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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6-01)

 


여섯 인을 떼시는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6장 1-17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항상 환영받고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배척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핍박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라고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믿는다는 사람이 핍박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 받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렇게 예고하신 것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실족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곧바로 기도와 찬양으로 두루마리를 위하신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루마리가 펼쳐집니다. 6장은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봉인한 일곱인을 떼서는 장면이며, 연속적인 세 가지 일곱 심판 시리즈의 첫 번째입니다. 일곱 인 심판은 전 인류의 4분의 1이 대상이며, 신자와 불신자가 그 대상입니다. 심판의 튀지는 신자에게는 기도를, 불신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처음 네 가지 짧은 인 심판(1-8)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악이 득세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린 양의 길을 갈 때 고난을 당하지만, 그난은 성도들의 참된 표지이고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갚아 주십니다. 이제 심판하실 주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1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1-8)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일곱 인을 떼기에 함당하신 어린양이 소개되었고, 6장에서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기 시작하십니다. 어린양이 처음 네 개의 인을 떼자 네 생물이 각각 말을 호출합니다. 말들의 등장은     스가랴 1:8-11과 6:1-8을 배경으로 합니다.

(1) 첫째 인 재앙 – 정복(1-2)

어린양이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등장합니다. 흰말을 탄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흰말 탄자의 정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재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19장을 근거로(19:11) 흰말 탄자를 예수님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흰말탄자의 승리는 세상에서 복음이 거두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뒤이어 나오는 세 말의 부정적 이미지와 맞지 않습니다. 또한 6장의 흰말 탄자를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6장의 흰말탄자는 활을 사용하지만,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을 사용하십니다(19:15). 흰말탄자는 단 하나의 면류관(στεφανος)을 받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관들(διαδηματα)을 쓰셨습니다(19:12). ‘στεφανος’(스터파노스)는 경기에서 우승한자에게 주는 화관을, ‘διαδημα’(디마데마)는 왕관을 가리킵니다. 흰말탄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며 싸우십니다(19:11). 무엇보다도 6장에서는 첫째 인을 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인을 떼신 어린양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외치는 소리에 바로 흰말을 타고 나가시는 것은 어색합니다. 어린양은 일곱 인의 집행자보다는 주관자에 가깝습니다.

둘째, 대다수의 학자는 첫째 인이 모종의 전쟁이나 정복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흰말탄자는 전쟁에 나가 승리합니다. 흰말탄자가가지고 있는 활은 전쟁 무기입니다. 그는 이미 이기고 있으며 계속 이기려고 합니다. 로마 시대에 전승자(戰勝者)는 흰말 네 필이 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3:5; 7:9), 흰말 탄자가 받는 면류관 역시 전쟁의 승리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참조, 3:11). 어떤 세력에 대한 승리인지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첫째 인의 재앙은 모종의 전쟁으로 인한 재앙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해석은 뒤따르는 말들의 재앙적 성격과 잘 맞습니다.

(2) 둘째 인 재앙 – 전쟁(3-4)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붉은 말을 탄자는 땅에서 화평을 제해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습니다. 이는 필시 전쟁을 상징합니다. 붉은색은 피의 색으로, 전쟁 이미지와 잘 어울립니다. 활과 마찬가지로 칼도 전쟁 무기입니다. 화평을 제해 버린다는 말은 전쟁을 일으킴을 의미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은 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가 사용되었으므로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재앙은 적어도 어린양과 하나님의 묵인 하에 이루어짐을 암시합니다.

(3) 셋째 인 재앙 – 기근(5-6)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시자 이제 검은 말이 등장합니다. 앞의 두 말과 다르게 검은 말에 탄자는 무기가 아니라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재앙은 기근을 나타내는데, 아마 앞서 언급된 전쟁들의 결과일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은 이 재앙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고, 밀 한 되는 한사람의 하루양식에 해당합니다. 평상시에는 한 데나리온으로 밀 열 되를 살 수 있는데, 한 되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암시합니다. 보리는 보통 가축 사료용이었는데, 가난한 자들이 먹었습니다(참조, 요한복음 6:9), 한 데나리온으로 3인 가족이 하루 식사들 해결하려면 밀 대신 보리를 사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라는 말의 의미는 난해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백성이 보호를 받을 것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밀과 보리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는 약점을 지닌다. 반면에 감람유와 포도주는 사치품이므로 기근 중에도 부자들은 별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 다른 유력한 해석은 기근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뿌리가 깊어 비교적 가뭄에 잘 견디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감람유와포도주를 해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재앙이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임을 암시합니다.

