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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01)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12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救援)은 해방의 사건이고 자유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욕망의 종노릇 한데서 벗어나는 것이고, 창조주 하나님만을 선악과 생사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유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참다운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자유인에게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일 뿐이며, 그러한 가르침의 동기는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비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불순한 동기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1)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유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헌법에서는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까지도 자유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유를 방종(放縱)이라고 합니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1-4장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변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간에 자신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관계도 나왔고,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복음을 위임 받았는지를 말해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주님의 복음이라고 논증하였습니다. 이 근거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서술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선언적으로 시작합니다. 보편적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1:4)는 소식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하였던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4:3,8).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조차도 율법을 따라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정신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율법을 성취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공연히 해방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멋대로 방탕하고 부도덕한 삶에 빠지라고 해방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구원의 모든 해택을 만끽하면서 죄책감이나 정죄 없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실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율법이 무효화 되거나 폐기되었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을 주장해왔던 철학, 종교, 기본적인 삶의 원리들과 함께, 그것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더라도 완성된 복음이 오기 전 유대인들에만 한시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율법까지도 ‘초등학문’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4:8).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해석에서도 자유한 여인 사라와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예는 바로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볼 때, 복음의 자유는 곧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도 할례를 부과하려는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2:4)하는 자로 설명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반면 이를 거부하고 다시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종’이 되는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율법의 멍에’라 표현하며 그 멍에를 명예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율법의 멍에’를 ‘종의 멍에’로 재규정합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표현은 바울이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이 회심 이전에 메고 살았던 ‘초등학문의 멍에’와 비숫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5장 1절은 복음의 선초와 그에 대한 단호한 응답의 요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는 의(2-4)

누구든지 율법을 지켜서 완전해져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이며, 죄인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칭찬받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다시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2-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도 취하고 하례와 율법도 행하려는 입장의 부당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옛 언약의 세계 속에서 메시아의 역할과 할례(율법)의 기능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은 구약과 옛 언약에 기초해서 나름의 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고려하는 순간 완전히 달라집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제외된다고 말합니다(4). 할례든 음식법이든 정결법이든,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이 중심이 되는 옛 언약의 체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말(3)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가 아니라 ‘율법 안에’(4) 거하려는 삶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초등학문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삶을 지칭하는 표현합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삶인데도, 이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러한 ‘종의 멍에’를 지려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을 통한 의로움(5-6)

인간의 무지는 철옹성 같아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면 그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믿지 못합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경의 증언을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바른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요약적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의로움’의 은총이 미래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모든 은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적 종말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이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로마서 5:1; 8:30; 고린도전서 6:11).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 거하면서 그 의로움이 자라가고 궁극적으로는 완성될 날을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5; 로마서 2:13; 3:20, 30). 같은 절에서, 바울은 미래적 의로움을 기다릴 수 있는 현재적 증거와 수단이 바로 ‘성령’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받게 될 복들 중 상징적 복이기도 한 성령의 임재(3:14)는 종말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은총을 매개합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인 의로움도 성령이 매개해주는 은총 중 하나입니다.

구속사적 순서로 볼 때, 하나님 백성의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의롭게 되심’(디모데전서 3:16)으로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매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은총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할레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6).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역사’합니다(6).

여기서도 ‘믿음’이 지적인 동의와 전적인 신뢰와 더불어 전인격적인 순종의 반응을 내포함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닮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누룩 같은 거짓 교훈(7-9)

누룩은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숫자가 적더라도 모든 음식물에 삽시간에 퍼집니다. 잘못된 거짓 진리들은 누룩과 비슷합니다. 그 숫자가 작다고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퍼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하면서 까지 찾아온 안정은 영원한 안전이 되지 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7-9)

대적자들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7). 율법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8). 바울은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가지는 독소적 요소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당시의 격언을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10-12)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기 때문에 매우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긍휼의 때,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서야 합니다.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0-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도록 종용하는 한편, 대적자들을 행하여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는 대적자들을 ‘요동하게 하는 자’(10)와 ‘어지럽게 하는 자’(12)로 칭합니다. 이는 각각 ‘혼돈하게 하는 자’, ‘성도들을 충동하여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희석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었음을 표현해 줍니다.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할례와 율법을 전한 것이 유대교의 주류 사회로부터 저주받은 자(3:13)라는 걸림돌이 있었음도 동시에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1:12)요 완전한 진리(2:5)요 인간을 자유케 하는 소식(5:1)이요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복음(1:4)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머물지 못하게 성도들을 혼란케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한 대적자들에게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아포콥토(αποκοπτω)는 육체의 일부를 잘라내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할례를 강요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면 차라리 거세를 하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의 격한 심정을 잘 표현해주는 문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립니다. 하례가 아닌 믿음으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사랑으로 지체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무서워 지키는 말씀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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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3)


자유인인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 4장 21-31절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진리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거라고 착각합니다. 자기 하나도 다스리기 힘든 미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왜 예수님이 오셨겠습니까? 왜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겠습니까? 구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사라와 하갈의 아들 이야기를 통해 ‘약속과 율법’을 대조하고 ‘성령과 육체’의 대립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누가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참 후손인지 밝힙니다. 비록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지만, 결국에는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만이 유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21-23)

불신앙의 세계에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심할 때는 잠시라도 현실에 순흥하려는 태도를 취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조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1-23)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바울이 거론하기 전에 대적자들이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할례와 함께 이삭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현혹되어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갈라디아서의 중심사상을 체계적으로 교리를 마무리하면서, 명확히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친숙한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해서 권면합니다.

(1) 율법의 의미를 청종(21)

사도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소재는 자주 사용한 성경 본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약속의 자녀에 대한 소재로서 적합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을 통해서만 진정한 구원의 방편이요 하나님 백성의 표지임을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사람들은 바울의 대적자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옛 언약의 체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직까지 체계적인 신앙이 정립되지 못하고 초보적인 상황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에 집중합니다. 그는 당시에 회당에서 랍비나 선생들이 청중들에게 성경을 낭독하기 전에 집중하도록 환기시키기는 방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두 아들(22-23)

사도 바울은 율법을 따라 가려는 자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정체성을 통해 설명합니다. 전자는 육체를 통해 태어났지만, 후자는 하나님 약속을 따라서 났습니다.

① 육신을 따라 난 이스마엘

먼저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하갈의 아들에 빗댈 수 있는 종의 언약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이 그 옛 언약을 대표합니다. 율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② 약속을 따라 난 이삭

반면에 이삭은 사라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유인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유인의 자녀입니다. 그들의 본거지는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 어머니에게서 난 이삭처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태어난 자유인들입니다.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약속과 자유를 소유한 이삭의 후손인가 입니다.

 

사라와 하갈에 대한 비유적 해석(24-26)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당시에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대에 숨겨진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그 숨겨진 영적인 교훈을 찾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 또한 색다른 기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대표적인 두 아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영적 교훈이 있었습니다.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

율법주의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로 모든 죄와 사망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유자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언약을 상징한 두 여인(24a)

본 단락에서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 해석이 알레고리적 해석의 결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를 놓고 오랜 토론이 있어 왔습니다. 우선 사라-하갈 이야기가 동시대 유대인들이 알레고리 해석의 주요 재료로 사용한 성경본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2) 종노릇할 하갈의 자녀(24b-25)

바울의 구약 사용을 이해할 때, 그가 1세기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다양한 해석 방법을 공유하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미드라쉬의 일종인 ‘원자화’ 해석 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신약 저자들의 구약해석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해석의 준거점이었습니다. 사라-하갈 이야기 이해의 결정적인 준거점도 창세기의 원래 문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완성된 구원,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외롭다함 받게 되었다는 새로운 틀 속에 사라-하갈 이야기를 재위치 시킨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이 알레고리입니다. 사라와 하갈은 각각 새언약과 옛언약에 대한 상징입니다(24).

역사적으로도 몸종이었던 하갈을 바울은 시내산과 연결시키고 나아가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연결시킵니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종입니다. 반면, 자유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됩니다.

(3) 자유자인 사라의 자녀(26)

바울의 대적자들은 틀림없이 자유자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그의 육신적 후손인 유대인과 그들이 시내산에서 받을 율법과 연결시켰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약속, 유대인, 시내산, 율법, 자유는 하나의 언약 체계 속에서 편안하게 어울립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그 자체 내에서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믿음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는 것입니다(3:23). 그리스도는 약속-율법-자유의 연결고리를 끊으셨습니다. ‘약속-자유’라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연결고리를 만드셨슨비다.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킨 새언약의 체계 속에서 볼 때는, 이방인에게까지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야말로 이방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복을 이미 받은 자들로서 사라를 ‘우리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27-28)

하나님만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해 나가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7-28)

사도 바울은 이사야 54장 1-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이사야서 54:1-2)

여기에서 ‘잉태하지 못한 자’는 일차적으로 사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의 ‘홀로 사는 자’에 대한 원래 표현은 ‘황폐한 여인’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남편 없는 여인이 남편 있는 여인보다 자녀가 더 많은 기이한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남편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5).

남편 있는 여인은 육신의 자녀를 낳을 뿐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준 여인은 약속의 자녀를 낳습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사라는 잉태치 못하였으나, 결국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았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 열방으로부터 수많은 약속의 자녀들을 낳은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사야서 54장 1-2절이 ‘고난 받는 종’의 노래(이사야 52:13-53:12)에 뒤이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 종은 땅에서 고난을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으나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때, 그 종이야말로 많은 의로운 후손들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54장 1-2절에서 이 종은 ‘잉태치 못하였으나 많은 자손을 본 여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의도하였습니까?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잉태치 못한 여인’이 보게 될 약속이 자녀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손이 된다는 오경 원래의 역사적 문맥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29-31)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을 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현실 앞에 탄식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종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현재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29-31)

교회는 교회 안에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지를 잘 살피고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이삭과 함께 두고 문제를 개선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어미인 여종까지 모두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1) 성령을 받은 자가 핍박(29)

사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대조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3장과 4장에서 아브라함의 자녀된 징표로 바울이 줄곧 강조해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자 사라의 요구를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명령하신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지금도 육체를 따라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가 누구인지가 재정의 되었을 뿐입니다.

(2) 여종의 아들은 유업을 나누지 못함(30)

사도 바울은 창세기 21장 30절을 빌려 ‘여종과 그 아들들을 내쫓으라’고 명합니다. 율법을 부과하려는 유대파 그리스도인 거짓 선생들을 내쫓으라는 직접인적 명령인 셈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주신 약속을 함께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성령 받는 자유자의 자녀(31)

이 단락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그들이야말로 약속의 자녀, 자유자의 자녀임을 재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 속의 아이를 희롱했듯이(창 21:90), 바울 당시에도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난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29). 하지만 그들은 약속의 자녀들이 누리는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만이 유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사실에 대해,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게 될 유업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를 이은 것은 육체의 생각과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믿음과 약속을 따라 낳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장자가 아니었지만 언약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보다 먼저 주신 약속을 따라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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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2)


바울의 권면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지도자’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지도자는 몸소 본을 보이는 사람만큼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가진 증인만큼 겁날 것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에는 지도자가 본을 보이고 성도들은 그 삶을 본받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란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직접적인 권면의 단락을 시작합니다.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성도들이 그를 환대한 것을 회상하며, 바울로부터 분리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시도를 비판합니다.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나를 본 받는 자 되라(12a)

예수님의 희생을 본 받아 바울도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다.

12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a)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이성적신 측면에서 맹렬한 논박을 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형제’로 부르면서 그들의 태도를 변경시킬 것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되어서 그들을 섬겼던 지난 시절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와 같이 되라’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와 같이 되라’는 권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 권면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씀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안디옥 사건(2:11-14)에서 이미 암시되었듯이, 이방인들과 하나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먼저 이방인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에서 소개되는 바울의 선교원칙과도 부합합니다.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린도전서 9:21)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가족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은 ‘내가 복음을 따라 살았은즉’이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은 우선 ‘너희도 복음을 따라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 11-2장 21절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바울의 삶을 자전적 어조로 보도해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즉,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특별한 열심이 있는 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2:19)과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게 된 것(2:20)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인칭 고백은 서신의 결론인 6장 14-17절에서도 다시 한 번 절정에 이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1장 11절-2장 11절에 나타난 자서전적 고백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삶의 모델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결국 ‘나와 같이 되라’는 명령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너희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신실함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가라는 명령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변화된 바울 자신처럼 말입니다.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12b-16)

현재 우리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가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신앙의 모습이 어떠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 날마다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살펴보면 환경에 따라 변질된 믿음이었습니다.

12…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2b-16)

복음은 율법의 영원한 요구인 참된 사랑을 이루는 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복음만이 참된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해 율법을 완성합니다.

(1) 연약함을 통해 전한 복음(13)

이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전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육체의 약함’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13)는 말은,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갈라디아 시방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계획보다 더 오랜 기간 그 지방에 머물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육체의 약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도 ‘육체의 가시’를 언급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다메섹 사건 이후 3일간 보지 못한 뒤 시력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아울러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육체적, 정신적 핍박에 노출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14-1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자신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육체적 연약함이 눈과 관련된 것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에 힘을 보탭니다. 이러한 육신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환대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육신의 질병은 악한 귀신의 역사라고 여겼다는 점에서 바울의 질병은 그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13).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않았습니다(13).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바울은 회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접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인한 진정한 삶의 변화와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한 감사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3:2)는 점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답답한 15절 서두에서 ‘너희에게 있었던 복음으로 인한) 행복/기쁨이 어디로 갔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특별했습니다(15b).

(3) 불편한 관계(16)

지금은 오히려 바울이 ‘참된 말을 하므로’ 그들의 원수가 된 형국입니다(16).

 

거짓 교사들의 의도(17-18)

복을 따르는 것이 참된 성숙의 길입니다. 복음만이 죄인을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이 사랑을 드러냅니다. 복음을 믿을 때 복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복음은 참된 아비의 마음을 갖게 하는 영적 성숙의 길입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7-18)

복음으로 주님의 자기 부인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성릐 모든 존귀와 영광을 버리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복음만이 자기를 위한 열심의 한계를 넘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1) 바울과 분리시키려는 거짓 교사들(17)

사도 바울은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열심을 품는 것에 다른 동기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켜 그들을 향하여 열심을 품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17).

먼저 바울의 선교 여정을 뒤따라 다니며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을 부과하려 했던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복음에서 ‘율법’이 결여되었다는 확신 아래,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이방인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하려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열심을 품다’라는 의미의 동사 ‘젤로우’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설명할 때 주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에게 열심을 품게 한다는 것은 결국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은 유대교가 초기 기독교 운동을 어느 정도 용인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5:34-39). 즉, 할례나 정결법, 안식법, 음식법과 같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표지들을 지키는 이상 다양한 종파들에 대해서 용인할 의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사건에서처럼 인방인과 식사 교제를 희생하더라도 주류 유대교와의 관계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부과할 수만 있다면 주류 유대교로부터 더욱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2) 잘못된 열심을 품은 거짓 교사들(18)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5:11)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레를 전하고 율법에 열심을 내게 한 것은 결국 자신들이 동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동기에서 나왔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동기가 온전하다면, 서로를 향하여 열심을 품는 것은 언제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18).

 

다시 돌아설 것을 요구(19-20)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르는 삶은 그저 주님이 좋아서 따르기보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앞서지만 실제적인 준비가 덜 갖춰졌다고 판단되면, 열의를 가라앉히고 기도하며 필요를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살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이라면 결단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19-20)

복음을 떠난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부터 다시 돌봐야 할 영적 어린 아이가 되었지만, 바울은 복음 가운데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성숙한 자가 됩니다.

