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5-02)


성숙한 삶을 살아갈 성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28절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같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구하는 삶이 성도들이 살아갈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러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기억하고 실천해야할 몇 가지 항목들을 권고합니다. 바울이 권고한 이 항목들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매우 유용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은혜의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권고(12-1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하고, 그 관계를 유지할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인간관계도 남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12-15)

바울은 앞 단락에서 특정 이슈로 야기된 공동체의 문제들을 주의 말씀으로 풀어주며 성도들 간에 위로와 권면을 독려했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신앙 전반에 걸친 권면과 명령으로 지면을 채웁니다. 특히 끝인사를 제외하고 12-22절까지 보면 도합 16 개의 주절이 등장합니다.

(1) 지도자에 대한 자세(12-13)

리더십은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지도자들을 세우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자신이 오래 머물 수 없기도 했지만, 교회를 세워 가는 원리가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지도자를 존경과 예우를 당연히 해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교육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평신도 지도자일 수 있고, 목회자나 장로님처럼 공적인 자리에 있는 분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땀 흘린 수고와 대가를 평가해 주라고 권합니다. 이런 지도자들은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각각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8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라디아서 6:6)

다음으로 지도자에 대해 질투하거나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권면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면서 용납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도자들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지도자를 사랑하라고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2) 형제들을 향한 자세(14)

다음으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에 대해서 서로 책임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는 성도들에게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는 온전한 자들이 모이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성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때로는 부족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있어서 도움을 필요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지체로 자라나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게으른 자들에게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와 감사의 표현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에게 훈계하고,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사람들을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도들끼리는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게으른 자들을 권면하고 모든 사람으로 인내하면서 성장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만 잘하면 되지 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돕는 손길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에게 책임 있는 성도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3)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세(15)

사도 바울은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성도들의 태도를 이야기 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항상 선을 쫓으라고 권고합니다. 항상 선을 쫓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비록 손해 보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옳고 의롭고 선한 일을 좇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 내어야 합니다. 원한과 복수를 금지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도록 힘쓰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기 때문에 손해 보아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손해 보아야할 이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들을 꿈꾸며 선한 일을 쫓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그 모습대로 항상 자신의 삶에 선을 즐거워하고 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고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어떤 성도들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자신의 책임을 온전하게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개인을 위한 마지막 권고(16-23)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이 땅에서 신실하게 살아간 성도들을 신원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16-23)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살아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권하고 다스리는 지도자를 잘 알고, 사람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연결돼 있으며 절대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1) 영적인 삶을 항상 유지(16-18)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면서 약속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깊이 세기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명령하신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방법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습이 있지만 성도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성도들의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에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비로소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항상 기뻐하며,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인생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은 없습니다. 현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로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 변화된 놀라운 복음의 소식입니다.

(2) 영적인 삶을 항상 노력(19-22)

사도 바울은 또 다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성령에 순종하는 삶,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을 원하시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그런 삶이 아니라 늘 삶 가운데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그러한 삶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성도들 향한 계획들이 참으로 선하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삶을 통해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쳐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향한 뜻은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을 성경의 말씀으로 비추어봐서 확고하면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은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4:3-4). 그러나 예언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분별해 합니다. 분별한 뒤에 좋은 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악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멀리하고 그 모양이라고 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악한 것이 존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평강의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의 모든 것을 흠 없이 보전 해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넘어지기 쉽게 자신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악을 분별하고 구별하지 않고서는 결코 거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을 붙잡고 악한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문안 인사(23-28)

삶을 이 땅이 아닌 하늘의 시간에서 보고, 오늘이 아닌 영원의 시각에서 보고,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만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고 거룩한 삶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의 미쁘심을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과 성도들에게 대한 문안으로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3-28)

이제 바울은 축복과 인사, 그리고 몇 가지 부탁으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먼저 평안을 위한 기원 양식을 이용해 편지 내내 도도히 흘러왔던 중심 주제를 한 번 더 소환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명명했던 ‘거룩함’(4:3)은 데살로니가 상황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정체성이었습니다.

온갖 핍박과 회유가 끊이지 않았던 신앙 현실 가운데 세상과 타협하거나 옛 습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음을 붙드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현실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정성껏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시며, 그 일을 주의 강림 때까지 멈추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성도의 전인격과 생애에 펼쳐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삼중 표현으로 강조합니다. 바울이 오직 이곳에서만 언급하는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조점은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 “온전히”(홀로클레로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강림 때 흠 없도록 성도들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참조. 약 1:4). 성도의 전인격과 생애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셨고 그분이 이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과 일행을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는 현재 고린도에서 또 다른 사역으로 몸과 영혼이 지쳐있었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이 큰 힘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기도를 부탁으로 자신의 사역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참여시킵니다. 이후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든든한 후원자요 동역자가 됩니다(참조, 롬 15:26; 고후 11:9).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성도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고 이 편지를 낭독할 것을 부탁합니다. 비록 바울이 육체로는 부재하지만, 편지로 그들과 함께 있어 거룩한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바울은 23절에서 “평강”을 기원하는 데 이어 마지막 축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이는 편지 서문 기원에 등장했던 “은혜와 평강”과 인클루지오를 이룹니다.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연약한 형제를 돌아보고 격려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귀한 날들이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5-01)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1절


어떤 사람이 무디(Moody)에게 와서 구원 받은 것 같이 않아서 걱정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디는 그에게 “노아의 방주 안에는 안전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는 “무엇이 노아를 안전하게 만들었을까요?”라고 하면서, “방주 때문에 안전했을까요? 아니면 노아의 느낌 때문이었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때 느낌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 받은 사실을 깨닫게 되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의문들을 대답해 줍니다.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합니다.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마지막 권고입니다.

 

도적 같이 임할 재림(1-3)

이 세상은 밤과 같은 점점 어두워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바울시대보다 훨씬 더 영적, 윤리적으로 어둠이 깊어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빛의 자녀들의 사명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1-3)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주님의 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만약 내일 재림하신다면 오늘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화두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도적과 같이 임할 것을 전제합니다. 이것은 아무도 그 때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종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어디 있냐고 조롱하고, 종말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없다고 무시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은 종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심히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재림인 종말은 그때가 반드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재림의 시기에 대해 정확한 시기와 날짜는 알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재림에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36-44)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시기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그들에게 현혹을 당할 것입니다(마가복음 13:5-6).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징표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구름을 타고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1:7). 그러므로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메시아인지 혹은 자신들이 사는 시기가 마지막 때인지 궁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은 만약이라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고 없이 도적같이 임하실 현실적인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인지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을 준비하는 것을 임산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임산부들은 자신의 출산일을 예정하여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은 거짓된 평안과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혀 “평안하다, 안전하다”(3)고 할 것입니다(예레미야 6:14). 하지만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날이 날벼락과 같은 일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끝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다른 기회도 연기도 없습니다.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인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칠지라도 성도들은 ‘지금이 그리스도 안에서 깰 때이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재림을 맞이할 준비들(4-8)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공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위험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다르게 살아가야할 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4-6)

 

사도 바울은 먼저 세상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무지한 상황을 잠들어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 시기와 때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징조들을 통해 이미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재림에 대한 성도들의 준비는 그 시기를 아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어서 근신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에 대해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지한다고 해서 내버려 둘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해답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재림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지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해답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죄 안에서 빈둥거리거나 유혹에 빠져 있거나, 자신의 의심에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영적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재림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그렇게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또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든 자들을 깨워야할 사명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7-8)

 

사도 바울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준비 상황을 무장 군인을 비유로 해서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서 보다 후에 기록된 에베소서에는 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에베소서 6:10-18). 이것에서 소개한 흉배와 투구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입니다. 이런 무기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경계하라,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분명하게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삶, 참 진리를 선택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욕심이 이끌려서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바울은 근신하라고 권고합니다. 근신(勤愼)은 ‘self-control’이란 단어입니다.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근신하는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근신과 관련해서, 자기 자신을 무장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장해야할 것들을 ‘흉배(胸背)’와 ‘투구(鬪毆)’를 말합니다.

‘흉배’는 가슴을 붙이는 것은 마음을 믿음과 사랑으로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종종 살다보면 세상이 부럽고 손 내밀고 싶을 때가 찾아옵니다. 그 때에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투구’는 머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감성과 지성 중에서 지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살다보면, 주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 질문과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답을 알 수 없겠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 지금 알 수 없었던 질문들이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랑이라는 방탄조끼를 입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소망의 투구를 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마지막 때를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영원히 함께 할 최후 승리(9-11)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인생이 무너질 것 같을 때, 더욱 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9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9-11)

 

사도 바울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때로는 너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 일수록 삶을 흔드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셨을 때, 이룰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우심’(9) 또는 정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과 ‘획득’이란 말을 병행해 사용합니다. 단지 구원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획득하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끝까지 구원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이 일은 우리가 자든지 깨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10)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소망에 근거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갈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에 부응해 우리의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나치게 관심 가졌던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지금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성도들이 사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피차 격려하고 덕을 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11).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격려한다는 것은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에게 꼭 필요한 것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우려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누군가에게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더 닮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싸우는 전쟁은 패하기 쉽지만, 서로 협력하면 더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영적인 싸움을 하다가 지쳐서 위로를 기다린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재림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연약한 형제들을 향해 서로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4-02)


천성을 준비하며 사는 성도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8절


어느 곳에 댐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댐이 건설됨으로 수몰 지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몰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수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을 고치거나 개선시키는 일이 없었습니다. 곧 물에 잠길 것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마을은 점점 흉물스러워 갔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세상의 것들은 아무 것도 필요 없기 때문에 세상의 일들은 무의미한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태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가르칩니다. 앞에서 첫째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길 원하면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9-12)

하나님께 구원을 대가없이 받았지만, 그의 뜻을 실천하는 데는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말로만이 아닌 수고와 헌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최고 계명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9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1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9-12)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실천해야할 일들을 계속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첫 번째는 성적으로 거룩한 삶을 권고한 후, 이제 성도들이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매우 흡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사랑으로 마게도냐 지역 있던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의 사랑 실천은 더 이상 권면할 것이 없다고 칭찬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행하면서 살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넘치지 않습니다. 끝이 없이 영원한 과정임을 깨닫길 원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누어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교회의 성도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동안 자신이 베푼 사랑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삶은 기나긴 여행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볼 때까지 여행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지금의 영적인 상태에 만족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만족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그 동안 실천해온 것보다 더욱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살아가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필요는 물론 다른 사람의 필요까지 채우기 위해 성실하고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의 일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일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 이후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이 훌륭하기 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에 자신을 일을 아예 그만 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기대여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동료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성도들은 온 시간을 받쳐서 하나님의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동료들을 궁핍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조용하게 실천하면 살면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도 시끄럽게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할지라도 종용한 삶을 영위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린도전서 4:2)

시대에 모범이 되고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도들은 거룩함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으로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칭찬 받고 인정 받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생활입니다.

당시 헬라 시대적인 상황에 육체적인 노동은 천하게 생각했습니다. 육체적인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 경시했습니다. 아무런 격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수고로 섬기라고 권합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데살로니가에서 텐트를 만들면서 육체적인 가치를 본을 보였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겸손히 행하라고 권면합니다(2:9-11).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살아가야하며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 이유를 설명했습니다(12).

첫째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때문에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인 일에는 열광적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는 게을리 한다면, 세상들은 성도들을 향해 편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편견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신의 일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해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적극적인 증인이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도들이 궁핍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게으르게 살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서 작은 일에 사랑을 신천하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의 최고 순간(13-18)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슬픔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승전가를 부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 최고의 영광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3-18)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언젠가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분명히 전했을 것입니다.

재림에 대해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 재림과 부활에 대해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습니다. 그 날에는 바울의 가르침은 성도들은 준비해야 동참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너무 집착하며 생각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성도들은 준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성도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죽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슬퍼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13). 성도들에게는 죽임이 끝이 아니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음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강림하시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먼저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사람들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므로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먼저 죽은 자들을 다시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살아있는 자들이 하늘에서 그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라고 불이익을 당하거나 나중까지 살아있다고 더 큰 영광중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들도 구원을 놓치지 않고 부활할 것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고전 15:12-20). 성도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소망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야 말로 축복 중에 축복이며 능력 중에 능력입니다. 살아도 주님 안에 있고, 죽어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14).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개가를 부를 순간이 찾아옵니다. 곧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삶이 세상의 일에 완전히 단절된 삶은 아니라고 권합니다. 현재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앞날에 일어날 일들만 생각하면서 현재 주어진 일들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현재의 삶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직장이든지 학교든지 가정이든지 어떤 역할을 주셨더라도 성실하게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비극적인 죽음은 없습니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단잠이 있듯이,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죽음은 복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16)하실 때, 성도들은 인생 최고의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장자는 모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잠자던 자들이 모두 일어나 주님 앞으로 함께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산 자들도 함께 들려 올라가 영원히 왕 노릇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주신 현재의 삶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성실한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을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누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아가야 합니다. 죄악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생활과 진심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신앙 그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항상 맞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칫 예수님의 재림이 멀었다고 경각심이 사라져 무의미하게 육신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4-0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


종종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한 성도들은 어려고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은 그다지 어렵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기초적인 하나님의 뜻만으로 실천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어려운 것보다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것들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제부터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의 특정 영역에 관해서 조언합니다. 믿음 안에서 걸어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은 가르칩니다.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아감으로 모든 영역에서 그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드러낸 것을 원합니다.

 

더욱 힘쓰는 거룩한 삶(1-2)

구원을 받는 사실은 단 일회적이지만, 믿음 생활은 단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믿음은 천국 가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천국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축제입니다. 따라서 매일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을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1-2)

데살로니가 있는 성도들은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교회입니다. 바울 일행이 그들에게 가르치는 시간은 고작 약 3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단의 핍박 때문에 급하게 도망치다시피 빠져 나왔습니다. 마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낳은 후에 돌보지 않은 고아와 같은 교회처럼 보였습니다. 극성맞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영적으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항상 부모의 심정으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은 더욱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권고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약 1년 전 만해도 아주 평범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한 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미 가르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 이렇게 배운 것을 행하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이 하라고 권고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막 시작한 교회였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인생의 제일 된 목적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면 하나님의 기쁨이 성도들의 기쁨이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지혜와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담대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자유분방한 삶은 위험합니다. 성도의 삶에는 언제나 말씀에 기초해 배우고 훈련받은 대로 행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열심히 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힘써야 합니다. 신앙의 길에 졸업은 없으면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경주는 계속됩니다. 온갖 유혹으로 가득한 현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함’(3)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육체의 소욕과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거룩함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경험이 있습니까? 내가 넘어지기 쉬운 세상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3-6)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원칙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배우자를 거룩함과 준귀함으로 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3-6)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이 배운 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을 칭찬하면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뜻은 성결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성적으로 문란한 헬라 문화권 속에서 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성적으로 순결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히브리서 13:4). 따라서 성도들은 음행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색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다른 성도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6)라는 말은 결혼관계를 넘어 성적 죄를 범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행위를 일삼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디서나 우상숭배와 성적인 죄에 경계합니다. 이는 성이 가진 파괴력 때문입니다. 성적인 죄는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음행과 색욕에 빠지는 것을 벌하신 분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뿐 아니라 성결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음행을 멀리하고 성결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거룩함을 주시는 하나님(7-8)

 

성***********************************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7-8)

 

만일 이 경고를 저버린다면 그것은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린 것과 같습니다(7). 하나님을 모른 사람들처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성적인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며,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만약 성도가 부정한 습관이나 행동을 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적인 죄를 범하면, 그것은 거룩하게 살아 기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형제자매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시길 바랍니다. 올바른 사회는 개개인의 거룩한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부리를 내릴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영향력은 거룩한 백성을 통해 세상에 전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거룩하게 살게 하십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피해야 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변에 성적 타락한 일들이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경건한 삶에는 결코 끝이 없습니다. 부정한 습관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거룩하게 살려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성령은 도우시길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3-01)


디모데를 파송한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3절


속담 중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행한 일이 힘들 때 끝까지 하라는 권고입니다. 때로는 지내온 반보다 나머지 반이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도 기적이지만 구원 받은 후에 그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 이유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데, 주변의 환경이 녹녹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디모데를 다시 보낸 목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통해 그들에 대한 들려온 소식은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고 있다는 매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더욱 성숙한 성도들로 성장하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파송한 바울(1-5)

부모님의 마음은 항상 자식을 향한 불타오릅니다. 특히 어렵거나 힘든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에게 부모님의 마음이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아버지의 마음 역시, 영적 자녀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타오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1-5)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볼 때, 두렵고 떨렸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 폭도들에 의해 데살로니가를 쫓겨나올 때, 심리적인 부담은 매우 컸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신에게 핍박을 가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극심한 핍박을 가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남아 있었습니다.

(1) 디모데를 보냄(1-2)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다시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방해로 가지 못했습니다(2:17-20). 데살로니가 서오들은 초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학적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으며, 그곳에서 일어난 박해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나중에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와서 그들의 상황 보고는 떠날 때 우려와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에 보내면서 디모데가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는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참다 못하여’(1) 자신은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어 그들의 형편이 어떤지 알아보고 그들을 영적으로 격려하는 일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사도행전 17:15을 보면, 바울이 아테네에 있는 동안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에서 아테네로 돌아와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2절에 나타난 결정으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아테네에 채루하고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대 사회에서 여행은 오늘날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교회의 안녕을 위하여 자신들의 안위는 뒷전에 두고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헌신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인’(2)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전한 복음을 ‘우리의 복음’(1:5), ‘하나님의 복음’(2:2,5,9)에 이어 ‘그리스도의 복음’(3:2)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체이고 핵심이 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를 파송한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2). 바울은 사단이 그들의 믿음을 흔들 때 무너지지 않도록 그들을 강하게 만들기 원했고, 시련 앞에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기 원했습니다.

