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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서론

 


선한 싸움을 싸우라

- 디모데전서 서론 -


본 디모데전서는 목회에 있어 연륜이 있는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쓴 격려의 서신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디모데 개인에게 쓴 편지로 그의 어려운 목회 사역을 격려하고 훈계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윤리와 교회의 조직,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이단에 대한 경계, 끝으로 성도들의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더 깊이 디모데전서를 묵상하다보면 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될 것입니다.

 

1. 저자와 기록 연대

⑴ 저자

전통적으로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을 바울의 저작으로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비평학자들은 바울의 저작권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했습니다. 본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기록했다는 사실은 내적, 외적 증거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① 내적 증거 : 저자가 사도 바울이란 것이 가장 먼저 1:1에서 나타납니다. 서신의 어조가 다른 서신들과 일치하며, 서두 인사들도 동일한 기록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갈라디아서 1:1-3; 에베소서 1:1-2; 빌립보서 1:1-2). 바울은 복음의 사명이나 복음의 은혜가 다른 서신과 유사하고(1:11-12; 로마서 1:5,14-17; 고린도전서 1:17, 갈라디아 1:1-5; 에베소서 3:7-12), 자신의 개종에 대한 암시가 바울의 서신에 언급된 것으로 보나 바울의 저작임이 확실합니다(1:13; 고린도전서 15:9; 에베소서 3:8).

② 외적 증거 :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디모데 전후서가 이단자들의 오류를 반박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자들은 이 서신들을 거부한다고 말하면서 본 서신의 정경성을 옹호했습니다.

⑵ 기록 시기

본 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치고, 계속해서 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본 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때를 주후 62-63년으로 본다면 본 서는 주후 63년경에 마게도니아에서 기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까운 장래에 에베소를 방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3:14, 15), 본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⑶ 수신자

이 서신의 수신자는 형식상 에베소 교회에 남아서 사역했던 디모데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 안에서 ‘아들 된 디모데에게’(1:2) 보낸다고 소개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 태생으로서 아버지는 헬라인이요, 어머니는 유대인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사도행전 16:1). 그는 에베소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바울에 의해 에베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 서신은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이 에베소에 남겨 두고 온 디모데를 걱정하여 쓴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2. 주제와 기록 목적

⑴ 주제

본 디모데전서에는 3가지 중심 되는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①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물리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목회하는 에베소 교회 안에는 율법의 선생으로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끝없는 논쟁과 헛된 말로 교리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을 유혹하였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통해 이단의 속성을 나열하면서 말씀으로 물리쳐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종들을 세우시고 사명을 주시며 능력 또한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모데 또한 택함 받은 주의 종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③ 성도들의 정확한 교리를 토대로 믿음과 선한 양심이라는 영적 무기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며 교회를 지켜 나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⑵ 기록 목적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후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곧 돌아올 것을 약속함과 동시에 그곳에 디모데가 사역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약소대로 곧 에베소가 갈 수 없게 되자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겪고 있는 두 가지 고충을 알고 있었습니다.

① 에베소 교회에서 장로와 감독들로 불리던 나이 많고 학식이 풍부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상적인 신앙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로는 많은 문제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이들을 다루는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②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을 왜곡시키는 거짓 교사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따서 사도 바울은 목회의 어려움을 당하고 잇는 디모데를 격려하면서 동시에 이단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고, 운동 선수처럼 신앙 훈련을 하도록 권면하기 위해 본 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3. 특징과 내용 구성

⑴ 특징

본 서의 특징은 첫 번째로 목회서신이라는 점입니다. 즉 본 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의 원리와 처리에 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신이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각 성도들의 영적 성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 서는 개인적인 편지라기보다는 공적인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본 서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에 대한 경계가 반복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바울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영지주의의 분위기가 교회 내에 팽창되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철저한 이원론에 바탕을 두어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라는 두 개의 극단적인 면으로 나타난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본 서는 몇 가지 신학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영광을 찬양하고 있고(디모데전서 1:17),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6:15,16).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디모데전서 1:15)과 그리스도의 인내(디모데전서 1:16), 그밖에 속전으로 자신을 주셨다는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진술(디모데전서 2:5,6)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⑵ 내용 구성

본 서의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디모데전서 1장으로 거짓 교리에 대한 바울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디모데전서 2장으로 예배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중기도의 중요성(디모데전서 2:1-8)과 여자 성도의 지위와 품행(디모데전서 2:9-15)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③ 디모데전서 3,4장으로 교회 지도자와 거짓 선생에 대한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는 감독과 집사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며(디모데전서 4:1-5), 바른 교훈과 바른 규율을 지켜 나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4:6-16).

④ 마지막으로 디모데전서 5,6장으로 훈계와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늙은이와 젊은이, 과부, 장로 그리고 종에 관하여 훈계하며(디모데전서 5:1-6:2), 끝으로 목회자의 자질과 임무(디모데전서 6:3-21) 등을 설명함으로 디모데를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4. 디모데전서의 구조

Ⅰ. 인사말(1:1-2)

Ⅱ. 거짓된 교훈을 경계(1:3-20)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3-7)

     율법의 올바른 사용은 유익(8-11)

     바울에게 주신 은혜(12-17)

     디모데에게 주신 경계의 말(18-20) 

Ⅲ. 일반적인 권면(2:1-15)

     기도에 관하여(1-8)

     여자의 품행에 관하여(9-15) 

Ⅳ. 교회의 제도에 관하여(3:1-16)

     감독과 집사의 자격(1-13)

     교회의 특성(14-16) 

Ⅴ. 경건한 삶에 관하여(4:1-16)

     거짓된 경건(1-5)

     참된 경건(6-16) 

Ⅵ. 교회의 여러 구성원들에 대한 권면(5:1-6:2)

     늙은이, 젊은이, 과부에 대하여(1-16)

     장로에 대하여(17-20)

     디모데에게(21-25)

     종들과 상전들에게(6:1-2)

Ⅶ. 경건한 삶에 관하여(6:3-21)

     불의한 교훈과 경건한 교훈(3-10)

     믿음의 선한 싸움(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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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1-01)


두 증인의 최후 승리

요한계시록 11장 1-13절


오늘날은 교통의 발달로 인해 점점 전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습니다.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비행기들이 아무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항로를 따라 운항합니다. 비행기는 이륙하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 비행기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가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0-11장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적 사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본보기가 11장에 두 증인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상황에 놓입니다.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처럼 권능을 받아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짐승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우상숭배자들은 기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ㄴ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을 보고 우상숭배자 중에 남은 자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성전을 측량(1-2)

종말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이며 사회악이라는 오해가 팽배해집니다. 점점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절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2)

11:1-13은 두루마리 계시(12-14장)의 축소판입니다. 두루마리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가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 단락을 요한의 나머지 환상들과는 두렷하게 구별되는 형식상의 독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장을 인유한 11:1-2은 계시록에서 유일한 상징적 행동으로 예언합니다. 에스겔 4장과 다니엘 11장을 인유한 11:3-13 환상 해석이 아닌 이야기식 예언으로, 비유를 통한 해석입니다.

(1) 성소와 제단 측량(1)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팡이처럼 생긴 갈대를 주면 성전과 거기서 경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사용한 갈대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측량용 자입니다(에스겔 29:6;40:5). 성전 측량은 에스겔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선지적 사역을 위임받은 후(에스겔 3장) 그의 예언 매시지를 구현하는 상징적 행위를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선지적 사역을 위임받은 후에 성전 측량과 같은 일종의 ‘상징적 선지적 행위’를 시행합니다.

(2) 성전 바깥뜰은 짓밟힘(2)

‘성전과 제단 및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은 그들이 보호받음을 상징하고, 반면 측량이 안 되는 성전 바깥마당은 보호받지 못함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관심은 참 유대인(2:9;3:9),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있으므로, 성전은 제사장 백성인 교회와 연관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제사장으로 언급됩니다(1:6). 우선 성전과 바깥마당은 참 성도와 형식적 성도를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보호를 받지만,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은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성전과 바깥마당이 동일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성전이 측량된 것은 교회가 내적으로 보호받음을, 바깥마당이 측량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외적 환난에 노출됨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해석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종말론적 박해를 비켜 갈수 없음을 말합니다. 바깥마당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짓밟힐 것이라는 말은 교회가 받을 핍박을 나타냅니다. 마흔두 달의 기간도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돼지 같은 부정한 동물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시기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에 해당하는 마흔두 달이었습니다(다니엘 7:25;12:7). 따라서 마흔두 달은 종말에 임할 극심한 박해를 가리키는 상징적 수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증인의 예언과 권능(3-6)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은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할 것입니다.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최후의 승리는 아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최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깐 사탄에게 져서 늘 패배자처럼 살지 말고 마음에 힘을 내어 승리자들처럼 살아가고 복음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3-6)

복음을 절할 때 그것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대치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증인이 행한 놀라운 이적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두 증인의 증언(3-4)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두 증인은 1260일을 예언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마흔 두 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마흔 두 달 동안 교회는 능동적으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두 증인은 중인으로서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중인이 둘이라는 것은 자격을 갖추었음을 상징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증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증인 혹은 세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신명기 17:6;19:15). 베옷은 이사야와 선지자가 입던 옷입니다(이사야 20:2).

‘두 증인’은 또한 ‘두 감람나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등잔대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에 대해 말하는 스가랴 4장과 연관됩니다(스가랴 4:3). 여기에서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학개 1-2장; 스가랴 4장),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과 왕 같은 역할을 하는 두 증인, 즉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불립니다(1:6;5:10). ‘두 증인’은 ‘두 촛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므로(1:20), 두 촛대인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의 권능(5-6)

권세를 받은 두 증인이 예언하는 동안 누구도 그들을 해하지 못합니다. 두 증인에 대한 묘사에는 엘리야의 이미지와 모세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리는 것과 그들에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열왕기상 17:1; 열왕기하 1:10,12). 두 증인이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과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는 것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연상시킵니다.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의 권세를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두 증인의 죽음(7-10)

고난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교회가 얻을 영광은 곧 주님이 받으신 영광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고, 마치 예수님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 참 증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성실하게 계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7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7-10)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세속의 힘에 의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적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원수의 공격이 강할수록, 우리에게 반드시 보장된 영생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두 증인은 핍박으로 순교를 당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 두 증인의 죽음(7-8)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전쟁을 일으켜 두 증인을 죽인다는 것은 교회가 박해와 순교를 당함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승리하지만, 환난을 겪습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은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영직 세력을 가리킵니다. 대적들은 두 증인을 너무나 증오한 나머지 두 증인의 시체를 장사하지도 못하게 막고, 오히려 축제를 즐긴다. 사흘 반이라는 기간은 3년 반이는 박해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의 수치(9-10)

두 증인의 시체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 불리는 큰 성, 곧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의 길에 방치될 것입니다.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죄악의 도시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여 재앙을 받은 나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표현에 근거해 큰 성을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큰 성은 로마를 가리킵니다(17:18). 신약성경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예루살렘과 로마는 완전히 상호배타적인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두 증인의 부활(11-13)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받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그들은 가장 불쌍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약속인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세상의 어려움은 잠깐이지만, 내세에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난을 대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1-13)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듣고 믿는 자들이 구원 받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주님의 몸인 교회는 고난을 당합니다. 두 증인은 세상의 멸시를 받고 순교를 당합니다. 성도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1) 두 증인의 부활(11)

세상 사람들이 만끽하는 축제는 단기간, ‘3일 반’에 끝날 것입니다. 이 말은 증인들이 짧은 기간만 수치를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3일 반’은 증인들이 힘 있게 증언한 1260일에 비하면 대단히 짧은 기간입니다. ‘3일 반’이 지나면 세상 사람들이 증인들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3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가 그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가 하나님의 영의 기운으로 살아나 거대한 군대가 되었듯이 말입니다(에스겔 37:10).

(2) 두 증인의 승천(12)

요한은 여기에 두 증인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용을 첨가합니다(12a). 사흘 반 후에 두 증인은 부활하고 승천합니다. 두 증인의 부활로 인해 대적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두 증인은 원수들의 목격 하에 승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증언 사역을 인정하셨음을 암시합니다.

(3) 열방이 주께 돌아옴(13)

큰 지진으로 인해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사람 7,000명이 죽는 것은 상당한 피해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참 회개를 의미하는지, 단지 두려움의 표시인지에 대한 해석은 평평하게 갈립니다. 14:6~7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표현은 참 회개를 의미하므로, 여기에서도 참 회개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 타당해 보입니다. 둘째 화가 지나갔으나 셋째 화가 속히 올 것이라는 진술은 여섯째 나팔 재앙이 끝났고 일곱째 나팔 재앙이 곧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9:21에서 끝났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어떤 영광을 받으셨던가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대로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보면 결국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이 광야와도 같은 인생길을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걸어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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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0-01)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사명

요한계시록 10장 1-11절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 침을 받지 않은 자들은 결국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진리를 전함으로써 사람들이 구원 얻는 길을 알게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먼저 단 말씀을 늘 먹어야 합니다. 또한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나팔 심판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왜 우상숭배자들은 그토록 재앙을 받아도 회개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회개하게 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심판이 아닌 신실한 증인이 답입니다. 우레 심판은 취소됩니다. 재앙으로는 회개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어린양이 인을 뗀 두루마리를 요한이 삼키고, 신실한 증언을 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힘센 다른 천사와 두루마리(1-4)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와 심판의 목소리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당신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애타는 부르짖음을 잘 듣고 계십니까!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영혼을 살리는 생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의 양식을 기쁨으로 먹고, 인생의 진리와 가치관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영접한 것을 말합니다.

1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3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4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1-4)

본문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사이에 막간 역할을 한 삽입구에 해당합니다. 이 10:1-11:14까지 삽입구로, 지금 설명하려는 것들이 확인과 강조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삽입구를 기록해야 할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을 다시 확인시키며, 강조하는 차원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1) 힘센 다른 천사의 모습(1)

요한계시록 8장과 9장에서는 첫째 나팔 재앙부터 여섯째 나팔 재앙을, 11:15-19에서는 일곱째 나팔 재앙을 묘사합니다. 그 사이에 낀 요한계시록 10장에서는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힘센 천사가 등장합니다. 구름, 무지개, 태양, 불기둥 등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천사에게 부여된 초월적 위엄과 권능을 나타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와 대조적으로 이 힘센 천사는 오른발로 바다를,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왼발로 땅을 밟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악한 세력에게 속한 영역을 이 힘 센 천사가 제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 세계에 걸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걸쳐 실현됩니다.

