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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5-01)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

신명기 4장 44절-5장 10절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듣고 배워합니다. 배워야할 때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시간이 많아지면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성경을 보고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될 수 있는 데로 한 살이라도 어려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도록 그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으로 빚져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이 설교는 여기 5장에서부터 28장에 이르는 길고 장황한 율법의 선포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 하는 역사적 회상과 더불어 하나님께 절대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한 모세는, 여기서 그들이 지켜야 하는 상세한 율법을 반포하기 시작합니다. 이 ‘율법’은 토라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그리고 교훈이 반복해서 ‘토라’로 규정됩니다.

 

모세가 율법을 선포한 장소(4:44-49)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직접 보고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면, 모든 사람들은 재와 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람은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새로운 창조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모세를 통해 중보자 역할을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44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45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46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47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48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 49요단 이쪽 곧 그 동쪽 온 아라바니 비스가 기슭 아래 아라바의 바다까지이니라(44-49)

 

모세는 요단강 동쪽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40년 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시 선포합니다. 왜 언약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 능력의 역사를 회고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 언약이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 즉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지나간 언약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맺은 언약이었다고도 설명합니다.

 

⑴ 선포된 율법의 근거(44)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 생활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역사적 회고는 이 율법 선포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광야 40년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깨닫게 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에’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모세가 선포하는 ‘율법’이 결코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옛 언약의 갱신이며, ‘가나안 정복’ 역시 그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과업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변함없는 명령임을 보여줍니다.

 

⑵ 선포된 율법의 내용(45)

 

모세는 이 ‘율법’을 ‘증언과 규례와 법도’로 칭합니다. 여기서 ‘증언/증거’란 신격 보장과 더불어 주어진 변치 않는 법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비롯하여 다른 책들에서 ‘에두트’는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을 가리키며(출애굽기 25:16,21; 레위기 16:13; 민수기 4:5,17:4,17:10; 참조 레위기 24: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두 돌 판을 자주 ‘증거판’(증거의 돌판들)이라 칭하셨습니다(출애굽 31:18; 32:15; 34:29). 앞서 말한 대로 ‘규례와 법도’는 단순히 율법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언과 규례와 법도’란 단순히 ‘십계명’과 이어서 반포되는 제반 율법을 가리킬 것입니다.

 

⑶ 율법이 선포된 장소(46-49)

 

신명기 1:1에 이어 다시 한 번 율법이 선포된 장소가 상세히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곳은 나중에 모세가 죽은 뒤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넓은 목포지가 펼쳐져 있던 그 땅은 아모리 왕 시혼의 영토였는데, 시혼을 물리친 뒤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은 역시 아무리 족속인 바산 왕 옥마저 물리치고 그 위쪽의 바산 땅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47절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둘 다 아모리 족속이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들이 차지한 요단 동편의 범위는 남북으로는 모압의 북쪽 경계선인 아르논 골짜기 근처의 아로엘로부터(2:36) 멀리 북쪽의 헤르몬 산까지 약 230km에 이릅니다. 헤르몬 산은 시온 산, 다른 방언으로 시룐, 혹은 스닐로 불립니다(3:9). 동서로는 폭이 들쭉날쭉한 데 오른쪽에 암몬과의 국경선으로부터 아라바 바다, 곧 비스가 산지 아래쪽의 사해까지 이르는 범위입니다. 새로이 정복한 요단 동편의 벳브올 맞은 편 골짜기에서 모세는 지난 광야 40년을 회상하며 율법을 선포하는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호렙 산에서의 언약 체결과 십계명 반포(5:1-5)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실천의 종교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새기고 감정적으로 사무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지 않으면 대신 다른 것을 듣게 됩니다. 그 들은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율법(토라)을 전합니다.

 

1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1-5)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도대로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 회중을 향해 주로 율법으로 구성된 두 번째 설교를 시작합니다. ‘토라’라는 단어를 ‘율법’으로 단언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곳에서는 근접한 단어인 ‘율법’으로 통칭합니다.

 

⑴ 율법(토라)의 실천성(1-2)

 

이제 모세가 선포하는 규례와 법도를 그들은 신중히 듣고 배우며 지켜야 합니다. ‘듣다’, ‘배우다’, ‘지켜 행하다’는 사람의 규범적인 학습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들으라, 배우라 지켜 행하라, 특히 서두의 ‘들으라’는 이후로도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강한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 시키면서 이 율법의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출애굽기 24장).

 

⑵ 율법의 현재성(3)

 

이 언약은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3)고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아닌 현재의 모세와 회중, 곧 ‘우리와 세운 언약’이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시내산 언약을 체결한 1세대가 이미 다 죽었기에 새로운 세대, 곧 제2세대가 이 언약의 주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언약의 항시적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현재 세대에게 유효하므로 과거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현재 그들과 체결한 언약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⑶ 율법의 중요성(4-5)

 

현재의 본문(1-4)은 그들이 언약을 체결한 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백성에게 대면하여 말씀하신(즉, 십계명을 들려주실 것으로 설명하는 듯 보입니다. 이 율법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0-24장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언약에 앞서 십계명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선포되었습니다(출애굽기 20:1-17). 하지만 우리는 시간 순서를 자주 무시하는 신명기의 특징을 고려해야 합니다. 언약이 과거의 고리타분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늘 현재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한 절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십계명 : 제 1계명과 제 2계명(5:6-10)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많은 종류의 피조물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다릅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짐승처럼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원리를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6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십계명, 즉 삶의 원리를 가르치기 전에, 구원의 역사,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은혜와 관계’를 잊고, ‘감사와 사랑’을 잃은 계명 준수는 자발적인 구속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속박입니다. 영광스러운 특권이 아니라 수고로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⑴ 제1계명 ‘다른 신을 두지 말라(6-7)

 

첫째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나는’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을 단수 ‘너’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단수 ‘너’는 십계명이 공동체의 질서와 삶을 위한 규약이지만, 또한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시사 합니다. 모든 백성은 각자가 이 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십계명은 이처럼 나와 너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종들의 집’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애굽 땅에서 당했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해방된 그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삶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은 해방되어 자유민이 된 그들을 위한 새로운 헌장입니다! 첫째 계명은 한 나라에 두 왕이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주의 창조주 왕, 유일하신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신들도 거짓이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땅에서 다신을 배했던 것 같진 않습니다. 고통당하던 애굽 땅에서 애굽의 신들은 그들에게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땅의 신들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온갖 풍요로움과 때에 맞는 비를 내리는 다산의 신이요 번영의 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미리 아시고 첫째와 둘 째 계명을 엄중하고 단호한 어조로 선포하십니다.

 

⑵ 제2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라(8-10)

 

모든 형상화된 신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기 말라’는 히브리어로 수동태입니다. 이것은 우상들이 섬겨지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즉 우상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유혹당해선 안 된다는 뉘앙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 숭배를 질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속 좁은 느낌을 주는 단어 ‘질투’가 인간의 정서상 너그러우신 하나님께는 안 어울려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부부간의 정절을 파괴할 때 배우자의 분을 일으키는 질투에 사용됩니다. 많은 구약의 본문들이 우상숭배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비난합니다.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죄의 앙갚음과 순종에 대한 대가인 천대에 이르는 장구한 은혜가 크게 대비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불변의 공식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먼저, 아버지의 죄의 대가인 징벌이 자동적으로 후손에게 가해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나타납니다. 죄의 공동 책임 원리가 때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로 망합니다! 그것을 신명기 24:16이 분명하게 진술하고, 예레미야(예레미야 31:29-30)와 에스겔(에스겔 18:19-22)이 재차 확인해 주었습니다. 사실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징벌을 받는 이유는 자신들도 아버지와 동일한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6:40). 그러나 아버지의 길을 거부하고 바른 길을 갔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떠난 히스기야; 아몬의 아들 요시야; 고라의 자손들, 고라의 후손들은 그리하여 큰 복을 받아 성전의 음악 맡은 자들이 되었으며, 많은 시편을 남긴 믿음의 가문으로 세워 졌습니다. 반대로 사무엘의 아들들과 같이 신문으로 세워 졌습니다. 반대로 사무엘의 아들들과 같이 신실한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패역의 길을 간 아들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죄의 공동 책임의 원리는 구약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다. 이 원리는 세대 간에도 적용되어 후손들은 조상의 죄를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레위기 26:40). 그리고 당대의 범죄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은 항상 공동 책임의 짐을 졌습니다. 여기에는 어린 아이라고 제외될 수 없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가혹해 보일 수 있으나, 죄의 독성은 모든 세대와 계층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후손들이 조상의 죄로 인해 3-4대까지 심판을 받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조상의 죄에 동참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그 사슬을 끊는 자는 그 순간부터 믿음의 가문을 세워나감으로써 그 복이 대대손손 흘러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은 자들로 주인이 바뀐 자들입니다. 구원과 해방은 새로운 주인을 통해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 거리낀 것이 있으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원한 중보자, 모세의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외하도 다른 진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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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4-02)

 

 


우상 제작을 금하고 경배를 금함

신명기 4장 15-31절


과거에 술이나 담배를 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었다가도 과거 비슷한 환경이 되면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만 섬기던 사람들은 우상 숭배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하나님만 섬깁니다. 하지만 타 종교를 섬겼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과거 종교를 회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옛 종교로 다시 돌아간 경우들도 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의 체험을 상기시키고 하나님께서 가장 준엄하게 금지하신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강조하면서 경고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첫째 계명은 각종 우상을 금지하는 둘째 계명에 의해 구체적으로 강화됩니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백성들을 구출하셨는지 요약해서 설명한 뒤 그 땅에 들어가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의 우상들에 대한 금지입니다.

 

우상 제작과 숭배 금지(15-24)

진정한 앎은 개방하려는 마음, 배우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자유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까지도 통제의 대상이 됩니다.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번 거기서 거기인 하나님만 만나려고 합니다.

 

15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6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17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19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20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21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22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5-2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조심해야할 것이 있는데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가나안에 널려있는 우상들을 하나님 대신이나 하나님과 함께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바꾸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나무나 돌에 새긴다면 아무리 그 돌이나 나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열심히 경배하고 열정적으로 예배한다고 해도 것은 우상숭배이니 절대 그것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교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철저히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⑴ 인간, 생물, 자연물의 우상화를 금지함(15-19)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 산에 머물며 하나님의 임재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짙은 구름, 강한 불과 화염, 우렛소리와 신령한 나팔 소리와 같은 장엄한 현상들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으며 중요하게는 직접 자신의 음성으로 반포하여 십계명을 듣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다양한 신적 임재의 현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어떠한 ‘테무나’도 보여주지 앓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런 테무나로 표현하거나 제작하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주변 세계에 존재하던 수많은 형상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① 사람의 형상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의 형상이든 여자의 형상이든 우상으로 숭배하기 위해 사람의 형상물을 제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라거나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집트나 바벨론, 로마 제국과 같이 고대에는 제국의 군주들과 권력자들이 자신들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형상물을 전국에 세워 백성들이 숭배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 숭배도 금지하십니다. 특별히 ‘자기를 위해’(원뜻은 ‘너희를 위해’) 그런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즉, 우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내적 위로와 평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한 ‘만들어진 신’입니다.

 

② 형상화하여 숭배

여기에는 세 영역으로 구분된 자연계의 모든 생물들이 포함됩니다. 구약의 우주관은 삼중적입니다(창세기 1장; 레위기 11장), 하늘, 땅(지상), 물(수중), 하나님께서 각자의 영역에 맞게 고유한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하늘에는 각종 새, 땅에는 여러 육상 동물들과 곤충과 기는 것, 물속에는 각종 물고기와 기는 것.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수많은 생물들을 형상화해서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우람한 짐승뿐 아니라 자그마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신으로 격상하여 대접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공중의 매는 이집트에서 호루스(Horus) 신의 형상이었으며, 육상의 소는 여신 하토르(Hathor)의 현현으로 숭배되었고, 이 것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는 것들도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이집트에서는 뱀이 가장 보편적으로 신성시되어 수많은 벽화에 그려져 있고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수많은 뱀 장식들이 남아 있습니다. ‘땅 아래 물’이란 지하 세계의 물, 즉 지하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유명한 물고기 형상의 신은 블레셋의 바알이라 할 수 있는 다곤(Dagon)입니다.

 

③ 신격화된 자연물

특히 하늘의 천체들인 해와 달과 별은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태고부터 신으로 숭배되어 왔습니다. 태양은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신이었으며, 달은 갈대아 우르에서 도시국가의 신으로, 중요한 별들도 하급 신들로 숭배되었습니다(5장을 보라). 구약, 특히 창세기 1장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신으로 숭배하던 그런 자연물들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 배정했다고 처음부터 선언합니다. 이런 천체의 비신화화는 종교학적인 관점에서도 놀라운 사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 자체로 구약의 여호와 신앙이 인간의 종교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계시에 따른 것임을 시사합니다.

 

⑵ 가나안 땅에서 우상숭배를 금지함(20-23)

 

애굽은 그들에게 쇠 풀무불과 같은 땅이었다. 풀무불이나 용광로는 성경에서 종종 고난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됩니다(열왕기상 8:51; 이사야 48:10; 예레미야 11:4; 에스겔 22:20-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낱 노예 민족이었던 미천한 백성을 선택하셔서 극적으로 구출해 내시고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정작 자신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아파합니다. 죽음이 임박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더 이상 그들을 지도하고 이끌 수 없는 운명이기에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그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신신당부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히 금지하신 우상숭배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상의 땅 애굽의 모든 우상들을 격파하여 구출해 주시고 언약을 맺으신 언약 백성입니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민족의 풍습과 규례를 따라 그 땅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고 형상들을 제작해서 하나님 자리에 놓는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한 징벌과 회복의 은혜(24-31)

인간은 악한 존재라서 무엇이든지 통제하려고 합니다. 알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 무엇인가를 알면 그것으로부터 휘둘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나님다우실 수 있도록 자유를 드리는 것이 인간이 할 최고의 경배입니다. 그 반대가 우상 숭배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입니다.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27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28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29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30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24-3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같이 열정적인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싶지만, 정작 만나면 죽을 것 같은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분을 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어서 놀랍니다. 품고 있으면 대단히 위험한 분입니다.

 

⑴ 그 땅에서 우상을 섬긴 대가(24-28)

 

모세는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각인시킵니다.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시며 질투 하나님’입니다. 이 불은 ‘삼키는 불’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또한 꺼지지 않는 불을 동반하시는 분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출현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구름 속에서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그런 일체형 구름이었습니다(출애굽기 40:38).

시내산 정상에서는 그 신령한 불이 구름을 뚫고 솟구쳐 나왔으며, 간혹 심판의 불로 뿜어져 나와 불순종한 백성들을 소멸했습니다(레위기 10장; 민수기 16장). 만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백성들이 그 땅의 우상들을 섬기고 제작한다면 이 불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란 단순히 우상과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묘사하는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 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그 땅에서 사느냐 입니다. 만일 그들이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걸으며 각종 신상들을 제작하고 그것들을 섬긴다면, 그들은 즉각 망할 것입니다. 모세는 천지를 증인으로 삼아 이것을 확고한 사실로 못 박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그 땅에서 머지않아 전멸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온 사방의 땅으로 그들을 쫓아내 남은 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26). 더욱 두렵게도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으로 끌려간 뒤, 생소한 그 민족들의 신들과 그것들의 우상과 신상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내쫓긴 뒤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냄새도 맡지 못하는 죽은 돌과 나무로 만든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신세로 전락할 것입니다.

 

⑵ 회개와 약속된 회복의 은혜(29-31)

 

하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베푸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속적이지 않으며 결국 그분은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지키십니다. 심판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영원합니다. 만일 끌려간 이방 땅에서 우상들의 울타리에 갇힌 그들이 하나님을 다시 절실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찾고 또 찾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은혜, 자비하신 그분의 회복의 은혜를 맛볼 것입니다. 모세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동사들을 나열함으로써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확증합니다.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멸하지 아니하시며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의 상황을 되새기게 함으로 지금부터 모세가 말하려는 율법은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각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율법의 신적인 권위를 강조하기 위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을 읽고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참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와 섬김은 모든 인간에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따라서 잠언의 기록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7)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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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4-01)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신명기 4장 1-14절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장 좋은 점수를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강의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잘 듣고, 과목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무슨 과제인가, 그리고 시험이 어떻게 출제될 것인가란 사실들을 잘 알 때, 좋은 성적을 최고의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리엔테이션 시간입니다.