(1) 다시 수고해야 함(19)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자녀’의 이미지는 곧이어 ‘해산하는 수고’라는 단어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낳은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오디노(ὠδίνω)’는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은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형성될 때까지’입니다. 이 말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아이가 태어나야 끝납니다. 즉,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도의 태어남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2) 안타까운 교인들(20)

편지를 쓰고 당시에도 바울은 당장에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합니다(20). 그만큼 복음의 진리를 떠나 할례와 율법을 채택한 그들의 결정이 바울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성도들이 바른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복음도 여전하고 바울도 여전한데, 다만 갈라디아 교인들은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간절히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랐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한 공동체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지도자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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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1)

자녀에서 종으로

갈라디아서 4장 1-9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너무도 감사하게도 부부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그 부부는 자신이 낳은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도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한 고아를 입양하였습니다부부의 사랑을 먹고 두 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입양된 아이는 자신이 입양된 것을 알게 되었고그때부터 아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부모에게 자유롭게 요구하던 것들이 사라지고부모님께 잘 보이도록 노력하였습니다가지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도 참고 말하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이유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이것을 알게 된 부모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에 마음이 아팠었습니다자신이 낳은 만큼 사랑한 아이인데 말입니다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했습니다그런데 혹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본문은 그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류합니다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 아닌 것들의 종으로 살았으나이제 하나님의 아들과 그 아들의 영을 통해 아들의 지위를 얻었음을 설명합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이방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려 하는 것을 다시 하나님이 아닌 것에 종노릇하려는 행위에 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아들의 명분(1-3)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아들이라도 성인이 되기 전에는 아버지 유산과 상관없는 종과 다름없습니다청지기과 후견인 아래서 통제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이와 같이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며 살았습니다그리스도 안에서만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1-3)

사도 바울은 은혜로 부름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의 조건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책망하면서 종과 아들에 대한 비유를 합니다종과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명확하게 들어납니다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이는 율법의 한시성을 설명하기 위해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사회적 관습인 후견인과 청지기’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에는 히브리 문화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대등한 관계였습니다아버지에게 있어 아들은 기업을 이을 상속자로서 아버지와 그 동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상속자로서 동격을 이루진 않았습니다당시 문화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장할 때까지 후견인을 두어 가르침을 받게 하였습니다율법은 그리스도에로 인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3장 24-25절에서 훈육교사와 유사한 비유를 제시합니다. ‘훈육교사가 주인집 아들의 교육과 관련되었다면, ‘후견인과 청지기는 주인집 아들의 재산 상속과 관련됩니다후견인 밑에 있을 때는 아들이지만 잠시 동안 종과 같은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하지만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되면아들은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로 가게 되고종은 계속해서 종의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율법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현존하는 그리스-로마의 많은 판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유언이나 재산 상속과 관련된 사건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관심거리였습니다유산을 상속할 적법한 상속자라 하더라도 성인이 되지 전까지는 재산 관리 차원에서나 법적인 차원에서 후견인이나 청지기에게 의지해야 하는 당시의 관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아버지가 정한 때가 차기 전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종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묘사합니다(1).

율법 아래에 있던 시기가 바로 이와 같은 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을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특징짓습니다여기서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는 영적인 세력보다는 세상이나 우주를 다스리는 기본적인 원리나 정신을 일킵니다바울이 율법을 스토이케이아의 일종으로 분류합니다.

이방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8) 나름의 철학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온 동안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이전에 따르던 이 모든 원리와 가르침을 다같이 초등학문으로 분류합니다율법도 초등학문인 것은 그것이 한 민족을 다스리는 원리였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준비 단계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의 지위를 얻음(4-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보내셔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던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그 전에는 우리의 신분이 사탄의 자녀요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지만주어진 율법은 1400년 정도를 청지기와 후견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이 후견인과 청지기의 역할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했던 신앙고백을 포함합니다로마서 8장 3-4요한복음 3장 16-17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도 하나님이 을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공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들이 오신 목적이 두 가지 인데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고⑵ 우리로 아들의 지위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을 이루는 가운데여자에게서 나시고율법 아래에 나신 것이란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실 때의 부대 상황으로 묘사됩니다이는 각각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표현해주는 표현들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이 문장이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고 그 중심에 율법 아래에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하는 것만 보더라도 바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즉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 아래 있다가 아버지가 정한 때에 상속자가 되는 것처럼우리도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그래서 때가 차매가 중요합니다이 악한 세대(1:4)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종말적묵시적 행동이 일어날 때가 된 것입니다.

아들의 명분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설명했습니다그 아들의 영(6)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이미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바울은 3장 2-5절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성령을 경험했음을 상기시켰습니다두 다락 모두에서 성령의 경험은 율법 준수와 상관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첫째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그 아들의 영으로 묘사합니다즉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릅니다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릅니다(로마서 8:9; 빌립보서 1:19).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하나님의 왕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성도의 영광스러운 종말적 소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둘째바울은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진다고 표현합니다(6). 그러나 로마서 8장 14절에서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면서성령 곧 양자의 영을 받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설명합니다바울은 두 본문에서 성령의 임재와 양자됨 사이의 시간적 순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까바울의 관심은 시간적 순서에 있지 않고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데에 있는 듯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바람과 같아서 언제 임했는지 인간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됨을 얻었고 그 양자됨은 성령의 선물과 관련이 있으므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성령의 선물과 관련이 있으므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케 하였는지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얻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논리적으로 볼 때양방향 모두에서의 추론이 가능해 보입니다어느 방향이건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 자녀됨의 증거 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아들의 영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6; 로마서 8:15).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입니다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입니다(7) 사도 바울은 3장 2-5절과 4장 6절에서 강조하듯이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성령의 임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은 경각심을 느끼게 합니다.

 

초등학문 종으로 돌아가지 말 것(8-11)

구원이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다른 신들로부터 구원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우상에서 종노릇하던 곳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점점 죄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그리고 결국 죄의 종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8-11)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전의 상태를 상기시킵니다. 1세기 그리스도-로마 사회에는 종교가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섬겨왔던 신들의 종으로 살았을 것입니다또한 각종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들이 그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주신 하나님 아들에 관한 복음을 그들은 종 삼았던 전통적인 신들의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인비다.

더구나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노예정제에 근거하여 이민족들을 착취함으로써 제국의 체제를 고착화하려 했던 황제들의 이야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9) 된 상태로 묘합니다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들이 할례와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그들의 옛 신들과 옛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바울은 평합니다복음과 비교할 때모든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는 약하고 천박하다’(4:9) 한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율법도 스토이케이아의 일종이 아니었습니까(4:3)?

과연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달력을 따른 각종 의식과 율법도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10).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그 각각이 정기적으로 되풀이되느 유대교의 특징 기념일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유대교 의식에 대한 통칭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지킨다는 의미의 동사 파라테레이스테(παρατηρεισθε)’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절기를 고수하고 있는 중으로 보입니다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단정 짓고 갈라이아 교인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대신자신의 수고가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11). 강한 어조로 다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올 것을 명하면서도그들 스스로 마음을 다시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대목에서 목회자 바울의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았으면서도자신들의 연약함과 무지 때문에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는 아들은 1세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오직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 근거해 의로움을 얻는다는 진리가 모두에게 계속적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준수함으로 먼저 유대인이 되라는 요구했습니다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무시한 것입니다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헛되게 하는 것이고바울의 목숨을 건 복음의 헌신 또한 헛되게 하는 행동입니다이러한 신앙 행동은 좀 더 고차원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노예와 자기 만족의 종교로 돌아가려는 불신앙일 뿐입니다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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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3-0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의미

갈라디아서 3장 19-29절


부모가 자녀에게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하나하나 도덕적인 사안들을 법으로 정해두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정죄하면 그것을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 법으로 인해 부모는 아이들을 정죄하고, 아이들은 그 법 아래에서 곧 고통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아직 도덕이나 윤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법을 지킬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이들과 함께 이 도덕이 왜 필요한지를 나누고, 또 도덕의 정신을 가르치고, 지킬 수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가르치면, 그것을 자신들에게 왜 필요한지, 왜 지켜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조금씩 지켜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율법(律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왜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은혜와 율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준수가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왜 율법을 주셨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처음부터 율법이 생명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구속사 속에서 한시적인 목적을 위해 주셨음을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된 생명과 의로움의 유업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19-22)

사람들은 혼돈을 머금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하고, 선악의 기준을 제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런 기능을 합니다. 율법 앞에 설 때,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지,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19-22)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의 진정한 본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다른 것으로 그 근거를 삼을 수 없습니다. 만약 십자가를 약화시키고 무효화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구약은 율법을 통하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무엇이냐?’라는 주제 아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여러 명제들을 쏟아냅니다.

(1) 죄를 깨달게 한 율법(19)

사도 바울은 율법이 구속사가 진행되는 중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즉 ‘범법함 때문에’(19)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즉 ‘범법함 때문에’라는 의미는 ‘범죄하였다는 것을 알도록’, 또는 ‘범죄함에서 돌이키도록’이라 뜻입니다. 이는 율법의 일반적 기능을 내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오히려 그 범법함의 증가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회심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율법의 기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중보자를 통한 율법(19)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을 통해 중보자, 즉 모세의 손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개입되었다는 인식은 사도행전 7장 53절과 히브리서 2장 2절에도 등장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사도행전 7:53)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히브리서 2:2)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4장 1-3절, 8-11절의 문맥에서 율법이 지니는 한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3) 한계성 있는 율법(19)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 즉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만 허락되었습니다. 이는 율법의 한시성(限時性)을 분명히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4) 생명이 없는 율법(21)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처음부터 율법은 생명을 주기 위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의로움을 율법을 통해 주셨을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과 의로움을 주기 위해 복음과 경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대하거나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시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5)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22)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즉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라고 번역했어야 합니다.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6) 제한적인 율법(21)

성경은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어서 은혜 아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문맥에서 ‘율법’과 사실상 유사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율법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범법함을 증가시켰습니다(19)는 이해와도 상통합니다.

그러면 20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역개정의 번역대로 ‘중재자는 한 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번역이 다수의 의견입니다. 중재자인 모세가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성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재차 확인하려 하는 것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 주어졌다(19)는 사실과 모든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의 한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20). 즉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은 다른 방법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민족의 구원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포함해서 율법 준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이 주장한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정죄 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율법으로 구원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방법(23-25)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능력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가능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이 미치기 전까지는 모두 율법 아래 갇히고 매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대해 어쩔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할 뿐이었습니다.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3-25)

율법은 인간 자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그 율법의 저주와 굴례에서 자신을 건져 줄 다른 누군가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율법의 저주를 해결하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함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해 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1) 율법 아래 갇힘(23)

사도 바울은 19절과 22절을 되풀이해서 표현합니다(23).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갇혀 있었던’ 시기는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 백성이 율법 아래 살던 기간을, 다메섹 이후의 관점에서 묘사한 표현입니다.

추가되는 결정적인 표현은 ‘믿음의 도래’인데,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23)으로 시작해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로 끝냅니다. 이는 ‘믿음’이 어떤 인물이나 사건인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믿음’은 원어로 ‘피스티스(πιστις)’인데, 그 앞에 정관사가 있는 점을 고려해, 직전의 피스티스,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특정하여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에 놓였다’는 의미로 정리됩니다.

(2) 초등교사가 된 율법(24)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비유가 24절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인의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그를 맡아 잠시 보호하는 ‘훈육교사’의 관습을 통해 설명합니다. 율법은 훈육교사처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우리를 맡아 보호하셨습니다. 결국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됩니다.

(3) 율법에서 벗어남(25)

사도 바울은 다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율법의 한시성을 강조합니다. ‘그 믿음’,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의 율법 아래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유업(26-29)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민족이 차별의 담이 하물어졌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망 없는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6-29)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함을 알게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얻은 유업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됨(26)

이 단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지는 의미에 집중합니다. 바울 서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연합 사상은 본문에서처럼 ‘그리스도 안에’(26),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음’, ‘그리스도로 옷 입음’(27), ‘그리스도에게 속함’(29) 등의 어구로 표현됩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과히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된 모든 복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그 은총들은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3장 13절에서 성령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2장 17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가 시신 삶을 살아갑니다.

(2) 그리스도와 살아감(27)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다’(27)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상태를 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실제적으로 있던 세례의식을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 표현은 ‘어떤 사람의 특징, 성격, 생각을 모방하여 그 사람처럼 되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성품, 생각, 행동을 본받고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같이 동일한 고백입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3) 차별이 없음(28)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하여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자녀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인종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서 하나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4) 아브라함의 자손(29)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29). ‘그리스도의 것’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 자손이요 약속을 이를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뿐만 아니라,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하나의 교회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는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적 질서와 관습을 생각할 때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름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이제는 옛전 생활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본 받아 살아가며,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요구가 구원의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율법을 그 정체성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정체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확인됩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살아가며 종노릇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주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로 남을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서 하나된 교회 공동체, 하나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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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3-02)


율법의 저주에서 복으로

갈라디아서 3장 10-18절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사람들을 구분해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과 보이는 이 세상에 것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루하루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더 이상 율법 준수가 아님을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또 언약의 권한 사회적 관행에 기대어 설득합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그리스도를 동해 약속하신 유업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을 제차 확인 합니다.

 

구약 핵심을 재해석(10-12)

지혜로운 사람은 영적인 눈으로 삶을 통찰합니다거시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기독교는 자기를 버리면 얻는 역설적인 종교입니다아집과 같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은혜로 채우려 하면하나님께서 때마다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0-12)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지 여부를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으로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1) 율법 안에서 저주를 벗어나지 못함(10)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부터 성경을 사용하여 율법으로부터 복음에 대해서 논증합니다.

구약 창세기만 놓고 보았을 때, 할례 일만을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는 바울의 대적자들의 주장이 옳아 보입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7장26절이나 레위기 18장 5절에서 설명합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명기 27:26)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8:5)

이처럼 율법을 행하는 자는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대적자들의 주장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구약 해석과 사용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해석학적 기준점이 대적자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인, 그리스도로 인해 옛 언약의 시스템이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바울의 신학은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래서 의로움과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 되는 방식도 바뀌었고, 성경에 대한 이해, 율법에 대한 이해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이로움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종말이 이미 시작 되었다.’는 문맥 속에서 10-12절을 해석해 보면, 종말 이전에 해당하는 구약(신명기 27:26; 하박국 2:4; 레위기 18:5)의 원래 문맥은 잠시 미루어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핵심적인 자신의 주장을 먼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10)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율법 준수는 옛 세상에 속해 있고, 그것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생명과 의로움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의지할 때만, 생명과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함(11)

사도 바울은 3장 1-5절에서 이미 종말의 상징인 성령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임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바울의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도대체 너희는 어느 시대에 속해 있습니까?’ 신명기 27장 26절이 말하는 것처럼, 옛 시대에는 율법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가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와 함께 ‘율법을 지키는 자’도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새 시대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통해 믿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이것이 새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제 새 시대에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의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종말의 새로운 원리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을 새로운 시대의 삶에서 배제시킵니다. 율법은 믿음이 중심이 되는 새 시대의 삶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래도 ‘율법에 속하여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옛 세상, 율법의 저주에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 18장 5절을 사용한 바울의 수사적 의도일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이 단락에서 바울은 새로운 창조에 속한 사람이 여전히 유대인의 외형적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3)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님(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중심된 새 시대에 방식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율법에 속하여서 지키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가운데서 율법의 저주 가운데서 살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창조에 속한 사람이 여전히 유대인의 외적인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이방인(13-1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은 받은 사람이 원해서 얻는 것이라기보다는주시고자 하는 분이 줄 만한 자를 보고 주시는 것입니다가난한 자주린 자우는 자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버림을 받은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을 허락하십니다이들의 공통점은 주님이 간절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3-14)

이러한 새로운 결정적 변화를 불러온 새로운 세대의 도래가 가능케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율법을 주셨다가 거두어 가셨습니까?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13)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결과로 모든 민족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속에서 메시아와 율법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 ‘율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역설합니다(갈라디아서 2:21; 3:21; 5:2-4). 그 결정적인 이유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찾습니다.

