶에서 부조리와 고통을 일으키는 사례들을 살펴본 전도자는 이제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언급합니다. 즉 무익하고 헛된 수고와 고통을 일으키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보람 있고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라 할 수 있는 본문에서 전도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함으로써 바르게 행하는 것이 부조리와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행하라는 이 권고는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된 의무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의 기본 자세를 일깨우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1)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순종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 나오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1)라고 하였습니다. ‘네 발을 삼갈찌어다’에서 ‘삼가다’는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모든 행동과 태도에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권고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지녀야 할 마땅한 태도를 말하기에 앞서 전도자는 거짓된 예배, 즉 순종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한 전제로서 하나님 앞에 거짓된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직한 마음과 순종으로서 이것이 없이는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면 말씀을 거스르는 악을 자행해도 괜찮을 줄 알지만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그분과의 관계를 결정 짓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준비되고 열려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전달되어도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시편 95편 7절에서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29 등)라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우상 앞에 서있거나 제물 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릅니다. 그 신들은 죽어 있는 신들이기 때문에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런 형식적인 모습을 원치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당신이 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 기도한 자세(2-3)
둘째,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2-3).
하나님 앞에서 삼가라고 권고했던 전도자는 특별히 그분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경계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절대자이신 창조주 앞에 인간은 유한하고 연약하며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중에 그분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여기고 이것저것 구하며 말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해 무지한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에 휘둘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해서, 또는 길게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말로써 진실이 가리워지기도 오고간 말이 잊혀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원을 하고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원을 행하는 데 따르는 희생과 수고를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서원 이행을 미루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원을 행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모두가 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가 됩니다. 즉 그분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결론적으로 서원을 하고 지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서원을 했다고 해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 거짓을 행한 것이므로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하고 정직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경솔한 사람은 장소나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말이나 막 지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막말하면 복 없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에 아무렇게나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성급한 사람은 판단력이 흐립니다. 자신의 생각이 마치 하나님의 생각으로 오인(誤認)합니다. 자기에게만 적용하면 좋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 생각이 주입될 때, 잘못된 믿음이 형성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주장이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에 말을 끊어버립니다. 이런 행동은 ‘우매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당신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은 무슨 생각부터 나십니까? 예수님께서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를 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의 염불을 외는 것처럼 계속적으로 지껄여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 말씀에 귀를 귀 울려 보시길 바랍니다. 이사야서 59장 1-3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이 말씀에서 지적한 이유 때문에 당신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시도해도 중언부언한 기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습니다.
(3) 하나님 앞에 서원한 자세(4-7)
셋째, 서원한 것은 반드시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진실하고 정직한 태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서원과 관련해서 전도자는 다음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종 서원에 대해 ‘~해주신다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서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식의 서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서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흥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대로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정말 아름다운 서원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난 후에 그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자진해서 드리겠다는 다짐이 서원입니다. 한 가지 또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기분파가 있습니다. 은혜 받았을 때는 아무 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서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육신의 생각이 나기 시작합니다. 서원한 내용을 취소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사람들에게 솔로몬은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 하지 말고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4). 차라리 서원에 대해서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5)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서원을 않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원에 대해서 나중에 실수라고 변명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6절에서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고 하셨습니다. 서원을 번복하는 것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지금 다 고백하시고 갚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66편 13-14절에서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14.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서원은 나에게 손해가 날지라도 반드시 갚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헛된 시기심에 의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서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서원 후에 헛되게 번복하는 사람의 사업의 터전은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실 것이고, 당신의 복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시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하셨습니다(창 2장). 그러기 때문에 시편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주심도 신앙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라고 세우셨습니다. 혼자서는 넘어지고 쓰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합심하고 협력하여 승리의 삶을 살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4장 1-8절까지를 통해서 3가지 목적을 지적했습니다. 권위를 위한 삶, 경쟁적인 삶, 물질을 위한 삶 등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끝없는 탐욕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삶의 목적이 있어 살아가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끝없는 탐욕(7-8)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삶에 가치관이 되어 사람의 삶을 이끌고 나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까지도 없으면 정말로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사람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7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7-8)
본문에서 전도자는 끝없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실제적인 예로 죽은 후에 남겨 줄 대상도 없는 사람이 재물 쌓기에 여념이 없는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유산으로 넘겨줄 처자식도 없는데,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가득하여, 계속 수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욕망으로 수고하는 모습은 자신을 위한 삶은 없고, 남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에게는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이 세상을 욕망에 끌리는 삶을 살아보니깐,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하실 때, 6일 동안 일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쉼’의 개념보다는 ‘누림’의 개념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안식이 없다.’는 의미는 누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처자식도 없는데, 일하는 것을 보니깐,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안식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라고 하였습니다. 시기심이 충돌질하여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누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욕망(欲望)은 그 자체가 소외와 결핍을 느끼는 데서 시작되므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고는 헛되고 무익합니다.
