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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3-02)

 


영적 지도자들이 받을 화를 가르친 예수님(1)

마태복음 23장 13-28절


새로운 지역을 관광할 때 가이드가 중요합니다. 가이드가 그 지역을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잘 설명해주면 관광이 즐겁습니다. 만약 가이드가 길을 모르거나 잘못된 길로 안내한다면, 그를 따르는 관광객들은 그 여행을 망치게 됩니다. 관광은 한 번 망치면 되겠지만, 인생을 안내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앞서 예수님께서 화를 선포하신 예들이 있었습니다(11:21; 18:7, 참조 24:19;26:24).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일곱 번째에 화를 집중적으로 쏟아내시며 부패한 유대교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십니다. 본 단락은 여섯 가지 화를 소개합니다. 천국문을 가로막고, 교인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며, 맹세로 기만하며, 형식과 겉만 치중하고 내용과 안은 부패했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은 종교적 위선과 부패로 가득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화(13-15)

신앙 생활에서 삶과 신앙이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등대로서 빛의 역할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반대로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3-15)

 

앞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참된 지도자는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높아지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진 자는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화(13)와 둘째 화(15)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1) 첫째 화(1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행동을 한 것은 ‘위선’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표현(5:20; 7:21; 18:3; 19:23,24; 21:31; 참조 7:13-14, 18:8-9; 19:17)은 구원과 영생을 얻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23:2) 자신들이야말로 토라의 올바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성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2) 두 번째 화(15)

 

본문은 첫 번째 화의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수고해서 개종자를 만들지만, 자신들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13)과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15)은 같은 의미입니다. 개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13절과 15절은 연결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며(15:12-14, 바리새인들), 그들의 교훈은 누룩과 같이 공동체를 파괴해(16:1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람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위선은 지도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거나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위선적인 사람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해 더욱 열심히 활동하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락의 길로 함께 갑니다. 이런 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는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지도자를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함을 경고로 가르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화(16-24)

정결 규례 같은 외적인 규례는 잘 지키면서 본래 취지인 마음의 정결을 지키는 데 소홀했습니다. 마음에 탐욕(착취)과 방탕이 가득하다면 외적인 정결 규례를 잘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외적인 정결은 쉽게 내적인 부정을 감추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16-24)

 

세 번째 화와 네 번째 화는 ‘눈먼 인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특히 맹세하는 일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위험한 오해를 하게 했는데, 이 맹세하는 일은 모든 나라에서 신성시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많은 영혼들의 피를 보상해야 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고하신다.

 

(1) 세 번째 화(16-22)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진실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강조하려고 성전의 금과 같은 것을 이용했습니다. 금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기 때문에 구별됩니다. 성전이 급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 작은 것(성전의 금, 제단 위의 예물)과 더 큰 것(성전, 제단)을 반대로 생각한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단이 아니라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그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물은 제단 위에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만한 제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제단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제단과 예물 중에서 어느 것이 큰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성전으로 맹세하거나 성전의 제단으로 맹세할 때 성전이나 성전과 관련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맹세나 맹세의 대상도 하나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맹세의 대상을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하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2) 네 번째 화(23-24)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세밀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들’의 항목인 크리시스(κρίσις)는 ‘정의’에 가깝습니다(참조, 12:18, 20).

긍휼은 하나님의 뜻에서 핵심이고 율법이 지향하는 바다(9:13; 127; 호세아 6:6). 피스티스(πίστις)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번역과 해석은 미가 6:8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가가 언급하는 ‘정의’, ‘인자’(긍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신실함)은 23절의 원리에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23절의 의미는 이웃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22:34-40; 참조 5:21,26,43-48; 7:12).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에 세세히 신경을 쓰면서도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이웃 사랑을 간과하는 것은 모순입니다(참조. 22:36-40). 또한 이들은 무엇을 마실 때 율법의 가르침(레 11:4)에 신경을 써서 하루살이는 걸러내지만, 엄청나게 큰 낙타를 삼키고 맙니다. 하루살이(또는 모기)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곤충을, 낙타는 가장 큰 생물을 대표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매(하루살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에 매우 신중하게 걸러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피했다고 안심했으나 실제로는 더 부정한 낙타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성경 교사들은 신앙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을 따르는 자들도 함께 엉뚱한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어리석은 가르침과 그런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눈먼 인도자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25-28)

위선은 그 속은 뼈와 썩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겉만 그럴듯하게 회칠하여 꾸며놓은 무덤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지만, 하나님께서는 불법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헛된 만족을 버리고 허위의 가면을 벗고 주 앞에 사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5-28)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문제를 비판합니다. 그들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죄로 가득찬 사람들도 그들의 생활 속에서 비난을 받지 않고 매우 선한 것처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을 지적하십니다.

 

(1) 다섯 번째 화(25-26)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내면을 청결하게 하는 대신 외적인 종교 행위에 신경을 쓰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15:11, 17-20).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시고 먹을 때 제의적 정결을 위해 잔과 그릇을 깨끗이 하는 것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정결 규례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잔과 그릇의 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정결 규례를 지켰으나 내면은 탐심과 방탕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정결법의 핵심은 윤리적 정결입니다. 윤리적 정결이 없는 제의적 정결은 모순입니다. 특히 ‘탐심’으로 번역한 단어는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 짓 혹은 폭력입니다. ‘방탕’으로 번역한 단어는 성적인 부도덕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데, 자기 절제가 되지 않는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참조 고전 7:5). 잔과 그릇이 부정한 이유는 욕심을 절제하지 못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뺏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안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2) 여섯 번째 화(27-28)

 

26절은 그릇을, 27절은 무덤을 소재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당시에 많은 무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뼈가 노출되는 일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을 하얗게 칠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시체와 접촉해서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특히 외지인들이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오면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무덤 곁을 지나거나 무덤을 접촉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유월절에 무덤을 하얗게 치장했으며, 어떤 무덤은 아름다운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많은 무덤이 회칠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무덤은 아름답지만, 무덤 내부는 깨끗하지 않은 뼈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면은 썩었습니다.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내면에 있는 탐심과 무절제와 위선과 불법을 깨끗이 하는 것을 외적인 활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신 여섯 번째 복에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 청결한 사람들로서, 내면과 달리 곁으로만 정결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禍)를 선언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천국의 복을 내리시지만, 자기 영혼을 기만하고 타인의 생명을 파멸케 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화를 내리십니다. 더러운 속사람을 외식과 위선으로 감추고 경건으로 포장하면 땅에서는 칭찬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천국문 앞에서는 거절을 당할 것입니다. 위선은 속사람을 보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도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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