바울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이 규정하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죽음, 즉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입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신명기 21장 22-23절에 규정된 죽음으로 읽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율법이 구체적으로 규정한, 가장 엄중한 형태의 죽음을 당하면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2장 19-20a절에서 암시한 ‘그리스도가 율법을 통하여 죽었다’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향한 저주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주’는 10-12절에서부터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율법과 함께 살았던 유대인이든 율법 없이 살았던 이방인이든, 죄의 결과인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1:14)고 말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대에서 건지셔서 다음 세대의 새로운 창조에 속하게 해주셨습니다. 다음 세대에 복의 상징인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복입니다. 그러니깐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주어졌음을 대변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원리입니다. 또한 종말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이 말했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약속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15-18)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율법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그래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처음부터 율법은 지킬 수 있고 언약에 신실할 수 있는 길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15-18)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6-14절을 통해 성경을 통해 신학적인 논증이라면, 15-18절에서는 사회적인 관습을 통해 논증합니다. 서두에서 ‘사람의 관례를 따라 설명하자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 약속을 변경치 못한 관행(15)

이곳에서 말하는 ‘언약’이라는 헬라어 ‘디아테케(διαθηκη)’는 ‘언약’이라는 의미보다 더 흔하게는 ‘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언’이야말로 한 번 작성되고, 작성자가 사망하면, 누구도 더하거나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2)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에게 주어짐(16)

문제는 그 언약이 약속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을 통해 약속하셨는데, 다수를 말하는 ‘자손들’이 아니라 한 사람을 지칭하는 ‘자손’에게만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창세기 12:7; 13:15; 24:7 등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자손’이라는 단어는 집합명사이기 때문에 단수로 쓰여도 복수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해석 방법이겠지만, ‘자손’이라는 단어가 단수인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 사람의 자손’을 도출해내는 이 읽기는 1세기의 사람들에는 가능했던 일조의 미드라쉬 해석 방법입니다. 그가 단언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이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유일한 자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언약의 약속을 폐기하지 못함(17-18)

여기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아브라람 이야기의 성취라는 종말론적 확신을 해석의 준거점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아브라함 이야기에 접근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복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종말의 현실을 보고서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관습에 빗대어 설명한 대로, 바울은 언약의 당사자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이미 제정된 것이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점을 17절에서 논증합니다.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주신 것보다 430년 후에 등장한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을 통한 칭의, 그 언약을 폐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약속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받을 유업은 ‘약속’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이 자손입니까? 누가 그 유업을 이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그 유업에 동찹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자손 되셨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새 언약, 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율법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를 정죄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더 이상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율법이 필요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취득해 가는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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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3-01)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

갈라디아서 3장 1-9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 말씀이 정말 맞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심하고 있을 때조차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분명히 맞다고 하십니다하나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한결 같이 변함없습니다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진리임을 믿으며 나가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3장에서부터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움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한 여러 근거들을 제시합니다이 단락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망각한 것을 책망하고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체험했던 경험을 상기시킵니다더 나아가 구약의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빛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재해석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1)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대부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그러므로 이단의 거짓 복음이든교회 안에 유사한 복음이든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충족성을 허물려는 시도일 뿐입니다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입니다첫 번째 부분(1~2)에서 바울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통하여 사도직을 변호했다면두 번째 부분(3~4)에서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매우 상세히 논증하는 교리적 부분입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은 교리의 적용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과 사조직의 신적인 기원에 대해 방어하는 입장에서 서술했습니다하지만 이제는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인 이신득의(以信得義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적극적인 자세로 비판합니다이미 초대 교회에서는 다음 사실을 결론 내렸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칭의 외에다른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서도 주어진다면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며그리스도로 주어진 은혜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그 동안 바울은 이 복음의 사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역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헌신하고 성장시켰던 갈라디아 교회까지도 율법주의 거짓 선생들이 침투했습니다분명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룬 구속 사역에 믿어야 되며더 나가 사람들이 율법을 준행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점점 교회는 망치고 복음에서 율법으로 퇴보하게 만들었습니다점점 믿음에서 퇴보해 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꾸짖습니다어리석도다.’는 원어 상으로 영적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아!’라는 뜻입니다당연히 알아야할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할 때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실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할 때마치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확실히 믿었습니다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잘못된 가르침을 교훈하자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습니다그리고 이제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5:7). 바울은 이렇게 그들의 삶 속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형상곧 바울이 선포하고 보여준 십자가를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합니다(4:19).

 

성령에 대한 경험(2-5)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도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에 충분합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된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려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격이 사라지면언제든지 믿음이 형식만 남아 율법주의와 통제되지 않은 탐욕으로 가득하게 자리 잡습니다.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2-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어지는 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칭의에 집중시킵니다그래서 중요한 사실을 논하기에 앞서사람들의 시선을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라고 집중시킵니다칭의에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데가장 결정적인 사실로 접근하기 위한 것입니다이는 왜 그리스도가 칭의의 해답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혀 줍니다.

⑴ 성령을 통한 칭의(2)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이 범한 가장 근본적인 잘못에 대해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통해 지적하고 있습니다그 질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것입니다이런 질문은 먼저 교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에 대한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회심과 함께 받았던 성령을 기억케 하면서그 성령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묻습니다.  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언급하는 증거는 구약 성경은 성령의 임재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백성에게 실현될 중요한 종말의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요엘서 2:28-32; 에스겔 36:27; 예레미야 31:31-34).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받을 복을 말하면서 그것을 성령의 약속과 동일시합니다(3:14).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유대인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아브라함 자손의 표지인 성령의 임재가 그들에게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⑵ 잘못된 육적인 결과(3)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을 때 성령이 개인에게 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렇듯 아브라함 자손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소유로 대변됩니다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으로 훌륭하게 그 삶을 시작하였습니다그런데 그들은 그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지 않고 돌연 율법으로 성령을 대체하려 했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이를 바울은 육체로 완성하려 하였다고 진단합니다.

육체로 번역된 헬라어 사룩스()는 하나님 없는 이 세대이 세상과 그 속에 속한 인간의 모든 활동과 죄악된 본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을 사륵스()의 한 요소로 평가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시작하다와 완성하다’ 두 동사가 동시에 사용되는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한다.’고 말합니다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시작하신 일을 성령으로 완성하신다는 말입니다성령은 지음 여기에 임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를 대표합니다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1:4)을 받고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면계속해서 그 나라의 삶의 원리인 성령 가운데 머물라는 것입니다.

⑶ 성령으로 돌아서라(4-5)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여기서 사용된 동사 파스코’()는 일반적으로 고통/괴로움을 받다를 의미하는데드물지만 긍정적인 경험을 하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후자라면당연히 성령의 경험을 말합니다지금까지 경험한 성령의 역사를 헛되이 경험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그들이 유대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을 상기시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들은 것을 믿었을 때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사 능력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유대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그 율법의 이상을 달성했다면율법 아래 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성취요 완성입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단 1회만(그것도 하나님 아버지를 묘사하면서언급한 바울은 십자가를 거듭 강조합니다(2:20; 3;1; 5:11; 6:12, 14). 여기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붙잡기만 했어도 꾀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답답해합니다.

헬라어 완료분사 용법을 통해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효력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났음을 강변합니다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넘어서 율법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계시를 전해주는 도구입니다십자가를 보면 율법의 진정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할례와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인 만큼 바울은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재해석(6-9)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나 후에도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복에 참여하는 것은 율법을 의지하지 않습니다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6-9)

이제 바울은 두 번째로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 해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아브라함 이야기는 대적자들이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는 할례(割禮)입니다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언약은 430년 후에 모세 언약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됩니다두 언약이 하나의 언약인 셈입니다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게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창세기26:5)는 구절에 근거하여아브라함도 미리 율법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하나님 백성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자격은 하례와 율법의 준행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의 양보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은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율법과 할례를 행한 본보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대적자들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믿고, 17장에서 할례를 행했으며, 26장에서는 율법을 해했습니다갈라디아 교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으니이제 할례와 율법을 행할 차례다.’ 매우 성경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논리를 바울은 어떻게 반박할 것입니까?

바울의 아브라함이야기 접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첫째바울의 아브라함 이야기 사용이 대적자들의 사용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입니다창세기에 대한 빈틈없는 주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창세기 자체의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구속사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문맥에서 새롭게 접근합니다다른 해석학적 준거점에서 출발한다는 말입니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다메섹 체험을 통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미 성취하였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그리스도만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자손입니다(3:16). 이제는 믿음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그는 이 확신 속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율법이스라엘 역사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구속사적 사실 속에서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아브라함도 믿음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았고(6),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7).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주장은 창세기에 대한 객관적인 주해의 결과가 아닙니다창세기 15장 6절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창세기 17장의 할례나 22장의 이삭 번제 사건이 더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는 대적자들의 예상 가능한 공격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예수가 과연 아브라함 이야기와 구약의 성취일 때만 참인 주장입니다예수라는 존재가 바울의 성경해석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문제의 핵심은 예수가 과연 누구냐는 문제입니다우리가 그를 구약과 구속사의 성취자로 받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과연 예수가 그러한 분이라면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하나님에 대한믿음이 있는 자입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옛 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복음의 열매입니다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방인이 네 안에 복을 받으리라’(8; 창세기 12:3; 18:8; 22:18)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하신 복음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입니다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이 있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그의 복음에 참여합니다.

아브라함 안에’ 있는 유일한 자손 예수 그리스도(3:16)가 아브라함의 복에 먼저 참여하고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에 참여하는 구속사의 놀라운 전재를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을 떠났고 성령을 따라 살았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기쁘게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올바른 신학이 올바른 삶을 만들어내지만동시에 올바른 신학은 성령의 역사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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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


직접 베드로를 책망했던 바울

갈라디아서 2장 11-21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라’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최대 역설은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다는 것’,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다른 죽음에서 살아남’,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음’ 등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인 우리와 율법의 존재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전적 회고로 시작해서 안디옥 사건을 언급으로 마무리 집니다. 이제 베드로가 실수하는데, 이 사실을 꾸짖을 만큼 사도로서 동등함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율법의 삶을 대체한다고 천명합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서 논증하려는 핵심 주장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위선으로 책망 받은 베드로(11-14)

지도자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을 넘어서 대표하는 공동체의 행동이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항상 신중히 행동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싫은 것도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지도자의 위선적인 행동은 서로 신뢰를 파괴하고, 불신을 조장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1-14)

앞에서 바울은 자기가 전했던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관계를 증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이방인 디도라는 사례를 통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종한 디도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구원이나 성화에 아무것도 더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사건의 회고를 마무리 짖고 있습니다. 마지막 회고로부터 새로운 근거를 제시합니다. 더 신학적인 논쟁을 펼쳤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5:1-10)을 통해 더 확실히 사도들에게 복음과 사도로서 동등한 사실을 인정받았음을 증명합니다.

(1) 책망 받았던 베드로(11)

앞 단락에서도 거론했듯이, 사도 바울 일행은 잠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하고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방인 디도를 통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아무도 율법이나 할례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나 사람을 성화하는 일에 아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바울은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나누여서 각자 사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구원에 대해 서로 같음을 확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베드로는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초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었고 사도들을 제외하고 그 많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8:1). 각지로 흩어져서 비록 피난민의 처지였지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 섬 그리고 안디옥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사도행전 11:19). 이곳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가 머물면서 사역했는데, 너무 성장한 해서 혼자서 목회하기가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다소에 있던 바울을 불러와서 함께 수많은 이방인 초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비아냥거리는 말로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1:25-26). 이방 교회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 했던 곳입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믿었던 사실과는 모순된 행동으로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책망이란 일반적으로 대등한 관계나 상하 관계이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모든 지역에서 베드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량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베드로가 잘못되었을 때는 과감하게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대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책망할 때, 무책임하게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만나서 베드로의 얼굴 앞에서 직접 책망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바울보다 먼저 사도가 되었지만 그의 잘못된 행동은 사도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12-13)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성도들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방인 지역인 안디옥에 방문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식사를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느냐?’와 ‘누구와 먹느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해 주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 회심 사건을 통해(사도행전 10:30-48),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이 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돌변하여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려 식사 자리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사실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의 파송을 빙자해 야고보의 이름을 팔았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성도에 대한 결정을 했지만,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했고, 떠나 물러갔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외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결법을 부과하려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유대인 정결법을 따라 이방인을 대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역행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외식(外飾)은 또 다시 주님을 부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바나바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위선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 대해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정말 많은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방인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정결법에서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결법의 종말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의 백성 되는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는 모습입니다. 정결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이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 식탁 교제였습니다. 식탁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복음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의 실수로 인해 자신에게 책망 받았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와 할례의 무의미함을 인정했던 베드로는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3) 바울의 책망(14)

사도 바울 역시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했기 때문에, 늘 함께 참석하여 식사하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바울은 매우 황당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언행이 일관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이 행동 때문에 사실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곁으로는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의 문제로 보였지만, 은혜의 복음에 대한 싸움이었습니다.

① 바울의 책망

바울은 베드로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고 책망했습니다. 순간 주변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눈치를 보며, 베드로의 입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향한 책망은 동종 사역자에 대한 질투심은 아니었고, 더더욱 바울의 즉흥적인 기질로 인한 책망도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초대기독교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 자리에서는 조용히 넘어가고 나중에 조용히 만나서 개인적으로 책망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공동체의 평화와 부흥’이 아니라, 진정한 ‘바른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바른 진리가 없는 기독교는 어떤 상태도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② 베드로의 반응

베드로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의 반응에 따라 초대교회는 분열할 수 있는 위기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결과가 나타나있지 않았지만, 베드로의 서신에서 그는 어떻게 받아 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A.D. 65년에 기록한 베드로후서에서 바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베드로후서 3:15b)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으로 짐작하건데, 그만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울의 책망을 부정적으로 받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렸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벌려놓은 사건이 아니라 더욱 견고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③ 결과

바울의 책망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많은 사람들과 베드로 앞에서 책망하지 않았다면, 당시 많은 교회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분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병이나 신분 그리고 출신 구별이 없이 모두가 동등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바울의 행동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위해 평생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15-16)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은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함만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5-16)

사도 바울은 베드로 책망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좀 더 자세한 신학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이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동일하게 인정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인정한 것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전통적인 유대인 생각(15)

사도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인 관점에서 사람들을 구분해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소개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출생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나머지 ‘이방인들’을 ‘죄인’이라는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없고 또한 율법이 없기 때문에 준수할 수 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 부른 것은 유대인의 특권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로서 알고 있듯이’라는 뜻으로 설명을 이어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분적인 잘못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결국 자신들을 스스로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아무런 가치 없는 헛된 생각입니다. 이것을 반증하고자 바울은 유대인의 신분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16)

바울은 회심 전에 다른 유대인들과 동일한 생각으로 종교적인 열심도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동안 자신이 믿었던 믿음과는 다른 정반대 주장을 합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옳지 않고,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율법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과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16)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법, 정결법, 음식법이든 다른 어떤 율법의 규정이든,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이제 누구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언약적 관계를 누리지 못합니다.

즉,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의로움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유일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피스티스(πιστις)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셨고, 수동적으로는 십자가의 소명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였던 예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3:16)입니다. 그의 신실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언약의 복과 생명, 의로움을 그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약속들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만 근거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언약적 산실함이 먼저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우리 칭의의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의롭다 함 받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의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17-18)

‘의로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정체성이자 생존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로움이란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거나 극한 절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교회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

계속해서 바울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행한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이신칭의’의 교리는 사람들을 방종(放縱)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1) 하수인으로 만드는 것(17)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에서 떠나면서, 이방인들과 식사하던 유대인들이 정결법을 어긴 죄인들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잘못도 아닙니다.

(2) 스스로 죄인으로 만든 것(18)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대변하는 주장들을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학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의로움을 얻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가 처한 상황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을 장려하다가, 돌연 정결법을 어겨 죄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의로움을 주신 그리스도의 책임이 아닙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사적 ‘나’를 통원해 다시 베드로의 딜레마를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미 헐어버린 유대인의 정결법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은혜의 삶(19-21)

믿음은 외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 사람의 수고로 의롭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끝까지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고집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욕보이는 것이 됩니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19-21)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대변하는 주장들, 대적자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 율법은 죽고 하나님으로 살아남(19)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대적자들을 결정적으로 반박합니다. 그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주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와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율법이 더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에서 자유롭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성취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성도 안에 내주하심(20)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심을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이 주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은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규정하는 특수한 형태의 죽음, 나무에 달리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규정하는 하나님 백성의 범위 밖으로 쫓겨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판명 났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율법이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바울 역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이 삶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삶입니까? 20절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 구절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율법 준수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윤리적 동기, 삶이 목표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내 안에 그리스고가 사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피스티스, 즉 그의 믿음/신실하심을나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할례 같은 조건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은혜를 붙잡았습니다(21).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예수께서 돌아가셨고, 바울은 그와 함께 죽어 율법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19-20).

(3)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로움(21)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믿음/ 신실하심을 지금 여기에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을 것입니다(21). 그들에게 하나님 은혜의 회고의 표현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폭발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 의로움과 은혜를 율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과연 헛되이 죽으신 셈입니다(21).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기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측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로 신앙을 대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무적인 신앙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과거에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했던 자신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의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고 사랑에 감동하여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도록 그분과 교제하시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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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2-01)


예루살렘에게서 인증된 사도권

갈라디아서 2장 1-10절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곧 중심에서 나오는 신앙 행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 행동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의를 위해 포장해서 외식(外飾)한다면, 사람들은 외모만 보기 때문에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습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앞서 마음의 동기와 태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런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을 통해, 중심을 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한 일과 그 기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회고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위해 방문했지만, 그 계기를 통해 자신이 전한 이방인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 사도들과 내용이 같다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했던 예루살렘(1-2)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화려한 경력이나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끌고 나가면, 모든 회중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처럼 바울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습니다.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입증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소명의 근원이자 메시지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더 나가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회심한 사건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방인의 사도직에 대해 소개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얼마나 합당한지를 변증합니다. 그 동안 전했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직까지 덜 이해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예루살렘 있는 사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일을 설명합니다. 그동안 이방인 선교를 힘써온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그가 전한 복음과 이방인 선교의 열매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사도들과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해서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예루살렘 2차 방문(1)

사도 바울은 회심 후 3년 만에 첫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1:18). 그리고 다시 14년 만에 방문하였습니다(2:1). 사도행전 15장을 참고해 보면, 바울이 두 번째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에서 ‘율법주의의 부당성’과 ‘이방인의 할례’와 같은 기독교 기초적인 신학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14년 후에’는 첫 방문 후에 14년이 아니라 회심한 후로부터 ‘14년 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방문을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행전 11:27-30)

당시에 바울은 안디옥에서 헬라인, 즉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아가보는 천하가 큰 흉년이 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 11:28). 그 예언을 따라 팔레스틴 지역에 큰 기근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대 지역의 흉년은 어머니 같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까지 영향을 받아서 힘들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바울 일행은 안디옥 교회에서 주신 사랑의 헌금을 전달하려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2) 자신이 전한 복음(2)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사역까지 공인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회심자인 디도도 함께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이방은 이방인들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에 대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즉,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혜롭게도 신중하게 예루살렘 총회 전에 먼저 보고한 후에,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총회 석상에서나 유명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자신의 이방인 사역을 설명한 것은 당시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거짓 교사들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자신이 이방인 사역했던 것을 공개 토론을 통해 공론화과정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칫 바리새파 중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같은 유대인들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사도행전 15:5),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하기 기회를 틈타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교제한 사건 때문에 논란이 되어 있었습니다(참고 사도행전 10:1-23). 아마도 바울도 안디옥과 같은 곳에서 사역하면서,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논란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사도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접근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를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지금까지 이방인들의 영혼을 위해 했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도 바울 일행이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는 구원에 대한 복음 사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예수님께서 받는 신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만약 공개적인 논쟁이 터지면 매우 난감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쟁은 소송을 낳을 것이며, 소송 과정은 많은 시간과 물질이 들어갑니다. 이 때문에 지루한 소송에 휘말리면, 이방인 복음 전파에 혼란이 일어나고 당연히 “유력한 자들”은 초기 기독교 내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이방인 선교를 당분간 중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더 나가서 기성 유대주의자들의 정치적, 종교적인 압력으로 굴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만용보다 신중하게 지혜로운 분별을 택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지 않음(3-5)

믿음으로 내딛는 순종의 발걸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약속들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와 순종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현실 됩니다.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런 시도에 유력한 자들인 사도들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학적인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문제만 언급했던 것입니다.

