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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2-03)


헛된 것들(3)-물질적인 측면

전도서 2장 18-26절


어린 시절 땅따먹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땅을 큰 네모를 반듯하게 그린 후에 병뚜껑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노는 놀이입니다. 놀이할 때 보면, 욕심이 많은 사람은 큰소리쳐가면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싸워서 얻은 땅이라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모두 다 제자리에 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날은 처음부터 또다시 시작합니다. 소유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면, 싸움이 없이 양보하며 사이좋게 놀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말년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최고의 권세, 최상의 물질, 최고의 명예도 누렸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으로 얻어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마음껏 누렸던 결과는 후회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좀 더 빨리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이 쌓아 두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솔로몬이 갔던 헛된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진짜로 행복하겠습니까?

 

사후에 남은 업적들(18-23)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남겨 주고 싶은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감정입니다. 부모들이 많은 것을 남겨 주려고 해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이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욥 1:21-22). 솔로몬이라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던 탁월한 지혜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18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19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0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21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18-23)

계속해서 전도자는 수고하여 이룬 업적이나 부의 가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앞에서 죽음 앞에서는 지혜도 그 가치를 상실해서 헛되다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평생 수고하여 이룬 업적이나 많은 재물, 또한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1) 타인에게 갈 수고의 열매(18-20)

전도자 솔로몬이 궁그적으로 불쾌하게 본 것은 삶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노동 또한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전도자가 평생 애쓰고 수고하는 결과들을 보고,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18)라고, “미워하였노니”란 ‘싫어졌다’, ‘허무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모든 수고를 미워한다’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평생 수고하여 어떤 것을 성취하여 놓았지만, 수고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죽으면 그 수고의 결과를 자신이 다 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허무하다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평생 수고를 통해 성취된 것이든, 죽은 후에는 그 수고의 결과물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는 자신이 하는데, 그것을 즐기는 것은 다른 사람입니다.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서 평생 고생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이제 먹고살만하니깐, 큰 병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모습에 정말 안쓰러워합니다. 인생은 대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가치 있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수고롭게 이룬 것이 지속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죽은 뒤에 그것을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19). 자기 뜻에 따라 지속적으로 관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평생 수고하여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죽은 후, 수고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대는 열심히 재산을 축적해 놓으면, 2대는 아버지의 수고를 알아서 조금은 전략해서 사용하지만, 3대째는 재산의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 있는 줄 알고 함부로 사용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전도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죽음으로 모든 것이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지만, 이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 수고하여 뭔가를 이루고자 하지만 수고하여 얻은 그 결과들을 채 누리지도 못한 채 죽고 맙니다. 더욱이 그가 애써 이루어 놓은 것들을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자가 거저 누리게 될 때, 그의 수고는 정말 허무한 것이 됩니다.

(2) 수고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21-23)

여기서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전혀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넘겨 준다는 뜻입니다. 부를 쌓기 위해 일생 아끼고 노력하지만, 그는 부를 채 누리지도 못하고 죽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후손이 그것을 물려받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수고도 헛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믿는 자가 진정으로 후손에게 물려 줄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없이 수고하여 쌓은 부나 업적이 죽음 앞에서도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적 업적과 재물을 물려받은 후손들이 그것을 잘 관리되고 지킬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믿는 자가 자손에게 물려 주어야 할 유산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수고는 물론 수고로 이룬 어떤 것을 후손의 몫으로 남겨 줄지라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최선의 삶(24-26)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물건, 동물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인정한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할 때,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욕구와 소원을 만족시키려면 많이 누리여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그러한 세상적인 생각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24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5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4-26)

인간의 노동 열매가 유한하다는 견지에서 솔로몬은 인간이 그 열매를 즐겁고,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2:10) 자기 일에 만족하는 것(참조 3:13; 5:18; 8:15)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으로 그 삶을 끝내게 될 인간에게는 지혜도, 수고로 이룬 업적이나 부도 모두 헛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제 전도자는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 아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를 생각합니다.

(1) 물질의 근원이신 하나님(24-25)

이제까지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던 전도자는 본문에서 물질을 누리는 삶의 즐거움과 보람에 대해 말합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신이 하는 수고를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고 주장했던 전도자가 삶 자체를 긍정하며 거기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에 대해 말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둘 때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든 일이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러한 인생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보람과 기쁨이 되는 이러한 축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전도자인 솔로몬은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다 누려보았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누려보았지만, 헛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26)

전도자는 물질을 성취하는 기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에 대한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후의 삶이 아니라 현세에 이루어지며, 영원한 것이 아닌 잠정적인 보상을 포함한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에 관해 분명하게 26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26a) 여기서 “기뻐하다”는 단어는 ‘좋은, 선한, 정직한’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께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잠 3:5-6).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삶의 축복이 지혜와 지식과 희락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근거를 둔 이런 자들에게는 삶이 결코 헛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죄인”에게는 모든 것이 헛되고 그들이 이룬 것은 남의 것이 됩니다(26). 이 같은 사실은 헛된 삶이야말로 하나님 심판의 결과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된 인생은 그 삶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지 않으므로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없는 자들, 즉 죄인들은 삶 자체가 이미 심판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수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26). 죄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됩니다.

사람의 행복지수는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까? 삶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자신만 위해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별만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 쓰시길 바랍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살아계시는 동안 잘 쓰시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하는 데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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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2-02)


죽음 앞에서 가치 없는 지혜

전도서 2장 12-17절


사람들은 무엇인가 한 번 꽂히면, 주변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경험한 사람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해보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가령 ‘도박은 패가망신이다.’, ‘마약은 중독되며 파멸이다’라고 하는데, 본인은 그 원칙에서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듭니다. 선배들의 조언을 따라 멈추면 그만큼 복을 누리지만, 끝까지 가는 사람들은 해를 당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들이 진리라면 믿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이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될 것이라고 여기며 추구하는 지혜와 수고로 이룬 성취에 대해 말합니다. 지혜와 무지는 계속 존재해왔고 이후에도 계속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무지한 자보다 나은 점이 있더라도 모두가 이 세상에 잠시 있을 뿐입니다.

 

절제된 생활 방식(12-14)

전도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바삐 달려가고 있는 삶을 잠시 멈추라고 하고 계십니다. 잠시 멈추어서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이루려고 하는 그것이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인생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12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13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14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12-14)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많은 것을 이룬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노년에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12a)라고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도구입니다. 도구가 아무리 좋아도 어떤 사람의 손에 잡히느냐에 따라서 좋게 사용할 수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왕궁에 같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때로는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죄악된 일들도 망령되게 행하고 어리석은 짓들까지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돌아보니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도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슬픈 사실 때문이었습니다(12). 지혜로운 사람들이 만든 업적이나 물건들을 본인이 죽고 나면 연속성이 끊어집니다.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조차 생각도 안하고 이용합니다. 차나 비행기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탈 때마다 그냥 타지 누가 만들었는지 감사하다 하면서 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솔로몬은 수많은 것들을 창작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자녀들이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1:43).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나와서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라고 간청합니다. 르호보함은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12:5)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는 솔로몬의 신하들인 노인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12:6). 그들은 솔로몬의 지혜처럼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권고합니다(12:7). 그는 또 젊은 신하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왕이 왕답게 단호해야 합니다.’(8-9)라고 조언을 듣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누구의 조언을 들었겠습니까? 노인들의 조언을 버리고,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취해 버립니다. 그 결과 북쪽 지파들 중심으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누어져 버립니다. 르호보암은 자기 아버지가 쌓아놓았던 모든 업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에까지 수고합니다. 그 일을 이루면 얼마나 뿌듯하고 쾌감이 있겠습니까! 성취하는 순간,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일에 대한 성취감의 쾌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을 뒤로 미루어 놓습니다. 그리고 변명이 ‘이것만 하고 나면, 다음에는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일하다보니 젊은 날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그로 하여금 쾌락과 노동의 대가를 현명하게 누릴 수 있게 한데 반해(3,9), 방탕한 쾌락주의(12)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론짓기를, 지혜에는 진정으로 유익한 점이 없다고 했습니다(13).

어리석은 자들은 마치 어둠 속에서 넘어지는 것처럼 곤경에 빠지는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14).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14). 모든 사람들은 죽고, 또 죽으면 사람들이 두 다 잊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어리석게 살지 않고 현명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진정한 우얼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15).

솔로몬 역시 어리석은 짓들을 시도했으나 단지 망령됨을 발견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짐승처럼 오직 본능에 의해 사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최선은 모든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바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의 마지막(17)

오늘날 이 시대는 구약의 ‘지혜’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신약의 지혜 또한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가장 어리석고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현실도피자가 되는 것은 지독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솔로몬은 현실도피자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고, 오늘날 사람들처럼 쉽고 안일한 삶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17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17)

솔로몬은 올바른 일을 행하는 인생이라도 결국 비참하게 마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성적으로 바르게 판단하여 탁월한 삶을 살더라도 결국 하나님께 반항하는 삶으로 끝마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로 사나 지혜로운 자로 사나 참된 기쁨을 발견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점점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우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후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먼저 간 사람들의 사후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과 일반인들이나 둘 다 죽게 되면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영웅호걸이었던 사람도 죽으면 모두 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간 것을 본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솔로몬은 삶을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주므로 사는 것을 한탄한다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만약 사람이 어떻게 살든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고, 아무것도 가치 있는 일이 없다면 삶의 모든 것과 삶에서 이룬 모든 성취는 헛되고, 무의미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습니다(참조, 1:14, 17, 2:11, 17, 26, 4:6, 16; 6:9).

솔로몬은 자신이 시도했던 모든 경험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오직 한 가지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신의 피조된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3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지니셨던 삶의 자세는 현실로부터 동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께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는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라고 빈정거렸습니다.


우리 주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결과 주 예수님께서는 결코 지치신 적도 없었고, 포기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이신 때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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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3)


헛된 것들(2)-쾌락적인 측면

전도서 2장 1-11절


오늘날은 ‘fun시대’라고 합니다. 세상의 프로그램은 재미없으면 떠난 것 버립니다. 대표적인 예로 TV 프로그램은 내용은 상관하지 않고 흥미가 있어야 지속적으로 봅니다. 재미가 없으면 다른 곳으로 틀어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억지웃음이라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은 교회 안에서도 적용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 프로그램이 싫증 나면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도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세속적이지 않으면서도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될까?’라는 점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본문에는 솔로몬이 만족한 삶을 위해 두 번째로 ‘쾌락’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쾌락에 만연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쾌락은 육신적인 부분만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만을 위한 육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목표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타인의 눈치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으면 다 좋다!’는 극도로 이기주의적인 쾌락 생활 속에 살아갑니다.

 

유희(개그)를 통한 만족(1-3)

인간이 인간됨에 필요한 것은 밥만 먹는 동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미’와 ‘보람’을 먹고 사는 의식적인 존재입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와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자신이 누군가에 의미 있는 존재와 보람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람된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1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2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3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1-3)

솔로몬은 서론에서 ‘이 세상 존재한 모든 것들은 헛된 것이다.’라고 단정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 속에 세상에서 만족을 줄 만한 것들을 찾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로, 첫 번째는 ‘지성’으로 지식을 추구하며(1:12-18). 다음은 ‘쾌락’으로 감성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2:1-11).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입니다(2:12-28). 이러한 것들로 세상에 존재한 모든 것은 헛된 것이라고 서술해 나갑니다.

본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내가’입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경험을 소개함으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해보았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반성하는 존재’, ‘사유(思惟)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의식(自意識)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존재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자신을 의식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에 지혜나 지식적인 것들을 쌓으면 쌓을수록 번뇌와 근심을 더 하여 헛된 것이라면(1:18), 이제 그 헛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서 즐기면서 살아보아야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1)라고 즐거움(enjoy)을 추구한 인생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소개함으로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헛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육체적인 즐거움을 만끽해봅니다. 그는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2)라고 합니다. 육체적으로 즐거움을 두 가지 영역에서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술’과 ‘유흥’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포도주에 맡겨서 즐거움을 얻고자 시도한 행동을 ‘나는 내 몸을 포도주로 이끌어보고자 내 마음에 애썼다’(3)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솔로몬이 종종 최고의 파티를 열었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0:21). 그리고 파티에 최고의 음식을 준비했고(왕상 4:22-23). 최고의 포도주로 만찬에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티에 재담가들을 세워서 흥을 돋구도록 했습니다(2:8). 이렇게 파티를 여는 동안에서 흥겹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썰물이 빠져 나간 것처럼 빈자리에는 쓸쓸하고 고독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파티들도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쾌락적인 파티를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는 것은 ‘미친 짓’과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이 왕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주관하고 행하는 것을 보면서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마음 중심에서는 공허가 빌려왔고 행복하질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속사정에 대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4:13).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 새번역성경)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술을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쾌락’이라고 합니다. ‘쾌락’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세상의 쾌락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자극적인 쾌락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인성이 파괴되고, 욕망 속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그는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3) 인간 욕구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알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포도주로 즐거움을 얻는 것은 순간적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겠지만,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리석음을 멈추고, 다시 지혜로 인도받고자 노력했습니다.

 

사업을 통한 만족(4-8)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침대 위에 평안한 잠을 위해 밤낮으로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침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어야 합니까! 그리고 편안한 침대 위에 잠을 청해보지만, 그 침대를 얻기 위해 부딪쳐야했던 일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4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7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8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10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4-10)

솔로몬은 술과 유희의 쾌락은 헛된 것들을 치유하지 못하고 악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혜를 얻기 위해 시도한 것은 무엇입니까?

(1) 전도자의 수고(4-6)

솔로몬은 다음으로 추구한 것을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4-6)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집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었으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열매 수확을 하고, 삼림을 만들어 사업을 일구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후대 사람들은 이 전도서를 솔로몬이 기록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행적은 개인적으로 먼저 그는 자신을 위해 집을 짓고 집 주위에는 만족할만한 정원을 만들고(대하 8장), 또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만들었고(아가 8:11), 연못도 파고 물을 댈 수 있는 관계시설까지 만들고 그것에 관상용 고기도 길렀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은 자신의 집을 어떻게 꾸몄겠습니까? 자신의 만족을 위해 최대한 아름답고 호화롭게 꾸몄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까지 건축하였습니다(왕상 5장 이하). 이 성전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역사적으로 위대한 건물로 손꼽힐 정도였습니다.

(2) 수고의 결과로 얻은 부(7-8)

솔로몬은 수고한 결과로 이전의 오느 누구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금, 은, 소, 양 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7-8). 그는 당시에 전 세계에 최고의 부자이며, 최고의 지혜자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러한 사업을 감당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비도 거느렸고 솔로몬은 처첩도 후궁이 700명이요 첩이 300명이나 두었었습니다(왕상 11:3). 솔로몬은 이처럼 인생에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한 삶이 자신에게 만족을 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일들은 계속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더 큰 만족을 위한 세상적인 추구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항상 만족할 수 없고,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었습니다.

(3) 선한 것을 추구한 결과(9-10)

솔로몬은 위에서 수고한 결과 선한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모든 결과를 통해 세상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 결과들에 대해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9)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누렸던 것들이 자신의 선조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10)라는 표현은 전도자의 허랑방탕함과 향락의 추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반절에 “나의 모든 수고”와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4-6절에서 언급된 각종 사업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소유를 통해 부를 축적해 보았지만, 그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 만족을 추구한 결과(11)

오늘날 사람들이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대해 잠시 기다림과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즉시 이루어지므로, 소유된 것에 대해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므로 자신의 소유에 대한 만족을 느낄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행복은 유효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솔로몬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가졌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한 진정한 만족은 누릴 수 없었습니다.

