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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6-02)

 


진행될 일곱 대접 심판(2)

요한계시록 16장 10-21절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인간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바벨론 제국 같은 세력을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악한 세력들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때로는 의롭지 않은 자들을 통해 나타나는 이유는 악이 원래 파괴적인 특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악이 스스로 자신을 파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은 자신의 악 때문에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첫 번째 네 천사의 대접 재앙은 자연에 대한 재앙이었다면, 본문의 다섯째 천사부터 마지막까지는 두 짐승과 용 그리고 바벨론에 대한 심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제 세 가지 대접 재앙은 더 강도가 심해지고 긴 심판이 임합니다. 짐승의 보좌에 쏟는 심판으로 맹목적인 삶이 주는 고통을 받습니다. 아마겟돈의 전쟁은 맞이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바벨론이 받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다섯째 대접 재앙(10-11)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들에게 대한 심판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제 그것을 시행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최종적으로 악한 사탄의 중심을 공격합니다. 인간의 악은 고통과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숫자, 색깔, 여러 상징적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짐승의 제국은 어둡고 악성종기의 전염병처럼 주체성을 상실하고 짐증의 체제에 편입됩니다.

10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0-11)

온 천하 왕들이 한 곳에 모였으니, 그들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만만했겠지만, 도둑같이 오시는 주님의 급습, 곧 일곱째 대접의 심판을 한꺼번에 당하기 위해 한 곳에 모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권세와 종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멸을 당하게 됩니다.

(1) 짐승의 왕좌에 대한 재앙(10a)

다섯째 대접 재앙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라고 합니다. 재앙의 대접을 쏟아 부은 곳은 짐승의 왕좌였습니다. ‘짐승의 왕좌’는 바벨론, 즉 로마제국입니다.

(2) 우상숭배자들의 고통(10b-11a)

전체 나라가 어두워졌습니다. ‘어두워지는’ 것이 실제로 흑암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 지, 아니면 영적으로나 도덕적인 어두움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암흑천지로 만들어버린 것(출애굽기 10:22-23)은 애굽의 태양신 ‘라(Ra)’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바로는 태양신 ‘라’가 성육신한 자로 여겼습니다. 애굽인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가련한 처지를 비관합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느낄수록 더욱 무거운 심리적인 짐을 지게 됩니다. 영적 고통은 극에 달합니다. 로마도 바로와 같습니다. 암흑천지는 빛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상징합니다. 암흑의 심판은 눈이 멀어 맹목적인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성경에서 흑암은 기근과 같은 극심한 영적, 경제적 환경을 말하기도 하고(이사야 8:21-22), 신에게 버림 받은 자의 심리를 말할 때도 쓰입니다(베드로후서 2:17; 유다서 13).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자기 혀를 깨뭅니다. 쿰란 문헌을 보면 흑암의 천사가 우상숭배자로 하여금 흑암의 길로 인도하고 참람한 말을 하는 혀를 가지도록 만둡니다(1QS 3:20-21; 4:11).

(3) 우상숭배자들의 반응(11b)

맹목적인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재앙을 통해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욕하여 그 성품을 왜곡합니다. 더는 회개의 여지기 없을 정도로 완악해집니다.

 

여섯째 대접 재앙(12-16)

예수님께서는 임하는 날, 즉 재앙의 날입니다. 그 날은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해 깨어있는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주님 재림하실 때에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벌거벗은 수치는 구약적 배경으로 볼 때 우상 숭배와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갖추어 입으라는 권면은 성도의 신분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12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12-16)

옷을 잘 지키는 자는 종말론적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극렬한 핍박 가운데서도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고, 성도의 고귀한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 치러야할 영적인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될 것입니다.

(1) 동방 왕들의 대로가 열림(12)

여섯째 나팔 심판의 발전입니다. 유프라테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었습니다. 이만 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불신자 3분의 1을 죽입니다(9:13-21).

(2) 세 더러운 영이 온 천하 왕들을 소집(13-14)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각각 666 체제에서 나옵니다. 사탄은 로마 황제와 거짓 선지자들과 결합하여 666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인 정치, 경제적 체제입니다.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귀신들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을 미혹합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있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한 곳에 모입니다. 그곳이 아마겟돈입니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옛날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의 패러디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온 천하 왕들은 또 다른 종류의 출애굽으로 멸망의 장소로 들어갑니다. 요한의 시대에 바벨론은 로마제국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선으로 하여 대치하고 있었던 동방의 파르티아 제국입니다. 자살한 네로가 환생하여 파르티아 군대와 함께 로마를 공략하러 온다는 소문으로 로마는 혼란에 빠졌습니다(시빌 신탁 4:115-139; 에녹 1서 56:5-7). 요한은 로마의 집단 심리를 잘 이용합니다. 왜 개구리가 미혹하는 영들을 대변하는 소재로 선택되었습니까? 개구리 우는 소리는 크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구리 소리는 공허한 소음으로 영혼 없는 의견과 추측을 상징합니다. 무엇보다 개구리는 더럽고 미혹하는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더럽다는 말은 바벨론의 음행과 관련이 있습니다(17:4). 개구리 영들이 미혹하는 대상은 온 천하 왕들입니다. 애굽의 개구리 재앙으로 오직 왕들만이 타격을 입었습니다(시편 104:30).

(3) 성도를 향한 경고(15)

바벨론의 체제를 숭배하는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해를 입을 것입니다. 왕들은 전쟁을 위해 한 곳 아마겟돈에 소집됩니다. 여기 전쟁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 전쟁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불경스런 세계 체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따로 준비하신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구약에 예언된 종말의 전쟁입니다(스가랴 12-14장; 스바냐 3장; 요엘 1:11,31). 아마겟돈은 문자적으로 ‘므깃도 산’입니다. 갈멜 산 근처에 있는 산이며, 구약에서 여러 번 결정적인 전투와 대량 살육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왜 요한은 갑자기 므깃도 산을 언급합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엘리야 시대를 되돌아 보도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맞불기 위해 모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중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바알은 잠을 잤습니다. 그 결과 거짓 선지자들은 도륙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악한 세력들을 아마겟돈으로 다 불러 모으십니다. 세 가지 더러운 개구리 영이 속이는 활동을 하도록 풀어주십니다. 이는 제국의 제체에 부역하고 결속한 나라들을 한 번에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심판을 위한 전쟁입니다. 요한은 아마겟돈이 가진 모형론적 의미와 예언적 의미를 결합하여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왕들이 패배하였습니다(사시기 5:19-21). 거짓 선지자들이 멸망을 당했습니다(열왕기상 18:4). 아마겟돈은 예루살렘을 대항하는 모든 열방이 멸망을 당한 곳이고, 모든 이스라엘이 통곡하며 회개하는 곳입니다(스가랴 12:9-12).

(4) 아마겟돈 전쟁(16)

성도는 아마겟돈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깨어는 있어야 합니다. 도둑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비유에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깨어 자기 옷을 지키라.’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는 잠을 잘 때 벌"벗고 잡니다. 벌거벗고 허둥대는 모습으로 수치를 당일 수 있습니다. 복장을 갖추고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벌거벗음은 음행의 이미지이고 우상숭배의 상징입니다. 대접 심판은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가혹한 심판입니다. 

 

일곱째 대접 재앙(17-21)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악한 영들의 꾐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악한 세력은 하나님을 모방하여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있어서 악한 영과 하나님을 구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잠시 악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의 결국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의 성공에 대해 부러운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17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21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17-21)

큰 지진을 통해 땅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만든 체제가 전복됩니다. 섬과 산악이 사라지는 것은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 대한 타격과 무력화를 의미합니다.

(1) 큰 지진의 재앙(17-18)

일곱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집니다. 그 순간 마지막 심판이 완료 ‘되었다’는 선언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울려나옵니다(비교 21:6). 여기서 ‘공중’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활동 영역을 염두에 두면서 언급한 것입니다(에베소서 2:2). ‘되었다’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완수되었음을 의미합니다(비교 요한복음 19:30).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내리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2) 바벨론의 멸망(19-20)

이제 제국의 체제는 최종적인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군은 한 자리에 모여서 멸망을 당합니다. 왜 멸망을 받습니까? 바벨론이 한 일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열방에게 진노를 드러내며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의 정치, 경제 체제에 합류 또는 협력하지 않은 자들에게 분노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부역하는 자들에게는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제국이 가진 특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게 희석되지 않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14:8,10). 요한은 대지진과 큰 우박으로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세계 체제에 최후 심판을 가합니다. 일곱째 대접 재앙은 물리적인 지구의 붕괴를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독자들은 상징적인 이해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 예언자들이 열방의 심판을 묘사할 때 은유적 언어로 서술해왔습니다(예. 이사야 24장).

무시무시한 일이 인류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가장 적합한 은유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지진과 큰 우박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핵폭발이 될 것이다. 땅에 있는 전체 사회적 정치적 체제의 붕괴를 기술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대지진은 묵시문학에서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길을 열기 위해 옛 우주를 파괴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우박 재앙을 마지막 목록으로 채택하십니까? 묵시문학에서 요한만이 특별하게 도성의 멸망을 위해 지진의 효과를 최고조로 부각합니다. 시내산 인유의 특징을 극대화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출애굽 행진은 여리고 함락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여리고 함락은 아모리 족속에게 내린 큰 우박으로 마무리됩니다(여호수아 10:11). 요한은 전체 출애굽 사건을 인유하여 새로운 출애굽의 모델로 삼습니다. 여리고 함락은 마지막 심판의 결정적인 핵심 모델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재앙이 크면 클수록 회개하지 않고 신성 모독하는 행위를 지속합니다. 더 이상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3) 큰 우박 재앙과 우상숭배들의 반응(21)

일곱째 대접 재앙은 17-20장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발생하는 일들을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17-20장은 일곱 대접에서 그리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환상들입니다. 우리 시대에 우상과 같은 세계적 경제 사회, 환경, 정치 체제의 붕괴가 임박하였다고 한다면, 신실한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심판은 폭력의 역사를 끝장낼 것입니다. 새로운 대안적 세상을 열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의지했던 개인과 사회는 마비되고 와해될 것입니다. 아마겟돈은 전쟁 없는 샬롬의 세계를 열망하는 반전이 있을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어린 양의 거룩한 옷을 입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악한 일에 고집하지 않고, 거룩함에 속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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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6-01)


진행될 일곱 대접 심판(1)

요한계시록 16장 1-8절


연말이면, 한 해를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이룬 것이 많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상실감이나 공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무조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매 시간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노력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반드시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발생하는 각종 재앙들은 ‘빨리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 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장차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일곱 대접 심판이 시행됩니다. 무대 설정은 마쳤고, 실제 공연만 남았습니다. 처음 네 재앙은 땅과 바다와 강과 해에 마치는 짧은 재앙입니다. 온 우주에 전면적으로 미치는 심판입니다. 우상숭배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없습니다. 심판의 연기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받을 재앙이 얼마나 강도가 높은지, 제국에 타협하고 순응한 자들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심한지를 나타냅니다.

 

네 가지 대접 재앙들(1-4)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과연 이러한 환란과 고통을 이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고, 개인적인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는 하나님의 큰 물줄기의 역사 가운데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백성의 승리와 원수에 대한 심판에 대해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모든 고난과 환란의 역사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1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3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1-4)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큰 소리가 성전에서 들려 왔습니다. 이것은 이 재앙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땅’에 속한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며, 짐승을 따른 사람들이고 자비보다 힘을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앞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무대를 소개했지만, 본문은 이제 심판의 집행하고 있습니다. 

(1)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1)

나팔 심판과 비슷합니다. 단지 효력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팔 심판은 우주의 3분의 1을 망라하고, 대접 심판은 우주 전체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나팔 심판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심판을 연기하고 삽화가 있었지만 대접 심판은 전혀 없습니다.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은 동일한 순서로 재앙을 당하는 대상들을 표현합니다. 땅-바다-강-해-어둠에 있는 사악한 자의 영역과-유프라테스(마귀들의 영향을 받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최후 심판으로 전체 세계,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의 모델은 출애굽 재앙입니다. 출애굽 재앙의 징벌 자체는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고, 이 심판이 의로우며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독특성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함을 증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접 심판에서 마음의 강퍅함으로 인해 불경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 강퍅함은 우상승배의 표현으로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성도를 핍박합니다. 나팔 시리즈가 비유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는 것을 대접 시리즈는 좀 더 직접적으로 진술합니다. 나팔 심관과 대접 심판 시리즈는 문학적으로, 주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병행합니다.

일곱 천사는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천사들은 대접 일곱은 ‘땅’에 쏟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땅’은 땅과 바다와 물과 해 등 피조세계 전체를 총칭하는 용어이며, 일곱 대접은 피조 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내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심판이 시행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재앙의 실행이 은유적이라면 그 효력도 은유적입니다. 유대 문헌에서는 출애굽 재앙들을 은유적으로 해석합니다(지혜서 15-17장). 요한은 대접 재앙을 같은 해석 전통 속에서 묘사합니다.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요한의 시대에 모든 악과 고난의 현실을 만드는 로마 제국을 심판하십니다. ‘쏟아붓는다’는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이 제단의 기단부에 희생제물의 피를 붓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레위기 4:6-7, 17-18). 이를 통해 죄로 더럽혀진 하나님 백성을 정결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접 심판은 죄로 더럽혀진 땅을 심판을 통해 정결하게 합니다.

(2) 땅을 향한 첫째 대접 재앙(2)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 우상숭배한 자들의 몸에 독한 종기가 났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우상숭배자’와 ‘땅에 거하는 사람’은 동의어입니다. 이들은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할 때 애굽인들의 행동이 이들과 같았습니다. 요한은 출애굽 열 재앙 중에 인체에 미친 재앙으로 종기 재앙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조롱하고 비방한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에서의 여섯째 재앙이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되어 애굽인들에게만 내려진 것처럼, 여기서도 재앙이 어린 양에게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입니다. 이 재앙은 짐승에게 속하여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내려집니다.

(3) 바다를 향한 둘째 대접 재앙(3)

둘째 대접은 ‘바다 가운데 있는 생물’에게 임합니다. 그들은 해양 경제에 의존하던 자들을 은유합니다. 바다가 피로 변하여 고통과 죽음을 맛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불경한 인류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24회). 17:1의 ‘많은 물’은 온 땅에 있는 불신자에 대한 그림입니다(17:15). 사탄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습니다’(12:18). 사악한 나라들에 대한 사탄의 주권을 말합니다. 불경한 나라들은 ‘바다의 모래’와 비교됩니다(20:8).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13:1).

‘바다’는 짐승이 지배하는 나라들을 상징합니다. 로마제국의 군사와 무역에 대한 심판입니다. 로마제국은 해양 군사력과 산업을 바탕으로 번영하였으며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 재앙은 전 세계적으로 겪는 경제적 환란을 가리킵니다. 경제적인 재앙은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짐승의 표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양 무역은 지역과 국가를 초월한 무역 체제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로마의 경제적 제국주의에 대한 당대의 가장 신랄한 비판입니다. 로마는 전 세계에 걸쳐서 소중한 자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로마 경제의 근간은 정복 전쟁을 통해 얻은 노예 노동입니다. 과도한 세금과 부역을 통해 부속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로마인들은 향연과 오락에 빠져서 풍요를 탐닉하였습니다. 이것이 로마가 말하는 평화이고 정의였습니다. 주후 66년에 발생한 유대의 대로마 항쟁도 세금과 빚과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의한 저항운동입니다. 오늘날도 가난하고 약한 나라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경제 체제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심판에 직면합니다. 둘째 대접 재앙은 해양 산업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 경향을 지닌 나라들의 경제적 재난을 대변합니다.

(4) 강을 향한 셋째 대접 재앙(4)

강과 물 근원의 심판은 바다에 대한 심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나일강에 내린 재앙(출애굽기 7:17-21; 시편 78:44)을 인유합니다. 나일강은 애굽 경제의 젖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농경 산업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기근은 치명적입니다. 강과 물 근원의 심판은 바벨론과 같은 제국에 대한 경제적 심판입니다. 어떤 심관입니까? 그 열쇠는 천사의 찬양과 제단의 응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5-7)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믿는 자들에게 핍박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없어 보이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모두 체크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 결산대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5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5-7)

*****

(1) 천사의 고백(5-6)

천사는 심관의 실행자이고, 제단은 하늘 보좌의 제단에서 기도하는 순교한 성도들입니다. 천사와 제단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롭다고 찬양으로 화답합니다. 왜 이렇게 찬양합니까? 6절과 18:24은 어구적으로 병행합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혔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상기시킨다. 나봇의 피를 흘려 포도원을 강탈한 이세벨은 행한 그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18장은 바벨론이 로마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로마의 죄악의 근원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세벨의 바알 경제법에 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희년제도를 초토화한 장본인입니다. 그 딸 아달랴는 남쪽 유다의 희년 경제를 붕괴시켰습니다. 두 나라의 패망 원인은 바알 경제 정책으로 희년 경제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돈과 두로는 페니키아 제국의 본거지이며, 바알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페니키아는 지중해 전역에 바알 경제법을 확산시킨 주범입니다. 페니키아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와 두 번에 걸쳐 벌인 포에니 전쟁으로 패망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용병들은 카르타고에서 바알 경제법으로 엄청난 재력을 쌓아서 로마에 가져왔습니다. 요한의 시대에 이르면, 소수 엘리트의 손에 농경지가 집중된 부재 지주 제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점령지의 토지 강점과 매매를 통해 축척된 부를 바탕으로 로마는 경제 성장과 호황을 누렸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경제법인 희년법을 거스르는 경제는 심판을 받습니다. 희년 경제의 기본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노동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레위기 25장). 땅을 황폐하게 하는 자들은 황폐하게 됩니다(11:18). 부동산 투기로 불로소득을 취하고, 서민과 청년 세대에 고통을 안기는 자들이 받을 심판이 둘째 대접 재앙입니다.

(2) 제단의 응답(7)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에 대해 제단이 참되고 의롭다고 반응합니다. 제단이 의인화되었는데, 이것은 제단에 있는 성도들의 응답을 표현한 것입니다(6:9-11).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대신하여 악인들을 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고 흡족해 합니다.

 

넷째 대접 재앙(8-9)

심판은 뒤틀리고 방향과 내용을 상실한 상태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일종의 종합평가이며 재편을 위한 시작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알면서도 굴복하지 않으려 합니다. 재앙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경고하시는데도 애써 외면합니다.

8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8-9)

고통과 아픔은 죄인들이 돌이키도록 진지한 성찰을 가져다줍니다. 뽑고 파괴하는 것은 심고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회개를 위해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1) 해를 통한 재앙(8-9a)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길 원하십니다(요한복음 3:16). 모든 인류를 심판에 이르지 않길 원하시며, 회개의 시간을 주십니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요한계시록 2:21).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거부합니다. 더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면, 결국 심판에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분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해가 권세를 받아서 사람들을 불로 태웁니다. 해는 피조 세계의 질서를 대변합니다. 우상숭배는 창조질서를 파괴합니다. 피조세계가 인간을 심판합니다. 이 재앙은 요한계시록 7:16에서 속량을 입은 자들이 받는 고난의 반전이자 패러디입니다. 순교자들을 핍박한 자들이 겪은 고난은 상징적으로 굶주림과 기근입니다.

(2) 사람들의 완고한 반응(9b)

이제 그 대적이 그 고난을 받습니다. 경제적인 안전보장이 박탈됩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거짓말을 합니다. 짐승이 행하는 짓입니다(13:1,5,6; 17:3). 하지만 결국 자신이 짐승이 되어버렸습니다. 666은 거짓 선지자와 결탁하여 인간을 짐승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정치, 경제 체제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영상을 돌리지 않습니다. 셋째, 회개하지 않습니다. 재앙을 받으면 받을수록 강퍅해집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성도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억울함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회개의 길로 나가기보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더 살아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을 닮아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길 위해 노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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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5-01)


준비된 일곱 대접 심판

요한계시록 15장 1-8절


폭풍 전야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합니다. 그러나 고요한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엄청난 바람과 파도에 의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고요하다고 해서 계속적으로 고요할 것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무한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지막이 분명히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어 집니다.

 

15장은 일곱 대접 재앙을 소개하고, 모세가 홍해를 건넜을 때, 찬양했던 노래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와 대비하여 어린양의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의 시행을 위한 준비로 마무리됩니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두루마리(12-15장)의 절정입니다. 노래와 재앙은 연동교합 방식으로 결합되어 서로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일곱 대접 심판에 대한 예고(1)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똑똑해지지만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은 사라지고, 모이기만 하면 자기 가족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평하고 살벌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린 것이 마땅합니다. 출애굽의 홍해사건을 경험한 자들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듯이, 어린 양의 승리를 통해 넉넉히 이기게 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찬양합니다.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 

본문은 일곱 대접(15:1-16:21)의 도입부입니다. ‘하늘에 크고 이상한 이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12:1의 ‘하늘의 큰 이적’과 12:3의 ‘하늘의 또 다른 이적’과 연결되는 이적입니다. 이곳에서 ‘이상한’은 ‘놀랄 만한’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경외롭고 놀라운 사역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1절은 요한계시록에서 주요 단락들 사이의 전환은 선행하는 단락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락을 도입하는 문학적 장치인 ‘연동 교합’(interlocking) 기법을 사용합니다. ‘어린양의 노래’(15:2-4)는 두루마리(12:1-14:20)의 결론이자 동시에 대접 심판 시리즈(16장)의 서론입니다. 두루마리가 용의 삼위일체(666)에 대한 어린양의 승리로 인해 두 가지 추수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린양의 노래’는 어린양의 승리를 극대화하며,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곡식 추수의 의미를 모세의 노래의 패턴을 따라 강조합니다.

재앙을 수행하는 일곱 천사에게 재앙이 들려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실수 없이 완벽하게 진행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양의 승리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도입합니다(15:1,5-8). 포도 추수 환상은 대접 심판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됩니다.