사람을 의지한 사람(9-12)
사람들은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서로가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인 ‘사람 인(人)’자도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9-12)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것들을 좇아 정신없이 살아가지 말고, 주님께 먼저 나아와 마음의 쉼을 얻고, 성령 안에서 연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9-10)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는 해 아래에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형제, 자매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서로 돕는 자가 되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여기서 ‘상’은 어떤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지불되는 대가를 가리킵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혼자서 애를 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하는 것이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겠기 때문이다.”(9)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 할 때 좋은 성과가 있고, 좋은 보상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혼자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함께 도우며 출애굽의 과정을 잘 이끌었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이 우둔하다고 고백하는 모세에게 형 아론이 있음을 언급하시며 마땅히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하십니다(출 4:14-16).
주의 뜻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은 멋진 일인데, 자신이 그 일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18-2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존귀한 자들이며 서로가 한 몸임을 깨닫고, 서로 하나가 되어 주의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혼자가 아니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아들이자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다윗에게 용기를 줍니다(삼상 23:16). 다윗이 십 광야 수풀에 있을 때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려워 말라 말하고, 친구 다윗이 왕이 되며 자기는 다음이 될 것을 아버지도 안다고 말하며 그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좋은 믿음의 친구가 되어 서로에게 힘을 주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무엇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기도 하겠지만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잘 연단 받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쇠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짐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 그리고 형제와 자매가 되어 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세 겹줄은 끊어지지 않음(11-12)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는 해 아래에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연합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약한 자의 연합보다는 약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겠는가?”(현대인성경)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 혼자 누워있으면 춥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게 잘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연합의 힘이 위대함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여기서 ‘끊어지지’는 ‘뽑아내다, 근절하다, 부수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뽑아내는 것부터 뿌리채 뽑아내는 것까지 두루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삼겹으로 묶은 줄의 단단한 결속력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 삼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12)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상황 가운데서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이 강한 전투를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 상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여,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도 능히 돌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한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 세 친구에게 화가 나 있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단 3:16-17). 그들은 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우리 또한 연합하는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성령으로 연합하여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 겹줄이 끊어지지 않음을 기억하며 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영적 전투에 승리하고, 믿음으로 주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바랍니다.
권력을 의지하려는 사람들(13-16)
미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지금도 계속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국제적으로 분쟁 지역을 다니면 평화의 중재자(Peace Marker)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만 있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13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5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16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3-16)
삶의 부조리함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례들 가운데 마지막 문제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추구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롬 13:1). 그런데 사람들은 권력을 주면 권력에 취합니다. 탐욕으로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둘 때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백성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면, 권력이 취해 진정 돌아봐야 할 백성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누리려고 무력을 사용하는 폭군이 되어집니다. 그 마지막이 파멸인 줄 알면서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을 끊기 위해서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는 마병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6-17)라고 하셨습니다. 왕에게 권력이 있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교만해져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 왕은 처음에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왕으로 세움을 받으려 할 때, 그는 아버지 암나귀들을 잊어버려 찾으려 다닙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만사서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 때, “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이며, 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입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삼상 9:21)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점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교만해져 하나님께 폐역한 악한 왕이 됩니다. 이렇게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이 된다면, 그는 자신에게는 차라리 왕이 되는 것보다 그냥 가난한 채 시골에서 농사 짖는 농부로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13).
솔로몬은 요셉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시작하였고, 감옥까지 들어갔습니다(14). 그는 한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는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끝까지 겸손하게 지혜롭게 통치했습니다. 그의 치적(治積)은 이집트 역사에서 토지제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획을 긋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지만 후대에게 많은 영향력과 기억을 오래도록 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왕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출 1:8). 왕에 대한 인기를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왕권을 통해서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전 세상을 다스릴 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모든 것이 헛되고 마음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4,8).