(1) 이방인 디도를 통한 인정(3)

초대교회 당시에 주요 쟁점은 율법주의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율법 준수가 화두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계속 해온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율법(할례)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분명한 대답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유력한 사도들에게 자신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의 복음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조건에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방인 디도에게 강제적으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3). 디도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율법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환이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던 것입니다. 디도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에 미혹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 기간 동안 바울의 복음에 대한 아무런 도전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 거짓 형제들의 존재(4)

예루살렘 교회에는 바울의 복음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 유대교적 생각에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대 율법주의 신자’라고 부를 수 있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들을 ‘거짓 사도’라고 불렀던 것처럼(고린도후서 11:13), 이들을 ‘거짓 형제’또는 ‘거짓 형제’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은 계속 율법주의를 고수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할례를 실행하지 않는 이유를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6:12).

기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는 아무도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변방인 갈라디아에서 할례 의식을 강요한다고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만약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의 율법에 대한 주장이 받아 들려졌다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현장에서 그들의 맹공격으로 더 많이 바울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처럼 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옛 율법에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은혜의 교리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려고, 가만히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구원의 진리를 망치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였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복음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사도들도 서서히 구원론에 대한 신학이 정립되고 있었습니다. ‘거짓 형제들’의 계략으로 인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더 빨리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 거짓 형제들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자유’를 빼앗고,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고 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3) 복음의 진리를 수호함(5)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무시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해야 된다고 주장에 결코 한순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자유’와 율법 아래 있는 ‘종’으로 비교 대조합니다. 후반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섰으니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일차적으로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의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상황과,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취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5장 13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대로, 율법과 상관없는 자유인 방종에 이른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계시된 이상,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살게 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시도에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5a).

갈라디아 교회에 침입한 거짓 교사들은 왜 할례를 요구했겠습니까?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무런 근거 없이 무조건 할례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이면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割禮)’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통해 성경적인 근거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안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하면서 ‘이것이 나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들은, 이 언약을 배반한 자로,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창세기 17:14).

거짓 교사들은 회심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처럼 창세기 17장을 성경적인 근거로 할례를 주장했을 것입니다. 할례를 하나님 백성의 표지로 제시하는 구약의 선지서인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이사야서 52:1)

이렇게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여기에서는 언약의 표지 역할 했던 할례가 구속사적 효력이 다했음을 설명하면서, 거짓 교사의 요구에 “한시도” 복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진리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의 인정(6-9)

사람들이 자신에게 사명을 잘 감당하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끝임 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사명자가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성취하게 됩니다.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6-9)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안으로 눈을 돌려 사도들과의 관계를 소개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사도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소개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약간 냉정하고 심지어는 교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1) 가미되지 않는 복음(6)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둥 같이 유력한 자들(2:9; 2:6)이 그 동안 자신이 전한 이방인의 복음과 그들의 구원을 인정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사도행전 15장)에 이루기까지, 초대 교회는 이방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 유력한 자들과 거짓 관계를 만들어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과의 관계가 없었던 것을, 과거에는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음을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으며, 받은 그대로 첨가 없이 순수하게 복음만 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 자신의 사역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덤덤하게 말합니다. 초대교회 차지하는 영적인 지위를 생각해보면, 복음의 진리 앞에서 바울의 태도를 얼마나 담대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들을 높게 평가했지만, 반면에 바울을 아주 낮게 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동행했고,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 대해서는 참 사도로 보았지만, 바울을 자칭 사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사도로 나섰으니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부정한 이방인들을 정결의식도 없이 그대로 하나님의 공동체에 부정한 채로 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아무나 쉽게 받아주는 ‘아주 값싼 복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이번 기회를 통해 처벌 받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쉽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해 내용을 추가하거나 할례나 율법 규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6). 사도들은 이방인 디도를 그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같은 형제로 받아 들렸고, 외형적으로 바울에게 공식적인 사도들처럼 사도직을 받아야 된다고 거짓 사도라고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더나가서 그들은 바울을 이방인을 향한 사도로 확실하게 인정했습니다.

오히려 더 나가서 예루살렘 교회에 기둥 같은 사도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함을 받은 것을 보고,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사도들이 교제했던 것은, 사도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자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서로 교제한 것이었습니다.

(2)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바울(7-8)

유대주의 거짓 형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이 바울 일행과 교재하면서 대등한 존재로 대접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사람들이 주관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사역이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할례자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교제를 통해, 바울 일행은 이방인에게, 다른 사도들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공통된 이해 아래서 한 복음 사역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복음 전파 사명은 동일한 역사이란 점을 상기 시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동일한 밝힘으로써 자신이 분명한 사도임을 천명합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그를 사도로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동등한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사도들과 공감대 형성(9)

유대주의 거짓 형제들은 바울와 사도들을 이간질해서 사역을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확실한 복음을 인증시키셨고, 더 힘차게 복음을 증거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과 바울 일행은 서로 사역을 인정하는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9)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을 … 보았고(6-10) …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사역이 이방인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이방인 성도에 대한 우려를 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모두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는 거짓 교사들을 향해 영적인 한 방을 날리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 교회에 선교 사역은 점점 확장되어 갔습니다. 각자 선교 대상이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경계선으로 선교 대상자에 대한 구분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개척한 이방인 교회인 고린도교회에서 ‘게바(베드로)파’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주로 이방인들로 추정되는 점(베드로전서 4:2-3)을 보면 서로가 경계를 넘어 협력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도직과 그 동안 이방인을 위한 복음, 그리고 사도들의 사역과 동등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더 나가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면서 사역을 계속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대적자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탁(10)

삶에는 우연한 일들이 끝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들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진행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일을 달라고 기도하지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은 사도권을 의심하지 않고 동등하게 인정하여 바울에게 부탁까지 합니다. 그들의 부탁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이라고, 복음의 증거 가운데 특별히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부탁한 것입니다.

자존심 강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구제를 부탁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동일한 형제로 생각하는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면, 절대로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을 전파하면서 바른 실천이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구제헌금을 부탁할 때, 자신은 그동안 그렇게 지속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체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참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인정한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른 삶을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이후에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이방인인 고린도와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서 지속적으로 구제헌금을 모금했습니다(고린도전서 16:1-3; 고린도후서 8:1-5). 이 구제헌금은 단순하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하는 목적 외에도, 위에서 말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한 백성임을 상징적 표현입니다(로마서 15:25-28, 31).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의 자세에서 사명사로서 마음가짐을 살펴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복음 밖에서 자신을 낮추고 서로를 인정합니다. 그러한 자세는 복음이 더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이방인에게 제시했던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내용 수정이나 첨가 없이 인정받았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복음 되도록 서로 협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들은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협력하면, 복음이 더 힘차게 증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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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1-02)


사도 바울의 회심과 소명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한국 법원에서 죄인들을 심판할 때 ‘증거재판주의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어려운 재판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재판에서 증거만 있으면 증인은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이 강합니다. 그리고 어떤 재판이든 승리할 수 있어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복음의 증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복음이 남을 살리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자 자신을 살렸고 변화시켰다는 증걸르 보이면 가장 확실합니다. 바울은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이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부름 받은 이후에는 어떻게 사역하였는지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합니다. 이 모든 것의 초점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기원(11-12)

교만은 스스로 높이려고 자신의 뛰어난 업적만을 내세웁니다.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과 거대한 느부갓네살 동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만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인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만을 세우고 헌신했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소아시아 남부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간 직후에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공격했습니다. 이제 세워진 연한 순과 같은 교회들을 강탈하기 위해, 그들은 ‘율법의 실천을 통해서 의를 이룬다.’는 거짓 복음으로 어린 교인들을 유혹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교인들에게 바울에 대해 불신을 심기 위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래야만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한 복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지속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의 전통적인 율법을 통한 구원에 비교해보면 내용도 내용적으로도 부실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통성이나 역사성도 없는 이단에 불과한 주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공동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반박에 나셨습니다. 먼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강한 어조로 사용했지만, 그들을 사랑이 담긴 호칭으로 부릅니다(참고 갈라디아서 3:1). 그의 의도는 지금부터 시작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세 가지 부정어를 강조해서 사용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자신이 전한 복음의 근원이 인간이나 세상이나 자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며(사도행전 22:3), 때문에 인간에 의한 전승되고 교훈되어진 것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사람들에게 받은 것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교육 받아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론이라면, 사람들이 행해야 할 종교행위를 많이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차원에서 노력이 전혀 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꾸며 지어낼 만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코 사람의 기쁨과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힙니다(10).

사도 바울은 그 동안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결론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입니다. 회심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로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은 자신의 회심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해 주신 내용에 대해 설명합니다.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6-18)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 염두해 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바울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메섹에서 바울은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유대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종말의 부활 가운데 이미 들어갔다는 사실과 부딪혔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새로운 창조’였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를 덧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가 오르신 것은, 그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외로움을 성취하고, 완전한 거룩과 영광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창조가 예수 한 사람 안에만 성취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에게로 가야 그 새창조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신학이 형성됩니다.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이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든 이제는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성취한 구원을 함께 누린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즉, 이제는 율법이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는 과정(13-24)

복음의 일꾼은 저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정하십니다. 한때 복음의 대적이었던 사람도 하나님의 택정 안에 있으면 완전히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복음을 위한 충성한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증명합니다.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3-24)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 의한 사도’나 ‘스스로 세워진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 회심함을 입기 이전(13-14)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죄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지만, 회개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 분입니다. 점점 죄가 무르익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 심판 앞에서 인간의 직위, 재물, 힘 등은 모두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으로 살아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기 전에 행했던 복음의 박해자로서 생활을 언급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자기의 체험을 제시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논증하는 것은 바울이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사도행전 22:3-10; 26:5-12; 빌립보서 3:4-6).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회심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전통과 유대교를 열렬히 추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자기만의 종교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서 광신도였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유대교와 조상 전통에 대해 특별한 열심을 품었던 자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옹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을 ‘나사렛 이단’(사도행전 24:5)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그리고 교회를 멸하려 했던 자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추종했던 유대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게 살아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메시아가 왔지만, 제일 먼저 환영하고 영접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세우실 때는 랍비 가운데서 세우실 것이다.’고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시골 출신 이단자나 정신이상자로 생각하고 영접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으로 바울이 유대교를 열심히 믿고 조상의 전통을 옹호할수록 원수이자 이단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의욕이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열정은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25장 11-13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 이야기는 후대의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대한 열심을 고취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을 품고 배교한 동족들을 처단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보존한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시편 106:13).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교가 취하리라 예상 가능한 행위였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멸하려 했던 것 또한 비느하스 이야기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틀림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유대인들의 정결법과 안식법을 비롯한 모세 율법을 규정대로 지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더 나가 율법과 함께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성전을 허물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 위에,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인식이 유대인들에게 만연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는 소식은 율법에 열심 있는 자, 바울을 움직이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혈기가 가득한 바울을 가던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당국자들부터 예수의 이단자들을 구금해도 좋다는 영장을 손에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는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모든 구금할 것인지 그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잘 설명합니다.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사도행전 22:4-5)

회심 전 바울의 마음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알았고, 이 사명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2) 회심함을 입는 과정(15-17)

진심으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종종 변화되었다고 대중적인 간증하던 사람들이 때로는 다시 돌아가서 범죄 해서 지탄을 받는 경우를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잠시 동안 변했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확실하게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잘못된 모든 열심에 대해 “그러나”라는 한 단어로 회심 전에 모든 사건을 요약합니다. 유대교에 깊이 빠져 있던 바울이 과거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코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변화는 매우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그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구원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① 구원의 주체

바울은 자신의 구원 과정을 간증하면서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이가)’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가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할 수 있었던 조건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해 관심도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조건으로 살펴보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더 나가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고 있는 다메섹 도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말합니다.

② 구원의 시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 시기를 추측해보면, 대부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러 가고 있을 때인 다메섹 길 위이라고 추측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바울에 대한 관심을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 고백합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오래전부터 예정(豫定)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했던 모든 일들(태어나면서 받은 영향, 경험 그리고 교육 등)을 이방선교를 위해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야 1:5)

③ 구원의 방법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는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선악을 알기 전부터 이미 택정하셨고,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은혜로 그를 구원의 반열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나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떤 일이나 조건이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생각이나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④ 구원의 목적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이유를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고백합니다. 구원도 기적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바울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 ‘속에’ 그의 아들을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바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단순히 어떤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실재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과 같은 바울을 보화와 같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앞으로 바울이 전해야할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자신이 하나님 은혜의 살아있는 증거인 셈입니다.

⑤ 구원의 사역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의 반열에 옮겨놓으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주인이기도 하시며 이제 그의 아들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부르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16).

바울은 구원 이후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당시 나바티아 왕국이 있었던 아라비아 지방(현 요르단 페트라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이스마엘 후손들에게로 달려가 이제는 비로소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음을 전한 셈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만 가능했습니다. 구원의 반열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하심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복음을 위임 받은 후, 어떤 사람과 상의하거나 심지어는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구원과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에만 의존합니다.

(3) 회심함을 입는 이후(18-20)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은혜에 거룩함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결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었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의존되어 있거나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존경했지만, 그들을 죠제의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의 지시를 받거나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심 후 첫 예루살렘 방문 동안에 바울은 베드로와 여고보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방문 때에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이 ‘복음’을 듣거나 배웠을 것입니다 

2장 11-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당시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성숙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였음을 바울은 주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경험을 시작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하여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려주려 합니다.

(4) 부르심을 이후 평가(21-24)

사명자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와 비슷합니다. 척박한 땅을 개간하듯이 완악하고 강퍅한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가는 사투(死鬪)의 현장입니다. 시작은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사역하다보면, 때가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역했던, 안디옥과 다소 지방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안디옥에서 사역한 바나바가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동역합니다. 이 두 사람의 사역을 통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유대의 교회들이 얼굴로 알지 못했던 바울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나의 선한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유대교회의 평가를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사역과 복음의 내용이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복음은 사도 바울의 모든 삶에 적용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으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자신을 변화시켜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 은혜의 복음만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복음의 신실성을 반영하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복음 전도가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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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1-0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본질

갈라디아서 1장 1-10절


오늘날은 다른 복음의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메시지가 과거에는 강단을 통해서 전달되었지만, 현대는 많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고갈 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홍수처럼 범람해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복음들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도 가짜 사도라고 비난 받을 정도로 가짜 복음은 위세를 떨쳤고 공동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따라간 갈라디아 교인들을 질책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해 강력한 저주를 선언하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바울의 첫 인사(1-5)

대부분의 악성 종양, 즉 암은 발견한 즉시 그곳에 어디든지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수술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양이 온 몸으로 결국에는 퍼져 죽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도 악성 종양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단 사설들입니다. 이것들은 발견한 즉시 추방시켜야 합니다.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5)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핍박하던 바울을, 역설적으로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 해방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통한 구원이라는 ‘거짓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과 믿음의 ‘참된 복음’으로 나갈 수 있게 인도합니다.

(1) 기록자 : 바울의 사도성(1)

사도 바울은 부름 받은 사도로서 서신을 기록합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갈라디아서에서만의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첫 인사부터 주목할 만한 두 가지인 사도의 근원과 복음의 핵심을 소개합니다.