11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전도서는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 원리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작동하는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솔로몬 스스로도 좋은 것들을 심어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것을 통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해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다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잠깐 기쁨(쾌락)은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점점 쾌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뒤안길에서 그 일들을 돌아보게 되니깐,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고 하였습니다. 자기 일을 돌이켜 보니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과 자신이 이루려고 애썼던 모든 수고가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로 결론짓습니다. 전도자가 시험한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복이 과연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왕으로서 행복을 만들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추구한 복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리지 못한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고 부러워서 말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누려보았습니다. 누려본 결과, 이 세상의 일들은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한 말은 정답입니다.


이 세상 것을 통해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껴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기쁨은 잠시 동안 만족(쾌락)을 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진정한 영원한 기쁨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을 얻기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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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1-02)


인생에게 헛된 지혜

전도서 1장 12-18절


세상적인 지식을 많이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을 ‘엘리트’라고 합니다. 대부분 많이 배우면 사람노릇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웠기 때문에 엘리트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바르게 배우지 못하면, 많이 배운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적극적으로 반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도해 보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자신들의 가진 지식 때문에 교만해서 하나님을 영접치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본문은 전도자가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락(1:12-2:26)의 첫 부분입니다. 전도자는 ‘왕으로서’ 시도하고 경험했던 일들을 소개합니다. 그가 탐구하려고 했던 많은 시도들 가운데 특별히 ‘인간의 행위’와 ‘지혜’에 관한 언급이 중심 내용으로 다루어집니다. 전도자는 그러한 탐구적 노력과 시도들에 한계가 있음을 자각합니다.

 

인간 행위의 한계(12-15)

선한 씨를 뿌려도 악한 열매를 거둘 때가 있고, 곡식을 심은 자리에서도 가라지나 엉겅퀴가 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에 근원과 뿌리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탐욕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은 많은 수고를 하도록 만들지만, 그 수고가 영혼의 평안과 만족과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수고에 수고를 더 할수록 인생은 괴로워집니다.

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2-15)

솔로몬은 모든 학식과 지혜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능통한 사람으로 수많은 잠언과 글들 그리고 시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 지혜로운 솔로몬이 사람들의 지혜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왕이 된 솔로몬(12)

삶의 헛됨을 절감한 전도자는 지혜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라고 소개합니다(12).

전도자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합니다(12).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당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도시로서 이곳에 왕이었다는 사실은 인생에서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삶의 가치를 궁구하는 일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최상의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논할 만한 자격과 조건이 충분했고, 이를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최선의 것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께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으므로 인생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신뢰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인생을 깊이 궁구한 결과는 한마디로 “헛되다”입니다.

(2) 인간행위의 한계(13-15)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솔로몬이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하여 인류의 역사와 인간사를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은 “13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13-14). 전반적으로 관찰한 결과가 ‘헛된 것’이며, 그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헛되고 괴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가 창세기 천지창조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창 1장).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사람들의 마음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괴롭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곡식과 열매를 맺었던 땅에서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죄악과 저주로 뒤엉키게 되었고,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찾아오면서 세상은 혼란을 통한 불안과 두려움과 저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수고하고 애를 써도 수고의 결과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창 3:15-18).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헛된 일입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얼마나 뜁니까! 뛰는 것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위해 평생 동안 자신의 인생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바람은 잡을 수 없습니다.

지식의 결과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5절에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고 합니다. 구부러진 철사는 사람들이 노력하면 반듯하게 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노력하면 구부러진 길을 반듯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쌓은 지식을 통해서 인간의 구부러진 마음은 바르게 잡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노력하고 수고하면 부족한 창고는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공허한 빈 마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만물이 잘못된 결합들을 바르게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다하고 수고를 해도 결코 도달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영혼의 진정한 행복은 수고와 노력과 사람의 지혜로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인 결과입니다. 모든 만족과 평안도 없습니다. 오직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세속의 욕심과 정욕과 이기심에 노예가 되어 헛된 수고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 수고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스스로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욕심의 노예 된 삶을 끊어버린 것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족, 자신의 수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고 사실을 인정하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깊게 고백할 때, 삶에는 진정한 평안이 찾아오고 삶의 만족과 여유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이 많아지고 놓아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수정 보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조언을 드려서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지식은 시간이 가면 인간에 가장 쾌적한 환경의 유토피아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합니다. 과학이 에덴동산을 만들 수 있습니까? 과학이 발달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파괴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바벨탑을 만들어 나갑니다. 하나님께 심판하실 때는 아무런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지혜의 한계(16-18)

인간은 일생 동안 온갖 문제에 시달리며 수고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이러한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세상적 지혜는 문제를 더욱 부각시킬 뿐 해답을 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지혜자들이 삶과 존재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고자 애썼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16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줄을 깨달았도다 18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6-18)

살아가는 일의 헛됨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언급했던 전도자는 이런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를 얻고자 하지만 지혜 역시 해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난날들의 지식을 회상해 봅니다.

(1) 탐구에 대한 이중적인 진술(16)

솔로몬의 지적인 능력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월등히 풍부한 지혜와 지식의 사람이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자신이 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 선물로 지혜를 주셨습니다(왕상 3:4-12).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고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중년과 노년을 향해 가면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러한 지혜도 헛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16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16)

많은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어리석고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잠언에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3:15)라고 했고,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4:7)라고 잠언에서 지혜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본문 전도서에서는 반대로 ‘지혜를 얻는 것도 헛되도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솔로몬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나라를 통치할 때,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은사와 은혜를 감사하지 아니하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나온 냥 우줄거렸습니다.

하나님을 기초로 해서 사람의 지혜에 외교술을 더합니다. 인간의 사특한 방법을 더하여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두면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에 겸손함이 더하지 않으면 그 지혜는 잔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겸손한 삶의 태도와 같이 가야 진정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로 오만하고 교만하게 판단하고, 또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낮추어 보았던 솔로몬은 마침내 중년에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진짜 지혜는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나 판단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함과 우매함을 고백할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지혜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명성은 솔로몬의 열조보다 지혜가 뛰어난 왕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많은 주변국가의 왕들과 사람들이 솔로몬에게 찾아와 지혜를 찾아와서 문의할 정도였습니다(왕상 4:29-34). 사무엘하 9장에 보면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살피기 위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근동에 있는 더 지혜와 지식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의 결정체가 솔로몬 ‘잠언’이라는 금과 같은 귀한 교훈을 모아놓은 성경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상의 지식들이 사람들에 만족과 풍요와 자유를 주는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아니며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지식은 아무런 쓸모없기 때문에 허무하다고 허무주의(nihilism)에 빠지도록 한 것입니까? 그는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로 접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세상 지식의 결과(17-18)

세상의 지식의 한계성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지식적인 것을 쌓아 ‘엘리트’라고 자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외적인 모습은 엘리트화 되어 갈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해줄 정화제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무지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잡을 수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많은 것을 쌓은 것이 사람들에게 부러워 보일 것입니다.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안습니다.

17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7)

솔로몬이 말하는 하나님을 떠난 지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있는 지식을 솔로몬은 아주 심한 표현으로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을 밝게 해주고 행복을 주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부담을 주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워야 하면 사람 노릇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만 사람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야 창조된 인격이 형성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만 새롭게 만드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곳을 통해 놀라운 만족이 있습니다.

지혜로써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헛수고입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지식과 지혜를 구하지만 결국 이로써 얻는 것은 더 많은 문제로 인한 혼란뿐입니다. 즉 지혜와 지식을 쌓을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그것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예배나 성경공부가 성경의 지식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학습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밖에 영적 상태로 성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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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1-01)


인생에 있어 마지막 결산

전도서 1장 1-11절


연말연시면 자신의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년 초에 세웠던 목적들을 얼마나 성취했는지, 일 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시기입니다. 먼저 글을 읽지 전에 지난 인생은 후회 없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기회가 있을 때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삶의 목적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 목적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전도서는 처음부터 세상에 대한 무의미함을 말합니다. 전도서가 기록한 의도는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 비관주의(pessimism)에 빠지도록 인도한 것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야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부분만 읽고 나면 염세주의(厭世主義)에 빠지기 쉽지만, 마지막까지 읽고나면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전도서에서 말하는 무엇이 그렇게 헛된 인생일까요? 그것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겠습니다.

 

전도자의 소개(1-2)

‘잠언’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전도서’는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전도서’는 ‘잠언’과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잠언’은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교훈이 중점으로 기록되어 있고, ‘전도서’는 ‘인생무상’과 ‘염세주의’가 그리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서 중 하나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지혜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입니다.

1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솔로몬은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소개부터가 범상치 않게 소개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소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소개는 기록자인 ‘솔로몬’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전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전도자’의 개념에 대해 12장에서 ‘9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 12:9-10)고 소개합니다. 현대어로 번역하면 ‘설교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기록자는 자신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겸손히 소개합니다. 더 나가 ‘이스라엘의 왕’보다는 ‘전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왕적 자격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가르치는 한 지혜자로서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기 친 것입니다.

‘전도자’인 ‘솔로몬’은 세상에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고 위대한 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정도로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누려보았지만,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헛된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의 영광스러운 업적이나 부귀가 아니라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는 것으로 겸손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솔로몬이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면서 기록한 책입니다. ‘솔로몬’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듭니까? 그는 이 세상에 모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고백이 인생의 헛됨을 노래합니다.

전도서 전체를 통해, 솔로몬은 ‘헛되다’는 말은 38번이나 기록합니다. 그럼 ‘헛되다’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의미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저 언덕 넘어 있는 무지개와 같다는 뜻입니다. 무지개는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부귀영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이 누렸던 재물, 명예, 권세들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솔로몬처럼 성공해보고 싶고, 당대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부유를 누려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의 모든 것을 이것들에 걸고 전력투구합니다. 오직 이것들만을 얻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열중해서 사업하고 그리고 쉼 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성취했던 솔로몬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솔로몬은 한마디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문장에서 다섯 번이나 ‘헛되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헛되다(לבח헤벨)’는 많은 개념을 가진 단어입니다. ‘바람’ 또는 ‘입김’에서 비롯된 단어로 ‘불안정’, ‘무상함’, ‘허무함’, ‘긍정적인 기대와의 불일치’ 등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지개처럼 무엇인가 그럴 듯하게 보이만, 실제로 취해보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을 통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보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얻어 보면 너무나도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이 후진국보다는 자살률이 높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어 행복할 것 같은 사회 부유 지도층들의 자살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풍부함이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성취했지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해 보였던 정상에 올라갔지만, 그곳에 도착해보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평생을 투자해서 달려왔지만 무지개와 같은 허상(虛像)뿐이었습니다. 주변을 돌이켜 보니깐, 저편 건너편에 또 더 화려해 보이는 무지개가 존재합니다. 또 그 무개기를 찾으려고 뛰어야 합니다. 그래서 뛰어 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행복한 삶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이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평생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무지개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뛰었지만, 막상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가치관이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자기 괴멸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것을 선택해서 자살하고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겠습니까?

 

유익함에 대한 질문(3)

다이아몬드가 비싼 이유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금은처럼 비싼 만큼 변하지 않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영원한 것은 없는가?’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누렸던 솔로몬이 영원한 것에 대한 대답을 합니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3)

전도자 솔로몬은 ‘헛됨’에 대해서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많은 것들을 쌓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높이 쌓으면 쌓을수록 헛된 일을 행한 것입니다.

헛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 천지만물은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자연 법칙인 하루 24시간과 사계절은 변함없고 산천 만물은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유한(有限)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왔다가 또 조상들처럼 그 길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유한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무엇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모든 것들 즉, 시간 물질 그리고 젊음 등을 투자합니다. 그래서 솔로몬과 같이 명성을 얻는 진시황제나 알렉산더 대왕, 스티브 잡스 그리고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게 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 죽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영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수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예를 들어서 보면, 육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좋은 화장품, 좋은 보약, 몸매를 고정시키는 기능성 속옷, 그리고 아름다움을 위한 성형수술 등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 늙지 않는 불로초(不老草)를 찾습니다. 옛날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신하 서불에게 명하여 500명의 선남선녀를 대동하여 불로초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모양만 다르지 불로초를 찾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제도 50세도 못되어서 죽은 아이러니컬한 일을 만났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동일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노력한다고 다 누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노력하지만 대부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것들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쉼 없이 수고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것들을 얻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피해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금까지 인간으로서는 누릴 것을 모두 누려본 사람입니다. 모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려보았지만 만족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죽음 앞에 서있는 자신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까지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외모지상주의(Lookism)가 자리 잡았습니다. 직장을 취직하는데도 실력보다는 미모를 더 중요시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외형을 깎고 다듬고 칠합니다. 하지만 외형적인 미가 전부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Miss Korea’, ‘Miss World’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탱탱하던 피부가 노후화가 됩니다. 미안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수명을 다하게 되면 늙어서 죽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은 모두 한시적인 존재입니다. 영원히 살 사람은 단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靈魂)입니다.

당신이라면 같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들 중에 투자한다면 무엇에 투자하겠습니까? 대부분은 영원한 것에 투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부분이 어느 것입니까? 육신입니까? 영혼입니까? 무엇에 대해 당신의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 어느 정도 투자하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4-11)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각 사람들에 따라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처럼 귀중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쓰레기처럼 취급당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소유의 많고 적음이 행복을 만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로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정말 귀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4-11)

인생의 모든 수고, 즉 세상만사가 헛되다는 사실을 선언한 전도자는 실제적인 현상들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반복되는 인생사와 순환하는 자연 현상들을 통해 모든 것의 덧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물론 자연 현상도 같은 변화가 반복되는 순환을 할 뿐 근본적으로 변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생의 덧없음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합니다.

(1) 오고가는 세대(4)

사람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보다도 더 영속적이고 지속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는 수고로 이루어진 인생이 헛될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어떤 것을 세상만큼 확실하다고 말할 때, 이것은 지구(땅)의 영속성에 대한 솔로몬의 확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4)

사람의 유한함을 비해 땅은 영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역하던 땅과 길들은 변함없이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왔다 갔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람의 연수가 길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시 90:10). 그 후에는 죽어 땅에 묻힘으로써 그 존재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땅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라는 말은 태어나고 죽는 일이 계속됨으로써 인간의 역사는 계속되지만, 한 인간의 삶은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명시합니다. 사람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태어나고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들이 무한한 만물을 향해 탐욕을 불립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수중에 넣을 것인지, 더 많은 것을 누가 획득할 수 있는지, 수많은 보석, 많은 땅, 높은 직위, 많은 학식 등을 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끝없는 탐욕 때문에 만물은 피곤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연이 화가 나서 사람들에게 큰 재앙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 것들 중에 무엇을 욕심내고 있습니까? 바른 물질적인 가치관이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유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성(城)을 획득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헛된 일이 되어 집니다(잠 16:32).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탐욕으로 세상의 것을 취하려 하면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점점 세상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불만족스러운 사람이 행복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통치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맛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생활 속에 부족함을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⑵ 반복되는 자연 현상의 덧없음(5-7)

전도자는 땅과 비교해서 인생의 유한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연현상에 눈을 돌립니다. “5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5-7)

시간이 흘러도 항상 그대로 있는 땅과는 달리, 해와 바람과 물은 끊임없이 4계절을 변화합니다.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집니다. ‘바람’도 돌고 돌고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계절’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라는 계절로 돌아옵니다. ‘강물’도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흐르고, 바다에서 하늘로 증발해서 비로 다시 내려옵니다. 이렇게 자연 현상의 움직임으로 어제와 오늘이 이어지고 세상은 변화 속에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엄청난 변화가 있겠지만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러한 자연 현상의 변화가 반복되는 ‘순환’일 뿐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쉬지 않고 변화를 일으키는 자연 현상도 사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그런 움직임이 반복될 뿐 근본적으로 바꿔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해는 뜨고 짐으로써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고 끝나지만 실상 오늘은 어제와 같은 하루의 반복일 뿐입니다. 바람은 임의로 이리저리 불지만 바다는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자연 현상의 변화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전도자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덧없음과 단조로움, 즉 아무런 목표도 성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순환의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순환 과정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러한 단조로운 반복 속에는 말할 수 없는 피곤함만 있을 뿐 안식은 없습니다.

