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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1-02)

    


축복과 저주를 상징한 산들

신명기 11장 18-32절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쫓아다닙니다. 성공의 비결을 듣기 위해 강연회나 세미나도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찾아다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처럼 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의 기준을 들으면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성공적인 삶을 분석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어떻게 성공했는지 장단점들을 분석해보고, 장점은 받고 단점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들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장에의 율법 강론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그들 앞에 축복과 저주의 선택지를 내놓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사실 신명기 신학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누리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 역사의 교훈은 많은 용사들과 왕들이 불순종의 길로 이탈함으로써 심판을 받았고, 일부지만 신실한 영웅들과 그를 따른 백성은 신명기가 보장한 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축복과 저주의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반복된 쉐마 강론(18-20)

불순종한 자들은 목숨은 부지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참다운 생명은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성경의 원리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의지하고서야 참다운 길이 열립니다.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9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18-20)

 

위의 말씀은 세 번째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디든 언제든지 그 말씀을 떠나서 의미 있고 생명 있는 말씀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한 명령으로 반복하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규례와 율법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삶에 모든 역영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동행하라는 뜻입니다.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장의 본격적인 율법 강론을 위해 서론 부분에서 결론적인 권면을 전합니다. 본문은 6:4-9절의 쉐마 헌장의 반복입니다.

21절에 나오는 새로운 표현인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는 ‘땅 위에 하늘이 있는 날 동안에’ 혹은 ‘땅 위에 하늘이 있는 한’이 가장 적절합니다(ESV, NIV). 이것은 그들이 만일 쉐마의 훈시대로 순종의 삶을 산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세대무궁토록 잘 지낼 것이라는 약속하셨습니다. 쉐마 헌장이 강조하고 또한 신명기 전체에서 모세를 통해 설교되는 신명기의 핵심 주제이자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여 지키며,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여 지키는 자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한 국가에 속한 국민은 그 나라의 헌법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국민이며 그 분의 법이 곧 그 나라의 ‘헌법’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쉐마 헌장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헌법은 다른 신들의 나라의 헌법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과 애굽의 헌법과 문화적 관행, 즉 그들의 규례와 풍속을 따라선 안 됩니다(레위기 18, 20장).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사악하고 가증하며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입니다(레위기 18:3,30, 20:23).

 

항상 주어진 말씀을 영적으로 자기 체질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성도들의 주변에 있어 상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시험에 들 때나 힘들 때나 기도할 때 어떤 경우도, 항상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말씀에 무장되어 있을 때 함부로 넘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얻을 땅의 경계(21-25)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찾아할 땅의 경계는 생각보다 넓지 않지 않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의 통치가 아니라 사랑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섬김과 사랑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차지할 경계를 지정해 주십니다.

 

21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22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23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24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21-25)

 

이스라엘이 말씀을 순종하며 산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세세토록 잘 지낼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땅을 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크고 강한 나라들을 제압할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영토의 경계선을 확보할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이라는 표현과 ‘너희가 밟는 모든 땅’이라는 익숙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며 진정한 이스라엘인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영토 개념이 없으며, 이제 영적인 영역, 개념만 있을 뿐입니다. 이 영역은 주권이 행사되는 범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왕국의 시민이며 그분의 영토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영적인 ‘땅 밟기’가 필요하지만 실제적인 어떤 이방 종교의 사찰이나 종교 시설에 들어가서, 혹은 이방 종교를 믿는 선교지에서 하는 구약적 개념의 ‘땅 밟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신약의 전도자들도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오직 영적인 싸움을 벌이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통치에 맞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영적인 ‘땅 밟기’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차지할 약속의 땅의 범위가 간단히 설명됩니다(24). 그것은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입니다. 이러한 간략한 묘사로는 정확한 약속의 땅의 경계 설정이 힘듭니다. 이것은 아마도 남쪽 아라바 광야동쪽 레바논; 북쪽 유브라데 강; 서쪽 지중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1:7에서 모세가 이미 설명한 범위인데 요약하면 현재의 24절과 일치합니다. 북쪽으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 동쪽으로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레바논 지역, 남쪽은 아라바 광야 너머 아카바 만까지, 동쪽은 지중해 해안 이 화장된 국경선의 약속의 땅의 범위는 이미 출애굽기 23:30-31에서 예고되어 있습니다. 또한 분명 이 국경선은 훗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취된 경계선들과 거의 일치합니다. 사실 오경에서 약속의 땅은 두 단계로 나뉘어 설정됩니다. ‘최초의 약속의 땅’과 ‘확대된 약속의 땅’입니다. 애초에 약속의 땅은 단지 요단강 서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첫 단계에서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요단 동편의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34:1-15에는 이 일차적 약속의 땅인 요단 서편의 경계가 동서남북을 따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됩니다. 요약하자면,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은 요단강, 남쪽은 가데스 바네아, 그리고 서쪽은 중해 연안입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 땅은 포함되지 않으며 북쪽은 유브라데 강이 아닌 하맛 어귀까지로 제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약속의 땅의 범위를 확대해서 그들에게 주겠다고 출애굽기 23:30-31에서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을 때까지 내가 그들 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그 땅의 주민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이 진술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국경이 홍해에서 블레셋 바다(지중해)까지, 광야(아마도 남방 광야)에서 그 강(구약에서 그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말하며 여기서는 그 강의 상류다)까지 이른다는 것으로 신명기의 진술과 일치합니다. 이 국경선은 훗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취된 경계선들과 거의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땅을 다 얻을 때까지 대적들을 ‘조금씩 쫓아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30).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요단 동편은 넓은 의미의 ‘약속의 땅’의 범위에 들어갑니다. 신명기는 현재 이 확대된 약속의 땅의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에 선택이 아니라 이미 약속되어진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포: 그리심 산과 에발 산(26-32)

땅을 정복하는 일도 믿음으로 얻는 선물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도 그 약속의 땅을 누리는 길이 됩니다. 성도의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순종할 때, 자연스럽게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6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2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26-32)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복을 누릴 것이나 그분의 ‘도’를 떠나 알지도 못하던 그 땅의 신들을 따라간다면,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27-28). 모세는 이 양자택일 앞에서 백성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특별한 의식을 진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반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행사입니다. 모세는 이 두 산이 요단 강 저쪽 곧 해 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심 산은 세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들입니다. 세겜은 현대의 나블루스(Nablus) 동쪽에 소재한 성읍이었는데, 그리심 산은 남쪽, 에발 산은 북쪽에 위치합니다. 구약의 세계에서는 동쪽을 기준으로 오른쪽인 남쪽이 더 선호되는 방향이고, 왼쪽인 북쪽은 열등한 방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남쪽과 오른편의 그리심 산이 축복 선포의 산, 북쪽과 왼편의 에발 산의 저주 선포의 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27장에서 더 구체적인 축복과 저주 선포의 의례 절차를 설명합니다(27:11f). 각 지파는 다음과 같이 자리를 배치해야 합니다. 그리심 산-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에발 산-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레위 사람들이 가운데 서서 다양한 금지 계명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씩 선언할 때마다 모든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훗날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정복한 후에 모세의 이 명령을 따라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앞에서 이 의례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성도들의 주변에도 그리심과 에발 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순종하여 축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심 산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불순종해서 저주와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고 신앙의 경종을 울려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에 따라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을 쫓아가지 않아도 복은 자연스럽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도 이스라엘처럼 끝도 없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을 만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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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1-01)


더 없이 중요한 선택

신명기 11장 1-17절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빨리 간파하고 자신의 신앙을 바르게 세우는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놀랍게 임합니다. 신앙이 식어지면 신앙의 문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은 생활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 막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나 한 번쯤은 성공해보려고 생각하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이 온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축복을 누리고 사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앞서 연설한 역사적 회고를 여기서 일목요연하게 종합해서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와 그 온 땅에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시고 또한 뒤쫓아 온 바로의 군병들을 따돌려 홍해를 가르신 뒤 그들을 바다에 수장해서 진멸시키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그토록 소망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적 회고에 대한 결론(1-7)

종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에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려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이후에도 인도하실 하나님의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1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2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 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3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4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5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6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 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7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1-7)

 

과거가 오늘 선 자리를 알게 해주고, 오늘은 어떤 미래로 이어질 것인가를 약속해줍니다. 이런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2세대 역시 2세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법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는 동일합니다. 비록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현재는 과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일이 있어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앞선 모든 역사적 회고가 간략히 요약됩니다. ‘순종하라’는 요구를 두 가지 역사적인 사례로 강화하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사건을 통해 교훈합니다.

 

⑴ 출애굽의 이적과 기사(1-5)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함으로 얻은 구원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을 출애굽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거듭된 반역했지만, 그들을 이끌고 오늘 모압 광야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분의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언제나 잘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여기서 ‘책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직무나 의무 사항을 말합니다. 그분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교훈’을 주셨습니다. ‘교훈’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몸으로 체득된 교훈을 뜻합니다.

사실 출애굽 이후의 모든 이적과 기사는 출애굽 당시의 압도적인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이후의 숱한 기적들과 신비한 경험들, 즉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과 극적인 식수 공급까지도 이에 비할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큰 권능의 역사와 홍해를 가르신 일은 이후의 모든 기적들을 대표하는 사건들입니다. 모세가 지난 역사를 총 정리하면서 애굽에서 있었던 최초의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끄집어낸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하나님마저 신뢰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배교와 반역을 반복하며, 잠깐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한 백성이 광야의 숱한 난관과 역경들을 뚫고 지금에 이르게 인도하셨습니다.

 

⑵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6-7)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역겨운 짓을 했습니까? 그래서 저주를 받아 망했습니다.

모세는 그중 가장 극단적 사례 하나를 대표로 끄집어냅니다. 이것 역시 초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정탐꾼 사건을(민수기 13-14장) 능가하는 이스라엘 최대의 배교 행위였습니다(민수기 16장). 당시 고라가 주동했던 반역 사건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한 무리는 아론과 그의 가문의 제사장권한에 불만을 품고 그의 제의적 권력을 찬탈하려 한 레위인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었으며, 다른 한 무리는 모세의 지도권에 반항하여 그의 정치적 권력을 뒤엎으려는 다단과 아비람과 그 추종자들이었습니다(온이라는 인물도 한 번 등장하나 이후 전혀 언급이 안 됨). 다단과 아비람은 장남인 르우벤 지파에 속한 자들로서 그들은 장남 지파인 자신들이 대접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무리는 목적이 달랐으나 한 패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선동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위와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반란이 두 방향으로 진행된 것처럼 심판도 두 가지 방식으로 집행되었습니다. 고라와 250명의 추종자들은 성막 앞에서 하늘의 불을 맞고 몰살당했으며, 다단과 아비람 일당은 진영에서 세를 규합하다가 땅이 갈라져 집단으로 매장되었습니다. 민수기는 다단과 아비람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산들, 그리고 살아 있는 가축들도 매몰되었다고 보고합니다(민수기 16:30-32). 신명기는 다시 한 번 이 보고에서 민수기와 엇박자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민수기는 고라가 주동해서 다단과 아비(그리고 온)이 세력을 규합했다고 보고하지만, 신명기에서 모세의 회고는 고라가 누락된 채 다단과 아비람만 등장합니다. 이에 대한 랍비들의 전통적인 설명은 모세의 연설에서 고라가 빠진 이유는 당시 심판의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고라의 아들들을 모세가 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실제로 민수기 26:9-10은 그 사건을 다시 회고하면서 반역의 무리가 몰살당할 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틀림없이 고라의 자녀들 중 일부가 하나님의 경고를 따라 심판의 장소를 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중시하여 살아남은 그들 은 훗날 큰 축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이 성전의 음악을 맡았고 많은 아름다운 시편의 시들을 남겼으며, 또한 사무엘이 고라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니다(역대상 6:34-38). 분명히 모사는 그 믿음의 사람들인 고라의 아들들을 배려해서 역사적 회상에서 고라의 이름을 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 목적은 이스라엘 현 세대에게 이전 세대의 순종에 기대지도 말고, 다음 세대에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으면서 지금 여기서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의식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각 세대는 언약적 책임이라는 면에서 이전 세대와 연속성 및 연대성을 갖습니다. 그와 동시에 각 세대는 스스로 반응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속받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8-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들을 강성하고 큰 기업으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차지한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며, 열악한 환경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요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8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9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0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8-17)

 

이스라엘이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하늘을 막아버리십니다. 가나안 땅은 애굽과는 다른 농사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농사를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⑴ 약속의 땅에서의 농사법(8-12)

 

이렇게 극적인 하나님의 많은 기적을 은혜와 심판의 교훈으로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절대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명령과 계명을 지키면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약속의 땅과 거기서 누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장수의 축복의 원천입니다.

지금의 세대와 더불어 세대를 이어 대대손손 이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스라엘은 장구한 날 동안 그 땅에서 풍요로운 복을 누릴 것이고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장구한 날’은 많은 세대로 이어지는 오랜 거주뿐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의 장수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은 특별한 땅입니다. 애굽 땅의 농사법과 가나안 땅의 농사법은 전혀 다릅니다. 애굽은 끝이 안 보이는 옥토가 펼쳐져 있는데, 그 땅에서의 농사법은 ‘발로 물대기’입니다. ‘발로 문대기’란 발로 수차를 돌리거나 논밭에 연결된 좁은 수로에 맨발로 들어가서 물을 퍼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땅의 농사법’입니다. 그것은 수문을 열고 닫을 때 발을 이용하는 작업이나 물줄기를 논밭에 있는 수로로 연결하기 위해 흙더미를 쌓는 고된 노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더욱 그럴듯하게는 그것은 물통에 물을 담아 ‘발로 걸어가서’ 논밭으로 운반하는 작업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의 농사법은 ‘하늘 농사법’입니다. 사람이 물을 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을 대십니다. 그 땅엔 많은 산과 골짜기가 있기에 하늘에서 비를 내리면 그 산과 골짜기들을 채우고 그 땅은 물을 흡수해서 식물의 뿌리까지 충분한 물을 공급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흡수한다는 표현을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로 해석합니다. 즉, 석회질의 그 땅의 토양이 물을 쉽게 빠지게 하여 식물이 자라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하늘에서 물이 수시로 내려와 땅이 그 물을 빨아들여 계속적인 수분 공급으로 식물들이 넉넉히 자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 농사법은 애굽 농사법처럼 힘들게 두 발로 물을 퍼올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늘에서 그런 충분한 비를 내려주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으로 연주 내내 여호와의 눈이 항상 지켜보시며 보호하시고 공급해주시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⑵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축복(13-17)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백성에게 하늘의 한없는 저수지의 수문을 열어주신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곧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비가 내리는 시점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파종할 시기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해 농사는 제 아무리 나중에 많은 비가 쏟아져도 흉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수확 직전에 충분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곡식은 줄기만 커졌을 뿐 낟알이 제대로 차지 않아 흉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 비’는 음력 7월에 내리기 시작하고 ‘늦은 비’는 6개월 후인 음력 1월에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면, 그들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신선한 양질의 포도즙)와 새 감람유를 넉넉히 수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축들도 들판에 무성히 자란 풀을 마음껏 뜯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신들을 의지하고 가나안의 바알을 농경 신으로 섬기면서 복을 빈다면, 하늘의 수문은 닫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복을 체험할 수 있었지만, 불순종한 경우에는 하늘을 닫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떡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달려 있음을 변함없이 믿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생계수단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모든 복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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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0-01)

 

   


두 번째 십계명을 주신 여호와

신명기 10장 1-22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또한 모든 인류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한 이유를 주변에서 찾으려 하지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환경이나 사람이 대부분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곳에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광란의 금송아지 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필사적인 중재와 탄원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표출한 모세는 십계명 두 돌판을 깨트려 하나님의 언약 파기를 선언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시내산 정상으로 부르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들을 친히 준비해서 올라오라 명하셨습니다.

 

두 번째 십계명 돌판(1-11)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의 기업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거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친히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기업이 되십니다. 친히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온 맘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6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10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1-11)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은 번번이 그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들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진노하시면서도 회복을 위한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⑴ 모세를 다시 부르신 여호와(1-5)

 

모세의 목숨을 건 중재와 탄원을 받아들여, 일단 황금 송아지 사건을 용서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정상으로 그를 재소환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두 돌판을 모세가 깎아서 준비해 와야 하며, 그 돌판들을 보관할 법궤를 조각목으로 제작해야 합니다. ‘나무궤’(아론 에츠)는 조각목으로 틀을 짠 궤(상자)를 뜻합니다. 조각목은 정확히는 중동 지역의 광야에서 자라는 싯딤 나무지만, 관례적으로 사용된 명칭인 조각목으로 부르기로 하자. 이 나무궤는 신명기에서 ‘언약궤’라 칭하는데, 구약 전반에서 이것은 ‘법궤’, ‘언약궤’, ‘증거궤’, ‘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 등으로 불립니다.

첫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고 십계명을 새기셨지만,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즉 사람 편에서 준비합니다. 이것은 언약 파기에 대해 백성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40일 금식을 하며 백성의 완전한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중이므로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돌판에 한 것처럼 두 번째 돌판 위에도 십계명을 새기신 뒤 모세에게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법궤 안에 두 돌판을 보관하라고 명하셨습니다(출애굽기 25:16). 법궤는 조각목으로 짠 나무 상자이며, 안쪽과 바깥쪽에 두꺼운 금을 입혔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카포레트)라 불리는 금덩어리로 제작한 비품을 얹어 놓았는데, 속죄소에는 두꺼운 금관 양쪽에 금덩어리를 부어서 조형한 뒤 세공해서 만든, 날개를 드리운 두 그룹(cherub) 형상이 놓여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5:10-23;37:1-9). 여기서 법궤 제작 시점이 문제가 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새로운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온 다음(출애굽기 34:1) 성막 건설과 법궤를 비롯한 비품 제작이 시작됩니다(출애굽기 35장). 그러나 여기서는 조각목 궤를 짜놓고 시내산으로 올라와 십계명 돌판을 새로 받은 뒤 그것을 거기에 두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읽힙니다. 출애굽기와 상이한 시간 순서에 따른 신명기의 설명은 다른 곳들에서도 흔하게 발견됩니다. 시간 순서를 중시하지 않는 신명기 특유의 기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출애굽기를 따라 실제 법궤 제작자는 브살렐이고 모세는 성막 건설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법궤를 제작하라 한 것일 뿐입니다. 제작 시기도 엄밀하게는 출애굽기를 따라 시내산에서 하산한 후에 성막 건설이 시작될 때인데, 신명기는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⑵ 시내산을 떠난 후 여정(6-9)

 

모세의 연설이 끊긴 뒤 삽입된 설명부입니다. 이 삽입부는 시내산을 떠난 후 이스라엘의 여정을 요약해서 회상하면서 모세가 제작해서 두 돌판을 보관한 법궤를 누가 맡았는지 알려줍니다. 몇 군데 지명들이 우선 다음 순서로 나열됩니다(6-7): 브에롯 브네야아간-모세라-굿고다욧바입니다. 민수기 33:30-35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지명이 나타난다 모세롯-브네야아간-홀하깃갓-욧바입니다. 두 책들 속의 이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같은 장소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로 인한 것이거나, 두 책의 여행 경로 보고가 정확한 순서와 상관없이 기록되고, 많은 지명들이 선택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광야의 이동 과정에서 법궤가 항상 선두에 섰으며, 법궤 위에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내려와 백성을 인도해갔습니다(민수기 10:11-36). 법궤는 하나님의 보좌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앉아 계신 비품이었으며, 행진 시 법궤의 선두 진행은 일종의 임금님의 가마 행차와 같습니다. 법궤의 가마꾼들은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고핫 자손들입니다(민수기 4:5-15, 10:21). 신명기는 법궤 운반을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31:9). 이것 역시 민수기와 신명기의 모순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막의 모든 비품의 관리와 운반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들의 지휘 하에 법궤가 운반되었습니다. 또한 전쟁과 같은 비상한 상황에서는 고핫 자손이 아닌 제사장들이 직접 법궤를 메고 앞장선 사례들이 나타나므로(여호수아 2장; 4장; 6장) 모순된 보고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법궤 운반뿐 아니라 성막의 관리와 봉사라는 중책을 맡은 레위 지파는 땅 분배에서 제외되었는데, 대신 지정된 48개의 레위 도성에서 성전에 바쳐진 십일조와 각종 봉헌물에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 삽입부는 그것을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라’고 표현합니다.

