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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01)

 


천국에 합당한 사람들을 가르친 예수님

마태복음 22장 1-14절


천국은 곧잘 잔치의 즐거움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고 계십니다. 평화의 떡을 나누고 기쁨의 잔을 마시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천국의 축복과 풍성함을 강조합니다. 소와 살진 짐승으로 성대한 잔치를 여신 하나님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들을 설명합니다.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손님들을 초대합니다. 손님들이 모두 급한 일을 핑계로 초대를 거부하자, 왕은 종들을 보내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받은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은 혼인 잔치를 즐기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혼인 잔치를 위한 손님 초대(1-10)

헛된 명예와 영광을 안겨주는 세상 연회에 기웃거리다가 메시아 잔치의 영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진지하게 이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 지금도 초대하십니다. 천국에 대한 복음이 전파될 때, 겸손히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1-10)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메시아 잔치를 거절한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은 정죄하십니다. 그들이 거절한 천국은 자격없다 여겼던 죄인과 이방인이 채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시작된 하늘나라는 혼인 잔치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1) 혼인 잔치에 초대한 왕(1-2)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이 겪은 상황과 같습니다(1-2).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왕과 왕자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그림입니다(호세아 1-3장; 예레미야 2:2-3;3:1-10; 에스겔 16:8-63). 혼인 잔치의 비유 외에도 마태복음에서 결혼의 이미지는 구원 역사의 마지막에 펼쳐질 장면을 위해 사용됩니다(25:1-3; 참조. 8:11-12; 9:15).

 

(2) 혼인 잔치에 참석을 거부(3-10)

 

왕은 혼인 잔치에 미리 초청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서 이제 오라고 했습니다(3). 하지만 그 초청된 사람들은 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다른 종들을 보내 다시 초청합니다(4). 왕은 ‘나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이 만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으며 모든 것이 준비됐으니 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결국, 세 번이나 초청을 받았는데도 그들은 참석을 거부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일과 사업이 왕의 초대보다 중요했습니다.

5절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초점을 맞춥니다.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원인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무관심과 하나님을 수단으로 사용한 이기심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나머지 사람들이 왕의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여버린 점입니다(6). 6절의 묘사는 악한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서 벌어진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21:34-39). 이는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이 배척을 당한 일들에 대한 묘사이며, 요한과 예수님의 죽음이 여기 포함됩니다(14:1-11; 27:27-31,35,39).

분노한 왕은 군대를 보내 종들을 살해한 자들을 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게 합니다(7). 도시를 불사른 왕은 종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다시 초청하게 합니다(8). 혼인 잔치는 준비됐고 시간은 급합니다. 왕은 이전에 초청받은 사람들 대신 다른 사람들을 찾도록 종들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큰길로 보냅니다.종들은 길거리로 나가서 그들이 찾는 모두를, 즉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모두 모았고,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10).

8-10절은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넘어서 보편적인 선교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초청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사거리에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며,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모이는 사람들입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3:9)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등장 이후부터 세례와 매춘부와 같은 사람들도 초청하십니다(9:10-13; 21:31-32).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면, 열방의 빛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의 목적에 집착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낸 종들을 핍박했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선교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감격적인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초대는 기쁨으로의 초대이고 절대적인 우선권을 갖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준비하신 초대를 거부하는 일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상응하는 대가가 지불될 것입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가 모두 초청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최후 심판까지 교회에는 의인들과 악인들이 섞여 있습니다(참조. 7:21-23; 18:15-20,23-35; 22:11-14; 25:31-46).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면 의인들과 악인들의 운명은 선명하게 갈립니다.

 

자격 없는 자에 대한 운명(11-14)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받습니다. 구원은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지지만. 천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를 믿고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1-14)

 

이제부터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납니다. 왕이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왔을 때, 그들 중에서 잔치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흰색 예복을 입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은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더구나 왕이 주체하는 혼인 잔치에 자격 없는 자들이 초대받은 것이므로 감사의 마음으로 예를 다해서 참석해야 했습니다.

 

왕은 ‘어떻게’라고 놀라움을 나타냅니다(12). ‘어떻게 예복도 없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느냐!’ 왕은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에게 ‘친구여!’라고 부릅니다(20:13; 26:50). 마태복음에 세 번 등장하는 ‘친구여!’는 모두 부정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20:13에서 주인은 수고한 자신을 역차별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는 품꾼에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라고 반응했습니다. 26:50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왕의 질문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합니다. 왕은 섬기는 일꾼들에게 그 사람을 결박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13). ‘바깥 어두운 데’는 종말의 잔치가 펼쳐질 밝은 장소와 대조됩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이곳은 지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청을 받았지만, 그들 중 적은 자들이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은 경고를 전하는 비유의 메시지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참조 7:13-14).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인과 악인이 섞인 교회는 종말에 충격적인 분리를 경험할 것이며, 예복음 입지 않은 자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예복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복은 행위 혹은 삶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세 개의 연속되는 비유(21:28-22:14)의 주제는 하나님의 새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순종하고(첫째 비유), 열매를 맺으며(둘째 비유), 예복을 입습니다(셋째 비유). 세 비유는 공통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삶의 열매로 존재를 입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표현은 선한 행위가 결여된 자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22:13; 8:12; 13:42,50; 24:51; 25:30). 예복이 행함을 의미한다고 해서 행위로 택함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복은 택함 받은 사람임을 입증하는 표시입니다. 예복을 준비한 사람은 초청하신 하나님의 뜻에 삶으로 반응한 참 신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행위가 구원을 증언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초대에 삶으로 응답하지 못한 사람의 최종 운명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복을 입은 여부로 출입이 결정되는 장면은 혼인 잔치가 열리기 전까지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의 두 비유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처럼(21:28-32; 21:33-43), 의인과 악인으로 혼합된 교회는 종말에 충격적인 분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왕이 기대한 삶과 열매에 따라 상과 형벌이 줍니다(13:42, 50; 24:51; 25:30; 참조 8:12; 13:42). 혼합된 교회를 향한 경고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라는 말씀에도 나타납니다(참조. 에스라서 7:47,50-51; 8:13).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22:12)은 최후 심판에서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참여할 수 있는 초대장을 받고 공동체의 삶을 즐긴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택함을 받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삶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종류의 활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이 경고를 심각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유는 하나님이 교회를 설립하신 목표를 알립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를 맺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삶을 상실한 채 헛된 확신으로 번영을 추구하는 모임은 진정한 교회와는 거리가 멉니다.


인간들의 반복되는 거절과 반역에도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자는 끝내 천국을 빼앗기고 열매 맺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받을 것입니다. 보이신 사랑에 합당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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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4)

 


악한 소작인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1장 33-46절


 

인류의 역사는 거절과 패역의 역사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의 역사이며 말씀에 대한 침묵의 역사였습니다. 인류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 의지가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사람을 만들어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생명 창조의 목적입니다. 다시 새롭게 사랑의 사람으로 창조하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 본문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세 가지 비유 중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소작인의 비유와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혈통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33-39)

세상에 대한 탐욕과 정욕은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욕망을 덜어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열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것을 귀하게 보고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으신 하나님의 신비를 믿어야 합니다.

 

33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33-39)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소득을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놓은 후에, 소작인들에게 임대하고 멀리 떠났습니다(33). 주인은 포도원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주 틀을 파고 망대를 지었습니다. 주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이윤을 받아오도록 중개자들을 보냈는데, 주인에게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관리인들이 소유권을 획득할 수도 있었습니다. 포도원을 소재로 하는 비유는 이사야 5:1-7의 포도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33절은 이사야 5:1-2과 비숫합니다. 포도원의 소유주인 하나님(이사야 5:2)은 정성을 다해 포도원을 가꾸고 최고의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 틀을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주인은 가장 좋은 포도 열매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들포도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파괴하기로 결정하십니다. 본문과 이사야 5장의 비유는 구성면에서 ‘기대’, ‘실망’, ‘심판’이라는 세 가지 공통되는 개념을 보여줍니다. 두 비유에는 불연속성도 있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죄가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공통적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정도로 자랐다고 판단한 주인은 열매를 받아오도록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34).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농부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 그들 중 한 명을 때리고, 다른 한 명을 죽이고, 또 다른 한 명을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을 때와 같이 죽음 중에서도 더 참혹한 경우를 뜻합니다(레위기 20:2; 24:14,16,23; 민수기 15:35; 신명기 13:10; 17:5; 21:21; 22:21,24). 그만큼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모욕적으로 대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들을 이전보다 더 많이 보냅니다(36). 헬라어 문장에서는 ‘다시’를 맨 앞에 배치해서 주인이 그들에게 주는 또 한 번의 기회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번에도 주인이 보낸 종들을 이전처럼 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개역개정에서 ‘후에’로 번역한 휘스테론(ϋστερον)은 32절에도 사용됐으며, 본문에서는 ‘최후에’ 또는 ‘마지막으로’를 뜻합니다(예, 22:27). 헬라어 문장에서 36절의 ‘다시’의 경우처럼 마태는 ‘마지막으로’를 맨 앞에 배치해서, 이번이 종들이 주인에게 합당하게 반용해야 할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인은 최종적으로 아들을 보내면서 자신의 분신을 보내니 당연히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기대와 달리 아들을 보고 상속자를 죽여서 유업, 곧 포도원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자고 결의합니다(38). 그래서 그들은 아들을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던져 죽였습니다(39).

 

예수의 비유 해석과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40-46)

인내에도 끝이 있습니다. 선택은 조건 없는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혈통보다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절이 예수님의 실패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처럼 예수님께서도 버림받겠지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여 참 나라와 참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입니다.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40-46)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전하고 나서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하겠는지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겠느냐?’는 이사야 5:5의 암시합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이사야 5:5). 청중은 패륜적인 죄를 지은 소작인들이 너무나 악한 사람들이므로 가장 비참하게 죽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청중의 반응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청중의 대답을 교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답처럼 대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핵심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십니다. 아들은 버림받지만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쓸모없다고 버림받은 돌이 건축물의 벽을 연결하고 기둥을 지탱하는, 반드시 필요한 모퉁잇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8:26에는 하나님의 신원하심이 나타나므로 버림받은 아들의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얻습니다. 예수는 버림받았고 사역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꼐서는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신원하실 것입니다. 부활한 아들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해 가도록 명령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더 많은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의 버림받음과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신 의미를 말씀하십니다(43-44),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43). 부활하신 아들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하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더 많은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새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은 두 아들의 비유에서 이미 충격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열매가 무엇인지를 직접 언급하지 않기에, 우리는 본문의 정황과 마태복음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열매를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은 하늘나라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나라라고 선언했지만(3:2,8,10), 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지는 열매의 이미지가 포함된 문맥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태도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특히 43절에서 열매는 복수형이고 열매들을 맺는다는 표현은 7:17-18에 나왔는데 좋은 열매는 산상설교를 통해 주어진 천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맺힙니다(20). 그러나 우리는 열매를 윤리적인 기준에서만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없고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에게는 있는 열매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제자의 열매는 구원 역사의 절정으로서 새 백성을 탄생하게 만든 예수와 반드시 연결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마지막 메신저로 왔기에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열매를 예수님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근거는 44-45절에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돌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 것인지, 즉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 것인지, 즉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응이 가져올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8:14-15과 다니엘 2:34-45을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게 반응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이제 돌이신 예수님께 부정적으로 반응한 자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이사야 8:14-15),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 제국들을 상징하는 신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유대 지도자들은 돌인 메시아를 죽였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이 메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다니엘 2:34-35, 44-45).

구원 역사의 절정은 돌로 표현된 예수님입니다. 예수께 반응하는 데 실패한 유대 지도자들과 달리 열매를 맺는 새로운 백성은 예수의 승리로 만들어졌고, 그 승리를 순종의 열매로 반영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정성껏 가꾸는 주인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새 백성으로서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참조. 에베소서 2:10).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예수께서 산상설교로 제시하신 내용을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새 백성에게 요구되는 열매는 예수님과 그의 생애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새 백성의 열매는 예수의 삶에 나타난 모습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 인정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예수의 버림받으심과 부활로 세워졌으므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열매도 예수의 고난과 관련됩니다. 번영을 추구해서 얻는 성공은 교회가 자랑할 열매가 아닙니다. 부와 사회적 지위, 곧 외적인 성공을 열매로 평가하기 쉬운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아름다운 열매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반복되는 거절과 반역에도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묵상할수록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자는 끝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열매 맺는 백성이 그 나라를 받을 것입니다. 보이신 사랑에 합당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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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3)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받는 예수님의 권세

마태복음 21장 23-32절


진리를 끝까지 잘 살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도자의 태도를 유지하다가도 제자로서 각오가 희미해지고, 어느 순간 현실과 타협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처럼 변질되지 않고 순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 본문은 성전 정화 사건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되묻는 질문(23-27), 종교 지도자들의 대답에 대한 비유와 해설(28-32)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자신을 연결해서 누가 하늘나라의 참 백성인지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세(23-27)

타락한 권력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나 일꾼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바른 영적인 지도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적용할 것인가 또한 문제입니다.

 

23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3-27)

 

앞 본문에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대단히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곁에는 안토니오 성이 있는데, 그 성에서 로마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유월절 기간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인구가 평상시보다 5배 정도 많았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독립기념일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출애굽과 같은 독립 사건이 일어나길 바랐기 때문에 로마에도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로마가 다스리는 땅 가운데 팔레스틴에는 유대인의 저항이 더 썼기 때문에 많은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1) 예수님의 권위를 믿는 종교지도자들(23)

 

청결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다시 들어가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했는지, 누가 이런 권위를 부여했는지 묻습니다(23). ‘이런 일들’은 성전을 정화한 행위(21:12,14)와 성전에서 가르친 일을 포함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성전의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대단히 불경한 행동이었으며, 특히 성전의 권력자들인 자신들의 이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따져 묻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평상시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과 말씀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소란만 피운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물은 던지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반문(24-25)

 

성전 정화는 보통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지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이상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세례 요한을 인정하지 않고 죽였던 자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했다고 말하면, 자신을 선지자적 메시아로 밝히는 것이고 곧바로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잡힐 시점이 아니므로 예수님께서는 우회적으로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4-25)라고 답변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목자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 즉 모든 권위를 받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11:27; 참조. 28:18). 예수님께서는 질문자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는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되물으십니다(24-25).

이들은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을 왜 믿지 않았는지 소명해야 하고,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으므로 예수님의 권위 역시 하늘에서 온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며 선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헤롯 안티파스 역시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백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14:5).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무리는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라고 말했고(21:11),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들 비유가 자신들을 지목하는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백성의 눈이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21:45).

