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05-01)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12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救援)은 해방의 사건이고 자유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욕망의 종노릇 한데서 벗어나는 것이고, 창조주 하나님만을 선악과 생사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유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참다운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자유인에게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일 뿐이며, 그러한 가르침의 동기는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비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불순한 동기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1)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유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헌법에서는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까지도 자유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유를 방종(放縱)이라고 합니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1-4장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변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간에 자신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관계도 나왔고,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복음을 위임 받았는지를 말해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주님의 복음이라고 논증하였습니다. 이 근거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서술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선언적으로 시작합니다. 보편적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1:4)는 소식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하였던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4:3,8).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조차도 율법을 따라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정신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율법을 성취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공연히 해방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멋대로 방탕하고 부도덕한 삶에 빠지라고 해방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구원의 모든 해택을 만끽하면서 죄책감이나 정죄 없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실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율법이 무효화 되거나 폐기되었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을 주장해왔던 철학, 종교, 기본적인 삶의 원리들과 함께, 그것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더라도 완성된 복음이 오기 전 유대인들에만 한시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율법까지도 ‘초등학문’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4:8).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해석에서도 자유한 여인 사라와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예는 바로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볼 때, 복음의 자유는 곧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도 할례를 부과하려는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2:4)하는 자로 설명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반면 이를 거부하고 다시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종’이 되는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율법의 멍에’라 표현하며 그 멍에를 명예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율법의 멍에’를 ‘종의 멍에’로 재규정합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표현은 바울이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이 회심 이전에 메고 살았던 ‘초등학문의 멍에’와 비숫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5장 1절은 복음의 선초와 그에 대한 단호한 응답의 요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는 의(2-4)
누구든지 율법을 지켜서 완전해져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이며, 죄인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칭찬받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다시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2-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도 취하고 하례와 율법도 행하려는 입장의 부당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옛 언약의 세계 속에서 메시아의 역할과 할례(율법)의 기능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은 구약과 옛 언약에 기초해서 나름의 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고려하는 순간 완전히 달라집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제외된다고 말합니다(4). 할례든 음식법이든 정결법이든,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이 중심이 되는 옛 언약의 체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말(3)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가 아니라 ‘율법 안에’(4) 거하려는 삶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초등학문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삶을 지칭하는 표현합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삶인데도, 이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러한 ‘종의 멍에’를 지려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을 통한 의로움(5-6)
인간의 무지는 철옹성 같아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면 그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믿지 못합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경의 증언을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바른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요약적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의로움’의 은총이 미래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모든 은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적 종말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이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로마서 5:1; 8:30; 고린도전서 6:11).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 거하면서 그 의로움이 자라가고 궁극적으로는 완성될 날을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5; 로마서 2:13; 3:20, 30). 같은 절에서, 바울은 미래적 의로움을 기다릴 수 있는 현재적 증거와 수단이 바로 ‘성령’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받게 될 복들 중 상징적 복이기도 한 성령의 임재(3:14)는 종말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은총을 매개합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인 의로움도 성령이 매개해주는 은총 중 하나입니다.
구속사적 순서로 볼 때, 하나님 백성의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의롭게 되심’(디모데전서 3:16)으로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매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은총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할레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6).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역사’합니다(6).
여기서도 ‘믿음’이 지적인 동의와 전적인 신뢰와 더불어 전인격적인 순종의 반응을 내포함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닮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누룩 같은 거짓 교훈(7-9)
누룩은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숫자가 적더라도 모든 음식물에 삽시간에 퍼집니다. 잘못된 거짓 진리들은 누룩과 비슷합니다. 그 숫자가 작다고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퍼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하면서 까지 찾아온 안정은 영원한 안전이 되지 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7-9)
대적자들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7). 율법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8). 바울은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가지는 독소적 요소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당시의 격언을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10-12)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기 때문에 매우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긍휼의 때,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서야 합니다.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0-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도록 종용하는 한편, 대적자들을 행하여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는 대적자들을 ‘요동하게 하는 자’(10)와 ‘어지럽게 하는 자’(12)로 칭합니다. 이는 각각 ‘혼돈하게 하는 자’, ‘성도들을 충동하여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희석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었음을 표현해 줍니다.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할례와 율법을 전한 것이 유대교의 주류 사회로부터 저주받은 자(3:13)라는 걸림돌이 있었음도 동시에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1:12)요 완전한 진리(2:5)요 인간을 자유케 하는 소식(5:1)이요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복음(1:4)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머물지 못하게 성도들을 혼란케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한 대적자들에게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아포콥토(αποκοπτω)는 육체의 일부를 잘라내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할례를 강요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면 차라리 거세를 하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의 격한 심정을 잘 표현해주는 문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립니다. 하례가 아닌 믿음으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사랑으로 지체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무서워 지키는 말씀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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