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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2-01)


새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생활

요한계시록 21장 22절-22장 5절


 ‘그리스도의 초상’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양인과 동양인이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모습이 다릅니다. 과거 초창기 한국에서는 도포 입으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각 나라나 시대에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도 각자 다를 것입니다. 욕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욕망으로 왜곡된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의 예수님은 허상일 뿐입니다. 이제 참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요한은 이제 새 예루살렘 성 내부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성전이 없고, 해나 달이 쓸모가 없습니다. 밤이나 바다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가 이 모든 것을 대체합니다.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분명히 구별됩니다. 성 내부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끕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교제가 다 회복됩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심(22-27)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십니다. 오늘도 친히 자기 백성의 성전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보호하시며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따라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2-27)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의 재건을 꿈꿔온 유대인에게는 상상 못할 일이지만, 주께서 친히 성전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시작되어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1) 성전이 보이지 않음(22)

새 예루살렘에는 현재 지상에서처럼 건물로 된 성전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개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성전이 재건된 것으로 말씀합니다(요한복음 2:19-22; 마가복음 14:58; 15:29).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전의 ‘머릿돌’(마태복음 21:42; 마가복음 12:10-12; 누가복음 20:17-18; 사도행전 4:11; 로마서 89:32-33; 에베소서 2:20)로 묘사합니다. 계시록에서 성소는 예외 없이 하늘 성소를 지칭합니다. 성전은 창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패턴에서 에덴은 창조의 성전이고 아담은 대제사장입니다. 첫 창조의 실패를 새 창조에서는 어린양이 성취합니다.

(2) 해와 달이 쓸모 없음(23)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고 그리스도께서 등불이 되어 밝혀주실 것이기에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떠한 빛의 근원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어린양이 등불입니다. 성도는 촛대이기 때문입니다.

(3) 성에 들어가는 자와 못 들어가는 자(24-27)

종말에 열방이 시온으로 순례할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 2:2,5에서 제기한 이 주제는 이사야 60:3,5,11에서 장엄하게 선언됩니다. 요한은 이사야 사상을 함축하여 인유합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과 음녀 바벨론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음녀는 착취와 수탈로 축적합니다. 신부는 자발적인 헌신을 공존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이사야 60-61장의 문맥 그 어디에도 왕들과 열방이 자신들의 영광(도사/δοζα) 또는 명예(티메/τιμη)를 들고 올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부, 재물’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열방의 부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방이 가져오는 영광과 존귀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최고조로 조명하기 위함입니다. 열방이 그동안 착취와 축적으로 바벨론에 세금과 노동을 상납하던 행태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나눔과 섬김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러 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이웃과의 연합은 예배의 진정한 목적입니다(이사야 11:6-12). ‘만국’과 ‘땅의 왕들’은 이사야 60장에서 도출된 용어입니다. 하지만 계시록 자체의 논리적 흐름으로는 ‘만국’ 열방을 말하는 사중 정형문-‘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0:11은 족속 대신에 ‘임금’으로 대체합니다. 그 결과가 ‘땅의 왕들’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한 분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러 옵니다. ‘열방의 귀의 사상’은 15:4 이후에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 열방의 귀의는 신학으로 우선적인 주제임을 증명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노래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모든 열방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열방은 겁을 먹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저주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파루시아와 아마겟돈 전쟁(18-19장)에서 최후 심판을 당한 자들이 결국에는 강요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어떤 제안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열방에 대하여 제시하는 가능성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1)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11:13; 14:6; 15:4). (2) 짐승으로서 지속적으로 우상숭배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거절하고 저주하며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여 최후 심판에 이르는 것(14:9-11; 16:9,11,21; 17:14; 19:17-21). 모든 열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까?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방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까?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중언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강퍅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21:8,27;22:15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계시록을 보편적 구원을 예건하는 책으로 보려는 시도들은 본문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회복(1-5)

에덴을 파괴하였던 하나님의 저주가 떠나고, 이제 다시 첫 창조의 순간처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하며 자원하는 기쁨으로 왕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 있거나 거짓말 한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1-5)

요한은 신부 새 예루살렘을 새로운 에덴으로 묘사합니다. 어린양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입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어린양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왕 노릇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바벨론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생명수 강(1-2a)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생명수는 생명의 근원이다. 죽음과 대조된다.

(2) 생명나무(2b)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에 있던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유합니다. 에스겔 47:8-9, 12에 있는 강은 많은 물을 소생시킵니다. 그 안에서 피조물들이 헤엄칠 수 있도록 ‘생명’을 줍니다. 나무들이 자라서 그 잎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에서는 그 강을 ‘맑은 강’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에서 ‘소생’은 ‘치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치유하기를 영원히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새 창조에서는 치유되어야 할 죽음이나 고통이 없습니다(21: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고통을 단번에 치유하십니다(21:4; 7:16-17). 열방의 치유는 요한계시록 5:9의 뜻을 발전시킵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열방이 치유되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섬깁니다. 따라서 생명나무 잎의 치유는 비유적인 그림입니다. 어린양 그리스도가 회개하는 열방의 치유를 위해 죽임을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3) 저주가 없음(3-4)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다.’ ‘저주’는 ‘헤렘’입니다. 아나데마(ἀνάθεμα)와 카타데마(κατάθεμα)로 번역됩니다. 구약에서 ‘헤렘’은 죄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7:27-29). 봉헌한 물건 또는 봉헌(devotion) 또는 금지(ban)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적인 물건으로 엄격하게 적용되면, 파괴하든지 혹은 용기에 담아서 구별해둡니다. 봉헌된 것에 대해 신실하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여호수아 7:1; 22:20).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인류에게 보내신 파괴적인 저주로부터 면제를 받습니다. 스가랴 예언의 성취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형태의 저주도 없을 것입니다.

(4) 밤이 없음(5a)

다시는 밤이 없습니다. ‘다시는 없을 것이다’(21:1-4) 형식의 절정입니다. 바다와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고통과 밤이 다시는 없습니다.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스가랴 14:11).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세상에서 그들을 위협해왔던 모든 범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할은 촛대입니다. 성도들은 신적 등불의 빛을 담고 최종적으로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세상의 ‘등불’입니다(21:23). 구약 성도의 반복되는 기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춤으로써 그의 현존을 드러내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민수기 6:25-26; 시편 4:6; 31:16; 67:1; 80:3,7,19; 119:135). 이 기도는 요한계시록 22:5에서 종합적이고도 완성적으로 응답됩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구약 본문은 민수기 6:25-27의 대제사장적 축복입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는 말씀이 지향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22장의 하나님 나라 완성입니다.

(5) 성도들의 왕노릇(5b)

다섯째, 성도들이 세세노록 왕 노릇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합적 완성입니다. 이 통치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4-6의 천년왕국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이는 천년왕국 이후에 반역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성도들의 통치를 받습니까? 통치는 첫 창조에서 아담에게 맡겨진 창조적 활동입니다(창세기 1:28; 시편 8편).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에는 인간에 대한 통치 개념은 없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새로운 창조될 예루살렘 안에는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충만해지는 것들이 있고, 완성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상 무너질 것만 같던 곳(교회)이, 언젠가 ‘떠날’ 곳(세상)이 ‘새롭게’ 된다는 성경의 진리는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채롭게 합니다. 그 완성을 향해 우리는 함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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