 

신명기 1-3장에서 모세의 역사적 회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난 40년의 광야 회상은 사실 4장에서 시작되는 신명기 율법의 선포와 설교와 배경이 됩니다. 이제 그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 율법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 율법의 백성으로서 순종하는 삶은 살아야 합니다. 이 교훈을 위해 모세는 직전에 있었던 바알브올 사건, 곧 모압 땅에서 행한 성적 타락이 수반된 집단적 배교 행위를 상기시킵니다.

 

율법에 순종하라는 명령(1-2)

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관심은 자녀들이 잘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서 자녀들에게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받은 땅을 주 안에서 누리는 방법은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신 풍성한 생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누리는 길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1-2)

 

모세는 계속해서 광야 2세대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광야 40년 역경의 세월에 대한 역사적 회상을 마쳤습니다. 그 뒤에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율법을 준수해야할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지극히 단순한 교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성하여 실천할 내용을 ‘규례와 법도’라고 부릅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키는 동의어로서 ‘규례와 법도’는 강조를 위한 동어반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례와 법도’를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두 번째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해야 합니다. 듣고도 준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약 1:22).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면 만일 백성들이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준행한다면, 그들에게 생명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또한 약속의 가나안 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 사실은 선포되는 율법을 자의적으로 변경하고 왜곡해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의도와 생각이 삽입된 거짓 율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게 되면, 그만한 합당한 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계 22:18-19).

이 말씀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성경적인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나머지 것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바알브올 사건의 교훈(3-4)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모든 생명의 주제이십니다(창 1:1).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생존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4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3-4)

 

모세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깨닫도록 광야 기간 막바지에 발생한 바알브올 사건을 끄집어냅니다(민 25장). 이것은 불과 몇 달 전에 발생한 비극적 사건입니다.

모세는 당시 불순종했던 백성의 뻔뻔스러운 민낯을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기시킴으로써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그 일로 범죄에 가담했던 백성들은 모두 멸망했고, 현재 모세의 설교를 듣는 회중은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기에 살아남았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생명의 길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서 상세히 설명된 ‘바알브올의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민수기 22-24장에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넘긴 바 있습니다. 발락이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 발람을 초청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직후 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바알브올은 지명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본문에서 ‘바알브올을 따르다.’란 표현에서도 확인됩니다. 바알이란 히브리어는 ‘주’란 뜻과 함께 고유명사 ‘바알’ 둘 다 가능합니다. 모압의 국가신은 바알이 아닌 그모스이며(민수기 21:29; 열왕기상 11:7,33; 예레미야 48:7,13,46), 따라서 그모스의 별칭이 바알브올이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어 바알이 일반적 의미의 ‘주인’이 아닌 가나안의 맹주 신 ‘바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그들은 그모스가 아닌 바알을 별도로 숭배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견해는 바알브올은 브올에서 섬긴 모압의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 싯딤에서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과 집단적으로 성적 음행을 범했는데(민수기 25:1), 그것은 브올의 신, 즉 모압 신과 연루된 제의적 성관계였을 것입니다. 발람이 꾀를 내서 주동한 사건이었습니다(민수기 31:8,16). 그 범행으로 하루 동안 24,000명이 죽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무리의 책임자들과 주동자들을 즉시 처벌해야 재앙이 멈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25:4-5). 그들은 백성의 수령들(아마 지파장들이거나 주요 지도자들)과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 수령 나라들이 이 음행 사건을 주도했으며, 많은 백성들이 가담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집단 사망한 사람들이 모두 ‘바알브올을 따른 사람들’이라고 평가합니다.

 

민수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상황이었는데,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주도하여 주요 책임자들을 처형함으로써 그날 염병이 그쳤다고 보고합니다. 모세는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견고히 ‘하나님께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합니다(4). ‘붙어 있다’라는 동사는 하나의 덩어리를 구성하도록 견고히 결속된 상태를 의미하며,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동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창세기 2:24). 이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하나님과의 결혼 관계, 즉 언약 관계에 충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순종하는 큰 나라의 백성이 되라(5-9)

역사를 잊으면 힘든 역사는 반복되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 세대들에게 교육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시 어려움이 반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우리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입니까!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을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5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5-9)

 

모세는 현재 자신의 설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다시 반포되는 율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미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왔다고 밝힙니다. 그는 출애굽기 19장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하나님께 율법과 계명을 전달받아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십계명(출애굽기 20:1-18); 언약의 율법(소위 ‘언약서’, 출애굽기 20:22-23:33); 성막법(출애굽기 25:1-31:18); 레위기법(레위기 1-27장); 민수기의 제반 율법들. 모세는 이 율법들을 하나님께 받은 뒤 기록했으며(출애굽기 24:4; 34:27; 참조. 신명기 27:3; 28:58), 율법의 훈련은 광야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제 들어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의 순종의 삶을 위해서입니다(5).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과 구별되는 백성이 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참된 지혜와 지식으로 이끄는 삶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온전히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만국 앞에서 복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도 나름 고도의 체계적인 법전과 윤리적 지침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민족들이 ‘이 큰 나라 사람들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라며 이스라엘을 칭송할 것입니다. 지혜(호크마)란 삶의 관조를 통해 깨달은 통찰력과 분별력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식으로 번역된 ‘빈’ 또한 단순한 정보의 습득을 의미하는 지식(knowledge)이 아닌 지식의 해석과 바른 판단력을 가리키는 단어로 지혜와 거의 동의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과 생명의 길을 분별하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거짓된 죽은 신들과는 다른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백성들이 기도할 때 가까이 계셔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신들 중 그 어떤 신도 여호와 하나님처럼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백성 가운데 가까이 계시지 않습니다.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면서 백성들은 신중히 그리고 힘을 다해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지난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들들과 후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잊지 않게 해야 합니다. 모세는 무려 네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가며…지키라…잊어버리지 말라…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9).

 

호렙 산(시내산)에서 들은 십계명과 받은 말씀(10-14)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만 역사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만 약속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 우리 자손들의 하나님도 되시고(9), 오늘 우리 하나님도 되십니다(10-13).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곧 오늘 우리를 통해 그분의 언약을 성취해나가십니다.

 

10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11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12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13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14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14)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서 백성의 귀에 직접 십계명을 선포하여 들려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직접 백성들의 귀에 선포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근간인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시내산 정상 부근은 신령한 구름이 뒤덮인 채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고 강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곳에서 우렛소리가 들리고 신령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임재에 동반되는 현상들입니다. 그들은 시내산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오직 음성만 들었으나 아무런 형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반포하신 후 준수할 것을 명령하시고 친히 두 돌판에 새겨서 모세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이 십계명을 특별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 ‘언약’은 약속입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이자, 동시에 백성 편에서의 약속으로 서로 간의 준수 사항을 지키겠다는 다짐입니다. 십계명이 요구하는 대로 백성은 순종을 약속하고, 하나님은 순종에 따른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유일하게 돌판에 새겨질 만큼 십계명은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십계명 돌판에 대해서는 신 5:22와 9:9 이하를 보라). 십계명이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백성들의 귀에 반포되어 그것이 두 돌판에 기록된 후, 하나님께서는 추가적인 규례들과 법도들을 모세에게 전달하여 교훈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서’라 일컫는 출애굽기 20:22-23:31의 언약 법전입니다.


십계명은 제국의 종으로부터 해방된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말씀의 종이 되어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십계명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돌아봅시다. ‘외형적으로 큰 것을 추구하는가,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을 추구하는가?’ 십계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정치 행위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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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3-02)

 


이제 떠나야 하는 모세

신명기 3장 23-29절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얼핏 보면 차별하시는 듯 보입니다. 더 많이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고생만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차례로 격파한 뒤 드넓은 요단 동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 땅은 나중에 논란 끝에 두 지파 반에게, 곧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해 줍니다. 우여골절 끝에 우선 르우벤과 갓 자손에게 모압과 국경을 이루는 남쪽의 아르논 골짜기 근처 아로엘로부터 북쪽으로 길르앗 산지 절반을 할당했습니다.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의 분배(12-17)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그 나라의 복락을 누리고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으며, 이미 그 나라의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참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무언가를 허락하신 복도 있습니다. 먼저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있습니다.

 

12그 때에 우리가 이 땅을 얻으매 아르논 골짜기 곁의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 산지 절반과 그 성읍들을 내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주었고 13길르앗의 남은 땅과 옥의 나라였던 아르곱 온 지방 곧 온 바산으로는 내가 므낫세 반 지피에게 주었노라 (바산을 옛적에는 르바임의 땅이라 부르더니 14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경계까지의 아르곱 온 지방을 점령하고 자기의 이름으로 이 바산을 오늘날까지 하봇야일이라 불러오느니라) 15내가 마길에게 길르앗을 주었고 16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길르앗에서부터 아르논 골짜기까지 주었으되 그 골짜기의 중앙으로 지역을 정하였으니 곧 암몬 자손의 지역 얍복 강까지며 17또는 아라바와 요단과 그 지역이요 긴네렛에서 아라바 바다 곧 염해와 비스가 산기슭에 이르기까지의 동쪽 지역이니라(12-17)

 

요단 동편 땅에서의 싸움과 승리는 이제 분배로까지 이어집니다. 분배 과정 속에 심각한 우려와 논쟁이 있었지만, 가축이 많았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먼저 요단 동편 땅이 분배됩니다. 그러나 요단 동편 땅을 먼저 차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에 뒷짐 지거나 나몰라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요단 동편 땅을 우선 르우벤과 갓 지파의 몫으로 할당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받은 길르앗 산지 절반은 아마도 얍복 강 남쪽을 가리킬 것입니다. 앞서 2:36에서 살핀 대로, 길르앗은 넓은 의미로 요단 동편 전체를 가리키나, 좁게는 얍복 강 근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 그것이 요단 동편 전체를 의미하면서 바산 들판도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길르앗 산지 절반이 우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할당되고, 나머지 절반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것입니다. 길르앗의 북쪽 절반은 바산 땅이며 중심 지역은 아르곱이었습니다(3:4). 르우벤과 갓이 각각 어느 지역을 할당받았는지는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의하면, 모세는 아모리 왕 시혼을 격파한 뒤 곧바로 야셀 지역으로 정탐꾼을 보내 탐문을 마치고 그곳의 모든 아모리 성읍들을 함락했으며(민수기 21:32) 여세를 몰아 바산까지 격파했습니다. 야셀은 암몬과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길르앗에 포함된 야셀은 마찬가지 로 넓은 지역으로 좋은 목초지였습니다(민 32:1). 르우벤과 갓의 요구대로 갓은 야셀 지역을 중심으로 땅을 받았고 르우벤은 그보다 남쪽의 얍복 강 주변의 길르앗 땅을 분배 받습니다.

 

13절 하반절과 14절은 또 하나의 설명을 위한 삽입구입니다. 이것은 어떤 연고로 바산 일대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되었는지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의 자초지종 또한 민수기 32:33-42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산 또한 과거에 ‘르바임의 땅’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기골이 장대한 바산 왕을 필두로 강력한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어떤 영웅적 혈족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산 왕 옥과 충돌할 때 독자적 인 대범한 군사 행동으로 북쪽의 바란 일대의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므낫세 지파의 야일이란 인물과 마길의 자손들이었으며, 노바라는 인물도 이 공헌자들에 포함됩니다(민수기 32:39-42). 우선 야일은 최북단 지역을 점령하여 그곳의 지명을 자신의 이름을 따라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이라 지었습니다(민수기 32:41). 모세는 마길에게는 길르앗을 주었습니다(15). 마길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마길 혈족입니다. 므낫세 지파 중 마길 자손들이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 같습니다. 민수기 26:29에서 확인된 바 마길은 아들 없이 딸만 남기고 사망한 슬로브핫의 조상입니다. 아마도 마길의 후손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에 거주하던 아모리 인들을 쫓아내는 업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즉 마길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스라엘은 길르앗을 침공하여 그곳을 빼앗았으며(민수기 32:39), 그 후 그들은 모세에게서 길르앗에 대한 합법적 점유를 승인받은 것입니다(민수기 32:40). 15-17절에서는 이 요단 동편의 땅 분배를 간략히 요약해서 총정리하는데, 여기서 는 다시 길르앗이 길르앗 북쪽, 즉 바산 땅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길 가문으로 대표되는 므낫세 지파(사실은 반 지파)에게 ‘길르앗’이 할당되고(바산 지역을 가리킨다),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는 길르앗으로부터 아르논 골짜기까지 주어지는데, 그 경계가 상세히 설명됩니다(16-17). 아르논 골짜기 중앙으로부터 북쪽 경계는 암몬 족속의 땅이 왼편에 펼쳐진 얍복 강이며(16), 그 일대의 아라바 광야와 서쪽의 가나안과 국경을 이루는 요단강까지 이른다. 더 남쪽으로는 긴네렛(갈릴리)에서 염해로 불린 아라바 바다(오늘날 사해)와 그 일대의 비스가 산기슭을 포함합니다. 이 범위 전체가 요단 동쪽 지역으로 불립니다.

 

두 지파의 요단 서편 전쟁 참여(18-22)

옛 사자성어에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새롭거나 값나간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나 욕심은 누구나 흔히 감정의 하나님이므로 크게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욕망보다는 절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8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19너희에게 가축이 많은 줄 내가 아노니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내가 너희에게 준 성읍에 머무르게 하라 20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21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22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18-22)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형제들과는 화친하고, 적들과는 싸우면서 통과했습니다. 헤스본 왕과 바산 왕을 격파하고 그곳을 통과하여 요단 강 동편에 도착했습니다.

 

(1) 가나안 동편을 차지한 두 지파 반(18-19)

 

요단 동편 지역을 정복한 후에 가나안 동편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가지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축이 많았던 르우벤과 갓 지파는 광활한 가나안 동편 땅, 목초지가 펼쳐진 그 땅을 자신의 터전으로 욕심내면서 모세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다른 지파들은 그들을 화를 내며 비난하고, 그 제안을 거부하게 됩니다.

모세와 다른 지파들이 거부한 이유는, 첫째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빠지려 한다는 의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런 이기적인 욕심은 공동체의 결속력에 큰 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염려했던 것입니다(민 32:1-7). 지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부에서 김을 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전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정복 전쟁이 다 끝날 때까지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합니다.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에게서 약속을 받아냅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는 가나안 전쟁에 지파들의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선봉에 서고, 가족들과 가축을 자신들이 차지할 요단강 동편 성읍에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자녀들과 아내, 그리고 가축이 요단 동편의 남은 잔당들에 의해 공격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안전 조치를 하고 전쟁에 출정하라는 지시입니다(민 32장). 이러한 안전 조치는 사실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먼저 내놓은 협상안이었습니다(민 32:16-17, 24-26). 모세는 다시 한 번 학실하게 집고 넘어간 갑니다.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먼저 전투에 설 것과 그들의 약속대로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 조건에 걸었습니다. 모세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점유한 뒤 형제 지파들에게도 땅이 분배되어 안식을 얻게 되고 나서, 요단 동편의 기업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20).

 

(2) 이스라엘에게 용기를 준 모세(21-22)

 

다시 르우벤과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들로 인해 용기가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위임식을 마친(민 27:18-23) 사령관 여호수아의 용기를 북돋습니다.

첫째는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21)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ㅁ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라고 권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싸우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전쟁관) 그래서 모세는 강한 어조로 연설합니다. 하나님께서 막강한 아모리인의 두 왕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처럼, 요단 서편의 가나안에서 만날 여러 나라들(민족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23-29)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난 자리까지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일수록,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을수록 적절한 시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기를 더욱 어렵습니다. 본문에는 모세에게도 그 일을 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3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23-29)

 

모세는 120세의 나이로 죽는 순간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고 심지어 눈도 흐려지지 않은 상태로 충분히 정상적인 직무를 수은 상태로 충분히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신 34:7)

모세는 요단 동편의 상황이 마무리된 직후, 자신이 드렸던 개인적 기도와 더불어 광야 40년 역사에 대한 회고를 마무리합니다. 그의 탄원 기도는 애절했습니다. 그토록 소망했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발, 제가 건너가게 하소서’는 그의 간절한 심정을 잘 반영합니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가서 아름다운 약속의 땅, 그곳의 산과 레바논의 들판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눈앞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거듭된 불순종과 반역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진노하여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긴 하나, 민수기는 모세 자신의 잘못을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의 실수 또한 백성의 반역에서 비롯된 것이고, 백성의 죄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 또한 컸기에, 신명기에서 모세의 대략적인 회고가 역사적 왜곡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혹하리만치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셨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 대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 희미하게나마, 그리고 일부나마 그 약속의 땅을 멀리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비스가 산은 아바림 산맥의 북쪽 산지를 총칭하는 명칭으로서 비스가 산 일대에 모세가 묻힌 느보 산이 존재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나 그 땅을 바라봅니다. 아마도 ‘나로 건너가게 하소서’라는 모세의 탄원과 그가 죽음 직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땅을 바라보는 이 장면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비장하고도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한 번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강하게 독려하고 용기를 북돋으라고 명하시며 대화를 마치셨습니다.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모세가 연설하고 있는 현재도 벳브올에 머물러 있으며, 여기서 모세가 고별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결국 이곳에 모세가 묻힙니다(34:6).


