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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4)

 


악한 소작인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1장 33-46절


 

인류의 역사는 거절과 패역의 역사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의 역사이며 말씀에 대한 침묵의 역사였습니다. 인류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 의지가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사람을 만들어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생명 창조의 목적입니다. 다시 새롭게 사랑의 사람으로 창조하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 본문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세 가지 비유 중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소작인의 비유와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혈통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33-39)

세상에 대한 탐욕과 정욕은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욕망을 덜어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열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것을 귀하게 보고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으신 하나님의 신비를 믿어야 합니다.

 

33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33-39)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소득을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놓은 후에, 소작인들에게 임대하고 멀리 떠났습니다(33). 주인은 포도원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주 틀을 파고 망대를 지었습니다. 주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이윤을 받아오도록 중개자들을 보냈는데, 주인에게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관리인들이 소유권을 획득할 수도 있었습니다. 포도원을 소재로 하는 비유는 이사야 5:1-7의 포도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33절은 이사야 5:1-2과 비숫합니다. 포도원의 소유주인 하나님(이사야 5:2)은 정성을 다해 포도원을 가꾸고 최고의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 틀을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주인은 가장 좋은 포도 열매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들포도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파괴하기로 결정하십니다. 본문과 이사야 5장의 비유는 구성면에서 ‘기대’, ‘실망’, ‘심판’이라는 세 가지 공통되는 개념을 보여줍니다. 두 비유에는 불연속성도 있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죄가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공통적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정도로 자랐다고 판단한 주인은 열매를 받아오도록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34).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농부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 그들 중 한 명을 때리고, 다른 한 명을 죽이고, 또 다른 한 명을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을 때와 같이 죽음 중에서도 더 참혹한 경우를 뜻합니다(레위기 20:2; 24:14,16,23; 민수기 15:35; 신명기 13:10; 17:5; 21:21; 22:21,24). 그만큼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모욕적으로 대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들을 이전보다 더 많이 보냅니다(36). 헬라어 문장에서는 ‘다시’를 맨 앞에 배치해서 주인이 그들에게 주는 또 한 번의 기회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번에도 주인이 보낸 종들을 이전처럼 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개역개정에서 ‘후에’로 번역한 휘스테론(ϋστερον)은 32절에도 사용됐으며, 본문에서는 ‘최후에’ 또는 ‘마지막으로’를 뜻합니다(예, 22:27). 헬라어 문장에서 36절의 ‘다시’의 경우처럼 마태는 ‘마지막으로’를 맨 앞에 배치해서, 이번이 종들이 주인에게 합당하게 반용해야 할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인은 최종적으로 아들을 보내면서 자신의 분신을 보내니 당연히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기대와 달리 아들을 보고 상속자를 죽여서 유업, 곧 포도원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자고 결의합니다(38). 그래서 그들은 아들을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던져 죽였습니다(39).

 

예수의 비유 해석과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40-46)

인내에도 끝이 있습니다. 선택은 조건 없는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혈통보다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절이 예수님의 실패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처럼 예수님께서도 버림받겠지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여 참 나라와 참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입니다.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40-46)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전하고 나서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하겠는지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겠느냐?’는 이사야 5:5의 암시합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이사야 5:5). 청중은 패륜적인 죄를 지은 소작인들이 너무나 악한 사람들이므로 가장 비참하게 죽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청중의 반응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청중의 대답을 교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답처럼 대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핵심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십니다. 아들은 버림받지만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쓸모없다고 버림받은 돌이 건축물의 벽을 연결하고 기둥을 지탱하는, 반드시 필요한 모퉁잇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8:26에는 하나님의 신원하심이 나타나므로 버림받은 아들의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얻습니다. 예수는 버림받았고 사역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꼐서는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신원하실 것입니다. 부활한 아들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해 가도록 명령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더 많은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의 버림받음과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신 의미를 말씀하십니다(43-44),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43). 부활하신 아들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하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더 많은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새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은 두 아들의 비유에서 이미 충격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열매가 무엇인지를 직접 언급하지 않기에, 우리는 본문의 정황과 마태복음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열매를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은 하늘나라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나라라고 선언했지만(3:2,8,10), 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지는 열매의 이미지가 포함된 문맥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태도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특히 43절에서 열매는 복수형이고 열매들을 맺는다는 표현은 7:17-18에 나왔는데 좋은 열매는 산상설교를 통해 주어진 천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맺힙니다(20). 그러나 우리는 열매를 윤리적인 기준에서만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없고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에게는 있는 열매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제자의 열매는 구원 역사의 절정으로서 새 백성을 탄생하게 만든 예수와 반드시 연결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마지막 메신저로 왔기에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열매를 예수님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근거는 44-45절에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돌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 것인지, 즉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 것인지, 즉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응이 가져올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8:14-15과 다니엘 2:34-45을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게 반응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이제 돌이신 예수님께 부정적으로 반응한 자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이사야 8:14-15),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 제국들을 상징하는 신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유대 지도자들은 돌인 메시아를 죽였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이 메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다니엘 2:34-35, 44-45).

구원 역사의 절정은 돌로 표현된 예수님입니다. 예수께 반응하는 데 실패한 유대 지도자들과 달리 열매를 맺는 새로운 백성은 예수의 승리로 만들어졌고, 그 승리를 순종의 열매로 반영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정성껏 가꾸는 주인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새 백성으로서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참조. 에베소서 2:10).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예수께서 산상설교로 제시하신 내용을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새 백성에게 요구되는 열매는 예수님과 그의 생애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새 백성의 열매는 예수의 삶에 나타난 모습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 인정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예수의 버림받으심과 부활로 세워졌으므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열매도 예수의 고난과 관련됩니다. 번영을 추구해서 얻는 성공은 교회가 자랑할 열매가 아닙니다. 부와 사회적 지위, 곧 외적인 성공을 열매로 평가하기 쉬운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아름다운 열매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반복되는 거절과 반역에도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묵상할수록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자는 끝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열매 맺는 백성이 그 나라를 받을 것입니다. 보이신 사랑에 합당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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