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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2-01)

 

 


소발에 대한 욥의 항변

욥기 12장 1-25절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현실에서는 때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기대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 욥의 말이 많다는 것을 비판하는 소발에 저항이라도 하듯 욥은 지금까지보다 더 길게 진술합니다. 12-14장까지 세 장이나 연속 말을 이어갑니다. 위의 세 장은 수신자에 따라 구분하면 12:1-13:19 친구들을 향한 변론의 한 묶음으로, 13:20-14:22 하나님을 향한 탄식으로 양분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에 저항하면서 욥은 반성적 지혜의 주제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욥의 비판(1-6)

 

하나님께서는 욥처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이런 어려움(심판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어려움)을 주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선을 이루십니다(롬 8:28). 하지만 과정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마냥 복과 평안만을 주시지 않고 시련도 주셔서 그들이 인내를 알아 더 온전한 자가 되길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5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6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1-6)

 

욥은 소발의 말에 반박하는 말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자기들 외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고 그들이 죽으면 세상의 지혜도 사라질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도 인과응보의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위문하고 위로하려”(2:11) 찾아온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자 욥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듯합니다. 욥은 세 친구들이 규범적 지혜를 자신들만 소유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분노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죽으면 지혜가 함께 죽는 그런 사람들이구나.’ 그러나 욥은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을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자신이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의롭고 온전한 자로 인정받은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5절을 다시 번역하면 ‘인생을 편안하게 산 자네들의 지혜는 완전히 부서진 사람에게 모욕을 주며 더 걸을 수 없는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네’ 정도의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의 “평안한”은 ‘샤아난’의 번역인데, 긍정적으로는 평안하고 행복한 것을 가리키고, 부정적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안일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교만’의 평행어로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왕하 19:28; 시 123:4; 사 32:9, 11;37:29; 암 6:1; 슥 1:15). 그들은 재앙을 멸시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조언은 자신처럼 극심한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라고 평가합니다. “재앙을 멸시하나”는 직역하면 ‘폐허에 경멸을’입니다. 여기서 ‘폐허’는 욥 자신을, ‘경멸’은 친구들의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다면, 친구들의 말은 완전히 망가진 사람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폭력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셋째,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로 번역된 문장을 직역하면 ‘저는 발에 때림을’입니다. 똑바로 걷지 못하는 것은 욥의 상태를 의미하고, ‘때림/치는 것’(나콘)은 친구들의 발언을 의미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이미 넘어진 자를 때려서 또 넘어뜨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6절의 “강도”로 번역된 ‘쇼데딤’은 ‘파괴하는 사람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5절에 묘사된 친구들의 행위가 폭력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줍니다.

6절에서 욥은 규범적 지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들의 경우에 적용합니다. 친구들의 행위는 욥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인과응보의 원리가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면 세 친구들 역시 악한 행위에 대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친구들의 집안에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과응보의 원칙이 발동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 원리가 적용되지 않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유)을 강조합니다.

 

지식의 보편성(7-11)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만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욥과 같이 온전한 사람도 이 시간을 흔들림 없이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기만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지나야 하는지 숙제입니다.

 

7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7-11)

 

여기서는 하나님의 임의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길흉화복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욥은 7-8절에서 땅의 짐승들과 공증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에게 물어보라고 요청합니다. 모든 짐승과 새들, 땅과 바다의 고기를 이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고난과 형통 분배, 길흉화복 처분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라”(9). 욥의 친구들이 자연세계를 인용할 때는 자연 현상 속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이끌어 내거나(8:11-12), 의인과 악인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비유로 표현할 때(4:10-11; 5:23, 26; 8:14-19)입니다. 즉,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연현상들이 예시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욥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과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6) 창조세계에게 물어보면 대답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체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하늘과 바다를 예시로 든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나올 하나님의 언설이 창조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합니다(38-41장).

7-10절은 창조세계로부터 배우라고 말하고, 11절은 규범적 지혜라는 신학적 이론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지 말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반성적 지혜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6)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는”(4) 현실이 있음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12-25)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시간에 악인들은 득세하고 의인들은 핍절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의 실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려고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공의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12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13○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15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6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7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18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9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20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21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22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23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24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25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12-25)

 

12절은 ‘늙음은 곧 지혜’라는 규범적 지혜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욥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13절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에 대한 발언과 상충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11절의 의문문이 연장되는 것으로 해석하기를 제안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진다고? 아니다. 지혜와 명철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적절합니다.

욥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개념을 공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친구들은 하나님의 주권 개념을 인과응보의 원리와 연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리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이고, 이 원리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모두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원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의인에게 상을 주고 악인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정의이자 공의입니다. 이 원리가 지켜져야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이라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주권 개념을 하나님의 자유와 연결시킵니다: “그가 헐으신 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14). 16절에서는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 자가 다 하나님께 속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둘 다 하나님의 심판 집행에 이용된다는 뜻입니다.

17-23절은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 처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지휘부를 무력화시키십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말들은 모두 규범적 지혜의 선악 개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모사와 재판장(17), 왕들(18), 제사장들과 권력이 있는 자(19), 충성된 사람들과 늙은 자들(20), 귀인들과 강한 자(21)는 규범적 지혜의 틀 안에서 지극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의인이자 지혜자들을 일컫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인이자 지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는 부정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벌거벗겨 끌려가고 넘어뜨려지고 무장해제 되며 지혜를 빼앗겨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절은 지휘부가 해체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복기하고, 21절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충성된 자들의 의견이 무시당하고 늙은 자들이 판단력과 총명을 상실하자 나라의 기둥들로 보였던 귀인들이 멸시를 당하고 강한 자의 띠도 풀어져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은밀한 것들을 밝히 드러내시며 한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한 죽음의 그늘(세력)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셔서 온 세상이 다 알게 하십니다(22).

23-25절은 한 나라의 멸망이 어떻게 연쇄적인 국제질서 변동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와 민족을 크고 널리 퍼지게 하실 수도 있으며 반대로 멸망시키거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23). 규범적 지혜에 따르면 의와 지혜와 선함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만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그들에게서 총명을 빼앗아 어두운 밤길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24-25). 욥의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른 사람이 처한 현실을 함부로 해석하고 조언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 태도입니다. 조언하고 가르치려 들기보다 슬픔을 당한 사람과는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는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훈계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공감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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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0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세

마태복음 16장 21-28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전부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 전체가 옳다고 믿는 것이며, 그분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참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치르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 베드로의 고백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제자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본 단락은 메시아의 길을 설명하고 메시아의 길이 곧 제자들의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고난의 메시아(21-23)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스승인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칭찬을 받다가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사탄(4:10)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1-23)

 

예수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제자들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가이사랴’는 황제 사이사랴에 나온 명칭입니다. ‘빌립보’는 분봉왕 빌립에서 나온 명칭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 ‘가이사’는 ‘주’로, ‘빌립’은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주와 그에 대리 통치자인 신의 아들이 통치하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의 주인은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의 대리 통치자는 ‘빌립’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점점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이지만, 그 메시아를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항변하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인데(공관복음서에 27회[마 6회, 막 44회, 눅 12회], 딤후 4:2; 유 1:9), 문맥에 따라 ‘책망하다’, ‘경고하다’, ‘심각하게 말하다’, ‘벌하다’ 등으로 번역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쫓을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막 1:25=눅 4:35; 마 17:18=막 9:25 9:42).

22절은 ‘주여, 하나님이 이것을 금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것은 결코 당신께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라며 예수님께서 생각을 고쳐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들려 세우고 꾸짖으십니다(23).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내 뒤로 떠나라, 사탄아!’라고 하십니다. 광야 시험에서 사탄에게 ‘떠나라,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4:10),

베드로에게 있는 사탄이 쫓겨나야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다’를 사용합니다(참조 5:29; 18:6). ‘스킨달론’은 ‘함정’,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죄를 짓게 하는 유혹’ 등의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유혹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어기고 넘어지게 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과 16:18에서 베드로에게 적용된 ‘바위’를 연결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위가 됐으나(16:18). 자신의 뜻을 추구하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단계는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 다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교회의 목표는 사람들이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목적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회복하기 위해 나의 아까운 시간과 소중한 보화를 희생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구원받은 감격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무한한 감사를 무한한 헌신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따른 제자의 길(24-28)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인간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부여받으실 것입니다. 그날을 구원과 심판이 판가름 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버렸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는지에 따라 그 운명이 갈릴 것입니다.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4-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 없는 영광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살겠지만, 예수님을 죽이고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다 잃게 될 것입니다.

 

(1) 자기 부인과 십자가(24)

 

예수님의 운명은 제자들의 운명을 뜻하므로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고백은 반드시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7:21-23; 10장; 11:28-30; 13장 등).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증명되며, 세 가지 삶(‘자기를 부정하라,’/‘자기 십자가를 지라.’/‘나를 따르라’)의 표현은 사실상 같은 의미의 반복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나오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예수님만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이므로, 제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 목숨을 잃음과 얻음(25-2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이 십자가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길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25). 목숨을 구하고 잃는다는 이미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목숨의 위협을 경험하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더라도 미래에는 (부활을 통해서) 확실히 얻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목숨을 잃고 얻는 것을 반드시 문자적 의미로만 볼 필요는 없으며 죽을 것 같았던 현실이 바뀌어 죽지 않고 사는 역설적인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몸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혜택으로 목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비록 고난이 필수적으로 따르지만 목숨을 얻는 길입니다.

 

(3) 인자가 올 때(27-28)

 

이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재판장으로서 미래에 등장할 신분과 역할(27-28)을 묘사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목숨, 최후에 심판대에서 주어질 목숨을 26절에서 암시한 다음에 27절에서는 그 일을 결정하는 인자의 오심을 언급하십니다(예. 25:31-32). 다른 본문과 비슷한 표현을 고려할 때 27-28절의 인자가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행한 대로 심판하는 장면은 최후 심판을 가리키며 그는 종말론적 심판을 집행하는 재판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의 천사들’이나(13:41,49; 24:31, 25:31) 행한 대로 갚는 모습을 통해 인자의 신적인 권위를 강조합니다. 원래 보상은 하늘 아버지의 행위인데(6:4,6,18) 인자가 이것을 행할 것입니다.

16:27과 19:28의 유사점을 연결하면,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을 집행할 것입니다. 24:30-31도 인자 그의 천사 종말의 심판이 나옵니다. 16:27과 25:21-32의 유사점은 각자 행한 대로 심판하는 인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참조 25:33-46). 인자는 신적인 존재로서 하늘 법정을 주재하는 존재입니다.

 

인자가 종말의 심판을 집행한다면 심판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아니라 역사의 끝, 즉 재림입니다(28). 그런데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죽기 전에’(28)는 재림이 아니라 제자들 중 일부가 인자가 그의 나라를 가지고 오는 것을 목격하게 될 특정 시간을 가리킵니다. 죽기 전에 제자들이 인자를 보게 될 사건과 시기에 대해 학자들은 변화산 사건, 십자가와 부활, 예루살렘의 멸망, 예수님의 재림 등을 제안해왔습니다. 이 중에서 예수의 재림은 ‘죽기 전’이라는 고려할 때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27절과 28절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있으며 이는 재림과 인자가 영광을 간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7절이 ‘재림’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28절을 재림과 연결해 보면, 제자들은 살아 있을 동안 재림을 부분적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28절은 변모 사건(17:1-8)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자들 중 일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형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모습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으며, 17:1의 ‘엿새 후’는 16:28과 변화산 사건을 연결하는 암시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도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미리 맛볼 수 있는 장면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28:18).

제자의 길과 인생은 인자의 길과 인생을 모방합니다. 인자의 인생은 십자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제자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 특히 그의 고난을 반영해야 하고, 이런 여정을 통해서 예수님과 일치되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한 사람은 심판의 때에 그 행함으로 신앙을 검증받습니다. 그래서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와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약속은 한편으로는 격려를 한편으로는 긴장감을 갖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에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적 마음으로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거부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기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항변은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아닌 자신의 뜻과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무엇인지 말씀을 잘 기울리고 깨달라아 주의 뜻을 온전히 쫓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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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01)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6장 1-20절


관계에 있어 가장 귀중한 기본은 소통입니다. 진실한 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상대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분과의 바른 친교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시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대답하시고,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지도자이나 무리는 예수님의 정체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거나 오해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합니다.

 

하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1-4)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입니다. 숱한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다시 표적을 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앙은 누룩같이 위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참 의미를 알기 전까지 그들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1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4)

 

본문은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일입니다. 당대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구합니다.

방금 전에도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는데도 또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 떡의 기적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모세에게 하늘의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자연현상을 언급하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2-3). 이런 것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십니다(4).

‘음란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12:38; 겔 16:38; 23:45; 호 3:1).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하면 비상한 표시를 구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권위와 능력을 여러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예수님과 하늘나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기보다 배척하기 위해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말로 시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특히 당시에 하늘에서 오는 표적은 하늘의 군대와 관련이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승리주의의, 군사적 시위를 보여주는 메시아가 아니므로,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는 자신들이 기대하는 ‘강한’ 표적에 몰입했기 때문에 약한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우리 시대의 표적도 세속적인 승리가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성공을 약속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끊임없이 소개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이해력(5-12)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인 사건과 사천 명을 먹인 사건을 경험하고도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해 언급하시자 이것을 미처 떡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들을 책망하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어찌 떡이 예수님의 관심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가 불신앙을 낳은 것입니다.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5-1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먹을 떡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문제임을 지적하십니다.

 

(1) 누룩을 주의하라(5-6)

 

예수님의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가면서 있을 때, 빵 가져가는 것을 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누룩은 가르침을 뜻하는 은유입니다(12). 누룩은 초기에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전체 반죽에 퍼집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이 끼치는 영향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백성 전체의 불신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7-10)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빵을 가져오지 않은 사실을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잊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제자들의 염려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위선이나 장로의 유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11-12)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고난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앞 단락에서 자신의 고난, 즉 약함을 의미하는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고, 뒤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처음으로 고난을 예고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룩을 피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은 고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에 급속히 퍼질 누룩(가르침)은 고난을 외면하고 번영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메시아가 보여준 고난의 삶을 참된 가르침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악하고 음란한 시대의 영향을 받아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망치는 누룩이며 눈에 보이지 않게 온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욕망을 약속하는 거짓 교사들의 확신에 찬 소리에 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갑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예수님께서도 관심을 가지신 중요한 주제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살펴주실 것을 믿지 못하면 어느 새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피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대의 말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권위 있게 여기고 탐구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13-20)

마태복음 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올바른 고백이 제자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더니(14:33), 이번에는 ‘메시아’로 고백한 것입니다. 왕이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는 뜻이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고백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13-20)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리통치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바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1)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14)

 

비록 베드로가 당시의 유대교 메시아 기대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길이 고난과 십자가로 향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2)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반응(15-17)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왕이나 이스라엘로 이해했습니다. ‘왕’의 신분이라는 측면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왕의 의미를 넘어서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17).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의 사건을 목격하고 그의 가르침을 배웠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특히 11장 25-27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부께 기도하는 내용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신적인 아들로 이해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구원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었습니다(14:33).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토대가 되는 바위의 역할을 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를 시작으로 사도들을 교회의 토대로 두시고 이후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교회로 세워가십니다.

 

(3) 놀라운 말씀과 경계(18-20)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십니다. ‘음부의 문들’(18)은 지하세계(음부)로 가는 출입구이고, 성의 문이 무너지면 도시가 무너집니다(예, 시 24:7). 그래서 문을 얻었다는 것은 도성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음부는 하늘과 정반대의 공간으로서 불경건한 자들이 거하는 영역이며, 이곳의 힘이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지상 교회의 연결은 19절의 ‘열쇠’와 ‘매고 푸는’ 표현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교회가 음부의 문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이라는 용어 자체가 저항하는 태도를 의미하므로, 베드로와 교회(18:18)가 음부의 문에 갇힌 자들을 구출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쇠로 연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 권세는 하늘의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사용할 때, 땅에서 베드로가 취한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 하늘이 열립니다.

1세기 유대 토양에서 ‘매고 푼다’는 것은 정치적이고 사법적인 권위와 같은 결정권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법을 해석함으로써 발휘하게 되는 결정권과 법적인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권위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하늘나라의 문에 들어갈 수 없게 막는 역할을 했지만(23:13), 베드로는 사람들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권위를 갖습니다.