 

(3)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결론(26-27)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음에도 알고 있으면서 백성들이 두려워서 ‘우리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27). 이들이 대답하지 않기로 하자 예수 역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로 하십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으셨지만, 암묵적으로는 자신과 요한의 사역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게 되며, 예수님께서 행사한 권위의 출처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하늘나라의 도래를 위해 세례를 베푼 사역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역과 말씀 선포를 통해 하늘나라를 가져오는 권위는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의 권위에 대해 묻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요한의 권위에 대해 먼저 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진리보다는 백성의 여론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해 모른다고 대답하는 장면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집을 맡았으나 자신들의 악한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덧붙여서, 이제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말씀을 저하셨는지에 대해 유대 지도자들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성도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성전 정화 사건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메시아의 권위로 행한 것이며, 이 사건은 이미 요한이 세례 장면에서 경고한 내용에 포함된 사건임을 알고 그 의를 숙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모음인 21:23-22:46까지를 한 문맥으로 읽으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22:41-46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는 아들(22:44)의 권위로 아버지의 집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에 근거하므로 누구든지 그의 권위에 순종해야만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와 해설(28-32)

천국은 직분과 신앙이력으로 가는 나라가 입니다. 참 회개와 순종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행함이 없는 말잔치는 참 순종이아닙니다. 인간을 기만과 허위에 빠트리는 위험한 일들입니다. 백성으로서 온전케 되는 길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실천하는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8-32)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전한 세 비유(21:28-22:14) 중 첫 번째로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1) 두 아들의 비유(28-30)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그의 큰아들에게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시켰습니다(28). 그러나 아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도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9).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했다가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30). 두 아들 중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아들은 행동으로 순종한 아들입니다(31).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처음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둘째 아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뉘우치고 순종했습니다. 순서와 상관없이 본문이 전달하는 비유는 변함이 없습니다.

 

(2) 두 아들 비유 해설(31-32)

 

종교 지도자들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매춘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논평하십니다(31-32). 세리들과 매춘부들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의 강력한 행위와 말씀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했으면, 참여한 자로서의 감격을 현재 누리고 있습니다. 31절의 의미는 32절에서 더 명확해집니다. 32절은 아래와 같은 문장 구조를 형성하며 ‘믿음’을 강조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는 요한을 믿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의의 방식으로 왔을 때 믿지 않았고, 세리들과 매춘부들이 요한을 믿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A′). 직접 만나고도 믿지 않았으며, 요한이 가져다준 결과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A. 요한이 너희에게 의의 길로 왔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B. 세리들과 매춘부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A′.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 그를 믿지 않았다

 

‘의’(마태복음 3:15; 5:6,10,20; 6:1,33; 21:32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예, 구원 계획)입니까? 하나님의 선물로 본다면, 의의 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나 구원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보면 의의 도는 요한이 살아낸 삶입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핵심은 세례 때 나타난 하나님의 뜻(3:15)을 성취한 요한의 역할입니다. 3:15의 의와 연결하면, 본문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나 행위에 더 가깝고, 요한은 이 계획과 행위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요한이 보여준 ‘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행위였기에, 요한의 삶을 수용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세리들과 매춘부들이 요한을 믿었다고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요한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러 온 자로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예수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뜻을 성취하셨기에,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21:28-30)와 해설(31-32절)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진정성의 여부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헌신으로 증명됩니다. 종교적인 지식과 지위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의 사역과 권위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써 그리고 이 믿음을 말이 아니라 행위로 입증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진리 앞에 정직하고 실천의 열매를 추구하는 모습을 견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권력과 돈의 유혹 앞에 흔들리고, 종교성으로 위장하는 위선의 위험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위선과 거짓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말씀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당신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고 신속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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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5-02)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2)

욥기 15장 17-35절


 

세상에는 소위 ‘목소리 큰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과 협의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서로가 잘 모르는 상태일 때는 이런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에서 이런 사람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엘리바스는 고난 당하는 자와의 대화를 ‘누가 더 지혜로운가’의 대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16절에서 욥의 지혜를 깎아내린 후 이제 엘리바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지혜를 뽐냅니다. 그 지혜는 엘리바스가 가담한 지혜의 서클에서 배타적으로 전수된 특별하고 신비로운 지혜입니다. 지혜자들 안에서는 온전히 전술되어 왔지만 외부인들에게는 누설된 적이 없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의 내용도 그만큼이나 특별하고 신비로우겠습니까?

 

엘리바스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특별한 지혜(17-19)

종종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면서 일장 훈계를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의 지식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 지식이 교만으로 이어지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합니다(마 15:14). 항상 어떤 마음으로 다른 이들 앞에 서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17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17-19)

 

이제는 엘리바스의 지혜를 풀어낼 시간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말하겠다고 합니다(17). 이것은 4장에서 “내가 보건대”(4:8)로 표현된 엘리바스가 직접 경험한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8)라는 누구나 다 아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여기서도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17절의 직접 경험을 강조한 뒤 엘리바스는 그 경험을 조상들의 지혜와 연결시킵니다: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18). 리바스의 ‘개인적 경험’은 결국 (빌닷이 강조한)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지혜에 다름 아닙니다. 즉, 엘리바스의 ‘개인적 경험’은 직접 체험한 특수한 개별적 경험이 아니라 지혜자 집단의 공통적인 규범적 지혜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배운 지혜의 ‘배타성’을 강조합니다. 이 지혜는 “지혜로운 자들” 내부에서는 아무런 숨김없이 그대로 전수되어 온 것이지만(18), 그 지혜의 세계(“이 땅”)는 오직 이 ‘내부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외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19). “외인”으로 번역된 ‘자르’는 ‘낯선’, ‘다른’, ‘외부의’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비합법적인’, ‘자격 없는’, ‘금지된’, ‘이상한’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단어입니다. 출애굽기 29:33에서는 제사장(‘거룩한[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신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이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나 이방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많이 쓰입니다(사 1:7; 렘 5:19; 30:8; 51:51; 겔 11:9,28:7). 특히 규범적 지혜인 잠언에서는 “너희(내부자들)”와 “타인(외부자들)”을 나누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잠 5:10, 17; 6:1; 11:15; 14:10; 20:16; 27:2,13). 이러한 이분법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대체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기준은 대체 무엇입니까? 엘리바스가 말하는 “지혜로운 자들”은 누구이며 “외인”은 누구입니까?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공격하려는 악인(20-27)

지식은 정직과 함께해야 합니다. 정직이 사라진 지식은 너무 쉽게 교만과 탐욕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결국 망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통과 번성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20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26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27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20-27)

 

이렇게 남들에게는 비밀로 감추어진 지혜의 내용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그 삶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0). “포악자의 햇수”가 정해졌다는 표현은 사는 날을 ‘셀 수 있다’는 것으로 짧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셀 수 없는’ 것은 “크고 측량할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과 놀라우심을 가리킵니다(5:9;9:10). 악인에게 공포가 임하고, 악인이 의인/지혜자에게 할당된 평안(샬롬)을 잠시나마 누릴 때에도 곧 그 평안을 파괴하는 자가 나타납니다(21). 어둠과 죽음(“칼날”)이 그의 몫입니다(22). 두려움과 어둠, 혹은 죽음의 공포가 악인을 휩싸면 그의 다음 행보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24-25). “싸움을 준비한 왕”(24b)이라는 표현은 중의적으로 사용된 듯합니다. (1) 24a절의 주어인 “환난과 역경”이 마치 아주 강한 왕처럼 악인을 사로잡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개역개정의 번역이 이 해석을 따랐다). 그리고 동시에 (2) 25절과의 연관성으로 보아 “싸움을 준비한 왕”은 악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악인이 자기가 받는 공격이나 혹은 앞으로 받게 될 공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준비하는 왕처럼 하나님을 공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악인은 손을 들어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한 가지, 개역개정의 “대적하며”와 “교만하여”(25)는 원문에는 없는 번역자의 첨가입니다. 원문은 ‘그는 하나님께 손을 뻗고 전능자를 (힘으로) 이기려 한다’입니다. “그는 목을 세우고”(26)라는 개역개정의 해석은 ‘목’이 악인의 목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판단이 가능합니다: ‘그(악인)는 그(하나님)의 목을 향해 달려간다.’ 이어지는 ‘두꺼운 등을 가진 방패’도 악인의 무기로 번역했지만, 칼이나 창 같은 흔한 공격형 무기가 아닌 수비형 무기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간다는 문장은 어색합니다. 대안적인 해석으로는 ‘그(악인)는 그(하나님)의 두꺼운 방패 같은 등을 (공격하러 달려든다)’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27절의 뚱뚱함을 나타내는 표현들(살찐 얼굴, 지방이 많은 허리 혹은 넓적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을 묘사하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지만, 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예레미야 5:28에서도 살찜과 지방(기름)이 악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살지고 윤택하여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그러나 이런 예는 극히 드뭅니다. 가뭄이 쉽게 드는 가나안 구릉 지역에 위치한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오히려 지방(기름)과 살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지방 혹은 유지방을 뜻하는 ‘헬레브’는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을 가리킵니다(창 45:18; 민 18:12, 29, 30, 32). 사람 몸에 지방이 많아 살찌는 것도 아주 긍정적인 가치를 지닙니다(창 27:39; 49:20; 삿 3:29; 느 9:25). 참고로, 사사기 3:29에서 개역개정이 “장사”로 번역한 단어는 ‘살찐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27절을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즉, 두려움에 사로잡힌 악인이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두꺼운 목과 등, 살집이 많은 얼굴과 허벅지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악인이 살이 쪘다는 해석은 15장의 문맥으로 보아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먹을 것이 없어 헤매는 자로 묘사되며(23)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에서 살아갑니다(28). 그는 재산도 없고 앞으로도 재산이 증식될 리가 없습니다(29).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얼굴에 살이 찌고 허리(혹은 허벅지)에 지방이 많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뚱뚱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미적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오히려 왜소하고 비쩍 마른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근동 지역에서 발견된 신상들을 생각해보라).

20-27절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바스의 악인에 대한 묘사가 욥에 대한 평가라는 사실입니다. 악인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치 최후의 발악을 하듯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욥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배타적인 지혜자 그룹에서 물려받은 엘리바스의 신비한 지혜가 가르쳐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욥은 악인입니다. (2) 그래서 욥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3) 고통이 욥을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만들었습니다. (3) 그 공포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인의 결말(28-35)

우리가 행해야 할 것,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어떤 것이 온전한 사람으로 귀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귀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지식이나 교훈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28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29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30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 31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32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33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34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35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28-35)

 

28-35절은 모두 규범적 지혜가 정의하는 악인의 결말입니다: (1) 악인은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에 살거나 혹은 그가 사는 곳은 곧 무너져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28); (2) 그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그의 재산은 증식되지 못합니다(29); (3) 그는 어둠 속에서 머물며 하나님의 뜨거운 입김으로 말라 비틀어집니다(30); (4) 그는 헛된 것(‘가짜/거짓’)을 믿고 헛된 것을 돌려받습니다(31); (5)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습니다(32-33); (6) 악인은 후손이 없고 그의 집은 불탑니다(34); (7) (후손을 낳는 대신) 그가 낳는 것은 고통과 죄악과 속임입니다. 악인의 결말을 설명하는 이 구절의 특징은 누가 악인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는 자”(34)가 악인이라는 것만 유일하게 알 수 있을 뿐입니다(욥이 뇌물을 받은 적이 있는가?). 반면에, 이 구절을 통해 엘리바스의 지혜가 의인/지혜자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역으로 추정할 수있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장수하며 많은 후손이 있고 고통 없이 편안한 인생을 삽니다. 욥은 이 정의에 해당 되지 않으므로 악인 임에 분명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교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신의 경험과 나이를 내세우면서 욥을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교만한 자였습니다. “내 말 잘 들어”는 교만의 언어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말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할 줄 압니다. 들으라고 하기 전에 먼저 듣습니다. 잘 말하기보다 잘 듣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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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2)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1장 12-22절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기’와 ‘물’입니다. ‘공기’는 5분만 숨 쉬지 않고, ‘물’은 5일만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물’과 ‘공기’가 중요한 요소이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햇볕’입니다. 근본적인 생명의 본질이 이 햇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양의 햇볕을 받아야만, 몸이 건강한 생체로 조절이 됩니다. 햇볕에 노출됨으로 건강을 찾듯이, 성도는 기도의 빛 앞에 노출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빛으로 나갈 때, 특별히 하나님께서 영혼의 건강을 주실 것입니다.

 

  • 본문은 성전의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면서 현재의 성전이 심판받고 만민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세워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이 치유 받고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성전의 운명과 새 공동체의 본질을 강조합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12-17)

인간의 탐욕은 가장 성스러워야 할 공간조차 짓밟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신앙의 이름으로 승인되는 순간, 교회는 사적 탐욕이 시낭의 이름으로 승인되는 순간, 교회는 사적 탐욕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예수님 안에 세워진 새 성전 공동체는 장사하고 정죄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고 구원하며 치유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드린 믿음의 기도가 성전에서의 기도를 대신에 할 것입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2-13)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 모두를 쫓아내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자리를 엎으셨습니다(12). 돈 바꾸는 사람들은 탁자에서 헬라나 로마의 돈을 성전 세겔로 바꿔주었습니다(출 30:11-16). 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맡았던 일입니다. 이 기간에 유대인이 개별적으로 성전에 세금을 냈을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모은 큰돈을 가져와서 성전세로 바꿨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성전 세금인 반 세겔을 내는 것에 동의하셨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는 세금 거두는 행위 자체를 반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탁자를 엎으신 것은 성전세의 기능이 중지될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비둘기 파는 자들의 자리를 엎으십니다. 새를 제물로 바칠 때는 요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성전 관계자가 꼼꼼히 검사했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검사하는 업무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성전 관계자들은 까다롭게 비둘기를 검사했습니다. 미쉬나에 따르면 비둘기 가격이 올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됐다는 내용이 나옵니다(m, Keritot 1:7).

하나님께서는 성전 세금이나 제사 비용으로 백성에게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닌데, 성전의 권력자들은 세금과 제물에 대한 엄격한 잣대로 이윤을 취했고 가난한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을 인용하십니다. 이사야 56:7은 더 나은 것이 오고 있음을 알리며, 예레미야 7:11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만민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라도 심판하시지만, 성전을 세우실 때의 원래 목적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성전, 교회를 통해 실현됩니다.

 

이 사건은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 첫째, 교회는 만민이 하나님께 기도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므로, 예수님 당시의 권력자들처럼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탐심을 섬기는 행위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행위는 성전의 상업화를 꾸짖은 것일 뿐 아니라 파괴되고 대체될 성전의 운명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참조. 24:1-2). 이는 예레미야 7장과 말라기 1:10에서 예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을 위해 오셨으므로, 성전 제의가 아니라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들의 상을 엎으신 것은 성전의 속죄 기능이 중지되고 예수님의 대속물(20:28)이 만민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셋째, 스가랴 14:21의 예언대로 매매하는 자들이 성전에서 사라지는 ‘그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열방의 회복이 실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정화 사건 직후에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을 치유함으로써 성전 제사 제도가 아니라 자신의 사역으로 시작된 하늘나라에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할 수 있도록 세워진 곳이며,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역시 반민이 기도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기 때문에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만민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곧 대화를 뜻하는 기도를 교회의 본질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반응(14-17)

‘경청’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귀는 태양이고 뇌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라고 할 정도로 귀는 우리 신체 기관 중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경청은 단지 ‘듣는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말하기보다 듣기를 우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경청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14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14-17)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21:14-17은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며, 맹인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이 치유 받고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부르는 장면과 종교지도자들의 비판이 대조됩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 이어서 이 내용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받으신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아들에게’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분노합니다(15).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의 외침은 메시아를 통한 회복의 시대가 왔고 이런 회복이 성전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21:9의 호산나 찬송처럼, 15절에서 어린이들이 부른 찬송 내용인 시편 118:26을 보면, 호산나로 찬송하는 장소는 여호와의 집, 곧 성전입니다. 찬송을 하게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16) 어린아이들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승인하셨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되는 장소이며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외침을 성경이 예고한 것이라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십니다(16). 사회-종교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치유 받는 사건은 하늘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복된 소식의 증거입니다(11:5; 누가복음 7:22; 이사야 56장; 61장). 성전은 긍휼의 공간입니다. 교회는 긍휼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종교적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함으로써 주의 이름을 높이는 모임입니다. 치유와 회복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메시아와 무화과나무의 심판(18-22)

명분을 앞세우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방해하는 걸림돌을 만들었다면 예수님과 같은 의분과 열정으로 그것을 내몰아야 합니다. 성도가 거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될 때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18-22)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에 다시 들어오셨고 시장하셨습니다(18).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고 가까이 가셨지만, 잎사귀 외에는 아무 열매도 찾지 못하셨습니다(19).