왕권이 무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복됩니다. 권력도 없는 것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치권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나님을 통치권을 관리할 수 있도록 주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왕으로서 받아서 관리해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마가복음 8장 36-37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명성은 덧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적으로 무익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책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그중에 조금 팔린 책은 ‘자기관리’, ‘리더십’, ‘시간관리’, ‘성공학’ 등이 있습니다. 사회적 풍토가 그러다 보니깐, 기독교 서적들도 그런 종류의 책들이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한결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책의 방향들은 자신의 목적(비전)을 이루기 위한 지침서들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합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서 꿈을 이룬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솔로몬은 꿈을 이룬 사람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 중에는 행복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아주 극소수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이룬 꿈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꿈을 이루었지만 자신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보고 시기와 질투합니다. 꿈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삶이 공허합니다. 이 말씀은 꿈을 이룬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만족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권위를 위해 산 사람(1-3)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도 미얀마처럼 권력에 의한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잡아서 투옥시키고 고문하고 심지어는 암암리 사형까지 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포악한 이유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또 무력입니다. 무력이 있는 권력자들의 포악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아무 말 못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분이 끓어올라서 화병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1-3)
죽음으로 끝이 날 유한한 인생의 본질을 살폈던 전도자는 이제 실제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부조리함과 고통에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실례를 들며 설명합니다.
삶의 실상에서 드러나는 부조리와 고통과 관계해서 전도자가 첫 번째로 지적한 문제는 ‘학대(虐待)’와 ‘압제(壓制)’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사회적 배경은 지금부터 3000년 전입니다. 하지만 저도서 4장의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껴집니다. 동물에게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역시 약육강식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솔로몬 당시에도 많이 보았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1)라고 합니다. 학대 받은 자들은 당연히 그 가혹함으로 인해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을 더하는 것은 학대 자체보다 불의가 계속 자행된다는 사실입니다. 학대로 인한 고통은 물론 공의가 행해지지 않는 현실로 인한 절망과 억울함으로 더욱 괴롭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학대를 받으면서도, 힘 있는 자의 권세가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더 힘든 것은, 억울하게 당하는데도 어느 한 사람 위로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학대와 압제가 자행됨에도 그것이 시정되지 않는 불의한 현실의 심각성에 대해 전도자는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는 학대받는 자가 무고히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나 이를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각박하고 악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학대하는 자는 권세를 가진 자로서 공의를 시행할 책임과 의무가 그에게 있음에도 오히려 무고한 자들을 압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 전도자는 이 같은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큰 관심과 책임을 느끼고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어느 한 사람의 의지나 능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계와 절망을 느껴 다음과 같은 토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문제는 인식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길이 없다면 남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학대와 억압이라는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에 고통은 필연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사느니 죽는 게 낫고 그보다는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을 잡고서 무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심리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폭력을 가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목적이 권력이었습니다. 이것을 성취했지만, 누가 자신과 같이 폭력적으로 권력을 빼앗아갈 것 같으니까, ‘자기 보호의 본능’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고생해서 얻은 권력을 누군가가 빼앗아가 가버리면 헛고생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입니다.
이렇게 폭악한 정권을 잡은 지도자 되어서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는 권력을 잡아서 권력의 능력을 누르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역사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얻어서 폭력으로 백성들을 지배하다가 죽어간다면, 그가 잡았던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권력자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권력자를 위한 기도를 권합니다(딤전 2:1-6).
경쟁심을 위해 산 사람(4-6)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 사람들이 불행한다고 하는 이유가 물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과거 조선 시대 왕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행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불행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比較)’ 때문입니다.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실상 가운데 전도자가 지적한 두 번째 사례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경쟁심, 즉 시기심입니다.