이런 권위는 베드로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18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교회를 지지한다고 밝힙니다. 마태복음의 첫 독자들에게 교회는 마치 음부의 세력에 잡아먹힐 것처럼 작고 약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위쪽인 하늘에 연결되어 있기에, 하늘은 열쇠로 매고 풀 때 하늘(의회)은 교회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했고 하늘나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또 음부의 문들을 공격해서 속박된 백성을 구출해서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권세와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초대하고 이들을 삼키려는 음부의 문을 박살 내서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권세를 얻은 교회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는 하늘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늘은 교회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곧 구세주이십니다. 이렇게 베드로처럼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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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5-02)

 


이방인에게도 역사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5장 21-39절


요리 프로그램이 부쩍 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먹는 문제 자체가 해결되니 이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맛있게 먹을지를 궁금하게 여기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는 문제로 이방인들을 상대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과 논쟁 후 급히 이방 지역으로 옮겨 가십니다. 거기서 한 이방 여인을 만납니다. 예수님 사역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별히 여인의 반응과 태도는 이방인들의 구원 사역 위치를 명확히 해줍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다른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들이 누릴 구원을 투사합니다. 이어지는 치유 사역과 칠병이어 기적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구원을 경험하는 이방인들을 그립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구(21-28)

정말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주께서 우리를 수치의 자리로 낮추실 때가 있습니다. 이방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낮아져야만 합니다.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살려 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1-28)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길은 헛된 자부심이나 말씀 소유 여부가 아니라 은혜를 갈구하는 겸손입니다. 이방 여자가 자격 없음을 인정하며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 이방 여자와 만남(21-22)

 

예수님께서는 대표적인 이방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에 가십니다(21). 그 지역에서 가나안 여자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딸은 귀신의 공격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중입니다. 귀신 들림은 사탄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특징이며(4:24; 8:16,28,33; 9:32, 12:22; 17:14-20),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하수인들인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이방 지역으로 확장됩니다.

이방 여자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다윗의 아들이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마태는 여자가 계속해서 부르짖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2) 예수님의 낯선 반응(23-24)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치유를 부탁할 때 즉각 응답하셨지만(8:2-4,6-7,14-15,16,28-34) 이번에는 침묵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24). ‘보냄 받았다’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돌봐야 하는 목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렘 50:6; 겔 34장).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입니다(마 9:36; 10:6). 얼핏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입니다(마 9:36; 10:6). 얼핏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가나안 여자가 듣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구원 역사의 순서에서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의 사명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돌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사역은 ‘이방의 갈릴리’(4:15)에서 출발했고, 데가볼리(4:25)와 같은 곳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본 이야기를 전체로 읽으면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의 간청에 대한 거절을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3) 여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응답(25-28)

 

이방 여자는 예수님의 냉찬 반응에도 관여치 않고,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 이어서 두 번째로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본문의 개는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으로서 집주인은 자녀가 먹는 같은 음식을 집어서 개에게 주지 않습니다. 개는 자녀와 대조됩니다. 개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비유어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개는 이방인을, 자녀는 이스라엘의 자녀(출 4:22; 신 14:1; 참조 마 5:9,45)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거절에 대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세 번째로 요청합니다. 집안의 개들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개가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받아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태도를 칭찬하십니다(28). 어떻게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까? 여자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이해했으며, 구원 역사의 흐름에서 다윗의 아들이 이방인들을 치유할 것을 믿었습니다. 여자는 구원 역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세 번째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큰 믿음을 칭찬하면서 ‘원하는 대로 되라’고 명령하십니다(28).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여자의 딸이 낫습니다.

 

본문에 묘사된 여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여자의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반응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이라는 주제만 강조하지 않고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말하자면, 여자의 믿음은 구원 역사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빵 부스러기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구원사의 전망에서 파악할 때, 기도는 더욱 확신에 차게 되고 더욱 간절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을 긍휼을 베푸는 메시아로 믿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의 치유(29-31)

지금 우리가 살고 자녀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금력, 학력보다 주의 권능을 의지하는 이 믿음뿐입니다. 자녀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에게서 귀신이 물러날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큰 능력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9-31)

 

본문은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치유(14:13-14)에 이어서 오천 명이 먹은 사건이 나온 방식과 같이 사천 명이 먹는 사건 앞에 치유 장면이 나옵니다. 치유와 먹는 것은 희년(사 61:1-2)의 실현인 메시아의 사역이므로 결합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본 단락의 치유와 먹는 사건은 단순히 앞의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에서의 메시아 사역을 다룹니다. 두로와 시돈을 통과해서 갈릴리 동편으로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바다를 건넜다는 서술은 없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여자의 팔이 치유 받는 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내용을 압축합니다(11:5).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종말의 회복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취되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드러냅니다. 긍휼의 메시아는 제의적으로 정결한 사람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을 찾아서 치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당시의 종교적 관점에서 소외된 자들일지라도 메시아의 권위를 믿고 초대를 받은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어떤 조건과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긍휼의 메시아에게 초대를 받은 사람은 치유 받습니다. 이사야의 약속이 성취된 본문의 치유는 하나의 모형이 되어 어느 시대든지 상처 받고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사천 명의 식사(32-39)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십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데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떠나지 않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32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32-39)

 

사람들은 외형적인 자격이나 조건에 따라 차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1) 칠병이어(32-34)

 

32절에 나오는 무리는 29-31절에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무리는 치유하는 예수님 곁에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무리를 먹이는 동기입니다. 무리는 3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가져온 음식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개의 빵이 있는지 묻자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본문의 숫자는 이방인과 관련이 있습니다(70개의 나라 등).

 

(2) 예수님의 축사(35-36)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때처럼 무리를 앉히신 다음 빵과 생선을 취해서 감사를 표한 다음에 무리에게 주십니다(14:19).

본문은 오천 명이 먹은 사건(14:15-21)과 여러 점에서 비슷합니다. 두 장면의 차이는 없습니까? 인원의 차이 외에도 두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각각 갈릴리와 이방 지역의 갈릴리 바다 근처의 산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산에서 먹었으나(렘 31:10-14; 34:14, 26-27), 유대인들에 의해 부정하다고 무시당하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21-28절)와 많은 환자들(29-31)은 이방 지역에서 메시아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개들이 자녀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한 내용은 이방인들이 치유의 혜택을 누리는 사건에 이어서 4천 명이 빵을 먹는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계층은 없습니다.

 

(3) 배불리 먹고 남는 기적(37-39)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외에, 이번에는 사천 명가량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맛봅니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말씀을 듣기 위해 떠나지 않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이들도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큰 믿음은 바른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기에 무시와 거절 심지어 모욕에 가까운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앎, 절대적 신뢰 그리고 딸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결합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며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예수님께 무엇을 간청하길 원하십니까?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주님의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간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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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5-01)


외식하는 자들을 향해 책망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5장 1-20절


진정 자신이 누구인 줄 알 때,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하나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 이곳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전에 자신부터 속여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이나 위선자들은 자신을 먼저 속인 자들입니다. 자신도 확신하고 거짓으로 살아갑니다.

 

  • 예수님을 조사하러 온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이 유대인의 정결법 전통을 들고 나와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행위로 논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참된 정결이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종교 엘리트들의 태도는 이어서 묘사되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 및 이해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대한 비판(1-9)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고 참된 토대는 없습니다. 말씀의 참 뜻을 반영하고 구현하려는 모든 신학적, 신앙적 전통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령님의 새로운 조명을 기대하지 않으면, 특정 시대와 인물의 제한된 신학적 입장이 무궁무진한 성경의 진리를 왜소한 교리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1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1-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따집니다(2). 장로들의 전통은 유대교에서 바리새 운동을 이끈 원로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며, 이 전통은 과거부터 유대인들을 거쳐 내려왔습니다. 구약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씻도록 규정하고 있지만(출 30:19;40:13; 레 15:11; 22:1-6), 원래 일상생활을 위한 규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이방 문화에 강하게 노출되면서 유대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제의적 정결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정결 의식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제의적 부정이 만지는 음식에 옮겨져 음식이 부정하게 되며, 부정하게 된 음식은 다시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라고, ‘너희’와 ‘하나님’을, ‘전통’과 ‘계명’을 대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충실했는데, 그런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예로, 부모님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과 ‘장로들의 전통’을 비교하여 지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이 부모님에게 드려져야 할 것을 하나님께 이미 드려진 것이라고 부모님에게 말하기만 하면, 부모님을 공격하지 않아도(부모가 받아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코르반’을 번역한 헬라어 용어입니다(마가복음 7:12). ‘코르반’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법적인 맹세의 기능을 했습니다. 바리새 전통을 사용한 유대인들은 어떤 재산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기 이외의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마가복음을 참조해서 예를 들어 보면(막 7:12), 어떤 남자가 자신의 재산을 코르반이라고 맹세하면, 부모는 아들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아들이 부모가 죽은 이후 코르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경우에, 아들은 전통을 악용해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근거를 삼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림’에 대한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합니다(참조. 갈 3: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은 부모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태도를 정당화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제5계명을 어기게 만든 셈입니다. 이같이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에 의존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위선자들로 규정하십니다(7). 그리고 이사야 29장 13절을 인용해서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9)라고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3장 14-15절에서 이사야 6장 9절을 인용해서 ‘선지자적 심판’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셨는데, 같은 목적으로 이사야의 본문을 여기서도 사용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15:1)로 비판의 대상으로 좁히십니다. 이사야 29장의 문맥에서도 선지자적 비판은 제사장들, 선지자들, 선견자들(28:7; 29:10),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들’(28:14; 참조, 29:20-21)을 향했습니다. 위선은 마음과 입술의 불일치로 나타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8),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행위라는 것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위선이었습니다(9).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가르치거나 행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거나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만든 전통 자체가 아니라 성경의 의도에서 벗어난 전통을 만들어 이용하는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듣고 깨달으라(10-11)

말씀 안에 산다고 종교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실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습관대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그릇된 일들을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점점 자신을 속이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신념으로 굳혀지고 자신들은 가장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0-11)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닫도록 명령하십니다(10-1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부정한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들 비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정결함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유대인들의 정결 예법 때문에 제자들이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완악한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부정하므로, 그들의 정통에 따른 정결 제의를 지킨다고 해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외적인 규례를 만들어서 지키면서 만족해하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13과 12:7에서 호세아 6:6을 인용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운명(12-20)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과 만물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12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2-20)

 

제자들은 그 동안 전통으로 지켜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조용히 물었던 것입니다. 의 대화 장면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12-14)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정체와 운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힌다고 말씀하십니다(사 5:1-7). 가족 언어인 ‘나의 하늘 아버지’를 사용하심으로써(5:16,45,48,6:9; 7:21; 10:32), 하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으로 백성을 속박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신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 아니라 이들을 따르는 백성을 동일하게 맹인으로 이해하십니다(14).

 

(2) 말씀에 대한 해설(15-20)

 

베드로는 예수님께 비유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를 묻는 베드로에게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으냐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18).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강조하십니다(참조 5:8). 마음은 사람의 핵심 부분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정결하지 못하면 모든 약한 것이 마음에서 나와(패로는 악한 것이 입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본문은 종교 행위의 근거 혹은 전통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그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하나님보다 더 의존하는 대상이므로 우상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일어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가시적으로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는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더 의존했으므로 전통을 우상으로 모신 것입니다. 정결 예식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대상이 되는 순간(15:3,6; 막 7:74), 전통은 우상이 됩니다.

교회나 교단의 헌법, 규칙, 관습 등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만듭니다. 그러나 건전한 법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의지하는 대상으로 자리를 차지한다면, 전통을 향한 열정은 우상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교회에서 자신(들)의 뜻을 정당화하려고 신성불가침의 근거로 전통을 내세우는 순간 우상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이라는 우상은 가장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무리에게, 역사와 전통을 수호하고 보수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선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예배로 위장한 채 하나님 노릇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는 전통을 논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는 길을 먼저 나서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심으신 나무입니다(13).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의 가족공동체는 마음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순종과 경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의식 준수나 입에 발린 경배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이웃 사랑으로 뒷받침되는 순종과 경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소원을 빌미로 부모 공경의 책임을 회피하는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찬송과 경배는 어떻습니까? 혹시 예배 한 순서로만, 입술의 고백으로만 끝나지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사랑을 핑계로 이웃 사랑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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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03)

 


물 위에서 걸어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14장 22-36절


오병이어는 광야에 하늘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상태처럼,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아직은 완성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 사이에 있는 나라가 광야에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우리 시대가 광야의 시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악의 혼돈이 넘치는 시대가 우리 시대입니다.

 

  • 오병이어 기적 후 예수님께서는 급히 제자들과 무리를 바다 건너편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롤라가 기도하십니다. 배로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새벽에 큰 풍랑을 만나 곤란에 빠졌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어 제자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8:23-27의 사건과 비슷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구약의 하나님만이 보이실 수 있는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목격하십니다. 이어지는 34-36절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미치는 범위를 묘사합니다.

 

물 위에서 만난 하나님의 아들(22-33)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본이 됩니다. 우리들도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일하고 사역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사람들과는 따로 떨어져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은 바른 방향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홀로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영적인 풍성함을 나눌 수 있습니다.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22-33)

 

앞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광야 시대를 볼 수 있습니다.

 

(1) 제자들과 무리를 보내심(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22). 제자들이 가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둘러 무리와 자신과 제자들을 분리하는 장면은 빵을 먹은 무리가 예수님을 정치적-민족적 메시아로 오해하고 기대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참조, 요 6:14-15).

 

(2) 산에 올라 홀로 기도하심(23)

 

또한 제자들도 현장에 무리와 함께 머물러 있었다면 무리와 같은 기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홀로 산에 올라가십니다(23). 마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설명합니다(26:36-42; 참조, 막 1:35; 눅 5:16; 6:12; 9:18). 예수님께서는 서서히 기도로 고난의 길을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3) 풍랑으로 고생하는 제자들(24)

 

배는 이미 육지에서 떠나 바다 깊은 곳에 이릅니다. 바람 또는 폭풍이 제자들의 배를 향해 불어와 파도가 배에 강하게 부딪쳤습니다.

 

(4) 물 위로 걷어오신 예수님(25-27)

 

제자들이 파도를 맞으며 목숨을 위협받고 있던 밤 사경(로마의 시간대에서 오전 3시부터 6시까지)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오십니다. 구약에서 새벽 시간은 두려움의 시간이지만(시 91:5; 107:10-12),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돕기 위해 개입을 하시는 때입니다(출 14:24; 시 46:3-5; 사 17:14). 이 시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신 때이므로 아침이 밝기 전 이른 새벽 시간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모습은 예수님의 구원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십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하나님(예, 시 65:7;89:9-10; 107:29; 욘 1:15; 전 3:23)은 물 위 또는 바다를 걸으시고(욥 9:8) 지나가십니다(출 14:20-21; 사 43:16; 51:9-10; 참조 창 1:1-2; 욥 38:16; 시 77:1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다를 거든 모습을 바다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사실을 의미하며, 바다를 걸어오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의 힘으로는 바다의 파도를 극복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약의 하나님의 권위로 이 위기에서 제자들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른 새벽의 안개와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제자들은 물 위를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를 보고 유령으로 오인했을 것입니다. 공포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즉시, 반응하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이 부사를 문장의 맨 처음에 배치합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안심하라’입니다(참조. 9: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 제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므로(임마누엘)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임재(임마누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목적은 그들을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5) 물 위를 걷는 베드로(28-29)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자신을 명령해서 물 위로 오도록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베드로는 11장 28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배 안에서 공포에 떨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물 위를 걷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한 베드로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만이 물 위를 걸으시는 존재이기에, 말씀을 믿은 베드로는 성경에서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물 위를 걷습니다.

 

(6)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30-31)

 

자신을 덮칠 것 같았던 파도를 예수님처럼 밟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을 본 베드로는 두려워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고 바람에 압도당할 때 물에 빠져듭니다.