 

⑶ 모세의 설교(10-11)

 

다시 모세 연설의 재개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두 번째 금식과 더불어 시내산에 40일간 체류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의 하나님 앞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패역한 백성들을 위해 탄원의 기도를 계속 올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결국 받아들여졌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용서하시고 모세에게 백성들을 선도하여 시내산을 떠나 광야 여행을 시작하라고 명하십니다.

 

택함 받은 백성의 의무(12-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물질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함께 다른 대상을 동급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하나님을 대처한 것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물질을 의지한다면,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숭배한 것입니다. 신앙에서는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여호와가 되십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12-22)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의 태도를 버리고 순종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근본 태도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한 답변과 이렇게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분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언급됩니다. 

 

⑴ 하나님을 사랑하라(12-16)

 

모세는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과 그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12장의 본격적인 율법의 재선포에 앞선 강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12-22절은 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오늘날에도 그것을 요약한 내용이 ‘경외문’(the paragraph on reverence)이라는 제목으로 유대인들의 기도 책자에 나타나며, 거기서 발췌한 문구들이 앞서 말한 테필린과 메주자에 기록되기도 합니다. 12-13절에 걸쳐 절대 순종에 대한 요구가 여러 동사들을 통해 반복되면서 강조됩니다. ‘도를 행하고…사랑하고…섬기고…지킬 것이니라.’ 앞서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국제 관계에 빗대어 잘 이해되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봉주와 봉신의 관계는 일대일입니다. 어떤 속국이 구 제국의 봉주를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두 왕, 혹은 여러 왕을 하늘의 봉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여러 왕들에게 분산된 충성은 진정한 충성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6:24;16:13).

만일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대상을 그분과 동급으로 의지하고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대상이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하나님도 믿고 돈도 의지하고 있다면, 그는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회색 지대와 양다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여호와이십니다.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전형적인 총칭 어법 (merism)입니다. 그분은 모든 하늘의 주인이시고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시어 일방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택함 받은 백성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굳은 목으로 하나님께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마음의 할례’, 즉 내면에 대한 할례가 구약에서 최초로 등장합니다.

 

⑵ 약자를 사랑하라(17-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들 중의 신이요 주들 중의 주’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백성을 인도하셨고 다른 신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신명기 32:12). 그분만이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다’(열왕기하 19:19; 참조, 이사야 37:16).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백성은 또한 마땅히 이웃을, 특히 약자를 보호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실천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계명의 순종으로 증명 되듯이 이웃사랑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베푸는 행동으로 증거가 됩니다. 특히 나그네와 약자를 잘 돌보아야 합니다. 결코 가난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무시하고 부자를 편애해선 안 됩니다. 그들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며 고통당했는데, 하나님께서 해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 축복을 받아 70명의 조상에서 지금 하늘의 별처럼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생명을 누리고 이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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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9-02)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재

신명기 9장 13-29절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날마다 선물을 받는다면 매일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루’라는 포장 속에 많은 선물들이 배달되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하나씩 열어 봅니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것이 적당한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기쁨은 선물의 종류가 아니라 선물을 받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삶은 선물이고 기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질 못하고 화를 자초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정상의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동안, 산 아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불과 40일 전에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십계명을 받은 백성들이(출애굽기 24장)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는 가장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때 맹렬한 심판으로 멸망할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 드리는 모세의 탄원 기도는 절박하고 처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진급한 중재(13-18)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섬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임의대로 만든 후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축복하기 위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히 형상화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의 손으로 임의대로 만든 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자신을 축복해 주는 종교로 만들어가는 우상화 작업입니다.

 

13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14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15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16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17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18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13-18)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받을 백성에서 버림받은 백성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사건을 언급합니다. 이런 위기에 처해 있던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⑴ 목이 곧은 백성(13-14)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는 첫 번째 사건은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한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온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자신들을 출애굽한 신이라고 섬깁니다.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 두 돌판을 받은 모세는 산 아래 백성들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분노하시면서 백성들이 극단적 패역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9:6에서 모세가 백성들의 근본적 악함을 가리킬 때 사용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나를 막지 말라’는 말은 그들을 멸망시킬 결심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패역한 백성을 제거하고 모세, 너를 통해 크고 강대 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없앤다’는 표현은 고대 중동의 전형적인 저주 문구로서 대적을 전멸시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참조.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천하에서 버리라는 지시, 출 17:14; 신 25:19). 사람은 죽은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보존되기를 원하는데, 그 이름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사후에 어떠한 명예도 그에게 돌리지 않는 저주의 징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다’라는 약속은 사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것이었는데(창세기 12:2), 현재 하나님의 제안은 그 언약을 파기하고 약속의 계승자를 모세로 바꾸겠다는 선언입니다.

 

⑵ 시내산을 하산한 모세(15-17)

 

소스라치게 놀란 모세는 황급히 돌이켜 시내산을 내려갔습니다. 하산 길에 그는 그 신령한 산에서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불이 뿜어져 나오는 장면을 보았으며, 두 손에는 십계명 두 돌판이 들려 있었습니다.

하산한 모세가 목격한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조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광란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속히’ 떠났다는 모세의 말은 적절합니다. 그들은 바로 직전에 시내산 언약을 맺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산 위에 올라간 지 불과 40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당장의 안전과 보호 속에 자신들을 인도할 구체적인 신이 필요했으며, 그 신은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황금 송아지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신입니다. 하산 길에 축제의 현장에서 들리는 괴성이 어찌나 컸던지, 모세와 동반했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진영 내에서 큰 싸움이 난 줄로 착각했습니다(출애굽기 32:17). 그러나 모세는 산 아래의 사태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 소음이 그저 광란의 ‘노래 소리들’인 것을 간파했습니다(출애굽기 32:18). 백성들의 춤은 소리를 지르며 온 몸으로 추는, 그리고 음란한 행위마저 수반된 광란의 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분노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트립니다(17). 돌판을 깨트린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파기를 상징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법에 의하면, 계약 파기는 당시의 계약서였던 점토판을 깨트림으로써 확정되었습니다.

 

⑶ 중보 기도하는 모세(18)

 

모세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 대한 대가로 심판 당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돌판을 파기하면서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다시 시간의 순서를 잠시 이탈해 그 후 모세가 결행한 두 번째 40일 금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모세의 연설은 19절에서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복귀하여 잠시 이 금식 주제가 끊겼다가 25절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첫 번째 금식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음식과 물을 모두 끊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금식은 목적과 취지가 달라졌습니다. 앞서 첫 번째 40일 금식에서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끊고 하나님의 면전 앞에 거룩하게 서서 말씀을 받기 위함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에서는 그가 백성들의 죄로 인해 금식의 고행을 자처한 것입니다(18,25). 결국 모세의 여러 차례에 걸친 중재 기도와 금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이후 깨진 두 돌판이 나중에 다시 제작되는데 이 때는 모세가 친히 깎습니다(출애굽기 34:1,3,28-29). 이것은 언약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가만히 있지 않고 이스라엘 범죄 현장으로 내려옵니다. 이 모습은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진멸되어야 합니다. 그 심판에 대상이 아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 굳지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면서까지 그 역할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중재와 사건 해결(19-21)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를 충성했거나 거역하지 안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후에도 속히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거역과 불순종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19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20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21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19-21)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라야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따라야할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격노하시고 멸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위기마다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한 역할을 합니다.

 

백성이 진멸할까 두려워한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참조, 출애굽기 32:32). 뜻을 돌이켜 달라는 기도는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탄원 형식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모세의 결사적인 탄원 기도와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9).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 아론에 대한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론은 영적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입니다. 백성들의 집단적인 종교적 타락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었으며 오히려 그것에 적극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백성을 엄중히 꾸짖은 뒤,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자신의 목을 걸고 탄원의 기도를 드린 모세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백성의 여론에 떠밀린 아론은 신의 형상을 제작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금귀고리를 빼서 금을 모으라고 지시했습니다(출애굽기 32:2). 애초에 백성들이 모은 금붙이는 성막 건설을 위한 봉헌물로 바쳐져야 하지만 불행히도 우상 제작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조한 금송아지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에젤’은 새끼 송아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1년생(레위기 9:3; 미가 6:6)에서 3년생(창세기 15:9)에 이르는 어린 연령의 젊은 수소로 충분히 자란 소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출토된 15-20센티미터 크기의 청동 송아지 상으로 보아 그것이 실물 크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세는 그 금송아지를 불살라 찧고 가루로 빻아 그것을 산의 계곡물에 뿌렸다고 말합니다. 현재의 신명기 본문은 이 우상의 가루를 시내산 시냇물에 뿌렸다고 말하지만, 출애굽기에서는(출애굽기 32:20) 그 가루를 백성들이 마시게 했다고 보고합니다. 아마 두 책의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가루의 일부를 계곡에 뿌리고 그 물을 떠 와 백성들이 마시게 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그 우상의 가루를 마신 것은 그들의 공동책임을 확증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의 배교 행위들(22-24)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서지도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래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시작점입니다. 

 

22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23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24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22-24)

 

그들의 배교는 금송아지 사건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중재로 그들은 극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에도 시내산을 떠난 직후 광야 여정의 첫걸음부터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만성이 된 그들의 반역질로 인해 모세는 내가 너희를 처음부터 알아봤다고 질타합니다.

 

용서를 위한 모세의 탄원 기도(25-29)

범죄한 이스라엘에게서는 용서받을 만한 근거를 전혀 찾아 수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그 언약을 근거로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히 주님의 십자가 공로와 그 언약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긍휼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25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26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27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28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니이다 29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25-29)

 

하나님께서는 이 극악한 패역 행위를 자행한 백성을 멸망시키고 모세를 통해 새로이 큰 나라를 이룰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을 통해 대안적 큰 나라를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40일간 금식하며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출애굽기 32장과 이어지는 신명기 10장에 비추어 볼 때, 모세는 분명히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조목조목 논지를 펼쳐가며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첫째,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속량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니 멸망시키면 안 됩니다(26). 여기서 이스라엘을 ‘내 주의 백성’으로 지칭하면서 12절에서 ‘너 모세의 백성’이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맞대응 합니다.

둘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서 이들을 용서해 달라. 만일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하나님께서 파기하신다면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계수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이 백성을 힘들게 애굽에서 끌어내신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멸망시키시면 애굽 민족이 하나님을 조롱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차라리 하늘의 생명책에서 뺄지언정 백성들은 살려달라는 모세의 끈질긴 탄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결국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세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로운 모세로 오셨던 예수님의 생명을 바친 희생을 통해 ‘너를 통해 새로운 큰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성취되었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은 잘려 나간 나뭇가지가 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큰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모세는 거역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모세가 그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진작에 심판을 받고 진멸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거역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용서를 받을 수 있었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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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9-01)

 


과거 광야에서 은혜로 주신 구원

신명기 9장 1-12절


세상에 아무도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는 왜 지금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고 여쭈어야 합니다. 의무감으로 살아가면 힘들 것입니다. 다만 그 의무가 하나님과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라면 더 이상 의무감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에게 물에서 사는 것은 의무감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계에서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9장은 다시 ‘쉐마’, 곧 ‘들으라!’는 명령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모세는 다시 한 번 만만치 않은 대적들을 눈앞에 두고 백성들이 심기일전하여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출애굽 후부터 지금까지 목이 곧은 백성으로 항상 여호와를 거역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시내산 아래의 금송아지 우상 사건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진멸을 약속하심(1-3)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너무나도 쉬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상직적으로 볼 때에는 우리가 도무지 세상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게서 앞서 싸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1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3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1-3)

 

모세의 두 번째 설교가 계속됩니다(4:44-26:19). 모세는 9:1-10:11을 여는 구절은 신명기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른 많은 주제를 요약합니다. 다시금 ‘들으라 이스라엘이여’를 외치며 이스라엘을 강하게 독려합니다.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그들은 정복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가장 큰 문제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의 방향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약 38년 전 가나안 정탐하고 나서 가나안 정복의 불가능을 역설했던 정탐꾼들의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민수기 13:25-29). 가데스에서 정탐꾼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 가나안 사람들의 거인 같은 골격과 그들의 견고한 성읍들로 인해 떨고 있었습니다. 모세 또한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그 민족들은 ‘크고 강대한 나라’이며 그들의 성벽은 견고한 요새와 같아 성벽은 깎아지른 듯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인구도 많아 천하에 당할 민족이 없어 보입니다(1-2).

그러나 용사이신 하나님을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강한 민족들 앞에서 비관적인 말을 해선 안됩니다(2).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대에 민족 간의 전쟁은 사실상 민족 신들끼리의 전쟁이었습니다. 앞서 그들은 이미 아모리의 두 왕을 연파함으로써 이 사실을 직접 경험한 상태입니다. 아모리가 모압을 제압함으로써 아모리의 달신인 신(Sin)이 모압 신 그모스를 이겼는데, 여호와께서 그 달 신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했으면서도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그들의 신들을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38년 전 정탐꾼들은 자신들을 메뚜기에 비유하면서 괴물과 같은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단정 지었습니다(민수기 13:28f). 이것은 아낙 자손과 그들의 신을 발아래 두시는 하나님 그보다 더 강대했던 파라오와 그 신들과 군대를 제압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맹렬한 불’, 정확히는 ‘서명하는 불’이요 ‘삼키는 불’이십니다(4:24). 그분이 뿜어내는 불이 하나님의 임재의 불이요 두려운 심판의 불이라는 사실은 몇 차례 드러난 바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 뒤쫓아 오던 파라오의 군대를 저지한 보호의 불기둥이 이스라엘 진영에 내려왔으며(출애굽기 14:20), 백성들은 시내산 정상에 불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신현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출애굽기 19:18). 그 불은 잘못된 제사를 시도하던 두 제사장 나답과 아비 후를 삼켰으며(레위기 10:1f) 반란을 일으킨 250명의 고라 일당을 몰살했던 심판의 불입니다(민수기 16:34). 이제 그 삼키는 불이 이스라엘을 이끌며 나갈 것입니다. 백성들은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삼키는 불을 뒤따라가며 그들을 전멸시켜야 가나안 족속을 무찌르고 속히 그들을 전멸시켜야 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 애굽의 강력한 군대와 철병거가 수장시키시고, 광야에서 아말렉 군대를 쳐서 파하셨고, 옥과 시혼이 어떻게 몰락시키셨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앞서 나아가서 싸우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뿐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진멸된 이유(4-6)

구원에 관한 한 사람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뿐입니다(참조. 에베소서 2:8,9). 현장에서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약체 이스라엘이 강력한 민족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전술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4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5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6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4-6)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한 후에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습니다. 행여나 그들은 그 땅의 정복한 것이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 길은 ‘믿음’과 말씀에의 ‘순종’입니다.

모세는 앞서 계명 준수가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 우리는 말씀 순종을 통해 계속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의로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원을 받을 만한 자격을 스스로 갖췄다는 자긍심을 말합니다. 이 의로움은 자신의 노력과 행위, 공적을 통해 갖춘 자질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은 의롭고 가나안 백성들은 불의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나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로워서 그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순전히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성취하신 업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유산(기업)으로 주신 이유는 자신들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목이 곧은 백성’일 뿐입니다. ‘목이 뻣뻣하다/곧다’라는 표현은 오경에서 이스라엘의 완고한 불순종을 표현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등장하고(출애굽기 32:9;33:3,5;34:9; 신명기 9:6,13;10:16;31:27),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하는 문맥에서 계속 나타납니다(열왕기하 17:14, 역대하 30:8; 느헤미야 9:16-17,29, 예레미야 7:26). 특히 잠언 29:1은 ‘목이 곧은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망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목을 숙이지 않는 인간의 고집스러움과 거만함에 대한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가 산에서 받은 십계명 두 돌판(7-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사람들에게 살아주길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하나님 백성다운 살기 위해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십니다.

 

7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8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9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10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11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12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9-12)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내내 뻣뻣한 목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며 그분을 분노케 했던 일들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대표적인 사건이 호렙 산에서 저지른 금송아지 사건은 정탐꾼 사건과 더불어 가장 중대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자마자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 정상에 하나님을 알현하러 올라갔습니다(9;참조 출애굽기 19:3). 그는 40일 밤낮을 음식은 물론 물마저 마시지 않는 극단적 금식을 하며 보내면서, 거기서 십계명 돌판을 받았습니다(아마 그 외에도 십계명 이후의 언약의 율법과 성막 제작법 등 일련의 율법들을 받았을 것이다). 십계명 돌판을 받기 위한 이 첫 번째 등산에 장차 모세의 후계자가 될 2인자인 여호수아가 동행했습니다(출애굽기 24:12-14).