(2) 박해가 가져온 위험(3-4)

바울은 박해로 인해서 아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돕는 것이 그들이 세움 받은(케이메다) 목적이라고 밝힙니다(3).

바울의 일행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성도가 된 이후에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교육하고 격려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성도를 생산하는 일과 그들이 건강한 성도가 되게 하는 일은 선후를 따질 수 없이 중대한 사명이었습니다.

4a절은 ‘우리는 너희에게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미리 말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일행과 데살로니가 성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우리’(inclusive we)입니다. 바울은 일행의 환난(데살로니가전서 3:7)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환난(데살로니가전서 1:6; 3:3; 2:14)을 전부터 예견했고, 예견대로 실제 박해가 찾아왔습니다(4b).

(3) 디모데를 보낸 이유(5)

5절은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목적을 한 가지 더 제시하는데,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우리’를 사용하다가 여기에서 ‘나도’라고 단수를 사용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생겨난 일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자’, 즉 사단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사역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휘방하거나 올가미를 놓아 영적 붕괴시키고자 합니다(마태복음 4:3; 고린도전서 7:5). 시험하고 박해하지만, 그들은 시험을 이겨내고 ‘우리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참조. 고린도후서 15:58; 빌립보서 2:16) 바울의 일행은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후에는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디모데가 가져오는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성도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의 도가니를 통과해 정결하고 성숙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발견하고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현재 삶의 모습이 영적 자녀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자녀를 향한 기쁨(6-8)

영적 지도자, 말씀을 전하는 자의 보상은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믿음 가운데 굳게 서있는 일을 보는 일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믿음으로 성장하고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습이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면서 그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6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6-8)

사도 바울에게 주는 기쁨은 큰 것에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올 쯤에 바울은 핍박으로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도 또한 극심한 핍박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잘하고 있는 소식을 전해들고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 중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1) 데살로니가 성도의 애정(6)

마침내 디모데가 실라와 함께 돌아왔습니다(사도행전 18:5).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라는 구절로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는 디모데의 귀환 직후에 고린도에서 쓰였을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을 갖고 있던 바울은 디모데가 가져온 좋은 소식을 듣고 기쁨의 환호를 질렸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소식은 그들이 영적으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8회 등장하며, 사랑은 7회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박해로 인해 낙담하지 않고 서로 사랑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제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갈라디아서 5:6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형제들과 전도자들을 향한 사랑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말합니다(‘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둘째 소식은 그들이 바울의 일행에 대한 ‘좋은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는 과거 상황에 대해, 감사하게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그들이 바울과 일행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선교팀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감정이었습니다.

(2) 데살로니가 성도의 상태(7-8)

데살로니가 성도만이 아니라 바울과 일행도 어려운 시간(궁핍과 환난, 7절)을 겪었습니다. 그런 일행에 디모데가 좋은 소식(6절의 ‘믿음과 사랑’, ‘우리를 잘 생각하여’를 ‘믿음’이라는 단어로 요약)을 전해주었을 때, 일행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8절은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하는데, ‘데살로니가 성도 여러분이 주 안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우리는 이제 살맛이 난다’ 정도로 의역이 가능합니다. 믿음 안에 굳게 서는 것의 중요성은 바울이 다른 서신들에서도 강조하는 바입니다(고린도전서 16:13; 갈라디아서 5:1; 빌립보서 1:27; 4:1). 성도들이 핍박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인내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사도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믿음을 지킬까 걱정했는데, 그들이 굳게 선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안위를 얻고 감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성장된 모습에 지도자들에게 감사를 표현할 때, 지도자들이 많은 위로를 받고 더욱 힘 있게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작은 배려는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영적 자녀를 향한 간구(9-13)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신 기쁨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위에 굳게 서있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진정한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짧은 인생 동안에 많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선택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거룩함’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9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9-13)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다시 보고 싶은 이유는 거짓 교사들처럼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 생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들을 위해 이 세 가지를 간구했습니다.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볼 소망(9-10)

바울 일행은 그들이 느끼는 감사를 하나님께 보답할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우리가 기뻐하는 모든 기쁨’(9)이라는 헬라어 표현은 그들이 느끼는 기쁨의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만 표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간구를 더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10).

바울은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1-3장의 분위기를 볼 때 바울이 이 교회에 심각한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들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성을 바울이 느꼈고 그 부분을 돕기 원했다는 의미입니다.

(2) 그들에게 돌아가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함(11-13)

바울은 희구법(optative)을 사용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합니다. 소원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달라는 간구합니다(11). 둘째는 데살로니가 성도 서로와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이 차고 넘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12). 셋째는 첫째와 둘째 기도가 이루어진 결과 그들의 마음이 흠 없도록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13).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참조. 슥 14:5[칠십인역]; 신명기 33:2)와 ‘거룩함에 있어서’라는 동족어의 중복적 표현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이 성도라는 이름답게 ‘거룩’하게 준비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감사와 간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격려와 교육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는 중에 믿음을 잘 지켜온 것에 대해 격려하면서도, 그들이 완벽하지 않음을 상기시키며 성도와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통해 더욱 성장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듯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절대로 인위적인 사랑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서 사랑이 넘치는 삶과 거룩한 삶은 절대 떨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사랑과 거룩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본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함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부드러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이곳에서 나옵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진정한 열매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2-02)


데살로니가를 통한 감사와 소원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20절


부모님은 자녀들이 상을 받아오면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기고 받아온 트로피는 잘 보이는 장식해 두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자녀의 성공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하고 희망에 가득 차게 합니까? 당신이 자랑스러워한 것들이 하나님께 보셨을 때,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 그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랑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말씀을 통해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은 말씀으로 위로하게 위해 성도들을 다시 만나길 원했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감사(13-16)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성도가 환난에 처해 있을 때 그 빛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13-16)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지만, 말씀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기억하면서 벅찬 마음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13)

첫 번째 감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짧은 시간에 복음을 증거했지만,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성장하고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을 받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며 지금 성도들 안에서 ‘또한(και)’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이 보여주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바울에게 나타났으며, 동일한 능력이 성도들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받은 말씀이 지금까지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한다고 감사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고 하여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로 국한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대단한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 속에서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합니다. 말씀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고통을 통과하는 원동력입니다.

(2) 유대 성도들을 본받음(14)

다음 감사의 조건은 특별히 복음을 받아서 세워진 성도들과 교회들을 본받는 자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1:6에서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 절에서는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다 확고히 해줍니다. 그것은 유대에 있는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킨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성도들에게서 신앙을 본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본받은 것은 바로 고난까지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믿었던 사람들과 교회들이 고난 가운데서 세워졌습니다. 고난 중에서 흔들림이 없이 세워졌습니다.

참 신앙의 표지 중에 하나가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잘 된 것이 아니라 고난 있는 것이 참 신앙의 증거이고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림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축복 그리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거입니다.

 

박해자들의 정체(15-16)

철저히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세상과 불화하고 고난은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하는 그 일은 죄를 채워서 주의 분노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삶인 것을 알 때,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그들에게 대해 정체를 밝힙니다.

15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13-16)

믿음의 역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 고난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복음 전파에는 감사와 고난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핍박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해 범죄한 악행들을 낫낫이 들어냅니다.

(1)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임(15a)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죽이는 데 관여한 사람이 실체로는 소수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의 악행에 소극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는 메시아를 거절하였고 메시아의 죽음에 공모자가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손을 씻어 자기 책임을 부인하고 유대인들이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마태복음 27:25)고 랬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시인한 셈입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유대인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의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처럼 악한 죄이며,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핍박한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악한 죄를 지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보다는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에 반대하는 ‘모든 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을 쫓아냄(5b)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쫓아냈습니다. 사도행전 8:1-3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냈습니다. 여기서 바울과 그 일행이 쫓겨난 일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것(사도행전 17:5-10)과 베뢰아에서 쫓겨난 것(사도행전 17:13)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내좇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그 일행을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자신들의 사도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7:10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 인들의 폭동을 동반한 박해로 인해 그 도시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박해를 바울 팀이 당했고,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음(15c)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실패했음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박해할 때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1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4:3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거룩, 순결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박해하였고(2:15) 죄를 항상 채움으로써(2: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4)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됨(15d)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타 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습니다.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이 서로에게는 신실하지만 타 민족에 대해서는 증오와 적대감만을 보였다고 썼습니다(History, 5.5).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유대인들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의 공적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유대인이 모든 사람의 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키투스가 말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반대를 일삼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대적하는 행동(16a)

유대인들의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므로(16a)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구원의 역사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감하게 저항하였습니다(사도행전 13:45-50; 14:2,19).

(6)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16b)

16a절에서 보듯이 바울 팀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막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항상 채우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노하심’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주후 49년) 혹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학살 사건(주후 49년) 혹은 심각한 기근(주후 47년) 혹은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68-70년)을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사건들 중 무엇을 가리키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일은 주의 분노를 불러오지만, 그 세상 앞에 굴복하지 않다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아니라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소원(17-18)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남이 그리워지고, 만나면 서로 헤어지기 싫어하고, 그리고 옆에 있어도 보고 싶어 합니다. 성도 간의 사랑 또한 이런 사랑은 아니지만 친밀해야 합니다. 그 관계에서는 탐심이 있을 리 없고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사욕을 취하려고 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의 친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17-18)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 그들을 만나려는 노력(17)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이 생명의 위협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떠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7장).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었고 항상 만나기를 사모했습니다. 떨어져 있었기 그들을 잊어버리거나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떠난 것은 얼굴이 마음은 아니라는 것과 그들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17). 바울은 자신을 ‘고아(ἀπορφανιξω)’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는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먼이러한 목자의 심정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2) 사탄의 방해(18)

바울은 여러 번 데살로니가 교회로 다시 돌아가려고 계획했지만, 뜻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여의치 않아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가로 막은 것은 ‘사단의 방해’였습니다. 사단의 황동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로부터의 방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엥콥토’는 도로에 홈을 파서 말이나 수레의 통행을 금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사단의 방해’는 데살로니가에서의 박해나 바울의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데살로니가 선교가 실패하길 원했고, 바울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싸움을 붙이고 불화를 조장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관계는 인간관계, 그 이상이며 영적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성도간의 교제 속에서 타인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4:22-27)

사단은 성도들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면 능력이 강력해지기 때문에 구축하지 못하도록 성도들끼리 서로 적대시 하도록 방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의 능력을 약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단의 방해와 반대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의 자랑(19-20)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자랑거리에 대한 대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9-20)

세상 사람들의 자랑거리나 기쁨이나 소망은 세상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랑과 소망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장 기뻐하시고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열매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바울에게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19). 바울은 그들 때문에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면류관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3에서 회심자들을 ‘열매’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9:2에서는 ‘사도됨에 대한 인침’이라 하였고, 빌립보서 4:1에서는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분투하고 땀 흘린 바울과 동료 선교사들에게, 그들을 통해 구원하신 영혼들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그의 선교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영광과 기쁨을 이미 얻었음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종말에는 더 충만한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을 등한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에게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고나계가 바르게 세워지며 교회 속한 성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일과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시험과 핍박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면 순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님 없는 인생의 평탄함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2-01)

 


모범적인 전도자 바울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2절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목적에 따라 하려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일에 열정을 가지고 하지만, 타인에 의해 마지못해 무기력하게 일을 해나갑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사람들이 볼 때에만,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열심히 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린도로 피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바울의 사역에 대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에 대한 일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순전하고 신실하게 사역했는지를 증언합니다.

 

복음을 위한 진정한 헌신(1-4)

좋은 환경은 항상 좋은 결과를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환경을 초월합니다. 오히려 주어진 환경을 좋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환경이란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1-4)

 

사도 바울 일행이 전했던 유럽 선교의 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성령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류시키시고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유럽 지역에 첫 선교지는 빌립보였고, 두 번째 선교지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이 두 지역에서 바울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의 모습을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2)라고 소개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계속적으로 어려움 중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 나가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해 밤중에 급히 떠나야 했습니다(사도행전 17:1-10). 이러한 일들은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적은 열매를 얻었기 때문에 실패한 헛된 일처럼 보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

 

세상에서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한 것만 헛되지 않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만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십니다(시편 126:6). 지금은 그 열매가 희미하게 보이지 않아서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가는 것은 때가 이르면 30배, 60배 100배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은 헛된 일이며, 허망한 일이 많습니다. 기쁨으로 심어서 눈물로 거두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결코 헛되지 않는 일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쫓아낸 반대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속였다고 모함했습니다. 바울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가차 없이 떠나 버리는 순회 철학자나 다름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동기와 목적을 설명하여 반대자들의 비난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세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익이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 당시는 지역에 대학이나 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회 철학자들과 순회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가르침과 철학을 전하고 대가를 받았습니다. 많은 헬라 철학자들이 전 그리스 지역을 다니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도 종종 그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마치 떠돌이 순회 철학자들처럼 복음을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처럼, 자기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처럼 오해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세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세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데살로니가에 갔던 것은 어떤 궤계나 속임수 그리고 아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간 것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세상의 인정과 명예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한 일만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한 헌신된 자세(5-10)

사람들의 실수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복음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의 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삶과 태도를 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태도로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5-10)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던 장본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받은 사도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에게 권세와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권위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유모(乳母)처럼 섬기는 자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영적인 권위는 섬김의 권위이며 희생의 권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갔던 것은 무엇을 얻으려고 갔던 것이 아니며, 복음을 줄 뿐 아니라 할 수 만 있다면 생명까지도 너희를 위해서 주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가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우리들로부터 대가를 요구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혹시라도 돈 때문에 사역한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그는 손수 텐트를 만들어가면서 자비량(Tent Maker)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하고 수고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흠이 없는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합니다.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

 

바로 이 시대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는 가장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세와 삶 그리고 말과 행동이 하나 된,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이나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어야합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복됩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생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거짓과 탐심의 탈은 믿음의 생활에서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11-12)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11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11-12)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막 설립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사랑으로 위로하고 권면합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로 가르칠 뿐 아니라 몸소 흠 없이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까지 만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뒤에야 사랑을 나눠 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랑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성도들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때로 젖먹이를 기르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때로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훈계했습니다. 이런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모두의 몫이 돼야 합니다.


복음이 자신에게 전달될 때까지 수고와 헌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고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영적인 자녀로 양육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서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힘이 있게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01-01)

 


믿음의 본을 가진 성도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생태계를 보면 식물이 쉬지 않고 계속 성장해 나갑니다. 그들은 먹이 사슬을 따라 성장해 갑니다. 즉 강자는 약자를 먹고 약자는 또 약자를 먹습니다. 이런 먹이 사슬을 속에서 자연생태계는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성도들이 어떻게 성장되어 나가겠습니까? 성도들의 성장은 선배 신앙인들로부터 후배들에게 본을 보여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은 2차 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어렵게 복음을 전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설립될 때 매우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다른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 탄생한 교회 성도들이였지만, 근동에 있던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의 인사(1)

‘아름다운 교회’는 단지 사람이 많고 건물이 아름다운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 설립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의 수도였습니다. 헬라 문명으로 화려한 도시이며 무역과 상업 그리고 군사와 정치에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각 지역으로부터 각종 이방 종교들이 가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선교 준비하고 많은 기대를 가지고 갔던 도시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고초를 격은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도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사도행전 16장). 이곳에서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영접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 일행을 끌어내리려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선교 중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고생을 데살로니가에서 치렀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짧은 사역기간 동안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세상 헬라 문화가 강력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복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은 신앙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죽이려 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막 탄생된 교회를 두고 도망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고린도까지 피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생활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지만 그에게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한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 중에 하나가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하는 마음은 목회자의 심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나오면서 남겨 두었던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직접 가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을 담아서 대신 편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축복과 감사하면서 그들을 위로와 격려하고 있습니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그 안에 믿음의 역사가 있었고, 사랑의 수고가 있었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믿음이 일하고 있었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있었고, 어려움은 있지만 소망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복음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던 교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와 격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택함으로 받고 사랑 받는 형제임을 확인시켜 주면서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2-5)

주님을 본받으며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연약한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문안합니다.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2-5)

 

항상 사도 바울은 연약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우려와는 다르게 믿음으로 싸워나가는 모습은 다른 지역 교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어렸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였고, 사랑으로 헌신의 수고하였고, 그리고 소망을 갖고 끝까지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을 중요한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는 먼저 ‘믿음으로 행한 일’을 언급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공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렇게 행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수고입니다. 사랑은 수고에서 나옵니다. 종종 그저 행해야 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있진 않습니까! 사람들의 눈에 의식해서 일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오늘날 이기적인 성도들은 사랑의 헌신이 약해졌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소망을 갖고 인내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일들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변에 모든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그들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기 만듭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큰 특권이고 최고의 복입니다. 이 특권과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삶 속에 기도와 감사가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복음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권능의 역사가 항상 따릅니다. 예를 들면, 믿는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에는 그리스도인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한 언어와 행함으로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나날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는 선택받는 복된 자들이며, 자기 삶에 복음의 증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복음이 처음 그들에게 전파될 때도 능ㄹ꽈 성령과 큰 확신이 함께 역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당신은 신앙생활의 시작이 오래되었든지 아니면 짧던지 기도와 감사가 생활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헌신된 사랑으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과 확신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6-8)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믿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 상황을 뛰어넘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불신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성도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부러워합니다. 자신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부흥의 비밀입니다.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6-8)

 

비록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지만,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통해 들려온 소식은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것은 환난 중에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막 믿음 생활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예수님을 본받아서 마게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자신들도 이제 막 믿는 교회였지만,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했던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과 그리스 전 지역에 믿음의 소문이 펴지고, 믿음의 본이 된 놀라운 역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한 복음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해지지만 그 말이 믿어지려면 성도의 삶 속에 복음의 능력이 좋은 본보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복음의 능력은 애써 소문을 내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방에 퍼뜨립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가능케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모든 믿는 자의 소망이고 확신이며 능력의 근거입니다.