① 사도의 근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쓰자마자 자신의 사도됨의 기원과 진정성을 변호하는 것으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바로 수술 칼을 집어든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가 악성 종양과 같은 대적자들의 공격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도직에 대한 방법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가지는 진정성 여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② 복음의 핵심

사도 바울은 첫인사에서부터 자신이 전하려는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여 첨가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4)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기원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부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1절이 유일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새 창조’(6:15)와 같이 부활로 인한 구속사적 결과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부활이 바울신학에서 찾지 하는 위치를 고려할 때 이례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논쟁의 성격상 부활보다는 십자가 죽음이 강조된다는 점을 앞으로의 설명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수신자 : 형제인 성도들(2)

편지의 수신인이 한 회중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신학적, 목회적 문제가 여러 회중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3) 내용 : 인사하는 내용(3-5)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는 신학적인 배경을 갖는 표현입니다. 당시 헬라어가 통용되던 세상에서는 전형적으로 서신의 첫 단어는 ‘문안’을 뜻하는 ‘καρδίαν’라는 인사였습니다(사도행전 15:23; 야고보서 1:1). 그런데 바울의 이 편지는 독특한 안부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의 은혜’(5:15)와 ‘하나님의 평화’(5:1)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이라고 인사는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에 대한 또 다른 요약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은혜

구약에서나 그리스-로마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나 ‘은혜’는 후견인이 예속인에게 베푸는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은혜는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2:21; 1:14)로, 때로는 ‘그리스도의 은혜’(1:6)로 표현합니다.

② 하나님의 평강

‘평화’는 구약의 ‘샬롬’ 이해를 그 배경으로 가집니다. 이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이웃, 자기 자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6-9)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죄 아래 있던 모든 인류가 대속을 받아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결코 가감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어ᅟᅮᆫ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6-9)

사도 바울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 바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을 저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배교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엄하게 꾸짖습니다. 배교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어쩜 너희들이 이렇게 속히 배교할 수 있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그들의 배교에 영적인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1) 다른 복음

배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진정한 복음에 대해 등 돌림으로써 그리스도를 떠난 결과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이들도 자신들이 이해하는 ‘예수’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또 ‘교란케 하는 자들’의 복음을 듣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혼동하여 그들을 따라갈 만큼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변질케 했다’(7)고 말합니다.

결국 그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6). 이 결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

우선 ‘복음’이라는 단어가 1장에 계속 되풀이되는 점에 유의해야합니다.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은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황제의 즉위, 황제의 전쟁 승리, 황위를 이를 왕자의 탄생 등과 관련된 소식을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이사야 52장은 이 단어가 소유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이사야 52:7-8)

이곳에서 ‘좋은 소식’은 평화와 구원의 소식으로 이는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이사야 52:7)는 선포입니다. 두 가지 배경에서 공통되는 개념은 왕적인 다스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7)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했다는 선포와 그 선포가 가져온 결과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왔던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했다는 선포는 이방인인 그들도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살도록 부름 받았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홀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 없이 하나의 하나님 백성으로 모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2장 이하의 문맥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다른 복음은 여전히 유대인들만을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으로 인정하는 선포입니다. 할례와 율법 준수가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보편적인 다스림과 은혜를 부인하는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바라지 않는 사도(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풍성한 보상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손익을 떠나서 무작정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속에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반면, 바울의 대적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요소들이 있었던 것을 보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잇다고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다른 복음’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피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을 할례와 율법으로 인도함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으로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동족들로부터의 핍박을 면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십자가의 능력을 가리는 것입니다(5:11; 6;12). 어찌 이러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있는 그대로 지키려는 바울의 열정이 보입니다.


오늘날 상대주의가 우상처럼 떠받드는 시대입니다. 서로를 향한 ‘관용’을 내세우며 단 하나의 진리와 단 하나의 복음만을 주장하는 우리 기독교를 향하여 ‘독선’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둘일 수 없기에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길도 둘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됨은 수용성 여부로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거짓 복음’에 단호히 배격하고, ‘바른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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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개론



◎ 기록자

◇ 갈라디아서 저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 내적 증거 : 본 서의 서두에 나오는 바울의 사도권 변증(1:1), 그리고 자신을 1인칭을 사용한 문장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외적 증거 :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가 갖고 있는 사상적인 유사점 등이 그의 저작을 뒷받침해 줍니다.


◎ 수신인

◇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라고 헬라어 제목으로 볼 때, 당연히 수신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 등에 있는 교회입니다.


◎ 기록 연대

◇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 때, 곧 예루살렘 교회(사도행전 15장)가 있기 전인 A.D. 48-4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은 A.D. 51-53년에 수리아 안디옥이나 또는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 갈라디아 지역

◇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중부 지방에 있는 하나의 주(州)였습니다. 지명의 기원은 ‘골사람’(Gauls)을 헬라어로 ‘Galavtai’(갈라디아)로 부른 것에 유래합니다.
◇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 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B.C 1680년대에는 이 반도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왕국이 일어났으나, B.C 1200년대에 쇠퇴하자 그 대신 프리지아 왕국이 일어났으며, B.C 700년대에는 리디아·카리아 등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BC 546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이 침입한 후로는,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도 전체가 그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B.C 189년 로마의 무장 만리우스에게 정복 되었으나, 왕국의 존속이 허락되고, 그 후 로마의 유력한 동맹국으로 되었습니다.
◇ 이 주(州)에는 산맥과 넓고 높은 평지들과 호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넓은 지역인데, 표고 700-1,000m의 고원지대입니다. 기후는 스텝 또는 사막성 기후이며, 여름이 짧고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흑해 연안지방은 기온 변화가 적으며, 연간 비가 잦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습니다.
◇ 주요산물은 밀·보리·포도·과일·잎담배 등이며, 석탄·크롬·철광석·구리·망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합니다. 주요도시는 앙카라·이즈미르·아다나·부르사 등이 있습니다.


◎ 갈라디아에 존재한 교회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로 말미암아 설립된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함으로 교회가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속히 가서 그들의 문제를 바로 잡아 주기를 원했지만, 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긴급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리로 인하여 황폐해 가는 갈라디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고, 또한 그들을 속히 돕고자 긴급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성도들에게 간략하게 문안한 함께 곧 바로 본론적인 말을 시작합니다.


◎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

◇ 첫째로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과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임을 밝히고자 했다.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이나 복음을 예수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고 왜곡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초반부에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고 복음의 신적 기원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가 전한 복음도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 둘째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미를 밝히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처지를 분명히 드러냄으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만 드러나 율법의 저주를 받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그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제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근거해 대신 정죄 받으셨고 저주 받으셨기에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이에 율법에 의해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셋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업을 받을 자며 자유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율법주의를 따를 때 다시 종 노릇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아들의 영을 받아 아들의 명분을 얻은 것이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유업을 얻을 것을 확신한다.
     그런데 이런 영광스런 신분을 가진 자들이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하고 있다. 율법주의들이 강요한 할례를 받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들을 따르면서, 전에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어할 정도로 사랑했던 바울을 아브라함의 두 아들 예를 든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서 난 자는 아들이기에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는 자다. 그러나 종인 하갈에게서 난 자는 종이기에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하고 쫒겨난다. 이 둘은 각각 율법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을 비유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한다.

​◇ 넷째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할례를 받는 등 율법주의에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 율법주의와 복음을 따르는 삶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 하나를 취하면 전체를 취하는 것이며,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삶이다. 믿음을 따라 살 때 사랑으로 역사함으로 거룩한 삶을 성취한다.
복음을 알고 믿어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은 절대로 딴 길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혼란은 어떤 자들이 들어와 일으킨 혼란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기 때문에, 거짓교리가 조금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해야한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곧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 왜냐면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죽음에 참여할 때 육체의 정욕과 탐심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이미 육체를 죽인 자니 성취된 것을 일상에서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즉 날마다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아야한다.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자는 성령으로 날마다 살아가야 한다.

​◇ 다섯째로,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이 영생을 거둠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살아야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그렇기에 성령을 따라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거두려고 해야한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복음 안에 서는 것이며, 율법주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함께 짐을 져야한다.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고 항상 자신을 살펴 경계해야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각각 자기가 져야 할 짐을 져야한다. 또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 받기를 좋아해야 한다. 말씀을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한다. 때가 이르면 거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을 때 선을 행함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한다. 물론 이때 믿음의 가정에게 우선 선을 베풀어야 함은 물론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은 헛되며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기에 무능하다. 오직 복음만이 새생명을 갖게한다. 오직 복음만이 평강과 긍휼을 얻게 한다. 바울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이것은 바울이 참된 진리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 갈라디아서의 구조

​◇ 본서는 내용 면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 자격을 변호·논증한다(1:11-2:21). 바울의 사도 자격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이 분명히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여 사도 자격을 변호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신 점(1:11-24)
②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그의 복음이 인정받은 점(2:1-10)
③ 베드로의 위선을 바울이 책망한 점(2:11-21)

(2) 사도 바울은 복음과 유대주의적 이단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며, 후자를 강력히 논박한다(3:1-5:12). 만일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면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참 의의와, 믿는 자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5:13-6:8).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상세히 논의하며, 육체의 일과 대조시킨다.

 

개요

1:1-10 서 론
   1:1-5   문안  
   1:6-10  시작하는 말

1:11-6:10 본 론
   1:11-2:21  사도로서의 변호
   1:11-12  복음의 출처
   1:13-24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
      1:13-17  바울의 개종
       1:18-24  성도의 생활
   2:1-21   바울의 사역의 변호
       2:1-5    예루살렘 공회
       2:6-10   바울과 사도들
       2:11-14  베드로의 외식
       2:15-21  이신득의
   3:1-4:31  바울의 복음 변호
       3:1-5    믿음과 행위의 논제
       3:6-4:7  교리적인 문제
       3:6-9    아브라함의 자녀들
       3:10-14  율법의 저주
       3:15-18  아브라함의 씨
       3:19-22  율법과 언약
       3:23-29  아브라함과 후사들
       4:1-7    하나님의 후사들
       4:8-31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권면
          4:8-11   율법으로의 다시 돌아감에 권면
          4:12-20  개인적인 관계의 권면
          4:21-31  우화로서의 권면
  5:1-6:10  거룩한 삶으로서의 부르심
      5:1     전환
      5:2-12  은혜에서 떨어짐에 대한 경고 
      5:13-26 성령 안에서의 삶
      5:13-18  참 자유는 방종이 아님
      5:19-21  육체의 일
      5:22-26  성령의 열매
      6:1-10   실천적인 가르침들
         6:1-5    서로 짐을 지기
         6:6-10   지혜로운 돈 사용

 6:11-18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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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02-0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학개 2장 10-23


옥새(玉璽)는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말합니다도장이 찍히는 곳은 왕의 명령이자 왕의 권한을 상징합니다그래서 옥새는 매우 귀중한 물건입니다옥새는 매우 특별하고 소중하게 관리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옥새처럼 여기십니다.

 

본문은 학개가 전달한 네 개의 예언 중에 세 번째 예언입니다그동안 부정했던 백성들이었지만 이제는 복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예언 및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예언을 동시에 내려주셨습니다백성들의 마음 및 지도자의 마음을 깊이 만져주시는 회복의 은혜시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본문은 깊이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예언(10-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우 귀중한 자녀들로 취급하십니다절대로 자녀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복보다는 화를 내리셨습니다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방치할 때어떤 결과가 맺었는지 상기시킵니다.

10다리오 왕 제이년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13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14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15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16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18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19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무화과나무석류나무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0-19)

세 번째 예언은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주어졌습니다두 번째 예언이 주어진 후 약 두 달이 지난 시간이었고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예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북돋우기 원하셨습니다이번에는 특별히 거룩과 부정의 주제를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성전건축에 대한 주제에서 율법에 대한 질문으로 본문 주제가 바뀝니다선지자 학개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질문하시고 대답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⑴ 율법을 기초로 한 부정 선언(11-14)

학개는 먼저 12절을 통해서 거룩한 고기를 옷자락에 싸서 옮기다가 다른 옷자락 등에 닿으면 그 닿은 것 역시 거룩해지느냐고 물었습니다제사장들은 이에 아니다고 대답했습니다정리하면 거룩은 전염되거나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3절에서는 부정의 전염성에 대해서 질의했습니다누군가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졌는데 그가 12절에 언급된 기름음식 등을 만지게 되면 그것들이 부정해지겠느냐는 질문인비다제사장들은 이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정리하면, ‘부정은 전염된다는 것입니다거룩은 전염되지 않고 부정은 전염된다는 이 대조가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바로 부정은 너무나 쉽게 공동체 가운데 퍼지게 되기에조그만 잘못으로 인해서도 공동체 전체가 금방 타락하게 됨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총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불결한 상태임을 지적한 것입니다(14). 그러므로 성전을 완성할 백성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불결함에서 돌이켜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즉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개는 14절에서 바로 이 점을 선언합니다하나님 앞에서 백성이나라가그 백성들이 한 모든 일들까지도 다 부정하다는 것입니다이 선언은 포로귀환 공동체 전체가 부정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그들이 성전 건축을 하지 않았기에그로 인해 모든 공동체 및 그들이 하는 모든 일들까지도 다 부정으로 전염되게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그 부정함의 결과첫 번째 예언에서 언급되었듯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 대신 저주를 경험하게 되었고두 번째 예언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들의 마음은 위축되었습니다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의 부정함 자체를 다루시고 새롭게 하려고 시도하고 계신 것입니다그 내용이 바로 15절 이하에 이어집니다.

⑵ 축복을 선언(15-19)

학개는 오늘부터 마음을 두라(15)고 권고합니다이 말은 과거를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라오늘부터 일어날 일에 마음을 두고 살펴보고 기대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즉 성전의 주춧돌이 놓이기 이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그 내용이 16절에 나옵니다이십 더미를 얻을 것이라 예상했다가 열 더미를 얻었고포도즙은 오십을 얻을 것이라 여겼는데 이십을 얻을 뿐이었습니다이것은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언약의 저주를 의미합니다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에 언약의 축복 대신 저주가 임하여 백성들의 삶이 곤핍해진 것입니다그런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이 17절에 주어집니다하나님께서는 기근과 메뚜기와 우박 재앙으로 백성들을 치셨지만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재앙들은 여호와께 돌아와 그분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학개의 첫 번째 예언과 두 번째 예언을 기억해야 합니다그 두 예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언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학개 1:13; 2:4),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으나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먼저 돌아오셔서 그들과 함께해주셨던 것입니다백성들이 그 은혜를 깨닫고 성전 재건을 다시금 시작하게 되자이제 하나님은 세 번째 예언을 통해서 그들의 곤핍한 삶의 근원적 문제였던 부정함’ 즉 죄와 불신앙으로 오염된 근본을 새롭게 변화시켜주려 하시는 것입니다그 선포를 요약하면 너희가 이제 성전 재건을 시작했으니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라는 메시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일어날 일을 살펴보라고 하십니다여기서 오늘이란 세 번째 예언이 내려온 아홉째 달 이십사일을 말합니다. 19절은 백성들이 그 동안 포도나무무화과나무석류나무감람나무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오늘부터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설 것이라 선포합니다나무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신명기 28장의 저주입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상태를 회복시켜 축복을 받는 삶으로 바꾸어주신다는 것입니다백서들을 향해 먼저 돌아오시고그 은혜로 성전 재건을 시작한 백성들을 보시고서는 그 행동을 기뻐하시면서 복을 더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언약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네 번째 예언(20-23)

하나님께서는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벌을 주셨지만올바른 길을 갈 때는 한없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본문에서는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착수하자 하나님께서는 거두어 가신 복을 다시 주겠다며 격려해주십니다.

20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1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20-23)

불순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경제적인 재난을 내리셨던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이제부터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지런히 수고하지만 기대 이하의 결과는 맺습니다.