(3) 만물의 피곤함(8-10)

아무리 좋은 컴퓨터를 구입했더라도 6개월 후에 새로운 제품이 나와서 후회스럽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것들 중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굉장히 새로운 것 같지만, 겉모습만 바꾸어질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새로운 유행과 새로운 스타일을 찾습니다. 새로운 아파트, 새로운 가구, 새 전자제품, 새 주방용품, 새로운 자동차, 첨단 컴퓨터 등등... 그러나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합니다. 진짜 새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 현상조차 일정한 법칙에 따라 변화가 반복되는 것일 뿐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언급했던 전도자는 이러한 만물의 덧없음을 가리켜 “만물의 피곤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새로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에게 만족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를 가리켜 전도자는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해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관계된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각이나 욕구는 늘 새로운 자극이나 만족을 원하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 즉 그 존재의 유한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물론 그 지식이나 기억, 감정 등 인간의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것에 대해 호감과 욕구를 나타냅니다. 이미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생각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또 다시 어떤 일을 하거나 생각하면 새롭게 받아들이며 환호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것도 낡은 것이 되고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실제로 인간들이 이룬 발명이나 창의적인 결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발견’한 것일 뿐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을 있게 한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에서 인간이 발견해내거나 조합한 것으로서 본질에서 변형된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8절 참조)

하나님만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헛된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안고 살아갑니다(롬 6:4).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시 40:3). 새로운 길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있습니다(히 10:20).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아갈 것입니다(계21:1).

지금까지 솔로몬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것은 아무런 쓸모없으니깐, 이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으로 가라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에 목적으로 두고 세상의 것에 낙을 두는 사람들은 ‘헛된 것’을 쫓아가는 거란 것입니다. 무지개를 좇는 사람들은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⑷ 기억되지 못할 세대(11)

기억은 불멸을 가능한 하나의 형식입니다. 따라서 ‘이전 것들에 대한 기억함’과 ‘그것을 실천해야 할 세대들은 없습니다. 우주의 영원성에 대비되는 인간의 무상성을 극명하게 다시금 자각하게 합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간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솔로몬이 체험한 후에 ‘헛되다’고 한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바울사도도 이러한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당신은 이 배설물을 얻기 위해 좇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쫓아왔습니까? 영원히 편지 않고 진정한 가치 있는 것을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마지막 때까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까지 당신에게 남아 있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아 떠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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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1-01)


모순과 정의를 공감하는 선지자

하박국 1장 1-11절


이 세상은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길 원하시지만, 실질적으로는 강포와 죄악과 패역이 넘쳐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 선지자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과 선지자 하박국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으로 하나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그 대회를 기초로 다음 질문과 대답이 이어집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공의를 실현해 달라고 기도하고(2-4),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을 불러오겠다고 대답하십니다.

 

하박국의 표제(1)

하나님의 정의로운 행동을 촉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불의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오, 불의로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당신이 이 부르짖음에 참여할 곳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불의 앞에서 ‘욱’하지 않는다면 선량한 사람이아니라 불량한 사람입니다.

1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1)

하박국은 정의로운 선지자입니다. 주전 7세기 말엽 앗수르가 힘을 잃고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던 당시에 활동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경고’라는 말은 신탁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경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담은 예언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하박국의 첫 질문(2-4)

살아가다 보면, 불의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촉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에는 첫째는 자신이 불의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며, 불의에 고통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불의한 일들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2-4)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첫 질문을 던지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2)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곡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런 하박국의 핵심적인 단어는 ‘강포’입니다. 이곳에서 ‘강포(סמה)’는 ‘폭력’이나 ‘강탈’을 의미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동을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유다 왕국 가운데 이러한 강포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강포한 모습들을 보시고도 구원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만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강포로 인해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 선지자 하박국은 어찌하여 자신의 눈으로 죄악과 패역을 보게 하시느냐고 질문합니다. 그가 보게 되는 일들은 ‘겁탈’, ‘강포’, ‘변론’, ‘분쟁’들입니다. ‘겁탈’과 ‘강포’는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괴롭히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며, ‘변론’과 ‘분쟁’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곳에서 ‘변론(ביר)’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법정에 소송하는 것과, 그리고 ‘분쟁(ןודמ)’으로 싸움이나 분란을 의미합니다. ‘강포’로 인해 유다 왕국이 소송과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다 왕국이 소송과 분란에 올바르게 시행되고 있겠습니까? 유대 왕국 가운데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소송’과 ‘분쟁’에서 기준은 ‘율법’인데, 그 ‘율법’이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즉 공의는 굽게 행해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의(טפשמ)’가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곳에서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올바로 이루어진 상태나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유다에서는 이 ‘정의’가 항상 올바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에는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공의는 곱게 행해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유다에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악인이 의인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악인들이 득세하여 의인을 둘러싸고 어렵게 만드는 상황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인과 의인의 관계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하박국서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정황은 ‘의인과 악인의 정체성과 그들 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올바로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악인이 의인을 둘러싸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인이 잘되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악인들이 득세하여 의인을 둘러싸고 어렵게 만드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박국은 여기서 ‘의인’과 ‘악인’ 그리고 ‘공의의 실현’을 말할 때, 구체적인 민족 혹은 지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박국의 문맥을 생각해 볼 때, 하박국은 분명 2-4절에서 유다 왕국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과 전능한 주권을 행사하시도록 호소하였습니다. 유다 왕국 내에서 의인을 회복하시고 악인을 심판해달라고 기도하던 것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5-11)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불의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매우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보면서 하나님의 무관심과 무능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방법과 시간을 저울질 하고 계십니다.

5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5-11)

하박국의 첫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하박국에게 ‘너희는 열방들을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한 가지 일이고, 그 일을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인데,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도저히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납고 성급한 민족 곧 갈대아 민족 즉 바벨론 제국을 불러오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갈대아 사람’이란 당시 승승장구하여 앗수르를 꺾고, 고대근동의 패자(牌者)로 부상하고 있던 바벨론 제국을 말합니다.

장차 바벨론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까지 계속하여 유다를 어렵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을 표현함에 있어서 ‘자기 소유가 아닌 것들을 점령’한다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표현은 ‘당당함과 위엄’이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즉 바벨론 제국은 공의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벨론의 공의가 ‘참된 공의’가 아니며 ‘자의적인 공의’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박국이 하나님께 공의를 행하여 달라고 기도한 요청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바벨론 군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들이 표범보다 빠르고 이리보다 사납고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어서 먹이를 빨리 덮치는 독수리와 같다고 서술합니다.

9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군대가 유다와 전쟁에서 행할 일들에게 대해 예언하십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9-11).

10절은 또한 그들이 유다의 왕들, 방백들을 멸시하고, 성들을 점령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11절은 매우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힘에 취하여 결국 범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자신의 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기는커녕 죄악을 저지르고 마는 자들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바벨론이 유다를 칠 가격이 없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이런 바벨론을 불러 올려 유다를 심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하박국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의로움, 악함, 하나님의 의, 믿음의 문제가 하박국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교회와 사회가 심판을 촉발하는 곳이 되지 않도록 속히 돌이키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패역과 강포 대신 의와 사랑, 긍휼과 자비, 공의아 정직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공감의 영성을 가진 주님의 제자로서 사회의 아픔에 함께하며 탄식의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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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서론 


하박국 서론


소선지서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경종을 일으키는 귀한 말씀입니다. 합법보다 불법이 앞서고, 비진리가 진리보다 더 대우받는 혼돈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엇하고 계실까?’라며 질문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안 계셔!'라는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답을 이미 하셨습니다. 불법이 횡횡하던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선지서’를 통해 분명한 해답을 주시고 계십니다. 특히 하박국은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전달하시는지 답을 주십니다.

 

하박국의 저자

유다의 예언자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앗수르 사람들이 부르는 원예 식물의 이름인 ‘함바쿠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암바쿰이라고 합니다. 벌케이트(Vulgate) 역에서는 아바쿠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뜻은 ‘껴안다’, 혹은 ‘껴 안김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직 이 책에서만 두 번 등장함으로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주전 612년부터 599년까지 활동합니다. 이 시기에 바벨론은 국제무대를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아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박국의 저작 시기

본 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박국 1:6-11에 나타나는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갈대아인들이 유다인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침공은 주전 605년에 있었던 갈그미스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심증은 앗수르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완전히 패하게 된 전쟁을 말합니다. 갈대아인들은 주전 625-530년 사이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 서의 주전 625년 이전에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작 시기는 주전 605-508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유다의 18대 왕인 여호야김(주전 609-598)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저작 시기에 대해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주전 625년 이전에 그리고 주전 605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본 서의 마지막 장인 3장이 시편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본 서의 저작 시기를 주전 539년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특징 

본 서의 특징은 삶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불공평해 보이는 문제들을 실질적이고 생생하게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과 대화로 이루어지는 질문과 답변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의심하는 하박국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벨론에게 내려지는 다섯 가지 조롱섞인 죄악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의 답변을 하시고 다시 하박국은 바벨론에게 말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하박국이 지혜의 방법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 3장은 하나님의 현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찬양시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신약에 많이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의 전개를 통해 하박국 선지자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슬픔과 불평으로 시작한 하박국은 이제 기쁨과 감사로 본 서를 끝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위대한 승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목적 

하박국이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강대국들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유대인들이 어떠한 삶(하박국 2:4)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하박국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피하기보다는 믿음으로 극복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는 하박국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살 때 의인은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함을 보시고 결코 방관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정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구조

1:1 표제: 하박국이 받은 묵시

1:2-11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1) 1:2-4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

(2) 1:5-11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1:12-2:20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1) 1:12-17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

(2) 2:1-20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 2:1-5 하나님의 대답

⒝ 2:6-20 하나님 대답의 연장: 다섯 가지 “화 있을진저”

① 2:6-8 첫째 “화 있을진저”

② 2:9-11 둘째 “화 있을진저”

③ 2:12-14 셋째 “화 있을진저”

④ 2:15-17 넷째 “화 있을진저”

⑤ 2:18-19 다섯째 “화 있을진저”

⑥ 2:20 “화 있을진저” 단락의 결문

3:1-19 하박국의 기도

(1) 3:1 표제

(2) 3:2 간구

(3) 3:3-15 하나님의 강림

(4) 3:16-19 신뢰와 소망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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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강해


헛되고 헛된 인생을 가치 있게

- 전도서 서론 -


「전도서」는 인생의 목적, 의미, 가치에 대한 소논문이다. 저자는 회의론자이며 염세주의자이다. 저자는 율법 또는 조상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기초로 해서(1:12-13; 7:23-25) 가능한 가장 염세적인 용어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한다. 시작하자마자(1:2), 저자는 자기가 발견한 진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요약하여 제시하는데, 즉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도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된다(1:14; 2:1,17,19,21,23,26; 4:4,8,16; 5:10; 6:2,9; 8:10,14). 저자의 마지막 말은,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이다. 저자는 사람의 모든 노력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말을 자주 덧붙인다(1:14,17; 2:11,17,26; 4:4,6,16; 5:16; 6:9).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헛될 뿐만 아니라 좌절과 절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독자는 이러한 종류의 결론이란 완전히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가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이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3:14; 5:7; 7:18; 8:12-13; 12:13). 그렇지만, 이렇게 강조한다고 해서 그가 위로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정의와 선함에 대한 증거를 이 세상에서 찾지 못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그래서 계시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짐이 된다는 것이다.

 

◎ 기록자

◇ 일반적으로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다. 전도서의 내용은 근거로 하여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정황을 참고하다면 솔로몬의 이름을 빌어 누군가의 수정과 첨가를 통해 재편집 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전도자가 솔로몬 왕 자신임을 명백하게 말한다(1:1,12). 그러나 솔로몬 자신이 이 책을 저술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특정 히브리어 단어들과 문법적 형태나 아람어와 페르시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들을 깊이 연구하면, 이 책이 솔로몬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솔로몬(주전 970-931년에 통치함)이 저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학자들 중 대부분은 이 책이 주전 3 세기 중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 전도자

◇ 전도자란 ‘코할렛’이란 단어는 회집을 뜻하는 ‘카할’이라는 어근에서 왔다. 저자는 종교적인 회집을 명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교사나 왕일 가능성이 많다.

◇ 전도서 12장 9절에서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표현을 통해 신빙성이 있는 해석으로 받아 들인다. 우리는 전도자를 전도자, 설교자, 강연자, 의장, 회장, 지혜자, 지도자 또는 스승으로 번역할 수 있다.

 

◎ 전도서의 내용

인생에 목적이 있는가(1:1-2:26)

인생에 대한 명언들(3:1-11:8)

결론적인 충고(11:9-12:8)

끝맺는 말(1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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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31-02)


현숙한 아내에 대한 지혜

잠언 31장 10-31절


인생에서 배우자를 만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없을 겁니다. 배우자를 만난 후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는 아주 달라집니다. 그 한 존재가 배우자에게 그리고 가족 전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아내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아내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르무엘의 어머니는 좋은 아내에 빗대어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축복을 가져오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 단락은 잠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현숙한 여인을 칭송한 노래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잠언이 언급한 모든 삶의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성취하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지혜의 길을 상징합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얻은 자이며,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현숙한 여인의 가치(10)

현숙한 여인은 훌륭한 신붓감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의 현현입니다. 모든 사람이 갖추기를 기대해야 할 지혜를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의 가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의 도덕성과 능력을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합니다. 그의 이타적인 성품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닮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소홀함이 없습니다.

10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10)

10절은 현숙한 여인 즉 능력을 지닌 여인에 대한 칭찬의 노래를 시작하는 첫 구절입니다.

앞 1-9절에 이어서 여인이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3절에서 왕을 멸망시키는 부류의 여인을 멀리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만약 10-31절 역시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면, 왕의 어머니는 1-9절에서는 피해야 할 여인을 말한 후에, 10-31절에서는 선택해야 할 여인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의 가치는 매우 높아서, 진주보다도 더 귀합니다.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여인이 아니기에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하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우리는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그 대답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현숙한 여인의 삶(11-12)

현숙한 여인은 보석보다 귀합니다. 진주가 여자의 몸을 빛나게 하듯이, 현숙한 여인은 그 남편을 빛나게 합니다. 현숙한 룻을 얻은 덕분에 보아스는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랐습니다(룻 4:21-22). 당신은 스스로 빛나고 인정받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자신으로 인해 자기 배우자와 동료들이 빛나길 원하십니까?