 

어린양의 승리의 노래(2-4)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되는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대해야할 것은 요행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은 않고서는 그분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판의 때가 되면,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악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찬양하고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2-4)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만국의 왕이십니다. 만국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전능하신 능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은 두려운 이름인 동시에 찬양 받으실 영광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사만 사천의 신실한 증언으로 열방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 사상은 두 증인의 이미지(11장)와 곡식 추수의 환상(14장)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애굽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1) 유리 바다 가에 선 ‘이기는 자들’(2)

십사만 사천이 짐승과 더불어 싸운 전투는 홍해를 건넌 시간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닥을 이스라엘이 건널 수 있도록 유리 바다처럼 만드셨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물로 뒤덮여 있던 땅을 성령이 바람으로 말려서 드러낸 것과 같습니다. 유리 바다는 솔로몬 성전에서 놋대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추격군이 유리 바다에서 수몰되었습니다. 유리 바다는 전투가 벌어진 장소입니다. 불로 뒤섞여 있습니다.

짐승과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은 유리 바다에 서서 승리의 새 노래를 부립니다. ‘불이 섞인 유리(수정) 바다 같은 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 수정 바다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보았던, 하나님의 발아래에 펼쳐진 청옥과 상응하고(참조 출애굽기 24:10), 성전의 놋 바다도 연상시킵니다. 승리한 어린양의 군대는 모세의 이스라엘과 같이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바다’는 어린양이 짐승을 심판한 장소입니다. 성도들은 어린양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성도들의 승리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를 당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의 눈으로는 이겼습니다. 핍박과 타협의 유혹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타협에 저항하며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짐승을 이겨왔던 자들’(2)은 짐승의 지배와 생활 방식을 거절하고 순응하지 않은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들입니다.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삶은 어린양과 같은 편이라는 증거입니다. 죽임을 당한 표는 어린양의 군대에 동참하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미 하나님의 거문고(하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 어린양의 노래(3-4)

승리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구원자의 예표인 모세가 불렀던 노래이며(출애굽기 15장), 노래의 주제는 어린양과 구분의 승리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의 노래’가 이제는 ‘어린양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새로운 출애굽을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쟁취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7:14;12:11).

그런데 문제는 어린양의 노래와 모세의 노래가 내용상으로 전혀 일치하지 않은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요한의 전문적인 성경 주해 솜씨가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은 구약을 언어의 무기고로만 활용하지 않습니다. 주해를 통해 창출된 의미를 해석에 활용합니다. 구약과 유대 문헌에서는 모세의 노래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도출하는 수많은 본보기들이 있습니다. 필로는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2-31)를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모압 왕 시스라로부터의 구출을 애굽 왕 바로로부터의 구출로 해석했습니다(필로의 성서고대사 32장). 이사야 12장도 새로운 출애굽을 표현할 때 모세의 노래를 시편 105편을 인유하여 재해석합니다. 어린양의 노래는 모세의 노래를 이사야 12장과 시편 105편을 활용하여 주해한 창의적인 작품입니다.

요한의 ‘모세의 노래’는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4)라고 어린양의 승리를 새로운 출애굽으로 찬양합니다. 그 결과는 다섯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로서 전능하심을 드러냈습니다. (2) 열방에 왕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3) 다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우월성을 증명하셨습니다. (4)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5) 열방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모세의 노래가 가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요한은 열방을 품는 보편주의로 변혁합니다. 모든 열방이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신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모세의 노래 핵심 구절인 출애굽기 15:11을 예레미야 10:6-7; 시편 86:8-10;98:1-2과 연결합니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대망해온 열방의 귀의란 보편주의의 선율에 리듬을 맞추어 노래를 해석한 것입니다: 모든 열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러 올 것입니다.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의 실행 준비(5-8)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는 다루는 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심판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항상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는 심판을 받기 전까지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혹시 오늘 회개해야 할 일은 없습니까? 본문은 끝까지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끝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5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5-8)

요한은 일곱 나팔 심판을 마지막 재앙으로 부릅니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마지막 시리즈이기에 마지막 재앙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재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인 심판과 나팔 심판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들 심판은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심판이었습니다. 삽화가 있는 심판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소개되는 심판은 전혀 다릅니다.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심판의 연기도 없습니다.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입니다. 5-8절에서 일곱 대접 심판이 실행될 준비를 합니다.

(1) 하늘 증거 장막(5)

요한은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환상을 보았습니다. 11:19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전쟁 이후 행하시는 심판을 선언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15:5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 재앙이 소개합니다. ‘증거 장막’은 성전의 특정한 장소인 지성소를 가리킵니다(출애굽기 29:43). 성막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성막 그 자체나 그 안에 있는 법궤를 강조하기보다는 법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것들을 가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들의 ‘증인’입니다.

(2) 일곱 대접의 전달(6-7)

대접 심판은 성전의 이미지 속에서 시작됩니다. 성전과 대접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소의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와 연결됩니다(5:8; 6:9-10; 8:2-5). 성도의 탄원기도가 하늘에 상달됩니다. 탄원기도의 내용은 우상숭배자들의 심판과 피의 신원입니다(요한계시록 6:9-10), 1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는 너무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마지막 재앙)에 가득 차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대접’의 이미지는 구약 두 군데에서 도출됩니다. 첫째는 대접들이 30회 언급된 성막이나 성전의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의 봉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대접과 제단의 이러한 연결 관제는 대접 재앙들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것이 성도들의 기도(8:3-5)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과 5:8에서 성도의 기도들을 대변하는 ‘향이 가득한 금 대접’ 사이의 어구가 비슷합니다. 성도의 복수를 위한 기도(5:8; 6:9-11; 8:3-5)는 대접 심판으로 가득히 담아서 응답됩니다. 둘째는 이사야 51:17, 22입니다. 두 번이나 ‘(하나님의) 진노의 잔의 대접’을 언급합니다.

이전에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에 쏟아 부은 이 대접은 이제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인 바벨론에 부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대접은 죄인들을 징벌하기 위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대접 심판은 하늘 증거 장막의 성소가 열리면서 시작합니다. 법궤와 시은소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세계의 축이고 하늘 문이 있는 곳입니다. 신적 자비가 아니라 신적 진노의 시작으로 기술됩니다. 요한은 특이하게 나팔 심판을 ‘일곱 재앙’으로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레위기 이외에는 이 용어를 쓴 사례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레위기 26:21의 인유입니다.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 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우상숭배 하여 배교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의 경고입니다. 네 번 반복된 경고(26:18,21,24,28)를 통해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의 강도가 더 높아진다고 경고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한 성전(8)

일곱 대접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지는 8절이 잘 나타냅니다. 8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표현입니다(이사야 6장; 에스겔 10장). 하나님 현존은 진노를 표현할 때에는 너무도 무시무시합니다. 어떤 천상의 존재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실 때는 하나님을 제지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참조, 다니엘 4:35). 따라서 중보기도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성도를 박해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성도가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순교자는 생길 수 없습니까? 돈과 권력으로 호령하며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짐승이 있고, 신이 된 시장이 있습니다. 소비주의 시대에 탐욕스러운 자본과 시장의 신에게 굽힘없이 저항해야 합니다. 시대의 짐승과 우상들과 싸우고 기도하며 저항하는 증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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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4-02)


마지막 때 심판 : 두 종류의 추수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


가을철에 추수한 곡식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풍족해집니다. 특히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을 보며 한 해의 수고를 다 잊습니다. 추수는 무계획적으로 진행된 일이 아닙니다. 봄철부터 씨를 뿌릴 때, 계획하고 예고된 일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인간의 마지막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심판은 예고 없이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모든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앞에서 세 천사들이 예고한 내용(6-12)이 두 가지 심판됩니다. 하나는 신자의 구원을 위한 곡식 추수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신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하여 최후 심판의 양면성을 보게 합니다. 인자는 예리한 낫으로 익은 곡식을 추수합니다. 역시 예리한 낫을 가진 다른 천사는 포도 추수를 하여 포도주 틀에 던져 넣습니다. 그런데 포도주 틀을 밟는 자는 누구입니까?

 

성도의 구원을 위한 곡식 추수(14-16)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의 기간 동안 교회를 향한 핍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을 그렇게 핍박하고 교회를 이기지 못했다는 증거는, 교회가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합니다. 심지어 박해가 심했던 지역일수록 교회는 더 순수하고 영롱했습니다. 오히려 박해가 없고 물질이 많은 곳에서는 교회들이 알아서 타락했고, 알아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14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4-16)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 때에 이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겠지만, 그 전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 심판이 없다면 의인들은 소망의 끄나풀이라도 잡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을 향한 심판은,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됩니다. 그러니깐 심판은 구원을 위한 심판과 형벌을 위한 심판으로 나눈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두 가지 심판이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추수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1) 인자와 같은 이와 예리한 낫(14)

처음 문단(14-16)은 인자가 흰 구름 위에 앉아 심판하시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을 주관하신 분입니다(1:13; 마태복음 24:30). 추수를 친히 행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는 다니엘 7:13-14에 대한 정확한 인유입니다. 본문에 묘사된 심판 언어는 다니엘 7:13에서 왔지만, 본문은 전통적으로 인자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폭풍의 구름을 언급하는 것(시편 18:9)과 다르게 흰 구름에 앉으신 인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 ‘인자와 같은 이’는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됩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와 언어에 대한 왕권과 영광과 주권을 받으십니다. 인자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은 인자를 왕이신 메시아로 제시합니다. 인자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낫은 추수하는 상황을 그려줍니다. 심판을 마지막 추수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곡식 추수의 때에 대한 천사의 청원(15)

이 ‘다른 천사’는 14장에 연이어 등장하는 세 천사들(14:6,8,9)와 구별되는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천사는 ‘인자와 같은 이(그리스도)’에게 땅의 곡식을 추수를 시작하시라고 부탁합니다. 천사는 하늘 성전에서 나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므로, 이것은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따른 자들과 짐승을 따른 자들을 같이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곡식을 거두어야할 이유는 곡식이 다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때가 무르익으면, 하나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구원과 심판으로 완성됩니다.

천사는 그리스도에게 ‘낫을 휘둘러 거두시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에 임합니다(마태복음 13:30). 이 상황은 구약성경(이사야 17:5; 예레미야 51:33; 요엘 3:13)만 아니라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마태복음 13:30,39). 세상 끝에는 의인과 악인, 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밀 추수는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마지막 심판 즉, 종말론적인 심판입니다(마태복음 13:36; 누가복음 10:2; 요한복음 35-36).

(3) 곡식 추수(16)

인자는 천사의 부탁에 따라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셨습니다. 그 후에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마태복음 13:30;40-43, 비교 말라기 3:18, 4:1).

 

불신자의 심판을 위한 곡식 추수(17-20)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영혼들을 추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가 씻긴 사람은 곡식처럼 하나님 나라로 거둬들일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인내하며 살아간 성도들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욕심을 따랐던 자들은 결국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17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17-20)

하나님의 심판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복이지만,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추수한 후에, 이제 포도를 틀에 던져 포도주를 짜듯이, 악인들을 맹렬한 진노의 틀에서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1) 예리한 낫을 가진 또 다른 천사(17)

이번에는 포도를 추수하는 상황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추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추수를 주도합니다. 왜 인자 대신에 천사가 등장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천사가 마지막 추수하는 천사로 등장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추수 때 추수꾼으로 천사들을 동원하신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마태복음 11:30,39,41;16:27). 날카로운 낫을 가진 것은 포도 추수가 심판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천사에게 낫을 휘둘러 포도 추수를 하라고 부탁하는 또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옵니다. 그 천사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로 설명되었고 그 불은 제단의 불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단은 성도들의 신운의 기도가 모아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땅에 쏟는 장소입니다(6:9-10; 8:5). 그 천사는 다섯째 천사에게 ‘포도가 익었’으니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부탁합니다. 포도가 익어 추수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대주재께 ‘어느 때까지’ 자신의 피를 갚아주지 않으시겠느냐고 탄원한 것과 연결됩니다(6:10). 포도 추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신원하시는 진노의 표현입니다.

(2) 포도 추수의 때에 대한 천사의 명령(18)

추수하는 천사는 제단의 불을 관리하는 천사였습니다. 포도 추수에 사용된 이미지는 특별히 이사야 63:1-6 말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이사야 본문에서는 장차 남쪽 에돔과 보스라에서 오시는 주님께서 만국을 짓밟은 용사로 등장합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그들의 원수를 칼로 심판하십니다(이사야 63:4). 그날은 원수 갚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심판 즉, 악한 자들을 위한 심판을 행하신다는 내용을 추수 장면으로 묘사한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예레미야 25:30; 예레미야애가 1:15; 요엘 3:13).

(3) 포도 추수(19)

구약성경에서 포도 추수는 기쁨의 축재였습니다(예레미야 3:12,13; 요엘 3:18; 아모스 9:13,14). 그런데 포도를 추수하는 상황에서 천사가 낫을 휘둘러 성 밖에서 포도송이를 거두어 즙을 짤 때 포도주 틀에서 흘러나온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피’였습니다. 축제의 포도주가 심판의 피로 바뀐 것은 축제가 심판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축제 이미지가 하나님의 심판 이미지와 연결된 이 장면에서는 기쁨과 두려움의 대조와 구원을 행하는 중에 행해지는 심판에 강조가 있습니다.

‘성 밖’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며, 예수님의 중인들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11:8; 참조. 마태복음 21:39; 히브리서 13:12,13), 포도원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켰습니다(이사야 5:1-7; 마태복음 21:33-46). 성 밖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사는 장소입니다. 심판이 성 밖에서 이루어지는 깃은 세상이 우리 주님과 주의 증인들에게 행한 것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응하려는 것(lex talionis, 보복법) 때문입니다.

(4) 포도주 틀의 위력(20)

포도주 색의 피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밖에서부터 말굴레(약 2m) 높이로 천육백(1,600) 스타디온까지 퍼질 것입니다. 천육백 스타디온(186m×1600=320km)은 이사야 63:6에서 취한 것인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인 320km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사무엘상 3:20), 천육백(1,600)이라는 숫자는 4×4×10×10으로 조합이 되었는데, 4라는 수가 세상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5:6; 7:1), 천육백(1,600)은 하나님의 심판의 전 포괄적인 규모를 나타내려고 제시된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 구석구석까지 퍼질 것이다(참조, 사무엘하 24:15). 물론 여기서 포괄하는 범위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보편성을 표현합니다.

포도주 틀을 밟는 것과 같은 심판은 19:15에서 반복된다. 그러나 성안은 깨끗하게 남아 있다. 성안에는 더러움이 들어 설 여지가 없다(21:27),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계시될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엄격한 구분과 새 예루살렘의 거룩함과 연결됩니다(21:26,27). 본문(14:14-20)에 추수가 이처럼 밀 추수와 포도 추수 등 두 가지로 언급된 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을 구원하고 악인들을 심판한다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실 그날에는 주님을 거부하고 조롱하던 자들이 모두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져 밟힐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다면 우리는 고난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견딜 수 있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한 기대를 붙들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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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4-01)


어린양을 따르는 교회의 승리

요한계시록 14장 1-13절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에 대규모 연합 예배를 드립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니다. 한국교회가 연합한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이 함께 연합 예배를 드리게 되면, 많은 교회 성도들이 협력하여 천 명이 넘는 연합 찬양대를 이루어 찬양을 드리기도 합니다. 그 찬양의 소리를 마치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찬양입니다. 그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13장만 보면 공포의 무기력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4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십사만 사천이 어린양의 성전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고 승전가를 부릅니다.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가 수장되는 장면을 본 이스라엘의 노래와 같습니다. 하늘의 세 천사가 영원한 복음과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 숭배자들의 심판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하늘에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승전가를 부르는 어린양(1-5)

성도들은 항상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 예수를 따라가며 제자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고 반드시 구원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혹시 식어져 있는 믿음이라면 다시 전의를 불태워 바다 위에 선 용과 담대히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1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5)

예수님께서는 이들은 한 사람도 잊지 않고 모두 구원하셔서 하늘의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가시든지 항상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땅에서 사탄과 사탄의 동역자들의 두 짐승의 무서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짐승 숭배의 거부한 것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요한에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종말론적인 현상을 시각적 이미지를 물론, 청각(2), 미간(8:11; 10:8-10), 후각(8:3-4;9:17-18), 촉각(1:17;3:15-16;9:5)을 통해서도 소개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시각(1)과 청각(2-3)적인 묘사, 그리고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시온산에 선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1)

요한은 시온산에 서 있는 어린 양이 있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 십사만 사천명을 보았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 시온 산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거하는 영원한 거처로서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입니다(갈라디아서 4:26; 히브리서 12:22-24). 그곳에서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아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장소에 와 있습니다(아사야 24:21; 요엘 2:32; 미 4:6-7). 땅은 사단의 통치 영역이며 짐승의 활동 무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브리서 12:1)

이 ‘십사만 사천 명’은 ‘짐승과 그 우상의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15:2)로서, 사탄의 표를 받지 않고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리십니다. 이것은 마치 소나 양을 소유를 표할 때, 이마에 불인장(火印)으로 표시하는 의미와 같습니다. 한 번 표시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사도 바울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자랑했습니다.

(2) 하늘 보좌에 올려 퍼지는 새 노래(2-3)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천사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입니다(2). 그 소리는 우렛소리처럼 크고 거문고 소리처럼 우아 했습니다. 또한, 천상의 성도들인 십사만 사천 명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 노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을 때, 특히 원수를 물리쳤을 때 불렀던 승전가였습니다(출애굽 15:1-8; 시편 33:3; 40:3; 96:1; 144:9; 149:1; 이사야 42:10).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노래가 ‘모세의 노래’라고도 불립니다(15:3). 그것은 모세가 출애굽과 홍해 도하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에 부른 노래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노래는 아무나 부른 것이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를 자격 있는 사람들만 불렀습니다.

(3) 십사만 사천의 자격(4-5)

‘십사만 사천 명’은 여자(17:2-5)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사람들이라고 소개됩니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는 금욕이나 은둔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고린도후서 11:2) 짐승이나 음녀를 따르지 않고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참석하여 새노래를 부를 자격은 구원받은 신부들로 구속 받은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탄과 더불어 영적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거짓말이 없는 자 그리고 순결한 자만이 구원의 반열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의 위협적인 공격 앞에서도 믿음을 지켜 승리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세 천사들의 승전 메시지(6-1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지만, 먼저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6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6-11)

세 천사가 공중에서 날아가면서 차례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들어야 할 영원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천사들은 은혜와 멸망과 경고를 예고하는 천사들입니다. 그 천사들은 각각 새로운 소식들을 선포합니다.

(1) 첫째 천사의 메시지-영원한 복음(6-7)

다른 천사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 천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으니 하나님께 경배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사탄이 일시적인 성공으로 미혹되어 있는 영혼들에게 외칩니다. 영원한 멸망이 임하기 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된 신부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복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2) 둘째 천사의 메시지-바벨론 멸망(8)

다음 천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8)라고 외쳤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하여 그 피를 포도주처럼 마신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은 아무리 크고 강해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영원한 나라를 위한 생각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셋째 천사의 메시지-짐승 숭배자들의 심판(9-11)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았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를 싫어하시며 결국 그들은 모두 심판을 받습니다. 짐승과 우상을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자는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인내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성공에 취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서로 성공에 대한 예물을 주고받습니다(11:10). 실제로는 한순간도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를 향한 격려와 위로(12-1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 있겠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영원한 파괴와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따라온 삶의 결과가 기대와 다를지라도 성급하게 불평하지 말고, 그 고난 너머에 있는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2-13)

요한은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은 다음으로 새로운 음성을 듣습니다. 마지막 영적 전쟁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1) 성도의 인내(12)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같이 하며, 인내하여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내린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내로써 지키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온 마음을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분만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영원한 안식(13)

요한은 천사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안에서 죽인 자들에 대한 복이 선포됩니다. 본문은 천사들의 일련의 경고(6-12)를 ‘복이 있다’는 말로써 마무리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복이 있다’는 선언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새롭게 평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그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이 땅에서 행한 수고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에게는 복이 있습니다(마태복음 5:10-12).

