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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0-01)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아님

시편 10편 1-18절


말씀을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의 앞길에는 환란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계속해서 세상 가운데 역사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잘 될 것야!’라며 희망의 기대를 가지고 살라고 말하지 않고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인이 ‘여호와여 어찌하여’라고 질문하며 환란의 때에 멀리 숨으신 하나님께 불평하고 질문하는 호소하며 악을 꺾고 처벌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탄식시입니다. 시인은 생생하게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솔직하게 악인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악을 갚아주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의 탄식(1)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악인이 지배하고 군림하는 상황에서 항상 손해를 보고 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침묵하고 숨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심판하실 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

시인은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따져 묻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여 멀리 서 계십니까, 숨으십니까?’ 시인은 자기의 불행 그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숨으심, 곧 하나님의 부재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무참한 고통에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움을 확신하건만 그 분이 숨어계신 것 같습니다.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때문에 ‘어찌하여’라는 시인의 질문은 여호와를 향한 비난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악인들의 포악함을 고발(2-11)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통치하신다면 왜 세상에 악이 성행하고 의인이 핍박을 당하는지에 대한 주제는 자주 떠오르는 화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상 속에 존재하시면서 상상 속에서만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기다린다면 모든 구부러진 것들을 바로 잡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

2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2-11)

시인은 ‘환난의 때’ 왜 여호와가 숨어 계시는지 따져 묻고서(1), 환난의 구체적 이유를 밝히듯 악인들의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악한 자의 교만 때문에 가련한 자가 심하게 압박당합니다. 이 때문에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엎어지기를 요청합니다(2).

악인의 특성을 교만으로 꼬집습니다. 악인의 거드름피우는 거만함이 ‘가련한 자’의 자존감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습니다. ‘가련한 자’는 주로 ‘가난한 자’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로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하게 멸시하는 교만한 악인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음모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길 요청합니다. 악인에 대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얼굴을 드높이 쳐든 악인은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합니다(3). ‘마음의 욕심’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동의어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악인은 교만한 얼굴을 하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그의 모든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4). 악인들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돌봄도 없고, 어떤 개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악인의 길은 언제나 번성하고 주님의 심판은 높기만 해서 악인에게 미치지 못하여 악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을 언제나 비웃고 경멸한다(6)고 탄식합니다.

본래 의인의 길이 견고하고 번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악인이 굳건하게 사는 것이 시인은 고통스럽습니다. 더군다나 악인들의 말은 점입가경입니다. 악인이 마음속으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6). 악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 포악이 충만합니다.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 곧 속임과 위법적인 행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7). 한마디로 시인이 보기에 악인의 말과 행위는 환난과 시련의 원천입니다.

시인은 은유와 직유를 통해 악인의 본성을 계속 열거합니다. 악인은 마을의 구석지고 후미진 골목,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고, 희생자들을 비밀리에 지켜봅니다(8). 악인은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 덮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다가 ‘가련한 자’를 사로잡습니다(9). ‘가련한 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시인의 눈에 악인들은 유달리 ‘가련한 자’를 자신의 포획물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련한 자’들은 악인들의 포악스러움 앞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10). 더군다나 악인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셔서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11). 그러니까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통치를 멈추셨고, 세상에 관심도 없으시고,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신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면 악인들의 이러한 확신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활동도 안 하고 계신 것입니까? 시인의 마음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위한 기도(12-14)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것 같을지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세상이 점점 공평하지 않을지라도 정의 실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변에 전쟁 같은 경쟁에서 떠밀려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악을 갚아주실 하나님에 대해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공평한 상황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2-14)

시인은 더 이상 악인의 활동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침통해하며 우울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부르며 재촉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손을 드십시오.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12). 시인은 하나님 손의 힘과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용사처럼 일어나셔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악인을 체벌하시기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시인은 ‘가련한 자’들을 짐승 사냥하듯 포획하는 악인들(9)의 흉악스러움을 처벌해주시길 재촉하고 심판을 청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악인의 오만함을 고발하면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13, 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말에 반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은 하나님을 믿기에 아룁니다. ‘당신은 고통과 번민을 보셨습니다’(14a). 시인은 세상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빠짐없이 보고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고통과 번민을 주의 손으로 갚으실 것이고, 불행한 자가 주를 의지하며, 이미 고아를 도우셨다(14bcd)고 증언합니다. 시인은 최우선적인 도움을 받아야할 고아와 불행한 사람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회복될 것을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통치와 심판을 확신(15-18)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하나님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기대와 달린 그들을 보시면서 비웃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15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5-18)

시인은 가련한 자, 불행한 자, 가난한 자, 고아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악인의 심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명령형으로 여호와께 요청합니다. ‘간악한 자’와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인의 악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15), 시인의 요청은 대담합니다. 이는 사람이 찾을 수 없는 악인들의 악을 하나님께서 찾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은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11)고 말하지만, 시인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 어떤 악도 하나님에게서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끝까지 찾아 처벌하시고 끝장내시기를 바라고 믿는 시인의 언어는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하는 찬양으로 바뀝니다(16-18). 시인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했다고 선포합니다(16). 지금까지 여호와의 왕권을 암시적으로 말했지만, ‘여호와는 왕이시다’라는 직접 진술이 시편에서 처음으로 천명됩니다. 시인은 옛적 조상들이 출애굽할 당시 애굽의 악하고 강한 군대와 나라를 멸망시키시고 심판하신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건넌 후 구원에 감격하여 ‘여호와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출애굽기 15:18)라고 노래했습니다. 시인도 그 신앙의 전통을 따라 이 땅의 모든 악한 나라와 통치자들을 완전히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지고한 믿음을 재천명합니다. 여호와의 왕권을 이스라엘 땅에만 제한하지 않고 온 세상 끝까지 박해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왕권을 소망하고 확신합니다. 시인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지만, 이름 부르기를 순서상 뒤에 위치시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원을 당신이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여!’(17) 시인은 가난한 자들(겸손한 자)을 강조하기 위해 문장 맨 앞에 두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악인들의 횡포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일하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주시고, 귀기울여주실 것입니다(17b). 또한 고아들과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여호와가 심판하시고,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강자들이 더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18). 이것은 가난한 자들, 고아들, 압제 당하는 자들을 위한 악인의 심판을 열렬하게 희망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해주시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희망과 기대를 끝까지 붙듭니다. ‘하나님이 잊으셨다’(11)고 말하는 악인의 조롱에 시인은 휘말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믿는 시인의 신학적인 입장이 오롯이 반영되었습니다. 악이 당장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로운 재판장이며 왕이신 하나님의 신성한 원수 갚음의 날은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랜 기간 고통과 고난에 처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잊어버리는 법을 모르십니다. 인내를 통해 더 성숙한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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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9-01)

 


결과를 아는 여유

시편 9편 1-20절


참된 빛은 번쩍거리지 않는다며 ‘지금 너무 눈부시고 찬란한 빛을 경계하라’던 박노해 시인의 시구처럼, 한낱 사람인데 별인 척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별들의 진위를 가려 그 광도를 조절하실 것입니다. 가짜 변들은 꺼뜨리시고 숨은 별들을 띄우실 것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악인을 심판하시며 압제 당하는 자들의 요새가 되시며 주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원수를 고발하고, 구원을 요청하며, 찬양과 신뢰를 고백하고, 맹세를 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다윗은 압제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무죄한 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찾아내 심판하심으로 정의가 성취되기를 희망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주님을 찬양(1-4)

하나님의 원수들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에 의한 것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무고하게 공격을 받고 불의한 일을 당하는 것에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성도들의 송사에 대해 의롭게 판결해 주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찬양합니다.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1-4)

본 시에는 감사와 찬양도 나오지만 간구도 나옵니다. 현재 다윗이 간구하는 맥락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어떻게 봐야할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다윗은 감사와 찬양하겠다고 선언하며 찬양을 시작합니다.

(1)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찬양(1-2)

두 절의 시행은 각각 히브리어 첫 자음 ‘알렙(א)’으로 시작됩니다. 각 시행의 ‘알렙’은 모두 1인칭대명사로서 ‘내가 찬양합니다.’, ‘내가 전합니다.’, ‘내가 기뻐합니다.’, ‘내가 찬송합니다.’로 시작하여 모두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다윗은 ‘전심으로’, 곧 ‘내 온 마음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모든 일들을 자세히 말하겠다는(1)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표현했습니다.

이후 다윗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2). 지존하신 분, 곧 주님의 이름이라는 표명입니다(7:17; 47:2; 78:35). 그리고 곧바로 가장 높으신 여호와를 기뻐하고 찬양할 이유를 제시하듯 주님의 행하신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찬양합니다.

(2) 정의로운 판결을 하신 여호와를 찬양(3-4)

3절의 시행은 둘째 자음 ‘베트(ב)’로 시작하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기이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말하는데, 3절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원수들이 이방나라들이 침략했으나, 주님 앞에서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는 일입니다.

다윗은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 당신 앞에서 멸망할 것입니다.’(3)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보좌에 앉으셔서 나의 송사와 판결을 내리실 때, 정의로운 판결을 하시기 때문입니다.’(4) 이것은 다윗이 법적인 송사에서 재판장이신 주님의 개인을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원수의 파멸을 아직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며 표명한 것입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열국을 판결하시는 여호와(5-8)

하나님께서는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은 철저하게 심판하심으로 완전히 살라져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후에 후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원수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뿌리째 뽑힌 나무나 풀들이 다시 살 수 없듯이 주께서 심판하신 성읍들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5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5-8)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하신 일들과 미래하실 일들에게 대한 한 가지 기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에게 과거에 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의 죄악을 물으시고 그 악을 갚으시되 전쟁 등을 통해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1) 악인의 멸망(5-6)

5절 시행은 히브리어 셋째 자음 ‘김멜(ג)’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주님이 열방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셔서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음을 선포합니다(5). 다윗은 범세계적인 하나님의 통치권과 열국을 심판하실 대법관으로서의 주님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옛적 이스라엘을 위해 원수와 뭇 나라들을 멸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그 이름을 지우셨다는 것은, 악인들이 후세대에 의해 잊힌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았던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 철저한 파멸을 뜻합니다.

다윗은 곧이어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했고, 주님이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다고 합니다(6). 다윗은 옛적 조상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심판으 자기 백성을 괴롭힌 이방 민족들의 도시를 파괴한 일뿐 아니라 그들이 도무지 회복할 수 없게 만드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지우신 것처럼(5), ‘기억’에서 지워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옛적 이스라엘이 광야에 거주할 때 아말렉 족속에게 내린 저주였습니다(출애굽기 17:14). 그러나 이때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모세를 제외한 백성들은 똑같은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신명기 17:14). 언약 백성도 하나님을 떠나면 공평한 재판장의 판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2) 공의롭고 정의로운 판결(7-8)

7절은, 심판을 위해 보좌를 준비하시고 영원히 앉으시는 여호와를 상상하는 묘사입니다(7). 여호와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8). 지금까지 다윗은 여호와를 ‘당신’으로 호명하며 관계적 거리를 좁혔지만, 이제 3인칭으로 ‘여호와’를 언급하면서 객관적인 거리를 설정하고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말합니다. 개인의 송사를 변호하실 하나님에 대한 기대(4)는 온 세상을 재판하실 하나님으로 확장시킵니다. 무엇보다 심판을 위해 여호와가 보좌에 ‘영원히’ 앉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태초의 시간부터 미래의 알 수 없는 시점까지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9편을 기록한 시인도 그분이 공의와 정직으로 만민을 심판하고 판결하실 것을 믿습니다.

  

가난한 자를 기억하시는 시온의 주를 찬양(9-14)

고대 왕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들 중에 하나는 백성을 재판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세상 왕들은 제대로 된 심판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공의로운 심판으로 선한 힘이 없는 자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다윗은 구원받는 날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저 악인들이 유린하는 시온의 성전에서 구원의 역사를 다 전하겠다고 선포합니다.

9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9-14)

하나님께서는 주를 찾는 사람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기에, 주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주님만 의지합니다. 연약한 자들이 언제든지 문을 두드려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피난처를 제공해 주십니다. 소리 없이 사라진 억울한 빛들을 기억하시고, 작은 신음도 놓치지 않습니다.

(1) 압제 당하는 자의 요새(9-10)

다윗은 압제당하는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가난한 자를 위해 여호와가 요새가 되어 구원해주시길 기도하며 찬송합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보좌에 앉으신 의로운 재판장의 비유로 말했다면, 이제 여호와가 ‘요새’,곧 ‘높은 곳’에 위치한 ‘피난처’ 되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9).

다윗은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재판장 하나님께서 압제당하는 자의 높은 요새가 되셔서 안전하게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고 당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10).

(2)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심(11-12)

다윗은 ‘시온’에 앉으신 이, 곧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열방 중에서 선포하자고 청합니다(11). ‘시온에 계신 여호와’(11)는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12)입니다. 그는 백성들을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12). 시인은 하나님을 타인을 해치는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시고 보복하시는 피의 보복자로 묘사합니다. 이는 압제 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를 잊지 않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보복하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3) 시온의 문에서 구원을 기뻐함(13-14)

이제 다윗은 간절하게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아룁니다(13-14).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나의 고통을 보십시오.’ 이렇게 부르짖는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가하는 고통을 봐주시기를 기도합니다(13).

다윗은 주를 향한 모든 찬양을 속속들이 전부 전할 수 있도록, ‘시온의 문’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14). 시온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인 만큼 시인은 ‘시온의 문’과 ‘사망의 문’을 의도적으로 대비시켜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보좌를 강조합니다.

 

악인과 이방 나라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15-20)

악을 행한 자들은 그 악이 자신들에게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모든 이방 나라들이 알게 하십니다.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다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결과입니다. 악인의 심판과 함께 의인의 구원은 동전에 양면과 같습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15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17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15-20)

여호와께서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시면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어나지만(13), 하나님을 잊은 열방은 심판을 받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찮은 인생인지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1) 악인의 멸망(15-16)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이 자기들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 멸망하기를 바랍니다(15-16; 참조. 5:11). ‘열방은 자기들이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발이 걸렸다’(15). 평행을 이루는 ‘웅덩이’와 ‘그물’은 둘 다 짐승을 잡기 위해 사냥꾼들이 만드는 함정입니다. 다윗은 열방이 자기들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진 것을 여호와의 심판 때문이라고 믿습니다(16).

(2) 이방 나라의 심판 요청(17-20)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은 열방의 최종적인 심판과 멸망을 간청합니다. 그들이 ‘스올’, 곧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청합니다(17). 스올은 어두운 땅이며 죽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반대로 다윗은 궁핍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실망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18).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궁핍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빈곤은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당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인생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시오’(19a), ‘인생’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의 연약함,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힘자랑하는 ‘이방 나라들’(열방)이 ‘사람’일뿐임을 각성시킵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착취와 억압으로 고난당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열방이 두려워 떨기를 간구합니다(20).


오늘날에도 공의로 세상을 다스려주시길 탄원하는 기도가 만연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를 섬기는 자들을 어떻게 보호해주는지, 주를 거역하는 자들을 어떻게 멸망시키는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큰 일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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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8-0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 1-9절


천영희 시인에게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으로, ‘앎음다음’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꽃피운 아름다움만 봐도 수긍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앎음을 경험했느니 알기에 우리를 미물(微物)이 아닌 미물(美物) 되게 하신 주님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기에’를 외칩니다.

 

이 시편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달과 별들의 질서에 깃든 영광스러운 주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대적자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과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과 사람의 작고 유한한 위치를 지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귀와 영광을 허락하시고, 친밀한 랑으로 돌보심을 노래합니다.