11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12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10-12)

이제 현숙한 여인이 자기 남편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먼저 그녀는 남편에게 신뢰를 받습니다. 그녀로 말미암아 가정의 필요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산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샬랄’인데, 고대사회의 전리품을 뜻합니다. 고대사회의 여성이 전리품을 집에 가져온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숙한 여인이 사실상 남성이 해야 할 일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2절은 현숙한 여인이 살아 있는 동안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최고의 배우자입니다.

 

현숙한 여인의 능력(13-19)

지혜는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영역에서도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교회의 직분자이지만 가정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당황스럽습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모두 인정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13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14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15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6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7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18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19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13-19)

본문에서는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위해 수행하는 일들의 목록을 제공합니다. 이 목록에서 우리가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 특징은 고대사회에서 남성들이 수행했을 만한 일들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는 점입니다. 먼저 여성이 수행했을 일들을 살펴보시겠습니다.

13절에서 양털과 삼을 구하여 기쁘게 손으로 일하는 것인데, 이는 실을 짜는 것을 말합니다. 15절에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나눠주고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8절에서 밤에 등불을 끄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아 이전에 만든 실을 사용하여 베를 짭니다. 21절에서는 가족들을 위해서 옷을 미리미리 지어 입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남성들이 수행했을 일을 현숙한 여인이 하는 묘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4절에서는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대의 무역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여인의 묘사로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16절에서 밭을 평가하고 구입하고 포도원을 개간하는 모습 역시 남편이 수행하는 일로 생각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립니다. 즉, 이 여인은 남성이 수행하는 일과 여성이 수행하는 일을 모두 해내는 존재입니다. 과연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현숙한 여인의 헌신(20-29)

누구든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찾습니다. 하지만 참된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외적인 조건을 만족시킬 때 관계까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20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21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 22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23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24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25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26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27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28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29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20-29)

현숙한 여인은 남을 돌아봅니다. 자신만 위해 일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손을 내밉니다. 자기를 이하여 옷을 입지만, 집안의 종들을 비롯한 모든 이를 위해 따뜻한 옷을 마련합니다. 추운 겨울과 미래를 성실히 준비한 후 미소 짓는 이 여인은 과연 능력과 존귀로 옷 입은 사람입니다.

(1) 현숙한 여인의 성품(20-22)

20-22절에서는 현숙한 여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묘사들이 발견됩니다. 20절에서 현숙한 여인은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구제합니다. 곤고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왕의 직무로 31:8-9에서 설명된 바 있는데, 바로 그런 일을 현숙한 여인이 행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여인은 겨울을 대비하는 옷을 미리 만드는 치밀한 준비성을 보입니다. 아굴의 잠언 24-28절에서 언급된 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처럼 이 여인은 매우 지혜로운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22절에서 이 현숙한 여인은 자기를 위하여 이불을 짓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줄도 아는 현명한 여인입니다.

(2) 현숙한 여인의 남편(23)

23절에 남편이 하는 일이 묘사되는데, 이 남편은 특별히 가정을 위해 하는 일이 없고 오직 성문에서 장로들과 함께 앉았다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일을 합니다. 아내가 모든 일을 다 감당하고 있는 것이 되므로, 이 여인이 누구인지 우리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됩니다.

(3) 현숙한 여인의 지혜로움(24-27)

24-27절에서 현숙한 여인의 지혜로움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24절에서 그녀는 그동안 만든 베로 옷을 지어 팝니다. 25절에서는 미래를 대비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26절에서는 지혜를 베풀어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7절에서 이 여인은 항상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은 온전한 자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4) 현숙한 여인의 가족(28-29)

28-29절에 이르면 자녀들과 남편이 일어나 그녀를 칭찬합니다. 이 세상에 능력 있는 여인이 많지만, 그중에서 이 여인이 가장 훌륭하다는 진심 어린 감사와 칭찬을 전합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완벽하고 존귀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입니까?

 

결론(30-31)

지혜자의 부모는 지혜로운 아들로 인해 칭송을 받고 즐거움을 누리듯이 현숙한 여인으로 인해 그의 남편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이에 자식들이 일어나 감사하며 남편은 아내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기혜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 ‘지혜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0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31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30-31)

우리는 30절에서 이 현숙한 여인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입니다. 잠언 전체의 맥락에서, 특별히 잠언의 서론으로 여겨지는 1-9장에서는 “여호와 경외가 지혜의 근본이다”라고 가르칩니다(잠 1:7; 9:10).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제 잠언의 결론 부분인 31장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인 이 여인은 3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관점을 지닌 여인, 지혜인 것입니다. 31:10-31의 남편은 지혜를 자기 인생의 궁극적 배우자로 선택한 사람을 뜻합니다. 지혜가 그의 삶의 모든 영역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1-9장에서 지혜 여인을 선택하라는 권고를 받은 잠언의 독자는 10-29장에서 삶의 많은 이슈들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 왔습니다.

이제 31장의 결론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데,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특징을 지닌 지혜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이끌어온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선택했더니 가정의 문제, 재정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등 모든 삶의 이슈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잠언 31장에서 잠언서의 결론을 읽게 됩니다. 지혜를 선택한 자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멋진 그림으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이 남편처럼 지혜를 선택한다면, 그리고 10-29장에서 설명되는 삶의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그 지혜를 붙들고 여호와를 경외하려고 노력한다면, 31:10-31에 묘사된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언의 여정을 마치게 되지만, 동시에 잠언을 배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의 단계로 더 깊이 나아가야 하는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선택하여 올바른 길로 걸어가는 은총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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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31-01)


르무엘 왕을 향한 어머니의 지혜

잠언 31장 1-9절


왕은 절대권력자입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왕이 자기 힘을 마음대로 사용했다고 그를 막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왕은 그런 길을 걷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걸어야 할 마땅한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서월대로 얻은 아들에게 왕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 단락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가르친 교훈으로, 뒤이어 등장하는 10-31절의 현숙한 여인에 대한 노래로 연결됩니다. 르무엘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왕을 멸망케 하는 부류의 여인과 술을 멀리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한 여자와 술은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공평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의 직무는 백성을 위하여 공평을 행하는 것입니다.

 

표제(1)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조언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왕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한 일을 가르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며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한결같은 소원입니다. 왕의 어머니는 자녀인 왕에게 왕으로서 바른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1)

먼저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는 표제가 등장합니다.

잠언 31:1-9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1-9절이 바로 뒤 본문인 10-31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라는 문제입니다. 1-9절을 10-30절과 별개로 보는 견해와 1-9절과 10-31절을 모두 르무엘 왕 어머니의 잠언으로 보아 1절을 31장 전체의 표제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1-9절과 10-31절이 서로 연결된다는 견해를 취하여 31장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사실은 잠언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잠언 1-9장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발견됩니다(물론 잠언 6:20 등과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언급되는 곳도 있지만, 대개는 아버지의 잠언이다). 그런데 31장은 어머니의 가르침입니다.

1-9장에서 잠언의 독자는 결혼하지 않은 청년으로 불리며 지혜와 결혼할 것을 권고받는데, 3장에서는 이미 결혼한 중년 남성으로 묘사됩니다. 1-9장에서는 독자가 솔로몬의 아들로서 왕권을 물려받는 왕족으로 묘사되는데, 31장에서는 출신을 알 수 없는 르무엘이라는 존재에게 가르침이 주어집니다. ‘르무엘’은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면, 잠언 첫 시작을 살펴야 합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1:1)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솔로몬 왕의 잠언입니다. 잠언은 왕과 같은 특정한 지도자를 포함하여 언약공동체의 작은 부분인 가정에서 지혜의 삶을 살아가는 자를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잠언의 결론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왕으로서 주의해야 할 점(2-9)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유혹에 넘어가면 왕 자신과 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정갈하게 마음을 지켜서 살펴야 하는 것은 백성과 나라의 안위입니다. 잠언의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왕의 어머니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인 왕에게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조언하고 있습니다.

2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3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4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5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6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8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2-9)

본문은 르무엘 왕을 향한 어머니의 지혜로운 훈계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하여 얻은 아들이 바르고 정의로운 왕이 되기를 원하는 어머니는 왕권을 위협하는 여자와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면서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는 통치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1) 멸망케 하는 여자를 주의(2-3)

2절에서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내 아들아 무엇이냐?”라는 불완전한 문장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아들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데, 그 질문을 일부러 표현하지 않은 채 아들을 세 번이나 부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은 3절에 등장합니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여자를 멀리하라는 일반적인 권고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3하반절에 어떤 여자를 멀리해야 하는 지가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반절에서 어머니는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멀리해야 하는 여인이 어떤 종류의 여인인지 알려줍니다. 바로 왕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듣기 전에 포도주와 독주에 대한 가르침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 후에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포도주와 독주를 주의(4-7)

4절에서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왕에게는 아니다!’라는 단호한 어법으로 원문을 시작합니다. 왕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왕에게 마땅하지 않은 것은 바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면 안 된다는 권고입니다.

이런 주류를 마시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5절에 등장합니다. 술을 마시다가는 나라의 법규를 잊어버려서 곤고한 자들에 대한 재판을 잘못 처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곤고한 자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 악인들이 이득을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5절에서 독주와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이 있는 자에게 주어 그것을 마시고 고통을 잊게 하라고 말합니다. 포도주와 독주의 기능은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르무엘이 마시게 되면 나라의 법도를 잊게 될 것이지만(5), 가난한 자에게 주면 자신의 가난함을 잊게 될 것입니다(7).

7절은 가난한 자로 하여금 가난을 잊게 만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술을 가난한 자에게 주면 그가 가난을 잊을 정도로 포도주와 독주가 강한 성분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한 자가 마시고 가난을 잊을 정도이니, 왕이 마시면 법도를 잊고 불공정한 통치를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3-4절과 5-7절을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르무엘에게 삼가 주의하라고 경고한 대상은 왕을 멸망시키는 여인과 포도주/독주였습니다. 그 이유는 왕의 공의로운 통치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인과 포도주/독주를 공통된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도주와 같은 여인 혹은 여인과 같은 포도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공평한 통치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유혹을 상징하는 비유로도 이해됩니다. 왕의 통치를 어지럽히는 그 어떠한 것도 왕은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지혜의 삶입니다.

(3) 공의를 성취하는 왕(8-9)

8절에 이르게 되면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르무엘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교훈을 전달합니다. 말 못하는 자와 사라져가는 자를 위해서 재판에서 입을 열어 말하라는 것입니다. 왕은 재판에서 최종 결정권을 지닌 권위자이므로, 그가 입을 열어 말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결정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르무엘 왕이 여인과 독주를 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통치를 통해 가난한 자를 변호하기 위함입니다.

9절에서 이러한 왕의 직무는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는 것이 왕이 해야 할 일입니다. 르무엘 왕에게 주는 어머니의 권고는 8-9절에서 갑작스럽게 종료됩니다. 이는 가난한 자를 위해 신원하는 것이 왕의 직무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그 공동체 내에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28-29장의 공동체 지도자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르무엘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지금까지 배워온 1-29장의 잠언들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권고를 듣게 됩니다. 지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삶의 구체적인 영역들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예가 멸망케 하는 여인을 피하는 것과 포도주와 독주를 피하는 것입니다. 실천의 발걸음이 이런 두 가지 예에 제한되지 말아야 함은 물론입니다. 지혜의 길을 걷기 위해, 여호와 경외의 길로 가기 위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가난한 자를 돌보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삶의 세세한 부분들에서까지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한 열매를 거두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의 덕목은 화합입니다. 화합을 위해서는 소외된 자를 본류에 끌어 올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소외된 지체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도와주고, 함께 하여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지도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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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30-02)


세상 만물을 통해 얻는 지혜

잠언 30장 18-32절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세상살이에 대한 교훈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피조 세계를 보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사람보다 지혜로운 미물들에게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본 단락은 아굴의 잠언인 30장의 후반부로서 ‘~한 것 서너 가지’라는 공통된 형식을 사용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서너 가지(18-20), 세상이 견딜 수 없는 서너 가지(21-23), 지혜로운 것 네 가지(24-28), 잘 걷는 것 서너 가지(29-31)를 연이어 묘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참된 권위 앞에 겸손해야 하며, 교만한 것이 곧 미련한 것임을 강조합니다(32-33).

 

깨닫지 못하는 서너 가지(18-20)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취 없어져 버린 것이 있습니다. 사라져버리면 그 심각성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독수리의 자취, 뱀의 자취, 배의 자취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음녀의 자취입니다. 음행을 저지르고도 감쪽같이 속여서 죄를 적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자는 음녀의 위험성을 깨닫고 멀리해야 합니다.

18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9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20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18-20)

18-20절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서너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 구절에서 ‘깨닫다’라는 표현은 빈 동사인데, 잠언 전체 맥락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즉, 18-20절의 서너 가지는 잠언이 알려주는 지혜와 합치되지 못하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서너 가지 중에서 첫째부터 셋째의 경우는 모두 자연물입니다. 독수리의 자취, 뱀의 자취, 배의 자취입니다. 세 가지 모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취가 사라져버리는 경우입니다. 핵심이 되는 넷째 자취는 남녀가 함께한 자취인데, 특별히 음녀의 자취가 그렇다고 20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음녀에게 유혹을 당한 자취는 금방 사라진다는 것인데, 사라지는 이유는 음녀가 거짓말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먹고 나서 입을 씻어 흔적을 지우는 것처럼, 악을 행해놓고도 금방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존재가 바로 음녀입니다.

18-20절은 음녀가 거짓말에 매우 능숙하기 때문에 음녀의 자취를 발견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녀가 음녀인지 알기도 어려우며, 이런 음녀의 유혹을 물리치기도 어렵다는 것을 말합니다. 참된 지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음녀를 멀리해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서너 가지(21-23)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다가 있던 것도 놓치게 됩니다. 무엇을 이루거나 가지고 싶다고 해도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고집부리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는 이유 주 하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21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22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23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21-23)

21-23절은 세상을 진동시키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서너 가지를 말합니다.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가 아닌 다른 이의 자리를 차지했기에,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들입니다.

첫째부터 셋째는 종이 임금이 된 것,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 미움받는 여자가 시집을 간 것입니다. 모두 자신이 합당하지 않은 행복을 얻은 경우들입니다. 이 중 둘째로 음식으로 배부른 것에 대한 언급은 30장의 큰 주제 중 하나인 ‘만족’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21-23절은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자리에 대해서 잘못된 욕심을 내는 것, 즉 ‘탐욕’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여종이 여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종이 탐욕을 내어 여주인을 내쫓은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18-20절에서 넷째가 음녀였는데, 21-23절의 넷째 역시 잘못을 행한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잠언 5-7장에서 음녀는 아버지에게 교훈을 받은 아들을 유혹하여 정한 배필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도록 권합니다. 여종이 여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지혜를 버리고 미련함을 택하도록 하는 경우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 네 가지(24-28)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나 허락하신 자리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그 빈 곳에 욕심과 불만을 채우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만이나 죄악으로 이끌리는 마음이 생기면 신속히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24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26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24-28)

18-20절의 서너 가지와 21-23절의 서너 가지가 부정적인 내용을 다루었다면, 24-28절의 네 가지와 29-31절의 서너 가지는 긍정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24-28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것들을 언급합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경우들입니다. 힘이 없지만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하는 개미, 약한 종류지만 바위에 집을 지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사반, 임금이 없지만, 함께 힘을 합해서 일하는 메뚜기, 그리고 손에 잡힐 만큼 작은 크기지만 가장 넓은 왕궁에서 살아가는 도마뱀이 바로 그런 경우들입니다. 21-23절에서 언급된 경우들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부당한 수단을 동원했지만, 24-28절에 나타난 경우들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당한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참 지혜로운 경우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가장 잘 걷는 것 서너 가지(29-31)

종이 임금이 되고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르고 미움을 받는 자가 시집을 가는 것, 그리고 여종이 여주인의 자리를 빼앗는 것은 모두 질서를 깨뜨리고 전복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자리를 욕심내서 차지하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또 다른 탐욕을 부릅니다. 그렇게 차지한 자리는 타인에 의해 찬탈의 대상이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죄를 범하고 추악해집니다.

