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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1-01)


꺾이지 않는 소망

시편 11편 1-7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하지만, 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에는 흔들리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진리가 아닌 부분은 진위나 흑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겸허히 반응하려면 어떤 훈련이 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시는 위기에 처한 시인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시입니다. 사회의 기초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탄식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기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위협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굳게 믿고 구원의 주를 찬양합니다.
 

여호와께 피신한 다윗(1-3)

사람들은 옆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때,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서 피하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께만 피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피할 곳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닌 참되게 현실을 돌파하는 길입니다. 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느낍니까? 도우실 수 있는 참 피난처, 하나님께 피하시길 바랍니다.
1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3)
다윗은 첫마디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이라고 고백합니다. 원어성경에서는 부사구 ‘여호와께’를 맨 앞에 위치시켜 강조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여호와’가 자기의 은신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당한 어려움 때문에 여호와 임재의 상징인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하며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는 뜻인지 모호합니다. 시편에서 이러한 표현은 도피처를 찾을 때 문학적인 습관처럼 사용되고 있으며(7:1; 31:1; 64:10; 71:1), 현재의 문맥에서는 둘의 기능적 차이를 구분하는 것보다 통합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후에 나오는 갑작스러운 질문이 이상합니다. ‘어떻게 너희가 내게 말할 수 있느냐?’(1b) 질문에 분노가 섞인 듯합니다. 누군가 다윗에게 ‘새처럼 너희의 산으로 도망하라’(1c)고 말했습니다. ‘너희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이 친구들의 말인지,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인지, 누군가의 조롱 섞인 충고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상황이 다윗을 추적하던 사울과 관련된 맥락이라면, 다윗이 사울에게 사냥꾼이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듯이 벼룩 한 마리 같은 나를 잡으려고 나를 찾아 나섰느냐고 질문한 상황을 연상시킵니다(사무엘상 26:20).
다윗이 자기의 위기 상황을 분명히 직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기에서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고 냉정해지는 것은 쉽지 않은데 다윗은 도망치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호와를 은신처로 삼고 여호와께 피할지언정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이미 활을 당겨 공격할 준비를 끝낸 상황입니다.
‘보라, 그 악인들이 활을 당겼다’(2a). 개역개정은 감탄사 ‘보라!’를 생략했지만 이 감탄사는 놀람과 두려움에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더군다나 ‘그 악인들’이라고 정관사를 붙여 악인들을 특정하고 있기에 훨씬 생생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어두운 데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2cd).
다윗은 위험하고 절박한 이 상태를 정확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 악인들이 정직한 자들을 겨누고 있으니 불안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입니까? 다윗은 혼잣말로 탄식합니다. ‘기초가 무너지는데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3) ‘터’, 곧 ‘기초’가 무너졌습니다. 기초 질서가 무너져 법과 공의가 무너진 상태를 표현한 은유입니다(시편 75:3; 에스겔 30:4).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새번역), 즉 법과 질서가 무너져 악인들이 어두운 데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과 의인들을 죽이려는 위기 상황입니다.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기초적인 체계들이 흔들리는 상황에서(참조. 에스겔 30:4) 의인의 무력감은 커집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피했다고 말하지만(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이 질문은 예나 지금이나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정의는 항상 늦게 도착하니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까?
 

성전과 하늘에서 감찰하시는 여호와(4) 