신앙은 오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고 제대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본 된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본받을 대상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말씀 앞에 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유익을 얻는 것은 믿음의 모델들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믿음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할 때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는 일이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믿음의 소문난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전파된 복음(9-10)

다른 사람의 본이 된다는 것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결단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9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9-10)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힘들게 증거한 것이 소문이 납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어떤 역경과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본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방법은 그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을 꼭 본받고 싶다는 방법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본받고 싶을 만큼 풍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줍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길 원한 것입니다. 당신을 방해하는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삶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말씀으로 하루하루 살며 어디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 서론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서론


 

1. 데살로니가전서의 제목

 

최초 헬라어 필사본 성경들에서 이 서신의 표제는 단순히 ‘데살로니가인들에게 Ⅰ’(Pros Thessalonikeis A)입니다. 「제임스왕역」에서 볼 수 있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서’(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Thessalonians)와 같은 긴 표제는 후대에 수식어를 첨가한 결과입니다.

 

 

2.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자

 

이 서신은 바울과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부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1). 하지만 이 서신은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입니다(참조 3:1,2,6,7; 5:27).

 

(1) 외적 증거 : 이 서신은 최초기의 신약 책들의 목록인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 AD 170)의 바울 편지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기교회의 저술가들인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년경~202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220년경 사망),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AD 160년경~240년경) 등은 바울을 이 편지서의 저자로 간주하였다.

 

(2) 내적 증거 : 사도 바울의 개성과 문체가 편지서들 전체에 역연(歷然)합니다. 그가 인도한 회심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영적 복리에 대하여 느끼는 심적 부담감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위대한 영적 특질인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그것의 저자가 바울임을 드러내 줍니다(참조 고전 13:13). 오늘날 학자들은 이 편지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에 일반적으로 동의합니다.

 

 

3.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작동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의 두번째 전도 여행에서 얻은 소산이다(사도행전 17:1-9). 빌립보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 사도와 그의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 일행은 남쪽 지방과 서쪽 지방을 경유하여 마게도냐의 수도이며 상업 중심지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강력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에 유럽에서 두번째 교회를 세웠다. 유대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후(사도행전 17:10-15) 바울은 아덴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거기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염려한 나머지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를 굳게하고 위로하기 위해 디모데를 급히 파송했다(데살로니가전서 3:1-3).

고린도에서 바울 사도와 재회하게 된 디모데는 복음의 씨앗이 좋은 토양에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울 사도는 그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데살로니가 전서를 쓰게 되었다.

 

 

4. 데살로니가전서 저작연대와 장소

 

누가가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작 연대는 비교적 확실하게 확정지을 수 있다. 또한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체제한 것과(사도행전 18:12) 관련시켜서 갈리오 총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델피에서 발견된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 총독의 재임기간은 글라우더오 황제의 치세 때라는 것이 밝혔졌다. 갈리오 총독은 A. D. 51년 여름 동안에 재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리오 총독이 부임하기 전 약 18개월 동안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에 머물렀다는 것을 누가가 명백히 시사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사도행전 18:11) 아마도 바울 사도는 A. D. 50년 초에 고린도에 도착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실라와 디모데가 돌아와 보고한 것은(사도행전 18:5; 데살로니가전서 3:1-6) 아마도 A. D. 50년 중반이었을 것이다. 이 때에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되었다. 몇 개월 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살로니가후서가 기록되었다.

 

 

5. 데살로니가전서의 사상의 전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복음을 뜨겁게 받아들이던 것을 회상하고는,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던 그 상황을 상기시켰다. 바울 사도의 관심이 핍박받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견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와 기꺼이 헤어졌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디모데의 긍정적인 보고는 바울 사도의 짐을 가볍게 했고, 그로 하여금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권면을 하도록 했다. 이교 문화의 유혹을 알아차린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성적 타락의 위협과 다툼과 분쟁의 위험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두 가지 특별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해서 생활이 나태해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죽은 성도들은 그 놀라운 부활 사건의 영광에 동참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바울 사도는 근면할 것을 권면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산 자와 죽은자들의 역할에 관하여 올바로 설명하고 있다.

 

 

6. 데살로니가전서의 중요성

 

이 데살로니가전, 후서는 단순했던 초대교회의 면모를 희미하게나마 보여준다. 복잡한 조직도 없이 성도들은 공통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공식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사도단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논제보다는 자신의 내면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유순한 유모(데살로니가전서 2:7)나 엄격한 아버지(2:11), 그리고 집 없는 고아(헬라어 원문 2:17)에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해왔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하여 만나는 사도 바울은 강하면서 부드럽고, 훈계 가운데서도 애정을 보이며, 불굴의 용기와 악의없는 동기를 지닌 그야말로 순수하고 온전한 한 인간이다. 이 서신의 종말론적 가르침들은 그 중오성을 한층 더 높여주고 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일어날 사건의 전말과 그때 죽은 성도들의 역할에 관하여 이처럼 길게 다룬 곳은 없다. 더우기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만 역사의 마지막 때에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 즉 적그리스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7. 데살로니가전서의 역사적 배경

 

데살로니가는 중요한 도시였으며, 마게도냐의 제2행정 구역의 수도였다(참조 행 17:1 주석). 그 도시는 오늘날 살로니카 만(Gulf of Salonika)이라고 알려진 테르마 만(Thermaic Gulf)의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방과 로마를 연결하는 에냐티아 도로(Egnatian Road)가 그곳을 통과하였다. 데살로니가는 그것이 갖고 있는 유리한 입지 조건, 즉 적합한 위치와 훌륭한 항구 때문에 상업상의 요지가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회당이 생겼을 것이다(행 17:1). 오늘날 살로니카라고 부르는 이 도시는 북부 헬라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게다가 그 도시는 옛날의 에냐티아 도로(Via Egnatia) 위에 세워진 개선문(triumphal arch)이 아직도 고대 로마의 영광과 세력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곳에 서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관심과 흥미를 끄는 도시이기도 하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처음으로 오게 된 때는 제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를 떠난 직후였다(행 16:40; 17:1). 주요 도시들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곳들을 중심으로 주위의 소도시와 촌락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이었으므로, 그와 그의 동료들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같은 소도시에서는 체류하지 않고 곧장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직행하였다(참조 행 17:1 주석).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을 제일 먼저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세 안식일 계속 회당에 가서 그의 동족들에게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근래에 빌립보에서 수난을 당했음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증거하고 그 예언들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 가운데 얼마가 믿게 되었다(행 17: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참조 행 17:4 주석)가 그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데살로니가의 신자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귀부인도” 있었다(행 17:4).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밤낮으로 일했다고 말한 사실(참조 2:9)과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에 그들이 보낸 선물을 언급한 사실(참조 빌 4:16 주석) 등으로 미뤄볼 때, 바울을 대표로 하는 그 선교사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업을 계속한 기간이 위에서 언급한 3주일보다도 더 긴 기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성공적인 전도 활동은 이윽고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대를 일으켰고, 그 결과 심한 분쟁이 유발되고 마침내 바울은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행 17:5, 6). 첫 세 안식일을 회당에서 보낸 다음 바울은 야손의 집에서 계속 전도했던 것으로 보인다(행 17:7). 그는 특별히 헬라인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한 것 같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1:9; 4:5 주석).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아 일어난 폭도들의 난동으로 바울의 전도활동은 로마 당국의 주의를 끌었으나, 바울이 장차 올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 교리를 전함으로써 반역죄를 범했다는 고발은 치안 판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공식적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추방당하지도 않았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이 금지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은, 사도가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그 교회에 설명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던 사실(2:17, 18)과 디모데는 이미 돌아간 사실(3:2)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잠정적으로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전도자들은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도시인 베뢰아(Berea)로 향하였다. 여기서 다시 바울은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했고, 성경을 사랑하는 그곳 유대인들 가운데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새로운 활동에 관한 소식이 이윽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즉각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들은 즉시 베뢰아로 달려와 또다시 군중을 선동하여 선교사들을 대적하게 하였다(행 17:10~13). 바울의 친구들이 그를 아덴으로 보냈으나, 그의 동료들은 마게도냐에 남아 있었다. 사도는 그들의 도움을 심히 열망하며 아덴에서 기다렸다(행 17:16). 그 후에 디모데는 아덴으로 와서 바울과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얼마 후에 바울은 그를 데살로니가로 돌려보내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상태를 보고하도록 하였다(참조 3:1, 2, 6). 실라는 헬라로 돌아온 디모데와 동행하였으며, 그들은 아덴에서 잠시 체류한 후에 고린도로 간 바울과 합세하였으므로 실라는 마게도냐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18:1, 5).

디모데의 보고를 받자마자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썼다. 제5세기까지 거슬러 오르는 필사본들은 이 편지서의 말미에 아덴에서 기록되었다는 진술을 덧붙여 놓았다.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3:1, 2에서 추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3:6을 보면 데살로니가전서는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소 기록되었음이 뚜렷이 나타나며, 행 18:1, 5을 보면 바울이 그때 고린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는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 편지서는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참조 제11권, 62), 야고보서가 어쩌면 그럴 가능이 있는데 이 야고보서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신약 전체 가운데서 맨 먼저 기록된 책일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연대에 관한 토론은 제11권, 62, 63을 참조하라.

 

 

8.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

 

열렬한 사랑의 빛난 광채가 이 편지서를 꿰뚫고 있다(참조 1:2~4; 2:7, 8; 3:6, 7). 사도는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실함과 그에 대한 그들의 극진한 관심을 알려주는 디모데의 보고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가진 고귀한 특질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인하여 아낌없이 그들을 칭찬한다. 그는 그들을 방문하기를 열망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복음의 진리들을 충분히 가르쳐 줄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디모데가 틀림없이 어떤 문제들을 보고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기별을 받아들인 후에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재림에 관하여 광신적(狂信的)인 태도를 취하여,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나태하며 막연한 기대 가운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다. 어떤 이들은 세상으로 도로 물러가서 부도덕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독립하고자 하는 경향에 빠져, 정당하게 임명된 교회 지도자들을 기꺼이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규모 없는 자들”과 “마음이 약한 자들”과 “힘이 없는 자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했다(5:14). 사도는 할 수만 있었다면 이 사랑하는 신자들에게 지체 없이 개인적인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 이상 그는 돌아가고자 시도하였으나 사단이 그를 방해했으며(2:18), 이런 까닭으로 그는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로 기록된 이 편지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관점에서 본 실제적 경건이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 책에 제시된 가장 뚜렷한 교리이다(1:10; 2:19; 3:13; 4:13~18; 5:23). 그밖에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4:14), 죽은 의인들의 부활(13~16절), 미래의 보상과 형벌(4:17; 5:3), 사단의 인격체로서의 실존과 적극적인 활동(2:18), 택하심과 성화를 포함한 구속의 진리(1:4; 4:3~7) 등의 교리가 언급되어 있다.

 

 

9. 데살로니가전서의 개요

 

Ⅰ. 인사 1:1

 

Ⅱ. 데살로니가인들에 대한 봉사와 그들에 대한 관계를 회고함 1:2-3:13

 

1. 교인들의 신실한 증거에 대한 감사 1:2-10

(1) 그들의 평판에 대한 감사 1:2-4

(2) 그들이 복음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을 회고함 1:5-10

 

2.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봉사한 일을 회고함 2:1-16

 

3. 바울이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방문하고자 노력함 2:17-20

 

4. 디모데가 바울 대신에 파견됨 3:1-13

(1) 디모데의 방문 목적 3:1-5

(2) 디모데의 보고와 그것이 바울까지 끼친 효과 3:6-13

① 보고 3:6

② 보고에 대한 바울의 기쁨 3:7-9

③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는 바울의 계속적인 욕망 3:10, 11

④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3:12, 13

 

Ⅲ. 교훈과 권면 4:1-5:28

 

1. 서론 4:1, 2

 

2. 참된 육신적 성화 4:3-8

 

3. 데살로니가인들의 형제 우애 4:9-10a

 

4. 조용히 일하라는 권고 4:10b-12

 

5. 죽은 그리스도인과 부활 4:13-18

(1)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 4:13-14

(2) 부활의 형편 4:15, 16

(3) 살아있는 의인들과 부활한 의인들의 승천함 4:17

(4) 이러한 확증으로써 신자들은 서로 위로할 것 4:18

 

6.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은 알지 못함 5:1-11

(1) 주의 날이 갑자기 옴 5:1-3

(2) 신자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함 5:4-11

 

7. 마지막 권면 5:12-22

(1) 주님의 종들을 존경하라 5:12-13

(2) 교회에 화목을 유지하라 5:14-15

(3)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 5:16-18

(4)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 5:19-22

 

8. 마지막 기도와 부탁 5:23-28

(1) 완전한 성화를 위한 기도 5:23-24

(2) 부탁과 인사 5:25-27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09-01)


다섯째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9장 1-12절


법정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진실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진실보다 거짓이 승리할 때도 있습니다. 거짓 주장하는 사람이 거짓의 각본을 정확하게 제시해서 각본을 맞추었고, 진실은 정확히 답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아무리 좋은 각본을 꾸며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들어납니다. 사탄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고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탄의 모습을 늘어내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 마지막 절에서 독수리가 화를 삼중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9장은 첫째 ‘화’로서 다섯째 나팔 재앙을 기술합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엽니다. 거기서 황충이 나옵니다. 황충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길게 다르고 있습니다. 앞의 네 가지 나팔과는 달리 세 가지 나팔은 재앙이라고 부릅니다. 가혹함의 정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1-2)

세상에 악한 문화는 점점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듭니다. 처음에는 강력하게 거부하다가 그러한 일들을 계속 접함으로 그 문화들을 아주 쉽게 받아 드리게 됩니다. 성도들은 더러워져 가는 세상의 문화를 선교할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상실되고 어두워진 환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새롭게 해야 할 사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1-2)
 
넷째 나팔은 암흑의 심판입니다. 이제 다섯째 나팔 심판으로, 남아 있는 세 개의 화 가운데 첫째입니다. 그 심판은 우상 숭배자들(땅에 사는 자들)에 대한 황충 심판입니다. 황충은 메뚜기입니다. 넷째와 다섯째 나팔 심판은 출애굽 재앙의 동기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1) 다섯째 나팔과 하늘에서 떨어진 별(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1절의 해석은 복음주의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떨어진’이란 단어로 ‘사탄’으로 보고(이사야 14:12; 누가복음 10:18), 또 다른 학자들은 ‘천사’로 해석합니다. 필시 천사를 가리킬 것입니다. 20:1에서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라고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졌다’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천사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그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하나님에게로부터 그곳을 열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무저갱(無底坑)’은 ‘음부’, ‘스올’을 의미합니다(누가복음 8:30-31). 이곳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를 의미하는 곳으로 어두움의 권세를 잡은 자들, 짐승과 사탄이 한시적으로 갇혀 있는 곳입니다(11:7;17:8;20:1-3).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최종적으로 벌을 받는 곳은 불과 유황 못입니다(20:10).
 
(2) 무저갱의 문을 열다(2)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무저갱의 열쇠’로 무저갱을 열자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러므로 무저갱은 불이 계속 타오르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 연기가 얼마나 심한지, 해와 공기가 어두워질 정도입니다. 군대라는 귀신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 것으로 보아(누가복음 8:21), 이것은 고통스러운 장소일 것입니다.
무저갱이 열리자 연기가 올라와서 해가 가려져서 어두움이 임합니다. 네 번째 나팔의 재앙도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말씀에 기갈을 의미합니다. 이 어두움의 의미는 창세기 19:28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고, ‘치솟음’와 ‘연기가 올라옴’과 단어에 일치하고 있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무저갱의 그림 자체가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 상태를 의미합니다(창세기 19:10-11). 그러므로 무저갱이 열림으로 어두워진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로, 이 세상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어둠은 영적인 맹목을 상징합니다. 그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마음이 강퍅해짐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일어나는 메뚜기 재앙(3-1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성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통한 재앙이 성도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방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다섯째 천사 나팔소리로 임한 재앙이 계속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3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7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3-1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첫 출애굽 때 역사상 유례없는 메뚜기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던 것처럼(출애굽기 10장), 이마에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큰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실 것입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황충의 권세(3-4)
 
무저갱에서 첫 번째는 연기가 나오고, 다음으로 더불어 황충이 땅으로 올라옵니다. ‘황충(蝗蟲)’은 메뚜깃과의 곤충으로, 풀무치라고도 불립니다. 이 ‘황충’이 엄청나게 하늘에 떴다면 온 대지는 깜깜해집니다. 그러나 황충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단순히 곤충 메뚜기로 보기 힘들게 합니다. 황충으로 묘사한 세력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 권세는 전갈의 권세에 비유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황충이 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납니다(사사기 7:12). 그래서 황충의 파괴력은 아주 강력합니다. 황충이 지나가면 모든 푸른 식물들을 모두 갈아먹어 버려서, 모든 농사를 끝장을 내버립니다.
하지만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4)라고 권합니다. 황충의 권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기는 못합니다. 첫째 나팔 재앙이 땅과 수목과 푸른 풀을 태운 반면에(8:7), 황충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과 각종 나무와 물은 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는 악인들만 해할 수 있습니다.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온 것으로 볼 때, 악한 세력의 일부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악한 세력이 다른 악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악이 다른 악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해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삶을 먹고 불로 사릅니다(17:16). 황충이 등장하는 다섯째 나팔 재앙은 메뚜기가 애굽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고, 우박에 상하지 않는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메뚜기가 다 먹어 치운 출애굽의 여덟째 재앙을 연상 시킵니다(출애굽기 10:14-15).
 