29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31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29-31)

29-31절에서는 가장 잘 걷는 서너 가지를 언급합니다.

‘잘 걷는다’는 것은 발걸음을 좋게 만들었다는 의미로서, 지혜로운 발걸음을 취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해서 그 어떤 짐승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자, 사냥개, 숫염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왕입니다. 사자, 사냥개, 숫염소는 모두 강한 힘을 가져서 자신의 걸음을 양보할 필요가 없는 동물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왕도 그 누구 앞에서도 자신의 걸음을 양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걸음이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참된 권위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잠언 전체 맥락에서 길 혹은 걸음은 지혜의 길을 뜻합니다(참조. 잠 4:10-27). 길을 좋게 한 왕이란 지혜를 구하여 진리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얻게 된 진실한 권위를 뜻합니다. 지혜의 길을 얻었기에 자신의 삶에서 당당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 가운데로 이끌 수 있는 권위를 얻은 것입니다. 지혜를 얻은 최종적인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묘사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미련함을 버리고 겸손하라(32-33)

미련한 일을 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아굴은 잠언을 마무리합니다.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려 막으라고 합니다. 이는 타인의 분노를 사고 다툼으로 이어지고 결국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할 수 있지만 더는 확산되지 않도록 절제하고 자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32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3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32-33)

아굴의 잠언 마지막 구절은 미련한 일을 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만약 미련해서 스스로 높은 척하였다면 그래서 악한 일을 행했다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입을 막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어리석은 말을 통해 다른 이의 분노를 사게 된다면, 결국 다툼이 일어나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과 같이, 미련한 일을 저지르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미련한 말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고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32-33절을 요약하면 미련함을 버리라는 권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30장의 해석과 적용

18-20, 21-23절은 음녀를 주의하라는 권고로 해석되고, 24-28, 29-31절은 지혜를 취하여 진실한 권위를 얻으라는 권고로 이해됩니다. 이제 32-33절은 미련함을 버려야 한다고 다시 한번 권합니다. 미련함을 버리고 지혜를 취하라는 권고입니다. 아굴의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올바른 만족을 추구하며, 음녀의 길을 버리고 지혜의 길을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매우 독특한 문예적 어휘와 형식들을 사용하였으나 그 전반적인 내용은 우리가 앞서 배워온 잠언 1-29장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아굴은 다양한 자연물과 인생사의 경우들을 예로 언급하면서, 우리 인생의 행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30장의 서른세 절을 통해서 요약 정리하여 보여줍니다. 아굴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세계관과 삶의 실천 원리들은 여호와 경외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굴의 잠언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지혜 없음을 깨닫고 말씀을 중심으로 지혜를 발견하며 살아가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경우들에 부딪치면서 때로는 깨닫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때로는 견딜 수 없어 고통하며, 때로는 지혜를 발견하여 즐거워하고, 때로는 진정한 권위를 발견하여 그 앞에서 겸손을 배웁니다. 참 지혜의 길은 추상적인 이론의 길이 아닙니다. 아굴처럼 말씀의 원리를 일상생활을 통해서 실천해가는 하루하루의 행보가 바로 지혜의 길, 명철의 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여전히 하나님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분 안에 거할 때 평안을 누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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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30-01)


말씀을 통해 주는 지혜

잠언 30장 1-17절


‘야베스의 기도’가 빗나간 기복주의 영성을 조장하며 한국교회 안에서 신드롭을 일으킬 때 열광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낯설고 또 잊힌, 그래서 늘 아쉽고 아타깝게 여겼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굴의 기도’입니다. 잠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이 기도는 잠언의 정수인 지혜의 백미를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에 이어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경계하라는 교훈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30장 전체가 아굴의 잠언인데, 오늘은 전반부와 중반부를 묵상합니다. 2-9절이 전반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인정할 때 참된 진리의 길로 갈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10-17절은 전반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순종과 만족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베푸는데,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일들을 강한 비유적 언어로 표현해냅니다.

 

표제(1)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 계신 분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1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1)

1절은 30장 전체의 표제입니다. 아굴이 전해준 말씀이며, 이 말씀은 또한 히브리어 ‘마싸’로 표현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아굴이 누구인지, 야게, 이디엘, 우갈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방 사람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를 위한 말씀의 중요성(2-9)

부와 가난 모두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지혜는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아굴처럼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2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2-9)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 계신 분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1) 지혜를 갖지 못한 한계(2-4)

2절부터 아굴은 매우 논리적이고도 화려한 어법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갑니다. 2절에서 자신이 지혜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어리석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3절에서는 자신이 지혜를 배우지 못했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지혜’와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란 잠언 9:10에서 병행되어 나타난 잠언의 대표적인 어휘 쌍으로, 지혜를 강조하여 서술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즉, 아굴은 자신이 잠언 1-29장에서 설명해온 잠언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굴이 지혜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지혜자로서 지금 잠언 30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2-3절에서 아굴의 표현은 강조를 위한 문예적 서술로서, 사람이 지혜를 갖는 것이 사실상 너무나 어렵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런 해석의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4절은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땅의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4절이 가리키는 존재는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2-4절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점을 독특한 논리적 구조를 통해 강조하여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말씀의 중요성(5-6)

5-6절은 말씀의 중요성을 서술합니다. 5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여,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심을 말합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훈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을 당하게 되고, 결국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거짓말하는 자로 판명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만이 지혜를 가지셨음을 강조한 2-4절에 이어, 5-6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7-9)

7-9절은 참 지혜를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게 될 때 얻게 되는 지혜의 삶을 보여줍니다. 아굴은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을 하나님께 구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5-6절에 의하면 거짓말을 멀리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첫째 소원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이룰 수 있습니다. 아굴의 둘째 간구는 조금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갑니다.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내게 정하신 분량의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간구의 핵심은 ‘만족’이 ‘나의 만족한 상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부터 비롯됨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사는 어느 정도의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에서 벗어나서 만족과 불만족이 핵심이 된다면, 그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굴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참 만족이 있음을 아름다운 문예적 표현을 통해서 힘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로 인한 만족(10-16)

사람은 왜 잘 안 변합니까? 타고 난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장 과정에서의 각인된 경험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오늘을 바라보고, 또한 내일을 예상합니다. 결국 ‘과거’로 인해 오늘의 나는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정반대입니다. ’과거’가 아닌, 반드시 일어나리라 확신하는 ‘미래’를 토대로 오늘을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은 분명 변화를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3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4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5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0-16)

겸손을 배우면 교만이 보이고, 자족을 배우면 탐욕이 보입니다. 남을 비방하면 결국 그 비방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짐승에 비유하는 겸손한 이가 있는가 하면(2), 눈꺼풀이 내려올 줄 모르는 교만한 이가 있습니다.

(1) 상전과 종(10)

10절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다룹니다. 종을 그 상전 앞에서 비방하면 종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2-9절에서 신앙적인 원리를 다루었다면, 10절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10절은 주변 문맥과 잘 연결되지 않는 주제를 홀로 다루고 있는 한 절로 구성된 개별잠언입니다.

(2) 지혜 없는 무리의 실례(11-14)

11-14절은 지혜 없이 행하는 네 종류의 무리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11절은 부모를 저주하며 축복하지 않는 무리를 언급합니다. 마땅히 공경을 표해야 할 권위의 대상을 인정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동체의 원리를 해치는 무리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언 전체의 맥락에서, 특별히 잠언 1~9장에서 잠언의 독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을 무시한다는 것은 지혜의 가르침을 저버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12절은 스스로 깨끗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씻지 않아서 매우 더러운 상태에 있는 무리입니다. 잠언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미련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은 눈이 높아진 교만한 무리를 언급합니다. 잠언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거만한 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교훈을 받지 않으려 하며 지혜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14절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하는 지도자의 무리입니다. 잠언 10-29장에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악인들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들이 이미 주어진 바 있습니다. 11-14절은 잠언 1-9장에 나온 중요한 가르침들을 위반하고 거절하는 무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3) 만족을 모르는 경우들(15-16)

15-16절은 만족함을 모르는 여러 존재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5절 상반절에는 만족함을 알지 못해 계속 달라고 외치는 거머리의 두 딸들이 등장합니다. 15절 하반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족함을 알지 못하는 서너 가지가 등장합니다. 사실상 네 가지를 말하는데, 첫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고 마지막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됩니다.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죽음과 생명의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스올은 죽음의 장소이고,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물로 만족하지 못하는 땅과 만족을 모르는 불은 서로가 서로를 상쇄하는 관계입니다. 15-16절의 죽음과 생명 없음 그리고 자연물은 참된 만족을 찾지 못함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참된 만족은 피조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7-9절이 이미 알려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붙잡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17)

아무리 악이 편만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자들이 젊은이들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제시하고 경험하게 하는 목적은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현실을 볼 때 마음에 불편함과 거부감이 생기게 끔하려는 것입니다.

17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17)

17절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잠언 전체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패망의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삶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깨지고 이 시대의 불의와 인생의 무상함은 더욱 분명해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당연시 여기진 말아야 합니다. 죄에 젖어 죄를 생산하며 살기보다 죄가 가져다준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세상의 혼돈을 단번에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두시는 여백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혜와 믿음으로 절망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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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9-02)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

잠언 29장 15-27절


말씀이 부재하던(삿 21:25) 사사시대는 신앙과 윤리, 공동체와 다음 세대의 위기까지 총제적인 난국에 빠졌습니다. 오늘 본문도 토라에 기초한 징계가 없고 지혜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을 때 공동체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본문은 공동체의 지도자를 위한 잠언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5-17절에서는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며, 18-21절은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고, 22-24절은 교육의 중요한 실례들을 제시하며, 25-27절은 교육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올바른 자녀 교육의 중요성(15-17)

자녀의 신앙을 방치하면 결국 부모에게 수치가 되어 돌아오고, 자녀가 지혜로우면 부모에게 기쁨이 되어 돌아옵니다. 당장에는 악인들이 득세하여 꼭 의로운 길을 가르칠 필요가 없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악인이 멸망하게 될 것이니 자식을 징계해서라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겠지만 반드시 즐거움으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15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6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17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15-17)

오늘 본문이 처음으로 강조하는 주제는 자녀 교육입니다.

15절은 자녀에게 채찍과 꾸지람을 내려야만 올바로 교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채찍과 교육은 물리적인 체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훈육 과정을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반절에서 ‘임의로 행하게 버려둔 자식’이란 부모에게서 떨어져 지내게 된 자라는 표현인데, 자녀 교육이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는 잠언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부모의 훈육을 받지 않고 자란 자녀’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5절은 자녀를 훈육하지 않으면 나중에 부모의 수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은 악인이 많아질 때 죄도 많아지지만, 의인들은 결국 악인의 멸망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지금 당장은 악인이 흥왕하고 죄들이 많아지는 것을 볼지 모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 악인들은 결국 패망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16절을 15절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근시안적인 태도를 취해서 올바른 훈육을 소홀히 하면 안 되고, 오히려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훈계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17절이 이러한 15-16절의 의미를 요약해줍니다. 자식을 훈육하면 결국 그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특별한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공동체 교육의 중요성(18-21)

여기서 묵시는 선지자의 예언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가정이나 공동체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백성들은 방자히 행하지 않고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종들이 되게 하느니 차라리 엄하게 교육하는 것이 어리석은 종들로 인한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 낫습니다.

18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19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20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21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18-21)

18절부터는 자녀 교육을 넘어서서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합니다.

18절은 묵시 즉 예언이 없으면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나태해진다고 말합니다. 하반절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음을 제시합니다. 즉, 공동체가 올바로 운영되려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예언과 율법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과 율법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18절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19-21절은 이러한 공동체 교육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공동체가 어떤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예들을 보여줍니다. 19절은 종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만약 종을 엄히 가르치지 않고 좋은 말로 달래려고만 한다면, 그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19절은 교육에 있어서 원칙을 명확하게 세우고 그 원칙을 실행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훈육이 필요한 때에 사랑의 용서를 베푸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20절은 말이 조급한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말이 조급한 사람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이 조급한 사람이란 말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자, 즉 말의 논리성과 설득력을 갖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19절이 말만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면, 20절은 말을 설득력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20절은 19절의 가르침이 잘못된 방향으로 치우지지 않도록 보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공동체 교육에는 적절한 말로 베푸는 가르침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미련함을 멀리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는 무엇인지 지식으로 교육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며, 이런 가르침을 적절하게 베풀지 않으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미련함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21절은 종을 올바로 양육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를 미리 보여줍니다. 19-20절에서 말한 대로 엄한 훈계 및 적절한 말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 종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자식인 체하리라”는 번역의 원문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21절의 내용은 명확합니다. 공동체 교육을 소홀히 하면 언젠가 그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육의 중요한 실례들(22-24)

말이나 감정도 지혜롭게 표현해야 합니다. 말이 급하면 실수가 많아지고, 급하게 화내면, 죄 짓기가 쉽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여도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딜수록 좋습니다. 말이나 감정을 교만하게 표현한다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22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23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4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22-24)

22-24절은 공동체 교육에 있어서의 실례들을 제시합니다.

22절은 노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음을 알려줍니다. 분노를 잘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으면, 공동체 안에 다툼이 발생하게 되고 범죄가 증가하게 됩니다.

23절은 교만과 겸손에 대해서 말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겸손하게 사는 성품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그 교만 때문에 결국 낮아지게 되지만 겸손하면 영광으로 이어지게 됨을 가르칠 때, 공동체는 겸손함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로 인해 서로 존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24절은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도둑이 훔쳐 온 장물을 나누는 데 동참하면, 나중에 그 일이 탄로 나서 조사를 받게 될 때 도둑 편을 들면서 거짓 진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잘못된 일이나 악한 계획은 처음부터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않도록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명확한 가르침을 베풀어야 합니다.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25-27)

진정한 안정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면 높은 망대나 요새에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결코 사람을 찾아가 인가넞깅 해결책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인의 길이 악인의 미움을 사겠지만,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25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26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27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25-27)

이제 우리는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수집한 잠언 25-29장의 결론부에 이르렀습니다. 25-2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적 관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25절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스스로 걸리게 되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게 됨을 말합니다. ‘안전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높아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망대나 요새 같은 높은 곳에 거함으로 안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는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 요새와 망대가 되시는 분입니다.

