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2-04)
사두개인에 대한 평가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2장 34-46절
예수님의 이미지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꿔 왔습니다. 백인 예수, 흑인 예수, 남성적 예수, 여성적 예수, 랍비 예수, CEO 예수,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오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오해와 직결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몰이해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드러내십니까?
- 예수님께서 또 사두개인들까지 물리쳤다는 소식에 바리새인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가장 율법에 실력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섭니다. 그는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더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34-40)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이지, 말씀을 다스리려는 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켜야만 하는 또 하나의 계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통치하신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말문을 막았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 중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4-40)
바리새인들은 음모를 꾸민 끝에 한 율법사를 보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선생(교사)으로서 서기관과 동의어이며, 헤롯 정부나 사두개파(또는 성서 책임자들) 가운데도 율법사가 있어서 자문 역할을 했습니다. 본문의 율법사는 바리새인 중에서 율법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당시에 율법의 선생마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원칙에 따라 율법의 경중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느 율법을 강조하든지 다른 의견을 가진 쪽에서 제기하는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보여준 행보에 근거해서 그가 율법의 특정 부분을 무시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참조 5:17)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인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계명에 대해 묵상하는 것도 아니며, 신비적 경험을 향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39-40절을 함께 고려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너의 온 마음으로’는 마음의 깊은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의 온 목숨으로’는 순교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너의 온 뜻으로’는 생각과 계획을 세우는 과정을 포함하며, 지적 능력을 다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종합해 보면, ‘내적인’ 감정으로 느끼는 것을 넘어서 존재와 소유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가장 크고 으뜸 되는 계명입니다(3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해서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십니다(5:43; 19:19). 두 번째 계명은 순서로는 두 번째에 배치됐으나 중요성에서 두 번째라는 뜻이 아닙니다. 첫 번째 계명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가장 큰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40절에서 ‘강령이다’로 번역한 크레마뉘미 엔(κρεμάννυμι έν)은 ‘에 걸려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수동태형(크레마타이 κρέμαται)을 사용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가르침이 사랑의 두 계명(신명기 6:4; 레위기 19:18)에 걸려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운동회에서 만국기가 하나의 줄에 걸려 있듯이 구약의 모든 가르침은 사랑의 두 계명이라는 줄에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해석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첫째,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동등하게 중요하므로 두 계명을 함께 묶어서 순종해야 합니다. 레위기 19:18이 포함된 문맥인 19:11-18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 예를 제시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은 제자 공동체의 구성원이나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지 않고(5:43-47: 누가복음 10:25-37) 제한이 없습니다(레 19:34). 둘째, 사랑의 두 계명은 구약의 핵심 가치일 뿐 아니라 구약을 해석하는 원리를 제공합니다. 두 계명에 걸려 있는 어떤 율법도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의 두 계명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 계명에 따라 살아낸 열매가 최후 심판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인 것을 입증하는 근거와 평가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7:21-23: 25:31-46).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과 대답(41-46)
예수님께서는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육신적 후손이지만 그의 주가 되십니다. 단지 다윗의 영화를 재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윗의 지상 보좌를 회복하는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과 사랑의 대상이 되실 분입니다.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41-46)
본 단락은 다섯 개의 논쟁과 세 개의 비유를 마감하는 역할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제까지는 적대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면, 본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선제적으로 질문하십니다. 이번에도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해석해서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하시고(42ab), 그들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42c). 다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질문을 하시고(43-45),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46).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물으십니다.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해석하는 것을 활용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실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해, 이어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질문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사무엘하 7:12; 역대상 17:11-14; 이사야 11:1; 예레미야 23:5-6; 33:15; 에스겔 34:23-24). 다윗의 아들은 왕적인 메시아에 대한 칭호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과 같은 왕의 역할을 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시 같은 왕의 역할을 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이해하는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아들은 인간이지 신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신적인 존재임을 암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부른다면, 성령을 통해 영감을 받은 다윗이 왜 그리스도, 곧 자신의 후손을 ‘주’로 불렀는지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넣어서 다윗이 시편 110편의 저자인 것을 강조하십니다. ‘성령으로’(έν πνευματι)는 시편 110편을 선지자적인 본문으로 보게 하며 이 본문이 ‘성령의 영감으로’ 다윗을 통해 주어진 것을 내포합니다.
신약 저자들이 만물을 다스리는 예수의 유일한 신적 권위와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시편 110:1을 적용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보캄은 제 2성전기 유대교 문헌 전체에서 욥의 유언서 33:3을 제외하면 시편 110:1이 사용된 곳은 없다고 관찰했습니다. 초기 유대교의 어디에서도 시편 110:1이 지금 또는 미래에 하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늘에 승귀한 인물들(천사들이 나 족장들) 중 하나에게 적용된 적이 없습니다. 초기 유대인들의 기대 사상에서 메시아는 하늘에서 우주를 통치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땅의 통치자였습니다. 시편 110:1을 예수님의 지위에 적용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독립적인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견해에서 앞의 주는 하나님이시고, 뒤의 ‘내 주’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주로 부른 메시아에게 ‘네 원수’(메시아의 원수)를 ‘네 발 아래’(메시아의 발아래) 둘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신원하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부터 재림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통치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선조)가 어떻게 후손을 주로 부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아들(인간)인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기 이전에 이미 신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갖고 계시는 선재하신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해석에 대해서 답하지도 묻지도 못합니다.
21:23-22:46의 맥락에서 본문에 접근해보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21:23-27)과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의 물음(22:41-46)은 서로 대칭을 이룹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통치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22:43-44).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버림 받아 죽지만, 원래는 하늘에 선재하셨던 분입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주를 통치하십니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원수를 완전히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단순히 중보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충성하고 순종해야 할 왕이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확신함으로써 땅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사적 이미지를 덧입혀 전쟁을 정당화하는 호전적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기독교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의 예수 이해는 어떻게 합니까?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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