많은 성도가 가난하고 힘들 때에는 주님을 잘 섬기다가 조금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거기에 안주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곤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짖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그 사명을 더 잘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깨달아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은혜를 누리되 절대 안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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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3-01)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 승리

신명기 3장 1-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시키신 훈련이 무엇입니까? 광야의 특징은 결핍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 훈련의 목적을 모세를 통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라고 하셨습니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때, 삶의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에서 이스라엘이 벌인 전투의 마지막은 바산의 옥과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담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행해지는 하나님의 전쟁은 승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산은 거인 민족인데 그들과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크고 높은 사람들과 성벽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바산 왕 옥과의 전쟁(1-2)

사람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실수로 인한 두려움, 현재 상황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예측 불허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두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지침이 되고 기준이 될 때, 그 두려움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삶에 자신감을 얻는 것은 사소한 승리는 지속적으로 해나갈 때 큰 승리를 만들어냅니다.

 

1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고자 하는지라 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 하시고(1-2)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일찍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두려워서 돌아서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훈련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훈련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 점령하는데 싸워야할 적들 앞에서 두려워하면 전쟁을 시작조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40년을 다 채우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가나안 까지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1) 전쟁을 준비한 바산 왕 옥(1)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싸워야할 대상과 화평을 이룰 대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 중에 싸워야할 대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이었습니다. 이미, 헤스본의 시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 땅에서 얻은 길르앗은 여전히 전쟁터로 남아 있었습니다(신 2:26-37). 그것은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시혼의 영토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아모리 족속인, 바산의 옥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인 바산으로 돌이켜 올라갔습니다(1). 그곳 왕인 옥은 이미 헤스본과의 전쟁 소식을 듣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인으로 지금까지 전쟁의 경험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산 왕국은 서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암몬과 접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헤스본의 시혼이 다스리고 있었던 미쇼르 지역(아르논 골짜기에서 얍복 시내까지)에 접해있는 길르앗(얍복 시내에서 야르묵 강까지)이 있었고, 북쪽으로 바산(야르묵 강에서 헤르몬산까지)이 있었습니다. 바산의 남쪽에는 살르가와 에드레이라는 국경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에드레이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남동쪽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살르가는 에드레이보다 더 북동쪽에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헤르몬 산에 이르렀습니다(8). 옥의 바산 영토는 빽빽한 숲과 생산력이 강한 고지대로서 떡갈나무와 가축들로 유명했습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2)

 

바산 왕 옥은 전쟁에 능숙하고 늘 승리를 해왔던 왕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자신이 늘 전쟁에서 승리했던 능숙한 땅인 에드레이Edrei로 유인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노정을 통해 에드레이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야셀이 바산과의 전투의 시작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민 21:32). 그 다음 목표가 에드레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바산 왕 옥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그도 거인 족의 후예였던 것 같습니다.

 

시혼과의 전투에서 주셨던 확신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옥과의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2)는 말씀으로 격려하십니다. 시혼 왕을 물리쳤을 때와 같이 ‘담대하라’고 명하십니다.

전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2장에서 헤스본에 거주한 마모리 족속 시혼을 처리한 것처럼, 이 옥에게도 동일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산의 옥에게도 동일한 전술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승리하고 다시 돌아보면서 이야기한 일이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가나안을 향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까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해왔던 전쟁의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전쟁의 과정(3-7)

전쟁은 무기와 전력에서 승패를 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대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승리의 보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보다 더 크고 더 풍부한 것이 될 것입니다.

 

3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넘기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 때에 우리가 그들에게서 빼앗지 아니한 성읍이 하나도 없이 다 빼앗았는데 그 성읍이 육십이니 곧 아르곱 온 지방이요 바산에 있는 옥의 나라이니라 5그 모든 성읍이 높은 성벽으로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심히 많았느니라 6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 7다만 모든 가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3-7)

 

교만하면 건재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나가서 싸웠고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바산은 남김없이 무너졌고 허망하게 멸망했습니다.

 

(1) 바산 왕 옥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3-5)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헤스본의 시혼의 경우처럼 똑같이 그들을 온전히 진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전쟁으로 아르곱의 전 지역에 있는, 60개의 성벽이 높은 성읍과 그 외에 성벽이 없는 마을들도 모두 정복하였으며(민 32:33; 수 9:10; 시 135:10-11; 136:18-22), 거주민들과 도시들이 진멸에 처해졌고, 그곳에 있던 가축들과 탈취물들은 이스라엘이 소유하였습니다.

 

이제 정탐꾼들이 두려워했던 두 가지(거인 족속과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성벽) 중 하나인 ‘높은 성벽’가진 도시들도 정복해낼 수 있는 담대함과 능력을 갖게 됩니다(3b).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던 대상은 전혀 없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승리의 결과, ‘우리’의 사용, 이스라엘이 실제로 참여하는 진멸의 수행, 그리고 두려움의 소멸[‘우리에게 너무 높아 (정복하기 어려운) 요새는 없다’]과 같은 시혼과 옥과의 전투에서 나타난 병행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시혼 이야기에서는 ‘요새화된 도시들의 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옥 이야기에서는 ‘선행적인 평화제의(提議)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혼과 바산과의 전쟁해서 점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거대한 사람들과 철옹성과 같은 성들, 그리고 이스라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이 있었지만, 그들을 정복하면서 이기는 습관을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2)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5-6)

 

바산 왕 옥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너무 심했고 악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해렌 전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6b), 탈취한 물건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물로 삼았습니다(7).

 

하나님께서는 헤스본의 시혼의 경우처럼 똑같이 바산 왕 옥과 그 백성들을 온전히 진멸하였습니다. 바산 왕 옥의 나라는 남김없이 무너졌고 허망하게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전초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와 기업이 아니면 그것은 잠깐의 영화일 뿐입니다.

 

전쟁의 결과(8-11)

세상은 많은 것을 준비해야만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기며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공동체와 후손 대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증거가 됩니다.

 

8그 때에 우리가 요단 강 이쪽 땅을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헤르몬 산에까지 아모리 족속의 두 왕에게서 빼앗았으니 9(헤르몬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부르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불렀느니라) 10우리가 빼앗은 것은 평원의 모든 성읍과 길르앗 온 땅과 바산의 온 땅 곧 옥의 나라 바산의 성읍 살르가와 에드레이까지이니라 11(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아직도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길이가 아홉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니라)(8-11)

 

모세는 헤스본과 바산을 점령한 후, 그 빼앗은 땅이 얼마나 되는지 정리해 백성에게 알렸습니다. 남으로 모압과 경계를 이루는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북으로 다메섹 동편의 헤르몬 산까지, 요단 동편 땅이었습니다. 또한 바산 왕 옥이 사용하던 거대한 철 침상이 암몬의 수도 랍바에 승리의 기념품으로 남아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편에 있던 헤스본의 시혼과 바산의 옥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얻은 땅들은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 즉 미쇼르, 길르앗, 바산 지역을 가나안 땅 동편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모든 땅을 망라하였습니다. 이 모든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10).

 

여기에서는 부연설명이 두 차례 등장합니다(3:9,11), 2:11에서 각 나라마다 한 족속(르바임 혹은 에밈)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던 것처럼 9절에서는 시돈 사람들과 아모르 족속이 헤르몬 산 지역을 각각 ‘시론’과 ‘스닐’이라고 부르던 상황을 언급합니다. 이는 아마도 두 종족 사이에 헤르몬 지역을 소유하기 위한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명의 전환은 소유와 정복의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이스라엘이 이 모든 지역, 특별히 바산의 남쪽 국경도시들(‘살르가와 에드레이까지’)까지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바산 지역마저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요단 이쪽 땅, 곧 요단 동편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최남단의 모압과 경계를 이루는 아르논 골짜기부터 멀리 북쪽의 헤르몬 산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갖게 된 군사적 혹은 영토적 우월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 모든 곳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주사 기업으로 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단강 동편에서 생긴 몇 가지 선례들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요단 서편에 위치한 일곱 개의 도시국가들과의 임박한 전쟁에서 확실히 승리할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들을 정복하고 분깃을 나누는 일도 동일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2:24-25에서의 약속처럼,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의 아모리 족속들 시혼과 옥과의 전쟁을 통하여 얻은 승리로 인해 많은 나라들(특별히 가나안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떨고 근심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과 대면한 것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요단 동편 아모리 족속들과 성공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한 후의 일이었습니다(민 22장 이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많은 일들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제 장차 요단강 서편 또한 지금까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삼상 1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해서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그대로 얻은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13절에는 아마도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이었던 암몬 족속의 랍바라는 곳에 남아 있었던 르바임 족속의 생존자였던 바산의 옥의 철침대의 거대한 크기(“장이 아홉 규빗이요 광이 네 규빗”)가 언급됩니다. 거인족의 후예였던 옥의 유물의 재질과 크기는 그의 위대함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헤스본의 시혼과 바산의 옥을 제거함으로써 요단 동편에 거하던 크고 두려운 존재인 아모리 족속을 완전히 섬멸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한 자들이 바로 여호와의 영도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2:11, 20-23; 3:11,13).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놀라운 경험을 과거로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에 대해 정리하고 남김으로써, 시련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후대에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기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공동체와 후손 대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같습니다. 돈, 권력, 폭력, 성(sex)이란 거인이 우리를 삼키려고 다가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도무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을 것 같은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담대하게 살아가면, 항상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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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2-02)

 


새롭게 시작한 정복 전쟁

신명기 2장 26-37절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이방인의 사상에 오염되지 않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정결된 삶을 위하여 죄의 원인을 미리 제거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은 자신을 더럽히는 죄와 죄의 가능성에 대해서 단호하게 척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삶에 진멸되어야할 죄의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거짓말, 불평, 폭력, 도박, 게으름, 성적 탐닉 등이 있습니다. 친숙하게 동거하는 것들과 전쟁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진멸되어야할 죄의 요소들과 타협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어서 그들이 모압 국경 아르논 계곡을 넘은 후 강력한 대적인 아무리 족속과 맞선 일들을 회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 아래쪽 그레못 광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사신을 보내 아모리 왕 시혼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레못은 이미 아모리 족속의 영토로서 헤스본 왕 시혼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의 협상(26-30)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가면서 명분(名分)만으로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당사자의 동의나 합의 없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라고 주장하며, 타인과 공동체에게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과의 협상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26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30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26-3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모압과 암몬 자손들과 싸움을 금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자기 부인의 정도를 시험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비록 수적으로 우세했을지라도 그 부족들에 대하여 어떤 공격도 감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옥한 영토를 조용히 통과하자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영토를 소유로 주심으로써 순종에 대한 보답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르논 골짜기를 통과하여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진입했습니다. 이 아르논 일대는 모압과 접경 지역입니다. 국경 수비가 허술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한 뒤 북진하여 비스가 산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민수기와 상충하는 진술이 또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사신을 보낸 곳이 ‘그데못 광야’인 반면, 민수기에서는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였습니다(민수기 21:20). 이 문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비스가 산의 북쪽은 모압 광야인 반면 남쪽은 그데못 평지인데, 그곳이 넓은 의미로 비스가 산지로 간주되었을지 모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일단 그데못에서 사신을 보낸 뒤, 계속 여행하여 비스가 산에서 신신을 보냈다는 말이 충분히 성립될 수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13-19절에 아르논 계곡 도하 이후의 여행 목록을 살피면 후자의 개연성이 더 큽니다. 그들은 일단 ‘아르논 강 건너편에 진을 쳤는데’(민수기 21:13), 그곳이 그데못 광야이고 거기서 시혼에게 사신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후 14절 이하에 나온 대로 아르논 북쪽 일대의 몇 군데를 거쳐 마침내 비스가 산에 도착합니다(특히 18절의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에서 이 광야는 그데못 광야일 수 있다).

헤스본 왕 시혼과의 협상 과정 또한 민수기 21장 21절 이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혼에게 평화적 협상을 위해 사신을 보내 영토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26; 민수기 21:21). 에돔과 모압을 통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큰길로만’ 지나면서 어떤 재산상의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식량과 물을 사서 먹겠다고 제안했습니다(27-28; 민수기 21:22). 하지만 아모리 왕 시혼은 이스라엘의 통행을 거부했으며(30) 국경 방어에만 치중했던 에돔과 달리 공격까지 합니다(32; 민수기 21:23).

여기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진술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혼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시고 완고하게 하셨다는 발언입니다. ‘완강하다’와 ‘완고하다’는 이미 애굽에서 파라오에게 적용되었던 완고한 심리를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앞서 2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사람 시혼과 더불어 싸워서 그 땅울 차지하라’고 명령하신 반면, 곧바로 26절에서는 모세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의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과연 모세가 제안한 협상은 하나님의 의도였겠습니까? 우선 평화로운 협상의 시도는 명백히 신명기 20장 10절 이하의 규정에 의해서도 정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읍을 치려할 때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부하면 전쟁을 개시하여 그들을 진멸해도 됩니다(신명기 20:10-13). 흥미로운 것은 파라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모리 왕 시혼의 거친 심리는 하나님께서 시혼 왕을 ‘완강하게, 그리고 완고하게 만드신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즉, 시혼 왕은 파라오와 같은 자임이 암시됩니다. 시혼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고하게 만드시는 이유 또한 동일합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30).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기시려고 그들을 완고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전쟁을 명령하신 것이며, 아무리 족속과 그들의 왕 시혼은 단지 전쟁에 이르는 협상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 진명의 대상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호 격파와 헤렘 전쟁 수칙 준수(31-35)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 기울이고 순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무단히 노력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3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32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34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음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31-35)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믿을 만한 존재인지를 증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행보는 이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얼마나 할 말 없는 악행이고 어리석음인지 보여줍니다.

 

⑴ 시혼을 격파함(31-33)

 

협상이 결렬되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시혼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시혼 왕의 영토는 이스라엘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32). 시혼이 먼저 공격을 해왔습니다. 시혼은 야하스에서 이스라엘과 격돌했습니다. 아마 이곳은 이스라엘이 아직 느보 산에 도착하기 전에 숙영을 한 비스가 산악 지역 아래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맞선 끝에 물리쳤는데, 앞서 건너온 아르논 골짜기로부터 멀리 얍복 강에 이르기까지 아모리 인의 땅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후대의 선지자 아모스의 회고적 기록에 따르면 이때 이 지역의 아모리 족속은 백향목처럼 장대하고 상수리 나무처럼 강했다(아모스서 2:9).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그 무적의 종족을 무찌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혼 땅의 모든 성읍을 정복하고 또한 각 성읍에 살던 모든 사람을, 즉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유아까지 진멸했습니다.