26절은 이런 여호와 중심성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주권자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많으나, 재판의 결과는 여호와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재판이 열리기 전에 주권자를 찾아서 사정을 설명하고 호의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도음이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겠지만, 진정한 재판의 결과를 이끌어 내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의 길로 갈 때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27절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의인과 악인은 서로를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의인과 악인은 각자 걸어가는 길이 달라서 동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교육함에 있어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 경외의 길을 선택하도록 공동체 구성원들을 최선을 다해서 훈육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은 공동체의 평안과 안정으로 결실할 것입니다. 이런 훈육에 소홀하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지혜의 가치를 잃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니,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이 잠언 말씀을 통해 공동체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세상을 이깁니다. 바른 부제의 시대를 임재의 시대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에게 부지런히 이 지혜의 길, 생명의 길, 경외의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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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9-01)


지혜로운 통치하는 왕의 지혜

잠언 29장 1-14절


한 신문에 실린 ‘두 대통령 이야기’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닮은 듯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여성 대통령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제목과 달리 내용은 씁쓸했습니다. 소통과 약자에 대한 지도자의 자질을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스크랩 해놓았던, 그 기사를 다시 꺼내놓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난세의 영웅, 아니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지도자가 더욱 그리운 아침입니다.

 

본문은 28장에 이어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조언을 제공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여 설명하고(1-2), 지혜로운 재물 사용에 대해 가르치며(3-4), 스스로 올무에 빠지지 말 것을 조언한 후(5-6), 공동체를 이끌 때 기억해야 할 여러 실례들을 알려주고(6-12), 마지막에는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13-14).

 

의인의 통치와 악인의 통치(1-2)

지혜로운 통치자는 정당한 책망을 귀담아듣지만, 책망을 외면하는 목이 곧은 통치자는 패망을 당하고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통치자는 아첨하는 말과 진실한 말을 잘 구별할 줄 압니다. 악한 통치자는 백성에게 탄식만 안겨주겠지만 의로운 통치자의 등장에는 백성들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1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2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1-2)

1절은 가르침을 받을 때 잘못을 돌이킬 줄 아는 것이 지혜임을 알려줍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충고와 교훈을 받을 때 목이 곧아서 즉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패망이 찾아올 때 그를 도와서 다시금 일어나게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모두에게 이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침과 조언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공동체에 알려진 사람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게 되어 더 큰 유익을 받게 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2절은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1절과 연결해보면, 의인이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조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자가 있을 때 공동체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지만, 지도자가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사람일 때는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당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재물 사용(3-4)

의로운 지도자가 공동체를 튼튼하게 세웁니다. 반면 악하고 교만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소란하게 만듭니다. 성적으로 문란하고 불의한 이들은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무너뜨립니다. 또한 경청은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입니다. ‘지도자의 소통 부재’가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합니다.

3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4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3-4)

3-4절은 재물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특별히 3절 하반절은 ‘창기와 사귀는 자’를 언급합니다. 창기와 만나는 자는 당연히 재물을 쉽게 허비하게 됩니다. 창기와 만난다는 것은 지혜를 잃은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재물을 정당하지 못한 대상에 사용하게 되며, 그럴 때 재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절은 지혜로운 삶의 관점을 유지하여 삶의 방향성과 재물을 관리해야 한다는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4절은 왕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줍니다. 왕이 만약 뇌물을 받게 되면 나라를 멸망의 길에 빠뜨리게 됩니다. 뇌물을 즐겨 받든지, 억지로 받는지 모두 다 뇌물이며, 멸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왕은 재물로 나라를 통치하려 하지 말고, 오직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인 정의와 공의의 원리를 기준으로 삼을 때, 재물을 오히려 더 풍성하게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올무에 빠지지 말라(5-6)

쓴 책망은 영혼을 살리고, 단 거짓말이 영혼을 죽입니다. 선지자들의 숱한 경고에도 묵이 곧아 회개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식잔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옳은 말에 귀를 막고 거짓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스스로 올무에 갇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 있고 아무리 기분 좋아도 흘려보내야 할 소리가 있습니다.

5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6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5-6)

5-6절은 올무라는 공통 주제가 있는 잠언들입니다. 5절은 이웃에게 아첨하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사람 앞에 그물을 펼쳐놓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아첨하는 말은 부드럽고 매끄럽게 말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미혹되면 자신 앞에 펼쳐진 그물을 알아채지 못하고 거기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내 귀에 솔깃한 말, 나를 칭찬하는 말,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귀에 솔깃한 말이 나를 넘어뜨리는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6절은 이어서 악인의 범죄가 스스로에게 올무가 된다는 점을 말합니다. 악인은 악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런 악한 계획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 자신을 넘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에 반해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의인은 자신의 앞에 그물이 펼쳐질 때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으며, 또한 항상 계획을 선하게 세우기 때문에 자기 올무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길을 걸어가게 될 때 그 길은 만족과 기쁨이 가득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공동체 운영을 위한 교훈(7-12)

지혜로운 통치자는 창기와 사귀지 않으며, 뇌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정의로 견고하게 하여 나라를 세우며 가난한 자의 형편을 헤아려줍니다. 가난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을 신원해 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7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8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9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10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11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12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7-12)

7-12절에서는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한 종류의 사람과 악한 종류의 사람을 대조하는 기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7절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의인이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준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의 생활을 돕는 지도자가 곧 의인인 것입니다. 악인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다가 패망의 길로 가고 맙니다.

8절은 거만한 자와 슬기로운 자를 대조합니다. 거만한 자는 성읍을 다툼 가운데로 몰아넣지만, 슬기로운 자는 발생한 분노조차 없어지게 만듭니다. 잠언에서 거만한 자는 지혜를 거절한 자를 뜻하며, 슬기로운 자는 지혜를 선택한 자를 말합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공동체에 있어서 평안함과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9절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대조합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재판정에 함께 서게 되면, 둘 중 누군가가 웃는지 노하든지, 결국 화평함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지혜자 때문이 아니라 미련한 자 때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화평함을 알지 못하기에 다툼을 끝까지 끌고 가려고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끼칩니다.

10절은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와 정직한 자를 대조합니다.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해서 그의 피를 이유 없이 흘리게 합니다. 자신의 죄됨이 온전한 자 앞에서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그렇게 온전한 자가 억울하게 피해를 볼 때 그를 구원해주려고 노력합니다. 10절은 주변의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를 도와주고 그 편에 함께 서서 힘을 보태는 것이 참된 지혜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공동체의 삶인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11절은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대조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감정을 억제합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겠으나, 감정을 모두 그냥 발출하는 것이 지혜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 드러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이 중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중요한 줄 알고 옆에 있는 형제자매와 공동체 구성원들의 감정과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지도자입니다.

12절은 공동체 지도자가 거짓말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지도자가 거짓말에 쉽게 흔들리게 되면,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지도자가 분별력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로 지도자를 속이려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동체에는 공명과 정의가 세워지는 대신 거짓말로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지도자의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교훈입니다.

 

가난한 자를 신원하라(13-14)

거만한 통치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지만, 슬기로운 통치자는 노를 그치게 합니다. 그들은 경솔하게 어리석은 자와 다투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감정을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통치자는 감정을 잘 억제하여 말할 때와 거둘 때를 잘 헤아려 발언합니다.

13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14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3-14)

13-14절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가난한 자를 보살펴야 함을 알려줍니다.

13절은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함께 살고 있는 객관적인 현실을 담담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일반은총의 원리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며 삶을 유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인들의 편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이 14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왕이 가난한 자를 공평하게 변호해주어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 왕위가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평의 원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럴 때 공동체가 튼튼해지고 구성원들이 만족스런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아가며,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같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열린 귀, 온유하고 공평한 마음, 약자를 돕는 손길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의 덕목은 은혜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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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8-02)


충성된 종이 되는 지혜

잠언 28장 19-28절


로또를 비롯해 도박 사업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아첨하는 자가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일확천금이나 대박을 염원하고 있고, 충언보다는 아첨을 더 좋아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잠언 기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본 단락은 28장 전반부에 이어서 의인과 악인의 대조를 재물 사용과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특별히 재물 사용을 잠언의 여러 주제와 연결합니다. 재물과 성실함(19-20), 공평함과 재물(21-22), 언어사용과 재물(23-24), 탐욕과 재물(25-27)로 나눠서 서술합니다. 마지막 구절인 28절은 이런 모든 내용을 함축하여 의인과 악인을 설명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재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실함과 재물(19-20)

모든 부가 다 축복은 아닙니다. 어떻게 버느냐가 문제입니다. 성실하게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겠지만, 속히 부자가 되려는 자, 타인의 것에 욕심을 내는 자는 도리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얻은 재물도 축복이 아닙니다. 재물 자체에만 눈이 먼 자는 빈궁이 찾아와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19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20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19-20)

19-20절은 재물의 주제를 성실함과 연관시킵니다. 19절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와 ‘텅 빈 것’을 따르는 자를 비교합니다.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기업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반면 텅 빈 것을 따르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지 않으신 것, 즉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는 풍성한 삶을 누리지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오히려 궁핍하게 되어 ‘텅 빈 상태’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20절은 19절의 내용을 하나의 원리로 잘 표현합니다. 성실함으로 사는 자는 많은 복을 얻게 되지만, 속히 부하게 되려 하는 자는 벌을 받게 됩니다. 성실한 자의 예가 자기 기업을 경작하는 자이고, 속히 부하게 되려는 자의 예가 헛된 것을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탐욕을 버리고 성실함의 가치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삶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공평함과 재물(21-22)

모든 것을 쉽게 얻으려고 하면, 도리어 많은 것을 잃는 법입니다. 땅을 일구는 것은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 관계가 마찬가지입니다. 혀로 아첨하면, 쉽게 사람의 인정과 환심을 얻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을 경작하듯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경책하는 사람은 진정한 벗을 얻을 것입니다.

21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22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21-22)

21-22절은 재물을 공평함이라는 주제에 연결하게 합니다.

21절은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낯을 보아준다는 것은 재판이나 어떤 공적인 결정을 하는 상황에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공정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을 말씀하셨고,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면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삼하 8:15; 사 5:7). 그런데 21b절은 사람이 이런 정의와 공의를 생각보다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 조각 떡 때문에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은 매우 작은 탐욕으로부터 기인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한 조각 떡 때문에 사람의 낯을 보아주기 시작하면, 하나님 지혜의 길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2절은 21절의 메시지를 더 발전시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잘못된 눈을 지닌 자입니다. 특별히 23:6에 의하면 악한 눈을 지닌 자는 ‘인색한 자’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탐욕을 부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악한 눈을 지닌 자는 재물을 얻는 데만 마음이 급해서 결국 가난이 자신에게 임할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재물을 모으는 데 욕심을 내지만, 결국 그 욕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더욱 가난한 상태에 떨어지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1절과 연결해보면, 한 조각 떡에 욕심을 내어 재판 중에 정의와 공의를 해치면, 그 잘못으로 인해 빚어질 결과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탐욕을 버리고 공평을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 길이 또한 자신의 재물을 지킬 수 있는 바른길입니다.

 

언어사용과 재물(23-24)

좋은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뼈 아프게 하는 책망이 더 유익하며 더 진실하고 견고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재물 욕심 때문에 부모에게마저 거짓말을 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고 말 것입니다. 즉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의 언어는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도 파괴합니다.

23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24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23-24)

23-24절은 재물을 언어사용과 연결합니다. 23절은 사람을 경책하는 자가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 사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경책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훈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7장 전반부에서 참된 친구의 충고에 대해 우리는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경책하기보다는 부드러운 혀만을 사용하려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말만 하려고 하고 진정성 있는 충고와 뼈아프게 만드는 조언은 좀처럼 주지 않는 사람은 처음에는 호감을 사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경책을 하는 사람이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게 됨은 자명한 일입니다.

24절은 이러한 인간관계와 언어사용의 문제를 구체적인 재물의 문제로 연결시킵니다. 부모의 것을 도적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녀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이런 자녀는 재물에 대한 욕심에 흔들려 거짓말을 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정직한 언어사용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자멸을 초래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정직한 길을 가는 삶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탐욕과 재물(25-27)

자기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할 때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망하겠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재물을 쓰는 자는 주리는 법이 없지만, 인색한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재물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생명입니다.

25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26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27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25-27)

25-27절은 재물 문제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인 탐욕을 다룹니다.

25절은 탐욕이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서술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란 ‘욕망이 넓은 사람’인데,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서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탐욕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소유를 가지고 싶어 하는 죄된 행동을 실행에 옮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러한 탐욕을 버리려 노력할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더 풍족하게 되는 은총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그 해답을 26절이 제시합니다. 26a절은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미련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잠언은 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참 지혜라고 가르칩니다(잠 3:5).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게 되면 자신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을 파악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그 탐욕에 이끌려 죄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며, 신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의 길이며 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방법입니다.

27절은 이러한 탐욕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구체적인 실례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줄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 오히려 풍요해질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를 피하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권고를 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나의 소유가 줄어들 그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사람에게 더 큰 풍요함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나눔이 곧 지혜이며 지혜의 열매는 생명과 풍성함인 것입니다. 25-27절은 재물 사용에 있어서 탐욕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하며,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나누는 삶을 살 때,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풍요함을 맛보게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의인과 악인(28)

쉽고 빠르게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은 불법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또한, 헛된 것을 좇으며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버림받겠지만, 느려도 신실하게 사는 이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8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28)

28절은 28장 전체의 결론입니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게 되고 악인이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진다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가난과 부라는 재물의 문제 및 탐욕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재물에 우선순위를 둔 지혜 없는 자가 곧 악인이며, 그런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고 결국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인들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는 의인들이 일어나 그 공동체에는 행복과 감사가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28장은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재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해야 할 것인지 가르침을 줍니다. 의인의 관점에서, 지혜자의 관점에서 재물보다 더 중요한 여호와 경외의 신앙을 기준으로 삼을 때, 그 공동체의 재정을 통해 하나님의 평강과 만족이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에게 흡족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지도자는 아첨이나 아부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도록 돕는 경책의 말, 충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아첨 혹은 아부 역시 뇌물과 마찬가지로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아첨하는 자가 당장은 지도자의 눈을 멀게 하여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아첨하는 자가 많으면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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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8-01)


의인과 악인을 다스리는 지혜

잠언 28장 1-18절


잠언서에서 지혜란 ‘공의와 정와 정직’(2:9)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갈수록 부자와 가나안 사람들의 차이가 심화되어 가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강조는 공의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잠언 기자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왕으로서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다스릴지에 대한 지혜를 소개합니다.

 

28-29장은 의인과 악인의 문제를 다루는데, 주로 공동체 지도자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1-5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모습을 대조하고, 6-11절은 부와 가난의 문제를 다루는데 율법에 대한 순종과 연결하게 합니다. 12-18절은 앞선 두 주제를 묶어서, 가난한 자를 돌아볼 줄 아는 의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유다의 왕에게 적용되는 말씀이었을 것이며, 또한 백성들 중의 리더들 및 현대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1-5)

구린 데가 있어서 쫓아오는 자가 없는데도 항상 도망하는 지도자가 있으면 그 나라는 주관자가 많아집니다. 하지만 의인이 다스리면 오래도록 견고한 나라가 섭니다. 악한 지도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율법을 버린 자를 칭찬하며 정의를 깨닫지 못하지만, 여호롸를 찾는 의인은 정의를 깨닫습니다. 본문은 ‘누구에게 나라를 맡길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사자같이 담대한 의인이라고 대답합니다.

1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2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3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4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1-5)

악인은 스스로 망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쫓겨 살게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1절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악인은 늘 두려움에 쫓겨 도망 다녀야 하는 마음이지만, 의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있기에 당당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악인의 마음과 의인의 마음이 28-29장 전체를 조명하는 렌즈가 됩니다.