말할 때, 성령께서 더 확증하시길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적인 승리가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인내해야합니다.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로 하나님께 대한 거룩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영적인 음란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순결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면 천국에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천상에서 놀라운 새노래로 찬양하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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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3-02)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1-18절   


‘모조품’을 영어로 ‘이미테이션(imit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짜 물건을 젊은 세대들의 언어로 ‘짝퉁’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짝퉁은 허술하게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명품의 경우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진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짜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가짜일 뿐입니다. 겉모양만 대충 보고 속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짝퉁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는 짐승 후에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첫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용처럼 말을 합니다. 큰 이적으로 미혹합니다.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우상숭배하게 만듭니다. 우상숭배 하지 않는 자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짐승의 수인 666을 받게 합니다. 그 표가 없으면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666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첫째 짐승이 정치 지도자이고 둘째 짐승은 종교 지도자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등장(11-12)

교회가 초림부터 재림까지 사탄으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지만 교회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해 주시는지, 그 보호 속에서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은 그들이 증인의 삶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증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이라는 것을 계속보고 있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로마제국의 정책을 선전하고 황제숭배를 동해 권력을 유지하고 개인적 이익을 챙기는 식민지의 토착 권력자들입니다.
11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11-12)
사탄도 삼위 하나님을 모방하여 자신들도 하나님의 행세를 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먼저 용이 성부 하나님을 모방하고,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이 성자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요한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고(1-10), 이제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도와서 용의 뜻을 전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람들에게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섬기도록 하고, 그를 선전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1) 둘째 짐승의 특징(11)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위력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르지만 성품은 비슷합니다. 일곱 뿐이 아니라 두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짐승들처럼 생겼다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니엘 8장에 나오는 두 뿔 가진 숫양과 비슷한 모습입니다(다니엘 8:3).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그림이 두 뿔을 가진 어린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어린양을 흉내 내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5:6). 짐승은 양처럼 생겨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흉내 냅니다(11; 5:6). 그가 어린양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가 하는 말(言)에서 나탑니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19:13)과 달리 짐승은 용처럼 말을 합니다. 용처럼 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사탄 같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은 말로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고 속였던 뱀과 같습니다.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종교적 대리인입니다. 온 땅과 거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속이는 도구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짐승은 저항해야 할 어떤 숭배의 대상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치 지도자를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의 원조입니다. 바람과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결국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 모두 용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2) 둘째 짐승의 권세(12)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용을 경배하듯이(4), 땅에서 올라온 짐승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도록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이적을 행합니다. 이 짐승은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서 공공연히 활동합니다. 반기독교적인 제국을 선전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19:20).
종교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반대되는 것을 지지하거나 결탁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킵니다. 특정 사상과 기독교를 동일시합니다. 경계가 필요합니다. 광범위하게 지지되고 있는 이념은 ‘명백’하고 ‘상식적’이며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권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보유하기를 원하는 소집단의 강력한 기득권을 감싸주거나 두둔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 짐승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이 첫째 짐승의 말과 활동을 정상적이며 훌륭하다고 보도록 설득합니다. 이에 대항하는 행동과 의견은 반사회적이며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요한은 짐승의 지배 과정에서 감추고 있던 정체를 폭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적을 행하는 것에 미혹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마태복음 24:24; 마가복음 13:22).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활동(13-17)

사람들은 외형을 중요시 합니다. 하지만 너무 겉만 봐서는 안 됩니다. 나타나는 형상만 보면 속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무엇을 더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나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때로는 회유나 위협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떠난 은사나 체험이나 영성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13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3-17)
짐승의 표가 찍힌 오른손은 제국의 충성하는 우상숭배자들의 행위이며, 이마는 의식을 말합니다. 충성은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제궁의 시스템에 적응하고 동화하지 많으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시장에서도 매매는 어려웠고 빈곤과 조기 사망의 원이 되었습니다.
(1) 둘째 짐승의 이적(13)
둘째 짐승은 일반적인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들의 활동은 기적과 미혹과 종교적 탄압으로 요약됩니다. 먼저 그는 큰 이적을 행합니다(마태복음 24:24). 엘리야의 권능을 흉내 낼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앞에서 모세의 이적을 모방하여 재현한 애굽 술사들과 같습니다. 정치 지도자에게서 권위를 위임 받습니다. 원래는 사탄이 준 권세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우상에게 생기를 부여하며, 다양한 마술적 기교로 숭배자들을 현혹합니다. 실제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다양한 마술 행위가 넘쳐났으며, 유대교에서도 마술이 통용되었습니다. 복화술로 말 못하는 우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성령의 이름으로 보여 온 종교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인생 기적을 거둔 기독교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외부의 미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 지역주의에 헌신하는 것, 특정한 공공사업에 이바지하는 것이 신앙보다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강요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 군국주의나 나치즘이 그 예입니다.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들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더 경계해야 할 대상은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와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풍요와 번영이란 바알의 가치로 변질시킵니다.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와 행동 방식과 타협하도록 미혹합니다. 단군신상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일부 기독교 세력들은 특정 정치인의 동상에는 침묵하고 용인하고 장려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가장한 유사종교이며 이단적인 교훈입니다.
(2) 둘째 짐승의 우상숭배 활동(14)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미혹합니다. 미혹은 사탄의 주목기입니다. 에덴부터 지금까지 그 버릇을 고친 적이 없습니다. 사탄은 이적을 행함으로 자신들의 권위에 확실을 줍니다. 13절의 ‘이르기를’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지시하고 명령하고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묵묵히 따르게 받습니다. 미혹의 목표는 우상숭배입니다. 첫째 짐승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치명적인 정치적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서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교회에게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며, 우상을 만들도록 부추깁니다. 참람함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요한의 시대에는 로마 황제 숭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대체하는 것은 다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돈도 사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안식에 여주행하는 생산과 소비주의도 우상입니다. 이단의 교주들도 우상입니다.
(3) 둘째 짐승의 핍박(15)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통제합니다. 외부 세력이 진정한 교회에 고난을 주는 것은 종교 탄압과 핍박입니다. 기독교 내부에서 저항하는 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통제와 억압입니다. 재국은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바벨탑의 망령은 시대마다 나타납니다. 한 언어와 생각만이 건건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건설적인 의견도 이단이나 불순세력으로 배도하여 죽입니다. 제국은 온실이나 인큐베이터를 좋아하지만 광야는 좋아하기 않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거북하고 불편하여 침묵시킵니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5)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신앙적인 고난입니다.
어떻게 저항합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교회는 불 가운데 들어가서 견인(堅忍)되어야 합니다.
(4) 둘째 짐승의 표(16-17)
666은 무엇입니까? 666의 의미를 푸는 열쇠는 계시록의 본문과 당시의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여섯째 심판은 우상숭배자들이 받는 심판입니다.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 666은 용과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의 삼위일체입니다. 6은 불완전수이며, 7은 완전수입니다. 8은 새 창조의 수입니다. 666은 사탄의 삼위일체를, 777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888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요한이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문학적 기법 중 하나가 ‘수비학’입니다. 네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숫자사로 환산하면 666입니다. 로마에 퍼진 네로의 환생설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안에서 666의 의미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66만 놓고 묵상하면 오해의 늪에 빠집니다. 666과 더불어 144를 봐야 합니다. 666은 인간의 수요 짐승의 수입니다. 144는 새 예루살렘의 수입니다.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입니다. 14장에서 144,000이 666을 이기고 승전가를 부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666은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모든 체제입니다. 특정 인물이 아닙니다. 반면에 144는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모든 체제입니다.
666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역사 속에서 부상했다가, 어린양의 군대 144,000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사라졌습니다. 666은 사탄이 그 근원입니다. 사탄은 정치 세력과 종교 세력과 동맹을 맺고,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역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통해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시켜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자는 666의 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에게 주는 경고(18)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분별력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불완전으로 뭉쳐진 악의 삼위일체를 이루고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사탄의 교묘한 유혹과 거짓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18)
지혜와 총명(18)은 분별력과 통찰력입니다. 13장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용이 앞장세운 짐승의 정체를 분별하고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주변 사회를 지배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짐승의 체제에 저항하고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해 상상력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정치적입니다. 예배는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하늘의 시각에서 갖도록 만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의 전조가 드리운다 해도 ‘저항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배제와 소외로 협박하는 ‘순응하라’는 사회적 압박을 성도는 ‘저항하라’는 메시지로 맞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권력 구조에 대하여 치밀하게 선지자적 비판을 가합니다. 제국의 모든 혜택을 거부하는 것은 로마가 자신의 권세와 번영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유일한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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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3-01)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10절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정의와 자비가 작동하고 구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요한은 짐승의 나라를 반대합니다. 짐승의 나라는 살인적인 억합 구조를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행사합니다. 그러나 누가 세상의 진짜 주인입니까?

 

용이 바다 모래에 섭니다. 사탄은 교회를 어떻게 핍박합니까? 바다에서 첫째 짐승이, 모래에서 둘째 짐승이 올라옵니다. 이들은 사탄의 대리인들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정치 지도자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 지도자입니다. 용과 더불어 666의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습(1-4)

바다 짐승과 땅 짐승은 욥기 40-4장에서 등장하는 두 짐승,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모델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짐승은 역사 이전에 하늘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습니다. 계속 패배하지만, 낮은 자세로 계속 미혹합니다. 사탄은 패배하였으나 재기하여 핍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계획을 능동적으로 수행합니다. 하늘 보좌에서의 참소권(讒訴權)은 박탈을 당했으나, 계속하여 핍박하고 미혹합니다.

1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1-4)

13장은 12장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용(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이(교회)를 핍박하는 기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용은 하늘에서 쫓겨나서 땅에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 사탄의 하수인들은 두 짐승인 바다의 짐승과 땅의 짐승의 도움을 받아 여자의 남은 자손인 교회를 해치려 합니다. 먼저, 용의 권세를 받아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어떻게 교회를 핍박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첫째 짐승의 특징(1-2)

요한은 바다에서 첫째 짐승이 올라옵니다. 이 첫째 짐승은 용(사탄)의 아바타입니다. 앞에 나온 용과 비슷합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특징은 용이 준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의 짐승에게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합니다. 12:3에 용의 모습과 비교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용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영화로운 이름을 가진 것처럼, 반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하는 것처럼(1:6), 짐승은 사람들에게 사탄을 경배하도록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처럼, 짐승도 상처를 입고 죽지만 다시 살아납니다(13:3,12,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보좌를 가지신 것처럼(12:5,10), 이 짐승도 용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받습니다(2,4).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용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정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사탄은 용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과 권세를 찬탈하는 자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다니엘서 7장 3,7절의 바다에서 나온 네 짐승의 모습을 종합하여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네 짐승은 매우 사납게 생겼으며 굉장한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을 대적한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본문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가지 더 추가됩니다. 짐승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치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세상은 짐승을 추종합니다.

요한과 당시 성도들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당대에 로마 세력을 염두하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장하여 마치 자신이 세상의 권세를 장악한 것처럼 아시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과 로마의 황제들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아우구스투스 이외에 여러 황제들을 로마 시민에 영향을 주는 신(gods)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네로의 후계자들은 네로가 죽은 뒤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짐승의 권세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한 국가와 국가의 원수와 인간 정신을 창고하고 신뢰하고 예배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이외에는 참신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2) 첫째 짐승의 어린양 패러디(3)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몇 가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머리 일곱 개 중에서 하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이 짐승도 큰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났습니다(13:12,14). 온 세상이 이런 놀라운 기적은 더 많은 사람들로 그 짐승을 따르게 했고, 짐승에게 그런 능력을 준 용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3) 첫째 짐승의 권세(4)

이러한 짐승의 행동은 모방일 뿐이지 예수님의 능력을 따라잡을 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셨던 것처럼 이 짐승은 용에게 권세를 받았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은 사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는 무시무시한 권세를 가진 것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 공포로 무기를 삼습니다. 악의 세력은 항상 공포를 무기 중 하나로 사용합니다. 무시무시한 공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만드는 일을 좋아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활동(5-8)

사탄은 오늘도 하나님을 모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탁월한 사탄의 재주는 여전히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다니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의 활동 기간에 제한을 두셨습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짐승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한 시기가 되면 그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본 것입니다.

5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7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5-8)

사탄이 많은 능력을 가졌고,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사탄을 경배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1) 첫째 짐승의 비방(5-6)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위력 있는 말로써 백성들을 미혹합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지 소개되었습니다. 그 기간은 한정된 기간인 마흔두 달 즉, 3년 반입니다. 이 기간은 교회가 말씀을 증언하는 기간이고(11:3), 교회가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기간입니다(12:6,14). 짐승은 이 기간 내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늘에 사는 자 즉, 교회를 비방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이 활동하는 기간은 용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권세 역시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에게 자신을 모독하게 허용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정하시고 은혜로우신 목적과 심판과 영광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있습니다. 짐승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비방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독을 당사시고, 성도들은 고난을 받으며, 악은 창궐하고, 세상은 거짓 신을 따릅니다.

(2) 첫째 짐승의 핍박(7)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짐승을 따를 것입나(7)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감정적이지만 전 세계 백성을 장악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는 온 세상을 가리키는 총체어 입니다.

(3) 첫째 짐승의 숭배(8)

세상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짐승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 신’으로 대접받습니다(고린도후서 4:4).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8).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과 그 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짐승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7-8). 창세 이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13:8) 은 짐승에게 경배합니다(8). 그들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고, 하늘에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횡포와 권세를 견디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성도에게는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요(9-10)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반드시 비용 계산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된다는 것은 악한 세상에 동조하지 않으며 고난과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기복주의와 만사형통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에 비해 약속된 장래의 영광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 길을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9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9-10)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인내입니다. 믿음과 안내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인내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참고 인내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들을 귀 경고(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촉구합니다. 듣지 않는 우상숭배자들은 더욱 마음이 강퍅해질 것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은 사탄의 통치(속임수와 과장과 신성모독)를 받는 정치를 통해 사회 각 영역에서 실행되는 현상입니다. 종교적인 구분만 하라면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속아서 도리어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종교를 신앙의 눈으로 보되,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어떻게 사탄의 통치가 실현되는지를 분별하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2) 성도의 시험대(10)

짐승의 활동 결과, 사로잡혀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짐승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인내와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10). 성도는 짐승의 공격 대상입니다. 영적으로 절대적인 보호를 받지만, 육신적으로는 구금과 죽임을 당합니다. ‘죽이다’는 성도의 고난을 묘사합니다(6:8,11). 고난을 당하는 성도에게는 영적 분별력과 더불어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실한 증인으로 고난을 받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 위탁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9). 생존과 생명을 위협하는 적대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순복해야 하지만, 정부가 위임된 권위의 한계를 넘어서,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고 종교적인 수준의 요구를 할 때에는 저항해야 합니다. 저항과 불복종으로 인해 정부가 징벌을 내리면 받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2:18-20, 로마서 13:1-7).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핍박은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속에서도 오직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의 전조입니다.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고 악한 세상에 맞서야 합니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곧 승리의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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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2-01)


용과 교회와의 영적 전쟁

요한계시록 12장 1-18절


세상 나라와 싸우기 위해서 먼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싸움을 간파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단지 인간 통치자만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와 악한 영들과 직면합니다. 피상적인 헛발질이 아닌 견고한 진영을 분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12장은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영적 전쟁을 묘사합니다. 용이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게 하지만 여자는 아이들 낳습니다. 여자는 용을 피하여 3년 반 동안 광야로 피합니다. 다른 장면으로 하늘에서 이와 상응하는 전투가 있습니다. 미가엘과 사탄의 전쟁입니다. 사탄이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납니다. 원래 장면으로 돌아가서, 용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홍수로 삼키려 하나 땅이 강물을 삼켜버립니다. 용이 분노하여 바다 모래 위에 섭니다.

 

땅에서 떨어지는 여자와 용의 전투(Ⅰ)(1-6)

11장은 두루마리의 축소판이고, 12-15장은 확장판입니다. 전체 주제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창세기 3:15의 원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하늘과 땅에서 사탄과 하나님 백성 간에 갈등이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도록 합니다. 주요 목적은 사탄의 공격에 대비하여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보호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신실한 증인의 삶을 견고히 고수하도록 격려합니다. 12장은 1-11장에서 발전시켜 왔던 주제, 교회와 제국 사이의 갈등을 더 심도 있고 상세하게 다룹니다. 사탄 자체가 제국적인 악의 근원입니다. 독자는 12장을 읽으면서, 땅의 박해자들의 배후에는 악마 자신이 거느리는 영적으로 악한 세력들이 서 있음을 인지하게 되고, 이러한 인식은 신실한 증인으로서 더욱더 감내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에베소서 6:12-13).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1-6)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은 성경으로 성령님에 의해서 해석되어 합니다. 본문에는 많은 상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상징과 이적 그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여자의 해산(1-2)

요한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1)로 시작합니다. ‘하늘’은 계시의 출처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보여줍니다. 우선 독자를 하늘로 초대하고 중요한 표적을 보여 줍니다.

이제 한 여자가 소개됩니다. 그 여자는 찬란한 영광을 지녔는데, 여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는 여자의 겉모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태양을 옷으로 입고, 발아래에 달이 있고 왕처럼 열두 별로 만든 관을 썼습니다. 12은 하나님의 백성의 총수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존재한 믿음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 여자는 17:3,4에 언급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진 음녀와 대비됩니다.

해를 입은 여자는 사내아이를 임신하였는데, 그 아이를 낳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임신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표상은 아사야 26:17,18과 아이를 낳은 모습을 그린 이사야 66:7-9에서 온 것입니다. 이사야 26장은 파멸된 이스라엘이 장차 후손이 많아지게 될 것을 예언한 본문인데, 이것은 마치 아이를 낳는 여자가 해산의 수고로 아이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66장은 진통하는 즉시 아들을 순산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2) 용(3-4a)

‘여자’에 맞서는 ‘용’이 나오는데, 그 ‘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용’은 머리에 일곱 개 뿔이 열 개 있었습니다. 몸집이 거대했고 붉은 색을 띄었습니다. ‘용’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원수를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시편 74:12; 이사야 27:1; 에스겔 29:3). 붉은 용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회화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탄은 애초부터 여자를 괴롭혔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여자와 뱀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창세기 3:15). 여자와 사탄의 전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을 미혹하고 여러 모습으로 괴롭혔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지만 모조품입니다. 그 속임수에 하나님 백성 3분의 1이 배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사탄의 모습을 창의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 백성을 괴롭힌 제국들의 이미지를 이리저리 모자이크하여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로마제국은 그 절정입니다. 이스라엘은 산고의 진통을 겪습니다(이사야 26:20;66:14). 그리스도는 하나님 백성의 고난 속에서 출현합니다. 시편 2편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3) 용과 여자의 갈등(4b-5)

용은 그리스도를 삼키려고 기다립니다(4b). 여자가 아들 곧 남자를 낳자 그 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려갑니다. 이러한 정황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 버리자 용은 공격 대상을 잃고 맙니다. 그의 공격은 실패로 끝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의 승천은 단지 용의 공격을 피하는 소극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의 탄생 목적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십니다(11:15). 하지만 사탄은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것이 독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4) 여자의 피신(6)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자 여자는 용과 함께 남습니다. 이때 여자는 하나님께서 양육하기 위해 예비하신 광야로 도망하여 1260일 동안 보호하고 양육합니다.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여자는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습니다. 하늘로 도피하지 않고, 신실한 증언을 통해 사탄의 통치에 저항합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1260일이 상징하는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 승천하여 보내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양육을 받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운명입니다. 성경 전승에서 광야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현존하는 곳이고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곳입니다(시편 23;78편). 시련과 보호의 장소다(신명기 8:14-16). 영적 피난처이며 훈련과 양육을 받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가엘과 사탄의 전투(7-12)

교회를 패하게 하려는 사탄의 표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사탄은 육신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주 무기로 삼지 않습니다. 사탄은 ‘네가 이러고도 성도 맞아?’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우리의 구원 자체를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격합니다. 이때 엉뚱한 것으로 사탄을 대적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7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7-12)

요한은 12장에서 여자와 용의 전쟁을 3부작으로 나눠, 1-6절은 태고부터 시작된 전투를, 13-17절은 현실 속 영적 전투를, 중간에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성합니다. 13-17절은 사탄과의 전쟁의 핵심적 해석이며 신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제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처럼 삽입되어 있는 이 말씀은 단순한 삽입이 아니라 앞뒤로 전계되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밝혀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7-12절까지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사탄의 정체와 패배(7-8)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미가엘과 용과의 큰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용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용의 패배는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미가엘은 실제로 싸우는 야전사령관이 아닙니다. 천국 지도에서 사탄의 깃발을 제거하는 참모입니다.

9절의 중요한 의의는 용을 마귀, 사단을 묘사하는 그림에 있습니다. 용은 ‘옛 뱀’으로 불리며(창세기 3:1,14), 하나님 백성의 오랜 원수입니다. 옛 뱀, 사탄은 중상모략하고 기만하는 자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뱀과 그의 대리자들은 동산에서 시작하였던 것을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마귀의 기만하는 역할을 과감하게 박탈하고 참소하는 역할을 무력화합니다. 마귀와 그 천사들을 하늘에서 내쫓아버리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에 대한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박탈과 무력화입니다. 마귀가 잃어버린 ‘곳’(장소)은 지금까지 특권을 누려왔던 고소의 자리로 이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의 특권으로 승인하셨던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교회에 들어와서 자신의 인간 종들을 통하여 기만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뱀의 이미지를 채택하여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이방신의 이미지입니다. 사탄은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합니다.’ 다니엘 2장의 ‘돌’이 신상을 깨트립니다. 그 돌은 다니엘 7장의 인자입니다. 다니엘 7장의 인자는 종말에 이전의 압제적인 제국들을 대체합니다. 초기 유대 문헌은 돌을 하나님의 대적들, 특히 로마를 무찌르는 ‘오실 메시아’와 동일시하였습니다(에스라4서 13:6-8). 사탄은 제한된 의미에서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하늘 전투에 상응하여 성도들이 사탄을 이겼습니다.

(2) 하늘 보좌에서의 승전가(10-11)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쫓기자마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였음을 선포하고 큰 음성이 들립니다. 이 음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승리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승리에 환호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점에서 용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내쫓긴 사건을 찬송으로써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가 나타난 반면에 사탄은 쫓겨났다는 것과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그들의 말씀 증언으로써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순교를 감수하면서까지 어린야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겼습니다.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로 사탄을 이겼다는 말은 사탄이 어린양의 피에 일찍이 패배했음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역을 통해 사탄을 이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70명의 사역으로 인해 사탄은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졌습니다(누가복음 10:18). ‘참소자’는 ‘고발자’(accuser, NASB)를 뜻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발한 사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욥기 1:6-12). 하늘 전투에서 패배한 사탄은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성도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3) 사탄 패배의 여파(12)

본문에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과 ‘땅과 바다’ 등 두 부류로 나눕니다. 성도들은 하늘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교회의 원수들은 땅과 바다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13:8). 성도들은 용(사탄)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즐거워합니다. 반면에 땅과 바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자기가 내쫒긴 분풀이를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떨어지는 여자와 용의 전투(Ⅱ)(13-17)

사방에서 혹독한 고난이 융단 폭격같이 쏟아지더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독수리 날개처럼 보호해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기 상황에서 주님의 손길이 교회를 건져 든든하게 받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갈수록 맹렬해지는 사탄의 공격이 그의 최종적인 패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시간표임을 읽어 내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13-17)

마귀는 교회를 파괴하려고 끊임없이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용은 두 번째로 땅에 떨어진 여자와 전쟁하고 있습니다.

(1) 용의 여자 박해(13)

요한은 독자를 다시 현실 속으로 초대합니다. 태초는 종말에도 반복됩니다. 박해를 받는 현장입니다. 13절은 6절과 12절이 남겨둔 주제를 다시 꺼내 듭니다. 6절은 성도의 공동체가 신적인 피난처로 피신하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 공동체에 대한 용의 핍박에 관한 명백한 언급이 없습니다. 12절은 용이 하늘에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용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보좌로의 등극을 훼방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상실감과 무능력으로 인해 분노합니다. 13절은 이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써 용이 격노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동사 디오코(διωκω)는 ‘핍박하다’ 또는 ‘뒤쫓다’로 번역됨 수 있습니다. 마치 바로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바로는 용의 모델입니다.

(2) 여자의 피신(14)

용은 여자를 없애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여자는 안전합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는 삼 년 반 동안 아무리 큰 환난(12:15,16)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독수리의 날개로 안전한 곳에 데려가며(이사야 40:31), 물이 엄습하여도 그들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14절은 6절의 진수를 이제 다시 진술합니다. 삼 년 반(1260일)은 교회가 광야 생활을 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큰 독수리 두 날개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양육하십니다.