베드로는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뻗어 베드로를 붙잡아 구원해주십니다(참조, 삼하 15:5). 마태는 31절에서 ‘즉’를 문장의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즉각적인 반응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고 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꾸짖으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작은 상태에서 구출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책망을 받아야 할 정도지만, 예수님께서는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제자의 손을 급히 잡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아 물에 빠져드는 베드로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구원하신 다음에 믿음이 작았던 문제를 지적하시고 믿음이 큰 사람이 되기를, 즉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7)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30-31)

 

풍랑은 예수님의 책망으로(8:27) 그친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 풍랑이 멈춥니다. 예수님께서 배 안으로 들어오시는 장면은 임마누엘의 주제를 드러냅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함께하심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곧 구원입니다. 베드로가 구원받는 장면을 포함해서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을 겪은 배 안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참조 3:17; 16:16; 17:5; 27:54)이라는 칭호가 하나님(3:17), 귀신들(4:3,6; 8:29), 저자의 설명(2:15) 이후 처음으로 제자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14:22-33과 8:18-27은 갈릴리 바다가 주는 공포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목격한 사건입니다, 8:27에서 예수님의 행위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이후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듣고 목격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됐을 것입니다. 앞 사건에서 광풍을 제압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8:27)라고 했던 제자들의 고백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14:33)로 발전합니다. 제자들의 신앙은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더 깊어집니다(8:27 → 14:33 → 16:16).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중요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구출하는 분이다! 베드로는 실패한 상태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실패해서 물에 빠질 때 구원을 외칠 수 있는 대상은 예수님뿐입니다. 교회는 구원을 외치고 즉시 예수님께서는 구원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드는 제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외칠 수 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큰 믿음을 원하십니다. 큰 믿음은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마치 예수님께서는 멀리 계시고 인생과 신앙의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두려움의 바다는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이며, 밤 사경은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셋째는, 광야에서 빵을 먹고 바다에서 구원을 받은 장면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출애굽을 가져오진 분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에서 구원받고 광야에서 빵을 먹는 사건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새 출애굽을 행하십니다.

 

게네사렛에서의 치유(34-36)

사람들은 수많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적인 갈급함으로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풍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풍요가 넘칩니다. 부족함이나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갈급함도 채워집니다.

 

34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34-36)

 

이 단락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느 범위까지 확장됐는지를 요약합니다(4:23-25; 8:16; 9:35-36). 예수님 일행은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이며(누가복음 5:1). 게네사렛은 구체적으로 갈릴리 해변의 북서쪽에,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 지대로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남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서 모든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가르침보다는 치유였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게 된다고 믿은 것은 혈루증 여인의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9:21). 마태는 만지는 것을 치유 내러티브에서 핵심적인 동작으로 묘사합니다(8:3,15; 9:20,21,29; 20:3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낫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소문을 들어서 예수님의 명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근방 모든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도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고 믿음대로 손을 대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미신적이고 천박하다고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들은 만큼 믿었고, 믿은 만큼 자신들의 맡겼고, 결과를 받았습니다. 제자들보다 서기관들보다 지식적으로 떨어지지만 절박함과 단순함으로 순종의 길을가는 일에는 절대 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흔들리는 절반의 믿음이 아니라 게네사렛 무리들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는다는 그 단순한 믿음이 우리 삶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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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02)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4장 13-21절


어떤 목사님께서는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체력’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잘 싸우되 ‘밤 먹고 나서 싸우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일, 쇠약해져 가는 몸, 이것과 신앙은 결코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을 일치시키면 욕망의 종교가 되지만, 분리시키면 위선의 종교가 됩니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보고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말씀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배를 타고 빈들로 가십니다. 빈들로 가신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치유하시며 그들을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사야 61:1-2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병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희년의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빈들에 홀로 계신 예수님(13-14)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구원 얻을 자들을 모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빈 들까지 찾아온 무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13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13-14)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과 헤롯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헤롯은 요한의 죽인 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3-12절까지 장황하게 요한의 죽음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로 가셨습니다.

 

(1) 광야로 가신 예수님(13)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듣고 혼자서 배를 타고 빈 들로 물러가십니다(13). 마태는 예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3절의 ‘광야’는 알려진 특정 장소가 아니라 단지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죽은 이후 사역의 새로운 전환점에서 기도하기 위해 홀로 광야로 가셨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병이어 사건이 끝난 직후를 보여주는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로 건너편에 보낸 다음 혼자서 광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A 혼자서 광야로(14:13)

A' 오병이어 기적(14:14-22)

B 혼자서 산으로(14:23)

B' 바다 위의 기적(14:24-33).

말하자면 ‘배’와 ‘혼자서 광야로’(13) 또는 ‘혼자서 산으로’(23)가 오병이어 사건을 감싸는 기능을 합니다.

혼자 계신 예수님께서는 13절 이후에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며 기적을 행했고, 23절 이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십니다. 어쨌든 23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목적으로 혼자 산으로 가신 것을 고려하면, 13절도 광야로 가신 목적을 기도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의미 있는 사역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태는 혼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곧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2) 병든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14)

 

예수님께서는 홀로 있는 시간을 원했으나 무리가 걸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로 가로질러 가는 거리와 시간에 비하면 무리는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고는 배에서 나와서 무리 중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막 6:34).

예수님께서 치유로 나타납니다. 즉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은 양 떼의 필요를 채우는 행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전환점에서 홀로 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우선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떠나 홀로 계신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홀로 계신 예수님의 이후 행동은 도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회복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떠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고 두려움 없이 행동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이 도피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한없이 가벼운 사고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발걸음을 내딛기 쉽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15-21)

하늘나라는 풍성하고 부유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부요한 나라인지, 그 풍요의 원천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오병이어로 먹이셨습니다.

 

15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5-21)

 

큰 무리가 몰려들었기 때문에 에수님의 치유 사역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제자들의 마음은 다급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도 동시에 굶주린 무리를 염려합니다.

 

(1) 무리를 마을로 돌려보내려는 제자들(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무리를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 먹게 말씀하시라고 부탁합니다(15). 제자들의 눈에 들어온 엄청난 무리의 저녁 식사를 해결해줄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사실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2) 예수님의 반응(16)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반응하셨습니다. 대단히 충격적인 선언이 등장합니다. 무리를 보내는 대신 ‘갈 것 없다’고 명령하십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는 제자들의 생각과 달리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의 저녁까지 책임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더 놀라운 선언은 뒤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치유의 사역으로 무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무리의 또 다른 필요를 채워주신 사역에 제자들을 초청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응답이 나옵니다.

 

(3) 오병이어(17)

 

지금 제자들은 자기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다고 대답합니다.

빵과 소금으로 절인 물고기는 갈릴리 바다 주변 주민들의 음식이었고 도시락이었습니다(참조. 7:9-10, 요 21:9-10,13).

그들이 가진 오병이어는 큰 무리의 필요를 채워줄 답이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능력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왕하 4:42-44).

 

(4) 예수님의 축사와 기적(18-19)

 

다시 예수님의 반응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오병이어를 자신에게 가지고 오도록 지시하십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손을 통해 일어나므로, 기적의 초점은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과연 누구이기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보며 축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얼굴을 드는 동작은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욥 22:26-27; 사 38:14, 눅 18:13). ‘축사하다’는 ‘(하나님께) 감사하다’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아버지가 식사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드린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줍니다.

 

(5)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음(20-21)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14:14) 목자로서 무리를 잔디 위에 앉혀 먹이십니다(시 23편; 겔 34:11-16). 빈 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21-22).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숫자가 오천 명이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헤롯의 사치스러운 잔지는 의인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으나, 잔디에서의 소박한 만찬은 사람들을 만족시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메시아와 함께 누릴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풍성하게 먹이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소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잔치를 누리는 나라로서 이사야 25장의 아름다운 그림을 떠올립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오병이어 사건은 주의 만찬과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합니다. 주의 만찬 외에도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현재 빵과 생선을 먹는 무리는 당연히 주의 만찬을 알지 못할 것이므로, 그들은 오병이어 기적으로 출애굽의 광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주의 만찬과 연결하면서도, 현장에 있던 무리와 제자들로서는 애굽에서 해방된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음식을 먹었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사가 열두 개의 빵으로 이백 명을 먹인 사건(4:42-44)도 있으나,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먹은 사건이 훨씬 큰 규모의 기적이고(출 16장)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장면과 유사합니다. 특히 출애굽의 백성이 ‘광야’에서 ‘중개자’(모세)를 통해 ‘빵’(출 16:4,8,12; 실제로는 '만나'가 내려옴)을 ‘배불리’(출 16:8) 먹은 장면은 본문의 기적과 유사합니다(참조, 요 6:25-34). 유대 문헌에는 메시아의 시대에 만나가 다시 내려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만일 애굽의 광야에서 벌어졌던 기적이 갈릴리의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의 모형이라면, 무리는 지금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메시아의 시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여러 가지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병이어 사건은 주의 만찬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공동체이며, 이 행위를 통해서 종말론적 잔치를 땅에서 경험합니다. 남은 음식이 열두 바구니를 채우고 남은 것처럼 교회를 위한 주의 만찬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의 만찬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즐길 감격(26:29)에 미리 참여하는 사건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하늘의 잔치입니다. 배고픔은 인격을 가진 인간을 우울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입니다. 무엇보다 식민 통치와 폭압 정치로 궁핍을 피할 수 없던 광야 백성에게 배고픔은 더욱 처절한 현실로 다가옵니다. 이사야 61:1-2에서 주의 종을 통해 실현될 치유와 풍성함의 나라를 예고한 것처럼, 이사야 25:6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연회를 마련해주실 것을 기대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넓은 광야를 만찬의 자리로 바꿔서 수많은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의 잔치와 같습니다. 셋째, 본문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합니다. 14:3-21에 나타난 예수님의 능력을 영적으로만 제한하지 말고, 예수님을 생활의 어려움, 즉 신앙적이지 않게 보이는 평상시의 필요에도 반응하시는 분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제자들을 통해 전달되므로,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에 긍휼의 마음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도울 때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교회는 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는 논리에 따라 영과 육을 분리해서 경제적 문제로만 간주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천 명을 먹으신 사건의 초점은 예수님의 긍휼과 능력을 통한 기적입니다. 하늘나라의 기적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하시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 나라의 감격에 참여하고 혜택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광야까지 온 무리들을 돌려보내자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갖고, 예수님의 길을 가져 이 땅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고달픈 현실과 탄식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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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01)


세례 요한의 체포와 죽음

마태복음 14장 1-12절


사람들은 죄악을 지적당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먼저는 충고를 듣고서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어리석게 더 큰 불의를 저지르는지 오판을 낳기도 합니다. 죄악 속에서 살다 보면 두려움에 쫓기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더 큰 죄를 범합니다. 더 큰 실수하지 않으려면 항상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 고향에서의 배척에 이어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가 이어집니다. 평소 헤롯 왕가의 부정과 불법을 꼬집었던 세례 요한이 마침내 투옥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딸 실로메에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맹세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간교한 뜻에 간교한 뜻에 따라 결국 세례 요한의 참수형을 끌어냅니다. 선지자가 부패한 왕실의 잔치에 조롱거리가 되어 죽습니다.

 

세례 요한의 체포(1-5)

사람들은 진리보다 여론을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옳은 것보다도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을 더 안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당대에 유행이나 상식 그리고 지지받는 것들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잘못이라고 주장한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헤롯에게는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그런 존재였습니다.

 

1구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1-5)

 

마태는 고향 나사렛에서의 배척 이야기를 분봉왕 헤롯의 세례 요한 참수 사건과 연결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본문 역시 세례 요한도 환영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 헤롯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1-2)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과 요한의 메시지가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그가 요한을 얼마나 위협적인 인물로 생각했는지 가늠하게 합니다.

헤롯에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난 ‘권능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2)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다시 나타났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헤롯이 자신이 행했던 일들에 대해서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죽음 과정(3-5)

 

마태는 세례 요한을 헤롯에 의해 어떻게 죽였는지 설명합니다. 요한은 말로만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예수님께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가 형제 빌립의 아내와 결혼한 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에 헤롯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4). 요한은 유대 광야의 동쪽에 있으면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요한복음 1:28), 요단강 동쪽인 베레아를 담당했던 헤롯 안티파스(4:12; 19:1)는 이곳에서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요한은 헤롯이 첫 아내(아레타스의 딸)와 이혼을 한 문제나 아내를 여러 명 두는 문제보다도 형제의 아내를 취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참조, 레 18:16; 20:21; 요세푸스, 고대사 17.341).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아내를 범하는 것을 크게 지적하셨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레 18:16)

‘누구든지 그이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레 20:21)

 

만일 요한이 샴마이 학파의 결혼에 대한 해석처럼 엄격한 입장을 견지했다면 음행한 연고 없이 왕이 이혼하고 결혼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됐을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이 백성을 선동한 것으로 체포됐다고 기록하는데(고대사 118.118-119), 왕의 재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행위를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고 백성을 선동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권위를 훼손한 어떤 행위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주도한 세례 운동 자체를 정치적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이혼과 재혼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요한의 전반적인 활동 자체를 저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백성의 눈을 두려워해서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서 당장은 실행하지 못했습니다(11:9, 21:26).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나 뜻에 따라서 산 사람이 아니라 백성을 함부로 하면서 그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의 세례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드디어 헤롯에게 기회가 왔을 때 요한은 죽게 되고, 예수님도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죽게 됩니다(16:21; 17:33; 26:4).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본 것은 정확한 판단입니다(21:26). 요한은 선지자이므로,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운명을 겪습니다(13:57). 특히 5절의 핵심 용어는 ‘죽이려 하는 것’과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거나 죽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두 용어의 결합은 구약에서 살해당한 선지자들의 운명을 떠올리며 마태복음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5:12; 17:12; 21:33-41; 22:3-6; 23:29-36).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그 시대가 좋아하는 말,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특히 헤롯과 같은 고위층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성공을 응원하는 소리를 내기 쉽습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은 이렇게 번영을 약속하고 지원하는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 사람들을 멸망의 길, 넓은 길로 초대하는 사람으로 꾸짖습니다(예, 7:21-23). 세례 요한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을 알았지만, 소신껏 발언하다가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도 시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반대로 교회가 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스스로 선지자적 기능을 놓아버리겠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목소리를 내는 선지자의 길은 번영을 추구하는 시대에는 배척당하기 쉽지만, 이런 사명을 수행할 때 사람들이 교회의 소리를 두려워합니다. 듣기는 싫지만 옳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을 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역자는 교회를 향하여, 교회는 시대를 향하여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할 용기가 절실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6-12)

세상에 속한 권력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큰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는 존재가 세상 권력자들입니다. 헤롯 또한 아무 미약한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 세 치 혀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어리석은 지도자일 뿐입니다.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고한 선지자를 죽이기로 합니다.

 

6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6-12)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지만 아주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절대자라고 생각한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요한은 투옥된 상태에서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갈릴리의 유력 인사들 앞에서 축하의 춤을 추었습니다(6). 요세푸스는 딸의 이름이 살로메라는 정보를 제공합니다(고대사 18.5.4). 살로메는 고관대작들에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습니다(참조, 마가복음 6:21). 남성들이 즐기는 연회에 참여하는 여성은 주로 성적인 유희를 제공하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살로메가 춤을 춘 것은 매우 부적절했습니다. 이는 헤롯 가문의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했고 부도덕한 사실, 즉 헤롯 가문과 당시 궁중의 낮은 도덕 수준을 반영합니다. 헤롯은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맹세로 약속합니다(7). 마가복음 6:23에서 헤롯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립니다.

 

7절과 8절 사이에는 마가복음 6:24-25의 이야기가 빠져 있습니다. 마가에 따르면 딸은 모친에게 가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모친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도록 하고 딸은 급히 왕에게 가서 그대로 간청합니다.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이는 자신의 결혼을 비판한 요한을 죽이려고 헤로디아가 시킨 일이었습니다.

쟁반은 잔치의 음식을 담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머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증거로 잘랐으며(고대사 18.115), 헤로디아는 요한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용도로 참수형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특히 잔치에서 처형을 집행하는 것은 잔인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고대사 13.380). 헤롯은 백성의 반응을 염려했지만 맹세한 것 때문에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합니다(9). 헤롯은 사람을 보내서 옥에 있는 요한을 참수했습니다. 10절은 요한이 갇히고 참수형을 당한 감옥이 왕궁에서 멀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딸은 요한의 머리를 직접 들고 자기 어머니에게 전달합니다. 