모세가 산에 올랐을 때 그곳에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빛과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빛을 바울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다’라고 묘사했습니다(디모데전서 6:16).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시다’(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자는 죽는다고 진술한다(창 32:30; 출 19:21; 신 4:33; 삿 13:2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따라서 원칙적으로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찬 시내산 정상은 인간 모세에게 접근이 허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차단하신 뒤, 모세에게 특별한 자격을 부여하여 그의 시내산으로 입산을 허용하셨습니다. 모세는 40일간 음식과 물을 끊어 내장을 깨끗이 비워내고 인간의 생리적 욕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첫 번째 40일간의 시내산 입산에서 금식에 대한 언급이 없고(출애굽기 24:18), 두 번째 입산에서만 언급되나(출애굽기 34:28), 우리는 신명기에서 첫 번째에서도 모세가 식음을 끊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금식을 어떤 사람은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수종 드는 천사와 같이 되기 위한 정화 과정이라고 해석합니다. 모세가 금식했던 의도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적절치 않은 모든 인간의 육체적 기능을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십계명 두 돌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십계명을 기록하신 돌판들입니다(10). 십계명은 산 아래에서 그들이 ‘총회’로 모였을 때 그들의 귀에 직접적인 음성으로 들려주었던 특별한 열 가지 말씀들입니다. 40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서둘러 하산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산 아래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부패하여’ 광란의 우상숭배 축제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패하다’의 히브리어 ‘쉬헤트’는 우선적으로 ‘망쳐놓다’, ‘쓸어내다’, ‘황폐화시키다’를 의미합니다. 즉, 사람들이 자신들과 주변의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상황입니다. 흥미롭게도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백성들을 쓸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때만 해도 사태의 진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여호수아와 함께 서둘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 아닌 ‘네 백성’, 곧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이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고 준엄하게 선언하고 있으며, 백성의 문제로 그들의 대표이자 책임자인 모세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승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과 평안이 넘치는 것이지 우리의 악한 본성이 완전히 사라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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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8-02)


여호와를 잊지 말라

신명기 8장 11-20절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잔소리하는 구나!’하는 부정적인 반응과 반대로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는구나!’라는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다면 무슨 의미를 담고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했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다시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분이시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확인하신 것은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잊지 말아야할 내용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다시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에 새기도록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넘치는 복을 누려 배가 부른 뒤에는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엉뚱한 생각을 품기 시작하곤 합니다. 모세는 인간의 이런 본성을 염려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특별히 축복 이후를 극히 조심하도록 신신당부합니다. 풍요가 은혜를 잊게 한다면, 그들도 결국 가나안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들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잊지 말라(11-14)

인생의 위기는 고난 중에 있을 때가 아니라 풍부해질 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망각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감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11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11-14)

 

이스라엘의 모든 소유나 복은 그들의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결과이고, 그들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세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 것을 권면하면서 은혜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⑴ 여호와를 잊지 말라(11)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로부터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라’는 유언적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반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⑵ 풍부는 또 다른 유혹(12-13)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물로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앞서 모세는 그들이 건축된 성읍들을 점령할 것이며, 그 성읍들 안에는 그들이 짓지 않은 많은 가옥들이 있어 전쟁의 와중 에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6:10-11). 그러나 여기서는 네가 아름다운 집을 지어 거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호 모순된 진술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이 진술은 거저 얻은 가옥에 더하여 그들이 필요에 따라 새로이 건축한 가옥들도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며, 그 가옥들을 한층 더 아름답게 꾸며서 거기서 살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좋은 집에서 배불리 먹고, 그들의 소와 양/염소 떼가 번성하고, 고대에 무게를 달아 현금으로 사용했던 은과 금을 풍부히 소유할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다량의 은금의 실제적인 소유를 의미하기보다는 재산 증식에 대한 비유적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풍요로운 삶이 자기 능력과 재주로 성취된 듯 여기는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⑶ 교만하지 말라(14)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을 ‘망각’이라 표현하지 않고, ‘교만’이란 표현하고 있습니다(14). 교만한 사람을 목에 힘을 주고 사는 사람, 그는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은 건망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입니다.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위기의 시작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의지하고 순종합니다. 하지만 풍요로우면 변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정되고 부유해질 때,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신앙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형통하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 경성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공급하신 하나님(15-16)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은 ‘광야 학교’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 광야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 항상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에 가장 중요한 목적은 ‘축복’이나 ‘번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15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5-16)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광야 생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베푸셨던 것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킨 뒤에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을 낮추어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20-22은 언뜻 에담에 장막을 쳤을 때 불구름 기둥이 나타난 것으로 읽히지만, 출애굽 직후부터 불-구름 기둥이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의 에담 정박에 이은 불-구름 기둥 출현에 대한 보고는 그들의 시내산까지의 광야 여정에 대한 개괄적 진술입니다.

광야 여정은 시내산을 기준으로 크게 두 장면으로 나뉩니다. 한 달 반의 짧은 시내 광야까지의 여정(출애굽기 13-18장)과 시내산 아래 일 년 정도 체류 후 출발한 뒤(출애굽기 19:1-민 10:10) 38년간 이어진 모압 광야까지의 오랜 여행입니다(민수기 10:11;신명기 1:1).

그들은 마지막 열째 재앙인 모든 장남과 짐승의 첫 새끼의 집단적 죽음의 형벌이 내려진 1월 14일 밤에 급히 유월절 의례를 치르고 다음 날인 1월 15일에 애굽 땅을 출발했습니다(민수기 33:4). 이후 시내산에 도착한 때는 ‘삼 개월이 되던 날’이었는데(출애굽기 19:1), 아마 3월 1일로 추정됩니다. 이 경우 1월 15일부터 3월 1일까지 도합 한 달 반 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 한 달 반의 여정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40년 동안 광야에서 겪을 일을 축소해서 미리 경험했습니다.

이미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고픔과 갈증으로 어려움 당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 물을 공급하시어 장차 40년간의 공급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으며,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장차 여러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출애굽기 17:8-16). 이런 이유로 시내산 도착 전에 신(sin)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공급과 식수 공급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비슷하게 시내산 출발 후에 바란 광야와 그 북쪽 신(Zin) 광야에서도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됩니다.

비슷한 사건들과 동일한 지명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그들은 오랜 광야 생활 기간 동안 얼마든지 여러 장소에서 동일한 식수 부족을 겪을 수 있었을 것이며, 상이한 장소에 같은 지명을 붙이는 것은 어디서든 흔한 일입니다. 모세는 이 모든 광야의 여정을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나온 광야는 위험한 광야였습니다. 맹독성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렸고 물이 부족한 건조한 땅이었습니다. 광야의 불뱀과 전갈, 물 부족 등은 가나안 땅의 생명을 충만케 하는 소 떼와 양 떼, 많은 샘들과 비교됩니다. 이러한 양극의 이미지 비교는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위험하고 척박한 광야 길에서 백성들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며 안전히 보호셨습니다. 그들이 식수난으로 도를 넘은 불평을 터트리며 아우성을 쳤을 때 반석을 갈라 물이 나오게 하셨으며(출애굽기 33:21 이하 민수기 20:10 이하), 출애굽 후 한 달 만에(2월 15일) 식량 문제에 봉착한 그들에게(출애굽기 16:1이하) 만나라는 비상식량을 공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 불평하자 메추라기를 원 없이 먹게 하셨습니다(출 16:13 이하 민 11:31 이하).

특별히 지팡이로 때린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물이 나왔던 바위는 매우 단단한 암반이었습니다. 민수기 20:8에서는 그 바위를 ‘셀라’라 ‘커다란 바위 암반(cliff)’을 의미합니다. 즉, 바위 자체가 쉽게 깨지기 어려운 단단한 암반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 하거나 말로 명령하여 반석을 가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만나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된 하늘의 식량입니다. 16절은 언뜻 만나를 주신 것이 그들을 고생시켜 겸손케 하기 위한 열악한 식량 공급인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15-16절은 광야 생활 전반에 대한 개괄적 묘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비상한 방법으로 필요한 음식과 물을 공급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지나온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겸손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는 궁핍할 때가 아니라 부요해 질 때였습니다. 그들은 부강하고 평강할 때에는 선지자들의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가 멸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던 때였습니다.

 

은혜의 망각이 불러올 심판(17-20)

풍요로울 때 자칫 교만해져서 방종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명령이 아니라 항상 반드시 청종해야 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망각하면, 배은망덕할 수 있고, 그것은 죽음으로 길로 들어선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17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17-20)

 

모세는 재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해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예방적으로 경고를 전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높아져 자신의 능력과 손으로 이 모든 복들을 성취하고 부를 이룩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러한 부와 명성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모든 재물은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신앙의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연루된 사해 근처에서의 국제 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 후 정당한 권리인 전리품 소유권을 거절합니다(창세기 14장). 관행상 소돔 왕이 약탈당한 물품을 아브라함이 되찾아 왔다면 그 소유권은 승자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것이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거만하고 뻔뻔하게 여전히 자신의 물건들로 간주하고 아브라함에게 큰 호의를 베풀기라도 하듯이 그 물건들을 하사품으로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아브라함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소돔 왕이 엉뚱하게 여호와가 아닌 자신이 아브라함을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허세를 부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4:23).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승리와 전리품 획득이 자신의 능력과 군사적 행동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직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재산과 군사력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의 모본을 따라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을 때 동일한 고백을 해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 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급이 되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상속받은 것입니다. 땅 선물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언약의 약조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대로 ‘지금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19). 그러나 그들이 만일 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들과 아무 상관없는 신들을 따라가 섬기고 예배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 강한 어조로 단호히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죄악과 우상숭배 때문에 멸망을 당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과 동일하게 멸망당하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삶이 부유해지면 과거 어려운 중에 받은 은혜를 망각하기 쉽니다. 풍요는 언제든지 신앙의 덫이 되거나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마음을 지키는 것만이 자기 영혼을 잘 보존하는 길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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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8-01)

    


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

신명기 8장 1-10절


살아가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납니다.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래 바람만 일어나는 광야 같은 환경에서 갈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더욱이 지혜로운 백성이라면 역경과 고난을 통해서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생명’과 ‘번성’을 위한 길입니다. 여기서 계명 준수는 생사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 족속이 당한 모든 재앙이 자신들의 것이 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번성과 번영의 복을 노릴 것이며, 그 땅을 점유하며 오래도록 거기에 거할 것입니다. 

 

거친 광야에서의 훈련을 위한 공급(1-6)

광야는 모든 사람들을 겸손하도록 만듭니다. 광야와 같이 어려운 길을 가는 동안 자신의 미약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광야길 가운데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1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1-6)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회상합니다. 그런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도보로 10여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 광야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모세는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기 위함(2a)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2a)고 소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다’는 의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단순히 예의 바른 태도를 넘어 자신의 한계를 깨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이며 ‘낮아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과 전갈의 위험이 있고, 농사도 짓을 수 없고, 기온 차가 심하여 생활하기 어려운 광야라는 공간을 통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깨달게 하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광야 40년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된 40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세대가 지나가도록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잘 준수하는지 지켜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2b)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2b)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지, 아니면 불순종하는지를 지켜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게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머지않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만연한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 앞에 순종 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③ 40년 광야를 허락하신 이유(3b)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광야를 허락하신 이유를,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b)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훈련소에서 40년 동안 끈질기게 훈련시키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떡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떡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거듭 그분의 명령을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은 사는 길이자 번영의 통로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의 의의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확인하듯이, 40년 광야 기간 내내 그들은 수도 없이 반역과 배교를 반복했습니다. 그때마다 혹독한 징계를 받았고 모세의 중재를 통해 뒤늦은 회개와 더불어 사함을 얻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이 뻣뻣한 죄의 근성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는 40년도 부족했습니다.

 

⑵ 사십 년 동안의 의식주 공급(3-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내몰아 혹독히 훈련하여 낮추시고 시험을 하셨으나, 그들을 향한 은혜를 중단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광야 생활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과 의식주를 끊임없이 공급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황량한 광야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위한 식량 배급은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심으로써 굶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나는 출애굽 직후부터 공급된 하늘의 식량입니다(출애굽기 16장) ‘만나’의 맛은 ‘기름 섞은 과자 맛’과 같았습니다(민수기 11:8). 만나는 생김새가 마치 깟(가드) 씨처럼 보이고 모양은 진주와 같았습니다. 가드는 중동 지역의 식물로 ‘고수풀’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채취해 다양한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만나는 시내 반도 일대에 서식하는 타마리스크 나무에서 생기는 분비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딱지 벌레가 기생하여 분비하는 점액질의 분비물로 몇 가지 측면에서 만나와 비슷합니다. 만나는 다음 날 아침이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기에 이튿날까지 보관이 어려웠는데, 이는 타마리스크 나무 분비물의 특징과도 일치합니다(참조, 출애굽기 16:20).

이 분비물은 주로 자당, 글루코오스, 프루토오스, 점액 등으로 이루어진 단맛이 나는 황색의 액으로, 6-7월경 주로 야간에 분비되고 아침에 고체화되었다가 해가 뜨면 녹습니다. 오늘날 시내 반도에서 여전히 생산되는 이 분비물은 연 평균 산출량이 불과 약 250킬로그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성된 분비물의 양으로는 장정만 60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만일 이것이 만나였다면, 이스라엘을 위한 만나의 공급은 놀라운 기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나는 안식일 전날에 두 배로 채취한 것이 이튿날 안식일까지 변질되지 않았으며(출애굽기 16:5), 그 나무 분비물의 채취 기간은 1년 중 6-7월, 즉 여름의 짧은 몇 주에 불과하지만 만나는 40년간 매일 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후 그들을 극도로 낮추시어 굶주리게 하신 뒤 기적적으로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출애굽기 16:3-4). 이는 그들로 하여금 과연 자신들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그들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얻는 길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사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하늘의 떡을 얻어 목숨을 연명했지만, 그 떡을 주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이심을 인식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율법대로, 즉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6:4에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면서 강조하셨던 교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늘에서 생명의 만나를 내려 육신을 먹이시는 분은 또한 생명의 말씀을 내려 영혼을 먹이시는 분입니다. 이 교훈은 예수께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면서 사용한 말씀이 기도 합니다(마태복음 4:4; 누가복음 4:4). 또한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내내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과거 라쉬(Rash)라는 유대 랍비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구름 기둥이 백성들의 옷을 말끔히 세탁해주었고, 아이들의 옷은 마치 달팽이집이 커지는 것처럼 그들이 자라면서 저절로 커졌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의복 한 벌 갖고 40년을 입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옷을 공급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네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는 표현 역시 발이 전혀 상하지 않았다는 기적을 말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신발 공급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29:5의 ‘너의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라는 진술에서도 확인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고대에 이스라엘뿐 아니라 중동 지역 사람들이 신발을 신었다는 증거를 제공합니다(창세기 14:23; 출애굽기 3:5;12:11; 신명기 25:9;29:5; 여호수아 5:15;9:5; 룻기 4:7 등). 예를 들어, 여호수아 9:5에 기브온 족속들 모두가 일부러 낡은 신발을 신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위한 옷과 신발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처럼 기적이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런 물품들은 외부 집단들과의 교역이나 물물 교환을 통해 조달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듯이 광야의 떠돌이 생활이라 해서 외부세력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최소한 제사장들이 바친 매일의 소제에 필요한 소정의 밀가루는 외부에서 사들여야 했을 것입니다. 설사 이집트에서 약간의 밀가루를 자져왔다 해도 그 양과 보존 기한을 고려해볼 때 한두 해에 국한될 정도였을 것이고, 40년 내내 필요한 소제의 밀가루는 자체 조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척박한 광야에서 의식주의 중단 없는 공급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실 때는,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할 때처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5-6).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광야 훈련소’로 인도하십니다. ‘벌’이 아닌 ‘훈련’을 목적으로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같은 어려움과 답답함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어떤 훈련을 시키시고 계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그곳은 풍요의 땅이겠지만, 가나안 땅이라도 하나님을 잃는다면 그곳은 죽음의 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풍성한 공급(7-10)

들어갈 풍요롭고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소개함으로 가나안 정복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고, 그처럼 아름다운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7-10)

 

모세는 그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 더욱 상세히 묘사합니다. 그는 그 땅을 가보지 못했지만, 이러한 시청각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는 과거 정탐꾼들의 상세한 보고를 통해서 얻은 정보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마 환상을 통해 미리 보여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땅의 골짜기와 산지의 많은 계곡들에 계절 천(Wadi)이 흐르고 ‘분천’, 곧 솟는 샘물들이 곳곳에 산재하며, 깊은 우물들(지하수)도 풍부합니다. 우기와 건기가 확연히 구분되는 곳에서 이와 같은 지속적인 물 공급은 가장 중요했습니다. 또한 그 땅에서는 밀과 보리가 풍년을 이룹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일대는 무엇보다 과일 농사가 잘되는 땅입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과일들과 생산품은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꿀이었습니다. ‘감람나무’의 원문은 ‘기름의 감람나무’, 곧 감람유를 의미하고, ‘꿀’은 앞서 6:3과 8:8에서 말한 대로 중동의 대추나무 열매로 제조한 과일 꿀을 가리킵니다. 즉 이 둘은 제조된 농산물품목입니다. 이러한 먹거리들이 그 땅에서 살 때 전혀 부족함 없이 제공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에서는 철과 동이 생산됩니다. 이 지역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확장된 약속의 땅의 범위에 들어 있습니다(출 23:30-31; 신 11:25). 따라서 모세는 여기서 지금 당장의 약속의 땅인 요단 동편에 국한해서 풍부한 철과 동의 생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확장된 약속의 땅을 염두에 두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풍년을 이룬 곡식들과 풍성한 과일들을 배부르게 먹으면서, 그러한 옥토를 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올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민족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능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다가도 그 열정이 금방 식어지는 반면에, 생활이 좀 어려워지면 원망하면서도 오히려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곤 합니다. 이렇게 신앙이 환경에 좌우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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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7-02)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신명기 7장 12-26절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백성에게 가나안에서의 축복과 번영, 안녕과 건강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가업을 얻고 누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싸워야 할 영역이 많고 넘어야 할 장애물이 쌓여 있습니다.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하는 백성에게 거듭해서 번성과 번영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의 농산물과 축산물이 복을 받아 풍성할 것이며, 덧붙여 하나님의 보호와 승리가 보장됩니다. 반대로 그들이 불순종하여 가나안 족속과 공생의 길을 택하고 그들과 통혼한다면 자주가 내릴 것입니다. 땅의 정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이며, 단지 백성들에게는 점유된 땅에서 살 때, 큰 책임을 수반됩니다.

 

순종에 따른 복: 번성과 번영(12-15)

신명기는 언약 문서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고대 종교에서 신이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면서 자세하고 고상하게 대하는 종교나 신도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을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2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13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14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15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12-1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를 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베풀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 백성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순종의 결과들이 실제적이고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약속된 땅의 모든 원수들을 진멸시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⑴ 하나님을 사랑하라(12)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하는 자에게 가나안에서 축복과 번영, 안녕과 건강을 약속하셨습니다. 순종의 요구가 세 개의 동사가 연거푸 나열되면서 강조됩니다. 이 법도를 ‘듣고, 지키고, 행하면.’ 특별히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도 조상들과 맹세한 언약과 인애를 ‘지키겠다/간직하겠다’고 다짐 하십니다.

 

⑵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13-15)

 

하나님께서는 주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어 끊임없이 복을 베푸시고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그들의 소생, 즉 태중의 열매들에게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의 번성뿐 아니라 땅의 풍성한 수확으로 구체화됩니다. ‘토지 소산’은 이어지는 곡식과 과일들을 의미합니다. 곡식은 중동 지역의 곡류인 보리와 밀을 의미합니다.