(2) 황충의 해악(5-6)
 
황충의 모양은 메뚜기 같지만 쏘는 것은 전갈 같습니다. 황충은 악인들을 죽이지는 않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합니다. 황충이 ‘다섯 달 동안’ 나타나는 기간은 유대 월력으로 4-8월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그 고통은 전갈에 쏘이는 정도로 극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고 싶어 하지만 죽지도 못합니다(6). 이 고통은 여섯째 인 재앙을 떠올립니다. 그 재앙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악인들은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6:16). 순교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절정은 죽음이지만, 악인들이 당하는 고통의 절정은 죽음 그 이상입니다. 황충이 악인들을 괴롭히는 다섯 달은 서머나 교인들이 환난을 받는 열흘보다는 확연히 길지만(2:10), 요한계시록에 여러 번 언급되는 마흔두 달보다는 훨씬 짧습니다(11:2~8: 12:6, 14; 13:5)
 
(3) 황충의 모양(7-10)
 
본문에서 언급된 황충은 실제 황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황충의 실제 모습보다는 신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실제보다는 훨씬 더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황충들의 전체 모습은 마치 전쟁용 말들과 같으며, 메뚜기의 모습이 전쟁용 마구(馬具)를 쓴 말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 황충이 쓰고 있는 금관 같은 것은 더듬이 끝의 노란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유력한 해석은 흰 말을 탄 자가 쓴 면류관처럼(6:2), 금관 같은 것을 승리를 상장하는 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황충의 이빨이 사자의 이 같다는 묘사는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황충의 파괴력을 말합니다. 황충에 대한 묘사는 요엘 1:8에 나와 있는데, 메뚜기 군대의 이빨을 사자의 이빨에, 그 어금니를 암사자의 어금니에 비유합니다. 호심경, 즉, 흉갑이 있다는 설명이나, 날갯소리가 전차와 말들이 달리는 소리 같다는 표현은 메뚜기 떼와 쉽게 연상됩니다.
반면에 메뚜기의 형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황충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고,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머리털 같은 것이 황충의 더듬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황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 황충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황충이나 메뚜기는 꼬리가 없습니다. 또한 황충은 풀을 해치는 것이 이치인데, 요한계시록의 황충은 풀을 해하지 않고 사람들을 해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황충은 우리가 아는 곤충 황충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더불어 모종의 초자연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4) 황충의 왕-무저갱의 사자(11)
 
황충들에게는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 ‘아볼루온’이라는 임금이 있습니다. 그는 무저갱의 사자입니다. ‘아바돈’은 ‘파괴’를 뜻하고, ‘아볼루온’은 ‘파괴자’를 의미합니다. 아바돈이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들의 왕이므로, 아바돈이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은 용이나 큰용, 옛뱀, 마귀 등으로 불립니다(12:9;20:2).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무저갱입니다(20:1-3). 아바돈이 사탄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바돈이 사탄은 아니더라도 악의 세력을 대표할 만한 강력한 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바돈’과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은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이 악의 세력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강력한 이름값을 하는 이 지도자는 사람들의 최고 통치자일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황충은 왕이 없습니다. 나팔 심판은 비자연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로마 황제들이 종종 자신을 가리켜 아폴로가 성육신하였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때때로 메뚜기로 표현됩니다. 또한 아볼로는 ‘아볼루온’과 같은 어원입니다. 아볼로는 악의 파괴자입니다. 요한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암흑 속에 거하는 자들은 반드시 흑암의 세력에게 징벌을 받습니다. 불경건한 자의 눈을 영구적으로 불신앙의 커튼으로 가리는 역할을 메뚜기가 합니다.
 
 

둘 째 화의 예고(12)

사탄의 공격이 제아무리 무섭게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격 대상과 공격 기간을 제한 시켜 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이 더 강하게 느껴질 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12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12)
요한은 지상에 임한 지옥과 같은 심판을 ‘첫째 화’라고 부릅니다. 이후에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즉 두 개의 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아직도 남아 있는 두 화를 언급하면 끝납니다. 혹자는 첫째 화를 일곱 인의 심판(6장)으로, 둘째 화를 일곱 나팔의 심판(8-9장)으로, 셋째 화를 일곱 대접의 심판(16장)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사탄의 공격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과 허락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세 아래 있는 성도들을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성도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마치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당신의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22-02)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장 6-21절


초대교회 성도들이 인사말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이 의미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달라는 것은 주님의 일을 이루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셨다고 시작했고,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 가실 일들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이자, 성경 66권의 마지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약속한 말씀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본문에는 여러 증언들이 나옵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시작인 1장 3절과 마지막 22장 7절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6-9)  

이 단락은 요한계시록 본문의 중심 글을 마치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결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본서에 기록된 내용에 순종하고 거룩함을 지켜 구원의 상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본문은 6-10절, 11-15절, 16-17절 등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6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6-9)

본문은 예언의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 책에 담긴 예언을 잘 지키라는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장차 될 일을 알리려고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장차 될 일은 우리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본문은 1:1-3a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종들에게 장차 될 일을 보이셨다는 것과 장차 될 일은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 두루마리의 예언의 본질(6)

마무리 주제는 두루마리 예언입니다. 요한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라고 두루마리 예언의 신적 권위를 확증하는 말로 화두를 연입니다. 다니엘 2장은 하나님 나라는 악의 제국에 궁극적인 승리를 하고, 이 땅에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적 환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2:45의 데오도션 역은 ‘이 꿈은 진실되고(ἀληθινὸν) 그 해석은 신실하다(πιστὴ)’고 확증합니다.

요한은 계속하여 다니엘 2:45을 활용합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다니엘의 ‘이 일 후에’를 ‘속히’로 변경한 주해의 산물입니다. 긴박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개시성을 함축합니다. 두루마리의 예언은 다니엘에게는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하지만 요한에게는 이미 시작되어 언제라도 실현될 수 있는 확실한 일입니다. 1:1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요한은 교회에 전달한 예언입니다. 요한은 ‘선지자들의 영’을 대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예언의 영을 주십니다.

(2) 두루마리 예언의 역할(7)

반드시 속히 될 일은 구원과 심판의 성취를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1:3)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복된 말씀은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서언은 계시에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선언하지만, 종언은 계시에 불순종하는 이들 모두를 저주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임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진정한 예배(8-9)

요한은 다시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달했던 천사를 경배하려고 합니다(요한계시록 19:10). 천사는 숭배를 금하는데, 이는 자신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천사는 요한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권면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착각한 것을 기록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통해 두루마리 예언의 궁극적 권위는 전달자인 천사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천명하기 위함입니다. 천사 숭배는 우상숭배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우상숭배는 미묘하고 난해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반응(10-15)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상을 갚아 주리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황제 숭배와 같은 사탄의 압박을 받았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메시지로 다가왔음에 틀림없습니다. 황제 숭배에 굴복하는 자들은 심판을, 그것을 견디어 승리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긴박감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10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0-15)

본문은 교회에게 거룩하라고 권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13절을 가운데 두고 11-12절과 14-15절 등 두 단학으로 나뉘는데, 두 단락 모두 같은 내용을 다룹니다. 그것은 ‘거룩하라’는 권면입니다. 전반부(11-12)는 두 상반되는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거룩할 것을 권하고, 후반부(14-15)는 각각의 사람이 받는 복과 심판을 대조함으로써 거룩할 것을 권합니다.

(1) 두루마리 예언을 인봉하지 말라(10)

다니엘 12장과 일곱 우레의 메시지(10:4)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는 왜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까? 다니엘의 경우에는 두루마리가 비밀로 감춰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예언들을 요한의 독자들은 엄청난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곱 우레 심판으로는 우상숭배자들이 강퍅해집니다. 회개를 유발하는 재앙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재앙 대신에 두 증인의 신실한 증언을 통해 두루마리 예언이 선포될 필요가 절실했습니다. 이제 두루마리의 일곱 인은 개봉되었습니다. 때가 가까웠습니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2)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반응(11-13)

주님이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바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게 내버려두’고 더러운 자들은 그대로 더러운 채 두어라.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두루마리 예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다시는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이제는 강퍅한 자와 신실한 증인의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반응한 대로 보상합니다. 상은 종말론적 상급으로 구원입니다(이사야 62:11). 첫째는 불의하고 부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개와 점술가와 음행자와 살인자와 우상숭배자와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거짓이 그 특징입니다. 신앙공동체 내부에 들어와 있는 가짜 신자들입니다. 사탄의 영을 받은 자들의 특성입니다. 이들은 최후 심판을 위해 성 밖에 있게 됩니다. 성의 출입이 금지됩니다. 둘째는 정의롭고 거룩한 자들입니다.

(3) 두루마리 예언을 지키지 않은 자의 보상(15)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출입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요한은 첫째와 둘째를 일종의 대차구조로 구성합니다. 초점은 두루마리 예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자들의 상급입니다. 불의와 부정은 정의와 거룩과 상반됩니다. 안식이 거룩의 근본이고, 희년이 정의의 기초입니다. 땅에서 안식과 희년을 지키는 신실한 증인들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역사의 처음과 끝을 관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적 권위로 확언합니다.

 

두루마리 예언은 초청과 경고(16-19)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승리의 복음입니다. 요한은 또한 성령과 교회가 세상을 생명수로 초대하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목이 마른 자나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마시라는 복음입니다. 계시의 주체자인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16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6-19)

본문은 다윗의 뿌리이며 자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기원과 요한계시록을 듣는 사람들에게 재림 때 있을 복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두루마리 예언의 원천이신 예수(16)

이제 최종적인 초청과 경고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와 성령과 신부가 초청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으로 초청합니까? 주 초청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예언자들을 보내 신실하게 증언하게 하십니다. 어린양 예수는 증인의 모델이십니다(11장). 예수는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 곧 광명한 새벽 별입니다. 요한은 ‘열방의 귀의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독자들에게 친숙한 구약 예언을 인유합니다. 다윗의 뿌리는 이사야 11:10의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다윗의 후손인 왕이 세워지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모든 열방이 모여드는 비전을 이사야 11장에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뿌리는 예수입니다. 광명한 새벽 별(민수기 24:17)은 신약에서 메시아 별과 같습니다(베드로후서 1:19). 여명과 함께 떠오르는 별은 어둠을 물리치고 종말론적 시대의 빛을 가져오는 별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비치면 열방이 그 빛으로 나오는 비전을 예언합니다(60:1-3). 히브리어 ‘자라흐’는 보통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예루살렘에 그의 영광으로 떠오르는 여호와의 이미지는 여명의 이미지입니다.

(2) 두루마리 예언으로의 초청(17)

요한은 두 가지 예언적 본문(이사야 11:10; 60:3)을 인용하여 예수에게 적용합니다. 열방은 구원을 위하여 예수께 모여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열방의 구원자로서 예수는 요한에게 계시해왔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의 교회가 열방을 향한 자신의 증언에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성령도 열방을 초청합니다. 계시록에서 성령의 역할은 종말론적입니다. 성령은 환상과 예언적 신탁으로 하나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백성의 기도를 인도하고, 세상을 향한 백성의 선교적 증언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도록 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관점으로 자신들의 현재를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신부도 열방을 초청합니다.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입니다(21:2). 즉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 시에 있는 교회입니다. 신부는 어린양이 오실 때 혼인 준비가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의로운 행위의 세마포를 입고 줄을 서 있는 교회입니다(19:7-8).

신부는 파루시아의 관점으로 보는 교회입니다. 예수와 성령과 신부의 초청은 17절에서 네 가지 명령법을 구성합니다. 생명수로의 초청입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청장은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열방의 구원을 위한 기도입니다(디다케 11:6). 파루시아(주님의 재림)의 기도는 두루마리의 예언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입니다.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경고가 마지막으로 선포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법조문으로 보고 있으며, 옛 율법 조문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신명기 4:1-2, 19-20).

(3)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경고(18-19)

요한계시록을 듣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경고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예언의 말씀에 어느 것이든 더하거나 그 예언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제하여 버리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저주입니다.

계시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명기에 따르면, 거짓 선지자의 미혹하는 메시지에 더한 경고입니다. 신명기 4장이 모델로 삼고 있는 고대 근동 조약 문서들도 의도적인 변조에 대비하여 성문화된 규제와 저주의 수단으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약속과 반응(20-21)

주의 재림으로 완성될 심판과 구원은 모든 성도와 함께 죄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입니다. 이 소망을 붙잡고 인내로써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음성에 귀 기울임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0-21)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줄 상을 가지고 속히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환영하며, 맞을 준비를 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것을 알릴 수 있을까요?

(1) 약속과 반응(20)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교회에게 교회의 가장 큰 소망인 ‘주 예수께서 속히 오신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약속은 요한계시록 내용을 증언하신 이의 증거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실한 증인입니다. 두루마리 예언의 종언에 직접 참여합니다. ‘반드시 오리라’고 약속합니다. 주의 파루시아는 초림과 최후 임재 사이에 계속됩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는 성찬에서 ‘마라나타’라고 외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주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그야말로 모든 역사가 지향하는 것들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에 누구든지 값없이 동참할 것을 성령과 신부가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초청에 응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과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축원(21)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불완전한 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자기들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갈증을 해소시켜주시고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하게 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까지 둘 사이에 긴장은 계속됩니다. 파루시아를 위한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는 제국이 해체되고 열방이 돌아오는 ‘그 날’을 향해 신실한 중언을 계속해야 합니다.

요한은 아시아의 여러 교회에서 이 편지를 읽고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편지를 마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이고 적절한 끝맺음입니다(고린도전서 16:23; 고린도후서 13:13; 에베소서 6:23).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에 감사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행위가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증거가 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함으로 맡겨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그리스도돟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칭찬과 존귀로 상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22-01)


새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생활

요한계시록 21장 22절-22장 5절


 ‘그리스도의 초상’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양인과 동양인이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모습이 다릅니다. 과거 초창기 한국에서는 도포 입으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각 나라나 시대에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도 각자 다를 것입니다. 욕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욕망으로 왜곡된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의 예수님은 허상일 뿐입니다. 이제 참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요한은 이제 새 예루살렘 성 내부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성전이 없고, 해나 달이 쓸모가 없습니다. 밤이나 바다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가 이 모든 것을 대체합니다.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분명히 구별됩니다. 성 내부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끕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교제가 다 회복됩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심(22-27)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십니다. 오늘도 친히 자기 백성의 성전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보호하시며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따라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2-27)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의 재건을 꿈꿔온 유대인에게는 상상 못할 일이지만, 주께서 친히 성전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시작되어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1) 성전이 보이지 않음(22)

새 예루살렘에는 현재 지상에서처럼 건물로 된 성전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개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성전이 재건된 것으로 말씀합니다(요한복음 2:19-22; 마가복음 14:58; 15:29).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전의 ‘머릿돌’(마태복음 21:42; 마가복음 12:10-12; 누가복음 20:17-18; 사도행전 4:11; 로마서 89:32-33; 에베소서 2:20)로 묘사합니다. 계시록에서 성소는 예외 없이 하늘 성소를 지칭합니다. 성전은 창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패턴에서 에덴은 창조의 성전이고 아담은 대제사장입니다. 첫 창조의 실패를 새 창조에서는 어린양이 성취합니다.

(2) 해와 달이 쓸모 없음(23)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고 그리스도께서 등불이 되어 밝혀주실 것이기에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떠한 빛의 근원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어린양이 등불입니다. 성도는 촛대이기 때문입니다.