열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3:8,10;7:16-20;12:35;13:8;21:33-43). 열매는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해야 할 행위를 뜻하며, 21:33-46의 비유에서도 열매 맺는 백성이라는 주제로 다시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심판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나무가 즉시 마를 수 있는지 묻습니다(20).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언급하지 않고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1). 제자들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무화과나무에게 벌어진 일을 행할 뿐 아니라, 산에게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도로 구하는 것마다 모두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22). 기도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자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러 가는 곳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기도가 성전의 제사를 대체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셨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자들도 하늘의 아버지를 신뢰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신뢰해야 합니까? 산도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판으로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은 심판과 믿음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대체될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전의 열매입니다. 화려한 잎사귀만 드러낼 뿐 만민을 위한 긍휼이 열매로 맺히지 않고 제사 행위처럼 형식화된 신앙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한 성전 제사에는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만민의 기도에는 반응하십니다. 교회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참 성전으로서 외면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고 용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금지한 맹인과 저는 자들도 용납하고 고쳐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막지 않으시고 용납하고 치유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전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구원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살펴보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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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1)


 

 

마태복음 21장 1-11절


대형 영화제나 연예 시상식들을 보면 화려합니다. 그 시상식장에 들어서는 주인공이나 연예인들은 대중에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한 옷과 비싼 장신구를 치장하고 포토라인에 섭니다. 많은 대중은 그들에게 환호하며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예언을 성취하려 나귀를 타고 무리의 환호 속에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입성합니다. 이 주제가 예루살렘에서 펼쳐질 한 주간의 사역에 빛을 제공해줍니다. 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며 다윗적 왕의 입성을 환호하는 무리와 성안 거민들의 반응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향후 펼쳐질 팽팽한 갈등의 전조가 됩니다.

 

나귀를 타는 겸손의 왕(1-5)

천국의 백성인 성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겉으로 힘과 권력을 추구하거나 가시적인 결과만 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면적인 성품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만왕의 왕인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1-5)

 

본문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반응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두 제자를 보내 나귀 새끼를 준비하심(1-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감람(올리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1). 벳바게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감람산 근거 있었고, 기드온 골짜기 동쪽에 있고 예루살렘과 경계를 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종말을 묘사할 때, 종종 이 감람산을 묘사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14:4-5)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벳바게에 이르자 제자들에게 기이한 요구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고 하십니다. 나귀를 끌고 올 때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고 하면 보내줄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직역하면 ‘주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신다’입니다. 나귀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이므로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에 정당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창 1:26-31, 사 1:3).

 

(2) 이사야의 예언 성취(4-5)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는 것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4). 4절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열 개의 구약성경 인용 공식 중 아홉 번째입니다. 5절은 스가랴 9:9과 이사야 62:11을 결합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인물은 열왕기상 1장의 솔로몬 왕과 스가랴 9:9에 나오는 시온의 왕뿐입니다. 두 인물은 왕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이고, 왕이 입성할 때 즐거운 축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가랴서를 살펴보면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특별히 스가랴 9:9의 새로운 왕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고 백성을 정의롭게 통치하기 때문에, 공의로 다스리는 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참조. 삼하 23:1-7). 이 공의로운 왕의 통치는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시 72:1-7). 이 평화는 로마 황제가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주제 측면에서 본문은 스가랴 9:9뿐 아니라 이사야 62:11과도 비슷합니다.

 

11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이사야 62:11)

 

5절의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백성을 가리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탄 모습은 왕의 겸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과 세상 나라의 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의 특징인 겸손을 보여줍니다.

 

스가랴 9장에서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한 후에 왕의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에 근거하는데,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50명을 앞세웠던 압살롬(삼하 15:1)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나귀를 탄 겸손의 왕이었습니다(삼하 19-20장). 스가랴 9:10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끓어버리실 것을 예언하면서(참조, 사 2:7; 31:1; 미 5:10; 학 2:22), 이스라엘의 왕은 나귀를 타고 평화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의 특징인 ‘온유한’이나 ‘유순한’ 성품을 가리키기보다는 낮아진 삶, 겸손한 삶을 의미합니다(11:29).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왕으로서 군마가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통치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는 겸손한 왕이기에 낮아져서 모든 사람을 섬기므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6-11)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어떤 분으로 환호하고 높이고 계십니까? 겸손하고 온유한 왕인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았으니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고 섬기는 성도들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때 무리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6-11)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해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무리는 예수님 앞과 뒤에 서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성에 다윗의 자손이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소동하다 결국엔 참 임금을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과 무척 다른 반응입니다.

 

(1) 나귀를 타신 예수님(6-7)

 

예수님의 지시대로 두 제자는 새끼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들 위에 그들의 겉옷을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마리의 나귀 중에서 사람이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참조. 막 11:2; 눅 19:29).

어미 나귀는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가 새끼였고, 사람들 타본 적이 없으므로 새끼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왕을 위해서 아무도 타지 못하도록 관리해 둔 나귀를 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무리의 반응(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탄 예수를 위해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펼쳤고,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펼쳤습니다(8).

군중이 자신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펼치는 것은 왕이 행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참조. 왕하 9:13). 이렇게 옷을 길바닥에 펼치는 것은 왕이나 높은 지위의 인물을 추앙하고 존중하는 행동입니다(왕하 9:13). 이는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앙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군중은 군사력으로 승리를 가져다줄 왕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행하신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기대했던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아들’과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내용은 시편 118:25-26에서 온 것으로, 이 시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부분에 해당합니다. 특히 순례자들이 모이는 큰 절기인 장막절, 유월절, 오순절, 수전절에 사용된 것입니다.

‘호산나’는 시편 118:25에서 ‘구원해 주소서!’ 혹은 ‘도우소서!’를 의미하는 아람어 ‘호샤나’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히브리어는 ‘호쉬아 나’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에게’는 ‘이제 구해주소서’(시편 118:25; ‘이제 구원하소서!’)를 다윗의 아들에게 붙여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시편 118편에서 왕을 암시하므로 군중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합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부른 것은 왕적 메시아에 대한 군중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역설적으로,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아들’은 치유하는 종으로 묘사됩니다(9:27;15:22;20:30-31).

군중은 예수님을 향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가장 높은 곳은 가장 높은 하늘, 즉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시는 하늘을 가리킵니다(참조, 눅 2:14). 땅에서는 군중이 호산나를,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호산나를 외칩니다. 하지만, 군중의 환호는 예수님을 곤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3) 예루살렘 성의 반응(10-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온 도시가 진동하며 ‘그는 누구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므로 왕의 등장은 로마와의 충돌을 의미했기에 정치적인 혼란을 예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에 대해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권위로 기름 부름 받은 메신저이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등장했다는 소식은 당연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북쪽의 갈릴리 지역에 온 선지자의 등장은 로마 당군뿐 아니라 성정을 중심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과 같은 지도부에는 위협이 되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지만 왕의 도성 예루살렘에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들어가십니다. 군마나 백마가 아니라 짐짝을 싣고 다니는 나귀의 등에 앉아 가십니다. 이는 스가랴 9:9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겸손, 즉 낮아짐을 강조하는 모습입니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또한, 예수님의 낮아진 모습은 고난 받는 종을 떠올립니다(사 53:4). 낮아져 오는 메시아의 모습은 백성이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 점에서 유대교의 메시아 기대 사상과 기독교의 메시아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믿는 주께서 이렇게 겸손하시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그로 인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복음인 이유는 그가 믿는 자들을 세상에서 번영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번영을 위한 기대는 당시 군중에게 있었던 메시아 기대 사상입니다. 교회가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은 종으로 죽기까지 낮아져 죄인들이 구원받을 길을 여셨습니다.

현재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의 헌신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존귀한 자로 대접받습니다. 또한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겸손한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낮아져 고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나라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준마가 아니라 초라하고 볼품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로마를 뒤엎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강력한 왕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정복이 아닌 사랑과 희생을 통해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우리의 왕이 겸손하고 온유하시다면 그분의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가 오늘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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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분명히 하라


박상규 목사(강진샘교회 담임목사, 칼럼니스트)

 
어떤 사람이 자신은 화살을 쏘면 백발백중할거라고 자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실력을 아는데 비아냥 거리면서 그 실력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 자랑하던 사람은 웃으면서 화살을 아무 곳이나 향해 쏘았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화살을 쏜 사람은 화살이 날아가 박힌 곳으로 가서, 화살을 중심에 놓고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살이 명중한 과녁을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누가 보아도 명중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아무 곳이나 목표 없이 여기저기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쏘아진 화살이 우연이 좋은 곳에 박혀 대박이 나길 기대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우연의 행운이 찾아와도 만족이 있겠는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화살을 보며 비교할 것이다. 만족이 없을 것이며 불평할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삶은 바닷물에 떠다니는 부표와 같다. 바닷가를 거닐어 본 적 있는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떠내려와서 해변을 더럽히고 있는가! 우리의 목표 없는 삶은 떠다니다 해변에 쌓인 쓰레기와 같은 인생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목표 설정하는 법
 
새해가 되면, 새로운 계획들을 한다. 그러나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가? 그것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따라 쉽게 목표가 변경이 되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목표에는 설정하는 데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장기적인 목표이다. 10년 후나 5년 후에 변화되어 있을 목표, 다음으로 그 목표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다. 먼 목표만 꿈꾸고 있으면, 망상이 되기 쉽다. 에베레스트산과 같은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지금 뒷동산부터 한 발 한 발 올라야 한다. 그렇게 단계를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할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정당한 핑곗거리를 찾을 것이다. 잠언에서도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22:13)라고 말한다. 참 좋은 핑곗거리이다.
 
높은 곳을 오르기를 원한다면, 일련의 과정을 검토한 후, 지금 현실에 맞는 목표를 정해야 한다. 먼 미래에 아름답게 성장하고 변화된 노년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라! 10년 후에 큰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성공한 꿈을 꾼다면, 먼저 작은 호수에서부터 낚싯대를 다루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 낚싯대도 드리운 방법도 모르면서, 큰 바다에서 고기 잡는 꿈은 망상일 뿐이다.
 
당신이 우연하고 막연한 행운을 위해 그저 아무 곳이나 화살을  마구 쏘아된다면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행운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아마 당신은 금방 지처서 다른 사람이 성공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성공을 보며 행운아라고 부러워 할 것이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이 부러워 하는 그 성공한 사람은 우연한 행운아가 아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 그는 자신의 꿈을 향해 수많은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화살을 당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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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0-02)

 


십자가를 통해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20장 17-34절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무작정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 삶, 모습 그리고 자세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많은 제자들을 두지 않으시고 12명을 구별하여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결국 그 12명을 통해서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길 원하게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길을 가는 사람인지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명예와 권세를 갖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자신이 직접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까지 높은 지위에 대한 관심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대속 사역을 들어 낮아짐의 도리를 교훈하십니다.

  

고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17-19)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되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지만, 결국 가장 큰 자가 되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 가장 큰 영광과 경배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그 나라 백성들인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17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17-19)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함께 데려가면서 예루살렘에서 겪을 자신의 운명을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 것이지만, 사흘째 날에 일으켜질 것입니다(18-19).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난 예고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수난 예고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십자가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듯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도 구체적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부활의 약속이 없기에 땅에서의 생존이 지상과제입니다.

 

인자가 온 목적(20-28)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군림하는 자들이 아닌 섬기는 자가 천국에 합당하다고 하십니다. 세상 나라는 더 높은 권력을 갈망하지만, 천국 백성들은 기꺼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좌우편 영광의 자리에 자녀들을 앉혀 달라고 요청합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께서는 고난받는 인자의 길을 언급하실 때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은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20). 어머니는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21). 이러한 요청은 왕으로 와서 영광중에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며, 제자들이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이 직접 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19:28).

예수는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열두 제자가 열두 보좌에 앉는다고 하셨으나, 서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예수께서 자신의 운명을 선명하게 밝히셨는데도 제자들이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예루살렘을 향하면서 제자들의 시선이 영광에 가 있어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예수의 수난 예고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세 번째 예고에는 그런 내용은 없고, 제자들의 욕망이 뒤따른다는 점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제자들의 기대가 영적 시야를 가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구약에서 잔은 복을 상징하기도 하지만(시편 16:5; 23:5; 116:13),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은유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시편 11:6;75:7-9; 이사야 51:17,22; 예레미야 25:15-17,27-28; 49:12; 예레미야애가 4:21; 에스겔 23:31-32; 하박국 2:16).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형벌의 잔을 언급하실 것입니다(26:39,42). 예수는 두 제자가 잔을 마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마십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처에 사람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오자 제자들은 예수의 잔을 공유하지 않고 도망할 것입니다(26: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 아버지(5:16,45,48; 7:21; 10:32-33; 11:25-27; 16:17; 18:35; 23:9)의 주권으로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리라고 하십니다(23b).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십자가 형장에 있었고(27:56), ‘유대인의 왕 예수’(27:36)의 좌우편에 있는 자들은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강도들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27:38).

나머지 제자들이 세베대의 두 아들이 요청한 내용을 듣고는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좌우편에 앉으려는 마음은 그들 모두에게 있었는데, 두 제자가 모친의 힘으로 청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모든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제자들을 불러 당시 사회의 지향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이 원하는 행위는 주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위에서 아래를 향해 권위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있는 자가 큰 자이고, 큰 자는 강한 힘을 사용합니다. 제자들은 이들과 달리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26-27). 예수는 제자들의 모본으로 인자의 길을 말씀하십니다(28), 인자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섬기기 위함이며, 섬기는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대속물로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 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원래 천상의 지위를 가진 존재로 ‘옛적부터 계신 이’(=하나님) 앞에 나와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의 권세를 부여 받습니다. 인자는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피조물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자이신 예수는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천상의 존재인 인자는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합니다. 여호와의 종이 섬긴다는 표현은 53장에 나오지 않지만, ‘종’의 주요 역할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의 극치는 죽음입니다(참조 12:40; 17:9,12,22; 20:18,28; 26:2,24-45). 무엇보다도 예수는 대속물(=몸값)의 개념을 이사야 53장에서 여호와의 종이 겪는 대속적 희생과 연결합니다. 주의 종의 고난과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목적이므로 대속적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당하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 위에서 통치하기를 좋아하는 세상의 흐름을 되돌리고 많은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된다는 말씀을 해석할 때, 예수께서 크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운명에 대한 내용을 듣고도 수난을 은유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희생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에는 작은 자들을 섬기는 종들이 필요하지, 얼마 동안 섬기고 나서 피라미드의 위에 오르는 주인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크게 되려는 욕망 자체를 합리화하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생각 자체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의 논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속성을 따르는 곳입니다. 잃어버린 양인 작은 자를 살리기 위해 낮아져 희생하는 목자처럼(18:1-14),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회복하기 위한 몸값으로 주기 위해 오신 인자처럼, 교회는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종의 모습이 하늘 나라의 제자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입니다. 섬기기 위해 낮아진 제자가 진정으로 큰 자로 인정받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두 맹인의 치유(29-34)

세상은 타인의 곤란에 대해 무관심하고 비정하지만, 천국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통감하고 긍휼히 여기는 나라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맹인의 절한 외침에 무리는 조용하라고 꾸짖지만,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겨 고쳐주십니다.

