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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9-01)


 신기한 하나님의 솜씨

시편 19편 1-14절


우리는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자신을 제시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를 묵상하며 오늘 하나님께 어떤 찬양을 올려 드리겠습니까?

 

19편은 그 어떤 시편보다 히브리 시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장엄하믈 묘사한 노래이며, 청조 세계를 통한 계시와 ‘토라’(율법)를 통한 계시가 분리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총임을 노래합니다. 온 우주와 태양의 질서는 토라와 양심의 세계로 깊게 침투하여 구속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며,정직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계시와 영광(1-6)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귀가 열린 이는 온 누리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매우 빠르게 살면 영혼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때 밖으로 나가 창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1-6)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연이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은혜 되는 것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 하늘의 계시(1-2)

 

하나님의 계시는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시의 첫 단락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1).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하는 1절은 하늘과 창공이 이어져 자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강조는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나타낸다’는 분사 구문의 동사 활용에서 제시됩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2). 날은 또 다른 날에게 이어지고, 밤은 또 다른 밤으로 이어져 낮과 밤의 질서가 교란되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우주 질서를 대표하는 날과 밤이 지식의 계시자로 인간 세계에 공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만 언어로 소통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날과 밤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여 쉼 없이 서로에게 정보와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2) 말 없는 계시(3-4)

 

다윗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우주의 속삭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3), 온 땅에서 서로 어울려 그 무늬가 퍼져 나옵니다. 그 말이 세상 끝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셨습니다(4). 다윗의 묘사처럼, 우주 질서는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의 수단이며 우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입니다.

 

(3) 해를 통한 계시(5-6)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신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장막’(오헬)은 거주와 쉼을 위한 공간입니다. 해가 장막에서 휴식을 취하는 영상은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5a)는 소절로 연결됩니다. 해가 마치 밀월의 기쁨을 나누는 신랑처럼 그려졌습니다. 또한 달리기를 기뻐하는 전사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5b) 하늘 길을 달리는 태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고대 수메르 신화처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매일 영광스럽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힘을 노래합니다. 하늘에서 시작하여(1) 하늘 저 끝에 이르는 태양의 힘찬 운동을 통해(6)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평범한 하루가 우주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며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의 세계임을 깨닫습니다.

 

여호와의 가르침(토라)을 통한 계시(7-11)

해는 해맑은 모습으로 떠올라 힘센 용사처럼 하늘을 달립니다. 만물이 해의 온기에서 생기를 얻듯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서 인간은 생명을 얻습니다. 과학만능과 물질 최고의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 신비를 경험하는 감수성을 가다어야 합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7-11)

 

다윗은 시선을 바꾸어 여호와의 율법(토라),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찬미하며 묵상합니다. 다윗은 토라에 대한 아름다움을 완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규명합니다. 완전함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그 증거의 확실함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만듭니다(7). 온 우주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십니다. ‘토라’는 여호와의 증거입니다. 곧 ‘경고 표시’로서 어수룩한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8a). 교훈도 ‘토라’처럼 삶의 방향을 안내하는 훈령으로서 사람의 의지와 정신을 즐겁게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여호와의 ‘계명’(미츠바)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8b).

불순물 없는 밝고 깨끗한 ‘명령’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빛나게 합니다.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관점과 인식의 체계를 얻은 상태를 말합니까? 이뿐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릅니다(9ab). 여호와의 ‘율법’이 증거, 교훈, 계명으로 분화되어 표현되었지만, 다윗은 ‘토라’를 ‘여호와 경외’와 동의어처럼 제사하여 영원히 가치와 삶의 원리로서 찬미합니다. 그 근거는 정결함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법’(미슈파트)은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9bc). 결국 여호와 가르침(토라)의 절정은 진실한 법으로서 의로움(체덱)을 그 속성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를 비유와 암시로 풍부하게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천체 운동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여호와의 ‘가르침’, 곧 그의 법의 인간 삶에서의 기능을 밝혀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백성에게 베풀어지는 구속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에 포함된 속성들이(7-9) 금보다, 순금보다 더 만족스러우며(10ab), 꿀보다 달콤하고 흘러넘치는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고(10cd) 고백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언약의 주님으로서 주신 포괄적인 ‘가르침’(토라)은 복된 삶, 곧 복음적인 삶의 바탕이 됩니다. 다윗은 ‘당신의 종이 이 가르침으로 경고를 받고 지켜서 받는 상이 크다’(11)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말은 여호와의 법을 중심에 둔 삶의 기쁨과 그 결과를 확신하는 믿음의 증언입니다.

 

토라에 대한 반응-고백과 헌신(12-14)

말씀은 태양처럼 백성을 살게하는 근원입니다. 시든 영혼을 소성케 하고,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며, 참 되고 순수하여 우리의 눈을 밝혀 의의 길을 가게 합니다. 말씀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지친 영혼을 위해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2-14)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 영광 찬미는 다윗의 내적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낮과 밤의 교차와 태양의 운동을 보며 환희에 찬 하나님 영광을 맛보고, 그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가르침(토라)을 찬미했습니다. 그 영광의 빛에 자신을 비춰 봅니다. ‘허물들을 깨달을 자 누구인가? 나의 숨겨진 허물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12). ‘잘못’이나 ‘허물’은 ‘정도를 벗어나 곁길로 간다’는 말에서 파생되어 ‘오류’와 ‘무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또한 수사학적인 질문의 숨은 의도는 죄에 대한 고발입니다. 누구도 숨겨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과 무지의 죄를 깨닫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는 ‘당신의 종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소서’(13a)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기도는 구체화되어 ‘그 죄’, 곧 거만한 의지에서 발동한 ‘고의적인 죄들’이 나를 주장하지 말게 해달라는(13b) 간구가 됩니다. 그때 비로소 다윗은 ‘내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큰 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13cd)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당신의 종’(주의 종)으로 낮추면서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결백하기를 구합니다.

마지막 시행에서 다윗은 엄숙하게 구속자 여호와를 고백하고 헌신을 다짐합니다. 14절의 개역개정 배열은 본래 히브리 본문 시행과 다릅니다. 의미상의 차이는 없지만 묵직한 여운을 느끼려면 히브리 시행 순서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하늘과 태양, 곧 우주가 하나님 영광을 선포한 것(1)에 이어, 언약의 주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가르침의 아름다움을(7-9) 노래합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합니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14ab).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2), 다윗은 자신의 말이 헛되지 않고 여호와가 기쁘게 받으실 제물이 되길 빕니다. 더군다나 ‘묵상’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포함된 것입니다. 다윗은 앞서 자신의 내밀한 것들까지 하나님 앞에 수렴되기를 바라며, 거짓이 없고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13) 간구합니다.

마지막 그의 간결하고 확실한 고백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입니다’(14c). 그가 선포한 창조자 하나님은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나’ 한 사람의 피할 반석과 구속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연대감을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구속자’(고엘)는 구약에서 법적인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사람의 빚을 갚아주고 자유를 얻게 해주는 사람이 ‘고엘’, 곧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옛 조상들을 애굽의 노역으로부터 빼내어 속량하신 (구속하신, 출애굽기 6:6)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의 폭압적인 통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로 고백하듯, ‘구속자’는 폭력적이고 노예적인 모든 종류의 삶에서 구출해주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참조, 이사야 54:8).


 다윗은 말씀에 비추었음에도 미쳐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다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듣고도 돌이키지 않을 만큼 완고한 종이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의 사람만이 죄의 무서움을 알고 두려움을 갖습니다. 민감한 분별력을 구하며 말씀이 낳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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