 

⑵ 헤렘 전쟁(34-35)

 

하나님께서는 시혼 땅에 살던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무자비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진멸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의 의미는 ‘전적 봉헌’이며 명사는 헤렘(םרח)입니다. 특별히 ‘헤렘 전쟁’은 진멸 전쟁으로 인간이 그 전쟁으로부터 전리품이나 소유물, 나아가 포로도 사로잡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전쟁입니다(신명기 20:10-18). ‘헤렘 전쟁’의 규칙은 대상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가나안 족속의 경우 모든 사람을 죽이는 철저한 진멸이고 비(非)가나안 족속은 남자만 죽입니다. 현재의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의 대표 족속으로 전자의 기준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정서상 매우 불편하게도 헤렘 전쟁에서는 여성과 유아까지 모두 죽여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헤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렘 전쟁은 신학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심판 전쟁이며, 마땅히 인간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셈이었습니다(창세기 15:16; 신명기 9:5). 아브라함 때에는 아모리 족속(가나안 족속)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약 400년(창세기 15:13)을 기다려야 했습니다(창 15:16). 그 후 가나안 족속의 악이 가득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서 쓸어내셨으며 이 것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맹세를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명기 9:5). 그들이 진멸 당한 이유는 가중한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임계량을 넘겼을 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결국 심판을 실행하신다.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장차 있을 인류 최후의 심판도 하나님의 정당한 헤렘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의 대가를 치를 뿐이며, 이런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시혼 땅(길르앗)의 점령지(36-37)

항상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나 고집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에 빠지고 패망하게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대적도, 정복하지 못할 성읍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36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36-37)

 

이스라엘이 점유한 헤스본 왕 시혼의 영토 범위가 대략적으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아르논 골짜기에서 가까운 아로엘과 그 골짜기 주변의 성읍들로 시작하여 길르앗에 이릅니다. 여기서 길르앗은 얍복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넓은 평원을 의미합니다. 그 너머는 바산 평원으로 바산 왕 옥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였습니다. 민수기 21장 25-32절에서 확인되듯이,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의 성읍들을 모두 정복했으며 그들의 수도 헤스본과 위성 촌락들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 곧 그 땅이 모두 그들의 수중으로 넘어왔음을 의미했습니다. 과거 헤스본은 원래 모압 왕의 영토였으나 아모리 족속이 모압을 물리치고 아르논까지 모압을 밀어내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습니다(민수기 21:26).

그러나 그 지역이 이제 이스라엘의 수중으로 넘어왔습니다. 얍복 강 주변은 당시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진격을 멈추었다. 민수기 21:25에서 보고하는 대로 암몬은 강력했고 국경 수비 또한 견고했기 때문이며, 그보다 중요하게는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전쟁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완고하기에 그들의 저항과 방해는 반드시 수반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신앙은 없고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 신앙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저항은 그분을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모두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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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2-02)

 

 


아르논 시내 도하와 모압 땅 통과

 

신명기 2장 16-25절


인간에게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때가 이르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죽음이 끝이겠습니까?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세대의 죽음 이후에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보여 주십니다.

 

모든 출애굽 세대가 사망한 후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날 때 암몬 족속과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땅은 롯 자손에게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암몬 족속은 르바임의 땅을, 에서 자손은 호리 자손의 땅을 점령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헤스본 왕 시혼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려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정하심(16-19)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어떤 복을 주시고 어떤 사명을 주실 것인지 계호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섬기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자신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주시지 않았을 뿐,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가장 좋은 것으로 곧 채워 주실 것입니다.

 

16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17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16-19)

 

하나님께서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 길로 들어가게 하셨고, 그 출애굽 세대 사람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제거해야 할 죄악인 불순종이 있었습니다.

 

(1) 출애굽 세대의 전원 사망(16-17)

 

세렛 시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자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에서 ‘모든 군인’은 출애굽 세대의 군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어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세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주어집니다. 모세는 계시의 통로이며 하나님의 대변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말씀을 실행할 때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2) 암몬을 지날 때 주의할 사항(18-19)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압 경계를 지나 암몬의 국경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를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롯의 아들들에게 그 땅을 소유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각 민족에게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납니다.

 

르바임 땅을 암몬 족속에서 주심(20-23)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장대한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그 여정 가운데 깨닫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0(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였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22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23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20-23)

 

앞서 설명한 대로 암몬 땅의 원주민은 ‘삼숨밈’이라 불린 거인족이었습니다. ‘삼숨밈’은 모압 사람들에게는 에밈 사람이라 불린 르바임(거인들)입니다. 더 나가서 여기서 해안을 점유하고 있던 갑돌 사람들의 유래를 덧붙입니다. 갑돌 사람은 블레셋 족속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들은 해안 지대 원주민이었던 아위 사람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차지했습니다.

 

(1) 암몬 땅을 지나면서(20-21)

 

모세는 암몬 땅을 지나면서 어떻게 암몬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전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암몬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원래 강하고 많고 장대한 르바임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통해 그들을 멸하셨기에, 암몬 족속이 르바임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20-21). 암몬은 그들을 ‘삼숨밈’이라고 불렀습니다(참조, 11). 르바임 사람들은 크고 강한 백성으로, 아낙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라는 표현에 잘 나타납니다. 이 표현에 따르면, 르바임 사람들을 멸망시킨 것은 암몬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암몬 사람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암몬 사람들이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족속들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원망했던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리석던가를 잘 보여 줍니다.

 

(2) 에돕 족속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22-23)

 

모세는 에돔(에서 자손)이 세일 산에 살던 호리 사람들을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나 갑돌 사람이 아워 사람들을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위해 행하신 일은 에서의 후손을 위해 행하신 일과 유사합니다.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의 원어는 ‘그가 호리 사람들을 그들 앞에서 멸망시키셨다’라는 뜻으로, 주어는 ‘그’, 즉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리 사람들을 에서의 후손 앞에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후손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정착해 살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십니다.

가사 지방에 살고 있는 ‘갑돌’은 전통적으로 지중해의 크레타 섬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70인역과 아람어 성경들, 탈굼 옹켈로스, 탈굼 네오피티, 탈굼 프쉬도 요나단은 갑돌을 소아시아 지방의 갑바도기아로, 갑돌 사람을 갑바도기아 사람들로도 해석합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는 갑돌이 블레셋 지역으로도 나옵니다(창 10:14; 렘 47:4; 암 9:7).

 

아르논 강을 건넘(24-25)

고대 전쟁은 현대 전쟁과 달리 심리전이 중요합니다. 고대의 전투는 전적으로 백병전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보고 칼과 창으로 싸워 죽여야 합니다. 군인들의 사기가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군인들의 심리 상태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단 동편의 땅 정복 전쟁에 함께하셔서 심리전을 펼치십니다.

 

24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24-25)

 

이스라엘은 에돔, 모압, 암몬을 치지 말라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인내의 시간 후에 드디어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1) 아르논 시내 도하(24)

 

드디어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에서 정복할 수 있는 땅에 이르렀습니다. 아르논 골짜기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이 다스리는 땅에 이르렀습니다. 세렛 골짜기와 더불어 아르논 골짜기는 중요한 국경선입니다. 아르논 계곡은 당시 모압의 북쪽 국경선으로 그 건너는 아모리 족속의 땅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헤스본 왕인 아모리인 시혼과 맞닥뜨립니다. 드디어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의 전초전으로서 요단 동편 종족들과의 전쟁이 명령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문장은 ‘일어나라. 여행하라. 그리고 아르논 골짜기를 지나가라’라는 명령형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 뒤에 “보라”라는 명령형이 나옵니다. 이 말은 땅과 관련해서 계속 나옵니다(1:8,21; 2:24,31). 다시 번역하면 “보라 내가 아모리 헤스본의 왕 시혼과 그의 땅을 너의 손안에 주었다. 시작하라. 점령하라. 그리고 그에 대항해 전쟁으로 싸우라!”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실패한 이후로 지금까지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채 38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지 시혼이 둔데를 이김으로써 천하 만민이 두려워할 만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 즉”에서 주어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네 손에 넘겼은 즉”의 원문은 ‘너의 손안에 주었다’라는 뜻으로, 시혼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 두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은 ‘권세’,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혼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 두셨기에 이스라엘이 시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혼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형제 국가들, 즉 에돔, 모압, 암몬과는 싸우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모리 사람 시혼과는 싸우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으로 이스라엘의 요단 동편 전쟁이 시작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땅 정복은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에서 가나안 땅 정복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 두려움의 대상이 이스라엘(25)

 

하나님께서 이제 행하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전쟁을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라는 “내가 너의 공포와 너의 두려움을 모든 하늘 아래에 있는 그 백성들 앞에 두기 시작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라는 표현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너의 공포와 너의 두려움’은 전쟁 직전의 심리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아모리 사람들에게 옮겨 놓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리전을 행하십니다. 아모리 사람들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더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진 반면, 아모리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배로 증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은혜를 베푸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 온 세상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때 우리는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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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2-01)

 


과거의 승리를 회상

신명기 2장 1-25절


 

인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탐욕이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것 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썩어질 것을 바라보며 욕심을 품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은혜로 허락하여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과 삶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 끝나자 하나님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통과할 땅은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하지만 정복할 땅은 싸워서 차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서나 모압 족속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걸린 기간은 38년입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손이 치셔서 출애굽 1세대가 다 멸망합니다.

 

에돔 영토 진입과 그 원칙들(1-7)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때는 찬양하고 헌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잠깐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하나님을 모른 체하거나 뜻을 배반하기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평생 한다고 할지라도 남는 것은 마음의 거짓 위안을 뿐 진정한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힘은 절제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할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1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6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1-7)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힘들고 고달 푼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내온 광야 여정을 간략하게 회상합니다.

 

⑴ 여호와를 따라 순종한 길(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는 과정에서 불순종으로 지내왔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마지막 명령을 되돌리면서, 이스라엘이 더 순종적인 행위로 돌아가고 따라서 1장 19-46절의 파멸과는 대조적으로, 뒤이은 두 장의 긍정적인 향취에 이르는 길을 준비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세 나라, 에돔과 모압과 암몬은 결코 전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형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고, ‘모압’과 ‘암몬’은 롯에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방향을 돌려 아카바만으로 난 홍해 길을 통해 광야로 다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에돔 땅 변경의 세일 산 일대를 여기저기 떠돌며 유랑했습니다.

 

⑵ 에돔의 땅에 진입(2-7)

 

하나님께서는 북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북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볼 때 우선 그들이 남쪽에 내려와 있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거기서 에돔 국경을 통과한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2장 8절에서 보듯이, 이후 그들은 분명히 에돔 변방의 국경선을 따라 다시 남쪽의 에시온 게벨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왕의 대로를 통해 에돔 땅 중앙을 관통하여 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북으로라는 뜻은 세일 산 북쪽 방향이라기보다는 요단 동편으로의 전체적인 여행 방향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북으로’는 에돔과 모압 땅을 경유하여 요단 동편에 이르는 북쪽 여행을 시작하라는 출발 신호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에돔 땅을 통과할 때가 되었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초기에 에돔 통과를 시도하다 좌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정탐꾼들의 선동에 동조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배회할 것이 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에돔을 통과하려던 그들 계획의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습니다(참조, 민수기 20장). 이스라엘은 에돔과의 싸움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에돔을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명기 2장은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두 번째 에돔 통과를 위한 시도에 대한 회상입니다. 민수기 21:4-1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에돔을 통과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나, 여기에 그 과정이 상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자 이제 북으로 행진하기 위해 에돔을 통과하게 될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돔 통과를 위한 원칙이 제시됩니다. 첫째, 전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5). 둘째, 그들에게 식량과 물을 위한 충분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말아야 합니다(6). 하나님께서는 에돔이 국경 통과를 허용한다 해도 그들은 압도적 인구의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것이니 스스로 깊이 삼가서 절대 그들을 자극해선 안 된다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에 부족함 없이 필요한 것을 늘 채워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이기도 합니다(시편 23:1). 다윗에게처럼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따라서 에돔에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고 해도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떠돌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도와서 애굽을 물리치고 그 대제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다가온다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 세상은 우리를 보며 무서워 떨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은 우리 앞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고 증명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전한 길이고 의미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첫 번째 부딪힌 상대는 세일 산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에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미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고, 또한 그 땅이 에돔 사람들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거쳤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아 넉넉하게 살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한 군사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윤택한 삶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언제나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배려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세렛 시내 도하와 모압 영토 진입(8-15)

중요한 것은 ‘말씀(약속)의 신실함’이지 ‘적들의 전력’이 아닙니다. 옥죄는 현실보다, 위협하는 세상보다, 더 크신 주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구해야 합니다. 오랜 기다림과 많은 고난을 통해 힘겹게 얻은 것일수록 더욱 값지게 여겨집니다.

 

8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10(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12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13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15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8-15)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언제나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배려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첫 번째 부딪힌 상대는 세일 산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에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미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고, 또한 그 땅이 에돔 사람들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⑴ 모압 땅을 통과 원칙들(8-12)

 

이스라엘은 세일 산 일대의 형제 국가 에돔을 통과한데 이어 모압 땅마저 통과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단 그들은 에돔 땅에 진입한 뒤 동남쪽으로 홍해를 향해 남하하여 아라바 광야를 지나 남쪽의 엘랏과 에시온게벨 근처를 지나갑니다. 에시온게벨은 아카바 만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는데, 그들은 그 위쪽을 우회해서 왕의 대로로 진입해 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돔의 북쪽 국경을 넘어서 그들은 ‘모압 광야 길’로 진입했습니다. 에돔의 북쪽 국경은 아래 13절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세렛 시내’입니다.

여기서 ‘모압 광야’는 분명 모압 영토 너머 요단 동편의 넓은 평지인 모압 광야(당시 아모리 족속의 점령지)가 아닌 모압 영토 내의 들판을 의미합니다. 모압은 암몬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피붙이 민족이기 때문에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금지됩니다.

 

10-12절은 모세의 말이 아닌 해설자가 모압의 역사를 간략히 묘사한 일종의 설명구입니다. 모압 영토는 원래 에밈이라 불리는 거인 족속이 거주하던 땅이었습니다. 에밈 사람은 역시 거인 족속으로 알려진 아낙 자손에 비견되었습니다(신명기 1:28). 에밈 족속을 20절에서 볼 수 있듯이 암몬 사람들은 ‘삽숨밈’이라 호칭했습니다. 당시 거인 족속은 아낙 자손 외에 르바임으로도 불렸습니다(11). 르바임(르파임)은 크고 힘이 센 ‘거인들’, ‘거인족’이란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편, 에돔 족속은 세일 산에 거주하던 토착민 호리 족속(거인족은 아니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유했습니다(12). 여기서 땅과 관련된 중요한 신명기의 신학적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모압과 에돔과 암몬에게 직접 땅을 하사하셨습니다(9,12,19). 이것은 모압과 에돔과 암몬에게 땅을 주시고, 그들이 그 땅의 거인족 원주민들을 몰아낼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⑵ 세렛 시내의 도하(13-15)

 

광야 여정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순간에 대한 회고입니다. 그들은 ‘세렛 시내’를 건넜습니다. 이 세렛 골짜기는 에돔의 북쪽 국경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세는 세렛 시내 도하를 그들에게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특별한 사건으로 회고합니다. 아마도 에돔 국경 통과가 특별한 사건으로 회고합니다. 아마도 에돔 국경 통과가 좌절되어 오래도록 에돔 변방의 세일 산 일대와 인근의 바탕을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1세대의 군인들 모두가 이 세렛 시대를 건너지 못했다는 것도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의 장정들이 ‘군인들’(전쟁의 남자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의 행군은 일종의 군사적 대열의 이동이었기에 에돔과 모압은 그들을 크게 경계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손쉽게 선물로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으로 인해 38년이라는 세월을 더 방황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자들은 다 멸망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먼 길을 돌아서 마침내 에돔과 모압 사이의 경계인 세렛 시내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사람들과도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에돔도, 모압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들에게 주신 땅을 정복했지만, 이스라엘은 아직 땅 없는 백성이라는 사실이 서로 비교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기다렸으니 그들이 곧 얻게 될 가나안 땅의 선물은 더욱 소중할 것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고 양육시킨 은혜의 기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삶에 허락하신 고난의 의미를 돌아보고, 고통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해야 합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수기 13:33)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120세 모세가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나이에 가나안 정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사라져야 다음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소신껏 지도자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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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1-04)


잃어버린 기회를 회상

신명기 1장 34-46절


‘기록한 역사’는 의미 없이 문자로 기록해 보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록을 소홀하게 다루면, 그 역사를 여지없이 되풀이 하고 맙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적인 환경은 달라져도 인간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대하였고, 같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살펴보면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삼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불신에 노하셔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어린아이들 외에는 아무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불신에 노하셨습니다. 방향을 돌려 광야로 들어가라고 명하시자 백성은 그제야 잘못을 깨닫지만, 반성하면서도 그들은 경솔하게 올라가지 말라고 명하신 산지를 올라갔다가 아모리 족속에게 패하고 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34-37)

살아있는 신앙은 소문으로 듣는 간접적인 누군가의 체험을 통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살아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4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35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7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34-37)
 