 

29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29-34)

 

예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향해 가실 때 길가에서 두 맹인이 예수틀 다윗의 아들로 부릅니다(29-30). 무리는 이들에게 침묵을 요구합니다(31). 무리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멈춰 서고 두 맹인을 불러 무엇을 훤하는지 물으십니다(32-33a).

그들은 눈을 뜨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33b절). 예수는 두 맹인을 불쌍히 여기고(참조. 14:14; 15:32) 들의 눈을 만져 고치십니다(34; 8:3, 15: 9:20,21,29; 14:36). 맹인의 치유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는 형벌의 잔을 마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도 긍휼이 필요한 이들의 소리에 응답하십니다. 둘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긍휼을 구한 두 맹인은 욕망으로 영적 시야가 가려져 높은 자리를 구한 두 제자와 대조됩니다. 두 맹인은 궁흄을 베푸는 예수의 정체를 정확히 알았지만, 제자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의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20:26-28). 셋째, 맹인의 치유는 종교지도자들의 영적 무지를 암시합니다. 맹인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보았으나, 백성을 빛으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영적 맹인에 머물러 있습니다(15:14; 23:16-26).


천국 백성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 나라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주님이 가르치신 원리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걷는 방향이 다르고, 가려는 곳이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기꺼이 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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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5-01)

 


엘리바스의 두 번째 욥에 대한 변론

욥기 15장 1-16절


세상에는 다양한 이해와 다층적인 견해가 존재합니다. 획일적인 주장으론 부족할 만큼 복잡합니다. 진리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하되 자기 견해만 옳은 듯이 믿고서 주장하면, 독선과 배제와 폭력을 유발하고 소통이 단절됩니다. 오류에서 벗어나 온전해지는 데 필요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 세 친구들과의 두번째 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 논쟁과 두 번째 논쟁의 차이점에 주목하며 어떤 변화 혹은 발전을 강조하는 읽기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논쟁에서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친구들의 말은 짧아지면서 고난과 아픔의 문제에 점점 더 둔감해지며 규범적 지혜의 신학을 더욱 원론적으로 나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원리와 원칙만 남습니다.

 

욥에 대한 반박(1)(1-6)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 정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믿음으로 덕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1-6)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인 15장의 전반부를 구성하는 1-16절은 욥의 발언을 평가하고 반박하는 것에 주된 목적을 둡니다. 후반부(17-35절)에서 엘리바스 자신의 규범적 지혜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주장을 약하게 만드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이 장에서 반박 논지를 전개하는 특징은 욥이 한 말들 중 정확히 어떤 말이나 표현을 반박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네가 너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 엘리바스가 지적하는 욥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지혜자는 욥처럼 감정적이지 않다(2-3)

 

욥을 반박하는 엘리바스의 첫번째 문장은 수사의문문으로 시작합니다. 지혜자라면 ‘바람의 지식’으로 대답할 리 없고 자신의 뱃속에 동쪽으로 채울 리가 있겠습니까? ‘바람의 지식’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는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문맥을 벗어나면 ‘영적 지혜’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평행어인 하반절의 ‘동쪽’과 연결하여 ‘동쪽에서 부는 바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풍은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 성경에서는 곡식을 말라죽게 하거나(창 41:6,23), 애굽에 재앙을 불러오고 (출 10:13), 홍해의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는 장면(출 14:21)에서 나타납니다. 욥의 말을 매우 뜨겁고 강력한 바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빌닷의 “거센 바람”(욥 8:2)이라는 평가와 일치하며, 그 의미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라는 엘리바스의 이전 말과 연결됩니다. 분노와 시기처럼 극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지혜자의 특질이 아닙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욥처럼 분노와 화를 표출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것으로(3) 지혜자라면 그렇게 말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지혜’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말입니다.

 

(2)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4)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버렸다고 비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르아)는 잠언이 말하듯 모든 지혜와 지식의 출발점입니다(잠 1:7;9:10).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자의 첫 번째 특질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무엇을 근거로 욥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버렸다고 주장하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욥기의 저자와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욥이 당대의 누구보다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합니다(욥 1:1,8;2:3). 이 평가를 엘리바스는 모르고 있습니다. 욥은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을 두렵게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9:34-35).

 

(3) 무지한 말을 하는 걸 보니 악인이 분명하다(5-6)

 

엘리바스는 욥의 무죄 항변을 참지 못합니다. 5절과 6절은 동일한 의미를 다른 표현을 써서 나타내는 평행절입니다. ‘너의 죄가 너의 입을 가르친다’라는 표현 자체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하지만 6절의 ‘너의 입이 너를 악하게 한다’라는 구절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엘리바스의 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욥이 죄인이기 때문에 지혜가 아닌 말을 하는 것이며, 또한 순환적으로, 무지의 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 악인임이 분명합니다. 혹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말을 함으로써 욥은 스스로를 더욱 죄인으로 만들어갑니다. 욥을 정죄한 것은 엘리바스 자신이 아니라 욥의 입이라는 것입니다. 욥의 입술이 욥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비판은 욥의 어떤 말이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당한 비판이라기보다 공허한 비난으로 보입니다.

 

욥에 대한 반박(2)(7-16)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무조건 존중받아야 한다는 태도는 전형적인 우매함입니다. 설령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지혜로 누군가를 질책하거나 굴복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지혜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태도로 드러납니다.

 

7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7-16)

 

1-6절을 종합하면, 욥이 하는 말이 결코 지혜자의 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계속해서 욥이 지혜자 일 수 없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논증하려고 시도합니다.

 

(1) 욥이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7,9-10)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라는 질문은 수사의문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규범적 지혜의 과거 지향적 세계관입니다. 지혜는 과거에 있다는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규범적 지혜에서 늙음과 나이 듦은 지혜와 동의가 됩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이 가장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 즉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욥의 지혜를 약하게 만듭니다. 7절은 10절과 연결됩니다. “우리 중에는” 욥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다는 적잖이 과장된 표현은 욥의 지혜보다 엘리바스의 지혜가 더 우위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때 “우리”는 세 친구들만을 지칭하는 표현은 아닌 듯합니다. 엘리바스가 소속된 규범적 지혜의 수호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집니다. 욥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도 포함된 지혜자 집단이기에 욥의 나이의 한계 안에서 깨달은 지혜를 “우리”가 모를 리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2) 욥은 신적 존재가 아니다(8)

 

욥이 천지가 창조되던 때(“산들이 있기 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천상회의를 엿들었을 리도 없습니다. 개역개정이 “(하나님의) 오묘하심”으로 번역한 ‘소드’는 ‘모임’ 혹은 ‘회의/회합’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 단어는 예레미야 23:18의 “누가 여호와의 회의(소드)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욥기 안에서는 1-2장의 하나님과 사탄,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을 지칭합니다. 이 자리에 욥이 참석했을 리가 없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던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욥의 지혜를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욥의 지혜를 약화 시키는 주장은 엘리바스 자신의 지혜 역시 동일하게 약화시킵니다. 욥의 아버지뻘이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도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없고 천지창조 때에 함께 있던 사람도 없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첫 질문들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질문 역시 욥에게만 해당하는 질문 아닙니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 욥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11-16)

 

욥의 진술을 가치 하락시키려는 엘리바스의 세 번째 전술은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인간(“여인에게서 난 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14). “거룩한 자들”은 평행어인 “하늘”에 비추어 해, 달, 별들과 같은 천체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에 위치한 존재들조차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분의 기준에서는 그 맑고 투명한 하늘조차 순결(자크)하지 않습니다(15). ‘의’와 ‘순결’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 비하면 제아무리 의롭고 순결한 인간도 더럽고 흠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16). 하나님 앞에 하찮은 존재가 감히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분노를 터뜨리고 입을 함부로 놀릴 수는 없습니다(12-13).

16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욥을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이 평가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욥 1:8; 2:3)와 정확히 상반됩니다. 욥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엘리바스의 말은 그 자신도 동일하게 깎아내립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고 부정한 존재라면,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인간 모두가 욥과 동일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엘리바스의 논리는 왜 엘리바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욥과 같은 고난 혹은 ‘징벌’을 받지 않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엘리바스의 ‘인간에 대한 일반론’에서 자신은 제외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반박하고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로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하는 교훈은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오류에 빠뜨려 신뢰성을 떨어뜨립니다.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지혜롭게 숙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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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0-01)


포도원 주인의 비유로 본 천국

마태복음 20장 1-16절


 

많은 사람들은 불행이 자신의 밖에 외부 환경으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은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남의 좋은 조건과 자신의 나쁜 환경을 비교하다가 스스로 마음의 불행에 빠집니다. 행복은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수제자로서 더 나은 보상을 기대한 베드로에게 비유를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제자들이 받을 보상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먼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경제 원리가 아니라 은혜 원리임을 보여주십니다.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를 통해 첫째들이 꼴찌가 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일꾼을 부르는 주인(1-7)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에 부르실 때 계산적으로 부르지 않고 은혜로 부르십니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셨다면 우리보다 적합한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격과 능력을 묻지 않으십니다. 초청하실 때 어린아이같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따라나선다면 모두 불러주실 것입니다.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1-7)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과 기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인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지금 천국인으로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 비유 중에서 포도밭은 천국을, 포도밭의 주인은 하나님을, 일꾼은 우리를 의미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용직 일꾼을 찾아 나섭니다. 주인은 온종일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당시에 일용직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길거리나 모퉁이에 서서 고용주를 기다렸습니다. 주인은 품꾼들을 만나 하루 한 데나리온의 임금으로 계약했습니다(2). 주인은 계속해서 제 3시, 제 6시와 제 9시, 제 11시에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맺고 일꾼들을 고용할 것입니다. 고용주와 일꾼들이 맺는 계약 조건인 한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일하면서 바라는 기대치입니다. 서로가 합의한 금액에 대한 일꾼들의 불만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은 제 3시(오전 9시)에 시장에서 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주인은 3-4절의 행동과 같은 방식으로 제6시(정오), 제9시(오후 3시)에 시장에 나가서 일꾼들을 부릅니다. 주인은 하루의 반나절과 그 이상이 지났는데도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난, 곧 일할 시간이 한 시간 남은(12) 제 11시(오후 5시)에도 시장에 나갔습니다. 오후 5시는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 시간에도 주인은 서 있는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이미 일이 시작됐는데 왜 주인은 계속해서 장터에 나갔겠습니까? 왜 하루 품삯을 지불하기 한 시간 전에 다시 시장에 나갔을까요? 주인은 일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장에 나갔습니다. 이 사실은 ‘나가 보니’(3)에 나타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장의 사람들을 보던 선한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일터에 고용합니다. 6절에서 ‘나가 보니’의 헬라어는 ‘나가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찾는 주인의 마음이 이 단어에 드러납니다. 주인은 한 시간이라도(12절) 일할 기회를 주려고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일할 기회가 없어서 시장에 하루 종일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8), 그들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야 하는 이들은 절망적인 마음으로서 있었을 것입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일을 해서 몇 푼이라도 벌기를 고대하며 그 시각까지 시장에서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인은 이들의 좌절감과 절박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관심은 자신의 필요보다도 일꾼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반대편에는 자신의 능력이 역부족이어서 내세울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권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권리라도 가져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하루종일 일합니다. 이런 일자리도 없는 사람들은 고용시장에 나섭니다. 그러나 직장을 구해서 봉급을 받아도 권리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에 따라 기수와 서열이 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습니다. 비영리 단체나 교회와 같이 선한 목적을 위해 모인 공동체에서도 권리와 관련된 이슈는 뜨겁게 제기됩니다. 교회에서마저 직분이나 신앙 연륜에 따라 권리가 달라지고, 이로 인해서 불필요한 갈등이 생깁니다.

노동자들을 찾아서 도움을 주려고 상식을 뛰어넘는 호의를 베푼 주인의 마음이 이런 시대를 구원할 것입니다. 갑을 관계, 따돌림과 차별의 문제, 권위주의 문화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일꾼들에게 삯을 주는 주인(8-15)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베푸셨고 은혜롭게 베푸셨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 것이 아니라 공정함을 넘어 관대하게 주셨습니다. 자기 것으로 가기 뜻대로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스스로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먼저 찾아와 불러주신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기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8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8-15)

 

날이 저물어 임금을 지불할 때가 되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입금을 지불하라고 지시합니다. 당일에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레위기 19:13, 신명기 24:14-15; 요세푸스, 고대사 20:220). 일꾼들은 당연히 먼저 고용된 순서대로 임금을 지불받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맨 나중에 고용된 자들에게 먼저 삯을 지불하라고 지시합니다. 임금 지불 순서가 고용 순서와 정반대였습니다. 먼저 고용된 일꾼들은 맨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이 얼마를 받는지 지켜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일꾼들이 하루 종일 수고한 일꾼들이 계약한 것과 같은 액수를 임금으로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9). 그들은 이 순간에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가장 적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적어도 그 이상은 받게 될 줄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먼저 왔으니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받을 줄로 기대한 일꾼들은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동일한 임금을 받습니다.

이에 제11시에 온 일꾼들보다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에게 불만을 제기합니다. 이들의 불만은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12).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공의롭다는 것이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주인은 불평하는 일꾼들에게 자신은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잘못하다’는 ‘속이다’, ‘갈취하다’라는 뜻입니다. 주인은 약속한 대로 지불 했으므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주인은 ‘나는 선하다’라고 밝힌다(15절). 왜 주인은 선합니까? 왜냐하면 주인은 일꾼들의 필요를 위해서 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보았고 찾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관심은 포도원의 수익보다는 일꾼의 필요에 가 있었습니다. 먼저 고용됐거나 나중에 고용됐거나 모두 새벽부터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으며,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도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임금이 필요합니다. 주인은 저녁 무렵까지 실업자로 지내는 사람들의 생계를 생각했기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고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주인의 뜻은 일꾼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며 이런 행동은 선합니다. 그런데 가장 적게 일한 일꾼들뿐 아니라 아침 일찍부터 일자리를 얻은 일꾼들도 주인의 혜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주인이 아침에 고용하지 않았다면 생계비를 벌지 못한 채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용된 것은 계약을 체결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 곧 주인이 베푸는 은혜를 입은 사실을 나타냅니다.

비유는 불만을 계기한 일꾼들의 대답 없이 주인의 질문으로만 끝납니다. 즉, 열린 상태로 끝납니다. 열린 종결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비유에서 어떤 일꾼과 비슷한지, 주인의 마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의도합니다.

