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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6-01)


주님만이 나의 유산

시편 16편 1-11절


살다보면 원치 않지만 때로 큰 시련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특히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분들을 보면 커다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순금같이 나와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피할 곳 없는 고통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16편은 위기에서 주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흔들리리지 않을 것을 찬양합니다. 이 때문에 신뢰의 시(또는 확신의 시)로 분류됩니다. 다윗은 주님을 섬기는 자와 다른 신을 섬기는 자의 대조적인 운명을 묘사하며 궁극적으로 상급을 주시는 주님의 복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주가 베푸신 생명의 길에서 다윗은 자신의 기쁨이 영원할 것을 확신합니다.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1-4)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시련의 한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이 그 백성들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경건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죽음을 걱정할 만큼 큰 고난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주님의 모범을 따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1-4)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며 보호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을 지켜달라는 요청과 당신께 피한다는 고백(1)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신뢰의 표시로 보입니다. 다윗은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직접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아뢴 것이 이미 있어 보입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 말고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2). 당신이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한 것은, 하나님 말고 누구도 ‘나의 복’(2b)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은 직역하면 ‘나의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 곧 ‘토바(ה󰔧וֹט)’는 누군가의 ‘호의’, ‘행복’ 또는 ‘구원’, ‘성공’과 관계된 말입니다. 다윗은 행복과 성공, 구원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정확히 압니다. 또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자들이며 자기의 모든 기쁨이라고 선언합니다(3). 성도들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표현한 말입니다(레위기 19:2; 민수기 16:3; 신명기 33:3; 시편 34:9).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방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종 됨의 위치를 선언하고, 백성들과 자신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신들에게 달려가서 예물을 바치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피의 전제를 바치지 않을 것이며, 내 입술은 그 이름도 부르지 않을 것’(4)이라고 고백합니다.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성도들과 다른 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이때 이방 신들을 따르는 자들이 피로 빚은 술을 붓는 ‘피의 전제’를 다윗 자신은 하지 않겠다(4ab)는 표현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동물의 피를 부어 바치는 의식을 언급한 것은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양상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시대에 몰렉에게 자기 자식을 불살라 바친 배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충격적인 이교 의식을 병행했던 역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입술로 그 어떤 신들의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겠다고(4d) 분명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선포입니다.

 

나에게 기업이 되신 여호와(5-8)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내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신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른 신을 의지하는 것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주님이시고 주님밖에 행복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의지한다면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8)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겠다고 하였고 그분만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고백했습니다(1,2). 우상 일상들을 향한 피의 제사와 우상의 이름 부르기를 거부하고 비판한 만큼(4) 여호와가 나의 산업과 나의 잔 자기의 소득이고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5).

‘나의 산업’은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지파별 인구 비율대로 할당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1장). 그런데 다윗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 여호와가 ‘나의 할당 받은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가 ‘잔의 소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나의 잔’입니다. 이 말은 이방 신들에게 부어 바치는 ‘피의 전제’와 비교되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음료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거기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꼭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5b). ‘분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땅을 분배받을 때 ‘분배받은 몫’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주신 땅의 약속을 빗대어 하나님만이 자기 운명을 보장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적인 선포입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행복한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찬양합니다(6,7).

다윗은 여전히 옛적 조상들이 분배받았던 땅을 상기시키는 은유를 활용하여 노래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6a),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자기를 위해 주님이 행하신 모든 곳이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로 분배해주신 땅을 받고, 감격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나는 나에게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니,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다윗은 자신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고요하고 적막한 밤중에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양심’은 본래 고대인들에 의해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기관으로 불리는 ‘콩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체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았기에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관입니다. 가장 깊고 내밀한 몸의 기관이 교훈한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루의 치열한 일상을 마무리하는 어두운 밤마다 자기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기 행동을 바로잡습니다. 다윗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기 행위를 수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면밀히 듣고, 자기 교정이 가능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8a)고 고백합니다. 왜입니까?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8bc). 다윗은 자기편이 되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드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자기 노력보다 먼저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확신합니다.

 

나의 기쁨이신 여호와(9-11)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고 풍성한 소산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백성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잠시 기업을 잃고 방황할지라도 언젠가 되찾아주실 것입니다. 줄로 재어 주신 기업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 유산을 기뻐하며, 빛나는 것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9-11)

다윗은 자신을 요동치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기에(8) 노래합니다.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겉 사람도 즐거워하니, 내 몸도 안전하리라’(9), 다윗은 주님의 붙드심 때문에 전인격적인 즐거움과 안전을 신뢰하고 확신합니다. ‘겉 사람’(카보드 דוֹבכּ)이 ‘영’(개역개정)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전적인 뜻은 ‘무거움’, ‘겉모습’, ‘영광’, ‘영광의 표시’, ‘탁월함’ 등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 몸의 안전까지 확신합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에 새겨진 속사람의 기쁨이 겉사람의 즐거움으로 채워져 안전함으로 확장되는 삶을 꿈꾸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의 충만함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다는 표명입니다.

이후 자신의 기쁨과 안전의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는 당신이 내 생명을 스올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a). ‘스올’은 지하세계이며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다윗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던 시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죽음의 위기가 닥칠 것을 예상한 것입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이 죽음의 세계로 던져 넣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기쁨과 안전을 확신합니다. 이 또한 여호와가 당신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10a)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개역개정)는 ‘경건한 자’이며, 3절의 성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약속 안에서 신실하며 헌신된 자들입니다. ‘멸망’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표현하기 위한 ‘구덩이’ 또는 ‘무덤’을 뜻하며, 시행에서 ‘스올’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당신의 경건한 자가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신뢰에 칸 마지막 고백으로 남겼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을 내게 알리실 것이고/당신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당신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11). 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평생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내세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는 것 소절, ‘당신이 내게 일평생 사는 방법(또는 길)을 알게 하셨다’(11a)는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의 임재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 넘치는 삶의 가치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다윗은 기쁨을 잃지 않고 평안을 경험합니다. 날마다 일깨워주시고 밤마다 교훈해 주시는 주님과 생생한 교제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손상되면,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말씀이 당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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