 

온 땅에 깃든 주의 영광을 찬양(1)

나이야가라 폭포나 그랜드케넨과 같은 위대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 그 피조물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라고 압도당할 것입니다. 그것을 만든 하나님의 위대함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피조물이 아니더라도 하늘에 해와 달과 수많은 별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시편 8편은 시편 전에서 처음 나오는 찬양시입니다. 1-7편까지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8편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 주’라고 부르며 주 이름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다윗은 ‘온 땅’인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라고 압도당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안약적인 이름으로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친밀성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이때 ‘우리 주’에서 ‘주’는 구약에서 왕을 부를 때 사용되곤 하는데(열왕기상 1:11,37,43), 시편에서는 온 땅의 주(97:5)를 찬미하거나 ‘주들 중에 뛰어난 주’(135:5; 136:3; 147:5), 곧 최고로 위대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칭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시인은 온 땅에 새겨진 그 이름의 위엄과 뛰어남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a)라고 찬미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감격과 감탄을 표현하는 것은 전형적인 찬양시의 특징입니다. 특히 첫 소절 ‘당신의 이름’은, 둘째 소절 ‘당신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1b)로 확장됩니다. 온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아름과 위엄을 하늘을 덮는 탁월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한 ‘우리 주’, ‘아름다움’, ‘영광’은 온 땅과 하늘에 넘치는 우주적 왕권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비천함(2-4)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관찰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그 거대함과 다양함과 오묘한 조화로 인해 놀람과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자연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2-4)

다윗은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시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연약과 겸손과 온유함을 상징하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아기들과, 거만한 자들과의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아기들의 입으로 당신의 권능을 세우셨다고 찬양합니다(2a). 이는 당신의 원수와 보복자를 파멸하기 위함입니다(2b). 어린아이, 젖먹이와 원수, 보복자를 대조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그 목적이 주의 원수들에게 보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장 연약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적대자들을 어떻게 파멸시킨단 말입니까? 대적자들은 인간의 오만한 힘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들은 온 땅과 하늘에 넘치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인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가장 섬세한 돌봄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젖먹이 아이들은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여호와 주님이 가장 연약하고 왜소한 존재에게 힘을 주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창조 솜씨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태곳적 창조행위를 가까이서 바라본 것처럼 친밀하게 묘사합니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당신의 하늘과 달과 별들’(3)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주님이 수립하신 질서로 운행됩니다.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멀고 드높아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 저 먼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과 같이 인간이 닿지 못하는 우주 공간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작동하는 광경입니다. 광활한 세계를 운행하시는 커다란 하나님의 손과 그것을 만질 수 없는 사람의 작음이 비교되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광활한 우주를 손수 운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함과 사람의 비천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그를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십니까?’(4)

다윗은 광활한 우주에서 사람을 가장 작은 파편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시켜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낮고 낮은 인간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대비시켜 하나님을 높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우주 활동을 묘사하여 인간의 왜소함을 자각시킵니다. ‘땅’(아다마)의 티끌로 만들어진 ‘사람’(아담)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탈피한 더 큰 세계 인식입니다. 다윗은 광활한 우주의 활동을 기획하신 하나님을 통해 인간의 무기력함을 까발린 셈입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땅에 속한 사람은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의 돌봄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며 가련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사람의 존귀함(5-8)

세상에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억압당하고, 곳곳에 부조리가 만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으셨다거나 창조세계에 대해 그분의 무관심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처음 창조 세계가 참으로 아름다운 것처럼 결국 악인은 심판하시고 그 세상을 아름답게 회복하실 것입니다.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5-8)

사람의 작음과 비천함을 강조해야 하나님께서 위대해집니까? 그런지 않습니다. 다윗은 반대로 사람의 존귀함도 노래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위엄의 관을 씌우셨습니다’(5).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게 하셨을 뿐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하나님과 비등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편했던지 고대 역본들(70인역, 시리아어역, 아람어역, 라틴어역)은 ‘하나님’을 ‘천사’로 바꾸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라는 표현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당신의 통치권을 자기를 닮은 사람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7-28). 이것은 시인이 ‘여호와 우리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1) 선포적인 고백을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과 위엄’관을 씌우셔서 통치권을 부여하셨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마치 창조의 사건을 떠올리듯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부여하신 것을 노래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그가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당신은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6). 5절에서 ‘영광과 위엄’의 관을 씌우셨다는 말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이 만드신 만물을 다스릴 왕적인 통치권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특히 ‘그가 다스리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왕에게 부여된 권위를 일컫습니다(사사기 8:22-23; 사무엘하 23:3; 시편 103:19 등). 마치 한 국가의 왕이 나라를 통치하듯 사람이 자연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을 하나님이 위임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부여된 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의 권위를 사람이 일부 위임받은 것이지 소유원의 의미는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뿐입니다(3).

사람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통치권의 범위는 가축에서 야생의 들짐승, 새들, 물고기들, 바다의 모든 생물들에까지 미칩니다(7,8).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이 교감하고, 동물과 짐승이 사람을 따르고 복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우주의 왕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돌보듯이(4), 사람은 각종 가축에서 바다 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돌봅니다. 사람의 왕적 통치대상의 순서가 점점 확장됩니다. 사람과 가까운 가축들(소, 양)에서 시작하여 고대인들이 혼돈의 장소로 여겼던 바다와 그곳에 사는 생물에까지 미칩니다. 바닷속 신비로운 생물까지도 사람의 관리와 보호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를 받는 사람이 그렇게 창조세계를 돌보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한 존재’(5)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통치권이 아니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약간 부족한 정도의 영광과 존귀를 주셨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각종 짐승들에게 폭력을 행사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류의 왜소함과 비천함(2-4)과 인류의 영광과 존귀함(5-8)을 서로 대비시켜 긴장감 넘치고 역동적인 관계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초대교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이후 높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와 관련시켜 기독론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수용되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주의 영광 찬양(9)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손으로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통치하라고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성도들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이 시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은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이 영광과 위엄의 관을 쓰고 왕적인 통치를 시행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더라도 사람은 땅의 흙과 먼지로부터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까? 다윗은 처음 생각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다윗은 인간의 왜소함과 비천함뿐 아니라 사람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로 부름 받은 은총을 노래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영광이 하나님 은총에서 시작되었기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사람 본연의 임무입니다.


온 땅에 드리워진 하나님 이름의 영광과 위엄은 찬양의 이유 그 자체입니다. 젖먹이들과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통해 원수를 제압하신 하나님께서는, 한낱 사람으로 광활한 우주를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존재를 작다 않으시고 크게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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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9-01)

    


다섯째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9장 1-12절 


법정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진실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진실보다 거짓이 승리할 때도 있습니다. 거짓 주장하는 사람이 거짓의 각본을 정확하게 제시해서 각본을 맞추었고, 진실은 정확히 답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아무리 좋은 각본을 꾸며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들어납니다. 사탄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고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탄의 모습을 늘어내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 마지막 절에서 독수리가 화를 삼중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9장은 첫째 ‘화’로서 다섯째 나팔 재앙을 기술합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엽니다. 거기서 황충이 나옵니다. 황충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길게 다르고 있습니다. 앞의 네 가지 나팔과는 달리 세 가지 나팔은 재앙이라고 부릅니다. 가혹함의 정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1-2)

세상에 악한 문화는 점점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듭니다. 처음에는 강력하게 거부하다가 그러한 일들을 계속 접함으로 그 문화들을 아주 쉽게 받아 드리게 됩니다. 성도들은 더러워져 가는 세상의 문화를 선교할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상실되고 어두워진 환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새롭게 해야 할 사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1-2)

넷째 나팔은 암흑의 심판입니다. 이제 다섯째 나팔 심판으로, 남아 있는 세 개의 화 가운데 첫째입니다. 그 심판은 우상 숭배자들(땅에 사는 자들)에 대한 황충 심판입니다. 황충은 메뚜기입니다. 넷째와 다섯째 나팔 심판은 출애굽 재앙의 동기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1) 다섯째 나팔과 하늘에서 떨어진 별(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1절의 해석은 복음주의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떨어진’이란 단어로 ‘사탄’으로 보고(이사야 14:12; 누가복음 10:18), 또 다른 학자들은 ‘천사’로 해석합니다. 필시 천사를 가리킬 것입니다. 20:1에서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라고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졌다’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천사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그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하나님에게로부터 그곳을 열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무저갱(無底坑)’은 ‘음부’, ‘스올’을 의미합니다(누가복음 8:30-31). 이곳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를 의미하는 곳으로 어두움의 권세를 잡은 자들, 짐승과 사탄이 한시적으로 갇혀 있는 곳입니다(11:7;17:8;20:1-3).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최종적으로 벌을 받는 곳은 불과 유황 못입니다(20:10).

(2) 무저갱의 문을 열다(2)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무저갱의 열쇠’로 무저갱을 열자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러므로 무저갱은 불이 계속 타오르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 연기가 얼마나 심한지, 해와 공기가 어두워질 정도입니다. 군대라는 귀신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 것으로 보아(누가복음 8:21), 이것은 고통스러운 장소일 것입니다.

무저갱이 열리자 연기가 올라와서 해가 가려져서 어두움이 임합니다. 네 번째 나팔의 재앙도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말씀에 기갈을 의미합니다. 이 어두움의 의미는 창세기 19:28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고, ‘치솟음’와 ‘연기가 올라옴’과 단어에 일치하고 있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무저갱의 그림 자체가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 상태를 의미합니다(창세기 19:10-11). 그러므로 무저갱이 열림으로 어두워진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로, 이 세상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어둠은 영적인 맹목을 상징합니다. 그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마음이 강퍅해짐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일어나는 메뚜기 재앙(3-1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성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통한 재앙이 성도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방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다섯째 천사 나팔소리로 임한 재앙이 계속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3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7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3-1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첫 출애굽 때 역사상 유례없는 메뚜기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던 것처럼(출애굽기 10장), 이마에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큰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실 것입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황충의 권세(3-4)

무저갱에서 첫 번째는 연기가 나오고, 다음으로 더불어 황충이 땅으로 올라옵니다. ‘황충(蝗蟲)’은 메뚜깃과의 곤충으로, 풀무치라고도 불립니다. 이 ‘황충’이 엄청나게 하늘에 떴다면 온 대지는 깜깜해집니다. 그러나 황충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단순히 곤충 메뚜기로 보기 힘들게 합니다. 황충으로 묘사한 세력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 권세는 전갈의 권세에 비유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황충이 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납니다(사사기 7:12). 그래서 황충의 파괴력은 아주 강력합니다. 황충이 지나가면 모든 푸른 식물들을 모두 갈아먹어 버려서, 모든 농사를 끝장을 내버립니다.

하지만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4)라고 권합니다. 황충의 권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기는 못합니다. 첫째 나팔 재앙이 땅과 수목과 푸른 풀을 태운 반면에(8:7), 황충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과 각종 나무와 물은 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는 악인들만 해할 수 있습니다.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온 것으로 볼 때, 악한 세력의 일부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악한 세력이 다른 악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악이 다른 악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해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삶을 먹고 불로 사릅니다(17:16). 황충이 등장하는 다섯째 나팔 재앙은 메뚜기가 애굽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고, 우박에 상하지 않는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메뚜기가 다 먹어 치운 출애굽의 여덟째 재앙을 연상 시킵니다(출애굽기 10:14-15).

(2) 황충의 해악(5-6)

충의 모양은 메뚜기 같지만 쏘는 것은 전갈 같습니다. 황충은 악인들을 죽이지는 않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합니다. 황충이 ‘다섯 달 동안’ 나타나는 기간은 유대 월력으로 4-8월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그 고통은 전갈에 쏘이는 정도로 극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고 싶어 하지만 죽지도 못합니다(6). 이 고통은 여섯째 인 재앙을 떠올립니다. 그 재앙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악인들은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6:16). 순교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절정은 죽음이지만, 악인들이 당하는 고통의 절정은 죽음 그 이상입니다. 황충이 악인들을 괴롭히는 다섯 달은 서머나 교인들이 환난을 받는 열흘보다는 확연히 길지만(2:10), 요한계시록에 여러 번 언급되는 마흔두 달보다는 훨씬 짧습니다(11:2~8: 12:6, 14; 13:5)

(3) 황충의 모양(7-10)

본문에서 언급된 황충은 실제 황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황충의 실제 모습보다는 신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실제보다는 훨씬 더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황충들의 전체 모습은 마치 전쟁용 말들과 같으며, 메뚜기의 모습이 전쟁용 마구(馬具)를 쓴 말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 황충이 쓰고 있는 금관 같은 것은 더듬이 끝의 노란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유력한 해석은 흰 말을 탄 자가 쓴 면류관처럼(6:2), 금관 같은 것을 승리를 상장하는 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황충의 이빨이 사자의 이 같다는 묘사는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황충의 파괴력을 말합니다. 황충에 대한 묘사는 요엘 1:8에 나와 있는데, 메뚜기 군대의 이빨을 사자의 이빨에, 그 어금니를 암사자의 어금니에 비유합니다. 호심경, 즉, 흉갑이 있다는 설명이나, 날갯소리가 전차와 말들이 달리는 소리 같다는 표현은 메뚜기 떼와 쉽게 연상됩니다.

반면에 메뚜기의 형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황충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고,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머리털 같은 것이 황충의 더듬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황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 황충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황충이나 메뚜기는 꼬리가 없습니다. 또한 황충은 풀을 해치는 것이 이치인데, 요한계시록의 황충은 풀을 해하지 않고 사람들을 해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황충은 우리가 아는 곤충 황충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더불어 모종의 초자연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4) 황충의 왕-무저갱의 사자(11)

황충들에게는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 ‘아볼루온’이라는 임금이 있습니다. 그는 무저갱의 사자입니다. ‘아바돈’은 ‘파괴’를 뜻하고, ‘아볼루온’은 ‘파괴자’를 의미합니다. 아바돈이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들의 왕이므로, 아바돈이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은 용이나 큰용, 옛뱀, 마귀 등으로 불립니다(12:9;20:2).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무저갱입니다(20:1-3). 아바돈이 사탄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바돈이 사탄은 아니더라도 악의 세력을 대표할 만한 강력한 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바돈’과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은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이 악의 세력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강력한 이름값을 하는 이 지도자는 사람들의 최고 통치자일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황충은 왕이 없습니다. 나팔 심판은 비자연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로마 황제들이 종종 자신을 가리켜 아폴로가 성육신하였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때때로 메뚜기로 표현됩니다. 또한 아볼로는 ‘아볼루온’과 같은 어원입니다. 아볼로는 악의 파괴자입니다. 요한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암흑 속에 거하는 자들은 반드시 흑암의 세력에게 징벌을 받습니다. 불경건한 자의 눈을 영구적으로 불신앙의 커튼으로 가리는 역할을 메뚜기가 합니다.

 

둘 째 화의 예고(12)

사탄의 공격이 제아무리 무섭게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격 대상과 공격 기간을 제한 시켜 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이 더 강하게 느껴질 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12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12)

요한은 지상에 임한 지옥과 같은 심판을 ‘첫째 화’라고 부릅니다. 이후에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즉 두 개의 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아직도 남아 있는 두 화를 언급하면 끝납니다. 혹자는 첫째 화를 일곱 인의 심판(6장)으로, 둘째 화를 일곱 나팔의 심판(8-9장)으로, 셋째 화를 일곱 대접의 심판(16장)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사탄의 공격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과 허락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세 아래 있는 성도들을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성도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마치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당신의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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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주해(08-01)


일곱째 인 개봉과 네 나팔의 심판

요한계시록 8장 1-13절


요한계시록은 이름 그대로 계시의 책입니다. 우리가 그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진리와 진실을 보게 하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계시합니다.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는 기도의 실체를 계시록을 통해 만납니다.

  

요한계시록 8장은 일곱째 인을 떼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됩니다. 기도는 응답되어 하늘의 포고령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일곱 나팔 심판이 시행됩니다. 일곱 나팔 중에 첫 네 번째 심판은 인 심판과 패턴과 같이 짧지만 강렬합니다. 이 땅 삼분의 일이 영향을 받는데, 그 대상은 불신자들입니다. 독수리는 아직 세 가지 화가 남아 있음을 경고합니다.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1-6)

악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힘과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여전히 악과 불의가 활동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악의 존재를 보며 불평만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1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2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1-5)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섯째 인 재앙이 언급되고, 7장에서 십사만 사천과 승리한 큰 무리가 묘사된 후에, 8장에서 다시 일곱째 인이 등장합니다. 일곱째 인은 인 시리즈의 결론 부분입니다. 불신 세계를 징벌하시기를 간청하는 성도들의 간구가 공식적으로 하늘 보좌에 상달됩니다.

(1) 하늘의 반시간 침묵(1)

어린양이 일곱째 인을 떼시자, 다른 인을 떼실 때와 달리 하늘에 반 시간쯤 고요가 임합니다. 고요함이 일곱째 인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요함을 바로 뒤따르는 일곱 나팔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고요함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습니다. 고요함 직후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것으로 보아, 이 고요함이 적어도 일곱 나팔 재앙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대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은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이 뒤이어 나타나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인의 개봉으로 종말론적 재앙의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등장한 반 시간의 고요함에 의아해하면서 다음 장면을 숨죽이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2) 일곱 나팔의 도입(2)

일곱째 인을 떼면서 이어진 고요함 이후에 등장한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재앙이 아니라 또 다른 일련의 일곱 나팔 재앙입니다. 이것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 시간의 고용함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을 연결하는 모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3-4)

6절에서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는데, 그 전에 다소 놀랍게도 성도의 기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금향로를 든 한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의 기도와 합해 하나님 앞에, 즉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립니다. 이 장면은 네 생물과 24장로가 향, 즉 성도의 기도가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있던 모습과 비슷합니다(5:8). 천사는 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땅에 쏟습니다.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발생합니다. 천사가 성도의 기도가 드려졌던 제단에서 불을 담은 이상, 그 불에는, 성도의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포함하는 불이 땅에 쏟아지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성도의 기도가 이 땅에서 발생하는 종말론적 재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을 암시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을 증언하는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항상 기도해야하는 의무도 지닙니다.

(4) 하늘 보좌의 포고령(5)

향로를 가진 천사가 제단의 불을 담았다가 땅에 쏟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들은 8:1의 고요함과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사징들입니다(11:19;16:18). 자연 현성들은 시내 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인 폭풍 신현의 현상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19:16-19). 그 후에(8:7-9:21) 일련의 나팔로 인해 재앙들이 야기되는데, 이것은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려졌던 재앙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7-10장). 하나님께서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심판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만이 악의 세력과 이 세상 신들을 주관하는 분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처음 네 나팔의 재앙들(6-12)

세상 거대한 악의 세력이 무너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문화와 가르침이 바뀌고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그 사람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의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가 견고하고 그것을 조장하는 악의 세력이 거대하다고 해도 믿음으로 개도해야 합니다.

6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7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6-12)

일곱 나팔은 그 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부터 넷째 나팔은 주로 무생물에게 영향을 주며(8:7-13), 다섯 째 나팔부터 일곱째 나팔은 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9:1-21; 11:15-18). 그래서 다섯째 나팔부터 일곱째 나팔은 ‘화’라고 표현되었습니다(8:13;9:12;11:14).

(1) 첫째 나팔 심판(6-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피 섞인 불 우박이 땅에 내립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린 일곱째 재앙인 우박과 피 재앙과 연관이 있습니다(출애굽기 9:23). 이 때 내린 불 때문에 땅 삼분의 일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해치는 모든 종류의 파괴를 상징합니다. 본문 묘사에 영향을 준 성경은 요엘 2:30인데, ‘이것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심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현상은 하나님의 심관이 임했다는 사실을 알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경고하기에 충분하다. 노아 시대에는 물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불심판으로 경고했는데, 마지막에는 지진으로 모는 이들에게 경고할 것입니다(히브리서 12:26).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당시 하나님은 우박을 사용하여 원수들을 멸절시켰습니다(여호수아 10:11). 나팔 재앙으로 인해 땅이 삼분의 일만 해를 입는 것은 이 재앙이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2) 둘째 나팔 심판(8-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붙는 산이 바다에 빠져 바다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하고 그곳에 있는 생명체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린 첫째 재앙인 나일 강의 물이 피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7:20). 이번 것은 불붙는 산이 바다에 빠져 이렇게 된 것입니다. 환경오염이 발생했고, 그와 관련하여 인간 교역이 깨졌고 배도 파손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완전한 심판은 아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큰 심판입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영향을 받지 않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3) 셋째 나팔 심판(10-11)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횃불 같은 별이 강에 떨어져 강물 삼분의 일이 써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횃불은 세상에 고통을 주려고 내려온 천사 또는 악한 인간을 상징하는 천사로 이해됩니다(9:1). 이것 역시 애굽에 내린 첫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일 강의 물은 피가 되어 사람들이 먹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사람의 생명줄인 민물이 써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 죽게 됩니다. 이것은 쑥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쑥과 쓴 물’을 먹여 고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명백한 표현입니다(예레미야 9:12;23:15). 이로 인해 쓴 물을 마신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릅니다.

