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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1)


일곱 교회(1) : 에베소 교회

요한계시록 2장 1-7절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 중에 청춘의 연인들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항상 같이 다니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러던 종종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첫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같은 지역에 많은 다른 교회들이 있었지만, 요한은 당시의 묵시문학처럼 숫자를 통해 의미를 창출합니다. 첫 번째 가장 좋지 않은 모델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를 소개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이방인 세계에서 기독교가 시작하는 무렵에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성의 사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전체 교회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정확하게 관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주는 분이기에 큰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면면히 알고 있기에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잘 알고 계십니다. 무슨 정보나 소문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속에 그리스도는 함께 계셔서 코이노니아를 하시기에, 경험적으로 잘 아십니다.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1)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교회 사이에 계시는 분입니다(요한계시록 1:12-13, 30). 우리 주님은 교회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놀랍도록 세미하고 정확하게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각 교회의 장점을 격려하시고, 그 단점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물론 일일이 점검하면서 지적하시는 귀찮은 분은 아닙니다. 너그럽게 신실하게 기다리십니다.

(1) 수신자(1a)

에베소 교회는 복음이 처음 소아시아에 전파될 때 그곳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 행정관이 소아시아에 방문할 때 들어가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 지역의 관문 도시였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b)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메시지를 보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내용은 교회마다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의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점검하시는 제사장처럼 등장하십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모습은 부활 승천하셔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에베소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빈틈없이 살피십니다. 그래서 ‘안다’고 하십니다. 신의 부재 시대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바로 이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2-3)

거짓은 사람을 속이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교회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거짓된 자들의 특징은 사칭한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더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자칭 사도라 하고, 거짓 유대는 자칭 유대인이라며, 거짓 선지자는 자칭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보낸 메시지 중에 첫 대상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는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인내했으며, 악한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첫째는 행위(works)와 수고(labors)와 인내(endurance)입니다. 이 세 가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유사 합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데살로니가전서 1:3), 기독교 신앙에서 세 개의 기둥인 믿음, 소망, 사랑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믿음은 행위로 증명됩니다. 사랑은 수고로 열매를 맺습니다. 소망은 인내로 생명력을 가진다. 둘째는 교리적 정통성(데살로니가전서 1:3)과 신학적 분별력으로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를 검증하여 배척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순회 사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순회 사역을 하면서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손 대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순회 사역자들 중에는 잘못된 교리와 도덕적 흠결과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견유철학자들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말은 달콤한데,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말을 내뱉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들과 비교될까봐 매우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량 사역을 하며 친히 일하였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분별이 어렵습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검증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무법자들과 이단에 대해서는 추호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비느하스와 마카비와 같은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단 척결에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책망(4)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점점 형식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밥벌이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에베소 교회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마치 현재 에베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현재의 에베소는 에게 해로부터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신약 시대에는 소아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였습니다.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지리적인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가이스텔 강의 입구에 있는 에베소는 강에서 내려오는 퇴적물들로 항구가 막히고 습지로 변해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Orthodoxy)을 지키다가 정행(Orthopraxy)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칭찬’만 보면 에베소 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균형 잡힌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책망한 바리새인들의 냄새가 납니다(누가복음 11:42). 손 대접하기와 구제, 목회적 배려와 훈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와 수고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마르다와 같이 비난하는 마음과 불평이 생깁니다. 게으른 사람은 핑계를 대기 일쑤고, 열정적인 사람은 남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교리적 순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웃과 사회에 담을 쌓고 경계를 하는 태도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내부의 문제에 골몰하다가 외부에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주변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이 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진보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인 태도를 지닙니다. ‘정통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킨다.’(William Barclay). 첫사랑은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의 사랑입니다. 끼리끼리 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잃어버렸다’(아피에미,ἀΦίημι)는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결혼관계로 말하자면 이혼의 위기에 처했습니다(예레미야 2:2).계시록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마태복음 24:12).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고 동화되어가는 사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다음 세대는 첫 세대가 가지고 있던 복음의 열정을 상실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해결책(5-7)

사람들은 외형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열심히 헌신하고 있으면 사랑한다고 착각합니다. 교회의 일을 해나갈 때 습관적이고 의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의 숨은 동기를 보고 계십니다. 자신도 모르는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5-7)

교회 사이를 다니셨던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보시면서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기꺼이 고난을 수고와 인내로 받았습니다. 또한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을 밝혀내고 거절했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1) 권고(5-6)

에베소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망각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심각한 경고를 받습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이 없습니다. 교회의 현재 상태에 대한 경고입니다. ‘촛대’는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백성의 상징입니다(스가랴 4장). 이스라엘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이방인의 빛입니다(이사야 42:6-7; 49:6).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마태복음 5:14). 촛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일곱 촛대 메노라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며 세상을 밝혀 비추는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는 교회는 촛대가 서있는 교회입니다(참조. 스가랴 4:11-14).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음을 선언하는 영적인 사망 선고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기억과 회개입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은 ‘생각하고’로 번역하지만, 성경 전승에서 기억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단어 므네모뉴오(μνημογευω)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상고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역사적 신앙인 기독교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적 신앙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신앙적 회귀 본능은 신앙 생명에 본질적입니다. 신앙적 기억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방향 감각을 사실합니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 기억에 정초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잠회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방향 재설정(re-orientarion)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디모데후서 1:6).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앞 세대와 같이 신실한 복음 증거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중해 사회에서 사랑은 들러붙는 것(attachment)이고, 미움은 떨어지는 것(detachment)입니다. 그래도 에베소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니골라 당을 미워합니다. 니골라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니골라(백성을 정복한다)와 발람(백성을 삼킨다)은 같은 뜻을 가진 헬라어와 아람어입니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점쟁이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훼손한 장본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미움은 거리를 두고 떨어트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니카오)와 니골라(니콜라이테스 백성을 정복하다)는 언어적 유희입니다.

(2) 상급(7)

예수님의 말씀은 성려의 말씀과 동일시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후 인간이 접근할 수 없던 생명나무는(창세기 3:24), 새 예루살렘에 다시 등장합니다(22:2).

생명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이 에덴에서와 같은 친밀한 교제의 회복을 원한다는 초청입니다. 인류와 신앙의 원천으로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선물들, 하나님과의 격의 없는 친밀한 교제뿐 아니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가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원래 소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입니다. 과연 관문 도시에 자리를 잡은 교회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합당합니다. 창조의 원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베소 교회는 반드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와 형편을 아시고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바라며 더욱 수고하고 인내해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또한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기 위해 회개하고 고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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