포도주로 번역된 ‘티로쉬’는 취하게 하는 포도주인 ‘야인’과는 다른 종류의 포도 음료입니다. ‘티로쉬’에서 야인이 만들어지기 때문에(미가 6:15) 이 둘은 구분됩니다. ‘티로쉬’는 그 해 수확한 포도로 빚은 최상품의 포도 음료이고, ‘새 포도주’라 할 때 이 포도 음료를 의미하며, 오래 숙성시킨 포도주인 ‘야인’과는 다릅니다. ‘티로쉬’는 알콜 성분이 없는, 혹은 매우 약한 포도 음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포도알을 짜서 만든 포도즙인 ‘미쉬라트 아나빔’과도 달랐습니다(민수기 6:3).

기름은 ‘이츠하르’인데, 감람나무 열매에서 짜낸 감람유(올리브유)입니다. 감람유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식용, 등불용, 치료용 등 다양했습니다. 불순물이 완벽히 제거된 정결한 감람유는 비쌌으며, 성막에서 완벽히 제거된 정결한 감람유는 비쌌으며, 성막에서는 그을음이 생기지 않는 정결한 고급 감람유가 등잔대의 등불을 밝혔고 관유를 제조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백성이 키우는 가축들도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네 소와 양’은 정확히 ‘네 송아지들과 양/염소의 어린 것들’을 의미합니다. 가축들이 새끼를 많이 칠 것입니다. 특히 ‘양’(양/염소의 어린 것들)으로 번역된 ‘아쉬타로트’는 특이한 단어입니다. 원래 아스다롯(아쉬타로트)은 가나안의 대표적 여신으로 번식과 출산을 주관하는 신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1:4; 9:10; 12:4; 13:12 등에서는 지명 ‘아스다롯’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가축의 새끼들이나 번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용되어 고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받을 복은 지상의 모든 민족이 누리는 복을 능가할 것입니다. 후손과 가축이 번성할 것이며,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 질병은 무서운 전염성이 있는 피부병과 역병으로 ‘애굽의 악질’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병들의 일부는 애굽에 큰 재앙으로 내려진 바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 유행하는 병들로 상피병(elephantiasis), 안염(ophthalmia), 이질(dysentery) 등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순종하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악명 높은 이집트의 피부병과 악질에 걸릴 염려가 없습니다.

 

순종에 따른 복: 보호와 승리(16-26)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 복은 다른 말로 생명력입니다. 복하면 생각나는 것이 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돈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생명과 인격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한 고유한 가치를 가졌으니 그 가치에 어울리도록 사는 것이 복입니다.

 

1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17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18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1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2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21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2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2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24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25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16-26)

 

복을 받은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자기 약속을 지켜 행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⑴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16-2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번성과 축복을 계속적으로 누리려면, 그 땅의 민족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들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올무’는 ‘덫’이나 ‘미끼’를 의미합니다. ‘덫’이나 ‘미끼’는 한번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고 아무 저항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우상의 신을 의지해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잘 정착할 수 있다고 그들을 올무로 유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무에 걸리지 않으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은 막강한 군사력과 기골이 장대한 다수의 가나안 민족들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땅 정복을 망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상황을 예단하고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과거 역사들을 기억해야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40년 전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 그분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물리치셨듯이 가나안도 친히 물리칠 것이란 것입니다. 가나안의 모든 신들보다 강한 전사이시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해서 가나안 민족들에게 강력한 독성을 지닌 ‘왕벌을 보내실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20). 이것은 출애굽기 23:28에서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참조 여호수아 24:12), 하나님께서는 ‘왕벌’이 가나안 족속들을 찾아낸다고 말하시면서(출 23:28), ‘내가 네 앞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하십니다(출 23:30). 이것은 왕벌이 하나님의 전쟁 대행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쫓아내는 가나안 족속과(출 23:23) 왕벌이 쫓아내는 가나안 족속을 대조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출 23:28). 즉, ‘왕벌’은 여호와의 사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왕벌’, 곧 ‘여호와의 사자는 위엄’(공포)으로 표현된다(출 23:27). 이 왕벌이 가나안 족속들을 쏘아 그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혹자는 왕벌의 침입을 말벌 떼가 급습한 집에서 가족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집을 비우고 도망가는 것에 비유하거나, 혹은 그로 인한 정신적 공황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땅을 순식간에 정복하지는 않을 것이며, 조금씩 이 정복이 진행될 것입니다. 속도전을 통한 땅의 정복은 땅을 황폐케 하여 들짐승이 난무하면서 백성들의 거주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2; 참조. 출애굽기 23:28-31). 출애굽기 23:29은 하나님께서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가나안 정복은 천천히 진행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수년이 걸릴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9:3에서는 정반대로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을 상호 모순된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⑵ 승리를 거둔 백성의 책임(23-26)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께서 왕벌을 보내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임을 거듭해서 명시합니다. 적들은 하나님께서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너희들은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 우상을 몰아내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우상들을 몰아내는 것뿐입니다. 우상에 붙어있는 금과 은을 아까워하지 말고 모조리 불태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작은 파편과 장식조차 이스라엘을 영적인 유혹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승리를 거두신 후 백성들이 할 일은 그 땅의 사악한 문화의 잔재와 종교적 유산들을 남김없이 없애는 것입니다. 7:2에서 경고한 대로 그들은 가나안 족속과 결코 언약을 맺어선 안 됩니다. ‘언약을 맺다’는 문자적으로 언약을 자르다 입니다. 언약식에서는 흔히 동물을 잡아 각을 뜨거나 새를 조각내서 언약의 징표로 삼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래 전에 유대의 랍비 라쉬(Rashi)가 주장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짐승을 자르는 의식에는 만일 언약의 수종자가 언약의 조건들을 지키지 않으면, 그 짐승의 운명과 같이 될 것임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이 충성의 언약을 다른 신과 맺는다면, 자신들을 어미 독수리처럼 인도하신 여호와를 향한 배신이 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거해야’ 하며, 그 땅을 차지하고 난 후 그 땅의 거주민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함께 거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말 것입니다(25).

실제로 사사기 1:21-33과 열왕기상 9:20-21은 가나안 족속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사사기 2:2-3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고 그들의 신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게 하셨다고 보고합니다. 따라서 올무는 불순종한 그들이 초래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나안 땅의 모든 신상들을 불사르고 부숴야 하며, 우상과 신상들에 입힌 금과 은을 욕심내어 취해선 안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헤렘으로 바쳐진 것들입니다(26). 헤렘 전쟁에서는 사람과 더불어 물건도 모두 파괴하지만(불사름), 성전에 바칠 가치가 있는 귀중품이나 금속 제품들은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은 ‘여호와의 집 곳간’에 안치되었습니다(여호수아 6:24). 그러나 백성들이 사욕에 사로잡혀 그러한 ‘가증한 것들을’ 집 안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 이끌려 그것들을 집 안에 안치하고 또한 우상을 꾸민 금은보화를 탐내 자신의 재산으로 삼는다면, 그들도 결국 헤렘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군사력을 생각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인 애굽을 물리치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을 향한 두려움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영적 우상들을 철저하게 진멸함으로 주님께서 예배하신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과 함께 동행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과 조급함과 탐욕에 맞서면,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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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7-01)


여호와께서 택하신 백성

신명기 7장 1-11절


전에 사람들을 만나서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했습니다. 그곳은 과거에 정미소 자리로, 하지만 지금은 먼저 뻘뻘 날리며 시끄러운 방아소리는 없어졌습니다. 리모델링한 후에, 이제는 방앗간 뼈대는 남기고, 레스토랑으로 바꾸어서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식사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한 부분을 지금에 맞게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것이 리모델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광야에서 리모델링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축복 받은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본 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 거민들과 구별된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상생은 통혼으로 귀착됩니다. 결혼하거나 어떠한 관계를 맺는 일이 없도록 금지합니다. 거룩한 가정에 다른 신을 유입시키며, 결국 이스라엘의 신앙이 그 땅의 종교와 문화에 흡수되어 배교하는 길을 걷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심판을 불러올 통혼과 혼합주의를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가나안 족속과 언약과 결혼 금지(1-5)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 복은 다른 말로 생명력입니다. 복하면 생각나는 것이 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돈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생명과 인격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한 고유한 가치를 가졌으니 그 가치에 어울리도록 사는 것이 복입니다.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1-5)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가나안 원주민들과 다르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질 수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풍요롭게 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광야에서 고생할 때, 부족함이 없을 만큼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간곡히 원하는 것은 가나안 원주민들과는 다른 삶을 원했던 것입니다.

 

⑴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지 말라(1-2)

 

가나안 땅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등이었습니다. 열 개가 훌쩍 넘는 종족들이 발견되는데, 신명기는 그들을 일곱 종족으로 대표해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스라엘 손에 넘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수적으로 많고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할 때는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한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이들 중 헷 족속의 기원과 정체가 가장 논란이 됩니다. 이들은 노아의 중손자, 즉 족보상으로 노아-함-가나안-헷으로 확인되는데(창세기 10:15), 그의 후손들이 헷 족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과 역사적으로 이들이 어느 종족과 연결되는지는 모호합니다. 첫째 견해로, 주전 2000년 경 소아시아 일대에 살았던 하티(Hatti) 종족일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티 종족을 정복해서 건립된 히타이트(헷) 제국의 민족(하티 족이 아님)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히타이트(헷) 제국은 주전 1200년경에 해양 민족들에게 멸망당했는데, 그들의 영토로 보아 팔레스타인의 한참 북쪽에 위치했으며, 결정적으로 구약의 헷 족속은 히타이트(헷) 종족의 관습과 풍속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족장 기사들 속에 등장하는 헷 족속은 히타이트 종족의 인명이 아닌 셈족 인명을 지니고 있으며, 족장 서사의 분위기로 볼 때 아브라함은 통역자 없이 그들과 대화를 나눈 것 같습니다. 즉, 팔레스타인 남부의 산지에 거주했던 이 헷 족속은(창세기 15:19-21) 히타이트(헷) 제국과 분명한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이 헷 족속은 시기적으로 한참 후대인 왕조 시대에 이스라엘과 접촉했던 시리아의 신-히타이트 도시 국가들과도 무관합니다(왕상 10:29:11:1; 대하 1:17). 아마 하티 종족의 일부가 가나안으로 이주해 헷 족속이 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헷 족속은 가나안의 아들 후손이며, 초기 예루살렘 정착민들의 목록 주변에 거어 있습니다(에스겔 16:3). 이들은 족장 시대에는 헤브론 주변에 거주했는데(창 23장을 보라), 그들의 문화는 반-하나님 적이어서 이삭과 리브가는 그들을 떠나 살았던 반면, 에서는 그들과 통혼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합니다(창세기 26:34-35; 27:46).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권고합니다. 가나안 땅을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죄악이 만연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 보내서 심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는다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종족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헤렘’ 심판의 명령입니다. 헤렘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동사 ‘하람’은 앞에 부정사 절대형 ‘하하렘’을 둠으로써 이 동작이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진멸의 반대는 상생 혹은 공생입니다. 상생은 쌍방의 약조를 통해 우호적 관계가 정립됨으로써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 결코 상생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어떠한 언약도 맺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어 그들과의 상생의 길을 택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문화가 이스라엘에 침투하게 해선 안 됩니다.

 

⑵ 가나안 족속과 통혼하지 말라(3-5)

 

가나안 족속과의 상생은 혼인 관계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상생을 위한 통혼은 비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들과 결혼은 그 가족의 문화와 종교를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들이 유입되어 여호와를 떠나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심판과 멸망입니다(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히 그들의 종교와 문화의 유산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들의 성소를 파괴하고 제단들을 헐고 각종 우상숭배에 사용된 주상들과 목상들을 깨트리고 불살라야 합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타문화의 유산과 그들의 종교를 이렇게 폭력적으로 말살하는 것은 모든 인명의 멸절을 요구하는 ‘헤렘 전쟁’과 마찬가지로 매우 불편하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이러한 조치의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은 순결한 신앙의 보존에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며, 구약 시대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백성의 거룩성을 보존했습니다. 신약에서 ‘헤렘 심판’은 종국의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단호히 이방의 관습과 도덕 종교의 가르침이 교회에 유입되는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린도전서 5:13) 이방의 제단들은 번제단과 향단 둘 다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제단들은 흙이나 돌로 축조되었으며, 거기에 다양한 제물들이 드려졌습니다(예. 희생 짐승과 음식, 술, 향). 돌기둥인 주상(마체바)은 모두 제의적 용도로 만들어져 세워졌으며, 때로 표면에 우상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세라 목상 ‘아쉐림’은 제단 주변에 세워놓은 나무 기둥이거나 어쩌면 종교적 숭배를 위해 심어놓은 나무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과 같이 이것이 많은 곳에서 복수 ‘아쉐림’으로 나타납니다.

이 목상 혹은 나무는 보호와 번영을 주관하는 가나안의 여신 아세라를 상징한,,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각종 우상들과 제의 시설들을 부숴야 합니다. 실제로 당시 하솔의 지층에서는 목이 잘린 우상들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들어내려면 강한 나라를 선택한 것이 어울릴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성공시키면 세상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란 것입니다. 진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모습은 힘센 하나님,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아름다운 하나님, 윤리의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너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힘 있게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6-8)

어느 지역에 문화는 그곳의 종교를 통해 형성됩니다. 그 문화를 받아들이면 그 종교도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로 이교 문화를 받아들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6-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사랑을 보이셨고, 얼마나 약속을 지키신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잘 보여주십니다. 역사를 가로질러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신은 고대 근동에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암 카도쉬’, 즉 ‘거룩한 백성’은 신명기 특유의 어법입니다(7:6; 14:2,21; 28:9). 성민으로서 이스라엘의 신분과 정체성은 신명기에서 두드러집니다.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레위기에서는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법이 두드러지는 반면, 신명기에서 ‘너희는 거룩하다’는 직설법이 지배적입니다. 즉 레위기에서 ‘거룩’은 성취하기 위해 갈망해야 하는 목표이고, 신명기에서 ‘거룩’이란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별된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기업의 백성’은 아쉬운 번역입니다. ‘암 세굴라’는 ‘보배로운 백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세굴라’는 어떤 사람이 매우 아끼는 물건이나 힘들게 모아놓은 귀중한 재산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재산을 가리킬 때는 흔히 ‘아후자’가 쓰입니다(출애굽기 19: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쁨으로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강하고 뛰어난 민족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인구 숫자도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 민족이었습니다. 여기서 적은 인구라는 말은 현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아마 이 표현은 그들을 겸손케 하려는 일종의 수사학적 과장법이거나, 실제로 가나안의 인구가 그들보다 많았거나, 아니면 애굽 땅에서 학대받던 소수 민족으로 시달렸던 시절부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현재 많은 인구를 거느린 그들은 우쭐대서는 안 됩니다. 가나안 민족 중에는 강인하고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들도 즐비하며, 인구도 이스라엘을 능가하고(7:7, 17:92), 그들의 성들은 견고한 요새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 신분이었던 그들을 속량하시어,(죄수를 석방한 것처럼) 자유인으로 해방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고 율법을 행하라(9-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던 것을 보여주신 사건은 출애굽입니다. 가장 강한 제국을 가장 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제압하고 거기서 탈출했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충분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9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9-11)

 

하나님께서는 자신처럼 백성들에게도 사랑과 신실함을 요구하십니다. 인격적인 신이기 때문에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굽이 심판을 받았듯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들도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참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구속의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요구는 고대 중동 지역의 봉신 조약에서 나타나는 계약 언어인 ‘충성하라’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속국의 어떤 군주는 애굽의 봉주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내장과 내 등에 내가 나의 왕, 나의 주의 말씀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음으로써 그분과 일종의 봉신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4장). 따라서 봉주 혹은 종주가 되는 하나님께 속국이자 신하인 이스라엘은 그분과 약속한 조약의 조항들을 모두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그분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모든 기계는 동력의 근원인 휘발유나 전기가 근원입니다. 사람들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하게 여기면, 성도들의 삶도 힘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애굽처럼 될 것인지, 축복 받은 백성이 될 것인지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반응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가서 승리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깨끗하게 리모델링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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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0-01)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기도

시편 20편 1-9절


성도들이 힘들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탁하기만 하고 정작 자신을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기도를 부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 시편 20편은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이를 위해 핵심적인 용어, ‘우리 하나님의 이름’과 ‘여호와’를 강조하며 다윗은 누군가를 위해 기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세계의 잦은 전쟁 경험을 고려하면, 이 시는 국가의 가장 큰 환난인 전쟁을 앞두고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승리와 구원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을 위한 백성들의 기도(1-5)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의 왕이 불러 도움을 청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건져내시며 또 높은 곳에 두어 보호하십니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염원을 품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될 때, 용기 있게 세상에 나설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을 위해 주의 도움을 구하고 축복합니다.

 

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1-5)

 

전쟁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승리한다 하여도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전쟁은 사람이 하지만,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할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의 하나님의 응답(1)

 

이 시는 여호와가 환난 날에 응답하시기를 축복하는 것으로(1) 시작하고, 공동체가 부를 때 응답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9) 끝납니다. 여호와의 응답을 촉구하는 주체는 ‘우리’입니다(5). 1절은 ‘우리’로 언급되는 공동체가 ‘너’(2인칭 남성 단수)로 호칭되는 누군가를 위한 기원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1a)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시 전체 분위기와 ‘기름 부음 받은 자’(6), 왕(9), 그리고 군사적인 용어들에서 ‘너’는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왕입니다. 이때 왕은 국가의 가장 큰 위기인 전쟁의 위협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언급된 백성들이 왕을 위해 축복합니다. 왕을 축복하는 백성들은 여호와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1), ‘우리 하나님의 이름’(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7)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야곱의 하나님’은 조상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을 연상시키기에 특별한 보호를 구할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창세기 35:3;참조. 시편 46:7,11; 76:6; 84:8). 또한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름’이 내포하는 것은 언약 백성에게 주신 친밀한 이름 여호와가 곧 우리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바탕에 둡니다. 그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도우시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간절한 기원이 담긴 소원입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은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습니다. 이는 용사이신 여호와가 백성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신 것에 근거합니다(출애굽기 15:3).