(2)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2)

천사의 손에는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이미 펴 놓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두루마리와 5장에 등장한 두루마리가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5장의 두루마리와 달리 10장의 두루마리는 작습니다. 5장의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지만, 10장의 두루마리는 펼쳐져 있습니다. 5장의 두루마리는 어린양이 받지만, 10장의 두루마리는 천사의 손에 있습니다. 두 두루마리의 관계를 어떻게 보든, 5장의 두루마리는 10장 이전의 계시와 연관되고, 10장의 두루마리는 10장 이후의 계시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장에 등장한 봉인된 두루마리가 계시의 은밀성을 나타낸다면, 10장에 등장하는 열린 두루마리는 계시의 공개성을 암시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22:10). 즉, 종말론적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계시가 점점 더 공개성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힘센 다른 천사의 행동(3-4)

작은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일곱 우레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요한이 일곱 우레가 말한 내용을 기록하려 하자 기록하지 말고 봉인하라는 말이 하늘에서 들립니다. 아마도 이것이 심판의 전부가 아니고, 더 완벽한 심판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은 일곱 천둥이 말을 했다는 사실만 기록할 뿐, 그 말의 내용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일곱 우레는 모종의 종말론적 재앙과 연관될 것입니다. 일곱 우레라는 표현 자체를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우레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세 종류의 재앙 외의 재앙에 해당할 것입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이 인봉되었다는 것은 일곱 우레의 재앙이 취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재앙 일부가 왜 취소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본문에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종말론적 환난의 날들을 감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24:22). 천사는 창조주를 향하여 지체하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합니다(6). 이 말은 일곱 우레가 말한 재앙을 취소함으로써 종말론적 사건들을 신속하게 진행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예고(5-7)

하나님께서는 복음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지체하지 않고 확실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지체하지 않고 복음에 약속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은 자는 말씀이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쓰디쓴 고통과 아픔도 감당해야 합니다.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경험하고,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합니다.

5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5-7)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대로 성취해 나갑니다. 천사에 대한 장황한 소개는 이 단락에 계속되는 선언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천사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엄숙히 맹세하면서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합니다.

(1) 천사의 맹세(5-6)

이 힘센 천사는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창조주 하나님께 지체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이 심판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기록하지 않아도 되므로 종말의 완성은 그만큼 가까워진 셈입니다. 오른손을 드는 것은 맹세할 때의 몸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자 그 종말을 완성하는 심판주입니다. 이 천사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 심판의 예언이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7)

그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연관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 지금 드러난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입니다(로마서 16:25-26).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복음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심판을 의미합니다. 일곱째 나팔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복음은 완성될 것입니다.

 

만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8-11)

불철주야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하기에 힘쓰고 있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자가 없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게 되어 결국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삶에 적용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8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8-11)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의 운명에 관한 메시지기도 합니다.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받을 종말론적 심판은 요한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힘센 천사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했다면, 이제부터 요한 자신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 개인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11장에서 나오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1)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8-10)

‘두루마리’는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다시 예수님에게서 천사에게로, 그리고 천사에게서 요한에게 전달됩니다. 요한이 힘센 천사에게서 그 두루마리를 받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났던 음성은 요한에게 천사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그 책을 주면서 그것을 먹으라고 요구합니다. 요한은 그 명령에 천사에게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먹었습니다. 천사가 시킨 대로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행동은 그 책에 담긴 메시지를 그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선지자적 메시지에 몰입함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에스겔 2:8-3:3). 그 책은 배에서는 쓰지만 입에는 달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순서적으로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고 정상적인 순서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에스겔 3:3), 천사가 순서를 바꿔 말한 것은 그 책에 담긴 기대 밖의 내용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배에 쓴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을 말하는 말씀은 달지만, 박해를 말하는 구절은 씁니다. 또한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는 말은 계시를 받는 과정은 달콤하더라도, 그것을 소화하는 과정은 힘듦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과 비교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 에스겔이 말씀을 전하면서 겪었던 경우와 같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단순히 지적 전달에 그치지 않고 가슴을 통해 내면화하는 힘든 과정을 거질 때, 사람들에게 더 권위 있게 다가갈 것입니다. 이 땅에 고통이 임한 후에 새 예루살렘이 도래한다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2) 세상에 예언하라는 명령(11)

요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하여 말씀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그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다시 예언한다는 것은 2장과 3장을 통해 요한이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예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와 교회들이 감당해야할 사명, 증거의 사명입니다.

그 예언의 사명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심판의 내용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 중인 요한에게 하나님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져다 먹고,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에게 다시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시 냉소와 조소와 거절과 핍박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가기 전에 먼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열국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상황에서 나온 에스겔 2:9-10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예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세상 임금들 앞에서 전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내용에서도 본문의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0:18). 제자들은 ‘관원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마가복음 13:9). 이것은 구약성경(시 119:46)에사도 확증되고, 사도 바울의 일생에서도 검증된 것입니다(사도행전 9:15;25:13-26:32;27:24). 요한이 전할 말씀은 교회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모든 생명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꿀같이 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또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쓰디쓴 고통이 온다는 것을 알고 감당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맗씀을 체험한 자는 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의 쓴맛과 단맛을 체험하고,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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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9-02)


여섯째 나팔 재앙

요한계시록 9장 13-21절


 세계 곳곳에서 해일, 지진, 자연재앙 그리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이러한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린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펴서 준비된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항상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로 치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들은 준비되지 않아 도적같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인 악마들은 불신자를 심판하는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 첫째 화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더 큰 둘째 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섯째 나팔 심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첫째 화에서 죽음은 면했습니다. 이제 전쟁을 통한 죽음의 재앙이 다가옵니다.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은 더 강퍅해질 것입니까? 회개할 것입니까?
 

여섯째 나팔과 네 천사(13-15)

우리는 세상을 믿으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잘해주다가 쓸모없으면 가차 없이 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한된 시간과 건강, 또 소유를 가졌습니다. 인생은 무한정 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디에 충성하고, 무엇으로 행복을 여기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결정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예배하고, 누가 당신의 생명을 생명 되게 한다고 믿고 있습니까?
13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13-15)
첫 화라고 일컬어진 다섯째 나팔에는 황충을 사용하여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심판한 대상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하나님께는 배교하고 불순종한 자들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이어 역시 ‘화’라고 불리는(8:13) 마지막 두 나팔이 뒤따릅니다. 
(1) 여섯째 나팔과 제단의 음성(13)
여섯 번째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나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금 제단의 네 뿐에서 음성이 나온다는 말은 뒤이은 사건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모든 일이 진행됨을 암시합니다.
‘제단’은 앞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한 곳으로 성도들의 기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6:9-11). 또한 ‘금 제단’은 천사가 금 향로에 많은 향을 받은 후에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 앞으로 드린 곳이기도 합니다(8:3-4). 이런 일련의 모습은 여섯 번째 재앙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금 제단에서 음성이 나와 심판을 시행되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아래 진행되는 종말의 역사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종말의 때를 살아갈 때 더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풀려난 네 천사(14-15)
금 제단에서 나는 음성이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소리가 들립니다. 언뜻 이 모습은 ‘네 천사’는 땅 네 모퉁이에 서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7:1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7장의 천사들은 땅에 서 있는 반면에, 9장의 천사들은 유브라데 강에 결박당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20:2에서 천사는 사탄을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결박했습니다. 따라서 9장의 네 천사는 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네 천사에 이어 2억 명의 대규모 마병대가 등장하는 것으로 아마(16), 이 천사들은 마병대를 이끄는 악의 세력으로 보입니다. ‘네 천사’는 선한 천사일 수 있고, 타락한 천사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천사입니다. 그가 결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결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제어를 받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점에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9:20-21에 나타나듯이 다섯째 나팔 재앙뿐만 아니라 여섯째 나팔 재앙도 악인들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악인들에게 극도의 고통을 안기지만, 여섯째 나팔 재앙은 악인들을 죽입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 출애굽 열 재앙의 이미지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네 천사가 죽일 사람 3분의 1은 과반은 못 되더라도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이것은 넷째 인의 재앙으로 인해 사망에 처한 땅 4분의 1보다 큰 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숫자의 문자적 의미에 너무 연연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 차이는 종말론적 재앙이 점점 확대되고 강화됨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강 건너편에서 오는 마병대(16-19)

심판을 불러온 죄인들은 대부분 완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면서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그만한 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자신에게는 그러한 심판이 지나가길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회개하길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회개치 않으면 다양한 심판의 도구들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16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16-19)
회개하면 소망이 있겠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멸망당합니다. 멸망당할 자들은 하나님의 인이 없습니다. 그 인이 없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강력한지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동원된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마병대의 수(16)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 즉 2억 명에 달합니다. 여기에서 2억에 달하는 실제 군대를 찾으려는 시도는 그의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숫자들의 상징성에 비추어 볼 때, 2억이라는 수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큰 수로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병대의 초자연적인 모습과 상상할 수 없는 큰 규모의 군대는 이들의 악마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의인을 보호하고 악인들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무수한 군대입니다. 이들의 활동은 천사들이 부추겨서 일어납니다(에녹1서 56:5-8). 홍수의 때에 와서 심판과 파멸을 가져오는 징벌의 천사들입니다(에녹1서 66:1).
(2) 마병대의 모습(17)
요한은 환상가운데 본 군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유그라데 강 건너편에 있던 파르티아 제국의 마병대 모습으로 용맹스런 전설을 이용하여 시각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나왔던 황충과 비슷합니다. 둘 다 사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 탄 자들은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호심을 차고 있었습니다. 사자 머리 같은 머리를 한 말들의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용맹했던 파르티안 제국의 기마병들을 연상시켜 줍니다. 기마병들이 호심경을 차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말들의 머리가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온다는 묘사는 이 기병대가 인간 기병대가 아닌 초자연적인 성격을 띠는 군대임을 암시합니다.
(3) 마병대의 재앙(18-19)
이 재앙으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와서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재앙은 소돔과 고모라가 받은 심판과 출애굽 열 가지 재앙을 연상시킵니다(창세기 19:24). 소돔과 고모라와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이번에도 로마제국, 사탄의 나라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귀, 짐승, 거짓 선지자,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라는 자들, 그리고 악인들은 불과 유황으로 고통 받습니다(14:10;19:20;20:10;21:8).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는데, 뱀 같은 꼬리에는 사람을 해치는 머리가 있습니다. 말들의 입에 있는 힘은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다고 합니다. 꼬리에 있는 힘에 대해서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뱀은 사탄의 다른 이름이므로(12:9;20:2), 뱀 같은 꼬리라는 표현에서 말들의 악마적 특성을 유추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앞서 황충은 전갈 꼬리에 사람을 해하는 힘이 있었습니다(9:10). 입에는 나오는 능력은 사람을 죽이지만, 꼬리는 사람을 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섯째 나팔 재앙과 여섯째 나발 재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두 나팔 재앙의 묘사는 앞선 네 나팔 재앙에 비해 구체적입니다. 여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마병대는 다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전투용 발 모양의 황충을 연상시킵니다. 황충과 마병대 모두 초자연적이고 악마적 세력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첫째부터 넷째 나발 재앙과 달리,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재앙은 모두 악인들을 괴롭히거나 죽인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생존한 우상숭배자들의 반응(20-21)

우상숭배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악한 영의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반역하고 우상 숭배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런 그들의 완고한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증명해 줍니다.
20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20-21)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사람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자초합니다. 이 심판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회개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심판에 대한 결과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 회개하지 않는 행동(20a)
여섯째 나팔 재앙을 통해 삼분의 일이 죽었고 삼분의 이가 살아남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라고, 그들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살아서 회개할 기회를 주어졌지만, 큰 재앙에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보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 재앙은 다섯째 나팔 재앙과 마찬가지로 악인들에게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 우상숭배(20b)
그들의 행동을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무서운 심판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도리어 금, 은 그리고 돌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깁니다. 살려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하기보다는 살아남은 자신들을 칭송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하지 않는 행동(21)
우상숭배의 결과로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은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이들은 우상 숭배를 계속했습니다. ‘손으로 행한 일’은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함을 말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금, 은, 동, 목석이기 때문에 보지도 목하고 듣지도 못하고 다니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궁극적으로 우상 뒤에 있는 여러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악인들은 살인과 음행과 도둑질 같은 부도덕한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복술’은 신비한 약을 써서 마법이나 주술을 부리는 행위로, 종종 우상 숭배와 연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한 심판의 시기를 저울질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고 잘못에서 돌이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지 않은 굳은 마음을 용서하시길 기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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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4-02)

   


사도 바울의 마지막 부탁

디모데후서 4장 9-22절


바울의 사역은 탄탄대로가 아닌 여러 고비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셨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를 돕는 손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움과 외로운 과정도 있었습니다. 지금 편지를 받는 디모데의 도움이 절실한 정도로 그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임한 바울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말합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외로움 가운데 있던 바울은 죽기 전에 디모데를 한 번 더 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를 대비해서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과 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탁함(9-13)

‘교인은 많지만 성도는 적다.’란 말이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의 성도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어려움을 통해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됩니다. 알곡은 남아있지만, 쭉정이는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도 동일했습니다.

9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9-13)

고난이 닥쳐오자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떠났습니다. 쓸쓸하고 외로움 가운데 있던 바울은 차디찬 로마 감옥에서 최후에 순간을 기다리는 노사도의 숙연함이 잘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디모데를 한 번 보기를 원했습니다.

⑴ 모두 떠나고 홀로 있는 바울(9-10)

바울은 노년에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힘 있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갇혀 더는 세상적인 소망이 없게 되자,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바울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떠난 자들 중에는 바울을 배신한 자들도 있고 바울이 보낸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가만 그와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바울은 죽기 전에 디모데를 보기 원하는 마음을 피력합니다. 바울의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는 말에서 디모데를 보기 원하는 간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두고 바울에게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속히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부탁합니다.

 

10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바울은 외로운 가운데 있습니다. 젊어서 복음을 위해 담대하게 일했던 바울도 이제 죽음을 앞두고 연약한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홀로 된 것도 외로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일입니다. 바울을 배신한 것은 믿음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지만,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습니다.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간 것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데, 그것은 믿음을 버리고 과거의 세상적인 삶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데마’가 복음을 전하다가 겁을 먹고 데살로니가로 도망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임무를 부여하여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디도’는 원래 그레데 섬에 남겨두었으나 얼마 후에 그를 불러들이고 아테마를 대신 그곳으로 보냈습니다(디도서 3:12),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고 대신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에게로 오게 했습니다(디모데후서 4:12)

⑵ 마가와 함께 책을 가지고 오라(11-13)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마가는 요한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한때 바울을 실망시켰지만 지금은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때에 바나바와 함께 떠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마가는 밤빌리아에서 중도 하차하여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나바는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바울은 중도에 하차한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바나바와 크게 다툰 후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육로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사도행전 15:36-41). 그러나 그 후에 바울과 마가는 서로 화해하고 마가는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골로새서 4:10; 빌레몬 24). 전승에 따르면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으며,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는 한 번의 실수를 거울삼아 신실한 복음의 일꾼으로 거듭났으며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형제이며 신실한 일꾼입니다(에베소서 6:21; 골로새서 4:7). 두기고는 아시아 출신이었기에, 디모데를 대신해서 에베소로 보낸 것은 적절한 선택입니다(사도행전 20:4). 바울은 두기고가 도착하는 대로 디모데가 오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들러서 겉옷과 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이는 바울이 스페인에 다녀온 후 그레데와 에베소를 거쳐서 로마로 돌아올 때 두고 온 것들입니다. 책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성경일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떠나고 외로운 때에 주의 말씀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바울을 대적한 자들(14-18)

우리가 항상 바라봐야 할 이는 주님 한 분입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 때, 어떤 사역이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주님은 또한 감당할만한 능력까지 주실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힘과 건강을, 어떤 이에게는 물질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주셨습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나라를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4-18)

교회 안에 있으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심하게 반대하여 어려움을 준 알렉산더를 특히 조심하라고 경계합니다. 그의 영향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 다 알고 계시고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⑴ 알렉산더를 주의하라(14-15)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악한 대적자를 주의하라고 디모데에게 경고합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거짓 교사입니다. 본문에서 ‘해를 많이 입혔으매’란 ‘밀고하다’란 어원입니다. 주석가들은 바울이 감옥 두 번 투옥되었는데, 그 중에 2차 투옥은 알렉산더의 밀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반대하도록 주동했습니다. 그는 얀네와 얌브가 모세를 대적했던 것처럼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믿음과 양심을 버린 배신자이며, 급기야 바울은 그를 출교 조치했습니다(디모데전서 1:20). 그러나 여전히 에베소 교회에서 영향력은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세를 대적했던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셨듯이, 알렉산더도 심판하실 것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도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⑵ 재판정에 홀로 서게 된 바울(16-18)

거짓 교사 알렉산더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던 바울은, 다시 자신의 외로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처음에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바울을 변호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바울을 버리고 떠나고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내리고 떠났다’는 말은 10절에서 데마가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과 믿음을 배신하고 떠났듯이, 이들도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배신하고 떠난 자 때문에 심히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허물을 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바울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알렉산더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주께서는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참된 친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떠나 홀로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주께서 함께하셨기에 담대하게 감옥에서 복음을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방인 권력자와 재판장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말은 아마도 당장 죽임을 당하지 않고 디모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일 것입니다.