마태는 헤로디아의 딸을 소녀로 묘사합니다(9:24-25). 소녀라는 단어는 피가 흐르는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어머니에게 가져다주는 행동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헤롯은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요한을 처형한다. 헤로디아는 자신을 비판한 요한에게 복수했습니다.

 

요한이 죽고 나서 요한의 제자들(9:14; 11:2)이 시체를 매장했습니다(2). 마태는 ‘몸’을 가리키는 ‘소마’가 아니라 시체를 가리키는 ‘프토마’를 사용합니다. 요세푸스는 동일한 용어를 로마 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굶주려 죽은 수천 명의 시체를 위해 사용했습니다(유대전쟁사 5.570).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알린 장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됩니다. 1절에서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면, 1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죽인) 헤롯에 대한 보고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선생을 매장하고 나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이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 곧 요한과 예수님의 연대성을 의미합니다. 두 인물이 연결되지 않는데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올 리는 없습니다.

선지자 요한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을 알리는 전조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는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문학적으로 병치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은 체포됐고(14:3) 그를 죽인 책임은 헤롯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됐고(21:46; 27:2)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은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둘째, 해로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을 두려워하고(14: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을 두려워합니다(21:46). 셋째, 헤롯은 다른 사람의 요구로 마지못해 요한을 죽이고(14:6-11), 빌라도는 다른 사람들의 사형 요구를 받아들입니다(27:11-26). 넷째, 요한은 제자들에 의해(14:12), 예수님께서는 제자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묻힙니다(27:57-61). 이와 같이, 요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난과 죽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시간에도 요한과 예수님처럼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의를 위해 사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은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 온통 악이 반복되고 성행하고 이긴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으로 그 세상을 고발하는 아들의 일갈도 멈추지 않습니다. 악한 권력자들을 두렵게 한 요한의 후예입니다. 누가 알아주고 있지 않고 잊힌들 어떻습니까! 시원한 국물 맛 내고 사라지는 멸치도 근사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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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04)

 

 


천국의비밀(4) -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를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3장 44-58절


 

기독교 영화 ‘창끝’의 주인공인 선교사 짐 엘리엇(Jim Eliot)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좋은 대학을 나와서 평생 순탄한 길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미로 선교사로 떠납니다. 그리고 에콰도르 식인 아오카 부족에게 선교를 시도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그와 일행은 순교 당합니다. 5년 뒤에, 그에 아내 엘리자벳이 그 부족에서 들어가서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여 모든 부족원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합니다. 천국은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주신 비유들로서 하늘나라의 가치, 이 가치를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마지막 운명, 제자들의 사명을 다룹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그리고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습니다. 좋은 것만 담듯이 세상 끝에도 천사들이 의인과 악인을 갈라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하는 고향에서는 능력을 행치 않으십니다.

 

세 가지 비유(44-50)

천국의 가치는 세상에 속한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다 걸고서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값지고 영광스럽게 보여야 천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택은 좁은 길이며 좁은 문입니다.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44-46)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한 정보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천국에 대한 두 가지 ‘밭에 숨겨진 보화 비유’와 ‘좋은 진주 비유’로 천국에 대한 소중성을 설명합니다.

 

(1) 숨겨진 보화(44)

 

천국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보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의 최고 가치를 강조합니다(44).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 얻는 가치이지만, 아직도 어떤 사람은 이 나라가 왔는지,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보화의 비유는 하늘나라가 ‘현재적으로’ ‘감춰져’ 있기에 ‘지금’ 찾을 것을 촉구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이 보화를 발견하고는 너무나 기뻐서 급진적인 행위, 곧 모든 것을 파는 결단을 내립니다.

 

(2) 진주의 비유(45-46)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에서 어떤 상인은 가장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최고의 진주를 발견하고는 차선의 것들을 모두 팔아 최고를 샀습니다(45-46). 이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덤불 땅에 던져진 씨(13:22)와 대조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의 반응(19:27)과 같은 의미입니다.

최고의 진주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하는 대상입니다(6:33), 이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덤불 땅에 던져진 씨(13:22)와 대조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의 반응(19:27)과 같습니다.

 

두 비유는 공통적으로 주어진 하늘나라에 대해 제자들이 보여야 반응을 강조합니다. 하늘나라를 만난 사람은 결정해야 합니다. 발견한 보화와 진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았다는 것은 결정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발견한 보화와 진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았다는 것은 결정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수많은 관심거리가 우리에게 가치로 다가오지만 그 어떤 것도 하늘나라의 비밀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보화의 비유(44)와 진주 장수의 비유(45-46)는 둘 다 하늘나라가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찾은 기쁨(44)과 일생을 찾다가 발견한 기쁨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물의 비유와 해석(47-50)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일들이 발견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는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점점 복음을 싫어하는 세상으로, 우리는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만 통하고 이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47-50)

 

우리가 천국 복음에 대해서 주님을 따름에 대해서 자기 것을 희생하여서 주님을 위한다거나 주님께 드린다거나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아직 천국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성도들은 세상에 모든 소유보다 하늘나라를 사모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1) 그물의 비유(47-48)

 

47-48절은 ‘그물의 비유’이고, 49-50절은 비유에 대한 해설입니다. 그물을 던져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모습은 심판의 때까지 인자의 명령에 따른 사역 기간에 일어난 일을 묘사합니다.

‘각종 물고기’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모두 포함하며, 세상 끝에서 갈리기 전까지 한 그물에 속합니다(48-49). 천사들이 악인들을 아궁이에 던질 때(50a, 참조 42a), 악인들은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8:12; 13:50, 22:13; 24:51; 25:30).

 

(2) 비유에 대한 해설(49-50)

 

본문은 하늘 법정에서 선언된 최후 평결의 결과를 반영하며, 세상의 끝에 있을 최종 분리까지는 교회에 악인들이 공존합니다.

그물 비유에서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될 대상은 누구입니까? 인자의 명령을 받은 천사들이 갈라내기 전까지 이들은 한 그물에서 최후 심판 때까지 의인들과 함께 섞여 있으므로, 의인들의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13:47-50은 교회의 실존을 혼합된 교회로 보여줍니다. 혼합된 교회 개념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교회의 특징입니다. 본 비유와 해석(13:47-50; 참조 24-30,36-43)과 다른 본문(18:15-20, 23-35; 22:11-14, 25:31-46)은 교회가 선인과 악인으로 섞인 것을 암시합니다. 교회는 의인들만으로 구성된 무리가 아니라, 세상의 끝에 있을 최종 분리까지는 악인들이 공존하는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긴장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공존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긴장해야 하고, 선한 열매로 신분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응답하실 것을 생각하며 긴장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된 서기관(51-52)

옛 고사 중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앎’이란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잘 순종하면서 새롭게 깨닫게 해주신 은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잘 조화롭게 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51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51-52)

 

본문은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된 서기관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리는 비유를 마친 뒤, 이 비밀을 깨달은 제자들의 역할을 말씀하십니다(51-52).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위해 제자 된 서기관을 자기 보고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 주인에 비유하십니다.

복음을 듣고 깨달은 자들은 제자 된 서기관들입니다(28:19). 말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열매 맺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서기관의 역할도 합니다. 옛것들과 새로운 것들은 구약과 신약, 또는 구약과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리키며, 새로운 것에는 하늘나라의 복음에 합당한 가르침 내지 제자도가 포함됩니다.

서기관인 제자의 역할은 자신들의 창조적 이해에 근거해서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에 보존된 보화의 보호자와 해석자로서 교사이신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관점, 곧 새로운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해석해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옛 것’과 ‘새 것’은 구분되지만,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성취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하늘나라의 서기관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며, 구약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해석해서 가르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예, 5:17-48).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하늘에 감춰진 것을 비유로 계시하신 것처럼(13:45; 참조 시 78:2), 그의 제자들도 구약과 신약이라는 보고에 감춰진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한 예수님(53-58)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대상을 바르게 앎이 아닌 자신들의 지식과 상식 안에 갇혀버린 앎입니다. 익숙함과 지식이 결국 앎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알량한 지식에 갇혀서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기에 이릅니다.

 

53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53-58)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비유를 가르친 다음에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참조, 눅 4:16).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처럼 고향의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4:23; 9:35; 12:9).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탁월하게 말씀을 가르치신 것을 들었습니다. 놀랍게 받아서 감동 받는 것이 아니라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지혜와 능력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궁금할 뿐이었습니다(54). 그리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언급합니다(55-56). 예수님의 부친은 목수였습니다. 목수는 무엇을 만들고 생산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석공이나 목공, 즉 건축 관련 이를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직업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의 가문이 무명임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목공의 가문에서 자란 목공과 나라를 구원하는 메시아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라는 점을 부각하려 했을 것입니다.

가족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명망 있는 가문이 아님을 자신들이 나무나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익숙함 때문에 예수의 능력과 말씀을 보고 듣고서도 반대했고, 그 결과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실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58). 불신은 예수님의 사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를 배척한 이유가 됩니다. 불신은 패역하고 삐뚤어진 세대의 특징입니다(17:17).

본 단락의 핵심 용어는 58절의 ‘불신’입니다. 불신은 스스로 규정한 틀로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해석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은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불신은 하늘나라 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공격하는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선입견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불신을 불러옵니다. 불신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천국이 인생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밭에 누군가 묻어둔 보화는 천국의 값어치를 보여줍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밭을 산 것입니다. 누군가는 말렸을 테고 바보라고 놀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바꾸어도 전혀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된 천국을 보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의 외형적 신분과 출신을 보고 성급하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은 우리 인생 모든 것을 주고 바꿔도 아깝지 최고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발견된 천국 복음을 듣고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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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1-01)

 


욥의 친구 소발의 첫번째 조언

욥기 11장 1-20절


다른 사람에게 권면할 때, 그 권면이 바른 권면일 수 있지만 때로는 무익한 권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대로 올바르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을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도 옳아야 하지만 마음과 태도도 옳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지식이 온전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더욱 세심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소발의 발언도 앞의 두 친구들과 그 구조와 형식, 내용에 있어서 유사합니다. 특히 8장의 빌닷의 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세 친구들은 각각 독립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의 입을 통해 규범적 지혜의 주제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소발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크심을 인과응보의 원리와 연결시키는 점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인간의 이해 불가능성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욥의 무죄 주장에 대한 반박(1-4)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절망의 이르기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의지와 희망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실행하시면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겪는 재앙의 이유는 ‘하나님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재앙의 문제를 사람에서 찾으려 하고,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판단하려 함다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잘못하면 죄로 규정하고 해결 방법으로 하나같이 회개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1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4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1-4)

 

욥의 친구 소발은 앞서 빌닷과 유사하게 욥을 비판하면서 시작합니다. 빌닷이 욥의 폭풍 같이 거센 말을 비판했다면, 소발은 말이 많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잠언의 전통 지혜를 빌어서 욥의 ‘많은 말’을 문제 삼습니다. 2절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는 ‘말을 많이 하면 우리가 대답하지 못할 줄 아느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반절의 “말이 많은 사람”은 직역하면 ‘입술의 사람’입니다. 사람이 말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소발은 계속해서 욥의 그 많은 말들은 다 반박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3). 소발은 욥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4). 사실 이것은 직접 인용이 아닙니다. 욥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선 “정결”이라는 단어는 엘리바스가 사용한 바 있습니다(8:6 “청결하고”). 후에 엘리후도 욥을 비판하면서 “나는 깨끗하여”(33:9)라고 욥이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욥은 16:17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기도가 정결하다고 할 때, 이 단어를 한 번 사용할 뿐입니다. 둘째, “깨끗하다”로 번역된 ‘바르’도 욥의 말에서 단 한 번 사용되는데, 9:30에서 자신이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라고 말하기 때문에 소발의 인용은 욥의 말을 본뜻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4절이 비록 ‘너는 말했다’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욥의 말에 대한 소발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것입니다. 이것은 8장에서 빌닷이 욥의 말을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다’라는 주장으로 해석해서 비판하는 것과 그 방식에서 동일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옳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에 기반한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는 의인/지혜자에게 재앙이 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옳지 못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욥의 말 중에서 세 친구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고난을 당하는 욥이 ‘자신은 이 고난을 당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죄주장입니다. 소발이 욥의 말을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라고 ‘인용’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 규범적 지혜를 기반으로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발의 신앙 안에서는 ‘무죄한 자의 고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한계(반성적 지혜)(5-11)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그의 피조물임을 인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5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6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7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0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5-11)

 

5-6절 전반부를 개역개정처럼 “하나님은… 원하노니”로 번역하는 것은 욥기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감안한 것이 아닙니다. 직역하면 ‘누가 주는가?’인데, 이 관용어구는 11:5 외에 6:8; 13:5; 14:4,13; 19:23; 23:3;31:35에 쓰일 만큼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현실화하기 어려운 소망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입을 여셔서 그 감추어진 지혜를 직접 알려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감추어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오묘함”(6)으로 번역된 ‘타알루모트’는 ‘감추어진 것’이라는 뜻이며, 오랜 옛날(태고)을 뜻하는 동시에 “영원”으로 흔히 번역되는 단어 ‘올람’과 어근이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규범)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태곳적(올람)에 결정된 것이기에 그 시기까지 접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감추졌다.’ 그분의 지혜는 너무나 커서(6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인간이 측량할 수 없고 그 지혜의 전모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7). 소발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그의 죄를 일시적으로 잊게 하셨는데도 욥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의를 과신한다고 비판합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소발의 주장은 앞 문장과 논리적 정합성을 보입니다: 인간은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8). 개역개정은 이 문장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해석했지만, 원문을 번역하면 ‘하늘만큼 높은 것을 네가 만들 수 있겠는가? 스올보다 더 깊은 것을 네가 알 수 있겠는가?’가 됩니다. 욥이 하늘과 스올의 일까지 통달한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는(9절의 주어는 여성 단수로서 문법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이 지구의 육지보다 더 길고 바다보다 더 넓으니(9) 한낱 인간이 그 지혜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발은 창조주의 크심을 그분의 절대주권(자유)으로 연결합니다: ‘그분이 순화시키고 닫으시고 모으시면 누가 그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겠는가?’(10) 절대 전지 공평하신 하나님의 재판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루 다니다가 욥의 죄를 발견하고 심판처분을 위해 재판을 여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소발의 말은 정확히 반성적 지혜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욥이 한 얘기가 이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크신 분이라 피조물인 인간이 그분을 다 알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자신의 뜻을 (어떤 원칙에 매임이 없이) 주권적으로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유)과 인간의 한계를 연결하는 것은 욥의 반성적 지혜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동일한 주장의 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하나씩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6b)와,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11)입니다. 이 두 문장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시고 어떻게 움직이시는지를 욥에게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대체 소발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소발 역시 피조물인 한낱 인간으로서, 소발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발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신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던 소발의 훈계는 소발 자신부터 적용해야 합니다. 6절의 끝 문장과 11절에서만 “죄”와 “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나머지는 선악 개념과 인과응보의 원리를 초월한 진술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소발의 주장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의인/지혜자에게 임하는 복(규범적 지혜)(12-20)

무고한 사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도 억울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입니까? 또는 모든 부귀가 선의 결과입니까? 우리가 의로워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므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복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없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12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3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5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9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20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12-20)

 

5-11절까지의 소발의 말이 반성적 지혜의 주장 끝에 규범적 지혜의 주장을 엉성하게 덧붙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면, 12-20절은 다시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회귀합니다.