 

(2) 시온에서 도우심(2-5)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왕을 도우시고 시온에서 붙드시기를 빌어줍니다(2).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군대 앞에서 전쟁을 이끄시는 분임을(사무엘상 4:3-9; 사무엘하 15:24-29; 시편 44:9) 확신하는 믿음에 기초한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시온에서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 의식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백성들은 출전을 앞둔 왕 앞에서 왕을 위해 노래합니다. ‘당신의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당신의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한다’(3), 고대의 왕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종교적인 예식을 통해 하나님께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왕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왕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어 돕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제사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왕에게 ‘당신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고, 당신의 모든 계획이 성공하기를 빌어준다’(4). 이것은 백성들이 왕의 내적인 열망, 특히 전쟁 승리를 위해 도모하는 갖가지 계획이 성공하기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또한 왕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표명한 선언입니다.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시행은 이것을 구체화합니다. 백성들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왕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의 승리는 곧 백성을 위한 구원이기에 외칩니다. ‘당신의 승리로 인해 우리가 기쁨의 환호성을 외칠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깃발을 높이 들리니 여호와가 당신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5). 위험한 전쟁 상황에서의 승리는 곧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다윗은 왕이 참여한 전쟁의 혁혁한 승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합니다. 백성들은 왕이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대합니다. 백성들은 왕과 함께 기뻐하고 소리치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축복 선언(6)

하나님의 공동체는 지지와 성원, 격려와 응원 속에 자랍니다. 진심으로 형제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주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들이 항상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염려하고 백성들은 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적인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말의 주체는 ‘우리’에서 ‘나’로 바뀝니다. 6절 시행은 ‘이제 나는 압니다’로 시작한다. ‘이제’는 새로운 상황을 강조합니다. 말하는 자가 무엇을 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말을 들은 제사장이 백성의 바람대로 하나님께서 왕에게 승리를 주시고 구원으로 응답하실 것을 확언하는 듯합니다. 그 근거는 여호와가 제사장을 통해 왕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신탁 내용입니다.

제사장이 받은 신탁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을 구원하신다는 것이고(6), 둘째, 그분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능력으로 그분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왕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6bc). 구원과 응답은 ‘그분의 거룩한 하늘로부터’옵니다. 백성들이 왕에게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왕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축복한 것처럼(2), 제사장은 ‘거룩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탁을 통해 알게 되어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름 부음 받은 왕은 땅의 ‘거룩한 곳’(성소)에서 예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하늘에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왕과 백성과 제사장이 함께 제의(예배)를 마치는 순간 이미 승리가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선언에 근거하여 왕은 출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승리를 위한 백성들의 기도(7-9)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보니, 세상의 것에 집착하는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유한한 것이지만 더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으로부터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군사적인 힘이든지, 자본의 능력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절대로 하나님보다 앞서는 안 됩니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7-9)

 

전쟁에서 백성들이 지도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승패를 좌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신뢰하며 응원하고 있지만, 왕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자랑임을 고백합니다. 백성들은 마지막으로 왕의 구원과 승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자랑(7)

 

백성들은 제사장의 선포를 듣고 환호하며 열광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의 주체가 ‘나’에서 다시 ‘우리’로 전환되어 백성들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합니다’(7). 말과 병거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누군지 밝히지 않지만,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자랑하는 자로서 그 정체성이 확실합니다. 고대의 왕들은 많은 말들을 비축하여 군사력 증강을 도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후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신명기 17:16).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호명하는 백성들이 그 이름을 자랑합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신앙공동체가 여호와 이름을 세상에 알려 기억하고 찬양하고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2) 여호와여 구원하소서(8-9)

 

백성들이 확신하며 고백하는 말은 계속됩니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이들은 비틀거리고 엎드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 똑바로 섭니다’(8). 이스라엘의 전쟁 상대인 대적들은 자기들의 군사력만 믿고 교만했겠지만, 백성들은 그들이 전복되고 함락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선다’(8b)는 말은 일어나 서로를 도와 일으켜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약 본문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된 강조형 구문입니다. 환난으로 대표되는 전쟁에서 혼자만 살기 위한 비겁하고 이기적인 싸움이 아니라 전투력이 소진되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도우며 일으켜주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자들과 대비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은 전쟁에 나서는 왕을 위해 힘찬 목소리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9). 처음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응답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1). 이제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으로 여호와께 ‘왕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이며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이며, 왕의 구원은 백성의 구원입니다. 마지막 시행은 한 나라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의 승리와 구원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선포하는 언약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담긴 간구입니다.


 당신이 섬기고 있는 공동체는 서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을 책임져주는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싸움에서 전사할지라도 남은 이들을 돌봐줄 수 있습니까? 형제가 오룻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상호책임의 연대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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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9-01)


 신기한 하나님의 솜씨

시편 19편 1-14절


우리는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자신을 제시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를 묵상하며 오늘 하나님께 어떤 찬양을 올려 드리겠습니까?

 

19편은 그 어떤 시편보다 히브리 시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장엄하믈 묘사한 노래이며, 청조 세계를 통한 계시와 ‘토라’(율법)를 통한 계시가 분리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총임을 노래합니다. 온 우주와 태양의 질서는 토라와 양심의 세계로 깊게 침투하여 구속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며,정직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계시와 영광(1-6)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귀가 열린 이는 온 누리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매우 빠르게 살면 영혼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때 밖으로 나가 창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1-6)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연이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은혜 되는 것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 하늘의 계시(1-2)

 

하나님의 계시는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시의 첫 단락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1).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하는 1절은 하늘과 창공이 이어져 자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강조는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나타낸다’는 분사 구문의 동사 활용에서 제시됩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2). 날은 또 다른 날에게 이어지고, 밤은 또 다른 밤으로 이어져 낮과 밤의 질서가 교란되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우주 질서를 대표하는 날과 밤이 지식의 계시자로 인간 세계에 공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만 언어로 소통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날과 밤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여 쉼 없이 서로에게 정보와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2) 말 없는 계시(3-4)

 

다윗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우주의 속삭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3), 온 땅에서 서로 어울려 그 무늬가 퍼져 나옵니다. 그 말이 세상 끝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셨습니다(4). 다윗의 묘사처럼, 우주 질서는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의 수단이며 우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입니다.

 

(3) 해를 통한 계시(5-6)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신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장막’(오헬)은 거주와 쉼을 위한 공간입니다. 해가 장막에서 휴식을 취하는 영상은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5a)는 소절로 연결됩니다. 해가 마치 밀월의 기쁨을 나누는 신랑처럼 그려졌습니다. 또한 달리기를 기뻐하는 전사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5b) 하늘 길을 달리는 태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고대 수메르 신화처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매일 영광스럽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힘을 노래합니다. 하늘에서 시작하여(1) 하늘 저 끝에 이르는 태양의 힘찬 운동을 통해(6)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평범한 하루가 우주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며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의 세계임을 깨닫습니다.

 

여호와의 가르침(토라)을 통한 계시(7-11)

해는 해맑은 모습으로 떠올라 힘센 용사처럼 하늘을 달립니다. 만물이 해의 온기에서 생기를 얻듯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서 인간은 생명을 얻습니다. 과학만능과 물질 최고의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 신비를 경험하는 감수성을 가다어야 합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7-11)

 

다윗은 시선을 바꾸어 여호와의 율법(토라),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찬미하며 묵상합니다. 다윗은 토라에 대한 아름다움을 완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규명합니다. 완전함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그 증거의 확실함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만듭니다(7). 온 우주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십니다. ‘토라’는 여호와의 증거입니다. 곧 ‘경고 표시’로서 어수룩한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8a). 교훈도 ‘토라’처럼 삶의 방향을 안내하는 훈령으로서 사람의 의지와 정신을 즐겁게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여호와의 ‘계명’(미츠바)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8b).

불순물 없는 밝고 깨끗한 ‘명령’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빛나게 합니다.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관점과 인식의 체계를 얻은 상태를 말합니까? 이뿐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릅니다(9ab). 여호와의 ‘율법’이 증거, 교훈, 계명으로 분화되어 표현되었지만, 다윗은 ‘토라’를 ‘여호와 경외’와 동의어처럼 제사하여 영원히 가치와 삶의 원리로서 찬미합니다. 그 근거는 정결함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법’(미슈파트)은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9bc). 결국 여호와 가르침(토라)의 절정은 진실한 법으로서 의로움(체덱)을 그 속성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를 비유와 암시로 풍부하게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천체 운동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여호와의 ‘가르침’, 곧 그의 법의 인간 삶에서의 기능을 밝혀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백성에게 베풀어지는 구속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에 포함된 속성들이(7-9) 금보다, 순금보다 더 만족스러우며(10ab), 꿀보다 달콤하고 흘러넘치는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고(10cd) 고백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언약의 주님으로서 주신 포괄적인 ‘가르침’(토라)은 복된 삶, 곧 복음적인 삶의 바탕이 됩니다. 다윗은 ‘당신의 종이 이 가르침으로 경고를 받고 지켜서 받는 상이 크다’(11)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말은 여호와의 법을 중심에 둔 삶의 기쁨과 그 결과를 확신하는 믿음의 증언입니다.

 

토라에 대한 반응-고백과 헌신(12-14)

말씀은 태양처럼 백성을 살게하는 근원입니다. 시든 영혼을 소성케 하고,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며, 참 되고 순수하여 우리의 눈을 밝혀 의의 길을 가게 합니다. 말씀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지친 영혼을 위해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2-14)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 영광 찬미는 다윗의 내적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낮과 밤의 교차와 태양의 운동을 보며 환희에 찬 하나님 영광을 맛보고, 그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가르침(토라)을 찬미했습니다. 그 영광의 빛에 자신을 비춰 봅니다. ‘허물들을 깨달을 자 누구인가? 나의 숨겨진 허물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12). ‘잘못’이나 ‘허물’은 ‘정도를 벗어나 곁길로 간다’는 말에서 파생되어 ‘오류’와 ‘무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또한 수사학적인 질문의 숨은 의도는 죄에 대한 고발입니다. 누구도 숨겨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과 무지의 죄를 깨닫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는 ‘당신의 종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소서’(13a)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기도는 구체화되어 ‘그 죄’, 곧 거만한 의지에서 발동한 ‘고의적인 죄들’이 나를 주장하지 말게 해달라는(13b) 간구가 됩니다. 그때 비로소 다윗은 ‘내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큰 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13cd)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당신의 종’(주의 종)으로 낮추면서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결백하기를 구합니다.

마지막 시행에서 다윗은 엄숙하게 구속자 여호와를 고백하고 헌신을 다짐합니다. 14절의 개역개정 배열은 본래 히브리 본문 시행과 다릅니다. 의미상의 차이는 없지만 묵직한 여운을 느끼려면 히브리 시행 순서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하늘과 태양, 곧 우주가 하나님 영광을 선포한 것(1)에 이어, 언약의 주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가르침의 아름다움을(7-9) 노래합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합니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14ab).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2), 다윗은 자신의 말이 헛되지 않고 여호와가 기쁘게 받으실 제물이 되길 빕니다. 더군다나 ‘묵상’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포함된 것입니다. 다윗은 앞서 자신의 내밀한 것들까지 하나님 앞에 수렴되기를 바라며, 거짓이 없고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13) 간구합니다.

마지막 그의 간결하고 확실한 고백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입니다’(14c). 그가 선포한 창조자 하나님은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나’ 한 사람의 피할 반석과 구속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연대감을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구속자’(고엘)는 구약에서 법적인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사람의 빚을 갚아주고 자유를 얻게 해주는 사람이 ‘고엘’, 곧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옛 조상들을 애굽의 노역으로부터 빼내어 속량하신 (구속하신, 출애굽기 6:6)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의 폭압적인 통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로 고백하듯, ‘구속자’는 폭력적이고 노예적인 모든 종류의 삶에서 구출해주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참조, 이사야 54:8).


 다윗은 말씀에 비추었음에도 미쳐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다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듣고도 돌이키지 않을 만큼 완고한 종이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의 사람만이 죄의 무서움을 알고 두려움을 갖습니다. 민감한 분별력을 구하며 말씀이 낳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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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3)

 


내가 승리 중에

시편 18편 30-50절 


우리는 환난의 시간보다 승리의 시간을 보낼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지기 쉽고, 그 승리를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점검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지입니다. 당신은 환난 중에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고 있습니까?

 

  • 시인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곧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셔서 구원하시고, 열방의 으뜸이 되게 하신 것을 찬송합니다. 이 일로 열방이 자기에게 굴욕감을 느끼지만 복종하게 되는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야)의 온 세상 통치라는 제왕시의 중심 사상이 나타납니다. 이와 함께 다윗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빅 불가능한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도와 안전한 구원(30-36)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순수하여 변치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되기에 다윗은 약속에 의지하여 신뢰하고 순종합니다. 말씀을 믿는 자만 세상을 이깁니다. 이제껏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신뢰와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2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33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0-36)

 

다윗은 환난 중에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움을 지나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원수의 손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1) 길과 방패 되신 하나님(30) 

다윗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며 그는 방패여서 피하는 모든 자가 안전합니다(30). 다윗은 독특하게 ‘하나님’ (하엘)앞에 정관사를 덧붙여 ‘신들 중에’ 신으로서 가장 탁월하신 하나님, 비교 불가능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참조. 신명기 33:26). 비교 불가한 ‘하나님의 도’의 완전성과 ‘여호와의 말씀’의 순수성이 평행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뛰어난 신이 제시하는 ‘길’, 곧 ‘도’는 여호와의 정제된 말씀 안에서 구현됨을 선언합니다. 더군다나 군사적인 위협에서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라는 은유로 묘사하여 보호막이 되신 하나님을 증언합니다(30bc). 

(2) 나의 반석, 나의 길 되신 하나님(31-36)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시인의 고백적인 증언은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재차 강조됩니다. ‘참으로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인가,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반석인가?’(31) 이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참조, 출애굽기 15:11; 신명기 33:26, 29; 사무엘상 2:2; 이사야 46:9). 또한 다윗은 유일하시고 반석이신(31) ‘그 하나님’이 힘으로 자신을 꽉 묶으시고 자신의 길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32). 다윗은 하나님의 ‘도(길)’가 완전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길을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병행시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밀착된 존재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시인을 자유롭게 대지와 언덕을 달리는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하시고 높은 곳에 서게 하셨습니다(33).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훈련시켜 화살을 당기게 하셨고(34), 승리의 방패를 주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그의 낮추심(온유함)이 자기를 크게 했다(35)고 증언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자신의 몸을 굽히시고 낮추셔서 돌보시는 영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발걸음을 넓게 하시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으니(36) 이는 드넓은 영토를 거침없이 행보하도록 돌보셨다는 뜻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37-4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친히 전쟁을 주도하시고 원수들을 처서 굴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나갔을 때, 다윗이 본 것은 도주하는 적들의 등뿐이었고, 그가 한 일은 적을 추격하여 바람 앞에 티끌 같이, 거리의 진흙 ㄱ같이 부수고 발아래 짓밟는 것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대적의 부르짖음에 결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37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39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40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42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37-42)

 

다윗은 자신의 대적들 앞에서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쫓는 자가 되어 도망치는 원수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멸망을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고백합니다(37). 마침내 대적들을 그의 발 앞에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38). 다윗은 적들을 완전히 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39-40).

‘주께서 …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40)라는 말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나라 밖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 없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셔서(41) 다윗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쫓는 자가 되어 도망치는 원수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멸망을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고백합니다(37). 마침내 대적들을 그의 발 앞에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38).

다윗은 적들을 완전히 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39-40). ‘주께서…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40)라는 말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나라 밖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 없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셔서(41) 다윗의 대적들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다윗 편이셨습니다. 다윗은 대적들을 바람 앞에 티끌처럼 날려버렸고, 길거리 진흙처럼 쏟아버릴 수 있었습니다(42). 다윗은 자기를 공격하는 대적들을 ‘내 원수’(37, 40), ‘나를 치는 자들’(39), ‘나를 미워하는 자들’(40)로 다양하게 묘사하며 자신의 궁극적 승리의 원동력과 그들의 패배 원인을 하나님께 둡니다.

 

우주적 왕권(43-45)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전진해 나갈 때 흑암의 영들은 두려워 떨며 뒤로 물러납니다. 교회가 담대히 일어나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의 영을 꾸짖는다면 악한 영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우주적인 왕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왕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고 계십니다.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43-45)

 

다윗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백성의 다툼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셔서, 나를 알지 못하는 배성까지 나를 섬길 것입니다’(43). 이 고백은 사울 집안과 오랜 시간 다투며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삼하 3:1), 그리고 이방 민족들과 벌인 전쟁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를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그의 왕권이 하나님에 의해 확장될 것을 믿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높이셔서 자기 언약 백성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섬기게 하셨습니다(사무엘하 8:6; 10:19).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계승하는 것이고,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의 확증이며, 장차 성취될 ‘메시아의 통치’를 내다봅니다. 다윗은 또한 다툼을 벌였던 자들과 열방이 자기 소문을 듣고 복종할 것이라고 믿습니다(44).

또한 이방의 자손들은 쇠잔해져 요새에서 떨며 항복할 것입니다(45). 꽃과 잎이 시드는 것처럼(이사야 1:30; 28:1)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서 힘과 용기를 잃는 모습을 그립니다. 더군다나 이방의 대적들이 지키던 ‘견고한 산성’에서 항복하는 것은 억압하려 했던 자들이 비굴하게 복종하게 되는 전복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반석이신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46-50)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니 언제까지든지 자기 백성과 맺은 약속을 지켜내실 수 있습니다. 반석이 되어 보호하시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민족들 위에 세우십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왕에게 언약적 사랑으로 큰 구원을 베푸시며, 믿음으로 그 언약의 후손 된 모든 자에게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더 큰 구원과 온전한 승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46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8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46-50)

 

다윗은 구원과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과정과 흐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다고 찬양합니다. 

(1)나의 반석이며 살아 계신 여호와(46-49) 

다윗이 곤경에서 구워해 주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시의 마지막은 송영입니다. 그의 첫마디는 우상처럼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분의 존재를 선포한 말입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되심을 찬양하라’(46a), ‘살아계신 하나님’(‘엘하이’, 42:2; 84:2)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라는 어법은 시편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다윗은 그가 내 구원의 하나님이니 그를 높이라고 외칩니다(46b). 이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 만세를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가 ‘내 반석’이라는 고백은 이스라엘 안에서 회자된 말일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큰 바위’되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합니다(참조. 사무엘상 2:2). 다윗은 자기를 위해 보복해주신 여호와가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길을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47; 18:32), 그 하나님이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셔서 완전한 복수를 해주셨습니다. 이는 다윗을 공격하는 원수들의 악을 갚아주신 사건들을 가리킵니다(참조. 사무엘하 4:8). 다윗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열거합니다. 그분은 원수들에게서 구원해주시고, 대적자들 앞에서 높여주시고, 포악한 자들에게서 건지신 분입니다(48).

승리는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살아계신 여호와, 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가운데 여호와께 감사하며, 내가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49절). ‘이방 나라들’, 곧 열방이 그의 통치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오래전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고되었음을 전합니다(로마서 15:9). 

(2) 메시아의 영원한 통치(50)

마지막으로 시인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고,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시며, 다윗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그렇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50).