성경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의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 사건을 기록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은혜로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든지 약속하신 땅을 주신다면, 모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신명기를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모세는 광야 시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2세대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축복뿐만 아니라 경고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34-35)
 
열 두 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열 명의 보고는 그 땅에 기골이 장대한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세력들이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민수기 14장). 이스라엘 백성은 탄식하고 절망하며 밤새 울부짖으며 불평불만을 쏟아 냈던 것을 살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미워하셔서 광야에서 죽게 하시도록 출애굽 시켰다고 생각하고 해괴망측한 불신의 말들을 쏟아내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과 반역은 그들의 행동 지침에서 반영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다시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하면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권을 지닌 모세와 아론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무섭지 않고 만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격노하셨습니다(34).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잘 모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없고, 하나님의 은혜만 추구하는 자들은 사실상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우상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황금 송아지 하나님’ 즉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잊은 백성들에게 화를 내십니다. 그들을 향해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35)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로 한 땅은 좋았지만, 그 땅에 거할 사람들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⑵ 지도자인 모세(37)
 
가나안 땅은 불신앙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도자 모세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37)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에 자신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민수기서에 보면, 모세 역시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13장). 그 이유는 두 가지 다 맞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때에 가나안 땅을 올라가기로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80세의 모세에게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수기 13: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120세 모세가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나이에 가나안 정복까지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사라져야 다음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소신껏 지도자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 않는 일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신앙대로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그 불신대로 될 것입니다. 반대로 믿겠다고 하면,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는 일을 믿어야지 자신이 바라는데로 믿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자들(34-37)

참다운 영성은 영향력 있을 때보다 영향력이 사라질 때 들어나는 것입니다. 때론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져 주는 것을 견디는 사람이 진정한 기성인으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진짜 실력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지도자를 양육하고 세우는 일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38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39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38-39)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셨지만, 그런 가운데도 그 땅에 들어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선악을 분별치 못하는 어린 아이들은 예외였습니다.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고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약속의 땅에 허락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온전하게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밥이라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데로 될 것이라고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36)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도 빛이 납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여호수아서 14:12)라고 간구합니다. 갈렙이 원했던 이 산지는 정복하기가 어렵기로 유명한 요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하는 믿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차지하려고 엄두도 내지 않는 땅, 그는 그 땅을 요구했고 결국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38)고 하였습니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지도자 여호수아와 갈렘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모세가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광을 누릴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어린아이들만 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눈앞에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 없음으로 인해 그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불순종과 불평불만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선물을 얻지 못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길도 멈추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자와 취하지 못할 자의 차이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와 같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고집한 백성들(40-46)

불순종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큰 단절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들어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고백하는 하나님과 너무나 무관하게 결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뜻만 생각하고 고집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40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41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4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43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44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45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46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머물던 날 수대로니라(40-46)
 
이제 가나안 땅은 지금 건장한 부모 세대가 감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를 거친 다음 세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하는 자녀 세대가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모 세대가 감당할 일은 이 자녀 세대를 가나안 땅을 차지할 만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가 큰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⑴ 자기 마음대로 나감(40-4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반발했습니다.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할 때는 거부하더니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니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41)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행동을 경솔한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4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또 거역하고 고집 부리면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보는 것입니다.
 
⑵ 고집으로 행한 결과(44-46)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 한 것입니다.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44)고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이 싸움에서 패하여 벌 떼처럼 쫓기듯 모든 것을 버리고 호르마까지 도망해야 했습니다. 남는 것은 후회뿐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잘해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회는 말씀 앞에 순종이었습니다.
심판을 달게 받는 것이 회개이지 죄의 대가는 받지 않겠다는 마음은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되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에게는 보상이나 사과하지 않고 여기저기 피해 다니면서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용서 받았다는 사람은 거짓된 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움에 나갔다가 패배하고 돌아와서 결과는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45)라고 통곡뿐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징계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백성은 때늦은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주셨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움을 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말에 귀를 닫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전투를 실행했습니다. 그 결과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가데스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내 맘대로, 내 필요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가감 없이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는 대로 순종하는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함께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만 싸우면 패하지만, 자신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게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자신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해야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대로 싸워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전략을 잘 세워야만 효과적으로 적과 대치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전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여론으로 이것을 대신하게 하는 것은 패배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작전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대적을 굴복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므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삶을 방치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길 원합니다. 당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던 태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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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강해(01-02)

 

   


 가나안 입성 전에 조직을 재정비한 모세

신명기 1장 9-18절


 

하나님께서는 아담 한 사람만 창조하지 않으시고, 하와를 통해서 부부라는 가정을 주셨습니다. 한사람보다는 공동체가 낫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원리는 바로 질서입니다. 질서가 없으면 그 공동체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해집니다. 이 질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 우리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길 원하십니다.

  

모세는 이전에 제정했던 이스라엘의 적절한 통치 조직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가 돌아본 사건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모세 혼자서 이스라엘을 전체를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들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등의 수령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재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강조하며 공정하게 판결하라고 당부했었습니다.

 

지도자를 세운 모세(9-15)

공동체를 이끌어가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자신을 다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는 생각은 독선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한 생각을 ‘근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대화가 단절되고 관계까지 단절됩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겸손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세우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9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 10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하게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11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12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일과 너희의 힘겨운 일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 있으랴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4너희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9-1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크게 성장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 생활 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면서, 첫 번째 조직을 정비했던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군사와 사법 조직을 정비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복할 때, 명령이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조직이 정비합니다. 모세는 연설 가운데 이 부분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합니다.

 

⑴ 성취해주실 하나님의 언약을 되새김(9-1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출애굽 인구가 약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송사였습니다. 처음에는 모세 혼자서 감당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 상황을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9)라고 고충을 표합니다.

 

애굽에서 늘어난 이스라엘 자손의 수적인 증가에 대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였음을 인정합니다. 즉 ‘너희는 하늘의 별 같이 많아지리라’(10)고, 이것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 모세는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리라’(11a)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더 많은 민족으로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준비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현재보다 천배나 더 많아지게 되기를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곧 곤궁함이 없다면, 상상할 수 없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기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을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조상들에게 이루셨던 약속이 성취되었던 것처럼 이후로도 여호와는 너희에게 복 주실 것입니다(11b). 약 250여 년 전에 애굽에 들어갈 때 70여명보다, 지금은 열 배나 더 되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보다 수천 배나 더 많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의 통치 아래 있을 때, 그들의 인구의 증가는 애굽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압박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출 1:9).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나올 때에 전쟁에 나갈 만한 장정 수만 6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들을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한 가족 당 3-4명이라고 치면 전체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200만 명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수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구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 안에서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모자람이 없이 더 성장할 것입니다.

 

⑵ 중간지도자를 세움(12-15)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많은 이스라엘에게 조직 재정비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과정이나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과정에 조직에 정비가 없으면 오합지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에 조직 정비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 출애굽 광야 생활 중에 모세도 어려운 상황이 있었습니다. 출애굽할 때는 문제가 적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아진 송사들은 모세 홀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분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이 새로운 제도를 만든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하지 않았지만, 출애굽기 18장에서 그 사실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14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15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16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17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18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19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20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21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출애굽기 18:13-22)

 

모세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송사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송사만 듣고 재판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점점 모세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지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일하는 모세는 일에 치여 피곤하지만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조언해줍니다. 먼저 혼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모두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방법을 조언해줍니다. 그것은 일에 합당한 중간지도자들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장인 이드로가 권고한 중간 지도자의 자격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건함과 (2) 진실하며 허물이 없는 강직한 성품과 (3)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성품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이는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모세가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조언할 때, 그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드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서 그동안 자기 혼자서 송사를 받았던 일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문제점을 의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에 대해 이해하고 지혜 있는 지도자를 세워 그들에게 합당한 직위를 세우고 다스리는 일을 맡겼습니다. 사소한 일은 십부장들에게 점점 무거운 일들은 그에 걸맞은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최종적으로 모세가 감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질서를 잡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매우 소월 해졌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하려 할 때, 모세와 같이 꼬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각각 받은 은사와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합력할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아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사역들은 쉽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임무와 원칙(16-18)

종종 사람들 중에 큰 역사를 이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일을 깨달은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는 스스로 능력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자신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을 깨닫고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6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17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18내가 너희의 행할 모든 일을 그 때에 너희에게 다 명령하였느니라(16-18)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은 모세는 이제 혼자 모든 일을 끌어안지 않고 짐을 나누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서를 세울 방법을 거론합니다. 지도자의 가격에 따라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그리고 조장들을 세울 것입니다. 단지 중간 지도자를 뽑고 그 권한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세는 중간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인도할 자세와 임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 중간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한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무질서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공정하면서 차별 없이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평안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1) 재판자들의 공정한 자세(16)

 

특별히 지도자로 선발된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공정한 태도로 재판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17)라고 권합니다. 선발된 각 지파 지도자들에게 재판을 맡기고 공정하게 일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지도자들은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선 재판장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공평하게 재판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에 대한 순종이 자발적으로 울어난 것입니다.

 

(2) 재판장들의 공정한 임무(17-18)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재판장들의 임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어려운 일을 만난 사람들이 재판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강조했습니다. 이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조작하거나, 힘없는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기 쉬운 이 시대에, 공정함과 정의와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세워진 지도자들에게 재판하는 원칙을 (1)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2)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3) 재판장이 스스로 재판할 수 없는 문제라면 상소(上訴)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분의 공의로우심을 닮은 자녀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맡은 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든 지도자들에게 공정함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 역시 어떤 자리, 어떤 상황에 있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공정함과 의로움으로 대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출세하고,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사업이 잘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쉽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 환호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한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으로 영광을 받길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공정한 공동체가 되기 원합니다. 특히 억울한 일을 만나서 재판하는 일에는 더욱 공정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공정이 무너지면 그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적절한 사람을 공정한 방식으로 세우고, 질서를 바르게 잡아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듯이 교회는 세상에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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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1-01)

 


모세의 고별사

신명기 1장 1-8절


군대 문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군인은 명령입니다. 전달된 명령에 대해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명령에 대해 불순종한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세 편의 설교와 고별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명령이 담긴 책입니다. 따라서 신명기 말씀을 대하는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명기를 읽고 있는 우리들 또한 신명기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인생을 접으면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출애굽한 지 40년째 되던 해 11월 1일에, 하나님의 종 모세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하십니다.

 

 

선포에 대한 배경(1)

신명기 첫머리에 있는 이 글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시련을 겪은 후 가나안 땅을 입성하기 직전에 받은 말씀입니다.

 

1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당시 그들이 야영을 친 곳은 ‘모압 땅에 있는 광야’였습니다(1,5). 거기에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했고 가나안 사람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1세대들은 40년 광야에서 대부분 죽었습니다. 이제 출애굽을 경험하지 않고 광야에서 출생한 출애굽 2세대들에게 강론한 것입니다. 2세들도 출애굽 1세대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듣고 순종해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입성해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정체성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 이후로 전달되었던 언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교육할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가나안 입성을 앞둔 ‘모압 땅에 있는 광야’에서 가르치길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완전히 성취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약속을 이루어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세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바르게 말씀을 가르칠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모세 고별의 시기(2-4)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도 주저하다가 놓치고 맙니다. 더 이상 한 자리에 머물지 말고, 이제 떠나가야 합니다. 더 큰 은혜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호렙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예비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2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3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나 4그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주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2-4)

 

신명기를 강론한 시기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기록한 시기는 출애굽이 다 끝나갈 무렵인 ‘출애굽 후 40년 11월 1일’이며, 장소는 ‘요단강 동편 모압 지역’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40년을 허비하지 않고도 직접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돌아서 약속 땅 가나안 앞에 이제 섰습니다.

그들이 출애굽 이후 먼 길을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 후 약 1년 동안을 시내산에서 보낸 후 출애굽 2년 2월 20일에 약속의 땅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38년 8개월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은 죽는 징계를 받았습니다(민수기 14:29-35). 그 결과로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되는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후손들에게 전해야할 출애굽 세대가 모두 멸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호렙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11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모압 광야까지 가는 데는 40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방황했던 광야 40년 생활이 꽉 찼습니다. 비로소 40년 11월 1일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민수기 22:1). 날짜를 명확하게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종료됨을 알리고, 이제 모세는 120세로 하나님께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모세는 곧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선생이자 해설자로 섰습니다. 40년 동안 먼 길을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들에게 다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했더라면, 광야 40년이라는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애굽해서 며칠 만에 약속의 가나안 땅에 손쉽게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40년이라는 시간을 돌아서 이제 요단강 동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세가 선포한 내용(5-7)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자신은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5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6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7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5-7)

 

모세는 가나안 땅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의 자리로 간절하게 인도하였습니다. 그 동안 주신 율법을 정리하고 쉽게 해석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율법을 해설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다음 세대들에게 맞도록 율법을 정리하고 적용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로서 가치가 있지만,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겸손한 마음과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합니다. 지난 광야 40년의 여정을 회고합니다. 그 회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호렙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작하여 기억을 더듬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원년 3월 1일에 시내산에 도착합니다(출애굽기 19:1). 그 다음 해 2월 20일에 시내산을 떠나기까지 약 1년 기간을 머물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호렙산에서 십계명과 각종 규례, 성막 및 제사 제도에 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출애굽기 20-30장).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여 출애굽 2년 1월 1일에 봉헌했습니다(출애굽기 36-40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부터 방향을 돌려서 북동쪽으로 진행해 나갔습니다. 세일산을 지나고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리 족속 산지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로를 방해하고 대적하다가 살육당한 족속입니다(민수기 21:21-26).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때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인해 아모리 왕들이 실패하게 만드셨습니다(여호수아 10:1-21). 이렇게 출애굽 과정을 자세하게 살핀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서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복하게 하신다고 확신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들어가서 정복할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지난 광야 40년 전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앞까지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이 땅은 아브라함 때부터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다고 언약하신 땅이기도 합니다(창세기 15:18-21). 오랜 세월 그 약속의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실제로 약속의 열매를 취할 때가 온 것입니다. 이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왔습니다. 약속의 열매가 있는 곳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단과 믿음 그리고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종종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약속하신 하늘에 있는 가나안을 보여 주십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담대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8)

모세를 통해 율법을 설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에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합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들이 어떤 상황ㅇ에 처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면 현재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명확한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8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8)

 

다시 말하지만,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후손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취할 동서남북 경계까지 정해 주셨고, 심지어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각 지파마다 얻을 지역까지 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땅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면 약속의 땅을 확실하게 자신의 땅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도 많은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면 당연히 성취될 것입니다. 오래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믿음과 결단으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혹시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찾아서 순종하며 나가면 됩니다. 그곳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입성을 약속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순종하지 않음으로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다시 가나안 땅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에는 순종하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지만, 순종하면 복이 풍성하게 임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상상할 수 없는 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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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서론


》신명기 서론《


오늘날은 자녀교육을 타인인 학교나 학원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돈을 버는데 전념하면서, 중요한 자녀 교육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은 부모의 무릎에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교육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다른 성경보다 신앙의 규범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신앙의 원칙과 규범을 재조명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명기의 제목

이 신명기의 히브리어로 ‘엘레 하데바림’(이는 … 말씀이니라)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히브리어 신명기 성경 1:1의 첫 두 단어를 따라 붙인 것인데, 성경 맨 처음에 나오는 단어를 책의 명칭으로 삼는 유대인들의 관례에서 따른 것입니다. 칠십인역(LXX)은 신명기 17:18에 따라 ‘듀테로노미온’(제2의 율법)이라 불렀습니다. 한글 성경은 ‘신명기’(申命記)라 부르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더욱 자세히 설명해 주는 책’이란 뜻입니다.

 

 

신명기의 저자

⑴ 내적 증거 : 신명기 자체가 모세의 저작성을 증거합니다(1:5; 31:9,22,24).

