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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3-03)


영적 지도자들이 받을 화를 가르친 예수님(2)

마태복음 23장 29-39절


학생들이 공부할 때 잘할 방법은 문제집을 풀어가면서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며, 문제집의 정답과 오답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틀린 문제를 왜 틀렸는지 분석하고 연구함으로써 다음에 틀리지 않으면 실력이 상승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반복되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일곱 번째 화(29-33)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애가(34-39)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에 내려질 심판(34-36)과 예루살렘의 비참한 운명(37-39)을 예고하십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정성스럽게 가꾸면서 선지자보다 더 큰 자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이 보낸 자들을 핍박하는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일곱 번째 화(29-33)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단점을 지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판단하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되어서 동일한 환경에 처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손질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29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9-33)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화를 지적하십니다.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화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일곱 번째 화는 무덤이라는 내용으로 여섯 번째 화(23:27-28)와 연결되고 전체 ‘화’ 선언의 결론입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실수(29-3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들을 단장하면서 자신들이 조상들의 시절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29-30). 그들은 위대한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고 단장하면서 조상을 기념했습니다(다윗의 무덤-열왕기상 2:10; 사도행전 2:29; 솔로몬 무덤-열왕기상 11:43 등).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옛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 비석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마카비의 무고자들의 무덤, 다윗의 무덤 등).

과연 그들이 선지자들이 고난 당하고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가장 최근에 그들은 세례 요한이 전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거부하며 그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이런 선지자들에 포함시킵니다.

 

(2)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죄(31-33)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분량을 채워라’(32)는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할 죄를 행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입니다. 그릇이 다 채워지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집니다. 이들이 어떤 점에서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는지 34-35절에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거나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따라다니면서 박해할 것입니다(34).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조상들의 대열에 합류한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며,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곱 번째 화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질 무서운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을 증오해서 가스실에 죽였던 홀로코스트(Holocaust)와 같은 반인률적인 비극의 도구가 된 반-유대교 사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정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본문의 의도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의 윤리에도 어긋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잘못 인도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백성은 영적으로 눈먼 이들의 지도로 비참하게 고통을 겪게 될 것을 한탄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고 그 뜻대로 백성을 인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오만과 위선은 위험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이제 교회를 향합니다. 독자들은 23장을 읽으면서 옛 이스라엘이 지도자들과 함께 몰락하게 된 원인을 자신들의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느 쪽 길이 예수님의 뜻에 맞는지 성경을 통해서 철저히 확인하지 않은 채 어리석고 눈먼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일곱 화는 산상설교의 언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공유하고 있으며,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상설교의 교훈을 자신과 인도자들과 인도받는 자들의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세대와 예루살렘의 심판(34-39)

선지자적 삶을 선지자 무덤 만들기로 대체하고 의로운 삶을 의인의 기념비로 바꾼 이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입니다. 의인들의 비석을 꾸민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다고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닭의 보호 날개를 거절한 새끼들은 버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4-39)

 

29-31절에서는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보내신 주체가 하나님이었으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들이 받을 핍박은 네 개의 미래형 동사로 표현되기 때문에, 선지자들(참조, 10:41), 지혜자들, 서기관들(예. 13:52)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보냄 받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자들도 같은 맥락에서 활동할 것이기에 구약의 용어가 사용됩니다. 당시의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이미 의인들의 피를 흘린 조상들과 결속된 상태에 있고 연속 선상에 서 있습니다. 의로운 아벨의 피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당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35). ‘∽의 피’는 심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 벌을 받아야 할 책임을 상징합니다(참조. 예레미야 26:15; 요나서 1:14). 누군가에게 피가 돌아온다는 표현은 유대식 표현입니다(참조, 사무엘하 1:16; 예레미야 51:35). 이스라엘은 의로운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요엘서 4:19; 요나서1:14; 잠 6:17). 의로운 피를 흘린 의인들은 아벨에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스가랴)에 이르며, 이 기간은 ‘모든 의인의 피’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이야기는 창세기 4:10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니라.’ 특히 ‘땅 위에는 창세기 4:10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악이 쌓인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이미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비극을 통해 이런 식의 심판 공식을 경험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로 예수님께 응답하지 않고 그를 핍박해서 죽일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조상들의 피 흘리는 행위와 모종의 연대감을 갖고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서 예루살렘으로 확장하십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인격화해서 선지자들을 죽인 것(23:34; 5:12; 사도행전 7:2)과 예루살렘에 보냄 받은 자를 죽인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민족의 멸망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들을 핍박하고 죽인 예루살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역대하 24:20-22). 이제는 마지막 메신저인 예수를 죽일 것입니다(16:21: 20: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듯 민족을 품기 원하셨습니다. 어미 새가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는 것은 안전과 양육과 평안을 주기 위한 행위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품으신 사랑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참조, 신명기 32:11; 시편 17:8; 36:7; 63:7; 이사야 31:5; 34:15; 예레미야 48:40; 룻기 2:12).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날개 아래에 모으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예루살렘이 배척했으므로, 멸망의 책임은 모으려고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거부한 쪽에 있습니다. 38절의 ’버림받아‘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개념을 상기시킵니다.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과 예루살렘과 그 세대가 예수를 배척했지만, 본문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림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의 초청에서 유대인들이 제외된다는 주장은 본문의 의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1:28-30이 증언하는 것처럼 긍휼의 아들은 유대인들도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습니다(10:32-33; 12:41).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으러 오셨고, 이 사역을 위해 자신이 비참하게 버림받는 수치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새처럼 사람들을 따뜻한 품에 모으려는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23장의 말씀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이 귀를 막고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교회에 중요한 교훈으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운명과 예루살렘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일은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관과 기념비가 우리 신앙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좋은 설교를 하거나 들었다고 자동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비판하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나를 정죄할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달라.‘라는 교만을 벗고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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