마지막 시행은 우주적인 왕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 왕 다윗,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지속되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인자’(헤세드)를 찬미합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이 어느 특정 시대로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임을 선포하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행은 다윗 언약(사무엘하 7:12-16)에 근거하여 이미 다윗 당시 성취되었고, 장차 그 후손을 통해 완전한 성취로 이어질 것을 내다봅니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주셨기에 이룬 값진 승리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승리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승리로 이끄십니다. 용기를 낼 때 북돋아 주시고, 힘을 낼 때 크고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싸운 자만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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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2)

 

 


나를 도우신 하나님

시편 18편 16-29절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질 때 우리는 밖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현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믿음으로 도약을 시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인 다윗은 약자를 구원하시는 하니님을 선포하기 위해 옛적 애굽으로부터 자기 조상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켜 자신과 모세의 지도력을 연결시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이유가 그의 규례와 율례를 따라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는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기초합니다.

 

악한 자들 구원하시는 하나님(16-19)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듯 다윗을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져내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넓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16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6-19)

 

다윗은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후(7-15), 그는 여호와가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셔서 자기를 붙잡아주시고,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동사로 표현합니다(손을 펴시고, 불잡으시고, 건지셨다).

그런데 다윗은 ‘그가 나를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b)고 할 때, ‘건져내다’는 ‘마샤’로 ‘모세’의 어근 동사입니다. 이는 ‘건져진 자’라는 뜻의 모세를 상기시킬 뿐 아니라, 나일 강에서 건져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출애굽기 2:10) 자신을 연결합니다. 더군다나 많은 물은 헤어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물이며, 위험한 물로서 죽음의 물을 상징합니다. 옛적 애굽의 범람하던 강물이 생명의 강이 아니라 영아를 학살하는 죽음의 강이었던 것처럼, 다윗은 많은 물의 위협에서 구원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다윗에게 좀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힘이 센 강한 원수와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주님이 구원하셨다(17)고 말합니다. 강자의 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묘사입니다. 다윗은 이를 내세워 자기 원수를 힘 센 강자로 표현하고 반면에 자신의 무력함을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또한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몰려온 그 재앙의 날에 하나님이 의지가 되셨다(18)고 회고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분으로 거칠고 험악한 삶을 살던 시절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 추적했던 때를(사무엘상 23, 24, 26장) 회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 왕의 강한 힘 앞에서 다윗은 무기력한 도망자였습니다. 왕의 군사들의 좁혀오는 추적 앞에서 두려웠을 다윗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를 위해 일하셨던 은혜를 기억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진실의 문을 열어 현재의 고통에 희망을 건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19). 좁고 험하고 거친 협곡들과 동굴에 숨어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상태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은 여호와가 자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19b)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스스로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떠나지 않은 삶과 보상(20-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자비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성품 그대로,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완전하며 깨끗한 마음을 품은 이들에겐 마땅히 받을 대접을 받게 하시되, 사특한 자는 거부하십니다. 종종 세상은 의인의 알 수 없는 고난과 악인의 흥왕함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과 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였음이로다 23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20-24)

 

다윗은 이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고, 내손의 깨끗함에 따라 내게 갚으셨다’(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충실히 지키신 것처럼, 다윗이 그 언약의 규범들을 지키는 일에 충실했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운 삶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특히 ‘내 의’와 ‘내 손의 깨끗함’은 살면서 올바름과 순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도덕적인 완결성을 표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의 의로움과 깨끗함을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데, 이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상해주신 이유들을 더 상세히 나열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21).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나의 하나님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정하신 ‘길’, 곧 하나님이 정하신 ‘생활양식’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서 우주를 창조하신 보편적인 명칭, ‘하나님’과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동시에 언급합니다(21). 이는 세계를 지으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구원하신 여호와라는 동일성을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규례가 자기 앞에 있고,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22). ‘규례’는 세부적인 법률적 항목들을 가리키며, ‘율례’는 성문화된 법령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명기 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열왕기상 2:3) 이 둘의 예리한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언약 관계 안에서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세부 항목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들에서도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고,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합니다(23). ‘완전하다’라는 말은 흠이 없고, 지탄받을 만한 어떤 일도 행하지 않고 정직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평행적 관계를 고려하면, ‘완전함’은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규범을 버리지 않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따라 되갚아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4). 다윗은 ‘갚아주다’라는 말을 반복할 만큼(참조. 20)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확신합니다.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25-29)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에게는 신실함을, 흠 없는 자에게는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을 보이기고, 불쌍한 백성은 자비로움으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약하고 사특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여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성품 그대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25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7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5-29)

 

지금까지 하나님을 ‘여호와’와 3인칭으로 호명하다가 2인칭 ‘당신’ 으로 바꿉니다. 자기 의를 갚아주신 하나님과 보편적 인류 사이에서 여호와를 '당신’으로 호명하고 그분의 성품을 밝힙니다.

‘경건한 자에게 당신은 진심으로 대해주시고, 완전한 자에게 당신의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25).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와 삶의 태도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완전한 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맛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하심으로, ‘사악한 자’, 곧 비뚤어지고 거짓된 사람은 혹독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26).

요약하면, 여호와는 신실한 자에게 자비로우십니다. 하지만 불법적이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성에 기초합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당신은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사람의 눈을 굴복시키십니다’(27). 곤고한 백성은 가난, 궁핍, 환난으로 비참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지만, 이들과 대조되는 교만한 자는 눈을 낮추시고 굴욕을 당하게 하십니다. ‘교만한 눈’은 말 그대로 하면 높아진 눈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의 교만에 대한 외적 표현입니다. 오만하고, 도도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태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오만함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자들을 깎아내리시고, 낮추시고, 창피를 주셔서 더 이상 오만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 삶을 성찰하며 고백합니다. ‘참으로 여호와 당신은 나의 등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28). 그는 앞서 자신을 죽음과 스올에 갇힌 사람 같았다고 했지만(4-5), 그 깊은 어둠의 세계에서 등불을 들고 어둠의 세계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신 등불 때문에 죽음과 시련의 어둠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대조는 성경 전체에서 고루 발견되는 일반적인 은유입니다. 어둠은 죽음의 세계와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반면, 빛은 질서와 생명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원수들과 사울의 손에서 여호와가 구원하신 것을 찬미하며 노래할 때(사무엘하 22장) 고백한 말입니다(사무엘하 22:29).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에라도(사무엘하 7장) 자신의 등불이 꺼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참조, 열왕기상 11:36; 15:4; 열왕기하 8:19).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적군을 향해 나가고 하나님과 함께 적의 요새와 성벽을 무너뜨리고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9). 이는 다윗이 아말렉 군대를 비롯한 적의 군대를 추격할 때, 참 용사이신 하나님만 의지했던 신앙 고백입니다.


 

캄캄한 어둠일지라도 주님께서 등불을 밝히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함께하시면, 내달려 적군을 쫓고 높은 성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랜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능력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 확신을 위해 오늘 당신이 쌓아야 할 경험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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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8-0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시편 18편 1-15절


사람들은 힘을 가지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평생 힘을 기르고 유지하는 데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어떤 힘보다 강한 힘은 여호와가 내 힘일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키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고, 아뢰며 부르짖으며, 피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8편 전체는 50절로 구성된 긴 시편들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다양한 주제들을 반영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찬양합니다. 1-15절 단락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사랑과 위대한 구원자 하나님을 ‘방패’, ‘구원의 뿔’, ‘반석’, ‘요새’, ‘피할 바위’, ‘산성’ 등의 은유로 묘사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악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는 찬양입니다.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1-2)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싫든 좋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는 어려움과 고난이 있고 박해가 있습니다. 때로는 유혹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주 믿음의 시험대에 서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윗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2)

 

본 시편의 부제(副題)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입니다. 즉 다윗이 그 인생의 모든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사울에게 겪었던 어려움을 포함한 다윗의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견뎌낸 후에 그가 믿음으로 견디는 동안에 경험하고 누린 하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이 묻어나는 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의 첫마디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생소합니다. ‘사랑하다’로 표현된 ‘라함(רחמ)’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은 사랑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애절한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독특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에 근거한 충성을 표현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서 여덟 가지 은유로 하나님의 본성을 묘사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입니다(2). 이 은유들의 특징은 군사적인 상황과 지형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의 성격을 표현합니다. 특히 ‘나의 구원의 뿔’이라는 말에서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참조. 사무엘하 22:3). 이는 다윗이 군사적인 위협과 험준하고 거친 광야의 삶에서 체득한 하나님 묘사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하나님의 구원(3-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쉴 만한 반석으로, 견고한 요새로, 방패와 구원의 뿔로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윗은 어려움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삶 가운데 고비 고비마다 생생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어려웠던 상황을 전쟁터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당신이 묘사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3-6)

 

다윗은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에게서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 다윗은 치명적인 죽음처럼 강렬했던 위험을 회고합니다.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가 자신을 얽어매고 두렵게 했습니다(4). 또한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가 자신에게 이르렀음을 감지했습니다(5). 4-5절에 죽음을 상징하는 은유들은 다윗을 얽어매고 잡아 묶어 죽음에 휩싸이게 하여 발현되는 두려움입니다.

더군다나 ‘불의의 창수’(4)는 위험한 강물입니다. 곧 ‘벨리알의 강물’은 고대근동 사회의 신화적인 용어를 인용한 말로 파괴적인 홍수이며 태초의 혼돈 세력을 상징하는 물입니다. 그 죽음의 강물이 죽은 자들의 지하 세계, 곧 ‘스올’로 다윗을 묶어서 가혹하게 끌고 가는 영상입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에 갇힌 상태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쓸 수 없는 죽음의 위협에 사로잡혔지만(5), 무서운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청했습니다(6ab).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전’에서 들으셨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6cd). 그의 ‘성전’은 어디입니까? 다윗 통치 기간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으니 하늘의 처소일 것입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사람의 눈에 감춰진 깊은 지하, 곧 어둠의 세계인 ‘스올’(5)과 대비시켜 사람에게 가려진 하늘 성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깊은 어둠에 사로잡혔을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러 오시는 것을 확신합니다. 사망에서 구원받는 것은 구약의 세계관에서는 매우 독특한데, 다윗은 죽음을 돌파하시고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강림(7-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 필요와 상관없이 아주 길게 침묵하시며 숨어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토록 오랫동안 쫓겨 다닐 동안 가만히 두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진노로 심판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물밑에 있는 땅이 보이도록 바다를 여시고 그 안에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우리에게도 일하실 것입니다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15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7-15)

 

하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전쟁에 익숙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항상 접하는 지형들인 전쟁 중요한 피난처들로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원수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소개합니다.

 

(1) 화염을 뿜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7-9)

 

마침내 하나님께서 강림하십니다. 땅이 진동하고 요동치며, 산의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합니다(7). 옛적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강림하셨던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묘사입니다(출애굽기 19:16-19).

죽음의 세계에 갇힌 다윗을 구원하기 위한 강림입니다. 다윗 생각에 지진과 폭풍우로 산들의 기초가 요동칠 정도의 강력한 흔들림은 하나님의 진노에 근거합니다. 계속되는 시행도 하나님의 진노를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살라버리고, 그 불에 숯이 피었습니다(8). 연기와 불과 숯불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점점 불이 거세지는 영상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연기와 화염으로 강림하셨습니다(출애굽기 19:18; 20:18;신명기 4:11-12). 하나님의 코와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의 영상으로 소개되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인 묘사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적인 문학기법입니다. 화염을 뿜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상상력 넘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두렵고 위엄찬 강림 후에 하늘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데, 그분의 발아래는 어둡고 빽빽한 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9).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하는 단락과 통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이사야 64:1-2).

 

(2) 그룹과 바람 날개를 타신 하나님(10-11)

 

빽빽한 구름을 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9b) 그룹을 타고 하늘을 나십니다.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십니다(10).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일이 펼쳐집니다. ‘바람 날개’는 바람이 날개를 달고 나는 새처럼 솟아오르는 영상입니다(호세아 4:19; 시편 104:3). 하나님께서는 타고 솟으시는 ‘바람 날개’와 평행되는 ‘그룹’은 무엇입니까? ‘그룹’, 곧 ‘케루브’는 최초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 동편을 지키는 천상의 존재입니다(창세기 3:24). 날개 달린 짐승으로 천상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킵니다(에스겔 1:5-14; 10:21; 참조, 출애굽기 25:19).

또한 하나님께서는 흑암을 그의 숨는 장소로 삼으시고, 장막처럼 두르시며 하늘의 어두운 비구름(빽빽한 구름)을 주변에 두르셨습니다(11), 비를 잔뜩 머금은 시커먼 구름에 싸여 계신 장면입니다. 이러한 영상은 당대 가나안 신화에서 익숙한 폭풍의 신 바알을 연상시키지만, 다윗은 강력한 폭풍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변증한 셈입니다.

 

(3) 우레와 콧김으로 꾸짖으시는 하나님(12-15)

 

이제 하나님의 광채로부터 캄캄한 구름이 지나가고 우박과 번쩍이는 숯불이 지나갑니다(12). 하늘의 우박과 벼락이 동반되는 광경입니다. 다윗은 하늘의 우렛소리를 여호와의 음성으로 표현합니다. ‘지존하신 자’가 목소리를 발하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13). 여호와가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자신을 감추신 듯하지만, 우레와 같은 그분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존재감이 울려 퍼집니다. 이것도 옛적 조상들에게 구름, 번개, 뇌성, 우박과 번쩍이는 숯불처럼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와 비슷합니다. 그 옛날 시내산 강림의 하늘빛처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강림하시는 모습입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영광과 위엄찬 강림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여호와가 원수를 직접 공격하십니다. 그분이 화살을 날려 원수를 흩으시고,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습니다(14). ‘그의 화살’은 둘째 소절에서 평행되는 ‘번개’입니다. 고대 근동 문헌에서 번개는 자주 화살로 묘사되곤 합니다(시편 77:17; 144:6). 무엇보다 ‘날려, 흩으시고, 깨뜨리셨다’로 연속되는 동사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특히 ‘깨뜨리셨도다’라는 말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소동이 일어나는 장면을 표현합니다(참조. 민수기 10:35; 시편 68:1; 사무엘상 11:11).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대동하시고 악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는 상황 묘사입니다. 이처럼 우주질서를 관장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행을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목소리와 장면 묘사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여호와의 콧김이 폭발하자 바다 끝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발가벗겨지듯 드러납니다(15). ‘꾸지람’과 ‘콧김’이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입니다. ‘콧김’은 ‘콧바람의 기운’으로 여호와의 코에서 품어져 나오는 생명의 ‘바람’(루아흐)입니다. 여호와가 호령하시며 발하시는 생명의 기운이 물밑을 드러낼 만큼 강력합니다. 이는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연상시켜(출애굽기 14:21) 다윗의 구원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강림과 악인은 세상 근원을 통치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적인 권능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람 날개를 타고 솟구쳐 오르십니다. 구름으로 장막을 치시고 은밀한 중에 감수십니다. 나타나실 때는 광채가 발하고 우박이 쏟아지고 번개가 칩니다. 애굽을 심판하실 때도, 홍해에서 적들을 섬멸하실 때도 두려운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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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4-01)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

욥기 4장 1-21절


우리는 각자의 틀로 사물과 사람을 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안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하고 완벽한 시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크고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욥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논쟁(4-31장)이 시작됩니다. 세 친구들 중에서 엘리바스가 할 수 있습니다. 4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3장의 욥의 발언 중 엘리바스로 하여금 침묵을 깨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냐를 가장 먼저 말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두 친구들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점에서 엘리바스가 세 친구들의 대표격이라 파악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지키고 변호하고 싶은 지혜(신학적 입장)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난의 원인에 대한 엘리바스의 추론(1-6)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삶이 여러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삶을 쉽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과 지적이 답이 아니라, 고난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답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런 평가와 판단이야말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1-6)

 

욥의 말이 끝나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처음으로 욥의 말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4-5장에 언급된 엘리바스의 말속에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전개될 모든 종류의 주제, 논쟁이 들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첫 발언인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2)을 욥을 꾸짖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욥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한 말을 하면 과연 자네가 견딜 수 있을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지나온 삶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방식(3-4)은 한편으로는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대화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법이기도 합니다.

3-6절에서 엘리바스가 사용하는 언어는 철저하게 규범적 지혜의 언어입니다. 연약한 자들(“손이 늘어진 자”), “넘어지는 자”와 “무릎이 약한 자”(4)는 규범적 지혜에서 ‘지혜가 부족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훈계”가 필요하고 “강하게” 해 줄 지혜자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욥이 훌륭히 해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따르는 지혜자/의인의 특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리고 이와 동의어로서 “온전한 길”을 “소망”하는 것입니다(6). 엘리바스가 평가하는 욥은 ‘규범적 지혜의 화신’이며, 이는 1-2장에서 언급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8; 2:3)라는 평가와 일치합니다. 5절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와 “이 일이 네게 닥치매”라는 ‘비인칭 주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맥상 욥에게 닥친 고난을 의미하고, 앞 문장의 표현으로는 ‘손이 늘어짐’, ‘넘어짐’, ‘무릎이 약해짐’을 의미합니다.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이러한 일은 지혜가 없는 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은 악인에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근간: 인과응보(7-1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선택에 대한 결과를 보상하거나 징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잉과응보는 일반적으로 행위와 결과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보상과 벌을 포함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잉과응보와는 별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동시에,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7-11)

 

하나님의 세상 통치 원리는 신상필벌, 인과응보라는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욥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한마디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욥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정직”)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 공종 통치 원리를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7).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8절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여기서, 죄 없이 망한 자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산 사람(“정직한 자”)에게는 끊어짐이 없다는 엘리바스의 말(7)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이 나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나온다는 극히 ‘당연한’ 원리(규범)는 성경 말씀(특수 계시)과 자연 현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일반 계시)을 통해 지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잠언 22:8; 호세아 10:12; 시편 126:5-6 등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말씀들로 우리는 삶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죄없이 망한 자는 없다는 엘리바스의 단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경우를 직접 관찰해서 도출된 결론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추론’일 따름입니다. ‘나쁜 것을 뿌리면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말을 뒤집어, ‘나쁜 결과를 맺은 것을 보니 나쁜 것을 심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결과론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징벌이 찾아온다’는 말과 ‘고난이 오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다’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둘째, 욥이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한다는 엘리바스의 추론은 욥이 죄를 짓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 나온 분석이 아닙니다. 1-2장을 읽은 욥기의 독자는 욥에게 닥친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뿐만 아니라 엘리바스도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욥기는 엘리바스의 ‘신학적 추론’이 천상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설사 욥의 잘못을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말이 욥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를 바로잡기 위해 건네는 조언일지라도, 독자는 엘리바스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말’일 뿐입니다. 진실이 아닌 말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넘어짐’(4)과 ‘끊어짐’(7)이 죄인과 악인,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아둔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적 진술에 대해 반성적 지혜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100퍼센트 예외 없이 항상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고, 욥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원리는 많은 경우에 해당되는 근본적인 원리이긴 하지만, 그 원리 하나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규범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반면에, 전도서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반성적 지혜를 보여줍니다. 전도서 4:10의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와 전도서 4:12의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은, 넘어짐과 끊어짐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 악인/무지자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므로 거기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반성적) 지혜라는 뜻입니다.