소발은 다시 욥에게 회복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허망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닥친 재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욥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로 바로 세운다면(13), 즉 죄악과 불의에서 멀어지고(14),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면 다시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사는 의인/지혜자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15). 그러면 고난은 이미 지나간 물처럼 여겨질 것이고(16), 욥의 인생은 대낮처럼 화창할 것이며 어둡던 것은 밝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17). 여기서 한 가지, 15절의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라는 표현을 통해 소발은 욥의 현재 상태가 죄의 결과이고 흠/결함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뭄’은 ‘흠’, ‘결함’, ‘장애’를 나타내는 말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죄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신학을 반영합니다. 소발의 규범적 지혜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의인/지혜자에게 “희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18). 누워 있어도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욥에게 잘 보이려고 몰려들 것입니다(19). 이와는 반대로 악인은 도망칠 곳이 없고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어서 오직 바랄 것은 죽음뿐입니다(20). 욥기의 성실한 독자라면, 5-10절의 반성적 지혜와 12-20절의 규범적 지혜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성도는 적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그 하나님의 사람과 영광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몸소 실천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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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0-01)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욥

욥기 10장 1-22절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 9장에서 욥이 반성적 지혜의 일반론을 진술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잘잘못을 가릴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욥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까닭 없는 것처럼,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1): 제게 알게 하소서(1-7)

하나님께 솔직하게 감정과 마음을 풀어서 말할 때, 우리는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느낍니다. 또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습니다(민 11:15; 시 142편). 너무 힘들 때는 그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정과 마음을 토해 내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1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3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5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6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7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1-7)

 

하나님을 향한 욥의 항변을 들을 것입니다. 욥은 ‘살아있는 것이 너무 끔찍하다’고 토로합니다(1). 욥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피조물로서는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을 막거나 되돌릴 힘이 없고, 욥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거나 그의 탄원을 받아들이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욥이 할 수있는 것은 결국 기도뿐입니다. 욥으로 하여금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1절을 직역하면 “내 불평을 내 자신에게 던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내 영혼의 원통함 안에서 내가 말하게 내버려두십시오.”입니다. 풀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삶이 너무 끔찍해서 말이 튀어나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역개정은 욥기에 쓰인 ‘시아흐’를 불평이나 원망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하는데, 이 어근은 단순히 ‘말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7:11). “불평”이라는 번역어의 선택은 ‘하나님을 공격하고 도전하는 욥’이라는 신학적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절 이하에 나오는 욥의 간절한 기도를 “불평”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욥이 간구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를 나쁘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2a); (2)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2b). 그는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자신을 법정 심판에 소환하여 이토록 가혹한 심판 처분에 내던지시는 이유를 제발 알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벌을 주신다는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가 맞는다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악인으로 판단하셨는지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말입니다. 이 간구 속에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판단을 알 수 없으니, 그 판단의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뿐이라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같을 수 없다는 진술입니다. 사람은 (욥의 친구들처럼) 잘못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4). 한 인간의 생명은 아주 짧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혜가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욥의 친구들처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5). 같은 인간인 친구들은 욥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을 죄 있다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욥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방이 막힌 상태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죄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데도(7a) 욥에게 고난을 주시기 때문에 욥으로서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그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지해 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 역시 없습니다(7b).

 

하나님을 향한 탄원(2): 저를 창조하신 것을 기억해주소서(8-17)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를 의지하며 그 시간을 지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노력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 욥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영적 무능과 타락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8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2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3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5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8-17)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욥이 하나님께 외치는 부르짖음은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욥 자신마저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것인데 탄원시에서 적지 않게 쓰이는 방식입니다. 이 장면을 아브라함이나 요나와 비교해보면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은 규범적 지혜의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에게는 걸맞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설득의 로고스로 삼습니다(창 18:25).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속성에 호소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선함’(goodness)은 의인을 살리고 악인을 멸망시키는 데 있습니다(현대 신학이 하나님의 선함을 자비와 용서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규범적 지혜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는 것을 선함으로 이해한다). 아브라함이 설득을 위해 사용하는 어휘는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언어입니다: 의인, 악인, 심판, 정의․ 반면에 요나는 하나님이께서 ‘정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에 오히려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화를 냅니다(욘4:1-4).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욘 4:2)이라는 표현은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선대하시고 악인을 징벌하시는 의로운 분(즉,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요나는 규범적 지혜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틀에서 하나님 스스로가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 포함된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욘 4:10)라는 표현은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은혜’와 ‘까닭 없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선악 개념을 초월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했다면(요나의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욥은 동일한 하나님을 ‘까닭 없는 고난’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까닭 없는 은혜와 까닭 없는 고난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욥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욥 1:21; 2:10) ‘창조주’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진흙에 우유를 섞듯이 욥을 창조하시고(9-10),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지금까지 은혜로 보살피고 지키신 것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합니다(12). 이 문장 속에는 아브라함이 사용한 '의인, 악인, 심판, 정의' 같은 어휘들이 등장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소유다. 창조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니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만드신 분이 그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죽게도 할 수 있다(8-9절). 하나님이 인과응보의 틀 안에서 움직이시는 분이라면 오히려 신앙이 쉬울 수 있다. 죄를 지으면 죄인으로서 받는 징벌을 받으면 된다. 악을 행하면 화를 당하면 됩니다(14-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상을 초월하시는 “놀라움”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16). 그렇기에 인간이 아무리 의롭더라도 그분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그분 앞에 죄인으로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15). 참고로, 개역개정이 “부끄러움”으로 번역한 단어 ‘깔론’은 ‘가벼움, 낮음, 천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3): 제발 저를 내버려 두소서(18-22)

세상 살기가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숨 한번 크게 쉬기 어려운 압박과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몰아치는 상황과 고통을 그저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잠시의 평안을 우리는 갈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18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8-22)

 

욥은 다시 3장의 탄식으로 돌아갑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18), 혹은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더라면(19) 이러한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20). 이제 자신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21). 그곳은 빛이 어둠처럼 뜨는 곳, 빛과 어둠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는” 곳(22)입니다. 3장에서 죽음의 공간을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는 곳으로 길게 묘사한 것(욥 3:14-19)을 여기서는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욥은 죽음의 세계를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난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2:6을 읽은 독자는 욥의 재앙이 욥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어떤 특정한 원리나 그분의 어떤 속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욥이 할 수 있는 탄원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잠시라도 평안하게 살 수 있게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둬 달라는 것입니다(20). 이것밖에는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개역개정이 “평안하게 하시되”로 번역한 ‘아블리가’는 ‘밝아지다’, ‘빛나다’, ‘기분이 좋아지다’라는 의미입니다(9:27; 암 5:9; 시 39:13).9:27에서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로 번역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여생을 잠시나마 밝고 기분 좋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그야말로 소박한 소망입니다.


욥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음에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고 결국은 회복되고 갑절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부터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2:9)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나 괴로울 때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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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03)

 


천국의 비밀 3-겨자씨,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장 31-43절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가서는 책망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암양 새끼 한 마리마저 빼앗은 부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부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곧 들어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사무엘하 12:7). 배우의 특징은 이렇게 숨김과 드러냄에 있습니다.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비유의 의미,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해설로 구성됩니다. 비유와 해설은 하늘나라가 성장하는 특징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늘나라는 비록 작게 시작하지만 놀랍게 성장할 것이고, 사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랄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

예수님께서 소개한 천국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소수의 추종자들만 얻을 뿐입니다. 그 왕의 권세도 놀랍지만 압도적이지 않았습니다. 권세자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천국은 그렇게 겨자씨처럼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나무처럼 자라서 온 세상에 영향력 있는 나라로 성장할 것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1-33)

 

예수님께서는 계속 천국에 대한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1) 겨자씨의 비유(31-32)

 

겨자씨의 비유는 13장의 비유 중에서 처음으로 해설이 주어지지 않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의미가 전달될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으므로 하늘나라를 시작한 주제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맥에서는 뿌린 주체가 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37). 인자가 말씀을 뿌리는 활동으로 하늘나라가 시작됐습니다.

겨자씨를 심는다고 나무처럼 자라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장법을 사용해서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 중 하나이지만 새들이 둥지를 틀 만한 나무처럼 성장하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나무’는 왕국을 묘사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에스겔 17:2-10, 22-24, 31:3-18; 다니엘 4:7-12, 17-23), 비유에 나오는 ‘겨자씨’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가리킵니다. 이 나무의 가지에 새들(모든 민족)이 둥지를 틉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크게 성장한다는 것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며, 처음으로 ‘작은 것’을 주제로 제시합니다. 하늘나라는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서는 파악되지 않을지라도 현재 성장하고 있으며, 미래는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현재 겸손하고 보잘 것 없이 시작됐으나 그 미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독자는 겨자씨 비유가 성공주의나 승리주의를 부추기는 목적의 비유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이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의 활동처럼 겸손과 섬김과 긍휼로 시작해서 그와 같은 성격의 나무로 자랍니다. 성공과 승리를 꿈꾸는 사람들이 터전으로 삼는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백향목과 같은 나라가 아니라 겨자씨와 같은 나라를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처럼 누룩도 처음에는 그 존재가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합니다. 시간이 흘렀을 때 놀랄 정도로 극적인 결과로 나타납니다.

 

(2) 누룩의 비유(33)

 

본문은 ‘밀가루 서 말 안에 숨겼다’고 표현함으로써 ‘숨겨진’ 속성에 초점을 둡니다. 밀가루 반죽에 누룩이 들어가기 만하면 반드시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하늘나라의 진리는 숨겨져 있는(13:35, 44) 누룩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눈에 띄지 않게 겸손하게 시작했고(예, 12:19),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과 같이 영향을 끼침으로써(5:13-16), 비밀스럽게 세상을 점령해 나갑니다. 겨자씨처럼 하늘나라가 자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쉼을 누리는 것처럼 누룩처럼 부풀어 올라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하늘나라 운동 역시 승리주의나 성공주의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이 겸손했다면 성장 과정도 겸손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사람들의 시야에 크게 들어오지 않지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비밀은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됐고 그 나라는 겸손하고 비밀스럽게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공통적으로 하늘나라의 현재성과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성장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갖도록 돕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서 거창하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제자들로 시작됐습니다. 하늘나라의 활동은 로마에 대한 승리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치유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예수의 비유(34-35)

천국의 확장은 은밀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끝은 시작할 때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를 것입니다. 그 출현도 떠들썩하지 않고 은밀할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떠들썩한 영향력이 아니라 잔잔하지만 힘 있는 영향력을 구할 일입니다.

 

34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34-35)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무리에게 말씀하셨고, 비유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34). 34절의 과장법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애썼으며, 이런 모습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패턴이 성취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해 … 성취되기 위함이었다’는 마태복음의 인용 공식입니다. 본문은 시편 78:28의 인용입니다. 마태는 시편 78:2을 근거로 예수가 비유를 많이 전하셨는지 설명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비유를 전달하신 목적이 하늘나라의 비밀, 곧 감춰진 것을 알리는 데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비유라는 수단으로 쉽게 해석될 수 있으며, 동시에 비유 자체가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 역시 해석이 필요합니다.

비유를 통한 계시에 귀를 기울여 해석을 듣지 않으면 하늘나라의 비밀은 비밀로 남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비유를 전달하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들으려는 자에게 비유에 감춰진 것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비밀은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비유를 통해 전해졌으나, 영적으로 귀와 눈이 닫힌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속성이 열리지 않은 비밀로 남습니다. 비유가 전달하는 내용이 의미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은 청중의 문제입니다.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옛 시대의 조상들처럼 비유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응답하지도 않았으나, 소수의 남은 자들인 제자들만 예수의 해석을 듣습니다.

 

가라지 비유의 해설(36-43)

비유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하늘나라의 왕이 직접 오심으로 드러난 실체를 반영한비다. 비유는 소수의 제자들을 그 나라의 현존으로 초대할 뿐 아니라 그들을 격려하는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비유를 해설해 주시고 계십니다.

 

36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36-43)

 

좋은 씨를 뿌린 자는 인자입니다(8:20; 9:6; 11:19; 12:8). 인자는 그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심판을 수행할 것인데, 재림이 바로 종말의 추수가 일어날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39절에서 ‘마귀’를 지칭함으로써, 열매가 맺히지 않는 원인이 마귀의 활동에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독보리들은 추수 때까지는 밀과 함께 자라지만, 시대의 마지막에 인자가 천사들을 시켜 모으고 태울 것입니다. 씨를 뿌린 인자가 추수를 하는 역할도 수행할 것입니다(25:31-46). 인자는 지상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겸손과 긍휼의 삶으로 씨를 뿌렸으나, 세상의 끝에는 ‘주’로서 재판장의 자리에서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인자의 심판으로 아궁이에 던져집니다(42; 다니엘 3:6,11,15,20). 그들은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서 슬피 울고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42절에 있는 악인의 운명과 43절에 있는 의인의 운명이 대조되는데, 대조의 강조점은 장소에 있습니다. 43절은 의인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독보리의 운명과 달리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 나라에서, 곧 완성된 하늘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다니엘 12:3; 참조, 마태복음 17:2). 이는 다니엘 12:3의 언어로서 의인들이 받을 상을 의미합니다. 의인들은 다니엘서에서 지혜로운 자로 표현되며, 마태복음에서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독보리의 비유는 하늘나라가 시작된 이후부터 완성 이전까지의 기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시대의 마지막에 악인들이 의인들에게서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은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첫째,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땅의 문제를 지적한다면, 독보리의 비유는 하늘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의 원인을 사탄의 활동에서 찾습니다. 밭은 세상을 상징하므로, 역사의 끝에 천사들이 심판을 집행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들과 공존합니다. 악인들이 번영하고 의인들은 고통을 겪는 모순과 혼란의 상황이 이 시기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악한 자들은 형벌을 받고 의인들은 신원을 받을 것입니다. 독보리 비유에 대한 해설에서 예수님은 일곱 개의 핵심 사항을 최후 심판 장면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십니다(13:37-39).

셋째, 비유는 교회를 향해 격려와 경고를 동시에 던집니다. 격려와 경고를 목적으로 최후 심판 이후에 보내질 복의 장소와 형벌의 장소가 대조됩니다. 의인들은 반드시 천상의 존재로 변화됩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들은 역사의 끝에 일어날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변화를 소망하면서, 불법이 아니라 의인들의 호칭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넷째, 비유 해설은 교회의 혼합성, 즉 의인들과 악인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내포합니다. 세상에서 악인들이 의인들 가운데 있듯이,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에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로 언제나 긴장해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누룩이 빵을 부풀리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리지만 이루어질 일입니다. 씨를 심고 누룩을 넣은 이의 인내를 닮아야 합니다. 악인이 우세하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나는 날, 모든 숨은 의인들이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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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03)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 18-30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부분은 자신은 다윗이지 골리앗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악인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고, 자신이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악인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인 줄만 알았는데 가해자임을 깨달은 경험이 있습니까?

 

  • 전반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3-8)에 대한 해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뿌려졌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 상태를 해설하십니다. 이어서 24-30절은 가라지의 비유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을 우주적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설(18-23)

한 장소에서 같이 말씀을 듣는 것은 공통적일 수 있지만 반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들었는지의 여부는 열매 맺히는 과정과 결과로 나타납니다. 제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수준은 아니며, 깨닫는 정도에 따라 맺히는 열매도 다릅니다. 좋은 제자는 성장할수록 더 깊이 말씀을 깨닫고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과거의 경험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깨닫는 자들은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18-23)

 

예수의 하늘나라 사역에 동참해온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듣기 전에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놀랍고 충격 적인 기적과 말씀으로 활동하셨지만 사람들의 적대감이 커져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급성장할 것 같던 하나님의 일이 퇴보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해설로 바른 눈과 귀로 현재와 미래를 정확하게 분석하게 도와주십니다.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회의에 빠지거나 낙심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돕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깨닫는 사람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밭두렁 옆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먹어버린 것(4)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9). 마귀는 씨를 훔쳐간 새에 비유됩니다. 사탄이 빼앗아 가버리는 씨가 뿌려진 땅은 밭두렁입니다.