⑴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선언(21-22)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향하여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다(21)라고 하십니다이 말은 22절의 도입부입니다. 22절이 본론인데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열방의 왕국들을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특별히 그 열방들의 병거 및 그 병거를 탄 자들을 엎드러뜨리실 것이요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스룹바벨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스룹바벨은 여호야긴의 후예로다윗 가문을 이어 왕이 될 존재였습니다그런데 그는 지금 열방 제국인 페르시아의 총독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스룹바벨에게 페르시아 제국을 두려워하지 말고 성전 건축을 담대하게 수행해나갈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움직이셔서 성전 재건이 문제없이 이루어지게 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스룹바벨이 하나님의 이 선포를 들었을 때 큰 담대함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⑵ 스룹바벨을 인장 반지로 삼으심(23)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내 종이라 부르시면서 그를 인장 반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인장 반지란 왕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서한국적 의미의 옥쇄입니다그 반지의 도장을 찍어 왕이 문서에 결재를 함으로 모든 정책이 반포됩니다이 구절은 예레미야 22:24을 반추합니다예레미야 22:24-30에서 하나님께서는 고니야(즉 여호야긴)가 하나님의 손의 인장 반지일지라도 빼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줄 것이며(예레미야 22:24), 그 후손 중에는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다시 없을 것이라고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예레미야 22:30). 스룹바벨은 분명히 이 저주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그런 저주를 받은 가문의 후손이 유다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기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을 것이라 여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그런 스룹바벨을 향해 주님은 내가 너를 인장 반지로 삼겠다고 선언하심으로 스룹바벨의 마음의 상처와 괴로움을 위로하시고 풀어주셨다스룹바벨은 이 말씀을 듣고 더욱 힘을 내어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동체뿐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 개인의 마음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그를 위로하시고 말씀으로 세우셔서 다시금 사용하기 원하십니다이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러하다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성전은 결국 완성되었고우리의 삶에서도 그 하나님의 왕국은 반드시 완성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일기장을 펼쳐놓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실패 원인을 조목조목 알려주셨습니다백성의 회개와 믿음의 작은 싹만 보시고도 섭섭함과 안타까움을 다 털어내시고 백성을 일으키십니다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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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02-01)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

학개 2장 1-9


인생의 삶이 처음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입니다사도 바울의 고백한 것처럼믿음에 있어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온전히 고백할 수 있다면그것만큼 큰 은혜가 없습니다이전에 영광이 나중보다 나은 삶은 우리의 꿈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모든 성도들의 삶이 나중에 영광이 이전에 영광보다 나아지는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본문은 학개가 전달한 네 개의 메시지 중에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폐허 속에서 돌에 돌을 얹으며 벽을 쌓아 올라갈수록 백성들은 마음 한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하지만 과거 솔로몬 성전과 현재 재건한 성전의 위용을 비교하는 백성들을 향해학개는 현재 성전의 영광이 더욱 볼 것임을 설명함으로써 성전 재건 역사를 힘차게 해나가도록 권면합니다.

 

시간적인 배경(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에 현재 상황에 대해 매우 실망한 것입니다그들은 눈에 보이는 보잘것없는 현실만 보고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1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본 절은 학개가 전했던 네 개의 메시지들 가운데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첫 번째 메시지는 다리오 왕 여섯째 달 초하루에 선포되었고그 말씀에 감동을 받은 백성들은 여섯째 달 이십 사 일에 성전 재건을 재개하였습니다(1:15).

시간적인 배경은 주전 520년 7월 21일인데중요한 것은 이 달 15일은 초막절 시작하는 날이며 21일은 초막절의 마지막 날입니다다음날인 22일은 첫날처럼 성회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레위기 23:36). 초막절은 이스라엘 선조들을 애굽에서 출애굽해 내실 때 초막에 거주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레위기 23:43).

귀환 직후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제단을 만들고 초막절 7월 1일에 절기를 지켰으며 성전 재건을 위한 백향목 운송이 시작되었습니다(에스라 3:1-7). 느헤미야 개혁 당시이 날에 에스라의 율법 낭독에서 시작해 이레 동안의 초막절 준수로 이어졌습니다(느헤미야 8:1-18). 학개서에 이어지는 스가랴서의 마지막은 이방 나라 사람들까지도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오리라는 선포가 나와 있습니다.

아마 첫 한 달 동안 포로 귀한 공동체는 16년 동안 중단했던 성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며 살펴보아야 했을 것입니다그 내용이 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현재에 대한 상황(2-3)

과거에 3-40년 전 우리 예배당은 대부분 초라했습니다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있었습니다오늘날 양적 성장 시대를 지나면서 성도는 구름떼처럼 많아지고예배당은 화려하게 큰 빌딩을 이루었습니다하지만 초라한 옛 예배당 때보다 큰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능력은 화려한 외형이 아니라 성도들의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됨을 다시 조명해 줍니다.

2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2-3)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에게 학개 1장은 아직 여호와의 집이 지어질 때가 아니다란 백성들의 관점에 대해 문제 제기로 시작했고, 2장에서는 현재 지어진 성전이 보잘것없어 보인다는 생각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에게 스룹바벨여호수아그리고 남은 자 공동체인 포로 귀환자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3). 백성들 가운데 전반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과거의 성전과 비교해서 너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 중에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자가 있느냐고 물으신 후너희가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이전 성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 새로 짓고 있는 성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그들이 생각하는 바는 마지막 문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바로 너희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과거 솔로몬이 건축했던 화려한 성전과 비교했을 때스룹바벨여호수아남은 자 공동체가 짓는 성전은 사실상 너무 초라한 건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이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것입니다먼저는 솔로몬 때의 부강한 재력으로 솔로몬 성전이 화려하게 지어진 데 비해 포로 귀환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식민지 백성이었기에 성전이 초라할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두 번째는 아직 이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열왕기상 8:10-11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구름이 성전에 가득 채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학개 2:3에 사용되는 것을 생각해보면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고 정말 최종 완공까지 가능할 것인지를 생각해볼 때 너무 염려가 되므로 백성들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이 두 가지 생각이 아마 함께 공존했을 것으로 판단해볼 수 있습니다.

 

함께하심에 대한 예언(4-5)

세상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높이 평가합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것보다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바라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라고 격려하십니다.

4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4-5)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또 한 가지 약속을 허락해주십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강하게 하라는 말씀을 세 번 선포하십니다먼저 스룹바벨에게그 후 여호수아에게그리고 백성들에게 차례로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학개서의 흐름에서 예언은 스룹바벨여호수아백성들에게 항상 함께 선포되었는데이번에는 따로 따로 세 번 선포되었습니다이것은 강조의 용법인 동시에 스룹바벨여호수아백성들이 모두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해야 할 필요가 각각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그렇다면 굳건히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문맥을 따라 생각해보자면, 3절에 나온 바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4절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굳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사실 이 말씀은 1:13에 기록된 것처럼 학개의 첫 번째 예언 시에 이미 선포된 바 있습니다그런데 이번에 한 번 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첫 번째 예언 때 내가 너희와 함께한다라는 것은 성전이 완공될 수 있음을 약속해 주신 의미가 있다면두 번째 예언 때 동일한 메시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되었을 때그 약속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5절에서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십니다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및 하나님의 영이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동일하게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첫째 언약의 말씀은 시내산 언약의 율법을 가리키며좀 더 거시적으로 보면 시내산 언약 자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그리고 여호와의 영이란 출애굽기 31:3에서 성막을 지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셔서 지혜를 주심으로 성막을 짓게 하신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출애굽 때의 언약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지금 포로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들을 언약 백성으로 여기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의 지혜를 주셔서출애굽 당시 성막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설하게 하신 것처럼 지금도 성전 완공하게 하실 것임 을 뜻합니다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포로귀환 공동체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중 영광에 대한 약속(6-9)

하나님께서는 머지않아 모든 천지와 민족을 뒤흔들고 이 성전에 빛나는 것들로 가득 채워과거 찬란했던 그 어떤 성전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성전의 영광과 평화는 결국 성전의 주인이요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실 때 비로소 성취될 것입니다.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9)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흔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6). 이것은 신현 현상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시면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구름이 임하게 됩니다이런 흔드심의 주제는 모든 나라를 흔드심(7)이라는 주제로 발전합니다모든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행하셔서 그 만국의 보배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즉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초라한 성전에 도달하여 그 성전을 충만하게 채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배란 무엇입니까본문 상으로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열방이 소유한 귀중한 보물로 해석할 수도 있겠고열방이 원하며 사모하는 어떤 대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그런데 그 만국의 보배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게 됨으로 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된다는 사실이 매우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8)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면이 보배와 영광이란 매우 존귀하고 값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이런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는 9절에서 학개의 두 번째 메시지의 결론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이전 영광이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말하고 나중 영광이란 지금 재건하고 있는 성전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기초적인 의미에서는 성전 건물의 외적인 화려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영광이란 하나님이 임재가 성전에 가득한 것을 뜻할 것이므로솔로몬 성전을 가득 채웠던 하나님 임재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난 어떤 하나님의 임재가 이 성전에 있게 될 것인을 말씀하시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그렇다면 만국의 보배와 더 뛰어난 영광은 어떤 실체에 대해서 메시지 한 것일까우리는 이 지점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만국의 보배란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구원의 통로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 사건으로 드러났으며따라서 성전에 임재하신 정도가 아니라 성전 자체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 9절의 나중 영광은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은 포로귀환 공동체의 마음을 이러한 미래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을 통해 위로하셨고 권면하셨습니다백성들은 이러한 말씀에 힘입어 눈에 보이는 연약한 현실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계속해서 수행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성전 재건 현장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독려하며 언약을 상기시키셨습니다장차 그리스도로 완성될 영광에도 눈뜨게 했습니다그분의 관심은 반듯한 집이 아니라 성도들의 자각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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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01-01)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

학개 1장 1-15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신앙 생활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신앙이 점점 침체하는 것을 걷잡을 수 없도록 빠져듭니다한번 슬럼프 빠지면 회복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어떤 사람은 아예 신앙을 떠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혹시 지금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들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본 학개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신앙 회복을 간절히 외치는 말씀입니다이 말씀을 통해 당신에게 회복시켜 주는 능력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본문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에서 신경을 쓰지 않고자기 일과 집에만 몰두하여 하나님께 소홀하였습니다선지자 학개를 통해 그들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그리고 또 해결할 수 있도록 친히 도우셨습니다.

 

시대적인 배경(1-2)

소명(召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셨기에우리의 존재나 행위 전체를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입니다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성전 재건에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1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1-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권고하십니다학개서는 크게 4편의 예언으로 기간은 약 4달 동안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습니다본문은 그 중에 첫 번째 설교에 해당됩니다.

⑴ 시간적인 배경(1)

주전(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 유다는 멸망을 당합니다그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70년 후에 약속대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학개를 통해 먼저 지도자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에게 임합니다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할 때 지도자였습니다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을 때 교회는 영광을 잃게 되고 백성들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⑵ 환경적인 배경(2)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은 성전 재건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기쁨 마음으로 건축하려 했지만당시 예루살렘 주변에 살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그 결과성전 재건은 중단되었습니다더욱이 중단 이후 16년이 지나도록 건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그래서 그들을 향한 심각한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그들이 핑계거리로서 입에 달고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을 지적하십니다그들은 성전을 건축해야할 사명은 알고 있지만건축하지 못한 이유 있는 변명거리였습니다사실상 그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즉 건축할 분위기가 아니다.’란 완곡한 표현으로 성전 재건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들은 성전 중단한 대신에자기 집만 화려하게 꾸미는 데만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문제(3-11)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이런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현재 너무 맘몬()에 매여서 노예가 되어 있지 않는지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멀어져 있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학개는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태도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형편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촉구합니다.

3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6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8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3-11)

하나님의 도움 없이 관심을 쏟는 당신의 수고는 헛수고가 됩니다따라서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한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요즘 당신이 관심을 쏟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⑴ 잘못된 우선순위(3-5)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포로 귀환 백성들에게 성전이 폐허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기 집 일에만 신경을 쓰며 사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며그 때문에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조 기법을 사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4). 백성들이 좋은 집에 거주하고 있는 데 반해 하나님의 집은 황폐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이 말씀을 들은 포로 귀환 공동체는 충격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핵심 메시지를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고 하셨습니다이는 너희 길에 마음을 두라입니다구약성경에서 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과 태도를 뜻합니다그들은 자기 행위를 살필 시간도 없이 분주하게 살았습니다그들에게 정말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⑵ 잘못된 우선순위 결과(6-11)

지난 16년 동안 성전을 재건하지 않은 채 지내온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을 마음을 다해 반추해보라는 뜻입니다그렇다면 그들이 분주하게 살아온 삶은 어떤 결과를 맺겠습니까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대조 기법을 사용하여 백성들이 원한 삶의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을 비교합니다잘못된 우선순위로 살아간 백성들에게 불만족이었습니다많이 뿌려도 적게 거두었고먹어도 배부르지 못했고마셔도 흡족하지 못했습니다삯을 받아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6절이 설명하는 내용들은 사실상 시내산 언약의 저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신명기 28장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시내산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설명하는데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얻게 되지만 그 율법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게 됨을 말합니다그 저주의 내용 중에 학개 1:6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신명기 28:38에는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신명기 28장의 다른 부분에는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그 대가를 얻지 못하는 여러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예를 들면 집을 건축했지만 거주하지 못하고 포도원을 심었으나 열매를 따지 못하고 토지 소산을 얻었지만 먹지 못하게 된다는 경우들입니다(신명기 28:30-33). 노력하였으나 결과를 얻지 못함이 바로 학개 1:6의 주제이기에신명기에 나타나는 시내산 언약의 저주즉 불순종의 결과로 나오게 된 저주를 언급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합니다이 것은 포로귀환 공동체가 성전을 재건하지 않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가 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절에서 5절의 명령을 다시 반복하십니다각자 자신의 길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이것은 단순한 책망이 아닙니다자신의 길에 마음을 두고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자세히 살피라는 권고입니다성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판단되는 문구입니다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8절에 나타납니다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확하게 명령하십니다성전을 재건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9-11절에서 성전 재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고난으로 닥쳐왔음을 다시금 자세히 서술해 나가십니다이기적인 백성들은 거둔 것을 집으로 가져갔지만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셨습니다그래서 하늘과 땅이 축복을 주지 않았고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 등 모든 일에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곡물’, ‘새 포도주’, ‘기름은 소선지서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목록으로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참조호세아 1:8). 하나님께서는 포로귀환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성전을 건축함을 통해서 다시금 언약의 복된 상태를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12-13)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더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 마음입니다돈이 없어도 지식이 짧아도 직장을 잃어도 몸이 건강하지 못한다고 해도 주님을 기뻐하실 영광의 처소가 될 수 있다면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십니다.

12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13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12-13)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다시 선지자 학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유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표로 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여기서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상 청종하다란 순종을 의미합니다이유는 여호와께서 학개를 보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을 존귀하게 생각하며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주인공으로 여겨그분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학개를 통해 매우 중요한 말씀을 전달하십니다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선포이십니다이 구절의 신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임재의 선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사실상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전 건축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하나님의 집이 완성되어야 하나님께서 오셔서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순서를 뒤집으시고성전이 아직 재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라고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들을 때이 말씀은 단순한 예언이 아닌 매우 급진적인 신적 메시지였습니다성전이 건축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벌써 오셨다는 것은 바로 성전이 반드시 재건될 것이라는 확인의 증거였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 선포를 통해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완성되도록 역사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언의 결과(14-1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그것을 인식하든지 안 하든지 그 백성들과 동행하십니다또한 항상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하나님과 지도자와 그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먼저 세워질 때 눈에 보이는 성전도 세울 수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도 선지자의 말을 청종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반응하며온 백성은 하나님께서 일깨워주신 마음을 따라 성전을 재건하는데 착수합니다.

14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15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14-15)

이러한 학개 선지자의 예언 선포로 인한 결과가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바로 스룹바벨의 마음여호수아의 마음포로귀환 공동체의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감동되었다는 것입니다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켰다는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혼이라는 뜻이다앞서 5절과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너희의 길에 두라고 하셨는데이제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좀 더 근본적인 내적 변화를 언급하시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감동시키다이란 단어는 잠든 상태를 깨워 일으키다’ 혹은 방향성/운동성을 부여하다라는 뜻입니다즉 그들의 영혼이 사실상 움직이지 않는 잠든 것 같은 상태였는데 학개의 메시지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깨어나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이유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하나님의 선제적인 선포였음이 분명합니다그래서 백성들은 여섯째 달 십사일에 하나님의 전 공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장에 나타난 첫 번째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백성들을 단순히 책망하시는 데서 머물지 않으시고오히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예언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그들의 영혼을 움직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반드시 완성하시며그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도록 친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객도주인도지붕도 없는 하나님의 집에 가장 큰 손실은 백성의 마음이 떠났다는 것백성은 하나님에 대해 마음을 비웠고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 인해 마음이 베였습니다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분주했다면이제라도 주의 집에 꽉 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돌아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루는 소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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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서 서론


학개서는 구약 성경 중에 오바댜서 다음으로 짧은 책이지만강한 어조로 거리낌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4편의 짤막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 공사는 중단되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 건축보다는 자신들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백성들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장차 그들의 수고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오직 하나님이 그들 앞에 주신 임무를 수행하여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둘 때하나님의 복의 손이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임할 것입니다.