(4) 넷째 나팔 심판(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천체(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린 아홉째 재앙인 흑암 재앙과 같습니다(출애굽기 10:21). 흑암 재앙으로 애굽은 온 땅이 칠흑 같이 깜깜해졌으나(출애굽기 10:21-23), 나팔 재앙으로 인해서는 삼분의 일만 어두워진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해와 달 삼분의 일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해나 달의 밝기가 (삼분의 일로) 약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광원체가 밝히는 시간 중에 삼분의 일이 어둡게 되어 낮 시간 삼분의 일(대략 네 시간)과 밤 시간 삼분의 일(대략 네 시간)이 빛이 전혀 없어 깜깜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일식과 월식으로 낮밤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네 시간 정도 어두움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두려워 할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천체가 빛을 상실하여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전조로 이해하였습니다(요엘 3:14,15; 아모스 8:9). 하나님께서 천체를 어둡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종일 흑암 속에서 지내지 않고 삼분의 일만 어둡게 하시는 것은 그분이 심판의 와중에서도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식으로 이 일이 발생하는지는 성경 필자들의 관심 밖입니다.

 

독수리의 경고(13)

장차 완전한 정의를 드러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미약한 변화에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장차 모든 악과 불의가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날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자들의 불의는 끝끝내 감추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13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13)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가며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앞으로 세상에 있을 재앙을 경고하면서 화를 세 번 선포합니다. 이것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라는 말씀대로 앞으로 세상에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의 절정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대라. 독수리가 여호와의 집 위에 있느니라’(호세아 8:1). 독수리는 시체가 있는 곳에 몰려듭니다. 이처럼 독수리와 주검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독수리는 치명적인 심판의 전조를 알리는 상징입니다. 네 나팔로 인해 사람들은 혹독한 심판을 겪었으나 앞에 제시된 심판은 사람들을 직접 겨냥하지 않고 무생물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언급된 네 재앙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혹독한 화가 아직 세 개가 더 남아 있는데, 세 화는 사람들에게 직접 가해자는 심판입니다.


 요즘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임하는 시대입니다. 이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수 있어야합니다. 비록 노아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면 비웃음을 당할 시대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사명은 마지막 때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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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7-01)

 


영적 전투 중인 있는 교회

요한계시록 7장 1-17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 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7장은 여섯째와 일곱째 인 사이에 위치한 삽입된 내용입니다. 다섯 번째 인 심판에서 제기된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하십니다. ‘얼마나 오래?’, ‘그 수가 차기까지!’ 그 수가 십사만 사천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을 따라 종말의 성전에 참여할 영적 군대로, 성전(聖戰)에 참여하여 승리합니다. 그 결과 열방에서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1-8)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무모하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사역하는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1-8)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 위치한 막간에, 8장에서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데, 이로써 한 장면이 일단락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그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인을 쳐서 소유권이나 보호 대상임을 표시하듯, 악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중에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그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1) 바람을 잡은 네 천사(1)
요한이 다음으로 본 환상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 환상입니다. 네 천사는 네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에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네 천사와 네 바람이 연결된 것은 스가랴의 환상과 관련이 있습니다(스가랴 6:1-5). 천사들이 땅의 사방에 선 것은 그들이 땅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였음을 표합니다. 천사들은 재난을 가져오는 바람을 붙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해를 받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행합니다. 바람은 태풍을 일으켜 파멸을 가져오는 세력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14:18)와 물을 담당하는 천사(16:5)도 등장합니다.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바람 같은 자연현상을 이용해 심판하십니다(예레미야 49:36).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연하시며 그분의 백성에게 인을 치시려고 하고 인 치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한 자들을 구별하시 인 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며 그분을 대적하는 위험천만한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향해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음을 얼려주어야 합니다.
(2) 인을 가진 다른 천사(2-3)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동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천사는 앞서 언급한 심판을 행할 네 천사를 향해 하나님의 종들 이마에 인 침을 받기까지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인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네 천사가 일으킬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인 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인 침을 말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NIV는 이 부분을 ‘그의 소유의 인’(his seal of ownership)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도장을 우리에게 찍으시고 ‘첫 번째 불입금’(first installment, NRSV)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고(에베소서 1:13),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에베소서 4:30).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인 침’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하기 때문에 심판 중의 보호를 말하는 에스겔 9장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에스겔 9:4-6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판에서 제외될 것이지만,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은 엄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언치침은 지엄한 심판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은 아마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일 것입니다. 14:1에 따르면,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 치심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혹은 어린양)의 이름이 그 종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22:4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인 치심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서 받는 하나님의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진밀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3) 인 침을 받는 십사만 사천(4)
요한은 인 침 받은 자의 수를 듣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서 ‘십사만 사천’에 달합니다. 이는 666(13:18)과 더불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숫자 중 하나입니다.
9절에서도 다시 설명하지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해 소개합니다(7:9). 잠시 후 살펴보겠지만, 이 큰 무리가 앞서 언급한 십사만 사천과 같은 무리인지 아닌지는 중요성만큼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십사만 사천과 큰 무리는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라고 산술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4) 각 지파를 구성한 십사만 사천(5-8)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씩 인 침을 받은 자들의 합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목록이 다소 독특합니다, 이러한 목록은 성경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목록에는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 있고, 요셉의 아들 중 므낫세는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없고 대신 요셉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해석은 첨예하게 갈립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은 분명 십사만 사천이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는 점도(21:12)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1:26). 이는 분명 불가능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묵시록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이 상징적 언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은 ‘십사만 사천’을 교회로 보는 해석에 좀 더 무게를 실어 줍니다. 144,00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수인 12의 제곱에 1,000을 곱한 수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수의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을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칭 유대인들을 사람의 회당으로 부르면서(2:9: 3:9),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유대인들을 참 유대인들로 다시 정의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참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2:28-29). 666과 같은 상징인 숫자가 번번하게 사용되는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이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십사만 사천’을 그리스도인들로 보는 견해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십사만 사천’이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하는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전체 그리스도인 중 일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1: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에서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교회 전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첫 열매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십사만 사천이 완전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 중 순교자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길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은 뒤이어 언급된(9),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같은 대상일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십사만 사천(9-14)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식은 어린 양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군대로서(14:1)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어린 양의 삶을 무기로 삼습니다. 끊임없이 환난이 닥쳐올지라도 어린 양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연단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견딘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보상하십니다.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9-14)
천국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감격스러운 찬양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본 천국에서는, 흰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서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인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수는 상징적인 수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소개합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속량 받고 어린양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이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1)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찬송(9-10)
요한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를 들은 후에, 아무도 셀 수 없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바라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속량을 입은 세계 각 처에서 나오는 성도들입니다(14장 참고).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창세기 12:1-3). 성도는 인종, 신분, 성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갈라디아 3:28). 이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순결한 승리자들이 입는 옷입니다(3:4-5). 이들은 큰 환난을 견디고 이긴 자들입니다(1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했던 것처럼(요한복음 12:13), 큰 무리가 손에 들고 있는 종려 가지는 승리와 환희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및 천사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입니다. 이 큰 무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루신 구원을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핵심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입니다.
(2) 하늘 보좌의 천사들의 화답(11-12)
10절의 찬송에 대해 화답하는 차원으로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선포합니다. 큰 무리의 찬양에 화답하듯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주위에서 있던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경배합니다. 이름은 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심을 거듭 강조합니다.
(3) 흰 옷 입은 자들(13-14)
요한계시록에는 역설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처음 보기에는 모순되지만, 놀라운 방식으로 상징적 의미를 창출합니다. 독자의 기대를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 5장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했는데, 돌아보니 도살을 당한 어린양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순교자들이 흰 두루마리를 씻습니다. 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습니다. 피로 씻는데 어떻게 희게 되었습니까?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피에 깊어 담근 옷’을 입습니다. 창세기 49:11(그 웃을 포도주에 빨며)의 인유입니다. 흰 옷은 불게 물들어야 합니다. 장세기 49장에서 설정된 기대를 뛰어넘는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붉은 흰 옷’이란 역설이 창출됩니다. 하얗게 하려고 씻었는데 붉게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어린양의 피로 물든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의 섬김과 찬양(15-17)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수 샘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죄로 인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결핍을 해결하셔서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15-17)
하나님의 백성들은 숫자적으로 한정된 144,000명이 아니라 셀 수 없는 많은 큰 무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 공동체의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우신 섭리를 찬양합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천국에서 누릴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결한 흰 옷을 입고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보좌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죄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라고 찬양의 고백입니다.
큰 환난을 이긴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주림과 목마름’과 ‘해나 뜨거움’이 없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삶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21:3).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승리자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모르는 곳입니다. 또한 해나 어떤 열기에도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큰 환난을 이긴 자들은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어떤 결핍이나 상해에도 노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안녕과 위로와 보호는 미래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당시의 성도들도 경험할 수 있던 것입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라는 표현은 시편 23편을 떠올립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시기에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시편 23:1).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복을 영원히 누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임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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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6-01)

 


여섯 인을 떼시는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6장 1-17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항상 환영받고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배척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핍박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라고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믿는다는 사람이 핍박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 받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렇게 예고하신 것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실족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곧바로 기도와 찬양으로 두루마리를 위하신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루마리가 펼쳐집니다. 6장은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봉인한 일곱인을 떼서는 장면이며, 연속적인 세 가지 일곱 심판 시리즈의 첫 번째입니다. 일곱 인 심판은 전 인류의 4분의 1이 대상이며, 신자와 불신자가 그 대상입니다. 심판의 튀지는 신자에게는 기도를, 불신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처음 네 가지 짧은 인 심판(1-8)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악이 득세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린 양의 길을 갈 때 고난을 당하지만, 그난은 성도들의 참된 표지이고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갚아 주십니다. 이제 심판하실 주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1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1-8)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일곱 인을 떼기에 함당하신 어린양이 소개되었고, 6장에서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기 시작하십니다. 어린양이 처음 네 개의 인을 떼자 네 생물이 각각 말을 호출합니다. 말들의 등장은     스가랴 1:8-11과 6:1-8을 배경으로 합니다.

(1) 첫째 인 재앙 – 정복(1-2)

어린양이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등장합니다. 흰말을 탄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흰말 탄자의 정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재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19장을 근거로(19:11) 흰말 탄자를 예수님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흰말탄자의 승리는 세상에서 복음이 거두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뒤이어 나오는 세 말의 부정적 이미지와 맞지 않습니다. 또한 6장의 흰말 탄자를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6장의 흰말탄자는 활을 사용하지만,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을 사용하십니다(19:15). 흰말탄자는 단 하나의 면류관(στεφανος)을 받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관들(διαδηματα)을 쓰셨습니다(19:12). ‘στεφανος’(스터파노스)는 경기에서 우승한자에게 주는 화관을, ‘διαδημα’(디마데마)는 왕관을 가리킵니다. 흰말탄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며 싸우십니다(19:11). 무엇보다도 6장에서는 첫째 인을 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인을 떼신 어린양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외치는 소리에 바로 흰말을 타고 나가시는 것은 어색합니다. 어린양은 일곱 인의 집행자보다는 주관자에 가깝습니다.

둘째, 대다수의 학자는 첫째 인이 모종의 전쟁이나 정복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흰말탄자는 전쟁에 나가 승리합니다. 흰말탄자가가지고 있는 활은 전쟁 무기입니다. 그는 이미 이기고 있으며 계속 이기려고 합니다. 로마 시대에 전승자(戰勝者)는 흰말 네 필이 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3:5; 7:9), 흰말 탄자가 받는 면류관 역시 전쟁의 승리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참조, 3:11). 어떤 세력에 대한 승리인지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첫째 인의 재앙은 모종의 전쟁으로 인한 재앙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해석은 뒤따르는 말들의 재앙적 성격과 잘 맞습니다.

(2) 둘째 인 재앙 – 전쟁(3-4)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붉은 말을 탄자는 땅에서 화평을 제해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습니다. 이는 필시 전쟁을 상징합니다. 붉은색은 피의 색으로, 전쟁 이미지와 잘 어울립니다. 활과 마찬가지로 칼도 전쟁 무기입니다. 화평을 제해 버린다는 말은 전쟁을 일으킴을 의미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은 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가 사용되었으므로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재앙은 적어도 어린양과 하나님의 묵인 하에 이루어짐을 암시합니다.

(3) 셋째 인 재앙 – 기근(5-6)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시자 이제 검은 말이 등장합니다. 앞의 두 말과 다르게 검은 말에 탄자는 무기가 아니라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재앙은 기근을 나타내는데, 아마 앞서 언급된 전쟁들의 결과일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은 이 재앙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고, 밀 한 되는 한사람의 하루양식에 해당합니다. 평상시에는 한 데나리온으로 밀 열 되를 살 수 있는데, 한 되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암시합니다. 보리는 보통 가축 사료용이었는데, 가난한 자들이 먹었습니다(참조, 요한복음 6:9), 한 데나리온으로 3인 가족이 하루 식사들 해결하려면 밀 대신 보리를 사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라는 말의 의미는 난해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백성이 보호를 받을 것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밀과 보리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는 약점을 지닌다. 반면에 감람유와 포도주는 사치품이므로 기근 중에도 부자들은 별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 다른 유력한 해석은 기근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뿌리가 깊어 비교적 가뭄에 잘 견디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감람유와포도주를 해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재앙이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임을 암시합니다.

(4) 넷째 인 재앙 – 사망(7-8)

어린양이 넷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청황색 말을 탄자의 이름은 사망인데, 음부가 그 뒤를 따릅니다. 그들은 땅 사분의 일에 이르는 권세를 얻습니다. 넷째 인은 말 그대로 사망을 말합니다. 사망과 나란히 사용된 음부, 즉 하데스는 사망의 동의어, 유의어로 사용됩니다(1:18; 20:14). ‘청황색’은 ‘잿빛’ 혹은 ‘창백한’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시체 혹은 죽음의 색입니다.

청황색 말을 탄자는 칼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입니다. 이는 마치 앞의 재앙들을 요약해 놓은 것 같습니다. 칼은 둘째 인에 등장하는 큰 칼을, 흉년은 셋째 인에 등장하는 저울을 떠올립니다. ‘사망’은 ‘전염병’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칼과 기근과 역병과 들짐승은 인류를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등장합니다(에스겔 14:21).

 

다섯째 인 재앙/순교자의 부르짖음(9-11)

성도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그렇게 쉽게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고난을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난 받는 성도들을 괴롭혔던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9장에서는 때가 차면 순교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9-11)

다섯 번째 인은 복음을 바르게 믿고 전하는 이들도 순교를 당하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이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은 즉각적인 도움이나 해결책을 주시 않습니다. 즉각적인 응답 보다는 앞으로 더 순교자가 나올 것인데,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1) 순교자들의 기도(9-10)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시자, 하늘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합니다. 이 탄원은 언뜻 복수의 뉘앙스를 띠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나 스데반의 기도와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누가복음 23:34; 사도행전 7:60), 그런데 놀랍게도 순교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하고 참되시다는 진리를 근거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무죄한 피에 대해 신원하는 것은 거룩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합니다. 정의와 심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영원히 참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공의도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거룩하고 참됩니다.

(2) 기도에 대한 응답(11)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순교자들의 탄원에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깐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2:17; 3:5: 7:9). 순교자들이 받은 흰 두루마기는 그들이 옮고 그들을 죽인 자들이 옮지 않음을 재차 입증해 줍니다.

하늘 제단이 속해 있는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실현된 곳입니다. 하늘에서 쉬고 있는 순교자들은 땅에 살면서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의 처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 땅은 카이사르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 곧 순교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수고에서 벗어나 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3).

천상의 순교자들은 다른 순교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종말이 완성되는데 필요한 조건은 순교자의 수가 차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끈이 옵니다(마태복음 24:14). 그렇다고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중언의 삶을 사는 자들인데, 이들에게 증언과 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12:11; 20:4).

다른 인들과 달리 다섯째 인이 열린 후에는 재앙이 발생하는 것 갑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순교자들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모종의 재앙이 암시된 것도 사실입니다. 순교자들의 단원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순교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탄원 후 악인들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여섯째 인의 재앙은 다름 아니라 어린양의 진노입니다(16). 하나님은 순교지들의 수가 찬 후에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악인들에 대한 예고편 격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3) 우주적인 징조(12-14)

여섯째 인이 열리면서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며,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떠나가고, 모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해와 달의 색이 변하고 명의 떨어지며 하늘이 떠나가는 짓은 하늘에 생기는 이변을 말하고, 큰 지진과 산과 섬의 이동은 지각 변동을 말합니다. 자연계에 임하는 재난은 나팔 재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8:7-13).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징조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재림 직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입니다(마태복음 24:29) 또한 곳곳에서 지진이 발생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4:7).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기에(21:1), 자연 질서의 변동은 예측 가능한 종말론적 현상입니다. 달리 말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자연과 우주로 확대됩니다.