2절은 이런 의인과 악인의 문제를 공동체의 리더십으로 연결합니다. 나라에 죄가 많으면 지도자가 많아져서 올바른 리더십이 세워지지 못하지만, 명철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 공동체가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의인이 이끄는 공동체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지도자와 악한 지도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이것을 3-5절에서 다룹니다. 3절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쓸어가 하나도 남기지 않는 폭풍우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악한 지도자를 가리키는 묘사입니다. 악한 지도자는 백성들을 이용하고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돌보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4절은 의인과 악인의 문제를 율법과 연결합니다. 악인은 율법을 버린 자에게서 칭찬을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대적 당합니다. 즉, 악인이란 바로 ‘율법과 관련 없는 자’입니다. 율법을 버리고 지키지 않는 자가 바로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5절은 그런 악인은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찾는 의인이야말로 모든 것을 깨닫는 명철을 소유했습니다. 의인이란 지혜를 소유한 지도자인데, 말씀을 자신의 통치 기준으로 삼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또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가 이러한 의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6-11)

부와 가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든지 부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면 부한 악인과 가난한 의인 가운데서는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잠언은 가난한 의인의 삶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가난해도 성실한 자가 부유하지만 굽게 하는 자보다 낫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와 사귀되 탐욕이 많은 자를 멀리해야 합니다.

6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7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8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9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10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 11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6-11)

잠언 기자는 6-11절에서는 부와 가난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6절은 비교잠언(‘~보다 ~이 더 낫다’라는 형식의 잠언)입니다. 가난해도 올바르게 길을 가는 사람이 부유하면서 길을 굽게 가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가난한지 부유한지 아닌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길을 올곧게 가는지 아니면 굽어진 형태로 길을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느냐의 여부에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6절의 메시지는 7절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지혜로운 아들이며, 탐욕을 부리는 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결국 탐욕을 부리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부유함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생각하게 되어, 결국은 굽은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문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가는 문제를 가장 우선적인 삶의 이슈로 지킬 때, 재물의 문제가 올바로 균형 잡힌다는 것입니다.

8절은 잘못된 우선순위의 예를 제공합니다. 비싼 이자를 놓아 돈을 벌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재산을 저축하는 셈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약하게 모은 재물을 결국 빼앗아 가셔서 선한 사람에게로 옮기실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경외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데 재물에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께서 그 재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9절은 다시금 율법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사람이 율법을 듣지 않으려고 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능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재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어떻게 거룩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혜의 길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은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됨을 말합니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앞뒤 구절의 문맥을 참고해 생각해본다면, 악한 방법을 사용해서 정직한 자들을 유혹하여 그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악한 계획을 세우면 결국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10절은 8절과 유사합니다. 재물에 우선순위를 두어 악함에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10b절이 말하듯이, 온전한 자 즉 지혜의 길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절은 부요함과 가난함을 비교하면서 6-11절의 모든 논의를 요약, 정리합니다. 먼저 상반절은 부자가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긴다는 말은 ‘자기 눈에 지혜롭다’라는 것으로 26장 전반부의 미련한 자에 대한 잠언들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본 적이 있는데, 미련함보다 더 나쁜 상태를 지칭하며 결국은 지혜를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하반절은 반대로 ‘가난해도 명철한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명철한 자, 즉 가난하지만, 지혜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살핍니다. 자기 안에 어떤 허물과 잘못이 있지는 않은지 살피고,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이끌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10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악한 자의 재물이 결국 이런 가난한 자에게로 오게 될 것이며,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고, 사자처럼 당당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6-11절은 부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가 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지 말라(12-18)

왜 가난한 의인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까? 부한 의인은 사람과 하나님께 모두 외면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불의한 부자가 나타나면 다들 숨기에 바쁩니다. 반대로 의인이 흥하는 것을 모두가 기뻐합니다. 악인은 재앙에 빠지고 구덩이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2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13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14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15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16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17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18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12-18)

악인이 권세를 가지면 힘없고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고통을 겪습니다. 12-18절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교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2절은 의인의 기쁨에는 영광이 있지만,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을 찾아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숨어버린다는 점을 말합니다. 의인의 흥왕은 모두가 기뻐하지만, 악인의 흥왕은 모두의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13절은 12절에서 말하는 의인과 악인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의인이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악인이란 자신의 죄를 숨기는 자입니다. 자신이 미련함을 깨닫고 여호와 경외의 길로 가려고 엎드리는 사람이 의인이며,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게 됩니다.

14절은 이러한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줍니다. 경외하는 자는 복되지만, 미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집니다. 죄를 회개하여 의인이 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죄를 계속 숨기는 자는 악인으로 남아 있게 되기에 재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돌이킨 의인과 죄를 숨기는 악인은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까? 15절은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지도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먹이를 잡고 기뻐하며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고, 또한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곰과 같아서 가난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합니다.

16a절은 ‘이런 악인을 무지한 치리자’라고 명명합니다. 명철을 소유하지 못한 자 곧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 그러한 지도자는 포악을 크게 행하여 가난한 백성을 압제합니다. 하반절은 의로운 지도자에 대해 언급합니다.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게 됨을 말합니다. 지혜의 길을 선택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17절은 이어서 악한 지도자의 모습을 한 번 더 묘사합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란 ‘사람의 피를 흘렸기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함정으로 즉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려서 스스로의 악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파멸을 자초하게 됩니다.

18절은 12-17절의 내용을 요약해줍니다. 온전함 가운데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넘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의를 세우는 자들보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들이 있을 때 행복해집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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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7-02)


부지런히 살아가는 삶의 지혜

잠언 27장 14-27절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역설적으로 개인의 얼굴(페이스)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언어가 파괴되고 언어폭력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개념도 변하여 페이스북 친구와 같은 가상의 친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특별히 오늘 말씀은 더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본문은 27장 전반부에서 다룬 진실한 인간관계에 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갑니다. 잘못된 관계의 예를 들고(14-16), 진실한 관계의 유익을 자세히 설명합니다(17-22). 진실한 관계 가운데 자신의 삶이 다듬어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어서 23-27절은 양 떼를 돌볼 때 삶이 윤택해진다는 설명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잘못된 관계의 예(14-16)

그릇된 인간관계는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과는 좋은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아침에 큰소리로 축복하는 것은 그 동기가 어찌 되었든지 남을 배려하는 일은 아닙니다. 늘 다툼을 일으키는 여자를 집 안에 붙잡아두는 일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고, 기름을 움켜쥐는 것과 같습니다.

14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15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16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14-16)

앞서서 13절은 잘못된 관계의 예로 보증 서는 것을 들었습니다.

14절은 이 주제를 이어갑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하는 것이 저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는 이웃을 위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실은 그에게 저주처럼 생각될 수 있음은, 진정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좋은 예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 역시 잘못된 관계의 예를 들어줍니다. 다툼이 습관이 된 아내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잠언 19:13b절을 좀 더 확장한 내용입니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빗방울입니다. 즉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내를 집 안에 두는 것은 바람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집안에 아내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툼이 이미 습관이 된 여인을 집 안에 있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여자가 집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여인의 마음이 가정을 위해 올바른 방향을 취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인간관계를 말합니다. 다투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 자신의 이익만을 계산합니다. 마치 15절에 나오는 것처럼 아침에 이웃을 큰 소리로 축복하며 시끄럽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실한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뿐입니다.

 

진실한 관계의 유익(17-22)

참 관계는 타인에게 유익을 줍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친구가 친구를 다듬어줍니다. 또 유익한 관계 안에서는 상대방 안에서 자기 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참 관계 안에서는 외적으로만 잘 보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칭찬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익숙한 어리석음을 벗겨내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17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18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19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20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21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22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17-22)

17절부터는 진실한 관계가 가져오는 유익을 하나씩 설명해 나갑니다. 17절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친구가 친구를 다듬는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인간관계를 갖게 되면, 내가 상대방을 다듬어주고 세워주게 되고, 그가 나를 다듬어주고 세워주게 됩니다. 적절한 충고, 따끔한 조언을 주려 하며, 진정한 사랑을 베풀게 되고, 참고 인내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좋은 관계가 아니라, 실제로 서로를 위하는 복된 관계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18절은 무화과나무의 예를 들면서 자기 주인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결국 영광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리더와 구성원들의 관계를 말합니다. 서로를 위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유익을 얻기 원한다면, 먼저 그 사람을 위하고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입니다.

19절은 해석이 어려운데,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비쳐집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마음을 읽어내게 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에 대해서 진실한 마음을 가지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한 결과가 나올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해 잘못된 마음을 가지면 결국 잘못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충고입니다. 내가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하느냐가 결국 그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하게 될 것이니, 우리는 처음부터 진실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0절은 19절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20절은 사람의 눈이 만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보는 것’은 19절의 ‘물에 비치는 현상’과 연결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아 그대로 비쳐지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만족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눈이 원하는 대로 모두 기대하면, 만족은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진정한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친구가 친구를 빛나게 하고, 주인을 지키는 사람이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니,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이를 먼저 만족케 해야 하는 것입니다.

21절 역시 해석이 어렵습니다. 대개는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해서 그 사람의 진실함 여부를 테스트하고, 그 사람을 훈련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곤 하는데, 우리는 원문에 근거해서 좀 다른 해석을 해보려 합니다. 사람의 행실 혹은 사람됨이 칭찬의 진실성을 가려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칭찬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은이 도가니를 통과해야 진짜 은이 되는 것처럼, 칭찬은 그 사람의 삶을 통과해야 진짜 합당한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지는 칭찬을 기뻐하고 자랑하지 말고, 그 칭찬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칭찬을 마냥 기뻐하는 것은 진정한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칭찬을 받을 때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진실한 인간관계를 이뤄가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22절은 갑자기 미련한 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미련한 자는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빻아도 그 미련함이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련한 자를 가르쳐서 고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문맥에서 미련한 자는 누구입니까? 진실한 인간관계를 멀리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칭찬받았다고 무작정 기뻐하는 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고 있고, 이런 실수에 빠지지 않습니다.

 

양 떼를 돌보는 자가 되라(23-27)

지혜로운 자는 재물 자체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임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재물의 속성을 잘 인식하고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날마다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통로가 됩니다.

23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24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25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26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27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23-27)

23-27절은 새로운 주제를 다룹니다. 자신의 양 떼를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은 양 떼를 잘 돌보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24-25절에 나오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풀을 벤 후에 새로 움이 돋는 것처럼, 내일이 되면 내일의 양식이 필요할 것이니, 날마다 새롭게 노력하고 새롭게 거두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6-27절은 열심히 노력하면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됨을 가르쳐줍니다. 어린 양을 기르면 옷이 되고 염소를 기르면 밭을 사는 돈이 되고, 염소의 젖을 짜면 음식이 되고, 결국 이 모든 것은 여종의 생명이 됩니다. 여기서 여종들이란 단순히 여종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종들이란 가족 구성원의 가장 낮은 자들이기에, 이 구절은 가족 구성원 전체가 삶의 윤택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3-27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 마음을 두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삶의 자리를 지킵니다. 게으름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열매를 거두고 풍족함을 누리게 됩니다.

27장 전반부에서 나타난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마지막 문단인 23-27절에서 나타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움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하여, 내게 맡겨주신 직분과 직장과 사업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유익이 되는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진실한 관계 안에서 이뤄집니다. 서로를 위한 진실한 관계 안에서 나누는 따뜻한 사랑과 따끔한 조언은 서로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주고 날카로운 부분을 깎아 함께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모든 관계의 중심에 두고 자신을 앞세우기보다는 남의 유익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진실한 관계를 든든히 세우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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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7-01)


장담할 수 없는 시대를 사는 지혜

잠언 27장 1-13절


함정에 빠진 이유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저는 자기 자신의 취약함에서부터 시작되는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사랑하는 자가 주는 진실한 통책(상처, 고언)에 귀 기울이기보다 원수의 거짓된 입맞춤에 더 기댑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입맞춤에 대한 갈증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갈망에 대하여 이미 지혜를 가지고 있는 배부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달콤한 꿀과 같은 유혹이라도 싫어 거절했을 것입니다.

 

본 단락의 내용은 주로 친구와의 우정 및 그의 진실한 충고에 대한 내용입니다. 친구가 베푸는 진실한 충고가 삶에 도움이 되니 그런 친구와 그의 충고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친구의 충고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칭찬, 자랑, 분노, 지혜로운 삶의 태도 등이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진실한 친구가 되어야 하고, 진실한 친구를 가질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랑과 칭찬에 대한 교훈(1-2)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 앞에서 겸손합니다. 어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로 내일을 예측하고 대비하겠지만 장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말하지 않고 속단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일에 대해 모두 신중합니다. 오늘 자기 자랑하는 일이 내일은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칭찬이나 자랑은 자기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1-2)

1-2절은 자랑과 칭찬에 대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1절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권고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내가 나의 인생을 통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계획이나 능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2절은 칭찬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절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게 하라는 것이지만, 실제 핵심 의미는 자신을 칭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절을 함께 묶어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 계획을 신뢰하거나 자랑하려 하지 말고, 그런 것을 통해 칭찬받으려는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분노와 진실한 충고(3-10)

분노하면 감정만 전달되고 메시지는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질투는 그보다 더 강합니다. 하지만 책망이나 충고는 그 진실함과 사랑을 담으면 잘못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의 입에 발린 칭찬보다 쓰디쓴 충고가 유익합니다. 먼 이웃보다 충고해줄 수 있는 친구가 더 낫습니다.

3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4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5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6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7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9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10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3-10)

삶에 대한 일상적인 내용과 친구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지혜로운 분별이 필요합니다. 특히 친구의 책망과 권고는 아플지라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1) 분노와 투기(3-4)

3절은 미련한 자의 분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과 모래보다도 무겁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의 화를 조절하거나 적절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분노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화를 쏟아내게 될 것이기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절은 3절의 분노의 주제를 계속해서 연결해 나갑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홍수와 같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노와 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질투’입니다. 질투의 힘은 분노보다도 훨씬 더 강합니다. 여기서 질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남녀 간의 사랑 질투를 말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투가 일어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4절은 우리의 삶에서 분노의 힘보다 질투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상황에 대한 화가 일으키는 힘보다, 관계의 갈망에서 나오는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갈망은 어떻게 올바로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그 문제가 5-10절에서 다루어지는 인간관계의 주제입니다.