(3) 용의 여자 공격(15-16)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에도 사탄은 계속 박해합니다. 홍수로 여자를 휩쓸어버리려고 합니다. 입에서 물을 토합니다. 홍수는 문자적이지 않습니다. 쿰란 공동체에서 홍수는 속임수와 핍박의 상징입니다. 뱀의 입에서 나오는 홍수의 이미지는 속임수와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상징합니다. 사탄의 본성입니다. 교회에 침투하여 속여서 꾀고 교회를 파멸시키는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4) 용의 분노와 대대적인 공격(17)

땅이 활을 삼켜서 사탄의 분노에 찬 시도를 좌절시킵니다. 바지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땅이 삼키고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 무리를 땅이 삼킨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좌절된 용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바다 모래에 섭니다. 바다 모래는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등장시켜,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우리가 이어서 감당하는 신실한 순종 없이 우상숭배의 거짓과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의 악은 멈취질 수 없습니다. 영적 활력을 가진 증인의 삼은 종교적인 ‘말의 죽음’을 불식하고 이기는 자의 삶이 되게 해줍니다. 사탄은 오늘도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단한 공격을 합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전투의 현장에서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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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1-02)


두 증인의 최후 승리

요한계시록 11장 14-19절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천국의 맛, 순종의 맛, 사랑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즉석음식들과 같은 신앙생활에 길들여진 삶은 천국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맛’을 아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 그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도 복음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것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증인이 가장 강력한 증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받고 살아있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나팔 심판이자 셋째 화가 시작됩니다. 9장의 여섯째 심판이자 둘째 화와 연결됩니다. 나팔 시리즈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그 내용은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세상 나라가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어 갑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심판을 받고, 성도는 상을 받습니다. 하늘 성전의 언약궤가 보입니다. 그것은 속량의 상징이자 심판의 상징입니다.

 

셋째 화 예고(14)

우리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상 나라의 힘과 권세는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는 유한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의 화려함은 꽃과 같지만 곧 시들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하는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받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항상 이 사실만은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14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14)

13절까지 내용은 독수리가 전해주는 화 세 개 중에 두 번째 화에 해당합니다(9:13-11:13). 본문은 지진이 나서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하는 혹독한 화가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 더 남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첫째 화(9:1-12)와 둘째 화(9:13-11:13)에 이어서 11:15-19에는 셋째 화가 소개됩니다.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결된다고 10:7에서 그리스도가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재앙도 없고, 오직 하늘 찬양만을 담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여섯 가지 나팔 재앙은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가혹한 심판이 가해졌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당시의 바로와 같이 더 강퍅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회개 유도 전략을 바꿨습니다. 우레 심판을 취소하고 두루마리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두 증인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열방이 대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일곱째 나팔은 그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왕 노릇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립되어갑니다. 사실 찬양에는 심판과 구속의 행위가 기술되어 있습니다(11:18-19). 하나의 노래가 환상이 될 수 있으며, 하나의 화(禍)도 나팔의 내용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우상숭배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확립은 다른 어떤 나팔 재앙보다도 가혹한 재앙입니다.

 

일곱째 나팔(15-18)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0:13; 베드로전서 1:17)이 우리를 신원하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불신 세력의 유혹에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우리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최후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를 박해하는 악한 세력의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5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24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15-18)

24장로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 모두를 보응하실 것입니다.

(1) 하늘의 찬양(15)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상황을 묘사합니다. 일곱째 인을 뗄 때는 고요함이 있었습니다(8:1). 그런데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는 고요함이 아니라 큰 음성이 울립니다. 이후에 벌어질 장관에 어울리는 내용을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5)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상 나라는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15-18, 참조 19:1-10).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무대 설정은 완전히 갖추어졌습니다. 어린양이 교회에 하나님의 일곱 눈이자 일곱 영이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복음 증거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순교적 증언으로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동을 걸어 행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요점 정리하여 찬양으로 선포합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이시다.’ 하나님의 비밀(10:7)이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그 성취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 보좌 예배에서 찬양을 통해 그 성취가 선포됩니다.

(2) 24 장로의 찬양(16-18)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도래할 때 반응하는 하늘의 찬송을 소개합니다. 이 찬송을 주도하는 자는 24장로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다시 왕 노릇하신다는 것과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노를 내리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상을 주시게 된 것을 감하여 그분께 경배하며 찬송합니다.

① 24장로의 경배(16)

하늘 보좌의 구성원 중에 24장로들이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하늘 보좌의 장로들은 진짜 장로답습니다.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장로가 얼마나 장로다운지 표시가 납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을 숭상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제의적 태도입니다. 장로들이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이지만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와 찬양의 반응을 보입니다. 심지어 4:10에서는 자신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면류관’은 명예이자 권위의 상징입니다. 24장로는 정치적인 직함입니다. 장로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대표들입니다. 대표로서의 권위와 명예와 위엄을 다 벗어던집니다. 그리고 왕 되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왜 장로들이 하늘 보좌의 대표로서 찬양을 하십니까? 땅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게 신앙고백이자 하늘 포고문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② 왕이신 하나님(17)

땅의 공동체는 지금 로마제국의 지배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상하는 움직임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제국인 로마가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법적인 왕이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세상에서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사탄은 세상 제국을 통해 세상을 향한 자신의 가치와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짐승이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고, 나라가 하나님 백성의 손에 넘어갑니다. 왕의 등극이나 왕국의 설립에 당연히 나팔을 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비밀을 대표하고 있는 교회에 포고문으로 전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다.’ 전형적인 표현을 변형합니다. 미래(‘장차 오실 이’)를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로 대체하고,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로 부연합니다. 바로가 그 백성을 억압하고 있을 때, 광야 가시떨기 나무에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로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현존하십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희생시켜서라도 현재를 강조합니다. 역사의 시공간을 뚫고 들어오셔서 친히 왕 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 증거입니다. 신실한 증인들도 양을 따라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는 사탄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사탄은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지만, 현재는 없다.’ 사탄의 결정적인 취약점을 파고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영원하심을 패러디를 통해 강조합니다. 누가 진짜 왕입니까? 누가 세상을 통치하기에 합당합니까? 로마 황제는 모조품입니다. 하늘 보좌의 예배는 지극히 정치적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이 찬양을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어린양을 경배할 것입니까? 짐승을 숭배할 것입니까? 단지 종교적인 질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질문입니다. 로마제국 치하의 교회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합니다. 국가에 대해서는 매국노 또는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잘못된 정치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③ 심판과 보상(18)

하나님께서 신원하시는 때가 임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과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분명하게 가르실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반면에 ‘땅을 망하게 한 자들’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자 이방인들이 분노합니다(시편 2편). 하나의 대차대조기법으로 성도의 보상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이방의 진노와 심판(a) - 성도의 보상(b)-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멸망(a′)의 구조로 구성됩니다. 신실한 증인에게 주실 상급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심판을 통해 성도가 옳다고 인정받음을 강조하는 구조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은 ‘그리스도가 왕이시다’라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열방은 분노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분노에 심판으로 대응하십니다. 증언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죽은 자들은 ‘땅을 황폐하게 하는 자들’입니다(a-a'). 황폐하게 하는 자들은 황폐하게 됩니다. 노아 홍수는 땅을 황폐하게 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파괴한 자들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레위기 25:23). 제국은 땅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듭니다. 제국은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통해 적출과 축적을 합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땅과 사람을 위한 규범입니다. 제국은 이를 통째로 무시합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아합의 집안처럼 황폐하게 됩니다. 바벨탑과 같은 제국을 건설하고 땅을 황폐하게 한 세상의 모든 정치 집단은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여 황폐하게 만듭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를 악의 위협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장소가 됩니다.

 

하늘 성전과 언약궤(19)

최후의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순간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을 받을 순간입니다. 이처럼 심판은 믿는 사들에게 소망의 때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구원의 언약이 성취되기를 확신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거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구원을 확신하게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때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묵묵히 이겨야 합니다.

19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9)

하늘의 참 성전이 열린 것은 하나님께서 신원하신 결과입니다. 성전에 안에서 언약궤가 보입니다. 땅의 성막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입니다. 하늘과 땅은 실재와 그림자로 상응합니다. 하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상징합니다. 성전의 언약궤는 바벨론 포로 기간에 사라졌습니다. 유대 전승은 언약궤가 돌아온다고 기대합니다. 성경은 문자적인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기대합니다. 마태는 임마누엘로, 요한은 성육신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 개념은 11:19에서 시작되어, 새 하늘과 새 땅(21:3), 새 예루살렘(21:33)에서 반복 확대됩니다. 하늘의 언약궤의 등장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다림을 상징합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은 신현과 동시에 심판의 마지막 행동을 시사하는 정형문입니다.


예배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세세토록 변함없는 여원하신 왕을 알현하는 시간입니다. 단정한 마음으로 겸손히 예배할 때 우리의 예배는 하늘로 이어질 것입니다.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눈앞에 밝히 드러났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세상 나라를 압도하며 담대하게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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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6-02)


하나님의 선한 사람아!

디모데전서 6장 11-21


운동 경기를 참가할 때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경기장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뛰는 사람과 관람석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편안하게 관람하는 사람들은 쉽지만금메달은 없습니다힘들게 뛰는 선수들만이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관중으로 부르셨습니까선수로 부르셨습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권면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사용합니다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리라는 것입니다이 싸움은 세상의 악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의 삶과는 철저하게 달라야 할 것을 부탁합니다.

 

디모데에게 명함(11-16)

다른 교훈을 의지하는 거짓 교사들은 교만하고 다투기를 좋아하고 탐욕스러웠습니다반면에 복음을 따르는 우리는 의와 경건믿음과 사랑인내와 온유를 따라야 합니다그것이 악에 대항하는 성도들의 선한 싸움의 방법입니다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그것이 영생 자체입니다.

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11-16)

먼저 바울 사도는 앞에서 하셨던 말을 강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강조하며 디모데전서를 마치고 있습니다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라

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1-12)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는 표현으로 권면을 시작합니다하나님의 사람이란 구약에서 모세나 사무엘이나 다윗 등 탁월한 영적 지도자들에게 사용된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신명기 33:1; 사무엘상 9:6; 느헤미야 12:24).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된 사람에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디모데후서 3:17). 바울은 이토록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디모데를 부르면서 돈에 대한 욕심으로 믿음에서 떠난 자들과 철저하게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과 달리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람은 거짓 교사들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가 피해야할 것은 이것들이란 지시대명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여기서 이것들이란 4-10절에서 설명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 되는 그러한 행위들입니다그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아는 척하면서 변론과 논쟁을 일으키는 것과 부패한 마음으로 복음을 물질적 이익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것그리고 재물을 사랑하는 탐심입니다디모데는 이런 것들을 피해서 달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는 악한 가르침과 거짓된 교훈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고합니다목회자에게 가장 큰 유혹은 편안한 목회입니다목회의 형식이 편안 목회인가?’ 또는 바른 목회인가라는 갈등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세우는데좁은 문과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때로는 바울 사도처럼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따른 사람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진리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그렇다면 이 세상의 거대한 유혹인 돈과 명성과 권력을 얻고 싶은 유혹에서 피해 달아날 수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길입니다.

⑵ 명령을 재림 때까지 지키라(13-14)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골인지점까지 뛰는 것입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권고하길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날까지 뛰어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증인으로 내세웁니다즉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디모데의 모든 삶을 지켜보고 계시니 그 앞에서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또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증언을 하셨던 주님처럼 디모데도 자신이 고백한 신앙을 죽기까지 지켜야 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⑶ 때가 되면 나타나실 하나님(15-16)

바울은 특히 그의 나타나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킵니다재림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즉 하나님의 현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바울은 성부 하나님께서 재림 시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현현으로 나타내 보이신다고 가르칩니다(15; 에베소서 1:20-22; 빌립보서 2:9-11).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에 대해 묘사하면서하나님께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리라고 가르칩니다(16).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주권자(신명기 6:4; 요한계시록 6:10). 여기서 기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가리킵니다삶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는 증인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부한 자들이 피해야 할 것(17-19)

편안한 생활이나 편안한 목회의 유혹은 돈입니다바울 시대보다 더 물질만능주의화 되어가는 상황에서 물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돈이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그렇기에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17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7-19)

바울은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부자들에게 경고합니다디모데가 피해야할 것과 추구해야할 것이 있었듯이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⑴ 피해야 할 것 두 가지(17a)

부자들이 피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첫째는 교만하지 말고두 번째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는 부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된 것입니다부자들이 얼마나 교만하기 쉽고또 자신의 재물에 소망을 두기 매우 쉽습니다부자는 자칫 자신에게 있는 넉넉한 것들로 인해 오만하여가난한 다들을 경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의 허구성과 무가치함에 대해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이 세대의 재물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 없어지는 것입니다우리가 죽을 때 그것을 자져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재물이 우리의 영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부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재물로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⑵ 선한 일을 많이 하라(17b-19)

바울은 선행에 대해 세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선을 행하고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나눠주기를 좋아하는 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바울은 먼저 부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후하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물을 후하게 주신 것은 선한 일을 많이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바울은 재물을 가지고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유익이 되는 길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선한 일을 많이 하고 후하게 나눠주는 것은 장래에 자신이 살아갈 터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그 터는 참된 생명의 터이므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생명의 터와 다른 것입니다부자들이 재물을 가지고 선을 많이 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참된 보물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그러므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께만 우리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헛된 논쟁을 피하라(20-21)

문제가 발생할 때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합니다성경을 전념하고 기도하는 훈련을 하길 바랍니다.

20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1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20-21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디모데가 피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 선을 행하고 나누고 동정하는 자가 되지 않고돈 때문에 마음이 높아지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보다는 잠깐 있다가 없어질 허망한 돈에 소망을 두면 참된 생명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⑴ 피해야할 것(20)

피해야 할 것은 거짓 교사들과의 헛된 논쟁이다헛된 논쟁에 휘말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지적합니다어떤 사람들은 헛된 논쟁에 휘말려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있습니다그들은 헛된 논쟁에 휘말려 자신들이 가야 할 참된 길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버린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디모데에게 경계를 주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바울이 명한 것을 디모데가 지키는 길은 먼저 헛된 논쟁을 피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⑵ 지켜야할 것(21)

바울이 사용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는 것은 간수가 죄수를 감시하고 지키듯이 그렇게 보호하고 지키라는 뜻입니다그러나 디모데가 지켜야 할 것은 죄수가 아니라 복음입니다복음을 지키기 위해 복음에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헛된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복음에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만약 디모데가 그렇게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복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은 열심히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을 통해 성취됩니다이단을 설득하려고 그들과 함께 논쟁하면나도 모르게 그들처럼 다툼과 비방과 논쟁과 악한 생각에 물들어 다투는 자가 됩니다거짓된 것을 피하고 열심히 진리를 행하는 것만이 우리가 복음을 지킬 수 있는 길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한 번의 승리가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지 못합니다그리스도인은 오늘 영생을 취해야 합니다그리고 내일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주 앞에 설 날을 기대하고 장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면서 오늘의 돈이 주는 영광을 멀리해야 합니다그리고 편한 함을 위해 너무 돈을 사랑하고 돈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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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6-01)


경건을 이익으로 삼는 거짓 교사들

디모데전서 6장 3-10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교훈에서 떠나서 헛된 논쟁에 빠진 자들과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거론했던 바른 교훈과 경건한 삶의 주제를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거론합니다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바른 교훈은 어떤 삶과 인격의 열매를 가져옵니까?

 

바울은 성도들에게 경건으로 인도하는 권면의 말씀을 한 후이제 경건에서 떠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경계하라고 교훈합니다그들은 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진리의 복음을 버리고 떠난 자들입니다돈에 대한 욕심이 모든 악의 근원이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진 것을 족하게 여기면서 경건하게 살 것을 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3-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온 교훈만이 바른 교훈입니다그 교훈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백성으로 만들어갑니다그들의 열매는 사랑과 연합과 화평이지만반면에 잘못된 다른 복음은 다툼과 교만과 악한 생각을 만들어냅니다이는 공동체 안에 분열을 낳으며 사랑 대신에 미움을 낳습니다.

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3-5)

거짓 교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말씀을 묵상하고공부하며 그대로 사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진리에서 나온 경건에 관한 교훈이 아니면 다른 복음입니다바울은 다시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거짓 교사들의 외형적인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 진리의 말씀에서 떠난 거짓 교사들(3)

먼저 거짓 교사들은 진리의 말씀이 아닌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거짓된 교훈이란 뜻입니다왜냐하면 그들 은 그리스도의 올바른 말씀에서 떠나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성도들에게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가르침으로 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으며 그럴수록 그 피해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흉악한 이리 떼에 비유했습니다(사도행전 20:29),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의 진리와 다른 거짓 가르침일 뿐입니다바울은 디모데전서 1:6에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헛된 말이라고 했으며, 4:1에서는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정죄했습니다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헛된 것이고, ‘거짓된 말이며, ‘귀신의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첫째 복음은 바른 말씀입니다올바른 말씀은 거짓 교사들의 다른 가르침과 대조됩니다올바른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둘째복음은 경건에 관한 교훈입니다바른 복음의 특징은 성도들을 경건으로 이끄는 것입니다그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경건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다음 4절 이하에 설명하는 것처럼분쟁을 일으키고 투기와 비방과 같은 모든 불의한 행위를 불러일으킵니다.

⑵ 거짓 교사들의 특징(4-5)

경건케 하는 복음에서 떠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바울은 이 결과에 대해서 4-5절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먼저 거짓 교사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여기서 교만이란 자신을 과장하여 부풀리는 것을 말합니다거짓 교사들은 자신을 뽐내려고 하는 건전하지 못한 욕망을 가진 자들입니다그러한 욕망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거짓 교사들이 변론과 논쟁을 좋아했던 것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건전한 욕구에서 비롯된 젓이 아니라 자신을 과장하여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건전하지 못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그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논쟁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불의와 불법을 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변론과 논쟁이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투기분쟁비방악한 생각 그리고 다툼입니다바울은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생산하는 거짓 교사들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설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며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이고경건의 말씀을 물질적인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들입니다(5). 여기서 마음이 부패한 것과 진리를 잃어버린 것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상태를 계속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고반면에 경건의 말씀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거짓 교사들의 마음이 부패한 것은 진리를 잃어버린 결과입니다진리에서 떠난 그들은 마음이 부패해졌고경건의 복음을 물질적 이익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주된 관심사가 물질적인 이익에 있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거짓 교사들은 복음을 경건한 신앙의 기초로 생각지 않고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건전한 교훈이 아니라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특징은교만하며 쓸데없는 논쟁에 열정을 쏟아 붓고교회를 분열시킵니다또 그들의 마음은 부패해서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건마저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이 있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돈을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에 관하여(6-10)

경건에 관한 교훈을 버릴 때 마음이 부패하고결국 경건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만 몰두하게 됩니다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고 종교를 상업적 이득의 도구로 이용하게 됩니다이처럼 부패한 말씀은 부패한 마음을 낳습니다.

6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6-10)

세상의 어떤 것보다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돈을 사랑하여 돈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바울은 이제 경건을 통한 이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⑴ 자족하는 경건의 이익(6)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물질적 이익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탐심을 버리고 가진 것에 만족하라고 권면합니다경건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첫째는 6절을 어순에 따라 번역하면 큰 이익은 족하는 경건이다이다바울이 큰 이익이란 표현을 문장의 첫 머리에 둔 것은 그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거짓 교사들은 이익을 물질적인 것에 두었습니다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이익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바울은 여기서 큰 이익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그것은 12절에서 말하는 영생을 가리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영생이 물질적 유익과 비교할 때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입니까그런데 그 위대한 이익을 얻는 길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경건입니다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을 경건과 같은 것으로 묘사합니다돈에 대한 탐욕이 모든 죄의 근원이지만 탐심을 버리고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경건의 시작입니다.

⑵ 자족해야 할 이유(7-8)

바울은 자족하는 것이 큰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 후에 이제 자족해야 할 당위성에 대해 설명합니다이것은 물질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 이외에 그 이상의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바울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이 세상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들어왔듯이또한 어디론가 가야할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갈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면 무엇을 저축하고 쌓아두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지금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욕심이며그것은 모든 죄를 불러오는 원인이 됩니다요컨대가진 것을 족하게 여기는 자족하는 마음은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합니다.

⑶ 물질에 대한 탐심은 모든 죄의 근원(9-10)

자족하는 것이 경건의 길인 반면에 탐심은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설명합니다부자가 되려는 자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빠집니다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시험을 극복하면 연단을 받아 더 굳건한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그러나 탐욕을 가진 자들이 시험을 받게 되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올무에 떨어지게 됩니다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탐욕적인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부자가 되려는 욕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설명합니다그것은 시험에 빠지게 하고 올무에 떨어져 탐욕적인 사람으로 전락하게 만들며결국은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가룟 유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그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시험을 받아 예수를 죄인들에게 파는 올무에 걸려들었고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돈이 많은 부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부자가 되려고 하는 욕구에 맹목적으로 집착할 때우리가 시험에 빠지고 올무에 떨어지게 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돈을 많이 가진 것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지만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이것은 가난한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동일합니다돈에 대한 탐심은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많은 근심 가운데 고통을 받게 합니다바울은 여기서 많은 근심을 찌르는 가시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돈에 대한 욕심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결국은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 괴롭힙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는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1-13)

이것은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진정한 만족은 물질에 만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에 말씀으로부터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유혹은 오늘날 사역자들에게도 여전히 맘몬 신으로 강렬하게 역사합니다말씀을 가르치면서 보상 받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이것은 돈에 매이게 하는 함정입니다그리고 돈에 매이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부탁합니다자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그리스도인들에게 지극히 만족하는 마음은 외부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의 위험 경고(9-10)

바른 교훈은 경건한 삶을 만들어내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은혜를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그런 사람들은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자족하게 되고돈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그리고 소유보다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돈이 주는 근심보다 주님 안에서 평강을 누립니다.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9-10)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데 인생을 겁니다그리고 온갖 유혹에 쉽게 빠지고 믿음에서 떠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결국에는 자신의 인생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돈이나 물질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 있는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아프리카에는 큰 돌이 돈의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그 돌을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겠습니까우리들의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아무것도 아닌데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더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탐심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즉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할 만큼 자제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다 감사하고지금 내게 없는 것들은 아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미련을 두지 않는 마음입니다이처럼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돈에 끌려 다니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서 나온 바른 교훈은 우리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합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안전과 평강을 누리게 합니다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나의 모든 조건에 대해 감사하게 만듭니다바른 교훈은 우리로 여기서 천국을 누리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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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5-02)


교회 안에 존경해야 할 사람들

디모데전서 5장 17-6장 2


자리’, ‘관리’, ‘능력은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입니다또한 다른 지도자에 대한 태도역시 자신의 발전과 건강한 권위의 확보 그리고 지도자 간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지도자 간에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오늘날은 마땅히 존경할 만한 분이 없다고 탄식하는 시대입니다본문은 우리가 존경해야 할 대상이 누구며또 어떻게 그분들을 대해야 할지 교훈합니다.

