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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2)

 

 


나를 도우신 하나님

시편 18편 16-29절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질 때 우리는 밖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현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믿음으로 도약을 시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인 다윗은 약자를 구원하시는 하니님을 선포하기 위해 옛적 애굽으로부터 자기 조상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켜 자신과 모세의 지도력을 연결시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이유가 그의 규례와 율례를 따라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는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기초합니다.

 

악한 자들 구원하시는 하나님(16-19)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듯 다윗을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져내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넓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16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6-19)

 

다윗은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후(7-15), 그는 여호와가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셔서 자기를 붙잡아주시고,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동사로 표현합니다(손을 펴시고, 불잡으시고, 건지셨다).

그런데 다윗은 ‘그가 나를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b)고 할 때, ‘건져내다’는 ‘마샤’로 ‘모세’의 어근 동사입니다. 이는 ‘건져진 자’라는 뜻의 모세를 상기시킬 뿐 아니라, 나일 강에서 건져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출애굽기 2:10) 자신을 연결합니다. 더군다나 많은 물은 헤어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물이며, 위험한 물로서 죽음의 물을 상징합니다. 옛적 애굽의 범람하던 강물이 생명의 강이 아니라 영아를 학살하는 죽음의 강이었던 것처럼, 다윗은 많은 물의 위협에서 구원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다윗에게 좀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힘이 센 강한 원수와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주님이 구원하셨다(17)고 말합니다. 강자의 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묘사입니다. 다윗은 이를 내세워 자기 원수를 힘 센 강자로 표현하고 반면에 자신의 무력함을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또한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몰려온 그 재앙의 날에 하나님이 의지가 되셨다(18)고 회고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분으로 거칠고 험악한 삶을 살던 시절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 추적했던 때를(사무엘상 23, 24, 26장) 회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 왕의 강한 힘 앞에서 다윗은 무기력한 도망자였습니다. 왕의 군사들의 좁혀오는 추적 앞에서 두려웠을 다윗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를 위해 일하셨던 은혜를 기억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진실의 문을 열어 현재의 고통에 희망을 건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19). 좁고 험하고 거친 협곡들과 동굴에 숨어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상태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은 여호와가 자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19b)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스스로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떠나지 않은 삶과 보상(20-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자비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성품 그대로,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완전하며 깨끗한 마음을 품은 이들에겐 마땅히 받을 대접을 받게 하시되, 사특한 자는 거부하십니다. 종종 세상은 의인의 알 수 없는 고난과 악인의 흥왕함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과 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였음이로다 23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20-24)

 

다윗은 이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고, 내손의 깨끗함에 따라 내게 갚으셨다’(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충실히 지키신 것처럼, 다윗이 그 언약의 규범들을 지키는 일에 충실했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운 삶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특히 ‘내 의’와 ‘내 손의 깨끗함’은 살면서 올바름과 순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도덕적인 완결성을 표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의 의로움과 깨끗함을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데, 이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상해주신 이유들을 더 상세히 나열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21).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나의 하나님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정하신 ‘길’, 곧 하나님이 정하신 ‘생활양식’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서 우주를 창조하신 보편적인 명칭, ‘하나님’과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동시에 언급합니다(21). 이는 세계를 지으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구원하신 여호와라는 동일성을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규례가 자기 앞에 있고,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22). ‘규례’는 세부적인 법률적 항목들을 가리키며, ‘율례’는 성문화된 법령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명기 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열왕기상 2:3) 이 둘의 예리한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언약 관계 안에서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세부 항목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들에서도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고,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합니다(23). ‘완전하다’라는 말은 흠이 없고, 지탄받을 만한 어떤 일도 행하지 않고 정직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평행적 관계를 고려하면, ‘완전함’은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규범을 버리지 않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따라 되갚아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4). 다윗은 ‘갚아주다’라는 말을 반복할 만큼(참조. 20)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확신합니다.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25-29)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에게는 신실함을, 흠 없는 자에게는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을 보이기고, 불쌍한 백성은 자비로움으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약하고 사특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여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성품 그대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25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7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5-29)

 

지금까지 하나님을 ‘여호와’와 3인칭으로 호명하다가 2인칭 ‘당신’ 으로 바꿉니다. 자기 의를 갚아주신 하나님과 보편적 인류 사이에서 여호와를 '당신’으로 호명하고 그분의 성품을 밝힙니다.

‘경건한 자에게 당신은 진심으로 대해주시고, 완전한 자에게 당신의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25).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와 삶의 태도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완전한 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맛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하심으로, ‘사악한 자’, 곧 비뚤어지고 거짓된 사람은 혹독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26).

요약하면, 여호와는 신실한 자에게 자비로우십니다. 하지만 불법적이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성에 기초합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당신은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사람의 눈을 굴복시키십니다’(27). 곤고한 백성은 가난, 궁핍, 환난으로 비참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지만, 이들과 대조되는 교만한 자는 눈을 낮추시고 굴욕을 당하게 하십니다. ‘교만한 눈’은 말 그대로 하면 높아진 눈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의 교만에 대한 외적 표현입니다. 오만하고, 도도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태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오만함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자들을 깎아내리시고, 낮추시고, 창피를 주셔서 더 이상 오만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 삶을 성찰하며 고백합니다. ‘참으로 여호와 당신은 나의 등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28). 그는 앞서 자신을 죽음과 스올에 갇힌 사람 같았다고 했지만(4-5), 그 깊은 어둠의 세계에서 등불을 들고 어둠의 세계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신 등불 때문에 죽음과 시련의 어둠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대조는 성경 전체에서 고루 발견되는 일반적인 은유입니다. 어둠은 죽음의 세계와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반면, 빛은 질서와 생명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원수들과 사울의 손에서 여호와가 구원하신 것을 찬미하며 노래할 때(사무엘하 22장) 고백한 말입니다(사무엘하 22:29).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에라도(사무엘하 7장) 자신의 등불이 꺼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참조, 열왕기상 11:36; 15:4; 열왕기하 8:19).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적군을 향해 나가고 하나님과 함께 적의 요새와 성벽을 무너뜨리고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9). 이는 다윗이 아말렉 군대를 비롯한 적의 군대를 추격할 때, 참 용사이신 하나님만 의지했던 신앙 고백입니다.


 

캄캄한 어둠일지라도 주님께서 등불을 밝히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함께하시면, 내달려 적군을 쫓고 높은 성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랜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능력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 확신을 위해 오늘 당신이 쌓아야 할 경험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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