바울은 결국 감옥에서 순교하게 되지만, 그들 앞에서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셨습니다. 바울은 또한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순교를 앞두고 끝까지 은혜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끝인사(19-22)

인생의 마지막에 기억나는 사람들은 역시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생애 가운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배려하게 하시고, 누군가의 생애 최후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소중했던 이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19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19-22)

아무도 복음을 위한 바울을 변호해주지 않고 떠났지만 바울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변호인이 되어 바울 곁에 서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굴복하지 않고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함(19-20)

바울은 마지막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글라우디우스 시대에 로마에서 쫓겨난 후 고린도에 와서 바울과 함께 텐트를 만들었으며, 나중에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가서 거기서 머물렀습니다(사도행전 18:2).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을 사람들’(로마서 16:3-4)이라며 바울이 극찬할 정도로 특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라스도’와 ‘드로비모’는 바울의 동역 자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바울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특히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고 왔다고 말하는데 그를 향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⑵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디모데에게 안부(21-22)

마지막으로 바울은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한 번 더 디모데를 독촉합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의 성도들 중에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의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아마도 디모데가 이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겨울 전에 속히 오라는 말은 두 가지 필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겨울이 오기 전에 바울의 겉옷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둘째, 겨울이 되며 항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 전에 속히 출발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복음의 일꾼들은 끝까지 곁에서 변호해주시고 증인이 되실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도 힘이 되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현실에서 실제적인 필요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여 끝까지 감당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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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4-01)


디모데에게 하는 바울의 명령

디모데후서 4장 1-8절


‘유언’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긴 부탁입니다. 당신은 ‘유언’을 남긴다면 무슨 말을 남기고 싶습니까? 바울에게는 오늘 본문이 사실상 유언입니다. 가장 남기고 싶은 것들,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남겼을 것입니다. 가장 미더운 사람에게 남겼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앞부분 3:16-17에서 성경의 교육적인 기능과 능력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그것은 복음 선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그 일을 감당해왔지만, 이제 디모데가 이어받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명령(1-5)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주는 유일한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바르게 하여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1-5)

복음 전도자는 말씀을 들은 청중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심판하실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청중으로 모시고 받은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그 나라 백성에 어울리도록 전하라고 엄히 명령합니다.

⑴ 말씀을 전파하라(1-2)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사람을 바르게 하여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디모데는 마땅히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선포 사명과 명령을 엄중히 부여하고 있습니다. ‘엄중하게 명령한다’는 것은 맹세와 함께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가 공정하게 규칙을 지키면서 경기하겠다고 선서하듯이, 바울은 디모데가 맹세하게 하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맹세를 할 때는 그걸 증명할 어떤 사람 앞에서 하든지 혹은 무언가를 걸고 합니다. 바울은 맹세의 신실함을 증거할 증인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명령한다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사명의 엄중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은 디모데가 선포하는 복음이 지금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며, 복음의 미래지향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입니다(디모데후서 4:18). 그러므로 디모데는 이 세상에서 복음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2)라고 다섯 개의 명령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디모데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복음 선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힘쓰라.’는 명령은 항상 준비된 상태로 있으라는 뜻이며, 언제든지 복음을 선포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이 준비 태세는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선포하기 좋은 때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때는 아마도 3-4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경책하라는 명령은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여 교정하라는 뜻이 있는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행위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책망하라’는 명령은 좀 더 일반적인 불순종에 대한 책망입니다. 마지막으로 ‘권하라’는 명령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성도들이 행해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3:16에서 말한 성경의 역할에 대한 재설명입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에 대한 바울의 명령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 연관성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여 가르치되, 잘못된 길을 가는 자들은 경책하여 돌이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책망하여 올바른 길을 가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⑵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할 이유(3-4)

바울은 2절에서 명령한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떼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복음을 전하고, 경책하고, 책망하여, 권면해야 할 이유는 앞으로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붙들기 싫어하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말세의 특징으로 사람들이 더욱 탐욕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디모데후서 3:1-5). 탐욕적인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줄 거짓 교사들의 허탄한 이야기를 더욱 듣기 좋아하고, 그것을 따라갈 것입니다. 허탄한 이야기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에 부합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것은 가려운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것처럼 탐욕적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⑶ 신중하게 직무를 감당하라(5)

바울은 노파심에서 다시 디모데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성도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디모데 자신이 허탄한 이야기에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신중하라’는 명령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라가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고난을 받으라’는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견디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부러 고난을 택해서 받을 필요는 없지만 고난이 있을 때는 견뎌야 됩니다. 고난을 견디라는 것은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것입니다. 신중하게 고난을 견디면서 복음 선포의 직무를 다하라는 명령은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아주 적절한 권면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도들이 잘 속았으며, 그들은 무정하고 모함하며 사나운 자들이었기에 디모데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중함과 인내입니다.

 

바울의 유언적 고백(6-8)

사역의 마지막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느냐가 아니라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두려울 것이 없고,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심판이 있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유언 같이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6-8)

바울은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후회 없이 싸웠습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신앙의 경주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였습니다. 네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된 재판장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습니다.

⑴ 바울이 죽음을 예감함(6)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모든 것은 사실 지금까지 바울이 해왔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이제 자신의 사역을 디모데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진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나온 표현인데,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자신의 삶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⑵ 바울의 삶에 대한 회고(7)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전력투구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운동선수의 삶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전제로 부어진 삶의 비유가 헌신과 희생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운동선수의 비유는 5절에 있는 ‘네 직무를 완수하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선한 싸움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라톤 경기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모든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운동 경기는 법대로 해야 하는 것인데, 바울이 지켜야 했던 법은 믿음입니다.

그는 믿음을 지키면서 모든 경기를 마쳤기에 승리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믿음을 버린 자들입니다.

⑶ 의의 면류관을 기대함(8)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회상한 바울은 이제 자신 앞에 놓여있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기에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경기의 심판자는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디모데후서 4:1). 그는 의로운 재판장이므로 공정하고 의롭게 판단하십니다. 이 세상의 심판들은 뇌물에 매수되어 불의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지만, 주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사실 바울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많은 재판을 받으면서 불의하고 억울한 판결을 받은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정하게 판단하셔서 지금까지 바울이 당한 모든 억울함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에게 감옥은 옹골지고 알찬 신앙으로 창조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을 소망을 향해 비상하는 도약대였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누리는 참된 ‘자유’와 ‘해방’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는 자신의 유언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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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3-02)

 


경건하게 살아가야할 그리스도인

디모데후서 3장 10-17절


그리스도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향기가 있습니다. 종종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났는데, ‘혹시 목사님이 아니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를 아십니까?’라고 반문하면, ‘아니요! 외모에 풍기는 모습이 목사님 같아서 묻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의 풍기는 것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장로님의 풍기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사님은 집사님으로서 풍기는 외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바울은 말세에 일어날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행위의 경고하고, 그들이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한 후, 이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가르치며 살아왔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의 행위에서 돌아서라고 했는데, 이제 디모데가 따라야 할 참된 모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을 본받는 경건한 자가 되라(10-13)

본질을 추구하는 삶,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결과가 당장 나오지 않더라도,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씀이 칭찬하면 칭찬을 받고 책망하고 바로 잡아주는 것을 따라 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건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10-13)

거짓 교사와는 달리 바울은 진리 안에 거한 자신의 삶을 제시합니다. 바울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 그의 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삶이 그가 진리의 사람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부귀와 명예 대신에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⑴ 고난 중에 인내한 바울을 기억하라(10-11)

거짓 교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행위에 대해서 지적한 후, 바울은 이제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0-11절에는 바울의 삶에 대해서 묘사하는 아홉 개의 목록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삶에 관한 열여덟 개의 목록과 대조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교훈과 행실이 어떠했는지 디모데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교훈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교훈뿐만 아니라 행실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바울의 행실은 자신이 가르친 복음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의 위선적인 행위와 대조됩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뿐만 아니라 속에 감주어진 의도와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처럼 성도들을 속이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의도와 믿음은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바울에게는 진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과 인내와 사랑은 목회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덕목입니다(디모데후서 2:22). 거짓 교사들은 무정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지만, 바울은 핍박 가운데 인내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런 일들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극심한 핍박과 고난으로 사망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하셨던 일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만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은 바울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삶을 본받는 것은 디모데에게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바울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4:11; 데살로니가후서 3:7,9)

⑵ 경건한 자들에게는 핍박이 따라온다(12)

디모데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경건하게 살려는 자들에게 고난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핍박과 고난의 삶을 일반화해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그런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핍박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놀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경건한 삶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경건한 삶이란 뜻입니다. 예수 밖에는 경건한 삶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셨듯이 바울도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제 디모데가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담대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⑶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의 특징(13)

바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박해를 받은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세에 악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12절과 경건한 사람과 악한 자들이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악한 자들’은 일반적인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역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이는 자들은 악한 자들 중에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속이는 자들’이란 말에는 마술사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8절에서 언급한 얀네와 얌브레를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속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12-13절의 경건한 자와 악한 자의 바울과 거짓 교사들의 대조인 셈입니다. 바울은 경기는 자이지만 거짓 교사들은 속이는 자들입니다. 경건한 자의 특징은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이지만, 속이는 자들은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에 속하여 경건한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으로 그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이 라고 경고합니다.

1절에서 말한 것처럼 비록 지금이 말세이지만, 고통이 극에 달하는 말세는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데, 이것은 불의한 자들이 서로 물고 뜯으면서 다투는 악한 습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디모데후서 2:24).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14-17)

성경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인격을 담아 기록하였으니, 그 말씀 앞에 나아가서야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4-17)

성경 없는 세상에는 ‘선’의 기준이 없습니다. 성경은 바른 삶의 기준을 전달합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빛의 열매는 빛의 자녀요 성경의 사람인 그리스도인만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태도를 가지고 살고 권고합니다.

⑴ 배우고 확신하라(14-15)

이 말세에게 악한 것들이 득세하고 거세집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고 속지 않으려면,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명령법인 것을 보면 지속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잘 속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미 배우고 확신하는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과 확신 가운데 계속해서 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미 배운 지식만으로도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핍박에 대한 두려움과 복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그 확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거대한 악한 세력과 맞서 싸울 능력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미 배운 것으로 인해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합니다.

첫째, 디모데는 자신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를 가르친 자들이 믿을 만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를 가르친 스승은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와 바울 자신입니다(디모데후서 1:5-6). 이들은 디모데를 속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기에 디모데는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확신해야 합니다.

⑵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16)

디모데가 확신할 수 있는 둘째 이유는, 그가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입니다. 성경은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깨닫게 된 성경 지식은 디모데에게 참된 구원의 지혜를 주는 것이기에, 디모데는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하나님 이 바람을 불어 넣으셨다는 뜻인데, 마치 태초에 인간을 만드신 후에 그 코에 바람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생명을 주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글자 모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의로운 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능력입니다.

⑶ 성경이 기록된 목적(17)

성경이 그러한 교육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완전히 무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선을 행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주십니다. 성경은 단지 어떤 교리적인 지식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할 능력까지 줍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모든 도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함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주는 것도 성경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세에 말씀을 붙잡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타락해 가는 말세에 바른 길을 제시한 것은 성경뿐입니다. 성경에서 배우고 성경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를 분별할 수 있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경건의 능력 있는 자로 빚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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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3-01)

   


마지막 때의 나타나는 현상들

디모데후서 3장 1-9절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세에 불의한 자들이 행하는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넘어지지 않도록, 그들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떠나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죄에 대해 어떠한 타협도 안 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속성 상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서 돌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죄를 이기는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친분관계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제안한다며 또 그런 환경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영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고 가르치기를 잘하는 종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모습에 대해서 폭로합니다. 디모데는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들로부터 자신과 성도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고 상기시킵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불의한 일들(1-5)

지금은 끔찍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좀 더 편하게, 좀 더 성취하고 누리며 살겠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위장된 거짓 만족이요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은 분별력과 순결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1-5)

어지러운 말세에 성도답게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 고통은 진리를 거절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선을 디모데도 공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진리 편에서 거짓 진리가 주는 고통을 기꺼이 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두려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어떤 모습이 성도답지 않는 모습으로 피할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⑴ 종말에 대한 예언(1)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대의 특징을 ‘고통의 때’로 묘사합니다. 종말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유대적 전통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만약 지금이 종말의 시대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하는 ‘고통’은 성도들은 그 시대를 살지만 그 시대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거스르기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단에 매어서 스스로 자기 고통을 만들어내는 모든 인류가 겪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고통의 시대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재림하시기 전까지 기간인 이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종말의 때가 곧 이를 것이다’라고 미래 시제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임박한 것이어서 이미 종말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의 고통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 때문에 생기는 고통, 즉 진리의 실현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종말의 특징인 여러 불의한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는 모두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불의한 행위로부터 돌아서라고 명하는데, 여기서 돌아서라는 명령은 현재 시제입니다. 종말이 현재적인 실재지만 미래 시제로 표현한 것은 종말의 특징인 불의한 일들이 앞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임 을 암시합니다. 디모데가 현재 경험하는 불의와 고난은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가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 더 큰 고통의 때가 올 것입니다.

⑵ 종말에 일어날 악한 일들(2-4)

바울은 왜 이 시대가 고통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종말의 특징인 불의한 일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두 열여덟 개의 악을 열거합니다. 이런 목록은 디모데가 현재 경험하는 에베소 교회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① 자기를 사랑, 돈 사랑(2a)

종말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집착하여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신과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과 돈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높이는 자랑과 교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경고하신 대표적인 불의한 행위입니다.

②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것(2b)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것’도 이기적인 자기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애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③ 감사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것(2c)

‘감사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의한 태도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향해서는 자랑과 교만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비방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감사하지 않고 거룩하게 행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난다.

④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3)

계속해서 불의한 자들의 특징을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의가 말의 비방을 넘어 악한 행위로 표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정함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사랑의 마음조차 상실한 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⑤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것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적인 본성을 가진 타락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모함하며’라는 단어는 2:26의 마귀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마귀의 특징은 속이고 모함하는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성적인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6).

⑥ 사나운 것과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사나운 것과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불의한 자들의 난폭하고 악한 본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격은 결코 지도자의 자질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온유함으로 거역하는 자들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5).

