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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3-03)


일곱 교회(7) :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종종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너무 한쪽으로 기우러진 모습이 때로는 광신적인 모습으로 비추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않는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안에 있는 열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열정이 없어서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나타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잃어버린 열정이 회복되길 기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일곱 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모습은 토해 버리고 싶을 만큼 역겨웠습니다. 그들은 부자라고 말하지만,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문 밖에 서서 두드리며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권면(14-17)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19:23)처럼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헐벗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는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기에 책망만 받았겠습니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4-22)

열심과 충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일한 삶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영적 장애물입니다. 세속적 부요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고 미지근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지 않습니까!

(1) 수신자(14a)

라오디게아는 일곱 교회가 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부유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로부터 약 70km로 떨어진 곳으로 에베소와 교통과 금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에는 양털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재정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에 황제 숭배가 심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핍박 없이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에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자만했습니다. 영적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들은 신앙적인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참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아십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4b)

라오디게아 교회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그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 근본이십니다. ‘아멘’, ‘충성’, ‘참’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불립니다. 19:11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1:17)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요한복음 1:3). 부활은 새 창조의 근본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사데 교회는 저의 죽은 혼수상태지만 몇몇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칭찬도 전혀 없습니다. 부활이 주는 새 창조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죽었다고 봐야 할 교회를 신실한 증인으로 살리기 위해 맞춤형 계시자로 그리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책망(15-17)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기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15a). 그 이유는 어려움을 모르고, 핍박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유대인 회당이나 주변 사회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과 같이 이상한 사상을 전파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 없고 책망만 열거됩니다.

① 냉정한 진단(15-16)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만 들은 교회인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들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미지근한 교인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섬기려 타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타협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차든지 뜨겁든지 확실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타협은 세상과 하나님을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4).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타협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사실상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협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착각에 빠진 진단(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자신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핍박이 없는 그런 교회였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칭찬만 들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외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책망만 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번성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으며(2:9),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작은 교회였습니다(3:8).

(4) 그리스도의 처방(18-20)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명령하시며 미지근한 그들을 입에서 토하여 내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둘 중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미지근한 상태로 있는 그들의 소극적인 자세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① 질병에 대한 처방(18)

장점이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적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위선 중의 위선은 무조건 회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유효적절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상세하게 맞춤형 처방을 내놓습니다. 첫째는 도시의 장점이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임을 지적합니다(18). 먼저 영적 빈곤을 영적 부요로 바꿔야 합니다.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부자 도시에 산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금을 제련하듯이 정결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잠언 27:21; 말라기 2-3; 스가랴 13:9; 베드로전서 1:6-9). 다음으로 영적 벌거벗음을 영적 단정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긴 옷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상업 중심지에 살고 있는 교회가 낮 뜨겁게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입니다. 성경에서 벌거벗음은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이사야 43:3; 에스겔 16:23; 23:29; 나훔 3:5).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자가 가장 수치스럽습니다. 다음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하면, 영적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세상은 선악에 대한 분별, 모조품과 진품에 대한 구분, 가짜 뉴스와 진실에 대한 판단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가짜를 퍼트리는 본거지가 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 됩니다. 영적 통찰력의 회복이 요구됩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나은 점은 권력과 부와 명예가 아닙니다. 진리를 넘고 역사의 방향을 알기에, 세상에 영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② 사랑하니 책망(19)

둘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19).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헤세드)은 언약에 대한 신실한 반응입니다. 언약적 상호 책임을 지기에 책망하고 징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언약에 대한 열정을 폭력으로 표현한 거룩한 전통이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그랬습니다(민수기 25장). 마카비 가문이 그랬다. 사악한 헬라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유대를 해방시켰습니다. 신약의 열심당원이 그랬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로마의 폭정에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열정을 가졌습니다(요한복음 2:17).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빌립보서 3:6). 라오디게아 교회도 이 열정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항거하며,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열정의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③ 신실한 청지기(20)

셋째로,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20). 문을 두드리는 그리스도는 종교화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립니다. 전형적인 해석은 신자의 집에 손님으로 오신 그리스도, 또는 성찬이 시간에 문밖에 서 있는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공관복음의 파루시아 비유들의 전승사적 발전입니다. 누가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4장의 깨어 있는 청지기의 비유, 마가복음 13:33-37의 문지기 비유가 이 구절의 원래 전승입니다. 그리스도는 밤중에 도착하는 주인의 모습입니다. 주인은 먼 거리에 불일이 있어서 언제 집에 도착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주인의 귀환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집이나 문을 신자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알레고리는 도둑과 같이 오시는 인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5) 그리스도의 약속(21-22)

20절에 이어서 21절은 어린양의 대잔치, 종말론적인 메시아 잔치의 주제를 부각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는 약속은 사실상 경고입니다. ‘이기는 자’는 미완성 독립격입니다. 약속의 유업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을 말합니다. ‘이김’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앞에서 처방한 해결책을 시행하여 회개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부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영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만(디모데전서 6:9), 아직도 많은 사람이 현실적 부와 영적 복을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도는 현실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스스로 채찍질하여 신 경주에 매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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