4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4-6)
많은 사람은 오늘도 새벽부터 돈을 벌기 위해 삶의 현장으로 달려나갑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수고한 만큼 모든 것을 자신이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면 정말 행복합니까? 사람은 만족이 없습니다. 평생 물질을 쫓아가다가 죽습니다. 이러한 삶을 행복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솔로몬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성취와 업적에 대해 순전한 마음으로 칭찬하고 박수치기 보다는,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신과 비교하여 부러워하거나 시기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이 있습니다. 이웃이 잘되는 것을 못 견뎌 경쟁적으로 일을 벌이고 수고합니다. 다시 말해 시기심은 세상의 온갖 노력과 성취의 근거가 되고 이로 인해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웃집에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을 못 봅니다. 어렸을 때, 이웃집 사람들이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시기(猜忌)를 하던지, 밥그릇 하나까지도 좋으면 안 됩니다. 좋은 밥그릇이 있으면 어느 때는 이웃집의 부엌에 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은 아무리 좋은 것을 성취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좋은 편으로 보면 경쟁심이 발동됩니다. 당사자는 평생 불행합니다. 그들은 계속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5)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진정한 행복은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6)고 권합니다. 이곳에서 “한 손에만 가득하고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란 말씀은 번역을 쉽게 하면, ‘두 손에 가득히 수고를 가지는 것보다, 한 손 가득히 평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다(Better one handful with tranquillity than two handfuls with toil(NIV))’라고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시기심은 세상의 온갖 노력과 성취의 근거가 되고 경쟁심으로 수많은 것을 얻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양손에 수고(고생)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적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은 잘 조절(control)이 잘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기심은 세상의 일에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으로 세상에는 많은 일이 시작되고 성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런 경쟁심은 그 동기가 선한 것이 아니고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줍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도자는 시기 때문에 열심히 수고하며 일하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보다 낮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라는 말은 게으른 자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평가로서 부정적인 말이지만, 전도자는 시기심으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자보다 이들이 못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방문하고 있습니다. 즉 조금 덜 가지고 덜 이루며 평안하게 사는 것이 고통 속에서 경쟁적으로 일해 많이 가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시기(猜忌)에 의한 경쟁심으로 일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그에 관한 결과는 불행입니다. 시기를 통해 당신이 아무리 많이 얻었다고 할지라도 불행할 뿐입니다. 이것은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물질을 위해 산 사람(7-8)
모든 사람은 결국 어떤 것엔가 또 누구에겐가 항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돈, 분노, 혹은 두려움, 자만심, 욕망 그리고 자아에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항할 것입니다.
7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7-8)
솔로몬은 한 가지 헛된 일을 보았습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이 물질을 악착같이 벌어 들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노년에 의지할 것이 돈밖에 없다고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들립니다. 머리에 바늘도 안 들어갈 정도로 구두쇠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종말에는 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생을 물질에 목숨 걸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질이 나를 따르게 만들어야지, 사람이 물질을 따르면 그처럼 추잡한 것이 없습니다.
물질 또한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인간이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피조물에 매이는 것은 그것 또한 우상 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물질이 기준이 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데도 돈입니다. 돈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도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돈 거립니다.
솔로몬은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무엇이 헛되다는 말을 한 것입니까? 물질입니다.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악합니다. 물질만을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악한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당신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 두었습니까? 권력에 목적은 둔 사람은 권력 때문에 초라해집니다. 시기심에 발동하는 사람들은 시기심은 살인까지 불러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둔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망합니다.
피조물을 따르는 사람은 피조물이 우상의 대상이 됩니다. 비록 그것을 우상처럼 모시지 않아도, 삶 자체가 피조물로서 우상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당신을 따르게 하십시오! 피조물을 지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 있으면 두 가지 행동을 합니다. 그 결과는 서로 양극으로 달립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정반대로 하나님의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가장 선한 방법입니다.
솔로몬은 지금까지 행복에 대해 인생이 행한 일을 돌아본 결과 ‘헛된 인생’이라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져있습니다. 수많은 것을 성취함으로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신의 목적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정말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고 시야를 사람에게서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살펴봅니다. 막간을 이용해서 인간의 진정한 목적과 방향을 놓친 몇 가지를 찾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12)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기쁨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면서 누리를 기쁨이 있습니다. ‘소유하려는 기쁨은 하나라면, 나누어 주는 기쁨은 두세 배’란 말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나누면서 연약한 자들이 그것을 누리는 기쁨을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정한 기쁨은 소유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음을 다시 한번 살피게 됩니다.