 

교회 안에 과부에 대한 지침이 주어진 후장로들에 관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21-25절은 디모데 자신이 성도들을 대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그리고 6:1-2은 믿는 노예들에게 주어진 권면입니다노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거나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그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인지 알려줍니다.

 

장로에 대한 태도(17-20)

항상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자신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역하는지그들이 복음으로 해산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뿐만 아니라성도들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이 말씀 연구와 기도목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함께 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이러한 건강한 모습이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19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17-20)

앞 강에서 바울은 목회자가 교회 안에 각기 다른 부류로 구성된 모든 성도들을 대할 때마치 가족처럼 대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특히 과부들을 어떻게 처하여야 하는지 교훈했습니다그들을 온전히 깨끗함으로 접대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장로들에 대한 예우와 교회에서 권징을 행하는 경우와 그에 관된 목회 지침에 관해 언급합니다디모데전서 3장 1-13절에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 논한 것이라면 본문 17-18절은 그런 자들에 대한 마땅한 존경과 예후에 관한 언급인 것입니다이제는 장로에 대한 예우 문제에 관해 거론합니다.

⑴ 잘 가르치는 장로를 존경(17)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고 권고합니다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다스려감에 있어서 잘 섬길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설명합니다지금까지는 과부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대우에 대해 소개했다면이제는 그 공동체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는 장로에 대해 소개합니다.

여기에 장로(πρεσβυτεροι)’란 나이가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초대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직분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참고 3:1-7; 디도서 1:5-9; 사도행전 20:17-38). 구약에서 이 명칭은 처음에는 연장자’(욥기 32:4), 한 가문의 어른’(창세기 10:21), 한 지파의 ’(레위기 4:15)에게 적용되었습니다후에 유대교적 개념에서의 장로를 의미하게 되었는데그들은 회당의 관리와 재판을 주관하였으며(마태복음 5:21) 71인 장로로 구성된 공회가 있어 사실적인 최고의 법적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신약 교회에 있어서 장로는 그러한 장로의 직분과는 약간 개념이 다릅니다즉 이들은 교회를 다스리고감독의 직을 수행하기(사도행전 20:17; 디도서 1:5-7)도 하였습니다또한 이들이 사도의 권위 아래에 있었으나(사도행전 20:18) 베드로(베드로전서 5:1)와 요한(요한삼서 1:1)이 장로로 지칭한 것을 보면반드시 사도 아래에 종속되는 직분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장로들이 맡은 일을 크게 두 종류로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 구분합니다이는 치리 장로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즉 목사를 의미합니다이러한 직분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초대교회 형성기를 지나서 확장기에 형성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장로의 책임은 교회를 잘 다스리고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장로들은 교회의 리더십을 형성하면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맡은 일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 가르치는 장로는 배나 존경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잘 가르치는 장로는 실력이 뛰어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헌신하는 장로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배나 존경하라는 것은 더 많은 존경을 보이라는 뜻도 되지만재정적으로 보수를 잘 뒷받침하게 해주라는 뜻입니다그들에게는 더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⑵ 존경의 근거(18)

바울이 말하는 존경하라는 보수를 지급하는 것과 관계있다는 것은 18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바울은 교회에서 수고하는 사역자들이 보수를 받을 마땅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성경을 인용합니다첫째는신명기 25:4을 인용하여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권합니다(참조고린도전서 9:9). 다음으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말씀도 인용하는데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마태복음 10:10; 누가복음 10:7).

이는 교회 안에서 시간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수고하는 장로에게 존경과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인용입니다바울이 장로들의 권위와 대우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초대교회의 질서와동시에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목양에 전념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도록 위함일 것입니다.

⑶ 장로에 대한 고발(19-20)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들에게 대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권합니다모세 율법에서도 어떤 사람을 송사하려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신명기 19:15). 이 제도는 제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 제도인데초대 교회에서도 시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로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할 수 있습니다교회 안에서 장로들이 실수할 때어떻게 처리하는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장로에 대한 고소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그 이유가 첫째는그의 지위가 교회에서 중직이므로 그에 대한 잘못된 판단은 교회에 큰 영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둘째로장로는 지도자이므로 항상 교회 안과 밖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바중상모략으로 인해 무고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를 고소하려면 항상 두 세 명의 증인이 요구되었습니다바울이 이렇게 장로의 송사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은 디모데를 염두해 두었던 것입니다왜냐하면 디모데는 선량하고 경건했으나 아직 연소하기 때문에 이런 중상모략에 대하여 주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만약장로에 대한 고소가 사실로서 범죄 사실이 드러난다면범죄한 자들은 엄중하게 책망해야 합니다장로에 대한 고소를 신중히 받아들여야 하듯이죄를 범한 사실에 대해서는 더욱 엄중히 다루어야 합니다일단 장로의 죄가 판명되면 교회 앞에서 엄격히 공개적으로 책망하여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도록 본보기로 세우라고 명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치는 지도자들의 수고는 교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염두해야 할 원리들(21-25)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우는 과정그의 사역을 평가하는 과정은 매우 엄격해야 합니다일반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원칙보다 더 엄격하게 지도자들을 평가해야 됩니다종종 지도자의 허물은 감추어져서 교회에 더 이상 충격이 생기지 않도록너무 지나치게 배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장로들에 대한 권고하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21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22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23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24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25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21-25)

교회 안에서 지도자들의 사역은 언제나 계속 되고 있지만또한 반대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바울은 사역에 대한 반대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너무나 힘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그 사역을 천편일률적으로 단순하게 다룰 것이 아니라 매우 신중한 태도가 필요합니다훼방자의 비난으로부터 교회가 보호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미 말했습니다(3:2,7). 그리고 다시 언급할 것입니다(6:1). 바울은 정당한 고발과 거짓 고발을 구별할 수 있는 절차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⑴ 공평무사하게 처신하라(21-22)

먼저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라고여기서 교회 지도자들의 징계 문제나 임직 등에 관한 자신의 교훈이 주께로부터 부여 받은 사도적 권위에 근거해 주어진 것을 천명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에 대한 재판 문제나 그 외의 제반 문제에 있어서 엄격히 경계해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특별히 이러한 문제를 진행할 때, ‘속단이나 편향을 경고합니다지도자가 편견이나 편벽으로 다스리면 교회를 분열시키고 복음 전도를 가로막는 중대한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디모데에게 장로를 안수하는 일에 대해 특별히 주의시키고 있습니다이것이 경건한 목회이기 때문입니다직분자를 세울 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고 권고합니다당시에 장로를 안수하는 일은 장로회에서 행하는 것이었지만디모데는 주관하고 통솔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먼저 장로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 공평무사하게 처신하여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세우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편견 없이 하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개인적 편견으로 그 사람을 부당하게 평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반면에 어떤 사람에 대한 편애로 그 사람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됩니다그러므로 장로를 세울 때는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22)고 권고합니다임명할 때부터신중하게 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22)라고 권고합니다이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아마도 당시에 장로의 모임에서 편견에 의해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안수하려고 할 때거기에 경솔하게 동조하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만약 안수한 다음에나중에 그 사람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것이 드러나면죄인을 안수한 죄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그러므로 디모데에게 먼저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고 또한 정결한 사람을 장로로 안수하라고 명합니다자신이 정결할 때정결한 장로를 알아보고 잘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슨 부탁을 하던지먼저 디모데 자신이 그럴만한 영적인 자질이나 인격적인 자질을 갖춘 것이 중요하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⑵ 건강을 잘 챙기라(23)

이번에는 바울은 디모데의 건강을 걱정해 주고 있습니다앞에서 영적인 경건에 대해 신경을 쓴 것과 함께육체의 연단이 유익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디모데의 건강을 걱정하면서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고합니다이 구절은 문맥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아마 너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행하라(22)는 말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는 것은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고 물만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나실인이나 레갑 사람들처럼 독주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민수기 6:3-4; 예레미야 35:5-9). 이러한 것들을 마시지 않음으로 성결을 힘썼을 것입니다그러나 디모데에게는 위장병이 있었습니다바울은 위장병을 치유하기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는 것이 디모데의 문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디모데에게 금욕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지켜 정결케 행한다는 것이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는 것과는 상관없다고 설명합니다.

⑶ 선악 간에 모든 일은 드러나게 된다(24-25)

바울은 왜 사역자들이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25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24-25) 인간의 모든 죄는 결국 다 드러나게 되고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명백하게 모든 사람 앞에서 밝히 드러나는 죄가 있고은밀하고 교묘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영원히 감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죄는 없으며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죄가 금방 드러나지 않고 벌을 받지 않는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뿐만 아니라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어떤 선행은 금방 드러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어떤 선행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선을 행하다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결국은 모든 선악 간에 행한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연소한 디모데에게 사역을 해 나가는 일에는 당장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죄에 참여하지 말며선한 일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종들에 대한 태도(1-2)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세상에게 마저 그것을 강요할 순 없습니다성도로서 종들이 평등의 문제를 잘못 적용하여 주인을 가볍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관계를 정립해 줌으로써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게 한 것입니다.

1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1-2)

에베소 교회에서는 노예 제도가 있던 당시에는 성도들 중에 노예들이 많았습니다바울은 노예들에게 권면한다먼저 믿지 않는 상전을 둔 노예들에게 말합니다바울은 자유인이나 노예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으며 모두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고린도전서 7:21-23).

그러나 노예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세상에서 그들의 신분을 등한시하여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거나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노예는 노예답게 살라고 권고합니다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들은 상전에게 더 진실하게 충성해야 합니다믿지 않았을 때에는 주인의 채찍이 무서워 충성했지만 이제 진실하게 주인을 공경하고 섬기면서 충성해야 합니다.

믿는 상전을 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믿는 상전들은 노예를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믿음의 형제로 대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그러나 종들은 믿는 주인의 그러한 호의를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믿는 주인이 선을 베푼 만큼 더욱더 주인에게 충성하고 잘 섬겨야 합니다왜냐하면 주인에게 충성하고 잘 섬겨서 유익이 되게 한다면그 유익을 받는 사람은 같은 믿음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유익을 베풀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노예가 믿는 주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더욱더 주인을 공정하고 진실하게 충성하면서 잘 섬기는 것입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것을 잘 가르치고 권하라고 명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종이나 주인이나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갈라디아서 3:28; 에베소서 6:9). 그렇지만 성도로서 종은 자기 주인을 존경해야 합니다바울은 여기서 노예제도를 인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당시 사회 구조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제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잘못이 들어났을 때는 변명하거나 숨지 말고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하실 때까지 회개해야 합니다그리고 교회 안에 지도자는 다른 지도자를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고그의 권위를 지켜주기 위해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동시에 자신의 영적인 정결과 육적인 건강을 잘 지켜서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합니다지도자의 건강이 공동체의 건강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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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5-01)


교회 안에 과부를 대하는 자세

디모데전서 5장 1-16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잘 되는 회사나 조직은 기초부터 든든하게 조직되어서사장부터 직원까지 기초적인 일에서부터 충성합니다손님에 대한 인사주변 정리자신의 단정한 용모 그리고 전화를 대응하는 것 등을 소월하지 않습니다때로는 이러한 것들은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교회가 기초적인 사역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그래야만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연소한 디모데에게 에베소를 받기면서이제 다양한 연령층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를 간략히 설명합니다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므로(3:15), 그 안에는 나이나 성별이나 처지 등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가족 구성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바울은 젊은 지도자 디모데가 그 모든 관계와 잘 지낼 수 있도록 지혜로운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먼저교회가 책임지고 도와야 할 과부에 대해 설명합니다.

 

다양한 성도들에 대한 태도(1-2)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올바릅니다이웃을 사랑하며 존경할 사람을 존경합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여러 유형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대할지 신앙생활 지도 방법과 관련된 행정적인 측면에서의 목회 지침을 제시합니다.

1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2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1-2)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대할 때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교회의 구성원은 매우 다양합니다연세가 아주 많으신 분에서 아주 어린 아이까지경제적으로 부요한 사람에서 가난한 사람까지지식적으로 많이 공부한 사람에서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여 한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의 권면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으로 전환됩니다다양한 연령층의 성도들과 특히 과부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디모데는 젊은 목회자이지만남녀노소 어느 누구에게나 권면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모든 권면은 정중히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교회는 큰 가정과 같습니다그러므로 가족을 대하듯이 구성원을 대하라고 권합니다.

⑴ 어르신을 대한 법(1a)

먼저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라고 권합니다늙은이(πρσβυτέρος)는 장로로도 번역되지만이곳에서는 연령적으로 나이 든 늙은 사람을 의미합니다늙은이에게 존경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입니다만약 늙은 사람들이 어떤 잘못이나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심한 말로 책망하지 말고마치 아버지를 대하듯이 부드러운 말로 권면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⑵ 젊은이를 대한 법(1b)

디모데와 비슷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고 하였습니다젊은이에게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접근해야 했는데책망한 일이 있으면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형제를 대하듯 하라는 것입니다성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자들입니다서로 권면할 일이 있을 때에도 다툼이나 반목질시(反目嫉視)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로써 해야 하는 것입니다.

⑶ 늙은 여인을 대한 법(2a)

늙은 여자에게는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라고 하였습니다이들에게도 늙은이를 책망할 것이 있으면 자기 아버지에 대하듯하라고 한 것처럼여자들에게는 자기 어머니를 대하듯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⑷ 젊은 여자를 대한 법(2b)

이제 마지막으로 젊은 여자를 대할 때는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권합니다젊은 여자는 처녀뿐 아니라 그다지 나이 많지 않은 유부녀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깨끗함은 단순히 성적인 정결뿐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불순한 정욕을 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합당한 예의범절로써 대하라는 말입니다절대적인 순결함으로 대할 것을 명합니다바울은 젊은 디모데가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 성적으로 유혹받지 않도록 특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인도해 나갈 때구성원들 가운데는 호의적인 성도가 있고마주하기 싫은 대상도 있을 것입니다그렇다고 편파적으로 대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지도자들은 모든 성도들을 향해 한결같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그러므로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과부에 대하여(3-8)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머리는 주님이시고우리는 그 지체입니다그러므로 머리되시는 주님의 인도에 따라 움직여야동시에 각각의 지체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연약한 성도들을 도와야 하지만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당시 에베소 교회 내에 당장 시급하게 요구되며 유의해야 했던 사역은 과부들의 처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3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4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3-8)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였습니다바울은 교회 내에 있는 과부들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그 뒤각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⑴ 참 과부에 대한 구분법(3-4)

바울은 과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합니다그만큼 교회 안에서 과부들에 대한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성경에서 과부(寡婦)’는 고아와 이방인’ 그리고 나그네와 함께 힘없고 가난하여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신명기 10:18; 24:17; 시편 68:5).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의 대상입니다그러므로 그들은 보호하는 것은 고래(古來)로 사회 문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그것은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또한그들을 공동체의 그늘 속에서 구제하고 보호해야 했습니다사도행전 6장에서 보면교회는 이미 과부들에게 자비의 손을 뻗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사역하는 당시에도 과부들에 대한 사역은 공동체에서 가장 주요한 과제 중 하나였고이것은 상당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먼저참 과부와 그렇지 않은 과부를 구별하도록 합니다일반적으로 과부는 남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여인입니다그들 중에도 참 과부는 실제적으로 남편을 여이고 도움이 필요한 여인을 의미합니다남편은 죽었지만아직 부양할 자녀들이 있는 과부들을 구별했습니다구별된 과부들을 명부에 올리고참 과부로서 존대하라는 것입니다이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하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과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 따로 일곱 집사를 택하여 저들을 구제하는 제도까지 마련되었습니다(사도행전 6:10). 때로는 과부를 돕는 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므로 교회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에 대한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대하라(τιμαω)는 예의를 갖추어 존경한다는 뜻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과부의 명부에 올라갈 자격이 있는 과부를 명부에 올려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을 존대하는 것입니다과부의 명부에 올라간 자들은 재정적 지원을 받는 대신 교회에서 적당한 봉사를 하도록 했습니다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아보고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을 주로 감당했습니다.

홀로된 과부라고 해서 무조건 다 과부의 명부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바울은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합니다과부이긴 하지만 가정이 재산이 있거나혹은 자녀들이 있다면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기 부모를 부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궁핍한 사람을 부양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교회나 국가가 아니라 가족에게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가족이 먼저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가리켜 효를 행하여라고 번역했는데원래는 경건을 행하는 것이란 뜻입니다그리스도인들에게 경건한 삶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자신의 책임을 다 하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⑵ 참 과부는 하나님께 헌신된 자(5-8)

① 참 과부의 자격(5)

바울은 참 과부의 자격에 대해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첫째참 과부는 외로운 자입니다둘째참 과부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밤낮 기도하는 자입니다.

먼저 외로운 자란 남편과 사별했을 뿐만 아니라아무 친척이나 가족 없이 홀로 남은 것을 의미합니다이러한 과부는 오로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 기도하는 자들입니다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임을 증명하는 표적들 중 하나는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② 참 과부가 아닌 자(6)

모든 과부가 그러한 경건한 섬김에 헌신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헌신된 과부가 있는 반면에어떤 과부들은 자신의 과부 된 것을 성적 향락(σπαταλω)’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향락을 즐기는 과부는 대부분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가진 자들이라 간주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가난해서 매춘과 같은 향락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향락에 빠진 자들을 가리켜 살았으나 죽은 자들이라고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이것은 향락을 즐기는 것이 어떤 심각한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③ 참 과부에 대한 바른 교육(7-8)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고 권고합니다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과부의 명부에 관한 교훈을 전해 주기를 원했습니다바울은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과부의 명부에 관한 교훈을 전해 주기를 원했습니다이 언급은 다소 모호하지만교회의 과부들의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일 옳지 못한 여인들이 명부에 포함되면 그들의 문한한 생활로 말미암아 온 교회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언급했던자기 가족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합니다만약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버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불신자들보다 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불신자들도 기본적으로 자기 가족을 돌봅니다바울은 가족을 돌보아야 할 마땅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경건이라고 설명합니다만약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믿음을 버리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을 해나갈 때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으로만 집중하는 사역은 금불입니다사역자도 사람인지라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에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러한 행동은 교회를 부흥시켜나가는데악영향을 키치는 것입니다사역자는 항상 공평해야 합니다그래야 교회가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젊은 과부들에 대한 태도(9-16)

우리는 약자는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막상 구제사역을 하다보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구제품이 약용되는 경우를 마주하게 됩니다선한 동기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악한 행동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래서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여러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됩니다그렇게 실수하지 않도록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9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10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11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12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13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9-16)

내부적인 교회의 사명은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당연히 고아와 과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야 합니다과부들에게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이곳에서는 교회에서 지원을 받을 과부들의 명단에 오를 자를 설명합니다.

⑴ 과부의 명부에 올릴 수 있는 사람(9-10)

과부라고 해서 모두 명부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바울은 명부에 올릴 수 있는 참 과부의 자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 가지 기준을 설명합니다기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먼저나이가 육십을 넘고다음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라야 하며마지막으로선한 행실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① 나이

나이가 60세 이상 넘어야 할 이유는당시로서는 고령이었지만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말라는 11절 이하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② 한 남편의 아내

그 동안 생활이 방탕하지 않고 정결한 삶으로 가정에 충실한 여인을 의미합니다그 과부들의 경건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습을 보여준 삶을 의미합니다.

③ 선한 행실

바울은 경건한 여자를 특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 요소를 나열합니다선한 행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10절에서 다섯 가지의 항목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

2)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3)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

4)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

5) 그 외의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것 등입니다.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아마도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먼 여행에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행하는 겸손한 섬김의 모습입니다선한 행위의 증거가 있어야 과부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명부에 올라간 과부들에게 어떤 봉사의 일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젊어서 선행을 했던 자가 과부가 되어 주어지는 봉사의 일을 진실하게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⑵ 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이유(11-13)

바울은 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아마 바울은 과거에 젊은 여자들을 과부의 명부에 올렸다가 많은 문제가 일어난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재혼함으로 주께 했던 헌신의 맹세를 배신하고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교회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지만 과부 개인에게도 믿음을 배신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됩니다.

둘째젊은 여자가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었습니다과부는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돕고 섬기는 일을 감당했습니다그러나 젊은 여자들은 봉사의 일에 충실하기보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들었던 사적인 일을 이 집 저 집에 소문내고 다녔을 것입니다아마도 젊은 여자들이 나이든 여자들에 비해 경솔하여 함부로 말을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그러한 행위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⑶ 시집가서 아이를 낳게 하라(14-15)

젊은 과부들이 한가하게 돌아다니면서 험담이나 하고 수다를 떠는 것보다 재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가정을 돌보는 것을 선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미혹하고 죄를 짓게 하여 비방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입니다바울은 이미 어떤 여자들은 사탄에게 넘어갔다고 말합니다사탄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정욕으로 인한 성적인 범죄에 빠진 것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11절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에 대한 언급과 14절의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사탄에게 비방당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라는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사탄에게 돌아갔다는 것은 성적인 범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따라서 젊은 여자는 과부의 명부에 올리기보다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한 일입니다.

⑷ 먼저 과부의 친척이 도움(16)

바울은 과부에 대한 마지막 교훈은 재산을 가진 믿는 여자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과부 친척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그들이 도와주고 교회에 부담을 지우지 말라고 명합니다교회는 참 과부를 도와주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유혹으로 불안한 젊은 과부들은 제외하고신실한 생활과 선행으로 칭찬을 받는 나이든 과부들을 선택해야 했습니다그 명단에 오른 자들은 도움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기도로 돕는 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또 과부들도 좋지 않은 행실로 인해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도록 지도자들은 그들을 바르게 잘 가르쳐야 할 책임 있음을 권고합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돕지만 그 원칙과 기준을 잘 정해서 도와야 합니다또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도 공동체 안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여 공동체를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비록 약한 과부의 신분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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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4-01)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

디모데전서 4장 1-16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자신이 전한 말씀과 자신이 제시한 성도다운 삶의 첫 번째 모범과 증거가 바로 자신부터 나타나야 합니다다시 말하면가르친 것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이 그의 권위와 그가 전하는 말씀의 신실성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니라는 거짓이란 사실을 강조합니다(1-5). 디모데가 복음의 진리에 합당한 일꾼이 되라는 권면입니다먼저 디모데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열심히 경건훈련을 해야 합니다(6-10). 그리고 성도들을 잘 가르치고 그들에게 본을 보이는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합니다(11-16).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1-5)

교회는 진리를 굳게 붙들고 바르게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진리를 굳게 붙잡지 않으면언제든지 진리를 왜곡하는 사단에 의해 교회의 믿음이 위협을 받습니다거짓의 영인 사단은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공동체에 침투하여 연약한 지체들을 꾀어내어 믿음에서 떠나도록 만듭니다.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1-5)

선생의 가르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바울은 이제 이단에 대한 경계와 성도의 신앙 교육과 관련된 목회 지침을 가르칩니다그리고 영적인 아들 디모데 개인에게는 경건의 연습하여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라고 명령합니다.