 

학개서의 저자

이 학개서와 에스라 5장 1, 6장 14절에 나오는 두 번의 언급으로만 학개 선지자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그 구절을 살펴보면학개는 자기보다 더 젊은 선지자 스가랴와 함께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학개는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에서 귀환했으며 분명히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어떤 학자들은 2장 3절의 의미를 해석하면서학개가 BC 586년 첫 번째 성진(1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유다에서 태어났으며이전의 화려한 성경을 기억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고 주장합니다이것은 학개가 BC 520년에 예언할 당시 약 75세였다는 의미기도 합니다그러나 학개가 포로기에 바벨론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록 연대

BC 538년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그리고 유다로 귀환한 사람들은 BC 536년에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귀환한 백성들은 고국 땅에서 사마리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서 BC 534년에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부르셨고그들에게 성전을 완공하기 위해 백성들을 독려하라는 임무를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모두 네 편인 학개의 메시지는 정확히 BC 520년에 기록되었는데이때는 바사의 왕 다리우스 1(BC 521-486재위 2년입니다첫 번째 설교는 히브리력으로 엘룰 월(8-9)에 기록되었으며두 번째 설교는 티슈리 월(9-10)나머지 두 개의 설교는 기슬르 월(11-12)에 기록되었습니다나중에 이 메시지들을 편집해서 오늘날의 학개서가 탄생했습니다.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허락하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그 메시지는 네 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이 모든 설교의 초점은 성전은 반드시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⑴ 첫 번째 설교 성전을 재건하라(1:2-11).

학개가 선포하는 네 편의 설교는 약 두달 간의 간격을 두고 계속 설교되었다첫 번째 설교의 제목은 중단되었던 성전의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다.

⑵ 두 번째 설교 굳세게 일하라(2:1-9)

첫 메시지가 전파된 지 두 달이 지난 후에 이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그때는 촉막절이었다촉막절을 계기로 해서 이 메시지가 선포 되었습니다첫 설교가 선포된 때와 같은 해인 주전 520년 10월 20일경학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된 메시지의 내용은 굳세게 일하라는 요지였습니다.

⑶ 세 번째 설교 순수하게 드린 후 복을 기다리라(2:10-19)

역시 두 달쯤 후인같은 해 주전 520년 12월 24일경이 설교가 베풀어 졌습니다이 세 번째 설교의 요지는 순수하게 드린 후 복을 기다리라는 내용입니다이 설교에서는 먼저 순수하게 드리지 못한 일에 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부정한 것잘못 드려진 것그들의 잘못된 태도 또는 잘못된 헌물에 대한 책망과 경고가 10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⑷ 네 번째 내가 너를 쓰리라(2:20-23)

이 설교는 세 번째 설교를 한 날과 같은 날약간의 시차를 두고 행해진 설교입니다이 마지막 설교의 요지는 내가 너를 쓰겠다는 것입니다세 번째 설교의 마지막은 너희를 축복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청중들은 어떤 복을 주실까하고 궁금했을 것입니다복중의 복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주제와 문학적 구조

학개서의 기본 주제는 분명합니다남은 자는 반드시 자기들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해야 하며 성전 건축을 완공해야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네 편의 메시지에 따라 단락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제 2성전의 완공(11-15), 제 2성전의 영광(21-9), 순종에 대한 현재의 복(2:10-19), 언약을 통한 미래의 부(2:20-23)입니다.

학개 2장 9절의 약속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제 2성전(스룹바벨 성전건축이 얼마나 중요하지 미리 알려줍니다나중에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성전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하나님이 인장으로 삼으신 스룹바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으며(2:23), 이는 메시아적 계보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단락 구분

1. 성전 재건을 촉구함(1:1-15)

⑴ 완공되지 않은 성전(1:1-6)

⑵ 반드시 완공되어야 하는 성전(1:7-15)

2. 제 2성전의 영광

⑴ 첫 성신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하는 제2성전(2:1-3)

⑵ 첫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워질 제29(2:4-9)

3. 순종에 대한 현재의 복(2:10-19)

⑴ 남은 자의 불순종(2:10-14)

⑵ 해결책남은 자의 순종(2:15-19)

4. 약속을 통한 미래의 복(2:20-23)

⑴ 미래에 멸망할 열방(2:20-22)

⑵ 미래에 인정받을 스룹바벨(2:23)

 

오늘날 교회에 주는 메시지

학개서는 오늘날 교회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주는데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고둘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셋째는 미래의 축복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 우리의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기독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 영광의 회복자로서(2:7-9), 이 세상 왕국을 멸망시키는 자로서(2:22), 또한 이스라엘의 인장으로서(2:23) 제시되었습니다.

 

·참고자료

넬슨 성경 개관(개정판)-죠이선교회출판부

IVP 성경주석-IVP

구약성경개론-도서출판 엠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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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4-01)


갈라지는 마지막 운명

말라기 3장 16절-4장 6절


 심판의 날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에는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멸망하는 삶과 회복하는 사람이 갈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판결하시기 전에 우리가 선택하는 길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회복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섬기는 저와 그러지 않는 자를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하십니다. 말일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두러운 날이 오기 전에 그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명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기억은 실천이라는 결과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악인과 악인의 구분(3:16-18)

이스라엘의 특징은 아무리 잘못을 지적해도 수용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당당했습니다. 무슨 짓이든지 정당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망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분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분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16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16-18)

이 단락은 3:13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마지막(여섯 번째) 경고로 4:3까지 계속되며, 의인과 악인에 대한 구별(3:13-18), 여호와의 날에 이들에게 임할 구원과 심판(4:1-3)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앞서 3:13-15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악인이 복되다고 주장하는 악인들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3:16-18에서는 의인들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인들)은 하나님이 악인의 말이나 의인의 말을 분명히 다 들으셨음을 서로 확신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말들을 기념책(출애굽기 32:32)에 기록하여 후에 그를 경외하고 이름을 존중하는 자들을 신원하실 것이라 말합니다(3:16). 앞서 3:5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불시에 속히 오셔서 사람들의 악행을 증언하며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의 경우는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며 아들을 아끼듯 아끼실 것입니다(17). ‘특별한 소유’로 번역된 ‘세굴라’라는 단어는 출애굽 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중에서 자신의 ‘소유’로 삼겠다고 선포하실 때 처음으로 등장합니다(출애굽기 19:5). 그런데,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 혹은 ‘그의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때 성립되는 조건 약속입니다. ‘보배로운 소유’는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으로서(출애굽기 19:6)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성결을 대표하는 제사장과 같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는 ‘이스라엘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해당합니다. 3:17에서도 그의 정한 날(말일)에 특별한 소유가 될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그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3:16)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며, 이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일치합니다. 또한 혈통상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열방 중에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보배로운 소유로 삼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서 1:5,11,14에 예고되었듯,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결한 제물을 드릴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자들까지도 마침내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세워 그를 축복하시면서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그 약속(창세기 12:3)이 이렇게 성취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될 뿐 아니라 의인과 악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그를 섬기지 않는 자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8).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4:1-3)

두려운 이야기기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공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아무리 다수가 악에 치우친다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무리는 반드시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살라져 심판을 받을 때에 그들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의 광선으로 온전하게 하실 것이지만, 악인은 불에 타는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마지막 경고(3:13-4:3) 중 4:1-3은 의인과 악인에게 여호와의 날 각각 임할 구원과 심판에 집중합니다. 4절의 첫마디인 ‘보라!’가 청중의 귀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광로 같이 불타는 여호와의 날(스바냐 1-3장; 요엘 1:15;2:1-3; 시편 50:3)이 다가옴을 예고하십니다. 이날 하나님 앞에서 의 인과 악인에게 합당한 심판이 내려집니다. 이들에 대한 표현은 3:13-18과 마찬가지로 4:1-2에도 다양하게 소개됩니다(교만을 행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 먼저 악인들은 지푸라기가 될 것인데, 더는 생명력이 없어 말라 시들어질 것이란 뜻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와의 날에 그것이 불살라지므로 뿌리나 가지, 즉 소생하거나 접붙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지 않고 다 소멸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은 공의와 치유와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다. 공의의 해가 떠오르면 어둠 속에 숨겨진 불의가 다 드러납니다. 해의 날개에 함께한 치유는 의인에게 생명과 구원, 하나님의 호의가 임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불에 타 소멸된 악인들과 달리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공의와 이 모든 혜택을 입고 송아지처럼 즐거워 될 것입니다(예레미야 50:11). 또한 의인들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데 동참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지푸라기처럼 다 소멸되어 의인의 발바닥 밑에서 재로 나뒹굴게 됩니다. 미가에서도 의인을 사자로 비유하여 원수를 멸하는 심판의 도구로 기술하고, 이슬과 비로 표현하여 초보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을 예고합니다(미가 5:7-9), 이제 질의문답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1:2부터 시작하여 4:3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일단락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표현은 말라기를 통해 전달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해줍니다.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많은 군대의 여호와’)란 칭호는 하나님이 온 세상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용사이자 왕임을 함축합니다. 이 호칭은 포로 귀환 공동체에게 언약의 삶을 살며 종말론적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권고: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4:4-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끝까지 돌아오라고 촉구하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메시지인 말라기 마지막까지도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은 첫 순간을 기억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온 열조들처럼 언약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에 진멸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6)

‘내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로 시작되는 이 단락은 하나님의 마지막 권고로서 말라기의 마지막이자 열두 권의 소선지서(호세아~말라기) 및 전체 선지서의 마지막 단락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억하라’는 명령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지력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행동력, 실천을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잠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조언, 즉 그의 말을 듣고, 떠나지 말고,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간직하고, 잊지 말라는 말(잠언 1:8;2:1-2;3:1; 4:1-2,10,20;5:1;7:1)은 궁극적으로 ‘행하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가르침을 나와 관계없는 낯선 것으로 여긴다면(호세아 8:12), 기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둘째, 기억해서 실행해야 할 구체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호렙(시내산)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통해 주신 법(율법), 율례와 법도(4)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주신 율법은 좁은 의미에서는 십계명(출애굽기 20장)과 그에 부속하는 율례들(출 21-23장)들을 가리킬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모세오경 전체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이나 율례나 법도의 의미나 내용을 따로 나누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는 지침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두려운 날(4:1,5), 즉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을 예고하시며,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 아합 왕 때 사역하던 선지자로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열왕기하 2:11)이며, 앞서 3:1에서 길을 준비할 자로 하나님이 보내겠다고 하신 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1이나 4:5에 예고된 선지자가 세례 요한임을 밝히셨습니다(마태복음 11:10,14). 종말 전에 이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시내산에서 백성에게 준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는 선지자를 통해, 이제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 관계로 돌아오도록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 방법으로 백성을 부르는데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저주로 그 땅을 치실 것입니다. 여기서 ‘저주’는 ‘진멸’(헤렘)이란 단어다. 호흡이 있는 자를 멸절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 그 땅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는데(신명기 7:1-2; 20:16-18), 지금은 그 진멸의 저주가 이스라엘에게도 임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의 이방인들이 진멸당한 이유가 죄였듯이, 이스라엘에게 경고된 진멸 또한 죄와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이스라엘이 경각심을 갖게 하여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바람은 엘리야(세례 요한)가 올 당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현 포로 귀환 공동체와 그 후에 올 모든 세대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서 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을 경외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치료의 광선이 주는 회복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여 기억하는 삶이 된다면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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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3-01)

   


정의와 십일조를 논하시는 하나님

말라기 2장 17절-3장 15절


세상은 정의로워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정의롭지 못하게 살아간다면, 그처럼 어불성설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의롭지 못한 삶은 충실한 종교생활로 대체되지나 만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충실한 삶은 반드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러 세상에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그의 길을 준비할 언약의 사자를 보내어 백성을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명령을 어긴 자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시며,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책망하시고 권고하십니다.

 

네 번째 경고 :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고 비방(2:17-3:5)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언약의 사자가 하는 일은 심판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주한 종교생활로 정의 없는 삶을 가리려 말아야 합니다.

17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2:17-3:5)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언제 여호와를 괴롭혔냐고 반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말도 안 되는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네 번째 논쟁입니다.

(1) 하나님의 경고(17a)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 하나님의 정의를 불신하고 어지럽혔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말씀을 곡해하고, 타인에게도 이 생각을 서슴지 않고 전하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피곤케 하였습니다.

(2) 백성들의 반응(17b)

이스라엘 백성은 한 발 더 나가서 ‘우리가 어떻게 괴롭혔나이까’라며 반문합니다. 도리어 행악자가 하나님의 눈에 선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신다고 빈정거립니다. 그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떠듭니다.

(3) 하나님의 응답(1-5)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함에 대해 심판주로서 직접 예고 없이 임하실 것이라고 응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오시기 전에 사자를 보내어 그 길을 준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사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신명기 17:15-19; 역대하 36:15; 예레미야 7:26; 미가 6:4).

특히 이사야 40:3의 광야에 와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처럼, 이 사자는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에서 장애물을 없애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4:5에서 이 사자는 엘리야로 예고되며, 예수님은 그가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10, 14). 하나님께서 이 사자를 보낸 후, ‘주’이자 ‘언약의 사자’가 갑자기 성전에 임하실 것입니다. 이 ‘언약의 사자’는 앞에 나온 사자와 동일인이 아닙니다. 이 사자는 하나님과 같이 이스라엘의 주인(1:6)이자, 성전의 주인이며(3:1), 이스라엘의 즐거워하는 대상(3:1)이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자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신약의 맥락(요한복음 2:19-22[성전]; 갈라디아서 3:15-18; 히브리서 12:14[언약])에서 볼 때, 언약의 사자는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언약의 사자의 역할은 제련공과 표백하는 자로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를 견디거나 그 앞에 당당히 설 자는 없습니다(2). 언약의 사자의 오심이나 불과 표백제의 연단을 통해 백성이 다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용광로의 불이 광석에서 불순물을 다 제거하여 순전한 금과 은을 만들어내고 표백제가 얼룩을 제거하여 깨끗이 하듯,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레위 자손’(3)을 먼저 정결케 하여, 그들이 공의의 제물을 바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제사장과 레위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자신과 백성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기에(2:1-9), 이들이 백성보다 먼저 성결을 회복하여 관계를 재개할 때 자신들은 물론이고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과 백성이 모두 성결하게 되어 악행(1:7-8, 13-14)을 버리고 규례에 따라 예배하며 예불을 드릴 때, 말씀에 따라 예배드렸던 과거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4).

이 연단의 과정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책망과 경고를 하셨고, 그의 사자와 언약의 사자를 통해 정결케 되어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회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지체 없이 그 죄악을 법정에서 증언하고 판결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점을 치며 간음을 행하여 가정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웃에게 거짓 맹세하고 마땅히 줘야 할 삯을 주지 않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착취하는 불의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관계를 기초로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맘이 없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다섯 번째 경고 :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책망과 권고(3:6-12)

악인이 대접 받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불의한 세상 때문에 신음하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백성은 여호와께서 행악하는 자를 선히 여기시고 그들을 기뻐하셨다는 거짓말로 여호와를 되롭게 하였습니다.

6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12)

하나님께서는 앞서 1:6-14에서 희생 제물에 대한 제사장과 백성의 태도와 행위를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3:6-12에서는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잘못을 책망(6-9)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권고(10-12)하십니다. 이 단락은 다섯 번째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시며 야곱의 자손들이 소멸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의 하나님의 야곱에 대한 언약적 사랑에 변함이 없었고, 지금도 미래에도 번함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규례에서 돌아섰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7절)는 권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 권고는 스가랴 1:3의 인용이며, 하나님이 귀환자들(주전 520년)에게 그들의 조상들에 대해 하셨던 말씀입니다. 포로 전에도 악한 길과 행실에서 돌아오라고 권고했으나(예레미야 18:11; 31:18)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포로로 끌려갔고, 그들은 바벨론에 가서야 자기들이 마땅한 심판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런 스가랴 시대부터 적어도 70-8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은 조상들과 똑같은 권고를 받고도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돌아가리이까?’(7)라며 완악하고 어리석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약탈한 것을 반역의 증거로 들었으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떻게 약탈했느냐고 반문합니다(8). 희생 제물은 죄와 관련된 제물이며, 십일조와 헌물은 의무로 드려야 할 헌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과 십일조를 열심히 바쳤고, 다른 제사와 절기들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지켰습니다. 예물이나 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적, 위선적, 습관적으로 행했을 뿐 식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공의를 행치 않았습니다(아모스 4:4-5; 5:4-8, 22-23; 미가 6:6-8; 예레미야 7:21-22. 에스겔 20:39).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은 십일조나 헌물마저 바치지 않았으며, 일부를 드리거나 상한 것을 드리면서도 할 바를 다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례적인 제안을 하시면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후 그가 하늘의 창문들을 열고 이스라엘에게 복이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으시는지 아니 하시는지 시험을 해보라는 제안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되는데(신명기 6:16), 자기를 시험하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해충을 금하고 열매가 떨어지거나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즐거움의 땅’이 될 것이며, 이방인들로부터 행복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12).