(4) 어린양의 진노(15-17)

하늘과 땅에 큰 격변을 불러일으키는 여섯때 인의 재앙은 땅의 임금과 왕족과 장군과 부자와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에게 임합니다. 이 재앙은 악인들을 향한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이 재앙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상류층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권력과 연대해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입니다. 종말론적 재난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진노가 자유인과 노예에게도 임한다는 사실은 권력이나 재력 혹은 사회적 신분을 막론하고 불의한자들에게 재앙이 내려옴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로마서 2:11).

이 재앙은 누구도 버틸 수 없다. 이 재앙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그들은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다섯째 나팔 재앙이 임하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9:5). 아이러니하게도,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박해는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20:4). 성도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마태복음 10:28). 반면에 약인들에게 입하는 어린양의 진노는 축음의 고통보다 더 큽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겪는 고난뿐 아니라 어린양을 대적하는 자들의 고난도 언급합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여섯째 인의 재앙이 대표적 예입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불 못이라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불과 유황의 고난 역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14:9-11).

악인들은 이 재앙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임을 알지만, 그들이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여섯째 나팔재앙에 살아남은 자들 역시 회개하지 않습니다(9:20-21), 넷째 대접과 다섯째 대접 재앙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16:9,11). 아는 것과 회개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비웃겠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쏟아질 것입니다. 그 종말의 때까지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힘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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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5-01)

 


경배를 받으시는 어린 양

요한계시록 5장 1-14절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계획하신다면 그 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그 나라와 백성의 정체성과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역사와 교회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이며 그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5장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중심의 예배이며, 보좌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는 원심력적 예배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어린양이 취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늘 보좌의 프로젝트가 시행됩니다. 네 생물과 24 장로들과 청사들, 모든 피조물이 찬양으로 어린양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담 되어 이 땅에 세 가지 연속적인 일곱 심판 시리즈의 시동을 겁니다.

 

두루마리와 어린 양(1-7)

악은 득세하고 교회는 수세에 몰리고 성도들은 모진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구속의 역사는 정체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희망마저 보이지 않지만, 보좌에 앉으신 주가 계시기에 탄식은 탄성으로, 슬픔은 환희로 바꿘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고 주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막을 수 없고, 그분의 의지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1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1-7)

요한계시록 4장은 ‘보좌에 앉으신 이’를 향한 찬양의 예배입니다. 5장은 죽임당한 어린양 중심의 예배입니다. 4장의 예배는 하늘 보좌를 향한 구심적 예배입니다. 보좌에 앉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계획은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됩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일곱 인으로 봉해져서 누구도 열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1)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1)

이제 5장에서는 보좌로부터 열방을 향한 원심적 예배가 진행됩니다. 그 출발점은 ‘두루마리’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왜 두루마리는 인봉되어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다니엘 12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세계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은 궁극적으로 제국에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두 천사가 역사의 결말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목격합니다. 들었으나 깨닫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알려고 했으나. 처사는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합니다. 다니엘에게는 멀리 떨어진 종말적 미래지만, 요한과 독자들에게는 직접 영향을 미치는 내용입니다. 즉시 공개되어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니엘이 봉인한 두루마리가 해제되는 과정을 쓰고 있습니다.

(2) 누가 인을 떼기에 합당하나(2-5)

요한은 봉인된 두루마리를 보았지만, 정착 그것을 펴고 인을 뗄 자격이 있는 자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숨겨진 역사의 종말을 알려 줄 사람이 없어 보이자 요한은 크게 울고 있습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했으므로 그가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기는 자에게 다양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2-14장이 그 내용입니다. 따라서 인이나 나팔 심판은 그 내용이 아닙니다. 두루마리는 10장에서 요한이 소화하여 예언적 선포를 할 때 드러납니다. 11장은 두루마리의 맛보기에 해당합니다. 봉인이 해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백성은 여전히 이사야 29:9-12의 상황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천상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합니다. 제국의 모습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대적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압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역사는 제국의 손에 이끌려 갈 것이며, 시련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 악한 제국에 대한 심판과 그리스도인의 승리도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유업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절망합니다.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순종하는 인류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인류가 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육신적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친히 참 인류와 참 이스라엘이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어린양밖에는 인을 뗄 자가 없습니다.

(3) 두루마리를 위하신 어린 양(6-7)

요한이 절망하고 있는 중에 한 장로가 일곱 인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다윗의 후손에게 약속한 메시아입니다(사무엘하 7:14-16; 시편 2:8). 다윗의 뿌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다윗 계통의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의 동산이 대적으로 인해 초토화될 것이나, 그루터기(이사야 6:13)에서 나온 가지와 뿌리와 싹을 통해 동산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그 동산에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이 돌아오고, 이방인도 올 것입니다. 이사야 11:1-10의 예언입니다. 예수는 나사렛(가지)입니다. 사자가 이겼는데, 사자가 아닌 도살을 당한 어린양이 서 있습니다. 사자의 승리는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완수되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사자와 같은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악과 죽음을 모두 정복하셨습니다. 이사야 40-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죽음을 통해 그 백성의 죄를 사하고 악의 세력에 승리합니다. 신적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중에 하늘에서 둘려온 음성(‘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도 신적 아이러니를 반영합니다. 시편 2편과 이사야 42장의 결합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 이겼고, 일곱 일을 떼시기에 합당합니다. 어린양은 다니엘 7장의 인자와 같은 이에게 부여한 권세(일곱 뿔)을 가졌습니다. 또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들을 찾는 하나님의 영(일곱 눈, 참조. 스가랴 4:10, 역대하 16:9)이 함께합니다.

 

성도들의 기도(8)

세상의 고난 가운데 기도할 힘을 잠시 잃었을 때,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든지 입술에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때, 신속하게 응답되어질 것입니다. 본문에는 성도의 기도가 하늘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향으로 어린 양께 그려집니다.

8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십니다. 두루마리는 기도와 찬양을 통해 어린양이 어떤 권세와 영광과 능력을 가졌는지를 드러냅니다. 왜 성도의 기도가 언급되었습니까? 기도는 두루마리가 개봉되어 선포되어야 할 이유를 나타냅니다. 기도는 6:9-10과 8:1-5에서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 시리즈가 하늘에서 시행하도록 만드는 정당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기도가 하늘 보좌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과 구원의 계획을 결정하고 시행 포고령을 내리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정당함을 인정받으려는 탄원과 더불어 제국과 그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위한 청원입니다.

 

어린 양께 드리는 찬양의 반응(9-14)

성도들은 천상의 예배를 모본으로 삼아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해야 합니다. 경제적 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도 강력한 힘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욕망을 채워 줄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린 양은 우리의 욕망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영원토록 경배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9-14)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시어 사자와 같은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입술에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기에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어린양은 구속의 행위로 인하여 찬양 받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됩니다. 어린양의 희생제사는 찬양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근거입니다. 9-14절의 찬양은 1-7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또한 전체 계시록의 주제를 설명하는 노래입니다.

(1) 첫 번째 찬양 - 네 생물과 24장로(9-10)

내 생물과 24장로는 새 노래를 불러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세 하늘과 새 땅 및 새 예루살렘 등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종말론적 사건들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것입니다.

‘새 노래’는 새 창조에 대한 찬양입니다. 구약에서 ‘새 노래’는 항상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찬양의 표현입니다(참조, 시편 33:3; 40:3; 96:1; 98:1; 144:9; 149:1; 이사야 42:10). 대적에 대한 신적 용사의 신성한 승리를 칭송하는 신앙을 위한 성전(聖戰) 용어입니다. 유대 문헌에서 이들 새 노래 본문들을 다양하게 적용 하였습니다: 다가올 세상에서 메시아 도래의 시기에, 구속 이후에, 이스라엘의 부활에, 네 번째 왕국의 패배에. ‘새 노래’라는 개념은 9-10절의 내용에 잘 들어맞습니다. 사실 9-10절은 광야 이스라엘의 소명과 사명을 선포하는 출애굽기 19:5-6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여 재해석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지만, 요한은 계시록에서 열방을 전문적으로 나타내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사용하여, 그 적용 범위를 열방으로 확대합니다. 창세기 10장과 다니엘 7장 사상의 발전입니다.

(2) 두 번째 – 천사(11-12)

천사들은 왕권이 가지는 일곱 가지 속성들을 어린양에게 돌리며 찬양합니다. 만만과 천천은 보좌를 중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보좌 예배 참석자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다니엘 7:10에서 파생된 표현입니다. 천사들은 어린양을 절대주권을 가진 왕으로 찬양합니다. ‘능력과 부와 힘과 존귀와 영광’은 역대상 29:11-12에서, ‘지혜’는 다니엘 2:20에서 도출하여 일곱 완전수로 재구성합니다.

(3) 세 번째 찬양 - 모든 피조물의 찬양(13-14)

어린양의 찬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함께 찬양합니다.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해서임을 보충 설명합니다. 구약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의 한계를 넘어 성부와 성자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5장 예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선교적입니다. 보좌로부터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예배입니다.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두루마리가 등장합니다. 둘째, 기도와 찬양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예배입니다. 셋째,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 하늘 보좌에서 인정받습니다. 유일신론에서 삼위일체로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속량하셔서 하나님의 소유 삼으시고, 나라와 제사장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제사장의 사명과 의의 통치를 구현하는 소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사명 없는 속량, 소명 없는 죄 사함은 복음의 왜곡입니다. 영광스런 부르심을 따라 삶으로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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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4-01)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4장 1-11절


 한 어머니가 딸을 전도해서 교회로 대리고 왔습니다. 딸은 교회에 이곳저곳에 있는 새신자실과 각 부서실 그리고 식당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싸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등을 들었습니다. 딸은 황급하게 어머니 손을 이끌고 교회 밖으로 나오면서, ‘이런 교회는 다니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첫날 많은 것을 보았구나! 지금까지 난 한 가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보았단다. 딸아! 예배드리고 가자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들을 많이 봅니다. 이 딸처럼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요한은 지상교회들을 돌아본 후, 이제 천상을 돌아봅니다. 천상 교회를 통해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보좌 주위에 흰옷을 입고 금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이 24보좌에 앉고, 주변에는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과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상의 경험을 통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을 만나 뵈러 가겠습니다.

 

하늘 보좌로의 초대(1)

우리는 빠르게 변화되며 화려한 다양한 문화들을 봅니다. 자연스럽게 세상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에 두고 땅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늘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땅에 하찬한 것들을 집중하게 됩니다. 바울은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골로새서 3:2). 땅의 교회들을 살핀 요한에게 이제 하늘 보좌를 보여주십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1)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소개했지만, 지상에 속한 교회는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요한에게 완벽한 천상 교회를 보여주십니다. 4장 이후에서는 범우주적 계시가 나옵니다. 첫 번째로 보인 것은 열린 하늘문을 통해 드러나는 하늘 예배입니다.

(1) 하늘 문(1a)

밧모섬에 있던 요한은(1:9) ‘성령에 감동되어’(2) 천상의 교회를 살펴봅니다.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1:10처럼 ‘성령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1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4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 보좌가 있는 곳을 봅니다. 열린 하늘문을 통해서 본 환상은 2개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는데, 예배 이미지와 정치 이미지다.

(2) 하늘의 음성(1b)

요한에게 나팔 소리 같이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 올라오라고 말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은, 앞서 요한에게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1:10).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왜 하늘 보좌로 올라오라고 하시겠습니까? 6-16장까지의 일곱 심판 시리즈는 하늘 보좌로부터 시행되기에 중요합니다. 다니엘 7장이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네 짐승들에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네 짐승은 네 제국(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입니다(다니엘 2장). 고난 받는 하나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시고 짐승을 심판하십니다. ‘인자와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등장합니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인자와 같은 이’에게 열방(나라와 백성과 언어)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십니다. 다니엘이 하늘 어전회의에 참여했듯이, 요한도 하늘 보좌의 배에 참여합니다.

땅에 있는 교회는 로마제국의 압박 속에 생존의 기로에서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무소불위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복음을 증언하기는커녕 타협하며 동화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신실한 중인이 되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돌파구는 바로 하늘 보좌의 시각을 가지고 현실을 전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 7장에서와 같이 대적을 정복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궁극적으로 세우신다는 계획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의 예배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를 경험하는 곳이 아닙니다. 감정의 위안을 얻는 곳이거나 현실의 피난처가 아닙니다. 하늘 보좌의 시각으로 현실을 전망하는 통찰력을 얻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하늘 보좌의 예배에 참여합니까?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입니다(요한계시록 3:8). 하늘 보좌는 성막의 지성소를 상징하고, 하늘 문은 지성소 가까이에 있는 성소의 분향단을 상징합니다.

 

하늘 보좌의 구성원(2-8a)

지상 교회들이 세상에서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받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인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영광이 밝히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2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2-8a)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는 황제의 권좌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의 왕좌(16:10)가 철옹성 같아 보여도 하늘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이의 영광은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 같이 빛나고, 무지개가 보좌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제 요한이 보았던 천상 교회와 ‘보좌에 앉으신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보좌 앉으신 이(2-3)

먼저 요한의 눈에 집중된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입니다. 천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 주변에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지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은 유대 문학에서 신적 위엄과 영광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에 있는 열두 개의 보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합니다. ‘무지개’는 화려함과 노아의 언약을 상기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초월성을 보호하면서도, 영광과 권세와 구원하시는 은총을 신비적으로 표현합니다.

(2) 이십사 장로(4)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보좌 주위에는 24개의 보좌가 있고,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금관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24장로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거룩함과 순결함을, 이들이 쓰고 있는 금관은 왕권과 같은 권세를 나타냅니다.

보좌 주위에 이 24장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위에 쓰여 있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21:12) 및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 쓰여 있는 12사도의 이름과(21:14) 연관될 수 있습니다. 24장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가능성이 큰 해석은 24장로를 천사와 같은 천상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늘에는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 있으며(시편 89:7)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좌우편에는 하늘의 만군이 있습니다(열왕기상 22:19). 24장로는 이들과 맞먹는 천상의 존재들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장로와 천사는 비슷한 일을 합니다. 예를 들면, 24장로와(5:8) 천사(8:3-4) 모두 성도의 기도가 담긴 향을 관장합니다. 또한 계시를 알리는 친사의 역할을(1:1) 장로가 수행하기도 합니다(5:5;7:13-14).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천사들 역시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8:3; 요한복음 20:12).

일곱 교회 메시지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면류관과 흰 옷과 통치권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24장로는 이기는 자로서 약속의 신실함을 증명합니다. 누구나 이기는 자는 이 약속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보좌와 면류관은 정치적인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하늘 어전회의의 구성원입니다(이사야 24:23).

(3) 일곱 영(5)

요한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5)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일곱 영’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및 권능을 상징하면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에는 우레, 번개, 구름, 큰 나팔 소리 등이 동반되었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출애굽기 19:16). 번개, 음성, 우레(=지진)'는 하나님의 신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표현 방식입니다. 심판이 하늘 보좌에서 명령이 하달되어 땅에서 실현됨을 시사 합니다.

하늘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스가랴 4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입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역대하 16:9). 7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충만한 상태로 존재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1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1:10), 4장에서는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 비전을 봅니다(2).

(4) 네 생물(6-8a)

요한이 또 바라본 것 중에 하나는 보좌 주위에 앞뒤로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었습니다. 이 ‘네 생물’은 에스겔 1장과 10장에 묘사된 내 생물, 즉 그룹들 및 이사야 6장에 묘사된 스랍들을 연상시킵니다. ‘네 생물’은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피조물 중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들을 나타냅니다. 네 생물이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합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또한 ‘네 생물’의 여섯 날개와 가득한 눈은 이들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늘 깨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네 생물’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며 찬양합니다.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하늘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용된 다양한 표현들과 더불어, 이 표현은 하나님의 또 다른 초월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하늘에 있는 투명한 유리 바다의 모습은 이 세상의 혼탁한 바다의 모습과 확연하게 다릅니다. 하늘 보좌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되고 하나님의 위엄이 온전히 나타나는 고요한 곳입니다.

 

하늘 보좌의 예배(8b-11)

모든 영광과 존귀는 오직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만 경배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이미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린도후서 4:15). 이제 요한은 하늘에 속한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8…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8b-12)

천상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위에 24장로들과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대리인으로서 ‘많은 눈으로’ 세상을 살피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1) 네 생물의 찬양(8b-9)

하늘 보좌의 예배는 네 생물과 24장로가 주도하여 끊임없이 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영광을 돌려드림이 그 초점입니다. 먼저, 네 생물은 온 우주의 생명체를 대표하여 찬양을 드립니다. 창조의 목적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은 영광을 돌려드림입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능자이십니다(1:8). 역사에 대한 주권은 주 만군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십니다. 출애굽기 3:14(‘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짐승인 로마 황제를 패러디합니다. 반면에 짐승은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고 장차 올 자’(17:8)입니다. 짐승은 현재에 어떤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로마 황제를 바로와 같이 모조품으로 전락시키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삼중 거룩송입니다. 3은 하나님의 완전수입니다. ‘거룩하다’ 삼중송은 로마의 제국적 본성에 대한 저항적 찬송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안식의 거룩을 파괴하는 체제에 저항합니다. 24장로들은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보여야 하는 태도는 ‘엎드리고, 경배하고, 자신의 면류관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갑니다.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집니다. 장로들은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고대 도시의 대표들이며 하늘 어전회의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의 상징인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져버립니다. 포기하며 갖다 바칩니다. 둘째,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 속에는 새 장조에 대한 기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현재 피조세계는 죄악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 땅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는 ‘처음 것은 다 지나갔다’(21:4)를 거쳐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로 발전되어 완성됩니다. 창조에서 새 창조로의 여정에는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간절합니다(이사야 43:18-19; 65:17). 첫째 창조는 퇴보하였지만 완전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 기대가 장로들의 찬양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2)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10-11)

오한계시록 4장의 예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서 보좌를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중심에 계십니다. 성령과 네 생물이 예배자의 중심입니다. 여기에 24장로와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많은 무리’와 모든 피조물(5:13)이 점차 동참합니다. 둘째는 예배의 형태가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밤낮 드리는 찬양 예배입니다. 찬양 속에는 계시록의 창조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창조와 역사와 생명의 절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 유일성, 창조주의 진정한 초월성이 그것입니다. 새 창조에 대한 기대를 듬뿍 담고 있습니다. 셋째, 예배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예배는 감정도 미학도 논리도 아닙니다. 예배는 저항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군왕들과 우상들에게 돌리는 숭배 행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를 지배하거나 억압하고 얽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과 전복 행위가 예배입니다. 장로들도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으로 던지며, 명예와 권위를 포기하고 봉헌합니다. 교회의 예배는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고 횡제를 신격화하는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누구를 경배할 것입니까? 진정한 예배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짐승(제국)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세계 권력 구조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항하고 전복하고 대안을 만들어갑니다.