12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12)
솔로몬은 지금까지 하나님 없는 삶에 대해 어떤 결과를 맺었습니까? 솔로몬이 말하는 ‘해 아래서’란 말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 또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이 다 헛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혼하고 역사를 만들어가고,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모든 일이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새로운 맛에 아름다워 보이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이루어진 일들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저주의 삶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가치 있는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소유’에서 ‘만족’으로 전환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매일의 시간에 기뻐함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선(善)에는 여호와의 기쁨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선행을,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제사처럼 기쁘게 받으시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급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러한 기쁨으로 행하는 선행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기뻐함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헛됨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색다른 축복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많이 소유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작은 것을 가지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하다가 옛날에 묻어둔 수많은 금은보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가치는 수백억 원이라고 가정합시다. 이것을 발견한 것만이 부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처분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이 부자입니다. 묻어두고 그 상태로 두면 있으면 가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쩌면 더 불행할 것입니다. 이 상자를 발견하지 않했을 때는 보물에 대한 걱정 없어서 평안히 잤습니다. 하지만, 발견하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가져갈까봐! 또는 도둑질 당할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하게 되어집니까? 가지고 누릴 줄 알아야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선물(13)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자기 속에만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행복한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3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13)
솔로몬이 발견한 ‘하나님의 선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의 선물은 ‘기뻐하는 것’입니다(12).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은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에 진정한 기쁨이 넘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그 두 번째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고와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순간적인 복일뿐이지 화(禍)로 돌아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다.
예화) 요즘 땅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은 잠이 안 올 것입니다. 개발 정보를 얻어 투기해서 떼돈 벌었던 사람들은, 그들은 대부분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잘못이 이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수치가 드러나자 감당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하여 먹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길이라고 시편 128편에서 말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1-2)
‘수고할 것’이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일에 치인 사람들은 불평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나태한 마음에는 각종 모양의 죄가 자라는 온상이 됩니다. 수고하면서 중간중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을 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처럼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14-15)
하나님께서는 항상 쉬지 않고 사역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종 평상시 하나님 없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당하면, 그렇게 강퍅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의 능력은 한계성이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4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15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14-15)
사람이 행하는 것은 일시적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잊혀집니다. 새로운 것이 없어서 이전에 하던 일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14). 언제나 새로우며 완전한 것입니다.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일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행하는 역사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영원히 있을 것(14a)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일시적인 일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 철저하고 완벽함(14b) : 사람들은 물건을 만들 때 보면, 크기나 분량에서 작거나 크게 만든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드는 일은 너무나 정확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3) 의도적인 계획(15) :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피조물들이 사람의 몸에 완전히 습득될 때까지 참으십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을 통해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사역은 무계획성 있게 진행된 것이라, 아니라 불변적이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을 보면, 두려움, 존경 그리고 겸손한 복종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목도한 사람은 한 명도 예외 됨이 없이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14b)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아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경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는 일을 통해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온전한 자신의 상속자 삼으시는 중심을 두고 계십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전체를 통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비결은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함’입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수고하여 밥을 먹는다 할지라도, 수고 중에 낙을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우리가 행한 ‘선행’은 스스로 ‘공로’가 될 것이며, 그 ‘교제(交際)’는 ‘집단 이기주의’가 될 것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지금까지 세상 가운데서 의미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인생사에 허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15).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은 주기적으로 똑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있던 일을 미래에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직시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에게 헛된 것에 대해서 헛된 줄 알게 하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허무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구원, 온전한 자녀가 됐고, 온전한 상속자가 되도록, 이 모든 수고를 선용(善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하는 만사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보이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 계획을 사모하는 기쁨으로 선을 행하고 먹고 마시며 소중히 교제하고 오늘도 수고 중에 낙을 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사업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도, 공원에서 무료하게 노니는 노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아마, 이것까지도 불공하다면 살맛이 안 날 것입니다. 이렇게 공평하게 주신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건강이나 물질은 다시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한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전반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다닙니다. 열심히 뛰면 어느 정도 뛴 만큼 얻어질 것입니다. 건강을 얻기 위해 새벽 운동을 나갑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 새벽시장으로 나갑니다. 학위를 얻기 위해 새벽 도서관으로 나갑니다. 이러한 수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솔로몬은 전합니다. 인생에는 종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서서 평가받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삶의 목적을 세움(1)
‘삶의 목적’은 바다에 운항하는 배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배가 출항을 했는데 목적지가 없다면, 그 배는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결 따라 흘러갈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인생을 삽니다. ‘될 대로 되라’라는 식의 삶입니다. 험난한 항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1)
전도자인 솔로몬은 전도서의 시작을 ‘헛되도다’라는 외침으로 시작했습니다. 2장에서는 솔로몬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왜 모든 것이 헛된지 가르쳐 줍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져보고, 누려보고, 만들어 보았는데, 마치 하나님처럼 천지를 창조하듯이 모든 것을 따라 해 보았는데, 그것 역시 ‘헛되다’라는 결론을 전합니다.