 

⑵ 외적 증거 : 그 외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도 이에 동의합니다(삼하 2:3; 8:53, 왕하 14:6;18:12). 예수님께서도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으며(마 19:7-8, 막 10:3-5; 요 5:46-47), 신약 성경의 다른 저자들도 모세가 저자임을 증거 합니다(행 3:22-23; 7:37-38; 롬 10-19).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

구약 성경은 대부분 역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입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사건을 기록한 것들입니다. 사건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문자로 압축해서 기록했습니다.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언약을 세우시고 섭리하신다는 전제 하에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약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이 구원의 언약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계명으로 주심으로써 잠정적, 상징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심으로 신정 정치를 확립하시고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왕권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반역한 출애굽 당시의 구세대가 광야에서 멸망하고 모세 자신의 죽음도 가까와지자 새로운 세대를 위하여 언약을 갱신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여호수아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야 했습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직전 모압 평야에서 진치고 있을 때, 인생의 황혼기에 선 모세가 행한 강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홍해를 건너거나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등의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율법을 기억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명기의 저작 시기

신명기는 아마 주전 1406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추정은 왕상 6:1을 근거로 해서 가능합니다. 솔로몬 재위 4년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되던 해였습니다. 솔로몬 재위 4년이 주전 966년 무렵이었으므로 자연히 출애굽 사건은 주전 1446년경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 40년을 제외하면 주전 1406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신명기의 주요 사상

신명기는 구약의 중심된 책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였던 구약성경의 하나입니다. 신약에는 신명기에 대한 언급이 80회 이상 나타납니다. 신명기의 기본 주제는 언약의 갱신입니다. 시내 광야에서 맺었던 옛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갱신되었습니다. 광야에서의 뼈저린 40년의 체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축복을 받았던 시기뿐 아니라 자신들의 죄로 인한 심판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입구인 모압 평지에 서있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맺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이스라엘이 민족이 수 차례에 걸쳐 언약을 새로이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헌신하는 역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언약은 여호수아 시대와 에스라 시대에 갱신됩니다. 언약의 갱신을 위한 의식의 유형은 신명기를 근거로 확립되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민족을 구출하시고자 행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회고된다.

2. 하나님께서 백성 앞에서 보여주시는 아름다운 땅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다.

3. 이스라엘은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특별히 택하신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

4.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장소가 지정되었는데 광야에서의 성막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5. 불순종하는 자들이 분명히 받을 심판으로써 거룩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강조되고 백성을 향한 경고와 격려가 반복된다.

6.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때 받게 되는 안식과 축복의 약속을 전한다.

 

언약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역사관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드라마로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 민족의 공동 생활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약을 이와 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훗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새 언약’으로 이해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듯이 그것은 돌비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새 언약이었습니다.

 

 

신명기의 구조

Ⅰ. 머리말(1:1-5)

 

Ⅱ. 서론 : 첫째 강론(1:6-4:43)

    A. 역사적 회상 : 호렙산에서 모압까지(1:6-3:29)

    B. 율법에의 순종 권면(4:1-40)

    C. 부록 : 도피성의 지정(4:41-43)

 

Ⅲ. 둘째 강론 : 율법 선포(4:44-28:68)

    A. 머리말(4:44-49)

    B. 서막 : 호렙산에서의 신현과 언약(5:1-33)

    C. 모압에서 선포된 율법의 서문(6;1-11:30)

    D. 모압에서 선포된 율법의 전문(11:31-26:15)

    E. 율법 강론의 결론 : 축복과 저주(26:16-28:68)

 

Ⅳ. 셋째 강론 : 모압 언약의 체결 선언(29-30장)

 

Ⅴ. 결론 : 모세의 마지막 노래와 축복(31-34장)

    A. 모세의 죽음의 준비와 후계자 지정(31장)

    B. 모세의 노래(32:1-43)

    C. 모세의 마지막 권면(32:44-52)

    D. 모세의 축복(33장)

    E. 모세의 죽음(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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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3)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함

야고보서 1장 19-27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맵시를 가다듬기 위해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흠을 고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분입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쳐야할 부분은 그대로 두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이유는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르게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하고 악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증거입니다. 19절을 전제로 20-27절까지는 하나씩 세부적으로 설명합니다. 20-21절에서는 ‘성내는 것’에 대해서, 22-25절은 ‘듣는 것’에 대해서 26-27절은 ‘말하는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성도로서 감정 조절하는 지혜(19-21)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접하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슴까지는 도착한데,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은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에게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언어(말)이라고 소개합니다.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9-21)

 

타락한 마음은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표준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다 맞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단정하고 단죄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닮은 이타적인 사람들입니다.

 

(1) 일반적인 삶이 법칙(19)

 

야고보는 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일반적인 법칙부터 설명합니다. 당시에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대한 격언을 들어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듣는 속히 함’과, ‘말하는 것’과 ‘성내기는 것’은 더디 하는 사람입니다.

 

(2)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20)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계의 법칙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의 죄악을 보시면서 성내지 않고 길이 참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즉흥적으로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몇 번이나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고보는 성도들이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20). 말을 반대로 성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성내기를 더디 하는 방법(21)

 

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는 것(21a)

 

‘성내기를 더디 하는 법’은 첫 번째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21). 반대로 말하면, 성내는 이유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심령은 사탄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마음이 죄악의 필터로 덮여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행동에서 급한 모습으로 죄악이 나타난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우리 영혼에 묻은 얼룩이 더러운 오물이 돼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가리키고(에베소서 4:31), ‘넘치는 악’은 스스로를 통제(control)가 안 되서 솟구쳐 표출되는 악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의 통제가 되면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성내기를 더디 할 수 있습니다.

 

②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21b)

두 번째는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성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팔복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준이 됩니다(마태복음 5:5).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온유함’은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합니다(갈라디아 5:23).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온유함’을 예수님의 것으로 언급하면서, 이것이 교회가 본 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제시합니다.

 

결과적으로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고, 더디 말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가능해집니다.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사람을 지배해서 감정이나 행동을 잘 조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로서 듣는 지혜(22-25)

 ****************************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2-25)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고쳐 나가야 한다고 권면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참된 경건도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반응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복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뿐 아니라 들은 말씀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묵상한 말씀에 비추어 당신이 고쳐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말하는 지혜(26-27)

옛날부터 언어(말)에 속담이나 교훈들은 수도 없이 많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량’은 사형수들을 형을 면할 수 있는 량의 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담은 ‘격에 맞는 좋은 말은 사형수도 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6-27)

 

성도들에게 실수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 말하기를 더디(26)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급하게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디 말하는 것은 속히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배우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잠 10:19).

26절은 말을 더디 하는 것(혀를 재갈 물리는 것)과 경건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속으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 말을 가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우상숭배)’입니다. 내적인 실상으로 경건을 가능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내적 경건은 반드시 외적 표현, 말로 드러나야 합니다.

 

 

(2) 경건의 외적 확장(27)

 

경건은 두 가지 측면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27). 이들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생명과 권리를 대변해 줄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돌보다’라는 말은 ‘방문하다, 심방하다, 관여하다,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환란 중에 있을 때, 실제적으로 이들을 찾고 돌보는 것으로 우리의 경건을 확증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속’이란 이 세상 가치 기준을 말하고, ‘물들지 않다’는 말은 ‘흠도 없고 티도 없다’(베드로전서 1:19)는 뜻입니다. ‘지키다’는 말은 ‘경각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간직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 가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경각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7)

 이처럼 삶에서 더러움과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때, 진정한 자유와 안식과 형통을 경험합니다. 매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 받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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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2)

 

 


시험이 유혹이 될 때

야고보서 1장 12-18절


산을 오를 때는 더욱 불조심해야 합니다. 산에는 불탈만한 것들이 많아서 한 번 불이 붙으면 쉽게 먼지기 때문입니다. 산불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로 시작하지만, 큰 불로 이어지면 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어떤 실수를 범했을 때,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곤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외부의 환경을 받기 때문에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잘못을 범죄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더라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악에 대한 작은 불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시련을 견디라는 권면에 이어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유혹은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에서 기인함을 밝히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을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선물을 주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분임을 일깨우고 변함없는 그분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는 속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시련을 찾는 자의 복(12)

일반적인 생활에서 진짜와 가짜 믿음을 바르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용광로 같은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해 증명됩니다. 진실한 믿음은 어떤 어려움 시험 속에서 빛이 나지만, 거짓 믿음은 시험에서 불태워지고 말 것입니다.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시험으로 번역된 ‘시험’은 ‘시련(trial)’ 또는 테스트(test)를 의미합니다. ‘시련을 참으라’, ‘인내하라’는 주제는 1:3-4에서 다루었던 주제인데,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시련을 인내하는 것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왜 복이 됩니까? 시련을 참는 성도를 바라보시며 응원하시는 주님이 계시며 주님은 시련을 참는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듯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고 시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견디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음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은 시련을 참는 자들이 받습니다. 시련의 시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테스트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13-15)

사탄은 항상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고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이 나지 않도록 해야지, 불이 한 번 붙으면 나중에는 자신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강하게 단련하시려고 시험하시되(test), 믿음을 파괴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temptation)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3-15)

 

야고보는 13절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사람이 겪는 ‘시련’은 죄에 빠지도록 하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은 부정한 방법이나 죄와도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만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1:5).

 

(1) 하나님 때문이 아님(13)

 

하나님께선 성도들이 성장하기 위해 시험(test)는 하시는 분이지만, 넘어지도록 함정을 만들어 놓고 유혹한 분은 아니십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외부에 유혹 거리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유혹에 반응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비유를 하자면, 아무리 기름이 많아도 불씨가 없으면 불날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작은 불씨라도 있다면 순식간에 불이 붙어서 매우 큰 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이 되어 온 산을 태운 것처럼 작은 욕심이 큰 죄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당할 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해 마치 하나님이 성도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는 속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련을 겪을 때 내가 하나님의 유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관련하여 야고보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니기에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정하는 것보다 안전합니다. 미리 자신을 알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십니다. 완전하신 선이시며 죄악된 욕망을 갖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촉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시련 중에 유혹을 받아 넘어지고 실패한 후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와 죄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기보다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정당화하려 합니까?

13절에서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있습니다. 시련을 참는다는 것은 결국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2)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14-15)

 

유혹을 받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14절에서 유혹을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대문이 아니라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 악한 욕망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 욕심으로 번역된 ‘에피뛰미아’는 육신적이며 악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물고기를 잡는 낚시 줄의 미끼와 같이, 동물을 포획하는 그물 같이 사람을 유혹하다가 걸려들면 여지없이 끌고 갑니다.

 

야고보는 여성이 잉태하고 자녀를 낳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욕망이 죄를 낳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욕망이 잉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욕망이 죄를 낳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속히 결단하고 돌이켜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죄는 결국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유혹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욕심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 충만’과 ‘성령 충만’은 반비례합니다. ‘욕망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반비례합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으로 가득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소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할수록 욕망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까?

 

속지 말라(16)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부추겨 죄를 짓도록 만들어 멸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좋은 분이십니다. 또한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을 주신 분입니다. 결코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16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야고보의 말에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16절은 앞 구절들과 뒤 구절들 사이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는 잘못된 생각에 속지 말아 16절 ‘속지 말라야’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좋은 선물의 근원이신 하나님(17-18)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들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죄에 대한 책임이 결국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안했습니다.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7-18)

 

하나님께서는 죄를 만들어서 부추기고 유혹에 빠지도록 조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양육하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 좋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17)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짓게 만들거나 파멸을 야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식하고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야고보는17절에서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은사’와 ‘선물’은 원어상 의미에 큰 차이가 없이 모두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 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을 하나님은 주십니다. 세상은 좋은 선물과 온전한 선물이 다 세상에 있으며 세상이 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빛들의 아버지이심을 밝힙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참조, 창세기 1:14-18; 시편 136:7-9),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하여 주실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 온전한 선물을 주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참고, 시편 23편)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천체는 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화에 따른 그림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가 변덕스럽게 어느 순간 다시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겉은 화려하고 좋아 보이나 뒤집어 보면 어둡고 흉한 이중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모든 좋은 것, 온전한 선물 중에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도 틀림없이 포함될 것입니다(1:5).

 

(2)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낳음(18)

 

15절과 18절에 ‘낳는다’는 말이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여 사망을 낳습니다(15). 하지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신(17)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18).

얼마나 상반되는 대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으로 유혹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망의 출발점은 육적 욕망입니다(1:15). 그것은 사람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출발점은 진리의 말씀입니다(1:18).

그리고 진리의 말씀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 즉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구원받은 성도를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즉 피조 세계의 회복을 예견하는 첫 열매이며 거룩히 구별된 값진 존재입니다. 야고보가 보여주는 하나님께서는 온갖 시련 중에서도 좋은 것을 주시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구원하사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신실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를 의지하며 시련을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1:12).


유혹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악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혹당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는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욕을 이기고 선한 열망을 품어 하나님 주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주시는 선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선한 마음과 인내심을 주셔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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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1)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참된 지혜

야고보서 1장 1-11절 


살아가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납니다. 문제에 대한 태도에 따라 쉽게 풀리거나 더 꼬이는 수 있습니다.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하는 것을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시련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인내를 통해 믿음의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능력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기독교 핍박으로 팔레스틴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특징은 교리적이거나 논쟁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생활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신약의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인사말(1)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들이 모두 변합니다. 부정적인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긍정적인 삶으로, 핍박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병들었던 사람들이 치유까지 받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1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

 

야고보는 당시 편지의 형식을 따라 먼저 발신인과 수신인을 언급하고 그들에게 인사말을 전합니다. 발신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이며, 수신인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곧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님의 친 동생이었던 야고보’라고 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른다는 사실은 야고보가 거듭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역하실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불만을 가졌습니다(요한복음 7:3-5). 한 번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동생인 야고보는 고향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야고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변했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7). 그의 영적인 변화는 예수님을 부르는 용어에서 나타납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친 동생’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육신의 형인 예수님을 ‘주님’라고 부른 것입니다. 속된 이야기로 예수님의 친 동생임을 내세워 덕을 보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를 가져옵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길 시험(2-4)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도 면할 수 있는 것이 ‘인내(忍耐)’입니다. 인내는 예로부터 인륜지덕(人倫之德)으로 분류되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돌아보면 인내는 별로 중요한 덕목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사람도 잘 찾아보기 힘들다는 선입관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현대 사회는 인내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겠습니까? 인내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공정 사회 속에서, 억울한 갑을의 관계 속에서 저마다 인내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내하는 것을 힘들어 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인내는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윤리적 덕목입니까? 성경은 이 인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2-4)

 

초대교회 당시에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8:1). 이로 인해 성도들은 각지로 흩어졌습니다(사도행전 11:19).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도망친 사람들은 은둔 생활하고 있었습니다(히브리서 11:37-38).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종종 기독교를 표현할 때 ‘익두스(ΙΧΘΥΣ)’라는 고기 문양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면, 체포되었습니다. 때문에 성도들끼리만 은밀하게 ‘그리스도인’라는 암호로 사용하고 다녔던 표시입니다. 이처럼 참으로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고난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열두지파’라고 부른 이유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원 받은 백성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신약의 신학이 형성되어 있지 안했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지만, 구약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 성도들이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교훈과 일치합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

 

성도들이 시험을 기뻐해야할 이유는 ‘믿음의 시련(testing of faith)’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사단은 자기 자녀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육이 온전하게 되어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 가운데 인내(忍耐)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인내하는 과정 속에 온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인내가 없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결실을 맺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누가복음 8:15).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훈련시키신 것은 세상의 축복과 번영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완전한 자질과 인품을 만들어 가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환영하고 기쁘게 받아들려야 합니다.

 

고난은 당장 힘들어도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성도들을 만듭니다. 시험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채워감으로 하나님의 성도로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상황과 조건을 초월해서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난관과 역경은 영적 거장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시련을 통해 당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시험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영적 지혜(5-8)

인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낙심하거나 영적으로 침체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낙심은 전적으로 어려운 상황과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해쳐나갈 지혜가 부족함에서 오는 근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5-8)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닥치는 환경에서 각각의 경우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문제와 환경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판단해 주고 문제점을 발견하고, 더 나가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종종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가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운 지식과 정보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때론 학교에 가지보지 못한 분들이 배운 사람들보다 어려운 일을 순조롭게 처리하는 것을 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지혜’라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생활 속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서 대처 능력인 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지혜를 아끼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후히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면서 조건을 답니다. 그러한 선물은 받긴 받았지만 왠지 씁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마가복음 11: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의심 없이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하나님께서는 ‘새벽 이슬’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두 마음을 품는다면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해서 바닷물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아니 마음속에서 해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혜로운 삶(9-11)

세상에서는 부자가 더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은 더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강한 것 같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약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과 힘을 가지려고 그것에 전력투구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진정한 행복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9-11)

 

이제 주제를 바꾸어서 ‘부’에 대해서, 즉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 대해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갑자기 주제를 바꾸는 것은 실천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먼저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랑할 것이 소유가 아니라 따로 있습니다.