성도들은 썩어가는 세상을 보며 냉소와 체념과 한탄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을 꿰뚫어 보시고 구석구석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잠시 이기는 듯 보이더라도 이에 영합하거나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불의를 보면서 탄식하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다윗은 인생을 감찰하시는 여호와께 시선을 고정하며 위기의식과 무력감을 회복합니다. 자기 시선을 위협적인 적들에서 하나님께로 고정합니다. 시인이 말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도다. 여호와가 하늘 보좌에 계심이여 그가 인생들을 통촉하시고 그의 번쩍이는 눈으로 감찰하신다’(4).
거룩한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는 하늘 보좌에 계신 여호와입니다. 성전은 이 땅에서 하나님 임재의 처소이자 이스라엘 신앙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은 건물을 초월하여 하늘 보좌에 계신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땅 끝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살피시는 초월적인 전능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지극히 높으신 이’(시편 7:17)로서, 세상을 판결하시고(시편 7:6) 지상 성전에 계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인식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습니다. 가까이 계시면서 동시에 멀리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시인을 힘 있게 합니다. 다윗은 지상 성전과 하늘보좌에 계신 여호와가 인생들을 치밀하게 주목해서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감찰하시다’라는 말은 검사하고 조사하고 심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안목으로 감찰하신다고 할 때, ‘그의 안목’은 문자적으로 ‘그의 눈꺼풀’입니다. 이 단어는 ‘빛을 발하는 눈’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가 빛나는 눈으로 치밀한 조사를 하십니다. 동시에 여호와께서 땅의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조목조목 사람의 사정을 살피시는 분, 곧 통촉하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멸망과 의인의 안전(5-7)

악으로 잔을 채운 자는 심판 때 그 잔을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행하는 자는 그분을 뵈옵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몸과 마음의 잔에 무엇을 채우며 살아갑니까? 세속의 욕심을 채운 자는 진노의 잔으로, 정직과 신실을 채운 자는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 편이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5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5-7)
악인과 의인을 다루시는 여호와의 공정함과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고백합니다. 다윗은 앞서 여호와를 인생들을 속속들이 조사하시는 조사관처럼 고백했는데, 동시에 의인을 시험하시고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악인들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을 마음속 깊이 미워하십니다(5). 의인을 감찰한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감찰하다’라는 말은 금속을 녹여서 불순물을 없애고 검사하는 뜻을 포함하기에 의인에게 좀 더 순도 높은 정화를 목표합니다. 어쩌면 의인이 당하는 삶의 고난은 삶의 순수성을 높이는 훈련일 것입니다. 반면에 악인들과 폭력을 일삼는 무리를 몹시 싫어하시며 악인들에게 그 어떤 것도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악인들에게 줄 것이 있다면, 불시에 덮치는 그물이며 비처럼 쏟아지는 불과 유황이며 태우는 바람입니다. 이것들이 악인들의 잔에 채워질 소득입니다(6).
다윗은 악인에게 내려질 여호와의 심판을 확신합니다. 비처럼 쏟아지는 불과 유황, 불태우는 바람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을 연상시킵니다(창세기 19:24-25). ‘유황’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불입니다(창세기 19:24; 에스겔 38:22; 누가복음 17:29; 요한계시록 9:17-18). 이 모든 일들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새들을 잡기 위해 던지는 덫 같습니다. 비처럼 내리기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악인들의 잔은 구원의 잔이 아니라 진노의 잔입니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기 꾀에 넘어져(시편 7:16) 심판받는 차원과 다릅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직접 행하시는 심판입니다. 악인들과 폭력을 즐기는 자들을 미워하시는 여호와(5)가 그들의 철제한 파멸을 어떻게 실행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정의로우시고 정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7a). 번역 과정에서 소실된 이유 접속사 (키)가 7절 맨 앞에 위치하므로 6절과 7절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악인에게 무섭게 쏟아지는 불과 매우 대조되는 분위기입니다. 여호와의 정의로움 때문에 정의로운 행동과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라(7b) 선언하며 마무리합니다. ‘정직한 자’는 올바르고 비뚤지 않고 곧은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고백적 선언은 첫 소절, ‘정직하다’와 서로 호응하여 의로우신 여호와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반응이 정직함으로 드러나야 함을 묘사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실질적인 힘이 작동합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실제적인 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변호를 받는 것이요, 구원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개입을 알기에 ‘여호와께’ 피신했다고 말한 것처럼(1), 그는 위기 상황에 던져졌어도 여호와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의인들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에서는 다른 피난처를 생각하라며 유혹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고난의 자리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만 피난처 삼겠다는 시인의 결기를 배워서 우리도 단호하고 의연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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