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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2)


 일곱 교회(2,3) : 서머나와 버가모 교회

요한계시록 2장 8-17절


사람들은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버가모는 믿음 생활하기에 나쁜 환경이었습니다. 버가모 지역은 사탄의 왕으로 지배당하고 우상으로 충만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버가모 성도들은 안디바 성도가 죽은 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환경을 핑계로 세상과 타협하며 믿음 생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비교적 건강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도시에 자리 잡은 교회지만, 부요한 교회입니다. 위협적인 집단인 유대인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신실한 증인이 무엇인지를 증명한 교회입니다. 환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의 기로에 선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타협과 융화를 통해 동화할 것입니까? 충성된 종 안디바가 그 모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한 권면(8-11)

고난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게 되는 참된 믿음의 표지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을 세상은 언제나 미워하며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교회를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 교회를 고난 속에서 지켜 주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임하신 교회는 서머나 교회입니다.

8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8-11)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아시아의 왕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아시아의 첫 번째 도시라는 타이틀을 걸고 에베소와 경쟁하였습니다. 그 지역에 특권은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1) 수신자(8a)

서머나는 가난하고 고난 받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는 ‘몰약’이란 뜻입니다. 몰약은 두드리고 으깰수록, 짓누르고 부서질수록 더욱 향기를 뿜어냅니다. 고난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가장 절망적입니다. 반전의 가능성은 고난 중의 소망입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8b)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으로, 죽었다 살아나신 이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 교회가 반전 드라마를 쓰게 하는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받고 있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헤아리십니다. 고난과 핍박이 심할수록, 신실한 증인은 십자가와 부활의 향기로 역사를 장식합니다.

(3) 칭찬(9)

왜 서머나 교회가 환란과 궁핍에 직면했습니까? 고대 도시는 시민 사회입니다. 도시의 질서와 번영을 위해 시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요구합니다.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애국적이지 않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도시의 혜택을 누릴 수 없도록 배제합니다.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합니다. 거부하면 거래에서 배제됩니다. 서머나 교회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겪었던 시험에 직면했습니다. 시민 종교에 참여하여 종교적 애국심을 발휘하며 상업적 유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 것입니까? 여기에 유대인들의 비방과 고소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황제 숭배도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면제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무신론자이고 애국적이지 않다고 비방하고 고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닌 로마제국을 통한 사탄의 통치에 부역하는 자들입니다. 진짜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입니다.

(4) 격려와 약속(10)

서머나 교회는 다행히 예수님께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수고의 향기가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켰습니다. 고난이 거셀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진하게 퍼져 갑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몇 사람이 투옥되는 시험이 닥칩니다.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10일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시험을 받았던 일시적인 시련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왕에 대한 충성 표시이자 신과의 혼연일체가 된다는 일상적인 의례 행위입니다. 거부하는 것은 불이익과 함께 사회적 파장이 따릅니다.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은 교묘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압박을 가합니다. 정치적인 타협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저항해야 합니다. 사탄은 육신적으로 투옥시키고 심지어 죽일 수 있어도, 둘째 사망의 권세는 없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며 주신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마태복음 10:28). 고난에 직면한 교회는 죽기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누구에게 충성했습니까? 국가에? 교회가 애국종교를 지향하는 것은 사탄과 타협하는 길입니다. 집단에? 교회에? 목사에게? 사탄이 주는 거짓 메시지들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피스토스 πιστος)는 신실함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피스티스 πιστος)을 신실함으로 증명했습니다(야고보서 2:21-22). 순교를 각오하고 신실한 증언을 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국가나 사회에 충절을 바치지 않거나, 이익집단의 논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난과 격리와 모함과 혐오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희생시키도록 요구할 때는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시민 사회나 어떤 종교 집단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의 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제국의 유혹에 저항하야 합니다. 시민종교의 편이함을 거부해야 합니다.

