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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4-02)


추가로 덧붙이는 지혜들

잠언 24장 23-34절


연인은 잠시라도 헤어져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를 그렇게 사모하고 애타게 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지혜는 성도의 삶을 형통하게 하며 실제적인 유익과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지혜를 산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지혜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다룹니다. 지혜자의 말씀에 해당하는 두 번째 모음집으로, 지혜자들이 삶에서 경험한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악인을 견책하고, 스스로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게으름을 버리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잘 지켜나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의를 이루라(23-29)

재판 상황입니다. 지혜자는 악인을 악하다 하고 의인을 의롭다 합니다. 하지만 미련한 악인은 얼굴을 보고 안면이 있는 사람이면 편파적으로 판결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서도 미움을 받겠지만. 악인을 견책하면 기쁨과 복을 얻게 됩니다. 정직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평화와 친교의 입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23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24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26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27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28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9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23-29)

재판할 때 사람에 따라 재판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사사로운 정이나 이해관계에 이끌려 악인을 두둔해서는 안 되며,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것을 권면합니다.

(1) 악인을 견책하라(23-26)

본문은 22:17-24:22에 이어 등장하는 두 번째 지혜자들의 말씀 모음집입니다. 23a절이 이를 나타내는 표제입니다. 23b절부터는 본격적인 지혜자들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먼저 재판할 때 어떤 사람에게 편파적인 판정을 내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두 번째 지혜자들의 말씀은 처음부터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은 악인을 옳다 하면 안 되며, 그렇게 하면 심지어는 이방 백성들에게서까지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25절은 이와는 반대로 악인을 견책하면 기쁨과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계속해서 공동체 안에서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참 지혜를 지녔다면, 우리는 악인을 견책하는 바른 양심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만 합니다.

23-25절까지의 이야기가 2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26절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문장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적절한 말로 대답하라’라고 한 것은 원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한 말로 대답하라’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정직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입맞춤할 수 있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한 대답은 ‘정직한 대답’입니다. 앞선 23-25절에서도 편파적인 판정을 하지 말며, 악인을 옳다 하지 말고 견책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든 언어사용이 바로 정직한 대답인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2) 바깥일을 잘 다스리라(27)

27절은 처음 보기에는 앞뒤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보입니다. 바깥일을 먼저 잘 다스린 후에 자기 집을 세우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가르침에 익숙한 우리는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7절은 공동체를 하나님의 원칙으로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가정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으면 가정의 일도 세우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 문맥에 잘 어울리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문맥이므로, 27절은 공동체의 일을 잘 돌보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악인이 되지 말라(28-29)

28절은 잠언의 독자들에게 악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거짓으로 증거하지 말고, 입술로 속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29절에서는 이웃에게 원수를 갚는 것과 같은 행동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생각은 공동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방법이 아닙니다. 참되게 정의를 세우는 것은 내가 당한 일을 갚아주겠다는 복수의 의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체를 돌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세우겠다는 참되고도 아름다운 목적을 세우고 실천할 때, 정의는 실현될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경고(30-34)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게 때문입니다. 영적 태만이요 자기 방치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입힙니다. 하지만 지헤자는 깊이 생각하고 훈계를 받아서 게으름에 빠지지 않습니다.

30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32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33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34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30-34)

게으름이 가난을 부릅니다. 지혜자는 좋은 포도원에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았는데, 이 모든 것은 농부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이를 보며 지혜자는 ‘좀 더’ 자고, 졸고, 누우려는 게으름이 가난을 강도같이 빈곤을 군사같이 불러오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 게으른 자의 밭(30-32)

30절부터 갑자기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게으름의 주제가 문맥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지 처음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30절의 내용은 지혜자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가면서 보니 포도원과 밭이 황폐해지어 덤불로 덮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 없는 자’로 번역된 원어는 ‘마음이 부족한 자로 판단력이 부족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잠언 1-9장에서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에게 주로 쓰였습니다(잠 7:7; 9:4, 26). 따라서 30절의 게으른 자는 곧 판단력이 부족하여 지혜를 버린 미련한 자입니다. 지혜 없음과 미련함의 결과, 게으른 삶에 천착하게 된 것입니다. 게으름이란 삶에서 어쩌다가 범하게 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의 뿌리에서 나오는 삶의 형태요 습관입니다.

이러한 게으름의 결과가 어떠한지가 31절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땅 전체에 퍼져 있고, 지면은 거친 풀로 덮였으며, 돌담은 무너져 있습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산업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런 게으름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입니까? 다음 구절로 계속 연결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 게으름에 대한 경고(33-34)

지혜자는 이것을 보고 한 가지 ‘훈계’를 얻었다고 말하는데, 그 훈계의 내용이 33-34절에 나와 있습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누워 있자고 하면 빈궁이 강도처럼 찾아와 궁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 33-34절은 잠언 6:10-11에서 미리 다루어진 잠언과 동일합니다. 6장에서는 부지런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개미에게 가서 부지런함, 문제 해결을 위한 준비성을 배우라는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서 게으름에 대한 경고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게으름은 ‘지혜를 버린 결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30절의 ‘판단력이 부족하다’라고 할 때 부족함이라는 히브리어 어근과 34절의 ‘곤핍’의 히브리어 어원이 ‘하사르’로서 동일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 없음과 게으름이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력이 부족하여 지혜를 버리고 결국 미련하게 된 자는 게으름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 없음의 결과로 게으름에 빠짐이 오늘 본문 전체의 문맥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까? 바로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잘못’이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30-34절의 게으름은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를 먼저 돌보고 자기 일을 돌보라고 할 정도로, 공동체를 세우고 그 안에서 하나님 지혜의 가치를 실천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 없는 자는 이러한 일에 게으름을 부리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이 악인이 되거나 아니면 재판 중에 편파적인 판정을 내리게 되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임으로, 참 지혜자가 되어 공동체를 하나님 지혜의 말씀으로 돌보고 바로 세워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혜자의 말씀을 듣고 지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 복을 받고 성공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돌보고, 억울함을 당한 자들을 도와주며,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세워지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서 참된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문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고난 중에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늘 사모하여 지혜롭고 형통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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