(4) 넷째 인 재앙 – 사망(7-8)

어린양이 넷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청황색 말을 탄자의 이름은 사망인데, 음부가 그 뒤를 따릅니다. 그들은 땅 사분의 일에 이르는 권세를 얻습니다. 넷째 인은 말 그대로 사망을 말합니다. 사망과 나란히 사용된 음부, 즉 하데스는 사망의 동의어, 유의어로 사용됩니다(1:18; 20:14). ‘청황색’은 ‘잿빛’ 혹은 ‘창백한’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시체 혹은 죽음의 색입니다.

청황색 말을 탄자는 칼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입니다. 이는 마치 앞의 재앙들을 요약해 놓은 것 같습니다. 칼은 둘째 인에 등장하는 큰 칼을, 흉년은 셋째 인에 등장하는 저울을 떠올립니다. ‘사망’은 ‘전염병’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칼과 기근과 역병과 들짐승은 인류를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등장합니다(에스겔 14:21).

 

다섯째 인 재앙/순교자의 부르짖음(9-11)

성도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그렇게 쉽게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고난을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난 받는 성도들을 괴롭혔던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9장에서는 때가 차면 순교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9-11)

다섯 번째 인은 복음을 바르게 믿고 전하는 이들도 순교를 당하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이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은 즉각적인 도움이나 해결책을 주시 않습니다. 즉각적인 응답 보다는 앞으로 더 순교자가 나올 것인데,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1) 순교자들의 기도(9-10)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시자, 하늘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합니다. 이 탄원은 언뜻 복수의 뉘앙스를 띠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나 스데반의 기도와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누가복음 23:34; 사도행전 7:60), 그런데 놀랍게도 순교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하고 참되시다는 진리를 근거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무죄한 피에 대해 신원하는 것은 거룩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합니다. 정의와 심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영원히 참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공의도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거룩하고 참됩니다.

(2) 기도에 대한 응답(11)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순교자들의 탄원에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깐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2:17; 3:5: 7:9). 순교자들이 받은 흰 두루마기는 그들이 옮고 그들을 죽인 자들이 옮지 않음을 재차 입증해 줍니다.

하늘 제단이 속해 있는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실현된 곳입니다. 하늘에서 쉬고 있는 순교자들은 땅에 살면서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의 처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 땅은 카이사르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 곧 순교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수고에서 벗어나 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3).

천상의 순교자들은 다른 순교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종말이 완성되는데 필요한 조건은 순교자의 수가 차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끈이 옵니다(마태복음 24:14). 그렇다고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중언의 삶을 사는 자들인데, 이들에게 증언과 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12:11; 20:4).

다른 인들과 달리 다섯째 인이 열린 후에는 재앙이 발생하는 것 갑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순교자들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모종의 재앙이 암시된 것도 사실입니다. 순교자들의 단원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순교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탄원 후 악인들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여섯째 인의 재앙은 다름 아니라 어린양의 진노입니다(16). 하나님은 순교지들의 수가 찬 후에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악인들에 대한 예고편 격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3) 우주적인 징조(12-14)

여섯째 인이 열리면서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며,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떠나가고, 모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해와 달의 색이 변하고 명의 떨어지며 하늘이 떠나가는 짓은 하늘에 생기는 이변을 말하고, 큰 지진과 산과 섬의 이동은 지각 변동을 말합니다. 자연계에 임하는 재난은 나팔 재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8:7-13).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징조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재림 직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입니다(마태복음 24:29) 또한 곳곳에서 지진이 발생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4:7).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기에(21:1), 자연 질서의 변동은 예측 가능한 종말론적 현상입니다. 달리 말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자연과 우주로 확대됩니다.

(4) 어린양의 진노(15-17)

하늘과 땅에 큰 격변을 불러일으키는 여섯때 인의 재앙은 땅의 임금과 왕족과 장군과 부자와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에게 임합니다. 이 재앙은 악인들을 향한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이 재앙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상류층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권력과 연대해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입니다. 종말론적 재난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진노가 자유인과 노예에게도 임한다는 사실은 권력이나 재력 혹은 사회적 신분을 막론하고 불의한자들에게 재앙이 내려옴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로마서 2:11).

이 재앙은 누구도 버틸 수 없다. 이 재앙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그들은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다섯째 나팔 재앙이 임하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9:5). 아이러니하게도,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박해는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20:4). 성도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마태복음 10:28). 반면에 약인들에게 입하는 어린양의 진노는 축음의 고통보다 더 큽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겪는 고난뿐 아니라 어린양을 대적하는 자들의 고난도 언급합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여섯째 인의 재앙이 대표적 예입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불 못이라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불과 유황의 고난 역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14:9-11).

악인들은 이 재앙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임을 알지만, 그들이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여섯째 나팔재앙에 살아남은 자들 역시 회개하지 않습니다(9:20-21), 넷째 대접과 다섯째 대접 재앙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16:9,11). 아는 것과 회개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비웃겠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쏟아질 것입니다. 그 종말의 때까지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힘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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