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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30-01)


말씀을 통해 주는 지혜

잠언 30장 1-17절


‘야베스의 기도’가 빗나간 기복주의 영성을 조장하며 한국교회 안에서 신드롭을 일으킬 때 열광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낯설고 또 잊힌, 그래서 늘 아쉽고 아타깝게 여겼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굴의 기도’입니다. 잠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이 기도는 잠언의 정수인 지혜의 백미를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에 이어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경계하라는 교훈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30장 전체가 아굴의 잠언인데, 오늘은 전반부와 중반부를 묵상합니다. 2-9절이 전반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인정할 때 참된 진리의 길로 갈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10-17절은 전반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순종과 만족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베푸는데,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일들을 강한 비유적 언어로 표현해냅니다.

 

표제(1)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 계신 분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1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1)

1절은 30장 전체의 표제입니다. 아굴이 전해준 말씀이며, 이 말씀은 또한 히브리어 ‘마싸’로 표현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아굴이 누구인지, 야게, 이디엘, 우갈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방 사람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를 위한 말씀의 중요성(2-9)

부와 가난 모두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지혜는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아굴처럼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2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2-9)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 계신 분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1) 지혜를 갖지 못한 한계(2-4)

2절부터 아굴은 매우 논리적이고도 화려한 어법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갑니다. 2절에서 자신이 지혜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어리석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3절에서는 자신이 지혜를 배우지 못했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지혜’와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란 잠언 9:10에서 병행되어 나타난 잠언의 대표적인 어휘 쌍으로, 지혜를 강조하여 서술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즉, 아굴은 자신이 잠언 1-29장에서 설명해온 잠언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굴이 지혜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지혜자로서 지금 잠언 30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2-3절에서 아굴의 표현은 강조를 위한 문예적 서술로서, 사람이 지혜를 갖는 것이 사실상 너무나 어렵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런 해석의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4절은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땅의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4절이 가리키는 존재는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2-4절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점을 독특한 논리적 구조를 통해 강조하여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말씀의 중요성(5-6)

5-6절은 말씀의 중요성을 서술합니다. 5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여,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심을 말합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훈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을 당하게 되고, 결국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거짓말하는 자로 판명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만이 지혜를 가지셨음을 강조한 2-4절에 이어, 5-6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7-9)

7-9절은 참 지혜를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게 될 때 얻게 되는 지혜의 삶을 보여줍니다. 아굴은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을 하나님께 구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5-6절에 의하면 거짓말을 멀리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첫째 소원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이룰 수 있습니다. 아굴의 둘째 간구는 조금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갑니다.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내게 정하신 분량의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간구의 핵심은 ‘만족’이 ‘나의 만족한 상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부터 비롯됨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사는 어느 정도의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에서 벗어나서 만족과 불만족이 핵심이 된다면, 그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굴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참 만족이 있음을 아름다운 문예적 표현을 통해서 힘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로 인한 만족(10-16)

사람은 왜 잘 안 변합니까? 타고 난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장 과정에서의 각인된 경험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오늘을 바라보고, 또한 내일을 예상합니다. 결국 ‘과거’로 인해 오늘의 나는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정반대입니다. ’과거’가 아닌, 반드시 일어나리라 확신하는 ‘미래’를 토대로 오늘을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은 분명 변화를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3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4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5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0-16)

겸손을 배우면 교만이 보이고, 자족을 배우면 탐욕이 보입니다. 남을 비방하면 결국 그 비방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짐승에 비유하는 겸손한 이가 있는가 하면(2), 눈꺼풀이 내려올 줄 모르는 교만한 이가 있습니다.

(1) 상전과 종(10)

10절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다룹니다. 종을 그 상전 앞에서 비방하면 종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2-9절에서 신앙적인 원리를 다루었다면, 10절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10절은 주변 문맥과 잘 연결되지 않는 주제를 홀로 다루고 있는 한 절로 구성된 개별잠언입니다.

(2) 지혜 없는 무리의 실례(11-14)

11-14절은 지혜 없이 행하는 네 종류의 무리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11절은 부모를 저주하며 축복하지 않는 무리를 언급합니다. 마땅히 공경을 표해야 할 권위의 대상을 인정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동체의 원리를 해치는 무리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언 전체의 맥락에서, 특별히 잠언 1~9장에서 잠언의 독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을 무시한다는 것은 지혜의 가르침을 저버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12절은 스스로 깨끗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씻지 않아서 매우 더러운 상태에 있는 무리입니다. 잠언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미련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은 눈이 높아진 교만한 무리를 언급합니다. 잠언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거만한 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교훈을 받지 않으려 하며 지혜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14절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하는 지도자의 무리입니다. 잠언 10-29장에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악인들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들이 이미 주어진 바 있습니다. 11-14절은 잠언 1-9장에 나온 중요한 가르침들을 위반하고 거절하는 무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3) 만족을 모르는 경우들(15-16)

15-16절은 만족함을 모르는 여러 존재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5절 상반절에는 만족함을 알지 못해 계속 달라고 외치는 거머리의 두 딸들이 등장합니다. 15절 하반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족함을 알지 못하는 서너 가지가 등장합니다. 사실상 네 가지를 말하는데, 첫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고 마지막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됩니다.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죽음과 생명의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스올은 죽음의 장소이고,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물로 만족하지 못하는 땅과 만족을 모르는 불은 서로가 서로를 상쇄하는 관계입니다. 15-16절의 죽음과 생명 없음 그리고 자연물은 참된 만족을 찾지 못함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참된 만족은 피조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7-9절이 이미 알려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붙잡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17)

아무리 악이 편만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자들이 젊은이들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제시하고 경험하게 하는 목적은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현실을 볼 때 마음에 불편함과 거부감이 생기게 끔하려는 것입니다.

17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17)

17절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잠언 전체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패망의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삶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깨지고 이 시대의 불의와 인생의 무상함은 더욱 분명해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당연시 여기진 말아야 합니다. 죄에 젖어 죄를 생산하며 살기보다 죄가 가져다준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세상의 혼돈을 단번에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두시는 여백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혜와 믿음으로 절망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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