(2) 친구의 진실한 충고(5-10)

5절은 드러난 책망이 숨겨진 사랑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충고나 조언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드러내놓고 잘못을 꾸짖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충고와 조언이 필요할 때 모른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꾸짖어야 할 때 꾸짖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 질문을 던지고, 조언해야 할 때 조언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5절은 진정한 인간관계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 대한 주제는 6절로 계속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자는 충직에서 우러나온 책망을 던져서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자는 입맞춤을 반복할 뿐입니다. 겉으로 위로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책망이 필요할 때 뼈아프게 책망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충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이 문제가 7절 이하에서 다루어집니다. 7절은 배부른 자는 꿀을 싫어하지만 주린 자에게는 쓴 것도 달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의 필요를 모르면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지만, 그 필요를 알면 소중함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7절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책망해줄 수 있는 진실한 벗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 역시 이런 주제를 이어갑니다. 자기 장소를 떠나 유리하는 자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장소’란 어떤 장소입니까? 나 자신이 항상 머물러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을 떠났다는 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만족과 행복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8절은 7절과 더불어 자신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해줄 사람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8절이 진실한 친구의 책망에 대한 필요를 간접적으로 다루었다면, 9절부터는 이 주제를 다시금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9절은 기름과 향 즉 얼굴과 옷에 사용하는 향수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아름답다고 가르쳐줍니다. 기름과 향은 다른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 준비한 친구의 마음을 뜻합니다. 후각과 청각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그 준비한 정성으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친구의 진실한 권고는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의미입니다. 9절은 친구가 자신을 위해 진실한 책망을 하려고 할 때, 그 친구의 마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0절 역시 친구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 형제보다 친구가 더 가깝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진실한 관계를 소중하게 가꾸어야 하고,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을 위한 교훈(11-13)

아들의 지혜가 아버지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악을 보면 숨지만 어리석은 아들은 악에 노출되어 해를 당합니다. 때로는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서는 것이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친구는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관계인데 보증은 둘 다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11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12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13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11-13)

11절은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잠언 1-9장에서 자주 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이며, 솔로몬이 아들을 향해 제시하는 교훈입니다.

11절은 아들에게 지혜를 얻으라고 권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비방하는 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들이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면 그 비방에 아버지가 무력하게 당하게 됨을 암시합니다. 즉, 아들이 지혜를 얻게 되면 비방하는 목소리가 잠잠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이 지혜를 선택하는 여부가 아버지의 기쁨과 행복에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아버지는 계속해서 슬기로운 자가 되라고 조언합니다. 악을 만나면 피하는 것이 슬기입니다. 악을 보면서도 그대로 계속 길을 가면 악으로 인해 해를 받게 됩니다. 11-12절은 아들에게 지혜를 선택하고 악을 멀리하라고 조언합니다.

13절은 보증의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룹니다. 보증의 문제는 잠언6:1-2 및 20:16에서 이미 다뤄진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왜 보증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까? 1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악한 상황을 보게 되면 슬기롭게 미리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친구를 위해서 보증을 서준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우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에게 도움이 되어, 그와 내가 다 같이 유익을 얻게 되는 관계입니다. 진실한 책망이 그런 예인데, 보증을 서는 것은 그와 나를 모두 망하게 하는 잘못된 길일 뿐입니다.

1-13절은 우리가 삶을 혼자서만 꾸려나갈 수 없기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지혜를 간구해야 하며, 특히 정직하게 조언을 해줄 친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리는 참 지혜자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지혜에는 하나님께서 경륜하시는 세계 원리에 부합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이 그것입니다. 곧 지혜란 하나님 없는 세상과 그 방식과 우매함에 대한 신적 대응방식이고 대답이고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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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6-02)

 


 미련한 말하는 어리석은 자를 통한 지혜

잠언 26장 17-28절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춰볼 때 들춰지는 위선으로 인하여 고민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특히 말씀을 맡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들춰지는 자신의 위선으로 인하여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종 늦게나마 말씀을 선포한 후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선포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들춰내실 때 양심에 찔림 속에서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인하여 자신이 한심해 보이고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본 단락은 이웃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입술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18-22절에서는 거짓 입술을 가진 사람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해서 결국 다툼을 일으키게 됨을 말합니다. 24-28절은 이런 거짓 입술을 가진 자의 내면에는 미움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결국, 그런 미움은 밝히 드러나게 되고 자기 자신이 그 미움과 거짓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실수(17)

지나가다 상관없는 일에 개입하는 것은 들개의 귀를 잡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문제를 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입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해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17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17)

17절은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개입하는 것은 들개의 귀를 잡는 것 같아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17절은 18-28절 전체를 이끌어주는 서론으로,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 함으로써 심각한 피해를 스스로에게 입히지 말라는 화두를 던집니다. 본 단락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란 마음에 미움을 품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해를 입는 거짓 입술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 입술의 사람(18-22)

사람을 속이는 길은 다양합니다. 이웃을 속이고도 농담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거짓의 사람입니다. 의도적으로 피해를 입히고도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험담하는 자들도 다툼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장적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험담꾼들의 말은 별식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옮기고 싶게 만듭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사람도 속이는 입술을 가진 어리석은 자입니다.

18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19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20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21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2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18-22)

18-22절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일련의 묘사합니다.

18절은 횃불을 던지면서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바로 19절에 나오는 거짓 입술을 가진 자입니다. 이웃을 속이고도 ‘내가 농담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이에게 말로 피해를 입히고서도 자기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거짓으로 해명하는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거짓 입술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쏘아 죽게 만드는 미친 사람이라고 오늘 본문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20절은 계속해서 이 거짓 입술을 가진 자를 묘사합니다. 불을 피우는 중에 땔감인 나무가 떨어지면 불이 꺼지는 것처럼, 다른 이를 험담하는 자가 사라지면 공동체 중에서 다툼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험담꾼이 공동체의 다툼에 땔감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서, 그런 자가 없으면 공동체에 평안과 사랑이 임하게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런 험담꾼에 의한 다툼을 불에 비유하는 것은 21절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은 숯불에 숯과 같은 역할 혹은 불에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역시 거짓 입술의 사람이 공동체의 분쟁을 심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험담꾼이 없다면 공동체에는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2절은 이러한 거짓 입술을 가진 자가 하는 말이 왜 공동체에 다툼을 일으키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험담꾼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험담꾼이 다른 이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기 쉽고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고 싶은 악한 욕망이 우리 안에서 꿈틀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22절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17절에서 말한 실수를 범하게 되어서 스스로를 해치는 길로 가게 될 뿐입니다. 둘째,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듣기에 달콤하고 솔깃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옳기도 싶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거나 그런 말을 옮기는 행위는 공동체에 다툼을 일으키고 그 다툼이 더 뜨겁게 타오르게 할 뿐입니다.

 

표리부동한 입술(23)

화려한 언변 뒤에 있는 악한 의도를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유창하고 부드러운 말 뒤에 그들의 의도를 감춥니다. 하지만 은 찌꺼기를 입힌 토기가 이내 그 저급함을 드러내듯, 악한 자의 숨은 의도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아첨하는 말 뒤에 가려진 그들의 의도를 잘 읽어내야 합니다.

23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23)

23절은 거짓 입술의 정체를 밝히는 구절입니다. 불타오르는 입술로 악한 마음을 감추는 사람은 나쁜 은을 입힌 토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나쁜 은이란 정제된 고급 은이 아닌 찌꺼기 은을 말합니다. 처음 볼 때는 은을 입힌 토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찌꺼기 은을 입힌 토기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가짜인 것이 바로 ‘낮은 은을 입힌 토기’입니다. 이런 토기와 같은 자가 바로 불타오르는 입술과 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자입니다. 불타오르는 입술이란 20-21절에서 말한 불타오르는 다툼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표현으로서, 공동체에 다툼을 일으키는 입술을 말합니다. 다툼을 일으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과 뜨거움 뒤에는 오직 악한 마음만 있을 뿐 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가짜 은을 입힌 토기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어떤 이웃에 대한 진실을 알려준다면서 이야기하지만, 그 뜨거운 열심은 가짜 토기의 ‘가짜 은’일 뿐입니다. 선한 마음이 아닌 악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23절이 보여주는 이런 거짓 입술을 가진 자의 악한 마음은 24절 이후의 미움의 마음과 연결됩니다.

 

미움과 거짓말(24-28)

속임수는 상대를 향한 나의 미움의 감정을 숨기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 속임수를 씁니다. 하지만 그 미움은 대중 앞에서 곧 발각될 것입니다. 미움을 감추고 험담을 하면 도리어 자신에게 험담이 돌아와 결국 멸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24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25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26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27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28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24-28)

24절부터는 ‘미움’이라는 주제가 등장합니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의 내면에 미움이 뿌리박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24절은 ‘원수’에 대해서 말합니다. 원수의 원어는 ‘미워하는 자’로서, 마음에 미움을 품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입술로 꾸미고 좋은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속에는 속임수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18-22절에서 기술한 거짓말하는 자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거짓말의 내면에 미움이 있다는 것을 24절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25절은 그런 거짓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이 꼭 어떤 일곱 가지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일곱이란 완전수로서, 가증한 것이 그 마음에 있다는 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 말이 듣기는 좋지만, 내면에는 가중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미움을 품은 자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그 결국이 26-27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26절은 미움을 품은 자가 속으로 그 미움을 감춘다고 할지라도 내면의 악함이 결국 회중 앞에 즉 공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해서 다른 이를 해치려 하고 그 미움을 감추려고 노력할지라도, 언젠가는 만천하에 명백하게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7절은 그렇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함정을 파면 결국 자기가 빠지게 되고, 무거운 돌을 언덕 위로 밀어 올리려고 노력하면 결국 그 돌에 자기 자신이 깔려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움을 품고 다른 이를 해하려고 하는 그 노력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미움은 거짓말을 낳고, 거짓말은 스스로에게 파멸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26-27절의 가르침을 28절이 명쾌하게 요약하고 정리합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 해하려는 자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28b절에서 ‘아첨하는 입’이란 부드럽고 매끄러운 입이라는 말로서 ‘아첨하다’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듣기에 좋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들을 때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거짓말의 특성을 다시금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28b절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듣기 좋은 말은 결국 패망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28절은 미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이야기를 하는 행동의 결과는 멸망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내면의 미움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미움에 빠지게 되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험담을 해서라도 그 사람에게 내 미움을 갚아주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되고, 그 욕망에 휘둘리면 험담꾼으로 전락하게 되며, 결국 그 험담이 나에게 돌아와 나 자신을 멸망시키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입술의 정직함을 지켜나가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미움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뢰 회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뢰도는 우리의 정직한 삶을 통해 만회할 수 있습니다. 신뢰를 회복해야 갈등의 현장에서 갈등조정자로, 분열의 땅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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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6-01)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의 비교하는 지혜

잠언 26장 1-16절


지도자의 자질을 성실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이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이 항목에 포함된 답변으로는 정직, 신의, 도덕, 공평, 솔직, 성실, 믿음 등이 있었습니다. 모두 지도자들이 직접 한 말과 행동에 관련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행복과 안전이 좌우됩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모의 역할이 좌지우지합니다. 안전한 나라를 위해, 행복한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무엇이 있겠습니까?

 

본 단락은 잠언에서 ‘미련한 자’에 대한 단락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12절은 미련한 자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10장 이후 보지 못했던 분명한 문맥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미련한 자를 가까이하거나 그에게 일을 맡기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13-16절은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게으른 자의 삶의 모습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미련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가르침(1-12)

미련한 자에게는 귀한 것을 주어 봐야 귀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예를 주어도 스스로 그 귀한 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는 까닭 없이 저주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저주가 유효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예가 아니라 채찍입니다.

1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2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3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5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1-12)

 다양한 은유를 통해,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들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지혜자는 미련한 자나 게으른 자가 되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1) 미련한 자의 특징(1-3)

1절은 미련한 자에 대한 열두 개의 잠언 모음집(1-12)을 시작하는 첫 잠언입니다.

1절은 미련한 자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을 제공합니다. 여름에 눈이 오는 것이나 추수 때에 비오는 것이 전혀 적절하지 않듯이, 미련한 자에게 영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삶이 어떠할지 추측하게 하는 내용으로 1절은 1-12절의 문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까닭 없는 저주에 대하여 말합니다. 아무런 이유나 근거 없이 저주한 것은 마치 참새가 떠도는 것이나 제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절은 1-12절에서 미련한 자가 언급되지 않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2절은 1절과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광이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까닭 없는 저주는 그 성취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광이 어울리지 않고, 여름에 눈이 어울리지 않으며, 추수 때는 비오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까닭 없는 저주는 성취됨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3절은 미련한 자의 주제를 계속 이어 나갑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채찍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한 것처럼, 미련한 자를 다스리기 위해서도 채찍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미련한 자는 쉽게 다스릴 수 없어서 힘과 권세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미련한 자를 대하는 방법(4-5)

1-3절이 미련한 자에 대해서 비교적 일반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면, 4-5절은 미련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4절과 5절은 서로 대조가 되는 잠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서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게 되면 똑같이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말합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미련한 자가 스스로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상당한 혼란을 줍니다. 어떤 때에 대답하고 어떤 때에 대답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4절을 일반적인 원리로 보고, 5절을 그 원리에 대한 예외로 생각해보려 합니다. 4절은 미련한 자와 대화하게 되었을 때 그가 미련한 것처럼 미련하게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미련한 자와의 대화를 통해 미련함에 물들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에게 대답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게 될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의 미련함을 고려하면서 적절하게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정도까지 가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것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악한 일입니다.

(3)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6-11)

6-11절은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묘사합니다.

6절은 미련한 자 편에 기별을 보내는 것의 위험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발을 스스로 베어버리는 것과 같아서, 미련한 자는 기별을 통해 유익을 가져오기는커녕 해를 끼치게 될 것이 분다 때문입니다.

7절은 미련한 자의 입에 담긴 잠언이 저는 자의 다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6-7절은 미련한 자에게 무슨 일을 맡기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8-9절은 미련한 자는 좋은 결과를 낳기는커녕 오히려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8절은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면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맷돌은 곧 날아가서 여러 사람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9절은 미련한 자의 입에 담긴 잠언이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음을 알려줍니다. 가시나무처럼 미련한 자는 여러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을 끼칩니다.

10절은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마치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어떤 일을 갑자기 맡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불합리한 일라는 뜻입니다.

11절은 미련한 자의 삶의 습관을 표현합니다. 그는 개가 자기 토한 것으로 돌아가듯이, 미련한 것을 거듭해서 행합니다. 미련한 자는 미련함을 버리지 못하며, 그 미련함을 즐겁게 여기고 미련함을 기뻐합니다.

(4) 미련한 자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12)

12절은 미련한 자에 대해 말하는 1-12절의 결론인데, 독자의 예상을 깨고 조금은 특이한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1-11절은 미련한 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계속 이어서 제시했는데, 12절은 미련한 자보다 더 나쁜 상황에 있는 자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에 비하면,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12절의 결론이 단순히 미련한 자를 주의하라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주의해야 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김이 미련함보다 더 악함을 우리는 4-5절의 관계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13-16)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도리어 여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어려움을 줍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의 입에 있는 잠언은 저는 자의 다리와 같이 쓸모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는 단순히 미성숙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여호와의 법을 멸시하는 자입니다.

13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4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15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16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13-16)

13절부터는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13절은 잠언 22:13과 유사한 내용으로, 게으른 자는 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변명을 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이 게으른 자의 특징입니다.

14절은 문이 경칩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게으른 자는 자신의 침대를 중심으로 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게으름은 그 게으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게으름이 일상이 되고 만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5절은 잠언 19:24과 같은데, 게으른 자는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놓쳐버리게 되는 게으른 자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16절은 13-16절의 결론이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특이한 결론을 보게 됩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 명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깊이 빠지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착각하게 되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원문은 자기 눈에 지혜롭다는 것으로, 5절과 12절에 이미 나타났던 표현입니다.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가 바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인데, 16절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게으른 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16절 전체의 문맥을 생각해보면, 게으른 자가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소중하지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게으름은 미련함을 심화시키며,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에서 떠나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게 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그 나라의 축복이라면, 성실하고 신실한 부모를 만나는 것은 그 가정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좋은 지도자를 세우는 데 신중해야 하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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