(3) 성에 들어가는 자와 못 들어가는 자(24-27)

종말에 열방이 시온으로 순례할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 2:2,5에서 제기한 이 주제는 이사야 60:3,5,11에서 장엄하게 선언됩니다. 요한은 이사야 사상을 함축하여 인유합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과 음녀 바벨론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음녀는 착취와 수탈로 축적합니다. 신부는 자발적인 헌신을 공존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이사야 60-61장의 문맥 그 어디에도 왕들과 열방이 자신들의 영광(도사/δοζα) 또는 명예(티메/τιμη)를 들고 올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부, 재물’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열방의 부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방이 가져오는 영광과 존귀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최고조로 조명하기 위함입니다. 열방이 그동안 착취와 축적으로 바벨론에 세금과 노동을 상납하던 행태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나눔과 섬김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러 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이웃과의 연합은 예배의 진정한 목적입니다(이사야 11:6-12). ‘만국’과 ‘땅의 왕들’은 이사야 60장에서 도출된 용어입니다. 하지만 계시록 자체의 논리적 흐름으로는 ‘만국’ 열방을 말하는 사중 정형문-‘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0:11은 족속 대신에 ‘임금’으로 대체합니다. 그 결과가 ‘땅의 왕들’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한 분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러 옵니다. ‘열방의 귀의 사상’은 15:4 이후에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 열방의 귀의는 신학으로 우선적인 주제임을 증명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노래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모든 열방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열방은 겁을 먹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저주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파루시아와 아마겟돈 전쟁(18-19장)에서 최후 심판을 당한 자들이 결국에는 강요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어떤 제안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열방에 대하여 제시하는 가능성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1)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11:13; 14:6; 15:4). (2) 짐승으로서 지속적으로 우상숭배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거절하고 저주하며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여 최후 심판에 이르는 것(14:9-11; 16:9,11,21; 17:14; 19:17-21). 모든 열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까?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방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까?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중언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강퍅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21:8,27;22:15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계시록을 보편적 구원을 예건하는 책으로 보려는 시도들은 본문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회복(1-5)

에덴을 파괴하였던 하나님의 저주가 떠나고, 이제 다시 첫 창조의 순간처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하며 자원하는 기쁨으로 왕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 있거나 거짓말 한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1-5)

요한은 신부 새 예루살렘을 새로운 에덴으로 묘사합니다. 어린양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입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어린양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왕 노릇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바벨론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생명수 강(1-2a)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생명수는 생명의 근원이다. 죽음과 대조된다.

(2) 생명나무(2b)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에 있던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유합니다. 에스겔 47:8-9, 12에 있는 강은 많은 물을 소생시킵니다. 그 안에서 피조물들이 헤엄칠 수 있도록 ‘생명’을 줍니다. 나무들이 자라서 그 잎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에서는 그 강을 ‘맑은 강’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에서 ‘소생’은 ‘치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치유하기를 영원히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새 창조에서는 치유되어야 할 죽음이나 고통이 없습니다(21: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고통을 단번에 치유하십니다(21:4; 7:16-17). 열방의 치유는 요한계시록 5:9의 뜻을 발전시킵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열방이 치유되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섬깁니다. 따라서 생명나무 잎의 치유는 비유적인 그림입니다. 어린양 그리스도가 회개하는 열방의 치유를 위해 죽임을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3) 저주가 없음(3-4)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다.’ ‘저주’는 ‘헤렘’입니다. 아나데마(ἀνάθεμα)와 카타데마(κατάθεμα)로 번역됩니다. 구약에서 ‘헤렘’은 죄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7:27-29). 봉헌한 물건 또는 봉헌(devotion) 또는 금지(ban)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적인 물건으로 엄격하게 적용되면, 파괴하든지 혹은 용기에 담아서 구별해둡니다. 봉헌된 것에 대해 신실하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여호수아 7:1; 22:20).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인류에게 보내신 파괴적인 저주로부터 면제를 받습니다. 스가랴 예언의 성취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형태의 저주도 없을 것입니다.

(4) 밤이 없음(5a)

다시는 밤이 없습니다. ‘다시는 없을 것이다’(21:1-4) 형식의 절정입니다. 바다와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고통과 밤이 다시는 없습니다.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스가랴 14:11).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세상에서 그들을 위협해왔던 모든 범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할은 촛대입니다. 성도들은 신적 등불의 빛을 담고 최종적으로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세상의 ‘등불’입니다(21:23). 구약 성도의 반복되는 기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춤으로써 그의 현존을 드러내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민수기 6:25-26; 시편 4:6; 31:16; 67:1; 80:3,7,19; 119:135). 이 기도는 요한계시록 22:5에서 종합적이고도 완성적으로 응답됩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구약 본문은 민수기 6:25-27의 대제사장적 축복입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는 말씀이 지향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22장의 하나님 나라 완성입니다.

(5) 성도들의 왕노릇(5b)

다섯째, 성도들이 세세노록 왕 노릇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합적 완성입니다. 이 통치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4-6의 천년왕국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이는 천년왕국 이후에 반역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성도들의 통치를 받습니까? 통치는 첫 창조에서 아담에게 맡겨진 창조적 활동입니다(창세기 1:28; 시편 8편).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에는 인간에 대한 통치 개념은 없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새로운 창조될 예루살렘 안에는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충만해지는 것들이 있고, 완성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상 무너질 것만 같던 곳(교회)이, 언젠가 ‘떠날’ 곳(세상)이 ‘새롭게’ 된다는 성경의 진리는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채롭게 합니다. 그 완성을 향해 우리는 함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21-02)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장 9-21절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며 어린양의 신부입니다. 모든 건축물이 구조적 특징이 있듯이 새 예루살렘 성도 내외적으로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신부인 성도들의 모습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신부로서 교회가 누리게 될 영광의 새로운 특면은 무엇입니까?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은 사실상 절정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21:2에서 짧게 소개된 신부가 이제 실제로 등장합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입니다. 음녀 바벨론과는 확연히 대조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구조, 열두 가지 보석으로 단장한 모습을 소개합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신부는 사실상 대제사장의 위엄과 광채를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최초 관찰(9-10)

결혼식에서 신부는 가장 주인공입니다. 신부들은 새하얀 옷을 입고서 순결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티 없는 제물을 원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거룩함이 없다면 교회나 성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분문의 말씀 속에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지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9-10)

새 예루살렘은 견고한 성곽으로 돌로 싸였고, 열두 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신구약 백성으로 구성된 새 창조된 공동체가 얼마나 완전하고 장엄한지를 보여줍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을 닮은 공동체가 참 성전입니다.

(1) 어린양의 신부가 초청(9)

21:11-22:5은 21:9-10에서 언급된 신부와 도성의 이의를 확대합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에스겔 40-48장의 패턴을 따라 묘사합니다. 기존 예루살렘 성과 정전의 물리적인 차원을 다 허뭅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그림으로 승화시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코이노니아로 우아하게 빚어냅니다. 그래서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입니다. 바벨론은 정치가 경제, 종교 체제와 동맹을 맺고서 666 체제를 구현하는 곳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오직 어린양에게 신실한 신부입니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와 평화와 코이노니아를 실현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두 도시는 각기 동일한 복장으로 치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금, 귀금속, 진주: 참조, 17:4; 18:12,16; 21:18-21). 그러나 각기 전혀 다르게 사역합니다. 동사 ‘보이다’(데이크노우)는 단순히 환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하늘 시각으로 영적 현실을 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신부 새 예루살렘과 음녀 바벨론을 대조하여 신부가 음녀를 대체함을 의도적으로 제시합니다. (1) 정숙한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21:2,9)와 땅의 임금들로 더불어 행음한 음녀(17:2); (2) 화려함은 하나님의 영광인 신부(21:11-21)와 제국의 착취로 축척한 것이 화려함인 음녀(17:4; 18:12-13,16); (3) 만국을 빛 가운데로 다니게 만드는 신부(21:24)와 만국을 타락시키고 기만하는 음녀(17:2; 18:3,23; 19:2); (4)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가는 신부(21:24)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음녀(17:18); (5)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가는 신부(21:26)와 온 세상으로부터 재물을 착취하고 치부하는 음녀(18:12-17); (6)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을 하거나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신부(21:27)와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을 지니고 복술을 행하는 음녀(17:4,5; 19:23); (7) 만국을 치유하는 생명수와 생명나무(21:6; 22:1-2)와 만국을 취하게 만드는 음녀의 포도주(14:8; 17:2; 18:3); (8) 생명과 치유(22:1-2)와 도살의 피(17:6; 18:24); (9) 하나님 백성이 들어가라고 요청받는 신부(22:14)와 나오라고 요구를 받는 음녀(18:4).

 

새 예루살렘에 등장(11-14)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는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거룩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이렇게 완전하게 변화시키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이 땅의 교회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의지하며 새롭게 변화되어가길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능력으로 교회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1-14)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가 길이와 높이와 너비가 같은 정방형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이 성전의 소성을 지닌 지성소임을 알게 해줍니다. 새 예루살렘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천국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새 예루살렘(11)

새 예루살렘의 모습도 바벨론과 분명히 대조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빛으로 비추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입니다(요한복음 1:14). 21:10b은 21:2a을 거의 축어적으로 반복합니다. 보석으로 단장한 신부의 장식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19:7-8). 매우 귀한 보석과 벽옥과 수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는 또 다른 은유적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백성에게서 반영됩니다(빌립보서 2:15). 둘째, 크고 높은 성곽과 열 두 문이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은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성격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21:27; 22:14-15). 각 문마다 한 천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에스겔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열두 장로들과 비교할만합니다. 요한계시록 21:1-22:5에는 이사야 50-66장이 상당수 인유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신부로(이사야 62:5; 요한계시록 21:2,9), 새 이름(이사야 62:2; 요한계시록 22:4)과 문(이사야 62:10; 요한계시록 21:12 이하). 이러한 인유들은 이사야 62:6의 파수꾼과 연결됩니다. 셋째, 문들의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입니다. 넷째,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습니다. 숫자 24는 성전 제의를 위해 다윗이 조직한 제사장(역대상 24:3-19)과 레위인 문지기(26:17-19)의 24반차를 반영합니다. 귀금속으로 된 기초석들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열두 귀금속을 인유하고 있는데, 이들 각 돌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출애굽기 28:21; 39:14). 나라와 제사장(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속량을 입은 성도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에스겔의 이스라엘 특수주의를 넘어서 열방을 품는 보편주의로 나아갑니다. 열두 기초석 위에 열두 문이 있습니다. 새 시대의 이스라엘 지파는 열방으로부터 귀의한 셀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666과 대조된 신부 새 예루살렘(15-17)

성(城)의 역할은 성 안에 사는 사람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성에 거주할 사람에게는 보호막이 되어야 하고, 성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는 방패막이기가 되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음녀에게 미혹되어 이 ᄄᆞᆼ에서 안락한 삶을 누린 자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음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린양을 따르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15-17)

성의 문과 성곽을 측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측량은 하나님의 미래 현존과 더불어 속량을 입은 자들의 안전과 죄가 전혀 없음을 보증하는 포고문입니다. 거주민들을 어떤 해로움이나 오염, 미혹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입니다(21:27; 22:14-15).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이 본 환상을 뛰어넘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단지 정사각형일 뿐이지만, 새 예루살렘은 입방체(cubic)입니다. 필로는 제사장 흉패의 직각 모양을 절대적인 안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선한 사람과 관련하여 완벽 또는 완전을 상징합니다. 16-17절의 묘사는 고대 바벨론 성에 대한 기술과 현저하게 유사합니다. 바벨론은 눈에 띄게 도성을 통과하여 흐르는 강이 있었고, 그 강의 양쪽 측면에는 가로수로 조경한 간선도로가 뻗어 있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음녀 바벨론의 창의적인 대안입니다. 성의 길이와 높이와 너비 그리고 성곽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묘사합니다. 상징서 해석을 요구합니다. 15-17절의 측량은 유대 신자들뿐 아니라 속량된 인류까지 다 포함합니다. 성의 엄청난 크기가 이방인을 포함합니다. 요한은 에스겔 40-48장 환상에서 상세한 장면을 단순화하고 요약합니다. 에스겔 환상이 내포하는 몇몇 요소들을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성곽을 측량하니 144규빗입니다.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입니다. 144규빗은 7:4-9과 14:1, 3의 144,000을 반향 합니다. 인간의 총량과 천사의 측량이 같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요한이 독자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입니다: 요한의 환상을 표면적인 차원이나 문자적인 의미로만 숙지하려고 한다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666 체제는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체제입니다. 이에 저항하는 새 예루살렘은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하는 체제를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고귀함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의 자질을 갖춘 신부 새 예루살렘(18-21)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게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순간마다 그 성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3:20).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는 이 땅의 시민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18-21)

새 예루살렘 성은 정금입니다. 정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속성의 은유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전체를 금으로 덧칠했음을 반영합니다(열왕기상 6:20-22). 성곽의 기초석을 장식하는 열두 보석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있는 열두 돌(출애굽기 28:17-20; 39:8-14)과 이사야 54장의 복합 인유입니다. 아론의 옷은 지상의 성막의 작은 복사판입니다. 지상의 성막은 하늘 성막을 모델로 삼습니다. 보석으로 장식된 흉패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 거하는 지성소의 축소판입니다. 출애굽기는 열두 지파에 적용하고, 요한은 열두 사도에게 적용합니다. 사도들은 최고의 주요 증인들이며 종말의 진정한 이스라엘인 교회의 대표들입니다(21:14). 진주 문은 이사야 54:11-12에 대한 인유입니다.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합니다. 한 개의 진주로 한 개문 전체를 만들려면, 대략 66미터 높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진주는 세상에 없으므로 상징적입니다. 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추가적으로 강조합니다. 성에는 큰길이 있는데, 중인들의 시신을 늘어놓고 불경한 세상이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도록 방치되는 곳입니다(11:8-9). 이전에 수치를 당하던 거리가 이 시즌 그들의 영원한 영광이 거리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하고 아름답게 보존하십니다.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성도들을 부르시고, 거룩함과 아름다움,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기 원합니다. 우리들의 믿음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해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오늘부터라도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21-01)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영광

요한계시록 21장 1-8절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궁극적 영광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이 땅에서 누려 보지 못한 안락하고 편안하며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천국을 꿈꾸곤 합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세상의 물질적 풍요와는 다른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하는 영광스러운 미래는 무엇입니까?

 

음녀 바벨론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전이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옛 창조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자리를 양보합니다. 새 예루살렘도 하늘에서 땅에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땅에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고 선포하십니다. 새 창조의 때가 이르면, 이기는 자와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1-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거나 곡하거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므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모든 만물이 새 것이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절서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하늘과 새 땅의 질서 속에 거하며 거룩한 천국의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1-5)

최후의 심판과 불못을 본 요한이 이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마치 결혼한 신부처럼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완성될 교회를 가리킵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1)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자리를 내어 줍니다.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새롭다’는 형용사는 질적인 구별을 나타냅니다. 옛 것의 소멸이 아니라, 새 것과 옛 것 사이에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갱신과 변혁을 통해 전혀 다른 차원의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이사야 65:16-17; 고린도후서 5:14-17; 골로새서 1:15-18). 새 창조의 세계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악한 존재가 출몰하는 곳이며, 죽은 자의 자리입니다.

(2) 새 예루살렘(2)

대신에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옵니다. 어린양의 신부처럼 단장을 합니다(이사야 61:10). 성경이나 초기 유대교에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낙원에 갈 뿐입니다. 낙원은 천국(하나님 나라)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땅에서 통치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신앙생활은 영육 이원론이나 현실도피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성도가 땀과 피를 흘려야 할 곳은 땅입니다. 땅은 하나님 창조의 본질입니다. 음녀 바벨론이 멸망했습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이 음녀를 대체할 것입니다. 음녀에서 신부로 전이되는 마지막 과정에 요한은 맛보기로 신부를 짧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21:9-22:5에서 충분하게 소개합니다. 성도는 지금 제국의 그늘에서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협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신부를 소개합니다.

(3) 새 성전으로서의 임마누엘(3-4)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있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21:1-3). 여기서 백성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요한은 에스겔 37:27-28과 스가랴 2:10-11에서 ‘하나님의 장막’ 개념을 도출합니다. 이 두 구절은 구약 소망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형태를 채택합니다. 스가랴는 많은 민족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개종자로서 합류하여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요한계시록 21:3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신실한 증인의 복음에 반응한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광야 이스라엘의 성막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성전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했고, 자신의 왕권을 높이려고 했으며, 하나님을 조종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데반은 솔로몬의 성전을 우상의 전당이라고 단정합니다(사도행전 7:48). ‘손으로 지은 곳’은 칠십인역에서 우상의 전당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두 번이나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은 더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아니고, 도둑의 소굴로 변질되었습니다(누가복음 19:46).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장막이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 속에 돌아옵니다. 그 결과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됩니다. 옛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겪었던 고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국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로서 경제적 착취와 인권 유린과 정당한 권리의 강탈과 정서적이고 육신적인 고통을 받았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제2의 출애굽이 일어났습니다.

(4) 새 창조의 선언(5)

요한은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창조의 예언(43:18-19; 65:17; 66:22)을 마음껏 활용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에서 바울은 이들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봅니다.

요한은 이사야 새 창조 예언의 완전한 성취를 묘사합니다. 새 창조의 완성된 성취를 부각하려고 요한은 이사야의 표현에 ‘모두’를 첨부합니다. 이전에 부분적으로만 시작했던 새 창조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선언합니다. 만물이 새 창조로 변혁될 것입니다. 현재 동사(포이오)는 미래에 새 창조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강화해주는 ‘예언적 현재’입니다. 히브리어의 예언적 완료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를 예견합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확실하게 신적 승인이 선포 됩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5b). 두 가지를 확증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창조의 약속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행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약속의 절대 취소 불가능성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 말씀은 타당하고 신뢰할 만하다.’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승인 도장을 찍으십니다: ‘이루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에 앉으신 분입니다. 새 창조를 승인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이사야 41:4; 44:6; 48:12).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의 초반과 후반에 각각 나타납니다(1:8,17; 22:13). 일종의 상극법입니다. 양극단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1:8과 21:6 사이에 서술되고 묘사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습니다.