세상의 고난과 핍박이 가득한 땅을 보면 비참할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의 하나님 나라를 볼 때, 성도들은 희망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통치하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뜻을 세우시면 반드시 이루어가지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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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3-03)


일곱 교회(7) :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종종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너무 한쪽으로 기우러진 모습이 때로는 광신적인 모습으로 비추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않는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안에 있는 열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열정이 없어서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나타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잃어버린 열정이 회복되길 기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일곱 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모습은 토해 버리고 싶을 만큼 역겨웠습니다. 그들은 부자라고 말하지만,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문 밖에 서서 두드리며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권면(14-17)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19:23)처럼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헐벗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는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기에 책망만 받았겠습니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4-22)

열심과 충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일한 삶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영적 장애물입니다. 세속적 부요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고 미지근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지 않습니까!

(1) 수신자(14a)

라오디게아는 일곱 교회가 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부유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로부터 약 70km로 떨어진 곳으로 에베소와 교통과 금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에는 양털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재정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에 황제 숭배가 심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핍박 없이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에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자만했습니다. 영적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들은 신앙적인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참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아십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4b)

라오디게아 교회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그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 근본이십니다. ‘아멘’, ‘충성’, ‘참’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불립니다. 19:11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1:17)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요한복음 1:3). 부활은 새 창조의 근본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사데 교회는 저의 죽은 혼수상태지만 몇몇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칭찬도 전혀 없습니다. 부활이 주는 새 창조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죽었다고 봐야 할 교회를 신실한 증인으로 살리기 위해 맞춤형 계시자로 그리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책망(15-17)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기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15a). 그 이유는 어려움을 모르고, 핍박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유대인 회당이나 주변 사회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과 같이 이상한 사상을 전파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 없고 책망만 열거됩니다.

① 냉정한 진단(15-16)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만 들은 교회인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들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미지근한 교인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섬기려 타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타협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차든지 뜨겁든지 확실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타협은 세상과 하나님을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4).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타협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사실상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협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착각에 빠진 진단(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자신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핍박이 없는 그런 교회였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칭찬만 들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외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책망만 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번성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으며(2:9),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작은 교회였습니다(3:8).

(4) 그리스도의 처방(18-20)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명령하시며 미지근한 그들을 입에서 토하여 내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둘 중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미지근한 상태로 있는 그들의 소극적인 자세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① 질병에 대한 처방(18)

장점이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적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위선 중의 위선은 무조건 회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유효적절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상세하게 맞춤형 처방을 내놓습니다. 첫째는 도시의 장점이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임을 지적합니다(18). 먼저 영적 빈곤을 영적 부요로 바꿔야 합니다.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부자 도시에 산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금을 제련하듯이 정결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잠언 27:21; 말라기 2-3; 스가랴 13:9; 베드로전서 1:6-9). 다음으로 영적 벌거벗음을 영적 단정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긴 옷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상업 중심지에 살고 있는 교회가 낮 뜨겁게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입니다. 성경에서 벌거벗음은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이사야 43:3; 에스겔 16:23; 23:29; 나훔 3:5).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자가 가장 수치스럽습니다. 다음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하면, 영적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세상은 선악에 대한 분별, 모조품과 진품에 대한 구분, 가짜 뉴스와 진실에 대한 판단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가짜를 퍼트리는 본거지가 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 됩니다. 영적 통찰력의 회복이 요구됩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나은 점은 권력과 부와 명예가 아닙니다. 진리를 넘고 역사의 방향을 알기에, 세상에 영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② 사랑하니 책망(19)

둘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19).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헤세드)은 언약에 대한 신실한 반응입니다. 언약적 상호 책임을 지기에 책망하고 징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언약에 대한 열정을 폭력으로 표현한 거룩한 전통이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그랬습니다(민수기 25장). 마카비 가문이 그랬다. 사악한 헬라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유대를 해방시켰습니다. 신약의 열심당원이 그랬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로마의 폭정에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열정을 가졌습니다(요한복음 2:17).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빌립보서 3:6). 라오디게아 교회도 이 열정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항거하며,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열정의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③ 신실한 청지기(20)

셋째로,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20). 문을 두드리는 그리스도는 종교화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립니다. 전형적인 해석은 신자의 집에 손님으로 오신 그리스도, 또는 성찬이 시간에 문밖에 서 있는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공관복음의 파루시아 비유들의 전승사적 발전입니다. 누가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4장의 깨어 있는 청지기의 비유, 마가복음 13:33-37의 문지기 비유가 이 구절의 원래 전승입니다. 그리스도는 밤중에 도착하는 주인의 모습입니다. 주인은 먼 거리에 불일이 있어서 언제 집에 도착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주인의 귀환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집이나 문을 신자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알레고리는 도둑과 같이 오시는 인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5) 그리스도의 약속(21-22)

20절에 이어서 21절은 어린양의 대잔치, 종말론적인 메시아 잔치의 주제를 부각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는 약속은 사실상 경고입니다. ‘이기는 자’는 미완성 독립격입니다. 약속의 유업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을 말합니다. ‘이김’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앞에서 처방한 해결책을 시행하여 회개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부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영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만(디모데전서 6:9), 아직도 많은 사람이 현실적 부와 영적 복을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도는 현실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스스로 채찍질하여 신 경주에 매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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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3-01)


 일곱 교회(5,6) : 사데,빌라델비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 1-13절


교회를 평가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적인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규모와 교인의 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과 신실한 충성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길 바랍니다.

 

사데 교회와 빌리델비아 교회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두 교회는 대조적입니다. 사데 교회는 몽유병 환자 또는 식물인간 닽은 교회입니다. 반면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지만 큰 교회입니다. 사탄의 회당을 굴복하게 만든 교회입니다. 승리한 교회며 어려움을 극복한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메시지(1-6)

사람의 겉모습이 멀쩡해 보인다고 해서 몸과 정신이 다 건강한 것은 아니듯, 눈에 보이는 교회의 활동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반드시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하다고 모든 꽃이 나중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가짜 꽃인 조화(造花)는 화려하지만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자신들이 살아 있는 교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6)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행실은 요한계시록에 반복해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도들은 깨끗한 행실을 상징하는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여 합니다.

(1) 수신자(1a)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 7교회 중에 가장 성적표가 좋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형식주의 신앙과 영적 무기력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서 사데 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같습니다. 사데에는 가장 큰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사탄의 회당이라는 말과 어감이 비슷합니다. 신앙고백과 명성에 비해 영적 건강은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데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b)

좋지 못한 성적표에서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초라한 등불 같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서 사데 교회에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1b)로 나타나십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와 교회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붙잡혀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필요성이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의 강한 역사를(1:4,16), ‘일곱 별’은 교회를 이끄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말합니다(1:2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강한 역사와 교회의 지도자를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를 품고 사데 교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온 교회를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3) 교회의 모습(1c)

하나님의 열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보시고 평가하신 것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c)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행위를 볼 때, 그들은 명목 상 살아 있을 뿐 실상은 죽은 신자들이었습니다. 즉 사데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영적으로 죽은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외적 핍박이나 내적 미혹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2:23).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복음 7:16). 즉 보이는 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마음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인들은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순종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4) 처방(2-3)

사데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행위의 온전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1절에서 죽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는 것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곧 사라질 판이었기에, 사데 교회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데 교회에 아직 회개의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심판이 선포되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18:4).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했던 것처럼(2:5), 사데 교회는 이전에 받고 들은 것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회개는 처음 신앙을 기억하고 다시 지키는 것입니다.

(5) 칭찬(4)

사데 교회 교인들의 대다수가 사실상 죽은 성도였지만, 그 중에는 몇 명은 살아 있는 성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놀랍게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고 소개합니다. 이들은 교회 안의 분위기와 다르게 옷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사데 교회가 온전하지 않은 행위 때문에 책망 받은 후에 옷이 깨끗한 교인들이 칭찬을 받는 것으로 보아, 깨끗한 옷은 성결한 신앙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깨끗한 옷은 어린양의 신부가 입는 깨끗한 세마포 옷을 연상시킵니다(19:8).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생실을 상징합니다.

(6) 상급(5-6)

본문에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이기는 자’에게 세 가지 약속이 제시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어린양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 종말론적 구원을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이기는 자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데 교회 교인들이 입게 될 흰옷을 입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기는 자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기록된 책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기 32:32-33에 처음 등장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므로(21:27),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자는 말입니다. 반면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20:15).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 앞에서 당신을 시인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사람 앞에서 당신을 부인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32-33).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7-13)

오늘날 교회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큰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큰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은 작은 교회대로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능력에 맞게 더 많은 일들과 더 많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7-13)

우리는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든 충성과 순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약속하신 상급과 하늘의 기쁨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1) 수신자(7a)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시련가운데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킴으로서, 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라고 하는 지역은 사데의 동남쪽 약 40Km 떨어진 고원도시로써, ‘작은 아덴’이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포도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암미아(Ammia)라고 하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기 시작하면서, 큰 부흥(AD 100-160년)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집니다. 암미아는 초대교회 내에서 필립의 네 딸들과 대등한 지위를 가졌던 여인으로, 예언과 은사가 있어서 교회를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그 당시 유랑하던 유대인들이 많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도전도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7b)

빌라델비아 교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진실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한 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여닫으시는데, 예수님께서 닫으시며 누구도 열 수 없고, 여시면 누구도 닫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십니다(5:5). 예수님께서 여닫으시는 것은 하늘나라, 곧 새 예루살렘의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1:18).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입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9-10)

서머나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9),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사탄의 회당인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이듯(요한복음 8:44) 사탄의 회당인 자칭 유대인들의 특징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거짓말은 시각한 죄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 못에 들어갑니다(21:8,27; 22:15), 반면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사천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들입니다(14:5). 요한계시록은 거짓말을 피하고 진리를 증언할 것을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와도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 유대인 중 몇 명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발 앞에 절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발 앞에 절하는 비전을 말하고(이사야 49:23), 요한은 유대인들이 교회의 발 앞에 절하는 비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참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 유대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인내는 고난을 전제합니다. 인내는 요한계시록에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2:2,19;13:10;14:12). 로마서에 따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로마서 5:3-4).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은 박해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를 요구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시험의 때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온 세상에 임할 종말론적 시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종들과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하라는 당신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 시험의 때를 무사히 통과해 이기도록 지켜 주십니다.

(4) 상급(11-13)

① 면류관(11)

예수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이라는 말씀은 종말론적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믿음을 굳게 잡고 버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면류판을 바라보며 환난을 이겨냅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로마와 교회를 공격하는 자칭 유대인 및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면류관을 뺏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악의 세력입니다. ‘면류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στεφανος/스테파노스인데, 이는 운동 경기에서 이긴 자가 받는 ‘화관’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② 성전의 가둥(12-13)

‘이기는 자’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즉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건물의 기둥이 옮겨지지 않듯이, 그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또한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및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 적힐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적힌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징합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짐승의 표, 곧 짐승의 이름을 받듯이(13:16-17),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을 것입니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14:1),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22:4).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도 기록됩니다. 이것은 이기는자만이 알고 누리게 될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고,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주님은 교회가 핍박 중에도 인내로 말씀을 ‘지켰기’에 시험의 때에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작은 능력이 작은 증언의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증언하는 힘은 약함과 십자가를 지는 신실함에서 발현됩니다. 부족한 중에도 충성을 다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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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3)


일곱 교회(4) : 두아디라 교회

요한계시록 2장 18-29절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유는 죄를 범하고도 회개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베푸십니다. 지속적으로 성숙한 신앙을 보여 오던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용납하여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경고의 말씀을 통해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 지혜를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두아디아 교회는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으로 위기에 처한 교회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바알의 경제사상이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경제적 풍요와 성장을 추구하다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두아디라에 나타난 그리스도(18)

주님께 칭찬 받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아 성숙해 가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는 계속 자라 가야 합니다. 또한 종교적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신비 체험에 이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그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18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8-29)

두아디라 교회는 일곱 교회들 중에 교차대구 형식의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당시 교회의 신앙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평균치입니다. 두아디라 지역은 무역에 최적화된 곳으로 제조업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상인들이 상주해 있었으며, 바울이 두아디라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났듯이(사도행전 16:14) 이곳은 옷감의 재료인 양털 제조업도 성행했습니다.

(1) 수신자(18a)

요한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18)고 밝힙니다. 두아디라는 산업의 중심지로서 노동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어 곳이었습니다. 주석을 제련하여 많은 철모를 생산하였고, 각종 섬유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산업을 길드의 수호신인 아폴로(Apollo)가 돌봐준다고 믿었습니다.

또 주후 83년에 죽은 도미티 아누스 황제의 아들은 별이 되어 제우스의 아들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일곱 별로 둘러싸인 장갑 위에 앉아있는 형상의 데나리온이 두아디라에서 주조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8b)

이러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는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랑과 믿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업, 즉 행위를 알아주십니다. 심판을 하시고 적들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은 자신만이 유일한 왕이요, 시편 2:7에 예언된 주권자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19)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지상명령인 사랑 및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믿음의 본을 보인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섬김과 인내의 행위’로도 칭찬을 받습니다. 이 행위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섬김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사역도 포함합니다. 인내 혹은 참음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게 줄곧 요구되는 중심 주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랑과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도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아지는 신앙의 진전을 보였습니다. 이 점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교회였습니다.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며 그들의 행위가 약해진 것과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신앙의 진보가 있다는 것은 근성, 내공이 있다는 뜻입니다.

(4) 그리스도의 책망(20-21)

두아디라 교회는 핍박을 받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사탄은 핍박만 하지 않았지만,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여러 가지 유혹의 미끼를 던집니다. 강한 전투력을 가진 신앙인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사탄의 차선책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① 이단을 용납(20)

먼저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깨달음이 적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이끈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정신을 따랐던 것입니다(열왕기상 18:4-19; 열왕기상 9:22).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며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14-15), 두아디라 교회에도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미혹에 넘어가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세벨은 남편 아합과 함께 바알 숭배를 부추긴 인물입니다(열왕기상 16:31). 자칭 사도(2)와 자칭 유대인(9)같이, 이세벨은 자칭 선지자일 뿐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행음은 육체적 죄와 더불어 영적 죄를 가리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성장을 추구하다가 기독교 교리가 부족하여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퇴보가 아닌 진보, 쇠퇴가 아닌 성장은 좋습니다. 그러나 진보와 성장에 집착하다 보면,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주변 사회 환경과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영향을 받는 온도계가 아니라 영향을 주는 온도조절기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② 이세벨 용납(21)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했습니다. 이세벨은 발람, 니골라 당을 주관하는 목자이며 거짓 선지자입니다. 어떤 교훈을 했는지는 명백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이세벨은 악성 바이러스와 같았습니다. 한번 들어오면, 몸 전체를 망가트립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합의 시대로 돌아가면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북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가득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종교는 사회 경제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냅니다. 종교와 정치, 경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증거는 나붓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와 더불어 페니키아의 경제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견지하던 경제관은 희년 경제법입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사고팔 수 없는 유업입니다. 바알의 경제관은 토지는 사고팔 수 있는 상품입니다. 유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소득의 본질입니다. 토지는 그 핵심입니다. 토지를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면, 삶의 터전을 잃은 사회적 약자는 영구적으로 취약 계층으로 내몰립니다. 불평 등이 극심화 됩니다. 북이스라엘에 도입된 바알 경제법은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개혁을 담당한 예후 왕가에도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그 영향력은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때에 활동한 선지자들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입니다. 미가는 바알 경제관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경고한 때에,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의 집으로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른다’(미가 6:16)고 책망했습니다. 이것이 북왕조 멸망의 이유입니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조 유다의 여호람과 혼인하여 6년간 통치하면서, 희년토지법을 붕괴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이세벨의 문제는 우상숭배만이 아니라, 경제의 기본을 붕괴시키는 바이러스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에서 경제적 허브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무역 길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산업 모두가 길드에 가입하여 경제 활동을 했습니다. 모든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유대교와 같이 길드의 수호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헌물 봉헌에 참여할 것을 요구 받았습니다. 도시의 축제는 부도덕한 행동들이 동반되었습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종교와 경제를 분리시킵니다. 우상숭배만 하지 않으면, 경제 문제는 타협해도 되고, 영과 육을 분리시킵니다. 성령을 경험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무슨 짓을 해도 전혀 영향이 없습니다. 버가모와 두아디라는 비슷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버가모에서는 거짓 교사가 침투할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서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견고한 성을 만들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5) 회개를 촉구(22-23)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라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큰 환난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 환난의 때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모든 영적 간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에 경제적 동기로 우상승배를 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

두아디라 교회는 왜 우상승배에 연루되었습니까? 경제적 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지속적으로 이세벨의 죄에 참여할지, 회개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세벨이 당한 결말을 똑같이 당할 것입니다.

