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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03)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에 답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2장 23-33절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될 수만 있으면 믿지 않으려고 주정하는 존재들입니다. 믿어야 할 이유가 수만 가지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골몰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만의 한 두 가지 이유를 찾으면, 그것으로 객관적인 수많은 진리와 증거들을 모두 거부합니다.

 

  • 두 번째 종교지도자 그룹으로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특징인 그들이 예수님에게 부활을 묻습니다. 유대교 내에서 부활은 분파를 가르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시고,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들춰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선명하게 계시해 주십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 사두개인들(23-31)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논리에 매여 있기에 부활의 본질이나 능력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어리석은 일로만 여깁니다(고전 2:14). 세속적인 논리를 버리고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지나간 자리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23-31)

 

자신의 기득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한 종교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과의 논쟁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속 시도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물러난 그날에, 사두개인들은 신학적 이슈인 부활에 대한 질문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앞에서는 세금 납부의 문제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더니, 본문에서는 신학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믿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1)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23-28)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파처럼 부활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16:21; 17:22-23: 20:17- 19). 부활이나 천사를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 교리이고 이성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제기한 문제는 모세의 수혼법에 따라 일곱 남편을 둔 여인이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부활 신앙의 맹점을 지적했습니다. 어떤 남자가 대를 이을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 그의 형제들이 남은 아내와 결혼을 해서 자손을 세워야 한다는 모세의 기록을 언급합니다. 신명기 25:5-10에 기록된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와 창세기 38:8의 내용을 연결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명의 형제가 한 명의 여자와 결혼한 예를 듭니다. 장남이 죽고 나서 차남부터 일곱째 형제까지 형수와 결혼했지만 모두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여자도 죽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일곱 남편 중에서 누가 아내의 남편이 되는지 묻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몸의 부활은 현재의 세상과 단절된 저 너머 세상의 삶이 아니라 현재의 생애와 연속되는 것이므로, 부활 교리는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만일 어떤 남자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는데도 하나님꼐서 죽은 남자를 살릴 것인지(하나님의 뜻), 과연 살릴 수 있는지(하나님의 능력) 질문합니다.

 

(2) 사두개인에게 대답하신 예수님(29-31)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두개인들이 틀렸다고 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은 헤매는 양처럼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왜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첫째,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 일어나는 두 가지 연결되는 일들을 언급하십니다(30). 부활 때에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됩니다. ‘부활 때’는 의인들의 ‘부활 상태에 있어서’에 가깝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천사처럼, 되는 사실과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강조하려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거론하십니다. 하늘의 천사들처럼 된다는 내용은 다니엘 12.3에서 온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자녀를 출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결혼이 땅의 일이며 임시적인 관계라는 사실은 연속성을 강조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부활한 사람은 땅에서 살았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지만(연속성), 부활한 사람의 몸은 썩지 않는 몸으로, 천상의 존재로 변화될 것이기에, 그 사람의 상태 혹은 조건은 달라진다(불연속성). 물론 동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새로운 몸으로 갱신될 것이기에 지상에서 가졌던 성품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했는지 물으십니다(31).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는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서(12.3; 19:4, 21:42,46)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도전하실 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29절의 ‘오해하였도다’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말씀인 출애굽기 3:6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두개인들에게도 주어졌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일이 성경을 근거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음을 본문의 논쟁이 잘 보여줍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잘못된 행위로 이어집니다. 바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의 독자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읽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32-33)

사람들이 너무 현실적이다 보면, 이처럼 내세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적당히 긴장감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의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32-33)

 

모세오경에 신학의 근거를 두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3:6을 인용해서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십니다. 출애굽기 3:6에서 하나님이 광야의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누구의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하나님이 조상들이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출 2:24, 3:6,15,16). 언약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은 이후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상태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현재적으로 함께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몸이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들의 몸은 썩어 뼈로 남아 있을지라도, 마지막 날 몸의 부활을 하는 때까지 현재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 관계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계셨던’ 과거 형의 하나님이 아니라 ‘계시는’ 현재형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두개인들은 해석의 근거로 삼는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체의 부활을 한 상태가 아니며 하늘에서 임시 상태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중입니다.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재림 전까지 의인들은 하늘에서 부활의 상태를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끝에 일어날 부활을 믿는 신앙에는 의인들이 죽음 직후에 하늘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부활과 죽음 직후의 (하늘에서의) 임시 상태는 배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근거를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는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죽어도 하나님과 함께 교제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내가 죽어도 산다는 것이 아니라 몸이 사나 죽으나 하나님과 함께 언제나 살아서, 교제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고 언약 백성,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사변적이지 않습니다. 언어유희로 정서를 만족시키는 종교도 아닙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을 믿는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바라보고 바로 이해하고 바르게 이해하길 힘써야 합니다. 무지는 오해를 낳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모세오경에서는 부활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혼법에 따라 일곱 형제의 아내였던 여자가 일곱 형제 모두가 부활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준에서 부활을 오해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논리였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성경과 신앙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셩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성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르게 바라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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