⑴ 예고된 거짓 교사들의 등장(1-2)

바울은 성령의 경건한 복음의 비밀(3:16)에 대해 가르친 후에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가르침에 대해 지적합니다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란 그가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 이리떼와 같은 거짓 교사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아마도 성령께서 바울에게 계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에베소에 남을 디모데와 헤어지면서 후일에’ 나타날 것이라고 전해준 것 같습니다복음이 매우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반대되는 악한 세력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했던 것입니다.

그 거짓 교사들에 대한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첫째그들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간 자들(1)입니다거짓 교사들이 믿음에서 떠났다는 것은 진리를 배교(背敎)한 것입니다원래는 그들도 복음을 받았고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임을 암시합니다그들은 믿음에서 떠났지만 몸은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에게 교육하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따랐고자신들은 믿음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위치에 두고 그 지식을 추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이 가르침을 따른다고 합니다미혹하는 영이란 속이는 영을 말하는데마귀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거짓 교사들의 거짓말하는 특성을 말해줍니다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정죄하면서 그들의 속이는 특징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믿음 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고린도후서 13:5).

두 번째 그들의 특징은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2)입니다화인을 맞다는 다른 성경 어디에서 쓰이지 않는 독특한 어구입니다거짓 교사들을 단순히 귀신을 추종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귀신에게 속박된 노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는 것은 당시 노예들에게 불에 달군 쇠로 낙인을 찍어 주인의 소유물임을 표시했던 관습을 가리킵니다거짓 교사들은 화인을 맞아 귀신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이 화인을 맞음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신경은 죽고 이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그들은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자시 행동이 그릇됨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디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에베소서 4:19). 양심이 화인 맞은 결과는 자신들이 가르치는 교훈과 다르게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거짓 교사들은 단순히 무지해서 자신들이 배운 거짓 교훈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 거짓말로 가르치게 된 자들입니다.

⑵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3a)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이것 또한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첫째거짓 교사들은 혼인을 금했습니다둘째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이 두 가지는 경건을 금욕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던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금욕주의의 전형입니다영지주의는 정신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생각으로 욕망을 제어하고 고결한 삶을 힘쓰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생격난 것입니다그들은 육체적인 성관계를 부정하고 악한 것으로 보았기에 금욕과 독신을 강조했습니다(고린도전서 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혼인을 악하다 하지 않습니다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세기 2:18)고 하셨습니다.

어떤 종류의 음식을 금했던 것은 언뜻 보기에 유대 정결법과 관계 것처럼 보입니다(골로새서 2:16). 그러나 영지주의에도 음식을 금하는 가르침이 있었으므로이것은 유대적인 전통과 관계된 것만은 아닙니다(골로새서 2:21-13). 여기서 식물이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각종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고기를 의미합니다우상에 받혀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바울은 식물이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니 속되다고 생각하지 않고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로마서 14:14; 고린도전서 8:7).

바울의 의도는 어떠한 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금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모든 것들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결코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로마서 1:21).

⑶ 진리를 아는 자들(3b-5)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모든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한 것입니다모든 피조물이 다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물질적인 세상이 열등한 신에 의해 창조된 악한 것이라는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사상과 대조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이 선한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을 창조의 질서를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모두 선한 것이 됩니다식물의 경우나 혼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금해야 할 음식이란 없습니다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의 정도에 지나치게 취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몸을 균형 있게 성장유지시켜 줄 것입니다.

5절은 이해하기 다소 모호합니다특히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것을 마치 부정한 음식도 말씀과 기도를 하면 거룩하게 된다는 주술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아마 바울은 여기서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식물은 무인격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한 성질을 지니지는 않습니다그러나 그 같은 음식물을 먹는 사람이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먹는다면 그 식물은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참된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먹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수되던 음식도 정결한 음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에는 혼인이나 어떤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금욕주의의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나처함에 빠뜨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릴 것을 권하면서 진리를 선포합니다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든 것이 선한 것입니다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것들입니다.

 

경건이 이르길 연습(6-10)

훌륭한 연주가의 연주나 탁월한 체육인들의 경기 장면을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그렇게 훌륭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서 온다는 결과입니다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꾼도 마찬가지입니다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거룩한 자기 관리 훈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6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6-10)

앞 단락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특징에 대해 지적한 후이제 복음의 진리로 형제들을 잘 가르치라는 명령을 합니다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성도들이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참 교사로서 목회자가 가져야할 목회 지침에 관해 언급합니다.

⑴ 복음의 진리로 형제를 깨우치라(6)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권합니다.

형제를 교육함에 깨우치다(ποτίθημι)라는 뜻은 강압적인 주입식 명령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의 특징으로 충고나 권고’ 또는 제의’ 등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이러한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선한 일군이라고 합니다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 행하는 충성된 일꾼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디모데후서 2:3). 하나님의 일군들은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양육을 받아야합니다그 내용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인데이것은 복음과 성경적인 교훈을 의미합니다.

형제들을 잘 가르치는 것을 그 자신이 복음 안에서 잘 성장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합니다디모데에게 형제들을 잘 가르치라고 명령함과 동시에 바울은 디모데 자신의 성장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형제들을 잘 가르치는 것은 디모데 그 자신이 잘 성장하는 것입니다즉 디모데가 좋은 일꾼이 되어 형제들을 잘 가르치면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⑵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7-8)

바울은 좋은 일군을 운동선수가 자신을 훈련하는 것에 비유하여 경건의 훈련에 대해 설명합니다경건의 훈련이란 첫째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다음으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입니다먼저 버려야할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인데앞에서 말한 신화와 끝없는 족보(1:4)와 같은 말로서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에 반대되는 의미입니다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로 간주됩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경계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는 연습입니다일군들이 추구할 경건(εσέβεια)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존경과 경외의 마음을 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바울은 이 경건을 연단하라(γυμνάζω권고하는데연습이란 운동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려고 연습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연단과 경건의 연단을 비교하면서 경건의 연단이 유익함을 강조합니다거짓 교사들은 거룩함을 위해 많은 육체 연단즉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것과 같은 금욕 생활을 운동선수들의 연습처럼 노력했습니다운동선수들이 승리를 위해 끝없이 연습하면 한 만큼 유익한 것처럼 육체의 연단도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유익은 있습니다그것은 경건의 연습에 비해 신체의 연단은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유익이 있을 뿐이니 곧 적은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경건 생활에 힘써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금생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리고(마태복음 6:33,34), 죽어 내세에서도 영생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마가복음 10:34). 즉 육체의 연단은 현세에서만 건강하게 사는 약간의 유익을 가져올 것이지만, ‘경건의 훈련은 금생과 내세에 약속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⑶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진리의 말씀 이해(9-10)

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관용적인 목회서신의 특징이 될 만큼 자주 나옵니다(디모데전서 1:15; 3:1; 디모데후서 2:11; 디도서 3:8). 이 말은 8절에 내용을 받아서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진실하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하며 힘쓰고 있습니다디모데도 바울처럼 이 복음을 위해 전력하는 것으로 수고하고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본이 되라(11-16)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더 확실한 교육이라는 의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가르침을 십자가 위에서 몸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예수의 제자된 목회자들은 백 번의 설교보다 한 번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을 통해성도들에게 바른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1-16)

대체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의 미성숙과 경험부족을 지적하기가 쉽습니다에베소 교회를 시무했던 젊은 디모데에게도 연장자들이 보기에 부족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⑴ 가르치는 것에 본이 되라(11-13)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11)고 지시합니다이것들은 그 동안 디모데에게 준 교훈을 가르쳐준 구원의 도리와 경건 생활에 모든 교훈을 의미합니다이것은 목회자로서 마땅히 자녀야 할 권위에 입각해 교인들을 양육하고 지도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젊은 디모데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며에베소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연소함(νεότητος)이란 군대 갈 나이부터 40세 정도까지 나이 먹은 사람을 의미합니다이전에 디모데를 고린도교회에 보낼 때도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업신여기지 말고 잘 영접하라고 권했던 적이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6:11). 여기서는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디모데가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바울은 특별히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예배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디모데는 이렇게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그들에게 본을 보임으로 성도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⑵ 전심전력하여 진보를 보이라(14-16)

말씀을 가르칠 때는 말씀의 권위 나타내어 성도들이 순복하도록 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보다 더 큰 진보를 보여야 합니다진보를 보이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는 안수를 받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열심히 사용해야 합니다전심전력을 다해 너의 성숙을 보이라는 것은 받은 은사를 그대로 두지 말고 개발하여 더 큰 진보를 보이라는 것입니다디모데가 받은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입니다그는 가르치고 자신이 가르친 대로 행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바울은 16절에서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가르침과 행하는 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성도들은 가르치는 자의 말보다 행위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목회자에게는 바르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가르친 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그런 부족함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했기에디모데는 여러 면에서 더 철저히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습니다디모데의 발전과 성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에베소 교회 전체를 힘 있게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지도자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은 그가 이끄는 공동체 전체를 매우 든든히 세워 갈 것입니다교회 지도자의 영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잘 깨닫고잘 가르치는 것에서 나옵니다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만특히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데서 발전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치고 명하는 자일뿐 아니라 성도들 앞에서 본을 보이고 성숙함을 드러내어 증명하는 자여야 합니다세상의 교훈을 따르지 말고오직 진리와 경건함에 마음을 두며 살아가야 합니다그리하여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모두 구원에 이르는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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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3-02)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

디모데전서 3장 8-16


성경은 이직분제즉 장로와 집사 직분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오늘날 서리집사 제도는 후대의 교회가 필요에 따라 만든 직분입니다. (안수)집사의 자격을 보면 장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역할은 다르지만 비슷한 자격을 요구합니다교회 내에 직분에 대한 역할을 감독을 아버지에 비유하면집사는 어머니의 역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으로 감독을 세우는 것만큼이나 집사를 세우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자격에 이어서 집사의 자격에 대한 핵심은 복음의 진리에 합당한 경건함입니다감독과 집사는 성도들에게 경건에 대한 모범이 되어야 하고 교회를 경건함으로 이끌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집사의 자격에 이어서 강조하는 경건의 비밀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으로 제시합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한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교회의 조직을 당부합니다.

 

집사의 자격(8-13)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따라서 교회는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며세상의 거짓 진리와 맞서 싸우는 진리의 수호자이자 진리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그 역할들은 할 교회에 일꾼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며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나가기 위해 순종하며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삶이다.

8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8-13)

성경에서는 직분을 감독과 집사’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바울은 교회를 바르게 세워 갈 수 있도록 감독에 이어 집사의 직분에 대해 권고합니다. ‘집사’(διαχόνους)는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식사 때 시종 드는 사람들을 의미로 사용했습니다기본적으로는 집사의 자격에서도 감독의 자격과 비슷합니다그러므로 집사는 감독을 도와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감독의 자격에서 언급됐던 단어들이 반복됩니다기능적인 측면보다 인격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⑴ 집사의 자격(8-9)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워가는데 디모데에게 집사의 자격을 제시합니다집사의 자격 요건은 앞서 언급한 감독의 자격 요건과 유사합니다자기 절제 능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고공동체 앞에서 책임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집사가 가져야할 자격으로 먼저정중하고라는 소개합니다이 말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성품을 말합니다.

다음 자격으로 일구이언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이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이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저 사람에게는 다른 말을 하는 이중적인 언행이 아닌 정직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말과 관련하여 감독은 잘 가르치는 자라야 한다고 했는데집사는 일구이언하지 않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이것은 집사 직분이 성도들을 방문하면서 봉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집사는 항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같은 말을 하는 진실한 자라야 합니다그리고 술에 인 박이지 않는 것은 술을 많이 마셔서 노예가 되는 사람을 말하는데감독의 자격과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란 사람입니다집사는 불의한 이익을 위해서 진리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감독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야 하듯이집사도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라야 합니다돈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집사에게 더 강도 높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아마 집사들이 재정을 맡아 사용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재정을 맡은 자들은 특별히 부당한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라야 합니다가룟 유다는 재정을 맡았다가 부당한 돈에 눈이 어두워 스승을 팔아먹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집사들은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정직하고 신중하여 믿을 만한 자라야 합니다동시에 영적인 측면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잘 깨달아 아는 자라야 합니다.

집사들이 그 대신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집사는 깨끗한 양심 가운데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9)로 세우라고 합니다믿음의 비밀이란 복음의 깊은 진리를 깨달은 자를 말합니다.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원래 감추어진 것인데믿는 자들에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구원의 비밀은 오직 믿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믿지 않는 자들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에 그것은 비밀입니다그러므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복음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깨끗한 양심을 강조하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아마 이것도 앞에서 말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됩니다거짓 교사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고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입니다마음이 바르지 않으면복음의 얼마든지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과 더불어 스스로 항상 깨끗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⑵ 자격을 시험한 후 직분을 맡길 것(10)

바울은 집사를 세울 때도 신중히 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감독을 세울 때도 새로 입교한 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집사를 세울 때도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라고 권고합니다자격에 부합하는 인물인지 먼저 시험한 후에 세워야 한다고 권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험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세운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사도들은 먼저 성도들의 대표자로 칭찬받는 사람들을 추천할 것을 부탁합니다이러한 추천의 과정을 통해 자격을 시험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자격을 시험한 후에 책망할 만한 일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

책망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지만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칭찬 받는 자’, 혹은 인정받는 자란’ 뜻입니다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기준은 다른 어떤 세속적인 기준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집사는 실천적인 행실과 도덕적인 수준과 영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자로 세워야 합니다.

⑶ 정숙한 아내의 남편(11-12)

여자들은 여성 집사를 가리키는 것인지아니면 집사들의 아내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11). 그러나 여자 집사든지 집사들의 아내든지직분과 관계된 자들은 이러한 자격을 갖춘 자라야 합니다.

감독의 자격을 설명하면서 감독의 아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집사의 아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좀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아마 이것은 나이가 들고 경륜이 있는 감독의 아내보다 상대적으로 젊고 신앙의 연륜이 짧은 집사들의 아내에 대해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사의 아내가 정숙해야 한다는 것은 8절에서 집사가 정중해야 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뜻입니다모함하지 않는 것에서는 특이하게도 마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모함하는 것은 마귀의 특징입니다절제하고 모든 일에 충성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된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아내를 둔 자들을 집사로 세워야 합니다감독의 자격과 마찬가지로 집사들도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를 잘 가르치고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합니다(12). 이러한 자격에 대한 설명은 집사들도 어느 정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에 봉사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⑷ 집사의 직분을 갈 감당하는 자들(13)

바울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자들이 얻게 될 유익에 대해 설명합니다그들이 얻게 될 것은 두 가지입니다첫째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둘째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아름다운 지위라는 말은 특별한 직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들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설 수 없습니다그러나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아름다운 자로 인정받는 자들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역할이 다르지만 감독과 마찬가지로 집사도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교회의 지도자들처럼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역시 모든 면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그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신실하신 본이기 때문입니다바울은 특히 그들에게 믿음의 비밀을 간직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비밀(14-16)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에 교회의 모든 소유권과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눈으로 볼 때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이지만하나님의 소유이며오직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신 데로친히 다스리시고 결정하시고 인도하십니다.

14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14-16)

바울은 집사의 자격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제 복음의 비밀에 대해 설명합니다그 다음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의 못된 가르침(4)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⑴ 에베소를 방문할 의도(14)

바울은 이 서신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이라고 먼저 운을 띕니다바울은 에베소 교회 초창기 힘들었을 때디도와 디모데 중에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습니다디도는 결단력이 있었지만반대로 디모데는 마음이 여렸지만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여린 디모데를 영적으로 힘든 에베소에 혼자 남겨둔 것은 바울에게 매우 부담이 되었습니다그 결과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항상 관심이 갔던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에베소를 방문하기를 원했지만(1:3), 항상 지체되었습니다지체되는 경우를 생각하여 목회 서신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직접 방문하기 전에 디모데에게 이러한 지침들을 서신으로 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아직까지 이러한 에베소의 문제들에게 대해 디모데는 너무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바울은 다음과 같은 의도에서 이 지침들을 서신으로 전했을 것입니다첫째본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말로써 충고하였던 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둘째바울이 디모데에게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수신자인 에베소 성도들로 하여금 디모데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하여 서신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⑵ 교회를 다스리는 청지기(15)

계속해서 바울은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청지기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집(οχῳ θεο)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러러보는 그리스도인 전체의 가족을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가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교회를 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 되는 가족들을 소유하고 계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면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권고합니다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계셔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바울이 이처럼 교회를 하나님의 소유라고 한 것은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이 지킬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그리고 기둥과 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는 진리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강조합니다.

⑶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16)

이 구절에서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합니다예수께서 우리에게 게시하신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참되게 헌신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경건의 본질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먼저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복음을 경건의 비밀로 표현한 것은 변증적인 의도가 내포된 것입니다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는데 영지주의 구원관은 비밀스러운 계시의 지식을 받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을 비밀이라고 합니다복음이 비밀인 것은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참된 진리의 비밀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복음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기독교 복음이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거짓 교사들은 경건한 자들이 아닙니다그러므로 참된 복음의 진리는 경건한 것입니다.

그가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는 것도 경건의 개념을 강조한 것입니다원래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킵니다교회를 성전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은 복음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성전인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이것은 교회의 기초와 성장은 복음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배척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떠받치는 것이 기독교 복음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그리고 영광으로 들어가심에 대해 말합니다(16). 먼저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에 대해 설명하는데이것은 영지주의에서 구원자가 육신으로 올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신 분이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부활하심에 대한 설명을 영으로 의롭다함을 받으신 것으로 묘사합니다여기서 육신적 죽음과 영으로의 부활을 결합하는데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육신으로 오셨던 바로 그 예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영지주의의 구원관은 육신에서 해방되어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구원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지 않습니다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를 간략하게 묘사합니다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비밀스러운 것입니다참된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은 거짓 교사들이 아니라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교회는 경건한 공동체입니다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이고진리의 전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그것은 성도들이 그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그런 성도들을 잘 섬기고 이끄는 집사들은 누구보다도 성숙하고 삶과 인격 모두에서 예수님을 반영해야 합니다복음의 비밀을 잘 간직한 자로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시고하나님의 가족을 위해 더욱 사람으로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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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3-01)


진정한 지도자의 조건

디모데전서 3장 1-7


어떤 지도자가 통치하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하거나 불행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나라의 미래는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지혜로운 지도자는 나라를 안정시키지만반대로 어리석은 지도자는 불안하게 만듭니다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면서 나라를 다스려 갑니다교회의 지도자들도 동일합니다어떤 목회자냐에 따라서 교회가 안정적이고 은혜스러워 날마다 부흥합니다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예배의 자세에 대해 가르친 후에이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할 자격에 대해 가르칩니다교회의 지도자의 자격을 개인의 인격가정생활신앙경력이웃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설명합니다교회의 지도자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의 중요성(1)

교회 안에서 목회자는 복종해야할 존재로 생각하고성도들이 목회자를 검증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지도자는 공동체가 세운 그 공동체의 한 구성입니다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신보다 공동체를 중시해야 합니다항상 소통을 통해서 지도자의 식견을 공동체가 듣고지도자는 이 공동체를 통해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듣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1미쁘다 이 말이여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1)

바울은 앞 본문까지 영광스런 성도의 삶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것에 대해 권면했습니다이제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는 방법에 대해 권고합니다에베소 교회는 세워진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기준이 필요했습니다또 한 가지는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활개한 상황이라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아무나 지도자가 되겠다고 자처해서도 안 되고엄격한 훈련과정을 통해서 지도자를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교회의 지도자인 감독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은 이 말은 믿을 만한 진실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이것은 다음 전개될 내용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관용구로 보아도 타당합니다바울은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중요한 교훈을 강조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목회 서신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1:15; 3:1; 4:9; 디모데후서 2:11; 디도서 3:8). 감독의 직분을 맡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격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감독을 세울 때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감독(πίσχοπος)은 헬라어로 교우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란 뜻으로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돌보는 직분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감독은 교회를 다스리는 직능과 더불어 교인들의 생활 전반을 보살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가톨릭에서는 주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나개신교에서는 장로(목사를 포함한)’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오늘날 개신교에서 장로는 목사장로’, ‘치리장로로 나눕니다, ‘목사도 넓은 의미에서 장로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감독의 직분은 개인적인 명예나 어떤 이권을 얻기 위한 위치가 아니라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직분입니다이러한 열망을 기초로 감독이 되려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마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면서 거짓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그들은 선생이 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그들은 불의하고 탐욕적인 자들로서 경건의 말씀을 이용하여 물질적인 유익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디모데전서 6:5). 바울은 강조하여 말하기를 선한 일에 대한 열망이 없는 자는 결코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합니다감독이 되려는 동기와 목적은 반드시 선한 일에 대한 열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어떤 특정한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온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모든 일들을 통칭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목회서신에는 같은 단어가 6회 나옵니다(디모데전서 2:10; 디모데후서 2:21;3:17; 디도서 1:16;3:11). 결국 선한 일이란감독은 전적으로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하지만감독의 선한 일은 교회를 모두 책임 맡아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돌아보며 각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모한다 함이로다는 이것은 감독의 직분을 세상적인 명예와는 구별된 거룩한 목적곧 하나님의 영광과 긴밀히 연관된 직책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2:31; 14:1). 당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외부로부터 오는 핍박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복음 파괴 등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감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야 했습니다교회를 돌보는 일에 반드시 철저한 헌신과 자기희생이 요청되어졌던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직제화(職制化)하고 교권적이 되면 이와 같은 본연의 성격을 잃어버리기 쉬운 법입니다즉 그 같은 직분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 직분임을 알고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수고와 봉사해야 합니다절대로 감독은 높은 교권적인 위치에서 다른 사람 위에 굴림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직분입니다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오직 섬기며 봉사하는 직분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명의식이 없으면서하나님의 사역을 해간다면 그것은 죽을 맛일 것입니다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과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처럼 넘쳐야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교훈을 오늘날 교회 안에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입니다중직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그 동기가 선한 일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할 것이며중직자가 된 후에도 이러한 열망을 잃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감독의 자격(2-5)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특히 영적인 공동체는 더욱 그렀습니다따라서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택정하셔야 하고공동체는 그 하나님의 뜻을 잘 반영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로의 기준을 따라서 잘 선정하고 또 그런 장로로 양육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2-5)

바울은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영적인 지도자가 바로 서야함을 권합니다이것을 알았기에 지도자의 삶에 대해서 교훈합니다바울은 영적인 지도자인 장로의 자격에 대해 몇 가지 거론합니다그런데 이러한 덕목은 디도서에서도 제시되어 있습니다(디도서 1:6-7). 감독은 선한 일을 힘쓰는 자이므로 덕행의 전형이어야 하며교회 안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비행(非行)이 없어야 합니다.