 (6) 약속(24-28)

교회 공동체가 신앙적 성장을 이뤄가는 가운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사단과 깊은 교제에 참여한 자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 만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거부한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현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은 ‘사탄의 깊은 것’과 관련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팽팽히 나뉩니다. 첫째로, 이세벨이 노골적으로 사탄의 깊은 것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짐작건대 이세벨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아마도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주장을 펼 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 표현은 이세벨의 교훈에 대한 냉소적 비판일 가능성도 큽니다. 아마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사탄의 깊은 것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9). 마찬가지로 자칭 선지자인 이세벨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안다고 가르쳤지만, 실상은 사탄의 깊은 것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해석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면,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① 만국을 다스림(26-27)

‘이기는 자’, 곧 끝까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들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받은 것과 같은권세를 이기는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메시아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고(12:5)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실 것입니다(19:15). 이기는 자 역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듯 한 것입니다. 이는 시편 2:9을 인용한 것입니다. ‘운명의 역전’은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르느라 환난을 겪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신원해주시는 날, 자신들을 박해한 자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② 새벽별(28)

‘이기는 자’는 새벽별(morning star)을 받을 것입니다. 22:16에서 ‘광명한 새벽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을 책임지십니다. 지금까지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표현 뒤에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약속했지만,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부터는 그 순서가 바뀝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이세벨의 교훈과 행위를 따르지 않은 신실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실과 위협을 감수하며 지조를 지킨 이들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돈과 음행은 여전히 강력한 유혹이며, 이단은 교회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세력입니다. 남은 자로서 신앙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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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2)


 일곱 교회(2,3) : 서머나와 버가모 교회

요한계시록 2장 8-17절


사람들은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버가모는 믿음 생활하기에 나쁜 환경이었습니다. 버가모 지역은 사탄의 왕으로 지배당하고 우상으로 충만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버가모 성도들은 안디바 성도가 죽은 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환경을 핑계로 세상과 타협하며 믿음 생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비교적 건강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도시에 자리 잡은 교회지만, 부요한 교회입니다. 위협적인 집단인 유대인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신실한 증인이 무엇인지를 증명한 교회입니다. 환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의 기로에 선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타협과 융화를 통해 동화할 것입니까? 충성된 종 안디바가 그 모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한 권면(8-11)

고난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게 되는 참된 믿음의 표지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을 세상은 언제나 미워하며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교회를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 교회를 고난 속에서 지켜 주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임하신 교회는 서머나 교회입니다.

8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8-11)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아시아의 왕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아시아의 첫 번째 도시라는 타이틀을 걸고 에베소와 경쟁하였습니다. 그 지역에 특권은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1) 수신자(8a)

서머나는 가난하고 고난 받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는 ‘몰약’이란 뜻입니다. 몰약은 두드리고 으깰수록, 짓누르고 부서질수록 더욱 향기를 뿜어냅니다. 고난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가장 절망적입니다. 반전의 가능성은 고난 중의 소망입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8b)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으로, 죽었다 살아나신 이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 교회가 반전 드라마를 쓰게 하는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받고 있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헤아리십니다. 고난과 핍박이 심할수록, 신실한 증인은 십자가와 부활의 향기로 역사를 장식합니다.

(3) 칭찬(9)

왜 서머나 교회가 환란과 궁핍에 직면했습니까? 고대 도시는 시민 사회입니다. 도시의 질서와 번영을 위해 시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요구합니다.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애국적이지 않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도시의 혜택을 누릴 수 없도록 배제합니다.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합니다. 거부하면 거래에서 배제됩니다. 서머나 교회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겪었던 시험에 직면했습니다. 시민 종교에 참여하여 종교적 애국심을 발휘하며 상업적 유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 것입니까? 여기에 유대인들의 비방과 고소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황제 숭배도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면제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무신론자이고 애국적이지 않다고 비방하고 고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닌 로마제국을 통한 사탄의 통치에 부역하는 자들입니다. 진짜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입니다.

(4) 격려와 약속(10)

서머나 교회는 다행히 예수님께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수고의 향기가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켰습니다. 고난이 거셀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진하게 퍼져 갑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몇 사람이 투옥되는 시험이 닥칩니다.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10일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시험을 받았던 일시적인 시련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왕에 대한 충성 표시이자 신과의 혼연일체가 된다는 일상적인 의례 행위입니다. 거부하는 것은 불이익과 함께 사회적 파장이 따릅니다.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은 교묘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압박을 가합니다. 정치적인 타협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저항해야 합니다. 사탄은 육신적으로 투옥시키고 심지어 죽일 수 있어도, 둘째 사망의 권세는 없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며 주신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마태복음 10:28). 고난에 직면한 교회는 죽기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누구에게 충성했습니까? 국가에? 교회가 애국종교를 지향하는 것은 사탄과 타협하는 길입니다. 집단에? 교회에? 목사에게? 사탄이 주는 거짓 메시지들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피스토스 πιστος)는 신실함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피스티스 πιστος)을 신실함으로 증명했습니다(야고보서 2:21-22). 순교를 각오하고 신실한 증언을 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국가나 사회에 충절을 바치지 않거나, 이익집단의 논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난과 격리와 모함과 혐오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희생시키도록 요구할 때는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시민 사회나 어떤 종교 집단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의 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제국의 유혹에 저항하야 합니다. 시민종교의 편이함을 거부해야 합니다.

(5)경고와 약속(11)

이기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가리킵니다(21:8). 이기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권면(12-17)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합니다. 무력으로 박해하기도 하고 교묘하게 미혹하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큰 효과를 거둔 듯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속에서 교훈을 받아 사칸과의 싸움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1-17)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세상 문화를 접해야 하지만,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핍박은 이겨 냈지만 거짓 선지자에는 미혹된 버가모 교회는 속히 회개해야 했습니다.

(1) 수신자(12a)

버가모 교회는 핍박이 매우 심한 곳이었습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왕좌가 있는 것으로 안디바가 순교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버가모에는 거대한 제우스 제단이 있었습니다. 또 황제 숭배가 성행했던 도시로, 그곳에는 로마 제국의 최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2b)

버가모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셨습니다(이사야 11:4). 예수님께서는 1차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악의 나라들에 칼을 겨누고 심판하습니다. 사형 처결권을 가진 로마제국에 대한 논박입니다. 진정으로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쪽 날이 선 날카로운 칼을 가지신 분으로서,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죄와 타협하며 믿음을 저버린 자는 벌하십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13)

버가모 지역은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로서 믿음을 갖고, 지켜 나가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증인 안디바가 죽음을 방하며 버가모 교회는 심각한 영적 전쟁을 치렀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순교자가 있을 정도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정의를 내세운 로마의 불의한 사회 체제를 심판하십니다. 제국의 힘에 타협하여 배교하는 교회를 향해서 칼을 겨누고 계십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제 숭배가 문제입니다. 1세기 당시까지 로마 중앙정부는 로마 황제 숭배를 조직적으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핍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의 지방정부가 앞다투어 자발적으로 황제 승배의 신전을 유치하였고, 간헐적으로 기독교를 반애국적, 반시민사회적, 또는 무신론자로 몰아서 핍박하였습니다. 충성된 중인 안디바가 순교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안디바는 집단 기억으로 남아 사회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 책망(14-16)

사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고, 경제를 통해서 삶의 현실을 통제하고 조종합니다. 종교와 정치 또는 종교와 경제의 분리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고대 사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한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우상숭배에는 저항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타협을 하게 만습니다. 이것이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입니다. 발람은 ‘그가 백성을 삼킨다’는 뜻입니다. 니골라는 ‘그가 백성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위에 굴림하며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점쟁이의 교훈입니다. 성공과 행운을 위해서는 신앙을 팔아먹도록 만드는 교훈입니다(유다서 1:11).

요한 당시에 발람의 추종자들은 우상숭배논 거부하지만, 우상에게 봉헌한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식사는 영양 보충의 기회가 아니라 사회적 교제의 자리입니다. 집단의 응집을 강화하고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의식입니다. 발람의 추종자들은 상권을 장악한 길드에 참여하고, 황제 숭배 의례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전에 가서 음식을 먹습니다. 이방 신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헛것에 제사를 드린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거짓 교사들은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주장하여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다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낳았고, 결국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도록 만드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탐욕은 부요를 가져오고, 신앙은 가난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발람은 누구입니까?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해야 교회가 사회적 영향 권력을 끼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교회가 부와 권력과 손을 잡고 그들을 옹호하게 만듭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교리적 순결성에 너무 무관심하다가, 타협적이고, 혼합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습니다.

(5) 약속(17)

그리스도는 버가모 교회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발람의 길을 따를 것입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까? 감춰진 만나와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은 잔치의 초대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감춰진 만나’는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이 누린 만나를 상기시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의 상징입니다. 흰 돌은 보통 사면 투표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출입증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흰 돌은 세상 권력이 우상숭배 하는 제의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범죄로 판결한 결정을 뒤집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들 약속은 우상숭배의 종교, 사회적 환경 속에서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특히 거짓 진리에 대해서는 절대로 수용해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요즘 내 믿음을 위협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은 무엇입니까? 안디바의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버가모 교회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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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1)


일곱 교회(1) : 에베소 교회

요한계시록 2장 1-7절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 중에 청춘의 연인들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항상 같이 다니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러던 종종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첫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같은 지역에 많은 다른 교회들이 있었지만, 요한은 당시의 묵시문학처럼 숫자를 통해 의미를 창출합니다. 첫 번째 가장 좋지 않은 모델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를 소개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이방인 세계에서 기독교가 시작하는 무렵에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성의 사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전체 교회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정확하게 관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주는 분이기에 큰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면면히 알고 있기에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잘 알고 계십니다. 무슨 정보나 소문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속에 그리스도는 함께 계셔서 코이노니아를 하시기에, 경험적으로 잘 아십니다.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1)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교회 사이에 계시는 분입니다(요한계시록 1:12-13, 30). 우리 주님은 교회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놀랍도록 세미하고 정확하게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각 교회의 장점을 격려하시고, 그 단점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물론 일일이 점검하면서 지적하시는 귀찮은 분은 아닙니다. 너그럽게 신실하게 기다리십니다.

(1) 수신자(1a)

에베소 교회는 복음이 처음 소아시아에 전파될 때 그곳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 행정관이 소아시아에 방문할 때 들어가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 지역의 관문 도시였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b)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메시지를 보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내용은 교회마다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의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점검하시는 제사장처럼 등장하십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모습은 부활 승천하셔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에베소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빈틈없이 살피십니다. 그래서 ‘안다’고 하십니다. 신의 부재 시대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바로 이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2-3)

거짓은 사람을 속이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교회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거짓된 자들의 특징은 사칭한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더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자칭 사도라 하고, 거짓 유대는 자칭 유대인이라며, 거짓 선지자는 자칭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보낸 메시지 중에 첫 대상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는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인내했으며, 악한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첫째는 행위(works)와 수고(labors)와 인내(endurance)입니다. 이 세 가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유사 합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데살로니가전서 1:3), 기독교 신앙에서 세 개의 기둥인 믿음, 소망, 사랑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믿음은 행위로 증명됩니다. 사랑은 수고로 열매를 맺습니다. 소망은 인내로 생명력을 가진다. 둘째는 교리적 정통성(데살로니가전서 1:3)과 신학적 분별력으로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를 검증하여 배척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순회 사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순회 사역을 하면서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손 대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순회 사역자들 중에는 잘못된 교리와 도덕적 흠결과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견유철학자들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말은 달콤한데,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말을 내뱉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들과 비교될까봐 매우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량 사역을 하며 친히 일하였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분별이 어렵습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검증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무법자들과 이단에 대해서는 추호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비느하스와 마카비와 같은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단 척결에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책망(4)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점점 형식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밥벌이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에베소 교회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마치 현재 에베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현재의 에베소는 에게 해로부터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신약 시대에는 소아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였습니다.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지리적인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가이스텔 강의 입구에 있는 에베소는 강에서 내려오는 퇴적물들로 항구가 막히고 습지로 변해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Orthodoxy)을 지키다가 정행(Orthopraxy)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칭찬’만 보면 에베소 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균형 잡힌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책망한 바리새인들의 냄새가 납니다(누가복음 11:42). 손 대접하기와 구제, 목회적 배려와 훈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와 수고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마르다와 같이 비난하는 마음과 불평이 생깁니다. 게으른 사람은 핑계를 대기 일쑤고, 열정적인 사람은 남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교리적 순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웃과 사회에 담을 쌓고 경계를 하는 태도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내부의 문제에 골몰하다가 외부에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주변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이 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진보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인 태도를 지닙니다. ‘정통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킨다.’(William Barclay). 첫사랑은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의 사랑입니다. 끼리끼리 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잃어버렸다’(아피에미,ἀΦίημι)는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결혼관계로 말하자면 이혼의 위기에 처했습니다(예레미야 2:2).계시록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마태복음 24:12).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고 동화되어가는 사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다음 세대는 첫 세대가 가지고 있던 복음의 열정을 상실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해결책(5-7)

사람들은 외형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열심히 헌신하고 있으면 사랑한다고 착각합니다. 교회의 일을 해나갈 때 습관적이고 의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의 숨은 동기를 보고 계십니다. 자신도 모르는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5-7)

교회 사이를 다니셨던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보시면서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기꺼이 고난을 수고와 인내로 받았습니다. 또한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을 밝혀내고 거절했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1) 권고(5-6)

에베소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망각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심각한 경고를 받습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이 없습니다. 교회의 현재 상태에 대한 경고입니다. ‘촛대’는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백성의 상징입니다(스가랴 4장). 이스라엘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이방인의 빛입니다(이사야 42:6-7; 49:6).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마태복음 5:14). 촛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일곱 촛대 메노라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며 세상을 밝혀 비추는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는 교회는 촛대가 서있는 교회입니다(참조. 스가랴 4:11-14).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음을 선언하는 영적인 사망 선고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기억과 회개입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은 ‘생각하고’로 번역하지만, 성경 전승에서 기억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단어 므네모뉴오(μνημογευω)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상고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역사적 신앙인 기독교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적 신앙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신앙적 회귀 본능은 신앙 생명에 본질적입니다. 신앙적 기억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방향 감각을 사실합니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 기억에 정초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잠회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방향 재설정(re-orientarion)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디모데후서 1:6).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앞 세대와 같이 신실한 복음 증거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중해 사회에서 사랑은 들러붙는 것(attachment)이고, 미움은 떨어지는 것(detachment)입니다. 그래도 에베소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니골라 당을 미워합니다. 니골라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니골라(백성을 정복한다)와 발람(백성을 삼킨다)은 같은 뜻을 가진 헬라어와 아람어입니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점쟁이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훼손한 장본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미움은 거리를 두고 떨어트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니카오)와 니골라(니콜라이테스 백성을 정복하다)는 언어적 유희입니다.

(2) 상급(7)

예수님의 말씀은 성려의 말씀과 동일시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후 인간이 접근할 수 없던 생명나무는(창세기 3:24), 새 예루살렘에 다시 등장합니다(22:2).

생명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이 에덴에서와 같은 친밀한 교제의 회복을 원한다는 초청입니다. 인류와 신앙의 원천으로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선물들, 하나님과의 격의 없는 친밀한 교제뿐 아니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가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원래 소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입니다. 과연 관문 도시에 자리를 잡은 교회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합당합니다. 창조의 원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베소 교회는 반드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와 형편을 아시고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바라며 더욱 수고하고 인내해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또한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기 위해 회개하고 고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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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1-02)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장 9-20절


병든 부모님께서 계시면 자녀들이 수고합니다. 자녀들은 최선을 다해서 부모님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간호합니다. 열심히 간호의 결과로 부모님의 건강이 좋아졌다면, 그 동안에 자녀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건강해진 것 하나만으로도 그 동안 수고에 대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복음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모든 고난을 씻어줄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친 제자입니다. 그는 지중해 있는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으로 계시를 받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인자’ 같은 이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환상을 보고 그분이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부분은 시각적인 환상으로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요한의 자기소개서(9-11)

‘사명자는 고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데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환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뜻을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동참시켜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함께 사명을 감당하며 시련을 견뎌내는 공동체로 성장해야 합니다.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9-11)

사도 요한은 안락한 환경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유배를 당해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밧모 섬에서 기도하던 중에 이 환상들을 보고 본 것입니다. 본 환경을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1) 요한과 그의 소명(9-10)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모든 교회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곳마다 거친 박해의 파도가 휩쓸고 있었습니다.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소개는 요한이 영적 권위로 지시하거나 교육하려 들지 않고, 다만 수신자들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당시 성도들과 함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밝힙니다. 편지를 읽는 수신자들과 함께 고난을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이지만 성도들을 향해 동일하게 ‘형제’라고 부릅니다. 다른 지역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처럼 요한 자신도 동일한 고난에 동참하며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이해한 호칭입니다.

유배당한 밧모 섬에서 바울은 계시록을 받았습니다. 계시를 받을 당시를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0)라고 회상합니다. ‘주의 날’은 ‘주님에게 속한 날’ 즉, 그분이 부활하셔서 그분의 날로 인정된 일요일을 가리키는 ‘주일’입니다. 그는 주일날에 예배드리면서 성령의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성령의 영감아래 있던 것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성령을 통해 ‘나팔소리’와 같은 큰 음성으로 계시가 임했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크고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요한이 받은 환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예언하신 말씀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1:19, 4:1,2; 17:3; 21:10).

(2)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11)

요한은 초자연적인 ‘나팔 소리’와 같은 속에서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당시 고난당한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물론 당시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한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장차 심판의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거짓 선지자들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는 위로의 책이지 공포의 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만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요한처럼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보시고 인도하심을 알게 될 때, 더욱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모습(12-16)

예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감찰하시고 최종적인 심판의 권능으로 온 우주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생명을 위협하며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그들마저 심판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하면 주님께서 먼저 싸워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12-16)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는 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핍박을 견디지 못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사람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위로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 위로는 고난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 계심을 밝힙니다.

