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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7-01)

 


영적 전투 중인 있는 교회

요한계시록 7장 1-17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 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7장은 여섯째와 일곱째 인 사이에 위치한 삽입된 내용입니다. 다섯 번째 인 심판에서 제기된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하십니다. ‘얼마나 오래?’, ‘그 수가 차기까지!’ 그 수가 십사만 사천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을 따라 종말의 성전에 참여할 영적 군대로, 성전(聖戰)에 참여하여 승리합니다. 그 결과 열방에서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1-8)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무모하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사역하는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1-8)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 위치한 막간에, 8장에서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데, 이로써 한 장면이 일단락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그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인을 쳐서 소유권이나 보호 대상임을 표시하듯, 악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중에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그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1) 바람을 잡은 네 천사(1)
요한이 다음으로 본 환상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 환상입니다. 네 천사는 네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에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네 천사와 네 바람이 연결된 것은 스가랴의 환상과 관련이 있습니다(스가랴 6:1-5). 천사들이 땅의 사방에 선 것은 그들이 땅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였음을 표합니다. 천사들은 재난을 가져오는 바람을 붙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해를 받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행합니다. 바람은 태풍을 일으켜 파멸을 가져오는 세력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14:18)와 물을 담당하는 천사(16:5)도 등장합니다.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바람 같은 자연현상을 이용해 심판하십니다(예레미야 49:36).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연하시며 그분의 백성에게 인을 치시려고 하고 인 치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한 자들을 구별하시 인 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며 그분을 대적하는 위험천만한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향해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음을 얼려주어야 합니다.
(2) 인을 가진 다른 천사(2-3)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동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천사는 앞서 언급한 심판을 행할 네 천사를 향해 하나님의 종들 이마에 인 침을 받기까지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인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네 천사가 일으킬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인 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인 침을 말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NIV는 이 부분을 ‘그의 소유의 인’(his seal of ownership)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도장을 우리에게 찍으시고 ‘첫 번째 불입금’(first installment, NRSV)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고(에베소서 1:13),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에베소서 4:30).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인 침’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하기 때문에 심판 중의 보호를 말하는 에스겔 9장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에스겔 9:4-6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판에서 제외될 것이지만,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은 엄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언치침은 지엄한 심판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은 아마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일 것입니다. 14:1에 따르면,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 치심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혹은 어린양)의 이름이 그 종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22:4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인 치심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서 받는 하나님의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진밀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3) 인 침을 받는 십사만 사천(4)
요한은 인 침 받은 자의 수를 듣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서 ‘십사만 사천’에 달합니다. 이는 666(13:18)과 더불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숫자 중 하나입니다.
9절에서도 다시 설명하지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해 소개합니다(7:9). 잠시 후 살펴보겠지만, 이 큰 무리가 앞서 언급한 십사만 사천과 같은 무리인지 아닌지는 중요성만큼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십사만 사천과 큰 무리는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라고 산술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4) 각 지파를 구성한 십사만 사천(5-8)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씩 인 침을 받은 자들의 합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목록이 다소 독특합니다, 이러한 목록은 성경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목록에는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 있고, 요셉의 아들 중 므낫세는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없고 대신 요셉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해석은 첨예하게 갈립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은 분명 십사만 사천이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는 점도(21:12)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1:26). 이는 분명 불가능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묵시록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이 상징적 언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은 ‘십사만 사천’을 교회로 보는 해석에 좀 더 무게를 실어 줍니다. 144,00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수인 12의 제곱에 1,000을 곱한 수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수의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을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칭 유대인들을 사람의 회당으로 부르면서(2:9: 3:9),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유대인들을 참 유대인들로 다시 정의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참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2:28-29). 666과 같은 상징인 숫자가 번번하게 사용되는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이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십사만 사천’을 그리스도인들로 보는 견해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십사만 사천’이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하는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전체 그리스도인 중 일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1: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에서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교회 전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첫 열매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십사만 사천이 완전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 중 순교자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길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은 뒤이어 언급된(9),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같은 대상일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십사만 사천(9-14)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식은 어린 양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군대로서(14:1)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어린 양의 삶을 무기로 삼습니다. 끊임없이 환난이 닥쳐올지라도 어린 양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연단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견딘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보상하십니다.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9-14)
천국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감격스러운 찬양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본 천국에서는, 흰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서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인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수는 상징적인 수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소개합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속량 받고 어린양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이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1)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찬송(9-10)
요한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를 들은 후에, 아무도 셀 수 없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바라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속량을 입은 세계 각 처에서 나오는 성도들입니다(14장 참고).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창세기 12:1-3). 성도는 인종, 신분, 성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갈라디아 3:28). 이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순결한 승리자들이 입는 옷입니다(3:4-5). 이들은 큰 환난을 견디고 이긴 자들입니다(1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했던 것처럼(요한복음 12:13), 큰 무리가 손에 들고 있는 종려 가지는 승리와 환희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및 천사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입니다. 이 큰 무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루신 구원을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핵심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입니다.
(2) 하늘 보좌의 천사들의 화답(11-12)
10절의 찬송에 대해 화답하는 차원으로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선포합니다. 큰 무리의 찬양에 화답하듯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주위에서 있던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경배합니다. 이름은 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심을 거듭 강조합니다.
(3) 흰 옷 입은 자들(13-14)
요한계시록에는 역설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처음 보기에는 모순되지만, 놀라운 방식으로 상징적 의미를 창출합니다. 독자의 기대를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 5장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했는데, 돌아보니 도살을 당한 어린양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순교자들이 흰 두루마리를 씻습니다. 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습니다. 피로 씻는데 어떻게 희게 되었습니까?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피에 깊어 담근 옷’을 입습니다. 창세기 49:11(그 웃을 포도주에 빨며)의 인유입니다. 흰 옷은 불게 물들어야 합니다. 장세기 49장에서 설정된 기대를 뛰어넘는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붉은 흰 옷’이란 역설이 창출됩니다. 하얗게 하려고 씻었는데 붉게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어린양의 피로 물든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의 섬김과 찬양(15-17)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수 샘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죄로 인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결핍을 해결하셔서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15-17)
하나님의 백성들은 숫자적으로 한정된 144,000명이 아니라 셀 수 없는 많은 큰 무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 공동체의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우신 섭리를 찬양합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천국에서 누릴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결한 흰 옷을 입고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보좌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죄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라고 찬양의 고백입니다.
큰 환난을 이긴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주림과 목마름’과 ‘해나 뜨거움’이 없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삶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21:3).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승리자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모르는 곳입니다. 또한 해나 어떤 열기에도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큰 환난을 이긴 자들은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어떤 결핍이나 상해에도 노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안녕과 위로와 보호는 미래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당시의 성도들도 경험할 수 있던 것입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라는 표현은 시편 23편을 떠올립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시기에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시편 23:1).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복을 영원히 누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임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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