19절에서 씨가 그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것을 고려할 때, 씨가 뿌려진 장소는 밭두렁과 같은 마음입니다. 씨를 빼앗기는 현상은 예수께서 드러내신 선포가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완악과 듣기를 거부하는 태도 때문입니다(참조, 13:13-15; 11:21,23: 12:41-42),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사탄이 가져가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이지만 책임은 사탄이 아니라 땅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땅의 경우에는 사탄에게 말씀을 뺏기지 않기 때문에 밭두렁의 마음은 사탄 때문에 말씀이 자라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20절에서의 사람은 돌투성이 땅입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하늘나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지만(참조. 데살로니가전서 1:6),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해 환난이나 핍박(5:10-12; 10:23, 23:34)이 오면 넘어집니다. ‘화난’(θλιψις)은 사람을 누르는 고통(7:14), 특히 예수 때문에 받는 고통을 가리킵니다(5:10,11,12,44; 10:23; 23:34). 마태는 환난을 종말이 오기 전에 겪을 핍박이나 종말론적인 시련에서 오는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합니다(7:14). 하늘나라의 말씀은 예수께서 전하시는 것이므로, 이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는 공격이 따르기 마련인데, 돌투성이의 마음은 말씀 때문에 잠시 기쁨이 생겼으나 곧 닥치는 환난을 견디지 못합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현재적인 환난이 오면 넘어지기도 하고, 마지막 날에 올 환난을 견디지 못해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핍박은 예수의 말씀 때문에 받는 것이므로, 이런 사람은 말씀 때문에 오는 시련을 통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말씀 때문에 즉시 무너져버립니다(24:9-10), 세 번째 땅의 경우에 땅은 씨가 자라기에 좋은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자라는 것을 막아버리는 요소가 생깁니다. 가시덤불의 땅은 말씀을 듣지만, 이 시대(13:39,40,49; 24:3; 28:20)의 염려와 부의 속임이 씨를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부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현재와 미래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확신을 주지만, 이는 속임수입니다(예, 잠언 11:28; 23:4-5), 네 번째 토양, 곧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23). 제자들의 정체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 깨닫는 것입니다(15:10; 16:12; 17:13). 이해는 반드시 행함 연결되기에, 예수님을 통해 이해한 것은 행위로 입증됩니다.

 

씨 뿌리는 자 비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나 깨닫지 못해 열매 맺지 못하는 땅(밭두렁, 돌투성이, 가시덤블)과 깨닫고 열매 맺는 땅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가 왔다고 해서 모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들었지만 앞의 세 가지 땅은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한 반면에 좋은 땅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유는 예수의 비유에 반응하지 않았고, 메시아 사역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를 맺는 자는 구원받은 상태를 증명합니다. 바른 이해는 열매로 입증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이해와 달리 거짓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이해했다고 확신했지만, 그들의 열매는 그들의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습니다(7:16-23).

둘째, 비유의 일차적인 의도는 하늘나라의 비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늘나라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므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셋째, 하늘나라의 사역이 라는 관점에서,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사역이 비록 귀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보이거나 결실이 없어서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늘나라는 좋은 토양을 통해서 좋은 결실을 맺고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결실의 양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비유의 본래 의도,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땅과 열매 맺는 땅의 ‘대조’라는 주제를 놓칠 수 있습니다. 마태의 예수님은 ‘열매의 양’이 아니라 ‘열매 자체’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다음에, 결실의 차이를 제자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제자 또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열매를 맺는 것(21:41)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의 열매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반응과 직결됩니다.

 

가라지의 비유(24-30)

말씀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단단히 마음을 무장하지 않아 유혹에 금방 빠져버리거나, 마음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금방 넘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말씀이 아닌 세상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말씀을 통해 세상의 일이 잘 풀리고 재물을 얻거나 지위와 명성을 얻게 되리라는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가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말씀에 나타난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24-30)

 

가라지의 비유(13:24-30)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예수에 대한 반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에, 가라지의 비유는 마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번 비유는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 로 씨를 뿌리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제 역시 ‘하늘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좋은 씨는 밀(25)로서 식량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이삭이 패고 열매가 생기면서 밀 속에 섞여 있던 가라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27). 종들은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이는 선한 일을 시작한 곳에 악한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을 목격하고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부정 적인 분위기가 열매를 맺는 결과로 반전된 정반대입니다. 아마도 종들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놀라운 양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이번에는 가라지가 생각보다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놀란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은 가라지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28). 그는 원수가 가라지의 씨를 뿌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종들은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는지 묻습니다. ‘뽑다’(συλλέγιο)는 ‘모으다’를 뜻하며 ‘모으다’는 최후 심판을 위해 악인들을 모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마태복음 7:16; 13:28-30, 40이하, 48). 주인은 가라지의 존재는 위협이 되지만, 가라지를 뽑으려 할 때 곡식을 뽑을 수도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미 많은 양의 가라지 뿌리가 밀 뿌리와 엉킨 상태며, 일반적으로 가라지 뿌리가 밀 뿌리보다 훨씬 강해서 좋은 곡식이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은 곡식을 보호할 목적으로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추수 때는 밀이 열매를 맺은 시기여서 가라지가 더 이상 열매 맺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고 말합니다.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요엘 3:13; 호세아 6:11; 예레미야 51:33; 요한계시록 14:15-16).

가라지의 비유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하늘나라의 성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비유는 하늘나라가 시작된 이후부터 최후 심판, 곧 완성되기 전까지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합니다. 열심히 씨를 뿌렸으나 생각보다 결실이 맺히지 않는 원인은 땅뿐만 아니라 사탄 때 일입니다. 하늘나라가 활동하는 동안 사탄도 활동합니다. 의인들이 활동하는 동안 악인들도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탄의 존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백성은 사람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사탄의 원리를 파악하고 기도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분열된 교회 한쪽에서 ‘양과 염소로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양이라는 확신입니다. 교회에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말씀을 읽기보다 말씀이 자신을 읽어내는 묵상 경험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마태복음(13-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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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01)

 


말씀에 대한 반응들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13장 1-17


비유란 문자 그대로 어느 한 사물이나 사건을 다른 한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특히 심오하고 난해한 추상적 사상을 일상 생활의 친근한 구체적 사물에 빗대어 이해를 돕는 문학적 기법을 말한다비유에는 이중 기능이 있습니다답을 알려주는 힌트가 될 수도 있고답을 찾기 어렵게 하는 함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본 장은 마태복음의 셋째 강화(講話)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여덟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믿음을 가진 자는 더 받아서 넘치게 하고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 위함입니다. 

 

가르치는 예수님(1-2)

천국에 대한 교훈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서 전하셨습니다그렇게 하신 것은 곁으로 보기에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알기 쉽고 이해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더 깨닫기 어렵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깨닫도록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1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비난과 메시아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모여드는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이제 13장에서는 예상 밖의 부정적 반응을 비유와 비유의 목적에 대한 교훈입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로 시작합니다본문에는 바닷가에 앉으시매로 시작해서이 말씀을 해변복음이라고 부르기도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합니다.

 

첫 번째 비유의 묶음(13:3b-23)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11-12장의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11-12장의 주제와 같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나는지 인간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십니다.

 

네 가지 밭에 대한 비유(3-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그 비밀을 들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아무에게나 깨닫게 하지 않습니다비유를 통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 그 비밀을 아는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육십 배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3-9)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불리지만비유의 초점은 씨 뿌린 사람이 아니라 뿌려진 이 핵심입니다하나님의 밭에 있는 네 종류의 땅에 씨가 각각 길가돌밭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이 비유는 풍유적이며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밭은 세상(13:38)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설명한다면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농부들은 제한되고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종은 땅에만 씨를 뿌릴 형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먼저 농부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뿌려진 씨 중에는 어떤 것은 밭두렁 옆에 떨어졌습니다(4). 흔히 로 번역된 호도스는 밭을 구분하는 밭두렁을 가리킵니다두렁 옆이나 위에 떨어진 씨는 노출되어 새들이 즉시 먹어 치웁니다.

또 어떤 씨는 흙이 많이 없는 돌투성이 땅에 떨어졌습니다(6). 팔레스타인의 많은 땅은 석회석 위에 흙이 덮인 상태였습니다흙이 깊지 않은 돌투성이 땅에 떨어진 씨는 물기에 빨리 반응해서 싹이 곧 돋았습니다아예 자라지 못한 첫 번째 씨에 비하면그나마 두 번째 씨는 자랄 수는 있었습니다그러나 태양이 떠오르자 뿌리가 견고하게 내리지 못한 이유로 아래서 수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채 말라버렸습니다또 어떤 씨는 제법 자랐으나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영양분을 빼앗고 햇빛도 맺지 못했습니다그러나 좋은 땅 위에 떨어진 씨는 다른 결과를 냅니다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육십 배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에 씨를 뿌린 모습에 대해서 청중은 처음에는 농부가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밭의 대부분은 땅이 좋지 않기 때문에청중에게는 씨를 낭비하는 어리석은 농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반전이 일어납니다그런 밭에 좋은 땅이 있고그곳에서는 기대 이상의 결실이 맺힌다는 사실이 들어납니다.

청중들은 농부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그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고 씨를 뿌렸음을 깨닫게 됩니다씨를 뿌리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이후에는 제자들이 감당하게 될 사역을 의미합니다씨가 결실을 맺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갱신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이처럼 풍성한 결실이 맺히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특징입니다사람들의 눈에는 메시아 시대의 사역이 어리석은 낭비나 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반드시 좋은 땅을 통해서 극적인 결실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비유로 가르치시는 까닭(10-17)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비유를 통해 좀 더 분명히 그 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면 자아의 나라를 고집하는 자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반대하겠지만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받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0-17)

 

예수님께서는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듣게 하시려고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진리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비유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겠지만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바리새인들은 닫힌 마음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었지만제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비유를 깨닫는 복을 누렸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비유를 사용하시는지 묻습니다하늘나라의 비밀에 대한 지식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비밀’(μυστήριον)은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은 신비로운 내용으로서 계시자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하늘나라의 비밀들에서 하늘나라의는 비밀들이 하늘나라에 속한 것임을 뜻합니다여기서 하늘나라의 하늘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주하는 영역입니다하늘나라의 비밀들은 하늘의’ 나라에 속한 비밀들을 가리킵니다하늘나라에 속해 있는 비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가르침으로 계시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무리에게 비유라는 수단을 사용하는지 설명하십니다(12).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지고 갖지 않은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비록 제자들이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한 지식은 시작 단계이지만말씀과 말씀하시는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비유를 듣고도 관심을 두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은 들은 것마저 시간이 지나면 빼앗길 것이고떠남으로써 그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입증할 것입니다.

13절은 10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사야 6:9로 요약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 또는 이해하지 못함을 또다시 언급합니다이 논리는 14-15절에서 확장됩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감추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고 오셨습니다비유는 백성의 완악한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반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과 귀가 막혀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됩니다그러므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책임이 예수께 있지 않고 무리에게 있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9-10을 인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믿는 것에 실패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9-10은 마음의 완악함과 심판을 표현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 본문에서 여러 차례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믿는 것에 실패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9-10은 마음의 완악함과 심판을 표현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 본문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습니다(예레미야 5:21; 에스겔 12:2; 요한복음 9:39; 12:40, 사도행전 28:26-27). 말하자면이사야 6:9-10은 예수의 사역에서 비로소 성취된 본문이 아니라 역사에서 여러 번 성취되었으며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성취의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이사야는 인간 마음의 완악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마음이 무디어진 것영적 청각의 문제시각의 문제입니다완악하다는 무디다’ 또는 둔감하다’(ESV, NASB, NRSV, 쉬운성경)입니다이 단어는 이사야 6:10의 인용으로 언제나 수동태로 쓰이며, ‘비만해지다’, ‘우둔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신명기 32:15; 사도행전 28:27). 그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실 것입니다이스라엘이 회개하면 진정으로 고치실 것입니다.

 

16-17절은 11절에 이어서 제자들의 특권에 대한 내용입니다이스라엘 가운데서도 그루터기는 남았던 것처럼(이사야 6:13), 제자들은 복되다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제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보기를 바랐던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17). 예수의 제자들은 보기를 원했던 구약의 선지자들 및 의인들과 연대되어 있으며(10:41; 23:34), 제자들로 대표되는 교회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약속한 구원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마음은 사람이 관심을 둔 곳에 머물기 때문에(6:21) 예수 외의 것으로 비만해진 마음은 하늘나라의 말씀에 둔감해진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면서 생명 없는 우상처럼 마음이 마비되고 귀와 눈의 기능이 상실되어 간 것과 같습니다마음이 마비되어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심장 박동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우리 주변에는 마음을 둔하게즉 비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귀와 눈의 기능이 마비됩니다눈은 분별력을 잃습니다그러므로 마음이 무디어지는 상태는 아닌지 심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한편듣고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 책임성의 자유를 침해함 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신비로운 주권을 행사하십니다하늘나라 선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비유를 통해서 지혜와 통찰을 더 많이 갖게 되는 반면예수님과 그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유 때문에 하늘나라의 진리에 대한 시력이 더욱 어둡게 될 것입니다믿음은 더 많은 지혜로 인도하지만불신앙은 더 많은 무지로 인도합니다.


오늘날 목회가 힘든 것은 말씀을 전해도 변화가 없는 데서 오는 좌절감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그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소수만이 깨닫고 소수만이 따릅니다경이로운 점은그 좁은 길을 걷는 적은 무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오늘 하루도 이 복음을 잘 나누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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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5)

 


천국에 새로운 가족을 설명한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38-50절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확실한 믿음의 근거를 찾고자 모습이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형태의 신앙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끊임없는 불신앙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삐뚤어진 형태의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확실한 증거를 보아도 믿지를 못합니다. 항상 그들은 다시 불신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시대의 운명과 예수님의 참 가족을 가르칩니다. 이 시대는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를 진정한 자기 가족이라고 하십니다.

 

악한 세대가 구하는 증거(38-4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계시를 하십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그 계시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과 등불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8-42)

 

앞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다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확실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1) 표적을 구하는 세대(3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새로운 기적을 보여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당시에 표적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서 의심을 불식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표적을 요구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셨지만, 이들은 만족하지 않고 또 새로운 표적을 요청한 것입니다.

16:1에서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할 것입니다. 이것을 38절과 연결해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흠집을 찾기 위해 표적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요나의 표적과 같은 표적(39-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솔로몬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것을 실행하실 것을 모형론으로 설명하십니다.

 

➀ 요나의 표적(39-41)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39).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8-9장에서 많은 기적들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라는 말씀은 모세가 반역적인 이스라엘에 대해 말한 내용을 떠올립니다(신명기 1:35; 32:5).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란한 상태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적을 구하게 됩니다. 이는 부부가 서로 신뢰의 관계가 깨어지면, 어떤 표시로 사랑을 입증해보다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공격하는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지 못한 태도, 즉 음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선지자의 사역을 통해서 경험한 표적입니다(4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요나를 ‘선지자’로 칭하심으로써 선지자적 사역을 행하는 메시아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예로 제시하십니다. 요나의 표적과 인자의 표적 사이의 유사점은 그들의 공통적인 경험에 있습니다. 요나는 3일 밤낮을 바다 괴물 속에 들어 있었고(요나 2:1-2,6,10), 예수님께서는 3일을 ‘땅의 심장에’ 계실 것입니다. ‘땅의 심장’은 무덤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기적적인 표적을 구했으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한 ‘이 세대’가 반응에 실패했음을 입증하는 표적이 됩니다.

그리고 요나와 인자의 표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포함합니다(41). 요나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니느웨 백성이 회개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대는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그들이 회개했다면, 이스라엘의 ‘이 세대’는 마땅히 회개로 반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보다 더 큰 분의 심판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는 회개하지 않습니다(41). 장차 마지막 심판에 니느웨 사람들이일어나 이 세대를 비난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경험과 자신이 겪을 경험을 연결하시면서 메시아의 운명을 암시하고 유대인들의 실패를 강조하십니다.

 

➁ 남방 여왕의 반응(42)

표적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4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응하지 않는 문제를 남방 여왕의 이야기로 지적하십니다. 수바 여왕은 이방인인데도 멀리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왔습니다(열왕기상 10:1-13; 역대하 9:1-12). 솔로몬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왔으나 이 세대는 적절하게 반응하는 데 실패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고 지혜가 주는 쉼을 얻지 못합니다(11:25-30). 또한 우리는 스바 여왕이 유대인들의 새 왕을 만나기 위해 온 점을 고려할 때(2:1-12)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왕적 지위에 대해 관심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와 솔로몬의 지위는 각각 선지자와 왕입니다. 선지자와 왕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권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보다 더 큰 분으로서 더 큰 권위를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이야기에 덧붙여서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 곧 이방 지역에서 온 점을 들어 예수님의 ‘권위’에 반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배우려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여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천국의 지혜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고, 지혜가 주는 안식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과 남쪽 나라의 여왕이 그랬던 것보다 더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또한 말씀을 들을 후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악한 세대에 대한 비유(43-45)

예수님보다 더 분명하게 구원의 길을 선포할 이가 없습니다. 그분보다 더 지혜롭게 통치할 왕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고, 그분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거절하고서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선포해야 합니다.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3-45)

 

부정한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이 없는 곳을 지나며 쉴 곳을 원하지만 찾지 못합니다(43). 귀신은 ‘쉴 곳’, 즉 들어가서 괴롭힐 대상을 찾지만 실패합니다. 그래서 귀신은 나왔던 곳에 다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귀신이 와서 집에 비었고 청소되고 정돈된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은 자신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들을 더리고 와서 그곳에 들어가 거주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지막 상태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바유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구원 역사의 단계에서 예수님께서는 축사(逐邪)를 통해서 이스라엘, 구체적으로는 갈릴리 지역을 청소라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혜택을 잠시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사의 행위를 보고도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악한 세대는 예수님에게 표적을 요구하고(12:38)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임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이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처지에 놓이며, 더 악한 세력들에 둘러싸여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오늘도 비슷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목격하거나 하늘나라의 확장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맛만 보았을 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더 큰 재앙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현장을 본 사람은 서둘러 이런 일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46-50)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가족입니다. 가족은 이 세상에서 서로 책임을 감당하는 관계입니다. 믿음을 공유한 가족도 영원까지 이어지는 가족입니다.