 

여섯 번째 경고 : 하나님을 거슬러 완악한 말을 하는 백성(3:13-16)

땅에 있는 하잘것없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었고, 그런 악행이 상습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그치고 기쁨의 땅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13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16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12-16)

하나님의 마지막(여섯 번째) 경고인 3:13-4:3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누구이며(3:13-18), 마지막 때이 여호와의 날에 이들에게 임할 운명(4:1-3)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 하나님의 경고(13a)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를 거슬러 완악한 말을 서슴지 않았음을 지적하십니다(13). ‘완악하게 말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압하듯 주제넘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반응(13b)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서 무슨 말을 했나이까?’라고 끝까지 반박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말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말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응답(14-1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헛되다. 악인이 행복한 자들이다’(14-15)라는 말이 완악하다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느라 명령을 지키고 슬프게 다니는 행동이 다 쓸데없다고 치부했습니다(14). ‘슬프게 행하는 것’은 상복을 입고 허리를 구부린 채 슬프고 어두운 표정으로 걷는 모습으로(시편 35:14) 겸손과 회개를 뜻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교만한 행악자를 행복자로 부르며(15), 그런 자들이 강성해졌고,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도 심판을 피했다고 떠들어댔습니다(15). 이스라엘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선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즐거워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2:17). 3:10-12의 십일조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자가 그의 즐거움이 되고 모든 열방으로부터 행복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신뢰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시편 1:2; 2:12)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말했듯 이스라엘은 만왕의 왕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행복한 백성(신명기 33:29)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삼은 것이 행복이며 특권인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걸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복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십일조는 은혜에 대한 화답이며, 사회의 약자를 돋보기 위한 세금입니다. 공평과 정의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십일조는 소유의 진한 주인이 누군지를 환기시켜 개인적인 탐욕과 야망을 조절하는 길로서 여전히 그 정신이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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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2-01)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을 행한 이스라엘

말라기 2장 1-16절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지도자가 합당하지 못하면 조롱을 받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에 지도자들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어겼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도자의 타락이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입니까? 타락한 지도자와 그 지도자들에게 이용당한 백성들의 결국은 어떠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그들이 ‘레위의 언약’을 망처 놨음을 책망하십니다. 생명, 화평, 하나님의 경외가 포함한 이 언약을 다시금 실천함으로써 그들은 진정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편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혼과 이방인과의 결혼을 질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편과 언약의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경건한 자손 얻기를 기대하십니다.



제사장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1-9)

영적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은 타락한 제사장을 저주하십니다. 희생제물의 똥을 얼굴에 바르겠다고 하실 만큼 그 심판은 엄중할 것입니다. 백성보다 영적 지도자를 향한 심판은 더 엄중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백성들에 비해 크기 때문입니다.

1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3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4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6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8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9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9)

하나님의 두 번째 경고는 2:9까지 이어집니다. 첫째 단락(1:6-14)이 예배를 통한 영적 생활에서 그들이 하나님 경외를 저버렸음을 보여준다면, 둘째 단락(2:1-9)은 언행에 있어서도 하나님 경외를 저버렸음을 보여 줍니다.

(1) 제사장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과 책망(1-3)

본문은 제사장들을 위한 하나님의 ‘이 명령’을 선언하며 시작합니다(1). 제사장의 의무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하고 순종하리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민족 가운데서도 크게 되고 경외의 대상이 된다면(1:11,14), 제사장들과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그 이름이 얼마나 더 큰 순종과 경외를 받아야 마땅하겠습니까!
제사장은 열두 지파 중 장자를 대신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례위인들(민수기 3:12-14)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개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민수기 6:23; 신명기 21:5) 특권을 가졌습니다. 이 특별한 권리에는 제사장의 하나님 경와와 신실함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계속 저주를 내리고, 그들이 받을 축복까지도 저주할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이름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그들 세대만이 아니라 자손들까지 꾸짖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제사나 절기에 다루던 짐승의 똥이 얼굴에 발라서 부정하게 되고, 그 결과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어 성전 밖 재 버리는 곳(진영 밖)에 똘과 함께 버려질 것입니다(출애굽기 29:14; 레위기 4:12; 예레미야 16:4). 이런 심판과 벌을 기술하는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 제사장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표현은 1:6-2:9 단락에 집중적으로 등장하여(1:6(2번); 11(3번), 12,14; 2:2,5; 이 단락 외에는 3:16, 4:2), 이스라엘에게 멸시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궁극적으로 두려움(경외)의 대상이 되고, 크고 영화롭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레위와 맺은 언약(4-9)

4절의 ‘이 명령’을 통해 1-3절과 연결되고 있으며, 새 주제인 ‘레위와의 언약’에 대한 설명을 9절까지 끌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와 맺은 언약은 레위인과 제사장으로서의 특권과 그들의 책임을 암시합니다. ‘시내산 언약’(출애굽기 19장)이나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 등은 언약을 맺게 된 배경이나 공식적인 내용이 있지만, ‘레위의 언약’은 그 명백한 기록이 없습니다. 말라기를 제외하고 이 언약은 예레미야에 한 번 언급되었으나(예레미야 33:21), 거기서는 이 언약이 예레미야 이전에 이미 성립되었다는 점만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모세가 죽기 전 각 지파를 축복하면서 레위인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켰다고 말하고 있는데(신명기 33:10), 만약 이 언약이 ‘레위의 언약’을 가리킨다면, 레위 언약의 성립 시기는 광야 시대나 그 앞까지 앞당겨집니다. 이 레위 언약은 출애굽 후 금송아지 사건 때 레위인들이 하나님 편에 서서 헌신했던 일(출애굽기 32:26-29)을 그 배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알브올 사건에서는 하나님과 제사장들 사이에 ‘평화의 언약’이 성립되었으므로(민수기 25:11-13), 이를 전체 레위인과의 언약과 동일시하기에 부적합합니다. 또한 민수기 18:19에 ‘소금 언약’이 소개되지만 하나님이 레위인과 후손이 영원히 먹을 수 있는 제물을 지정하는 약속이기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4절은 하나님께서 1-3절의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레위와 맺은 언약이 지속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언약의 핵심이자 특징은 생명과 화평이며, 결국 이것은 하나님 경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5).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언급하는데, 2절의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의무와 연결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과거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법을 입에 담았고, 오직 의와 화평과 정직함을 실천하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말과 행동은 많은 자들을 죄악에서 돌이키게 했습니다. 모세도 이들이 부모나 형제나 자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언약을 지키는 데 힘썼음을 인정했습니다(신명기 33:9). 이런 예는 금송아지 사건(출애굽기 32장)이나 바알브올 사건(민수기 25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의 대표인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입술에 보관하여(예레미야 4;13),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레위기 10:10-11에 따르면 제사장의 직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한 규례들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 명령은 첫째 직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해야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신실한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7). 그러나 말라기 시대의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8: ‘깨뜨렸느니라’로 번역됨). 자신들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악에 빠지게 했습니다(8절; 예레미야 23:13-14). 이처럼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에게 공정치 못한 제사장들(미가 3:11)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할 것입니다(9).


세 번째 논쟁 : 백성들의 이방 결혼 죄(10-16)

지도자들이 방황하면 백성들은 혼돈스러워집니다. 이스라엘도 백성들은 제사장들을 본받아 거짓을 행하고 하나님의 성경을 욕되게 하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죄악된 백성들의 삶은 단적으로 결혼생활에서 드러났습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이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봉헌물을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제물이 되지 못해서입니다.


10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1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13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16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10-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세 번째 논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방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의 삶을 살므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1)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10)

하나님의 계시 셋째 단락인 2:10-16은 백성을 지목하여 결혼 문제, 특히 이방인과의 결혼과 이혼을 책망합니다. 그러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신실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십니다.

(2) 이방인 딸들과 혼합 결혼(11-12)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한 아버지를 가졌으며, 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10).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1:6)을 가리키며, 한 조상은 ‘아브라함’ 또는 ‘야곱’(1:2; 2:12)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이방인과 구별되었음을 말합니다. 선지자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면서 어떻게 형제들에게 ‘거짓을 행하고’ 조상들의 언약을 모독하느냐고 한탄합니다. 10절에서 시작하여 반복되는 동사 ‘거짓을 행하다’(10,11,14,15,16)는 ‘신의 없이 대하다’, ‘불충실하다’, ‘불성실하다’의 뜻으로,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과 거룩함을 모독하는 가증한 일을 저질렀음을 뜻합니다. 11절과 이후에서 이 표현은 결혼 생활에서 불충실한 것을 가리키며, 10절에서는 이를 포함한 중의적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귀화자들이 하나님의 성결을 모욕하고 이방 신의 딸과 결혼했다고 꾸짖습니다. 귀환자들은 수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았고, 다시 돌아온 유다 땅에는 이방인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이 같은 종족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자손(15: ‘경건한 자손’으로 번역됨)을 낳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결혼하는 자는 누구든지 언약 백성에서 내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는 말라기나 그 전후에 사역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도 큰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에스라 9-10장; 느헤미야 10:30;13:23-27). 특히 에스라 시대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롯한 백성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고, 방백과 고관들이 이런 일에 앞장을 섰다고 고발합니다(에스라 9:1-2). 이때 에스라의 기도에 찔림을 받은 자들은 이방인 아내와 자식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도 했으나(에스라 10장), 말라기 때에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3) 이방인적인 삶을 책망(13-16)

이제 백성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와 울고 탄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입니까?’라며 묻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14). 그 이유는 젊었을 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언약을 맺어(잠언 2:17) 합법적인 아내로 삼은 여인들을 남편들이 내쫓고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직 생명이 있어 경건한 자손을 낳아 양육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은 그들과 이혼하고 학대를 일삼았습니다. 음행의 이유로 이혼이 허락되기도 하였지만(신명기 24:1-4),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맺어준 부부의 연을 지속하라고 권합니다(마태복음 19:8-9; 고린도전서 7:10-11).



지도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생명과 의의 길, 즉 북의 길을 제시하고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가 타락하였을 때 미치는 파급 효과는 엄청나기 때문에, 타락한 제사장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혹독합니다. 지도자의 말을 잘 분별하는 것 또한 백성들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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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1-01)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

말라기 1장 1-14절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뜨거웠던 믿음이 식어지고, 열정적인 헌신도 식어집니다. 이런 형상을 단지 봉사나 예배를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타락했습니다. 그들의 타락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에게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기기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누가 타락했으며, 어떤 식으로 타락했으며, 그 타락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그 모든 것들의 긍극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되었으나,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자기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이들을 책망하며 회개를 종용하십니다.

 

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1)

하나님께서 부르심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치밀하고 섬세한 계획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다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우리를 부르시고 그 선하신 뜻대로 귀한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헌신으로 변해버린 이스라엘에게 바른 관계를 맺자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1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신앙의 감격이나 긴장감은 살아져 갔습니다. 그러면서 심판의 원인이었던 형식적인 예배와 외식적인 예배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하신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백성으로서 특권과 의무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해서 그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여전히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셔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진심어린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말라기 1:1; 스가랴 9:1; 하박국 1:1)로 시작합니다. ‘경고’로 번역된 단어(마싸; 나훔 1:1; 하박국 1:1)는 특징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선지자가 본 계시 등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집’, ‘부담’이란 뜻이나 ‘여호와의 짐’ 또는 ‘선지자의 짐’이라는 번역이 듣기에 매끄럽지 못하므로, 보통 ‘경고’, ‘계시’, ‘신탁’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 뒤에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므로, 심판을 내리실 하나님이나 전달하는 중개자의 부담과 고통이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논쟁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 요청(2-5)

때로는 사랑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마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으니 사랑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끼리도 사랑하기 힘든지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예배는 자기만족을 위한 방편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실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2-5)

말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질의문답을 통한 논쟁 형식으로 계시가 전개될 것입니다. 이 형식은 1:2-4:3까지 여섯 번이 반복하여 논의가 진행됩니다. 각 논쟁은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심, (2) 이스라엘의 반문, (3) 하나님의 설명과 책망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첫 번째 논쟁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2a)

이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담을 담은 첫 내용(1:2-5)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이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한 언약 백성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하십니다. 이 진술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줄곧 사랑하고 충실하게 대하셨음을 뜻합니다(예레미야 31:3).

(2) 이스라엘의 반문(2b)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못마땅하여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2). 이 물음은 ‘대체 무슨 일을 우리에게 해주었다고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는 겁니까?’란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불만과 의심의 표현입니다.

이 시기는 포로 귀환 및 성전 재건 이후로 추정되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깨고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주전 586년)로 보냈다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주전 538년) 성전을 재건하고도(주전 515년) 오래 지났건만(약 주전 5세기 중엽) 기대만큼 정치, 경제적 부흥(학개 2:6-9, 15-23)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 바람대로 해주어야 사랑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뿐 하나님을 멸시하여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자기 실체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2-3)

이런 이스라엘의 반문에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2-3)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쌍둥이인데, 하나님께서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창세기 25:22-23).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이 야곱에게 이어졌고(창세기 17:6; 26:3-4; 28:13-14), 야곱의 아들 열 두 명은 크게 번성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가 되었습니다(창세기 49:28). 이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며(출애굽기 19장),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었습니다(여호수아 13-22장). 다윗을 통하여 영원한 왕권을 약속받았고(사무엘하 7장),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로 잡혀갔으나 다시 돌아와 나라와 기업을 회복하고(역대상 9장; 에스라 1장),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에스라 6:14-15). 오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와 구원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손의 번성(창세기 35장)과 기업(신명기 2:5; 여호수아 24:4)의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지만, 에돔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언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바벨론을 도와 유다를 침공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에돔에게 멸망을 선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미 에돔의 터전을 황폐하게 했고, 설령 그들이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하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헐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3. 에돔이 산 곳은 악의 지역이 되며, 그들은 크게 패망하여 ‘하나님이 영원히 저주하는 백성’이라 불릴 것입니다(4).

반대로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끝장난 것 같았던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이스라엘도 목격한 바이기에,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밖에서도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두 번째 논쟁 : 바른 제사 드리기를 원하신 요청(6-14)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린 것들이 빈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잖게 여기지 않고서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아쉬울 때는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성전 문을 닫는 것이 낫겠다고 분노하실 만큼 형식적이고 불손한 제사를 드리진 않습니까?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에는 무관심한 사람은 아닙니까?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14)

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첫 번째 계시가 이스라엘 지체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했다면, 두 번째 계시인 1:6-2:9은 본격적인 책망의 시작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6a)

여기서는 제사장을 이스라엘의 대표로 지목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제사를 업신여겼다고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어서 아들과 종이 각각 아버지와 종을 공경함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 후, 제사장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주인이신 하나님을 왜 공경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십니다(6; 이사야 1:2-3). 이 비유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암시하며,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일원이 되어야 함을 함축합니다(출애굽기 19:6), 제사장과 레위인은 언약 백성 중에서도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를 드리는 일을 담당하는 자들입니다(민수기 3:1-13). 이런 자들조차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남은 백성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에게 들어야 할 호칭은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지만, 현실은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었으니 굴욕적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의 반문(6b)

그런데 제사장들은 ‘어떻게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 하며 어리둥절해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이 반응은 1:2의 이스라엘의 반응과 다름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눈감하고 악하고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의 응답(7-8)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럽고 부정한 떡이나 병들고 눈먼 희생제물처럼 적합하지 않은 제물을 백성에게서 받아 하나님께 드린 행위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멸시하는 일이었다고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7-8).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마땅한데(레위기 1:3,10; 3:1) 이 규례에는 신경 쓰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했나이까?’(7)라고 반박하며 하나님의 식탁(제단)을 거룩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런 곡물과 짐승을 총독에게 드려보라고 비꼬십니다(8). 한 나라의 총독도 그런 물건을 받으면 언짢아하고 받지 않을 터인데, 온 세상의 왕 하나님께 그런 쓸모없는 제물을 드리며 은혜와 용서를 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4) 불만족스러운 하나님(10-14)

➀ 거짓된 예배(10-12)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봉사와 예배에 대해서는 제단 불을 꺼 예배를 없애고 성전문을 닫는 게 낫다고 하십니다(10). 진정한 제사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속죄하고 순종과 헌신을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화목을 누리는 ‘향기로운 제사’(레위기 1:9,13)입니다. 제사나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누락되고 가식적인 행사로 남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제사장과 백성에게 소홀히 취급되고 있지만, 그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열방 중에 크게 될 것입니다(11; 이사야 45:6). 그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예배하며, 그가 명령하고 기뻐하시는 정결한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고 농작물의 피해도 있어(3:11) 형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온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시편 50:8-14).

➁ 거짓된 마음(13-14)

또 하나님의 제단과 제물을 멸시하고, 제사를 번거롭게 여기며, 훔친 것이나 병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12,13). 제물에 합당한 수컷 짐승이 있어도 흠 있는 것을 가져와 하나님을 속이고 서원하며 복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공경심도 감사도 순종도 없는 제물을 저주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아버지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온 땅의 큰 임금이며, 열방으로부터 그 이름이 경외 받을 것이라는 점입니다(14). 제사장과 이스라엘에게 있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책망을 겸허히 받고 하나님 경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어떻게 받으시는지 잘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그 이름을 멸시하고, 제사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제사장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욕보이는 일에는 한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분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참 제사가 아닌 형식적인 제사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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