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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4-01)


 의인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14편 1-7절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허탄한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지혜를 자랑하나 실상 어리석고 부패하여 악한 행실만 가득합니다. 떡 먹듯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삼키면서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고 불의한 세계에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시편 14편은 어리석은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의 성격을 다룹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어리석은 사람으로 정의되고, 그는 의인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지혜로운 의인의 탄식을 축발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14편은 어리석음과 의로움의 주제, 그리고 시온에서 시작되는 구원과 찬양의 주제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악행과 착함의 부재(1-3)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십니다. 땅은 완고하고 타락한 죄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찾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찾으신 그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3)

다윗이 게속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구한 결과, 인간들이 받은 큰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먼저 그런 어리석은 자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규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1a).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나도 피할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리석다’라는 말이 구약성경에서 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습니까?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식과 판단력이 뒤떨어지는 상황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는 지혜 있음의 반대적인 의미이며, 우매하고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신명기 32:6). 분별력이 없고 무감각하거나 몰상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참조. 이사야 32:6).

다윗이 바라본 어리석은 자는 그 행실이 부패하거나 가증하며,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1bc).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과 ‘좋은’ 행실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속 말은 생각을 반영하며, 생각은 행동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부패하고 가증한 행동을 낳습니다. 그 삶에 ‘좋은’ 행동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어리석음의 성격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사고와 악한 삶의 방식으로 규명합니다. 무엇보다 ‘좋음’은 도덕적 기준에 맞는 정당함을 뜻하고 ‘선’(善)을 뜻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의 상태를 벗어난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어긋난 모든 행위들은 ‘선’, 곧 ‘좋음’과 ‘아름다움’이 없는 삶입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하늘에서 인생들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고 계시다고 말합니다(2). 어리석은 자의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과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주를 기획하고 만드신 ‘하나님’이 그분을 찾는 자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시는 영상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과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면서 세계를 질서 있게 운행하는 이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안타깝습니다. ‘모두 다 치우쳐 있고, 함께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3). 다윗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1c)고 말했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선’(착함)의 부재를 탄식합니다. 흥미롭게도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좋음’(선)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그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 치우쳤고, 모두 함께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는 부정한 뇌물이 통하는 방식을 서로 공유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군다나 모두 올바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한쪽으로 치우쳐 빗나간 상태입니다. 이때 다윗은 ‘모두’, ‘함께’라는 말을 덧붙여 악으로 치닫는 공동체의 결탁과 타락의 전체성을 꼬집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3:10-18). 이처럼 전부가 타락했으니 ‘선’을 실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창세기 6:12). 또한 온 인류가 공모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기 위해 바벨탑을 쌓던 태곳적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창세기 11:19). 한쪽으로 치우쳐 선이 부재한 시대를 바라보며, 쏟아내는 통렬한 탄식의 목소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외침입니다.

 

행악자들의 무지(4)

악한 자들은 돈과 권력으로 약한 자들을 삼키려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만, 결국 두려움 가운데 살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도와시고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힘없고 가난하다고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4절은 다윗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호합니다. 직접 인용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다윗의 연이은 탄식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쉬운 번역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밥 먹듯이 나의 백성을 먹어치우고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다.’ 다윗이 왕이라면,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구체적인 손해를 입히고,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끼니를 채우기 위해 먹듯이 백성을 먹어치운다고 하니 악행이 일상화된 상태입니다. 보통 이러한 사람들은 착취하기 쉬운 가난한 자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대체로 부패한 종교와 정치 권력자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리 없으니 어찌 깨달음을 기대하겠습니까!

 

의인 편에 계신 하나님(5-6)

아무리 고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은덕을 베푸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랍니다. 살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종 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5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5-6)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깨달음도 없는 사람들의 최후를 밝힙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세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5). 이것은 시시때때로 일상의 삶에서 악인들에게 먹거리처럼 착취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의인들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믿고 선포한 말입니다. ‘의로운 세대’라는 표현은 적극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악인들의 희생물이 된 사람(4)을 통칭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세대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악행을 일삼던 무리를 심판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시행에서 의로운 세대와 평행관계를 위해 선택된 말인 ‘가난한 자’(6)의 피난처 되신 여호와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제 다윗은 악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고발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수치스럽게 했다. 여호와가 그의 피난처다’(6), 다윗은 행악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삶의 계획을 좌절시킨 자보이고 반합니다. 악인들의 횡포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주인 삼아갈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펴며 착취하였는데, 이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행악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가난한 자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행악자들의 행위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신 여호와가 피난처 되심을 믿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7)

시온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고난 중에 인내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반듸 역경에서 건져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하십니다. 당신이 포로가 된 듯 힘겹지는 않습니까? 때가 되면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

지금까지 다윗은 지혜자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성격을 묘사하여 행악자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무분별을 고발하며 탄식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탄식에 멈추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의인을 연결시켜 여호와가 그들의 피난처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러고서 갑자기 시온에서 시작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그 마무리는 독특하게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시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베풀 것인가?’(7a) 곧이어 다윗은 여호와가 회복시키실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그의 백성을 속박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기쁨으로 소리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7bc). 시온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며, 이스라엘의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포로의 땅에서 되돌려 보내실 여호와, 곧 운명을 되돌리실 여호와를 기대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전의 분위기와 달리 시행의 갑작스러운 내용 변화는 후대의 첨가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으나, 마지막 시행은 새로운 상황에 놓인 세대들에게 재해석과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가 악인들의 횡포가 만연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습니다. 출애굽과 함께 해방을 경험한 세대를 지나 포로기를 경험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후 모든 믿음의 세대들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기쁨은 오직 옛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이 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정욕 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인생의 모든 판단이 왜곡되어 약자를 짓밟다가 자신도 파멸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약한 자를 돌보고 행실을 의롭게 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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