 

46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46-50)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려고 찾아온 장면을 배경으로 합니다(46-47). 본문은 예수님과 가족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의 의미에 관한 내용입니다.

50절은 핵심을 제시하는 구절이며, 예수님의 가족을 당시의 사람들로 국한하지 않고 오고 오는 세대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11:27)를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로 확장하시며, 열 두 제자로 제한하지 않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를 가족으로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제자들의 아버지로 밝히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하늘 아버지의 의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의미입니다(3:15; 5:6,10,20; 6:1,33). 예수님께서는 이 뜻에 순종하는 모본을 보이셨습니다(26:42).

교회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제자 및 가족 공동체이며(6:10),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지가 심판의 기준입니다(7:21-23). 교회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순종하는 자녀의 삶을 본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십니다(5:16).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고 아버지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단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흘러넘쳐야 할 교회를 혈연이 지배할 때, 니느웨의 정죄는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세상이 증거로 삼는 은과 금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만을 증거로 삼고 사는 교회를 꿈꾸어 봅시다.

마태복음(12-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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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9-02)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Ⅱ

욥기 9장 17-35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 일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영과 자체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오직 하나님의 이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중보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어떤 법칙이나 원리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반성적 지혜의 일반론(1-16)을 17절 이하에서는 욥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욥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일(욥 1-2장)을 알지 못하는 욥에게 그 고난은 “까닭 없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더욱 고통스럽고 두렵습니다. 욥은 그 두려움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까닭 없는 고난에 대한 탄식(17-24)

때로는 사람이 매우 지혜롭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스스로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17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20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21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17-24)

 

1-16절은 반성적 지혜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1) 하나님의 절대주권(하나님의 자유)과 (2) 인간 인식의 한계. 욥은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의 틀이 아니라 반성적 지혜의 관점에서 자신의 고난을 바라봅니다. 그 고난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며, 그 고난의 이유를 한낱 피조물인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고난(17-19)

 

하나님께서 산들을 “진노하심”으로 무너뜨리시는 것처럼(5) 욥에게 임하는 고통도 “폭풍”과 같은 것입니다(17). 하나님께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움을 채우셨다고 고백합니다(18). 폭풍이 왜 부는지 그리고 언제 부는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이며 “셀 수 없는 기이한 일”(10)인 것처럼 욥이 당하는 고난 역시 “까닭 없는”,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17). 여기서 “폭풍”은 폭풍우(storm)나 회오리바람(whirlwind)같이 강하고 거센 바람을 가리킵니다. 일상적인 바람과는 다르고, 또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는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을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왕하 2:1; 사 29:6;40:24;41:16; 시 107:29; 겔 1:4; 슥 9:14). ‘니플라오트’의 두 가지 의미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가 강하고 거센 바람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이러한 바람을 잠잠케 하는 능력(시 107:29)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신적 능력을 나타냅니다(마 4:35-41; 막 8:23-27). 힘과 능력에 있어서 아무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으며 그 분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19; 참조. 3,12절). 19b절은 ‘누가 (그분의) 판단 기준에 맞겠는가’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그분의 판단 기준에 욥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부합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의 전형적인 신학적 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다르다는 20절의 진술과 연결됩니다.

 

(2)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20-24)

 

욥은 설령 자신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자신이 당한 처참한 곤경을 보면 자신은 입으로 스스로를 정죄할 수밖에 없으며, 설령 자신이 온전할지라도 내 입이 자신을 정죄할 것이라고 염려합니다(20).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의로울 수 없다는 것(4:17; 9:2)은 곧 인간의 입장에서 최대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다고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8; 2:3)로 여기시지만, 하늘 아래 있는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시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를 의롭고 온전하다고 평가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다르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20).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의인/선인/지혜자(“온전한 자”)도 악인과 마찬가지로 죽는다(22)는 것은 전도서 2:14-16에서도 언급됩니다(“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6). 의인/선인/지혜자에게는 생명이, 악인에게는 멸망(죽음)이 임한다는 이분법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객관적 사실에 무너집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누구나 추울 수 있고 누구나 끊어질 수 있고 누구나 패할 수 있다는 전도자의 말처럼(전 4:10-12), 갑작스레 닥치는 재난은 “무죄한 자”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습니다(23). 23절의 “무죄한 자”에게 “갑자기 재난이 닥쳐”라는 표현은 1:15-19에서 묘사된 재앙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24a절을 개역개정이 번역한 것처럼 ‘현실에 대한 관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악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고 공정한 재판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욥이 경험하는 현실일 수 있습니다. 23절의 조건문을 이끄는 접속사 ‘임’이 24절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온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판결해야 할 재판관들이 하나같이 눈이 가려져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24)이고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고백(25-35)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을 여전히 돌보고 계셨음을 알고 있지만, 욥은 이를 몰랐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상황까지 이르는지를 너무나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짧고 헛된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향해가 의미 있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지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복락이어야만 합니다.

 

25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25-35)

 

25-27절의 표현은 전도서를 연상케 합니다. 인간의 삶이 매우 짧아서 인간 경험의 한계 안에서는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진술은 전도서의 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선)이라고 가르칩니다(전 3:12; 8:15; 9:9). 전도서는 한 인간의 삶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시간과 전체 세계라는 공간을 논의의 배경으로 삼는 초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집중하는 지극히 미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도서와 같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욥은 마치 전도자의 조언과 같은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전 9:8)와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전 11:10)와 같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27)고 다짐을 하여도 그럴 수 없습니다. 고통과 두려움 때문입니다(28). 욥은 전도자처럼 어느 정도 초월적이고 초탈한 듯한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가 고난을 다 겪고 난 후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 고난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위로를 준다면, 욥기는 지금 현재 깊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합니다.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아프고 무섭고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결여나 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욥은 고통스럽다고 말하고(28) 자신도 자신의 모습이 끔찍하다고 말합니다(31). 욥은 당당히 ‘나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신이 그럴 수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35). 고난과 고통, 두려움 앞에서 솔직한 것은 자기 자신한테 솔직한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것입니다. 아것을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척,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것이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욥기는 말해줍니다. 자신의 괴로움에 솔직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두렵지 않게 해달라고, 그분의 “막대기”와 “위엄”이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34),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합니다(15). 27절의 ‘옴리’(나의 말) 다음에 이어지는 세 동사는 모두 1인칭 청유형(cohortative)으로 되어 있습니다. 화자의 바람과 소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개역개정은 존대어로 번역하면서 27절 이하를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으로 해석합니다. 욥의 간청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이 반드시 하나님의 어떤 행동을 촉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니 욥에게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복을 주실 수도 있고 화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에서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누가 옳은지를 따질 수 없습니다(32-33). 규범적 지혜가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니(“경외”) 그분의 뜻을 알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칠 때, 반성적 지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실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은 더욱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지금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 성령과 동행하며 온전하고 거룩한 푯대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기억하며 비록 지치고 힘들지라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의지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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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4)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31-37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은 제대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19-2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변에 일어난 일들이 주의 성령의 역사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의 영이 하신 일인데도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과 다르다고 거절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또 모든 영적인 현상을 성령께서 하신 것으로 추종한 것도 안 됩니다.

 

  •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축사 사역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논평입니다.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결과가 다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31-32)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마귀의 일로 취급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도적인 모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마귀의 일로 선언했으니, ‘자신이 걸터앉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스스로 사함 받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축사(逐邪) 행위를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 행위를 신성모독이라고 평가하십니다(31).

모든 죄와 신성모독은 용서되지만,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용서되지 않습니다. 죄 용서는 예수님께서 행하러 오신 목적인데도 불구하고(9:2,3,5,6,8), 성령을 대항한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32절은 31절의 의미를 더욱 강조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가리키는 인자에 대해 반대하더라도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성령에 대항하는 자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에서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32). ‘이 시대나 오는 시대’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인자가 성령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인자를 모독하는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즉 인자의 지상 사역으로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자를 거부하는 죄는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부하는 것은 진리를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역과 주장을 거부하는/모독하는 죄는 성령을 거부하는 죄로 발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탄의 나라를 궤멸하는 역사적 현장에 있으며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악의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이 나라를 부정합니다. 12:28과 연결해 보면, 축사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한 사역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 전체를 반대하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받는 기회를 얻지 못하므로 구원의 혜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계획에서(1:21; 26:28) 성령의 역할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 만큼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음(33-35)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말과 글은 자신의 존재의 증거물들입니다.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이의 입에서 선한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내면의 썩은 것들을 말로 토해냈습니다. 상투적인 자기 종교 언어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3-35)

 

예수님께서는 30-31절의 내용을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나무가 좋으면 그 나무의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나무의 열매도 나쁘다는 사실을 언급하십니다. 이 내용은 일반 상식이며 지혜 문헌의 가르침입니다(시락서 27:6). 1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가장 좋은 나무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악하거나 죄 용서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정체는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자신의 실제 행위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강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위를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 라고 비난한 모습은 그들이 나쁜 나무임을 드러낸 증거입니다(7:16-19).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지만 성령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열매입니다. 예수와 그의 사역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나쁜 나무임을 증명하며, 나쁜 나무인 바리새인들이 맺은 나쁜 열매는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인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손들아’라며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일이라고 비웃은 그들이야말로 ‘사탄’ 또는 ‘마귀’를 상징하는 뱀의 후손들임을 일깨우십니다. 이들의 운명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23:33), ‘독사’로 번역하는 ‘에키드나’는 독이 있는 뱀을 가리킵니다. 독사의 특징은 ‘독’이기에, 독사는 내뿜는 독으로 상대방을 마비시키고 죽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악한 독으로 예수님을 공격해서 죽이려고 하며, 이런 특징은 35절에서 ‘악한 것’을 낸다는 그림과 연결됩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파괴하는 말을 내뱉는 것은 그 정체가 독사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들은 악하기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34절 후반절을 직역하면 ‘입이 마음에서 넘쳐나는 것을 말한다.’입니다. ‘넘침’(περίσσευμα)은 신약에서 이곳과 마가복음 8:8; 누가복음 6:45; 고린도후서 8:14에서 사용됩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5:8).

마음, 곧 사람의 중심에 가득 찬 것이 넘쳐 날 때 열려서 입을 통해서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자마다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이런 갱신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35절에도 비슷한 논리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선한 보고에서 선한 것 들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들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쌓여 있는 선의 창고에서 선한 말이 쌓여 있는 악의 창고에서 악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한 창고가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면, 선한 보물을 내는 선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35절과 13:52은 동일한 어록일 가능성이 크며, 서기관인 제자 또는 마태 자신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έκ του θησαυρου)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선한 보물을 가진 자로서 선한 것들을 냅니다.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는 사람은 열매 없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모습으로 종교 생활을 한다고 해도 종의 회복하는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열매는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산상설교에서 이 행위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의 실제 모습은 특히 언어생활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반드시 뒤따릅니다.

 

무익한 말에 대한 결과(36-37)

심판의 근는 우리의 말입니다. 말이 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을 심판합니다. 자신의 말로 구원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말의 값은 곧 존재 값입니다. 무심코 한 모든 말들의 값을 톡톡히 치를 것입니다.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36-37절은 31-37절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말과 관련된 일반적 인 원리를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내뱉은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해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36). 아르고스(άργός)는 ‘나태한’, ‘고용되지 않은’의 뜻인데, 쓸데없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적으로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쓸데없고 무익한 말을 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무익한 말은 산상설교에 나온 열매가 없는 행위(7:15-20)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나무에서 그들의 무익한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나쁜 나무가 심판을 받는 것처럼, 나쁜 나무와 같은 사람이 내뱉은 말도 결산을 해야 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회계하는 일은 청지기가 주인이 맡긴 사업에 대해 언젠가 실행해야 하는 책무입니다. 자신이 내뱉은 무익한 말에 대해 반드시 회계를 해야 할 것이라는 원리에 따라서, 예수님의 치유와 축귀 사역을 사탄의 힘으로 한 것이 라고 평가한 그들의 말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37).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나서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말한 사람의 운명은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정죄를 받는 것으로 갈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경고를 ‘너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36-37절의 경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제한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가장 쉬운 평가 수단입니다. 독설로 상처를 입히고 회개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이런 악한 소리를 개선의 여지없이 지속적으로 내뱉는 사람은 심각하게 자신의 정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독한 언어가 그 사람의 특징이라면 나쁜 나무, 악이 쌓인 창고일 수 있습니다.


갈수록 말과 글이 힘겹습니다. 존재의 가벼움이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교회의 속 빈 언어가 오늘날 교회의 속내를 보여줍니다. 속이 꽉 차 있지 못하니 말이 풍요로울 리 없습니다. 기형도 시인도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존재와 삶을 먼저 다듬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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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4-01)

 

 


모세의 마지막 사역

신명기 34장 1-12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롭게 창조된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우 시작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백성으로,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 주인을 모시고 살기 위해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은 죽음입니다. 모세가 죽어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 시대의 죽음, 엣 시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 본 장은 신명기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의 마지막 장입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출애굽 시대’라는 한 시대의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다른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나안 동편까지는 ‘모세의 시대’라면, 이후부터는 ‘여호수아 시대’입니다. 모세의 안수를 받은 여호수아는 지혜로 충만해졌고 백성은 그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 이후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가는 길(1-8)

죽음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불행해 보입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계가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사명자의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그 사명이 다 하는 날, 하나님께서 모세처럼 수고의 눈물을 닥아 주실 것입니다.

 

1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1-8)

 

⑴ 약속의 땅을 바라본 모세(1-4)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이제 120세의 나이로 가나안 땅 동편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요단강 동편 산인 느보 산 정상에서 비스가 산꼭대기에 세우셨습니다(1). 특별히 34:1-6은 신명기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1:1-3:27; 32:48-52: 민수기 27:12-14).

34장은 긴 화자의 설명이 짧은 여호와의 명령(4)을 압도합니다. 이제 모든 수고와 노력들 그리고 모든 교훈과 노래들과 축복을 진술한 모세는 희망과 절망의 장소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미 모세는 짜인 군사적 리더십과 종교적 리더십의 퇴임사를 모두 낭독한 후입니다. 비록 모세는 오래전에 약속받았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는 못하지만, 그가 들어가고자 애쓴 지경들을 마치 아브라함처럼 높은 산에 올라가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약속의 땅에 대한 조망(2-3)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파노라마적 시야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사학적 측면에서 과장법일 수 있고, 계시적인 측면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위로 그 전체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북쪽을 향하여 자신의 시야를 열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지평선을 따라 서쪽으로 그리고는 남쪽으로 이동하며 그 후에는 다시 사해 계곡을 구성하는 데 ‘리프트 밸리(Great Lift Valley)’를 지나 시작점으로 돌아갑니다. 길르앗 지파의 영토는 느보산의 북쪽이며 요단강의 동쪽으로 이릅니다. 여기서 언급된 단은 단지파가 사사 시대에 라이스를 정복하고 새로 붙인 지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4:14에서 말하는 단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납달리 지파의 영토는 긴네렛 너며 북서쪽에 이르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들의 영토는 요단강의 서쪽 산지에 위치합니다. 유다의 영토는 요단강과 사해 너머의 산지에 위치합니다. ‘평지’는 사해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지만 소알, 즉 사해의 남쪽 끝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사해의 양쪽 끝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신명기의 독자가 모세가 행한 이상한 은퇴사와 그의 초자연적인 죽음을 오해할까 봐 그것을 교정하려는 차원에서 ‘모세가 죽을 때 120세였지만,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말을 첨언합니다. 사실상 모세는 7절이 말해주듯이 기력이 쇠하여 이스라엘의 리더십에서 은퇴한 자가 아니고, 자신의 건강과는 상관없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은퇴해야 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권세와 특권을 내야놓았습니다.

