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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3-01)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시편 13편 1-6절


고난의 끝이 언제일 모를 때 삶은 얼마나 힘겹습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다윗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질문과 탄식이 중심이지만, 끝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다윗의 현실 경험에서 비롯된 좌절감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변화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다윗의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변주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시입니다.

 

탄식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1-2)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근심하고 눈물로 침대를 적시며 밤을 지세운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밤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힘들 때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탄식하거나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1-2)

다윗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외치는 말에서 탄식과 절망 그리고 원망, 무기력함, 간청 등에 여러 가지 마음의 아픔이 읽힙니다. 다윗은 원수로 인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없자 너무 답답해합니다. 하나님께 언제까지 자기를 잊고 그의 얼굴을 영원히 숨기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서 이렇게 대하시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서 더 큰 절망감과 망망함을 느낌입니다.

이 질문은 1-2절 시행에서 4회 반복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질문합니다.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느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실 것입니까?’(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여호와의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잊는 것’과 ‘숨기는 것’이 서로 평행관계를 이루어 시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얼굴을 보이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를 상징합니다(민수기 6:24-26). 때문에 여호와가 얼굴을 숨기셨다는 말은 오랜 침묵과 관계 단절의 심각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교제가 중단된 것처럼 묘사하면서 비통함을 질문으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신 것 같은 괴로움과 무거운 마음을 질문으로 담아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지만, 원망이 아니라 갈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멀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느 때까지 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하고, 날마다 내 마음속 비탄에 빠져 있어야 하는지, 내 원수가 내 앞에서 떠벌리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합니까?’(2) 개역개정은 다윗의 목숨을 건 투쟁을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2a)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영혼’, 곧 ‘네페쉬’는 한 인간의 생명, 곧 목숨 그 자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영혼의 번민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생명을 걸고 내적 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히브리어 구문을 곧이곧대로 풀면 ‘내가 내 생명 다해 저항한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종일 근심합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민과 비통함이 언제 끝날지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자기 앞에서 떠벌리는 원수를 어느 때까지(2bc) 지켜봐야 하는지, 그것도 견딜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절박한 마음 상태로 죄 고백이나 참회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자신의 극심한 불안과 마음속 불평과 저항감이 더 큽니다.

그러면 다윗을 괴롭히는 ‘내 원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원수인가, 집합적인 개념과 민족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원수를 말합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문맥상 다음에 나오는 ‘죽음’을 ‘원수’로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극심한 고통이 질병 때문이라면,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원수는 죽음을 인격화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간구 : 내 하나님여, 나를 보시고 응답하소서(3-4)

정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면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다윗이 목숨을 건 내적 번민과 투쟁의 시간을 보내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지 않습니다. 창조자이며 보편적인 통치자를 강조하는 하나님을 호명하는데, 그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엘로하이)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바라보시고, 내게 응답하소서’(3a).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셨다고 생각했기에 제발 자기를 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윗의 언어가 거칠게 들려도 계속되는 기도는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 오직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고, 삶과 죽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혹시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습니다’(3b).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주시기를 믿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단지 신체적인 건강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하나님이여’라는 외침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생명이 끊어질 정도의 내적 고뇌와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때문에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활력을 주셔서 밝히 볼 수 있다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두 번째 두려운 이유를 자기 원수와 대적들의 말과 생각을 인용합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자기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라고 말할까 봐 두렵습니다. 또 ‘나의 대적들이 내가 넘어질 때 기뻐할까 봐 두렵다’(4). ‘나의 원수’와 ‘나의 대적들’을 구분지어 말합니다. 둘이 다른 것입니까? 앞서 다윗은 ‘내 원수’(2)가 자기를 치고 자랑하는 것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2) 하나님께 묻고 따졌습니다. 4절 첫 소절의 ‘나의 원수’는 다윗이 죽음을 인격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나의 대적들’은 단수 형태의 ‘나의 원수’와 다릅니다. ‘나의 대적들’은 실제적으로 괴롭히는 압박자들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듯 원수로 의인화한 죽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를 이겼다’(개역개정). 다시 말해 ‘내가 그를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땅에 속한 누구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죽음을 인격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죽음은 정복할 수 없는 최후의 사건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살고자 하는 열망의 표시로 ‘여호와, 내 하나님’을 부르며 죽음의 잠에 빠져들까 두려워 호소합니다.

다윗이 세 번째 두려운 것은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4b). 이 시가 다윗에게 속한 시집이라기보다 다윗의 시라면, 그가 왕의 자리에 있는 상황이라면, 왕좌와 왕권이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이를 확실하게 보증할 만한 언어적인 표시가 시행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적들’이라고 복수 형태로 말한 것과 ‘기뻐 소리치다’(4b)라는 동사절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제의적인 문맥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소리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것인 만큼, 다윗의 대척점에 있는 위협적인 세력들이 기뻐 날뛰는 모습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죽음과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실제적인 대적들 전부가 두렵습니다.

다윗의 거룩한 근심하던 세 가지를 살피면, 자신의 욕망에 대한 근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a)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희망 : 나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찬송합니다.(5-6)

하나님께서 지금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 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고집 센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 발짝 다가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고통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찬양할 수 있습니다.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5-6)

그럼에도 다윗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립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2)를 외쳤던 다윗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마음 한구석에 일렁이는 죽음과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발설하고서야 시인에게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탄식과 고발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에 대한 구체적인 표명은 없습니다.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나 동료들을 의지해야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신뢰합니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5). 5절은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과 ‘당신의 구원’이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이루어 의미를 확장하고 보충합니다.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시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기뻐 소리쳤지만(4), 이제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다윗이 기뻐 소리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실한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절망은 탄식과 고발을 거쳐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 몸서리치며 죽음이 두려웠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안에서 기쁨의 함성을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두려움을 딛고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다윗이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를 다루셨던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덕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116:7; 142:7).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어두운 현실로 소환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귀결이며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절망적인 고통과 탄식을 통과한 희망은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우리를 고난에 두시지만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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