 

새 창조의 귀결(6-8)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르지 않는 생수를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를 원하십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깊은 영적 생수를 맛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에게 허락하실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망하길 바랍니다. 새 창조 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6-8)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임할 새 예루살렘 성을 상속받을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입니다. 불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에 이른 ㄴ자들과 달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거룩하고 정직한 길로 걸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임마누엘의 복(6-7)

새 창조를 선언하고 승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두 부류를 구별하십니다. 마치 백 보좌 심판의 결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같습니다(마태복음 25장). (1) 먼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인데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줄 것이다’(이사야 49:10). ‘생명수 샘물’의 소유격은 동격 병렬 용법(‘물 근원, 곧 생명이라’) 또는 형용사적 용법(‘살아있는 물의 근원’; 이사야 12:3은 구원의 샘물)으로 이해됩니다. ‘생수’는 영생을 대변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근원입니다(22:1,17: 예레미야 2:13; 시편 36:8-9; 요엘 3:18; 요한복음 4:10; 7:38; 요한계시록 7:17),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누리는 영원한 교제의 삶입니다.

‘값없이’(도레안)는 ‘자유롭게’(마태복음 10:8; 로마서 3:24; 데살로니가후서 3:8), ‘공짜로’(요 15:25; 고린도후서 11:7; 갈라디아서 2:21)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샘물 근원’(하나님 구원의 현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55:1).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아들은 유업을 상속받는 자입니다(시편 2:7-8; 사무엘하 7:14).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입니다. 성도의 유업입니다. 새로운 가나안 땅입니다.

(2) 불 못에 들어가는 자들(8)

불 못에 들어가는 자들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타협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가짜 신자들이며,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빠진 자들입니다. 음녀 바벨론이 주는 포도주를 마신 자들입니다.

용과 짐승들과 바벨론의 부역자들이 던져진 유황불 못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이들의 목록은 여덟 가지입니다.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a) 두려워하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소심한 자입니다. 짐승과의 전투에서 용감한 신앙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b)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교회 내부의 타협하는 자들입니다. 흉악한 행동은 우상숭배 주변에서 나타나는 불경한 행동들입니다. 살인자들은 박해자들입니다(13:15; 17:6). 음행은 우상의 제단에서 벌어지는 제의적 매춘 행위입니다. 점술과 마술은 신약 시대 훨씬 이전부터 우상숭배와 결부되어 실행되어 왔습니다. (c) ‘거짓말(프쉬데신)하는 모든 자들’로 마무리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가짜들입니다. 경건한 신앙의 모양은 있는데, 실상은 바알 숭배자들입니다. 앞의 일곱 가지 목록에 속한 모든 자는 다 거짓말쟁이들이며, 사탄을 닮았습니다. 거짓의 영에 사로잡힌 공동체는 신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아닌 음녀 바벨론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진 곳에 하나님의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이 완성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늘도 영적 축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더욱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20-01)

 


그리스도의 천년왕국과 성도

요한계시록 20장 1-15절


뜨거운 참숯 불가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숯가마에 참나무를 넣고 숯을 만든 다음, 숯을 빼고 다음 날부터 그 가마 안에 들어가서 찜질을 합니다. 들어간 순간에 숨이 막히고, 죽을 건만 같습니다. 한 5분 동안 정도 땀을 내고 나옵니다. 이러한 곳에 영원히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불못’은 훨씬 더 뜨거운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계시록 전체 속에서 가장 신학적인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두 짐승은 처형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용입니다. 천사가 용을 사로잡아서 무저갱에 넣었습니다. 천 년 동안 열방을 미혹하지 못합니다. 한자님의 백성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합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천 년 이후에 용은 잠깐 놓임을 받습니다. 땅의 백성을 모아서 성도와 최후의 전쟁을 합니다. 최후의 패배를 당하고 두 짐승이 있는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하늘에 백 보좌 심판대가 세워집니다.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무저갱 속 용의 천 년 구속(1-3)

성경은 반드시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교훈합니다. 마귀와 함께 하나님을 배신하고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악을 따르는 모든 자가 그 아비 마귀와 함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악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악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진리를 외면하고 악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악에 대해 계시록은 철저하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1-3)

역사의 끝에 일어날 심판 장면으로, 사탄과 그에게 속한 자들의 심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열방을 미혹하던 사탄의 삼위일체 중 이제 우두머리 용만 남았습니다. 666 체제는 이미 붕괴되었습니다. 666이 현실 속에 정치, 경제 제도로 구현되었던 음녀 바벨론도 멸망을 당했습니다. 음녀의 자리에 신부 예루살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두 짐승(바벨론을 표면에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한 정치와 종교 세력)을 전면에 내세운 용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용은 태고로부터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역사 가운데서 제거되는지를 20장 전체는 확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20장 이후부터는 에스겔 37-48장의 흐름을 따릅니다. 이스라엘의 부활(37장), 곡과 마곡과의 전쟁(38-39장), 새 예루살렘 성전(40-48장). 다만 에스겔에는 천 년이 없고, 계시록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계시록 내부에서 20장은 12장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12장은 사탄이 에덴 동산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어떻게 하나님 백성과 갈등을 이루어왔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2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부터 최후 심판까지 하나님 백성과 사탄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동전의 양면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한 면은 사탄의 운명(1-3)이고, 다른 한 면은 성도의 운명입니다(4-6). 사탄은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서 권세와 활동에 심각한 제재를 받습니다. 반면에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합니다.

(1) 무저갱 속 용의 천년 구속(1)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온 천사에 대한 묘사는 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별 대한 묘사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2) 용의 결박(2)

용은 태고에 천사장 미가엘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땅에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열방을 미혹해왔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제국적인 체제를 가진 나라를 통해 핍박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속에서 메시아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갖은 술수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1-3절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용에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합니다.

(3) 용을 천 년 동안 무저갱 속에 결박(3)

용이 이제까지 휘둘렀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 법정에 성도들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악한 정치 경제 체제를 통해 활동을 펼칩니다. 성도를 박해하고 열방을 미혹합니다. 땅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가택연금으로 활동과 권한에 제재를 받는 정치인과 같습니다. 자신은 결박되어 있어도 대리인이나 부하들을 통해 할 일을 더 왕성하게 합니다. 용은 최후의 시간에는 잠깐 놓인 후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성도의 천년 왕국(4-6)

사탄은 교회를 흔들어 타격을 어려움을 끼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위협하고 미혹하고 분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됩니다. 이 첫 부활에 참여하여(에베소서 2:6) 훗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첨함을 받아 주와 함께 영원한 부활을 누리는 것보다 더한 ‘복’은 없습니다.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4-6)

용의 가택연금의 다른 측면입니다. 몇 가지를 정리하며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늘 보좌에 앉은 자들은 두 증인과 같이 신실한 증인들(11장)입니다. 666 체제에 저항하며 어린양의 성전(聖戰)에 참여한 군대 십사만 사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을 통치합니다. 미래나 하늘에서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땅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삶을 통해 시행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동사무소와 같습니다. 둘째, 통치는 무엇입니까? 상징적입니다. 통치는 우선적으로 재판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가 입의 칼로 대적을 무찌릅니다. 입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세상을 심판합니다. 하늘 법정에서 성도가 활동할 수 있도록 판결이 났습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는 세상을 구원하거나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김이 바로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며 통치합니다.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는 왕 되심을 삶의 모든 영역에 선포하면, 세상과 부딪히고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통치를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언론 등 모든 영역에서 시행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통치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우리 삶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 통치입니다. 셋째, 천 년은 문자적이지 않습니다. 상징적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숫자를 초지일관 상징적으로 사용합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한 구절로 모든 성경을 짜 맞추려는 시도는 무모합니다. 넷째, 소위 말하는 천년왕국설은 요한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이론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논리보다는 상상력을 추구합니다. 강요보다는 설득을 합니다. 다섯째, 성도는 육신적으로 죽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예수를 믿을 때 첫째 부활에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 즉 영적 사망이자 영원한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용의 최후 멸망(7-10)

불신자의 영혼이 불과 우황 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첫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한 자들로서 이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임을 말했습니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누리는 영광인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7-10)

사탄은 잠깐 놓여 최후 전쟁 준비를 합니다. 땅의 모든 곳에서 지원군을 불러 모읍니다. 엄청난 수를 소집합니다. 곡과 마곡은 에스겔 예언의 성취입니다. 하나님 백성과 신앙 공동체를 공격하지만 패배를 당합니다.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자신의 묘지를 판 꼴이 됩니다. 결국 앞서 두 짐승이 던져진 유황불 못에 용도 던져집니다.

 

백 보좌 심판과 생명책(11-15)

악의 세력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지금도 승리하고 있으며 마침내 영원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성결한 믿음을 지켜 가야 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1-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마지막 심판을 묘사합니다. 이 마지막 심판으로 영벌과 영생에 들어갈 사람이 결정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역사의 마지막에,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때 발생합니다. 이때 땅의 역사는 끝이 나고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동안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그들의 수고를 인하여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벌을 내리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 흰 보좌(11)

흰 보좌에 앉으신 이는 심판을 베푸십니다. 옛 하늘과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길을 내어줍니다. 흰색은 심판이 성도의 신실한 증언이 옳다고 입증하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정의로운 심판입니다. 백 보좌 심판은 성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심판입니다. 불신자의 심판입니다. 이미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보관하던 바다와 사망과 음부도 백 보좌 심판을 위해 죽은 자를 내놓습니다. 죽은 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죄의 권세 속에서 영적 사망을 당한 자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자들입니다(에베소서 2:1). 우상숭배를 한 자들입니다. 666 체제에 순응하며 사탄의 통치를 받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2) 생명책(12a)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생명책은 신자에게는 구원의 책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책입니다. 요한은 다니엘 7장과 12장의 두 가지 책을 인유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추면만을 강조합니다.

(3) 죽은 자의 둘째 사망 심판(12b-1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백 보좌 심판을 받습니다. 두 짐승이 유황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용도 따라서 던져집니다. 불신자들도 심판을 받고 던져집니다. 최종적으로 사망과 음부도 던져집니다. 죽은 자를 담던 용기도 불 못에 던져버립니다. 세상의 모든 악한 체제는 종언을 고합니다. 요한은 신자의 심판과 생명책을 연관시켜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는 신자의 심판을 다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5장과 같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진짜 신자는 행위의 벌이 아닌 상급을 다루는 심판을 받습니다.

20장은 바벨론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의 긴장 속에 읽는 하나님 나라가 주제입니다. 21세기의 우상은 경제와 기술과 웰빙입니다.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모든 제도는 666 체제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신적 통치에 참여합니까?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시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가치와 방향 감각을 가지고 저항하는 삶의 예배로 신실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탄의 가치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통치입니다. 순교와 선교가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 받고 첫째 부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사탄의 미혹과 속임수에 빠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19-02)


 백마 타고 오신 예수님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현상에서는 정의로운 자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의 편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용기 얻기를 원합니다.

 

어린양이 이제는 백마 탄 신적 용사로 등장합니다.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6:15)이 다가왔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철장으로 다스리는 아이(12:5)는 이제 심판하러 옵니다(19:15). 심판을 받은 자들은 공중의 새의 먹이가 됩니다. 13장의 두 짐승도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어린양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바벨론 멸망 이후에 바벨론의 동맹 세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제 용만 남았습니다(20:1-3).

 

백마를 탄 신적 용사(11-16)

성도는 십자가 군병으로 우리 앞에 나가 대적과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승리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한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 탄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1-16)

17:1-19:10은 음녀 바벨론의 환상이고, 21:9-22:5은 신부 새 예루살렘의 환상입니다. 19:11-21:8은 음녀 바벨론에서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의 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다룹니다. 4: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요한이 올라갑니다. 두루마리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19:1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신적 용사가 전쟁하러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듣고 보는 환상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늘 무대에서의 신적 활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19:11 이후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볼 일도, 들을 일도 없습니다. 하늘이 역사의 시공간을 뚫고 땅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입니다.

요한은 계시록 앞 단락들에서 이 파루시아(19:11-21)를 예고하는 다섯 가지 지표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1) 6:15의 인 심판을 받는 자들은 19:18에 등장합니다. 심판을 피한 자들이 이제는 새의 먹이가 됩니다. 6:17에 예고한 심판이 19:11-21에 기술됩니다. (2) 12:5에서 철장으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어린아이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19:15에서 심판하기 위해 땅으로 돌아옵니다. (3) 14:20의 포도 추수에서 천사가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넣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들을 밟는 자의 정체는 남겨두었습니다. 19:15에서 그 정체가 밝혀집니다. 신적 용사인 그리스도입니다. (4) 16:14,16에서 악한 영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의 전투’를 위해 왕들을 모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여기와 19:15에서만 등장합니다. 왕들의 모음은 시편 2:2을 인유하는데 19:19에서 분명하게 반향 합니다. (5) 17:14에서 어린양의 타이틀은 짐승과 왕들의 정복자로서 19:16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추종자들은 19:14에서 하늘 군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다섯 가지 지표들은 파루시아 환상에서 수렴되어, 일종의 합주곡을 만들고 있습니다.

(1) 신적 용사의 등장(11-14)

성전(포)의 이미지가 전체 단락을 지배합니다. 바벨론을 배후에서 조종한 짐승들과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하러 옵니다. 구약과 쿰란 공동체와 열심당원들과 유대 백성이 기대했던 종말의 성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요한은 모든 기대를 넘어서서, 하늘에서 오는 신적 용사를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스가랴 9장에서 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어린양은 이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등장합니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라이벌이었던 동방의 파르티아 왕과 그의 기병대를 연상시킵니다.

신적 용사는 한편으로 대적을 심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오십니다. 하늘 군대도 백마를 타고 흰 옷을 입고 뒤따릅니다. 이들이 입은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섬기던 하늘의 군대입니다. 흰색은 박해를 받은 성도들이 ‘옳다고 인정’을 받는 정당성 입증과 관련된 색입니다. 신적 용사가 벌이는 전투는 문자 그대로의 전투가 아닙니다. 12장에서 미가엘과 용이 벌인 하늘 법정의 전쟁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악의 세력들과 싸웁니다. 하나는 정의로 심판하는 심판자입니다(11-12). 그래서 이름이 ‘충신과 진실’(신실과 참)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분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적을 심판하고 그 백성이 옳음을 입증한다는 약속을 지키러 옵니다. 그래서 거짓과는 반대되는 참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신실한 증인(11장)입니다. 피 뿌린 옷은 신실한 증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의 피 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백마를 탄 기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름, 비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문학적 기교로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a) ‘충신과 진실’로 칭합니다. (b) 자기만이 아는 이름입니다. (a')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다른 누구에게 일려진 이름은 이마와 옷에 드러나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은 무엇입니까? 16절에서 드러납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입니다. 다리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용사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옷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자신만이 알도록 기록된 이름이지만, 요한은 세심한 독자가 눈여겨볼 수 있도록 문학적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름은 여호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nomen ineffabile, 필로, 모세의 생애 3:519, 529)입니다. 여호와는 대제사장의 이마에 있는 금으로 된 명찰에 쓰여 있는데, 유대인들은 읽을 때 발음을 하지 않기에 어떻게 부르는지 모릅니다.

(2) 신적 용사의 성전(15-16)

15절은 네 가지 구약 본문을 복합 인유합니다(이사야 49:2; 11:4; 시편 2:9; 이사야 63:2-6). 하나님 백성의 대적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본문들입니다. 입의 검(이사야 49:2; 11:4)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사야 11:4을 칠십인역은 ‘그 입의 호흡으로 악인들을 도살할 것이다’로 번역합니다. ‘검’의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합니다. 히브리서 4:12과 지혜서 18:15-16에서도 검증됩니다. 지혜서 본문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들을 동등하게 여기는데, 이집트인들을 응징하였던 ‘예리한 검’과 더불어 하늘 보좌로부터 튀어나옵니다. 두 본문에서 검의 은유는 심판의 실행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철장으로 다스리다’는 시편 2:9의 인유입니다. 시편 2:8-9, 12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불경한 왕들을 전복한다고 예언합니다. 이들 왕들은 주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세를 취하고 공모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63:2-6은 포도주 틀을 밟는 자의 정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합니다. 포도주 틀에 있는 포도를 짓밟듯이 철저한 심판입니다.

 

짐승에 대한 심판(17-18)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악이 강해 보이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끝까지 인내하며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악한 세력의 미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짐승과 추종자들에게 예비하신 궁극적인 심팜을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17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17-18)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음녀 바벨론이 주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부역했던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사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 군대에 다가올 멸망을 에스겔 39:4, 17-20에 선포된 곡과 마곡의 패망에 사용된 이미지를 사용하여 선언합니다. 포식성 새들의 초대는 다가올 패망의 확실성을 비유적으로 강조합니다. 왜 이 시점에서 에스겔을 인유하고 있습니까? 악의 세력의 말세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는 다른 구약 예언들(다니엘 2, 7-12장; 스가랴 14장)에서도 도출할 수 있었겠지만 에스겔 39장의 그림이 포함된 이유는 이 단락의 주요 요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곡과 마곡을 패망시키신다,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알게 만드십니다. 신적 이름의 계시가 주목적입니다. 그리스도도 심판과 구원을 통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름을 열방에 알릴 것입니다.

 

두 짐승의 심판(19-21)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두렵지만,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심판이 두려움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영광을 얻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합니다.