전도자는 본문에서 인생의 일반적인 삶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인생에 주어진 시간, ‘때’라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왜 인간은 열심히 해도 헛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전합니다. 전도자는 모든 일에는 ‘때’, ‘기한’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다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한여름에 눈이 오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내릴 리 없습니다. 겨울에 반소매 옷을 입을 정도로 따뜻할 수 없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을 향해 ‘철부지’, ‘철없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철없다’라는 ‘시기를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노력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다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때’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밀어붙인다고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와 계획을 뛰어넘는 것은 “범사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는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한은 누가 정했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이 반복되는데, 사람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서 투표해서 반대로 돌린다고 할지라도 될 순 없습니다. 이런 법칙은 누군가는 정했는데, 그 기한을 정하신 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도, 모든 질병도, 사람의 운명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범사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 만물에는 때가 있어서 거슬릴 수 없습니다.
목적을 성취케 하신 분(2-8)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은 그저 자기 자신만 알고 이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하기에 그 계획을 알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때, 그가 중생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2-8)
전도자 솔로몬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인생의 삶을 살핍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어날 경우를 구체적인 예를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거슬릴 수 없는 것들을 나열합니다. 그는 이렇게 14가지의 사람의 때를 기록했습니다. ‘날 때’, ‘심을 때’, ‘죽을 때’, ‘헐 때’, ‘울 때’, ‘슬퍼할 때’, ‘돌을 던질 때’, ‘안을 때’, ‘찾을 때’, ‘지킬 때’, ‘찢을 때’, ‘잠잠할 때’, ‘사랑할 때’, ‘전쟁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주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2)라고 합니다. 사람의 출생을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 자신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출생한 것을 자기 의지대로 출생지, 출생 시간, 출생 가문에 출생하지 않았습니다. 출생을 모른 것처럼, 이제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을 향해 큰 계획을 세우고 출생하게 하셨고, 또 죽게 하실 것입니다. 출생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데,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죽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주장하고, 자기 뜻대로 된다고 믿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잘 태어났고, 잘 살고 있고, 그리고 잘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 우리에게 천하만사에 귀함과 때를 주신 분,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때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파종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꽃을 피웁니다. 가을에 추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사람에게 자연적인 순리를 주셨는데, 그 순리를 따라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으란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크신 분, 때를 주장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40-50세인데 고시(考試)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10여 차례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험을 보는 사람은 헛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명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고시 공부한다고, 주위 사람들만 고달프게 만듭니다. 속단한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는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가령 고시에 합격해도 고시 합격 동기생들이 20-30대 자식뻘 되는 사람들이라 화합도 잘 안 됩니다. 그럭저럭 세월만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생 고시 공부에 다 받치고, 무엇 하나 얻은 것 없이 폐인(廢人)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기에 맞게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기회를 활용하시지 못한 것 다시 한번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많은 것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윤택하게 만듭니다. 이곳에서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 것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질문입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나열해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始期)”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적이고 대립적인 사건들을 나열함으로써 도전과 기회를 줍니다. 시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기회를 인내와 경성으로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으로서 교훈을 전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론(9-11)
세상의 일은 사람들의 수고로 이룬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때를 주장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9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9-11)
1-8절까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노력을 통해 많은 것을 얻습니다. 솔로몬은 그러면 그럴수록 질문이 오릅니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9)라고 하였습니다.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수고 결과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마지막 결론은 ‘인생의 노고’뿐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평생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일들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것 중에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이룬 것들은 영원한 것 중 하나도 없습니다.
솔로몬은 사람의 끝을 보면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노력을 따라 수고한 인생을 본 결과로 하나님께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 대해 주관자는 누구입니까?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일에 대한 수고는 헛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의 처음과 끝인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은 한계점이 있는 한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각을 교정받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능력 있어 보일지라도 피조물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