 

계시와 지혜의 내용(12-21)

성도들에게도 인과응보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 항상 인과법칙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선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오로지 형벌만 받는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는 이러한 법칙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12-21)

 

욥기 4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진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해석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진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8절의 “내가 보건대”라는 표현과 13절의 “환상”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습니다. 엘리바스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진술하고 있다거나, ‘직통 계시’의 신비적 체험을 기반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특정한 표현들에 집착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보건대”라는 문장의 목적절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8)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이 원리가 엘리바스 개인에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주장입니까? 동일한 주장을 빌닷도 하고 소발도 합니다. 잠언과 신명기 등의 규범적 지혜도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의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눈앞을 지나가는 특이하고 신비한 체험이 엘리바스에게 알려준 내용의 결론은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21)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는 죽음과 멸망을 초래한다는 ‘규범’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도 특이하고 신비할 것 없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환상”은 계시의 정당한 한 방법입니다. 그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목소리의 내용이 17-21절입니다. 그 핵심은 허무하고 연약한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불결한 존재라는 것입니다(17). 그래서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않고 천사라도 미련하다고 하신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욥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1:8). 그는 지금 하나님의 평가를 부정하는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부각하였지만, 인간을 지나치게 격하시킴으로써 도리어 하나님의 명예와 성품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믿지 않는 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21절은 인간에 대한 엘리바스의 경멸의 시각을 계속 보여줍니다. 천사도 미련하다고 책망하시는 하나님께서 흙 집(진토에 사는 육신)에 사는 티끌로 지어진 존재이며, 하루살이 앞에서 부셔 뜨려지는 자를 믿어주시겠느냐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부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3장에서의 욥의 진술이 선악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것이 엘리바스의 첫 번째 진술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삶의 원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이 원리가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잉과 응보의 법칙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평가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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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3-01)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는 욥

욥기 3장 1-26절


우리는 고난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피할 길을 내시는 대신에 그것을 직면하여 정면으로 다루는 방법을 훈련 시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종종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문제를 영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고난 일지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세심하게 돌보심을 믿는다면,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욥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세 명의 친구들은 아무 말 못 한 채로 칠 일 동안 함께 보냅니다. 욥의 이야기는 이들의 침묵을 깨는 계기가 되며, 앞으로 진행되는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이 됩니다. 3장에 나타난 욥의 말 중에 세 친구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하도록 촉발한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욥기 3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도입부:단절인가 연속인가(1-2)

고난은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이나 역경을 가리킵니다. 이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단절이 아닌 연속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험을 쌓고 배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이며,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부분입니다.

 

1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1-2)

 

욥기 3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3장의 욥의 말이 1-2장과 단절되는 것이냐 아니면 연속되는 것이냐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욥의 성격에 변화가 있다는 관점은 1-2장과 3장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욥이 반항적이고 도전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 이 해석의 문제점 혹은 약한 고리는 욥이 그렇게 바뀌게 된 계기에 대해 욥기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추측과 상상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심한 고통(욥 2:13) 이 욥으로 하여금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밤낮 칠 일 동안”(2:13)이라는 시간의 경과를 지칭하는 표현과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자신의 입을 열었다’(3:1)라는 구절이 이러한 단절의 관점을 지지해 줍니다.

그러나 태도나 말투에 현혹되지 않은 채로 1-2장의 욥과 3장 이하의 욥의 진술이 과연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1:21)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는 욥의 신앙고백은 욥이라는 인물의 착하고 순종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바로 인과응보의 원리, 즉 뿌린대로 거두는 원리를 초월해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이 “까닭 없는”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이 무작위일 뿐이라는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주권 하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인간은 그 까닭(원인)을 다 알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진술입니다.

 

고통에 대한 호소(1): 저항인가 탄식인가(3-13)

고통에 대한 호소는 개인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통을 도전으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힘들게 시도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고통을 기회로 여기며, 성장과 발전을 위한 동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3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11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3-13)

 

욥기 1-2장과 3장 이하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욥기 3장을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는 ‘저항시’가 아니라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를 호소하는 ‘탄식시’로 이해합니다. 욥기 3장은 2:13에서 언급된 “욥의 고통이 심함”을 욥의 입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장면(특히 3:3-13)은 예레미야 20:14-18과 그 언어 표현이 상당히 유사합니다(“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예레미야의 이 탄식을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도전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욥 또한 2장에서 묘사된 뼈와 살을 치는 심한 고통(5,13)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죽으면 이 고통이 없어질 텐데’라는 의미의 표현들이 현대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 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을 값어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욥의 태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경함’을 읽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세 친구들의 발언과 엘리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욥의 탄식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는 장면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즉, 욥기의 등장인물들과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 진술을 하나님께 도전하는 ‘문제적 발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칠 일 동안 말없이 욥의 고통을 함께한 친구들로 하여금 침묵을 깨도록 만든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진술입니다.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14-19)

인생에는 다양한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은 우울하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닌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에게 행복과 따뜻함을 선물해주는 이들의 존재가 소중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슬픈 일에 대해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되려 아픔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날들에 대해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묻게 되었습니다.

 

14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14-19)

 

차라리 죽었으면 이 고통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욥의 진술은 그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주제는 반성적 지혜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범적 지혜는 ‘의인/지혜자에게는 생명이, 악인/무지자에게는 멸망(죽음)이’라는 도식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됩니다(잠 4:22), 이 지혜가 결여된 악인을 기다리는 것은 멸망(죽음)입니다(잠 1:32; 6:15; 10:8-15,29; 18:7; 28:24). 지혜와 의는 죽음에서 건지며(잠 10:2; 11:4),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육체의 건강과 생명(‘영적 생명’이 아니다)은 지혜에 속해 있고, 멸망과 죽음(마찬가지로 ‘영적 죽음’이 아니다)은 무지와 악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반성적 지혜는 이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지혜자는 죽지 않습니까? 죽음이 그들에게도 찾아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1-2장이 규범적 지혜가 다루지 않는 천상의 공간을 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온 것처럼, 욥기 3장은 규범적 지혜에서 언급되지 않는 죽음의 평등성을 논의의 단상에 올려놓습니다. 욥이 묘사하는 사후 세계는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무지자가 모두 함께 있는 곳입니다. “임금들”과 “모사들”(14절)은 의인과 지혜자를 나타냅니다. 잠언에서 임금(왕)은 “의/공의”(8:15; 16:12, 13), “재판/심판/정의”(16:10;29:4), “정직”(16:13), “생명”(16:15), “지혜(20:26)”와 연결됩니다. “모사들”에게는, 잠언에 따르면, “평안”(11:14), “화평, 희락”(12:20), “경영”(15:22), “승리”(24:6)가 주어집니다. 또한 15절의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 역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서, 부요는 의와 지혜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진술은 이 의인이자 지혜자들이 정반대의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한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16), “악한 자”와 “피곤한 자”(17), 그리고 “갇힌 자”(18)가 바로 그들입니다.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으며 종과 상전의 구분도 없는(19) 사후 세계는 규범적 지혜의 근간인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곳입니다.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는 전도서 역시 이 지점에서 욥의 이해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죽음에 있어서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과 짐승의 구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전 3:19-20). 만약 지혜자와 우매자의 결말이 동일하다면, 규범적 지혜를 추구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욥의 첫 번째 발언 중에 친구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지면, 규범적 지혜의 선악 구분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명분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까닭 있는 신앙’ 혹은 ‘영적 투자’를 아무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호소(2)(20-26)

고통은 우리에게 불편함과 아픔을 주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받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연대감과 동정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우리가 감사하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20○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0-26)

 

고통에 대한 두 번째 호소는 ‘죽음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탄식(1-13)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첫째,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이 23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발언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이 말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에서와 동일합니다. 둘째, 규범적 지혜에 대한 반문입니다. 고난이 악인에게 주어지는 징벌이라면, 그 악인에게는 멸망(죽음)이 뒤따라와야 하는 것이 규범입니다. 그런데 욥은 왜 “고난”과 “생명”이 동시에 주어지는지를 고통스럽게 묻습니다(20). 22절의 ‘기쁨’과 ‘즐거움’은 의인과 지혜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이 규범적 지혜의 진술인데,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에게는 “무덤”을 발견하는 것, 즉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 “보배”요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역설입니다(21-22). 선과 악, 상과 벌의 이분법이 깨집니다.

 


욥은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죽음을 갈구했지만, 죽음은 영원한 안식과 쉼이 아닙니다. 죄 아래에서 죽는 모든 인간은 영원한 절망과 고통 속에 던져집니다. 욥이 그토록 바랐던 참된 안식은 오직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난 사람은 불안을 던져 버리고 평온함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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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6-02)

  


불순종에 대한 경고

신명기 6장 10-25절


성경은 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복’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복권에 당첨’, ‘사법고시 합격’, ‘대기업에 취직’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생각만으로 그친다면, 당신은 이 세상이 말하는 ‘복’만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은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셔서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복’과 함께 떠올릴 단어는 바로 ‘생명’입니다. ‘복’은 생명력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생명’다우면 그것을 복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 하는 과거를 회상해야 할 뿐 아니라, 앞으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온갖 축복을 선사하실 미래를 상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풍성한 미래는 의무와 더불어 보장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점유 과정에서 자신들의 능력과 재주로 공헌한 일이 없습니다.

 

복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10-13)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태어난 사람들이 정말 복이 있다는 것은 그 인간이 인간의 가치를 따라서 존중을 받고,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알고, 그 도리를 따라서 서로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고 그 인생은 복을 받은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도 다른 사람을 죽이고 아픔을 주는 인생은 그 사람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10-13)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자비와 구원하신 행위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성경적 신앙의 근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도움으로 해방 받았다는 사실입니다(이사야서 6:21-23; 8:14-16).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⑴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10-11)

 

모세는 장차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 누리게 될 축복을 일러줍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을 향한 맹세는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 약속이며, ‘들어가게 하신다’는 사역형 동사에서 나타나듯이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역사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 그들이 수고하지 않고 많은 것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즉, ‘훌륭한 성’, ‘훌륭한 물건들로 가득한 집’, ‘우물’,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것’ 등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풍요를 누리게 될 텐데, 문제는 바로 그 때 발생합니다. 삶이 풍성해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⑵ 가나안 땅에서 신앙을 지킬 것(12-1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질 여러 가지 부동산들은 그 땅의 가치를 크게 높이는 귀한 재산 품목들입니다. 그러나 이 전리품들이 모두 자신들이 세우고 짓고 파고 조성한 것들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던 것들을 그저 고스란히 넘겨받게 되는 것뿐입니다. 많은 건물들을 지닌 성읍이 파괴되지 않고 점령된다면 큰 유익을 남길 것입니다. 온갖 좋은 가구들과 생활 비품들로 가득한 집뿐 아니라 우물과 과수원도 큰 재산입니다.

특히 우물은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농경 문화권에서 매우 중요한 식수원이었습니다. 음력 7월에서 다음해 1월까지 6개월간(양력으로 9-10월에서 다음해 3-4월)은 우기에 해당합니다. 물이 쉽게 빠지는 석회암질의 토질과 지형의 특성상 저수지가 소용없었기에, 우기에 빗물을 받아놓는 방법들은 중요했습니다. 이 우물은 천연 우물(브에르)이 아닌 빗물을 담는 인공 우물(보드)이며, 주로 단단한 바위를 깊고 넓게 파서 우기에 내린 빗물을 보관하였습니다. 가나안의 주거지는 대부분 고원 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하천에서 물을 공급받기 쉽지 않아 비를 식수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저하수용 우물은 목축과 식용을 위해 중요했기 때문에 우물이 거주지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지만(창 16:14; 1:19,25,30; 24:11,20), 빗물 저장용 우물 또한 목축뿐 아니라(창 37:20,22), 특히 성읍 주민들을 위해 중요했습니다. 각 주요 거점 지역이나 성읍에는 커다란 저수용 우물들이 있었습니다(삼상 13:6; 19:22; 삼하 23:16). 더불어 개인 소유의 수많은 빗물 우물들이 만들어져 사용되었으며 사유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지하수 우물이든 빗물 우물이든 쉽게 마르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또한 짐승이나 사람이 빠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뚜껑을 덮어서 관리했습니다.

포도와 감람나무 열매는 가나안의 대표적인 과일들입니다. 특히 포도밭은 헤브론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었으며, 예루살렘 일대는 대규모 감람나무 단지가 조성된 ‘감람산’이라는 산이 있을 만큼 고급 감람유의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성읍들과 많은 가옥들, 우물들과 좋은 과수원들을 수고 없이 모두 ‘공짜로’ 얻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에는 의무가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아가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을 누릴 때 그들은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여호와를 잊어선 안 됩니다. 그분만을 경외하고 섬기며 죽은 신들이기에 아무런 효험이 없는 이방신들이 아닌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인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서원해야 합니다(12-13). 신약의 신자들도 그러합니다. 신자들은 죄의 노예로부터 우리를 구원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선 안 되며, 그분만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오직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모세의 짧고 강한 어조의 반복적 경고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심하여 … 잊지 말고 … 경외하며 … 섬기며 … 맹세하라’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14-19)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쉬울 수 있으나 항상 잘 순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삶이 풍부해지면, 과거를 쉽게 잊고 현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점점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하려다가 실패합니다. 성도들은 풍요로울 때든지, 빈궁할 때이든지 항상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14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16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19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14-19)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놀랍도록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때 하나님을 잊지 알고 더 잘 섬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육체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를 얻게 될 때 나태해지기 쉬운 신앙 자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날,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땅에 살고 있던 백성의 신들을 추종해선 안 됩니다.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은 이스라엘 주변(사비브)에 사는 여러 가나안 족속들을 가리킵니다(14). 이 경고는 십계명 중 1,2계명의 반복적 강조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진노하시어 반드시 자신의 백성마저 엄중히 징계하실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4:34에서는 하나님께서 시도하신 시험에 언급됩니다. 그것은 백성을 애굽로부터 탈출시킬 때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친히 마련하신 검증 절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신들과 파라오의 권능이 참인지 거짓인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여러 차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신지 시험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맛사’의 반역입니다(출애굽기 17장).

원래 시험은 의심을 품게 하는 대상의 신분과 능력을 확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직후 시내산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최초의 식수난을 겪었습니다(출애굽기 17:1). 당시 르비딤 지역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떨어지자 모세와 다투며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 명하셨고, 모세가 그대로 시행하니 반석에서 물이 솟구쳤습니다(그들은 아직 시내산 도착 전이므로 이 호렙 산은 시내산을 포괄하는 넓은 산악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건 이후 그곳에 시험이라는 뜻의 ‘맛사’ 또는 다툼이라는 뜻의 ‘므리바’라는 지명이 붙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검증하려 하기보다는, 이미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스스로 증명하신 여호와께서 봉주의 자격으로 그들에게 부여한 하나님 나라의 헌법, 즉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봉신으로서 충성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다른 문맥들에서 명령은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법령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는 어떤 문맥에서든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앞서 4:45에서 설명한 대로, ‘증언/증거’(에두트)란 영구적으로 증가 역할을 하는 변치 않는 법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비롯하여 다른 책들에서 ‘에두트’는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을 가리킵니다(출 25:16,21; 레 16:13; 민 4:5; 17:4; 17:10; 참조 레 24:3). 신명기 밖의 증거 이긴 하지만, 이렇듯이 증언은 좁게는 십계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시내산에서 반포된 십계명과 후속 율법들, 그리도 지금 재 반포 되거나 새롭게 입법될 제반 율법들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그 땅에서 대대손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무엇보다 십계명은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이 십계명은 또한 모든 율법의 초석입니다. 그 토대 위에 이후의 다양한 율법들이 주어집니다.

 

아무리 대적이 많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기만 하면 그들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후손에게 전해줄 역사의 교훈(20-25)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내려주십니다.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20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공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20-25)

 

이 교훈은 당대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대손손 그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은 후손들에게 이렇게 선포된 하나님의 율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이집트 땅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그들을 이끌어내 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대의 그들뿐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도 그 땅에서 영속적인 복을 누리며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며 사는 길뿐입니다.

모세는 이것 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움(츠다카)은 신구약 전반에 걸쳐 구원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용어입니다. 구약에서 츠다카의 개념은 광범위하여 간단히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대체로 우리는 '올바르게 정립된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의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의로움을 율법의 행함과 연결시킵니다. 즉, 계명의 '행함'이 신자의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단어 츠다카의 의미를 어떤 영어 성경은 ‘공덕’(merit)의 적립으로, 티게이는 하나님 앞에서 신용(credit)을 다지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단순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것이 조직신학적 개념으로 구원에 이르는 정의의 개념이라면, 믿음으로 의로워 지나 진정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함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여기서 확인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간사합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매어달려도 편안해지면 그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시기만 하면 더 잘 섬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큰 복을 받으면 부요에 젖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풍요로움에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풍요로움으로 쉽게 타락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부하든지 천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섬기며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완전히 축복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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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6-01)


율법을 듣고 순종해야할 이스라엘

신명기 6장 1-9절


요즈음은 겨울철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채소를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비닐하우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닐하우스는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따뜻하게 해줌으로 식물의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비닐을 걷어버리는 순간,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모든 식물을 얼어 죽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하는 비닐하우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호막입니다. 거추장스러운 혹이 아니라 자신들을 보호할 보호막입니다. 보호막 안에 있으면 안전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하신 함 하나님이시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계명들을 지키며 자손에게까지 가르치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순종에 따른 복의 약속(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고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 자체가 풍요와 번역 그리고 장수를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복의 공간이 되어질 것입니다.

