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12-01)
소발에 대한 욥의 항변
욥기 12장 1-25절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현실에서는 때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기대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 욥의 말이 많다는 것을 비판하는 소발에 저항이라도 하듯 욥은 지금까지보다 더 길게 진술합니다. 12-14장까지 세 장이나 연속 말을 이어갑니다. 위의 세 장은 수신자에 따라 구분하면 12:1-13:19 친구들을 향한 변론의 한 묶음으로, 13:20-14:22 하나님을 향한 탄식으로 양분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에 저항하면서 욥은 반성적 지혜의 주제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욥의 비판(1-6)
하나님께서는 욥처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이런 어려움(심판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어려움)을 주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선을 이루십니다(롬 8:28). 하지만 과정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마냥 복과 평안만을 주시지 않고 시련도 주셔서 그들이 인내를 알아 더 온전한 자가 되길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5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6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1-6)
욥은 소발의 말에 반박하는 말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자기들 외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고 그들이 죽으면 세상의 지혜도 사라질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도 인과응보의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위문하고 위로하려”(2:11) 찾아온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자 욥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듯합니다. 욥은 세 친구들이 규범적 지혜를 자신들만 소유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분노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죽으면 지혜가 함께 죽는 그런 사람들이구나.’ 그러나 욥은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을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자신이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의롭고 온전한 자로 인정받은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5절을 다시 번역하면 ‘인생을 편안하게 산 자네들의 지혜는 완전히 부서진 사람에게 모욕을 주며 더 걸을 수 없는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네’ 정도의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의 “평안한”은 ‘샤아난’의 번역인데, 긍정적으로는 평안하고 행복한 것을 가리키고, 부정적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안일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교만’의 평행어로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왕하 19:28; 시 123:4; 사 32:9, 11;37:29; 암 6:1; 슥 1:15). 그들은 재앙을 멸시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조언은 자신처럼 극심한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라고 평가합니다. “재앙을 멸시하나”는 직역하면 ‘폐허에 경멸을’입니다. 여기서 ‘폐허’는 욥 자신을, ‘경멸’은 친구들의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다면, 친구들의 말은 완전히 망가진 사람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폭력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셋째,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로 번역된 문장을 직역하면 ‘저는 발에 때림을’입니다. 똑바로 걷지 못하는 것은 욥의 상태를 의미하고, ‘때림/치는 것’(나콘)은 친구들의 발언을 의미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이미 넘어진 자를 때려서 또 넘어뜨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6절의 “강도”로 번역된 ‘쇼데딤’은 ‘파괴하는 사람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5절에 묘사된 친구들의 행위가 폭력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줍니다.
6절에서 욥은 규범적 지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들의 경우에 적용합니다. 친구들의 행위는 욥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인과응보의 원리가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면 세 친구들 역시 악한 행위에 대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친구들의 집안에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과응보의 원칙이 발동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 원리가 적용되지 않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유)을 강조합니다.
지식의 보편성(7-11)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만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욥과 같이 온전한 사람도 이 시간을 흔들림 없이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기만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지나야 하는지 숙제입니다.
7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7-11)
여기서는 하나님의 임의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길흉화복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욥은 7-8절에서 땅의 짐승들과 공증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에게 물어보라고 요청합니다. 모든 짐승과 새들, 땅과 바다의 고기를 이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고난과 형통 분배, 길흉화복 처분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라”(9). 욥의 친구들이 자연세계를 인용할 때는 자연 현상 속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이끌어 내거나(8:11-12), 의인과 악인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비유로 표현할 때(4:10-11; 5:23, 26; 8:14-19)입니다. 즉,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연현상들이 예시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욥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과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6) 창조세계에게 물어보면 대답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체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하늘과 바다를 예시로 든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나올 하나님의 언설이 창조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합니다(38-41장).
7-10절은 창조세계로부터 배우라고 말하고, 11절은 규범적 지혜라는 신학적 이론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지 말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반성적 지혜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6)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는”(4) 현실이 있음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12-25)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시간에 악인들은 득세하고 의인들은 핍절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의 실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려고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공의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12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13○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15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6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7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18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9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20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21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22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23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24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25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12-25)
12절은 ‘늙음은 곧 지혜’라는 규범적 지혜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욥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13절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에 대한 발언과 상충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11절의 의문문이 연장되는 것으로 해석하기를 제안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진다고? 아니다. 지혜와 명철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적절합니다.
욥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개념을 공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친구들은 하나님의 주권 개념을 인과응보의 원리와 연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리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이고, 이 원리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모두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원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의인에게 상을 주고 악인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정의이자 공의입니다. 이 원리가 지켜져야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이라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주권 개념을 하나님의 자유와 연결시킵니다: “그가 헐으신 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14). 16절에서는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 자가 다 하나님께 속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둘 다 하나님의 심판 집행에 이용된다는 뜻입니다.
17-23절은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 처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지휘부를 무력화시키십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말들은 모두 규범적 지혜의 선악 개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모사와 재판장(17), 왕들(18), 제사장들과 권력이 있는 자(19), 충성된 사람들과 늙은 자들(20), 귀인들과 강한 자(21)는 규범적 지혜의 틀 안에서 지극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의인이자 지혜자들을 일컫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인이자 지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는 부정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벌거벗겨 끌려가고 넘어뜨려지고 무장해제 되며 지혜를 빼앗겨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절은 지휘부가 해체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복기하고, 21절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충성된 자들의 의견이 무시당하고 늙은 자들이 판단력과 총명을 상실하자 나라의 기둥들로 보였던 귀인들이 멸시를 당하고 강한 자의 띠도 풀어져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은밀한 것들을 밝히 드러내시며 한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한 죽음의 그늘(세력)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셔서 온 세상이 다 알게 하십니다(22).
23-25절은 한 나라의 멸망이 어떻게 연쇄적인 국제질서 변동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와 민족을 크고 널리 퍼지게 하실 수도 있으며 반대로 멸망시키거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23). 규범적 지혜에 따르면 의와 지혜와 선함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만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그들에게서 총명을 빼앗아 어두운 밤길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24-25). 욥의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른 사람이 처한 현실을 함부로 해석하고 조언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 태도입니다. 조언하고 가르치려 들기보다 슬픔을 당한 사람과는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는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훈계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공감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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