⑦ 배신하며 조급한 것

‘배신하며 조급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2절에서 말했던 자기 사랑과 교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대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대신 쾌락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거룩하고 경건한자가 될 수도 있고, 불의하고 악한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⑶ 종말의 특징인 위선적인 신앙(5)

바울은 악에 대해 열거한 후에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악을 저지른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돌아서라’고 권고합니다. ‘돌아서라’는 ‘~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자신을 돌이키라’는 매우 강한 뜻을 지닌 것입니다. 즉 지금 즉시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2-4절에서 언급한 모든 악의 목록들을 행하는 자들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로 규정합니다. 이것은 거짓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악의 목록들은 거짓 교사들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증거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경건의 모양으로 그러한 불의를 덮고 있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위는 아주 종교적이고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속에는 복음의 진리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위선자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돌아서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지금 디모데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은 특히 목회자들이 빠지기 쉬운 대표적인 불의입니다.

에베소 교회 내에서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방향이 잘못된 곳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와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쾌락을 사랑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돈을 사랑했고, 하나님 없는 영혼의 공허함을 돈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첫 인류가 하나님을 버린 것도 하나님 밖에서 자기 사랑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거짓 교사(6-9)

진리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면 거짓과 위선이 찾아옵니다. 십자가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참 능력을, 그럴듯한 분주한 활동으로 흉내만 내게 됩니다. 단호하게 인간의 욕심을 지적하고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않으면 더 자기 확신이 강한 위선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6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6-9)

모든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쾌락을 더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척하는 위선의 시대입니다. 그런 자들이 다수입니다. 오히려 경건하게 하려고 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말세에 고통을 주는 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유린하고 미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⑴ 미혹하는 자들(6-7)

바울은 이제 직접적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행위 중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자기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집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성도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방문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몰래 들어가는 도적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몰래 들어갑니다. 어리석은 여자는 단지 지능이 떨어지거나 많이 배우지 못한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적인 분별력이 없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1-15에서 정욕적인 젊은 과부들에 대해서 말했는데, 어리석은 여자는 이런 여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여자들은 오랫동안 정욕으로 인해 음란의 죄를 지어온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자들입니다.

⑵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8)

바울은 이런 거짓 교사들을 얀네와 얌브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 했던 애굽의 술사들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낸 자이지만, 얀네와 얌브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 결코 복음의 사역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부패해 있었습니다.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며, 마음이 부패하여 믿음을 버린 자들입니다.

⑶ 그들은 패망할 자들(9)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런 거짓 교사들은 결국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얀네와 얌브레의 경우처럼 거짓 교사들도 불의한 정체가 곧 드러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거짓 교사들이 득세해서 많은 성도들에게서 인기를 얻고 있을지 몰라도, 오래지 않아 버림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갈수록 더 악해질 것입니다. 거짓 교사의 본색이 모든 사람들이 알만큼 명백하게 들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하지 못할 것이며,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거짓 교사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디모데에게는 희망적이고 격려가 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일시적인 성공을 보면서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면 결국 진리가 거짓을 이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거짓 가르침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교회와 진리는 넘어지지 않고 든든히 지금까지 서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기지 않고 지금도 위세를 떨치는 세력은 번영과 탐욕의 신 바알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들이 할 일은 그 허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성도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단이 축복이라고 하는 미끼를 던지고, 또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는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시대가 가까우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바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진리를 따라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이 더 빛을 발한 것입니다. 겉을 꾸미려 하지 말고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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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2-02)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디모데후서 2장 14-26절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메시지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더 그렀습니다. 자신 안에 증거가 있지 않으면 미덥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하는 사람의 인격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찾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그 일군의 자질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2:14-4:8절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는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이 중에서 본문은 디모데가 불의한 거짓 교사들과 구별되는 복음의 참된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삶과 말씀에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인정받은 일꾼(14-19)

요즘 이단들이 교회 안에 논쟁을 일으킨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될 수 만 있으면 논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비진리가 교회를 공격해도 조용히 피하란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논쟁하지 말라는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4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14-19)

바울은 앞에서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목회자 디모데에게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권면을 합니다. 불의한 거짓 교사들과 구별되는 복음의 참된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⑴ 말다툼하지 말고 진리를 바로 분별하라(14-15)

바울은 먼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담대하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가 되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을 대하는 실질적인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① 논쟁을 그치라(14)

지금 디모데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성도들 사이에 퍼져 나가고 있는 말다툼을 그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말다툼의 근원은 거짓 교사들의 헛된 논쟁이었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건설적인 토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영지주의 이단의 영향으로 진리가 혼탁해지고 왜곡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란 간단히 말해,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 것으로 단정하는 이원론적인 사상에 기반을 둡니다. 이 사상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을 절제해서 영혼의 숭고함을 보호하려는 철저한 ‘금욕주의’이고, 또 하나는 육체의 어떤 타락과 방종도 숭고한 영을 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쾌락주의’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사상은 교회 내에서 물의를 일으키며 사람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때문에 자연적으로 교회 안에는 이런 신학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논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여 헛된 논쟁을 하지 말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는 말은 그러한 논쟁은 잘못이며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라는 뜻입니다.

② 진리를 옳게 분별하라(15)

다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쓰라고 명합니다(15).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디모데는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3:14).

둘째,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드리기를 힘쓰는 자입니다. 아무리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삶과 인격에서 경건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⑵ 진리에서 떠난 망령된 자들을 경계하라(16-18)

바울은 이제 거짓 교사들이 어떤 자들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거짓 교사들은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이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은 성도들을 점점 더 불의한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헛된 말은 불의한 행실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들의 헛된 말을 바울은 질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암을 치료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온몸에 퍼져서 생명을 잃게 하듯이 거짓 교사들의 암적인 가르침을 당장 중단시키지 않으면 공동체에 지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암적인 존재의 예로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에베소 교회의 이단적인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릇된 종말론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에 물든 자들이며 바울이 선포했던 부활의 교리를 왜곡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고 영적인 부활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이미 영적으로 부활한 존재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은 육체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의 중요성과 가치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고 반대로 정욕적이고 불의한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영적이며 이미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⑶ 주의 백성답게 불의에서 떠나라(19)

디모데는 자신이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음으로 담대하게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증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16:5를 인용한 것입니다. 반역자 고라가 스스로 제사장의 직분을 취하려고 할 때, 모세가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인침을 받은 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둘째 증거는 그가 불의에서 떠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도 민수기 16:26에서 온 것입니다. 모세는 회중에게 고라 일당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했는데, 불의한 고라에게서 떠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표시가 됩니다.

즉, 19절의 요점은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떠나는 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고라와 같은 반역자들이며,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고라와 함께 멸망했던 반역자의 일당이 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에 대한 비유(20-21)

세상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큰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그릇도 좋으니 깨끗한 그릇이 되라고 하십니다. 작아도 깨끗한 그릇은 쓸모 있지만, 커도 더러운 그릇은 도무지 쓸모가 없습니다.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0-21)

바울은 그릇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디모데에게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적인 가르침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귀한 그릇이 되어 모든 선한 일을 위해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자(22-26)

불의를 떠난 하나님의 백성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고 선한 일을 위해 잘 준비된 귀한 그릇과 같습니다. 그들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믿음, 사랑, 화평을 좇아 사는 삶을 통해 정결함과 거룩함을 지킨 성도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 안에 거한 성도입니다.

22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22-26)

아무도 복음을 위한 바울의 삶을 변호해주지 않고 떠났지만,바울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변호인이 되어 바울 곁에 서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건고합니다.

⑴ 깨끗한 마음으로 화평을 추구하라(22)

바울은 디모데가 귀하게 쓰임 받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피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청년의 정욕으로부터 피해야 합니다. 정욕적인 삶은 거짓 교사들의 대표적인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기 쉽습니다. 아직 젊은 디모데는 이것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피하라’는 명령은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나를 사로잡으려고 다가오는 정욕으로부터 도망가듯이 적극적이고 긴급한 태도로 피해야 한다. 대신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붙잡기 위해서 쫓아가야 합니다. ‘따르라’는 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추격해서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디모데는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거룩과 경건이 아니라, 다른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⑵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23)

위 14절에서 말다툼하지 않도록 금하라고 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14절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다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23절은 디모데에게도 그러한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그것은 다툼을 만드는 것이지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⑶ 온유함으로 가르치라(24-26)

바울은 목회자로서 디모데가 해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가르치는 것을 잘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다투지 말고 모든 성도들을 온유하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다투는 것과 온유한 것은 대조되는 덕목입니다. 다툼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지만, 디모데는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가르침의 대상들 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거역하는 자들도 온유한 마음으로 훈계해야 합니다. 훈계에는 책망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 책망은 미워함과 정죄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에서 나오는 책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훈계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잘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깨어나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술에서 깨어나게 하듯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논쟁을 즐겨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삶과 인격으로 살아내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헛된 말들로 진리를 혼탁하게 하는 시대 속에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되길 원합니다. 누가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입니까? 진리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배우는 자입니다. 또한 그 말씀이 삶과 인격 속에 흘러나오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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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2-01)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디모데후서 2장 1-13절


옛 속담에 ‘콩 심은 대 콩 나고 팥 심은 대 팥 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경에서는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갈라디아 6:7)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행한 대로 열매를 거두는 법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법칙도 심는 대로 거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더 정확하게 평가하시고 합당한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장이 디모데의 낮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말이었다면, 2장에서는 맡은 책임을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1-7)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병사처럼, 경기하는 자처럼, 농부처럼 우직하게 고난을 감내하면서, 결과를 확신하면서, 승리의 순간을 소망하면서 꿋꿋이 살아야 합니다. 그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게 의미 있는 삶인 것입니다.

1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1-7)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순간, 영적 전쟁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단과 싸우는 군사로 부르십니다. 바울은 그 과정을 너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강해져라(1-2)

디모데는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과 복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1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한 후에, 두려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제 더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1). 디모데는 마땅히 강해져야 하고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의 영을 은사로 주셨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1:7). 그런데 강해지는 것은 인간적인 용기와 자신감을 회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담대함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에게서 들은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명령합니다(2). ‘내게 들은 것’이란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복음은 이제 디모데에 의해서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져야 합니다. 디모데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될 수 있도록 신실한 일꾼들을 가르치고 세워서 복음을 맡겨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겨둔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디모데전서 1:3).

⑵ 좋은 병사로서 고난을 받으라(3-4)

앞에서 말한 바울의 명령을 감당하는 데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특히 거짓 교사들과 겨루어 그들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야 하는 디모데에게 핍박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세 비유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면서 임무를 완수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첫째 비유는 병사의 비유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병사는 마땅히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병사는 고통스러운 훈련을 감당해야 하고, 언제라도 상관의 명령에 따라 피 흘리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투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는 병사로 복무할 수 없습니다. 또 좋은 병사는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고 상관을 기쁘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되려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⑶ 승리하는 경기자가 되라(5)

둘째 비유는 경기자의 비유입니다. 경기자가 상을 받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훈련을 감수해야 합니다. 또 상을 받으려면 합법적으로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받고 실력이 있어도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디모데가 사역을 감당하면서 고난을 받되 합법적이고 옳은 일을 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합법적으로 경기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속이고 비방하고 거역하고 모함하면서 경기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의 참된 일꾼으로 부름 받은 디모데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디모데가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합당하게 경기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도 결코 결과를 위해서 부당한 과정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⑷ 수고하는 농부처럼 하라(6-7)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에 대한 셋째 비유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주인에게 고용된 일꾼이나 소작농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설명합니다.

농부가 일하는 목적은 곡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한 후에 곡식을 받을 수 있는 우선순위는 일한 농부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수고한 농부에게 주어지는 대가입니다. 추수는 종종 종말론적인 심판을 상징하며, 곡식은 그 상급에 해당합니다. 농부가 곡식을 얻기 위해서 땀 흘리며 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듯이 복음의 일꾼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질 상급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인내해야 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 비유를 마친 후에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깊이 묵상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비유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실천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뜻입니다. 이론적인 깨달음과 그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쉽지만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적용하여 살아가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디모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텍스트로 삼아서 묵상하고, 그것을 이 복음에 비추어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세 비유를 묵상한다면 하나님께서 디모데가 어떻게 처신할지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의 결과(8-1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음에 매어둘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죽으면 다시 살 것입니다. 함께 왕노릇 할 것입니다. 고난 받는 왕,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당장에는 근사하지 않아도 주님이 아시니 괜찮습니다.

8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8-13)

본문에서는 주의 사역자들이 군사, 경기하는 자, 농부와 같은 자세로 충성할 때, 훗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 위로와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⑴ 복음이 매이지 않게 됨(8-9)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 바울은 이제 바울 자신이 진실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로 명령만 하는 자가 아니라 본을 보인 지도자였습니다.

8-13절은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경기자로 수고하는 농부로 살아온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한 자전적 보고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복음의 정체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말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잘못된 메시아 이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당시엔 다윗의 씨로 오시는 메시아가 원수를 정복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드러난 복음의 진리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복음 때문에 갇혔지만 복음은 매이지 않고 널리 선포되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은 실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⑵ 고난 후 구원의 영광(10)

10절은 법대로 경기하는 자가 승리의 관을 얻는다고 했던 5절의 비유를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는데, 인내는 복음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법과 같습니다. 바울은 법대로 인내했고 그 결과 택한 자들이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택한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바울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관과 같은 것입니다.

⑶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의 결과(11-13)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에 대한 결론적 진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의 영광에도 참여하겠지만, 그것을 부인하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는 것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와 함께 부활하는 것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면 그의 왕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신실하신 주의 말씀이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징징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치러야 할 대가를 알았다는 뜻도 됩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 그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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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1-02)


아름다운 복음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장 9-18절


‘죽음의 협곡’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한 연인이 산을 등반하다가 그만 여자 친구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다가 다행히 줄을 잡았습니다. 줄만 놓으면 깊은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습니다. 하지만 점점 손에 힘이 빠져 떨어지는 죽는 충격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잡고 있는 줄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안전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그 안전함에 평가는 그 사람이 잡고 있는 줄이 얼마나 견고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줄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줄을 잡고 있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이제 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설명합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 선포자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면하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9-10)

어려운 현실만 보면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현실 안에 감추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게 되면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복음이신 예수님 때문에 부끄러움과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9-10)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나 고난당한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숨기려 합니다. 특히 믿음이 깊지 않으면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이 닥치면 떠나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권고했는지 설명합니다.

⑴ 거룩하신 부르심(9)

바울은 먼저 자신이 감옥에 투옥된 사실을 말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디모데를 복음 사역자로 부르신 것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부름을 받았다면 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울은 갇혀 있고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은 로마의 네로(주후 54-68년) 황제가 기독교인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기독교를 범법단체로 낙인찍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로마 대 화제 사건을 기독교인의 소행이라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볼 때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십자가의 복음과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면서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바울도 실패한 것 같아서 디모데도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의 상황은 실패가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된 일이고 성취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려운 현실만 보고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보고 담대해지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투옥이나 디모데가 두려워하는 현실이 자신들이 무능해서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마땅히 일어날 일이었고 심지어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⑵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10)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설명한 후 이제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명합니다.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는다면 그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복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복음은 무엇을 드러냈습니까? 사망을 멸하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을 드러냈습니다. 사망을 멸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음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망을 폐하신’라는 표현은 사망을 완전한 정복한 결과로 영원한 생명이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장차 성도들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0-24, 50-54).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부활하심을 보지 못하면,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본다면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 복음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고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음(11-14)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단순하게 수준 낮은 복음이나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오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1-14)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인 것과 사역자로서 자부심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세를 소개합니다.