 

⑵ 모세의 임종과 장례(5-8)

 

모세는 120세에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눈을 감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곳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행해진 곳이며, 이스라엘이 시혼과 옥과의 싸움에서 승전한 곳입니다(3:29; 4:46-49). 이 지역은 모세에게 실패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장소입니다. 야곱은 자식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지만 모세는 여호와의 인도로 홀로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 그의 육신이 매장되어있는 무덤은 잊혔습니다. 모세가 죽자 백성들은 아론의 장례처럼 30일을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었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 승계(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백성을 위해 언제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일꾼들을 예비하십니다. 지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그로 인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훌륭한 일꾼은 죽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더욱 훌륭하게 이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9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9)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모세의 죽음과 함께 여호수아에 대한 지도력의 승계 언급은 민수기 27:12-23에서도 나타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사망 직후 보고되는 이 임명식이 집행됩니다. 민수기의 임명식에 잘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염려는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기원(祈願)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신명기의 결론뿐만 아니라 모세오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즉 이것이 모세의 마지막 언급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모든 준비의 대단원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9절에서 화자는 민수기 27:18-23처럼 여호수아의 승계를 한 번 더 언급합니다. 31장에서는 여호수아의 임명에 대한 (백성 앞에서의 제시와 위임의 요소들을 강조했다면, 34장에서는 모세가 안수한 결과들(지혜의 영이 충만 백성들의 순종)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절차들은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신정적 통치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모세와 같은 이가 없어도 이제 백성들 앞에는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그는 국가적 리더십의 위임으로, 모세에게 안수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혜의 영이 충만한 자입니다. 이와 같은 안수식은 전임자와의 동일시, 혹은 대체 직책의 임명 혹은 시작, 권위와 권능의 전가와 같은 상징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민수기 27:18에서 ‘영이 이미 내재하는 여호수아에 대한 안수’라는 묘사와 모순된다는 견해도 있으나, 임직 후 ‘지혜의 영’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을 직접 정복하고 분배하는 국가적 과제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게다가 신명기는 민수기 27:20의 여호와의 명령인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말씀의 성취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라는 낙관적인 묘사로 종결됩니다. 이것은 신명기 화자의 ‘오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와 같은 이가 없다는 말로 인해서 비관적인 결론으로 볼 사람도 있지만, 화자의 견해와 같이 그 점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낙관적 묘사는 신약의 사도행전의 말미(28:30-31)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명기 내부의 미래에 대한 우울한 제시와는 대조됩니다.

 

모세에 대한 평가(10-12)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의 사후(事後)에 역사적 평가를 기대한다면 지금 이 시대의 국민의 뜻을 이해하고 국민의 바라는 바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0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화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10-12)

 

모세라는 인물에 대한 짧고 강렬한 평가가 신명기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본문을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모세에 관한 일종의 ‘문학적 묘비명’, 혹은 ‘부고(訃告)’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전무후무한 지도자였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모세는 지금까지 40년간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지도자였습니다.

4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비교 불가능성이 대조된 바 있었는데, 이제는 여호와와 제시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시던 자며,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애굽 땅에서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이스라엘 앞에서 행한 유일한 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후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이제 더 이상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서 직접 행하지 못하고 엘르아살 제사장 앞에 서며 엘로아살이 우림의 판결을 통하여 여호와의 뜻을 물어야 했습니다(민수기 27:21). 그러므로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백성에게 대언하는 기능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의 미래적 등장에 대한 언급(18:15-22)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뤄드린 지도자이십니다.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순종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 끝에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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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9-01)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욥기 9장 1-16절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이는 인간이 죄인임을 전재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 빌닷의 첫 번째 발언(8장)에 대한 욥의 응답의 전반부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욥의 죽은 자녀들을 저주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빌닷의 말에 대해 욥은 저항합니다. 여기에서는 반성적 지혜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다루어집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생활 영역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며, 둘째, 그렇게 커다란 창조주를 한낱 피조물인 인간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주장 일부에 대한 동의(1-4)

욥의 탄식은 우리가 현실 신앙생활에서 가끔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 눈앞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이런 현실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1-4)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전통적인 지혜(규범적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지혜의 화신이었습니다(욥 1:1-5). 그러나 욥의 신앙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 원리를 초월해서 주권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즉, 반성적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욥 1:21;2:10). 그는 9-10장에서 친구들의 논리를 대응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데 그분이 침묵하고 계시다고 항의합니다. 심지어 초하나님 존재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심판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신다면 감히 하나님께 맞설 수 없는 존재인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견주어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잘 알고 있습니다(2). 사실 이 말은 빌닷의 말이 아니라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 4:17).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진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지혜자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법을 예측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바스나 빌닷 등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지혜와 힘은 하나님께 있고(4)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에 대해 어느 인간도 제대로 알 수 없다(3)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주장입니다. 욥의 항변은 ‘왜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반성적 지혜 : 하나님의 크심과 절대주권(5-9)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이기거나 설득하여 마음을 바꾸시게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행하시는 이유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욥은 이런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대적이 되시자 찬양의 내용은 오히려 욥에게 크나큰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5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5-9)

 

이어서 욥은 하나님의 크심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분의 운행을 어떤 법칙으로 설명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진 등의 천재지변으로 산이 무너지고 옮겨지는 현상은 인간이 조종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관용구입니다(시 18:7; 29:8; 97:7; 나 1:5; 합 3:6 등). 시편의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시 18:7)라는 구절은 5절과 유사합니다. 계속되는 욥의 말에 언급되는 창조세계는 “땅”과 “그 기둥들”(6), “해”와 “별들”(7), “하늘”과 “바다”(8), 그리고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9)입니다. 5장에서 엘리바스가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는”(10) 등 농사와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나, 8장에서 빌닷이 갈대나 거미줄, 가지가 돌무더기 틈에 뿌리를 내리는 현상 등에 빗대어 하나님의 운행을 설명하는 것(11-18)과는 스케일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의 생활 반경 안에서 주로 관찰되는 것을 통해 삶의 법칙(규범)을 끌어내고 그것을 인간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런 면에서 규범적 지혜는 ‘인간중심적’인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성적 지혜는 신학적 사유의 지평을 훨씬 더 크게 가져 갑니다. 인간의 삶의 영역 바깥의 세계마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성적 지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를 규범적 지혜에서보다 더욱 크게 벌리고 차이를 극대화합니다. 스케일을 확장하면서 질문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산에 임한 것은 산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기둥들을 흔드시고(6)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거나 별들을 가둬두는 것이(7) 땅이나 해, 별의 무지나 악 때문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지만,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 또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에 가둬놓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원리를 창조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반성적 지혜 : 인간의 한계(10-16)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이 시간 내 앞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0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11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10-16)

 

10절은 5-9절과 11-16절을 연결하는 경첩(hinge)입니다. 그렇게 거대한 창조주를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욥의 고백은 욥기를 관통하는 주제어 중 하나인 ‘니플라오트’로 연결됩니다. 크신 하나님의 움직임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셀 수 없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엘리바스입니다. 5:9과 9:10의 히브리어 원문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엘리바스는 이 구절을 “분노”와 “미련함”에서 벗어나도록, 즉 ‘지혜자’가 되라고 욥을 설득하는 것에 사용하는 반면, 욥은 그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으며, 복을 주실 수도 화를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과 바다와 별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닌 것처럼, 욥에게 임한 불행 역시 죄나 무지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에 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규범적 지혜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물론 지혜에 다다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지혜와 무지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들을 유혹하는 악의 손길(잠언의 ‘음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지혜를 추구해야 하고 부모 세대와 조상들에게서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모가 자식 세대에게 지혜를 전수해주는 형식을 취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잠언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엇이 옳고(선) 무엇이 그른지(악),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무지인지 아주 친절하게 반복적으로 알려줍니다. 개미를 통해 부지런함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잠 6:6-7; 30:25), 피조세계의 현상들도 우리에게 어떠한 규범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의 기본적인 입장은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친절한 분으로 묘사되지 않고 저 천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입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 땅의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옆을 지나간다 해도 내가 알 수 없으며(11),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인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12). “라합을 돕는 자들”과 같은 천상적 존재들마저 굴복시키는 분이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인간 따위가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인 엘리바스나 빌닷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는가? 너희는 인간이 아닌가? 욥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찮은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의 평가를 할 수 없고, 동시에 그 뜻을 돌이켜달라는 요청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14-15).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판단/평가에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15). ‘불쌍히 여기다’라는 동사 ‘하난’은 1:9와 2:3의 “까닭 없이”와 동일한 어근을 가집니다. 한 인간의 올바름(쩨데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미쉬파뜨)에 있어서, 행동한 그대로 보응 받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벗어나 하나님의 “까닭 없는”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욥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여전히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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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3-02)

 


모세의 축복 : 지파들의 축복⑵

신명기 33장 18-29절


정체성은 성도의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결정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 공동체인지 망각하는 순간, 지금 서 있어야 하는 곳에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이제 낯선 땅 가나안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행복한 백성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고 수용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과 목표를 결정해 줄 것입니다.

 

지파들을 향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은 나머지 지파들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스불론과 잇사갈, 갓과 단, 그리고 납달리와 아셀입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레아가 낳은 아들들이고, 갓은 실바의 첫째 아들, 단은 빌하의 첫째 아들입니다. 납달리는 빌하의 둘째 아들이며, 아셀은 실바의 둘째 아들입니다. 이들의 순서는 어떤 일관된 원칙에 따른 배열은 아니나 대체로 태어난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1) 지파들의 축복 : 스불론와 잇사갈(18-19)

 

18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18-19)

 

표제는 스불론 지파에게만 행한 모세의 축복이지만, 그 내용은 스불론과 잇사갈 두 부족을 위한 것입니다. 레아의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입니다(창세기 30:20).

가나안에서 잇사갈의 땅은 서편 므낫세의 북쪽에 있고, 스불론의 땅은 남쪽으로 잇사갈을 두면서 북쪽으로 아셀과 납달리 사이에 있다 모세는 두 지파에게 즐거워하라고 요청합니다. 스불론지파는 장막에서 나감으로, 잇사갈 지파는 장막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이 단락에서 나오는 ‘즐거워하다’와 ‘제사하다’라는 말은 각각 잇사갈과 스불론이라는 이름과 언어유희를 이룬다고 보기도 합니다. 집안과 밖에 대한 언급은 주로 일상적인 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은 모든 영역에서 복을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야곱의 축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스불론 지파의 외향성과 잇사갈 지파의 내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축복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창 49:13-15) 바다와 관련된 풍성한 복은 하나의 가능한 독법으로 이방인들도(혹은 이스라엘 사람이) 산에 모여 하나님께 의의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모세의 기원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단락은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에게 땅과 바다 즉 모든 자원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2) 지파들의 축복 : 갓(20-21)

 

20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21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20-21)

 

모세는 갓 지파가 넓은 땅을 갖도록 축복합니다(신명기 3:12-16). 물론 이 부분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도록 기원한다거나 ‘그들을 돕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는 식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야곱과 모세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호전성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갓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행운’와 연관된다는 점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자처럼 매복하고 먹잇감의 다리와 머리를 찢을 것이며 최상의 몫(약속의 땅)을 스스로 준비하여 대장의 몫을 보존합니다.

여기서 최상의 몫은 므낫세 반지파 르우벤 지파와 함께 받았던 요단 동편의 땅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르우벤 지파는 요단 동편의 남쪽을 얻었고 갓 지파는 중앙을,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는 북쪽을 얻었습니다.

갓이 얻은 분깃은 가장 윤택한 곳이다 법을 세운 자(메호퀘크)는 모세를 가리키며, 그의 분깃은 요단 동편에 있는 그의 매장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는 전쟁을 시작할 목적으로 백성(혹은 군대)의 두령들에게 옵니다. 그는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며 이스라엘과 함께 그의 심판을 수행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미 얻은 영토와 그후에도 수행해야 할 가나안 정복 사명에 따른 전과(戰果)를 예견하는 것이거나 통치자의 정의 수행 기능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지파들의 축복 : 단(22)

 

22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22)

 

모세는 갓 지파처럼 단 지파를 사자 비유와 연관시킵니다. ‘사자 새끼’라는 표현은 원래 야곱의 축복에서 유다 지파에게 적용되었습니다(창세기 49:9). 그러나 여기에서 단 지파는 (다른 독법에 따라서 ‘바산’이라는 지연이 아니라) 독사로부터 도망쳐 나온 새끼 사자라고 묘사됩니다. 정통적인 입장에서는 바산에서 나왔다는 표현을 단 지파의 ‘라이스 이주’(사사기 18:27-28)와 연관하기도 합니다. ‘새끼 사자’란 아직 어린 미숙함이 남아있지만, 조만간 용맹과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탓에 독사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야곱의 축복에서는 길에 있어서 지나가는 말을 공격하여 말 탄 자를 뒤로 떨어뜨리는 뱀과 같은 존재로 묘사합니다(창세기 49:17).

 

 

(4) 지파들의 축복 : 납달리(23)

 

23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23)

 

야곱의 첩 빌하의 아들인 납달리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인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은 야곱의 축복(창세기 49:21)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납달리 지파와 아셀 지파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그들의 분깃 북쪽 갈릴리와 관련된 여호와의 복이 가득하며, 남방과 서방(갈릴리 호수)을 얻을 것입니다. ‘(바다가 있는) 서쪽과 남쪽’이라는 표현을 호수의 서쪽 지역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암사슴으로 묘사합니다(창세기 49:21).

 

(5) 지파들의 축복 : 아셀(24-25)

 

24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24-25)

 

모세는 야곱의 첩 실바의 아들인 아셀 지파의 복이 가장 클 것이며, 다른 지파들에게도 사랑받을 것을 기도합니다. ‘아셀’이라는 말 자체가 행복을 의미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이다’라는 모세의 축복은 특정적으로는 그들이 거할 장소(갈릴리의 고원지대)의 특산물인 올리브 나무의 소산(기름)이 충분한 결실을 얻을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또 결실이 많은 지역을 소유할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유사하게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신명기 32:13: 욥기 29:6). 문빗장은 강한 요새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들이 평생 안전하고 안락할 것을 말해줍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지파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는 물질적 번영과 대적들로부터 안전보장에 대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그것을 왕에게 진상(珍賞)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창세기 49:20).

 

 

결론(26-29)

 

26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8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6-29)

 

서론처럼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전사이며 보호자)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탁월성과 특권이 재진술됩니다(사실 26-27절의 본문은 난해하다).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도다.’ 이스라엘이 탁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하늘들을 병거(兵車) 삼아 타시고(참조. 사무엘하 22:11; 시편 18:10: 68:33: 104:3; 이사야 19:1; 에스겔 1장: 하박국 3:8),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거주처인 하늘로부터 영원하신 손을 뻗으사 이스라엘 앞에서 원수를 몰아내시고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풍요의 땅에 안착케 하시는 분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풍요로운 약속의 땅에 대한 묘사(‘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는 앞서 언급된 요셉에 대한 축복(하늘의 보물인 이슬, 13절)과 야곱이 이삭에게 받은 축복(하늘의 이슬, 창 27:28)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이 복의 언급은 28장의 복 목록을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풍요로운 땅에 홀로 안전하게 거할 것이며, 야곱의 샘은 신적 축복의 상징들인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있고, 이제 그의 하늘은 (축복과 번영을 위한) 이슬을 내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그들은 여호와로 인해 구속 받은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방패이며 영광의 칼이십니다. 그러니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굴복할 것이며, 그들의 등(‘높은 곳들’)을 밟아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신 전사 여호와의 보호를 바라는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지파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말씀대로 성취하시고, 돌보시고, 붙드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누가 어떤 기준을 들어대면서 우리를 다른 식으로 정의한다 해도 우리는 단호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자신의 정체를 규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행복한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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