 

비유에 대한 예수의 논평(16)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베푼 아버지의 지극 호의에 분노했던 이유 속 형처럼(누가복음 15:28-30), 하루 온 종일 일한 자들은 주인의 비상적인 관대함을 원망했습니다. 받을 것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받을 자격 없는 자와 똑같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16절의 내용은 19:30의 내용과 순서가 거꾸로 돼 있으나 의미는 동일합니다. 본 비유를 앞뒤 단락과 함께 읽으면, 특히 19:30과 20:16의 관계를 고려하면,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해서 제자들이 다른 신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은혜(또는 긍휼)와 관대함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는 마감 시간 한 시간을 남기고 부름 받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알반적인 원칙과 다르게 자체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제자는 하나님의 일도 은혜에 기초해서 행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방식 그대로 은혜로 일하는 것입니다. 먼저 부름을 받아 오랫동안 일하고 고생하면서 일했기에 나중에 부름을 받고 덜 일한 사람보다 더 큰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강조하는 점에서 비유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탈자의 비유와 비슷한 의미를 전달합니다(누가복음 15:11-32). 특히 교회는 맨 나중에 온 사람을 먼저 배려한 주인처럼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를 실현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더 많은 일을 한 품꾼들은 같은 품삯을 받았다고 원망하지만,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하루를 허탕 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격과 조건이 되어 부름을 받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비교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면, 주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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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02)

 


천국에 합당한 사람

마태복음 19장 13-30절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란 책에서 소유의 양식의 삶을 벗고 존재의 양식의 삶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변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을 얻는 데 집중하기보다,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경험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부자 청년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제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자가 오는 것이 더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천국(13-15)

천국은 권력이나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자들의 것이 아닙니다. 순전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신을 맡기는 자들의 것입니다. 세상은 어린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며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고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아무거도 갖춘 것이 없지만, 주님을 두 손 벌려 반기십니다.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13-15)

 

예수님께서 결혼, 이혼, 독신에 대해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어린이들에게 안수하여 축복을 빌어주시기를 바라면서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꾸짖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린이들로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어린이들에게까지 예수님께서 관심을 두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십니다(14).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은 후에 거기를 떠나셨다(15).

 

13-15절은 결혼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한 구성원인 어린이를 실제로(또는 문자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환영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과거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폭력과 빈곤 등으로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 쉽고, 약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돌봄 없이는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특히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들을 볼보는 일은 예수의 마음을 나타내야 할 교회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뒤로 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움직임이나 소리가 어른들 중심의 예배를 방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린이들의 어린이다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환영하시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규격화된 선입견이 아니라, 예수의 눈으로 어린이들을 실제로 환영하고 안수하는 모습이 오늘 교회에도 요구됩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이는 존재 자체로 살아 있는 교훈입니다. 어린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존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복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16-22)

하나님보다 소유를 더 사랑한 사람의 계명 준수는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외식일 뿐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눠주지를 거절하는 사람의 계명 준수는 ‘네 형제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저버린 껍데기 순종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을 살펴보겠습니다.

 

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6-22)

 

앞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아이들이 등장했다면,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탁월한 위치에 있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부자 청년’(20, 22)은 ‘무슨 선한 것’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선한 것’에 대한 청년의 이해를 바로 잡으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묻고 선한 것에 대한 답을 얻는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만이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참조, 역대상 16:34; 역대하 5:13; 시편 25:8; 34:8; 106:1; 118:1,29, 136:1; 나훔 1:7). 예수님께서는 ‘선한 분은 한 분이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본 단락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읽으면 예수를 따르는 것(21절)이 ‘영생을 얻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영생의 길은 무슨 선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만,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사람은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의 삶과 영생에 합당한 행위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어떤 계명인지 묻습니다. 18-19절의 계명들에는 십계명의 두번째 묶음에 들어 있는 다섯 계명들이 주로 포함됩니다. 첫째부터 넷째 계명과 열째 계명(‘탐내지 말라’)이 빠졌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지켰는데 아직 무엇이 부족한지 묻습니다(20).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재물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21).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지만(13:44), 청년은 가진 부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으므로 예수를 따르기보다 떠나고 맙니다. 많은 소유가 그를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입니다.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돈을 선택하고 영생의 길을 외면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했으므로,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사실상 어긴 것입니다. 이처럼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은 6:24에서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돈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21절에서 수는 재물과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과 자신을 대조하십니다. 청년이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은 신적 존재인 예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의 위험(23-26)

천국은 지상에서 부자인 사람들이 그 상태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잠시 맡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3-26)

 

제자들은 부자가 떠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야말로 하늘나라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는 하나님의 복을 증명하는 표시였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에는 부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예. 신명기 28:1-14; 잠언 10:22). 제자들은 이런 부자가 제외된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구원은 인간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언급하십니다. 부는 구원을 받는 조건도 아니며 구원을 입증하는 열매도 아닙니다. 부에 의존하는 것은 안전을 보장하는 대상을 하나님에서 부로 바꾸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돈은 하나님께 맞설 수 있는 매력을 지녔고, 예수를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뿐 아니라 교회 역시 돈에 삼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약속(27-30)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된 자는 아무 자랑할 것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헌신이나 희생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헌신된 사람들에게 비할 수 없는 영광과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27-30)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인자가 오실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입니다(28; 다니엘 7:13-14,26-27). 여기서 심판하는 것은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을 위해’ 잃은 자들에게 주어질 상을 말쯤하십니다(29).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충성심을 의미하는데, 29절의 이름은 후자를 가리키며, 예수 이름으로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미래의 유업이 기다립니다. ‘여러 배’를 받는다는 표현은 제자가 버린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13:8,23). 이런 보상은 제자들이 하늘에서 얻는 것인 동시에 역사의 끝,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인들이 상속받게 될 것도 포함합니다. 특히 예수는 영생을 언급하심으로써 제자들은 땅에서 가장 낮고 가난하지만, 부자가 얻지 못한 영생을 확실히 받게 될 것을 확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신 것은 우선 현재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처럼 사람들은 ‘번영=복’이라는 방정식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녀는 그것을 믿기에 다른 대상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청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하나님의 복’이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이들의 현재 어려움은 불행이 아니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증거도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는 젓반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면서 꼴찌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수고에 대해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역전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너무 비대하여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면 참으로 비극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다 정작 생명을 놓쳐버린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일이 도처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국은 소유지향적인 자가 잃고 존재지향적인 자가 얻는, 역설의 나라인비다. 어린 아이처럼 천국을 겸허하게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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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01)

 


천국 백성의 결혼에 대한 자세

마태복음 19장 1-12절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람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반대로 이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혼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음행과 부정이 팽배하고,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작정 이혼을 정죄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는 이혼이 올바른 최선의 선택인지 묻고 계십니다.

 

  • 마태복음 19:1-20:16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행하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를 설명하는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로서 가야 할 길을 가르칩니다. 결혼, 이혼 독신, 자녀, 돈이라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다룹니다. 본문은 3-12절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길(1-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바로 믿을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주 건강한 몸으로 스스로 예배에 참여하고, 건장한 정신으로 예배 시간 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드리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모임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기회는 그렇게 많지 ㅇ낳기 때문입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2)

 

본문은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지역으로 들어가신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직통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요단강 서쪽 길을 따라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예루살렘에 도착한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울수록 반대하는 사람과 갈등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사역의 출발점인 갈릴리는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걸고 있는 길은 이생에서 마지막 걸음입니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직접보고 믿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북쪽 갈릴리 사역처럼 남쪽 유대 지역에서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2; 참조 4:25; 8:1,18; 12:15; 13:2).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중에도 자기 백성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변함없이 긍휼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20:29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등장한 무리 중에서 두 소경을 치유하실 것입니다(30-34).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치유했지만, 예수님께 또 다른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은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와 ‘왕’으로 전할 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 속에 결혼(3-9)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지만 어설프게 알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성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지 모릅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3-9)

 

예수님께서 나와서 겸손히 치유 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짜임을 들어내고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함정(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도록 아주 애매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 이혼에 대해 묻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들이 이혼 문제를 가지고 질문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이혼에 대한 견해를 밝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에 처하도록 질문을 던졌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헤롯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 지역의 통치자였는데, 아내와 이혼하고 형제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요한이 형제의 아내를 취한 문제를 지적한 것을 계기로 잡히고 참수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시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신명기 24:1를 염두해 두고 질문합니다.

 

(2) 예수님의 대답(4-6)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읽지 못했느냐?’라는 하십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전문가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즉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시는 표현입니다(12:3,5; 21:16,42; 22:31).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인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는 말씀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결혼에 대한 첫 명령을 소개합니다. 먼저 창세기 1:1과 1:27을 사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을 말씀을 통해 성경적인 결혼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해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세기 2:24) 말씀을 들어서 이혼을 반대하셨습니다.

나중에 신명기에 소개된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 마음’에 불가피하게 이혼 규정을 만드신 것이지, 더 중요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결혼)이 반영된 시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남자’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여자’를 강조하고 의도함으로써 남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여자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결혼은 세상의 시작부터 한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하나님의 형상의 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창세기를 인용하신 것은 창세기가 신명기보다 더 권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신명기 24:1은 인간이 죄인인 상태이기에, 신명기의 가르침을 하나도 손대지 않고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 결혼에 대해 의도하신 것을 창세기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므로 신명기의 가르침도 다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핵심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연합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부는 나눌 수 없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육체를 이룬다는 표현에는 ‘부부’의 연합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보다 더 우선적인 점을 암시합니다. 물론, 부모에 대한 효도는 제5계명이 엄격히 명령하므로 한 육체가 된 부부가 부모를 떠난다는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떠나는 목적은 부부의 연합을 위해서 다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채 부모(아내 입장에서는 시부모)의 통제를 받게 되면, 이것은 왜곡된 질서가 되고 결혼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면서도(마태복음 15:36) 부부가 한 육체를 이룬다는 사실에 순종해야 합니다. 창세기 2:24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 결혼입니다.

한 육체가 되었다는 표현은 성적인 결합이 핵심 요소인 것을 나타냅니다(참조. 고린도전서 6:16). 둘을 한 육체로 묶은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성적인 하나 됨을 도외시하면서 정신적이거나 은유적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 명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결혼은 거룩한 것이며 인간이 주도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불륜은 연합을 깨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육체가 된 이상 분리되는 것은 육체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둘이 한 육체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결혼의 하나 됨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혼과 재혼은 일어납니다. 따라서 둘이 하나 된 육체가 나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보다는 나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마음이 완악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땅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말씀을 결혼과 이혼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한 육체로 묶어주신 주권에 복종하여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3) 바리새인들의 반론(7)

 

예수님께서 창세기에 근거해서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치시자 바리새인들은 다시 신명기 본문으로 질문합니다(신 24:14), 예수의 해석에 반대한 바리새인들은 한 육체를 강조한 예수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혼이 불가하다면 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보내라고 명령했는지 묻습니다(신명기 24:1).

 

(4) 예수님의 반론(8-9)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신명기 24:1을 이혼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았고, 이 본문에 기초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5:31). 이들은 모세를 문장 앞부분에 둠으로 예수와 모세를 대조하여 모세가 하라고 명령한 것을 자신들이 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명령'했다고 표현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8).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에 이어서 ‘처음부터’를 반복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지기 전에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십니다. 이혼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배려한 하나님의 허락일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나라의 새 시대가 왔고 새 시대의 제자들은 소금과 빛으로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 포함되지 않으므로(에스겔 36:26) 창조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의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행위입니다(9; 5:31-32). 만일 아내가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이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도 간음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닌 성경에서 결혼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독신을 허용하는 경우(10-12)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비혼이나 독신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으면 거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소명을 주셨을 때 건강한 독신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관습에 기대어 비혼이나 독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를 그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들을 공동체가 격려하고 대안 가죽이 되어주야 합니다.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12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10-12)

 

이혼에 대한 예수의 엄격한 잣대는 제자들의 오해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이혼이 그 정도로 어렵다면,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와 같다면,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10). 예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주어진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11). 결혼은 규범이고 독신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진 예외적인 은사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보다 더 큰 가치인 하늘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2절의 고자가 결혼하지 않는 독신을 가리 키는지, 배우자의 죽음 이후 재혼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학자들의 입장이 갈립니다. 전자는 하늘나라의 높은 가치를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활동한 경우도 포함합니다(참조, 고린도전서 7:32-34). 후자는 배우자의 사망 이후에 재혼하지 않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은 둘 다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는 은유적으로 제자의 삶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의 삶은 여러 가지 점에서 제약을 받고 어려운 길이므로 제자도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는 결혼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위해 결혼이라는 중요한 것을 희생할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이 은사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개인이나 단체가 결혼이든 독신이든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독신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거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소명을 주셨을 때 건강한 독신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관습에 기대에 독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를 그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들을 공동체가 격려하고 대안 가족이 되어 줍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결혼이나 이혼, 혹은 독신을 선택한다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태든 자기 백성이 소명에 따른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죄가 그 연합을 깨뜨렸지만, 이제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그 연합을 다시 회복하시는 시대가 왔으니 제자에게 이혼은 더욱더 허용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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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3)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나타낼 용서

마태복음 18장 21-35절


 

용서를 한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용서는 했지만, 생각하면서 피해받은 것을 생각이 나서 힘들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나갑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가 가득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을 살리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오늘도 크나큰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나가길 원합니다.

 

  • 본문은 1-20절에 연결됩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작은 자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것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권면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하늘의 응답과 임마누엘을 확신하는 가운데 치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도 마음으로는 용서하며 대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제한이 없는 용서(21-22)

바르게 용서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받은 용서를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용서받은 극악한 죄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건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는 이 용서의 은혜 때문에 우리에게도 관습과 상식을 초월한 용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21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1-22)

 

본문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향한 용서의 횟수에 대한 질문(21)과 예수님의 대답(22)입니다. 18:1-14과 21-35절은 각각 제자들과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2-4절과 22절에 나오며, 이어지는 비유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2절을 답으로 제시하셨고, 23-35절은 동일한 의미의 답을 비유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는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21). 베드로는 15절에 나온 죄지은 형제와 관련해서 질문했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은 인간에게는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이며(참조, 잠언 24:16),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관대함을 보여줍니다. 어떤 점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일곱 번의 용서마저도 무제한적인 용서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흔 일곱의 일곱 번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표현은 77회 혹은 490회(70×7)를 의미합니다. 사실상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좀 더 관대하게 일곱 번까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한계조차 정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되 한없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평가할 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해야 합니다. 부주의한 말로 비방하거나 세상처럼 경쟁하거나 유혹함으로써, 혹은 용서를 거절하거나 차별하거나 헌신을 강요함으로써 지체를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23-35)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웃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게 됩니다. 용서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완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있는 그대는 수용하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그분의 주권에 맡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23-35)

 

예수님께서는 22절의 대답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23절의 ‘그러므로’는 ‘용서가 무제한적이기 때문에’와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결산하기 위해 왕 앞에 왔습니다. 만 달란트는 약 20만 년의 입금에 해당하므로 종은 현실적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종은 재정 관리를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갚을 수 없었기에 주인은 아내와 자녀와 모든 소유를 함께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25).