(5)경고와 약속(11)

이기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가리킵니다(21:8). 이기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권면(12-17)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합니다. 무력으로 박해하기도 하고 교묘하게 미혹하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큰 효과를 거둔 듯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속에서 교훈을 받아 사칸과의 싸움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1-17)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세상 문화를 접해야 하지만,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핍박은 이겨 냈지만 거짓 선지자에는 미혹된 버가모 교회는 속히 회개해야 했습니다.

(1) 수신자(12a)

버가모 교회는 핍박이 매우 심한 곳이었습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왕좌가 있는 것으로 안디바가 순교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버가모에는 거대한 제우스 제단이 있었습니다. 또 황제 숭배가 성행했던 도시로, 그곳에는 로마 제국의 최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2b)

버가모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셨습니다(이사야 11:4). 예수님께서는 1차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악의 나라들에 칼을 겨누고 심판하습니다. 사형 처결권을 가진 로마제국에 대한 논박입니다. 진정으로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쪽 날이 선 날카로운 칼을 가지신 분으로서,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죄와 타협하며 믿음을 저버린 자는 벌하십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13)

버가모 지역은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로서 믿음을 갖고, 지켜 나가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증인 안디바가 죽음을 방하며 버가모 교회는 심각한 영적 전쟁을 치렀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순교자가 있을 정도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정의를 내세운 로마의 불의한 사회 체제를 심판하십니다. 제국의 힘에 타협하여 배교하는 교회를 향해서 칼을 겨누고 계십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제 숭배가 문제입니다. 1세기 당시까지 로마 중앙정부는 로마 황제 숭배를 조직적으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핍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의 지방정부가 앞다투어 자발적으로 황제 승배의 신전을 유치하였고, 간헐적으로 기독교를 반애국적, 반시민사회적, 또는 무신론자로 몰아서 핍박하였습니다. 충성된 중인 안디바가 순교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안디바는 집단 기억으로 남아 사회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 책망(14-16)

사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고, 경제를 통해서 삶의 현실을 통제하고 조종합니다. 종교와 정치 또는 종교와 경제의 분리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고대 사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한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우상숭배에는 저항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타협을 하게 만습니다. 이것이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입니다. 발람은 ‘그가 백성을 삼킨다’는 뜻입니다. 니골라는 ‘그가 백성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위에 굴림하며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점쟁이의 교훈입니다. 성공과 행운을 위해서는 신앙을 팔아먹도록 만드는 교훈입니다(유다서 1:11).

요한 당시에 발람의 추종자들은 우상숭배논 거부하지만, 우상에게 봉헌한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식사는 영양 보충의 기회가 아니라 사회적 교제의 자리입니다. 집단의 응집을 강화하고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의식입니다. 발람의 추종자들은 상권을 장악한 길드에 참여하고, 황제 숭배 의례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전에 가서 음식을 먹습니다. 이방 신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헛것에 제사를 드린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거짓 교사들은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주장하여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다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낳았고, 결국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도록 만드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탐욕은 부요를 가져오고, 신앙은 가난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발람은 누구입니까?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해야 교회가 사회적 영향 권력을 끼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교회가 부와 권력과 손을 잡고 그들을 옹호하게 만듭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교리적 순결성에 너무 무관심하다가, 타협적이고, 혼합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습니다.

(5) 약속(17)

그리스도는 버가모 교회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발람의 길을 따를 것입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까? 감춰진 만나와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은 잔치의 초대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감춰진 만나’는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이 누린 만나를 상기시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의 상징입니다. 흰 돌은 보통 사면 투표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출입증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흰 돌은 세상 권력이 우상숭배 하는 제의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범죄로 판결한 결정을 뒤집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들 약속은 우상숭배의 종교, 사회적 환경 속에서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특히 거짓 진리에 대해서는 절대로 수용해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요즘 내 믿음을 위협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은 무엇입니까? 안디바의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버가모 교회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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