⑴ 일반적인 품성(2-3)

바울은 감독이 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감독이 될 수 있는 인격적인 자질에 대해 설명합니다여기서 설명하는 감독의 자질은 대단히 고상한 수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질입니다바울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감독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감독이 될 수 없는 자질에 대해 설명합니다.

① 긍정적인 자질(2)

감독으로 긍정적인 자질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고신중하고단정하며나그네를 잘 대접하고가르치기를 잘하고관용하는 자라야 합니다.

먼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집사의 자격과도 관련하여 요구되고 있는 것으로서(12) 성적으로 자유분방하여 일부다처로 여러 아내를 둔 자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반드시 결혼한 자라야 한다거나 이혼한 자는 안 된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그보다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반대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바울도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독신이었으며과거에 결혼했다가 이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절제하고 신중하며 단정한 것을 지적합니다이것들은 비슷한 자질로서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가 가능한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절제(νηφάλιος)는 세상적인 모든 욕망을 제어하는 중에 영적으로 깨어있는 진지한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그리고 신중은 앞선 절제와 비슷한 의미이지만모든 일에 조심하며 깊이 생각하는 심적 자세를 의미합니다(디도서 1:8;2:2). 그리고 단정은 신중은 내적인 자세를 의미한데, ‘단정은 외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즉 의복이나 행동을 단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은 선한 일에 대한 대표적인 예입니다당시는 교통이나 숙박시설이 발달되지 않아서 여행자들이 어려움을 치렀습니다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나그네를 잘 대접하지 않는 자가 선한 일에 열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잘 가르치는 것은 감독의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특히 거짓 가르침이 많은 시대에 잘 가르치는 것은 감독의 필수적인 자질입니다이것은 단순히 말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자신의 믿는 도리를 분명하게 밝히는 능력을 뜻합니다.

② 부정적인 자질(3)

바울은 감독이 될 수 없는 부정적인 자질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다른 사람들로부터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있는 자는 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술에 중독된 것이나 취해 인사불성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디도서 1:7). 바울은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완전히 죄악시한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디모데에게 건강을 위해 술을 조금씩 마시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디모데전서 5:23). 감독이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술에 취해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구타하는 사람은 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다른 사람을 직접 폭행하는 것도 있지만언어로 폭행하는 것도 있습니다감독은 잘 타이르는 자가 되어야지구타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용하는 것은 다투지 않는 것과 대조적인 것입니다분쟁을 유발하는 자는 감독이 도리라고 수 없습니다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어떤 손해나 아픔도 감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돈을 사랑하는 자도 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단순히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만족을 느껴(시편 23:1) 하나님보다 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아니함을 가리킵니다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고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유익이 됩니다(디모데전서 6:6).

⑵ 가정을 잘 다스린 자(4-5)

계속해서바울은 감독의 일반적인 자질에 대해 설명합니다당시에는 잘 사는 가정은 자녀 교육을 대개 자기 노예들에게 일임했습니다부모들의 직접적인 훈계와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들 중에 풍기와 정신상태가 많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려 많은 이들에게 본을 보여야만 했습니다왜냐하면 자기 집을 잘 다스림은 교회의 다스림에 대한 모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감독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가정 교회가 많았던 당시에 가정은 작은 단위의 교회와 같습니다작은 교회를 잘 목회하지 못하면 큰 교회를 목회할 수 없듯이먼저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감독이 될 수 있습니다자기 가정을 어떻게 다스리고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손함은 자기 자신을 제재하여 위신과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남들을 엄격히 다르거나 혹은 자기를 높이는 행동을 가리키지 않습니다이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위신을 지켜 그 자녀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아비의 말에 순복하게끔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가정에 대한 중요성을 많이 강조합니다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은 감독뿐만 아니라 집사의 자격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3:12).

5절에 (         )가 쳐져 있습니다이 절은 사본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설명하는 구절로서 일종의 삽입 구절임을 시사해 줍니다감독이 직분을 받기 전에 가정 사정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결국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의 가정에 충실할 때에야 이것은 결국 자기의 가정에 충실할 때에야 비로소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지도는 내적인 면에서 자기 자신과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먼저 자신의 생활을 지도하는 일에서 실패한 사람이다른 사람을 지도하거나 이끄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직책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가정을 돌보는 일에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그래야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모든 사람이 받을 만큼 믿음직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모습(6-7)

감독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합니다새로 입교한 자는 열정은 칭찬 받을 수 있지만 너무 빨리 책임을 맡으면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감독은 교회 안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인정받은 사람은 온전히 삶과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권위로 다스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바울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6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6-7)

바울은 마지막으로 감독의 자격에 대해 신앙의 경력 측면에서 설명합니다먼저 새로 입교한 자는 감독으로 세우지 못하게 합니다새로 입교한 자(νεόφυτον)는 새로 심은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이런 사람은 최근에 개심하여 세례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너무 급격히 교회의 중책을 맡기면 자만심에 빠지거나 지나친 책임감으로 중단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특히에베소 교회는 새롭게 세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새로운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그래서 초신자도 종종 교회의 직책을 맡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적어도 교회의 중직인 감독에는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바울은 그 이유로 초신자가 중직을 받으면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세상에서는 다스리는 직분을 맡게 되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위치로 올라가지만교회에서는 감독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교회 사역을 세속적인 가치로 임하게 되어서어려움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더나가서 직분을 매우 세속적인 방법으로 진행함으로 거룩한 공동체가 쉽게 세속화가 될 수 있는 원인이 됩니다.

바울은 새로 입교한 자들이 잘못 사역하다가 보면,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표현합니다마귀(διαβόλου)를 사단을 위미합니다명확하지는 않지만초신자가 교만하여 사역을 잘못 행하게 되면자칫 잘못하면 마귀의 올무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초신자의 직분에 대한 교만을 지적한 후더불어 감독의 마지막 자격을 언급니다그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자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여기서 외인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지 못하는 자가 감독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교회가 바른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성도는 하늘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베드로전서 2:12).

다시 바울은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언급합니다칭찬을 받지 못하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비방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비방을 받으면 마귀가 쳐놓은 올무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마귀는 교회의 지도자를 올무에 빠뜨림으로 교회 전체를 타락시키려고 합니다마귀의 올무에 빠진 것에 대한 언급은 알렉산더와 후메내오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1:20). 감독은 교회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습니다감독에 대한 비방은 교회에 대한 비방과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장로들을 세우는 일들이 명예직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이러한 풍토는 교회의 직분이 점점 계급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맺습니다세상의 비방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얼마나 많은 비방들이 칭찬을 받지 못하는 목회자들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감독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칭찬과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다시 섬기는 지도자가 세워지는 새로운 흐름을 세워가야 합니다하나님의 공동체는 이런 자격 없는 사람들을 세워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검토한 후 영적 지도자를 세워야 합니다한마디로 감독은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교회 안이나 밖에서 모두 존경과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장로)는 그리스도를 사람은 사람이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공동체 안팎에서가정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며이 세상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거스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며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을 세워가는 길을 일을 감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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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2-02)


하나님을 바르게 공경하는 여자들

디모데전서 2장 9-15


옷차림은 그 사람의 맘가짐과 생각을 반영합니다그렇기에 행위와 복장은 결코 신앙과 별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자세를 반영합니다그래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외형적인 모습을 꾸미기보다 신앙고백에 일치하는 선한 행실들로 자신을 적절하게 단정합니다그런 의미에서 역도 장미란 선수는 여성으로서 아름다운 몸매를 포기했습니다하지만 실력으로서 세계적인 선수가 되고 나니깐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그녀는 믿음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공적인 가르침에 열심인 여자들에게 명령합니다앞에서 남자 성도들에 대한 선한 싸움을 언급한 후(2:1-8), 이제는 여자 성도들이 어떻게 선한 싸움을 해야 하는지 바른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그들은 가르치려 하지 말고 조용히 배워야 합니다또 남자들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조용히 가정에 충실하며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그것이 성도들에게 경건한 삶입니다.

 

외모보다 선행으로 단장(9-10)

아름다움은 화려한 장식이나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진실한 아름다움은 선한 행실에서 나옵니다역사 이래로 여성들은 자신을 꾸미는 데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살아갑니다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꾸며가려면 거울 앞에 서있는 시간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은 더 많이 가집니다.

9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9-10)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에베소의 남자 성도들이 공식예배에 참석할 때다투지 말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하나님의 예배를 거룩하게 인도해 나가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이어서 디모데에게 여자 성도들도 똑같이 거룩한 심령을 가지고 공중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⑴ 단정하게 단장함(9)

바울은 남자에 대한 권면에 비해 여자에 대한 권면은 훨씬 길고 구체적입니다이것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본문에서 여인들의 옷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야 함을 말함으로써 예배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자들의 옷차림과 치장에 대해 지적합니다그는 아담한 옷을 입으며라고 권고하는데그것은 적당한 옷차림으로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입으라는 뜻입니다분수와 환경에 맞지 않는 치장을 하여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은 여자의 미덕이 아닌 것입니다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마음가짐은 정결함과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요구됩니다(요한복음 4:24).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내면적 마음가짐보다 주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외모에 더욱 신경을 써 자기 분수에 지나친 치장을 한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가서 여자의 2대 덕목으로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라고 권고합니다당시에 디모데가 시무한 에베소 교회는 여자들이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외적인 화려함에 더 치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소박함(σδος)은 여자다움을 잃지 않는 현숙함을 뜻하고정절(σωφροσύνης)는 마음의 건전함과 육체적 순결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격동하는 정욕이나 혈기를 제지하여 도덕적 균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교회 안에 여성들은 이러한 2대 미덕 소박함, 정절으로 자신들을 단장하라고 권고 합니다이것은 예배에 참석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옷치장을 하는 행동은 헌신적인 신앙과 거리가 멉니다.

남자에게 분노와 다툼 같은 혈기가 있다면반면에 여자들은 허영에 쉽게 빠지는 것이 단점입니다그래서 이제 바울은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고 명합니다땋은 머리는 여자들의 일상적인 머리 모양이지만여러 가지 장신구로 금이나 진주는 머리단장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각종 장신구로 화려하게 땋아서는 장식했습니다에베소 교회에서 부유한 여인들이 있었고그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장식과 값진 의복으로 치장하고서 교회에 왔던 것 같습니다분수에 지나치게 치장할 때 사람들의 주목을 끔으로 인해 그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적대의식을 부각시키게 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당시 에베소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는 여인들이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고 남자들을 유혹하였습니다이러한 악한 문화가 종교라는 개념으로 기독교 안에까지 들어와서 성적으로 어지럽혔습니다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결코 아르테미스 신전의 여자 사제들의 사치스러운 차림새를 따르지 말 것을 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 안에서 여인들이 화려하게 꾸미지 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첫째는 가난하고 연약한 성도들에게 대한 배려입니다그리고 교회 밖에 사람들이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과 신전에 화려한 여인들을 동일시해서 기독교를 음란한 종교로 착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여성들의 단정함에 대한 권고를 베드로도 한 적이 있습니다(베드로전서 3:3).

⑵ 선행으로 단장함(10)

계속적인 바울의 권고에서 여성 성도들의 외적인 단정한 옷차림에 대한 권장하기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라면 자신을 선행으로써 단장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고 권고합니다선행은 성도의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값진 옷이나 장식품으로 단장하는 것보다 더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성경에서는 여성들의 선행을 하찮은 것을 다루지 않습니다(잠언 31:10-31; 디도서 2:3-5).

당시에 교리와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자선 행위의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인 선행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석이나 값비싼 옷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 있는 요소입니다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힘쓰는 여성 성도로서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장식품으로서 결과적으로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고 합니다여성 성도들의 품행이 단정해야 하는 그 수준이 일반 여성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데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성 성도들이 좋은 옷과 보석으로 자신을 꾸밀 수 있습니다중요한 것은 외면을 가꿈으로써 내면을 감추는 위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외형적으로 꾸며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여성의 본능이긴 하지만하나님을 공경한다고 공언하는 여성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선행이라는 무형적 장식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왜냐하면성도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의 믿음의 증거가 겉으로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성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착한 행실에서 베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신을 꾸미기 위해 수많은 물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성형하고 기능성 화장품을 구입하는데 많은 물질을 쏟아 붇습니다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여인들의 치장은 금과 진주가 아닌 선한 행실입니다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신중하며순결하고집안을 잘 돌보며선하며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치장하라고 합니다(디도서 2:4-5). 이것이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종용히 배워야할 여인들(11-15)

여성의 순종이나 복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일부 여권신장 단체에서 남녀평등 시대라고 분노합니다극단적인 사람들은 바울을 반여성주의자로 매도하여 비난합니다이 일이 어찌 바울의 책임이며 비난 받아야 할 일입니까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리에 따라 남녀가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충실할 때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정 공동체도 날마다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11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11-15)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성 성도들을 향한 두드러진 두 가지 내용을 소개합니다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여성 성도들을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분을 영화롭게 하기 원하며 그분을 위해 살고자 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록되어 있습니다진정한 성도로서 살아가는 여성은 공중 앞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행동에 주의합니다.

(1) 순종하고 배우라(11-12)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다른 종류의 여성들을 향해 권면합니다이번에는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성들에게 명합니다그들에게 모든 일에 순종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조용히 배우라고 명령합니다이런 권면은 바울이 여성들에 대해 어던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베소 교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바울 사도가 남성우월주위에서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다른 부분에서는 여자들의 가르침들이 많이 나왔고칭찬할 때도 있습니다사도행전 18장 24-28절에서는 여자들의 가르침으로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로마서 16장 1-3절에서는 복음 전도 사역에서 여자들과 동역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6장에서 겐그리아 교회의 자매인 뵈뵈를 훌륭한 일꾼으로 추천하기도 했으며 브리스길라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소개하기 했습니다그러므로 바울이 여성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관된 신념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후 1세기 당시에 유대사회나 헬라사회에서 여성들은 여러 측면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그나마 여성들이 가장 자유롭게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영역은 종교적 활동이었습니다그런데 여성들의 적극적인 종교 활동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서도 일부 회심한 여성들이 갑자기 경험하게 된 자유를 남용하기 시작했습니다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정학하게 교육을 받지 않는 미성숙한 상태에서 앞에 나서서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그 사람들에게는 사역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가르칠 만한 자격이나 자질을 갖추지 모했으며도리어 조용히 배워야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때라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과 남성을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습니다여기서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선언은 바울 자신의 판단과 결정으로 명령한 것입니다.

(3) 순종으로 배울 이유(13-14)

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여성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남성들을 주관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까그 이유를 이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첫째 성경적인 원리를 통해 가르칩니다아담이 하와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장자권처럼 법적 권리와 특권을 부여받은 근거가 됩니다두 번째는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하와의 범죄는 아담을 속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권위를 가로채고 옳지 않는 주도권을 행사한 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일과 아내가 남편을 주관하는 것을 연결하여 설명한비다사실 여성이 공적인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남편을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입니다그런데 바울은 이 둘을 서로 연결하여 마치 같은 문제인 것처럼 설명합니다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상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바울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베드로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베드로전서 3:1).

아내가 남편을 주관하면 안 되는 이유는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다름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여기서 먼저라는 말 자체에 주도권을 의미하는 첫째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기에 남성에게 리더십이 주어진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고나한 문제를 일반적인 문제로 확대하여 모든 여성은 모든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남편의 아내 사람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명한 것은그것이 인간 창조의 본성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즉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가장으로서의 리더십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이며그러한 욕구를 서로에게 충족시켜주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는 것은 왜 여자가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설명합니다(14). 이것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유혹에 잘 속아 넘어간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비다특히 거짓 교사들이 교묘한 속임수로 성도들을 미혹할 때에는 주로 여자들을 유혹의 대상으로 삼았으며또한 여성들이 잘 속아 넘어갔습니다(디모데후서 3:6). 여성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았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현대에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등하게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만 고대에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저의 없었기 때문에 남성들에 비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여성들이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잘 넘어갔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따라서 바울은 여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배우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는 사실을 인간의 최초 타락에서 논증하고 있습니다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이러한 설명은 바울 당시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여성이 잘 속아 넘어가므로 가르치지 말나는 명령이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바울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여성들은 무조건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지만바울의 교훈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바울의 권면의 원리는 이렇습니다남성이든지 여성이든지 판단력이 부족하여 잘못된 가르침에 잘 속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그들은 조용히 더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지 않은 채그릇된 교훈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먼저 조용히 교회의 질서를 따르며 조용히 듣고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먼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면서 배우려하지 않고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교회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함(15)

본 절은 이해하기 쉽지 않는 구절입니다헬라어의 어순대로여자들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만약 정숙함으로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한다면...’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이는 하와에게서 얻게 되는 교훈을 모든 여성 성도들에게 적용시켜 주원에 이르게 힘쓰도록 권면하면 있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여성 성도들에게 여성으로써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권합니다신전에서 남자들을 유혹하는 여인들처럼 방탕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를 믿는 여인들이 정숙하도록 경건한 삶을 살면서 출산을 이루어가면 경건한 자녀들을 해산합니다자신에게 맡긴 고유한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여성들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한다는 것은 경건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여인들에게 요구되는 정절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은 모든 신자들이 구원을 위해 갖추어야 할 성품입니다.


여성의 역할은 시대마다 조금씩 변했습니다하지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고유한 역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따라서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여성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하여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잘 보여줄 때 세상 앞에 선한 싸움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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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2-01)


중보기도 하는 사역자

디모데전서 2장 1-8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부터 새로운 고민이 생깁니다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대로 모든 일을 결정하면 되었습니다하지만 이제는 어떤 일이 생기면먼저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삶 속에 그리스도라는 방지턱이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우리는 작은 그리스도로 살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길을 바르게 따라 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1-4절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한일이라고 권하며, 5-8절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설명합니다. 8절은 모든 분노와 다툼을 버리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권면으로 마무리합니다모든 사람들특히 핍박자인 왕들과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분노의 마음이 아니라 거룩한 마음과 태도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1-4)

기도의 제목들이 많아질수록 영혼의 시야 또한 넓어집니다성도들은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기에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기도를 통해 능력을 얻는 것처럼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1-4)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던 바울은이제 기도에 대해 권면합니다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기도뿐입니다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 점점 교회가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그들은 모일 때마다 진리에 대해 논쟁이 끊임없이 행했습니다영적인 질서를 세워가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기도 밖에 없습니다.
⑴ 임금과 권세자들을 위한 기도(1-2)
디모데를 향한 권면에서 바울이 이제 강조하는 것은 기도입니다아마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활개 치는 상황에서무엇보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의 대상(1)
바울은 첫 번째 중요한 사항으로 말하는 것은 기도에 어떤 사람을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기도의 대상을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어느 한 사람을 빼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종류(1b)
바울은 기도에 대해 강조하면서 기도에 대한 표현을 네 가지로 사용합니다그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권합니다간구와 기도와 도고는 비슷한 용어라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단어들을 언어상으로 비교해 보면첫째간구(δέησεις)는 긴박한 상황에서의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을 의미합니다(히브리서 5:7). 둘째기도(προσευχάς)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뜻합니다셋째도고(ντευζεις)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디모데전서 4:5)를 의미합니다마지막으로 감사(εχαριστίας)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에 대해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행하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 바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 특별한 기도의 대상(2)
기도의 대상으로 특별히 임금들과 권세자들에 대해 언급합니다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도 특별히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바울이 특정하고 있는 임금들(βασιλέων)은 당시에 성도들을 핍박하던 네로 황제뿐만 아니라 지위가 낮은 분봉왕들도 포함합니다악한 통치자를 위해 기도라는 권고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입니다.
주후 1세기 당시의 상황에서 왕들과 권세자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주된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할 이유는바로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사실 성도들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속적인 권력에 대해 기도하는 일은 중요합니다왜냐하면 통치자들의 정책이나 결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권세자들을 위한 기도는 나라의 안녕과 사회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정부와 사회가 평안한 상태로 나아갈 때 성도들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할 모든 사람 속에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와 위정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어쩌면 그들은 교회와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고 적대세력일 수도 있습니다실제로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로마 황제나 각 지역의 분봉 왕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입니다구약의 예레미야도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7)라고 외쳤습니다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성읍을 위해서 힘써 기도하라고 했습니다그 성읍이 평안함으로써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⑵ 기도의 목적(3-4)
바울은 이제 권세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일이라고 말합니다모든 사람을 위한 선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그것은 하나님께서 흔쾌히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14).
기도의 목적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한 언급을 신학적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이것은 보편적 구원이나 제한적 구원과 같은 신학적 문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아마 바울은 소수의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의 영지주의적 구원관을 비판하는 듯합니다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지식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진리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구원자로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선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첫째그러한 기도를 통해 성도들이 경건하고 단정한 가운데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둘째성도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은 에베소 교회 안에 있던 거짓 교사들처럼 자기만 위한 것이 아니라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이 참다운 기독교 신앙임을 간접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기도까지도 개인의 욕심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하길 원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만 위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모든 사람을 품고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최고 지도자부터 연약한 사람들까지 품어주는 공동체입니다성도들은 모든 인류를 위해 기도할 때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고 안정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심(5-8)