주인의 말에 종은 엎드려 절하며 참아 주시면, 즉 시간을 더 주면 갚겠다고 다짐합니다(26). 그 정도 규모의 손실을 끼친 것도 그렇고, 갚을 시간을 달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그렇고,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독자들 중에 아무도 이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의 주인도 당연히 갚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왕은 종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27). 이유는 ‘긍휼’입니다. 긍휼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필요를 보면서 느끼는 예수의 성품을 뜻합니다(9:36; 14:14; 15:32; 20:34). 흥미롭게도 빚을 ‘탕감하다’의 표현으로 ‘용서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빚’과 ‘죄’는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됩니다. 종이 탕감을 받고 나서 주인의 집을 나갔을 때, 동료 종들 중의 한 명을 찾았습니다. ‘동료 종’은 둘 다 동일한 신분임을 뜻합니다. ‘찾았다’의 의미는 탕감 받은 종이 의도적으로 빚진 동료를 찾아 나선 것을 의미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은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간청합니다(30). 그러나 탕감 받은 종은 동료 종을 끌고 가서 빚진 것을 갚을 때까지 옥에 던져 넣었습니다. 빚 때문에 투옥시키는 일은 구약과 랍비 문헌에서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종의 마음은 ‘그러나 그가 원치 않았다’는 표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30). 23절과 30절에 의도를 반영하는 ‘원하다’라는 동사가 동일하게 사용된 것은 주인이 종의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는 빚을 탕감하기를 원했던 모습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빚을 탕감할 수 있는 의지는 긍휼에서 나오는 것인데, 종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본 동료 종들은 큰 충격을 받아 주인에게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31). 주인은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행한 이야기를 듣고는 종을 불러서 ‘사악한 종’(참조. 25:26)이라고 정죄합니다(32).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지만, 그렇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5:7). 주인은 자신이 종을 불쌍히 여긴 것처럼 그 종도 동료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합니다(33). 주인은 분노하며 모든 빚을 갚을 때까지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 종을 넘겨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34). 만 달란트의 빚을 모두 갚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옥에 갇힌 상태에서 돈을 벌 기회는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비유를 해설하십니다(35). 비유에서 왕은 하늘 아버지를, 동료 종들은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본질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는 용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은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참조 12:34; 15:18,19). ‘마음으로부터’는 쉐마를 떠올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신명기 6:5; 마태복음 22:37).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특히 공동체 강화(18장)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이 비유 역시 교회 공동체를 점검하고 실천해야 함 규범으로 주어졌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예수님의 긍휼로 용서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비유는 용서하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1:21에서부터 죄를 용서받는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라고 전제한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처럼, 이 나라의 특징인 용서도 하나님에 의해 먼저 주어집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긍휼로 주어졌다. 긍휼은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의 특징입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경험한 여부가 용서하는 행위로 입증된다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경험한 참 제자라면, 형제의 작은 허물에 대해 비유의 종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형벌에 처해진 종은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채무가 있는 자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함으로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용서하셨으나 그 용서를 믿고 감사한지 여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탕감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용서할 것을 전제로 주어집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돌아서자마자 작은 긍휼히 필요한 자에게 큰 심판을 내리는 사람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용서하라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한없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은 작은 긍휼함이라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은 교회는 용서하는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긍휼의 마음으로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긍휼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나라며, 긍휼이 확대되는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용서입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하고 교인을 통해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용서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렵기에,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용서는 아버지의 완전하심처럼 완전을 지향하라는 명령입니다(5:21-48).

따라서 긍휼이 없고 긍휼이 용서로 입증되지 않는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못지않게 교회에서 명예 훼손과 관련한 소송이 많고, 일곱 번이 아니라 한 번의 관용도 베풀지 못해 사람들을 정죄하고 쫓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바른 교리는 생명과 같지만, 세상은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


 

주님의 나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세상 논법으로 담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의의 나라이지만 정의를 넘어선 용서와 희생과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용서와 사랑을 시작하셨고, 아들께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 공동체도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저희 온 공동체가 배워서 한 뜻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위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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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4-01)

 


하나님을 향한 욥의 탄원 기도

욥기 13장 20절-14장 22절


 

고난 당한 것이 전적으로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으로 크게 마음이 상한 욥은 그들을 향한 항변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욥이 드린 이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기도는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는 연약한 자의 간절하고 정직한 부르짖음이고 호소입니다.

 

  • 세 친구들과 욥 사이의 첫 번째 논쟁(4-14장)의 마무리에 욥의 깊은 탄식이자 간절한 기도문이 위치해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 지적한 후, 욥은 다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이 기도문의 흥미로운 점은 시편의 탄원시 등에서 하나님께 환난과 어려움 등에서 구원을 요청할 때 사용하는 어휘들, 즉 ‘살려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들이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탄식(13:20-28)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인간이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은 성도는 영적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0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21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22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23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24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25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26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27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28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20-28)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라고 진단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그러하니 문제의 해결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5:8, 엘리바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8:5, 빌닷),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11:13, 소발). 친구들의 진단과 처방이 무색하게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고 탄원했습니다. 세 친구들과의 첫 번째 논쟁을 마치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합니다.

욥의 눈은 이제 친구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1) 저에게 손을 대지 말아주시고 저를 무섭게 하지 말아주십시오(21); (2)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게 말씀해주십시오(23). 21a절을 직역하면 '당신의 손이 나로부터 멀어지게 하소서'인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치다’가 역병 등의 재앙을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손이 멀어지다’라는 표현은 욥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멈춰달라는 부탁입니다. 이러한 부탁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 숨지 않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20b)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기 위함입니다(22). 22절의 ‘당신은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는 ‘내가 당신께 드리는 말씀을 듣고 내게 대답하소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욥은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만약 자신이 잘못을 했다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23),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원수”로 여기시는지(24) 알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원수”는 히브리어로 ‘오예브’인데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예브’는 욥기에서 총 세 번 나오는데, 이 구절(13:24)과 이 구절을 인용한 엘리후의 말(33:10), 그리고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곧 악인이고 불의한 자라는 욥의 말(27:7)에서 쓰입니다. 이 세 번의 용례 모두 욥이 누군가를 (능동적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욥 자신이 친구들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수동적으로 대적을 당하고 있는 경우를 지칭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26). 욥은 그 크신 하나님에 비해 보잘것없이 작고 하찮은 인간을 대비시킵니다. 친구들도 이런 대비를 하는데, 친구들은 이 대비를 욥에게만 적용하고 정작 친구들 자신은 하나님의 운행 원리를 다 알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여기지만, 욥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합니다. 욥 자신은 ‘떨어지는 낙엽 하나’ 혹은 ‘바짝 마른지푸라기’(25)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한다’고 하소연합니다. 욥은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처럼 하찮은 존재에게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발바닥에 ‘노예’라는 표식을 새겨 넣어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지를 묻습니다(27).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처분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나는 썩은 물건이 낡아지듯 낡아졌으며, 좀 먹은 의복처럼 너덜너덜해졌다’면서 욥은 그 이유를 간절히 알고 싶어 합니다(28).

 

하나님을 향한 탄원(14:1-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우리 마음의 쓴 뿌리, 상처, 가시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 앞에 주저하지 말고 마음에 있는 바를 정직하게 아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십니다.

 

1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3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6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18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1-22)

 

욥기 14장은 전체가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 혹은 탄원이므로 14장을 두 단락이나 혹은 세 단락으로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13장에서 욥은 하나님과 법적 분쟁을 하고 싶고(3절 “변론하려 하노라”), 자신이 그분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살아온 것을 입증하는 변론을 다 준비했다고 말하지만(18), 그러나 13:20부터 14장까지 이어지는 욥의 말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법정적 증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3장의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는 주제로 회귀합니다. 물론 단순히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탄식은 그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 지혜의) 이해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욥의 탄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유)을 배경으로 합니다: (1)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극명하게 대비; (2)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행하시는 것처럼, (까닭 없는) 고통을 주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13장에서 욥이 자신을 낙엽과 지푸라기, 벌레 먹은 옷에 비유한 것처럼, 14장의 탄식 역시 자신을 포함한 인간 전체의 보잘것없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위엄과 유한한 인간의 잠정성과 유약함을 대조합니다. 인간은 한번 피었다가 금세 시드는 꽃 한 송이나,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그림자 같이(2) 짧은 인생을 살 뿐입니다(1).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에 어떤 선악 개념을 기반으로 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꽃이 선한 일을 해서 피고 악한 일을 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 역시 선악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인간을 굳이 눈여겨 보시고 재판까지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3).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신적 정결에 미치지 못하는 더러운 피조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4). 꽃과 그림자처럼 인간이 탄생했다 죽게 되는 날을 정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5).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5b절)이라는 표현에서 “규례”는 ‘호끄’를 번역한 것인데, 어원적으로 ‘한계’(limit)를 뜻합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입니다. 문맥상 하나님께서 정하신 각 인간의 수명을 의미합니다. 13절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3).

7-12절에서 욥이 사람과 자연을 대비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나무의 질긴 생장력과 부활 갱생을 예찬하고(7-9), 나무에 비해 이승의 삶으로 끝나는 인생은 비참하고 허무하다고 말합니다(10-12). 나무는 비록 찍혀서 죽더라도 “물 기운(원문은 ‘물 냄새’)에” 다시 싹이 트고 가지가 자라 새 생명을 얻습니다(7-9). 아무리 힘이 센 사람(“장정”)도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며(10)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12).

13-15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자신을 스올에 잠시 감춰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세 절은 가정법입니다: “아, 나를 감춰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6절에서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라는 문장은 ‘그를 죽게 해주소서’라는 의미였는데, 욥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문맥을 제하고 보면 규범적 지혜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들입니다: “감추시며”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13),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14),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15). 이런 표현들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죄를 용서해달라거나 자신을 선대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알려달라는 의미로 쓰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 표현들 모두 이제 그만 죽여 달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스올에 감춘다’(13)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고난을 피해서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이해입니다(10,12).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 고통을 끝내는 길은 죽음뿐이라는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15)라는 표현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직접 대면을 요청하는 말이지만, 그 실제 내용은 죽어서 하나님께로 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들의 마음에 공감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름을 통해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깨닫게도 하시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듬고 그들의 아픔을 나의 것처럼 느끼지도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한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위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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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1-01)

  


왕의 승리를 기뻐하며

시편 21편 1-13절


시편20편이 왕의 출전을 앞두고 그를 축복하여 승리를 기원하였다면, 21편은 승리한 후, 돌아오는 왕과 병사들을 맞아 기쁨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죽음과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왕의 승리가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21편은 왕을 위한 감사 시입니다. 다윗은 주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또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통해 얻은 승리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왕 주변을 돌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오직 언약 과계 안에서 존속되며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신뢰를 낳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근거임을 노래합니다.

 

왕의 기쁨과 근거(1)

하나님께서는 병거와 말을 의지하지 않고 싸운 왕과 병사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왕과 백성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승리를 하늘의 승리로 완성하신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탁월한 영광으로 승리를 이루신 주님을 기뻐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1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1)

 

첫 시행의 핵심은 왕이 승리한 사실보다 그 구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부르며 고백한 시인의 말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당신의 힘으로 기뻐합니다.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그가 즐거워함이 얼마나 큰지요!’(1). 다윗은 왕의 승리가 언약 관계로 묶인 여호와의 힘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시편 20편에서 백성들은 여호와가 왕을 ‘구원하실’ 것을 고대했습니다(20:5). 그 기대가 현실화한 것을 감격하는 감사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왕이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의 ‘힘’과 ‘구원’ 때문입니다. 두 단어는 주로 전쟁과 군사적인 맥락에서 발견되며(시편 28:8; 118:14; 140:7; 이사야 12:2; 26:1),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주님의 힘이 곧 구원(승리) 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20편에서 누군가는 군사력을 의지하나 언약 백성의 공동체인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는(20:7) 고백의 흐름을 잇습니다.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2-7)

시시각각 우리를 노리는 사방에 노립니다. 그런 악한 영들을 분별할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야 합니다. 사방에 도사린 영적인 어두움을 잘 분별하고픈 우리의 갈망과 기도 역시 주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대로 잘 분별된 영성으로 늘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셀라) 3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4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5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6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7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2-7)

 

승리하고 돌아온 왕을 보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쁨의 근원은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 기쁨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나열하는데,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에 감사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마음의 소원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2-3)

 

다윗은 왕의 기쁨과 큰 즐거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밝힙니다. 여호와 이름을 이미 부른 상태에서(1) 시인은 고백합니다. ‘당신이 그의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그의 입술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2). 여호와는 왕의 ‘마음의 소원’, 곧 마음에서 솟구쳐 오르는 간절한 열망을 주셨고, 왕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의 ‘마음의 소원’을 주신 주체가 여호와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왕의 마음에 타오르는 열망은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이기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뜻과 왕의 소원이 일치합니다. 언약 관계 안에서 인간 왕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참조. 예레미야 32:38-39; 에스겔 11:19-20) 매우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왕은 한마디로 여호와가 지목하신 왕이었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3:14). 여호와가 왕을 위해 주신 마음의 소원은 왕의 입술의 요청으로 발설되니 거절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왕을 ‘아름다운 복’으로 기꺼이 맞이해주시고, 순금으로 만든 왕관을 씌우셨다고(3) 여호와를 찬미합니다. ‘복’(베라카)은 옛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세기 12:2; 28:4; 49:25). 이는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더군다나 순금의 왕관을 왕이 스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씌워주신 것에 시인은 감격합니다. 여호와가 왕의 적법한 통치권을 수여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2) 지속적인 복과 여호와의 인애(4-7)

 

왕이 생명을 구하면 여호와가 생명을 주셨고, 왕이 오래오래 영원한 날들을 살게 하셨습니다(4).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주시는 분이지만, 놀랍게도 왕에게 ‘영원한 날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왕이 사람인데 ‘영원한 장수’(개역개정)가 가능합니까? 고대근동 세계에서왕의 장수를 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기도제목이며(열왕기상 3:11,14; 시편 61:6; 72:17) 문학적인 과장법입니다.

다윗은 생명과 장수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을 통해 왕의 영광을 크게 하셨고, 여호와가 왕에게 존귀와 위엄을 입히셨다(5)고 찬미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위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 왕은 하나님의 영광, 위엄, 존귀를 반영하는 자가 됩니다.

다윗은 참으로 여호와가 왕에게 ‘항상’ 지속되는 ‘복들’을 부으시고, 주님의 임재 앞에서 기쁨으로 즐겁게 하심을(6) 노래합니다. 이는 생명과 다양한 종류의 필요한 복들이 반복되는 현재를 항상 누릴 수 있게 하신 주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다윗은 ‘그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니(보테아흐), 가장 높으신 이의 인자함 때문에 왕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7) 고백합니다. 언급된 ‘왕’은 다윗입니다. 이때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함’, 곧 실패하지 않는 ‘언약적인 사랑’이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삶의 안전은 보장됩니다. 무엇보다 언약 관계를 특징짓는 두 단어, ‘인자함’과 의심하지 않고 의지하는 관계는 시 전체를 압축하고 요약하는 말입니다. 이는 언약 백성을 대표하는 왕과 하나님의 관계를 특징짓는 말이며, 언약 관계가 지속되려면 ‘신뢰’가 유지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7절은 공동체가 예배 시간에 가장 엄숙하게 낭독하는 언약 신앙의 고백인 셈입니다.

 

왕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복(8-12)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 이루실 완전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왕은 남은 대적들을 섬멸하고 보좌를 굳건하게 할 것입니다. 하늘에 오른 왕이 만국을 미혹한 자를 불과 유황 못에 던질 것입니다. 왕의 승리를 본 교회는 승리를 믿고 기도하며 마지막 싸움에 참여해야 합니다.