⑴ 복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음(11)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바울의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할 사역을 ‘선포자’, ‘사도’, ‘교사’ 등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소개합니다(참고 디모데전서 2:7). 여기서 ‘선포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며, ‘사도’는 복음 전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은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기독교 진리를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⑵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12)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감옥에 갇힌 자 되었지만(8), 그러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선포자로 부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부끄럽게 하실 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의탁한 것’은 아마 죽음을 앞두고 바울의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은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지켜주실 것임을 확신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바울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조차 바울을 두렵게 할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망의 권세를 멸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나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⑶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13-14)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설명한 후, 이제 디모데도 그것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는 것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가리켜 ‘바른 말’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지혜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속이는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은 오직 바울이 선포한 복음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가르친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7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사실은 교만하고 비방하고 거역하며 무정하며 모함하는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3:2-5).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고 권면하면서 복음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다시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게 주신 능력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으로만 우리는 복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의 모범(15-18)

진정한 믿음이란 항상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악한 사단의 세력들은 끊임없이 믿음을 꺾기 위해 공격과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한 믿음을 변치 않고 굳게 지키기 위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터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믿음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15-18)

근신(勤愼)하는 마음이라는 바른 삶을 살고자 절제하고 조심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굽은 마음을 곧게 하며 악한 마음을 의롭게 합니다. 자신을 항상 돌아보고 가꾸어가며 다른 사람 또한 바른 마음을 가지도록 근신케 하는 마음입니다.

⑴ 바울을 떠난 사람들(15)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례를 소개합니다. 디모데가 어떤 모범을 좇아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먼저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그를 버리고 떠나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하면서, 대표적으로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⑵ 바울을 찾아온 사람들(16-18)

반면에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찾아와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출신이면서 로마까지 와서 바울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바울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찾아서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오네시보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디모데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또 자신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열심히 찾아 만났던 것처럼, 디모데도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바울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디모

데는 마음속에 있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바울이 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지켜야 했으며, 바울이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바울을 부끄러워한 것은 사실상 복음을 부끄러워한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 자신에 대한 돌봄이나 관심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라, 디모데가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리스도를 어떤 상황에서도 따르고 신뢰하라는 격려인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는 소식입니다. ‘보기에 심히 좋다’하신 하나님의 잔잔한 탄성을 다시 듣게 하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하는 착한 사람 같이 울어주고 믿어주고 어깨를 빌려주고 잘되기를 빌어주는 가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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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1-01)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디모데후서 1장 1-8절


고대 전쟁에서 승전가가 울리면 승리한 군사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패한 군사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에게 시대를 거스르고 지배 체제를 부정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조롱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 처하면 신앙의 순수함과 열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럴 때는 처음 은혜 받았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실에 압도당하면 신앙이 약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다시 용기가 생깁니다. 바울은 의기소침한 디모데에게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사를 기억하고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문안 인사(1-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줍니다. 사망의 문화 속에서 생명이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 사망이 끝이 나고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현재로 가져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이 서신은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쓴 최후의 서신입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해 참고 견디었던 수모와 박해를 돌아보면서 후계자인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의 권면을 주고자 본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서신의 관습에 따라 문안 인사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수신자인 디모데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⑴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1)

바울은 자신에 대한 소개에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① 사도권의 기원

바울은 사도권의 기원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가 되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또한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과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부르심을 입은 이유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지만, 보냄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부인하고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은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⑵ 디모데를 위한 축복(2)

본 절은 이 서신을 보내는 수신자를 밝힘과 동시에,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더욱, 수신자에게 사도적 축도를 해주고 있습니다.

① 아들과 같은 디모데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부자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뢰하는 선생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해준 것이 아니라 영적 아비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 은혜와 긍휼과 평강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적인 축복해 주었던 것은,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가리키며, ‘긍휼’은 하나님께서 한없는 사랑과 위로로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과 심적인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긍휼’이 다른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온갖 어려움을 무릎 쓰고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를 생각하며 쓴 단어입니다.

 

디모데로 인한 하나님께 감사함(3-5)

동료를 그리워하시는 마음으로 서로 눈물 나게 그리워하고 눈물로 기도해주는 성도와 성도,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를 보신다면, 하나님께서도 눈물 나게 좋아하실 것입니다. 믿음과 은사를 가진 자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감당할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3-5)

간단한 문안 인사를 전한 후 바울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3-4절은 바울의 감사하는 생활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며, 5절은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께 감사함(3-4)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면서 많은 시간을 홀로 외로이 보내야 했습니다. 먼저 자신이 감사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그의 조상 때부터 섬겨온 분입니다. 이것은 유대적인 전통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있는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조상들의 믿음의 유산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② 정결한 양심으로 섬겨온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이면 무엇이나 다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결한 양심으로 섬겨온 신앙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참 믿음이란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 밤낮 기도하면서 감사합니다. 또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며’라는 표현과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라는 표현이 연결되면서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에 대한 생각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이유는 그만 홀로 에베소 교회에 남겨두고 떠나왔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3). 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어려운 가운데 사역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네 눈물을 생각하며 너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디모데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드러 내줍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임무를 잘 완수하고 속히 자신을 만나러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⑵ 감사의 이유(5)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그의 거짓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은 바울의 ‘정결한 양심’과 비교됩니다.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으나, 그의 신앙은 유대적 전통을 따른 진실한 믿음을 계승했다. 바울이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한 것처럼, 디모데도 진실한 믿음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디모데의 신앙이 유대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거짓 교사들은 유대적인 전통을 강조하면서 율법주의를 가르쳤지만, 그것은 참된 신앙의 유산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유산은 바울과 디모데가 계승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도 유대적인 전통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은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3:8).

그들은 유대적인 전통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참된 유대적인 신앙의 유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며 속이는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2:16-18; 3:13).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디모데가 진실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상기시킴(6-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준 자긍심과 약속 때문입니다.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6-8)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이 겁쟁이가 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바울처럼 핍박과 죽음 앞에서 생명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궈면하고 있습니다.

⑴ 네 속에 있는 은사를 생각하라(6)

사도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을 상기시킵니다. 젊은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대적자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받은 은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잠자고 있는 디모데의 은사가 다시 불 일 듯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디모데가 자신의 믿음과 받은 은사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가 받은 은사가 얼마나 위대한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변론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고난이나 어려움 때문에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 디모데가 그러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큰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⑵ 디모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7-8)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불 일 듯 일으키라고 했는데, 이제 그 은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디모데에게 주신 은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사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다.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두려움의 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능력의 영입니다. 아마 디모데는 지금 홀로 에베소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능력의 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담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사랑의 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자들은 사랑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사나운 대적자들 입니다(디모데후서 3:3,8). 거짓 교사들은 또한 절제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조급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다(디모데후서 3:2-6).

둘째, 디모데가 받은 은사는 주의 복음과 바울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영이다. 복음의 해시 은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 받고 감옥에 갇힌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주 방문하여 격려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바울처럼 복음과 함께 담대하게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8).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합당한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메시지와 십자가의 삶을 사는 메신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복음을 따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사는 삶을 고수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일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꽃길만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준이 달라졌으니 세상이 뭐라고 평가하고 푸대접하든, 그것이 사역의 성패, 믿음의 성채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생명이니 죽음의 평판을 무시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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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서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디모데후서 서론-


오늘날 많은 신학교를 통해 목회자들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종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신학생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이 진정한 목회자의 사명감으로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까 하고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을 구비해야 합니까?’라는 즉, 목회자의 자격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묻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일꾼인지 묻습니다.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전서와 같이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개의 서신들은 교회의 목회 사역에 관한 원리들과 구체적인 지침들에 관하여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2) 기록 시기

주후 62년경에 로마의 옥에서 풀려난 사도 바울은 다시 4차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한 시기는 바로 이 전도 여행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66-67년경, 네로 황제(재위 주후 54-68년) 치하 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이때에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자신의 일생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3) 수신자

사도 바울은 본 서를 본 서의 수신자인 디모데전서와 마찬가지로 디모데에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① 디모데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라는 뜻이며, ② 모친은 유대인 유니게, 부친은 헬라인, 외조모는 로이스(행 16:1;딤후 1:5)이며, ③ 루스드라 출신(행 16:12)입니다. ④ 그는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행 16:3;살전 3:2)이며, 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딤후 3:15). 그리고 ⑥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딤전 1:3)였습니다.

 

기록 배경

사도 바울은 잠시 동안 자유를 누린 후 재차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석방되었던 기간 동안의 여행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디도서 3장 12절은 그가 니고볼리를 방문하였음을 시사합니다. 거기서 그는 드로아로 간 것이 분명하며 드로아를 급히 빠져나오느라고 그의 집 주인인 가보에게 외투와 책들과 양피지들을 두고 왔었습니다(디모데후서 4:13).

그가 어디서 어떻게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는 것과, 바울의 두 번째 감금의 상태는 첫 번째와는 매우 달랐다는 점입니다(사도행전 28장). 그는 이제 로마 감옥에 있는 미움 받는 죄수였고, ‘자신이 빌린 집’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 마지막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재판과 분명한 순교에 직면하여 외로움과 가슴 아픔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으며 ...’라고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에게로 오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언급된 알렉산더가 사도행전 19장 33절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면, 바울이 에베소나 그 근처에서 체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사도행전 20:19), 아마도 은장색 알렉산더가 이 음모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알렉산더가 우상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들어 있었으며, 바울이 전에 에베소에서 도망한 것을 인하여 기분이 상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더 이상 영적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위를 대신하도록 두기고가 파송되었기 때문입니다(4:12). 아마도 디모데는 에베소 지역을 여행하며 사역을 하는 부흥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로마로 오기를 기대했던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에게 드로아(4:13)와 에베소(1:16-18)에 가라고 쓰고 있는데, 이 도시들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위치한 도시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록 목적과 주요 내용

⑴ 기록 목적

본 디모데후서는 3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사도 바울은 외로운 상태였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로마서 16:21),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한 것처럼,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습니다(빌립보서 2:22; 고린도전서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 밖에 내게 없다’(빌립보서 2:20)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 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습니다(4:19, 21).

②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1: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③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본서의 끝 부분에서도 ‘너희’라는 복수 대명사를 부가하여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습니다.

(2) 주요 내용

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1장)

디모데후서는 고난에 대해서 많이 강조합니다(1:3-8).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옥에 갇히게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격려합니다(1:8).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항상 고난이 동반되고, 신실한 주의 종은 그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때문에 복음과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오네시보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1:15-16). 마찬가지로 디모데도 담대하게 고난에 맞서서 좋은 군사처럼, 혹은 운동선수처럼, 혹은 농부처럼 기꺼이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2:3-6).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그것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위한 고난은 실패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 결과는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금에 동참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고 왕 노릇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2:8-19).

② 부끄러움이 없는 진리의 일꾼으로 서라(2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일꾼으로 굳건히 서기 위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설명합니다. 첫째, 거짓 교사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특별히 부활이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책망해야 합니다(2:17-18). 둘째,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2:22). 디모데는 아직 젊은 사람이기에 정욕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상대에 있었습니다. 특히 거짓 교사들이 공공연하게 행하는 정욕적인 삶에 유혹을 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귀하게 쓰는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셋째, 무식하고 어리석은 변론을 피해야 합니다(2:23).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무익한 변론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훈계해야 하지만 무익하고 어리석은 변론으로 다툼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③ 종말론적인 경건한 삶을 살라(3장)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시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실한 일꾼으로 서기 위해서는 시대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종말에 만연하게 될 불의한 사람들의 행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3:1-9). 거짓 교사들의 맘과 행위는 불의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디모데는 그들의 행실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디모데가 자신을 경건하게 지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첫째, 바울이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모범을 기억하하고 그것을 본 받는 것입니다(3:9-11).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에는 고난과 핍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러한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과거에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했던 것을 기억하고 디모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배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산아야 합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의 진리를 잘 배웠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더욱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그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으며, 교훈과 책망으로 우리를 의로 교육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17).

 

디모데후서의 구조

Ⅰ. 문안인사(1:1-2)

Ⅱ.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1:3-18)

1. 디모데가 받은 믿음과 은사(3-8)

⑴ 디모데의 믿음으로 인해 감사함(3-5)

⑵ 디모데의 은사를 상기시킴(6-8)

2. 두려워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9-18)

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9-10)

⑵ 우리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음(11-14)

⑶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15-18)

Ⅲ. 충성된 주의 종이 되라(2:1-26)

1. 담대한 군사처럼 고난 가운데 인내하라(1-13)

⑴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1-7)

⑵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의 결과(8-13)

2. 부끄러움이 없는 진리의 일꾼이 되라(14-26)

⑴ 헛된 논쟁을 버리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14-19)

⑵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자가 되라(20-26)

Ⅳ. 종말론적인 삶(31-17)

1. 종말에 있을 불의한 자들의 삶(1-9)

⑴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불의한 일들(1-5)

⑵ 불의를 행하는 거짓 교사(6-9)

2. 종말을 살아가는 경건한 삶(10-17)

⑴ 바울을 본받는 경건한 자가 되라(10-13)

⑵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14-17)

V. 바울의 고별적인 권면(4:1-18)

1. 힘써 복음을 전파하라(1-5)

2. 죽음을 앞둔 바울의 고백(6-8)

3. 사적인 부탁과 권면(9-18)

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탁함(9-13)

⑵ 대적자들을 경계하라(14-18)

Ⅵ. 끝인사(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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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7-01)


억울한 고난 속에 있을 때

시편 17편 1-15절


예수님을 믿는다고 장밋빛 대로만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기대로 신앙의 길을 간다면 고난이 닥쳤을 때, 낙담하고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다윗 또한 억울한 비방과 부당한 고난으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억울한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시편 17편은 자기의 결백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변호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웃은 사방에서 조여드는 압력과 곤경에서 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악인들 때문에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세심한 보호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는 악인들에게서 여호와의 손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며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무죄 천명과 간청(1-5)

하나님께서는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목석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소를 세심히 듣고 계시며 처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공평하게 살펴 누가 옳은지 판단해주십니다.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탄없이 아뢰어야 합니다. 

1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1-5)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아뢰며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공평하게 판단해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진실을 입증해주시고 깨끗한 양심으로 외식 없이 외치는 부르짖음을 귀담아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1)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1-2)

본 시를 쓴 다윗의 상황이 무척 다급해 보입니다. ‘여호와여 옳음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하소서 나의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1a) 여호와를 부르며 외치는 다윗의 연속되는 요청이 눈에 뜁니다.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 이러한 일련의 구문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한 정보는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나 ‘의’ 곧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호소하고 법적으로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나의 부르짖음’과 ‘나의 기도’는 절박함을 강조합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거짓되지 않은 입술의 말(1b)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음을 당당히 밝힙니다. 자기의 부르짖음과 기도가 옳음을 호소하는 것은 자기 의를 뽐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비난과 공격에서 무죄 입증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판결은 여호와께 있으니, 당신의 눈이 옳은 것을 보실 수 있기를(2)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법적 판결을 적극 요청하는 것은 긴급한 호소와 함께 정당한 판결을 구하는 결백 주장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의 결백 주장의 언어는 좀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2) 다윗의 결백 주장과 이유(3-5)

다윗은 당당합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자기 마음을 시험해도 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3) 말합니다. 밤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 깊은 사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주님이 ‘방문하셔서’ 마음을 시험하셔도 다윗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3절 시행에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기관에 속한 마음과 입이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 시행을 둘러싼 형태입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생각, 지혜, 의지의 자리이며 의사결정기관입니다. 고대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나의 입술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3)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무죄와 결백이 말과 관계된 것이요, 생각과 말이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이후에도 말과 행위의중요성은 계속 언급된다. 다윗은 주의 입술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삼가고 포악한 자들의 길을 가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4).