만약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자신의 생각만 고집한다면공동체는 점점 어려워집니다단지 자기주장만 관철하려기보다는 먼저 기도하고 서서히 주장해야 합니다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갈 것입니다비록 기도가 연약하고느리게 보일 것입니다하지만기도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최선의 방법입니다.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5-8)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하라고 한 후에그리스도로 인도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자가 되신 것처럼성도들이 자기만의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이러한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로 부르심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⑴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오심(5-6)
이제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설명합니다먼저 개역개정 성경에는 γάρ’(왜냐하면)가 번역이 생략되었습니다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먼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신 예수 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전 우주를 총관하고 계신 분은 유일하신 절대자요 초월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과 은택을 받을 자가 단지 유대인이나 특정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로마서 3:22).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한 분으로서 그 어느 민족에게나 똑같은 관계를 가지시고 똑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반박합니다그들은 잘못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성도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그들의 영지주의 신관은 이원론적입니다영지주의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지고(至高)의 신이 있다고 보고조금 덜한 열등한 신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소개합니다여기서 사람이란 표현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참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이것은 영지주의의 가현설(假現說)에 대한 반대입니다영지주의에서는 구원자가 사람일 수 없습니다단지 사람처럼 나타났을 뿐 사실은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합니다그러나 우리의 중보자이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참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는 친히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입니다영지주의와 기독교 구원의 핵심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영지주의는 계시의 지식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그러므로 구원자는 계시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역할만 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 영적 지식을 소유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사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셔야만 했던 것은그가 대속적인 제물로 죽으셔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던 것이며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그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영지주의에서 구원자는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지만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그것은 선한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⑵ 바울은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7-8)
이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사역에 대해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7)고 소개합니다이러한 구원의 복음을 위해 전파자로서 사도로 세움 받았습니다바울은 내가 사도가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도로 세움 받았다고 수동태로 설명하는데이것은 그를 사도와 전파자로 세운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 세운 자입니다그것이 참말이며 거짓말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왜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까디모데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심이나 도전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왜 바울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야만 했습니까?
아마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한 번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거짓 교사들을 상대해야만 했던 젊은 디모데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디모데는 바울의 신임을 받는 제자였습니다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사도로 세움 받았다는 것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면그러한 바울로부터 세움을 받은 디모데도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디모데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갖고 거짓 교사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도하기를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생활 속에서 종일 기도해야 합니다모든 사람을 위하여즉 통치자와 백성들 모두를 위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주님과 더불어 교통과 교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그는 자신이 속한 곳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남자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화목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엄격히 명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배척하고 있었습니다이러한 분쟁이 종종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이러한 분쟁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 가운데서 종식되어져야 했습니다.
기도의 자세에 대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언급합니다성경에 소개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출애굽기 9:29; 열왕기상 8:22; 시편 63:4; 누가복음 18:11). 그러나 바울의 의도하는 기도는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는 손입니다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을 행하거나기타 범죄를 짓고 나서 더렵혀진 손을 듣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만일 그런 손으로 듣다면 하나님께서 돌아설 것입니다따라서 기도할 때는 몸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매우 연약해 보이고느리게 보일지라도가장 거룩하고 가장 선한 영적 싸움의 길입니다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 지는 일이 참다운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기도는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일입니다기도가 승리의 길인 이유입니다사사로운 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함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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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1-0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진 영적 군사

디모데전서 1장 12-20


당신은 삶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한 어떤 간증들이 가지고 있습니까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귀중한 간증들을 소유해야 합니다하나님을 미지근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뜨겁고 은혜가 있고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그러한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성도라고 한다면항상 영적으로 당신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예전 모습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핍박자이였던 자신을 믿고서, 이 복음을 맡겨주신 사실에 크게 감격합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은 까닭은 훗날 주님을 믿어 영생 얻을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의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도 자신 같은 죄인들을 상대할 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을 부르신 복음의 은혜와 능력(12-14)

하나님 안에서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없습니다복음에는 죄인을 회개시키고 그를 하나님 나라의 중심인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누구든 잘못한 사람을 벌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잘못된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그리고 사랑입니다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감동하여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2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2-14)

 

9-10절에서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만들어 내는 각종 불의와 죄악에 대해서 나열했습니다그리고 11절에서그는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선언했었습니다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바른 복음즉 복되고 영광스러운 복음에 소개합니다특히바울 자신이 받은 복 세 가지에 대해서 능력을 주신 복’, ‘충성되게 여겨주신 복 그리고 직분을 맡겨주신 복으로 소개합니다.

 

(1) 자신의 회심을 회상함(12-1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 설명합니다앞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야기된 모든 불의죄악에 대해서 나열했습니다(1:9-10). 그와는 대조적으로 바울 자신이 전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본문은 그 영광스런 복음에 대해 설명합니다그 복음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과거 자신의 불의함과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대조합니다과거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성도들을 박해하고 폭행하던 자였습니다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만큼 열성적인 복음의 반대자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런 바울을 변화시켜 복음의 일꾼으로 일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그는 오히려 자신을 충성되게 여겨 주시며 은사와 직분을 허락해주신 사실을 너무도 벅찬 복이었다고 고백합니다여기서 충성되이 여겨란 자신을 신실한 자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죽이려는 자를자신을 위한 순교자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바울은 그의 변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았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2)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14)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비방자요 핍박자요 그리고 폭행자로 예수님을 비방하고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온갖 방법을 통해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만큼 열성적인 복음의 반대자였습니다.

이런 핍박자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하나님께서 그를 자비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그러한 바울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칠 만큼 풍성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뿐만 아니라 그 은혜 가운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던 바울을 돌이켜 세워주시고그에게 능력을 주시고또한 충성할 마음을 주셨습니다더 나아가 사도의 직분도 맡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게 하셨습니다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울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위해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 중에 괴수였던 바울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바울이 알지 못하고 행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무지에 의한 죄에 대해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무지(無知)’와 위선(僞善)’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지식이 없이 범죄하는 것이지만, ‘위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범죄하는 것입니다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의 자식이라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위선자가 아니었습니다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했을 뿐입니다디모데전서 1:5에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에 대해 강조했는데바울은 무지했지만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아마 바울은 은연중에 선한 양심을 버린 거짓 교사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듯합니다선한 양심을 버린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암시하고 있습니다(1:19). 거짓 교사들은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했지만바울은 과거에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과거에 자신의 불의함과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정도로 큰 죄인이었습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열매만 보지 않으시고 죄의 과정도 보셨습니다범죄하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의 악한 의도가 있었느냐에 따른 것입니다바울은 이 과정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실수했던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오늘날도 그 사람이 부족해 보인다 할지라도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자신의 일꾼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를 구원한 하나님(15-17)

바른 복음은 자기 자식을 자랑하는 교사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 사람이며반대로 복음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히 썩지 않을 영광스런 것입니다그리고 끝없는 사랑은 잘못된 사람까지도 변화시키고 좋은 일군으로 만듭니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5-17)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한 후에 이어서 복음 그 자체의 구원하는 능력에 대해서 설명합니다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며자신을 변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소개합니다.

 

(1) 바울을 구원하신 목적(15-16)

 

사도 바울은 복음의 본질적 특징을 소개합니다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이 복음은 거짓 교사들의 헛된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미쁘다라고 고백합니다이것은 참되고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모든 시대를 위한 참된 것입니다당시 거짓 교사들은 특별한 영적 지식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일종의 엘리트적 구원관을 제시했습니다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즉 죄인을 위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동시에 복음은 개인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긍휼을 받아들려야 하는 것입니다이렇듯 복음은 우주적으로 제공되지만 개인적으로 받아들려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구원한 구원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이 복음은 거짓 교사들의 헛된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그것이 얼마나 믿을 만한 사실인지신실한 말씀인지 모든 사람들이 받아 들릴 만큼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 은혜를 가진 사랑인지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그러나 끝없이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바울의 삶은 이제 더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은혜의 사도가 되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려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일 뿐 아니라 복음을 믿은 결과를 보여주는 본보기였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지만사람들의 태도는 바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바울은 자신을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하며심지어 죄인 중에 괴수라고 소개합니다이렇게 강조한 것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인내하심에 대한 위대하심을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을 때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예수님의 핍박자였던 바울까지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면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16)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셨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의 죄인을 보시고도 인내하시고 죄값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드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맛보았습니다더구나 핍박자였던 자신을 충성되게 여겨 은사와 직분까지 허락해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자기처럼 핍박자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에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3)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17)

 

사도 바울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구원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세 가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샘플이 되었던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신성모독자였다고 주장했던 바울까지 긍휼히 여기고 구원하셨다는 것은그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세상 앞에 밝히 들어낸 사건이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3가지로 소개합니다첫째영원하신 왕입니다둘째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신 분입니다마지막으로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입니다하나님에 대한 이런 소개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만 주어지고그 구원은 썩지 않고 영원한 것임을 들어냅니다.

이 복음을 가지고 거짓 교사들은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는 방도로 사용했던 것을 나중에 비판합니다(디모데전서 6:5). 거짓 교사들은 썩어질 물질을 위해 썩지 아니할 복음을 버린 것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을 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들어내고하나님께서 영광을 더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거짓으로부터 진실로 변화되었습니다이 세상의 영광 받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그 결과 바울을 통해 수많은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고수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또 그 열매들이 지금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많이 맺히고 있습니다한 사람의 생애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처럼 위대한 역사를 이룹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당부함(18-20)

이 세상이 성도들을 핍박할 때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굴복하는 대신에 복음의 진리를 변호하고 성도다운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성도로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들어야할 무기는 총검이 아니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8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8-20)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디모데는 이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사역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싸움입니다거짓 교사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신을 높이고자 복음과 말씀을 도구화하는 사람들입니다하나님의 은혜를 지키고자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1) 믿음의 선한 싸움(18)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과 차별화되는 복음의 은혜와 영광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다시 디모데에게 권면으로 들어갑니다바울은 3-5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는데다시 그 권면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참된 교훈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중단되었던 디모데를 향한 권면을 다시 시작합니다.

건전한 교훈영광의 복음이 가르치는 그대로 살아가는 데는 싸움과 같이 치열합니다그러므로 바울은 싸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이 싸움은 자신을 세우기 위한 육신의 싸움과는 다릅니다믿음과 바른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자신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입니다이 싸움은 거짓 교사들처럼 분열을 일으키는 악한 싸움과는 달리사랑의 열매를 맺는 선한 싸움입니다그리고 이어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이곳에서 믿음은 개관적인 진리를 의미하고, ‘양심은 주관적이지만 도덕과 윤리를 의미합니다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합니다선한 싸움은 거짓 교사들의 악한 싸움과 반대되는 것입니다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악한 다툼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거짓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서 경건한 행위와 사랑을 행하는 것그것이 선한 싸움입니다바울은 선한 싸움에 대해 나중에 디모데전서 6장에서 또 언급할 것입니다첫째는 거짓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며다음으로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서 경건한 행위와 사랑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선한 싸움의 대상(19-20)

 

바울은 힘든 사역지인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지금까지 배운 말씀으로 믿음 안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옳은 일들을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합니다바울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한 거짓 사람으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지적합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처럼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이들을 사탄에게 내어준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이것은 그리스도 교회 밖으로 출교 조치를 내렸단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훈계를 받아서 신성모독 하는 일을 중단해 주길 기대한 것입니다또한 더 나가서 그들에게 범죄에 대한 대가로 처벌을 내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그들이 출교의 교훈을 받아서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믿음과 도덕을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믿음을 잃지 않으려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진리를 위해 싸워 나가야 합니다악과 싸우다가 악해지지 않고악한 방법을 쓰지 않으며또 다른 악을 만들어 내지도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피고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참 복은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긍휼히 여겨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과 능력과 직분을 허락해주신 은혜입니다은혜와 긍휼로 찾아오는 복이기에 참된 교훈은 겸손하게 합니다그리고 바울에게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삶을 완전히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이 복음을 맡은 자들은 착한 양심과 믿음을 지키며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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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01-01)


속지 말아야할 거짓 교훈

디모데전서 1장 1-11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은 참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우리는 올바른 것을 안다고 해서 올바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하지만 올바른 가르침은 항상 필요합니다복음에서 나온 교훈이 아니면 우리는 그 교훈에 따라서 그릇된 삶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잘못된 가르침은 병균과 같아서 그 가르침을 받는 개인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병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병균을 이기는 바이러스를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홀로 남겨둔 장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서남겨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그에게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를 물리치고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사명이라고 권합니다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열매를 잘 살피므로 항상 거짓 교훈에 휩쓸리지 않고 에베소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문안 인사(1-2)

성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확신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정의가 분명하지 않으면 혼란과 어둔 세상을 향해 싸워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사단은 가장 먼저 성도들의 정체성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1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사도 바울은 문안 인사에서 자기에 대한 소개와 이 서신을 받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또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소개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먼저 바울은 문안 인사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소개와 이 서신을 받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⑴ 발신자 사도 바울(1)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하면서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합니다또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소개합니다.

① 사도권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사도로 소개합니다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자의적으로 사도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거짓 선생들은 스스로 교회의 선생을 자처하며 바울의 사도성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② 사도의 근원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는 자신의 사도됨을 소개할 때 주의 뜻에 따라 되었다고 말하는데여기서는 명령을 따라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특이합니다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고 자신의 사도됨의 기원입니다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바울은 사도가 된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되었다고 말하지만이 디모데전서에는 특이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되었다고 말합니다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사도됨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사도적인 권위를 강조하고 싶을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디모데전서처럼 예수의 명령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감에 대해 강조하고 싶을 때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을 구주로 소개합니다그의 서신들에서 대부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소개하는데조금 디모데전서에는 특이하게 하나님을 구주 소개합니다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늘 구원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그 하나님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에서는 펼치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5년을 더 살다가 주후(AD) 60년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차로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바울은 스페인(당시 땅끝)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그런 후에 다시 소아시아 지역을 방문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그렇게 소아시아를 방문하는 동안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였습니다그리고, 67년에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도착하고 감옥 생활하면서 마지막으로 디모데 후서를 기록한 후에 순교를 당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를 방문하여 잠시 사역한 후에이 에베소 공동체는 거짓 교사들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디모데를 문제점이 많은 에베소 공동체에 남겨두고 마게도니아로 떠났습니다젊은 장로를 문제가 많은 곳에 남겨두고 떠날 때바울은 걱정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노심초사하면서 문제 많은 공동체를 바르게 지도할 수 있을지 기록한 서신이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⑵ 수신자 디모데(2a)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서신을 썼습니다그를 참 아들로 묘사합니다참 아들이란 표현은 거짓 아들을 염두하고 사용한 표현합니다이 표현은 친밀감의 표현인 동시에 디모데가 바울 복음의 참된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자신이 전도했던 교회를 돌아보는 길에 에베소를 방문했다가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곳에 디모데를 남겨 두고 마게도니아로 떠났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에 있어서 바울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가르침으로 미혹하던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디모데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사역을 통해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둘 때이 표현의 중요성은 더욱 들어납니다바울은 오직 디모데만이 복음의 참된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그는 디모데는 거짓 교훈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에베소의 공동체를 돌보는 귀한 사역을 받았습니다그에게 올바른 가르침과 경건한 삶을 통해 진리 가운데 잘 세워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⑶ 인사 내용 은혜와 긍휼과 평강(2b)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혜긍휼과 평강을 빌어주고 있습니다다른 성경과는 다르게 하나 더 긍휼이란 단어가 첨가 되어 있습니다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인사말로 사용했습니다(고린도전서 1:3; 고린도후서 1:2; 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빌립보서 1:2; 골로새서 1:2; 데살로니가전서 1:1; 데살로니가후서 1:2; 디도서 1:4; 빌레몬서 1:3). 그러나 본문에서는 긍휼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이처럼 긍휼이 서신의 인사말에 언급된 경우는 본서 외에 디모데후서 1:2 ; 요한이서 1:3 ; 유다서 1:2에만 해당됩니다긍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상황을 지배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위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긍휼은 죄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여 항상 새롭게 합니다한편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구원의 선물이며평강은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결과입니다이렇듯 모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께로서만 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참된 아들로 묘사합니다. ‘참 아들이란 표현은 친밀감의 표현인 동시에 디모데가 바울 복음의 참된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둘 때 이 표현의 중요성은 더욱 드러납니다바울은 오직 디모데만이 복음의 참된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서신을 기록한 목적(3-7)

오늘날 성도들은 이 시대에 속한 유행한 가르침을 따르려고 합니다그것이 지혜롭게 능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성도들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진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특히 성경적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거나 복음의 가치를 훼손한 가르침은 피해야 합니다.

3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3-7)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디모데를 남겨둔 이유를 설명하면서어떻게 사역해야 할지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이곳에서 복음 전파하는 어려운 과정특히 거짓 교사들의 거짓 교훈과 방해에 대해 격려하고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사역할 때 필요한 교훈을 주기 위해 서신을 썼던 것입니다.

⑴ 에베소에 남겨둔 이유(3-4)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거짓 선생들이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어떤 사람들이 들어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거짓 가르침을 가르쳤습니다이러한 가르침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었습니다쓸데없는 말싸움과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디모데의 도움이 필요한 만큼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젊은 디모데는 혼자서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기가 두려워서 에베소에 남아 있기를 꺼려했을 것입니다그래도 바울은 권하였습니다명령하지 않고 권한 것은 그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해 주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과 목적도 몰랐습니다그저 율법을 가르치는 목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선생이 되기만 원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거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뒷전이었습니다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져 우월의식만 가지길 원했습니다.

⑵ 바른 복음의 목적(5)

디모데가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거짓 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도록 막아야 했습니다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관없거나 그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그 교훈은 신화(神話)와 끝없는 족보에 의지해서 가르쳤습니다이 신화는 구약과 유대적인 전통을 헬라 관점에서 신화적으로 해석한 내용입니다그리스나 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들과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아브라함의 혈통인 것을 자랑하려고 성경에 기록된 유명한 조상에게 자신의 족보를 끼워 맞추는 거짓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었습니다그 결과 스스로 교만하려니 성도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복음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을 행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복음은 단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대상입니다성도들이 실천해야할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합니다이 세 가지 요소는 복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정결한 마음은 나중에 거짓 교사들의 교만하고 부패한 마음과 대조되며선한 양심은 거짓 교사들의 화인 맞은 양심과 대조되고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이 가르침을 따르는 거짓 신앙과 대조가 됩니다.

⑶ 거짓 교사들의 모습(6-7)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된 교사들 중에 거짓 교훈으로 통해서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부러워했고그것을 따라 자신들도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였습니다하지만거짓 선생들은 교훈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났습니다원래는 복음 안에 있었는데나중에 잘못된 길로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들의 가르침은 헛된 말과 공허한 말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논쟁만 불러 일으켰습니다복음은 사변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신기한 방식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지식만 자랑하던 자들이었습니다하지만 스스로 자신들이 무슨 말하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그러나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왜곡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그들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첫째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적합한 결함이 있었습니다둘째 그들은 복음에서 떠나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마지막으로 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이 더 이상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요구했습니다그들의 이기심이 가득한 가르침을 막아야 에베소 교회 안에서 사랑이 가득해지는 것입니다그래서 에베소 성도들이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가득해집니다에베소 성도들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러니깐거짓된 교훈에는 이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거룩한 공동체를 분열과 다툼을 조장시키지만바른 교훈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겸손한 사랑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그들을 따른 에베소 성도들은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율법을 가르칠 만한 합당한 인격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교훈에 중심된 내용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교사만 되려고 하였습니다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선생이 되려면선생이 되기 전에 먼저 청결한 마음을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자문해 보아야 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사리사욕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언급된 모든 것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바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기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기보다는 자기를 세우는 일에 노력합니다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잘못된 가르침을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만듭니다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오늘날 성경적이지 않은 온갖 성공 신화들이 교회에서 남무 합니다그리고 교회에서 인맥 중심 등과 같은 이야기들이 진행됩니다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율법의 올바른 사용(8-1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그것이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더는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정죄하지 못합니다하지만 율법은 무용지물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담은 거룩한 말씀으로 무엇이 죄이고 선인지 가르쳐줍니다복음 안에서 율법은 의미가 있습니다.

8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8-11)

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당시 교회들을 순례하면서 복음을 가르치던 교사들을 분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잘못 사용하여 공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디모데에게 율법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⑴ 율법의 기능(8)

율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율법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그런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해석은 사람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종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자로 만들고 있습니다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파괴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⑵ 율법에 지적한 것들(9-10)

바울은 9-10절에서 율법의 목적과 반대되는 열다섯 가지의 불의한 목록에 대해서 소개합니다여기서 의롭지 못한 자를 말하면서 십계명에 기초한 죄의 목록을 말합니다바울은 십계명을 통하여 신자들의 행위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연약한 점을 드러냅니다.

1-4계명(불법한 자복종하지 아니하는 자경건하지 아니한 자죄인거룩하지 아니한 자망령된 자), 5계명(아버지를 죽이는 자어머니를 죽이는 자), 6계명(살인한 자) 7계명(음행하는 자남색하는 자), 8계명(인신매매하는 자), 9계명(거짓말하는 자거짓 맹세하는 자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을 말합니다.

이 목록은 불법에서 시작하여 올바른 교훈을 거스른 것은 모두 교훈의 참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가르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을 파괴하고 배척하는 행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교훈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이런 모든 것들은 올바른 교훈에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⑶ 율법의 바른 사용(11)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시 올바른 교훈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따른 것입니다여기서 복음의 특징은 두 가지로 복된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소개합니다이 교훈은 바른 교훈건전한 교훈을 의미합니다즉 이 교훈은 복음에 기초합니다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맡기셨으며 그는 에베소에서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였습니다.

선악을 구분할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열매입니다거짓 교훈에 속지 않으려면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삶에 어떤 열매가 나타나는지 살펴야 합니다그 가르침이 선하면 그들의 삶을 당연히 선한 열매가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거짓되면 거짓 사리사욕의 열매들이 맺은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태복음 12:33)고 하셨습니다.


이제 참다운 교훈의 기준이 오직 복음입니다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새 언약의 성취입니다복음이 없이 율법을 말하면 그 율법이 자신을 정죄하는데도 율법준수만을 요구하는 사람이 됩니다스스로 자신과 타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는 죄를 짓게 됩니다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론에 미혹되지 말고건전한 교훈을 붙잡음으로써 하나님의 경영을 점차 이루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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