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19-21)

이 단락은 16:14와 20:8의 복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19:19은 16:14과 20:8에서와 같이 최후 전쟁에 대한 동일한 전주곡을 언급한다. 16:14에서 귀신의 영들이 온 땅에 거주하는 왕들을 불러 모아서 함께 전쟁을 일으키려고 미혹합니다. 20:7-8에서 사탄은 열방, 즉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그들을 함께 불러 모아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나올 것입니다. 왕들과 그들의 군대는 자신의 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귀신의 영향력으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전투는 그리스도와 그의 하늘 군대를 대항하여 수행됩니다. 시편 2:2의 인유입니다. 전투 결과는 두 짐승의 포획입니다. 13장에서 등장한 두 짐승으로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입니다. 유황불 못에 던져져서 그리스도의 칼로 처형되고, 그 시신은 공중의 새들이 먹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중인 이야기의 패러디입니다. 두 중인과 같은 처벌을 받는데, 살아나지 않고 비참하게 죽어 장사도 치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바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멸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은 현실에서 악의 세력에 핍박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19-01)


 바벨론의 멸망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 18장 21절-19장 10절


운동 경기는 마지막 끝날 때가지 긴장을 풀지 않고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이겨놓은 경기도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을 야구에 비유하면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2대 1로 지고 있더라도, 마지막 투구에서 말루 홈런을 쳐서 역전을 한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상황까지 계속 지고 있던 상황이라도 마지막 한 순간에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운동선수라면 막판 뒤집기의 승리에 대한 기쁨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센 천사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집니다. 바벨론 멸망을 기념하는 상징적 행위예술입니다. 바벨론 심판의 최종 선고입니다. 최종 여성 가지 목록은 바벨론에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늘에서는 승전가가 올려 나옵니다. 18:20의 지시가 시행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배설됩니다. 신부가 준비하고 축하객이 초청됩니다. 요한은 너무 흥분하여 또 실수합니다.

 

바벨론을 위한 장송곡(18:21-24)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아는 성도는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좁아서 걷기 힘들어도 생명과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통치자로서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항상 아름다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23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21-24)

20절에서 초상집에서 애곡하는 분위기가 잠시 중단됩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제 애가가 아닌 축가를 부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됩니다(19:1-10). 하나님의 준비를 21-24절에서 바벨론 심판이 가져오는 냉엄한 실재로 나열합니다.

(1) 힘쎈 천사와 큰 맷돌(21)

힘센 천사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바벨론은 존재감 자체가 완전히 지워집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장면,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사라지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바벨론은 거주민이 없는 유령 도시가 됩니다. 완전한 황폐함의 이미지를 여섯 번의 연속적인 ‘아니하고’를 통해 표현합니다(이사야 13:20-22).

(2) 바벨론이 상실한 여섯 가지(22-23a)

‘바벨론은 결코 다시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를 다섯 가지 ‘아니하다’로 구체적인 내용을 나열합니다. 바벨론에는 풍악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미술과 음악과 세공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구가해온 바벨론의 명성은 끝이 났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도시 생활의 특색인 청사초롱 빛과 결혼하는 장면이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3) 바벨론이 황폐하게 된 이유(23b-24)

왜 음녀 바벨론은 이렇게 황무하게 되었습니까? 요한은 바벨론 멸망으로 인한 황무함의 원인 세 가지를 최종적으로 선고합니다. 첫째는 바벨론의 상인들은 정치적 축재자입니다. ‘왕족’(메기스탄)은 ‘높은 자’, ‘우두머리’입니다. 대부호가 되어서 자기 영화에 도취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만합니다(이사야 23:9의 휘브리스). 정치를 이용하여 축재한 자들은 자신만만하고 거들먹거립니다. 결국은 신성 모독의 길을 걷습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위대하다’고 부릅니다(11:8; 14:8; 16:19; 17:1,5,18; 18:2,10,16,19,21,23).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호칭이고,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둘째, 모든 열방을 미혹한 ‘복술’입니다. ‘복술’(파르마케이아)은 이사야 47:9과 나훔 3:4의 인유입니다. 복술은 마술이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여러 종류의 약품을 혼합하여 주술 행위를 하고 마시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18:3, 6에서 바벨론이 혼합된 포도주로 미혹하는 은유는 당시의 주술적 관습이나 행위를 발전시킨 표현입니다. 로마 황실과 귀족에서 연회를 할 때 마술을 행하였습니다. ‘미혹’은 음행, 즉 우상숭배와 연결됩니다. 이세벨은 음행과 복술로 이스라엘을 미혹했습니다(열왕기하 9:22). 셋째, 바벨론의 번영 배후에는 하나님 백성과 사회적 희생자들의 피가 있습니다. 피는 온갖 종류의 종교적 정체적 핍박과 경제적 착취를 상징합니다. 성중에서 피가 발견되었습니다(유레데). ‘발견되다’는 바벨론이 ‘결코 보이지 않는다’를 염두에 둔 언어유희입니다. 바벨론이 번성할 때는 약자와 희생자들의 피가 흥건했다는 표현입니다. 경제활동과 사교 행위는 본성상 정치나 종교와는 무관하게 중립적이라고 생각한 독자들은 바벨론 멸망을 관찰하면서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바벨론은 인간을 향하여 악독한 폭력을 자행하던 곳인 동시에 소수 특권층인 왕들과 거상들이 축재를 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 번영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체제는 바벨론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길로 걸어갑니다. 부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상의 할렐루야 공연(19:1-8)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 보좌에서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편 115:13).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찬양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충만히 받아 누려야 합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8)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18:20에 ‘성도들아 즐거워하라’는 권면에 대한 하늘 성도들의 응답입니다. 1-6절의 사중적인 할렐루야는 할렐 시편들(시편 113-118)을 인유합니다. 이들 시편들은 출애굽 사건을 최고조로 조명합니다. 특히 랍비 문헌은 할렐 시편과 사악한 자의 최후 파멸을 결부시킵니다.

(1) 첫 번째 할렐루야 : 허다한 무리의 찬양(1-3)

무엇을 찬양합니까? 첫째,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탈리오 원칙은 신적 정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피로 땅을 황폐하게 한 자는 황폐해집니다. 둘째는 바벨론 멸망으로 인해 찬양합니다. 연기가 올라가는 장면은 바벨론 멸망을 상징합니다(14:11).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더불어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표현합니다(8:4). 셋째, 아멘 할렐루야는 신적 비준을 뜻한다. 지금은 찬양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들이 찬양할 때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배설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가 통치하신다.’ 구약에서 대적의 심판은 하나님 왕권 확립의 신호입니다(시편 93:1; 96:10; 97:1; 역대상 16:31; 이사야 52:7; 스가랴 14:9).

이사야의 복음의 내용은 ‘주가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이사야 40:9; 52:7; 61:1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 이미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잔치는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자리입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스스로 혼인 예복을 준비해 왔습니다. 음녀 바벨론에 저항하며 신실한 중언을 하였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인데 성도의 ‘옳은 행실’(디카이오마타)을 가리킵니다.

7절에서는 신부가 옷을 준비해왔습니다. 8절에서는 신부의 옷이 주어집니다.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구원은 ‘주어지는’ 수동성과 우리가 ‘이루어가는’ 능동성의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양면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동사 ‘주어지다’(에도데)를 ‘허락하다’, ‘승인하다’로 번역합니다. 어린양이 준비한 옷을 입도록 허락하십니다. 신부의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음녀 바벨론의 복장(18:16)과 대조됩니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9-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성도들을 초대하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치스러운 옷을 입던 바벨론은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지만, 고난의 옷을 입어야 했던 성도들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 영광스러운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아름답고 거룩한 신부가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9-10)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전하며 기록하라고 명했습니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음녀들과 대조적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다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영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 잔치에 초대받은 자의 복(9)

천사의 선언입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은혜로운 복입니다. 일곱 우레 심판을 기록하지 말라던 천사는 이 축복 선언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요한은 또 실수를 범합니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홍분하면 실수합니다. 천사는 함께 섬기는 종이고 함께 예배하는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천사를 숭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종인 메신저를 수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풍조가 교회에 팽배합니다. 바벨론 멸망을 두고 서로 다른 음성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옵니다. 애곡하는 소리와 승리의 함성입니다. 18-19장의 특징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쪽에 마음을 들 것인지 선택하기를 요구합니다. 현재 제국적 체제에 부역해왔던 독자들은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교회 내부에는 여전히 이세벨과 발람의 목소리가 권력자와 경제적 강자들을 통해 강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계시록의 끝까지 결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울려 나오는데, 이는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목소리입니다. ‘부정한’ 것이 여전히 새 예루살렘 도성의 문에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의 역사를 주의 깊게 상고하고, 국제적인 경제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국제 무역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까지 중립적인지를 평가해보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2) 요한의 천사 경배와 천사의 교정(10)

바벨론과 더불어 왕들과 권력자들이 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부와 지위와 권세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권력이 대다수의 자원을 착취하고 고갈시켜나간, 하나의 문화적인 형태를 띤 난잡한 성행위입니다(a cultural promiscuity).

정치학이나 경제학은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며, 그들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가설을 계시록은 장려하지 않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구속이 필요 없다고 수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목음을 신실하게 증언한다는 기준은 신조의 고백이나 교회 생활이 아닌 바벨론에 대한 저항이 그 판단 기준입니다.


새 노래의 기백을 회복하여 제국의 이야기와 싸워 이길 전투력을 높여야 합니다. 피상적인 종교성 제외에서 벗어나 예배와 저항으로 충만한 선교적 기세를 축적하고 발휘해야 합니다. 담보된 승리 속에서 소망의 인내로 할렐루야를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린양은 승리하셨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18-02)


바벨론 멸망의 애가

요한계시록 18장 9-20절


 눈에 보인 권력은 독재자라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동화와 적응합니다. 가능하면 그 권력에 의해 피해보지 않고 수혜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독재자가 망하면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재자 때문에 권력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권이 없어지기 때문에 슬퍼합니다.

 

로마제국은 하룻밤 사이에 멸망을 당합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보고 세 집단이 통곡합니다. 로마와 매춘을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땅의 왕들, 그동안 제국의 보호 아래서 치부했던 땅의 성인들, 그리고 해양산업 종사자들이 통곡합니다. 그 사이에 멸망하는 로마를 행해 불쑥 터져 나오는 탄식이 들려옵니다. 로마제국을 향한 애가(哀歌)입니다.

 

첫 번째 애곡 집단 : 땅의 왕들(9-10)

세상의 영화(榮華)는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바벨론과 같이 부를 약속하는 세상의 경제적 기반이 신속히 무너지게 될 것을 알고 세속주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한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과 부를 태우는 자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탄식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처럼 언제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9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9-10)

본문은 땅의 왕들은 로마제국과 거래(음행)하며 사치를 누려왔습니다. ‘사치’는 부요하면서도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 단어의 다른 뜻은 ‘관능적(官能的)’입니다. 악의적인 탐욕을 부리는 행동입니다.

로마 지방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로마의 제국적 체계를 지지하고 후원하였습니다. 에스라 4서는 명확하게 판단합니다. 아시아는 경제적 부도덕에 협력함으로써 ‘로마의 매력과 유혹에 공동 분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5:46-53). 경제 복지를 위해서 자기 영혼을 짐승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에게 로마는 크고 견고합니다. 그래서 추종하고 부역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과 같이 순식간(한 시간)에 멸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경제적 손실만 계산하고 애통해 합니다. 로마에 대한 애정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왕들이 17:16에서 음녀를 멸망시킨 주역들인지도 모릅니다. 그간 혜택을 누려온 로마의 멸망을 거리를 두고 서서 두려워하며 통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곤경을 당하는 자들과의 공감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에게 닥칠 물질적 빈곤만 생각하고, 자기들에게 닥칠 심판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애곡 집단Ⅰ : 땅의 상인들1(11-13)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부를 축적하고 사치하는 것이 죄가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과도한 치부와 사치를 정죄하십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우상 숭배는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전하면서(골로새서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부리가 된다고 교훈했습니다(디모데전서 6:9-1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의식 없이 돈을 사랑하며 사치를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를 일삼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러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경건한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11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13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다(11-13)

본문은 음녀 바벨론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상인들도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그들이 파는 상품을 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의 눈물은 오늘날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의 비인격성과 잔인함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1) 상인들이 애통하는 이유(11)

땅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주요 고객이 말했기 때문에 통곡합니다. 다시 판로를 개척하기엔 막막합니다. 인도주의적 공감력이 전혀 없습니다(15).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신분과 지위,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만 생각합니다. 상거래의 파트너는 이용의 대상일 뿐 공감의 대상은 아닙니다. 몇몇 필사자들은 ‘그녀를 애곡하다’를 ‘자신들을 두고 애곡하다’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실수입니다.

(2) 상인들의 거래 품목(12-13)

이제 로마와 거래했던 상품의 목록들이 총 열거됩니다. 총 스물여덟 가지인데, 4×7=28입니다. 로마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지 수들입니다. 이 물품은 극도의 사치품들입니다. 로마 수입물 중에 가장 비싸고, 사치와 향락을 위한 것들입니다(플리니 자연사 37:204). 여기에 로마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자연 생산품 중 열세 가지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수입이 증가하여 베스파시아누스 시대를 거쳐 계시록이 기록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절정에 이릅니다. 특히 아라비아, 동 아프리카, 인도의 동방 무역은 급증했습니다. 왜 부자들의 향연을 위해 로마 세계 전역에서 수입한 외래 식품은 빠져 있습니까? 14절에 불쑥 튀어나오는 탄식으로 그 몫은 남겨두었습니다. 요한의 비판이 당대 로마 도덕군자들의 비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고대 로마 귀족들의 근면하고 엄격하고 단순한 생활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상류층의 부패와 향락을 비판하면서도 로마제국의 권력과 풍요는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로마제국 자체를 신랄하고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비판합니다. 로마가 가진 사악한 근성을 폭로하고 비판합니다. 비판의 절정은 마지막 두 항목, 노예무역과 사람의 영혼 매매입니다. 로마는 부와 사치를 위해 세계를 정복하며 노략질했고 정복한 땅에서 세금을 수탈하여 부와 풍요를 누렸습니다. 또 노예와 부속민의 노동을 착취하였습니다. 로마의 사치와 풍요는 로마를 치장하는 복장과 보석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16). 로마가 음녀임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17:4). 음녀의 옷은 경제 체제가 종교적 후광을 입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제사장의 의복과 비슷합니다. 12-13절의 스물여덟 가지 목록과 비교할 때, 두로의 거래 목록(에스겔 27:12-24)에 포함되지 않은 열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한은 그중 세 가지 ‘세마포와 진주와 자주색 옷’을 언급합니다. 이것들은 칠십인역에서 대제사장의 의복 묘사에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곱게 단장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스라엘은 화려함을 믿고 창녀가 되어버렸습니다(에스겔 16:13) 로마제국도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음녀의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도 동일하게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21:2,10-23).

 

두 번째 애곡 집단Ⅱ : 땅의 상인들2(14-17a)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을 구원하고 지킬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고 완전한지 사망과 슬픔과 굶주림이 한꺼번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거래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4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14-17a)

요한은 상인들의 애곡 중에 갑자기 터져 나오는 탄식의 소리를 끼워 넣습니다. 스물여덟 가지 목록 중에 노예와 인간의 영혼이란 간명하지만 음산한 언급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노예들은 그저 몸뚱이뿐입니다. 거기에다 더 많은 상품들이 부가되어서 긴 목록을 이루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토를 달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혼들’이라. 로마제국의 영혼이 탐하던 맛있고 빛난 과실입니다. 단어 ‘탐욕’(에피두미아스)은 십계명의 탐심과 창세기 3:6의 선악과를 반향 합니다. 인간을 소비재로 간주하고 탐욕을 부렸습니다. 첫 번째 도시를 세웠던 바벨탑 세대 이후에 가인의 길을 완성한 장본인이 로마제국입니다(요한일서 2:16;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60). 로마제국의 사치는 수백만 노예를 희생시킨 결과입니다. 사치품들은 탐욕스러운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중심부의 소수 특권층에게로 향합니다. 주변부는 엘리트들의 단순한 공급원일 뿐입니다. 소수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부유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도에 지나치게 추구합니다. 그 결과 나머지 인간은 숨겨진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한은 왜 제국의 부역자들을 악하게 보았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경제적 착취로부터 유익과 혜택을 얻던 자들입니다. 신자는 주변 사회와 무엇을 공유해야 할지, 무엇에 공감해야 할지, 누구와 연대할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통곡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머나의 니골라 당과 두아디라의 이세벨의 교훈에 빠진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요지는 ‘타협하지 말라’, ‘부역하지 말라가 아니라’, ‘도리어 비판하라’, ‘즐거워하라’입니다(20). 독자들 중에 제국에 부역하면서 호의호식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바벨론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결단하라는 요청이자 경고입니다.

 

세 번째 애곡 집단 : 뱃사람들의 애통(17-19)

돈은 중요하지만, 결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인생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가면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급작스럽게 한 순간에 몰락하면 충격과 공포와 허탈감에 사로잡힙니다. 어제 부러움의 대상이 오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선장과 선객과 선원들도 더 이상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합니다.

17…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19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b-19)

뱃사람들의 애통은 땅의 왕들이나 상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며, 머리에 티끌을 뿌리는 애곡의 표현만 추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애통은 로마제국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통곡입니다. 로마는 해양강국입니다. 그동안 로마제국의 경제적 번영 때문에 치부하였는데,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즐거움(20)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가치와 문화에 끝까지 저항하며. 하나님 없는 성공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곤경을 선택하고 숱한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적인 손길을 믿고 의지하며 말씀을 청종하는 삶에 따르는 고난과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신원하실 것입니다.