 

8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 9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 10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11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12왕이 그들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8-12)

 

이 단락에서 문장 형식이 달라집니다. 6절까지 여호와를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언급했고, 7절은 다시 ‘여호와’(1)를 직접 거명했습니다. 다시 인칭대명사 ‘당신’을 언급하는데 ‘당신’이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인지, 왕인지 모호합니다. 그러나 ‘언약적 사랑’의 혜택을 누린 왕을 연속적으로 말하므로 8절의 ‘당신’은 왕입니다. 개역개정 본문도 ‘당신’을 ‘왕’으로 표기했습니다. 이어지는 시행은 문맥상 마치 왕을 위한 신탁 말씀이 전달되는 분위기입니다. 왕의 손은 모든 원수를 찾아내고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낼 것입니다(8). 왕이 노할 때, 원수들은 풀무불처럼 타오르고, 여호와의 분노는 그들을 삼켜 소멸할 것입니다(9). 여호와의 진노 자체가 불이 되어 삼켜버렸고, 왕의 분노는 곧 여호와의 분노와 동일시됩니다. 이는 또한 여호와의 뜻과 왕의 마음이 일치된 것을 표현한 2절과 비슷합니다. 원수의 완전한 소멸은 왕의 원수들의 후손까지 확장됩니다. 왕은 자기 원수의 후손을 땅에서 멸하고 완전히 씨를 말리게 될 것입니다(10). 후손들까지 멸하는 것은 고대 전쟁의 특징이고, 고대근동 세계의 종주권 조약에서도 불충성한 속국 왕의 후손들을 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시편 37:28; 호세아 9:11-14). 또한 왕을 해하려고 누군가 음모를 꾸미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11). 왕이 원수들의 등을 돌리게 하여 그들 얼굴에 활시위를 당길 것입니다(12). 겁에 질려 등을 보이며 도망치던 원수들이 얼굴을 돌리게 만들어 치명타를 입히는 장면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목한 왕에게 패한 원수들과 대적들은 세상에서 끊어질 정도의 철저한 패배가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처럼 다윗과 하나님의 언약은 왕의 모든 통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적들과의 전쟁에서 생존할 것이며, 그 생존의 필연적 이유는 군사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을 신뢰하는 것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찬양과 근거(13)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날에 심판의 화살이 아닌, 영광과 존귀와 위엄으로 옷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왕은 전쟁에서 살아남기만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자손손까지 그 생명(왕위)을 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3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다윗의 감사 기도의 마무리는 찬양과 다짐입니다. 왕을 위한 이 기도문의 작성자가 예언자인지 제사장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누구든 21편의 기도문을 작성한 다윗은 최후 승리의 약속 또는 신탁의 말씀을(8-12) 받았기에 주님의 능력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합니다’(13). 여호와의 능력을 찬미하는 시인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여호와 ‘당신의 힘으로’(베아즈카) 왕이 기뻐한다고 감사를 드린 것처럼, 기도의 마지막에서도 ’당신의 능력으로‘(베우제카) 높여지기를 찬미합니다.

시인은 승리에 도취되어 여호와의 능력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이 높여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언약공동체, 곧 ‘우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힘’, 그의 ‘권능’(개역개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를 것을 다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개입하셔서 그의 혁혁한 능력과 승리가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반응입니다.


 

인생은 날마다 전쟁 같은 날입니다. 생존을 위해 출정하듯 출근합니다. 슈퍼 갑의 세상과 분투하며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왕이 되셨고, 마침내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노래하며 세상의 맞서 그리스도의 남은 싸움을 싸워 승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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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2)


잃어버릴 수 있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

마태복음 18장 11-20절


오늘날은 영혼을 귀히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파라오의 나라처럼, 생산성에 기여하지 않는 이를 배제하고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교회도 작은 자를 무시하고 큰 자 중심으로 운영합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을 향한 주님의 관심은 무한하십니다. 재자 된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 본문에서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 하늘의 장면(14), 공동체를 위한 훈육(15-20)으로 구성됩니다.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교회는 회복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이 고회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15-20절의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들이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고 모두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사랑하시는 작은 자들을 다양한 이유로 실족하게 하는 죄는 실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비방이든 외면이든 우리의 사랑에서 누군가를 제외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2-13)

 

12-13절의 비유는 하늘의 장면을 묘사하는 10, 14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독자는 하늘의 장면과 연결해서 비유를 해석해야 합니다. 12절의 ‘플라나오(πλαναω)’는 ‘잃다’보다는 ‘헤매다’에 가깝습니다. 양이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는 아닙니다. 이어지는 15-20절과 18장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길을 헤매는 양은 어떤 문제를 일으켰습니다(12). 길을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은 남아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 비하면 가치가 낮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안에 얌전히 있는 양 무리에 비하면 이탈한 한 마리의 가치는 더욱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양에 대한 묘사와 양처럼 길을 헤매는 것에 대한 표현도 구약에 많이 등장합니다(예, 시편 23편; 시편 119:176; 이사야 53:6; 예레미야 50:6).

비유에서 목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목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선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은 고난의 종의 모습과 같습니다(이사야 53:3,6). 14절은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찾는 이유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밝힙니다. 하늘에 있는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자는 땅에 내려와 무가치해 보이는 한 마리 양을 찾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14)

공동체는 용서와 권면을 통해 잘못된 형제들에 단 한 명라도 돌아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는 신중하면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형제의 잘못에 눈감아서는 안 되며 또한 무책임하게 폭로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된 사람도 존중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두세 증인과 함께 강력히 설득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공동체 전체의 권위를 빌어 설득하는 절차를 제시해야만 합니다.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점에서 목자는 제자들의 모본입니다. 18:1-10의 설명에서 살펴본 격과 같이,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4절이고, 10-14절은 간접적인 대답입니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까? 하늘나라에는 제자들이 기대하는 그런 큰 바는 없지만, 분명히 큰 자는 있습니다. 양을 찾는 목자가 바로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인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헌신하며, 그 좌정에서 고난의 종처럼 낮아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목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회복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고난 받는 목자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목자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는 4절의 의미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낮은 위치로 내려가기도 하며,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닥쳐오는 수치를 겪기도 합니다. 작은 자 한 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수치를 겪을지라도 목자-종의 낮아지는 과정이 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타인의 회복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낮아지는 삶이 있기에 교회와 세상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훈육(15-20)

하나님께서는 용사와 징계의 권위를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지은 한 형제를 대하려면 같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정죄할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 잘못한 지체를 대하는 공동체의 전제 조건입니다.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5-20)

 

1-14절은 자연스럽게 15절로 이어집니다.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이 자신의 회복을 시도하는 사람의 노력을 무시할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형제에게서 피해를 입으면 맨 먼저 그 사람과 일대일로 만나 책망해야 합니다(15). ‘책망하다’로 번역되는 ‘엘렝코(ελεγχω)’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용어는 지혜 문헌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아버지나 하나님께서 개선의 목적으로 교정하거나 훈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잠언 9:7이하;3:11; 히브리서 12:5; 요한계시록 3:19; 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 디도서 2;15; 유다서 1:15). 이 단어는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잘못된 행위, 곧 죄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회개하도록 설득하거나 가르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마태복음 18:15; 에베소서 5:11), 목회서신의 경우처럼 공동체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 디도서 1:9;13; 2:15). 그러므로 책망하는 것은 죄를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에 목표를 돈 행위입니다(참조, 레위기 19:17; 잠언 3:12;욥기 5:17). 이 용어의 용례는 길을 헤매는 양을 회복시키는 목자의 그럼을 담은 18:10-14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개별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상대방을 보호하는 차원의 행동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책망을 들으면 형제와의 화해가 이뤄집니다. 화해를 먼저 시도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정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수치를 감수하면서도 형제를 회복시키려고 나서는 도를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에 해당합니다.

 

사적인 대화에서 실패하면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만일 두세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나서야 하고, 교회의 훈계마저 무시하면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킵니다. 누군가를 이방인과 세리로 대우하라는 것은 그 사람과 더 이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교회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형제로 생각하지 말고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합니다. 이런 명령은 교회의 합의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므로 교회의 공식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땅에서 매고 풀 때마다 하늘에서 매이고 물리는 것을 약속하십니다(18). 매고 푸는 의미에 대해서는 16:18-19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법적이고 행정적인 개념을 내포하며,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의 권위가 강조됩니다. 15-17절의 내용과 연결해 보면, 세 단계에 걸쳐 주어진 훈계와 회복의 절차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을 교회가 정계했을 때, 교회는 이 결정이 하늘에서 인정받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과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땅의 총회이고 하늘에는 하늘의 총회가 있는데, 두 총회는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는 비록 약하고 형제의 문제 때문에 휘청거릴 수 있지만, 교회의 뿌리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교회의 결정에 하늘이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에서 출발해서 교회의 정체성과 특권으로 확장하여 교육하십니다(19). 두 사람이 땅에서 기도한 것을 합의하면 하늘에 계씬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결정은 반드시 기도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징계를 결정하든 영접을 결정하든, 모든 행위는 기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즉,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무엇을 합의하거나 합의하지 않을 때 참여하는 최소한의 단위입니다. 공고의 목적을 무시한 채 진행하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둘이나 셋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모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합의하고 기도한 내용에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인 ‘임마누엘’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형제를 징계하는 매우 어려운 순간에서도 임마누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을 굳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긍휼의 공동체이면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죄의 문제를 엄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교회가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결정은 하늘에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권징을 한 후에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두세 사람을 언급하심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교훈은 교회 구성원의 합의를 강조하고 특정인의 독단적인 주장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성은 임마누엘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교회는 개인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모였음을 늘 인식해야 하며,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때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돈에 집착하면 물질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도덕에 매이면 정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는 한 영혼을 귀하게 보는 공동체입니다. 작고 가난하고 모났을지라도 그 영혼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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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1)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

마태복음 18장 1-10절


인간의 비교의식은 타락한 본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한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묻습니다. 인간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순한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고 계십니까?

 

 

  • 본문에서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큰 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존재(2-5)와 하늘의 장면(10)으로 대답하십니다.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옥의 실상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6-9).

  

하늘나라에서 큰 자(1-4)

천국을 소유한 자들은 영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를 갈망하고 핍박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사람들입니다. 주의 도우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면, 아직까지 우리는 참 복음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4)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큽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왕적인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다스리실 지상 왕국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된 나라, 이방의 제국이 물러가고 세리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청결하게 된 나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권위의 체계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새로운 나라의 권력 순위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특히 그들의 질문은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와 관련이 있습니다(17:24-27).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금을 내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땅의 왕들이 세금을 면제받듯이 하늘나라 왕의 ‘아들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25-26).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예수님께서 통치하실 나라에서 차지하게 될 구체적인 서열을 알고 싶어한 것입니다(20:26-2; 23:1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을 듣고 그들이 배워야 할 모습으로 제시하려고 어린 아이 한 명을 그 제자들 가운데 세우십니다(2). ‘돌이켜서 …처럼 되라’(3)는 말씀은 제자가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대답은 4절에서 나옵니다. 3절과 4절은 개념상 연결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원리(3)는 하늘나라에서 ‘큰 자’의 개념(4)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존재 혹은 구원과 관현이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은 실존 혹은 생활의 관련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는 하늘나라에서의 생활 원리에도 적용됩니다. 어린 아이처럼 돼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큽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때 얻는 것이기에, 어린아이처럼 의존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크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너희’인 제자들이며,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약속(16:1)이나 17장에서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26)고 말씀하신 내용은 제자들의 신분이 하늘나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1장 이후 19:28에서 제자들은 종말론적인 하늘나라에서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따라서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신분이나 구원을 빼앗길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제자는 이후에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낮추는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갔다(‘소금’)고 해서 어린아이의 태도(‘소금의 맛’)를 버리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께만 의존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으며, 종말론적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 원칙은 또한 타인을 위해 또는 길을 헤매는 사람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삶으로(18:12-13) 나타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는 삶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존하는 상태와 절대 낮아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수평적으로는 공동체나 사회에서 수치를 경험하는 삶으로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노해하면서도 타인에 대해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은혜로운 교회는 서로를 겸손히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태도와 운명(5-9)

성도들은 세상의 권세에 대한 누림을 갈망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또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힘없는 듯이 보이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갖고, 디 힘이 있을수록 자발적으로 이런 삶을 추구하지 않으면 저절로 영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5-9)

 

어린아이의 존재는 5-9절에서도 제자도의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반응하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할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을 영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5절은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을 선지자, 의인, 제자로 영접하라는 명령이 담긴 10:40-42의 내용과 병행을 이룹니다(특히 10:40).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제자는 가장 높으신 예수님을 대표하므로, 낮은 자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6절의 실족시키는 것은 5절의 영접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죄를 짓게 만들어버리는 행동이며, 심지어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는 죄에 대한 형벌은 나귀가 돌리는 무거운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 속으로 끝없이 끌려 내려가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죄이기 때문입니다(8). 6-7절이 타인을, 특히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자들에게 경고했다면, 8-9절은 세상에서 오는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달리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과 손이라는 신체 기관이 실족시키는 도구가 되면 그런 기관 없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발과 손과 눈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대표합니다.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게 됩니다. 8-9절은 죄에 대해 사람들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의 관점에서는 매우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보일지라도, 죄의 결과는 가해자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피해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6-7절의 메시지를 듣는 대상은 3인칭 반면에 8-9의 메시지를 듣는 대상은 2인칭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유혹에 이끌릴 위험에 처한 사람은 제자 또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작게 여기기 쉬운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옥을 사용하십니다.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지옥의 경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땅의 작은 자들, 하늘에서 있는 천사들(10)

가장 작은 자, 낮은 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무시해도 좋을 조건을 가진 자를 세상처럼 똑같이 대하면서 실족하게 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과 자신을 동일히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1절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4절이고 간접적인 대답은 10-14절이므로, 우리는 10-14절의 핵신은 하늘의 장면이며,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가 하늘 장면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목자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사람과 하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늘 장면(10)에서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하늘에서 항상 뵙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수호천사들로 해석합니다. 수호천사는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며, ‘그들의 천사들’이기 때문에 작은 자들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땅에 있는 천사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사들’로서 수호천사의 개념 이상입니다. 이들은 하늘궁정(또는 하늘회의, 하늘법정)의 구성원들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결을 받기 위해 기다립니다. 특짛 작은 자를 실족시킨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에서 전하고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립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자들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땅의 장면을 정확히 보고받으시고, 적절한 때에 무섭게 반응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작은 자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12-13절의 비유에서 설명하는 내용처럼 작은 자의 회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인간의 갈등은, 높아지고 지배하는 자리를 탐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욕심은 타인을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시선을 갖게 되고, 교만해져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천국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섬김으로 행하는 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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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02)

 