(1) 일곱 금 촛대 환상(12)

요한은 뒤에서 들리는 ‘편지를 보내라’라는 소리에 몸을 돌이켰습니다(12). 틀림없이 그 큰 음성으로 말씀하신 분이 위대하고 위엄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요한은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와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처음 본 것은 일곱 촛대입니다. 일곱 촛대는 하나의 줄기에 일곱 자기 모양을 한 촛대인데, 스가랴 4장에서 온 것입니다(스가랴 4:1-14). 스가랴에서는 일곱 촛대가 하나님의 일곱 눈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일곱 영들은 촛대로 상징된 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입에 참여하십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인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20).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촛대에 임재하시고, 일곱별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2) 인자와 같은 이의 환상(13-16)

요한이 보았던 환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분은 다양한 모습으로 비추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영광과 능력(6)을 회화적으로 묘사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초월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일곱 촛대뿐만 아니라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를 봅니다. 이 ‘인자 같은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은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것은 모종의 방식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함께 계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모습은 대제사장이 입던 옷입니다(출애굽기 25:6; 28:4; 29:5; 39:29; 에스겔 9:2; 28:4; 39:29; 다니엘 1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을 직접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금띠는 왕의 권세와 부요함을 상징합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완성자이심을 알리십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온 인류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끄시는 중보자이심을 보여줍니다.

더 나가서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은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부리는 분이라는 것이며,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은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또한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비단 얼굴뿐만 아니라 그분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요한이 본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인 양털, 눈, 불꽃, 청동, 큰 물소리와 같이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권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위엄 찬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서, 압도되어 그리스도의 발 앞에 요한은 쓰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완벽하게 성취해 가십니다. 오늘도 대제사장으로서 성도들과 교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핍박당하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겠습니까! 외형적으로 핍박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영광의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 사이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으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요한의 반응과 예수님의 명령(17-20)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만물의 시작과 끝은 아래 있고, 부활의 권능으로 죽음의 권세까지 무력화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고난을 인내하는 성도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요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17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7-20)

성경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본 사람들마다 모두 그 위엄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죄인들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쓰러졌습니다. 요한 또한 그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한 행동이 동일합니다. 

(1) 요한의 반응(17)

요한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친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지금까지 지상에서 사역하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의 초월적인 모습 앞에 요한은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모습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입니다(에스겔 1:28; 다니엘 8:17; 10:9; 마태복음 17:6; 사도행전 26:14).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인자’로 계시된 ‘권세가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환난에 동참하던 신실한 종이었지만, 순결하고 거룩한 예수님 앞에서 서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현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첫 말씀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요한뿐만 아니라 고난당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의로의 말씀입니다. 그분은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를 줍니다. ‘처음과 나중’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원이며 역사의 마지막 되는 분이시기 때문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와 소망을 북돋웁니다. 반면에 짐승(로마 제국)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현현이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2) 그리스도의 현현(18)

첫째, 예수님께서는 ‘곧 살아 있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존(永存)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천국뿐만 아니라 사망과 음부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라고 소개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로마 제국의 권세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 안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패는 사탄의 공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 고난을 통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졌습니다.

(3) 그리스도의 미래(19)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8-19)고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본 사건들을 엄격하게 시간 구분을 가리켜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이 어구는 ‘예언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공식’입니다. 요한이 본 요한계시록에 나온 전체 환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기록하여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지만(1), 그것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도 망라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4) 요한이 본 환상의 설명(20)

요한은 자기가 성령에 인도하심으로 본 것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요한이 본 ‘일곱 금 촛대’(12)은 일곱 교회를 가리키고, ‘일곱 별’(16)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사자’란 단어는 (anggeloi/앙겔로이)인데 ‘사자’란 번역은 애매모호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공동체의 수호천사들을 의미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차선으로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하늘의 대응 천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에 처한 일곱 교회를 살피고 지키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교회의 주인입니다. 세상은 악한 자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바라보고 통치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에 당한 고난은 바로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장차 받게 될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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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1-0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 1장 1-8절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장차 속히 이루실 일들을 보여 주시며 그 내용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계시록을 읽을 때,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해 기대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하면 왠지 어렵고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많은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접하길 꺼려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요한계시록을 금기 서적으로 취급하기도 했지만,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서 덮어두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이 책을 기록한 당시에는 성도들이 로마에 의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곧 다시 오실 것이며, 그들을 새하늘과 새땅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인내로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라고 부탁하신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입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에게 계시를 주신 이유(1-3)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무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인간적으로 지식과 총명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새로운 영의 눈으로 영의 것을 보아야만 충분히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 책은 대표적인 계시의 책입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먼저 그 계시를 주신 분이 누구인지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1-2)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절에서 요한계시록과 계시의 순서 및 계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전달과정을 설명합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계시록은 말씀의 권위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 줍니다.

 (1) 표제(1a)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라고 계시록을 시작합니다. 본 편지는 요한의 계시가 아니라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 친히 받은 계시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계시라는 뜻입니다. ‘계시’를 아니라 ‘묵시’라고 해야 옳습니다. ‘묵시’는 계시이고 예언이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의 늪에서 피어오르는 소망의 꽃이 묵시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입니다. 하늘로부터 시공간을 뚫고 질곡의 현실을 돌파할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인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상징과 은유의 세계로 초대하여, 현실을 넘어설 통찰력과 비판력과 저항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묵시는 구약 이스라엘의 선지자 전통에 서서 예언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2) 계시의 경로와 증언(1b-2) 

요한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일어날 일은 언제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초점은 어느 시점에 묵시가 성취될 것인지에 있지 않고,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가까움과 빠름이 아닌 즉각성을 의미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장차 속히 될 일들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다 기록하므로 증언합니다. 이 말씀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말씀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반적으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승리 그리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계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감추어진 것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이성으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만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영안이 열려지지 않는 타락한 이성으로 요한계시록을 접근한다면 무리수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난을 받은 성도들에게 ‘장차 될 일’(1:1;19)을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제국의 핍박 때문에 기독교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소망을 주기 위해 쓴 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현재와 임박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보이시려고 계획하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그 계획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사말-기원과 축원(3-6)

과거 잘못된 종말론자들의 주장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종말에 대한 논의 및 거론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점차 너무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지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 그만큼 세상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져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의미에서 준비된 성도를 만들어 갑니다. 이제 요한은 이 편지에 대한 수신자들을 소개합니다.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3-6)

밧모섬 있던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당시 편지 형식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서두에서 자신이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함으로 이 편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계시임을 밝힙니다. 이 편지를 통해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하나님과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과 일곱 영이신 성령님의 이름으로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1) 지복(至福) 선언(3)

요한계시록에는 7가지 복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그 첫 번째 복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3)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을 전제합니다. ‘예배 중에 말씀을 읽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목적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계시의 내용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때가 가깝다’는 것으로 종말론적 긴박감을 더합니다. 신구약의 지복 선언(예:시편 1:1; 마태복음의 팔복, 누가의 사복사화)은 반전의 언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번의 지복 선언이 있습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지복선언은 예언 메시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실 충만한 시적인 축복을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나타난 7가지 복
1)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켜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2) 계 14:13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3)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 계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5) 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6)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으리라.
7)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2) 수신자(4-5a)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는 먼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온 소아시아, 즉 지금 터키에 해당하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당시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장차 될 일이므로 이후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편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기원(5b)

요한은 서두에서 요한계시록의 근원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함으로 이 편지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로 기록한 계시임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짜 나라인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핍박을 받는 성도들에게 진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➀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십니다. 이 표현은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계시하신 의미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표현은 바로 ‘여호와’로 지칭하는 하나님의 고유명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며, 역사의 시작이며 끝이십니다.

‘오실 자’는 하나님께서는 미래적 실존이 아닌 구원과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도래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사탄이 가짜임을 폭로합니다. 사탄은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자’(17:8,11)입니다. 사탄의 세력으로 세워진 로마제국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러도, 여호와 하나님과 견줄 수 없는 짝퉁 나라임을 증명합니다.

➁ 성령 하나님

성령님을 ‘그(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 또한 성령님을 4:5에서는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을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에 계십니다.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동등한 권세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성령님을 ‘일곱 영’으로 표현했겠습니까? 이사야 11:2와 스가랴 4:2-7을 결합하여 인유(引誘)한 표현입니다. 이사야 11:2에서 성령은 지략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과 여호와를 아는 영으로, 또 스가랴에서는 이는 성전 안의 일곱 가지가 달린 금촛대(메노라)로 표현합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성령은 교회에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메시아의 종말론적 통치를 확립하기 위한 장비를 구비하도록 하십니다. 스가랴는 일곱 영을 4번 언급한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축은 힘으로도 아니고 능으로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합니다(스가랴 4:6).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는 짐승과 같은 세상 힘이 아닌 신적일 영으로 이뤄집니다. 스가랴 4:3에서 일곱 등물은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일곱 영이신 성령님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감찰하십니다(역대하 16:9). 성령님께서 선택한 자는 무엇이든지 강력하게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세상의 짐승이 명백하게 불가항력적인 힘과 세계적인 힘을 과시하는 세상에서 성령은 여전히 신실한 종을 찾으시고, 능력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십니다.

➂ 성자 하나님

요한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성자 그리스도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5)라고 소개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그 의 능력과 권세를 이 세상에 실현하실 성령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시고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 땅에 온전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표현으로 설명되는데, 1) 충성된 증인 2)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 3)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십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증인이 되셨습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사야 43:10-13과 시편 89:27,37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 그리스도가 죽음에 이르는 핍박을 당하시만, 아버지에 대한 신실한 증인으로 참고 견딘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 신실한 증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이사야 43:10-13). 사망 권세를 이기고 우주의 통치자로(이사야 55:4) 하나님 보좌 우편에 등극합니다(시편 110:1).

(4) 축원(6)

요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6)라고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를 사랑하고, 둘째, 그의 피로 죄에서 해방하셨으며, 셋째,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형식으로는 영광송이지만, 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하시고 안부를 전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나라와 제사장’으로 이중직분을 수행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은 출애굽기 19:6과 베드로전서 2:9을 반합니다.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 또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여 이중직을 수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증인으로 죽기까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며 증언하셨습니다. 부활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개시입니다. 교회도 이방 사회 가운데서 신실한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죽기까지 고난과 순교를 당하고 복음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것으로 신실하게 왕 같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소명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수되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옛 이스라엘의 직무를 전수받아서 수행하여야 합니다.

 

선언과 계시(7-8)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신 분입니다. 모든 세상과 민족들은 하나님을 세상의 주관자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어야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보다 먼저 다가오셔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7-8)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시면 한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과 민족들과 다시 회복하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양으로 죽으심으로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1) 선언(7)

요한은 송영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사도행전 1:9-11). 실제로 그리스도를 처형했던 자들과 대적했던 자들이 비록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들은 그들이 찌른 자를 보게 될 것입니다(스가랴 12:10).

이 경건한 남은 자들은 민족을 대표할 것입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의 범위를 초월하여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7)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열방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온다는 소망은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실현되는 방법에 대한 계시는 전적으로 새롭습니다. 이때까지 봉함된 두루마리의 내용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개시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열방의 멸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열방의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7절은 교회가 여기에 동참하라는 선언입니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8)

요한계시록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8)라고 계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과 끝이신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역사의 원천이요 목표이십니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과 함께 인사말을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림은 초라한 베들레헴에 오셨지만, 재림은 장차 구름을 타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본 모습 그대로 오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승리자로 오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고,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될 것이며, 짐승을 따르던 자들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개로 인사말을 마무리합니까? 묵시를 받은 종은 계시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위임을 받은 자는 누구의 권위로 직무를 수행하는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핍박을 받고 있던 교회는 짓눌려서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타협과 순응과 동화만이 살 길로 보이지만, 교회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세상에 파송 받았습니다. 교회는 로마제국과 대결할 신분과 사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은 영광중에 재림하시는 모습에 대한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합니까? 등과 기름이 준비된 신부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임하시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 분을 따라 살아가면 진정한 행복한 삶을 맛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 준비는 인간의 방법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신대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대로 순종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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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입니다. 대부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해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종종 사람들이 자의적인 유추해석으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본 주해는 요한계시록을 너무 교리와 조직, 그리고 상징들에 대해 지나치게 해석하려 들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의하게 주해를 시도했습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을 더 알기를 원하신다면 구체적으로 다룬 다른 주석들을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평신도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쉽고 평이하게 접근해 나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저자인지를 밝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본에서 찾는 내증(內證)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전승을 통하여 증거를 찾는 외증(外證)가 있습니다.

(1) 내증 : 요한계시록은 요한 문헌 중에서 저자를 밝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계시록 앞부분에서 세 번(1:1,4,9) 마지막 부분에서 한 번(22:8) 소개합니다. 더 나가서 자신을 계시록에 나타난 일들의 목격자요(1:2,19-20;22:8) 참여자라고 소개합니다(1:2; 참고22:18).

(2) 외증 : 주후 2세기까지는 전통 초대교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을 저자로 인정했습니다. 이레네우스, 클레맨트, 오리겐, 터툴리안과 같은 교부들 또한 저서에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

요한계시록의 기록기시에 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초기연대(주후 64-69년)와 후기연대(주후 95-96년)로 양분됩니다. 확실한 증거들은 찾기 어렵지만, 학자들 사이에는 후기연대, 즉 도미시안 황제(즉위기간 주후 81-96) 말기인 주후 95-96년을 가장 선호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장소

사도 요한은 터키와 그리스 중간인 에게 해에 떠있는 밧모(Patmos) 섬에서 기록하였습니다(1:9). 이 섬은 로마 제국의 유배지로 사용했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증거로 인해 그 섬에 유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1:9).

 

요한계시록의 수신자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는 1세기 말엽(주후 95-96년), 당시에 터키 지방 소아시아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들입니다(1:4,11). 그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주님께 직접적인 명령으로 계시록을 기록하고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1:11,19; 2:1 등).

 

요한계시록의 배경

오순절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 이방 종교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종교에 대해 관대했던 로마가 주후 1세기말에 대제국을 건설한 후 황제 숭배사상을 도입하였습니다. 마침내 로마에서는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동기

요한계시록의 일차적인 기록 동기는 심각한 박해로 고난당하며 배교의 유혹을 받고 있던 당시 성도들을 위로하고 고난을 이겨낸 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사단의 세력과 더불어 투쟁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특히 종말의 때에 사단의 박해를 받게 될 미래의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이후에 있을 심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보여줌으로써 승리하는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의 세속적 역사 및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의 끝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종말의 책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 및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본서는 새로운 시작의 책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

요한계시록은 이미 다른 성경에서 다룬 여러 기록들에 대해 최종적 성취의 성격을 지니고 띠고 있습니다. 본서에 나타난 기본 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일들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될 것입니다. 이를 자각하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이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2) 재림하실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계획하셨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 구원의 최종계획은 필히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가 바로 그리스도 재림의 날입니다.

(3) 성도의 고난

하나님 뜻을 거역한 사단은 인간을 미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이 세상을 환란에 빠뜨릴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은 역사 가운데 계속 있어 왔으나 역사의 마지막, 즉 그리스도 재림의 날 직전에 가장 심각한 형태로 임할 것입니다.

(4) 마지막 심판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구속사를 역행한 모든 무리들을 심판하신다. 이 심판은 역사상 있어 왔던 모든 심판보다 훨씬 심각할 뿐 아니라 다시 반복되지 않는 최후적 성격을 지닌다.

(5) 신천지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계속된 인류의 범죄로 부패하였던 이 세상은 없어지고 오직 의와 평화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다. 성도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신천 신지의 도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

1:1-8 서론

1:9-3:22 첫째 환상 :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일곱 교회

   (1) 그리스도의 환상 계시(1:9-20)

    (2)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2:1-3:22)

4:1-16:21 둘째 환상 : 하늘 보좌 환상과 세 가지 심판 시리즈

    (1) 하늘 보좌 환상(4:1-5:14)

        ➀ 성부 하나님 중심의 구심적 예배(4:1-11)

        ➁ 어린양 그리스도 중심의 원심적 예배(5:1-14)

    (2) 일곱 인 심판시리즈(6:1-8:5)

        ➀ 네 가지 짧은 심판(6:1-8)

        ➁ 두 가지 긴 심판(6:9-17)

        ➂ 144,000의 삽화(7:1-17)

        ➃ 일곱째 인 심판(8:1,3-5)

    (3) 일곱 나팔 심판 시리즈(8:2, 8:5-9:21)

        ➀ 네 가지 짧은 심판(8:6-13)

        ➁ 두 가지 긴 심판(9:1-21)

        ➂ 작은 두루마리와 두 증인의 삽화(10:1-11:14)

        ➃ 일곱째 나팔 심판(11:15-19)

    (4) 두루마리 예언(12:1-15:4)

        ➀ 용과 여자의 전투(12:1-17)

        ➁ 두 짐승과 666(13:1-18)

        ➂ 어린양의 승리와 복음 선포 그리고 마지막 추수(14:1-20)

        ➃ 어린양의 노래(15:2-4)

     (5)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15:1,15:5-16,21)

        ➀ 일곱 대접 삼판의 도입(15:1,5-8)

        ➁ 네 가지 짧은 심판(16:1-9)

        ➂ 세 가지 긴 심판(16:10-21)

17:1-21:8 셋째 환상 : 음녀 바벨론 환상과 새 하늘과 새 땅

    (1) 음녀 바벨론(17:1-19:10)

    (2) 바벨론으로부터 새 예루살렘으로의 전이(19:11-21:8)

21:9-22:5 넷째 환상 : 신부 새 예루살렘

22:6-2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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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6-02)


예수 그리스도만 위한 성도의 삶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마치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낸 성취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 구속의 은혜,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그분만을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적으로 정리해서 강조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시켰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옛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창조가 결정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놀라운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빌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이기적인 목적(11-1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제부터 삶의 우선순위를 예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 사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당신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합니다.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1-13)

대적자들은 할례를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몸의 소욕을 죽이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았으니 그 욕망을 절제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할례를 자신들의 성과물로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오로지 관심은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1) 바울의 친서(11)

바울 당시에 서신을 보낼 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말로하고 가까운 사람이 대신 기록하여 전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대서인(代書人)을 통해 편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넣음으로써 그 편지의 진정성을 입증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친필 사인과 같은 역할 한다고 하겠습니다. 간혹 결론부에서 첨가하는 중요한 내용을 직접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본 절부터는 직접 친필로 쓰고 있습니다. 편지 전체가 자기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서신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의 이름을 도용해서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낼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견해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실히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결론 부분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2) 잘못된 가르침의 동기(12-13)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격양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12-1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적자들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사실상 반쪽짜리로 만들고, 혼합주의 신앙과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 믿음을 대단한 것으로 만든다면 은혜를 모르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루는 삶,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중심 메시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본문의 ‘육체’는 다소 중립적입니다.