또한 의도적으로 ‘강포한 자의 길’과 ‘당신의 길’을 대비시켜 주의 길을 굳게 지켰음을 강조합니다(5a). 이 때문에 다윗은 나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5b). 시편 1편처럼 다윗은 삶을 ‘길’에 빗대어 자신의 올바른 발걸음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악인과 대적의 위협에서 보호 받기를 간구(6-12)

떳떳한 사람이 강합니다. 기도의 힘은 정직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음을 호소할 정도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늘 하신 말씀과 발자취만을 따랐으며 벗어난 적이 없다고 탄원할 수 있습니다. 티끌만큼도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법에 신실했다는 뜻입니다.

6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6-12)

다윗은 하나님께 떳떳한 자신의 기도에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께 피하는 자신을 그 능하신 오른손으로 구원해달라고, 주의 기이한 사랑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뿐임을 호소합니다.

(1) 내 말을 들으시고 지키소서(6-9)

이제 다윗은 ‘하나님’(‘엘’)을 부르며(6) 응답하실 것을 믿고 간구합니다(6-8). 다윗은 부르면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전제한 듯 말합니다(6). ‘그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고 간구합니다(7a). 이 말은 히브리어와 한국어의 어순 차이 때문에 셋째 소절에 위치했지만, 본래 7절의 첫 소절입니다. 다윗이 담대하게 ‘그 기이한 사랑’, 곧 ‘헤세드’를 구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의 핵심으로서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기이한 사랑’(‘헤세드’)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피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7bc).

다윗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그는 이른바 바다의 노래로 알려진 모세의 노래를(출애굽기 15:1-8) 되풀이하듯 같은 언어를 소환합니다.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에 숨겨 주소서’(8; 참조, 신명기 32:10-11), ‘눈동자처럼’, ‘당신의 날개 그늘에’라는 말은 가장 소중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옛적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은총을 다시 보여주시길 간청하는 호소입니다. 이제 다윗의 기도가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자기를 압제하는 악인들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9).

(2) 짐승처럼 달려드는 대적들(10-12)

다윗은 악인들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기름에 잠겼고, 그들의 입은 교만합니다(10).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개역개정)는 말이 모호합니다. 직역하면, ‘그들의 살진 마음(또는 심장)이 닫혔다.’ 또는 ‘그들의 살진 마음이 무뎌졌다’라는 말입니다.

이 소절은 악인들의 교만한 입과 평행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악인들은 몸의 중요한 기관들이 굳어지고 닫혀 겸손을 잃은 모습입니다. ‘이제’ 악인들은 걸어가는 길을 에워싸고 진로를 방해하고, 눈으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11). ‘이제’라는 부사를 덧붙여 악인들의 포악성을 드러냅니다. 악인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몸을 사용해 타인을 넘어뜨리는 데 있습니다. 다윗을 공격해 오는 악인들의 적대적인 성격묘사는 점점 더 실감나고 강력해집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포획한 먹이를 갈기갈기 찢는 사자 같고, 은밀한 곳에 숨어 공격의 기회를 살피는 젊은 사자 같습니다(12). 이처럼 다윗은 악인들의 은밀함과 무자비한 공격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적극 요청합니다.

 

악인 심판 요청과 구원의 확신(13-15)

의의 길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은 탐욕이 가득하고 입술은 온갖 교만한 말로 가득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길 외에 어떤 불의의 길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고난과 조롱 속에 배고프고 초췌하고 불안합니다.

13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3-15)

다윗은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외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그들을 대항하여 넘어뜨려주십시오. 당신의 칼로 악인들로부터 생명을 구원해주십시오’(13). 동사들은 다윗의 긴급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일어나십시오’, ‘대항하십시오’, ‘넘어뜨려주십시오’, ‘구원해주십시오.’ 이 동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다윗의 절박함 자체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노려보며 맹렬하게 사자처럼 달려드는 대적들을 하나님이 직접 처단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죄 주장으로 호소했다면(3-5), 기도를 마무리하면서는 대적들의 심판과 멸망을, 무죄한 자신의 안전을 요청합니다. 다윗은 기도를 대충 멈출 수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구체적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이 세상에서 제 몫을 다 받은 사람에게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14ab). 이들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삶의 전부인양 누릴 것을 다 누린 자들이며, 남은 것을 자기 자녀들에게까지 상속하는 자들입니다(14cd). 다윗은 자신이 마치 이생의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적들의 형통함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내가 의로움 중에 당신의 얼굴을 뵈오니 내가 깰 때에 당신의 형상에 만족하겠습니다’(15). 다윗은 이 땅에서 누리는 풍요로움보다 여호와의 얼굴과 형상, 곧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만족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의로움을 들어주십시오’(1)라고 기도한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로움’ 중에서 주님의 임재를 확신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깰 때에’라는 말에 부활이나 종말론적 의미를 부과하지만, 다윗은 현재의 위기와 고통의 문제에서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임재를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의 언어는 기술적으로 더 교묘하고 교활한 악인들로부터 구원받고, 죽음의 잠처럼 위협적인 것을 초월할 만큼 희망을 노래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갖가지 억울하고 적대적인 현실과 위기로부터 즉각적인 구원을 과감하게 요청하라는 본보기요, 하나님 임재를 확신하도록 도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께로 피하는 사람을 오른손으로 구원해주십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십니다. 홍해를 건너던 위기의 현장처럼, 자비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곤경에 처하거나 부당한 일로 마음이 상하였습니까? 난관에서 건지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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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6-01)


주님만이 나의 유산

시편 16편 1-11절


살다보면 원치 않지만 때로 큰 시련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특히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분들을 보면 커다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순금같이 나와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피할 곳 없는 고통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16편은 위기에서 주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흔들리리지 않을 것을 찬양합니다. 이 때문에 신뢰의 시(또는 확신의 시)로 분류됩니다. 다윗은 주님을 섬기는 자와 다른 신을 섬기는 자의 대조적인 운명을 묘사하며 궁극적으로 상급을 주시는 주님의 복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주가 베푸신 생명의 길에서 다윗은 자신의 기쁨이 영원할 것을 확신합니다.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1-4)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시련의 한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이 그 백성들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경건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죽음을 걱정할 만큼 큰 고난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주님의 모범을 따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1-4)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며 보호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을 지켜달라는 요청과 당신께 피한다는 고백(1)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신뢰의 표시로 보입니다. 다윗은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직접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아뢴 것이 이미 있어 보입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 말고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2). 당신이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한 것은, 하나님 말고 누구도 ‘나의 복’(2b)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은 직역하면 ‘나의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 곧 ‘토바(ה󰔧וֹט)’는 누군가의 ‘호의’, ‘행복’ 또는 ‘구원’, ‘성공’과 관계된 말입니다. 다윗은 행복과 성공, 구원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정확히 압니다. 또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자들이며 자기의 모든 기쁨이라고 선언합니다(3). 성도들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표현한 말입니다(레위기 19:2; 민수기 16:3; 신명기 33:3; 시편 34:9).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방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종 됨의 위치를 선언하고, 백성들과 자신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신들에게 달려가서 예물을 바치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피의 전제를 바치지 않을 것이며, 내 입술은 그 이름도 부르지 않을 것’(4)이라고 고백합니다.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성도들과 다른 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이때 이방 신들을 따르는 자들이 피로 빚은 술을 붓는 ‘피의 전제’를 다윗 자신은 하지 않겠다(4ab)는 표현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동물의 피를 부어 바치는 의식을 언급한 것은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양상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시대에 몰렉에게 자기 자식을 불살라 바친 배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충격적인 이교 의식을 병행했던 역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입술로 그 어떤 신들의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겠다고(4d) 분명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선포입니다.

 

나에게 기업이 되신 여호와(5-8)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내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신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른 신을 의지하는 것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주님이시고 주님밖에 행복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의지한다면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8)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겠다고 하였고 그분만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고백했습니다(1,2). 우상 일상들을 향한 피의 제사와 우상의 이름 부르기를 거부하고 비판한 만큼(4) 여호와가 나의 산업과 나의 잔 자기의 소득이고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5).

‘나의 산업’은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지파별 인구 비율대로 할당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1장). 그런데 다윗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 여호와가 ‘나의 할당 받은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가 ‘잔의 소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나의 잔’입니다. 이 말은 이방 신들에게 부어 바치는 ‘피의 전제’와 비교되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음료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거기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꼭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5b). ‘분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땅을 분배받을 때 ‘분배받은 몫’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주신 땅의 약속을 빗대어 하나님만이 자기 운명을 보장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적인 선포입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행복한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찬양합니다(6,7).

다윗은 여전히 옛적 조상들이 분배받았던 땅을 상기시키는 은유를 활용하여 노래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6a),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자기를 위해 주님이 행하신 모든 곳이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로 분배해주신 땅을 받고, 감격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나는 나에게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니,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다윗은 자신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고요하고 적막한 밤중에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양심’은 본래 고대인들에 의해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기관으로 불리는 ‘콩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체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았기에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관입니다. 가장 깊고 내밀한 몸의 기관이 교훈한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루의 치열한 일상을 마무리하는 어두운 밤마다 자기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기 행동을 바로잡습니다. 다윗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기 행위를 수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면밀히 듣고, 자기 교정이 가능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8a)고 고백합니다. 왜입니까?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8bc). 다윗은 자기편이 되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드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자기 노력보다 먼저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확신합니다.

 

나의 기쁨이신 여호와(9-11)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고 풍성한 소산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백성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잠시 기업을 잃고 방황할지라도 언젠가 되찾아주실 것입니다. 줄로 재어 주신 기업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 유산을 기뻐하며, 빛나는 것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9-11)

다윗은 자신을 요동치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기에(8) 노래합니다.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겉 사람도 즐거워하니, 내 몸도 안전하리라’(9), 다윗은 주님의 붙드심 때문에 전인격적인 즐거움과 안전을 신뢰하고 확신합니다. ‘겉 사람’(카보드 דוֹבכּ)이 ‘영’(개역개정)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전적인 뜻은 ‘무거움’, ‘겉모습’, ‘영광’, ‘영광의 표시’, ‘탁월함’ 등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 몸의 안전까지 확신합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에 새겨진 속사람의 기쁨이 겉사람의 즐거움으로 채워져 안전함으로 확장되는 삶을 꿈꾸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의 충만함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다는 표명입니다.

이후 자신의 기쁨과 안전의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는 당신이 내 생명을 스올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a). ‘스올’은 지하세계이며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다윗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던 시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죽음의 위기가 닥칠 것을 예상한 것입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이 죽음의 세계로 던져 넣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기쁨과 안전을 확신합니다. 이 또한 여호와가 당신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10a)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개역개정)는 ‘경건한 자’이며, 3절의 성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약속 안에서 신실하며 헌신된 자들입니다. ‘멸망’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표현하기 위한 ‘구덩이’ 또는 ‘무덤’을 뜻하며, 시행에서 ‘스올’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당신의 경건한 자가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신뢰에 칸 마지막 고백으로 남겼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을 내게 알리실 것이고/당신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당신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11). 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평생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내세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는 것 소절, ‘당신이 내게 일평생 사는 방법(또는 길)을 알게 하셨다’(11a)는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의 임재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 넘치는 삶의 가치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다윗은 기쁨을 잃지 않고 평안을 경험합니다. 날마다 일깨워주시고 밤마다 교훈해 주시는 주님과 생생한 교제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손상되면,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말씀이 당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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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5-01)


진정한 예배

시편 15편 1-5절


 예배란 어떤 의식이나 행위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식 예배보다 삶의 예배가 강조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내게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개선하면서 진정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이 시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에 들어가기 전 예배자의 조건들을 제시합니다. 이 조건들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윤리적인 삶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과 성산으로 언급되는 곳에서 예배하기 위한 열 가지 선행 조건들인데, 이것을 온전히 충족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여 죄사함의 필요성을 깨닫고 겸허히 예배하도록 교훈합니다.

 

[질문] 누가 당신의 장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1)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것이 구속의 이유는 아닙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고 유하면서, 그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합당한 복을 내리시는, 살아있는 교제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열망이 있을 때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합니다. 두 개의 질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사는 자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주요한 장소가 언급됩니다. ‘장막’과 ‘거룩한 산’입니다.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께서 주신 도면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장막은 이동이 쉽도록 설계되었으며, 하늘 하나님께서는 땅에 거주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막을 만나는 장소로서 회막(사무엘하 7:6)으로도 불렸으며 솔로몬의 성전으로 대체됩니다. 장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며 예배의 장소로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장소입니다. 15:1처럼 장막과 거룩한 산이 함께 등장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2:6; 3:4; 43:3; 48:1).

다윗의 질문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 반복했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항의합니다. ‘머무르고’ ‘사는’ 것은 비슷한 의미입니다. ‘머무르다’는 일시적 ‘거주’(구르)이고, ‘살다’는 ‘정착’ (샤칸)을 뜻합니다. 다윗은 성전과 거룩한 산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정착하든 누가 거기에 머물며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 임재 앞에서 보호받고 쉴 권리를 가진 자들이 누구인지를 새겨보라는 초대입니다.

 

[대답] 정직, 공의, 진실한 일상(2-5ab)

하나님께서는 책망 받을 것 없는 길을 걷고, 공의롭게 행하며, 맘속에서부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경배를 받으십니다. 근사하지 않더라도 고백과 마음과 삶이 하나 된 백성의 찬미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받고 싶은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가꾸운 벗과 이웃조차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이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울 수 없습니다.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2-5ab)

여호와의 성전, 곧 그분의 임재 앞에 거할 수 있는 조건이 열 가지로 제시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조건들입니다. 적극적으로 수행할 일과 금지 조항들이 각각 다섯 가지로 열거되었습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으로, 정직하게 걷고, 공의를 행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2).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서원을 했다면 해를 입더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4).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정직하게 걷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결점이 없고 비난할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둘째,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공의’는 보편 타당하게 옳은 일을 행하는 것과 관련된 덕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평하고 법적으로도 결백하고 진실한 사람이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굳이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진실한 말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지혜와 의지와 의사결정의 자리이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진실’(에메트)은 구약성서에서 공의와 거의 항상 짝꿍처럼 함께 어울리는 말로서 믿을 만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러움을 가리킵니다. 이는 표리부동한 언어의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말이 일치하는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넷째 조건은, ‘망령된 자’를 거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4a). 이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4b)과 동의적인 평행관계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망령된 자’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망령된 자’는 비열하고 야비하고 깔보고 얕보는 사람입니다. 남을 얕보고 깔보는 사람은 당연히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비열한 태도를 보이거나 남을 얕잡아 보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예배자의 적극적인 행위로 제시한 마지막 요청이 있습니다. 주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는 자는 손해를 보더라도 맹세한 것을 바꾸지 않습니다(4bc).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서원’은 자기가 믿는 신에게 맹세하고 서약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레위기 마지막은(27장) 서원을 되돌리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서원의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서원을 무를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구약 본문은 서원의 나쁜 예로 사사시대 입다를 지목하곤 합니다. 사사 입다는 무분별한 ‘서원’으로 자기 딸을 번제물로 바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4일 동안 애곡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사사기 11:34-40). 전도서는 서원한 것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서원’을 이행하라고 조언합니다. 서원하고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안하는 것이 낫다고 덧붙입니다(전도서 5:4-5). 이것은 서원의 신중함을 말한 것이지 서원을 장려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 본문의 전반적인 맥락처럼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라는 것은, 예배자의 서원을 장려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4절 시행에서 하나님께 서원하는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행위보다 ‘맹세하다’(샤바)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직역하면 ‘그는 잘못 행동하지 않도록 맹세하고, 취소하지 않는다’(4bc)라는 말입니다. 그릇된 행동을 안 하기로 맹세한 것을 철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시행의 전체 맥락에도 어울립니다.