겨자씨만 한 믿음을 원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 14-27절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을 화분이나 화단에 심어서 계속 감상합니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적당하게 물과 거름을 줍니다. 만약 시시때때로 물주는 일을 게을리하면 꽃은 시들 거리다가 죽어버립니다. 영적인 성장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은 꽃에 물을 주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공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말씀과 은혜를 공급해 주셔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 직장에서 수고해서 피곤해도 기도의 시간에 빠지지 않고 철야기도회나 새벽기도회에 계속적으로 출석하는 것을 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려 했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고쳐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저기로 옮길 것이며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았던 잘못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으로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심(14-21)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척박하고 강퍅한 세상을 만나고 이곳에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내려오실 때, 산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9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없음)(14-21)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했던 것은 믿음을 기술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능력으로 지금도 행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기술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일어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1) 귀신 들려 간질 걸린 아들을 둔 사람(14-16)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에 의해 간질에 걸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오셔서 다른 제자들과 합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도움을 얻지 못한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무릎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로 비참하게 고통을 겪고 자주 불과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점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허락해준 권위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작은 믿음과 영적인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2) 무능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치유(17-1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시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탄식하십니다. ‘세대’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는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삐뚤어진 세대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제자들의 실패, 곧 믿음의 실패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십니다. 그때 아이는 나았습니다. 본문에서 ‘꾸짖었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아이의 현상이 육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 표현을 통해서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 귀신의 세력이었고,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향력을 제거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가 그 때부터 나은 것은 즉시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3) 겨자씨만 한 믿음(19-21)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병을 치유하고 나서,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작은 믿음 때문에 쫓아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의 문제는 작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재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존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란 공급해주고 보호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란 간구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믿음이 없는 상태를 꾸짖었으나 20절에서는 믿음이 작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제자들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아닙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뢰를 기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산’ 자체에 어떤 신학적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공동체이며 이런 능력은 교회의 믿음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 상황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이 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22-23)

오늘날 당신과 당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비록 이해하기 힘들고 순종하기 힘들더라도 제자들처럼 염려하지 마시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22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22-2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에 모으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의기소침한 제자들에게 재자의 참 의미를 다시 고취해줄 필요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예루살렘 여정을 앞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가버나움)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과 죽임을 당한 후 제 3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제자들의 정체를 연이어 배치한 마태복음은 22-23절에 인자의 수난을 두 번째 언급하고 곧이어 제자들의 신분을 설명합니다. 인자의 운명과 제자공동체의 운명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겠다고 말씀하지만,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매우 근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세금 납부에 관한 교훈(24-27)

오늘날 성도들은 악을 조장하는 질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지만, 공공질서를 위해서라면 자유와 권리를 양보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정당한 권리라도 분쟁의 원인이 된다면 차라리 권리를 포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입니다.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4-27)

 

본문은 성전 세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장면이 가버나움으로 바뀝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후에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본문이 나온 것처럼,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제자들의 신분 혹은 정체성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1) 성전세 문제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24-26)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세를 받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24)고 질문함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본문은 성전 세금의 이슈로 제자들의 신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전세나 속전을 지불하는 거 없이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에서 성전세와 속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전세가 중지될 것을 예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에서 성전세금을 위한 세겔을 바꿔주는 사람들의 탁자를 엎으심으로써 환전 자체를 반대하실 것입니다. 이는 속전 역할을 했던 성전 세금을 내는 일이 없어지는 것, 즉 성전 세금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가버나움에서는 성전세금인 반 세겔을 내는 동의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거두는 행위 자체를 반대하실 것입니다.

대속에 의미와 연결해보면 출애굽기 30장 16절에서 성전세금은 생명을 대속할 목적으로 지불 하는 속전이었으므로 예수님의 목숨이 속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면 성전세금은 필요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의 가르침과 같이 성전은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은 세금을 모으는 자들의 소유나 이득의 수단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집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전이 없이도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대됐던 긍휼은 성전 없이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혹은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은 성전에 충성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2) 기적을 통한 성전세 납부(27)

 

둘째 예수님께서 물고기 입에서 얻은 돈으로 성전 세금을 내게 하시는 장면은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알립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물고기라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필요를 채워주시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물고기는 통치자가 죽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고기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새 본문 7장 10절, 14장 13-21절, 그리고 15장 32-39절은 물고기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과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물고기의 관계는 마태복음 7장 9-10절에서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신 장면은 5천명이 넘는 무리에게 물고기를 제공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물고기로 4천명에게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하신 후 생선과 빵을 나눠 주셨기 때문에 물고기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적으로 돌봐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소유를 자녀를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들들을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신 내용과 연결해보면, 물고기 입에서 세금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것을 착취하는 분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서 세금을 받지 않고 자녀를 돌보는 존재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보다 우선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 자녀들에게 땅의 임금들이 하는 것처럼 무거운 재정의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내적 신념이나 의지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큰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 삶 속에서 힘있게 작동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여 큰 능력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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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01)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 1-13절


영화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다음에 상영할 영화를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을 ‘예고편’이라고 합니다. 잘 만들어지고 바르게 전달한 예고편은 관객들에게 다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예고편은 그럴싸한데 본 영화가 형편없다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욕을 먹을 것입니다. 본문은 장차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실 참모습인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입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언에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본 모습인 하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던 엘리야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1-9)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모하신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고난받으실 메시아로 드러내셨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서 수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가긴 했지만, 온전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다가, 예수님께 책망까지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1) 천상의 모습(1-2)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후 엿새 되는 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변모되었습니다.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천사처럼 천상의 존재가 된듯합니다(단 12:3). 최후 심판 이후의 존재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실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직전에 첫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셨는데(16::21-23), 천상의 존재로 변형될 예수님의 모습은 재림의 영광(16:27)을 미리 보여주는(16:28) 역할을 합니다.

 

(2) 천상의 증인들(3)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 이어서 천상의 존재인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운명처럼 영광스러운 하늘의 존재로 빛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운명처럼 영광스러운 하늘의 존재로 빛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천상을 위한 준비(4-9)

 

하늘 방문객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개의 천막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산이므로 일반 가옥을 짓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생각하고 이런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천막’의 의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70인역에서 ‘천막’는 성막을 가리키므로 처소는 광야의 성막을 가리킵니다(대하 24:6; 29:6; 시 42:4, 토빗 13:10: 지혜서 9:8; 히8:2,5; 9:11; 계 15:5; 21:3),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된 다윗의 집을 의미합니다(암 9:11; 사 16:5). 또한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초막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참조. 호 12:9; 슥 14:16-20).

 

베드로의 제안에는 반응이 없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소리가 하늘에서 들립니다. 변모된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이며, 하늘에서 들린 음성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에게 들린 하늘의 음성은 신적 메시지이므로 그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십니다. 제자들이 봤던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위를 쳐다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고 구름도 사라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과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친 핵심이었기에, 두 이미지는 각자의 기능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마태는 예수님 홀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영광스런 모습을 얻기 위해 현재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형된 모습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인간으로서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명령하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영광스런 광경에 도취 돼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면, 군중은 왜곡된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산 아래 남아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오해해서 예수님의 길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와 운명을 계시함으로써, 제자들(또는 교회)이 아들의 말에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한 예수님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견합니다. 예를 들어,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군중 앞에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운명도 그렇게 될 것을 믿어야 하며, 동시에 아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이 자신들의 삶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길이 교회의 길입니다. 고난의 삶은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순종한 아들의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본 영광스러운 광경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해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본인이 체험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 은총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본 사람은 순종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함(10-13)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고 예수님을 감싸던 영광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예수님을 가로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10-13)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제자들은 의도적으로 주제를 엘리야로 바꿉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해석의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친 사실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며 그의 사역은 모든 일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시키는 엘리야의 역할은 말라기 4:5-6에서 제시됐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6(70인역)에서는 엘리야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대상을 가족에서 ‘모든 것’으로 확장하십니다. 실제로는 헤롯에 의해 체포당해 죽음을 맞이한 요한이 ‘모든 것’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것을 회복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회복을 시작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메시지를 선포한 시점부터 모든 것의 회복은 시작됐습니다. 모든 것의 회복은 재림 때의 회복이 아니라 회개와 갱신, 곧 회복을 위한 준비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말을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대조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습니다. 11:14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이미 엘리야가 온 사실은 모릅니다.

본문은 엘리야가 온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한을 체포해서 죽인 자들, 이론을 알고 있으나 요한과 엘리야를 연결하지 못한 서기관들, 나아가 돌아온 엘리야인 요한이 오실 분으로 소개한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자신의 연대성을 근거로 인자의 운명이 요한의 운명처럼 될 것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인 요한이 겪은 운명을 따를 것이므로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인자의 수난을 예고하셨고(16:21) 변모 사건에서도 인자의 죽음(17:6)을 언급하셨으며, 이번에도 인자가 고난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온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메시아의 운명이 고난받는 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의 모습 그대로 행동한 인물인 것을 깨닫습니다(13). 제자들과 그들의 차이는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는 여부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는 자는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본 단락의 핵심은 고난 받아야 하는 메시아의 운명을 엘리야인 세례 요한의 운명을 근거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은 성경에서 예고한 대로 엘리야가 행했던 모습과 사역을 실행하다가 자기 백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요한을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내몰 것입니다. 특히, 민족의 회복을 고대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각 때문에 성경의 예고를 오해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운명처럼 백성의 무지로 배척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내리는 자들에게 의해 배척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구해야 합니다. 변화산의 놀라운 체험에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베드로의 제안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구하고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무조건 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예수님의 뜻을 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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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3-01)

 


소발에 대한 계속되는 욥의 항변

욥기 13장 1-19절


당신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아는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가르치려 하시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지식과 경험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 주는 것입니다. 명철한 판단보다 아픔을 안아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떠한 말보다 침묵이 더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 가운데 주어지는 참된 위로는 고난 중에 있는 자에 고통을 덜어줍니다.

 

  • 욥기 12장이 규범적 지혜의 한계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며 친구들의 말에 대한 비판을 전재하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13장의 욥은 친구들의 말에 대한 평가를 하나씩 나열하면서 감정에 호소합니다. 특별히,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 진정한 위로인가에 대해 깊은 울림이 있는 말을 합니다. 이어서 욥은 친두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올곧게 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친구들의 말에 대한 욥의 평가(1-12)

 

타인의 불행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를 위로해야 하고, 어떻게든 낙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욥의 친구들처럼 진정한 위로를 전하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교만과 자기 지혜로 위로보다 상처를 주곤합니다. 아마 세 친구들처럼 ‘정답’을 주려고 햇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답을 주기 위해 수고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답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1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2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3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5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7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8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9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0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1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2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1-12)

 

13장은 12장과 연결되며, 세 친구 모두에게 주는 욥의 대답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선악 이분법을 초월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 인과응보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세계를 직시하라는 말 다음에 이어집니다. 이 장에서는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규범적 지혜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합니다.

12장에서 욥은 친구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인과응보라는 렌즈를 통해 각색된 채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에 욥은 맛을 보면 무슨 맛인지 아는 것처럼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요청합니다(12:11). 13장을 시작하며 욥은 자신의 지혜는 이론적이거나 피상적인 지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고 귀로 듣고 깨달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1).

 

(1) 첫 번째 비판: 너희의 지혜는 나도 알고 남들도 다 아는 것이다(2,12)

 

친구들이 욥에게 가르치려는 규범적 지혜는 어떤 특별한 비밀이 아닙니다. ‘환상’ 같은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엘리바스)이 아니며, 선조들의 지혜를 각고의 노력을 통해 갈고 닦아야 알게 되는 것(빌닷)도 아닙니다. 좋은 것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기본적인 원리는 욥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고(2), 너무나 뻔하고 남들도 다 아는 말들입니다(12). 12절 상반절의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라는 표현을 풀이하면, 우선 “격언”은 ‘지카론’을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너희의 기억’입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기억하는 것은 규범적 지혜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법입니다. 그 다음 “재”로 번역되는 ‘에페르’는 하반절의 “토성”의 ‘호메르’와 더불어 크신 하나님에 대비하여 작고 천한 인간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입니다. 정리하면, 12절은 ‘너희가 지키려는 그 조상으로부터 배운 지식은 지극히 인간적인 속담들에 불과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2) 두 번째 비판:너희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4,7)

 

욥은 친구들이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들’이고 ‘돌팔이 의사’일 뿐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4). 그들의 말이 거짓말인 것은 직접적인 경험에 입각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사는 지역에 함께 살지 않아서 욥이나 욥의 자녀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학적 신념에 따라 그들이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욥과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욥기의 독자들은 친구들의 말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욥의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들을 ‘헛된 치유자’로 규정한 욥의 말에서 그들이 하려는 것이 욥을 치유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문하고 위로하려는 방문 목적은 욥을 고치려는 시도로 변질됩니다.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3) 비판: 너희의 말은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것이다(7-8,11)

 

친구들이 이렇듯 거짓말을 하고 가짜 치유자 행세를 하려는 의도는 고난 당하는 욥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행위일 뿐입니다. 욥과 그의자녀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면서까지 그들이 ‘살리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입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지켜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위하여”라고 번역된 전치사 ‘라메드’는 '~에게’로도 ‘~를 위하여’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에게 거짓을 말하는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해석이 다음절인 8절의 의미와 더 잘 연결됩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편을 들면서 하나님을 위해 욥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호하고 변호하려는 시도를 욥기의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을 변호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38-41장을 보라).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권선징악/인과응보의 시각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을 ‘거짓’이고 ‘헛된’ 것이라고 비판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변명하는 것이 신앙인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반성적 지혜가 드러내는 절대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변호가 필요할 정도로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11절의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저주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 천벌받을 놈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지 않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4) 네 번째 비판: 고난 당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다(5-6)

 

친구들의 본래 목적인 위문과 위로를 위해서라면 첫 칠 일 동안처럼 욥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질울며”(2:12) 친구의 극심한 고통 앞에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2:13). 욥은 친구들의 ‘진정한 지혜’는 ‘침묵’이었다고 말합니다(5). 고통당하는 자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라고 말하는 욥의 말(6)은 아마도 욥과 유사한 고난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부탁하는 욥(13-19)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어도 결국 자기를 위해, 자기 의를 위해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마음으로 상대방을 돕고 세울 능력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가져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계속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간구해야 합니다.

 

13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14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5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6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7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8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19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13-19)

 

욥은 이제 5-6절에서 언급한 올바른 위로자의 태도를 친구들에게 요청합니다. 제발 좀 입 다물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13절을 다시 번역하자면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말할 수 있도록’이 됩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말일 수도 있지만, 친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의 논리에 의하면 욥의 재앙은 욥 자신이 불러온 것이 됩니다.

14절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내 자신이 내 살을 뜯어 먹고 내 손으로 내 목을 칠 수 있겠는가!’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내 살을 내 이로 물고”라는 표현은 ‘어떻게 내가 나의 살을 내 이빨로 들어 올릴 수 있나’로 직역됩니다.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표현이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 표현은 대표적인 우리말 성경 번역들도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공동번역, “나 이를 악물고.” 친구들의 인과응보의 법칙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파악한다면, 자신의 죄로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빨로 자신의 살을 드는 것’은 한편으론 어리석고(지혜가 아니고), 또 한편으론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욥은 죽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평가받기를 원합니다.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겠다는 욥의 소망과 마찬가지로(3), 지나온 삶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친구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15). “희망”으로 번역한 ‘어야헬’은 무엇인가 소망하고 희망하는 것이기보다는 ‘기다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죽음이 자신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14)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대면하여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하나님께 묻고자 합니다. 그분만은 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아온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8).


인간은 본능적으로 질병, 재난, 경제적 어려움 등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사실 이것이 욥의 친구들의 태도였습니다. 생명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며 담대하 나서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담대함을 소유하는 데까지 성장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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