 

야보고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권합니다. 육적인 의미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비천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태도, 곧 겸손한 태도입니다(베드로전서 5:6). 부자가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모든 것이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자칫 가진 것을 가지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모두 상대적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풀의 꽃처럼 사라집니다. 누구든지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간구한다면,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응답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위치에 도달하지 못해서 힘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초점을 맞추며 의심하지 말고 구함으로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우리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응답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상대적인 세상의 가치에 마음을 두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구시길 바랍니다.


성도들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세속적으로 포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련을 바르게 통과하면 영육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겪는 고난과 아픔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승리할 능력과 온전한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지혜를 따라 여러 가지 시험을 승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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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서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라!

야고보서 서론


 

야고보는 오늘 말씀에서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던 길에서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본문은 이 말을 “너희는 ……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방향을 바꾸어 정반대 쪽으로 향하여 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입니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1. 저자와 기록 연대

이 야고보서의 저자는 ‘야고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야곱’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흔한 이름입니다.

신약에 몇 명의 야고보가 등장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저자 후보는 예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던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는 믿지 않았지만(마 13:55; 막 3:31.32), 부활을 통해 신자가 되었고(고전 15:7)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로 베드로가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간 주후 44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 듯하며, 이후 계속 교회를 섬기다가(갈 2:9, 12; 행 15:13), 주후 62년에 순교했습니다.

이 야고보를 저자로 보는 이유는 편지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배경 정보(2:5-7, 3:12: 4:13-17; 5:1-7)와 율법과 관련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 것(1:1,25; 2:1-26; 4:11)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 아래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저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와 함께, 초대 교회 전통도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편지의 저자로 소개합니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3.25.3; 2.23.25).

 

한편, 기록 연대는 두 가지 요소와 관련 있습니다. 하나는 저자입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저자라면 그가 순교하기 전 50년대나 40년대 중후반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다른 요소는 바울과의 연관성입니다. 만일, 이 편지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저술된 이후, 즉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바울의 편지가 본격적으로 집필되기 시작한 50년대 이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바울의 교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기에 편지의 기록 연대는 주후 40년대 중후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수신자의 상황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1)를 수신자로 부릅니다. 비록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수신자 대부분은 팔레스틴 지역에 살고 있고 유대 그리스도인인 듯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회당의 분리가 완전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황(참조. 2:2-4)에서 선생(3:1)이나 장로들(5:14)이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일부 부자들이 있었지만(참조. 2:2.3; 4:13), 대부분은 가난한 소작농이나 부유한 지주의 일꾼들이었습니다(2:2.3: 5:4).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핵심은 부와 가난과 관련한 세상의 영향력, 즉 소유로 인한 힘의 서열구조입니다. 세상은 소유를 통해 생긴 힘으로 계층과 서열을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가진 자는 위에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밑에 있습니다. 가난한 독자들은 자연스레 아래 계층에 속해 있었고, 소유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착취와 불의를 당하고 살았습니다(참조. 2:6,7; 5:1-6).

 

독자들은 그 상황을 뒤집을 힘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그 상황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시험 상황이 서신의 첫 주제(1:2-18)이자, 마지막 권면의 배경(5:7-20)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의 모습이 교회의 내적 문제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소유로 인한 차별(2:1-11)과 비교와 경쟁으로 인한 다툼(3:14-16; 41-12; 5:9)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힘의 서열구조를 동경하고 그 모습을 따라 형제들을 대하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참조. 5:19). 이런 면에서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소유와 관련한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예외가 아니기에 그들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3. 문체의 특징

야고보서는 몇 가지 인상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전개해갑니다. 첫째, 활발한 문답식 대화법(diainlle)입니다. 독자나 가상의 인물을 대화 상대자로 세워 어떤 주제나 상황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믿음과 행함의 문제’(2장)와 ‘지도자와 관련한 혀 사용’(3장)과 ‘교회 안에 있는 다툼’(4:1-12)을 다룰 때는 독자를 대화 상대자로 세우고, ‘부한 상인들’(4:13-17)과 세상의 ‘부한 지주’(5:1-6) 문제에 대해서는 가상의 대화 상대자를 세워 설명합니다.

바울의 편지 중 로마서가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지만, 야고보서는 훨씬 다양한 형태로 여러 상황에 대한 권면을 전달합니다.

 

둘째, 대화 진행과 관련한 다양한 서술 방식입니다. 그중 하나는 저자가 의도한 것을 독자 스스로 답하도록 유도하는 부정의문문 사용입니다. 긍정 대답과 부정 대답을 유도하는 두 가지 형태를 상당히 자주 사용합니다(긍정 대답 2:4-7,21,24; 4:1,4; 부정 대답 2:14; 3:11,12). 이는 독자를 가상의 대화 속에 참여시켜 주제에 집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서술 방식은 직접 화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2인칭, 혹은 3인칭 대화 속에 일인칭 지시어(1:13; 2:18; 4:13,15)나, 이인칭 명령(2:3,16)을 사용해 마치 상대방의 고백을 직접 듣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생생함을 통해 독자의 참여를 이끄는 형태다.

 

셋째, 다양한 형태의 예시들입니다. 어렵지 않고 일상에서 흔히 보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율법 행함과 관련해 ‘거울을 보는 예’(1:23-24)나, ‘혀 사용과 관련해 다양한 예들’(배와 말[馬]과 불과 길들이는 짐승들, 샘과 나무 등, 3:1-17)과 ‘부한 상인의 계획’(4:13-17)과 ‘지주들이 소유한 것들’(5:2-3)과 ‘욥’(5:11)과 ‘엘리야의 예’(5:17-18) 등이 그것입니다.

마치 독자와 대중에게 친근함을 주는 예수의 비유나 가르침을 연상케 합니다. 이 모든 방법은 독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하려는 저자의 배려이자 지혜입니다.

 

 

4. 주요 내용

 

(1) 하나님 나라와 새 언약 관계 안에서의 삶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자기 뜻에 따라 세상 어둠 속에 있던 신자를 말씀으로 낳는 것에서 시작합니다(1:18). 즉 과거 사건입니다. ‘낳았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새 창조를 의미함과 동시에 새 언약 관계에서 자녀의 신분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인간 편에서 믿음의 요소가 수반된 과정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 속 언약 관계는 신자의 현재 삶을 통제합니다. 신자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계명과 ‘형제 사랑’이라는 수평적 계명이며(1:27), 믿음과 함께 이 계명들을 지키고 행함으로 언약 관계에 충실한 자, 곧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데, 이 상태를 복이라고 부릅니다(1:25). 하나님의 현재적 함께하심과 온전함을 향한 성숙 과정(1:4), 그리고 미래의 완전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2:5)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신자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여러 시험을 당하지만, 복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에 속한 것들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1:2-4,27), 장차 있을 주의 재림과 심판을 기억하고(5:9) 주께만 순종하고(4:7,8) 견뎌야 합니다(5:7). 이를 위해 신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여 분별하는 것(5:19,20)과 기도를 통해 지혜를 포함한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1:5-8; 5:13-18).

 

(2) 의롭고 경건한 삶과 지혜

 

지혜의 소유 여부와 성격은 세 가지 과정을 통해 확인되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내적 상태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지혜를 통한 내면 상태의 모습은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하고(1:2-4) 불신앙(1:6-8)이나, 욕심(1:14,15)과 시기심(41,2)으로 얼룩진 파괴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둘째, 내면 상태를 밖으로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말이나 행동/태도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2:2,3; 3:9,10; 5:4), 다투고 자랑하거나(3:14; 4:1,11,13), 세상을 추구하는 것(5:5,6)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경건과 화평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1:26,27; 3:13,17,184:8,10; 5:8-10).

셋째, 내면 상태를 밖으로 표현한 결과다. 혀를 함부로 사용해 망하는 경우(3:5,6)나, 전쟁으로 표현되는 다툼의 부정적 결과가 있기도 하고(4:1),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한 의의 열매도 있습니다(3:17,18).

 

결국 지혜는 이 세 가지 과정과 결과의 모습으로 판단됩니다. 세상은 철저히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만을 성취하도록 돕는 것을 지혜라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런 지혜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 지혜요, 심지어 귀신의 지혜로 평합니다(3:15,16). 대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정체성과 삶을 드러내는 과정과 결과를 만드는 것을 참 지혜라고 합니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고, 이 또한 ‘지혜’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향한 믿음의 눈을 열어 잘 분별하고 잘 표현하며 살아가는 참 지혜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마음일 것입니다.

 

 

5. 바울 서신과의 관련성

야고보서는 바울 편지와의 관련성으로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특히 루터는 구원 과정에서 믿음을 중시한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해 야고보를 바울에 도전한 사람으로 평하고, 1522년에는 독일어 신약성경 서문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급기야 1534년에 그의 독일어 성경 완역본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외경의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비록 이후 성경에서는 야고보서의 위치가 교정되었지만, 루터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와 야고보서의 관계성에 혼동을 겪어왔습니다.

과연 이 둘은 정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쟁점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다루는 2:14-26입니다. 이신칭의와 반대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곧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과정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 부분은 신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저자는 이미 1:18에서 독자들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낳은 자들로 묘사하고, 그들을 믿음의 형제로 부릅니다(1:19; 2:1,14). 또한, 2:1에서도 독자들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로 전제해 설명합니다.

둘째, 2:14-26은 믿음과 행함의 대조가 없습니다. 오히려 저자의 초점은 믿음의 고백과 행함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2:14-17)과 행함 없는 믿음과 행함 있는 믿음 사이의 대조입니다(2:18-20),

셋째, ‘의’에 대한 이해입니다. 정체성과 관계성에 충실하다는 말로, 사람과 관련해 창조주께 반응하는 피조물다운 모습이며 언약 관계에 속한 자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의롭다 여김 받는다는 말은 단순히 죄 사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로 인해 마치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한 자처럼 여김 받는, 끊어진 그분과의 관계 연결이 포함된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뿐 아니라, 이후 삶에서의 신실한 모습을 지칭할 때도 사용됩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하고(2:22),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은 창세기 15:6 말씀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2:23). 믿음으로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간 상태를 행함으로 드러내어 관계의 신실함, ‘의로움’을 인정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문맥과 초점이 다릅니다. 다른 것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신자에게 율법 행함을 요구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고(롬 3:22; 갈 2:16), 이후 삶에서는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라고 말합니다(롬 13:8; 갈 5:14). 이는 야고보서의 설명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를 바울과 대화하는 편지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야고보서를 자체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6. 야고보서의 구조

1. 서론(1:1)

 

2. 부와 가난과 관련한 세상 영향력에 대해(1:2-18)

(1) 시험당하는 독자를 향한 권면(1:2-8)

(2) 부와 가난에 대해(1:9-11)

(3) 시험당하는 독자를 향한 권면(1:12-18)

 

3.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일반적 권면(1:19-27)

(1) 성마른 사람이 되지 말라(1:19-20)

(2)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1:21-25)

(3) 참된 경건(1:26-27)

 

4.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말씀 순종과 의로움(2:1-26)

(1) 말씀 순종으로 인한 의로움: 형제 차별에 대해(2:1-13)

(2) 말씀 순종으로 인한 의로움: 믿음과 말씀 순종과의 관계성(2:14-26)

 

5.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지도자에 대해(3:1-18)

(1) 지도자와 혀 사용(3:1-12)

(2) 지도자와 참 지혜(3:13-18)

 

6.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교회 안 다툼에 대해(4:1-12)

(1) 세상 욕심으로 서로 다투지 말라(4:1-3)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4:4-10)

(3)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4:11-12)

 

7. 부와 가난과 관련한 세상 영향력에 대해(4:13-5:11)

(1)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신자의 자랑에 대해(4:13-17)

(2) 세상의 부한 지주에 대해(5:1-6)

(3) 시험 상황의 신자를 향한 권면(5:7-11)

 

8. 마지막 권면들과 마무리(5:12-20)

(1) 맹세에 대해(5:12)

(2) 여러 기도 상황에 대한 권면(5:13-18)

(3) 진리를 떠나 형제를 돌아오게 하라(5:19-20)

 

      

결론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살던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듯을 깨달은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자는 이제 주님께 의지하는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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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03-02)


복음을 따라 사는 삶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6절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형식적으로 부탁하고, 다른 사람이 기도를 부탁해올 때 기도해주겠다고 말도 형식적으로 말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인에 대한 믿음이고 기대감의 표현인데, 기도 부탁이라는 핑계로 하나님께서 아니라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은 질서 있게 행하고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주야로 일했습니다. 성도들은 이를 본받고, 게으른 자는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말고, 불순종한 자를 형제같이 권면해야 합니다. 바울은 평강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길 원하며 편지를 맺습니다.

 

기도(1-5)

기도는 믿음의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게 하는 척도입니다. 기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행위이며, 우리 자신의 한계를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안전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미쁘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사 악한 자들로부터 지키실 것입니다.

 

1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자신과 일행을 위한 기도를 요청한바 있습니다(살전 5:25). 그때는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두 가지 기도제목을 서술합니다. 먼저 사역과 관련해 자신과 일행이 전하는 “주의 말”이 달음질하듯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자주 달음질에 비유하곤 했습니다(고전 9:24: 갈 2:2; 빌 2:16). 사실 그들의 달음질의 결과가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같은 또 다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여전히 말씀을 들고 달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통해 성도들이 그 일에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부당하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주시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들이 위탁받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늘 치열한 전투를 겪었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살전 2:24).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런 위협 가운데 있습니다(살전 2:18: 3:7). 복음을 전할 때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절과 물리적 저항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최전선을 달리는 사역자들을 위해 공동체의 기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 됩니다. 바울은 나중에 다른 공동체에 똑같은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롬 15:31; 고후 1:8-11).

그런데 복음을 방해하는 악한 자들은 최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데살로니가에도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늘 전투 가운데 서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했던 바울은 동일한 내용으로 성도들에게 복을 빕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건져주실 것을 강하게 확신합니다. 더불어 그들이 앞서 부탁한 전통을 잘 따라 행할 것도 확신합니다. 교회가 비록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그들을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기원합니다. 비록 현실은 녹록치 않지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온전히 배우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삶(6-15)

선한 사업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선한 사업 자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자기 생각대로 완고한 윤리적 요구는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무위도식하는 형제들을 떠날 뿐 아니라 사귐을 중단하여 부끄럼을 느끼게 하라고 합니다.

 

6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6-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형제 사랑과 관련해 ‘조용히 자기 일을 할 것’과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쓸 것’을 명령했습니다(살전4:9-12).

공동체 내에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그의 명령이 기대만큼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그때보다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규범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삶 자체가 무질서했습니다. 무질서는 앞서 언급된 주님의 미쁘심과 반대되는 성품입니다. 더욱이 과거 바울 일행이 보여주었던 질서 있는 삶(7)과도 반대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앞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성도들에게 가르쳐준 전통(2:15)과 명령들(3:4)을 잘 지킬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내 일부 성도들이 그 전통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들이 신앙 윤리에 반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구체적 이유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선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해 그들이 주의 날이 이미 왔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노동을 포기할 정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게 그들이 그저 생계를 위해 사회적 시스템에 기대어 복음의 가치를 저버리면서까지 불필요한 일에 참여하며 신앙인의 본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직접적 원인으로 고집하기는 어렵습니다. 종말에 대한 오해도 일부 원인이 되었겠지만, 그들의 문제를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재림만을 열렬히 기다리는 과격한 태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의 진짜 문제는 바울이 가르친 전반적인 신앙 전통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 윤리에 걸맞지 않은 대단히 무질서한 삶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것(not busy)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모든 일에 참견하는 바쁜 삶(busybody)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공동체 다움을 훼손하고 복음의 가치를 허무는 행위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일행이 최초 보여주었던 질서 있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전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살전 2:9). 바울 일행은 늘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질서 있게 행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야로 노동하며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여기 8절에 “수고하고 애써”라는 말을 어떤 영어번역본(JB)에서는 ‘노예처럼 중압감에 사로잡힌’으로 번역하며 바울 일행의 노동 강도를 실감케 해줍니다. 그렇게 지낸 까닭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신생 공동체에 어떤 폐도 끼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역자가 어떤 환대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형편을 잘 알았기 때문에 폐가 되는 일을 스스로 삼갔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올바른 본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복음을 품은 자의 신실함을 삶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로서 누릴 마땅한 특권과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듯이 그 본을 따라 신생 공동체 성도들을 진심으로 섬기려고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성도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범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고 자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종말을 사는 성도의 신앙 윤리를 몸소 보여주며 질서 있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이후 비교적 최근에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 무질서에 빠진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라고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명령한다. 전서에서 언급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살전 4:11) 쓰고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살전 4:12)라는 명령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선명한 신앙 전통과 윤리를 제시하며 그것을 따라 살도록 독려합니다. 물론 그런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고단함만 생각하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기에 즐겁고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고 또다시 격려합니다. 바울은 단호한 명령으로 본 단락과 편지 본론의 결론을 맺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편지에 묵직하게 새겨 넣은 내용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그 사람을 특정하여 부끄럽게 하고 교제를 단절하라는 대단히 강력한 징계 수준의 명령을 내립니다. 앞서 6절에서도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권징은 궁극적으로 대상자를 회복하고 명예로운 자리로 되돌리는 목적이 있습니다.