 

1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1-3)

 

본문은 앞 5장의 십계명 단락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단락으로 보려고 합니다. 현재 1-3절까지는 그 서언적 강론의 ‘서론’ 부분입니다. 이 서언 부분에 이어 12장부터 본격적인 신명기 율법들이 반포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견해를 따라 본다면, 모세는 십계명에 이어 곧 선포될 제반 율법들에 대한 순종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처럼 그들에게 앞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이미 거듭 약속한 바 있습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만 예배하고 충성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유일하는 한 분 참된 하나님으로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오래 살 것이며 큰 번성을 누릴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신명기 최초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것은 목축이 잘 된다는 것이고, 꿀이 흐른다는 것은 농사가 잘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목축과 농업의 축복이 보장된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순간부터 다양한 이방 문화와 생활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경성하지 않으면 이방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빠져들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과는 달리, 경외함과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가장 잘 공경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자신과 교제가 단절된 인간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인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과 약속된 축복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제정하시고 모세를 통해 반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축복을 깨달은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단 말씀으로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기록한 사람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편 119:103)라고 말합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 공급되어지는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율법에 대한 태도(4-9)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으로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요 여호와이심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4-9)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⑴ 하나님을 사랑하라(4-5)

 

모세는 후대에 그 유명한 ‘쉐마’라는 제목이 붙은 감동적인 권면을 내놓습니다. 처음 단어인 ‘쉐마(들으라)’는 뜻의 명령형 동사라는 말 때문에 이 제목을 붙었습니다. 명령어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아)은 4:1과 5:1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듣고 준행하라’와 ‘듣고 배우고 행하라’로 번역되어 ‘쉐마’가 서두에 등장해 ‘들으라’로 시작하는 강한 효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쉐마’는 이후에도 9:1; 20:3; 33:7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쉐마’는 신명기의 정신과 신학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녹아 있기에 매우 특별하고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도 율법의 모든 요약을 이 ‘쉐마’ 헌장을 꺼내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쉐마 헌장은 특별히 십계명 중 첫째와 둘째 계명에 대한 해설적 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먼저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을 혼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삼중적 표현은 전인적 사랑을 요구하는 어법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지.정.의가 수반된 사랑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사고에서 ‘마음’(레바브)은 내적인 상태, 즉 생각과 의도의 좌소인(지) 반면, ‘뜻’(네페쉬)은 생기 있는 혼의 작용, 즉 감정과 열정, 욕구의 좌소입니다(정), 그리고 힘을 다하는 것은 ‘베콜 메오드’, 곧 문자적으로 ‘모든 최고의 것으로’, ‘넘침으로’인데 최선을 다한다는 뜻의 의지의 영역으로(의) 볼 수 있습니다.

 

⑵ 말씀을 기억하고 가르치라(6-9)

 

이어서 모세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권면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곧 모세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의 원문은 ‘말씀들’입니다. 우선 십계명은 ‘열 개의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들은 십계명을 포함한 제반 율법들, 시내산에서 선포되었던 율법들과 이제 모세가 갱신해서 다시 선포할 율법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선포된 이 말씀들을 우선 자신들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마음에 새기다는 문자적으로 마음에 둡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갖고 싶은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렇게 소중히 탐내야 할 보물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자녀들에게 그것 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의 가르침과 기억의 강조는 매우 인상적인 연속적 총칭 어법(merism)을 통해 강조됩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 길을 갈 때에는 누웠을 때에든 일어날 때에는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해야 합니다(참고로 총칭 어법은 양극단의 대조되는 것을 열거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늘과 땅, 남녀노소).

 

과거 출애굽 직전의 긴박한 유월절 밤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들이 그날 밤 급히 지켜야할 유월절 예식을 알려주면서 그것을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9). 지금 모압 광야에서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그 땅에 들어가기 직전인 이 백성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마음에 간직하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는 명령을 받습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친다는 동사는 ‘샤난’인데, 이것은 반복과 되풀이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되풀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설명과 해설을 통한 상세한 가르침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참고로 이 단어에서 ‘둘’이라는 숫자 ‘쉐나님’이 파생되었고, ‘미쉬나’라는 유대인의 구전 율법문집(구전 토라)을 지칭하는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미쉬나’는 ‘되풀이한 말씀’이라는 뜻의 율법 해설서이며 복음서에서 '장로들의 전통'이라 부른 책입니다(마가복음 7:3-15),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 즉 ‘표시’로 삼으라 했는데, 손은 가장 자신의 눈에 잘 띄는 신체 부위입니다. 말씀을 미간에 붙여 ‘표’(토타모트)로 삼으라는 것은 머리의 띠에 말씀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라는 뜻인데, 이마의 장식은 타인의 눈에 잘 띄는 신체 부위입니다. 이 권면으로 인해 훗날 유대인들은 ‘테필린’이라는 양피지 재질과 딱지 모양의 작은 성구함을 만들어 이마와 손목의 표로 달고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것의 오늘날까지 관행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의 ‘말씀을 네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네 집의 문설주’는 각 집의 출입구에 세운 ‘문설주’(메주조트)를 의미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어떤 주택은 ‘대문’(델레트)이 있었습니다(예, 롯의 집 문, 창 19:6; 그 외 신 15:17; 수 2:19; 삿 11:31). 출애굽기 12:7에서 좌우 문설주와 인방(문의 위쪽 틀)에 ‘피를 바르라’는 명령도 이 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주택이나 천막집에는 문짝이 없는 출입구에 문설주만 세워놓고 커튼을 쳐놓았습니다. ‘바깥문’은 단순히 ‘샤아르’, 즉 ‘문’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성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네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은 개인집을 출입할 때에도 성읍을 출입할 때에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띄도록 그 입구에 말씀을 기록해 놓으라는 명령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앞서 말한 대로 오늘날까지 어떤 정통 유대교 신자들은 손목과 이마에 그 표를 장식해서 달고 다니며 집에는 ‘메주조트’라 불리는 토라의 어떤 중요한 말씀을 새겨놓은 문설주를 세워놓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3:9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 예식을 기억하기 위한 명령, 즉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는 명령은 문자적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것은 분명 유월절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 적인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쉐마 헌장에서 신체의 주요 부위와 주택과 성문에 기록하라는 명령은 언제나 말씀을 곁에 두고 기억하고 묵상하라는 상징적 권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듣는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해야 함을 시사해 주는 단어입니다.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다신교에 매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설교도 쉐마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학설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장 정도로 섬기는 법을 전합니다. 그리고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쉐마의 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의 유무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말씀의 실종은 공동체의 붕괴를 낳고, 말씀의 부흥은 교회의 살림을 이끌어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정녕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일은 신앙생활의 한 영역에 그치지 않고 전 존재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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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5-03)


이스라엘을 위한 중재한 모세

신명기 5장 22-33절


오늘날은 물건을 살 때, 내용물도 보지만 포장 상태를 많이 봅니다. 어느 때는 내용물보다 포장이 아름다울 때,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고가를 주고 구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서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용을 살펴보고 살 것이라고 후회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은 사람의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중심을 보시길 바랍니다.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다가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쓴 두 돌판을 모세에게 주실 때 백성은 불 가운데서 나는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백성은 그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까 두려워, 모세가 전해주는 말씀을 듣고 행하겠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말이 옳다 하셨고, 그들이 경외함으로 명령을 지켜서 복 받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중보자가 필요한 죄인(22-27)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곤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성도에게 거룩함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했습니다(빌 2:12).

 

22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25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22-27)

 

십계명이 선포되는 시내산은 온통 불과 연기, 번개와 천둥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와서 자신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1)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22-23)

 

십계명이 주어졌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직접 나타나셔서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기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현현하셨을 때, 불, 구름 그리고 흑암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흑암’의 원어는 ‘짙은(무거운) 구름’이라는 뜻으로, ‘진한 어두움’을 의미합니다(참조, 출 19:16,18; 24:15~18; 시 18:7~14).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 가운데서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의 원어는 ‘그는 더하지 않으셨으며’라는 의미로, 십계명 외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두 돌판에 써 주셨습니다. 돌은 쉽게 부식되거나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말씀이 오래 보존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불과 어둠 가운데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고 백성의 대표들이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나아온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 현현을 목격한 이스라엘(24)

 

이 구절은 백성의 대표들이 모세에게 한 말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보라’라는 지시 부사가 나와 시내산의 하나님 현현 사건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보이시매’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현현에는 불, 구름, 어둠이 동반되었습니다. ‘그의 영광과 위엄을’의 원어는 ‘그의 영광과 그 위대함(큼)을’이라는 뜻으로, 장엄한 현존을 의미합니다. ‘보았나이다’는 이스라엘이 직접 목격했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장엄함이며, 하나님께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더 특이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보이시매’는 하나님의 계시 행동을 의미하고, ‘보았나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3) 하나님의 현현을 두려워한 이스라엘(25-27)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한 이스라엘의 염려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이 느끼는 두려움이 드러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큰불이 그들을 삼켜 버릴 것(먹어 치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큰불이 이스라엘을 다 태워 멸망시켜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정법을 사용해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에 대한 염려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큰불’과 ‘여호와의 음성’ 앞에서 이스라엘은 경외심과 공포심을 느낀 것입니다.

 

수사학적 질문이 계속 이어집니다(26). 이 질문은 큰 불 가운데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살 수 없음을 전제합니다(참조, 삿 6:22-23). 하지만 이스라엘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불가운데서 말씀하심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우상은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이 만든 조형물에 불과하지만(4:28; 5:8),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이스라엘 대표들이 모세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듣고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모세에게 중보자 역할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을 지키라(28-33)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약속한 것은 대부분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약속을 지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성다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 위에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주신 약속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28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30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31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32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28-3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감당했던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 순종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28-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부탁한 내용을, 즉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 사이에 대화였지만 모두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부탁을 긍정적으로 여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말한 것을 들으시고 그 말이 옳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즉 ‘모든 날들에’ 이 같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킬 것을 기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천하는 행동에 대한 대가는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십니다. 그 원어는 ‘잘되기 위해, 영원히’라는 뜻으로, 목적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오고오는 모든 후손들이 잘되는(번영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목적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백성이 받을 복(30-3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복 받는 길을 가르쳐 주신 후에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는 남아 있으라고 하십니다. 모세에게 남아 있으라고 하신 이유는 십계명 외에 다른 말씀들을 그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모든 규례와 법도를 듣고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모세가 가르치는 법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언약(법)을 가지고 들어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가르치는 법(교훈)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대로(명령하셨던 것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기준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우측으로나, 좌측으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정도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도를 행하라’의 원어는 ‘그 모든 길 안에서 너희는 걸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길’은 비유적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 때, 이어지는 결과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첫째, 그들이 살 것입니다. 둘째, 복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그들의 날이 길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면 약속의 땅에서 생명과 복과 번영이 주어집니다.

 


  • 참고 : 하나님 종에 대한 태도 // 하나님의 종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쉽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영적 권위자에 대한 반역의 예가 있습니다. 민수기 16장에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입니다. 그들은 성막 안에서 모세의 사역을 최측근에서 제사 전반에 돕는 일을 하는 레위 족속 중에 한 자손입니다. 자신을 일을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제사장으로 섬기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려진 250명의 족장들을 모았습니다. 이 반역은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반역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반역이 일어나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고 여호와께로서 온 불이 250인을 죽였고 땅이 입을 열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그들에 속한 모든 소속과 소유물들을 삼켰습니다. 그 바로 다음날 그들은 다시 반역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그 백성들을 염병으로 쳤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 죽게 될 판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아론에게 향로에 단의 불을 담고 백성들을 위해 속죄의식을 드리라고 명령하자 아론이 막 달려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섰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습니다. 엄청난 권세입니다. 이 일로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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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05-02)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신명기 5장 11-21절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보면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입니다. 말씀을 통해 완전한 죄성을 드러내시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출애굽의 능력을 맛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들에게 두 번째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앞 본문에서는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토라)을 다시 들려준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십계명에서 3-10계명까지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사항들이고, 나머지 부분은 5-10계명은 인간에 대한 의무 사항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이 기준을 따라 십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로 요약하셨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십계명 : 제3계명과 제4계명(11-15)

율법(토라)의 정신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나하나가 제각각이 아니라 모두 연결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하나만 없어도 안 되는 전체가 하나입니다. 굳이 둘로 나눈다면,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사람들에 대한 계명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란 명령으로 요약하셨습니다.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1-15)

 

앞에서 십계명 중 1-2계명을 소개했고, 계속해서 나머지 3-10계명까지를 소개합니다. 잘 알고 있듯이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하는 명령들입니다.

 

⑴ 제3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11)

 

여기서 이제 셋째 계명이 선포되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일지만, 개인의 욕망을 위해 찾고 부르는 망령되이 일컫는 상황이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함부로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망령되이’는 ‘무가치하게’, ‘헛되이’라는 의미이며 ‘이름을 일컫다/부르다’는 문자적으로는 ‘이름을 들어 올리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올리다’는 특히 맹세, 예언, 기도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입술에 갖다 붙이는 행위를 지시할 수 있습니다. 헛된 목적으로 자신의 이익이나 이기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지 인간들의 이용하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특히 맹세와 서약에서 경솔히 사용하거나, 사악한 목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레위기 6장).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멋대로’ 부른다는 의미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쩌면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 24:10-14에는 그런 사례가 나옵니다. 애굽인 아버지와 이스라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어떤 혼혈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고 모독하는 신성모독 죄를 범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백성들에 의해 투석형으로 죽음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⑵ 제4계명 : ‘안식일을 지키라’(12-15)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 준수의 계명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 준수를 출애굽의 구원사건에 연결시킵니다. 안식일을 창조사건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구원사건의 맥락으로도 연결하고 확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를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4-15)고 합니다.

 

혼자만 노동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에 거하는 종이나 짐승들까지도 안식할 수 있게 하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안식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노동의 결과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일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날을 잘 지키고 그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마태복음 12:8; 6:5), 이는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시사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특히 할 대상은 모든 남녀의 모든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 즉 종과 가축을 포함합니다. 여기에는 종들과 ‘성문 내에’ 장기간 머무는 타국의 거류민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안식일 준수의 의무는 가축에게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사실상 인간들이 안식일에 가축을 부리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현재의 십계명은 안식일에 노동을 금하고 쉬라는 명령을 출애굽의 구원 사건에 연결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십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학대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린 노예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을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구해내시어 압제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쉼 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본받아 기쁘게 노동을 한 뒤 안식일에 쉼을 가져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기 20:8-11의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 준수의 이유와 배경을 천지창조에 둡니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 후 7일째 쉬었으니 사람도 이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반면에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안식일 계명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준수를 출애굽의 구원 사건에 결부시킵니다. 모순이 아닙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토대로 안식일 정신을 구원 사역으로 더 확대시킨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헤럴드 맥밀러는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노동자 보호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십계명: 제5-10계명(16-21)

이웃 사랑은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권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려 듭니다. 그런 식으로 진행하다보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도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놓여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타인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16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17살인하지 말지니라 18간음하지 말지니라 19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20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21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16-21)

 

십계명 중 처음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었습니다. 이제 나머지 계명, 5-10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계명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다른 계명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⑴ 제5-7계명 : 부모공경, 살인 금지, 간음 금지(16-18)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의무 조항들입니다. 인간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 중에 위의 세 가지를 어기는 행위, 곧 부모에 대한 패역과 살인과 간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① 제5계명 : ‘부모를 공경하라’

먼저 제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님에게 주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부모를 멸시하는 행위는 부모님께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거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라’는 ‘무겁게 하다’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1:17의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일지니라’는 명령에 나오는 ‘저주하다’ 동사와 대조됩니다. ‘저주하다’는 ‘가볍게 여기다’입니다. 이 두 동사는 효도와 불효에 대한 매우 적절한 히브리식 표현인 셈입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반항하며 구타하고 멸시하는(원문의 의미는 저주보다 ‘멸시’가 더 낫습니다(출애굽기 21:17)) 패륜아는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할 만큼 효도를 크게 강조합니다(출애굽기 21:15,17; 신명기 21:18). 부모를 짓밟는 행위는 곧 부모님께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그런 패륜아에 대한 처형 방법이 신명기 21:1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패륜아는 성읍 모든 사람들이 돌로 죽여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반면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 큰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은 장수의 복인데, 단순히 물리적으로 긴 수명만이 아닌 번영을 누리는 장수를 보장합니다.

 

② 제6계명 : ‘살인하지 말라’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소유인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인에 사용된 동사는 고의적 비고의적 살인 모두에 사용 가능하지만, 도피성을 통한 면책이 가능했던 과실치사가 아닌 고살(故殺)이나 모살(謀殺)입니다. 교묘한 모살이거나 분노를 품고 죽인 고살은 용서의 기회가 주어 지지 않았습니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도피성으로 피신이 가능했습니다(신명기 4:42). 살인에는 생명을 훔치는 인신매매와 유괴도 포함될 것입니다. 인신매매 역시 부모에 대한 패역과 간음과 더불어 사형감입니다(출애굽기 21:16). 이런 극악한 인신매매범과 유괴범의 처벌 또한 신명기 24:7에 나오는데, 가장 일반적이었던 회중에 의한 투석형(投石形)이 집행되었습니다.

 

③ 제7계명 : ‘간음하지 말라’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간음은 결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사회의 악이었습니다.

 

간음죄는 결혼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 배우자를 배반한 성적 이탈을 금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말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다른 문화권에서도 유부남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큰 죄’였습니다(창세기 20:9). 유부남은 물론 요셉을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의 사례와(출애굽기 39장) 민수기 5장의 소위 간음이 의심되는 아내를 시험하는 ‘시죄법’에서 확인되듯이, 이 법은 유부녀에게도 엄격히 적용됩니다.

 

⑵ 제8-10계명 : 도둑질 금지, 거짓말 금지, 탐욕 금지(19-21)

 

마지막 계명들은 도둑질, 거짓말, 그리고 탐욕의 금지입니다. 이 죄들은 오늘날 흔한 죄들이지만, 이 죄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중대한 범죄들입니다.

 

① 제8계명 :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여덟 번째 계명은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도둑질과 거짓말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흔한 범죄 행위일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사형에 처할 만큼은 아니지만, 오늘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당시에도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율법은 절도죄를 범한 도둑은 원금에 서너 배를 더하여(즉, 총 네다섯 배) 배상하도록 명령합니다(출애굽기 22:1).

 

② 제9계명 :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말은 예를 들어 사실을 왜곡하여 소문을 퍼트리거나 위증을 하는 행위(출 23:1),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를 하는 행위입니다(레위기 6:3). 특히 신명기 19:19에서 보겠지만, 재판정에서 위증은 심각히 다루어졌습니다.

 

③ 제10계명 : ‘탐심을 품지 말라’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탐심을 품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탐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의 금지 대상들이 목록으로 나열됩니다. 이웃의 아내, 집, 밭과 종들, 가축과 모든 재산입니다. 그 욕심이 도둑질과 강도질, 간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탐욕은 약간 난해한 문제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어떤 행동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내적인 생각에 대한 금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까? 분명 이 계명이 주어진 이유는 히브리식 사고에서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탐욕은 실천으로 옮겨졌습니다. 70인경(LXX)은 현재의 ‘탐내지 말라’를 ‘우크 에피투메세이’로 번역했습니다. 이 동사에서 나온 명사인 에피투미아(욕심)를 사용하면서, 야고보는 욕심이 죄를 잉태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1:15). 이것은 마음의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줍니다. 따라서 사람은 탐심과 탐욕을 품어서는 안 되며(누가복음 12:15), 탐심은 심지어 우상숭배입니다(에베소서 5:5; 골로새서 3:5). 탐욕을 품는 마음은 첫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품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알 수 없기에 처벌이 불가합니다. 물론 이 탐욕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계명의 취지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내적인 충동을 사전에 막으려는 예방적 목적에 있다고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모든 계명을 열 개로 줄이면 십계명이 되고 이것을 다시 둘로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됩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라, ∼하지 말라’를 넘어서 십계명에 각각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잘 살리고 지켜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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