그러면 다윗이 말하는 예배자의 금지 조건은 무엇입니까? 3,5절에 제시되었는데, 이 사항들은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사항이 아니라 금해야 할 행동과 관련 있습니다. 첫째, 자기 혀로 남을 험담하고 뒷공론을 즐기며 떠벌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을 비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자기 친구나 동료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 자기의 가까운 이웃을 경멸하거나 비웃고 모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3). 이 중에 하나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예배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일그러진 관계성 회복이 예배 행위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넷째, 이자를 받기 위해 타인에게 돈을 꾸어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무죄한 사람에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5ab). 시인은 이자와 뇌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스라엘 밖 이방인들과의 사업상 거래는 예외였지만(신명기 23:19-20),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언약백성 사이에서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출애굽기 22:25; 레위기 25:36-37).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궁핍함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마땅히 할 일로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돈은 오직 도움을줄 목적으로만 빌려줘야 하며, 이자 없이 담보물로 저당 잡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신명기 24:6).

그러나 이 법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에스겔 18:13;22:12; 느헤미야 5:1-13; 사무엘상 22:2). 뇌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뇌물 받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예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뇌물 받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뇌물이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비틀어 곡해하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3: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경제적인 일상의 삶에서 약자와 무죄한 자에게 피해를 입힘으로 공평과 정의가 짓밟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결국 처음 시행으로 되돌아가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흠이 없고, 공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2) 집약됩니다. 한마디로 정의로운 삶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약속] 흔들리지 않는 삶(5cd)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더 괴롭게 하는 고리대금과 억울한 자를 더 억울하게 하는 뇌물을 싫어하십니다. 뇌물은 말할 것도 없고, 자ㅓ기 백성끼리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신명기 23:19-20). 지금도 처지가 궁한 성도들을 상대로 이득을 취하거나 뇌물을 받아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들 듣지 않으십니다.

5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cd)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열거되었지만, 모든 것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예배자의 합당한 삶은, 공의와 진실한 마음으로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실천하며 사는 이들을 위한 약속이 선포됩니다. 이들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삶의 다양한 문제들 앞에서 흔들리거나 비틀거리거나 요동칠지라도 하나님 가르침 안에서 의로운 삶을 위해 투쟁하며 사는 자들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돈으로 타인을 괴롭게 허거나 유혹받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이자나 뇌물은 궁핍한 형제를 절망으로 내몹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도리어 내쫓고 심판하십니다. 나눔과 선행으로 예배자의 모습을 보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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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4-01)


 의인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14편 1-7절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허탄한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지혜를 자랑하나 실상 어리석고 부패하여 악한 행실만 가득합니다. 떡 먹듯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삼키면서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고 불의한 세계에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시편 14편은 어리석은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의 성격을 다룹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어리석은 사람으로 정의되고, 그는 의인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지혜로운 의인의 탄식을 축발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14편은 어리석음과 의로움의 주제, 그리고 시온에서 시작되는 구원과 찬양의 주제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악행과 착함의 부재(1-3)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십니다. 땅은 완고하고 타락한 죄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찾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찾으신 그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3)

다윗이 게속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구한 결과, 인간들이 받은 큰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먼저 그런 어리석은 자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규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1a).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나도 피할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리석다’라는 말이 구약성경에서 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습니까?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식과 판단력이 뒤떨어지는 상황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는 지혜 있음의 반대적인 의미이며, 우매하고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신명기 32:6). 분별력이 없고 무감각하거나 몰상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참조. 이사야 32:6).

다윗이 바라본 어리석은 자는 그 행실이 부패하거나 가증하며,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1bc).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과 ‘좋은’ 행실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속 말은 생각을 반영하며, 생각은 행동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부패하고 가증한 행동을 낳습니다. 그 삶에 ‘좋은’ 행동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어리석음의 성격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사고와 악한 삶의 방식으로 규명합니다. 무엇보다 ‘좋음’은 도덕적 기준에 맞는 정당함을 뜻하고 ‘선’(善)을 뜻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의 상태를 벗어난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어긋난 모든 행위들은 ‘선’, 곧 ‘좋음’과 ‘아름다움’이 없는 삶입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하늘에서 인생들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고 계시다고 말합니다(2). 어리석은 자의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과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주를 기획하고 만드신 ‘하나님’이 그분을 찾는 자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시는 영상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과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면서 세계를 질서 있게 운행하는 이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안타깝습니다. ‘모두 다 치우쳐 있고, 함께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3). 다윗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1c)고 말했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선’(착함)의 부재를 탄식합니다. 흥미롭게도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좋음’(선)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그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 치우쳤고, 모두 함께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는 부정한 뇌물이 통하는 방식을 서로 공유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군다나 모두 올바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한쪽으로 치우쳐 빗나간 상태입니다. 이때 다윗은 ‘모두’, ‘함께’라는 말을 덧붙여 악으로 치닫는 공동체의 결탁과 타락의 전체성을 꼬집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3:10-18). 이처럼 전부가 타락했으니 ‘선’을 실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창세기 6:12). 또한 온 인류가 공모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기 위해 바벨탑을 쌓던 태곳적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창세기 11:19). 한쪽으로 치우쳐 선이 부재한 시대를 바라보며, 쏟아내는 통렬한 탄식의 목소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외침입니다.

 

행악자들의 무지(4)

악한 자들은 돈과 권력으로 약한 자들을 삼키려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만, 결국 두려움 가운데 살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도와시고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힘없고 가난하다고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4절은 다윗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호합니다. 직접 인용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다윗의 연이은 탄식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쉬운 번역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밥 먹듯이 나의 백성을 먹어치우고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다.’ 다윗이 왕이라면,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구체적인 손해를 입히고,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끼니를 채우기 위해 먹듯이 백성을 먹어치운다고 하니 악행이 일상화된 상태입니다. 보통 이러한 사람들은 착취하기 쉬운 가난한 자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대체로 부패한 종교와 정치 권력자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리 없으니 어찌 깨달음을 기대하겠습니까!

 

의인 편에 계신 하나님(5-6)

아무리 고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은덕을 베푸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랍니다. 살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종 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5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5-6)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깨달음도 없는 사람들의 최후를 밝힙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세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5). 이것은 시시때때로 일상의 삶에서 악인들에게 먹거리처럼 착취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의인들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믿고 선포한 말입니다. ‘의로운 세대’라는 표현은 적극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악인들의 희생물이 된 사람(4)을 통칭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세대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악행을 일삼던 무리를 심판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시행에서 의로운 세대와 평행관계를 위해 선택된 말인 ‘가난한 자’(6)의 피난처 되신 여호와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제 다윗은 악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고발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수치스럽게 했다. 여호와가 그의 피난처다’(6), 다윗은 행악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삶의 계획을 좌절시킨 자보이고 반합니다. 악인들의 횡포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주인 삼아갈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펴며 착취하였는데, 이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행악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가난한 자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행악자들의 행위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신 여호와가 피난처 되심을 믿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7)

시온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고난 중에 인내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반듸 역경에서 건져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하십니다. 당신이 포로가 된 듯 힘겹지는 않습니까? 때가 되면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

지금까지 다윗은 지혜자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성격을 묘사하여 행악자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무분별을 고발하며 탄식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탄식에 멈추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의인을 연결시켜 여호와가 그들의 피난처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러고서 갑자기 시온에서 시작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그 마무리는 독특하게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시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베풀 것인가?’(7a) 곧이어 다윗은 여호와가 회복시키실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그의 백성을 속박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기쁨으로 소리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7bc). 시온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며, 이스라엘의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포로의 땅에서 되돌려 보내실 여호와, 곧 운명을 되돌리실 여호와를 기대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전의 분위기와 달리 시행의 갑작스러운 내용 변화는 후대의 첨가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으나, 마지막 시행은 새로운 상황에 놓인 세대들에게 재해석과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가 악인들의 횡포가 만연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습니다. 출애굽과 함께 해방을 경험한 세대를 지나 포로기를 경험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후 모든 믿음의 세대들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기쁨은 오직 옛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이 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정욕 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인생의 모든 판단이 왜곡되어 약자를 짓밟다가 자신도 파멸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약한 자를 돌보고 행실을 의롭게 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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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3-01)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시편 13편 1-6절


고난의 끝이 언제일 모를 때 삶은 얼마나 힘겹습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다윗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질문과 탄식이 중심이지만, 끝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다윗의 현실 경험에서 비롯된 좌절감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변화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다윗의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변주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시입니다.

 

탄식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1-2)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근심하고 눈물로 침대를 적시며 밤을 지세운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밤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힘들 때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탄식하거나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1-2)

다윗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외치는 말에서 탄식과 절망 그리고 원망, 무기력함, 간청 등에 여러 가지 마음의 아픔이 읽힙니다. 다윗은 원수로 인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없자 너무 답답해합니다. 하나님께 언제까지 자기를 잊고 그의 얼굴을 영원히 숨기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서 이렇게 대하시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서 더 큰 절망감과 망망함을 느낌입니다.

이 질문은 1-2절 시행에서 4회 반복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질문합니다.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느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실 것입니까?’(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여호와의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잊는 것’과 ‘숨기는 것’이 서로 평행관계를 이루어 시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얼굴을 보이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를 상징합니다(민수기 6:24-26). 때문에 여호와가 얼굴을 숨기셨다는 말은 오랜 침묵과 관계 단절의 심각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교제가 중단된 것처럼 묘사하면서 비통함을 질문으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신 것 같은 괴로움과 무거운 마음을 질문으로 담아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지만, 원망이 아니라 갈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멀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느 때까지 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하고, 날마다 내 마음속 비탄에 빠져 있어야 하는지, 내 원수가 내 앞에서 떠벌리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합니까?’(2) 개역개정은 다윗의 목숨을 건 투쟁을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2a)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영혼’, 곧 ‘네페쉬’는 한 인간의 생명, 곧 목숨 그 자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영혼의 번민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생명을 걸고 내적 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히브리어 구문을 곧이곧대로 풀면 ‘내가 내 생명 다해 저항한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종일 근심합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민과 비통함이 언제 끝날지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자기 앞에서 떠벌리는 원수를 어느 때까지(2bc) 지켜봐야 하는지, 그것도 견딜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절박한 마음 상태로 죄 고백이나 참회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자신의 극심한 불안과 마음속 불평과 저항감이 더 큽니다.

그러면 다윗을 괴롭히는 ‘내 원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원수인가, 집합적인 개념과 민족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원수를 말합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문맥상 다음에 나오는 ‘죽음’을 ‘원수’로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극심한 고통이 질병 때문이라면,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원수는 죽음을 인격화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간구 : 내 하나님여, 나를 보시고 응답하소서(3-4)

정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면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다윗이 목숨을 건 내적 번민과 투쟁의 시간을 보내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지 않습니다. 창조자이며 보편적인 통치자를 강조하는 하나님을 호명하는데, 그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엘로하이)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바라보시고, 내게 응답하소서’(3a).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셨다고 생각했기에 제발 자기를 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윗의 언어가 거칠게 들려도 계속되는 기도는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 오직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고, 삶과 죽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혹시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습니다’(3b).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주시기를 믿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단지 신체적인 건강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하나님이여’라는 외침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생명이 끊어질 정도의 내적 고뇌와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때문에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활력을 주셔서 밝히 볼 수 있다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두 번째 두려운 이유를 자기 원수와 대적들의 말과 생각을 인용합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자기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라고 말할까 봐 두렵습니다. 또 ‘나의 대적들이 내가 넘어질 때 기뻐할까 봐 두렵다’(4). ‘나의 원수’와 ‘나의 대적들’을 구분지어 말합니다. 둘이 다른 것입니까? 앞서 다윗은 ‘내 원수’(2)가 자기를 치고 자랑하는 것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2) 하나님께 묻고 따졌습니다. 4절 첫 소절의 ‘나의 원수’는 다윗이 죽음을 인격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나의 대적들’은 단수 형태의 ‘나의 원수’와 다릅니다. ‘나의 대적들’은 실제적으로 괴롭히는 압박자들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듯 원수로 의인화한 죽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를 이겼다’(개역개정). 다시 말해 ‘내가 그를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땅에 속한 누구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죽음을 인격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죽음은 정복할 수 없는 최후의 사건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살고자 하는 열망의 표시로 ‘여호와, 내 하나님’을 부르며 죽음의 잠에 빠져들까 두려워 호소합니다.

다윗이 세 번째 두려운 것은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4b). 이 시가 다윗에게 속한 시집이라기보다 다윗의 시라면, 그가 왕의 자리에 있는 상황이라면, 왕좌와 왕권이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이를 확실하게 보증할 만한 언어적인 표시가 시행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적들’이라고 복수 형태로 말한 것과 ‘기뻐 소리치다’(4b)라는 동사절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제의적인 문맥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소리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것인 만큼, 다윗의 대척점에 있는 위협적인 세력들이 기뻐 날뛰는 모습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죽음과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실제적인 대적들 전부가 두렵습니다.

다윗의 거룩한 근심하던 세 가지를 살피면, 자신의 욕망에 대한 근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a)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희망 : 나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찬송합니다.(5-6)

하나님께서 지금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 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고집 센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 발짝 다가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고통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찬양할 수 있습니다.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5-6)

그럼에도 다윗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립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2)를 외쳤던 다윗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마음 한구석에 일렁이는 죽음과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발설하고서야 시인에게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탄식과 고발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에 대한 구체적인 표명은 없습니다.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나 동료들을 의지해야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신뢰합니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5). 5절은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과 ‘당신의 구원’이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이루어 의미를 확장하고 보충합니다.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시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기뻐 소리쳤지만(4), 이제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다윗이 기뻐 소리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실한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절망은 탄식과 고발을 거쳐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 몸서리치며 죽음이 두려웠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안에서 기쁨의 함성을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두려움을 딛고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다윗이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를 다루셨던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덕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116:7; 142:7).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어두운 현실로 소환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귀결이며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절망적인 고통과 탄식을 통과한 희망은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우리를 고난에 두시지만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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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2-01)


신실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

시편 12편 1-8절


 어려운 시기가 되면 의인들은 사라지고 악인은 도처에 도사리며 약한 자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악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행하며 악인 담긴 말로 궁핍한 의인들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힘없는 자는 위협하고, 힘 있는 들에게는 아첨합니다. 비열함이 성공을 부르는 때에 하나님께 소망을 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 시는 경거하고 진실한 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속임과 아첨의 말을 생산하는 악인들이 득세하는 현실을 탁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은처럼 순결하고 완벽히 제련되고 단련된 여호와의 말씀이 ‘누가 우리의 주인가?’를 외치는 자들의 말을 제거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비참한 자들과 궁핍함에 눌려 탄식하는 자들의 안전을 간구하고 확신하는 노래입니다.