 

축복(16-18)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권태로운 현실이나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생각과 마음을 지켜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도 처할 줄 안 믿음의 선배였습니다.

 

1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16-18)

 

신생 공동체가 견디기에 만만치 않은 안팎의 도전이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평강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바울 역시 성도들이 끝까지 복음 안에 거하며 순종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려면 성도들이 그의 편지를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친필 인증을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글자에까지 자신의 사도적 진심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로 맺습니다.


기도는 희망의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의 표현이요, 무에서의 창조, 죽음에서의 살림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주님의 초월적 개입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강력한 능력임을 확신한 자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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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02-01)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때의 모임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


일반적으로 집에서 항상 먹는 밥이기 때문에 식상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씩 하는 외식이 특이하고 맛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식당에서 제공한 식사는 살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사는 한두 번 먹을 순 있겠지만, 계속 먹을 순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에서 해준 식사가 점점 그리워집니다. 영적인 부분도 식상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의 날에 관한 잘못한 가르침에 속지 않게 하려고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을 알려줍니다. 누군가가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도 두려워하거나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이라 높일 것입니다. 불법의 사람은 주님이 강림하셔서 폐하실 것이고,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는 심판받을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요청(1-3)

한 때 종말론이 한국을 휩쓸고 간 뒤, 요즘은 종말론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날에 과도한 관심을 가졌던 데살로니가 성도들과는 다르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날을 잊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주님의 날을 소망 중 기다려야 합니다.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1-3)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기록 목적은 대동소이합니다. 첫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경적 재림 신학과 신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특히 ‘주님의 재림이 이미 임했다’는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아 줍니다. 주님이 이제 곧 오신다는 임박한 재림 사상도 문제가 있지만, 주님이 이미 오셨다는 사상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는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거짓 교훈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증거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아직 배교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종말 전에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도전하는 일(배교)이 일어날 것이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을 현혹할 것입니다(4). 그런데 그런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소문을 듣고 흔들리는 이유는 믿음보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앞서면 두렵고 초조해집니다. 그릇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했던 주님의 날에 대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대다수는 밤에 도둑처럼 오신다고 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2). 하지만 당시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거짓 예언과 가짜 편지를 내세우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관해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실재로 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잘못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주장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법한 자의 결말(4-8)

개인이나 국가가 법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면 벌금, 투옥 또는 기타 법적 영향과 같은 처벌을 받습니다. 법 집행 당국은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 노력하며, 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목표는 범법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정의를 수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4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5-8)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법의 사람이 자기를 높이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할 것임을 증언합니다.

로마의 여러 폭군 중에 ‘가이우스칼라큘라’라는 악명 높은 황제가 있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흥을 권장했고, 국가행사 때 신으로 분장하고 마치 신처럼 행동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설치해 유대인들을 자극했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말합니다.

불법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탄압하고 엄청난 재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그 불법의 사람을 죽이실 것입니다. 그는 큰 세력을 가진 듯하지만, 예수님의 입의 기운(입김)만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8).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현재도 믿음 안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멸망의 심판을 받을 자들(9-12)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놀라운 이적이 곧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눈에 보이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이적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적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9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9-12)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고 진리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받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사탄의 능력으로 권세를 행사하는 불법의 사람에게 넘어가 멸망 당하고 맙니다(10).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소문에 흔들리지 말고, 구원을 확신하고 진리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재림의 소문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사탄의 세력에 넘어가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도가 두려워할 것은 도처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현혹돼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항상 진리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해 재림을 소망하고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직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서 않았고, 불법자가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의 벌써 왔다는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자는 사단의 작용에 따라 나타나서 온갖 능력과 표징과 이적을 행하고 불의한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자를 나타나게 하시고 그에게 미혹하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또한 그를 멸하십니다. 또한 그를 멸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올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그에게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그를 죽이고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 모든 성도들은 주님 앞에 모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멸망은 성도들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잘못된 소문에 흔들릴 것도 없고, 사탄의 현혹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매일 공급받으며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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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01-01)


자랑스러운 교회의 모습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2절


 

이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떵떵거리면서 살아간 것 같습니다. 더 나가서 의인들을 괴롭히는 불공평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언젠가는 반듯이 악인과 의인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분명히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로 인해 이 서신을 쓰게 되었지만, 바울은 이 교회 성도들의 성장과 성숙으로 인해 뿌듯함과 기쁨을 감추지 않습니다. 잘못은 따끔하게 책망하고 정확히 지적하여 교정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좋은 태도와 열매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기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인사(1-2)

믿음의 성숙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풍성한 사랑은 수평적인 차원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뜨거운 곳에는 감사도 넘쳐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성숙한 믿음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 이어 데살로니가 교회에 두 번째 서신을 보냈습니다.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며 서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와 같이 공동 발신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라와 디모데인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가서 함께 복음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동역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디모데는 최근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 돌아와 교회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공동 발신자로 언급하고 있지만, 2장 18절, 3장 5절, 5장 17절에서 1인칭은 ‘나’를 사용한 것을 볼 때,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편지들에 감사가 서두에 이어 나오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짤막한 감사입니다. 바울의 감사 대상은 하나님이며 내용이 길고 구체적입니다. 바울의 감사 방법은 기도할 때 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인사는 전서와 매우 유사하지만, 몇 가지 작은 차이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버지’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개인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돌보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모든 성도가 한 아버지의 영적 자녀들임을 시사합니다. 둘째는 은혜와 평강의 기원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임을 두 번이나 밝힌 것입니다.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 연대(連帶)가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친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강조하려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두 번째 편지도 성도들을 향한 삼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교회를 붙드셔서 은혜와 평안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요구합니다.

 

바울의 감사(3-10)

고난은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고 촉진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아무 탈이 없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이웃의 존재감을 더욱 또렷하게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믿음은 더욱 자랐고 사랑은 풍성해졌습니다.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3-10)

 

본문은 바울의 편지 중에서 가장 근 문장이 등장합니다. 헬라어 원문 3-10절은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상황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모두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의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그들의 신앙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감사한다’가 아닌 강한 의무감과 감격이 섞여 당연히 감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성도 간의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람’과 ‘풍성’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사방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는 매우 역동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무와 당연으로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2:13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런 감사의 요소들은 철저히 과거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현재진행입니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듯 그리고 물이 넘쳐흐르듯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이전보다 더 역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등장했던 삼중 표현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 중 ‘믿음과 사랑’만 언급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등장하는 “인내”는 전서에서 언급한 “소망의 인내”를 급히 소환합니다.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한 까닭은 현재 교회가 겪는 박해와 환난이 이전보다 훨씬 심각해졌음을 암시합니다. 고난에 대한 그들의 견딤은 이미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훌륭한 본과 자랑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 여전히 그들을 자랑하고 있음을 언급하며 신앙을 독려합니다. 외부의 적대감이 더욱 거세진 상황에도 그들은 인내하며 견뎠습니다. 물론 그 동력은 전서에서도 언급했듯 주의 강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박해와 환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설명했습니다. 특히 동족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은 유대에 있는 교회와 바울 자신도 경험하고 있는 성도의 숙명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박해와 환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넓게 필칩니다. 그는 고난의 현실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 정의하며 성도들을 안심시킵니다.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이 침묵하신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 생생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성도들이 인내하고 믿음을 놓지 않을 근거가 확보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성도와 핍박자들의 운명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바울은 성도와 핍박자의 운명을 교차로 두 절씩 소개하는데(5,7절 vs 6, 8: ABA'B'구조), 현재와 장차 주의 강림 때로 구분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핍박받는 성도들의 현재 운명을 다룹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수혜자가 되는 것인데, 그 증거가 바로 현재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받은 예수님을 영광으로 높이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공의였듯, 현재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도 영광은 확실히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을 영광에는 장차 주가 강림하실 때 얻을 안전한 쉼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7). 이것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공의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현재와 장래의 은혜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공의가 핍박자들에게는 어떻게 실현됩니까? 성도들에게 까닭 없이 환난을 가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불의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악인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참조, 롬 2:6).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현재적 보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성도들의 고난의 현재에 실제하듯이, 악인을 향한 신적 보응인 환난도 그들의 현재에 실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 예수가 강림하실 때에 최종적인 신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현재의 보응인 환난을 되갚으시고, 장래의 보응인 피할 수 없는 형벌이 내리십니다.

바울은 장래의 심판과 보응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8). 대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방인으로,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으로 구별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재림 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을, 후자는 복음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교회를 핍박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다음 장에서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질 것입니다(2:3-4).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대적한 자들이 심판당할 자들의 특징이라면, 반대로 고난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긴 진술을 통해 현재 고난받는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며, 현재와 장래에 항상 의로 우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것을 강력히 독려합니다. 마침내 주의 강림의 날에 있을 영광스런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해 “주의 얼굴”과 영광에서 떠나가지만(아포, 9절),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엔 아우토, 12절) 그 얼굴 앞에 나와 영광에 참여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성도들을 위한 기도(11-12)

은혜는 우리 안에 믿음을, 믿음은 영광을 낳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름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는 자는 고난과 불공정한 현실 속에서도 부르심에 함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기도는 불의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가게 만듭니다.

 

11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1-12)

 

사도 바울은 비록 육체로는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는 항상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합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성도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들려주면서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문장 앞에 위치한 “이러므로”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종합합니다.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가 어떤 확신 속에 드려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여기시며, 또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로 채워집니다. 우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에 할당한 자”로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직 합당하게 여겨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여겨주셨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기도를 듣는 성도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이런 존재로 서 있는지 상기시키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복음만으로 부름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부름받은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의 마땅한 요구이자 기대입니다. 바울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의 삶에 선한 열매가 맺히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성도들의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불어 성도들 역시 예수 안에서 영광이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바울은 이미 12절에서 예수가 강림하실 때 성도들로부터 영광 받으실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모든 신앙 여정을 마치고 드릴 미래적 영광이라면, 여기 영광은 그 여정 가운데 합당한 삶으로 드리는 현재적 영광입니다.


믿음의 성숙과 풍성한 사랑이 환난 중에도 이어질 수 있었던 비결은 악인과 선인에 대한 공정한 심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는 마음은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말기는 태도에서 비롯합니다. 그런 기대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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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2-01)

 


두 번째 시험을 당하는 욥

욥기 2장 1-13절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 앞에서 입술을 지키는 것이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시작입니다. 입술에 원망을 담지 말고, 믿음의 고백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고백과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뼈와 살을 치시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 합니다. 사탄이 욥을 치니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납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지만 욥은 입술로 죄짓지 않습니다. 세 친구가 위로하려고 와서 밤낮 7일 동안 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탄의 두 번째 천상회의(1-6)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가혹한 재난들을 만나면 대답은 궁색해지고 변증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해명할 수 없는 곤한 중에서 비로소 신앙은 빛을 발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민 속에서 욥이 보인 태도는 무엇입니까?

 

1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1-6)

 

본문은 욥기 1장 6-7절에 언급된 것과 유사한 형식과 내용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경건을 옹호하자 사탄은 소유의 시험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명과 직결된 시험을 제안합니다.

 

(1) 두 번째 천상회의(1-2)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사탄도 함께 등장합니다. 첫 번째 천상회의와 약간 달라진 부분은 사탄이 여호와 앞에 섰다라는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첫 번째 천상회의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 때문에,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사탄이 특별히 하나님께 나왔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2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어디서 왔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아마도 욥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에 사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땅을 두루 다니다 왔다고 말합니다.

 

(2) 욥에 대한 신뢰(3)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탄에게 하는 질문은 단지 1:8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탄이 까닭 없이 욥을 쳤음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온전함을 지켰습니다. 이것으로 욥의 경건은 사탄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3) 두 번째 시험(4-6)

 

사탄은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다른 주장을 관철하려 합니다. 사탄은 가죽으로 가죽을 바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물질을 바꾸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의미는 물물교환과 관련된 말입니다. 돈으로 돈(물질은 물질로)을 대신할 수 있지만, 생명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말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생명이기에, 사람은 생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물을 다시 거두어가시고, 그의 자녀들을 죽게 하셨지만, 정작 욥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기에 경건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욥 자신의 생명에 비하면, 그의 재산이나 심지어 자녀들까지 읍에게는 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약 주님이 손을 펴서 욥의 몸(뼈와 살)을 치신다면 욥은 틀림없이 주님을 향해 욕을 하리라는 것이 사탄의 주장입니다.

사탄의 이러한 제안에 하나님은 욥을 사탄에게 맡기십니다. 그러나 욥의 생명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조건을 거십니다. 뼈와 살은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지만,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따라서 뼈와 살을 치라는 것은 욥에게 육체의 질병과 고통을 가하여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어 보라는 말입니다. 사탄의 말에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 존재이기에 자기가 살기 위해시는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욥에게 닥친 두 번째 재앙(7-9)

 

고난이 닥치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시 141:3). 고난 중에서 우리는 하나니믈 운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 부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말들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더 악화시키고 관계를 깨뜨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입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7-9)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전신에 종기가 생기게 했습니다. 욥이 걸린 병은 피부병으로, 이는 고대 근동에서는 저주받은 자나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되었습니다(신 25:3.5). 이러한 질병은 욥의 고난을 악인이 당하는 심판과 연결시킴으로, 욥이 은밀하게 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 당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욥은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마을 밖 쓰레기 더미에 앉아 그릇 조각으로 피부를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욥은 그때껏 쌓아 왔던 화려한 경력을 잃고, 미래의 안녕을 보장하는 자녀들 역시 잃음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생겨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욥은 정신적, 물질적, 신체적으로 고통당했으며, 사회적으로도 격리되어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욥의 두 번째 반응(10)

하나님 외에 누구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두려움을 완전히 이해하고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킬 때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이제 욥에게 남은 것은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욥의 아내마저 욥을 향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서 ‘욕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실 ‘축복하다’를 의미하는 그리다. 이 히브리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번역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지만, 1:5의 경우처럼 굳이 이 부분을 완곡어법으로 보고, 욕하고 죽으라는 말로 대치시킬 필요까지는 없어보입니다. 70인역도 욥의 부인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욥의 아내는 괴로워하는 남편을 향해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는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한탄 섞인 조언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신학자가 욥의 아내를 부정적으로만 판단했습니다. 정말 욥의 아내는 칼뱅이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사탄의 도구이거나 악마의 조력자입니까? 욥의 아내는 많은 오해를 받지만, 실제로 욥을 떠나지 않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으며 그를 지켜 주었던 사람입니다. 어찌되었든 아내의 이러한 제안을 욥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화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욥은 결코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세 친구 등장(11-13)

성도는 가까이 있는 이들이 고통을 당할 때 선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 앞에서 입술을 지키는 것이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시작입니다.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1-13)

 

욥의 친구들이 그를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욥을 방문합니다. 이들은 에돔의 북쪽 지역으로 추측되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하나님께서 정복하신다), 유프라테스강 중부 지역으로 여겨지는 수아 사람 빌닷(하닷의 아들)과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은 나아마 사람 소발(새)입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욥기의 프롤로그와 대화 부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두 부분을 연결 시키는 매개체입니다. 친구들은 처음에 욥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욥의 상황이 안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욥을 알아본 후엔 소리를 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재를 날립니다. 그들은 7일 밤낮을 침묵하며 욥과 함께 있었습니다.


욥의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이 그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욥을 보면서 목숨까지 잃었던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께 대한 신뢰를 보였던 주님을 따라 나의 시험을 인내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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