여기서는 이 세대에 속한 삶의 체계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악한 속성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 다음 세대의 삶이 아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한다’는 표현은 ‘옛 세대의 삶의 체계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옛 세대에 속한 삶의 체계 중 하나가 유대교입니다. 그 유대교의 체계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전체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유대교의 주류 집단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한 셈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할례를 받은 그들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베드로의 행동이 일관되지 못함(2:14)을 지적하면서 본문의 유사한 비판을 가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유대교 율법 속에서 일관되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으로 살 것을 강요한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삶의 체계가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 이전에 거짓 교사들이 자신도 그 체계 속에서 일관되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부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유대인화 함으로써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기의 자랑거리를 쌓으려 할 뿐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하례와 율법을 부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새로운 창조(14-16)

종종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그 사랑의 가치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도 남을 가치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한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십자가의 가치와 사랑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4-16)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육체, 곧 옛 세대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려고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는 이 자랑을 가장 강한 형태의 이중 부정문을 사용하여 전달합니다. ‘메 게노이토(μη γενοιτο)’라는 표현 자체만으로도 강한 표현인데 이중 부정문 형식을 빌려 강조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그 무엇이라도 자랑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14)라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십자가 외에’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십자가’ 앞에 있는 전치사 ‘엔(εν)’의 의미를 살려 ‘십자가에 관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삶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12-13절의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그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는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그 앞의 ‘십자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후자가 조금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이 나에 대해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코스모스(κοσμος)’는 위의 ‘육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세상’ 역시 하나님이 없는 삶의 체계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러한 하나님 없는 세상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표현은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표현과 합하여 옛 세대의 삶을 떠나 다음 세대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결국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이 악한 세대’(1:4)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음 세대의 삶을 시작하였음으로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힌다’라는 바울의 고백은 당연한 귀결입니다(14).

‘육체’와 ‘세상’으로 대변되는 이전 세대에서는 할례와 무할례의 구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미 살기 시작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할례의 여부가 무의미합니다(15). 그것은 할례가 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15)이라는 번역보다 ‘새로운 창조’가 더 낳은 번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을 시작으로 그 새로운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에 속해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갈 것인지의 질문이 있을 뿐입니다.

16절의 ‘규례’는 ‘기준’ 혹은 ‘원칙’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여 ‘이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준은 14-15절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기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창조 속에서 살아가는가?’입니다. 바울은 ‘이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를 구합니다.

바울이 첨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16) 이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갑자기 육신적 이스라엘에게도 평화와 자비를 신포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서신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다룬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는 곧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3:16절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규정한 바울은 서신 내내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약속의 자녀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로 서신을 끝내기 전에 바울은 이 짧은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마지막 인사(17-18)

마지막이라고 하면 괜히 섭섭해지고 슬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은 당사자의 진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화는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편지는 다시 뵙길 원한다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생애 마지막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7-18)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기에 앞으로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수고로움을 주자 말라는 명령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편지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 방법이고 바울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17)는 말라고 합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 중 당한 여러 공격과 그 연장 선상에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공격을 기억하게 합니다. 자기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성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내세울 것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뿐이란 것입니다. ‘흔적’으로 번역된 원어 ‘스티그마(στιγμα)’는 몸에 새겨진 ‘노예의 표식’이나 ‘종교인들의 문신’을 일컫는 말로, 고대 사회의 관행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종의 표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티그마’가 타인도 볼 수 있는 표식임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많은 핍박과 그로 인해 얻은 육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자신이 4장 13-14절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바울에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얻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빌면서 편지를 시작했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6:18)을 빌며 편지를 끝맺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창조주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 결정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다시 한 번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정리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여러 가지 대안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사역을 위해서 율법이 있었고,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불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그와 동행한 흔적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출입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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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6-01)


사랑의 실천에 대한 권면

갈라디아서 6장 1-10절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기능은 하나님을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더욱 율법을 사랑하고 그 속애 담긴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여 율법이 주신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울은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서신을 마무리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 여러 가지 윤리적 권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을 살필 뿐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르치는 자를 지원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며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재차 강조합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권면(1-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의미는 은혜로 구원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도록 가능하게 해주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1-2)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과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을 그 열매를 가지고 비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에 기록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교훈은 비록 실천적 권면이기는 하나 역시 이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5:16-26).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은 갈라디아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기술한 부분으로 교회 내 범죄자들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원활한 교제를 권면한 것으로 본 서신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공동체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야 할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지칭하면서 이 단락을 이전 단락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킵니다. 분쟁에 대한 화해를 권면했던 바울은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성도가 지향해야 할 생활 규범을 제시합니다.

(1)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음(1a)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는지에 대해 다룹니다.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범죄는 고의적인 범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혹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불법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령한 너희’라고 지칭한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24)이란 표현과 같은 의미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연약함으로 범죄한 자들에 대해 배척하지 말고,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회복시켜주라’는 것이 바울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건면하여 범죄한 자로 하여금 그 죄 가운데서 돌이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5:32).

(2) 유혹을 당하지 않도록(1b)

그렇게 범죄한 사람을 세워주면서 ‘자신도 유혹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책망하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당시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두드러진 태도였습니다(요한복음 8:3).

하지만 성도들은 그들과 달리 범죄한 자들을 권면하고 또한 바르게 세우는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죄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존재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의 행동을 더욱 자중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취할 삶의 태도이기 떄문입니다.

(3) 서로 자기 짐을 지라(2)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라’고 명령합니다. 이곳에서 ‘짐’은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일’(마태복음 20:12)을 뜻합니다.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 즉 범죄함으로 겪게 되는 수고와 고통을 서로 같이 나누는데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법’은 율법이나 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은 이미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이 이웃 사랑의 명령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웃 사랑의 명령으로 성취된 율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짐으로써 이웃 사랑의 명령을 성취하게 된다는 의미는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법이 이웃 사랑의 명령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바로 그 사랑의 정신으로 보여주신 모든 삶과 거기에 내포된 윤리적 명령들로 그리스도의 법을 확장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동안 이웃이 될 수 없는 세리와 죄인들을 이웃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다시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의 신실함(2:16; 20)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연약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처럼 낮아지고 비움으로서 이웃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채워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만하지 말라는 권면(3-5)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조심스럽게 살펴야 합니다. 쉽게 평가해서도 너무 율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타인의 경우에는 원석에서 순금을 만들어내듯 꼼꼼하게 살피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대충 쉽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반대로 행동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3-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 속에 있는 분쟁과 다툼을 의식하며 이미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5:26)고 권면했었습니다. 다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허영과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는 사람 또는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1) 헛된 교만(3)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보면서, 허영과 자기 자랑에 빠지지는 일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고합니다. 특히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서 분쟁을 야기 시키고 또한 성도들을 이간질 시켰던 자칭 진리를 선포한다는 거짓 선생들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온유한 심령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이 교만입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1-4장)에서 볼 수 있듯이, 명예와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권 속에 살던 당시의 이방인들에게 자기 자랑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인정은 모든 공적인 삶의 목표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까지도 자기 자랑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등에서 모두 교인들 간의 다툼과 분쟁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통해 의롭게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성경에서는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원어의 ‘프레나파타(ψρεναπατα)’는 ‘마음을 타락시킨다’는 뜻입니다. 교만한 자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의롭게 생각해서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어 멸망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에서 자주 교훈하고 있습니다(잠언 16:18; 야보고서 4:6).

(2) 자기 점검(4)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활 속을 점검함으로 규모 있는 실제적인 삶을 살도록 권합니다. ‘점검하라’는 참과 거짓에 엄격하며 행동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을 참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자랑거리를 찾는 나쁜 습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일을 점검하라고 명령했지만, 정작 그 점검의 기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가 말했던 ‘그리스도의 법’이나 ‘하나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자기를 점검하면’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고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랑거리를 찾는 나쁜 습성(4)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외형적 행동을 연약하여 범죄하는 자들과 견주어 자랑거리로 내세웁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런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분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그리스도의 법’에 비추는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악에서 승리하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할 만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고린도후서 1:12). 그것만 자랑합니다.

(3) 자기 짐을 지라(5)

사도 바울은 더 나가서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5)는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각자 자기의 일을 살피라’(4)는 명령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과 함께 자기의 짐도 져야 한 것입니다. 자기 일을 살피는 것이 자기 무거운 짐입니다.

이곳에서 ‘짐’은 군인들이 행군할 때 지는 군장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개인 형편에 따라 담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함께 자기의 짐도 져야 하는데,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이 바로 자신의 ‘무거운 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 모릅니다. 참 이웃 사랑은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기다림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역지사지가 가능합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을 통해서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는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일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성실히 수행하라는 신앙적 권면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며 살라는 권면(6-10)

교회는 크든 적든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큰 교회라고 많이 누리고 작은 교회라고 힘들어지면 공동체 사역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립하지 못한 작은 교회가 역부족일 때는 큰 교회에서 후원해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가 공생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사도 바울은 스승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바울 외에 다른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성도들에게 사례를 받는 목회자도 있지만, 순회 전도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1) 가르치는 자와 함께(6)

사도 바울은 먼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분명히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눈여겨 볼 것은 갈라디아 교회들 속에 바울을 제외하고 소위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작위로 거짓 선생들까지를 포함하지 않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은 곧 교사들에게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자신에게도 물질적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그린도전서 9:12),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희생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 권리를 희생하더라도 다른 말씀 사역자들을 위해서는 지원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선배 사역자 바울의 사랑 많은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심는 대로 거둔다(7-8)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7)는 이후에 따라올 경고의 내용을 소개하는 도입부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든다’는 두 표현은 당시에 잘 알려진 격언입니다. 이러한 도입부과 격언들은 8절의 내용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법칙은 성도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심는 데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은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의 특징인 ‘육체’ 곧 ‘죄악된 본성’을 위하여 심는 자는 결국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한편으로 ‘성령’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

주후 1세기경 회심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족의 종교와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웃들로부터 소외와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철저한 회심을 요구하는 진리일수록 버려야 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는 그것이 곧 썩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얻는 길이라는 확신을 전해줍니다.

(3) 낙심하지 말라(9-10)

거대한 제국 속에 흩어져 있는 조그만 가정 교회들이 제국의 억압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성령을 위하여 끊임없이 심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바울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선한 일을 하자’고 종용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이 일은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자’(9)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령을 따라 심은 선행의 씨앗은 반드시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러한 선행을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욕하는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특별한 선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

거대한 제국 속에서 소수집단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견고한 신앙공동체와 그 속에서만 가능했을 진실한 교제와 나눔이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분쟁과 다툼을 멈추지 않는다면, 바울이 5장 21절에서 경고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장신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썩어서 없어질 가치가 아닌 영원히 남을 가치여야 합니다. 성령 안에 거하여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은 율법에 온기를 불어넣고 참 생명력을 갖게 하여, 율법의 본래 정신을 따라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율법은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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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02)


육체의 일과 성령의 사역

갈라디아서 5장 13-26절


세상적인 관점에서 죄는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상해를 입혔는지 여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 삶으라고 말합니다. 그렀다면, 영생은 이타적인 삶입니다. 타인을 섬기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가 투기하고 노엽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의 핵심은 바로 회생적인 사랑입니다. 성령의 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율법에서 자유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놓인 삶은 잘못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방종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율법으로부터는 자유 하였으나 오히려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13-1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사망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성도의 자유는 섬김을 위한 자유입니다. 스스로 주장하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사랑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섬기는 사랑이었고,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법이었습니다.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3-1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옛 삶에서 해방시켜 의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데는 위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빨리 망각한 채 세상적인 개념의 자유로 돌아갑니다.

(1) 자유를 위한 부르심(13)

①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반복적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유한 자유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강조하게 된 이유는 복음을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 성도들의 궁극적인 자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중심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②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바울은 ‘그러나 그 자유로 유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란 부분을 직역하면, ‘너희의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바꾸지 말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방종의 도약대로 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곧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이 ‘새 언약’을 통해 자유를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만큼 율법적 의를 내세워 육체의 할례를 중시하는 율법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남을 기회로 육체적 쾌락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통해 영원한 자유를 소유한 성도의 절제된 생활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강조되는 사상입니다(고린도후서 7:1).

③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본 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13)와 ‘멸망할까 조심하라’(15)고 두 명령어가 직접적 권면 단락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유’(13)와 ‘종’의 이미지는 5장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과 같이 한 민족에게 제한된 법을 지키는 것을 ‘종의 멍에’를 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5:1). 이제 13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지니는 자유의 속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고의 섭리인 복음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그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13).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 ‘자유’는 타인을 사랑하게 하고 타인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합니다.(13).

(2) 율법의 완성(14)

바로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율법 전체를 ‘성취’하는 삶이란 점을 재확인해줍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페플레로타이(πεπληρωται)’가 완료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4:4) 우리를 대표하여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단번에 성취되었습니다. 그 핵심은 이웃을 제가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랑의 삶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반하는 삶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분쟁의 결과(15)

사도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자유’를 ‘방종’으로 변질되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섬김(종노릇)’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서로 물고 뜯는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은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영적 자살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내면의 영적 전쟁(16-18)

인간의 육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들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은 모습은 곧 있을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결과는 영생을 거두는 삶으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6-18)

사도 바울은 본문의 두 번째 주제인,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 대해 거론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는 분명히 분쟁과 다툼을 비롯한 여러 윤리적 문제들이 있었음을 암시해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입된 거짓 선생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완전한 자격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과 행동 방식 모두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그러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성령입니다.

(1) 성령을 따라 행해야함(16)

본문은 성도들 안에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성령의 소욕’이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다음 절에 설명하겠지만, 이 둘은 서로를 거슬리고 언제나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정상적인 내면에 일어나는 영적 상태입니다. 절대로 비정상이 아닙니다. 즉 육체와 성령의 전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영적 전쟁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고 행해야 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Live by the Spirit)”고 권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영적 전쟁에서 육체의 소욕,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도, 여러분의 결심도 결코 이 영역에 있어서 여러분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2) 육체 대 성령(17)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르는 삶과 ‘육체’를 따르는 삶을 대조하며 설명합니다(17).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를 거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성도의 현재적 삶이 이 두 가지 소욕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대가 아직 지속되고 있는 한가운데에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영인 성령이 앞당겨 침투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입니다.

바울신학 속에서 ‘성령’과 ‘육체’의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은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원리입니다. 반면에 ‘육체’는 반대로 세상적인 삶의 원리를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이 삶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육체’는 바울서신 속에서 종종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16)은 당연합니다.

(3) 성령 안에서 율법(18)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행동방식 모두를 규정하는 대답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율법을 통해 정체성과 행동방식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19-23)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욕심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예수님의 종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고 육신의 요구에 굴복할 때, 자신은 물로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할지라도 성령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이기심과 진리에 대한 무관심뿐입니다.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19-23)

전쟁터에서 양편의 군대를 묘사하듯이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구분된 선악을 나란히 놓으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 육체의 열매(19-21)

사도 바울은 육체, 곧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성적인 타락, 우상숭배 행위, 내면의 미움과 분노, 외적인 방탕, 공동체의 분열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반지 못한다’(21)고 잘라 말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전에도 누누이 경고했던 바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이 처음부터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 선교사들을 인식하며 줄곧 공격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율법의 행위’이지 불특정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행해서는 육체를 따르는 삶의 방식 전체를 공격합니다. 믿음에 합당한 선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열매(22-23)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합니다. 다만 이곳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간략하게 하나씩 개요만 살펴보겠습니다.

① 사랑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 가장 먼저 ‘사랑’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온 율법이 사랑의 계명에서 성취되었다는 이 사랑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② 희락

‘희락’은 내면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③ 화평

‘화평’ 또는 ‘평화’는 단순히 고통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샬롬’ 개념이 그러하듯,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 정의, 행복이 구현되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④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부정적인 상황을 견디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⑤ 자비와 양선

‘자비’와 ‘양선’은 다소 중복되는 성령의 열매로서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행위들입니다.

⑥ 충성

‘충성’은 헬라어 피스티스()에 대한 번역으로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하여 ‘신실함’을 다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⑦ 온유

‘온유’는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공격적이지 않고 겸손하며 사려 깊은 내면의 상태입니다.

⑧ 절제

마지막으로 ‘절제(節制)’는 욕구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고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에 반하는 어떠한 율법도 없다’고 말합니다. 온 율법이 사랑의 계명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씀을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이야말로 율법이 지향해 온 삶의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24-26)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 즉 이제 자기가 왕이던 나라를 버리고 예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삶으로 전환한 자들에게 성령님은 내주하십니다. 이제 그들의 죽은 옛 자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그들로 예수님의 삶에서 맺혔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4-2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복음의 진리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라디아서 2:20)고 선언했습니다. 이 표현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2:20)는 수동적인 표현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24)는 능동적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못 박은 대상은 ‘육체와 그것에 속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 세대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 세대의 운영원리인 ‘육체’와 그것의 특징인 정욕과 탐석을 따라 살지 않고, 다음 세대의 새로운 창조를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 은총을 한마디로 ‘성령으로 살게 되었다’(25)고 표현합니다. 그 성령을 따라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라’(25)는 것입니다. 자만하며 서로를 충동질하는 것(16) 성령을 따라 사는 삶과 모순됩니다. 그것은 이미 못 박은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격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자유로운 성도인지 알고 싶습니까? 성령으로 사는지 또는, 육체로 사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난 열매, 성품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을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살면 그에 따른 열매가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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