 

의인이 없어 도움을 구하는 기도(1)

우리 시대는 사람들은 온통 악인들의 비열하고 무가치한 말들만 칭송합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 시대만 아니라 모든 시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광고, 유행어, 정치 구호, 독설이 숨 막힐 듯 난무하여 우리의 정신적, 영적 공간을 어지럽힙니다. 헛된 구호에 넘어가지 않고, 경건하게 신실하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1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다윗은 이 시 또한 첫 마디가 ‘여호와여 도우소서!’로 외칩니다. 갑작스런 외침으로 시작하니 도움이 절박한 상황입니다.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긴급하고 절박한 외침의 이유는 뒤따르는 시행에서 밝혀집니다. 사람들 중에 경건한 사람은 끊어졌고, 진실한 자들은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1b).

시의 첫 행과 마지막 행(8)에서 반복되어 호응하는 ‘인생 중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다윗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 중에 경건하고 신실한 자가 없어 탄식으로 여호와를 부르면서 긴급하게 구원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소리를 누가 들을 것입니까! 경건한 자들과 신실한 자들이 사라진 땅에서 호소하는 다윗의 목소리는 자신만 홀로 남은 것 같아 울부짖던 엘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닮았습니다(열왕기상 19:10).

‘경건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실하게 하나님께 몰두하여 헌신된 사람입니다. ‘충실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에게 진실한 사람이요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경건한 자나 충실한 자들은 하나님이 옛적 이스라엘에게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인애’(헤세드)와 ‘신실함’(에메트)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성에 기초한 사람들입니다(출애굽기 34:6).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사람들을 이 땅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갖춰야 할 삶의 본질인 진실과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는 세상에서 (호세아 4:1; 예레미야 5:1; 미가 7:2), 의인들이 악인들 앞에 불려가 제거되는(이사야 57:1) 참혹한 상황 때문입니까? 의인들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린 극한의 상황에서 시인이 여호와를 부르며 구원을 호소합니다.

 

거짓과 아첨하는 말이 난무하는 땅(2-4)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다들 자기 말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말을 꺾는 일입니다. 자신들의 말에 스스로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인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ㅍ빡하는 수단은 말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속이 텅 빈 헛된 말로 피해를 주고 감언이설로 마음을 흐리게 하며,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2-4)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 자취를 감춘 땅에서 세력을 떨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2).

다윗이 말하는 거짓말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공허하고 가치 없는 말입니다.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남을 속이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웃에게 부드러운 입술로 말합니다. 이웃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매끄러운 말로 마음을 훔칩니다. 그뿐 아니라 ‘두 마음으로’ 말합니다. 두 마음은 둘로 나뉜 마음, 이중 잣대를 가진 마음입니다. 히브리어의 ‘마음’은 의지, 양심, 지혜의 자리로서 생명의 중심 기관인 심장을 뜻하여 생명과 직결됩니다. 또한 마음은 생각이 만들어지는 곳이며, 한 인간의 의사결정기관입니다. 그런데 이중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땅을 차지했으니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 사람 사는 땅에서 사라졌고, 그래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1).

다윗은 ‘인생 중에’,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을 치고 들어와 맹위를 떨치는 자들과 거짓되고 아첨하는 말과 두 마음의 생각을 가진 무리를 특정하며 한탄합니다. 악한 행위 이전에 사람의 생각과 말의 본질이 갖는 위험성을 더 큰 문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제거해주시기를 여호와께 간청합니다(3).

악행의 근원인 말의 근원적인 기관을 끊어주시기를 바라는 구체적인 간청입니다. 특히 ‘자랑하는 혀’는 거만하고 잘난 체하며 뽐내는 말들을 모조리 일컫는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아첨하는 말만큼이나 제거되어야 할 악이 교만한 말입니다. 이러한 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말을 통해 세력을 키워 힘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그릇된 말로 구축한 힘을 가지고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을 억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들의 허황되고 교만한 말이 근절되기를 요청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오만함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4).

거만한 언어를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말을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고 말로 무엇이든 다 성취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누가 우리의 주님인가?’라고 질문하며 오만함의 극치를 보이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우리 주’(8:1)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과 정반대 생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순결한 말씀과 구원(5-6)

악인의 말에는 온갖 거짓과 불순함이 섞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곱 번 제련한 순수한 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켜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악이 횡행하고 의의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며 진실함을 지켜 가야 합니다.

5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5-6)

여호와가 주님인 것을 거부하는 교만한 자들의 말을 인용한 이후에(4), 다윗은 예언자가 계시 받은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비참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열망하는대로 내가 구원할 것이다’(5).

여호와가 말씀하신 강력한 두 문장이 눈에 띕니다. ‘이제 내가 일어날 것이다’, ‘내가 구원을 베풀 것이다.’ 이보다 더 힘이 되는 문장이 또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문장 앞에 ‘이제’(또는 ‘지금’)에 해당하는 부사 ‘앗타’ 때문에 생생한 현장감이 전달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가 가련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위해 친히 개입하시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개역개정)라는 말을 직역하면, ‘내가 구원을 베풀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1)라는 외침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 정확하게 실현됩니다. 다윗은 예언자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현실화할 것을 믿고 확신하며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여호와 말씀의 순결함과 완전함을 고백한 말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가치 없는 거짓말이나 겉만 번드르르한 아첨의 말, 두 마음을 품은 말로(2-3) 득세한 자들과 대비됩니다. 다윗은 일곱 번이나 정련한 은처럼 흠 없고 허위 없는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에 그분의 구원을 믿습니다.

 

비열한 자를 속에서도 안전을 확신(7-8)

교만한 세상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악이 횡행하며, 거짓과 처세에 능한 자들이 득세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자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은 의인들을 지키시고 그 나라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7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7-8)

긴박한 외침으로 도움을 청했고(1),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구원의 확신을 표명했습니다(5-6). 이제 한 번 더 응답에 대한 확신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말합니다. ‘여호와여, 당신만이 그들을 지키시고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우리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7).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순결하심과 완전성을 믿기에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2인칭 독립인칭대명사 ‘당신’을 첨가하여 그 누구도 아닌 ‘여호와 당신만이’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살던 ‘이 세대’는 거짓과 속임과 아첨의 말이 난무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다윗도 우리도 모르는 감추어진 미래의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보호가 지속될 것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보는 세상은 여전히 악합니다. 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인생 중에’ 높임을 받으며 날뛰는 세상입니다(8).

악인들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악인들이 마치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기막힌 세상입니다. 다윗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악이 곳곳에 만연합니다. 야비한 인간들이 창궐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다윗의 기도는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고, 사방으로 미쳐 날뛰는 사회일지라도 비참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시들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세상이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말들로 넘쳐날지언정 정련되고 순수한 여호와의 말씀이 거짓된 모든 말들을 제거할 날이 도래할 것을 꿈꾸며 기대하도록 마음을 붙들어줍니다.


 교회에서조차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세상의 지혜와 방법을 동원하고 입으로 시인한 것을 행위로 부인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실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악을 이겨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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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1-01)


꺾이지 않는 소망

시편 11편 1-7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하지만, 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에는 흔들리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진리가 아닌 부분은 진위나 흑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겸허히 반응하려면 어떤 훈련이 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시는 위기에 처한 시인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시입니다. 사회의 기초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탄식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기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위협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굳게 믿고 구원의 주를 찬양합니다.
 

여호와께 피신한 다윗(1-3)

사람들은 옆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때,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서 피하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께만 피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피할 곳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닌 참되게 현실을 돌파하는 길입니다. 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느낍니까? 도우실 수 있는 참 피난처, 하나님께 피하시길 바랍니다.
1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3)
다윗은 첫마디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이라고 고백합니다. 원어성경에서는 부사구 ‘여호와께’를 맨 앞에 위치시켜 강조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여호와’가 자기의 은신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당한 어려움 때문에 여호와 임재의 상징인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하며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는 뜻인지 모호합니다. 시편에서 이러한 표현은 도피처를 찾을 때 문학적인 습관처럼 사용되고 있으며(7:1; 31:1; 64:10; 71:1), 현재의 문맥에서는 둘의 기능적 차이를 구분하는 것보다 통합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후에 나오는 갑작스러운 질문이 이상합니다. ‘어떻게 너희가 내게 말할 수 있느냐?’(1b) 질문에 분노가 섞인 듯합니다. 누군가 다윗에게 ‘새처럼 너희의 산으로 도망하라’(1c)고 말했습니다. ‘너희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이 친구들의 말인지,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인지, 누군가의 조롱 섞인 충고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상황이 다윗을 추적하던 사울과 관련된 맥락이라면, 다윗이 사울에게 사냥꾼이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듯이 벼룩 한 마리 같은 나를 잡으려고 나를 찾아 나섰느냐고 질문한 상황을 연상시킵니다(사무엘상 26:20).
다윗이 자기의 위기 상황을 분명히 직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기에서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고 냉정해지는 것은 쉽지 않은데 다윗은 도망치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호와를 은신처로 삼고 여호와께 피할지언정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이미 활을 당겨 공격할 준비를 끝낸 상황입니다.
‘보라, 그 악인들이 활을 당겼다’(2a). 개역개정은 감탄사 ‘보라!’를 생략했지만 이 감탄사는 놀람과 두려움에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더군다나 ‘그 악인들’이라고 정관사를 붙여 악인들을 특정하고 있기에 훨씬 생생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어두운 데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2cd).
다윗은 위험하고 절박한 이 상태를 정확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 악인들이 정직한 자들을 겨누고 있으니 불안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입니까? 다윗은 혼잣말로 탄식합니다. ‘기초가 무너지는데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3) ‘터’, 곧 ‘기초’가 무너졌습니다. 기초 질서가 무너져 법과 공의가 무너진 상태를 표현한 은유입니다(시편 75:3; 에스겔 30:4).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새번역), 즉 법과 질서가 무너져 악인들이 어두운 데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과 의인들을 죽이려는 위기 상황입니다.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기초적인 체계들이 흔들리는 상황에서(참조. 에스겔 30:4) 의인의 무력감은 커집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피했다고 말하지만(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이 질문은 예나 지금이나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정의는 항상 늦게 도착하니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까?
 

성전과 하늘에서 감찰하시는 여호와(4) 

성도들은 썩어가는 세상을 보며 냉소와 체념과 한탄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을 꿰뚫어 보시고 구석구석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잠시 이기는 듯 보이더라도 이에 영합하거나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불의를 보면서 탄식하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다윗은 인생을 감찰하시는 여호와께 시선을 고정하며 위기의식과 무력감을 회복합니다. 자기 시선을 위협적인 적들에서 하나님께로 고정합니다. 시인이 말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도다. 여호와가 하늘 보좌에 계심이여 그가 인생들을 통촉하시고 그의 번쩍이는 눈으로 감찰하신다’(4).
거룩한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는 하늘 보좌에 계신 여호와입니다. 성전은 이 땅에서 하나님 임재의 처소이자 이스라엘 신앙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은 건물을 초월하여 하늘 보좌에 계신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땅 끝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살피시는 초월적인 전능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지극히 높으신 이’(시편 7:17)로서, 세상을 판결하시고(시편 7:6) 지상 성전에 계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인식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습니다. 가까이 계시면서 동시에 멀리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시인을 힘 있게 합니다. 다윗은 지상 성전과 하늘보좌에 계신 여호와가 인생들을 치밀하게 주목해서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감찰하시다’라는 말은 검사하고 조사하고 심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안목으로 감찰하신다고 할 때, ‘그의 안목’은 문자적으로 ‘그의 눈꺼풀’입니다. 이 단어는 ‘빛을 발하는 눈’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가 빛나는 눈으로 치밀한 조사를 하십니다. 동시에 여호와께서 땅의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조목조목 사람의 사정을 살피시는 분, 곧 통촉하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멸망과 의인의 안전(5-7)

악으로 잔을 채운 자는 심판 때 그 잔을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행하는 자는 그분을 뵈옵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몸과 마음의 잔에 무엇을 채우며 살아갑니까? 세속의 욕심을 채운 자는 진노의 잔으로, 정직과 신실을 채운 자는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 편이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5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5-7)
악인과 의인을 다루시는 여호와의 공정함과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고백합니다. 다윗은 앞서 여호와를 인생들을 속속들이 조사하시는 조사관처럼 고백했는데, 동시에 의인을 시험하시고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악인들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을 마음속 깊이 미워하십니다(5). 의인을 감찰한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감찰하다’라는 말은 금속을 녹여서 불순물을 없애고 검사하는 뜻을 포함하기에 의인에게 좀 더 순도 높은 정화를 목표합니다. 어쩌면 의인이 당하는 삶의 고난은 삶의 순수성을 높이는 훈련일 것입니다. 반면에 악인들과 폭력을 일삼는 무리를 몹시 싫어하시며 악인들에게 그 어떤 것도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악인들에게 줄 것이 있다면, 불시에 덮치는 그물이며 비처럼 쏟아지는 불과 유황이며 태우는 바람입니다. 이것들이 악인들의 잔에 채워질 소득입니다(6).
다윗은 악인에게 내려질 여호와의 심판을 확신합니다. 비처럼 쏟아지는 불과 유황, 불태우는 바람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을 연상시킵니다(창세기 19:24-25). ‘유황’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불입니다(창세기 19:24; 에스겔 38:22; 누가복음 17:29; 요한계시록 9:17-18). 이 모든 일들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새들을 잡기 위해 던지는 덫 같습니다. 비처럼 내리기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악인들의 잔은 구원의 잔이 아니라 진노의 잔입니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기 꾀에 넘어져(시편 7:16) 심판받는 차원과 다릅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직접 행하시는 심판입니다. 악인들과 폭력을 즐기는 자들을 미워하시는 여호와(5)가 그들의 철제한 파멸을 어떻게 실행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정의로우시고 정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7a). 번역 과정에서 소실된 이유 접속사 (키)가 7절 맨 앞에 위치하므로 6절과 7절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악인에게 무섭게 쏟아지는 불과 매우 대조되는 분위기입니다. 여호와의 정의로움 때문에 정의로운 행동과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라(7b) 선언하며 마무리합니다. ‘정직한 자’는 올바르고 비뚤지 않고 곧은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고백적 선언은 첫 소절, ‘정직하다’와 서로 호응하여 의로우신 여호와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반응이 정직함으로 드러나야 함을 묘사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실질적인 힘이 작동합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실제적인 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변호를 받는 것이요, 구원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개입을 알기에 ‘여호와께’ 피신했다고 말한 것처럼(1), 그는 위기 상황에 던져졌어도 여호와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의인들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에서는 다른 피난처를 생각하라며 유혹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고난의 자리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만 피난처 삼겠다는 시인의 결기를 배워서 우리도 단호하고 의연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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