20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20)

예레미야 51:48-49의 인유입니다. 우상숭배에 부역한 자들의 절망은 성도들의 환희로 나아가게 하는 관문입니다.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온 하늘과 성도와 사도와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기도(6:9-10)에 대한 응답이 바벨론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들은 제국의 피해자들입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없는 용서나 연민의 요구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고 또 다른 폭력입니다. 값싼 동정심으로는 누구도 포용하거나 치유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의로운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냅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탈리오 원칙은 성경의 원리입니다(신명기 19:19-21).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옳음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약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정의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악한 자들의 심판을 통해 명예가 변호됩니다.

20b절은 ‘바벨론이 성도를 법정에서 고발한 죄목을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했는데, 이는 성도가 옳다고 입증하기 위함이다’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인 심판에서 성도들이 탄원한 기도의 핵심입니다.


바벨론은 크고 강한 성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의 권세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의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는 참다운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18-01)


음녀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 18장 1-8절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자기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잘 될 수 있었고, 선한 사람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한 자들을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바벨론을 소개하고 그 멸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서술합니다. 18장은 17:16의 간략한 언급의 확대판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바벨론은 더럽고 가증한 곳으로, 정치와 경제의 세계적 영향력으로 만국을 무너지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합니다. 심판은 임박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도망가라!’호소합니다.

 

바벨론이 멸망당해야 하는 이유(1-3)

성도들은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체계나 물질주의는 우리 시대의 바벨론으로서, 부와 명예를 약속하며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부를 획득한 사람은 바벨론처럼 오만하게 되고 그것들이 영원히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판은 한 순간에 임하게 되어 집니다. 지금 삶 가운데 타협하거나 물들지 않고 떨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버리시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1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1-3)

바벨론은 화려하고 권세가 있습니다. 실제 생황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짐승에 의해 음녀가 죽임을 당한 후,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온 다른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하늘 법정에 바벨론을 피의자로 세우는 일종의 기소장과 같습니다. 요한은 하늘의 포고령을 전달하는 천사를 더 권위 있게 묘사합니다. 하늘에서 다른 천사가 내려와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합니다.

(1) 큰 권세를 가진 다른 천사(1)

바벨론보다 더 찬란한 영광과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힘찬 목소리로 바벨론의 최족적인 멸망을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사들은 그가 전할 메시지의 성격에 알맞게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 천사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진 것은 옛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이 등장할 것을 알리고 여호와의 영광을 묘사한 에스겔 43:2의 장면과 비슷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모습은 바벨론의 멸망 선언과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강림 모습과 비슷합니다.

(2) 바벨론 멸망의 선언(2)

바벨론은 처음에는 영광스러웠지만 멸망하고 나면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짐승들이 거하는 도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 화려한 도시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는 것은, 그 도시의 철저한 폐허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에돔이 폐허가 된 것(이사야 34:11-15)과 옛 바벨론이 폐허가 된다고 예언한 내용(예레미야 51:37)을 반영합니다.

(3) 바벨론 멸망의 이유(3)

바벨론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간략이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행한 음행(우상숭배)의 진노의 포도주 때문입니다(3).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행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당연히 세상에서 멸망해야 합니다. 바벨론만 아니라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하고 바벨론이 행한 사치에 도취되었으며, 바벨론 때문에 더럽혀진 땅의 왕들과 상인들도 멸망됩니다(이사야 13:19-22; 예레미야 50:39,40; 51:37).

큰 성 바벨론이 멸망한 이유를 첫째, 모든 민족이 바벨론의 음행으로 빚은 포도주에 취하여 무너졌으며, 둘째, 세상 왕들이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했으며, 셋째, 세상 상인들이 바벨론의 사치 덕분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자신들만 타락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타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향한 천사들의 외침(4-8)

세상은 공룡과 같이 거대합니다. 그들의 욕망에 대한 부르짖는 소리는 위축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비교할 때 우리는 정말 작아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겉으로는 거대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잠시 후 하나님께서 심판하면 모두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믿음으로 보면서, 지금보다 더 당당해지고 더 편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4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4-8)

바벨론 멸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린 재앙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지체 없을 것이며 변함없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제 천사는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백성을 향한 요청(4-5)

천사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멸망하는 바벨론에 머무는 자는 그의 죄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짐승의 지배권이 극에 달한 음녀 바벨론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소비문화 가운데서, 요한은 쓰고 그의 독자들은 읽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언약의 용어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입니다. 요한은 좋든 싫든 바벨론의 풍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타협하여 순응하든, 침묵하고 중립을 지키든, 제국의 체제에 부역하는 자가 됩니다. 비록 동조하여 살지는 않지만 바벨론의 주권이 강하게 미치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전망이 필요한 자들을 향하여 계시록을 통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각이 있다면, 그 수중에서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관에 기초하여 일상생활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바벨론이 다스리는 천년 왕국에서의 유배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우상 숭베적 타협과 물질의 풍요와 정치적 안전으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는 하나님 백성에게 비슷한 경고를 합니다(예레미야 51:45; 이사야 52:11; 고린도후서 6:17).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도는 탈출해야 합니다. 요한은 문자 그대로 지리적인 탈출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가치와 생활 방식과 단호하게 결별하라는 경고입니다.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고 타협하거나 동화하지 말라는 호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바벨론의 사악한 뜻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시의 사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야 합니다. 경제적 안전보장은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입니다. 유혹을 뿌리치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큽니다. 로마제국의 영향력은 너무 막강합니다. 로마의 진노와 음행의 포도주로 열방은 로마 황제 숭배 요구를 뿌리 칠 수 없었습니다. 거역하면 로마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그렇게 순응하며 경제적 이익에 취하게 만듭니다.

한번 마시면 중독되어서 바벨론의 파괴적 영향력에 저항하려는 모든 욕구들을 제거해버립니다. 중독되면, 맹목적인 탐닉을 하게 되고, 감각과 분별력이 마비됩니다. 로마제국의 죄는 열방을 정치적 안전보장과 경제적 풍요를 미끼로 황제 숭배의 길로 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상인들의 배만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로마가 제공하는 평화(Pax Romana)는 속임수입니다. 로마에 부속된 나라의 백성은 엄청난 세금과 부역을 제공하였습니다. 로마가 제공하는 혜택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다 돌아갔습니다. 하층민들은 노동 착취와 세금 수탈로 신음하고 있는 평화가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는 자신의 경제적 자원을 신뢰하라고 열방에게 강요합니다. 바벨론식 교만의 표현이고 우상승배의 형식입니다. 이에 대한 신적 응답은 정죄와 심판입니다.

(2) 정의의 복수를 위한 요청(6-7a)

이 단락의 핵심 단어는 ‘갚아주라’입니다. 로마제국이 행한 그대로 갚아주라! 썩은 잔도 갑절로 갚아주라! 호사스러움과 사치를 고통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탈리오 법의 적용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같은 맥락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흔히 정교분리의 의미로 잘못 해석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없습니다. 마카비 시대의 슬로건을 인유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로 갚아드려라! 가이사가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로 갚아주라! 로마가 유대에 은택을 베풀었다면, 세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압제와 고통을 안겨주었으면, 그대로 갚아주라는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문제는 갚아주어야 할 주체가 누구입니까? 본문은 침묵합니다. ‘갚아주라’는 동사(아포도테)는 2인칭 복수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인 ‘내 백성’의 저항적 행동을 촉구합니다. 천사도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활동하는 짐승과 동맹국들을 향한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3) 몰락에 대한 예언(7b-8)

역사적 바벨론의 교만과 패망은 역사의 끝자락에서 범세계적인 바벨론 체제가 맞이하는 모형론적인 패턴입니다. 바벨론의 정치적 경제적 안전보장이 갑자기 사라지면, 교만한 자부심은 근거가 없고 미혹임이 날날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자기 우상화입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47:7-8의 인유입니다. 안전하다고 자부하고 안주하던 바벨론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당한 역사적 사실이 모형론적 이미지입니다(다니엘 5:30).


오늘도 세상인 바벨론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기 원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락으로 유혹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악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유혹으로부터 요셉처럼 밖으로 뛰어 나가야 합니다. 이 세속적인 유혹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한계시록(17-01)


음녀 바벨론의 종말

요한계시록 17장 1-18절


초등학교 앞에서는 아주 싸고 초등학생 입맛에 딱 맡은 식품이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에 맞게 100원이나 200원이면 살 수 있지만, 대부분 ‘불량식품’이라고 불립니다. 불량식품은 입에 달고 맛이 있지만, 자주 당겨서 자주 찾게 됩니다. 불량식품이라고 불리운 것은 건강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본문부터는 영적인 세계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곱 천사 중 한 천사가 요한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심판의 시작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을 보여주심으로 시작됩니다.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왜 바벨론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서론 : 바벨론의 멸망(1-2)

사탄은 선악과 사건 때부터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미혹해서 영혼과 육체를 더럽히려 합니다. 로마는 음란 문화와 수많은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로마보다 그다지 나올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악한 문화에 젖어들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1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1-2)

17장에 대한 서론입니다. 더 넓게는 17:1-19:10의 서론이고, 주제는 로마 제국의 멸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물과 바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악의 상징입니다. 음녀는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영적 간음, 즉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1)

일곱 대접을 쏟은 천사들(15:1; 16장) 중 한 천사가 요한에게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고 멸망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여기서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로 등장합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준 이 환상에는 일곱 대접 재앙과 그 재앙의 결과가 나타나 있습니다. ‘앉았다’는 것은 주권 행사를 함축합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는 하나님 백성을 핍박하는 많은 악한 나라들과 매춘을 일삼는 제국에 대한 요한의 통찰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많은 부속민을 거느리고 있는 제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로마와 열방의 왕들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후견인과 후견자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2) 땅의 임금들의 매춘부(2)

요한은 이를 ‘음행’이라고 합니다. 열방의 통치를 받는 우상숭배자들은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매춘부가 돈으로 몸을 팔아 성적인 봉사를 한다는 대중적인 인식을 활용합니다. 로마가 제시하는 경제적 번영과 군사적 안전보장은 한 번 맛을 들이면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큰 유혹입니다. 한 번 마시면 진리에 눈멀게 하고, 영적으로 맹목적이게 만듭니다(이사야 29:9).

 

큰 음녀, 바벨론의 환상(3-6a)

현재 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면 현실의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입니다.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종말의 관점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결말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신 결망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멸망하거나 사라져 버릴 것을 쫓아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헛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을 놓아 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3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3-6a)

본문에서는 요한이 본 환상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본 것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큰 음녀인 바벨론의 모습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붉은 빛’은 음녀가 입은 옷의 색깔이며, 사치와 영광의 빛이며, 죄의 색깔입니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악녀의 모습이 그대로 들러났습니다.

짐승의 모습은 12:3의 용과 13:1의 짐승과 어구적으로 동일입니다. 짐승은 사탄의 정치적 대리인입니다. 동일한 짐승의 활동을 다른 각도로 서술합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성격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음녀와 짐승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지만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이 사탄과 동맹 관계임을 폭로합니다. 둘은 합동하여 성도를 핍박하고, 우상숭배자들을 미혹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독자는 짐승의 붉은빛과 음녀의 붉은빛 옷을 성도의 피로 읽어냅니다. 머리와 열 뿔은 다니엘 7장의 인유로 악한 왕국의 권세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은 신적인 권위를 주장하여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는 특징들을 상징합니다. 666 자체가 신적 삼위일체를 흉내 내는 신성모독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는 바벨론의 무역 목록(18:12)에서 대표 상품들입니다. 국제적인 무역을 통한 경제적 결탁을 상징합니다. 손에 든 금잔은 예레미야 51:7-8의 인유로 바벨론이 열방을 취하게 하는 본성을 나타냅니다. 여기 가증한 물건은 세상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신적 진노의 대상입니다.

음행의 더러움은 우상숭배의 배후에 귀신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음녀의 자줏빛 옷은 황족과 부유한 엘리트들과 결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음녀의 복장이 화려하고 고상해도 본질상 흉하다, 창녀를 홍내 낼 뿐입니다. 큰 음녀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 ‘크다’는 것은 어느 한 시대에 미치는 능력의 크기가 얼마 정도인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 그 영향력과 악명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냅니다. 생존 유지에 필요한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큰 것은 자원이 제한된 이 세상에서는 그 자체로 죄악입니다. 강탈하여 잉여를 축적한 결과가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법정에 세울 때 두 가지로 죄목을 요약합니다. 먼저 바벨론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우상숭배 체제에 권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입니다. 둘째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자입니다. 음녀의 금잔에 가득 찬 것은 성도와 증인의 피 입니다. 큰 음녀 바벨론은 제국적인 정치, 경제 체제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크고 화려하고 매력적이며 숭배의 대상이 되고자 합니다.

 

큰 음녀 바벨론의 본성(6b-15)

지금도 돈과 권력이라는 강력한 우상이 온 새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추종하라고 가르치는 숭배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를 비웃고, 자기들의 신을 섬기라고 유혹하며 위협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우상숭배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드시 심판 받습니다.

6…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9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15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6b-15)

17,18장은 바벨론 멸망을 다루는데, 17장은 정치적, 종교적인 측면에서. 18장은 문화,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그 결과를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17장에서는 여자 이미지인 음녀로 소개되고, 18장에서는 도시 이미지인 바벨론으로 소개됩니다.

(1) 요한의 경탄(6b-7)

요한은 음녀를 보고 놀랍게 여깁니다. 천사는 ‘왜 놀랍게 여기느냐?’라고 호통합니다. ‘놀라움’은 다니엘 4:17,19이 배경입니다. 다니엘이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다니엘은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책망을 받습니다. 왜 요한은 놀랐게 여겼습니까? 요한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두 번이나 천사를 숭배하려고 했다가 책망을 받습니다(19:10; 22:8). 요한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반응은 불경한 세상이 짐승에게 보이는 흠모와는 대조됩니다.

음녀의 모습이 신부 예루살렘과 비슷합니다(21:18-21). 구약의 대제사장의 복장을 연상시킬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환상에 대해 두려움과 당황스러움과 흠모의 마음으로 다가 갔지만, 결국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당황하고 두려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번역은 ‘경이로워 했다’일 것입니다.

바벨론의 본성을 통찰하기 위해 성도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있다. 첫째, 광야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3). 광야는 성도가 보호와 양육을 받는 곳이며, 뱀과 악한 영들이 성도를 핍박하고 심판을 받는 곳입니다(12:13-17). 제국은 성령의 눈으로 광야에서 볼 때 정확하게 파악됩니다.

둘째, 비밀을 확실히 인지해야 합니다(5). 비밀은 다니엘의 인유입니다(다니엘 4:9).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고 짐승의 나라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직전에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비밀은 그리스도와 그 백성의 고난을 통해서 아이러니하게 성취됩니다. 짐승의 나라는 패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돌아오기 이전에도 이미 내부에서 스스로 배반하고 멸망하기 시작합니다.

셋째, 지혜가 필요합니다(9). 지혜는 하나님 나라와 제국의 본성에 대한 분별력이며, 제국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제국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하면, 제국을 숭배하게 됩니다. 정부의 정치와 경제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지 혹은 바알의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보지 못한 채 종교적 측면만 보면 우상승배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넷째, 어린양이 제국의 배후에 있는 사탄에게 이겼습니다. 성도가 제국에게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14). 어린양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 이기는 길입니다. 다섯째, 제국의 위엄과 자태에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흠모하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큰 음녀 바벨론의 멸망(16-18)

하나님께서는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셨고, 악한 바벨론을 악한 바사를 통해 징벌하셨습니다.

16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18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16-18)

요한은 13장과 17장에서 네로 전설을 최대한 활용합니다(13:3,12,14; 17:8,11). 네로는 죽지 않고 단지 사라졌을 뿐이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전설입니다.

13장은 네로의 치명적인 상처와 죽음으로부터의 회복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17장은 네로의 실종과 출몰이란 주제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를 패러디합니다. 짐승은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때 의미심장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에 널리 사용되었지만, 계시록에서는 이 단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13:1의 표현과 똑같은 표현으로 바다는 태고로부터 혼돈의 장소입니다. 17:8의 요지는 죽은 네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이 용이 원래 불러냈던 무저갱에서 다시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네로는 로마를 통치하다가 없어졌는데 다시 귀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환은 통치가 아닌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짐승에 대한 요한의 설명은 창의적인 상상력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의 시대 로마제국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입니다.

요한은 단지 기독론적 패러디를 제국에 투사하지만은 않는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와 라이벌을 이룰 만큼 신적이고 메시아적인 구성 요건을 갖추고 있음을 간파합니다. 로마는 열방과 짐승에게서 혼연일치의 지지와 위임을 받았지만(12) 결국 배신을 당한다. 사탄은 일정 기간 사용하고 효용성이 떨어지면 버립니다. 동맹국의 반란과 경제와 종교 체제의 배신으로 로마는 망합니다.


 우리 시대에 다가오는 큰 음녀인 바벨론과 같은 유혹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바벨론의 문화에 유혹은 잠시 동안은 달콤한 쾌락입니다. 잠시 쾌락 때문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은 영혼을 죽이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악한 세력에 대해 잘 저항하며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