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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1-01)


두 증인의 최후 승리

요한계시록 11장 1-13절


오늘날은 교통의 발달로 인해 점점 전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습니다.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비행기들이 아무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항로를 따라 운항합니다. 비행기는 이륙하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 비행기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가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0-11장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적 사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본보기가 11장에 두 증인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상황에 놓입니다.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처럼 권능을 받아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짐승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우상숭배자들은 기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ㄴ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을 보고 우상숭배자 중에 남은 자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성전을 측량(1-2)

종말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이며 사회악이라는 오해가 팽배해집니다. 점점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절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2)

11:1-13은 두루마리 계시(12-14장)의 축소판입니다. 두루마리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가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 단락을 요한의 나머지 환상들과는 두렷하게 구별되는 형식상의 독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장을 인유한 11:1-2은 계시록에서 유일한 상징적 행동으로 예언합니다. 에스겔 4장과 다니엘 11장을 인유한 11:3-13 환상 해석이 아닌 이야기식 예언으로, 비유를 통한 해석입니다.

(1) 성소와 제단 측량(1)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팡이처럼 생긴 갈대를 주면 성전과 거기서 경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사용한 갈대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측량용 자입니다(에스겔 29:6;40:5). 성전 측량은 에스겔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선지적 사역을 위임받은 후(에스겔 3장) 그의 예언 매시지를 구현하는 상징적 행위를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선지적 사역을 위임받은 후에 성전 측량과 같은 일종의 ‘상징적 선지적 행위’를 시행합니다.

(2) 성전 바깥뜰은 짓밟힘(2)

‘성전과 제단 및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은 그들이 보호받음을 상징하고, 반면 측량이 안 되는 성전 바깥마당은 보호받지 못함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관심은 참 유대인(2:9;3:9),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있으므로, 성전은 제사장 백성인 교회와 연관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제사장으로 언급됩니다(1:6). 우선 성전과 바깥마당은 참 성도와 형식적 성도를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보호를 받지만,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은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성전과 바깥마당이 동일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성전이 측량된 것은 교회가 내적으로 보호받음을, 바깥마당이 측량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외적 환난에 노출됨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해석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종말론적 박해를 비켜 갈수 없음을 말합니다. 바깥마당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짓밟힐 것이라는 말은 교회가 받을 핍박을 나타냅니다. 마흔두 달의 기간도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돼지 같은 부정한 동물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시기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에 해당하는 마흔두 달이었습니다(다니엘 7:25;12:7). 따라서 마흔두 달은 종말에 임할 극심한 박해를 가리키는 상징적 수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증인의 예언과 권능(3-6)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은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할 것입니다.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최후의 승리는 아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최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깐 사탄에게 져서 늘 패배자처럼 살지 말고 마음에 힘을 내어 승리자들처럼 살아가고 복음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3-6)

복음을 절할 때 그것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대치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증인이 행한 놀라운 이적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두 증인의 증언(3-4)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두 증인은 1260일을 예언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마흔 두 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마흔 두 달 동안 교회는 능동적으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두 증인은 중인으로서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중인이 둘이라는 것은 자격을 갖추었음을 상징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증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증인 혹은 세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신명기 17:6;19:15). 베옷은 이사야와 선지자가 입던 옷입니다(이사야 20:2).

‘두 증인’은 또한 ‘두 감람나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등잔대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에 대해 말하는 스가랴 4장과 연관됩니다(스가랴 4:3). 여기에서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학개 1-2장; 스가랴 4장),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과 왕 같은 역할을 하는 두 증인, 즉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불립니다(1:6;5:10). ‘두 증인’은 ‘두 촛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므로(1:20), 두 촛대인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의 권능(5-6)

권세를 받은 두 증인이 예언하는 동안 누구도 그들을 해하지 못합니다. 두 증인에 대한 묘사에는 엘리야의 이미지와 모세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리는 것과 그들에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열왕기상 17:1; 열왕기하 1:10,12). 두 증인이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과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는 것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연상시킵니다.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의 권세를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두 증인의 죽음(7-10)

고난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교회가 얻을 영광은 곧 주님이 받으신 영광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고, 마치 예수님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 참 증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성실하게 계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7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7-10)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세속의 힘에 의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적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원수의 공격이 강할수록, 우리에게 반드시 보장된 영생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두 증인은 핍박으로 순교를 당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 두 증인의 죽음(7-8)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전쟁을 일으켜 두 증인을 죽인다는 것은 교회가 박해와 순교를 당함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승리하지만, 환난을 겪습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은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영직 세력을 가리킵니다. 대적들은 두 증인을 너무나 증오한 나머지 두 증인의 시체를 장사하지도 못하게 막고, 오히려 축제를 즐긴다. 사흘 반이라는 기간은 3년 반이는 박해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의 수치(9-10)

두 증인의 시체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 불리는 큰 성, 곧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의 길에 방치될 것입니다.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죄악의 도시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여 재앙을 받은 나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표현에 근거해 큰 성을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큰 성은 로마를 가리킵니다(17:18). 신약성경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예루살렘과 로마는 완전히 상호배타적인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두 증인의 부활(11-13)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받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그들은 가장 불쌍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약속인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세상의 어려움은 잠깐이지만, 내세에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난을 대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1-13)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듣고 믿는 자들이 구원 받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주님의 몸인 교회는 고난을 당합니다. 두 증인은 세상의 멸시를 받고 순교를 당합니다. 성도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1) 두 증인의 부활(11)

세상 사람들이 만끽하는 축제는 단기간, ‘3일 반’에 끝날 것입니다. 이 말은 증인들이 짧은 기간만 수치를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3일 반’은 증인들이 힘 있게 증언한 1260일에 비하면 대단히 짧은 기간입니다. ‘3일 반’이 지나면 세상 사람들이 증인들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3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가 그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가 하나님의 영의 기운으로 살아나 거대한 군대가 되었듯이 말입니다(에스겔 37:10).

(2) 두 증인의 승천(12)

요한은 여기에 두 증인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용을 첨가합니다(12a). 사흘 반 후에 두 증인은 부활하고 승천합니다. 두 증인의 부활로 인해 대적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두 증인은 원수들의 목격 하에 승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증언 사역을 인정하셨음을 암시합니다.

(3) 열방이 주께 돌아옴(13)

큰 지진으로 인해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사람 7,000명이 죽는 것은 상당한 피해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참 회개를 의미하는지, 단지 두려움의 표시인지에 대한 해석은 평평하게 갈립니다. 14:6~7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표현은 참 회개를 의미하므로, 여기에서도 참 회개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 타당해 보입니다. 둘째 화가 지나갔으나 셋째 화가 속히 올 것이라는 진술은 여섯째 나팔 재앙이 끝났고 일곱째 나팔 재앙이 곧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9:21에서 끝났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어떤 영광을 받으셨던가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대로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보면 결국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이 광야와도 같은 인생길을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걸어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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